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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밤 2 (30/104)

피로 물든 밤 2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규모의 궁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무너진 걸 창덕궁을 복구하면서 함께 다시 세웠다.

궁문은 넓은 계단이 있는 장대석의 기단 위에 세워졌고 굵은 기둥 사이에는 두 짝씩 단단한 나무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대궐의 정문이다 보니까 일반적인 성문처럼 본격적인 방어 시설은 아니었지만, 담벼락이 높고 튼튼해 억지로 뚫고 들어가려면 상당한 출혈을 각오해야 한다.

중간에 큰아들이 데려온 수어청 병력과 합류해 이미 승리를 거둔 것처럼 당당하게 진격해 온 김자점은, 대궐을 지키는 용호영 지휘관인 박흥원이 자신의 수하였기에 성문 통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병력을 멈춰 세운 김자점은 앞에 보이는 돈화문이 너무 조용한 가운데 세 개의 문이 모두 굳게 잠겨 있는 모습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문이 닫혀 있군.”

“제가 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말 옆구리를 차며 달려 나간 김응해는 문루 바로 앞까지 다가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어서 문을 열어라!”

그러자 신철이 문루에서 얼굴을 내밀고는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새벽부터 시끄럽게 하느냐!”

“우리는 주상 전하를 해하려는 불충한 무리를 벌하러 온 충의군이다.”

말 위에 앉아 김응해가 호기롭게 외치는 이야기에 신철은 코웃음을 치고는 매섭게 쏘아 붙였다.

“주상께서 계시는 대궐에 무기를 든 무리를 이끌고 오다니 충의군이 아니라 네놈들이 반역도들이구나!”

예상 밖의 반응에 김응해는 크게 당황했다.

“네놈들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서 가서 박 별장을 불러와라!”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지.”

대답과 함께 신철은 뭔가를 아래로 집어 던졌는데 바로 죽은 박흥원의 수급이었다.

툭.

얼떨결에 시선을 내려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수급을 보게 된 김응해는 헛바람을 삼키며 기겁했다.

“헉!”

“어젯밤 박흥원이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돼 죽임을 당했는데 이제 보니 네놈들도 같은 일당이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죽여라!”

신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루에 있던 용호영 소속 갑사들이 활을 꺼내 들고 쐈다.

슈슉! 쉬이익!

날아오는 화살에 화들짝 놀란 김응해는 허겁지겁 말 머리를 돌려 반란군 진영으로 달아났고 그 모습을 보며 아군 병사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

“도망치는 것 좀 봐.”

“꼴좋구나.”

치욕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돌아온 김응해는 김자점이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머리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뒤로 가 있게.”

“……예.”

힘없이 대답하며 뒤로 걸음을 옮기는 김응해를 보며 작게 혀를 찬 김자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돈화문을 노려봤다.

“박 별장이 죽었다니…….”

“아무래도 거사가 사전에 노출된 것 같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때 문루에 봉황과 용이 금색으로 화려하게 수놓인 무복을 입은 도현이 모습을 드러내고는 크게 소리쳤다.

“모두들 들어라!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다면 세자로서 이름을 걸고 모든 걸 용서해 주겠다. 하지만 계속 반역도당의 편을 든다면 제발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생 지옥 같은 삶을 살도록 해 주겠다!”

간단히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처음 예상과 달리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던 반란군 병사들은 도현의 말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야기 들었지?”

“그래. 이거 지금이라도 발을 빼야 되는 거 아냐?”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놈들의 수작이다. 동요하지 마라!”

수뇌부가 황급히 병사들을 진정시켰지만 불안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면천이라는 확실한 당근을 제시한 노비들보다 단순히 지휘관의 명령에 여기까지 온 수어청 소속 병사들의 동요가 더 컸다.

“아버님.”

큰아들인 김익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부르자 김자점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이미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탔어. 세자가 어떻게 눈치를 채고 박 별장을 제거했는지 모르겠지만 거기까지야. 대궐만 장악하면 우리가 이긴다. 어서 공격해!”

“옛.”

김자점의 지시에 김익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수뇌부들 모두 결연한 얼굴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잠시 뒤 반란군은 어설프게나마 전투대형을 갖추고는 돈화문을 공격해 왔다.

“제일 먼저 성문을 여는 자에게는 일백 냥을 상금으로 주겠다!”

“공격!”

“우와아아!”

사기를 올리기 위해 김자점이 돈을 내걸자 욕심에 눈이 먼 반란군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앞다퉈 달려 나갔다.

단번에 결판을 낼 생각인지 아니면 김자점이 전쟁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예비대도 없이 일부 호위 병력만 남겨 두고 총공격을 펼쳤다.

이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모습은 상당한 위압감을 줬지만, 도현은 전혀 위축되는 것 없이 오히려 상대를 측은한 눈빛으로 봤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거총!”

촤촤착!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루와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호위대 대원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며 사격 자세를 잡았다.

담벼락이 높아 원래는 자세를 잡기 어려웠지만 이걸 고려해 미리 일 미터 정도 되는 넓고 긴 발판을 만들어 둬서 대원들이 그 위로 올라갔다.

호위대의 기본 사격 대형은 세 줄이었는데, 발판 넓이를 고려해서 두 명이 앞뒤에 서서 올라가고 나머지 한 명은 밑에서 대기하다가 선두 열이 사격하고 내려오면 다시 빈자리를 메우는 방식으로 약간 변형했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상대를 겨냥한 대원들은 전혀 긴장하거나 서두르는 기색 없이 조준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호흡을 가다듬으며 한쪽 눈을 감고 가만히 정면을 바라봤다.

그동안 받은 혹독한 훈련의 성과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것인데, 이것만 봐도 호위대가 얼마나 정예인지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조총과 달리 도현의 지시에 따라 가늠자가 장착되어 상대를 조준하기 더 쉬웠는데, 그게 없더라도 워낙 거리가 가깝고 목표가 많아 아무렇게나 쏴도 다 맞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재차 도현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발사!”

대원들은 방아쇠에 걸어 둔 손가락을 망설임 없이 당겼고 순간 천지가 진동하는 소음과 함께 백여 개가 넘는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파바방! 타탕! 탕! 타타타탕!

“컥!”

“으윽.”

“아악!”

기세 좋게 달려오던 반란군 선두가 날아온 총탄에 비명을 지르며 우수수 쓰러졌다.

하지만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는데 사격을 끝마친 일 열이 재빨리 발판을 내려와 재장전하는 사이에 계속 이어서 이 열과 삼 열이 잘 만들어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며 연속 발사를 했다.

