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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폭풍 전야 (28/104)

6권

폭풍 전야

살짝 머리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도현은 방 안을 스윽 한번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

“혼자 왔나?”

“아니옵니다.”

대답과 함께 왼쪽에 있던 문이 열리더니 이관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사내가 한 명 안으로 들어와 공손히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무례를 저질렀나이다. 소인 이완이라고 하옵니다.”

이완李浣은 역사적으로 효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는데, 아버지인 이수일은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형조판서까지 역임했다.

이런 명문가의 자제인 이완은 1624년 무과에 급제한 뒤 각지의 현령을 거쳐 수안군수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팔기군과 용감하게 싸워 많은 전공을 올렸다.

그 후 효종이 등극하자 북벌의 핵심 무관으로 신임을 받으며 포도대장과 어영대장을 거쳐 당시 최고의 무력 부대인 훈련원의 수장이 됐다.

역사서에서 읽었던 대단한 인물을 실제로 만나게 된 도현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반갑소.”

“장차 군주가 되실 분이신데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송구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자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말을 편히 하겠네.”

“예.”

“다들 자리에 앉지.”

도현이 말을 하자 김덕술과 박태철이 호위하듯 양옆에 자리했고 맞은편에는 이완과 동생인 이관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역시 장군을 보고 있으니 조선 최고의 무장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틀리지 않은 것 같네.”

“과찬이시옵니다.”

“아니. 지난 병자호란 때 청나라 팔기군에게 속수무책으로 강토가 유린당하는 가운데서도 장군과 몇몇 무장들이 거둔 승리를 전해 듣고 얼마나 통쾌하고 기뻤는지 모를 걸세.”

도현의 칭찬에 이완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저 맡은 바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비록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 묻혀 버렸지만 장군의 승리는 저 무도한 청국에 조선의 기개를 보여 준 자랑스러운 일이었네.”

혼란 속에 잊혀 버린 일을 도현이 기억하고 있자 이완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어버린 수많은 장졸들을 위해 위령비라도 하나 세워 주고 싶지만 청나라의 눈 때문에 그러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군.”

“세자 저하께서 이렇게 마음을 쓰고 계시니 저세상에서나마 병사들도 감사해할 겁니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도현은 직접 손을 뻗어 앞에 있던 술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한 잔 받게.”

“예.”

얼른 자세를 바로 한 이완은 도현이 술을 가득 채워 주자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잔을 깨끗이 비웠다.

그러게 몇 순배 술을 마신 도현은 정색한 채 이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장군.”

“말씀하십시오.”

“요즘 조정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나?”

“…….”

민감한 물음에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던 이완은 이내 약간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사옵니까?”

“물론이네.”

“북경을 함락시킨 청나라의 기세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다는 건 알지만, 저들이 언제부터 대륙의 패자였다고 너무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인 것 같아 안타깝사옵니다.”

아무리 도현이 허락했다고 해도 조정의 수장이 인조였기에 자칫 임금을 능멸한 것이 되어 삼족을 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조공을 바치며 굽실거리던 야인들에게 무릎을 꿇은 것도 치욕스러운데, 김자점을 비롯한 일부 간신배들이 청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조정을 마음대로 농락하고 사리사욕만 채워 나가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고 분했기에,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역시 짐작한 대로 주화파, 그중에서도 노골적으로 청나라에 빌붙어 권력을 휘두르는 김자점 일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걸 확인한 도현은 내심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차분한 얼굴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 장군의 이야기에 나도 공감하네.”

“정말이시옵니까?”

“일부 사대부들은 형님과 내가 청국에 가서 오랑캐 물이 들었다면서 수군거리지만, 힘겨운 볼모 생활을 참고 견디며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건 언젠가 이 치욕을 되갚아 주고 말리라는 복수심이었네.”

그동안 소현세자와 도현의 고초가 얼마나 컸을지 떠올린 이완은 얼굴 가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청나라가 대륙을 제패해 가는 걸 직접 눈으로 보며, 기력이 다해 겨우 숨만 쉬고 있는 늙은 사자인 명만 바라보고 있기보다는, 스스로 힘을 길러 복수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자존自尊을 강조했는데, 그걸 대신과 사대부 들이 오해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네.”

