전후 처리
하카다에서 조선군의 위장 전술에 속아 넘어가 화살 한번 날려 보지 못하고 닭 쫓던 개 꼴이 된 스네시게는 곧장 간몬해협을 건너 본주를 횡단하다시피 하며 에도 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조선 놈들한테 복수를 하려면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행군 속도를 더 높여라!”
스루가만에서 막부 수군이 전멸당하고 에도에 조선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라서 그런지 스네시게는 더욱 조바심을 내며 부하들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벌써 이십 일이 넘게 잠잘 때만 빼고 쉬지 않고 강행군을 계속해 온 막부군 병사들은 완전히 지쳐 좀처럼 속력을 높이지 못했다.
“제기랄. 제 놈은 말을 탄 채 편히 가니까 저러지.”
“누가 아니래. 하도 많이 걸어서 이젠 다리가 곰 발바닥처럼 퉁퉁 부었어.”
온몸에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은 말을 타고 연신 행군을 독려하는 스네시게의 모습에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와 불만을 쏟아 냈다.
“그나저나 스루가 앞바다에서 수군이 크게 당했다던데, 자네 들었어?”
곰보 사내의 말에 젊은 나이인데도 살짝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 수군 병사들이 흘린 피로 바다가 시뻘겋게 물들 정도로 아주 박살이 났다며.”
“그렇다는구먼. 군선이 무려 백 척이 넘었다던데 그게 몽땅 다 격침당했다니까 그럴 만도 하지.”
작게 한숨을 내쉰 곰보 사내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후우, 그런 무지막지한 놈들과 싸워야 한다니 걱정이야.”
“바다에서 이겼다고 육지에서까지 잘 싸우겠어…….”
“하긴 그렇겠지.”
애써 유리한 쪽으로 생각을 하면서도 조선군이 싸울 때 엄청난 불벼락을 하늘에서 뿌린다는 등 워낙 들려오는 소문이 흉흉하다 보니까 둘은 자신 있게 말을 하지 못했다.
둘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힘든 행군에 지쳐 빨리 에도에 도착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군과 싸우는 것에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복잡한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갑자기 정면에서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기마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뭐지?”
스네시게가 미간을 좁히며 다가오는 기마를 바라보자 옆에 있던 나가야마가 말을 받았다.
“등에 꽂고 있는 깃발을 보니 에도에서 보낸 전령 같습니다.”
“흐음. 정말이군.”
가까이 오자 기마의 등에 달린 깃발 모양을 스네시게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분명 쇼군의 문장이었다.
“워워.”
바로 앞까지 다가와 말을 멈춰 세운 전령은 호위 무사들과 함께 서 있는 스네시게를 보고는 고개를 숙여 먼저 예를 갖췄다.
“스네시게 장군을 뵙습니다.”
익숙한 목소리로 자세를 바로 한 전령의 얼굴을 쳐다본 스네시게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자네는 쇼군의 근접 호위가 아닌가?”
“제 얼굴을 기억하시는군요.”
“쇼군을 뵈러 갈 때마다 항상 옆에 있던 자네를 어찌 모를 수가 있겠나. 한데 쇼군 곁을 지켜야 될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인가?”
“…….”
스네시게가 의아한 듯이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전령은 이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쇼군께서 보내신 명령서를 가져왔습니다.”
“그래? 어서 줘 보게.”
그렇지 않아도 조선군이 에도에 상륙했다는 급보를 받은 뒤 며칠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어 걱정하던 찰나였기에, 스네시게는 반색을 하며 전령이 건네주는 서찰을 받아 읽었다.
비단 봉투에는 쇼군의 인장이 찍혀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봉인을 뜯고 안에 든 종이를 꺼내 펼쳐 본 스네시게는 몇 줄 읽어 보지 않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에, 에도가 함락됐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자 전령은 침통한 얼굴을 하며 힘없이 대답했다.
