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총
북경에 거점을 두고 활동 중인 주작단 간부인 함길현은 아까부터 초조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똑똑.
“누구냐?”
“천식이입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며 청국 복식의 옷을 입고 변발까지 한 주작단원 길천식이 기다란 상자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그건가?”
“예.”
“이리 내려놓게.”
길천식이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자 함길현은 바로 잠금장치를 풀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완충재로 넣어 둔 짚 사이에 서양식 머스킷이 한 정 들어 있었다.
“이게 예친왕이 새로 제작한 총인가?”
“그렇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심지 대신 부싯돌을 사용해 총을 발사하는 방식이 아국의 것과 거의 유사합니다.”
“으음.”
침음을 내뱉은 함길현은 직접 머스킷을 꺼내 꼼꼼히 살펴봤다.
사정거리나 화력은 나중에 쏴 봐야 알겠지만 외관과 작동 방식은 부하가 말한 대로 조선군이 쓰는 조총하고 거의 똑같았다.
“북경 외곽에 공장을 만들어 이미 대량생산에 들어가 예친왕 휘하의 병력에 보급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그중 하나를 어렵게 빼돌린 겁니다.”
이어진 설명에 함길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결국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군.”
“당장은 물량이 적어 큰 문제가 안 되겠지만 예친왕이 진충군이라는 부대까지 따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조총을 운용하려는 걸 볼 때 그냥 좌시하고 있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 거야. 수십만 명의 청군이 조총을 마구 쏴 대며 심양성을 공격할 걸 생각하니 아주 끔찍하군.”
그동안 조선군이 상대를 압도할 수 있었던 화력의 우세를 잃고 거센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청군에 휩쓸려 무수히 죽어 나갈 아군 병사들의 모습을 떠올린 함길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막아야 돼.”
그러고는 옆에 서 있는 길천식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걸 가지고 천진으로 가서 최대한 빨리 본국으로 보내게.”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머스킷을 다시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단단히 닫은 길천식은 함길현한테 살짝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함길현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원칙적으로는 본국의 지시를 기다려야겠지만 그러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하고 급했다.
이대로 놔둔다면 오래지 않아 예친왕이 인력과 물자를 무지막지하게 투자해서 머스킷을 대량으로 생산해 낼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 전에 어떻게든 저지를 해야 되는데 상대도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일인 만큼 경비를 삼엄하게 할 것이기에 방법이 마땅치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지금까지 어렵게 구축한 북경의 주작단 비밀 조직이 모두 노출되고 부하들까지 희생시킬 수 있었기에 더욱 신중해야 됐다.
“어렵군.”
미간을 찌푸린 함길현은 밤새 고민을 거듭했다.
한편 길천식이 가져간 머스킷은 천진에서 주작단이 은밀히 상단으로 위장해 운용하는 선박에 실려 곧장 황해를 건너 조선에 보내졌다.
일주일도 안 돼서 한양에 있는 이완 단장의 손에 들어간 머스킷은 바로 남한산성에 위치한 병기창에서 시험 발사를 해 성능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도현에게 보고됐다.
희정당에 앉아 승정원에서 올린 서류를 살펴보고 있던 도현은 갑자기 찾아온 이완 단장의 보고에 이맛살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니까 청국이 남-일식과 비슷한 수석식 조총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거야?”
“그렇사옵니다. 북경에 침투해 있는 조직을 통해 어렵게 청군이 만든 신형 조총을 입수해 시험해 본 결과 사거리와 발사 속도에서 남-일식에는 못 미치지만, 예전에 쓰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진보한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얼굴을 굳힌 도현은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아군에 위협이 될 정도야?”
“청군이 대량 운용을 한다면 보병끼리 맞붙었을 때 예전과 달리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더불어 기병 전술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생각됩니다.”
조선군이 청과 거란족하고 전쟁을 벌이면서 이미 증명했다시피 충분한 숫자의 조총을 가진 보병을 상대로 기병을 돌격시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완 단장이 에둘러서 이야기를 했지만 청군이 수석식 조총을 대량 배치한다면 조선군은 기존의 전략과 전술을 모두 바꿔야 했다.
당장 거란족을 흡수하며 청나라의 팔기군 못지않은 강력한 전력을 구축한 기병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졌다.
“생산량이 얼마나 돼?”
“얼마나 만들어졌는지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전국에서 쇠를 다루는 장인을 끌어모으고 공장 규모를 계속 늘리고 있다는 보고로 볼 때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리고…….”
이완이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말끝을 흐리자 도현은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다그치듯 물었다.
“또 뭐야?”
“예친왕이 수석식 조총을 사용하는 별도의 부대를 만들어 진충군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아주 작정을 했구먼.”
와락 얼굴을 구긴 도현을 보며 이완이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청국 정규군이 아니라 예친왕이 사비를 들여 운용하는 사병으로 현재 인원은 이천 명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이미 수석식 조총을 이천 정은 생산해 냈다는 뜻이 되겠군.”
냉철한 도현의 분석에 이완 단장은 동의하듯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다고 봐야 될 겁니다.”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낸 도현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최근 군세를 많이 늘렸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청군에 비해 열세인데 무기의 우위마저 없어진다면 그건 재앙이나 마찬가지야. 해결책이 없겠나?”
