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정리
“우상 대감!”
대궐 내 위치한 건물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경망스럽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권억을 보고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체통 없이 웬 호들갑인가?”
“대감, 지금 성 밖에…….”
“왜, 반란군이 도성 밖에 나타나기라도 했나?”
“주상 전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야!”
뜻밖의 이야기에 심기원은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다그치듯 앞에 있는 권억에게 말했다.
“반란군을 토벌하러 가신 전하께서 아무런 기별도 없이 갑자기 귀환하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전투에서 패하기라도 하신 건가?”
반란군과 내통 중이었던 심기원이 살짝 기대를 담아 물었지만 대답은 정반대의 결과였다.
“그게…… 청주에서 반란군과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이, 이겼다고?”
“예.”
“허어.”
믿기지 않는 듯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심기원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반란군의 전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절반도 안 되는 병력으로 이렇게 빨리 토벌을 끝내 버리다니. 정녕 하늘의 뜻이 이 심기원이 아니라 주상께 있단 말인가?”
“대감…….”
도현이 패하거나 반란이 조금만 더 길어지면 따르는 세력을 끌어모아 거사를 일으켜 도성을 장악하려고 했던 심기원은 시작도 해 보기 전에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들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류명동과 반란 수뇌들은 어떻게 됐다고 하던가?”
“전투 결과가 전혀 알려진 것이 없어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으음. 때를 놓친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반란군과 우리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져서는 절대 안 되네.”
연계가 드러나면 조정에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치는 건 둘째치고, 당장 심기원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할 수 있었기에 권억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전투 중에 죽었거나 도망쳤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류명동이나 이석재 둘 중 하나라도 살아 있다면 입을 열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용히 만들어야 될 걸세.”
살인멸구 지시에 권억은 놀란 듯 눈을 크게 치켜뜨다가 이내 심각한 얼굴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자네만 믿네.”
몸을 일으켜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권억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심기원은 문쪽으로 걸음을 떼며 입을 열었다.
“주상께서 오셨다니 나가 봐야지. 자네도 함께 가세.”
“예.”
다른 신료들도 도현의 귀환 소식을 들었는지 삼삼오오 근무지를 나와 대궐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토벌대가 청주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지자 행여나 반란군이 도성을 침범할까 봐 불안에 떨던 백성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거리로 몰려나온 백성들은 숭례문을 통과해 당당하게 대궐로 행군하는 토벌대를 보고 함성과 만세로 환영했다.
“역시 이길 줄 알았어!”
“천세! 천세!”
“반란을 이렇게 빨리 토벌하다니 역시 주상 전하셔.”
“용맹하고 지혜로운 주상 전하께서 계시는 이상 그 어느 누구도 우리 도성을 넘보지 못할 거야.”
“암. 그렇고말고.”
“저기 갑옷을 입으시고 말 위에 앉아 계신 걸 보게. 얼마나 늠름하신가!”
“맞아.”
직접 친정에 나서 반란군을 토벌했기에 도현을 칭송하는 소리가 더 높았다.
그런 분위기를 보여 주듯 황금색 갑옷을 입고 등 뒤로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도현이 장수들과 함께 말을 타고 지나가자 환영 분위기는 더 뜨거워졌다.
환호하는 백성들 때문에 행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자 급히 동원된 포졸들이 인파를 제지해야 됐다.
“백성들이 정말 기뻐하는 것 같사옵니다.”
옆에 바짝 붙어 따라오던 박영식의 말에 도현은 한쪽 손을 들어 백성들에게 흔들어 주면서 약간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큼 백성들의 불안감이 컸다는 뜻이 되겠지. 앞서 두 번의 전란이 벌어졌을 때 백성들을 끝까지 보호했어야 될 조정이 의무를 팽개치고 먼저 도망쳐 버렸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야.”
“전하…….”
무겁게 이야기하던 도현은 이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이 조선의 국왕으로 있는 이상 다시는 백성들이 전란을 두려워하며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만들 거야, 반드시!”
그러자 도현의 말에 감복한 박영식은 뜨거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소인 박영식 하찮은 목숨이나마 전하께서 가시는 길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쳐 견마지로를 하겠사옵니다.”
“경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니 든든하군. 그럼 먼저 내부에 있는 쥐새끼들부터 때려잡아야지.”
매서운 시선으로 앞을 보며 도현이 말을 하자 고개를 바로 한 박영식은 멀리 대궐 정문 앞에 서있는 신료들의 모습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시는 전하의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아주 깨끗이 쓸어버리겠습니다.”
“그래.”
개선 행렬이 대궐 앞에 도착하자 영의정 김류가 신료들을 대표해 길게 읍을 하며 도현의 무사 귀환을 축하했다.
“대승을 감축 드리옵니다, 전하.”
“고맙소. 경과 신료들이 도성을 든든히 지켜 준 덕분에 마음 놓고 반란군과 싸울 수 있었소.”
“황공하옵니다.”
힐끗 시선을 돌린 도현은 김류 뒤에 서 있는 심기원을 보고는 이채를 띠었다.
“우상도 나와 있었구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옵니다.”
“어디 몸이 불편하오? 안색이 안 좋소이다.”
도현이 툭 던진 말에 심기원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사옵니까?”
“뭘 그렇게 놀라시오? 누가 보면 죄라도 지은 사람 같소이다.”
“…….”
“자. 그럼 다들 안으로 들어갑시다.”
“예, 전하.”
신료들과 함께 대궐로 들어가는 도현을 보며 심기원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혹시 전하가 눈치를 채신 것이 아닐까요?”
옆으로 다가온 권억이 두려운 목소리로 묻자 심기원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일단 들어가세.”
“예.”
문무 대신들과 함께 대전으로 들어간 도현이 좌정하자 토벌군 지휘관이었던 박영식이 대표로 결과 보고를 했다.
“시간 관계상 간략하게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이끄신 토벌대는 충청도 청주에서 반란군 이만과 조우해 꼬박 한나절 동안 전투를 벌여 적 오천을 죽이고 만오천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오오오!”
토벌대가 돌아온 걸 보고 막연히 이겼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인 내용을 몰랐던 신료들은 예상보다 더 큰 승리에 다들 감탄성을 내뱉었다.
“오천도 안 되는 병력으로 몇 배나 많은 적을 상대해 이런 전과를 올리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특히나 무장 출신인 임경업은 소수로 다수를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에 특유의 호탕한 음성으로 도현을 추켜세웠다.
“반란군 주력은 전멸됐지만 아직 잔존 세력이 남아 있어 구인후와 흑치영 두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가 마무리를 지을 겁니다.”
이어진 박영식의 설명에 임경업과 박황 등 왕당파로 분류되는 신료들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잘하셨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역적들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려야 합니다.”
“맞습니다.”
“감히 주상께 반기를 들다니 일벌백계를 해야 됩니다!”
이런 가운데 맞은편에 앉은 심기원과 권억은 반란군 수뇌부가 어떻게 됐는지 말이 없자 내심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그때 영의정 김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반란을 일으킨 수괴들은 어떻게 됐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좌중을 훑어본 뒤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소.”
“그게 무엇이옵니까?”
“역도들을 잡아 심문하는 과정에서 가증스럽게도 조정 내에 반란을 도운 협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소.”
“……!”
자칫 또다시 조정에 거센 피바람을 몰고 올 수 있는 충격적인 이야기에 신료들은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도현의 말에 심기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지만 험한 정치판에서 구르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물답게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다.
반면 권억과 다른 측근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안절부절못했다.
“반란군과 내통한 자가 있다니, 그게 누구이옵니까!”
흥분한 임경업이 얼굴을 상기시킨 채 언성을 높이자 도현은 천천히 대전에 모여 있는 신료들을 훑으며 말했다.
“글쎄, 누굴 것 같소?”