“읽으신 그대로입니다. 사흘 전 에도 성이 조선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뭣이!”
에도 성이 무너졌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함락된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니 스네시게는 충격을 받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위에 있던 나가야마와 측근 무사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창백해진 안색으로 웅성거렸다.
“이게 무슨…….”
“에도 성이 떨어지다니.”
“쇼군께서는 어찌 되셨나!”
겨우 정신을 차린 스네시게가 언성을 높이며 다그치듯 묻자 전령이 바로 대답했다.
“무사하시지만 조선군에 항복을 하시고 현재 오오쿠[大奥]에 감금되어 계십니다.”
“저런!”
오오쿠는 에도 성내에 쇼군의 생모, 처첩 또는 어린 자식들과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스네시게와 무사들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크게 분통을 터트렸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전령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명령서를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즉시 행군을 멈추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쇼군의 명령이십니다.”
“에도가 조선군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우리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에 처박혀 있으라는 건가!”
화가 난 스네시게가 고함을 내지르자 전령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분하신 마음은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쇼군의 안위가 달린 일입니다. 그런데도 명령을 따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익.”
입에 단내가 나도록 달려와 이제 겨우 에도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또다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린 스네시게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군대를 몰고 에도로 달려가 원수 같은 조선군을 모조리 다 도륙해 버리고 싶었다.
그런 스네시게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전령은 정색을 하고는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원통하고 분에 사무치는 장군의 마음을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행여 다른 생각을 품으셔서는 안 됩니다.”
“뭐야!”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노려보는 스네시게의 기세가 사뭇 사나웠지만, 전령은 꿋꿋하게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장군께서 이러실 것을 염려해서 제가 에도 성을 떠나오기 전에 쇼군께서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연이은 패배로 친위군이 모두 소진된 이때에 장군이 이끌고 있는 군대가 막부의 유일한 희망이니 치욕스럽더라도 은연자중해서 도쿠가와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이 되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막부의 존립을 걱정해야 되는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는 이야기에 스네시게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만약 그가 이에미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조선군과 맞섰다가 자칫 병력을 모두 잃기라도 한다면 도쿠가와 가문의 힘이 빠진 틈을 이용해 이곳저곳에서 탐욕스러운 이빨을 드러낼 번주들에게 막부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조선군이 돌아간 이후에 최소한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지금 스네시게가 지휘하고 있는 군대를 그대로 보존해야 됐다.
용맹만 앞서는 아둔한 인물이 아니었던 스네시게는 정말이지 수치스럽고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크흑. 알겠네.”
스네시게가 어려운 결단을 내리자 행여나 분에 못 이겨 돌발 행동을 하면 어찌해야 될지 마음을 졸이던 전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전 그렇게 알고 에도로 돌아가겠습니다.”
“쇼군께 옥체 보존하시라고 전해 드리게.”
“예. 그럼.”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바로 한 전령은 타고 있던 군마의 옆구리를 발로 가볍게 차며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빠르게 멀어지는 전령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스네시게는 이내 옆에 있던 나가야마를 돌아보며 힘없이 지시를 내렸다.
“나가야마.”
“네.”
“아무래도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 될 것 같으니까. 행군을 중단시키고 적당한 장소를 골라 군영을 세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옆에서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나가야마는 착잡한 얼굴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휘이이잉.
높은 곳이라 그런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도현은 어쩐지 휑한 기운이 도는 천수각에 서서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에도를 바라보았다.
한때 이에미쓰가 막부 가신들과 함께 국정 대소사를 논하던 자리이지만 지금은 도현과 멀리 뒤쪽에서 시립해 있는 칠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화무십일홍, 인불백일호, 세불십년장이라.”
혼자 중얼거린 말에 칠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 궁금하냐?”
“예.”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이 지나면 시들기 마련이고, 아무리 좋은 사람도 백 일을 못 가며, 아무리 긴 권세도 십 년을 못 간다는 뜻이야.”