거기다 용호영 소속 궁수들이 화살을 날리며 공격에 가담하자 궁문 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쏴!”

슈슉! 쉬이익! 슈슉!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 비와 앞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변변한 방패조차 없었던 반란군 병사들은 썩은 짚단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총을 가진 호위대 병력은 불과 오백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쉬지 않고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들리는 커다란 총성은 심리적으로 적에게 큰 압박과 공포를 안겨 줬다.

흑색화약 특유의 매캐한 냄새와 뿌연 연기가 전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곳곳에서 살려 달라는 반란군 병사들의 신음과 비명이 들렸고 바닥에는 시뻘건 피가 웅덩이를 이뤘다.

“내 다리.”

“살려 줘!”

조총과 화살을 절묘하게 섞은 집중 사격에 선두가 무너지며 순식간에 수백 명을 잃은 김자점은 손에 쥔 고삐를 꽉 움켜쥐면서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으음.”

“대감, 박 별장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세자가 단단히 준비를 한 모양입니다.”

다급한 황현의 말에 김자점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거칠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일단 물러섰다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에 재차 공격하는 것이…….”

김자점이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황현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세자에게 주도권을 주게 되는데 그럼 정말 끝이야! 자네나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지금 승부를 봐야 돼!”

“하지만…….”

“듣기 싫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병사들을 독려해서 궁문을 뚫으란 말이다!”

북상하고 있는 경기 병영 군사들과 합류했다면 상황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몰랐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마음이 급해진 김자점은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김자점의 지시에 주춤거리던 반란군은 다시 한 번 돌격을 시도했지만 호위대와 용호영 병사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반란군이 조총과 활 같은 원거리 무기를 챙겨 오지 않았기에 아군은 마치 사격 훈련을 하듯 편하게 상대를 유린했다.

타탕! 탕! 탕! 탕!

슈슉! 쉬이익.

총성과 바람을 가르는 화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적이 비명을 내지르며 고꾸라졌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부상자가 속출하자 공포가 극에 달한 반란군은 노비들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흐윽.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죽기 싫어.”

아직 어려 보이는 노비 두 명이 들고 있던 죽창을 내버리고 달아나자, 폭우에 제방이 허물어지듯 주위에서 눈치를 보던 반란군 병사들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주 행렬에 가담했다.

그 모습에 전투를 독려하던 군관들이 이탈을 막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겁에 질린 병사들을 다시 싸우게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루 위에서 그걸 지켜보던 도현은 도망치는 적들을 향해 지휘봉을 내밀며 크게 외쳤다.

“기병대 출진!”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출입문이 좌우로 열리더니 대기 중이던 기병 이백 명이 지축을 울리면서 달려 나왔다.

“한 놈도 남겨 두지 말고 다 쓸어버려라!”

“이랴!”

두두두두!

위사들로 이루어진 기병대 선두에는 철퇴를 손에 든 신철이 있었다.

“역도들에게 용호영의 용맹함을 보여 줘라!”

다분히 조총 사격으로 반란군의 돌격을 저지하며 맹활약한 호위대를 의식한 발언이었는데, 효과가 있는지 말에 탄 위사들의 눈빛이 매섭게 불타올랐다.

궁문을 나오자 신철 위사장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쫙 펼쳐져 쇄기 대형을 만든 위사들은 그대로 등을 보이며 도망치고 있는 반란군을 덮쳤다.

“이얍!”

서걱!

“끄허억.”

“컥.”

빠르게 지나가면서 위사들이 휘두르는 칼날에 반란군 병사들은 피를 뿌리며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언제 문루에서 내려왔는지 도현이 검을 뽑아 들고는 직접 전투에 뛰어들자, 호위대와 용호영 병사들도 함성을 내지르며 뒤를 따랐다.

도현의 지시에 따라 총신에 대검을 꽂아 유사시 창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했기에, 호위대 대원들은 지금처럼 과감하게 백병전을 벌일 수 있었다.

“하아압!”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도현이 장검을 휘두르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반란군 병사의 머리가 날아가며 피분수가 하늘로 치솟았다.

“크악!”

“저기 세자가 있다. 죽여라!”

제법 지위가 높은 인물인지 갑옷을 차려입은 적장 하나가 도현을 발견하고는 부하 두 명을 이끌고 덤벼들었지만 뒤따라 온 흑치영과 박영식에게 막혔다.

“어딜!”

“이거 오랜만에 제대로 몸 좀 풀겠군.”

채챙! 츄앙!

두 사람이 신이 난 듯 무기를 휘둘러 대자 적들은 힘없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꾸엑.”

검에 베이고 말발굽에 짓밟히며 반란군은 혼란에 빠져 모래성처럼 완전히 무너졌다.

기병대의 돌파와 뒤이은 보병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노비뿐만 아니라 수어청 병사들마저 도주 행렬에 가세했다.

그때 반란군의 전투 의지를 꺾는 결정적인 외침이 전장에 울렸다.

“항복하는 자는 목숨을 살려 준다!”

“어서 무기를 버려라!”

맞서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치자니 말을 탄 기병대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웠던 반란군 병사들은, 살려 준다는 이야기에 너 나 없이 무기를 내던지고는 팔을 들어 올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항복하겠습니다.”

항복한 적들은 무장해제를 시킨 다음 한쪽으로 모았고 계속 버티는 상대에게는 가차 없이 응징을 가했다.

그러자 반란군 진영은 더 빨리 붕괴됐고 어느새 김자점과 수뇌부 바로 앞까지 기병대가 밀고 들어왔다.

“아버님, 아무래도 틀린 것 같습니다. 일단 몸을 피하셨다가 후일을 도모하시지요.”

“그게 좋겠습니다.”

“제기랄! 대궐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여기서 무너지다니.”

분한지 김자점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좀처럼 전장에서 시선을 못 떼고 있자 두 아들이 억지로 그를 데리고 뒤로 말 머리를 돌렸다.

“어서 아버님을 모셔라!”

“예.”

이렇게 지휘부가 달아나자 반란군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며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거나 각자 살길을 찾아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문 앞에서 벌어진 전투는 무수히 많은 사상자와 포로를 남겨 두고 후퇴한 반란군의 완패로 끝났다.

“우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세자 저하 천세!”

“천세!”

승리를 거둔 호위대와 용호영 병사들은 손에 든 무기를 치켜들며 환호했고 도현도 주먹을 꽉 쥐고 힘차게 흔들었다.