“저하…….”

“장군도 다른 이들처럼 재조지은을 갚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명나라와 계속 손을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오?”

도현이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묻자 이완은 약간 당황스러워하다가 이내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자고로 은혜를 모르는 건 금수禽獸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배웠습니다.”

기대와 다른 대답에 도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려고 할 때 이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임진년의 은혜는 이미 차고 넘치도록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 두 번의 호란胡亂도 따지고 보면 청과 저희 조선의 사이가 나빠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명과 동맹 관계에 있기 때문에 화를 당한 것이니까요.”

바른 자세로 앉아 또박또박 이완이 하는 말에 도현은 눈을 반짝 빛냈다.

“바로 그걸세. 하지만 자주성을 세우고 청나라에 복수를 하고 싶어도, 아직까지 명국의 망령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이들과 나라가 어떻게 되든 사리사욕만 채우려는 간신배들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한숨만 나오는구먼.”

“신료와 사대부 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니 너무 상심하시지 마십시오, 저하.”

그러자 도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장군이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살짝 말끝을 흐리는 이완을 향해 도현이 오늘 이런 은밀하게 만남을 주선한 진짜 이유를 꺼내 놨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좁은 조선 땅에서 벗어나 드넓은 만주 벌판을 질타한 옛 조상의 모습을 되찾는 데 이 장군이 힘을 보태 줬으면 좋겠네.”

순간 이완은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이지만 아직 인조가 멀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사사로이 세력을 모으고 키우는 건 명백한 반역 행위였다.

하지만 도현이 품고 있는 커다란 포부는 무장으로서 이완의 심장과 피를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약간 껄끄러운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상 전하께 말씀을 드리고 도움을 받으시지요.”

이완의 이야기에 도현은 씁쓸한 얼굴로 앞에 있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형님이 급사하신 걸 보고 마음을 바꿨네. 이 장군은 병치레도 거의 하지 않고 건강하던 형님이 갑자기 세상을 버린 것이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도 저잣거리에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이완도 뭔가 석연치 않다고 여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설마 주상께서…….”

“아무리 행동이 탐탁지 않다고 해도 어찌 부모가 피를 나눈 자식을 해할 수 있겠나?”

“그럼?”

“권력에 눈이 먼 숙원 조씨와 김자점 일파가 꾸민 짓이네.”

“으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도현의 입에서 직접 이야기를 듣자 이완은 눈을 치켜뜨고는 낮게 침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권력이 좋다고 하지만 그런 간악한 짓을 저지른 자들을 난 절대 용서할 수 없네.”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너무 엄청난 일인지라 이완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쪽에서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물론이네.”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 도현이 눈짓을 하자 지금까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김덕술이 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하나 꺼내 상 위에 올려놨다.

“이게 뭡니까?”

“저들이 어떻게 형님께 위해를 가했는지 소상히 적혀 있으니 직접 읽어 보게. 참고로 청탁을 받고 손을 쓴 내의원 의원 이형익이 직접 쓴 것이네.”

소현세자가 급사했을 때 치료를 맡고 있던 자가 바로 이형익이라는 걸 이완도 알고 있었기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종이를 펼친 이완은 천천히 적혀 있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내용을 볼수록 점점 표정이 상기되어 가던 이완은 결국 숙원 조씨와 김자점이 벌인 천인공노할 짓에 분통을 터트렸다.

“어찌 인두겁을 쓰고 이런 짓을 저지를 수가!”

“나도 설마 했는데 사실을 확인하고 고통 속에 죽어 갔을 형님이 얼마나 분하고 원통했을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네.”

도현은 속에 담아 두고 있던 걸 토해 내듯이 말하며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숙원 조씨에게 푹 빠져 눈과 귀가 가려진 아바마마께서는 믿으려고 하지 않으실 걸세.”

부끄러운 이야기였지만 늙은 인조가 숙원 조씨의 치마폭에 싸여 정신을 못 차린다는 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이완은 어두운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세자였던 형님을, 그것도 대궐에서 서슴없이 해친 자들이니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 심한 짓도 벌일 것이야. 특히나 요즘 들어 아바마마의 건강이 안 좋은 걸 생각하면…….”