“제조 공장을 부숴 얼마간 생산을 늦출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미 기술이 예친왕한테 넘어간 이상 청군이 수석식 조총으로 무장하는 걸 완전히 막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의 심기를 거슬릴 수도 있었지만 이완 단장은 눈치를 보지 않고 현실을 정확히 이야기했고 도현도 그걸 가지고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겠지. 하지만 최소한 아군이 대비책을 세울 동안이라도 놈들이 수석식 조총을 완전히 배치하지 못하도록 지연시켜야 돼.”
그러자 이완 단장이 차분히 대답했다.
“이미 작전이 실행 중이옵니다. 하지만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시간을 조금 지연시킬 뿐 청군이 수석식 조총으로 무장하는 건 피할 수 없습니다.”
“알고 있네. 아무튼 벌써 주작단이 움직였다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군.”
굳어 있던 표정을 살짝 푼 도현은 보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놈들이 어떻게 수석총 제작 기술을 알아낸 거지?”
“박호 병기장의 말에 따르면 기본적인 작동 원리만 파악하면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했듯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아니잖나.”
“실은 외부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북경에 들어와 있던 서양 선교사 중에 수석총 제작 기술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예친왕이 성안에서 자유롭게 신자들과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대신 무기 생산에 협력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대충 어찌 된 건지 알아차린 도현은 눈가를 찡그리며 짧게 혀를 찼다.
이 시절의 선교사와 종교인 들은 상당한 학식을 갖춘 지식인들이었기에 머스킷 제작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도 중국에 온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활용해 황실이나 조정 고관대작들과 친분을 쌓아 포교에 유용하게 활용한 기록이 있었다.
“서양 선교사가 제작에 관여한다면 앞으로 성능 개량이 우리 예상보다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이완 단장은 표정으로 그럴 가능성을 인정했다.
“갈수록 태산이군.”
주먹을 꽉 움켜쥔 도현은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완 단장이 돌아가자마자 병기장 박호를 부른 도현은 입수한 청군의 수석총을 철저히 분석하도록 지시하고 비변사 회의를 긴급 소집해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북경에 있는 주작단 단원들은 청군의 수석총 제작을 방해할 방법을 찾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알아봤나?”
함길현이 묻자 좁은 방 안에 모여 있던 부하 중 한 명이 고개를 앞으로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일백여 명이 넘는 장인을 끌어다 놓고 작업을 시키고 있지만 증기기관을 쓰는 본국과 달리 순수하게 망치를 든 손으로 두들겨 조총을 만들고 있어서 하루에 열 정을 겨우 생산해 내고 있었습니다.”
장인 열 명이 달라붙어 겨우 하루에 한 정을 만들어 내는 거였으니 조선에 비해서 생산성이 엄청 떨어졌다.
“그건 다행이군. 그래도 진충군인가 뭔가 하는 놈들한테는 수석총을 보급했겠지?”
“예. 바로 지난달에 지급을 다 끝냈다고 합니다.”
“수석총으로 무장한 병력 이천 명이라…… 예친왕의 힘이 엄청 강해지겠군.”
“안 그래도 태후파의 군권을 쥐고 있는 오삼계가 상당히 경계를 한다는 소문입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다른 단원이 말을 받아서 이야기하자 함길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 같아도 껄끄러울 텐데 오삼계처럼 뛰어난 장수가 앞으로 진충군이 목을 겨누는 칼이 될 거라는 걸 왜 모르겠어.”
“그 때문인지 태후가 예친왕이 쇠를 다루는 장인들을 끌어모아 수석총 제작에 투입하는 것에 제동을 걸고 나설 움직임이 있습니다.”
뜻밖의 희소식에 함길현은 눈을 반짝였다.
“확실한 정보야?”
그러자 약간 찢어진 눈을 가진 단원이 머리를 살짝 숙이고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후전에 심어 둔 정보원이 알려 온 겁니다.”
“이거 일이 재미있게 되는구먼.”
“양쪽의 반목을 잘 이용하면 예친왕의 의지를 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천진에 갔다가 복귀한 길천식의 말에 잠시 고심하던 함길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내가 아는 오삼계라면 수석총을 확보하려고 태후를 내세워 약간 압박을 가하고는 예친왕과 협상을 할 거야.”
“예친왕에 이어 태후파까지 수석총으로 무장한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 순간 방 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뭐, 조금이라도 수석총 생산을 지연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으니까 태후전과 연결된 끈을 활용해서 일을 한번 꾸며 봐.”
“네.”
다시 처음 이야기를 나눈 단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함길현이 말했다.
“공장의 경계 상태는 어때?”
“예친왕 직속의 필기군 부대인 백기단 중 두 개의 천인대가 상주하며 지키고 있어 공장을 직접 타격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숫자도 많았지만 모두 순수 만주족 정예들로 이루어진 백기단의 전투력을 생각하면 공장을 도모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뭔가 허를 찌르면서 청군의 수석총 생산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다들 입을 다물고 있자 초기에 함길현과 함께 북경으로 와서 올빼미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도석재가 입을 열었다.
“저한테 묘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
“공장을 직접 치기 어려우니 거기서 일하는 장인들을 제거해 작업에 차질을 주는 겁니다.”
“장인들을?”
