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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 (58/104)

저격

도현이 노비해방을 선언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지만 여전히 정국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신료와 사대부 들의 상소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근로계약을 맺고 예전에 부리던 노비들에게 일을 시키고 있던 사대부들이 세경 지급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님! 대감마님.”

비단 보료 위에 누워 담배를 피우면서 한가롭게 쉬고 있던 최 진사는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왼편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드르륵.

“무슨 일이냐?”

마당에는 사내 대여섯 명이 엉거주춤 서 있다가 최 진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얼른 허리를 숙였다.

“저, 마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봐.”

그러자 가장 젊어 보이는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이야기를 했다.

“세경을 주시기로 한 날짜가 어제인데 아무런 말씀도 없으셔서 왔습니다.”

“세경이라고?”

“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굽실거리며 노비로 살던 것들이 이렇게 떼로 몰려와 돈을 내놓으라는 것에 짜증이 난 최 진사는 손에 든 담뱃대로 창틀을 툭툭 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며칠 있다가 줄 테니까 기다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씀하시지 마시고 정확히 언제 주실지 날짜를 정해 주십시오.”

“뭐야!”

최 진사가 눈썹을 치켜뜨고 노려보자 함께 온 사람들이 약간 겁먹은 얼굴로 눈치를 보며 젊은 사내를 말렸다.

“이봐, 춘삼이, 진사 어른께서 나중에 주신다지 않나?”

“그래. 이만 돌아가세.”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오랜 시간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중년인들과 달리 아직 나이가 젊어 반항심이 더 컸던 춘삼이라는 사내는, 최 진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했다.

“이제 이 집에 묶여 있는 노비도 아니고 정당히 일한 대가를 받으러 왔는데 뭘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춘삼의 말에 최 진사는 헛바람을 내뱉으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감히 눈도 못 마주치던 놈이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아직도 저희가 이 집 노비인 줄 아십니까?”

“이놈이!”

화가 치밀어 오른 최 진사는 벌컥 문을 열고 마루로 나와 고함을 질렀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이제 저희들도 호패를 가진 당당한 이 나라의 백성입니다.”

“이런 미친!”

춘삼이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며 대들자 꼭지가 돌아 버린 최 진사는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 내려가서는 들고 있던 담뱃대를 휘둘렀다.

예전 같으면 키우는 가축보다 못한 노비 신세였기에 때리는 대로 그냥 무기력하게 맞을 수밖에 없었지만, 호패를 받고 그 굴레에서 벗어난 춘삼은 손을 뻗어 담뱃대를 든 최 진사의 팔을 움켜잡았다.

돌발 행동에 순간 당황하며 주춤거리던 최 진사는 이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거 안 놔!”

“자꾸 이러시면 현청에 고발할 겁니다.”

“흥! 마음대로 해 봐.”

서로 양팔을 붙잡고 옥신각신하자 불안한 얼굴로 옆에 있던 사내들이 얼른 다가와 둘을 말렸다.

“춘삼이, 자네 왜 이러나?”

“젊은 혈기에 이러는 거니 마님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굽실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내들의 모습에 춘삼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를 냈다.

“아재들은 배알도 없소! 사람이 일을 했으면 당연히 그 대가를 받아야지. 우리도 이젠 노비가 아니라 당당한 양민이란 말이오.”

“그래도 여태껏 신세진 최 진사 어른께 그러는 게 아니야. 얼른 놔 드려.”

“흥, 신세는 무슨 신세! 개돼지처럼 부려 먹힌 것도 신세를 진 거요?”

춘삼은 콧방귀를 흥 뀌고 마지못해 손을 놓았다.

“이놈이 그깟 호패 하나 받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놓으라고 몸부림치다가 춘삼이 손을 떼어 버리자 얼떨결에 뒤로 휘청거린 최 진사는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고 와락 덤벼들었다.

길쭉한 담뱃대가 얼굴을 맞힐 기세로 붕 휘둘러지는 것을 운 좋게 피한 춘삼은 하마터면 정통으로 맞을 뻔했단 생각에 우씨, 하고 이를 갈았다.

“에잇!”

“어어?”

화가 잔뜩 난 춘삼이 최 진사의 가슴팍을 확 세게 밀치자 순식간에 중심을 잃은 그의 몸이 뒤로 쿵 넘어갔다.

“아구구!”

“아이고, 대감마님, 괜찮으십니까?”

육중한 소리와 함께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최 진사는 마구 앓는 소리를 내며 삿대질을 했다.

“천한 노비 새끼가 사람 잡네! 이보게, 뭐 하나. 얼른 포졸들을 불러 저 쌍놈을 옥에 가두도록 하지 않고!”

최 진사가 걸쭉한 욕설을 내뱉자 욱하고 저질러 버린 행동에 순간 흠칫해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춘삼은 금방 다시 기세를 회복하여 말했다.

“아재들은 언제까지 노비처럼 살 거요? 우리도 이제 양인인데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지!”

“그, 그래도…….”

“됐고, 진사 어른, 이게 마지막 경고입니다. 밀린 세경을 내일까지 지급해 주지 않으면 그땐 내가 먼저 관아에 고발해 버릴 테니 그렇게 아시오!”

“뭐, 뭐야?”

최 진사는 얼얼한 엉덩이를 붙잡고 춘삼을 노려보았다.

“가십시다, 아재들!”

성큼성큼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춘삼은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짜증 난 표정으로 홱 돌아보았다.

“아, 뭐 해요?”

“아니, 그게…….”

그때까지도 제대로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던 사내들은, 심술보가 더덕더덕 붙은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는 최 진사와 매서운 눈길로 빨리 오라며 재촉하는 춘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둘이 먼저 주춤주춤, 최 진사한테서 등을 돌려 춘삼이 있는 곳으로 향하니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따라왔다.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다음 날.

점심때가 한참 지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도 최 진사 댁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춘삼은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임시 수용소에 있는 거처를 나섰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호기롭게 관아까지 오기는 했지만 막상 문 앞에 도착하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포졸 하나가 그를 보고 알은척을 했다.

“넌 춘삼이 아니냐?”

“용필이 아재.”

어릴 때부터 안면이 있던 사이였기에 춘삼은 반색을 했다.

“이야기 들으니까 어제 최 진사댁에 가서 한바탕했다며?”

“벌써 소문이 났어요?”

머쓱한 얼굴로 춘삼이 뒷머리를 긁적이자 포졸은 가볍게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그 난리를 피웠는데 소문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거야. 욱하는 성질 좀 죽이고 살아. 아무리 그래도 이 지역에서는 방귀 좀 뀐다는 양반인데 괜히 잘못 건드리면 너만 피 본다.”

“쳇.”

“그것보다 여긴 어쩐 일이야?”

“세경 때문에 왔어요.”

“왜, 아직도 못 받았어?”

대충 사정을 알고 있는 포졸의 물음에 춘삼은 분통을 터트렸다.

“어제도 세경을 받으러 간 건데 최 진사가 도통 줄 생각을 안 하잖아요.”

“거참, 돈도 많은 양반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하여튼 있는 놈이 더 독하다니까요.”

“그래서, 고발이라도 하려고?”

“그러려고 왔는데 아무래도 소용없는 짓이겠지요?”

최 진사한테 바락바락 대들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는지 약간 기가 죽은 춘삼이 한쪽 발로 괜히 바닥을 파며 말하자, 포졸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현감님에 한번 말씀을 드려 봐.”

“예?”

“너처럼 이번에 노비에서 해방된 이들을 차별 대우하거나 부당하게 일을 시키면 엄히 다스리라는 어명이 내려왔거든.”

“어명이라면 임금님이 직접 그런 지시를 하셨단 말씀이에요?”

“그래.”

노비라는 천형에서 벗어나게 해 준 임금님이 행여나 불이익을 당할까 봐 그런 지시까지 내렸다고 하자 춘삼은 크게 감격했다.

“마침 현감 어른께서 관아에 나오셨을 시간이니 어서 들어가 봐.”