슬쩍 말끝을 흐렸지만 이완은 도현이 뭘 말하는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도현이 세자 자리에 올라 있는 상태에서 인조가 승하한다면, 그동안 주상을 등에 업고 권력을 쥐고 휘두르던 숙원 조씨와 김자점 일파가 숙청당해 몰락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결과였다.

당연히 상대는 반항할 테고 그러면 최악의 경우 내란까지 벌어질 위험이 있었다.

뼛속까지 무인이라 권력 다툼 같은 건 관심이 없는 이완이었지만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고 감정적으로 주화파, 그중에서도 김자점 같은 골수 매국노들을 싫어했기에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세자라고 해도 사사로이 세력을 끌어모으는 건 역모에 해당하는 중죄였기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방 밖에서 가야금 소리와 기생들이 손님과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가운데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이완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될지 하교해 주십시오.”

표시는 안 냈지만 내심 약간 초조해하던 도현은 이완이 그를 돕겠다고 하자 반색을 했다.

“이 장군,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조선의 무장으로서 조정을 바로 세우고 종묘사직을 지키는 일에 두 팔 걷고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단순히 무예만 뛰어난 장수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듯 은근슬쩍 자신의 결정에 정당성까지 부여하는 이완의 모습에 도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장군이 날 도와준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네.”

“과찬이십니다.”

“자! 우리의 앞날과 북벌北伐을 위해 건배하세.”

마음 한구석에 약간의 찝찝함을 가지고 있던 이완은 도현의 입에서 나온 북벌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지금 북벌이라고 하셨습니까?”

떨리는 말투 속에 담긴 이완의 열망과 기대를 읽은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왕위에 오른다면 말만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니라 힘을 키워 기필코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을 되갚아 주고 드넓은 만주 벌판에 봉황 깃발을 휘날릴 걸세.”

봉황은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 그대로 군대를 몰아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이완을 비롯한 조선의 무장들이 꿈에서도 바라 마지않는 것이다.

답답하던 가슴을 뻥 뚫어 주는 것 같은 도현의 이야기에 이완은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목숨을 걸고 저하를 보필하겠습니다.”

“이 장군만 믿겠네.”

그렇게 군부에서 명망이 높은 이완을 수하로 끌어들인 도현은 이날 처음으로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북벌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함께한 도현은 모종의 지시를 내리고는 활동비로 쓰라며 이완에게 엽전 천 냥을 하사하고 헤어졌다.

한편 숙원 조씨는 벌써 도현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타기 시작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수라간 상궁과 동궁전 기미 상궁을 거처로 불러들여 참았던 분노를 터트렸다.

“너희가 감히 나를 우습게 보는 게냐!”

두 사람이 처소에 당도하자마자 다짜고짜 그렇게 소리친 숙원 조씨는 찻잔을 집어 들어 내던졌다.

찻잔은 기미 상궁의 몸에 맞고 그대로 발치에 데굴데굴 굴렀지만 안에 들어 있던 뜨거운 찻물을 흠뻑 뒤집어쓰게 된 그녀는 입술만 깨물었을 뿐,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것은 수라간 상궁으로, 그대로 납죽 엎드리며 숙원 조씨에게 말했다.

“마마, 어찌 저희가 언감생심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부디 고정해 주십시오.”

“닥쳐라! 네년들이 나를 물 먹일 심산이 아니었다면 어찌하여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게야?”

“그, 그건…… 저하께서 워낙 눈치가 빠르셔서…….”

“흥, 그래도 제 목숨 아까운 건 아는 모양이구나.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는 걸 보니. 설마하니 세자가 하루에 한 끼도 안 먹고 내내 굶고 다닌단 말이냐?”

콧방귀를 뀌면서 숙원 조씨가 차갑게 대꾸하자 수라간 상궁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은 모양인데,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 줘야겠구나.”

그렇게 말한 숙원 조씨가 눈짓을 하니 재빨리 근처에 있던 궁녀들이 달려들어 수라간 상궁과 기미 상궁의 양팔을 붙잡았다.