“승리를 감축 드리옵니다, 저하.”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이 다가온 지휘관들의 축하 인사를 받던 도현은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장들이 열심히 싸워 준 덕분이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일은 지금부터이니 역도들이 도성을 빠져나가기 전에 모두 잡아들여 후환을 없애도록 하시오!”

“옛!”

주먹을 쥔 오른쪽 팔을 심장에 갖다 붙이며 크게 대답한 지휘관들은 대궐을 지킬 병력을 남겨 두고 여섯 개의 소부대로 나눠 곧장 잔당 소탕에 들어갔다.

이미 봉황상단에서 깔아 놓은 탐보망을 통해 이번 역모에 가담한 인물들을 모조리 다 파악하고 있었기에, 잔당 소탕도 아주 정확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탕탕탕!

“어서 문을 열어라!”

몇 번을 소리쳤는데도 반응이 없자, 용호영 소속 군관인 임명호는 인상을 와락 찡그리며 뒤에 서 있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것들이! 부숴!”

“예.”

그러자 커다란 덩치의 병사 두 명이 앞으로 나와 손에 든 도끼로 대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꽝! 꽝!

값비싼 원목으로 만들어진 대문은 도끼질 두세 번에 힘없이 부서졌다.

우지끈. 쿵!

“한 놈도 빼놓지 말고 다 잡아들여!”

임명호의 외침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병사들은 엉거주춤 대문 앞에 서 있던 하인들을 시작으로 저택에 남아 있는 김자점의 식솔을 보이는 대로 잡아들였다.

젊고 튼튼한 노비들은 이미 김자점이 거의 다 데려갔기 때문에 남아 있는 건 나이가 많거나 여자들이라 큰 저항은 없었다.

하지만 개중 몇몇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몽둥이 같은 걸 들고 덤벼들자 병사들은 가차 없이 응징을 가했다.

퍽퍽!

“어이쿠!”

“아이고! 나 죽네.”

무지막지한 구타에 노비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겁에 질려 있을 때 안채에서 비단 옷을 입은 중년 여인이 나와 호통을 쳤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그러자 임명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신이 김자점의 처요?”

“무례한 놈!”

욕설을 내뱉으며 여인이 그의 뺨을 후려치려 하는 걸 붙잡은 임명호는 기가 안 찬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말했다.

“아직도 자기가 정경부인인 줄 착각하고 있나 본데, 김자점이 역심을 품고 거사를 일으킨 그 순간부터 네년 집안은 망한 거야!”

“이익.”

임명호는 비웃어 주고는 인정하기 싫은지 이를 악물며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중년 여인을 뒤로 밀쳐 냈다.

“꺄악.”

“마님!”

“이놈들 나중에 꼭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당신 걱정이나 하시지.”

바닥에 쓰러진 중년 여인이 악에 받친 듯 저주를 퍼부었지만 임명호는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얼마 뒤 김자점의 처를 비롯해서 며느리와 손자들이 모두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의금부로 연행됐는데, 숙원 조씨의 딸인 효명 옹주는 특별히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고 대궐로 보내졌다.

김자점 집안뿐만 아니라 거사에 참여했던 사대부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용호영과 의금부에서 나온 병사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식솔들을 모조리 다 잡아갔다.

설마 거사가 실패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런 대비책도 세워 놓지 않았기에 전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편 신철과 흑치영이 이끄는 병사들은 도망친 반란군 지휘부를 찾아 소탕하는 데 집중했다.

“잡아라!”

채챙! 챙!

“끄아악.”

도망치는 와중에 하나둘 뿔뿔이 흩어져 현재 김자점 옆에 남아 있는 부하는 아들들을 포함해서 불과 십여 명이 채 안 됐다.

“여기만 벗어나면 숭례문입니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말까지 잃고 두 발로 걸어서 도망치던 김자점은 큰아들인 김익의 이야기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 도성을 빠져나가 경기 병영 군사와 합류하는 것만이 김자점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채 몇 걸음도 떼기 전에 물거품이 됐다.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자마자 나타난 숭례문 앞에 도현이 호위대 서른 명을 거느리고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로 올 줄 알았지.”

“역시 대단하십니다.”

엄지를 치켜든 흑치영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준 도현은 이내 시선을 돌려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김자점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쯤 되면 다 끝난 것 같은데 더 험한 꼴 보지 말고 그만 항복하는 게 어때?”

그러자 김자점은 길게 자란 수염을 파르르 떨면서 원독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다 네놈 때문이야!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그냥 청나라에 남아 있었더라면 모든 것이 뜻대로 잘 풀렸을 텐데, 갑자기 돌아와서 깽판을 부리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된 거야!”

도현은 사나운 눈빛으로 김자점을 노려봤다.

“나라가 어찌 되든 말든 네놈과 숙원 조씨가 권세를 누리며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정의란 거냐!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고위 관리라는 자가 정말 염치도 없고 뻔뻔하구나. 정녕 네놈 귀에는 공녀로 딸을 빼앗기고, 가혹한 수탈에 주린 배를 부여잡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백성들의 절규가 안 들린다는 말이냐!”

분노에 찬 도현의 일갈에 김자점은 찔끔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그런 줄은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는 놈들이구나. 더 볼 것 없다. 다 잡아들여라!”

“옛!”

지시가 떨어지자 뒤에 있던 호위대 대원들이 날 듯 몸을 날려 김자점과 반란군 잔당을 덮쳤다.

도현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고 말을 몰아 수괴인 김자점에게 달려가서는 안장 옆에 매어 둔 채찍을 빼 휘둘렀다.

츄아아악!

섬뜩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채찍은 정확히 김자점의 어깨를 때렸다.

“컥!”

김자점이 답답한 신음을 내뱉으며 엎어지는 걸 보고 아들인 김익이 달려왔지만 여지없이 도현의 채찍이 날아왔다.

“으윽.”

목소리만 컸지 평생 글만 읽은 연약한 책상물림이었던 두 부자는 채찍질 두 번에 정신이 나가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사이 흑치영과 호위대 대원들은 남은 반란군 병사들을 모조리 다 제압했다.

단단한 밧줄로 대원들이 김자점 부자를 묶는 걸 보던 흑치영이 도현한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 의금부 감옥이 아주 비좁겠습니다.”

“그렇겠군.”

