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그동안 이런저런 사건이 있었지만 야심차게 추진한 무한경장은 국왕인 도현의 강한 의지에 따라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됐고 이제 그 성과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개국 이래 지금까지 계속 하나로 묶여 있던 국방과 행정 기구의 분리를 명문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서로 완전히 떼어놔 전문화시켰다.
이제 예전처럼 문관이 고위 무관직을 제수받아 군사를 지휘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제한되며 군부는 국왕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며 통솔하도록 했다.
그리고 부패의 온상이었던 잡세를 통합하고 중앙정부에서 직접 거두었는데, 그 전에는 기본이 되는 토지세 외에 지방관들이 필요에 따라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하면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 많았다.
단적인 예로 부역을 시켜 저수지를 만들어 놓고는 그걸 사용할 때마다 물세를 받기도 하고 성문을 지날 때마다 문세를 거두는 등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용도로 악용되어 왔다.
이걸 무역할 때 받는 관세 등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폐지했다.
거기다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도 지방관이 아닌 재무부에서 직접 별도의 관청을 만들어 맡도록 해 부패가 생길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해 버렸다.
이것 외에도 신분에 제한을 두지 않고 관리를 등용하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면서 조선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활기찬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책들은 지금까지 정체되어 있던 조선 사회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국왕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시켰다.
한편 조정에서 정책적으로 대외무역을 장려하며 상인과 여러 가지 상품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그동안 은자隱者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던 조선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서양인들이 늘어났다.
특히 서양의 범선 제작 기술과 항해술을 배우기 위해 은밀히 왜국에서 데려왔던 호세 마누엘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조선에서 겪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커졌다.
당시 최고의 해상 강국으로 인도와 중국 대륙을 비롯해 왜까지, 아시아 곳곳에 상관을 두고 무역을 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조선에서 생산하는 상품에 큰 관심을 보이고 직접 교역을 위한 배를 띄우기로 결정했다.
교역을 바로 하기보다는 직접 조선과 접촉해 우호를 다지고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목적이었기에 길이 삼십 미터, 배수량 팔백 톤의 중형 범선을 이용해 탐사대를 보냈다.
보물섬호로 명명된 이 범선은 육십 명의 인원을 태우고 암스테르담 항을 출발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고 멀리 인도양을 거쳐 무려 석달 만에 황해로 들어섰다.
“뭐 좀 보이는 것이 있소?”
여느 때처럼 함교에 서서 주위를 살피던 에스피리코 선장은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망원경을 눈에서 뗐다.
“나오셨습니까.”
옆으로 다가온 중년 사내는 이번 항해의 총책임자인 반 데르 발데였다.
십 년 넘게 해외 교역에 종사한 노련한 상인이자 총관이라는 상당히 높은 직책에 있는 인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종일 좁은 선실에 있으려니까 너무 답답해서 바닷바람이나 좀 쐬려고 나왔소. 그건 그렇고 육지는 아직 멀었소?”
“글쎄요. 일단 나가사키에서 알아낸 정보대로 항로를 잡고 있습니다만, 언제 조선에 도착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어찌 생각하면 배를 지휘하는 선장으로서 상당히 무책임하게 들리는 이야기였지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발데 총관은 화를 내지 않고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조선으로 가는 정확한 항로를 모르는 탐사대는 일단 가장 가까운 나가사키로 가서 며칠 머물며 휴식과 함께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양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부산포와 남해안 일대로 가는 항로에 대해 아는 이들이 많았지만, 조선에서 들여오는 갖가지 물건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넘겨 상당한 이득을 올리고 있던 왜국 상인들이 혹시나 기득권을 빼앗길까 봐 철저히 정보를 숨겼다.
결국 왜국 상인들의 방해로 인해 기대한 만큼 정보를 얻지 못한 탐사대는 우연히 선술집에서 술에 취한 뱃사람한테 어느 방향으로 며칠쯤 가면 조선이 나온다는 단편적인 정보만을 알아내 다시 바다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가사키를 떠난 지 벌써 나흘이 흘렀지만 육지는 고사하고 갈매기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출항 이후 지금까지 날씨가 맑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 줘 항해를 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는 거였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오.”
“조선에 도대체 뭐가 있기에 이렇게 탐사대까지 꾸려 찾으려는 겁니까?”
어느 정도 알려진 중국이나 왜국과 달리 조선은 아직 서양인들한테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래서 선원들 사이에서 왜국처럼 섬이라는 이야기부터 금과 은이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황금의 나라라는 말까지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다.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조선에 도착하면 큰 부를 거머쥘 수 있다는 거였다.
빙긋 미소를 지은 발데 총관은 에스피리코 선장을 보며 말했다.
“배 이름 그대로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한 보물섬 같은 곳이오.”
“농담하지 마시고요.”
“정말이오.”
경험이 많고 노련한 에스피리코 선장은 선원들 사이에서 떠도는 황당한(?) 소문을 믿지 않았지만 발데 총관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에스피리코 선장의 표정 변화를 보며 발데 총관은 품속에서 꺼낸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최근 유럽 각국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차茶가 뭔지 아시오?”
“그야 인삼차라는 것이 아닙니까?”
비교적 상품성이 떨어지는 삼사 년 근 인삼을 갈아서 만든 인삼차는 홍삼과 함께 조선 상인들이 판매를 했는데, 그게 마카오를 거쳐 유럽으로 흘러들어 흑사병을 비롯한 각종 전염병 예방에 좋다고 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맞소. 그것뿐만이 아니라 선장도 해도에 배 위치를 표시할 때 쓰는 연필과 각종 문양이 화려하고 색이 고와 부자와 귀족 들이 즐겨 찾는 다기茶器까지, 요즘 돈이 되는 물건 거의 대부분이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오. 그러니 보물섬이지 않겠소?”
“그렇군요.”
그제야 에스피리코 선장은 발데 총관의 말이 이해가 되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실제로 왜국 상인들은 조선에서 사들인 물건을 네덜란드 상관에 팔아 상당한 차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자 조선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간 차익을 챙기는 왜국을 빼고 보물섬과도 같은 조선과 직접 교역을 하기로 결정한 거였다.