시선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신료들은 죄가 없는데도 흠칫 몸을 떨었다.
심기원한테서 시선을 멈춘 도현은 잠시 그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상.”
“……예.”
“우상이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해서 발이 넓은 건 알았지만 하삼도 사대부들과 그렇게 교류가 많은지는 미처 몰랐소이다.”
순간 낮은 심음과 경악성이 대전 안을 휘감으면서 모든 신료들의 시선이 심기원에게 집중됐다.
“설마!”
“허어.”
“어찌 이런 일이…….”
당혹스러워하던 심기원은 이내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황급히 양손을 내저으면서 변명을 했다.
“역적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사오나, 전부 모함이옵니다!”
목숨이 걸린 만큼 순순히 죄를 실토하지 않을 거란 걸 예상했던 도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심기원을 보면서 말했다.
“죄가 없다, 이거요?”
“그렇사옵니다. 제가 어찌 그런 불충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바닥에 몸을 엎드린 심기원이 강하게 혐의를 부인하자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던 신료들은 술렁거리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도현은 짧게 콧방귀를 뀌고는 손바닥으로 앞에 놓인 서탁을 세게 내려치면서 호통을 쳤다.
탕!
“흥. 이미 모든 게 다 밝혀졌는데 어디서 그 더러운 입을 나불거려 짐과 대소신료들의 눈을 흐리려 하는 거냐!”
“저, 전하.”
“이게 뭔지 아느냐!”
신료들은 의아한 얼굴로 도현이 꺼내 든 종이 뭉치를 쳐다봤다.
“바로 네놈이 반란군 수괴인 류명동과 역모를 꾸미면서 주고받은 밀서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발뺌을 할 생각이냐!”
증거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심기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서찰을 주고받는 일을 맡았던 권억은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저게 어떻게…….”
“호오. 이제 내통을 했다는 걸 인정하는가?”
“헉.”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해 버린 권억은 당황한 얼굴로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대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가 무심코 내뱉은 말을 다 들은 후였기에 이제 의혹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런 불충한 자들이 있나!”
“조정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반역을 꾀하다니! 전하, 저들을 엄히 벌하소서.”
벌 떼처럼 일어나 반역 행위를 성토하는 왕당파와 달리 붕당의 핵심 인물인 심기원이 연루됐다는 사실에 영의정 김류를 포함한 서인들은 행여나 불똥이 자신들한테 튈까 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좌불안석인 모습을 보였다.
“이건 모함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전하.”
심기원이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자 도현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크게 소리쳤다.
“이미 모든 사실이 다 드러났는데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안 되겠구나. 여봐라, 저놈과 일당들을 모조리 다 잡아 의금부 감옥에 가둬라.”
“옛!”
그러자 언제 대전에 들어왔는지 건장한 친위대 위사들이 달려들어 심기원과 측근들을 붙잡았다.
“전하, 억울합니다!”
“놔라, 이놈들아.”
일단 대역죄인들을 다루는 의금부로 끌려가면 무사히 살아서 나오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심기원과 측근들은 거칠게 저항했다.
하지만 글만 읽은 유학자들이 무예로 단련된 위사를 당해 낼 수는 없었기에 이내 거친 손길에 제압되어 강제로 대전 밖으로 끌려 나갔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대전 안은 평화를 되찾았지만 신료들은 누가 또 역모에 휘말려 심기원 일파처럼 끌려갈지 알 수 없었기에 두렵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왕좌에 앉은 도현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도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료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김자점의 역모가 있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다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다니 정말 실망이오.”
“송구하옵니다, 전하.”
“짐을 최측근에서 보필하던 대신이 이런 음모를 꾸미다니, 이래서 어찌 마음을 터놓고 신료들과 국정을 논할 수 있겠소!”
거친 질책에 신료들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연루자들을 다 밝혀낼 때까지 당분간 조정을 폐쇄할 테니 그렇게들 알고 각자 근신하며 괜한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하시오!”
역모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서 조정까지 폐쇄된다면 도현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지만, 뒤에 선 친위대 위사들이 입만 뻥끗하면 바로 잡아갈 것처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어 어느 누가 하나 나서서 반대를 하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폭탄선언을 한 도현이 박영식과 함께 대전을 나가자 신료들은 그때서야 깊게 한숨을 내쉬며 경직된 표정을 풀었다.
“후우. 이것 참 우상이 반란군과 내통을 했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토벌이 끝나 이제 한시름 놓나 했는데 더 큰 일이 터진 것 아닙니까?”
대신 중 한 명이 근심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영의정 김류는 도현이 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한동안 조정에 거센 피바람이 몰아치겠군.”
“…….”
김류의 중얼거림에 붕당을 따지지 않고 대전에 남아 있던 신료들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반란은 사대부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하삼도에서 그것도 유력 가문과 대지주들이 주도한 거였기에 붕당을 떠나 대부분의 신료들이 직간접적으로 인맥과 핏줄이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왕당파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산당은 어느 정도 배려를 해 주겠지만, 껄끄러운 서인들은 도현이 어떻게 할지 몰랐다.
막말로 아무 꼬투리나 잡아 의금부로 끌고 간 다음 역모로 엮어 버린다면 꼼짝없이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서인의 핵심 인물인 심기원이 반란군과 내통까지 했으니 불안감이 더 컸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부터 한양에서 검거 열풍이 불었는데 의금부뿐만 아니라 포도청까지 나서 심기원을 비롯한 반란 연루 인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다 잡아들였다.
그중에는 시전상인이자 한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부인 김막동과 여러 상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반란군 수뇌부들을 심문해 얻은 명단이 있었기에 체포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탕탕탕!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마당을 쓸고 있던 중년 하인은 살짝 인상을 쓰며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떤 놈이 이렇게 시끄럽게 하는 거야.”
툴툴거리며 빗장을 풀고 대문을 연 하인은 흰 무명 옷에 검은색 도포를 입은 포졸들이 한 무더기 서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헉!”
“김막동이 안에 있느냐!”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관이 무서운 기세로 묻자 중년 하인은 겁먹은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저희 주인어른은 왜 찾으십니까?”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어디서 질문이냐! 역적으로 의금부 옥에 갇히기 싫으면 어서 썩 이야기를 하지 못할까!”
의금부라는 말에 기겁을 한 중년 하인은 한쪽 팔을 들어 안을 가리키며 얼른 입을 열었다.
“아, 안채에 계십니다.”
말을 하기 무섭게 군관은 하인을 옆으로 밀쳐 내면서 지시를 내렸다.
“다 잡아와!”
“옛!”
육모 방망이와 포승줄을 손에 든 포졸들은 재빨리 저택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곧 여기저기서 비명과 호통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이놈!”
비록 양반은 아니었지만 한양에서도 알아주는 거부 집안답게 평소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생활했지만, 의금부 포졸들의 육모방망이 앞에서는 돈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저항을 하거나 달아날 낌새를 보이면 여지없이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무지막지한 폭력이 가해졌다.
퍽퍽! 퍽!
“하찮은 장사치 주제에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아이구. 살려 주시오.”
잠시 뒤 김막동 일가가 안채에서 끌려 나왔는데 남자들은 구타를 당해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였고, 난데없는 날벼락에 여자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집 안에서 일하던 하인들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불안한 표정으로 모두 다 마당 한쪽에 모였다.
“이자가 김막동입니다.”
비단 옷을 입은 뚱뚱한 중년인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나온 부하가 내민 호패를 살펴본 군관은 김막동이라는 이름 석 자와 출생일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는 걸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맞군.”
“이, 이보시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는 거요?”
한양 상계를 좌지우지하는 거상답게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김막동이 용기를 내 질문을 하자 군관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봤다.
“감히 반란군에 몰래 군자금을 대는 대역죄를 저질러 놓고 참 뻔뻔하구나.”