큰 고비를 넘긴 도현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한편 김자점에게 넘어간 수어청을 제외하고 도현의 공작에 중립을 지키기로 약속한 남은 네 군영은 양쪽의 싸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반란군이 완패하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융사 영감, 급보이옵니다.”

파총 이상 고위 군관들을 모아 놓고 초조한 얼굴로 회의실에 앉아 있던 이상규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부관의 다급한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과가 나왔느냐?”

“예.”

“누가 이겼어?”

다그치듯 이상규가 묻자 부관은 거칠어진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바로 전투 결과를 이야기해 줬다.

“세자 저하께서 완승을 거두셨습니다.”

“지금 완승이라고 했어?”

“네. 병판이 군대를 이끌고 올 줄 알고 돈화문에 미리 조총부대와 궁수를 배치해 상대의 기세를 꺾은 후 곧바로 세자 저하께서 직접 병사들과 함께 일제 돌격을 감행해 적을 단번에 괴멸시켰습니다. 지금 대궐 앞에는 반란군의 시신이 산을 이루고 잡혀 있는 포로가 족히 수백은 됩니다.”

“허어.”

보고를 들은 이상규는 약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걸 보고 도현이 이길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병판과 배후에 있는 숙원 조씨의 힘을 볼 때 어려운 싸움을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완승을 거뒀다니 새삼 세자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며 임경업 장군의 권유를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진 반란군 잔당 소탕과 함께 가담자 색출과 체포가 진행 중입니다.”

“전투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말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는군.”

아예 김자점 일파가 빠져나갈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빠르게 뒷정리에 들어간 도현의 행동에, 이상규는 물론이고 함께 있던 고위 군관들도 혀를 내둘렀다.

“이러면 병판은 이제 끝났다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끝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패가망신한 거지.”

형벌 중에 가장 엄격하고 가혹하게 처리되는 것이 바로 역모였다.

단순히 가담자와 직계가족만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노비를 비롯한 모든 식솔과 친척들까지 연좌제가 적용되어 엄한 처벌이 가해졌다.

그러니 패가망신이라는 말을 해도 절대 과하지 않았는데, 특히나 김자점은 반란 수괴이니 더 혹독하게 처리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전하께서는 중태에 빠져 계시고 그동안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김자점 일파와 숙원 조씨가 몰락했으니, 이제 세자 저하의 세상이 되겠군요.”

“그렇겠지.”

다들 자세한 언급은 회피했지만 인조의 명이 다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자로서 계승 서열 영순위라는 명분과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옥쇄까지 이미 손에 쥐고 이제 강력한 경쟁 세력까지 박살 낸 도현이 조선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영감, 아무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상규가 쳐다보자 평소 눈치가 빠르고 처세에 밝은 이 천총千摠(정삼품)이 약간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중립을 취하면서 세자 저하의 편을 조금 들어 줬다고 하지만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으니, 나중에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마당에 계속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직속상관인 이상규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앞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에 측근들이 더 안달을 냈다.

사실 자신이 너무 소극적이었던 건 아닌지 내심 후회하고 있던 이상규는 측근들의 이야기에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으음. 어찌했으면 좋겠나?”

“일단 대궐로 가서 세자 저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잔당 소탕에 적극 협조해야 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조금 낯 뜨거운 일이었지만 역모라는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는 이때에 이렇게 보험을 들어 두지 않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몰랐다.

막말로 아무런 죄가 없어도 역모라는 말 하나로 사약을 내릴 수 있었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이런 식으로 정적을 제거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김자점이 병조판서에 있으면서 다들 약간씩은 뇌물을 주거나 받은 일이 있었기에 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한 이상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네. 지금 당장 대궐로 들어가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상규의 결정에 측근들은 환하게 얼굴을 폈다.

이런 움직임은 총융청뿐만 아니라 훈련도감을 비롯한 다른 군영도 마찬가지였는데, 앞을 다퉈 대궐로 들어와서는 이제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도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이게 다 도현이 의도한 것으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반란을 진압하면서 군부의 목소리가 커지는 걸 막고, 오군영으로 대표되는 중앙군에 대한 통제력을 확실히 손에 쥐게 됐다.

한편 경기병사가 이끄는 군대는 수괴인 김자점과 수뇌부가 이미 제압됐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한양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좀 더 빨리 움직이라고 하게.”

경기병사 최병설의 말에 부관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도 속보로 행군 중이온데 여기서 속도를 높이면 병사들에게 무리가 갈 것이옵니다.”

실제로 군마 위에 편하게 앉아 있는 최병설과 달리 어제 오후부터 쉬지 않고 이동한 병사들은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최병설은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재차 지시를 내렸다.

“어떻게든 정오까지 강을 건너 한양 성문 앞에 도착해야 되는데, 이래서 어느 세월에 가겠나? 낙오가 돼도 어쩔 수 없으니 잔말하지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해!”

거듭된 재촉에 부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잠시 뒤 경기 병영 병사들은 거의 뛰다시피 행군을 해야 됐고 자연스럽게 낙오병들이 늘어났다.

그런데 이런 경기 병영의 움직임은, 흑치영이 남겨 두고 간 호위대 대원들을 통해 한양에 있는 도현한테 빠짐없이 전달되고 있었다.

“저하.”

“무슨 일인가?”

“급히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허둥지둥 대궐도 들어온 이상규와 다른 오군영 수장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고 잠시 쉬고 있던 도현은 칠현이 가져다준 찻물을 마시며 말했다.

“이야기해 봐.”

“경기병사 최병설이 이끄는 무리가 한 시진쯤 뒤에 광희문光熙門 쪽으로 올 것 같사옵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도현은 크게 동요하는 모습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가 얼마나 되지?”

“남겨 놓고 온 수하들이 보내온 전서구에 의하면 이천이옵니다.”

“경기 병영 군졸 이천이라…… 만만치 않은 병력이군.”

“머릿수는 많지만 칼과 창만 든 병력인 데다 이쪽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조총으로 기선을 제압한다면 저희 호위대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 가득한 흑치영의 말에 도현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물론 그렇겠지만 앞으로 날 옆에서 보좌하며 왕권을 수호해야 될 호위대가 이깟 일에 전력을 깎여서는 안 되지. 총융청과 훈련도감에 기별을 넣어서 휘하 병력을 광희문으로 집결시키라고 해.”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만큼 도현이 자신과 호위대를 아낀다는 뜻이었기에, 흑치영은 순순히 수긍하며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령을 보내기 위해 흑치영이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차갑게 식은 찻물을 단숨에 털어 넣은 도현은 벗어 놨던 투구를 고쳐 쓰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골치 아파지지 않으려면 잔불까지 확실히 꺼뜨려 놔야지.”