“회사의 관심이 지대하고 통령이신 오렌지 공의 친필 서한까지 받아 온 만큼 어떤 일이 있어도 조선과 접촉해 교역을 할 수 있는 끈을 만들어야 되오.”
새삼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알게 된 에스피리코 선장은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때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가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전방에 국적 불명의 선박 발견!”
말을 듣자마자 에스피리코 선장은 재빨리 손에 들고 있는 망원경을 들어 견시수가 가리킨 방향을 살폈다.
정말 아무것도 없던 바다에 배가 한 척 떠 있었는데 뜻밖에도 중국이나 왜국에서 봤던 형태가 아니라 서양의 범선 모양인 걸 보고 에스피리코 선장은 얼굴을 살짝 굳혔다.
“왜 그러시오?”
드디어 조선과 접촉을 하는가 싶어 들뜬 발데 총관이 다그치듯 묻자 에스피리코 선장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크선이 아니고 서양식 범선입니다.”
“그럴 리가…….”
발데 총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에스피리코 선장은 가지고 있던 망원경을 내밀며 말했다.
“직접 보시죠.”
망원경을 건네받아 눈에 가져간 발데 총관은 정말 동양 배와 확연히 다른 서양식 범선인 걸 확인하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혹시 다른 나라에서도 조선에 탐사대를 보낸 것이 아닐까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관심을 가질 만큼 최근 유럽에서 가장 주목하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기에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모르겠소.”
“일단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경계 태세를 갖추겠습니다.”
“알겠소.”
이 시절 바다에서 가장 위험한 상대는 태풍이나 질병이 아니라 언제든 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같은 뱃사람이었다.
특히나 대항해시대를 맞아 해상무역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기에 같은 상단이나 국가가 아니면 서로 무기를 들이대며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다.
각 국가에서 운용하는 해군도 다른 나라 소속 상선을 발견하면 공공연하게 해적질을 하는 판국이니 바다에서 배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보다는 바짝 경계를 해야 됐다.
땡땡땡!
함교 한쪽에 설치된 비상종이 시끄럽게 울리는 것과 동시에 선원들은 황급히 무기를 챙겨 들고 각자 위치로 달려갔다.
전투에 대비해 대포까지 끌어다 내놓으며 쏠 준비를 했다.
“빨리 움직여!”
“젠장. 갑자기 이게 뭔 일이야?”
“누가 아니래.”
투덜거리면서도 선원들은 자기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인 만큼 신속하게 전투준비를 끝냈다.
이렇게 보물섬호를 긴장하게 만든 배는 다른 서양 국가의 선박이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조선 수군에 배치하기 시작한 치우 급 전투함이었다.
판옥선과 달리 서양식으로 만들어진 치우함은 화포를 구십육 문이나 탑재한 전열함으로, 어떤 적선이든 단 한 번의 일제사격으로 격침시킬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을 가진 조선 수군의 핵심 전력이었다.
이번에 충청수영에 새로 배치된 치우함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직접 함선에 탑승한 충청수사 이혁민은 전방에 보이는 보물섬호를 보며 이맛살을 찡그렸다.
“돛대 위에 걸려 있는 깃발을 보면 네덜란드 선박인 것 같습니다.”
수군 사관학교를 나와 서양 사정에 밝은 부관의 말에 이혁민은 함교 난간을 지휘봉으로 툭툭 두드리며 짜증을 냈다.
“서양 놈들이 뭐 얻어먹을 것이 있다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거야.”
“나가사키로 가려다가 항로를 잘못 잡은 것이 아닐까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이혁민은 젊은 부관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자네 바본가?”
“예?”
“제주나 전라도쯤에서 발견됐다면 몰라도 여긴 북쪽으로 한참 올라와야 되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날카로운 지적에 부관은 얼굴을 벌겋게 상기시키며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 함선을 지휘하는 함장이 되려면 시야를 좀 더 넓게 보고 생각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부관에게 따끔한 충고를 한 이혁민은 다시 앞에 보이는 범선을 주시하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유야 어찌 됐건 우리 조선 영해에 들어왔으니 문정을 해야지. 화포 사정거리 안까지 배를 접근시키고 만약을 대비해 전원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옛!”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부관은 이내 큰 소리로 명령을 전달했다.
“문정을 한다. 전원 전투준비!”
“전투준비!”
명령을 복창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부하들의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이혁민은 긴장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군.”
치우함의 전투력을 믿기에 설사 싸움이 벌어진다고 해도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괜히 불필요한 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이혁민의 마음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양측은 급격히 거리를 좁혀 어느새 이백 보 안으로 들어왔다.
배를 멈춘 이혁민은 쪽배를 내린 뒤 능숙하지는 않지만 불어를 배운 부관을 보내 문정을 실시했다.
이런 가운데 보물섬호의 선원들은 대형 돛이 세 개나 달린 엄청난 크기의 전열함 급 함선에 잔뜩 겁먹은 얼굴로 치우함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젠장. 이거 비교가 안 되잖아.”
“포구 구멍을 봐. 족히 수십 개는 되겠는데.”
“저기서 일제사격을 하면…… 으, 생각하기도 싫군.”
이제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할 만큼 가까이 접근한 치우함의 모습에 에스피리코 선장도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으음. 동아시아에 저런 배가 있다니.”
“어느 나라 배인지 알겠소?”
역시나 안색이 하얗게 질린 발데 총관의 물음에 에스피리코 선장은 치우함 돛대에 걸린 삼족오 깃발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깃발입니다.”
“프랑스나 영국 함선이 아니라 다행이기는 한데…….”
“일단 적대적인 의도를 가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에스피리코 선장의 말에 발데 총관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크기는 물론이고 탑재된 화포 숫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났기에 상대가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저항은 고사하고 그대로 손을 들어야 될 판이었다.
실제로 머스킷과 검을 들고 갑판에 늘어서 있는 선원들은 전의를 잃고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기 보트가 다가옵니다.”
갑판장의 외침에 치우함에서 내려진 쪽배가 노를 저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본 에스피리코 선장은 크게 숨을 내뱉고는 긴장한 선원들이 행여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다독였다.