“알았어요.”

용기를 얻은 춘삼은 관아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형방을 통해 최 진사를 고발하고 얼마 있지 않아 바로 현감 앞에 불려 갔다.

근엄한 분위기 속에 이방과 포졸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관아 마당에 들어간 춘삼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정면 마루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던 현감이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춘삼이라고 합니다.”

“최 진사를 고발하러 왔다고?”

“예. 벌써 세경을 받기로 약속한 날짜가 사흘이나 지났는데 몇 번이나 찾아가도 도통 줄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노비 출신들의 근로 계약은 현감이 직접 나서 작성했기에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질문을 했다.

“너만 못 받은 것이냐?”

“아닙니다. 저 말고도 함께 일하는 서른 명이 전부 세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으음.”

손에 들고 있는 지시봉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잠시 고심을 하던 현감은 이내 아래에 있는 형방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형방.”

“옛.”

“지금 당장 최 진사를 이리로 데려오고 세경을 못 받았다는 나머지 인원도 모두 불러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요.”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한 형방은 대기하고 있던 포졸들을 이끌고 바로 현청을 나섰다.

“최 진사, 이 사람이 내가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일을 치다니…… 쯧.”

현감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골치 아픈 사건을 일으킨 최 진사의 행동에 심히 짜증이 치솟았다.

얼마 있지 않아 현감이 지시한 대로 사람들이 하나 둘 붙들려 왔다.

춘삼과 같은 피해자인 노비 출신들은 논에서 일을 하다가 왔는지 입고 있는 옷 여기저기에 흙이 묻은 채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짓는 것과 달리 최 진사는 형방과 포졸들에게 마구 역정을 내며 관아로 들어섰다.

“현감, 이게 무슨 짓이오!”

“최 진사에 대한 고발이 접수되어서 부른 것이니 얌전히 그쪽에 서 있으시오.”

춘삼과 한쪽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노비 출신들을 째려본 최 진사는 오히려 더 사납게 따졌다.

“지금 저 하찮은 것들 때문에 나한테 이런 모욕을 주는 것이오!”

계속 최 진사가 안하무인처럼 행동하자 참다못한 현감은 들고 있던 지시봉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버럭 호통을 쳤다.

탁!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스럽게 하는 거요. 자꾸 그러면 포승줄에 묶어서 심문을 할 테니 조용히 하시오!”

“현감!”

“정말 험한 꼴을 봐야 말을 듣겠소이까.”

“끄으응.”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듯 현감이 정색을 하자 최 진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겨우 관아 안이 조용해지자 현감은 춘삼과 같은 노비 출신들을 보며 먼저 질문을 했다.

“최 진사가 지난달 세경을 주지 않았다는데 사실이냐?”

“그게…….”

옆에서 무섭게 노려보는 최 진사의 눈치를 보느라 노비 출신들이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을 못 하자 형방이 재촉을 했다.

“현감 어른께서 물으시는데 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뭘 하는 게야!”

“예? 옛. 맞습니다.”

“서른 명이 모두 한 푼도 못 받은 게냐?”

“그렇습니다.”

한번 말문이 트이자 그다음부터는 묻는 대로 술술 대답을 했다. 시선을 돌린 현감은 뭐가 그리도 당당한지 뒷짐을 진 채 턱을 치켜 올리며 서 있는 최 진사를 보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시오?”

“고작 세경이 며칠 늦었다고 날 이렇게 핍박하는 거요.”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최 진사의 말에 현감은 눈가를 찡그리고는 화가 난 듯 언성을 약간 높였다.

“지난번에 계약서를 쓸 때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엄히 처벌한다고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소!”

“흥! 그까짓 세경 얼마나 된다고. 알았소. 지금이라도 주면 되지 않소.”

“그럴 거면 애초에 이런 문제를 만들지 않았으면 될 것을…….”

현감이 질책하듯 하는 말에 최 진사는 귀찮다는 얼굴로 한쪽 팔을 내저었다.

“어찌 됐건 세경을 주면 되는 것 아니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이다.”

뒤로 몸을 돌려 관아를 나가려는 최 진사를 현감의 묵직한 목소리가 잡았다.

“거기 서시오.”

“뭐가 더 남았소?”

“세경은 당연히 줘야 되는 것이고 지엄한 주상 전하의 어명을 어긴 벌을 받아야 되지 않겠소.”

“이보시오, 현감!”

“뭣들 하느냐! 죄인을 당장 옥에 가둬라.”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포졸들이 양쪽에서 다가와 팔을 붙잡자 그때에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최 진사는 다급한 얼굴로 현감을 쳐다봤다.

“조금 실수를 한 것 가지고 이거 너무하는 것 아니오!”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미 본관이 누차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이런 일이 생겼다는 건 어명을 우습게 봤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바, 한양에 있는 의금부로 넘겨 중벌을 받게 될 것이다.”

대역죄를 다루는 의금부의 이름이 거론되자 최 진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 내가 잘못했소.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봐주시오.”

“이미 늦었다. 어서 죄인을 끌고 가라!”

“갑시다.”

“이거 놔라. 현감, 살려 주시오.”

방금 전까지 목을 뻣뻣하게 세우던 기세는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최 진사는 포졸들에게 붙잡힌 채 사정을 했다.

하지만 현감은 또다시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일벌백계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혀, 현감!”

최 진사가 옥사로 끌려가자 현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춘삼과 노비 출신들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최 진사의 재산을 압류해서 며칠 안에 밀린 세경을 모두 다 받게 해 줄 테니까 이만 가도록 하라.”

“……예. 옛.”

“저, 현감 어른.”

“뭐냐?”

노비 출신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사내가 쭈뼛거리면서 나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진사 어른 댁 일은 못 하는 겁니까요?”

세경을 받는 건 좋지만 당장 일이 끊겨 먹고살 길이 막막해질까 봐 걱정하는 거였다.

그런 마음을 헤아린 현감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근로 계약에 따라 올 한 해 동안은 그대들이 최 진사 땅을 경작해 주고 세경을 받기로 되어 있고, 이게 싫으면 주상 전하의 지시에 따라 관에서 다른 일거리를 찾아 줄 것이니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게야.”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다 주상 전하의 은혜이니 절대 잊지 말도록 하게.”

그때에야 사람들은 마음 놓고 기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흑흑.”

“자. 그럼 돌아들 가 보게.”

“예.”

며칠 뒤 춘삼과 사람들은 밀린 세경을 모두 지급받았고, 최 진사는 한양에 있는 의금부로 압송돼 어명을 어긴 죄목으로 크게 치도곤을 당하고는 가진 재산 절반을 내놓고 난 다음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사대부들이 노예해방령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이와 유사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는데, 최 진사처럼 국법대로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지방관은 노비 출신들의 고발을 무시해 버리거나 양반 편을 들어 주기도 했다.

이런 지방관들은 주작단과 연계한 감사원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열이면 열 모두 붙잡혀 벼슬이 떨어지고 귀향까지 갔다.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거나 가지고 있는 권력을 남용하던 지방관과 관리 수십 명이 걸려 목이 달아나면서 비로소 감사원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깨닫게 됐다.

이렇게 되자 사대부들은 모이기만 하면 국왕인 도현에 대한 원망을 쏟아 냈다.

“정말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이러는 건지.”

황죽표가 한탄을 하며 말하자 술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던 최석호가 맞장구를 치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윗마을 최 진사 이야기를 들으셨지요?”

“노비 놈들 세경을 조금 늦게 줬다가 의금부에 잡혀 갔다는 거 말인가.”

“예. 다행히 풀려나기는 했지만 가지고 있던 전답 절반을 나라에 빼앗겼다고 합니다.”

“허어.”

“조선이 언제부터 노비들의 나라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말조심하게. 그러다가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저희 둘뿐인데 뭘 그러십니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네.”

정색을 하며 황죽표가 이야기를 하자 최석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한양에서는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나?”