안 그래도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도현의 눈에 들지 못해 안달이던 이상규와 구인후 훈련대장은 기별을 받자마자, 바람같이 휘하 병력을 몰아 광희문으로 달려갔다.

도현도 호위대 이백을 데리고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 위해 현장으로 나왔다.

흑치영의 호위를 받으면서 갑옷을 차려입은 도현이 말에서 내리자 이상규와 구인후가 얼른 허리를 꺾으며 군례를 올렸다.

“오셨사옵니까.”

허리를 숙인 총융청과 훈련도감 지휘관들을 한차례 스윽 쓸어본 그는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병력은 다 배치했나?”

“예.”

“적을 신속하게 괴멸시키고 최병설과 반란군 잔당을 한 놈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잡아 후한을 남기지 않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저하.”

지시를 내린 도현은 지휘관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 오르자 주위가 한눈에 다 들어왔는데, 무기를 들고 성벽 아래위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병사들을 보자 절로 마음이 든든해졌다.

왕성인 한양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이라고 불리는 총 여덟 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그중에 광희문은 현재의 서울 중구 광희동에 위치한 소문이었다.

따로 시구문屍軀門이나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한양 밖으로 내보내는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평소에는 출입이 거의 없었고 국왕이 있는 창덕궁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인접한 홍인지문에 비해 수비 병력도 적어 반란군이 입성 통로로 잡은 것이다.

그렇게 얼마쯤 기다렸을까 멀리 경기 병영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적이다!”

갑옷이 무거웠지만 묵묵히 참으며 꼿꼿한 자세로 서 있던 도현은 정말 일단의 무리가 지평선을 넘어 곧장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발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투준비! 내 허락이 있을 때까지 절대 적을 공격하지 마라.”

밤새 치열한 실전을 겪어서 그런지 약간의 동요도 없이 성곽 위에 조총을 올리며 담담하게 곧 벌어질 전투에 대비하는 호위대와 달리, 총융청과 훈련도감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걸 보고 도현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상황이 정리되면 군제 개편부터 서둘러야겠군.”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흑치영이 쳐다보자 도현은 한쪽 손을 살짝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지금쯤이면 기마부대도 자리를 잡았겠지?”

“그럴 겁니다.”

상황이 불리해졌을 때 반란군이 도망쳐 골칫거리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 도현은 총융청과 훈련도감 소속, 기병 천이백 명을 미리 밖으로 내보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호를 보내면 포위 소탕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그사이 경기 병영 병사들은 성문에서 이백 보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이제 다 왔다. 모두 기운들 차려라!”

백인장의 말에 밤새 험한 길을 행군해 오느라 뽀얗게 먼지가 묻고 지친 병사들은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사 영감,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 어때서? 여기는 원래 사람의 출입이 없고 한적한 곳이잖아.”

“그래도 무장한 병력이 접근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게 수상합니다.”

경기병사라는 막중한 자리에 있었지만, 주로 상관에게 아첨하고 뇌물을 바쳐 여기까지 올라왔기에 전공이라고는 살기 어려워서 산에 들어간 화전민을 산적이라고 때려잡은 것이 다였던 최병설은, 부관의 말을 일축했다.

“수문장도 병판 대감의 사람이니까 그렇지.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게.”

“그렇지만…….”

한쪽 손을 들어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 부관의 입을 막은 최병설은 약간 퉁명스러운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됐으니까 어서 사람을 보내 성문을 열라고 하게.”

“……예.”

마지못해 대답한 부관은 군관 한 명을 성문 앞으로 보냈다.

군관이 다가오자 문루에서 인기척이 일더니 투구를 깊이 눌러쓴 도현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정지! 어디서 온 무리냐?”

그러자 군관은 미리 지시받은 대로 크게 소리쳤다.

“병판 대감의 지시를 받고 올라온 경기 병영 군사들이오!”

“지금 병판이라고 했나?”

“그렇소. 조금 있으면 군사들이 올 테니 어서 문을 여시오.”

“흥! 아무리 병판이라고 해도 주상 전하의 어명 없이는 오군영 외에 어떤 군대도 도성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으니 썩 꺼져라.”

산천초목이 부르르 떠는 김자점의 명이라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콧방귀를 뀌는 상대의 태도에 군관은 순간 당황했다.

“뭐, 뭐요?”

“오호라. 반역을 일으킨 김자점의 이름을 자꾸 들먹이는 걸 보니 네놈들도 같은 역적도당이로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저 역도들을 모두 붙잡아 무릎을 꿇려라.”

도현의 외침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며 성벽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

성벽 위를 빽빽하게 채운 병사들의 등장에 군관은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크게 놀랐고 뒤에서 다가오던 최병설과 경기 병영 군사들도 기겁을 했다.

“저게 다 뭐야!”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애써 부정하던 최병설은 바로 이어진 도현의 외침에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주상 전하의 총애를 저버리고 역모를 일으킨 김자점과 일당들은 이미 모두 잡혀 의금부 옥사에 갇혀 있다. 너희들도 역도로 죽기 싫으면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거사가 실패하고 수장인 김자점이 붙잡혔다는 말에 최병설의 얼굴이 구겨졌고, 어젯밤 숙영지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불충한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병사들은 크게 동요했다.

“주상 전하를 보위하기 위해 올라간다고 하더니, 우리가 반란군이었어?”

“제기랄.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반역은 삼족을 멸하는 거 몰라. 우린 다 죽었어.”

“설마? 난 그냥 병사兵使가 끌고 오는 대로 따라왔을 뿐이야.”

“그걸 저쪽에서 알아주겠어?”

“미치겠네.”

술렁거리던 병사들이 원망 어린 시선으로 상관들을 쳐다봤지만 최병설과 군관들은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제 어쩝니까?”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최병설은 부관의 물음에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병판 대감이 쉽게 당하실 리가 없다. 이건 필시 세자 쪽에서 우리가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꼼수를 부리는 걸 거야.”

“성벽 위에 올라가 있는 병사들을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건…… 그래! 어디서 장정들을 잔뜩 데려와 군복만 입혀 놓은 거겠지. 병권을 대감께서 쥐고 계신데 세자 측이 저런 군세를 동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흐트러짐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들이 분명한데,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상관의 모습에 부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상대가 성문을 막고 있는 이상 이쪽으로 입성하는 건 틀렸습니다. 잠시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으음.”