함길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도석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 제가 알아보니 예친왕도 미처 여기까지는 신경을 못 썼는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인들이 공장 외부에 거처를 두고 출퇴근을 할 뿐만 아니라 호위병도 없었습니다. 기껏 기술을 가르쳐 놓은 숙련공들을 잃는다면 수석총 생산량이 현저히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들은 함길현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
“확실히 공장을 직접 치는 것보다 가능성이 높고 성공만 한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겁니다.”
길천식과 다른 단원들이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함길현은 결정을 내린 듯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했다.
“머뭇거릴 것 없이 내일까지 제거할 명단을 만들어서 내게 보고하고 실행에 나설 인원을 준비해 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풀어낼 돌파구를 찾아낸 함길현은 처음과 달리 얼굴에 활기가 넘쳤다.
그날부터 주작단 요원들은 수석총 제작 공장에서 일하는 장인들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태후파에 선을 넣어 방해 공작을 펼쳤다.
며칠 뒤 태후의 부름을 받은 예친왕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자금성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전각을 향했다.
앞에 서서 안내하는 내관이 슬쩍 그를 흘겨보긴 했으나 예친왕의 부리부리한 눈빛과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여 모른 척했다.
“흥.”
이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을 한 예친왕은 쿵쾅거리는 발소리를 죽이려고 하지도 않은 채 태후 앞에 섰다.
“누가 이리 인기척을 내면서 다니나 했더니 예친왕이셨군요.”
오늘도 어김없이 주렁주렁 화려한 머리장식을 매단 채 나른한 얼굴로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던 태후가 그를 맞이했다.
곁에는 그녀의 측근이자 황도 수비를 책임진 오문 도독 오삼계 장군이 갑옷 대신 관복을 입고 자리했는데, 당연하다는 듯 자단목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있는 폼이 매우 익숙해 보여 비위가 상했다.
“오라고 부르신 건 태후 아니시오?”
어쨌든 왔으니 용건이나 말해 보라는 식으로 예친왕이 대꾸했다.
“호호호. 그것 때문에 화가 나신 모양이군요.”
“…….”
핏줄이 다 보일 만큼 하얀 손으로 입을 가르며 웃은 태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는 예친왕을 보며 자리를 권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아녀자인 제가 황궁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 않아요. 그래서 내관을 보내 부른 것이니 기분 푸시고 앉으세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걸 알았지만 여기서 각을 세워 봤자 자신만 우스워지는 거였기에 예친왕은 비어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차는 뭐로 아시겠어요?”
“별로 생각이 없소이다. 그것보다 어서 용건이나 말해 보시오.”
“하여튼 성격이 불같고 급하신 건 여전하시군요.”
오히려 여유를 부리며 앞에 놓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태후는 마주 앉아 있는 예친왕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예친왕께서 진충군이라는 사병 부대를 하나 새로 만드셨다고요?”
뜻밖의 이름이 거론되자 예친왕은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짓고는 상대가 시비를 걸 수 없도록 선을 그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심양성을 탈환해 제국의 명예를 되찾을 때 선봉에 세우기 위해 사비를 들여 키우는 군대올시다.”
“황상과 제국을 위해 자신의 주머니를 아낌없이 털다니 역시 예친왕께서는 충신이세요.”
약간 비꼬는 듯한 어투에 예친왕은 저 요물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는지 경계하듯 태후를 봤다.
“조선군이 쓰는 신형 조총으로 무장을 시켰다고 하니 전쟁에서 진충군의 활약이 아주 기대가 되는군요. 하지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황상의 안전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되는 건 없지 않겠어요. 그럼 당연히 좋은 무기를 만들었으면 황상께 먼저 바치셔야지요.”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린 예친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친왕의 충심을 몰라주고 진충군을 키우는 걸 보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아주 많아요. 안 그렇소, 오 도독.”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태후가 묻자 오삼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예친왕을 힐끗 보고는 대답을 했다.
“송구스럽게도 역모라는 단어를 거론하는 투서들도 있사옵니다.”
“이것 보세요. 황상과 전 예친왕의 진심을 믿지만 계속 이런 투서와 이야기들이 나오니 입장이 아주 곤란하답니다.”
“…….”
보나 마나 뒤에서 일을 다 꾸며 놓고 시치미를 떼는 태후의 모습에 예친왕은 한쪽 뺨을 실룩이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는 것이 뭐요?”
“그렇게 정색을 하니까 꼭 제가 예친왕을 핍박하는 것 같네요.”
그럼 아니냐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걸 예친왕은 꾹 눌러 참았다.
“소문을 완전히 불식시키려면 진충군을 황군으로 편입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예친왕께서 어렵게 키워 온 공이 있으니, 그럴 수는 없고 대신 새로 만들었다는 수석총을 일부 금군에 넘겨주면 어떻겠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친왕은 눈을 치켜뜨며 태후를 노려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자 옆에 있던 오삼계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게 왜 말이 안 된다는 것이오? 좋은 무기가 있으면 응당 황상께 먼저 바치는 것이 신하 된 도리가 아닙니까? 한데 예친왕께서는 그러지 않고 자신의 사병만 키우니 주위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지요.”
“닥쳐라! 만주족도 아니고 살기 위해 무릎을 꿇고 대청제국에 목숨을 구걸한 이신 주제에 어디서 끼어드는 거냐!”