“모두 긴장을 풀고 상대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 무기를 내려라.”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기를 치우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지시였지만 워낙 상대와 전력 차이가 크게 났기에 선원들은 별다른 반발 없이 검을 집어넣고 난간에 거치해 놓은 머스킷의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갑판 아래에 있는 대포는 바로 쏠 수 있도록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얼굴을 보기도 전에 잔뜩 위축된 상대와 달리 조선 수군은 처음 접해 보는 서양 선박이었지만, 자신들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에 두려움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보물섬호 바로 앞까지 온 부관은 양손을 펴서 입에 갖다 대며 사관학교에서 배운 불어로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조선국 수군이다. 정체불명의 선박을 문정하려 하니 이에 응하라!”
“……!”
다른 유럽 강대국의 함선인 줄 알았던 에스피리코 선장과 발데 총관은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저들이 하는 말을 들었소?”
“듣긴 했습니다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에스피리코 선장은 경악한 표정으로 자기 눈을 의심하듯이 비비는 시늉을 했다.
“저것이 정녕 조선의 배란 말인가?”
바로 전에 들른 나가사키 항에서 봤던 왜국의 선박하고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지 않는가.
게다가 눈으로 보이는 배의 크기와 무장 수준만 따져도 본국의 해군과 거의 동등, 아니, 그 이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왜국만 보고 조선도 비슷하겠거니 생각하며 미리 얕잡아 보았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추측이 보기 좋게 엇나간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저들을 배에 승선시켜야 하지 않겠소.”
먼저 정신을 차린 발데 총관이 선장에게 말하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선원들에게 예의 바른 신사처럼 굴라고 미리 주의를 줘야지 안 되겠군요.”
“동감이오.”
저만한 배를 운용할 정도로 국력이 있는 나라라면 쉽사리 대할 수는 없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아니, 당장 중국이나 왜국에서 했던 것처럼 거들먹거리다가는 수십 문의 화포에서 쏴 대는 불벼락을 맞아 꼼짝없이 격침당할 처지였다.
잠시 뒤 선원들이 줄사다리를 밑으로 내려 주자 종사관 손재명은 병사 한 명을 데리고 보물섬호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갑판 위로 올라서자 선원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 자리를 비켜 주는 가운데 에스피리코 선장과 발데 총관이 앞으로 와서 먼저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저희 보물섬호에 승선하신 걸 환영합니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 손재명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선은 본국의 영해를 무단으로 침범했소.”
그러자 불어를 할 줄 아는 발데 총관이 얼른 나서 이야기를 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립니다. 하지만 미리 허가를 받으려고 해도 조선 정부와 접촉할 방법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된 것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은 목적지가 우리 조선국이라는 거요?”
“그렇습니다.”
단순히 항로를 이탈하거나 표류 중인 것이 아니라 애초 목적지가 조선이라는 말에 손재명은 표정을 굳혔다.
“아국에 가려는 이유가 뭐요?”
“조선국 국왕 전하께 저희 화란 공화국 총독이신 오렌지 공의 친필 서한을 전달하고 우애를 다지려는 목적입니다.”
진짜 목적은 교역이었지만 처음부터 이걸 내세우면 자칫 상대의 반발을 살 수도 있었기에 발데 총관은 일부러 적당한 핑곗거리를 댔다.
“오렌지 공이라면?”
“저희 화란 공화국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음…….”
국서를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에 손재명은 자신이나 충청수영의 선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본선으로 돌아간 손재명은 바로 상황을 보고했고 한참을 고민하던 충청수사 이혁민은 일단 보물섬호를 가까운 대청도로 데려가 머물도록 하고는 한양에 장계를 띄웠다.
한편 도현은 가을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공납품으로 올라온 먹거리들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역시 가을 하면 먹는 거지. 천고마비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냐.”
입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을 정도로 잘 익은 홍시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도현이 말했다.
수라간 나인들의 음식 솜씨를 탓할 마음은 없지만, 만날 먹는 간식이란 게 약과 아니면 꿀떡, 식혜 같은 것들뿐이니 가끔은 다른 먹거리도 맛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닌가.
계절이 바뀜에 따라서 제철 과일을 즐기는 것도 나름 풍류가 있으니 꽤나 멋스럽다고 느낀 도현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칠현에게 말했다.
“그렇지. 벌써 산엔 단풍이 다 들었나?”
“예에. 이제 가을도 초입을 훨씬 지났으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대궐 정원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도 어느덧 반 이상은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앞으로 한 두어 달 정도 더 지나고, 지금은 선선한 정도인 바람이 싸늘하다 느껴질 때쯤엔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온 거리에 떨어질 터였다.
“더 늦기 전에 단풍 구경을 가야 할 텐데. 아차, 고구마 구워먹는 것도 깜박하면 안 되지.”
가을엔 별미가 많아서 참 좋아, 하는 도현의 중얼거림에 칠현은 그저 예예 하면서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평화로우면서도 한가로운 한때를 즐기고 있는데, 돌연 급한 전갈이라며 내관이 장계를 가지고 희정당으로 들어왔다.
“어디서 왔다고?”
“충청수영이옵니다, 전하.”
칠현이 중간에서 장계를 받아 들어 전달하는 사이에 내관이 덧붙여 말했다.
“설마 왜구라도 출몰한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옵고 근해에서 서양 범선과 접촉해 그에 관한 보고를 올리는 거라 하옵니다.”
“뭐야! 얼른 이리 줘 보게.”
도현은 빨리빨리, 하면서 손짓을 하고는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쫙 펼쳐 들었다.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간 도현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손에 든 장계를 내려놨다.
“끄으응.”
“무슨 내용인데 그러시옵니까?”
“화란의 동인도회사 간부라는 자가 자기 나라 국왕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날 알현하고 싶다고 하는군.”
“국서를 소지하고 있다면 일종의 사신이니 만나 보시면 되지 않사옵니까?”
동인도회사가 뭘 하는 곳인지 잘 모르기에 태평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칠현과 달리, 단번에 이들이 찾아온 진짜 이유를 간파한 도현은 좀처럼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후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
서탁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어찌할지 고심하던 도현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짐이 적어 주는 교서를 즉시 충청수사에게 전달하고 회의를 할 테니 대신들을 소집하도록 해.”