“매일 상소를 올리고 있지만 주상이 꿈쩍도 안 하는 모양입니다.”

“으음.”

낮게 침음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린 황죽표는 잠시 말없이 술잔만 비우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주상께서 정도를 버리시고 사대부들을 홀대하신다면 우리도 도리를 지킬 이유가 없지 않겠나.”

“설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최석호의 시선을 받으면서 황죽표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주상 전하를 보위에서 내려오시게 해야지.”

너무나도 엄청난 이야기에 목이 탄 최석호는 앞에 있던 술잔을 들어 단번에 죽 들이켜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서 두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지만 모두 힘없이 진압됐고 지금은 그때보다 왕권이 더 강한데, 가능하겠습니까?”

“심기원 일파 때처럼 군을 일으켜 거사를 도모한다면 필패를 하겠지.”

“허면…….”

황죽표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최석호를 봤다.

“주상만 없애면 되는 것 아닌가.”

“……!”

여름이 되자 노비해방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판단한 도현은 자립을 위해 조세 징수를 이 년간 유예시켜 주는 대신, 원래 목적대로 열여덟 살 이상 심신이 건강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징집을 실시했다.

징집령이 떨어지자 원래 계획보다 많은 인원이 스스로 지원을 했다.

꼬박꼬박 봉급도 주고 공을 세우면 높은 관직에도 오를 수 있었기에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고, 무엇보다 노비의 굴레를 벗어나게 해 준 도현에게 보답한다는 마음이 지원자가 폭증하는 데 단단히 일조를 했다.

“그럼 이제 계획대로 군단들을 모두 편성할 수 있는 건가?”

도현의 물음에 임경업이 만면에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리고 새로 근위대 한 개 보병연대를 더 창설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경기도를 지키는 삼 군단 소속 한 개 연대가 심양에 있는 근위대 본대를 대신해 한양을 방어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친위부대가 머무는 것보다 허전한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었는데, 새롭게 근위대 병력을 편성해 주둔시킨다고 하니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근위대 병력부터 빨리 보강했어야 됐는데 죄송하옵니다.”

“아닐세. 북방 상황이 급해서 어쩔 수 없지 않았나. 그래도 늦게나마 도성 방어를 튼튼히 할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야. 허면 기존에 있던 삼 군단 병력은 원래 있던 곳으로 복귀를 하는 건가?”

“아니옵니다. 새 부대가 편성된다고 해도 여전히 원래 있던 전력보다 약하기 때문에 근위대 본대가 돌아올 때까지는 계속 머물도록 할 계획입니다.”

“병판이 알아서 하도록 하게.”

“네.”

“군의 규모가 커지면 필연적으로 소모하는 물자도 많아질 텐데, 거기에 대한 대책은 세우고 있나?”

그러자 임경업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안 그래도 군에서 필요한 화약을 원활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염초 밭을 더 늘릴 것을 건의드리려고 했습니다.”

군단 수가 늘어나는 만큼 이제 조선군의 핵심 병기가 되어 버린 화약 수요가 커질 수밖에 없었기에 염초 밭 확장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조선군의 체질을 바꾼 사람이 바로 도현 본인인 만큼 여기에 공감을 했다.

“그래야지. 어디에 얼마만큼 조성을 하면 좋겠나?”

“수군을 위한 제삼 병기창이 세워질 부산포가 어떻겠사옵니까?”

신형 판옥선과 치우함을 건조하면서 화포를 대량 운용하게 된 수군을 위해 도현은 부산포에다가 군선에 탑재할 각종 함포와 화약 무기를 제조하는 제삼 병기창을 따로 세우기로 하고 현재 공사 중이었다.

원재료를 만드는 염초 밭이 병기창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 아무래도 편리했기에 잠시 생각을 해 본 도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군.”

“규모는 심양성에 조성한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공조와 협조해서 일을 추진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군대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만큼 병력을 지휘하고 통솔할 군관도 많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추천이나 무과 시험을 통해 뽑았지만 화약 무기의 사용으로 전투 방식 자체가 바뀐 데다 보다 전문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용산에 사관학교를 만들어 운영했는데, 올해 일 기 졸업생을 배출해 일선 부대에 배치됐다. 원래는 삼 년에서 사 년제를 목표로 했지만 당장 군관 부족이 너무 심했기에 일 년 동안 속성으로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우려 섞인 시선이 많았지만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종사관 벼슬을 받은 졸업생들은 때마침 한창 진행 중이던 청과의 전쟁에 투입되어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거기에 고무된 도현은 이 기 입교생 숫자를 백오십 명으로 대폭 늘렸고, 그들은 지금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구르고 있었다.

“동작 봐라! 그래 가지고 어떻게 계급장을 달고 나가서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겠나?”

“시정하겠습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 저기 연병장 끝에 보이는 소나무를 찍고 돌아오는데 선착순 열 명. 몇 명?”

“열 명!”

“좋아. 뛰어!”

다다닥.

교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색 훈련복을 입은 생도들은 이를 악물고 연무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처음에는 아직 민간인 물이 빠지지 않아서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말을 안 들었지만 한 며칠 교관들이 죽어라 갈구자 이제는 순한 양처럼 시키는 대로 잘 움직였다.

“하나! 둘! 셋! 넷…… 열!”

“여기까지. 뒤에 온 놈들은 다시 선착순 열 명이다. 이번에도 늦으면 오리걸음으로 뛰게 만들 테니까 알아서 해!”

“헉헉!”

오리걸음이라는 말에 생도들은 기겁을 하며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짜내 전력질주를 했다.

그렇게 선착순을 무려 다섯 번이나 더 하고 난 다음에야 교관은 얼차려를 멈추고는 휴식 시간을 줬다.

“아이고, 죽겠네.”

거친 숨을 내뱉으며 생도 하나가 연병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옆에 있던 동료가 손으로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어서 자세 바로 해.”

항상 규율과 절제를 강조하는 사관학교였기에 쉬는 시간에도 각을 잡아야 했다.

“젠장. 쉬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해.”

투덜거리면서도 생도는 행여나 교관이 볼까 봐 눈치를 보면서 얼른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도 우린 나은 편이야. 이제 몇 달만 참고 견디면 졸업이지만 다음 기수부터는 교육 기간이 삼 년으로 늘어난다잖아.”

“나도 들었어. 일 년도 힘든데 삼 년을 어떻게 견디지?”

“그러게 말이야.”

“수군도 분리돼서 가덕도에 별로의 사관학교가 만들어진다면서?”

옆에 있던 다른 생도 하나가 끼어들며 묻자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사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더라고. 이제 완전히 육군과 수군을 분리해서 군관을 양성하고, 보직을 왔다 갔다 할 수 없게 한다던데…….”

“진즉에 그렇게 했어야지. 솔직히 예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양쪽의 전투 방식이 완전히 다른데, 지휘관과 군관을 구분 없이 배치한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맞아.”

단순히 군사훈련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교 경전을 제외하고 여러 가지 기본 지식과 교양을 가르쳤기에 사관학교 생도들은 조정의 정책을 토론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보일 수 있는 식견을 가지게 됐다.

유교 경전만 공부하거나 무예를 익혀 과거 시험에 도전하는 예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식수준과 사물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

당연히 이들은 현재 조정 관료들이 가지고 있는 사대의식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조선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국왕을 향한 충성심으로 가득했다.

굳이 무리를 해서 사관학교를 만들고 운영하는 도현의 숨겨진 의도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친위 세력과 기존 사대부들을 대체할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양성이었다.

“휴식 끝! 제식 훈련을 실시한다. 모두 집합.”

“집합!”

생도들은 다시 얼차려를 받기 전에 각자 자신의 신형 조총을 하나씩 챙겨 들고는 얼른 교관이 서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사관학교 졸업생만으로 당장 필요한 군관을 다 채울 수 없었고, 몇 번의 전쟁을 거치며 일반 군사 중에서 공을 세워 하급 군관으로 진급한 자들이 많았기에 도현은 임경업과 상의를 한 끝에, 이들을 교육시켜서 군관으로서 기본적인 소양과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훈련소를 따로 하나 만들었다.