역린과도 같은 부분을 예친왕이 건드리자 오삼계는 어금니를 물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날 모욕하는 것이오!”
“흥! 네놈한테 그런 명예라도 있는지 모르겠군.”
“이익.”
평소 태후를 등 뒤에 두고 위세를 떠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예친왕은 치욕감에 몸을 부르르 떠는 오삼계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걸 보고 저잣거리에서는 박쥐라 부른다고 하더구먼.”
꽝!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요!”
참다못한 오삼계가 탁자를 손으로 내려치며 벌떡 일어나자 예친왕도 마주 보고 서서 으르렁거렸다.
“얼마든지.”
두 사람이 서로 노려보며 기세를 피워 올리자 방 안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고, 주위에 시립해 있던 시녀와 내관 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마른침을 삼켰다.
비록 둘 다 무기를 소지하지는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상대를 난도질해 버릴 것 같았다.
무겁고 긴박한 순간 상석에 앉아 가만히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후가 팽팽한 긴장감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나라의 중신이신 두 분께서 이리 채신머리없이 행동하셔야 되겠습니까?”
그 말에 예친왕이 홱, 고개를 돌려 사납게 노려보았다.
애초에 두 사람이 대립하게 된 상황을 조장한 게 누군지 뻔히 알면서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혼자 발뺌하고 있는 꼴이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던 탓이다.
“어쨌든 두 분 다 앉으시지요. 아랫것들 보기 남우세스럽습니다.”
태후는 특유의 화사한 미소를 짓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예친왕을 응시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발끈해서 분노를 터트리기는 했지만 이런 데서 싸움판을 벌일 생각은 없었던 예친왕이 먼저 마뜩잖은 얼굴로 의자에 앉고, 싸울 상대를 잃어버린 오삼계 역시 크게 콧방귀를 뀌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태후는 금장식을 낀 손가락으로 시녀를 불러 어느새 식어 버린 차를 새로 가져오게 하고는 이야기를 했다.
“다소 서운한 마음이 있더라도 다 황상과 제국을 위해서니 그렇게 해 주세요. 대신 진충군을 예친왕 휘하에 두는 걸 황명으로 인정해 주도록 하지요.”
“으음.”
말을 안 들으면 아예 진충군 자체를 빼앗아 버리겠다는 은근한 협박에 예친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침음성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다 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태후가 황제를 내세우고 있는 이상 여기서 거절을 한다면 바로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상대도 그걸 다 예상하고 이런 말을 한 것이 분명했는데, 요구를 받아들이면 예친왕이 힘을 키우는 걸 막아서 좋고 설사 거절을 해도 이걸 핑계로 그를 압박할 수 있으니 어느 쪽이든 손해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 걸 깨달은 예친왕은 앞에 있는 태후를 노려보다가 이내 분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소. 원하는 대로 해 주겠소.”
“호호호. 그러실 줄 알았어요.”
득의만만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는 태후의 모습에 예친왕은 얼굴을 구기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 눌렀다.
“더 할 이야기가 없으면 난 이만 가 보겠소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차나 한잔 더 하시지 않고요?”
태후의 말에 예친왕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됐소이다.”
예친왕이 밖으로 나가자 오삼계가 가라앉은 어투로 태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순순히 말을 따를까요?”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했지 않소. 자존심이 강한 양반이니 스스로 내뱉은 말은 지킬 거예요.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언제든 예친왕 일파를 제압할 수 있도록 병사들을 준비시켜 둬요.”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하는 오삼계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은 태후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태후의 요구에 따라 예친왕은 진충군이 보유한 수석총 절반을 금군에 넘겨주고 앞으로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량도 절반씩 나누기로 했다.
수석총 값으로 금 일천 냥을 하사받고 한 정당 금 한 냥을 받기로 했지만 애써 노력해서 만든 결과물을 태후파가 단물만 쏙 빼 가는 꼴이었기에 예친왕 쪽의 반발이 컸다.
이런 가운데 수석총 생산을 방해하기 위한 주작단의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예친왕이 만든 수석총 제작 공장은 북경성 외곽에 위치했는데 종일 뿌연 연기와 쇠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벽돌 건물을 가운데 두고 팔기군 두 개 천인대가 숙영지를 만들어 주둔하고 있었다.
높다란 통나무 방책으로 주위를 빙 둘러싸고 곳곳에 감시탑이 세워져 있고 경계 병력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어 습격이 거의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런 요새의 문이 열리며 사내들을 가득 태운 마차가 여러 대 줄을 지어 나왔다.
바로 인근 마을에 거주하면서 요새 안 공장으로 출퇴근을 하는 장인들이 탄 마차였다.
뒤쪽 짐칸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들은 하루의 고된 일과를 끝냈기 때문인지 다들 밝은 표정으로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대었다.
“이보게, 왕팔이. 그냥 바로 집에 들어가기도 아까운데 나랑 같이 백주 한잔 하고 갈 텐가?”
“좋지. 만날 가던 거기 말이지.”
“내가 요즘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야. 얼마 전에 새로 생긴 주점에 예쁜 과부댁이 왔다고 하더군.”
“예끼, 이 사람! 술은 뒷전이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군그래.”
큰 소리로 껄껄거리는 사내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내 아는 사람도 거기 과부댁이 괜찮다 하던데 구경 좀 하러 가야지 안 되겠구먼.”