“허어.”
“옛날 송나라 시인인 양만리의 말이지.”
이에미쓰는 설마 자신의 대에서 막부 체제가 산산조각 날만큼 중대한 위기에 처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막강한 권력과 명예가 대대손손 이어질 줄 알았겠지.
그가 좀 더 영리했다면 적어도 아들에게까진 쇼군 자리를 물려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몰락하게 된 원인은 싸움을 걸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거다.
“양만리란 사람은 되게 우울했던 모양입니다. 열흘 넘게 피는 꽃도 얼마나 많은데요.”
가을을 타는 것처럼 싱숭생숭해 있는 것도 모르고 칠현이 옆에서 태평한 소리를 내뱉었다.
“너도 참 한결같구나.”
“……?”
“머릿속이 하얗다 못해 청순하기까지 하다니 부럽다, 부러워.”
“지금 바보라고 놀리시는 거죠?”
“응.”
그래도 칠현의 바보 같은 말 덕분에 도현은 평정심을 회복했다.
승리의 축배를 들어도 모자랄 판에 괜한 감상에 빠져 있다니.
적을 동정할 여유가 있으면 도현 하나만 믿고 있는 조선 백성들 걱정이나 하는 게 백배 천배 더 유익하다.
“어쨌든 이걸로 두 번 다시 해적이니 왜구니 하는 소리는 안 들어도 되겠군.”
적어도 남해와 동해 쪽의 어민들에게는 두 발 쭉 뻗고 잘 수 있는 나날이 이어질 터였다.
“그리고 출정 전 종묘에 가서 임진년의 치욕을 열 배로 되갚아 주겠다는 맹세를 했었는데 그걸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이야.”
약간 삐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칠현은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에도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도현이 말하자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막부가 만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에도가 침범당한 적이 없다고 하니 전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으실 겁니다.”
“아무튼 도성이 함락되고 왜적의 노략질에 경복궁이 불타 소실된 원한을 이렇게나마 풀었으니, 속이 정말 시원한 것 같군.”
두 손으로 난간을 짚고 선 도현의 얼굴에는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득 어려 있었다.
“전하, 도총관께서 오셨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위사가 도총관이 온 것을 알렸다.
“들라 하라.”
도현은 난간에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도총관한테는 바람이 찰 테니 장지문을 내리도록 해.”
‘예에.’ 하면서 대답한 칠현이 덜컥덜컥 소리를 내며 장지문을 원래 자리로 내려놓았다.
얼추 반 정도 손을 대었을 때, 도총관 엄황이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도현에게 군례를 올렸다.
“충. 전하를 뵙습니다.”
“이리로 와 앉게.”
“네.”
상석에 마련해 놓은 보료로 가서 앉은 도현은 마찬가지로 왼편에 방석을 깔고 좌정한 도총관 엄황에게 시선을 주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짐이 지시한 일들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예. 근위대의 엄중한 경비 속에 모두 아군 전선으로 옮겨 싣는 작업을 하고 있사옵니다.”
에도 성을 함락시킨 도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에미쓰의 친족을 비롯한 막부 주요 인사들의 체포와 함께 도쿠가와 가문이 그동안 왜국을 통치하면서 끌어모은 막대한 재화를 확보하는 거였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지만 혈장穴藏이라는 낮은 구릉 중턱에 굴을 깊이 파고 나무나 돌을 주위에 둘러쌓아 비상시나 화재가 일어났을 때 안전하게 보물을 보관해 두는 곳이 있어서, 약간의 손실도 없이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모두 얼마나 된다고 했지?”
“정확한 값어치를 산정하기 어려운 물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원정에 동행한 봉황상단 행수의 보고에 의하면 금자로 구백만 냥은 족히 될 거라고 하옵니다.”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액수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작년 조선 조정의 조세 수입이 천이백만 냥이었는데 거기에 거의 근접하는 재물을 노획하게 됐으니 엄청난 횡재였다.