“예.”
눈치가 빠른 칠현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급 내관에게 일러 도현의 지시를 전달하는 한편 얼른 지필묵을 준비해 서탁에 올려놨다.
붓을 집어 든 도현은 먹물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로 충청수사에게 보내는 교지를 적어 내려갔다.
잠시 뒤 내용을 확인한 도현이 옥쇄를 찍어 마무리를 하자 칠현은 먹물을 잘 말린 뒤 교지를 승정원에 보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연락을 받은 대신들이 속속 희정당에 도착했다.
총리대신 박황을 필두로 국방대신 임경업과 외무대신 박노 비롯한 각부 대신들과 근위군단장 박영식까지 거의 어전회의 수준이었다.
좌정한 신하들을 한차례 훑어본 도현은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충청수사 이혁민이 보낸 장계가 도착했소. 내용은 화란이라는 나라에서 국서를 가진 인물들이 찾아와 짐을 알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하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크게 술렁였다.
“화란이라면 유럽에 있다는 나라가 아니옵니까?”
“맞소.”
지식인이라 불리는 신료와 사대부 들이 명목적으로 명을 추종하는 사대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 도현이 직접 참여해 세계지도라는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기에 다들 자세히는 몰라도 화란이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 줄은 알고 있었다.
“그 먼 나라에서 어찌 우리 조선을 알고 국서를 보냈는지 모르겠군요.”
농산대신 진대석이 의아해하자 상업을 맡고 있다 보니 비교적 나라 밖 사정에 밝은 상공대신 유형원이 궁금증을 풀어 줬다.
“해상무역이 발달해 곳곳에 거점을 만들어 바다를 제집처럼 돌아다니고 왜국의 나가사키에도 상관을 두고 있으니, 우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구먼.”
이야기를 들은 신료들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고 외무대신 박노가 상석에 앉아 있는 도현을 보며 말했다.
“국서를 가지고 왔다면 사신이나 마찬가지이니 알현을 하시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사옵니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별 고민이 없겠지만 문제는 국서를 가지고 온 자들이 화란의 동인도회사 소속이라는 것이오.”
“……?”
눈을 껌뻑거리며 그게 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신료들의 모습에 도현은 내심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동인도회사는 화란 상인들이 해상무역을 활성화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강화하기 위해 세운 일종의 연합 상단이오. 이들이 왔다는 건 친선보다 우리와 직접 교역을 하고 싶다는 의중이 있다는 것이오.”
“아…….”
“교역이라면 이미 나가사키와 마카오 등지에 진출한 우리 상단들을 통해 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재무대신인 김육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도현은 보료 팔걸이에 몸을 살짝 기대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거 가지고는 성에 안 차니 아마 왜국처럼 특정한 곳에 상관을 만들어 아국과 직접 교역을 하길 원하는 걸 것이오.”
“그런…….”
“흐음.”
단순히 외부로 나가 교역을 하는 것과 국내에 상관을 만드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기에 신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내 약간은 고지식한 성격의 법무대신 송준길이 나서 의견을 말했다.
“절대 양인들을 받아들여서는 아니 되옵니다, 전하.”
“이유가 무엇이오?”
“그들이 아국에 발을 디딤으로써 끼칠 악영향을 생각해 보시옵소서. 양인들이 하는 행동이나 풍습은 하나부터 열까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우리와 다른 점이 많은데 어찌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가 있겠습니까. 저들은 양반이나 선비에 대한 예와 도를 모를뿐더러, 아낙네에게 사사로이 말을 걸기도 하니 이는 시정잡배를 집 안으로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이옵니다.”
그러자 상공대신 유형원이 반박을 하고 나섰다.
“법무대신께서 하시는 말씀도 일리가 있긴 하나, 너무 지나친 생각이시오.”
“뭐가 지나치단 말이오?”
“주상 전하께서 보위에 등극하신 이래, 우리 조선은 상업을 장려하고 타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 왔소이다. 쇄국정책을 펼치는 것도 아닌데 왜국이나 청국과는 아무 거리낌 없이 교역을 하면서, 양인만을 배척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오.”
“하지만…….”
“내 말 아직 안 끝났소이다.”
상공대신 유형원은 법무대신이 하려는 말을 가로막고 계속해서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만약 그들이 병을 옮기거나 아국의 미풍양속에 해를 끼치는 것이 우려된다면, 왜국처럼 일정 구역을 만들어 놓고 그 이상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으면 되지 않겠소. 그리하면 관리하기도 쉽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처리하기도 용이할 것이오.”
“말로만 하면 뭔들 못하겠소. 상공대신께서는 양인들이 우리 말을 순순히 들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게요?”
“그럼 그들이 창과 칼을 들고 우리 군에 덤벼들기라도 할 거란 소리요?”
“처음엔 고분고분하게 굴다가 양의 탈을 뒤집어쓴 늑대처럼 우릴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른다는 뜻이오. 사람이 앞일을 내다볼 줄 알아야지.”
“그런 걸 다른 말로 없는 걱정을 사서 한다고 하더이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설전이 이어지자 조정 대신들 역시 두 파로 갈려서 서로 웅성대었다.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현이 서탁을 한쪽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달아오른 방 안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탕!
“그만들 하시오.”
“흠흠.”
“양인이 백성들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법무대신의 말에 일리가 있지만, 상공대신의 주장처럼 교역을 적극 장려하는 이상 언제까지 문을 닫고 지낼 수는 없을 것이오.”
잠시 말을 끊고 좌정해 있는 신료들을 천천히 훑어본 도현은 사뭇 진지한 어투로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양측의 의견을 절충해서 상관을 설치해 직접 교역을 하되 일반 백성들이 양인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거기서만 거래를 하게 만들고, 그 전에 선결 조건으로 아국 법을 지켜야 하며 조정의 허락 없이 사교를 포교하거나 미풍양속을 헤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는 것이 어떻겠소?”
“현명하신 결정이시옵니다.”
“전하의 뜻을 따르겠사옵니다.”