평소 성격대로라면 부관의 말을 들어야 했지만 이미 군대를 몰아 여기까지 왔고, 김자점이 가진 연판장에 수결까지 해서 반란 혐의를 벗을 길이 없었기에 최병설은 머리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전군 정렬!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까지 바로 밀고 들어간다.”

“벼, 병사 영감.”

언제나 위험한 일은 피하고 몸을 사리다가 정작 뒤로 물러서야 할 때에 최병설이 엉뚱한 용기 아니, 만용을 보이자, 부관은 화들짝 놀라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최병설은 부관을 무시하고 병사들을 재촉했다.

“어서 공격하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추상같은 명령에 머뭇거리던 군관과 병사들은 급히 대열을 갖췄다.

“돌격!”

“우와아아!”

제대로 된 공성 병기 하나 없었지만 이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드는 모습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성문부터 부숴라!”

그래도 병서는 제대로 읽었는지 제일 먼저 성문을 깨라는 최병설의 지시에 도끼를 든 부월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두꺼운 통나무를 가져와서 만들어 튼튼하다고 해도 부월수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도끼를 찍어 댄다면 견뎌 낼 재간이 없었기에,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문루에 서 있던 도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상대가 하는 걸 지켜보다가 손에 든 지휘봉을 치켜들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조준! 사격!”

지휘봉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궁수와 호위대 대원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쏴!”

슈슈슈슉!

타타탕! 탕! 탕! 탕!

콩 볶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와 화살이 하늘을 온통 뒤덮었고 삽시간에 성문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으아악!”

“크흑.”

“컥!”

미리 조준을 다 끝내 놓고 있은 데다 성문을 부수기 위해 많은 인원이 한곳에 몰려 아군의 사격은 백발백중이었다.

특히 문루 양옆에 배치된 호위대 대원들의 조총 집중사격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좁은 성벽 위에서도 삼 단 대형을 갖추고 연사를 퍼붓자 달려들던 적들은 볏단이 잘려 나가듯 피를 뿌리며 허무하게 쓰러졌다.

훈련도감에도 조총부대가 있었지만 호위대가 가진 신형 조총에 비하면 위력과 연사 속도에서 현저하게 떨어졌다.

얼마나 위력이 큰지 조총이 발사될 때마다 나는 총성과 매캐한 흑색화약의 연기는 아군 역시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궁수들도 지지 않으려는 듯이 쉬지 않고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 아래에 있는 적을 향해 쏴 댔다.

“조총 따위에 밀리지 마라!”

무섭게 덤벼들던 적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총탄에 그대로 기세가 꺾여 버렸다.

어깨에 화살이 꽂힌 병사는 바닥에 넘어져 거친 숨을 헐떡였고 재수 없이 머리에 총탄이 명중한 이는 누군지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 되어 즉사했다.

그걸 본 적들은 하얗게 얼굴이 질린 채 공황 상태에 빠졌다.

“히익.”

“우린 다 죽을 거야.”

“도, 도망쳐!”

벌벌 몸을 떨던 반란군들은 급기야 겁에 질려 지휘관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등을 돌려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후퇴하지 말고 계속 성문을 공격해라.”

최병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전투를 독려했지만 이미 전의를 잃은 부하들을 돌려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틀렸습니다. 훗날을 도모하시려면 지금이라도 후퇴 명령을 내려 남은 병력이라도 보존하셔야 됩니다.”

부관의 말에 최병설은 이를 부드득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퇴각 나팔을 불게.”

“옛.”

잠시 뒤 반란군 진영에서 후퇴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뿌우웅! 뿌우웅!

하지만 이들을 놔줘서 골치를 썩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도현은 달아나는 반란군을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마무리를 지으라고 해.”

“네.”

도현의 지시에 신호수가 붉은색 삼각 깃발을 들어 힘차게 좌우로 흔들자 성문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총융사 이상규는 눈을 번득였다.

“신호가 왔군. 반도들에게 주상과 세자 저하의 위엄을 보여 주자!”

말 위에 탄 채 슬쩍 몸을 뒤로 돌린 이상규의 외침에 총융사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창과 검을 치켜들며 함성으로 전의를 다졌다.

“와아!”

“성문을 열어라!”

끼이이익.

빗장을 풀고 굳게 닫아 놓은 성문이 열리자 검을 뽑아 든 이상규는 말 옆구리를 발로 차며 외쳤다.

“쳐라!”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간 총융청 병사들은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반란군 병사들을 쫓아가 가차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죽어라!”

슈칵!

퍽!

“커헉.”

후퇴하느라 대형이 완전히 흐트러진 상태에서 총융청 병사들이 거세게 공격해오자 반란군은 체계적인 대응을 못 하고 뿔뿔이 흩어져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부관과 함께 말을 타고 도망치던 최병설은 그걸 보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저, 저런.”

“따라 잡히기 전에 어서 한강을 건너야 됩니다. 서두르십시오.”

“제길!”

부하들이야 어찌 되건 일단 자기부터 살고 보자는 생각에 최병설은 연신 말 엉덩이를 채찍으로 때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히히힝.

“이런 쌍!”

바로 앞에 총융청과 훈련도감 깃발을 내건 기마대 천여 명이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 놈도 빠져나가게 하지 마라!”

선두에 선 구인후 훈련대장의 호령에 기병들은 햇빛을 받아 번득이는 검을 치켜들었다.

두두두두!

최병설과 부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절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츄앙!

“큭.”

“꾸에엑.”

채챙! 챙! 챙!

도성을 지키는 정예병들답게 총융청과 훈련도감 기병들은 대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반란군을 유린했다.

질풍같이 달려가면서 휘두르는 장검에 사방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푸르르릉.

특히 구인후 훈련대장은 안전한 곳에서 지휘만 해도 됐지만, 문루에서 전투를 지켜보는 도현한테 잘 보이려고 오랜만에 직접 적의 목을 베는 수고를 아까지 않았다.

서걱.

“끄아악!”

앞에 선 적병의 목덜미에 검을 박아 넣었다가 뺀 구인후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최병설을 발견하고 눈을 번득였다.

“저게 누구야? 이랴!”

말을 달려간 구인후는 최병설을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하하하! 최 병사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헉!”

눈을 크게 뜬 최병설이 놀라 허둥거리자 함께 있던 부관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상대할 테니 어서 피하십시오.”

“아, 알겠네.”