“그렇게 많단 말인가.”
“대대로 유력한 번주 가문인 데다 이에야쓰 이후 거의 오십 년 넘게 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해 왔으니 그만한 재화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크게 놀랄 일은 아닐 겁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수긍이 된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인 도현은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걸로 이번에 쓴 전비戰費는 대충 충당할 수 있겠군.”
“예.”
수송선까지 합쳐 백 척이 넘는 대함대를 동원한 데다 화약을 대량으로 소모해 지출이 많았다지만 막부의 보고에서 나온 재물이 워낙 엄청나 전쟁 비용을 제하고도 절반 이상이 남았다.
이런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도총관 엄황이었지만 굳이 끄집어 내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보고에서 나온 재물은 전쟁 중에 획득한 노획물이니 막부로부터 받아 낼 보상금에는 포함시켜서는 절대 안 될 것이야.”
이미 막대한 재물을 획득하고도 입을 싹 닦고 이 중으로 막부의 돈을 또다시 뜯어내겠다는 도현의 태도에, 도총관 엄황은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도현은 이야기를 이었다.
“에도로 접근 중이던 왜국 군대들은 어떻게 됐나?”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드리려고 했었는데 이에미쓰가 보낸 친서를 받고 다들 진격을 멈췄고 일부는 방향을 돌려 철수하는 군대로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 봐.”
“막부 가신인 스네시게와 이에미쓰에게 우호적인 번들은 행군을 멈춘 채 에도 쪽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데 반해 평소 도쿠가와 가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몇몇 대번주들은 휘하 세력을 데리고 곧장 군대를 돌려 각자 영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도현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살짝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호오. 벌써부터 내전의 조짐이 보인다, 이거지.”
“연이은 패배로 막부와 추종 세력의 힘이 크게 약화됐고 에도 성 함락으로 권위마저 바닥에 떨어졌으니 평소 도쿠가와 가문이 왜국을 통치하는 데 불만을 가지고 있던 번주들한테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사옵니까.”
“후후후. 그렇지. 따로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저들끼리 알아서 사분오열되어 아귀다툼을 벌이려고 한다니 아주 잘됐어.”
“그러게 말이옵니다.”
다시는 임진왜란 같은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왜국을 분열시켜 놓을 계획이인 도현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이에미쓰가 아주 똥줄이 타겠군.”
몸을 살짝 보료 등받이에 기대며 도현이 묻자 도총관 엄황은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답했다.
“안 그래도 빨리 우리 군을 돌려보내고 흔들리는 내부를 추스르기 위해서인지 항복 협상을 상당히 서두른다고 합니다.”
“우린 급할 게 없으니 저들한테 끌려가지 말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얻어 낼 수 있는 건 다 짜내도록 해.”
마치 악덕 상인이나 할 법한 말을 하면서 도현은 쳐다만 봐도 오한이 들 정도로 오싹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에미쓰가 이 모습을 봤으면 등골이 서늘하다 못해 꽁꽁 얼어붙었으리라.
“알겠습니다.”
이마에 흐르는 한 줄기 식은땀과 함께 엄황은 고개 숙여 명을 받들었다.
그 시각 내성 한쪽에 위치한 전각에서는 전쟁을 완전히 종결짓기 위한 양측의 협상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매년 스물여덟 관(100kg)이나 되는 은괴를 십 년 동안 상납하라니 이건 너무 가혹한 조건이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역시 막부 대표로 조선과의 협상 탁자에 앉은 미우라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언성을 높이자 이 순간을 위해 원정군에 포함시킨 외무부 차관 이척이 맞은편에 앉아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뭐가 너무하다는 거요! 이번 원정에 아국이 쓴 전비가 얼마인 줄 아시오?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은 보상금을 요구하고 싶지만 막부의 사정을 생각해 그나마 줄이고 기간도 십 년이나 늘려 준 것이오.”