이름은 충무학원이라 짓고 국경과 가까운 의주성에 세웠다.

사관학교가 제대로 역할을 할 때까지 운영할 단기 속성 교육 과정이라 훈련 기간은 육 개월로 아주 짧았다.

그렇다고 절대 교육 과정이 허술하거나 대충 진행되지 않았는데, 오히려 기간이 짧은 대신 사관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을 압축해서 더 혹독하게 가르쳤다.

관노 출신에서 참군 벼슬까지 받은 돌쇠도 청군이 잠잠한 틈을 이용해 여기에 입교해 교육을 받아야 했다.

타앙!

푸드드득.

깊은 산중에 울려 퍼지는 총성에 나뭇가지 위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또다시 총성이 울리며 바위에 올려놓은 호박이 총탄에 맞아 산산조각 나며 터졌다.

탕!

퍼석.

사냥꾼 복장을 한 털보 사내가 조총을 내려놓자 한쪽에 서서 지켜보던 황죽표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백발백중이로군.”

“강원도에서도 조총을 제일 잘 쏘기로 이름이 난 포수입니다.”

옆에 있던 최석호의 말에 황죽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수 쪽으로 걸어갔다.

“자네, 이름이 뭔가?”

“박완용입니다.”

“포수라면 주로 뭘 잡았나?”

“호랑이 사냥을 했습니다.”

“오! 그렇구먼. 산중 제왕이라는 호랑이를 잡으러 다녔다면 배포가 크겠어.”

“…….”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박완용의 모습에 황죽표는 과묵한 것도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 준 조총 성능은 어떤가?”

그러고 보니 박완용의 손에 들려 있는 건 포수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구형 조총이 아니라 병기창에서 개발해 낸 신형 조총이었다.

어떻게 유출된 건지 몰라도 최신 병기가 군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는 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주 좋습니다. 연사력도 우수하고 사정거리도 길어 족히 이백 보 밖에 있는 목표도 너끈히 맞출 수 있습니다.”

“이백 보라…… 알겠으니 자네는 그만 물러가서 쉬게.”

“예.”

머리를 숙인 박완용이 자리를 비켜 주자 황죽표는 이내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력은 괜찮은 것 같은데,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자인가?”

“노름빚을 대신 갚아 주는 조건으로 이번 일을 하기로 했는데, 가족들을 저희가 데리고 있어서 절대 배신하지 못할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황죽표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노름쟁이란 말인가?”

“재수 없이 사기를 치는 투전꾼들한테 걸려든 모양입니다.”

“그런 자를 믿을 수 있겠어?”

“그래도 조총을 쏘는 실력만큼은 최고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을 잘 해내면 금자 백 냥을 주기로 했으니 쉽게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신상 내력을 알게 되자 별로 탐탁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저만한 실력자를 다시 구하기 어려웠기에 황죽표는 짧게 혀를 찼다.

“쯧. 어쩔 수 없지. 대신 언제 엉뚱한 생각을 할지 모르니 감시를 잘해야 될 걸세.”

“염려 마십시오.”

둘뿐인데도 불구하고 행여 누가 엿들을까 봐 주위를 둘러본 최석호는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거사를 벌이려면 주상이 대궐 밖으로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조만간 기회가 있을 테니 기다리게.”

“예.”

“그 전에 일이 벌어지면 바로 상황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한양에 계신 예조참판께는 미리 우리의 거사를 귀띔해 줘야 될게야.”

“제가 수일 안으로 한양에 올라가 직접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하게.”

고개를 끄덕인 황죽표는 뒷짐을 진 채 표적으로 쓰인 호박이 완전히 박살 나 흙바닥에 흩어져 있는 걸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편 한양에 있던 도현은 남한산성에서 전해진 낭보에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증기기관을 완성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방금 전 박호 병기장이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려 왔사옵니다.”

“정말 만들어 내다니…….”

곳곳에 공장을 세우고 제철소까지 만들었지만 모든 일을 인력으로 하다 보니까 너무 불편하고 효율도 떨어졌다.

뭔가 해결책이 없을까 고민하던 도현은 증기기관을 떠올리고는 병기창에 소속된 장인들을 불러 기초적인 원리를 설명해 주고 한번 만들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청과의 전쟁을 치르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 깜빡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증기기관을 완성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일을 시키면서도 이렇게 금방 만들어 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직접 봐야겠다.”

도현의 말에 공조판서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거동하실 채비를 갖추라 하겠사옵니다.”

얼마 뒤 도현은 호위를 비롯해 서른 명 안팎의 적은 수행원만을 데리고 대궐을 나와 병기창이 위치한 남한산성으로 행차했는데, 빨리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가마가 아닌 직접 말을 타고 달려갔다.

남한산성 내에 있는 제일 병기창은 갈수록 규모가 점점 더 커져서 이제 자체적인 용광로 두 개와 크고 작은 건물만 마흔 개가 넘고 소속된 장인도 천 명이 넘었다.

제일 병기창은 신형 조총과 화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무기도 생산해 냈지만, 이번처럼 신기술 연구와 무기 개량이 이루어지는 과히 조선군의 핵심 시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근위대 소속 한 개 보병 대대가 주둔하며 철통같은 경계를 펼쳐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도현과 수행원들이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박호 병기장이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맞이했다.

“어서 오시옵소서, 전하.”

“큰일을 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네.”

“내일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그러셨습니까.”

보고를 받았던 때가 늦은 오후였기에 남한산성에 도착하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 초저녁이 되어 있었다.

“마음이 급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네. 그것보다 만든 물건은 어디에 있나?”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리로 가시지요.”

“알겠네.”

말에서 내린 도현은 수행원들과 함께 앞서가는 박호를 따라 병기창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드르륵.

깡깡깡!

쇠를 두드리고 연마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건물들 사이를 지나 한참 들어간 박호는 멀리서부터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한 건물로 일행을 안내했다.

건물 안은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기둥만 여러 개 세워져 있고 벽이 하나도 없이 다 트여 있는 구조였는데, 한가운데 커다란 철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푹식푹식!

연신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는 보일러와 규칙적으로 상하 운동을 하는 피스톤의 모습은 더 볼 것도 없이 완벽한 증기기관이었다.

그것도 피스톤이 움직이는 실린더가 하나뿐인 초기형이 아니라, 두 개를 사용해 증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끊이지 않고 계속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증기가 흘러가는 통이 두 개군.”

“예. 이렇게 하면 증기가 사라지지 않고 기관에 지속적으로 힘을 가해 줄 수 있어서 구조를 살짝 바꿔 봤습니다.”

서양에서도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방법을 단번에 발견해 내고는 바로 적용한 조선 장인들의 뛰어난 통찰력과 추진력에 도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훌륭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옵니다.”

칙칙 하는 소리를 내면서 느리지만 힘차게 움직이는 증기기관을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 도현은 연신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증기기관을 만들어 내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았네.”

“전하께서 기초가 되는 이론을 말씀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됐사옵니다.”

“아니오. 경을 비롯한 병기창 장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완성해 내는 건 불가능했을 거요.”

“과찬이시옵니다.”

“공판.”

“예, 전하.”

공조판서가 부름을 받고 앞으로 나오자 도현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큰 공을 세워 나라를 이롭게 한 병기장 박호에게 금화 백 개와 비단 열 필을 내리고 휘하에 있는 장인들도 각각 금화 오십 개를 하사해 노고를 치하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냥 말로만 수고했다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질적인 포상을 해 주자, 박호를 비롯한 장인들은 기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뒤에 있던 칠현은 포상 이야기를 듣고 기겁할 호조참판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얼핏 봐도 포상을 줘야 되는 장인 숫자가 스물은 넘어가니 금화가 천 냥 넘게 나가게 생겼는데 쌀로 따지면 수천 섬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격려의 말을 계속했다.