“그래?”
사내들이 모이면 항상 화젯거리로 떠오르는 게 여자, 술 이야기라더니 여기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술집 주모가 그리 예쁘냐, 몇 살이냐, 샛서방이 있니 없니부터 시작해서 어디 사는 누가 누구랑 눈이 맞았다더라 하는 뜬소문까지 이런저런 잡담을 떠들어 댔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이 한가롭게 이동하는 마차 행렬을 은밀히 숨어서 노려보는 이들이 있었다.
“왔군.”
“지금 바로 공격할까요?”
길천식의 물음에 함길현은 시선을 마차에서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조금 더 기다려.”
상대가 공격 범위 안에 들어왔지만 함길현은 보다 확실하게 마차 행렬을 제압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주작단 단원이 숨어 있는 곳은 수석총 공장과 마을 중간쯤에 위치한 숲 속으로,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제법 넓은 흙길이 나 있었다.
이 시간이면 인적이 드물고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습격을 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
하지만 가끔씩 팔기군 경계 병력이 순찰을 도는 곳이라 은밀하고 재빨리 일을 해치우고 떠나는 것이 관건이었다.
실수 없이 일을 끝내기 위해서 함길현은 이미 두 차례 예행연습까지 해 봤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 채 장인들을 태운 마차 행렬이 호위도 없이 매복지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함길현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쏴라!”
그러자 풀숲에 숨어 활을 겨냥하고 있던 주작단 단원들이 일제히 시위를 놨다.
슈슈슉! 쉬이익.
“뭐, 뭐야?”
섬뜩한 소리를 내며 좌우에서 화살 비가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제일 먼저 마차에 묶인 말들이 구슬픈 비명을 내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이히히힝.
말을 제일 첫 목표로 삼아 혹시라도 적이 마차를 몰고 매복지를 빠져나가는 걸 사전에 차단한 거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마부와 짐칸에 타고 있던 장인들의 고통에 찬 끔직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끄아악.”
“컥!”
“스, 습격이다.”
“살려 줘!”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당하던 사람들은 화살을 날린 뒤 양쪽 수풀에서 튀어나온 주작단 단원들을 보고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소리를 쳤다.
“한 놈도 남겨 두지 마라!”
“우와아아!”
서걱!
“꾸엑.”
무기를 하나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주작단 단원이 휘두르는 검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비비며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애초에 말살抹殺이 목표였던 주작단 단원들은 손 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가차 없이 상대를 베어 버렸다.
순식간에 조용하던 숲 속은 지옥으로 변해 비명과 피로 가득 찼다.
과부댁 이야기를 하며 껄떡거리던 털보 사내도 허겁지겁 마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다가 누군가 휘두른 검에 등이 베여 앞으로 꼬꾸라졌다.
“크악.”
화끈한 무언가가 살을 파고드는 느낌을 받고 쓰러진 털보 사내는 방금까지 자신하고 농담을 주고받던 동료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걸 보며 의식을 잃었다.
잠시 뒤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장인 서른 명은 모두 목숨을 잃고 싸늘한 시신이 되어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가운데 한쪽 어깨에 화살을 맞은 채 숨을 거칠게 쉬고 있는 사내의 가슴에 검을 쑤셔 넣어 마무리를 한 함길현은 약간 착잡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살아 있는 놈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현장을 깨끗이 치워라!”
“옛.”
크게 대답한 단원들은 한 명씩 확인 사살을 한 뒤 시신과 마차를 길옆에 있는 수풀 속에 감췄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는 흙으로 덮어 버리고 화살을 모두 회수하자 꼼꼼히 살펴보지 않는 한 방금 전 끔찍한 살육이 벌어졌다는 걸 모를 정도로 말끔해졌다.
“다 됐습니다.”
“좋아.”
정리를 다 끝낸 함길현은 단원들을 데리고 연기처럼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자정 무렵 수석총 공장이 있는 요새 부근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어림잡아 열 자(3미터) 정도 되겠는데요.”
길게 자란 수풀 속에 숨어 요새를 둘러싼 목책을 살피던 함길현은 옆에 있던 길천식의 말에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까 처리한 장인들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에 일을 끝내고 빠져나간다.”
잠시 말을 끊고 고개를 돌려 뒤에 모여 있는 단원들을 천천히 훑어본 함길현은 작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모두 죽지 말고 살아서 다시 만나자.”
어렵지만 조국을 위해 꼭 해내야 될 임무라는 걸 알기에 단원들은 두려운 기색 없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단원들의 모습에 든든한 마음이 든 함길현은 복면을 쓰며 힘차게 말했다.
“가자!”
몸을 일으켜 날렵하게 목책 아래로 접근한 함길현과 단원들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재빨리 준비해 온 밧줄을 위로 던졌다.
휘이익.
털컹.
끝에 매단 갈고리가 목책 너머에 걸리자 몇 번 밧줄을 당겨 본 단원들은 날다람쥐처럼 날렵하게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순식간에 목책을 넘어간 함길현과 주작단 단원들은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낮에 부하들과 순찰을 나갔다가 잡은 사슴 고기를 구워 휘하 장수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백기단 선임 천인장 토빌라이는 갑자기 찾아온 하급 군관의 보고에 인상을 찌푸렸다.