움직일 수 없도록 단단히 옭아맨 후, 야문 손끝으로 허벅지와 배, 팔 안쪽의 제일 살이 여린 부분을 번갈아 가며 꼬집으니 절로 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궁에서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거나 처벌할 수 없으니,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벌을 주고 싶을 때 제일 즐겨 쓰는 수법이었는데, 고통을 주면서도 얼굴이나 밖으로 드러나는 부위에는 손을 대지 않으니 쉽게 들키지도 않아, 주로 후궁에서 많이 행해졌다.

입에 억지로 천이 쑤셔져 있어 제대로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상태로 윽윽 하면서 몸을 이리저리 뒤트는데, 눈물이 마구 흘러나왔다.

그렇게 악몽 같은 시간을 겨우 견뎌 내고 있는데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상궁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숙원 조씨에게 귓속말을 했다.

“뭐라? 그자가 어쩐 일로…….”

잠시 생각하던 숙원 조씨는 궁녀들을 향해 귀찮다는 듯이 손짓했다.

“그만하면 됐다. 얼른 치우고 자리를 정리해라.”

그 말에 궁녀들이 힘없이 축 늘어진 수라간 상궁과 기미 상궁을 끌고 나가려는데, 숙원 조씨는 깜박했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향해 마지막 일침을 놓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지만 다음번엔 진짜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년들이 죽어서 이 궁을 나가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야.……그래, 대궐 위사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어찌 될까? 주상 전하께서는 궁내의 기강이 흐트러지는 걸 싫어하시니 아마 곤장을 맞고 주리를 트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텐데…….”

죽여도 깨끗하게 죽이지는 않겠다는 숙원 조씨의 악독한 말에 두 사람은 사시나무 떨 듯이 흠칫거렸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든 걸 본 숙원 조씨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후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드시라 해라.”

“예.”

김 상궁이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후, 병조판서 김자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흠.”

낮게 헛기침을 한 김자점은 숙원 조씨에게 인사를 하고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한두 번 오신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구경하십니까?”

“아니요. 무슨 향을 쓰시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향?”

“아까 언뜻 들으니 고양이들끼리 싸우는 소리가 요란하던데, 막상 마마의 처소에 오면 짐승 냄새 대신에 좋은 꽃향기만 나니 신기해서 물어봤습니다.”

두 상궁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본 김자점이 비꼬면서 냉소를 지었다.

“호호. 병조판서께서 나랏일만 잘하시는 줄 알았더니 코도 보통이 아니시군요.”

하지만 숙원 조씨도 속내가 능구렁이 같기로는 만만치 않아 아무렇지 않게 김자점의 비꼼을 흘려버리고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탁 접으면서 눈매를 날카롭게 했다.

“한데 병조판서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오늘 사주단자를 올렸다는 걸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마주 앉은 김자점의 이야기에 숙원 조씨는 반색을 했다.

“오! 그래요. 이제 그럼 진짜로 병판하고 내가 사돈이 되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이번 결혼이 성사되면 자신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지기에 김자점의 입에도 살며시 미소가 걸렸다.

신랑 측 사주단자가 들어오자 인조는 정식으로 길일을 골라 김자점의 손자와 효명 옹주의 혼례를 공표했다.

직계 왕족이라도 국왕이나 세자처럼 계승 서열이 높지 않았기에 따로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인조가 총애하는 옹주였기에 따로 내탕금까지 털어 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다.

효명 옹주의 혼례 준비로 대궐이 어수선한 가운데 시강원 학사들과 공부를 끝낸 도현이 거처에서 조용히 쉬고 있을 때 뜻밖의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저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들어와.”

문이 열리며 칠현과 함께 얼굴이 아주 익숙한 중년 내관이 방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절을 올렸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저하.”

“아니. 그대는 최 내관 아닌가?”

“예.”

약간 초취한 얼굴로 앞에 선 중년 내관은 죽은 소현세자의 측근이었던 최형외였다.

“정말 반갑군. 일단 앉게.”

“네.”

“북경에서 헤어지고 못 봤으니 거의 반년 만이군.”

“진작 찾아뵈어야 되는데 송구하옵니다.”