부관에게 싸움을 떠넘긴 최병설은 호위 네 명과 함께 허겁지겁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혼자 남겨진 부관은 자신의 명줄이 여기까지라는 걸 직감하고 손에 쥔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구인후를 향해 마주 말을 달려갔다.

“히야!”

촤창! 챙!

검을 뻗어 일격은 잘 막아 냈지만 바로 이어진 상대의 베기에 부관은 신음과 함께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며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크흑.”

넘어진 그 자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움켜잡으며 힘겹게 고개를 뒤로 돌린 부관은 최병설이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쫓아간 구인후와 기병들에게 붙잡혀 바닥에 끌려 내려오는 걸 보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최병설의 군대는 일각도 안 돼서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힘없이 무너졌고 광희문 앞은 환희에 찬 병사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우리가 이겼다!”

“천세! 천세!”

“우와아아!”

김자점이 일으킨 반란군을 모두 물리친 도현은 신료들이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어전 회의를 소집했다.

밤새 도성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눈치를 살피던 신료들은 선전관이 가져온 입궁 명령에 관복을 챙겨 입고 대궐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했다.

“우상 대감.”

치운다고 했지만 새벽에 벌어진 전투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돈화문 앞에서 가마를 내려 굳은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던 우의정 심기원은 측근인 지사知事 이일원이 다가오는 걸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사 왔는가.”

허리를 숙여 인사한 이일원은 옆에 바짝 붙어 서서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소문 들으셨습니까?”

“뭘 말인가?”

“밤새 시끄러웠던 이유가 바로 병판 대감이 숙원 조씨와 짜고 역모를 일으켰기 때문이랍니다.”

자신도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기에 심기원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평소 알고 지내던 내의원 관리한테 들은 소식이온데 주상께서 승하하셨다고 하옵니다.”

충격적인 소식에 심기원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게 정말인가!”

“목소리가 크십니다.”

실책을 깨닫고 헛기침을 한 심기원은 목소리를 낮추며 다그치듯 물었다.

“확실한 건가?”

“예. 일이 벌어지면 저한테 알려 주기로 했사온데 새벽에 대궐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운 좋게 몰래 빠져나와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이것 참…….”

어차피 중병을 앓고 있어 침과 약으로 겨우 버티던 인조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자점과 숙원 조씨의 반란을 단번에 쳐 내 버리고 대궐을 장악한 상태에서 임금인 인조까지 승하했다면 자연스럽게 세자가 왕좌를 물려받게 되어, 이제 명실상부한 조선의 주인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눈엣가시 같았던 김자점이 몰락한 건 좋았지만 역모 사건으로 정국이 차갑게 얼어붙고 세자인 도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심기원을 보며 이일원이 불안한 듯 말했다.

“대궐을 손에 넣은 세자가 분명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시작할 텐데, 이대로 입궐해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돌려 이일원을 힐끗 쳐다본 심기원은 퉁명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대로 돌아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칩거라도 하자는 건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가뜩이나 역모로 살벌한 정국인데 우리가 옥쇄까지 찍힌 명령서를 무시하고 입궐하지 않는다면 김자점 일파와 함께 끌고 갈 빌미만 준다는 걸 왜 모르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만약 먼저 치려고 한다면 호락호락 당해 줄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오군영과 도성이 도현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였기에 일단은 바짝 엎드려 거센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알았으면 따라오게.”

“예.”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심기원은 앞에 보이는 돈화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돈화문 앞은 아주 살벌한 분위기였는데 무기를 들고 눈을 무섭게 부릅뜬 용호용 병사들이 늘어서 있고 잔뜩 기가 죽은 신료들이 눈치를 보며 그 사이를 지나 대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대궐을 지키는 용호용의 수장이 된 신철은 허리에 검을 찬 채 들어오는 신료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손에 든 명단에 적힌 이가 보이면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마침 염소수염을 한 문관 하나가 쭈뼛거리며 나타나자 신철이 턱짓을 했고, 바로 내금위 위사들이 다가가 상대를 양쪽에서 붙잡았다.

“왜, 왜 이러나?”

“이조 좌랑 박지천. 사사로이 육의전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편의를 봐준 혐의로 체포한다.”

“모함이오!”

상대가 아니라고 발뺌하자 신철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반은 돈으로 수원에 일천 평이 넘는 땅을 샀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으니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뭣들 하느냐? 어서 의금부로 끌고 가라!”

“옛.”

“사, 살려 주시오.”

크게 대답한 위사들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박지천을 강제로 연행했고 주위에 있던 신료들은 그가 도와 달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행여나 불똥이 튈까 봐 애써 외면했다.

눈앞에서 동료가 끌려가는 걸 본 관리들은 더욱 몸이 얼어붙었고 부들부들 떠는 이일원과 달리 우의정 심기원은 담담한 얼굴로 문을 걸어 들어갔다.

거물급의 등장에 신철은 눈을 반짝이며 가까이 다가와 먼저 알은척을 했다.

“이거, 우상 대감 아니십니까?”

“흐음. 누구신가?”

심기원처럼 높은 관직에 있던 이가 일개 위사장을 알 리가 없었고, 더군다나 신철은 수년간 죽은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에서 지냈기에 더 그랬다.

“죄송합니다. 먼저 제 소개부터 드려야 했는데 이번에 새로 용호영 별장이 된 신철이라고 합니다.”

“그럼 박 별장은 어떻게 됐나?”

“불충하게도 역모에 가담해 김자점 일파를 대궐로 끌어들이려고 하다가 발각돼 세자 저하께서 즉결 처분하셨습니다.”

“그렇군.”

대충 짐작한 일이었기에 심기원은 비교적 차분한 얼굴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앞에 선 신철을 보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볼일이라도 있나?”

애써 아닌 척하지만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상대를 보며 신철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세자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고맙네.”

깔보는 듯한 시선이 마음에 걸렸지만, 신철이 슬쩍 길을 비켜 주자 일단 당장은 세자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한 심기원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도현은 이번 반란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김자점과 연관되어 있는 관리들을 잡아내 몽땅 하옥시켰다.

평소라면 신료들이 탄압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을 테지만, 역모라는 민감하고 엄한 상황 속이었고 호위대를 통해 조사해 본 결과 전부 크고 작은 비리를 저질렀기에 처벌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전에 모인 대소 신료들은 빈자리가 곳곳에 보이고 무장한 위사들이 뒤편에 서 있자 다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 상선의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세자 저하 납시오!”

문이 열리며 도현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예복이 아니라 마치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까지 차고 있었다.