“이번처럼 공을 세우면 그에 상응하는 포상을 내리니 그대들은 더욱 정진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만들어 내도록 하라.”

“예, 전하.”

이번 일뿐만 아니라 도현은 공을 세우면 넘치도록 많은 포상을 내려 줬는데, 이건 아랫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맡은 일을 하는 데 상당한 동기 부여가 됐다.

물론 반대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에 따른 엄한 벌을 내려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

병기창 장인들이 만들어 낸 증기기관을 어디에 먼저 쓸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예조에서 뜻밖의 소식을 가져왔다.

“전하, 왜국에서 사신이 왔사옵니다.”

“음?”

도현은 의아한 얼굴로 예조판서 박노를 쳐다보았다.

“왜국에서 갑자기 무슨 일로 왔다 하던가?”

잦은 노략질로 해안 지방을 들쑤시던 왜구를 일망타진하고 대마도를 복속시킨 이후, 왜와는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동안 이렇다 할 사건도 없어, 왜국 사신의 방문은 참으로 뜬금없는 일이었다.

“자세한 건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찬찬히 살펴보니 전과는 달리 얌전하고 공손한 태도라 아마 뭔가를 부탁하러 온 것 같습니다.”

“예조판서는 짐작 가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

눈치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도현이 대뜸 그렇게 말하자 박노가 작게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아마 교역 건 때문에 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왜? 교역은 아무 일 없이 진행되고 있을 터인데.”

왜국과는 이래저래 얽힌 사연이 많지만 그래도 조선과 가장 가까이 있는 나라 중 하나였기에, 중요한 교역 상대국인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일 년에 한번 통신사를 파견하고 봉황 상단을 비롯한 상단들의 왕래가 잦았는데,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분명 도현에게 보고가 올라왔을 터.

“딱히 왜국과 하는 무역에 차질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곤란한 건 저희가 아니라 왜국 쪽이겠지요.”

“그게 무슨 뜻인가?”

“저희는 평상시대로 소금과 인삼 등을 수출하지만, 왜국에서는 딱히 내다 팔 게 없지 않사옵니까.”

하기야 생각해 보면 그랬다.

해산물은 남해나 동해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귀한 약재나 서적은 청과 명의 것이 더 좋으니, 굳이 왜국에서 수입을 해야 할 정도로 욕심을 낼 만한 게 없는 것이다.

그나마 화약 제조에 필요한 유황이 제일 가치가 있었지만 막부에서 전략물자로 타국에 내다 파는 것을 금지했고, 조선에서도 몇 년 전부터 유황 광산을 개발해 자체적으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기에 그건 예외로 치는 것이 옳으리라.

그래서 현재는 별다른 수입 없이 조선에서 일방적으로 물건을 내다 팔며 막대한 은을 챙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하, 그렇게 된 일이로군.”

“과연 영명하십니다.”

도현이 손가락을 딱 치고 알았다는 표정을 짓자 박노가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사신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좀 그러니 슬슬 일어나 볼까.”

뒷짐을 지고 일어선 도현이 대전으로 향하자 박노도 그 뒤를 따랐다.

“지금 바로 들라 할까요?”

“그리하게.”

왕좌에 앉은 도현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함과 동시에 묵직한 문이 열리고 왜국 사신이 걸어 들어왔다.

좌우로 신료들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길쭉한 대전 중앙에 서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왜국 사신의 얼굴을 본 도현은 호오, 하고 알은체를 했다.

“자네는 낯이 익군. 일전에도 사신으로 오지 않았었나?”

“예. 알아봐 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미무라 아키오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거듭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대마도 정벌로 뜨거운 맛을 봐서인지 아니면 아쉬운 소리를 하러 와서 그런지 몰라도, 전과는 상당히 태도가 바뀐 느낌이라 예조판서 박노가 쓴웃음을 지었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이것은 쇼군께서 바치는 공물이옵니다.”

미무라의 말에 함께 들어온 수행원들이 튼튼하게 봉인된 묵직한 궤짝을 하나 가져와 앞에 내려놨다.

그가 직접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 주는데, 안에는 어린애 팔뚝만 한 은괴가 가득 쌓여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작은 상자에는 왜국 특유의 세밀한 장식이 돋보이는 장신구와 진주 세공품들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모처럼 마련해 준 것이니 쇼군의 성의는 감사히 받겠네.”

공짜로 주는 거라면 사양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생각에 도현이 덥석 받아들이자 미우라가 덧붙여 말했다.

“아직 더 있사옵니다.”

“호오?”

또 뭘 주려고, 하는 얼굴로 도현이 반문하자 미우라가 박노를 힐끗 쳐다보았다.

“……?”

“저, 그것이…….”

박노가 웬일로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게다가 맞은편에 있는 칠현도 왠지 모르게 어색한 웃음을 매달고 있어,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왜 그러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박노는 칠현과 잠시 시선을 마주치더니 이내 어깨를 한번 들썩하고는 왜국 사신이 준비한 공물을 들이라 일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지 곧 문이 열리고 미우라가 준비했다는 공물이 도현의 눈앞에 드러나자 뭐라 말할 수 없는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저게 뭔가?”

“왜국 사신이 진상한 공물이옵니다.”

“진짜? 농담 아니고?”

“예에.”

대답하는 칠현의 얼굴에도 안타깝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착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우라는 도현에게 공물을 내보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왜국에서도 보기 힘든 토종 원숭이이옵니다. 쇼군께서 암수 한 쌍을 정원에 풀어 놓고 기르고 계시온데, 이번에 새끼를 낳았기에 조선 국왕께 특별히 드리는 것입니다.”

“그거 참 고맙군그래.”

으드득.

“저,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이마에 힘줄이 불끈 돋아난 것을 본 칠현이 서둘러 귓속말을 속닥였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준 선물인데 필요 없다고 집어 던지면 안 되겠지?”

“그랬다가는 전쟁을 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만.”

“먼저 시비를 건 건 저쪽이잖아.”

“호의의 표시로 주는 거라 하잖습니까. 게다가 왜국에서는 무척 귀한 짐승이라 하니…….”

열심히 도현의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는 칠현 역시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물건도 아니고 산 짐승을 데려온 것만 해도 곤혹스러운데, 모양새가 예쁘거나 귀여우면 또 몰라도, 동물 주제에 사람처럼 두 발로 서기도 하고 끼익 울음소리를 내면서 얌전히 앉아 있지를 못하니, 정이 가기는커녕 오히려 흉물스러운 느낌이라 앞으로 이걸 떠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야말로 애물단지가 따로 없었다.

신료들도 난생처음 보는 동물에 신기해하면서도 어쩐지 거북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끄응. 그래 참자, 참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화를 꾸역꾸역 눌러 참은 도현은 미우라를 향해 물었다.

“공물이야 어쨌건, 일단 사신은 먼 길을 찾아온 용건을 말하도록 하라.”

미우라는 자세를 바로 하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아국과 조선 간에 이뤄지는 교역 불균형을 바로잡고자 찾아왔사옵니다.”

예상했던 말을 하자 도현은 왕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약간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

“너무 한쪽으로만 은자가 쏠리니 문제지 않습니까. 은자로 매달 수천 냥 어치의 물품이 조선에서 들어오는 데 반대로 수입해 가는 건 일 할도 채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난 또 뭐라고 그거야 상단들이 알아서 할 일인데, 짐한테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쉽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막부 내에서 조선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도현은 한쪽 손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탕!

“지금 짐을 협박하는 건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거친 반응에 따지듯 이야기를 하던 미우라는 찔끔한 표정을 지었고 단번에 대화의 주도권을 쥔 도현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릇 단 한 푼의 이익이라도 그걸 좇는 것이 상인일진데, 왜국의 물건이 가치가 있다면 왜 그걸 가지고 와서 팔지 않겠나. 그런데도 그냥 빈 배로 온다는 건 조선에 필요가 없는 것이란 뜻인데, 그러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낼 생각은 하지 않고, 떼를 쓰려고 하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사실 매달 막대한 은자가 조선으로 유출되는 걸 그냥 두고 보기 어려운 막부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 줄 만큼 도현의 마음이 너그럽지 않았다.