“아닐세. 그것보다 듣기로 사가에 계시는 형수님을 따라 갔다고 하던데 잘 지내시는가?”

그러자 최 내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큰일이 겪으시고 아직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홀로 대궐을 나오셔서 그런지, 식사도 잘 안 하시고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십니다.”

“저런, 그러실수록 건강을 챙기셔야 되는데 걱정이군. 몸이 상하지 않게 자네들이 옆에서 잘 보살펴 드리게.”

“…….”

어찌 된 일인지 무례인 줄 알면서도 최 내관이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도현은 의아한 시선을 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실은 강빈 마마를 모시고 있던 궁인들에게 다시 대궐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린 거야?”

“주상 전하이시옵니다.”

“아바마마께서?”

혹시라도 욱하는 마음에 도현이 사고를 칠까 봐 한쪽에 시립해 있던 칠현이 얼른 부연 설명을 했다.

“지시는 주상 전하께서 내리셨지만 분명 숙원 조씨가 옆에서 부추겼을 겁니다.”

단단히 화가 난 듯 도현은 옆에 있는 비단 팔걸이를 세게 꽉 움켜쥐면서 언성을 높였다.

“아바마마의 총애를 받아 위세가 등등하다고 하지만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께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계신데, 감히 후궁이 이딴 짓을 벌이다니 간이 배 밖에 나온 모양이군.”

“저하…….”

“아무리 조씨가 부추긴다고 해도 그렇지 어린 조카들의 어머니이자 큰며느리인데 이리 모질게 대하시다니, 너무하시는군.”

인조처럼 강빈과 조카들을 자신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 방해물로 생각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최 내관은, 도현의 반응을 보고 안도하는 한편 혹시라도 화가 미칠까 봐 모두 외면하는 가운데, 끝까지 강빈에게 마음을 써 주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그런 최 내관을 보며 도현이 걱정스러운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형수님 옆에는 시중들어 드릴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가?”

“아닙니다. 장 상궁과 나인 한 명이 남아 있사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도현이 살짝 머리를 끄덕이자 최 내관이 품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강민 마마께서 저하께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건네받은 도현은 내용물을 꺼내 펼쳐 봤다.

안에 들어 있던 건 뜻밖에도 만상과 송상이 발행한 이십만 냥짜리 어음 두 장이었다.

“이건?”

“돌아가신 소현세자께서 남기신 거라고 하시며 대업을 위해 써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도현은 돈의 출처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봉황상단을 운영하며 소현세자 몫으로 챙겨 준 수익금과 농장 매각 대금이 분명했다.

대궐에서 쫓겨나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소현세자의 마지막 남은 유산인 이 돈을 강빈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주려는지 속뜻을 짐작한 도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숙원 조씨의 방해를 이겨 내고 왕위에 올라 채 못 다 피고 꺾인 소현세자의 꿈을 이뤄 달라는 무언의 압력이자 부탁이었다.

여장부라고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강빈다운 행동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도현은 어음을 다시 봉투에 넣고는 최 내관 쪽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형수님의 뜻은 잘 알았으니 이건 가지고 계시다가 나중에 조카들을 위해 쓰시라고 전해 주게나.”

그러자 최 내관은 봉투를 챙기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강빈 마마께서 절대 다시 받아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억지로 돌려보내신다면 필요 없다는 것으로 알고 찢어 버린다고 하셨으니 부디 성의를 받아 주십시오, 저하.”

“허어. 이것 참.”

도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대쪽 같고 배포가 큰 강빈이라면 단순히 엄포를 놓는 것이 아니라 진짜 어음을 찢어 버리고도 남았다.

“강빈 마마의 정성을 생각하셔서 받으시지요.”

옆에 있던 칠현까지 거들고 나서자 고심 끝에 도현은 결국 어음을 받기로 했다.

“할 수 없군. 자네가 형수님께 고맙다는 말을 전해 주게.”

“예.”

공식적으로 바깥출입이 어려운 도현과 달리 최 내관은 일과 시간이 끝나면 퇴궐을 하기에 사저로 강빈을 찾아가기 쉬웠다.

“그건 그렇고 다시 대궐로 복귀했다니, 어디로 배치되는 건가?”