“장인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예. 마을에 있던 관리가 전령을 보내 알려 왔습니다.”
그러자 마유주가 가득 담긴 술잔을 손에 든 토빌라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디 술집에 틀어박혀 있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색을 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 하러. 그딴 일에 귀한 팔기군 병사들을 이 오밤중에 깨워야겠나! 내일 아침이 되면 알아서 다 기어 올 테니 그냥 내버려 둬.”
“……예.”
어쩐지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까마득한 상관에게 토를 달고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기에 하급 군관은 고개를 숙이며 몸을 뒤로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연속해 바깥에서 울렸다.
꽈아앙! 꽝! 꽝!
“이게 무슨 소리야?”
술이 확 깬 토빌라이가 소리를 치자 막사 바깥에 있던 병사 한 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와 말했다.
“습격입니다!”
“뭐야!”
얼굴이 구겨진 토빌라이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던져 버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쨍그랑!
“어떤 놈이 감히 여길 습격한 거야!”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사방에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고 있습니다.”
“제기랄!”
욕설을 내뱉은 토빌라이는 옆에 놔둔 검을 챙겨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고 주연을 즐기던 휘하 장수들도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막사 밖은 시뻘건 화광이 충천한 가운데 잠을 자다가 나온 팔기군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걸 본 토빌라이는 눈을 치켜뜨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꼴이냐? 당장 병사들을 통제해서 습격해 온 적을 찾아 다 죽여 버려.”
“옛.”
크게 대답한 장수들을 서둘러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또다시 수석총 제작 공장 쪽에서 폭음이 울리며 불길이 치솟는 걸 본 토빌라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여깁니다!”
혼란에 빠진 요새 안을 단원 두 명과 함께 빠르게 내달리던 함길현은 마초가 가득 실린 짐마차 뒤편에서 길천식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얼른 그쪽으로 갔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도석재는?”
“말을 묶어 놓은 곳에 불을 지르고 곧장 빠져나갈 겁니다.”
길천식의 대답에 함길현은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어서 여길 탈출하세.”
“예.”
요새 안으로 은밀히 침투한 주작단 단원들은 등에 하나씩 메고 온 화약을 요새와 공장 시설물 곳곳에 설치한 다음 시간에 맞춰 터트렸다.
가지고 들어간 화약을 반이라도 터트리면 성공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방심했는지 팔기군의 경계 상태가 느슨한 덕분에 예상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제 이대로 탈출만 하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함길현과 단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곧장 목책 쪽으로 이동했다.
“여기 적이다!”
“젠장!”
하지만 계속해서 운이 좋을 수는 없었는데 얼마 못 가서 일단의 적병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 도망칠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함길현은 손에 든 검을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뚫고 나간다.”
“죽여라!”
함길현의 말과 동시에 단원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들었고 이내 적과 뒤엉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채챙! 챙! 챙!
“으아악.”
“꾸엑.”
“이얍!”
양쪽이 휘둘러 대는 무기가 달빛을 받아 번쩍였고 시뻘건 피와 비명이 마구 터져 나왔다.
그중에서 함길현의 무술 솜씨는 단연 돋보였는데 제비처럼 움직이며 검을 휘젓자 적병 두 명이 신음과 함께 사지를 뒤흔들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단원들도 날카로운 몸동작으로 단번에 상대의 목숨을 끊었다.
십여 명이나 되던 적병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모두 차가운 시신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잠깐 멈춘 것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는데 비명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다른 적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저기다!”
“잡아라.”
횃불을 든 적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자 미간을 찌푸린 함길현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따라와!”
자칫 잘못했다가는 꼼짝없이 포위되어 사냥당할 판이었기에 함길현과 단원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다행히 어둠과 상대가 아직 혼란을 다 수습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가다가 적병을 두세 번 더 만나 싸움을 벌여야 했지만, 무사히 목책 밑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서걱.
“끄르륵.”
창을 내밀며 겁 없이 앞을 막아서는 적병의 목을 베어 버린 함길현은 적진을 뚫고 오느라 지친 단원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이제 다 왔다!”
그러자 단원들은 다시 힘을 내 함길현을 따라 목책에 설치된 사다리를 올라가 요새 밖으로 뛰어내렸다.
목책 높이가 상당했지만 바로 뒤에 적병들이 쫓아오는 상황이었기에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고 다행히 모두 낙법을 펼쳐 크게 다치는 사람 없이 착지했다.
“괜찮나?”
“……예.”
몸을 일으킨 함길현은 목책 너머에서 들리는 고성에 단원들을 재촉했다.
“쫓아오기 전에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돼. 서둘러.”
지치고 힘들었지만 여기서 주저앉으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라는 걸 알기에 단원들은 함길현을 따라 움직였다.
그런 함길현과 단원들 뒤로 동녘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뭐라!”
애첩과 함께 자고 있다가 대충 겉옷만 하나 걸치고 나온 예친왕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수석총 공장이 어떻게 됐다고?”
“습격을 당해 용광로를 비롯한 시설물들이 크게 부서지고 병사들도 상당수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지경이 되도록 토빌라이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분노에 찬 예친왕의 호통에 급보를 전하기 위해 쉬지도 못하고 왕부로 달려온 전령은 잔뜩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습격이었고 적이 내부로 침투해서 화약을 터트리는 바람에…….”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와장창!