“하오나!”

“그렇게 걸리면 막부에서 수입해 가는 물량을 줄이면 되지 않나?”

“끄으응.”

도현의 말에 미우라는 얼굴을 살짝 구기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막부에서도 수입 물량 축소를 생각했지만 기존 소금보다 훨씬 값이 싼 조선산 소금은 물론이고 인삼이나 담배, 도자기는 왜국 상류층의 필수품으로 자리를 잡아, 수입을 막으면 큰 혼란과 반발이 예상돼 그럴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손해를 보는 걸 알면서도 수입을 중단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교역 불균형을 그냥 방치할 수도 없었기에 막부에서는 오랜 고민 끝에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양국 간의 우호 관계가 이런 일로 금이 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쇼군께서 조선이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을 판매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뭔가?”

“유황이옵니다.”

“……!”

뜻밖의 말에 신료들이 크게 술렁였고 건성으로 묻던 도현도 몸을 살짝 앞으로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지금 유황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짐이 알고 있기로 유황은 왜국 막부에서 타국에 넘기는 걸 엄격히 금하고 있다던데, 그걸 팔겠다고?”

“원래는 그렇지만 조선은 막부와 각별한 사이이니 쇼군께서 특별히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교역 불균형을 개선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다가 생각해 낸 고육지책이라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뻔뻔하게 이야기를 하는 미우라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조선 입장에서도 나쁜 제안이 아니었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은자 유출이 심각하다고 해도 조선이 자체적으로 유황 광산을 개발해 필요한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지 않았다면, 막부도 절대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만 봐도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립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잠시 생각을 해 본 도현은 앞에 있는 미우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막부의 제안은 알겠네. 신료들과 상의를 한 뒤에 결과를 통보해 줄 테니 사신은 영빈관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라.”

“모쪼록 좋은 소식을 알려 주시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예를 갖춘 미우라는 수행원들과 함께 대전에서 물러났다.

도현은 좌우에 늘어서 있는 신료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그러자 호조판서 김육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이야기를 했다.

“이미 유황광산을 개발해 필요한 물량을 모두 충당하고 있는데, 굳이 돈을 들여 왜국에서 사 올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맞사옵니다.”

김육을 비롯해 몇몇 신료들이 반대 의견을 내놓는 가운데, 왼편에 있던 우의정 송시열이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아국에서 유황이 충분히 생산되는 이상 불필요한 지출이 되겠지만, 신은 왜국 막부의 제안을 한번 고려해 봐야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왜 그렇지?”

“우선 청과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배후에 위치한 왜국과 관계를 악화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옵니다. 이대로 교역 불균형이 계속된다면 왜국 내에 저희를 시기하고 안 좋게 보는 이들이 늘어나지 않겠사옵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약간의 성의를 보여 불만을 무마시키는 것이 여러 가지로 이득일 것입니다.”

차분한 설명에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고 했지. 병판은 어찌 생각하나?”

“저도 우상 대감의 말에 찬성입니다. 유황은 전략물자로 분류될 만큼 귀한 것이니 미리미리 비축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다시 시선을 돌린 도현은 호조판서 김육을 보며 물었다.

“유황을 구매한다면 재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겠나?”

이미 마음이 거의 기울어진 것 같은 모습에 김육은 내심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송시열의 이야기대로 당장 눈앞의 수익에 연연하다가 왜국이 완전히 돌아서게 되면 큰일이었기에,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본 뒤 대답했다.

“왜은으로 이천 냥 정도면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되옵니다.”

“매달 말인가?”

“예.”

“이천 냥이면 얼마나 되지?”

마침 대전회의에 참석해 있던 장 총관이 김육을 대신해 말했다.

“화산 지대라 유황이 흔하고 막부의 허락하에 정식으로 사들이는 것이니 오륙백 관은 가져올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정도면 거의 이 톤에 달하는 양이었는데, 현재 경주 만호봉 광산에서 채굴하고 있는 물량과 엇비슷했다.

“그럼 일단 한시적으로 일 년 동안 매달 왜은 이천 냥 어치를 구매하고, 상황을 봐서 기간을 연장하는 걸로 하지.”

상대편의 요구를 단번에 다 들어주지 않고 협상 주도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패를 쥐고 있겠다는 속셈이었다.

정치판에서 오래 굴러먹은 사람들답게 송시열을 비롯한 신료들은 대번에 도현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훌륭하신 생각이시옵니다.”

“그럼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예판이 내일쯤 왜국 사신에서 통보를 해 주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다른 할 말이 없으면 오늘 대전 회의는 이걸로 마치겠소.”

그때 한쪽에 있던 예조참판이 황급히 끼어들며 말했다.

“저, 전하.”

“왜 그러는가?”

“그게…….”

일어서서 대전을 나가려는 사람을 붙잡아 놓고 얼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도현은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빨리 하게.”

“저건 어떻게 해야 될지…….”

예조참판이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으응.”

거기에는 사신이 가져온 일본 원숭이 두 마리가 목줄에 묶인 채 서로 사이도 좋게(?) 마주 보고 앉아 이를 잡아 주다가 사람들의 시선에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끽끽! 끽!

“흠흠.”

“커흠.”

“거참…….”

그걸 본 신료들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난감한 얼굴을 했고 갑자기 골치가 아파진 도현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버려.”

“그래도 막부에서 보낸 선물이온데…….”

곤란하다는 듯 예조참판이 말끝을 흐리자 도현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칠현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전하, 그러지 마시고 적당한 장소에 우리를 하나 크게 만들어서 백성들이 진기한 동물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 그렇게 하도록 해.”

“예.”

도현의 지시대로 예조에서는 청계천 근처에 커다랗게 우리를 짓고는 원숭이 한 쌍을 넣어 전시했는데, 난생처음 보는 진기한 동물이 있다는 소문에 구경하러 오는 백성들이 줄을 이었고, 훗날 조선 최초의 동물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음 날 예조판서 박노를 통해 도현의 결정을 전해 들은 왜국 사신은 아주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했다.

돌아가는 왜국 사신에게 답례로 인삼과 도자기 등 여러 가지 귀한 물건을 줬는데, 최근 시중에 판매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연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황 거래는 봉황상단이 맡아 바로 그 달부터 이루어졌지만, 왜국의 기대와 달리 조선으로 유출되는 은이 줄어들기는커녕 도현이 답례로 준 연필이 상류층에서 유행하면서 오히려 쏠림이 더 커졌다.

하지만 이미 이것 때문에 조선이 매달 일정 물량의 유황을 사 주기로 합의했기에 막부는 추가로 제재나 항의를 못 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아야 했다.

한편 도현은 공조 관리와 병기창 장인 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한 끝에 새로 개발한 증기기관을 신형 조총과 화포를 생산하는 공장에 먼저 설치해서 시범 운영을 해 보기로 결정했다.

“흐음. 그러니까 증기기관에 쇠망치를 연결해서 규칙적으로 쇠를 두들기게 한다는 거군.”

설계도면을 보고 도현이 단번에 원리와 용도를 파악하자 병기장 박호는 역시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쇠의 강도와 형태를 잡아 주는 중요한 과정이면서도 힘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데, 계획대로 된다면 작업 능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불량률 또한 줄어들 것이옵니다.”

“괜찮은 것 같군.”

“그럼 이대로 실행해도 되겠사옵니까?”

“그러게.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공정에도 증기기관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보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박호의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나란히 앉아 있는 공조판서에게 시선을 줬다.

“공판.”

“예, 전하.”

“증기기관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연료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어찌 되고 있소?”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경상도 문경 일대에 이의립을 내려 보내 석탄 광맥을 찾고 있사오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올 것이옵니다.”