“허억!”
“여, 역모라니…….”
역모라는 말에 식솔들은 기겁을 했고 토벌대가 개선했다는 소식에 내심 불안해하던 일이 터지자 김막동은 해쓱해진 얼굴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걸 보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은 군관은 주위에 서 있는 포졸들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죄인과 식솔들은 모두 의금부로 압송하고 저택에 있는 재물은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봉인을 한 뒤 경비를 세우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가자, 이놈들아!”
잠시 뒤 김막동과 식솔들은 굴비처럼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 포졸들의 감시를 받으며 의금부로 끌려갔고 저택 대문에는 출입을 금하는 봉인이 큼지막하게 붙었다.
이런 일이 김막동의 집뿐만 아니라 한양 곳곳에서 벌어지며 김자점 역모 사건이 터졌던 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
사대문을 모두 걸어 잠근 채 불시에 기습적으로 검거가 시작돼 반란에 연루된 인물들은 미처 도피할 틈도 없이 포승줄을 받아야 했다.
설사 잡으러 오는 걸 알았다고 해도 비밀리에 가담자 명단을 넘겨받은 주작단에서 며칠 전부터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기에 도망칠 수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검거 열풍에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지만 그것도 잠시 의금부와 포도청에서 반란 가담자를 잡아들이는 거라고 알리자 불안감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저건 또 무슨 일이래?”
비단옷에 갓을 쓴 양반들이 포승줄에 묶여 줄줄이 끌려가는 걸 본 털보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하자, 옆에 있던 친구는 힐끗 시선을 줬다가 바로 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자네 아직 소문 못 들었나?”
“뭔 소문?”
아무것도 모르는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털보 사내의 모습에 친구는 짧게 혀를 찼다.
“쯧쯧쯧. 이렇게 소식이 늦어서야.”
“답답하게 하지 말고 뭔지 빨리 말해 봐.”
“잘 듣게. 얼마 전에 주상 전하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셔서 반란군을 토벌했지 않나.”
“그랬지. 오늘 낮에 병사들을 이끌고 개선하시는 걸 보고 얼마나 늠름하고 멋지신지 눈물이 날 뻔했어.”
아직도 개선 행렬을 본 감동이 남아 있는지 털보 사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런데 조정 대신들과 한양에 있던 사대부 일부가 반란군 놈들과 몰래 내통을 하고 있었다는구먼.”
“헉! 그게 진짜야?”
“의금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는데, 내가 말을 꾸며냈겠나?”
국왕이나 역모에 관련 이야기를 잘못했다가는 그날로 패가망신할 수 있었기에 털보 사내는 굳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다행히 주상 전하께서 역적들이 일을 벌이기 전에 그걸 알아내시고 다 잡아들이는 거라고 하더군.”
“그럼 포졸한테 끌려가는 저 양반네들이…….”
“그래. 역모를 꾸민 자들이야.”
자초지종을 알게 된 털보 사내는 누런 가래침을 땅바닥에 뱉으며 잡혀가는 양반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나쁜 놈들. 퉤!”
아직 집권을 한 지 일 년 남짓 됐을 뿐이지만, 그동안 선정을 베풀고 직접 친정까지 나서는 등 큰 신뢰를 줬기에 백성들은 하나같이 털보 사내처럼 반란군과 내통한 자들을 욕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렇게 붙잡힌 사람들은 두 곳으로 분산돼 수용했는데 직접 내통한 자는 의금부에 그리고 죄인의 가족이나 하인은 포도청 옥사로 보내져 심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다들 무죄를 주장하며 버텼지만 반란군 수뇌부가 실토한 내용과 하나둘 나오는 증거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혹한 고문이 가해지자 오래 가지 않아 자백을 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으아아악!”
포졸 둘이 양쪽에 서서 가랑이 사이에 X 자로 넣어 교차한 나무 작대기를 힘껏 잡아당기자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던 권억은 끔찍한 고통에 목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이얍!”
“으으윽.”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한 권억이 입에 게거품을 문 채 고개를 푹 떨구자, 그 모습을 상석 의자에 앉아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여봐라.”
“예!”
미리 옆에 대기하고 있던 군관 하나가 재빨리 물이 든 나무통을 들고 와 권억의 얼굴에 쏟아부었다.
“어푸푸! 허억. 헉.”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난 권억은 잠시 여기가 어디인지 까먹은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여전히 포승줄에 묶인 신세라는 것을 깨닫고 이내 다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죄를 실토할 기분이 드느냐?”
“저, 전 무고합니다.”
“허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아직 버티겠다?”
반란군과 한패라는 게 밝혀지면 어차피 사형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고문을 받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권억을 향해 도현이 물었다.
“그럼 여기 이 서찰들은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그, 그건 누군가가 저를 모함한 것입니다. 전부 조작된 것들이옵니다.”
“흐음. 끝까지 그리 주장하겠다, 이거지?”
뻔뻔스럽게 잡아떼는 권억의 얼굴을 느긋하게 주시하며, 도현은 군관에게 한 손을 들어 명했다.
“그자를 데려오라.”
도현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복을 입은 군관 둘이 한 사내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고 심문장으로 질질 끌고 왔다.
“어이쿠!”
죽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철푸덕 내던져진 사내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권억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너, 너는!”
사내의 얼굴을 알아본 권억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경악해 말을 잇지 못하는데, 도현이 팔걸이를 탁 내리치고 호통을 쳤다.
“조용히!”
그러자 권억은 물론이고 갑자기 끌려온 사내 역시 어깨를 움찔거렸다.
“네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뭘 하는 자인지 직접 말해 보아라.”
도현의 지명을 받은 사내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땅바닥에 이마를 맞댄 자세로 대답했다.
“저, 저는 억삼이라고 하옵니다.”
더듬거리는 말투로 겨우 이름만을 밝힌 억삼이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도현이 재차 팔걸이를 내리쳤다.
“어허! 왜 뒷말을 하지 못하느냐!”
“아이고! 죄, 죄송합니다요!”
반사적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던 억삼은 조심조심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저는 권억 나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는 하인입니다요.”
“네 주인인 권억이 여기 있는 이자가 분명하겠지?”
“그, 그렇사옵니다.”
비록 포승줄에 묶여 있는 상황이긴 해도 주인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본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억삼은 잠깐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선 바로 머리를 푹 숙여 버렸다.
“허드렛일이라고 해도 이것저것 많을 텐데, 주로 어떤 일을 하느냐?”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합니다요. 겨울에 땔감이 모자라면 산에 가서 주워 오기도 하고, 다른 양반님들께 전해야 할 편지나 물건이 있을 땐 걸어서 옆 마을까지 갔다 오기도 합니다요.”
“그럼 이것도 낯이 익겠군.”
그리 말하며 도현은 한쪽에 놔둔 종이뭉치를 들이밀었다.
“쇠, 쇤네는 까막눈이라 글자를 모르옵니다.”
“그래도 네 주인을 한평생 모셨으니 필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테지.”
“그거야…….”
억삼은 말끝을 흐리며 편지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특유의 붓 끝을 위로 치켜 올리며 휙휙 갈기듯이 쓰는 필체.
내용은 읽을 수 없으나 권억이 집에서 뭔가를 쓰고 버릴 때마다 그것을 치우는 입장이던 억삼의 눈에는 낯이 익었다.
“네 주인이 직접 쓴 글씨가 맞느냐?”
“……네에. 틀림없사옵니다.”
다름 아닌 억삼 자신이 몰래 빼돌려 주작단에게 넘긴 서찰이니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 요망한 혓바닥을 놀리느냐!”
새파랗다 못해 하얗게 핏기가 가신 권억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몸을 들썩거리며 크게 소리쳤다.
“주, 주인 나리께서 은밀히 전달하라며 저한테 맡기신 서찰이 아니옵니까!”