상공대신 유형원을 비롯한 개방파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뜻이 거의 다 반영된 것이었기에 당연히 반대가 없었고, 법무대신 송준길 쪽은 다소 불만이 있어도 국왕인 도현이 낸 절충안인 데다 최소한의 안전망은 해 두는 거였기에 일단 수긍을 했다.
“그럼 아국의 방침은 조건부로 직접 교역을 허락하는 것으로 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주무부처인 상공부와 법무부가 긴밀히 협의해 화란인들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련해 보고토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도현의 말에 신료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상관 설치에 대한 방법을 마련하는 사이에 도현이 내린 교지를 전달받은 충청수사 이혁민은 수영이 위치한 보령으로 보물섬호를 데려간 뒤 발데 총관을 포함해 십여 명의 인원만 미리 준비한 호위 병력과 함께 마차에 태워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도성인 한양으로 가는 수로를 양인들한테 드러내지 않기 위한 조치로 전부 도현이 지시한 것이었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추진한 도로 정비 사업 덕분에 발데 총관 일행은 별다른 불편함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거기다 호위 병력도 모두 기병으로 구성해 일행은 보령을 출발한 지 이틀 만에 한강을 건너 도성에 도착했다.
이동하는 동안 발데 총관은 놀람의 연속이었는데 우선 충청수영에 정박해 있는 전선들의 규모와 숫자에 기가 죽었다.
대부분 동양에서 흔히 본 배수량 오백 톤 미만에 십여 문 정도의 화포를 탑재하는 정크선이었지만 숫자가 스무 척이 넘었고, 처음 봤던 치우 급 전열함도 한 척이 더 정박해 있었다.
아무리 작고 화력이 약해도 일정 이상의 규모를 갖춘다면 충분히 위협이 되는 데다 치우 급 전열함은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국에서 본 군선과 달리 조선 해군은 모든 배마다 가라앉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많은 화포를 탑재한 데다 형태가 아주 단단해 보이는 것이 쉽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다음으로 발데 총관을 놀라게 한 것은 서양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닦이고 관리된 가도였다.
흙을 단단히 다지고 그 위에 자갈이나 박석을 촘촘하게 깐 도로는 폭우가 와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보였고 넓이도 충분해 동시에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동하는 동안 각종 마차와 짐수레가 빈번하게 보이는 걸 보고 유통망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행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 건 바로 한강을 가로질러 건설 중인 대형 석조 교량이었다.
길이만 일백 미터가 넘고 높이 또한 오 미터나 돼서 아래로 배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된 석조 교량은, 이제 완공을 눈앞에 두고 형태가 거의 드러나 있었다.
옆에 놓여 있는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너가며 마차 창문 너머로 석조 교량의 웅장한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살펴본 발데 총관 일행은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건축물에 일행은 막연히 왜국과 비슷한 수준일 거라는 자신들의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대표로 조선 조정과 협상을 해야 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발데 총관은 상대에 대한 인식을 바꿔 명나라나 서양 국가를 상대하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이 되었다.
상대가 화란의 통치자인 오렌지 공의 친서를 가져왔다는 걸 감안해 한양에 도착한 발데 총관일행은 남별관에 머물도록 했다.
“양인들이 숙소에 도착했다고?”
부용지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하던 도현의 물음에 외무대신 박노가 살짝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태도가 어떻다고 하던가?”
“생긴 것과 달리 대체적으로 지시에 순순히 따르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상당히 조심한다 하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뒷짐을 진 도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노가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안내를 맡은 우리 쪽 관리에게 빨리 전하를 알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옵니다.”
“어제 상공대신과 법무대신이 상관 설치에 대한 세부적인 안을 마련해 가져왔으니 만나는 건 언제든지 가능하지…….”
살짝 말끝을 흐리고는 앞에 있는 연못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외무대신.”
“예.”
“경은 이번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
갑작스러운 물음에 살짝 당혹해하던 박노는 이내 담담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이미 직접 교역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만 왜국 막부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조금 염려스럽사옵니다.”
“막부가?”
“네. 남해도가 아국 영토로 병합이 되고 지금까지 쓰시마 영주가 해 오던 중계무역을 막부가 대신해 큰 이득을 취하고 있사온데, 우리와 화란의 직접 교역이 시작된다면 상당한 손해를 입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봉황상단의 보고에 의하면 나가사키에서 화란 상인들이 구해 가는 물건의 오 할 이상이 아국에서 나는 거라고 하니 상권이 크게 위축될 게야.”
“번주들과의 마찰을 무릅쓰고 강제로 화란의 상관이 있는 나가사키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집어넣을 정도로 욕심이 많은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성격으로 볼 때 반발이 클 것이옵니다.”
“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박노가 지적하자 도현은 살짝 얼굴을 굳히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막부가 어떻게 나올 것 같나?”
“화는 나겠지만 막부의 전통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아국과의 교류가 필요하기에 극단적으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허나 분명 어떤 식으로든 불편한 감정을 표현할 겁니다.”
“이것 참 어려운 문제군.”
미간을 찌푸린 도현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잠자리들이 날아다니는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국과 관계도 중요했지만 그렇다고 막부의 눈치를 보느라 그냥 놓치기에는 화란하고 직접 교역을 해서 얻게 될 이익이 너무 컸다.
무엇보다 막부를 신경 써야 된다는 것 자체가 도현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요청한 것도 아니고 저들이 알아서 찾아온 거니 아국에는 잘못이 없지. 그리고 언제부터 아국이 막부 따위의 눈치를 보며 국정을 결정했나?”
다소 억지스럽고 오만한 말이었지만 막부의 반발 정도는 무시해 버릴 만큼 국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좋은 지적이었네. 앞으로도 짐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가감 없이 충언을 해 주게.”
“그러겠사옵니다.”
“그래.”
가볍게 박노의 어깨를 두드려 준 도현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산책을 마저 했다.
일부러 하루를 그냥 넘기고 한양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 발데 총관 일행은 알현을 허락받고 대궐로 들어왔다.
본국에서 준비해 온 예복을 갖춰 입은 발데 총관은 수행원 두 명과 함께 외무부 관리에게 기본적인 예법을 설명 들은 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갔다.