딴에는 상관인 토빌라이를 변호해 준다고 한 이야기였지만 오히려 화를 더 돋우고 말았고 예친왕은 한쪽에 장식되어 있던 화병을 집어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분노를 터트렸다.
“헉.”
그러자 옆에 있던 총관이 황급히 예친왕을 말렸다.
“전하, 전령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고정하십시오.”
“후우.”
크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화를 가라앉힌 예친왕은 거칠게 의자에 앉고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전령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공장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소상히 말해 봐라!”
시선을 받은 전령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포, 폭발에 용광로와 공장 건물이 부서졌고 그 충격에 쇳물이 쏟아져 작업 중이던 장인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끄으응.”
좀 더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방금 들은 것만 해도 상당한 타격이었다.
특히 시설물이야 돈과 인력을 들여 다시 만들면 됐지만 숙련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잃은 건 치명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그건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만 토빌라이 장군께서 추적대를 편성해 직접 놈들을 쫓고 있습니다.”
예친왕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붙잡아 오라고 해. 알겠나!”
“옛.”
크게 대답한 전령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가뜩이나 며칠 전 태후한테 굴욕을 당해 심기가 불편하던 예친왕은 그동안 공을 들여 만든 수석총 공장까지 문제가 생기자 좀처럼 분을 삭히기 어려웠다.
“토빌라이. 이 멍청한 놈!”
두 눈을 번들거리던 예친왕은 한쪽에 시립해 있는 총관을 보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총관!”
“말씀하십시오.”
“당장 용골대에게 사람을 보내 토빌라이와 함께 수석총 공장을 엉망으로 만든 놈들을 잡아오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얼마 뒤 화가 단단히 난 예친왕의 지시를 받은 용골대가 팔기군 한 개 천인대를 끌고 북경성 밖으로 나왔고, 삽시간에 사방 백 리에 걸쳐 천라지망이 펼쳐졌다.
이런 가운데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냈지만 곧바로 팔기군의 추격을 받게 된 주작단 단원들은 두세 무리로 뿔뿔이 흩어져 필사의 탈출을 벌이고 있었다.
“잡아라!”
두두두두!
“이랴!”
“더 빨리 달려라!”
함길현이 단원들을 재촉했지만 벌써 두 시진째 쫓기느라 말들이 지쳐 있어 좀처럼 속력이 나지 않았다.
추격을 뿌리치는 건 고사하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따라잡히지 않고 거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슈슉! 슉!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함길현은 등 뒤에서 들리는 섬뜩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함을 쳤다.
“화살 공격이다. 피해!”
경고성에도 불구하고 미처 대응을 하지 못한 단원 두 명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피를 뿌리며 타고 달리던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헉.”
“크아악.”
“윽.”
“이런!”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단원을 보고 함길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낙마한 단원들은 이대로 잡혀 포로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 단검을 꺼내 스스로 가슴을 찔렀다.
푹.
“끄으윽.”
그걸 본 토빌라이는 얼굴을 구기며 부하들을 다그쳤다.
“지독한 놈들. 뭣들 하느냐! 어서 저것들을 잡아라.”
연신 말 엉덩이를 검날로 때리면서 내달렸지만 한계에 왔는지 양쪽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갔다.
이제 뒤에서 욕설과 고함을 내질러 대는 토빌라이와 팔기군의 목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고, 타고 있는 말들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입에는 거품까지 묻었다.
쉬이익.
“컥.”
또다시 화살 세례가 날아들자 바로 옆에 있던 단원 한 명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쓰러지자 힐끗 뒤를 돌아본 길천식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함길현에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어쩌려고?”
말을 달리며 함길현이 쳐다보자 길천식은 결연한 표정으로 빠르게 이야기를 했다.
“제가 뒤를 막을 테니 그사이에 빠져나가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함길현이 정색을 했지만 길천식도 아주 진지했다.
“이대로 다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두 명도 아니고 저들을 어떻게 막겠다는 거야?”
“이게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며 길천식이 안장 뒤편에 매달린 보따리를 손으로 툭툭 쳤는데 거기에는 쓰고 남은 폭약이 한 묶음 들어 있었다.
“자네, 설마……!”
깜짝 놀라 쳐다보자 길천식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한 말에 함길현은 뭔가 울컥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내가 남겠어.”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저희는 한 목숨 희생하면 끝이지만 접장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북경 지부 전체가 무너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자네들을 보내고 내가 어떻게 혼자 살 수 있겠어!”
울부짖듯 내뱉는 말에 길천식은 처연히 웃으며 고삐를 당겨 말 머리를 뒤로 돌렸다.
“먼저 좋은 곳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가 떨어지기 무섭게 대열을 이탈한 길천식은 부싯돌을 꺼내 폭탄과 연결된 심지에 불을 붙이고는 단원 두 명과 함께 검을 뽑아 들고 쫓아오는 팔기군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이야아!”
괴성을 내지르며 덤벼드는 길천식과 주작단 단원의 모습에 토빌라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건 또 뭐야?”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오십인장 한 명이 부하들을 이끌고 토빌라이를 추월해 앞으로 나갔고 이내 양쪽이 뒤엉켰다.
채채챙! 챙!
츄아악.
“크헉.”