“석탄은 철과 함께 앞으로 우리 조선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니 광산 확보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도현의 말이 끝나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호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거리가 조금 멀기는 하지만 초흐타 부족의 영역에 이미 개발한 노천 석탄 광산이 있는데 그냥 그걸 가져다 쓰면 되지 않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겉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거기서 나오는 석탄은 제철소에서 철을 뽑는 데 적합하지 연료로 쓰는 건 맞지 않아. 반면 문경에 묻혀 있는 건 용광로에 집어넣을 수는 없어도 연료로 쓰기에는 딱 좋지.”

아직 석탄의 종류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박호는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증기기관을 돌리는 연료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도현은 장차 일반 백성들의 난방도 땔감 대신 석탄을 이용하도록 해서, 고질적인 산림 훼손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비교적 한양에서 가깝고 매장량도 풍부한 문경 광산의 개발이 더 중요했다.

이렇게 도현이 조선을 개혁하고 국력을 키우는 데 여념이 없을 때 물밑에서 그를 시해하려는 불온한 움직임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익치는 방 안에 들어와 앉는 황죽표와 최석호를 보며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찌 됐소?”

“무사히 한양에 들어와 모처에서 쉬고 있습니다.”

“후우. 다행이구려.”

“우상 대감한테는 말씀을 드렸습니까?”

황죽표의 물음에 이익치가 고개를 내저었다.

“슬쩍 운을 띄웠다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꾸지람만 들었소이다.”

“우상 대감처럼 명망 높으신 분이 앞장서 주셔야 일이 수월한데 이러면 낭패지 않습니까?”

최석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이익치가 안심하라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다른 많은 사대부와 신료 들이 이 일을 지지하고 있고 막상 거사가 벌어지면 우상도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을 거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말끝을 흐리며 최석호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자 옆에 있던 황죽표가 슬쩍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꿨다.

“인평대군 쪽하고는 이야기가 다 됐겠지요.”

“물론이오. 우리와 뜻을 함께하기로 하셨소.”

인평대군은 선왕인 인조의 셋째 아들로, 장남인 소현세자가 독살당해 죽었기에, 도현의 하나뿐인 동복동생이자 형제였다.

“그러면 문제는 병판을 포함한 주상의 측근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건데.”

“걱정 마시오. 주상이 살아 계실 때나 권력을 휘두르는 거지. 거사가 성공하고 그동안 숨죽여 지내던 전국의 유림들이 들고일어나 인평대군 마마를 추대한다면 저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오.”

이익치가 이렇게 자신하는 건 조선이 선비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유림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강력한 왕권에 눌려 있지만 구심점인 도현이 사라진다면 대번에 상황을 반전시킬 힘과 세력이 있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니 절대 실수가 없어야 될 게요.”

“최고의 포수를 데려왔으니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익치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사가 성공하더라도 역풍을 맞지 않으려면 우리가 개입했다는 흔적을 절대 남겨서는 안 되오.”

그러자 황죽표는 이익치를 마주 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일이 끝나면 확실히 입막음을 할 생각입니다.”

“후후후. 그럼 되겠구려.”

애초에 황죽표는 큰 약점이 될 것이 분명한 박완용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제 며칠 뒤면 새로운 하늘이 열릴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에 이익치의 눈은 더러운 탐욕으로 가득 물들었다.

한참을 더 은밀한 밀담을 나눈 황죽표와 최석호가 이익치의 집에서 나오는 걸 날카롭게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일부 신료와 사대부 들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고?”

아침 조회를 끝내고 거처에서 잠시 쉬고 있던 도현은 주작단 수장인 이완의 보고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사옵니다.”

“역모라도 꾸미고 있다는 거야?”

이미 두 차례나 반란을 겪었고 최근에는 노비해방령으로 사대부들의 반발이 큰 상황이었기에 도현은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칫 조정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이완 단장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특정 인물들이 최근 빈번하게 모임을 가지는 것이 꺼림칙하옵니다. 단순히 친목을 다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빈도가 너무 잦고 대부분 노비해방령에 반대하는 산당 강경파들이기에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으음.”

낮게 침음성을 흘리면서 손가락으로 서탁 끝을 툭툭 두드리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군사나 무기를 모으는 조짐은 없나?”

“단원들을 풀어 면밀히 감시하고 있사온데 아직 그런 낌새는 없사옵니다.”

“군부 인사들과 접촉은?”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일단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에 도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 단장 말대로 의심은 가지만 그것만으로 잡아들이기에는 증거가 부족해.”

“하지만 때를 놓치면 일이 심각해질 수도 있사옵니다.”

“나도 알아. 그렇긴 해도 가뜩이나 노비해방령 때문에 사대부들의 불만이 가득한데 조정 중신들이 끼어 있는 무리를 확실한 증거 없이 체포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역풍을 맞게 될지도 몰라.”

“하오나…….”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됐지만 그래도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의심이 가는 무리를 그냥 놔두는 것이 찝찝했던 이완이 재차 말을 하려는 걸 도현이 한쪽 손을 들어 막았다.

“경이 뭘 우려하는지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산당에 칼을 들이댈 수는 없어. 대신 놈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가 증거를 잡으면 그때는 지체 없이 모두 잡아들이도록 하게.”

타이르듯 도현이 하는 말에 이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해 놓고도 바로 행동에 나설 수 없는 것에 이완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도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의 기를 세워 줬다.

“경이 곁에서 날 지켜 주니 정말 든든하다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아니야. 경이 없다면 내가 어찌 마음 놓고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겠나. 앞으로도 지금처럼 내게 힘이 되어 주게나.”

그러자 이완은 상체를 엎드리며 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목숨을 걸고 전하를 보위하겠나이다.”

“그래.”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앞에 있는 이완 단장을 바라봤다.

대궐을 나온 이완은 기존에 있던 인원을 대폭 보강해서 이익치를 비롯해 최근 주시하고 있는 무리의 감시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도 호락호락하게 그냥 당하지 않았는데, 그동안 주작단의 촘촘한 탐보망에 걸려 많은 이들이 신세를 망치는 걸 봤던 황죽표 등은 실제로 일을 벌일 박완용이 한양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철저히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 치밀함을 보였다.

연락도 몇 단계를 거쳐 아주 은밀히 주고받았고 그나마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아예 하지 않았기에, 주작단은 아직 이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청계천 아래에 위치한 남촌은 예로부터 가난한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그곳에 중인들이 쓰는 폭이 좁은 갓을 쓴 중년인이 뭔가 불안한 얼굴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어가다가 한 허름한 초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당 한쪽에 서 있던 건장한 사내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안에 있나?”

“예.”

“별일 없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사내가 대답을 대신하자 중년인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오셨수.”

헝겊으로 조총을 닦고 있던 박완용의 딱딱한 말에 중년인은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떤가?”

“며칠 술을 입에 안 대서 그런지 목이 칼칼한 것 빼고는 좋수다.”

“큰일을 앞두고 있는데 정신을 맑게 해야지.”

“됐고. 내가 말한 건 가져왔소?”

버릇 없고 거친 태도에 살짝 눈가를 찌푸린 중년인은 품속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하나 꺼내 앞에 내려놨다.

쩔그렁.

“오십 냥일세.”

“반밖에 안 되지 않소?”

“나머지는 일이 끝나면 주겠네.”

“…….”

박완용이 인상을 썼지만 중년인은 태연하게 받아넘기며 말했다.

“잊지 않고 확실히 챙겨 줄 터이니 염려하지 말게.”

“흥.”

약간 짜증이 난 얼굴로 상대가 돈주머니를 챙기자 중년인은 진지한 목소리로 다짐을 받듯 이야기를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네. 첫 발에 목표의 숨통을 끊어 놔야 해.”

“걱정 마시오. 그쪽뿐만 아니라 나도 목숨을 걸었는데 절대 실수는 하지 않소.”

“암 그래야지.”

“그것보다 일이 터지면 계속 한양에 있을 수 없는데 난 어찌해야 되오?”

“이미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 놨으니 안심하게.”

“알겠소.”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네.”

“내일 나머지 돈을 가져오는 걸 잊지 마시오.”