“내가 언제 그랬느냐!”
“다른 사람한테 절대 들키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신 게 불과 며칠 전 일인데 기억이 안 나신단 말씀이십니까?”
“이, 이익!”
천한 하인으로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억삼에게 주작단이 내민 돈은 그야말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글자를 알지 못하는 탓에 어떤 게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구분을 하지 못해 곤란해하던 참에, 권억이 꼭 비밀리에 전달해야 한다며 서찰을 주었으니 당연히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에 주작단에 넘긴 것이 바로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그만!”
도현이 호통을 치자 바로 관군들이 달려들어 권억을 조용히 시켰다.
“이렇게 완벽한 증거와 증인이 있는데 끝까지 결백을 주장할 셈이냐?”
“저, 전하!”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진 권억은 사지에 몰린 절박한 심정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네 죄상이 만천하에 낱낱이 밝혀졌는데 이제 어찌할 테냐?”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불안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권억은 퍼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모, 모든 걸 다 실토하겠습니다. 그 대신 선처를 해 주십시오!”
“하하, 죄인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구나.”
“…….”
비웃음이 가득한 조롱에도 권억이 아무 대답을 못 하고 있자, 도현은 이내 무릎을 탁 치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좋다. 네가 아는 사실을 모조리 토해 내면 내 사형만은 면하게 해 주지.”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단!”
도현은 검지를 들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또다시 거짓말을 해 나를 현혹시키려 한다면 그땐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알겠느냐!”
“예, 예!”
얼음과도 같은 냉정한 시선에 권억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가볍게 떨고, 깊숙이 머리를 떨궜다.
“실은…….”
실토를 하기로 마음을 굳힌 권억은 자신이 살기 위해 모든 죄를 심기원에게 떠넘겼다.
도현도 그걸 눈치챘지만 어차피 최종 목표는 심기원이었기에 그냥 모르는 척했다.
온갖 고문과 협박을 받으면서도 심기원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지만, 권억의 실토로 내통이 사실로 굳어졌다.
이런 가운데 하삼도로 내려간 구인후와 흑치영이 체포한 사대부들이 무더기로 도성에 압송되어 왔다.
조용히 근신을 하다 도현의 호출을 받고 저택을 나선 영의정 김류는 대궐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거리 한쪽에 빽빽하게 몰려 뭔가를 구경하고 있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제가 한번 가서 확인해 볼까요?”
끌채가 앞뒤로 길게 뻗어 있고 발판과 함께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가마인 남여에 타고 있던 김류는 하인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라.”
종종 걸음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뛰어간 하인은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래, 무슨 일이더냐?”
“저, 그게…….”
“썩 이야기를 하지 않고 뭘 우물거리는 게야!”
상전이 다그쳐 묻자 하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반란군을 도와준 죄목으로 체포된 양반님들이 하삼도에서 압송되어 올라오는 걸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으음.”
낮게 침음성을 내뱉은 김류는 백성들이 모인 곳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자.”
“예.”
이번 반란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주모자들이 모두 자신이 속한 붕당 출신이었기에 언제 불똥이 튈지 몰라 대궐로 가는 내내 남여에 탄 김류는 마음이 불편했다.
“전하, 영상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편전이 있는 선정전이 아닌 왕의 개인 거처인 희정당으로 들어가자 좌의정 박황과 병조판서 임경업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둘을 힐끗 쳐다본 김류는 상석에 앉아 있는 도현 앞으로 가서 엎드려 절을 했다.
“신, 영의정 김류 부르심을 받고 왔사옵니다.”
“어서 오시오.”
인사를 한 김류가 비어 있는 방석에 자리하자 도현은 세 사람을 천천히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
“경들을 부른 건 심기원의 혐의가 모두 사실로 밝혀졌기 때문이오.”
“……!”
왕당파에 속하는 박황과 임경업은 미리 귀띔을 받았는지 담담한 표정을 짓는 것과 달리 이렇게 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김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보, 본인이 인정을 했사옵니까?”
김류의 물음에 도현은 약간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만 이미 드러난 증거가 확실하고 무엇보다 측근이었던 권억이 모든 걸 실토했소.”
“권억이 말씀이옵니까?”
“그렇소.”
김류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는데 권억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심기원의 오른팔이었으니, 그자가 입을 열고 내통 사실을 인정했다면 다 끝난 거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큰 실망과 충격을 받았소. 짐을 사로잡거나 죽여 조정을 전복하려고 심기원이 친정 사실과 토벌대의 구성까지 자세히 알아내 반란군에 유출했다고 하니 앞으로 누굴 믿고 국사를 봐야 되겠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세 사람이 이마를 땅에 대고 말했지만 도현은 화가 쉽게 안 가라앉는지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연신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벌써 두 번째요! 김자점과 심기원까지 역대 어느 국왕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반란을 여러 번 겪은 사람은 없을 것이오.”
도현이 거론한 두 사람 모두 서인 출신이었기에 김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 곰곰이 고심을 거듭한 끝에 더 이상 이런 반란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중앙군인 근위대를 대폭 확대하기로 결심했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훌륭하신 판단이옵니다.”
“이번에도 정예화된 중앙군이 없었다면 큰 곤욕을 치렀을 테니, 만사불여萬事不如 튼튼이라고 증원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찬성하는 두 사람과 달리 김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근위대를 확대하신다면 얼마나 늘릴 생각이시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김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도성을 지키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반란이나 전쟁에 대비하려면 최소 이만 명은 있어야 되지 않겠소?”
“헉. 이, 이만 명이나요!”
너무 놀라 김류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지만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번 반란 때도 도성을 수비할 병력이 없어 급히 황해도 군사를 데려온 걸 생각하면 두 배는 더 늘리고 싶지만 나라 살림을 고려해서 그 정도로 줄였소.”
“도성을 지키는 중앙군이라면 그 정도 위용은 갖춰야지요. 애초에 병력을 적게 둔 것이 잘못된 거였습니다.”
“재정에 무리가 가겠지만 나라가 무너진다면 조정과 백성도 없는 것이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되겠지요.”
“으음.”
갈수록 태산이라고 이만도 적다는 말에 김류는 어두운 얼굴로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다른 때 같으면 돈이 없다든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근위대 병력 증강을 막든지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나 대궐에 들어오기 전에 하삼도에서 반란군에 협조한 사대부들이 끌려 올라오는 것도 봤기에 더 입을 떼기 어려웠다.
그나마 자신은 선대왕의 측근으로 심기원이 주도하는 서인내 소장파와 거리를 뒀고 도현과 사이도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역모의 영향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여기서 잘못 보이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노련한 정치인답게 이미 저울추가 도현에게 완전히 기울었다는 걸 간파한 김류는 머리를 조아리며 이야기를 했다.
“뜻대로 하소서.”
그러자 도현은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인 뒤 병조판서인 임경업에게 시선을 줬다.
“병판.”
“말씀하십시오, 전하.”
“근위대 보강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니 병판이 책임을 지고 빠른 시일 안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시오.”
“옛.”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이 늘어나는 일이라 그런지 임경업은 눈을 반짝이면서 힘차게 대답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김류는 뭔가 결심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소?”
“다른 것이 아니오라 제 일신상에 관계되어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시오.”
도현의 허락에 김류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선대왕 전하와 주상 전하의 은혜를 입어 신하로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인 영의정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능력이 부족하여 반란을 두 번이나 겪게 해 드리고 전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하는 불충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책임을 통감하고 이제 그만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면 합니다.”
뜻밖의 말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도현은 김류의 결정을 만류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영상이 그만두면 어떻게 하겠소? 그러지 말고 짐을 더 도와주시오.”
“아니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제 나이가 일흔이 넘었습니다. 벌써 그만뒀어야 했는데 늦은 감이 있지요. 저 말고도 많은 인재들이 있으니 그들을 새로 등용해 뜻을 펼치십시오.”