이미 내성에 있던 도쿠가와 가문의 비고를 먼지 하나 남겨 두지 않고 싹싹 털어 간 것을 아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마치 이쪽 사정을 많이 봐주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척의 태도에 미우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지금 아쉬운 쪽은 막부인 데다 막말로 수가 틀리면 포로가 되어 있는 이에미쓰와 막부 가신들을 깡그리 다 죽여 버릴 수도 있었기에 앓는 소리를 내며 앉아 있어야 했다.
“좋소, 보상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임진왜란 때 가져온 보물과 포로 들을 전부 다 되돌려 달라는 건 불가능한 얘기요?”
“그게 왜 안 된단 말이오?”
이척은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남의 나라에 강제로 쳐들어와서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훔쳐 간 물건들을 도로 가져가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미우라도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대꾸했다.
“막부가 모두 다 소유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전국 각지의 번주들에게 흘러들어 간 것도 많은데 그 많은 물건을 어떻게 회수할 수 있겠소, 포로들도 마찬가지 신세고.”
탕!
미우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척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세게 쳤다.
“구차한 변명 따위 그만두시오! 명색이 왜국을 통치한다는 막부에서 이 정도 일도 제대로 못해 낸단 말인가!”
“그, 그게…….”
미우라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맷자락으로 훔쳤다.
애초에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조선과는 달리, 왜국은 정치 체제부터 완전히 달랐다.
지방의 번주들 가운데에는 굳건한 토착 기반을 바탕으로 쇼군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들도 많아, 쉽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세력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애초에 참근교대니 뭐니 하면서 번주가 자기 영지를 떠나 강제적으로 일 년 동안 에도에 머무르게 하는 수법을 생각해 낸 것도 그들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니 오죽하랴.
게다가 안 그래도 에도 성이 함락되어 쇼군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인데 이걸 이척에게 알아듣게 설명하자니 스스로의 치부를 밝히는 꼴이 되어 미우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번주들에 대한 건 나중에 천천히 해결하도록 하고, 우선 막부 직할령에 있는 보물과 포로 들을 되돌려 주는 것으로 먼저 합의를 보면 안 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나름대로 대안을 찾아낸 미우라가 입을 열었지만, 이척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만약 우리가 요구한 것과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막부엔 협상할 뜻이 없다는 것으로 알겠소.”
냉정하게 일어서서 등을 돌리자, 미우라가 황급히 그를 붙잡으려 했다.
“아니, 이보시오. 사람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 봐야…….”
그러나 이척은 뒤돌아보는 척도 하지 않고 쌩 하니 찬바람을 날리며 협상장을 나가 버렸다.
닭 쫓던 개처럼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미우라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이척은 맞은편에서 도총관 엄황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른 인사했다.
“도총관 어른께서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러 왔네. 한데…….”
도총관 엄황은 이척의 표정을 살피더니 슬쩍 웃었다.
“아무래도 단번에 해결을 보진 못했나 보군. 뭐가 잘 안 풀리나?”
“요구 조건이 많다 보니 막부 측에서 난색을 표하더군요.”
“흐음. 그래서? 순순히 물러날 자네가 아니잖나?”
“곤란해하든 말든 팍팍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하하! 역시 자네야. 믿음직스럽군.”
도청관 엄황은 파안대소를 터트리며 이척을 격려했다.
“주상 전하께서도 사정을 봐주지 말고 요구 조건을 다 수용하게 만들라고 분부하셨으니 잘하고 있는 걸세. 자네 생각대로 계속 진행하게.”
“예.”
미우라가 들었으면 한껏 울상을 지었을 이야기를 태평하게 나누며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계절은 봄.
삼월의 이른 새싹에 햇볕이 들기 시작하고 벚꽃이 꽃봉오리를 틔울 시기를 기다리는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