“화란국 사신 듭시오!”
대전 내관이 크게 소리를 치는 것과 함께 발데 총관 일행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인정전 안에 들어서자 좌우에 늘어서 있던 신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됐다.
배운 대로 도현이 앉아 있는 옥좌를 열 걸음 정도 남겨 두고 멈춰 선 발데 총관 일행은 고개를 숙인 채 한쪽 다리를 꿇으며 입을 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관인 반 데르 발데가 조선국 국왕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바닥에 엎드려 세 번 절을 하는 조선식 예법과 상당히 다른 인사에 신료들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미리 도현이 저들하고 우리는 예법 자체가 완전히 다르니 같은 잣대를 상대에게 들이대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기에 그냥 참고 넘겼다.
한쪽에 시립해 있던 역관을 통해 발데 총관의 말을 전해 들은 도현은 근엄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화란은 배로 수천 리나 떨어진 먼 곳이라 들었는데 아국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듣자 하니 귀국의 국왕이 보내는 친서를 가져 왔다던데?”
도현의 물음에 발데 총관은 얼른 뒤에 있는 수행원에게 눈짓을 하며 대답했다.
“네. 오렌지 공께서 친필로 적으신 서한입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채 봉인된 친서를 수행원이 쟁반 위에 올려 내밀자 한쪽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그걸 받아 도현에게 바쳤다.
인장을 뜯고 양손으로 두루마리를 잡아 펼친 도현은 스윽 한번 훑어보고는 역관에게 친서를 건넸다.
그러자 조정과 계약을 하고 수군사관학교에서 군관들한테 항해와 조선술을 가르친 양인들한테 불어를 배운 역관이 큰 소리로 친서를 읽어 내려갔다.
특별한 것 없이 틀에 박힌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양국의 우호와 친선을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역관의 말이 끝나자 발데 총관은 미소 띤 얼굴로 다른 수행원이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기다란 상자를 열었다.
“이건 친선의 의미로 오렌지 공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상자 안에는 새하얀 상아 손잡이에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말채찍이 하나 들어 있었다.
“본국의 최고 장인이 전하를 위해서 정성을 다해 만든 물건입니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도현은 예의상 이야기를 했다.
“고맙게 받겠네.”
“그리고 저희 동인도회사도 따로 전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발데 총관의 말과 함께 밖에 있던 내관들이 큼지막한 상자 세 개를 양쪽에서 잡고 안으로 들어왔다.
상자에는 각각 후추 같은 향신료와 인도산 상아 한 쌍 그리고 은으로 만든 식기 세트가 포장되어 있었다.
좌우에 시립해 있던 대신들은 웬만한 사람 팔뚝보다 더 큰 진줏빛 상아를 보고 아름답다며 속으로 감탄했고, 빈대떡처럼 납작하게만 생긴 접시에 국과 밥은 어떻게 퍼서 먹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으나, 코를 찌르는 냄새를 풍기는 향신료 자루에는 그냥 이상한 가루라 생각하며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들과 반대로 도현은 상아와 식기 세트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다가 후추 냄새를 맡자마자 몸을 앞으로 기울여 눈을 반짝였다.
“그건 후추가 아닌가?”
크게 반색을 하는 도현의 반응에 발데 총관은 의외인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사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져온 것인데 전하께서도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동양에는 뒤늦게 전해져 아직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유럽에서 금가루보다 더 귀한 취급을 받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향신료가 아닌가.
게다가 잘 살펴보니 후추 말고도 이것저것 들고 왔는지 여러 가지 냄새가 섞여서 풍겨 왔다.
개중에는 익숙한 카레 냄새가 나는 노란 가루도 있어서, 도현은 절로 나오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식생활이 얼마나 풍요로워질지 상상하면서 속으로 히죽거리던 도현은 매우 만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주 좋은 걸 가져왔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래. 더 할 말은 없는가?”
지금이라도 바로 수라간 나인을 불러서 새 요리를 만들라고 시키고 싶은 생각에 엉덩이가 들썩거리는데, 발데 총관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실은 전하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됐지만 도현은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말해 보게.”
“왜국을 거치지 않고 조선과 직접 교역할 수 있도록 상관을 여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지금도 나가사키를 통해 양국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
그가 일부러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자 몸이 단 발데 총관은 황급히 상관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같은 구조가 지속된다면 중간에서 왜국 상인들의 배만 불려 주게 될 겁니다.”
“어째서 그런가?”
“예를 들어 최근에 유럽 각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조선 도자기의 경우 조선 상인들이 나가사키로 가져와 왜국 상인한테 넘기는 가격이 다기 하나당 은 한 냥이지만 저희는 그걸 무려 네 배나 비싼 은 넉 냥에 구입을 합니다. 멀리 운송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창고에 잠시 보관만 한 뒤에 그런 폭리를 취하는 건 너무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구입한 다기를 유럽으로 가져가 다시 뻥튀기를 해서 은 열 냥에 파는 건 쏙 뺐지만, 그것만으로도 인정전에 모인 신료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허어. 완전히 도둑이 아닌가?”
“누가 아니랍니까?”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만약 나가사키가 아닌 조선에 상관이 설치된다면 양국 상인들이 다 큰 이득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노련한 상인답게 발데 총관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보다 조선이 얻을 이익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런 시커먼 속을 이미 다 간파하고 있던 도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아래에 있는 발데 총관을 내려다봤다.
마치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발데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아국하고 직접 교역을 하고 싶다는 건 화란국 정부의 뜻인가 아니면 단순히 동인도회사가 원하는 일인가?”
“그건…….”
아주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였는데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협상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설마 도현이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미처 몰랐던 발데 총관은 순간 당황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저희 동인도회사가 주체가 되어 추진하는 일이지만 네덜란드 공화국 통령이신 오렌지 공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도현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대충 얼버무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을 하게!”
그가 강한 기세를 내뿜으면서 다그치듯 묻자 찔끔한 발데 총관은 얼른 다시 대답을 했다.
“오렌지 공으로부터 동양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받았기에 저희 회사가 정부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개 상단이 정부의 뜻을 대신한다니…… 아주 광오한 말이군.”