“흐음.”
재차 사직 의사를 밝히자 도현은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고는 제법 기른 턱수염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면서 고심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영상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동안 수고가 많았소.”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몇 번 말리지도 않고 도현이 바로 받아들이자 김류는 어쩐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내통 사건과 맞물려 김류의 사직은 정계 개편의 신호탄이 됐다.
얼마 있지 않아 고령의 이명이 노환을 이유로 호조판서 직에서 물러났고 눈치를 보던 많은 서인 출신 관리들이 직간접적인 압력을 받아 벼슬을 그만뒀다.
그렇게 빈자리는 왕당파가 채웠고 좌장인 심기원과 김류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서인은 세력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몰락한 서인은 중앙 정계에서는 밀려났지만 뿌리가 워낙 깊고 넓게 퍼져 있는 만큼 완전히 와해되지 않고 예학의 대가인 김집金集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해 산당山黨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건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었고 지금 당장은 반란 관련자 체포와 정계 개편으로 구석에 몰린 서인은 도현의 눈치를 보며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이렇게 서인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도현은 왕권 강하의 밑바탕이 될 병력 증강과 도성 방어 시설 확충을 뜻대로 신속하게 밀어붙였다.
애초에 말한 근위대 말고 대궐을 경비하는 친위대도 신료들과 아무런 상의 없이 병력을 삼천 명으로 대폭 늘렸다.
거기다 근위대도 처음 말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이만 오천 명으로 정원을 확대하고 대대적인 병력 모집에 나섰다.
반란군 토벌에서 보여 준 용맹함과 상당히 높은 대우에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한강 강변에 임시로 마련된 시험장에서 일주일 동안 시험을 본 뒤 어렵지 않게 필요한 병력을 모두 채웠다.
법령 정비로 앞으로는 누가 됐건 군역을 피할 수 없었기에 이왕이면 근위대나 친위대에 들어가 출세를 하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 영향이 컸다.
이런 가운데 도현은 청주 수용소에 있던 반란군 포로들을 상경시켜 한양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성을 축성하도록 했다.
남한산성과 더불어 도성을 방어하는 요충지에 위치한 북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을 쌓아 지킨 곳이었다.
하지만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인 데다 그동안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기능이 상당 부분 상실된 채 방치 중이었다.
이걸 도현은 튼튼한 석성으로 다시 쌓고 유사시 북쪽에서 밀고 내려올 외적을 막아 내는 요새로 사용하기 위해 백 칸이 넘는 창고와 병영 그리고 저수지까지 각종 시설을 설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상당한 인력과 재물이 들어가는 대공사였지만 또다시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꼭 해야 될 일이었다.
어느새 날씨가 다 풀려 따뜻한 봄기운이 물씬 풍길 때쯤 하삼도로 내려갔던 구인후와 흑치영이 토벌대를 이끌고 개선했다.
“소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사옵니다.”
구인후와 흑치영이 정중하게 군례를 올리자 상석에 앉은 도현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흡족해했다.
“하하하! 어서들 오게.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
“아니옵니다.”
“일단 앉게.”
“예.”
두 사람이 자리를 하자 도현은 부드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잔당을 소탕하는 데 어려운 일은 없었나?”
“반란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주작단이 넘겨준 명단을 가지고 신속하게 가담자들을 잡아 들여서 큰 충돌은 없었사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사옵니다.”
“다행이군. 경들이 빨리 정리를 해 주지 않았다면 아주 골치 아파졌을 거야. 그러면 반란 세력은 완전히 쓸어버린 건가?”
도현의 물음에 관직이 더 높은 구인후가 이야기를 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두 발을 뻗고 편히 쉴 수 있겠군. 그나저나 이번 일로 목에 힘깨나 주고 다니던 사대부 집안이 상당수 풍비박산이 났으니 분위기가 흉흉하겠군.”
이번에는 흑치영이 물음에 답했다.
“일반 평민들이야 대동법이 실행되면 자신들한테 이익이니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사대부들은 당장 힘에 눌려 얌전히 수그리고 있어도 언제 저항을 하려 들지 모르는 데다, 이번 반란에 몇몇 관아가 박살 나 치안이 불안한 상태라 전라도와 경상도에 각각 병력을 천 명씩 남겨 두고 왔사옵니다.”
“잘했어. 장계를 보니 전라도 감영은 역도들이 지른 불에 잿더미가 됐다고 했지?”
“예.”
후기로 갈수록 기득권을 가진 사대부들이 이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큰 뜻을 가진 국왕과 위인들의 발목을 붙잡아 결국 조선을 쓰러지게 만든 걸 잘 알고 있던 도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죽일 놈들! 지금까지 배불리 잘살았으면 됐지. 나라야 어찌 되든 말든 저기들만 계속 호의호식하려고 하다니. 그런 자들은 사대부 자격도 없어.”
“맞사옵니다.”
즉각 동조를 하는 흑치영과 달리 얼마 전부터 도현의 측근이 되어 왕당파에 속하게 됐지만 명문 출신이고 아직 유교적인 관념이 남아 있던 구인후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어찌 됐건 먼 지방까지 내려가서 수고가 많았어. 경은 오래 충청 병영을 비워 둘 수 없겠지만, 며칠 이따가 논공행상이 있으니 그때까지 한양에 머물면서 푹 쉬도록 하게. 두 사람은 이번 반란 토벌에 가장 큰 공을 세웠으니 일등 공신으로 책봉될 게야.”
도현의 귀띔에 흑치영과 구인후은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어느새 구인후의 머릿속에는 약간 남아 있던 찝찝한 감정이 싹 사라져 버리고 공신 반열에 올랐다는 희열과 기쁨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이 돌아간 뒤 이번에는 토벌대를 따라 하삼도로 내려가 반란 가담자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일을 맡았던 봉황상단 행수 서상수와 장 총관이 나란히 희정당으로 들어왔다.
이미 품계를 받아 어딘지 모르게 관리다운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물론 하는 행동거지도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장 총관과는 달리, 서상수는 난생처음 입어 보는 관복이 어색한지 계속 빳빳한 소매 자락이나 허리띠를 만지면서 침착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오게나.”
“전하를 뵈옵니다.”
두 사람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도현이 얼른 앉으라며 맞은편에 비단 방석이 놓인 자리를 가리켰다.
“그나저나 우리 서 행수는 관복을 걸치니까 신수가 훤해 보이는군.”
“그, 그렇사옵니까.”
평소와는 다른 서상수의 행동을 대번에 눈치챈 도현이 능청맞게 농을 건넸다.
놀리는 줄도 모르고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 서상수의 행동에 장 총관은 쓴 미소를 지었고, 도현 역시 웃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장 총관처럼 자네한테도 빨리 품계를 내려 줘야 하는데, 내 일이 바빠 미뤄 놓기만 하고 있어서 미안하네.”
“아이고! 아닙니다. 저는 천성이 떠돌아다니길 좋아해서 상단 일만 계속하는 게 적성에 맞습니다.”
“어허! 이 사람. 그럼 나는 상인에 안 맞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
도현의 놀림에 편승해 장 총관까지 한마디 거들고 나서자 서상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허둥거렸다.
“하하, 서 행수가 곤란해하는 것 같으니 농은 이만할까.”
“예.”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도현의 말에 장 총관이 다시 흐트러진 옷자락을 가지런히 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서 행수.”
장 총관이 넌지시 말하자 서상수는 서둘러 품 안에서 서책 한 권을 꺼냈다.
표지는 기름을 먹여 빳빳하게 만들었고, 굵기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될 정도로 두툼한 책이었는데 만든 지 얼마 안 된 듯 책장 사이에서 은은한 먹 향기가 풍겼다.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밋밋한 표지의 서책을 서상수의 손에서 칠현이 받아 들고, 도현에게 건넸다.