길천식과 단원들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삽시간에 주위를 둘러싼 적들이 퍼부어 대는 공격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방 단원 두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길천식도 어깨와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으으…….”
길천식이 피가 흥건히 배어 나오는 상처 부위를 손으로 틀어막고 있자 적들이 검을 겨누며 항복을 종용했다.
“다 끝났다. 항복해.”
그러자 말 위에 앉아 숨을 거칠게 내쉬던 길천식은 지척에 다가온 토빌라이와 추격대 본대를 보고는 선혈이 묻은 입꼬리를 위로 살짝 말아 올리며 중얼거렸다.
“큭큭. 아직 안 끝났다.”
“……!”
뭔가 섬뜩한 느낌에 상대를 훑어보던 오십인장은 안장 뒤에 삐죽 나와 있는 심지가 하얀 연기를 내며 빠르게 타들어 가고 있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 이건!”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다.
꽈아아앙!
“크아악.”
“우엑.”
이히히힝.
앞서 나간 부하들이 겁도 없이 덤벼들던 놈들을 제압하는 걸 보고 다가가던 토빌라이는 온몸에 있는 털을 다 태워 버릴 것 같은 후끈한 열기와 함께 밀어닥친 충격파에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폭발에 휘말린 팔기군은 사지가 갈가리 찢겨 나갔고 요행히 살상 범위에서 벗어나 있던 이들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반경 오십 보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가운데 부상을 당한 부하의 구슬픈 비명과 말들이 내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여기저기 불에 타거나 조각난 시신이 널려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한 폭의 지옥도를 보는 것 같았다.
한편 귀청을 때리는 폭음에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 함길현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대의를 위해 망설임 없이 산화한 길천식과 단원들의 희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외침을 마음속으로 수십 번 되뇌면서 함길현은 타고 있는 말을 더욱 빨리 달렸다.
이렇게 마흔 명이 넘는 인원이 목숨을 잃고 함길현을 포함해 겨우 여섯 명의 단원만이 혈로를 뚫고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상당수의 숙련공을 없애고 공장 시설물도 파괴해 청군이 수석총으로 무장하는 걸 오랜 기간 저지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북경 지역에 있던 주작단 단원 상당수가 희생되고 말았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낮 동안의 열기가 서늘한 저녁 바람에 식어 사라지고 있었다.
뺨에 와 닿는 공기가 쌀쌀하다 느껴질 무렵인데도 불구하고 도현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저 연못 속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는 걸 뒷짐을 진 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일반 궁녀들과 내시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가운데, 도현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칠현뿐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다가 이따금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이 다였다.
어느덧 해가 지려는지 연못 위로 붉은 빛이 드리울 때, 이완 단장이 소리 없이 나타나 도현의 뒤에 섰다.
“왔는가.”
몸을 살짝 돌린 도현이 그렇게 먼저 운을 띄우자 이완 단장이 고개를 숙였다.
“예.”
“일은 어찌 되었나?”
그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곤 시선을 내리깔았다.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기쁜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도현의 얼굴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 사뭇 무서울 정도였다.
“우리 쪽 피해는?”
“여기에…….”
이완 단장이 품에서 꺼낸 두루마리는 바로 작전 중에 죽은 주작단 단원들의 명단이었다.
칠현에게서 그것을 받아 든 도현은 길고 긴 이름의 행렬을 하나하나 곰씹듯이 읽다가, 마지막쯤에 붓 끝이 떨렸는지 필체가 흐트러진 것을 깨닫고 속으로 긴 숨을 내쉬었다.
분명 이 명단은 이완 단장이 직접 작성했을 터.
죽어 나간 부하들의 이름을 한 자씩 적을 때마다 그의 가슴은 생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을 것이다.
끝까지 냉정을 지켜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결국 마지막엔 손이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이완 단장의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져 도현은 한동안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총 마흔 명이로군.”
“그렇사옵니다.”
도현은 두루마리를 칠현에게 넘기고,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큰 희생을 치렀어.”
온통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노을빛이 도현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이완 단장을 향해 온갖 회한이 어린 눈빛을 보냈다.
“내 욕심에 아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닐까?”
“단원들의 희생 덕분에 청군이 수석총으로 무장하는 시기를 크게 늦출 수 있지 않았사옵니까. 이는 마흔의 목숨으로 열 배, 스무 배에 달했을 미래의 희생자들을 살린 것이나 마찬가지니, 죽은 그들 역시 기꺼운 마음으로 몸을 던진 것이옵니다. 그 갸륵한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정녕 그러한가.”
도현은 복잡한 마음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아무리 의미 있고 거창한, 영웅적인 희생이라 해도 죽은 단원들의 가족 역시 그렇게 생각해 줄지는 의문이었다.
“희생자들의 남은 가족들을 잘 보살펴 주도록 하게.”
“예. 염려하지 마십시오.”
굳이 도현의 명령이 없더라도 이완 단장 역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그가 물러가고 난 뒤, 한참 동안이나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일렁이는 노을의 마지막 끝자락을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불꽃처럼 타오르던 붉은빛이 거의 사라질 즈음에야 겨우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꾸나.”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결국 희생은 따르는 법.
하지만 한 떨기 꽃과도 같았던 청년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
짧지만 찬란했던 그들의 삶이 눈부신 미래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
도현은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