“그게…….”
발데 총관이 뭐라고 변명을 하려는 걸 중간에 끊고 도현이 말했다.
“뭐, 그쪽 나라의 일이니 우리가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지. 하나 동인도회사의 일방적인 말만 믿고 국가의 중차대한 일을 추진할 수는 없으니 짐이 신뢰할 만한 증거를 가져와야 될 것이야.”
이야기를 들은 발데 총관은 크게 당황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였지만 네덜란드까지 다시 돌아가 원하는 문서를 받아 오려면 최소 몇 달은 허비됐기에 발데 총관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발데 총관이 머뭇거리자 도현은 내심 미소를 짓고는 마치 사정을 봐준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화란과의 거리가 먼 것을 감안해서 일단 먼저 상관 설치에 대해 협상을 하고 나중에 화란 정부의 신임장을 가져오는 걸로 사정을 봐주도록 하지.”
도현의 말에 발데 총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상관 설치를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협상 결과를 지켜본 뒤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네.”
확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협상을 한다는 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의사가 있다는 뜻이었기에 발데 총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게.”
“예.”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를 표시한 발데 총관과 수행원들은 뒷걸음질로 인정전을 나갔다.
내관들이 진상품들을 모두 치울 때까지 잠시 기다린 도현은 이내 좌측에 시립해 있는 상공대신 유형원과 외무대신 박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협상을 할 준비는 모두 끝났나?”
“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쉬운 쪽은 아국이 아니라 상대편이니 먼저 패를 꺼내 보이지 말고 느긋하게 임하고, 나가사키에 둔 상관보다 유리한 조건을 받아 내야 될 게야.”
“명심하고 있사옵니다.”
두 대신의 대답에 도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아. 두 사람만 믿겠네.”
상관 설치와 동인도회사에 대해 신료들하고 얼마간 이야기를 나눈 뒤 도현은 대전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대궐 앞 육조거리에 위치한 외무부 청사에서 양측이 만나 첫 협상을 가졌다.
“외무대신을 맡고 있는 박노라고 하오,”
“난 상공대신인 유형원이오.”
역관을 통해 앞에 서 있는 두 대신의 신분을 전해 들은 발데 총관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인도회사에서 총관직을 맡고 있는 반 데르 발데라고 합니다. 이렇게 높으신 분들이 나오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은 첫날이라 인사차 우리가 나왔지만 내일부터는 뒤에 서 있는 실무자들이 협상을 이어 갈 것이오.”
“아. 그렇군요.”
발데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과 함께 온 실무자들을 보고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우선 확실히 해 둘 것이 있소이다.”
“그게 뭡니까?”
“지금부터 하는 협상은 그쪽이 화란 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만약 나중에라도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거나 합의한 내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경우 전부 없었던 일로 할 것이오.”
정색을 하면 외무대신 박노가 하는 이야기에 발데 총관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동의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쪽의 제안부터 먼저 꺼내 보시오.”
“먼저 이걸 한번 봐 주십시오.”
둘둘 말린 종이를 하나 꺼내 건네자 외무대신 박노가 의아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이게 뭐요?”
“왜국과 나가사키 상관 운영에 대해서 맺은 협약입니다. 저희는 이것과 같은 조건으로 상관을 개설했으면 합니다.”
역관이 발데 총관의 이야기를 통역해 주자 외무대신 박노는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훑어보고는 옆에 앉아 있는 상공대신 유형원에게 넘겼다.
협약서는 조선 측 관리들이 읽어 보기 쉽게 한문으로 작성된 거였다.
다 읽어 보고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상공대신 유형원이 입을 열었다.
“참고는 되겠지만 아국은 왜국 막부와 다른 만큼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가 없소.”
상대가 까다롭게 나오자 발데 총관은 살짝 짜증이 났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상공대신 유형원이 상체를 펴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먼저 관세 문제인데. 귀측이 물건을 사들이거나 팔 때 일괄적으로 이 할의 세금을 부과하겠소.”
“파는 건 그렇다고 쳐도 조선 상품을 구입하는 것까지 관세를 매기는 건 너무합니다. 그리고 관세율도 왜국보다 두 배나 높지 않습니까?”
상인답게 계산에 민감한 발데 총관이 발끈하며 따지자 유형원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얼굴로 대응을 했다.
“어제 대전에서 그대가 왜국 상인이 조선 상품을 가지고 네 배의 폭리를 취한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랬지요.”
“직접 교역을 하게 되면 그 부분이 사라지니 관세를 내더라도 훨씬 이익이 아니오. 우리도 면밀히 검토를 한 끝에 도출해 낸 금액이니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길 바라겠소.”
“으음.”
여기서 반박을 하면 자신이 국왕 앞에서 거짓말을 한 꼴이 되기에 발데 총관은 속이 쓰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대를 힐끗 본 외무대신 박노가 유형원에 이어 이야기를 했다.
“다음으로 상관이 설치될 경우 운영에 관한 부분이오. 아국에 들어와 장사하는 양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선의 법에 적용을 받고 만약 죄를 짓는다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은 뒤 처벌할 것이오. 그리고 이게 가장 민감한 부분인데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사로이 종교를 포교하거나 미풍양속을 헤치는 행위를 한다면 극형에 처하는 건 물론이고 죄의 경중에 따라 상관을 폐쇄할 수도 있소.”
서양 국가들이 아시아에 진출할 때 현지인들과 가장 크게 마찰을 빚는 것이 바로 종교 문제였다.
왜국도 제일 처음 거래를 튼 곳은 네덜란드가 아니라 에스파니아였지만 가톨릭 포교 문제 때문에 얼마 안 있어 나가사키에서 내쫓겼다.
종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른 서양 국가들과 달리 네덜란드는 가톨릭을 믿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충돌했을 때 막부 편에 서서 포격을 가해 줄 만큼 철저히 이윤에 따라 움직였기에 앞선 조항과 달리 두 번째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편파적이지 않고 공정하게 재판이 이루어진다면 저희도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자 박노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양쪽의 의견이 일치하니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어 참으로 좋지 않소이까. 하하.”