“어디 보자.”
기대하는 눈빛으로 도현이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는 동안 서상수가 보충 설명을 했다.
“하삼도에 있던 반란 가담자들한테서 압류한 재산 목록입니다. 주동자들 대부분이 사대부의 신분인 데다 대지주까지 겸하고 있어서, 그 재물의 양과 수가 많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흐음.”
도현이 대충 눈으로 훑어보고 있는 것만 해도 진주, 산호, 옥함, 그림에 도자기까지 온갖 사치품들의 목록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이걸 하나하나 작성하려면 못해도 일주일 이상은 꼬박 밤낮으로 작업에 매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금액이 얼마나 되나?”
“정확한 액수는 좀 더 감정을 면밀히 해 봐야겠지만…… 대충 시가로만 따져도 육천만 냥이 넘습니다.”
“허어! 그렇게나?”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다들 그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양반 대지주들이었으니, 뒤로 몰래 축적해 놓은 재산이 만만치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액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당장 돈이 될 수 있는 건 이천만 냥 정도입니다.”
“보석이나 비단류로군. 나머지는?”
“땅이지요. 대지주들이라 역시 재산의 상당 부분이 토지였습니다. 양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그 대금을 받는 것이 기본적인 수입원인데, 그렇게 매년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만 해도 꽤 많은 액수였을 겁니다.”
“한마디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자기들 배만 불리고 있었다는 소리군.”
말이 소작이지, 농민들이 일 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어놓으면 추수 때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선 수확의 대부분을 빼앗아 갔을 것이다.
“이건 나중에 내가 천천히 읽어 보기로 하지.”
일단 서책을 덮어 놓은 도현은 장 총관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모자란 쌀을 사들이는 건 어떻게 됐나?”
“곧 제물포 항으로 선단이 들어올 것이라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마 하루 이틀 뒤면 도착하겠지요.”
“좋아.”
모든 게 별 차질 없이 돌아간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도현은 얼굴에 싱글벙글거리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앞으로도 두 사람이 잘 협력해서 일을 진행해 주게.”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 총관과 서상수가 나란히 자리를 물러나자, 혼자 남은 도현은 아까 덮어 놓았던 책자를 다시 손에 들고 펼쳤다.
방금 전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지만, 이번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히죽거린다는 것이 달랐다.
“어디 보자~ 어이쿠! 이놈은 많이도 해 먹었네. 자개 장식장에, 옥 노리개는 또 뭐야? 어디 첩이라도 새로 들어앉혔나?”
“……전하, 체통을 좀 지키시지요.”
옆에서 보다 못한 칠현이 딴죽을 걸자, 도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마, 너랑 내가 이제 와서 뭘 따질 사이냐? 잔소리하지 말고 차나 한 잔 타 와. 목이 마르네.”
“예에.”
칠현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곤 도현이 혼자 독서(?)에 푹 빠질 수 있게 뒷걸음질을 치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잔당 소탕을 하면서 뜻밖의 소득이 있었는데 바로 도성으로 압송된 대지주들의 창고에서 무더기로 나온 쌀이었다.
그동안 소작농들을 얼마나 심하게 수탈해 왔는지 걱정하는 대로 올해 농사가 흉작이 되더라도 대월에서 쌀을 사 오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성급하게 선단을 보내지 않고 토벌 결과를 조금 기다려 볼 것을 그랬다며 장 총관이 아쉬워했지만 도현은 백성들의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식량은 없는 것보다 넘치는 게 낫다면서 그냥 넘겼다.
토벌이 끝난 지 두 달이 지났을 때쯤 역적들에 대한 처벌이 내려졌는데 심기원과 류명동, 이석재를 비롯한 주모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가담 정도에 따라 종신 귀향형과 이십 년 노역형이 떨어졌다.
거기에 소유한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됐고 양반 신분마저 박탈당했다.
다들 방귀깨나 뀌고 산다는 집안들이었기에 딸려 있던 노비와 하인 숫자도 상당했는데 이들은 반란군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십 년 노역형을 받고 호조에 소속됐다.
역모 사건인 만큼 판결과 동시에 형벌이 집행돼 한때 서인의 거두로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심기원은 한강변에 마련된 사형장에서 망나니의 칼에 생을 마감했다.
이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양반이 무려 오십이 넘었고 멀리 떨어진 낙도落島로 귀향을 떠난 이가 백여 명에 달했다.
이렇게 모든 처벌이 끝나자 반란으로 흐트러진 민심과 조정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도현은 대규모 논공행상을 벌였다.
우선 토벌에 참가한 근위대와 경기 병영 병사들에게 일률적으로 오십 냥씩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전공에 따라 추가로 최대 오십 냥을 더 줬다.
그동안 포상은 주로 지휘관급에게만 돌아가고 일반 병졸들은 잔칫상 한판 차려 주고 땡이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파격적인 조치였기에, 소식을 듣고 진짜로 돈을 지급받은 병사들은 크게 기뻐하며 도현을 칭송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에게 포상금을 다 주려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하삼도 사대부들 말고 심기원 일파한테서 몰수한 재산만 천만 냥이 넘었기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지휘관들에 대한 포상도 함께 이루어져서 먼저 이완과 구인후, 박영식, 흑치영이 일등 공신에 책봉됐고, 뒤를 이어 임경업, 신철, 이상규가 이등 공신이 되어 공신록에 이름을 올렸다.
모두 도현의 측근들로 특히 박영식과 흑치영은 출신 성분 때문에 이런저런 걸림돌이 많았지만, 공신 반열에 오르면서 그걸 모두 해소할 수 있게 됐다.
주머니가 두둑하고 자기 사람은 확실히 챙기는 군주인 도현은 단순히 공신이라는 명예만 준 것이 아니라, 각자 일만 냥의 포상금과 몰수한 저택 중 괜찮은 걸 골라 하나씩 하사했다.
이걸로 측근들이 조정에 확실히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하고 동시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도록 해서 다른 유혹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 준 거였다.
통 큰 포상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도현은 김류의 사직과 반란 관련자 처벌로 상당수 공석이 발생한 관직 인사를 단행했다.
먼저 신료들의 수장인 영의정에는 왕당파의 수장인 박황이 임명됐고 심양 관저 출신으로 도현과 인연이 깊은 김종일이 좌의정 자리를 물려받았다.
심기원이 맡았던 우의정은 다른 이들의 예상을 깨고 주자학의 대가인 송시열을 앉혔다.
송시열은 서인이자 조선을 유학자의 나라로 만든 대표적인 인물로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도현과 정반대의 사상을 가졌고, 그가 가장 경계하는 자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송시열을 우의정이라는 높은 관직에 임명한 건 조정을 장악하게 된 왕당파와 한당이 자칫 초심을 잃고 서인들처럼 국정을 어지럽히는 걸 경계해 적당한 견제 세력을 남겨 두려는 의도였다.
그와 동시에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고 하지만 지방을 중심으로 여전히 상당한 힘을 가진 서인 세력을 이쯤에서 끌어안고 가기 위해 먼저 손을 내민 거였다.
고향에 내려가 학문을 수양하고 있던 송시열은 도현이 내린 벼슬을 정중히 거절했지만 거듭해서 칙사를 보내고 서인 쪽 인사들이 찾아와 출사를 설득하자 결국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 외에도 많은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노환을 이유로 사직한 이명 대신 대동법 추진의 뼈대를 만든 김육이 호조판서가 됐고, 신면申冕이 호조참판이 되어 경제 개혁을 뒷받침하게 했다.
여기서 신면은 정뇌경처럼 도현이 이 시대에 오면서 운명이 바뀐 인물이었다.