몸을 일으키던 중년인은 박완용의 말에 피식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지.”

밖으로 나온 중년인은 여전히 마당 한쪽에 정승처럼 서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서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허튼 짓 못 하게 감시 잘하고 일이 끝나면 내가 전에 일러 둔 대로 처리하게.”

“예.”

사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준 중년은 슬쩍 고개를 돌려 박완용이 있는 방을 보며 짧게 코웃음을 쳤다.

“하루살이 같은 놈.”

다음 날은 아침부터 거리마다 군것질거리를 파는 노점상이 서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이유인즉, 바로 심양을 점령하고 청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걸 기념해서 만든 개선문 완공식이 열리기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주변은 물론이고 한양 전체가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를 이뤘다.

“와아!”

“엿장수 아저씨다!”

마을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일찌감치 일어나 무리를 지어 골목을 뛰어다녔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엿장수나 떡 파는 아낙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새된 소리를 내질러 댔다.

“어이쿠, 이 녀석들. 앞 좀 잘 보고 다녀라.”

“죄송해요!”

“헤헤헤.”

하마터면 아이들과 부딪칠 뻔한 노인이 곰방대를 휘두르며 소리치자 아이들은 혀를 삐죽 내밀고 와아 반대쪽으로 달려 나갔다.

“애들은 기운이 펄펄 넘치는구먼.”

“왜 안 그러겠어요. 어른들도 저렇게 들떠서 난리인데.”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주막에서 겨우 앉을 자리를 찾은 노인이 투덜대는 소리를 듣고 주모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십 년 넘게 이 자리에서 장사를 해 왔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처음 봐요.”

그러면서 주모는 시원한 막걸리를 따라 노인에게 건넸다.

고개를 들면 길거리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의 머리 위로 개선문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여기서도 아주 잘 보였다.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기에 개선문의 당당한 위용이 더욱 돋보였는데, 아직 식이 거행되기 전이라 주변을 포졸들이 통제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나무를 타고 올라가거나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개선문은 단단한 회색 석조로 만들어져, 높이와 너비가 장장 오십 미터에 달했다.

그리고 외부 벽에는 심양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생생한 느낌으로 현장을 표현한 부조 스무 개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작업에는 한양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덕분에 보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웅장하면서도 한편으론 예술적인 미가 물씬 풍겨 나오는 건축물이 완성되었고, 설계부터 완공까지 무려 일 년이 넘게 걸렸다는 말에 다들 그럴 가치가 있다고 절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또한 오늘은 완공 기념으로 백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도현이 직접 근위대와 함께 개선문 밑을 행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왕의 용안을 보는 것은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이고 또한 신변의 안전을 위해 가마를 타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번 행사는 특별히 말을 타고 행진을 하기로 했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안 그래도 축제 분위기에 젖은 사람들은 더욱더 흥분하여 도현이 행차하기만을 이제나저제나 하고 손을 꼽아 기다렸다.

이런 인파들 사이로 등에 기다란 봇짐을 멘 박완용이 초가집 마당에 있던 사내와 함께 걸어갔다.

“저기요.”

사내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최근에 지어진 삼 층짜리 객잔이 보였다.

“장소 하나는 잘 구했군.”

객잔 위치가 아주 절묘했는데 기와가 놓인 지붕 위에 올라가면 행사가 벌어질 개선문 일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갑시다.”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는지 입구에서 마주친 점원한테 살짝 눈짓을 한 사내는 곧장 지붕으로 박완용을 데려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지만 아무도 둘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이번 행사 경비를 맡은 포도청 포졸과 친위대 위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도현이 지나갈 길을 따라 촘촘하게 경계선을 설치했지만 이백 보나 떨어진 객잔은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실수나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조총을 사용한 저격이 한 번도 없었기에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한 거였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상체를 숙인 채 적당한 위치를 찾아 앉은 박완용은 등에 메고 있던 봇짐을 풀었다.

그러자 흑철색의 신형 조총이 나왔고 박완용은 능숙한 동작으로 총알을 장전하고는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가만히 행진이 지나갈 방향을 겨냥했다.

이렇게 자신을 노리는 저격수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도현은 오랜만에 백성들과 함께 어울리는 축제에 약간 흥분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성 백성들이 다 밖으로 몰려나온 것 같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이 모두가 주상 전하의 업적을 칭송하고 기리기 위해서 나온 것 아니겠사옵니까.”

임경업을 비롯한 근위대 무장들의 말에 도현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어찌 그게 다 나 혼자만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소. 경들이 옆에 없었다면 절대 이룰 수 없었을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무장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근위대 기병 복장을 한 군관이 와서 정중히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전하, 이제 행진을 하실 시각이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어서 가시지요.”

“알겠네.”

임시로 설치된 천막을 나선 도현은 칠현의 도움을 받아 준비된 애마에 올라탔는데,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였기에 곤룡포가 아닌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두정갑頭釘甲에 투구를 쓰고 허리에는 장검까지 찼다.

천막 바로 옆에는 전투에 직접 참여해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근위대 기병과 보병이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대열을 갖추고 서 있었다.

보병은 얼마 전까지 심양성에 잔류해 있다가 노비해방 덕분에 신규 병력이 대거 충원되면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천천히 말을 몰아 앞에 선 도현은 잠시 길게 늘어서 있는 병사들을 훑어보고는 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랑스러운 병사들이여, 그대들의 용기와 기백을 도성 백성들에게 보여 줄 준비가 모두 됐나!”

“옛!”

“좋아. 오늘은 그대들을 위한 날이다. 백성들의 환호와 찬양을 마음껏 즐기고 늠름함을 뽐내라!”

“우와!”

병사들의 힘찬 함성을 들으며 도현은 지휘봉을 꺼내 짧은 명령을 내렸다.

“부대. 앞으로 갓!”

그러자 근위대 병사들은 마치 한 몸처럼 군홧발 소리를 내며 질서정연하게 개선문으로 연결된 대로를 행군했다.

척척척! 척척척!

그 모습을 보고 모여 있던 백성들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걸어가는 모습을 봐!”

“팔 흔드는 것까지 딱딱 맞아떨어지는군. 역시 조선 최고의 정예병들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가 봐.”

“정말 대단해!”

칼같이 군기가 살아 있고 보기만 해도 든든한 근위대의 행군에 백성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양팔을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주상 전하. 천세!”

“와아!”

“멋지다.”

이쯤 되면 분위기에 들떠 주위를 둘러볼 만도 했지만 근위대 병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 주시한 채 행군을 이어 갔다. 그런 모습이 백성들에게 더 강한 인상을 심어 줬다.

대열 제일 앞에 말을 타고 가며 근위대를 이끄는 도현이 지나갈 때면 모두들 더욱 큰 환호를 보냈다.

행군 대열은 어느새 개선문 앞에 도착했다.

개선문 한쪽에 마련된 귀빈석에 있던 조정 신료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행군해 오는 근위대를 보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근왕군답군요.”

“그러게 말이오.”

도성을 지키는 군대가 최정예라는 사실에 든든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근위대가 있는 한 도현의 왕권은 더욱 공고해질 거라는 걸 깨닫고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도현이 귀빈석 가까이 오자 신료들은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렇게 행군 대형이 개선문 밑을 지나며 행사가 절정에 달해 있을 때 도현을 겨냥하는 차가운 총구가 있었다.

“왔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황죽표가 붙여 둔 사내의 말에 박완용은 한쪽 눈을 감은 채 멀리 보이는 도현을 노려보며 짧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바로 코앞에서 호랑이를 마주 보며 조총을 쏴 잡은 적도 있었지만 박완용은 그때보다 더 긴장하며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거리는 백오십 보.

단 한 발에 목표를 명중시키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길게 숨을 내뱉은 박완용은 환호하는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도현을 조준하고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커다란 총성과 함께 말 위에 타고 있던 도현이 비틀거리며 상체를 푹 숙였고 순간 축제는 큰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1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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