여기까지는 두 사람 다 웃으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로 마무리 짓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차례가 되자, 박노가 슬쩍 헛기침과 함께 뜸을 들였다.
“그럼 이번엔 상관 건설에 대한 것인데…….”
돈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니 발데 총관이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건설 비용은 그쪽에서 대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소이까. 대신 솜씨 좋은 장인과 목수를 소개시켜 드리지요.”
그 말을 들은 발데 총관은 웃는 얼굴을 순식간에 거두고 정색을 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관을 우리가 지으라니요?”
“그럼 누가 하겠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상관이 필요한 것은 아국이 아니라 그쪽이지 않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오 대 오, 아니, 육 대 사 정도라면 기꺼이 부담하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비용을 대는 건 무립니다.”
흥분해서 떠드는 발데 총관에 비해 박노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대꾸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먼저 와서 교역을 청한 것도 그쪽이고, 장사를 하려면 상관이 필요하니 자리를 내 달라고 부탁한 것도 그쪽이외다. 아국의 영토에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큰 호의인지는 잘 아시리라 믿소.”
“하지만…….”
흔들림 없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박노의 태도에 발데 총관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상관이 무슨 일반 가정집도 아니고, 한번 만들려면 만만치 않은 규모의 자재와 일손이 필요하다.
게다가 하루 이틀 걸리는 일이 아닌 만큼 인건비와 기타 등등의 명목으로 나갈 돈들을 생각해 보면 ‘예, 그렇습니까.’ 하고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까? 하다못해 칠 대 삼이라도…….”
그러나 박노는 물론이고 옆에 앉아 있던 상공대신 유형원도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고, 발데 총관은 깊은 한숨과 함께 결국 결심한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금액이 크다 보니 비록 제 선에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본사에 연락을 해서 가급적 긍정적인 답변이 오도록 노력해 보지요.”
지금껏 동인도회사의 이름을 걸고 수많은 거래를 하는 동안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협약을 맺은 적은 없었다.
분명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 내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와 교역을 함으로써 얻을 이익이 얼마나 클지를 피력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계산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시오.”
상황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자 박노는 강경하게 밀어붙인 게 미안하기라도 한 듯 발데 총관을 치켜세웠다.
“총관 같은 인재가 있으니 동인도회사의 미래가 참 밝은 것 같소.”
선심 쓰듯 하는 칭찬에 발데 총관은 쓴웃음으로 답하곤 얼른 다음으로 넘어가자며 손짓했다.
깨알 같은 글자가 수북하게 쓰인 서류를 하염없이 검토하고 갑론을박하면서 길고 긴 회의가 그렇게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 뒤로도 며칠간 양쪽은 치열하게 협상을 벌였는데 문구 하나 차이로 큰 이권이 오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듯 지루한 힘겨루기 끝에 최종 협상안이 만들어졌다.
붉은 끈으로 묶인 두루마리를 칠현이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서탁 위에 내려놓자 도현이 앞에 앉아 있는 외무대신 박노와 상공대신 유형원을 보며 말했다.
“이게 최종적으로 나온 협상안인가?”
“그렇사옵니다.”
“어디…….”
두루마리를 집어 든 도현은 끈을 풀고 적혀 있는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흐음. 관세율을 일 할 오 푼으로 했군.”
“예. 저들이 상관 건설 비용까지 대는데 너무 부담이 크다고 해서 그렇게 조정을 했사옵니다. 대신 교역을 시작하고 이 년 뒤부터는 처음 제시한 대로 이 할을 받기로 명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양보한 대신 전하께서 말씀하신 물건들을 다음 방문 때 가져다주기로 약조했습니다.”
“호오. 그래. 잘했네. 너무 몰아붙이면 나중에 반발이 생길 수도 있으니 적당히 사정을 봐주는 것도 한 방법이지.”
설명을 들은 도현은 머리를 끄덕이며 관세율을 낮춰 준 걸 크게 탓하지 않았다.
그가 요구한 물건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보유한 각종 해도와 각 지역의 지도 그리고 사탕수수였다.
해도와 지도는 훗날 조선이 대양으로 진출할 때 요긴하게 써먹기 위해서였고 사탕수수는 땅이 척박해 논농사를 짓기 어렵고 날씨가 온난한 제주도에 대량으로 농장을 조성해 백성들의 호구지책을 만들어 주고 새로운 특화 작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물론 꿀 대신 회귀 전에 즐겨 먹었던 설탕을 맛보려는 그의 자그마한(?) 소망이 작용하기도 했다.
“딱히 손볼 것이 없으니 이대로 시행하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그런데 상관의 위치는 어디로 하는 것이 좋겠나?”
도현의 물음에 미리 생각해 둔 곳이 있는지 상공대신 유형원이 바로 대답했다.
“상관이 도성과 너무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 여러모로 좋지 않으니 멀리 완도에 만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완도?”
“네. 육지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있고 섬이라 관리하기 수월할 뿐만 아니라 서쪽과 남쪽에서 오는 물길이 겹치는 곳이라 교역 거점으로 삼기에 알맞은 지역입니다.”
“저 옛날 신라 때 장보고 장군이 청해진을 설치한 곳이 아닌가?”
“맞사옵니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잠시 생각을 해 본 도현은 고개를 돌려 옆에 시립해 있는 칠현을 보며 말했다.
“상선.”
“예.”
“지도를 가져와 봐.”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남해안 지역이 자세히 그려진 지도를 칠현이 가져와 서탁에 펼치자 도현은 거기서 상공대신 유형원이 거론한 완도를 찾아 손가락으로 짚었다.
“흐음. 위치는 괜찮은 것 같군.”
“섬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제법 돼서 따로 인력을 데려갈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외무대신 생각은 어떤가?”
“신도 적당한 곳이라 생각하옵니다.”
“좋아. 그럼 완도에 화란 상관을 설치하도록 하지. 부산포에 위치한 왜관과 함께 상공부에서 관리를 맡게.”
“알겠사옵니다, 전하.”
도현의 최종 승인이 떨어지자 양쪽은 다음 날 정식으로 각자 서명을 한 뒤 협정서를 교환했다.
그렇게 조선은 서양에 처음으로 문호를 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