원래는 김육과 함께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 한당의 대표 주자였다가 김자점의 옥사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자결로 생을 마감하게 되어 있었지만, 도현이 역사에 끼어들면서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 호조참판이 됐다.
아무튼 이렇게 조정은 도현이 의도한 대로 왕당파가 여섯 그리고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산당과 한당이 각각 이 할씩 나눠 가지는 형태로 정계 개편이 이루어졌다.
한동안 조선 팔도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반란 사건이 마무리되고 다시 조정이 열리며 안정을 찾아갈 때쯤 일단의 인물들이 조용히 대궐로 들어왔다.
이들은 바로 한양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시전상인 대표로 비록 신분은 양인이었지만, 웬만한 사대부쯤은 눈 아래로 쳐다볼 만큼 막대한 부를 가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잔뜩 기가 죽은 모습이었는데 국왕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들어온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미 의금부에 잡혀 간 김막동의 권유로 반란군에 상당한 액수의 군자금을 지원한 게 걸렸기 때문이었다.
역모로 당장 의금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고 재산이 몰수돼도 아무런 말을 못 할 상황이었다.
줄줄이 사대부들이 잡혀가고 높은 권세를 누리던 양반들이 사형에 처해지거나 양민으로 끌어내려져 노역장에서 일하는 걸 보고 가슴을 졸이던 상인들은, 어제 갑자기 선전관이 찾아와 대궐로 들어오라고 말하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심정이 들었다.
친위대 위사의 안내를 받으며 대궐 안을 걸어가던 상인들 중 한 명이 일행 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인 옆으로 가서 낮게 이야기를 속삭였다.
“어르신, 전하께서 저희를 왜 보자고 하시는 걸까요?”
육의전에서 곡물점을 크게 하는 김복윤은 얼굴 가득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십중팔구 김막동과 관련된 일이 아니겠나.”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대가 약한지 담담하게 말하는 김복윤과 달리 상인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김복윤은 작게 혀를 차고는 상인을 보며 꾸짖듯 말했다.
“쯧. 의금부가 아닌 대궐로 우릴 부르신 걸 보면 뭔가 다른 뜻이 있으신 것 같으니까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게.”
“……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잡담을 하는 거요!”
“죄송합니다.”
친위대장인 신철의 말에 김복윤과 사내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희정당 앞뜰에는 평소보다 많은 위사들이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서운 표정을 짓고 김복윤 일행을 노려봤다.
“전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예.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고맙네.”
칠현이 옆으로 비켜서자 신철은 궁녀들이 열어 준 문을 지나 내전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김복윤과 상인들도 얼른 뒤를 따랐다.
방 안에는 도현이 약간 권태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앉아 있었는데 양옆에는 측근 호위인 박태철과 김덕술이 허리에 검을 차고 정승처럼 서 있었다.
“시전상인 대표들을 데려왔사옵니다.”
절도 있는 자세로 군례를 올린 신철의 말에 고개를 든 도현은 뒤편에 뀌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엉거주춤 선 상인들을 쓰윽 훑어봤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짧게 대답한 신철이 왼편으로 가서 서자 눈치를 보고 있던 김복윤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올렸다.
“한낱 미천한 장사치인 저희들에게 용안을 뵐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영광이옵니다.”
“영광이옵니디.”
합창을 하듯 말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상인들의 모습에 도현은 몸을 등받이에 기대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앉지.”
“예.”
바닥에 앉기는 했지만 상인들은 감히 도현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엎드렸다.
“오늘 자네들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반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야.”
“…….”
도현의 말에 상인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창백해진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돈을 최고로 치는 장사치라고 하지만 반란군에 오천 냥이나 되는 군자금을 지원하다니 정말 간이 크단 말이야. 역모에 가담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겠지?”
지금도 도성 성문에 심기원과 반란군 수뇌들의 머리가 효수되어 있기에 도현의 입에서 역모라는 단어가 나오자 상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사, 살려 주시옵소서, 전하.”
“저희는 그저 김막동이 돈을 빌려 달라고 해서 꿔 줬을 뿐이옵니다.”
“맞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입을 맞춰 둔 대로 상인들이 변명을 하자 와락 미간을 찌푸린 도현은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는 크게 호통을 쳤다.
탕!
“대동법 폐지와 이권 보장을 약속받고 네놈들이 스스로 군자금을 각출해 준 걸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무섭게 눈을 부라린 도현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칠현아!”
“말씀하십시오, 전하.”
“죄인들에게 그걸 보여 주어라.”
“예.”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칠현은 소매주머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서는 상인들 앞에 펼쳤다.
“보시오.”
“헉!”
“저건…….”
“으음.”
힐끔 머리를 든 상인들은 헛바람을 삼키거나 낮게 침음성을 흘리면서 크게 당황했다.
칠현이 펼친 종이는 김막동의 저택에서 나온 것으로 누가 언제 얼마나 반란군에 군자금을 냈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던 김복윤마저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위험한 도박을 하면서 저따위 증거를 남겨 두다니 속에서 욕설이 치밀어 올라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그런 상인들의 반응을 보며 도현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음성으로 추궁을 이어 갔다.
“이렇게 증거뿐만 아니라 의금부 옥에 수감된 김막동이 돈을 거둬 군자금을 줬다고 다 자백을 했는데도 계속 아니라고 발뺌할 것이냐!”
사색이 된 상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오리발을 내밀어서 될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김복윤은 얼른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계산이 빠른 상인답게 다른 사람들도 김복윤의 행동을 보고 죄를 인정했다.
“대동법이 실행되면 망하게 될 거라는 김막동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만……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럼 다들 죄를 인정하는 것이냐?”
“…….”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상인들이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신철이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소리쳤다.
“어허. 전하께서 물으시는데 빨리 대답을 하지 않고 뭣들 하는가!”
그러자 김복윤이 대표로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예.”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에만 눈이 멀어 역도들을 돕다가 패가망신을 하게 되다니 정말 어리석구나.”
패가망신이라는 말에 김복윤과 상인들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국법대로 한다면 하삼도에서 잡혀 올라온 사대부들처럼 모두 의금부 옥사에 집어넣어 죗값을 치르게 하고 가솔들은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몰수해 버려야 되겠지만, 그리하면 도성 상계가 일시에 마비될 수도 있으니 이번 한 번만 특별히 용서를 해 주겠다.”
꼼짝없이 역적으로 죽겠구나 하며 체념하던 상인들은 뜻밖의 말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그게 정말이시옵니까?”
“짐이 너희들을 불러 농이나 할 정도로 한가해 보이느냐!”
호통을 들었지만 살았다는 생각에 상인들은 반색을 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하옵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사옵니다.”
“허나 어떤 이들은 패가망신을 하고 목숨까지 잃는데 이런 큰 죄를 지어 놓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건 형평성에 문제가 되겠지. 그래서 속죄의 의미로 그대들이 자진해서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일조를 했으면 하네.”
“……!”
말이 좋아 자진 성금이지 반강제적인 각출이었다.
그래도 가진 걸 모두 빼앗기고 식솔들이 노비로 전락하는 것보다 백번 나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도현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계급이 깡패고 힘 있는 자가 왕이라는 말이 나온 거였다.
“그럼 얼마나 성금을 내야 될는지요?”
상인 중 하나가 눈치를 보며 묻자 도현은 약간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까지 내가 정해 줘야 되겠나!”
“아, 아닙니다.”
괜히 나섰다가 한 소리를 들은 상인은 얼른 꼬리를 내렸다.
그러자 도현이 만족할 만한 금액이 얼마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은 상인들은 머리가 아주 복잡해졌다.
최소한 반란군에 군자금으로 준 돈보다는 많이 준비해야 된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이렇게 상인들이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때 도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대들에게 통보할 것이 있네.”
통보라는 단어에 떨떠름한 느낌을 받으며 상인들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귀를 기울였다.