그걸 본 관리들은 놀라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으음.”

“이런.”

그러든 말든 도현은 당당한 걸음으로 관리들 사이를 지나 왕좌 바로 앞에 섰다.

한차례 모여 있는 관리들을 스윽 훑어본 도현은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들을 이렇게 모이라고 한 건 어젯밤 종묘사직을 위협하고 나라를 어지럽히려는 불충한 무리의 준동이 있었기 때문이오!”

다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도현의 입에서 역모 이야기가 나오자 관리들은 숨을 죽인 채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사전에 발각되어 역모를 막을 수 있었지만 주상 전하를 잘 받들어 모시고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될 조정 대신들이 주도가 되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다니 정말 통탄할 노릇이오.”

“송구하옵니다, 저하.”

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석에 자리한 정뇌경이 앞으로 나섰다.

“신 사헌부 장령 정뇌경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말해 보시오.”

“주상께서 와병 중인 때에 감히 군사를 동원해 대궐을 범하려 한 짓은 용서할 수 없는 대죄이오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련자들은 국법에 따라 처벌해야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정 장령의 말이 맞사옵니다.”

“일벌백계를 내려야 하옵니다.”

주로 젊은 신료들과 심양 관저에서 도현과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정뇌경의 말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나섰다.

법대로 처리한다면 역모 가담자들은 모두 사형이었고 삼족까지 노비로 삼게 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집안 하나를 완전히 뿌리째 뽑아 버리는 가혹한 형벌이었지만, 조선시대에서 가장 큰 죄인 역모에 관련되어 벌을 받는 거였기에 어느 누구 하나 심하다고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도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국법을 바로 세우고 왕권의 지엄함을 보여 주기 위해 본인이 직접 국문을 관장하겠소.”

“저하께서 직접 죄인들을 심문하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렇소.”

도현이 직접 국문을 주도한다는 것은 언제든 마음에 안 드는 이를 역모에 끼어 넣어 숙청해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에 심기원은 다급해졌다.

“앞으로 왕위에 오르실 저하께서 그런 험한 일을 직접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사오니 형조판서에게 맡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심기원의 이야기에 도현한테 너무 많은 힘이 쏠리는 걸 견제하는 신하들이 얼른 나서 동조를 했다.

“그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행여 저하의 명예에 누가 될지 염려스럽사옵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속마음을 단번에 파악한 도현은 내심 콧방귀를 끼고는 크게 호통을 쳤다.

“감히 아바마마께 도전하고 조선을 뒤엎으려고 한 무도한 무리가 있는데, 왕실과 국가를 지켜야 될 책임이 있는 내가 직접 국문을 하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이오!”

“하오나…….”

“왜, 내가 국문을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거요?”

재차 만류하던 심기원은 도현이 눈을 매섭게 뜨며 묻자, 찔끔한 얼굴로 얼른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요? 이번 역모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마무리를 지을 테니 경들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시오.”

“…….”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 해서든 제지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더 나섰다가는 역모와 관련해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비치도록 도현이 교묘하게 분위기를 만들었기에, 심기원과 다른 관리들은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국문 문제까지 일사천리로 상황을 정리한 도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경들에게 한 가지 슬픈 소식을 전할 것이 있소.”

“그게 무엇이옵니까?”

다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나 하는 시선으로 도현을 쳐다보는 가운데 심기원을 포함한 몇몇은 뭔지 대충 짐작하고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좌중을 살핀 도현은 그런 사람들의 얼굴을 마음속에 새겨 두며 입을 열었다.

“슬프게도 어젯밤 아바마마께서 지병을 이기지 못하시고 승하하셨소.”

순간 대전은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큰 충격에 휩싸였고 한동안 멍하니 있던 관리들은 이내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 일이!”

“전하! 이렇게 가시다니.”

“흑흑흑.”

부자지간의 정이 없었기에 인조의 죽음에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지만, 유교를 숭배하는 관리와 양반 사대부 들에게 괜한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표정을 지으며 도현이 말했다.

“상선이 아바마마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전해 주도록 하겠소.”

도현이 시선을 주자 한쪽에 서 있던 상선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몇 발자국 나와 손에 들고 있던 비단 두루마리를 펼쳤다.

“지금부터 주상 전하의 고명顧命을 전하겠습니다. 흠. 짐이 불민하여 재위에 있는 동안 만백성들이 고난을 겪고 남한산성에서 오랑캐한테 무릎을 꿇는 잊지 못할 치욕을 당했으니 어찌 열성조들을 뵐지 염치가 없도다. 나는 이제 명이 다했지만 내 후대는 이런 오욕을 겪지 않도록 대소 신료들이 힘을 합쳐 세자를 잘 보필하길 당부하노라. 먼저 후사는 세자인 호淏(효종의 이름)가 잇게 하고, 온갖 패악질을 일삼고 역모를 꾸민 숙원은 그 품계를 거두고 내명부에서 삭제토록 하라. 이상입니다.”

말을 끝낸 상선은 옥쇄가 선명하게 찍힌 문서를 신료들에게 보여 줬다.

“이 불충을 다 어떻게 해야 될지…….”

“전하!”

“영상.”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영의정 김류는 도현의 부름에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저하.”

“아바마마의 유교대로 당장 숙원 조씨를 벌하고 경이 총호사가 되어 국상을 관장하고 절차를 진행할 삼도감을 설치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다들 슬프고 힘들겠지만 이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도록 합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회의를 끝내고 대전을 나온 심기원은 힐끗 고개를 뒤로 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완전히 졌군.”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옆에 있던 이일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심기원은 그를 보며 말했다.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죽은 소현세자 못지않은 잠룡이지 않나?”

“세자 저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방금 대전에서만 해도 국상을 이유로 직접 국문을 맡지 못하게 할까 봐 일부러 주상 전하께서 승하하신 걸 제일 마지막에 꺼내지 않나.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고명서에 숙원 조씨의 처분을 끼워 넣는 기지를 발휘하다니, 머리 쓰는 것이 오랜 세월 조정에서 굴러먹은 늙은 너구리들보다 더 능수능란해 보여.”

“하긴 그렇군요. 어찌 됐건 잘못하면 돌아가신 선왕의 여인을 핍박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는데, 주상 전하의 유교로 숙원 조씨가 내명부에서 쫓겨난다면 그런 구설이 나올 여지가 아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거야. 아무래도 당분간은 바짝 엎드려 있는 것이 좋겠어. 자네도 명심하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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