“숙종 때부터 그대들에게 보장한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할 생각이니 그렇게들 알고 있도록 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순간 상인들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금난전권은 육의전과 시전상인들이 관청의 허가를 받아 아무나 함부로 난전을 벌이지 못하게 자체적으로 단속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한양 상권을 독점할 수 있는 엄청난 특혜였다.
기존 상인들을 육성하고 세수 확보를 보다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지만 득보다 실이 더 많아 시전상인들의 이익 독점으로 물가가 오르고 경제 활성화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런 여러 문제 때문에 몇 번이나 금난전권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미 커질 때로 커져 버린 시전상인들이 막대한 금력을 동원해서 고위 관리들을 회유해 그런 시도를 번번이 무산시켰다.
이렇게 시전상인들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걸 도현이 없애겠다고 하니 다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그건 저희들 보고 더 이상 장사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제발 다시 재고해 주시옵소서.”
방금 전까지 그저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하며 고분고분하게 굴던 것과 달리 결사적으로 반대를 했다.
“말씀대로 하신다면 난전 상인들이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도성 상권이 어지럽혀지고 세수가 제대로 걷히지 않을 것이옵니다.”
김복윤이 나름 논리적인 이유를 들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도현은 콧방귀도 끼지 않고 그런 상인들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명색이 한양 상계를 대표하는 자들이라면서 이런 근시안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딱하기 그지없군.”
“…….”
“금난전권이 당장 그대들의 이익을 보장해 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스스로 한양이라는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히는 족쇄가 된다는 걸 왜 모르나! 고인 물은 썩을 수밖에 없지. 언제까지 난전을 단속하는 걸로 상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통렬한 도현의 비판과 지적에 김복윤을 비롯한 상인들은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었다.
사실 아무리 단속을 해도 계속해서 난전은 늘어났고 큰돈을 번 개인 상단들이 야금야금 한양 상권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라 시전상인들도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현 상황을 타계할 방법이 없었기에 상권을 지킬 유일한 수단인 금난전권에 더욱 집착했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결국 금난전권은 없어질 운명이라는 걸 그대들도 알고 있을 거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넋 놓고 있다가 그때가 닥친다면 시전상인이라는 이름은 역사의 한 줄로 영원히 사라져 버리겠지.”
극단적인 도현의 말에 김복윤이 살짝 발끈했다.
“대책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옵니까?”
“아니지. 도태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방도를 찾으면 되지 않겠어.”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에 김복윤이 차마 화는 못 내고 속으로 침음성을 삼킬 때 도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 이름이 뭔가?”
“……김복윤이라고 하옵니다.”
“제법 연륜이 느껴지는데, 시전에서 일을 한 지 얼마나 됐나?”
금난전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지 몰랐지만 김복윤은 성의껏 대답했다.
“올해로 삼십 년이 조금 넘었사옵니다.”
“그러면 시전에 대해 잘 알겠군.”
“예.”
“우리 조선에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상단들이 여러 개 있지 그중에 시전상인들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 글쎄요.”
김복윤이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도현은 실망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자체적인 생산 기반과 인삼 같은 특수작물을 독점하거나 확실한 유통망을 가진 다른 상단하고 비교해 시전상인들이 가진 장점은 단 하나, 재력일세. 지난 세월 동안 관에서 허가를 내준 유일한 상인으로 독점적인 지위를 누려 오며 엄청난 재물을 쌓아 놨을 거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
“으음.”
상업 천시하는 유교 풍습에 따라 그다지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역대 국왕들과 달리 도현이 너무나도 세세히 시전상인들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것에 김복윤은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뿐이지. 재물은 많지만 한마디로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성에 불과하단 말이야.”
도현의 말대로 자체적인 경쟁력을 가진 송상이나 만상과 달리 독점상권에만 의지하는 시전상인들은 난전의 확산으로 밑뿌리부터 야금야금 썩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느냐 이건데, 의외로 방법은 간단하지.”
어느새 이야기에 푹 빠져든 김복윤과 상인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풍부한 자금력을 이용해서 새로운 상권을 개척하는 거야.”
원론적인 방법에 김복윤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이미 국내 시장은 각 지역별로 상단들이 꽉 움켜쥐고 있는 상황이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름 돈 좀 만진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시선이 좁아서야 뭐에 쓰겠어.”
상인들의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가운데 도현은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제물포濟物浦에서 배를 띄우면 열흘 안에 산둥 지방과 중국 중남부에 도착할 수 있지 않나. 이런 천혜의 자연 조건을 놔두고 왜 쓸데없이 국내 상단들과 피 터지게 싸울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군.”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김복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해상 교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제 좀 말 귀를 알아듣는군.”
“하지만 해금령이 있는데…….”
명나라 건국과 함께 실시된 해금령은 갈수록 극심해지는 왜구의 노략질과 밀수를 막기 위한 조치로 조공 무역을 제외한 모든 해상무역과 통행을 제한했다.
황제의 지시로 조선도 해금령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급한 연락을 제외하고는 나라에서 보내는 사신도 편하고 가까운 바닷길을 두고 멀리 만주를 돌아 북경까지 수천 리 길을 가야 했다.
“처음 해금령을 시작한 명나라도 이미 오래 전에 부작용과 왜구의 준동을 막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걸 인식하고 폐지했는데, 굳이 우리만 계속 유지할 이유는 없지.”
해금령을 폐지하려는 의지를 살짝 내비치자 대륙과 직접 교역을 할 경우 발생할 막대한 이익을 떠올린 김복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간절한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봤다.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다른 상인들도 잔뜩 흥분한 얼굴로 얼른 몸을 엎드렸다.
비단 보료 위에 앉아 있던 도현은 그걸 보고 씨익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대륙을 상대로 무역을 하는 만큼 주먹구구식으로 하면 안 되겠지. 우선 지금처럼 느슨한 모임이 아니라 만상이나 송상처럼 하나의 상단을 구성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도현의 말에 홀딱 넘어간 상인들은 그 후에도 들뜬 표정으로 네, 네 하며 귀를 기울였고, 남은 잡다한 이야기들을 다 끝내자 신철 친위대장이 다시 그들을 인솔하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현은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해상무역이라는 먹음직스러운 떡밥을 던져 놨으니 이제 시전상인들은 금난전권 철폐에 대해 크게 왈가왈부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뿐이랴?
황금 알을 낳는 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앞다투어 ‘성의’를 표시하려 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이제 도현이 할 일은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는 것뿐이었다.
“우후훗.”
자기가 생각해도 실로 기발한 묘책이라, 실실 웃고 있을 때 그걸 보고 있던 칠현이 옆에서 한마디 툭 던졌다.
“하여간 전하의 수법은 날로 발전해 가는군요.”
“무슨 수법?”
“남의 재산 뜯어먹는 방법 말입니다.”
“나 혼자 좋자고 하는 일이야? 두루두루 잘살자고 하는 짓이지. 단군 할아버님의 홍익인간 정신도 모르냐?”
“……홍익, 뭐요?”
“아, 됐어! 이런 무식한 놈.”
무슨 말도 못 하게 두다다다 쏘아붙인 도현은 흥, 하며 고개를 돌리는 척하고선 벙 쪄 있는 칠현을 곁눈으로 흘겨보고 큭큭 웃었다.
이걸로 도현은 돌을 하나 던져 세 마리 토끼를 잡는 성과를 올렸는데 먼저 금난전권을 큰 반발 없이 폐지해 화폐 유통과 경제 활동을 촉진시키고, 봉황상단 외에 해상무역을 하는 상단을 하나 더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미소 짓게 하는 건 시전상인들이라는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 있는 호구가 생긴 것이다.
시전상인들의 등에 빨대를 꽂아 두고 단물을 쪽쪽 빨아 먹을 생각에 도현은 하루 종일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