질문을 받은 최 내관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워낙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믿고 따르던 소현세자가 급사하고 강빈마저 대궐에서 내쳐지며 최 내관과 예전 동궁전 소속 궁인들은 완전히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마 모르긴 해도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는 숙원 조씨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는 건 물론이고 강빈의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앞으로 한직을 전전하며 생활이 엄청 힘들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대궐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최 내관이었기에 자신의 그런 운명을 어느 정도 짐작한 듯했다.

최 내관과 궁인들의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던 도현은 문득 이들을 자신이 끌어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숙원 조씨의 눈 밖에 난 자들이니 배신의 가능성이 적고 어려운 상황에서 손을 내민 자신을 진심으로 따를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도현은 앞에 앉아 있는 최 내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최 내관.”

“예, 저하.”

“심양에서 그대가 형님을 충심으로 모신 것처럼 이제부터 날 도와주면 안 되겠나?”

도현의 말에 놀란 최 내관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가 말씀이십니까?”

“그러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히 제가 방해나 되지는 않을지…….”

혹시라도 부담이 될까 봐 꺼려 하자 도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들을 가엽게 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 거두려는 거네. 그리고 돌아가신 형님의 유지를 이어 가고 숙원 조씨와 김자점 일파에게 복수를 해야 되지 않겠나?”

“……!”

소현세자 이야기를 꺼내자 힘 빠진 늙은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최 내관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솟아났다.

그러고는 도현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자들을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확신이 없었다면 예친왕을 부추겨서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걸세.”

진중하면서도 태산 같은 기세를 내뿜으며 도현이 하는 말에 최 내관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절을 하고는 결의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 최형외 부족한 것이 많지만 저하를 보필하며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피우겠습니다.”

“자네를 거두게 되다니 정말 기쁘군. 오늘 한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해 주겠네.”

“망극하옵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도현은 앞으로 가서 최 내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주며 신뢰와 기쁨을 나타냈다.

그렇게 최 내관뿐만 아니라 예전에 소현세자 부부를 따르던 궁인들을 모두 휘하로 흡수한 도현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대궐 안에서 숙원 조씨와 맞설 수 있는 세력을 어느 정도 갖출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시간이 흘러 김자점 손자와 효명 옹주의 혼례가 치러졌는데, 숙원 조씨가 인조를 부추겨 인정전 앞에서 식을 올렸다.

대관식이나 세자 책봉식 같은 국가적인 행사 때에만 쓰는 인정전 앞뜰에서 예식을 하는 것부터 법도에 어긋나는 거였고,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수만 냥을 써 벌이는 호화로운 혼례에 백성들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들까지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숙원 조씨와 김자점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과시라도 하듯 너무 사치스럽다는 이야기를 깡그리 무시하고 혼례를 강행했다.

“호호호! 이제 정말 가족이 됐네요.”

상석에 앉은 숙원 조씨가 한쪽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리며 하는 말에 김자점도 미소를 띤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그렇군요. 마마님을 닮아 혼례복을 입은 옹주마마가 얼마나 예쁘신지, 도통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김자점의 아부에 기분이 좋은지 숙원 조씨는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렸다.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것이 많으니, 병판께서 예쁘게 봐주세요.”

“물론이지요. 제 친딸처럼 여길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네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야기를 나누던 숙원 조씨는 은근한 시선으로 앞에 있는 김자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전하와 사돈이 되셨으니 우의정 정도는 하셔야 되지 않겠어요?”

“제가 말씀이십니까?”

“뭐, 병판 정도면 능력도 있고 그동안 전하를 보필한 공이 크니, 삼정승 반열에 오를 때가 된 것 같아 드리는 이야기예요.”

순간 김자점의 눈이 뱀처럼 사악하게 번득였는데, 정승이 되고 싶다는 야망보다 현재 우의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과 경쟁 관계인 심기원이기 때문이었다.

“말씀이야 감사하지만 지금 우의정을 맡고 있는 심기원 대감이 별다른 잘못을 한 것도 없는데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반발이 클 겁니다.”

그러자 숙원 조씨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흥. 그래 봤자 전하께서 어명을 내리시면 따라야지 어쩌겠어요.”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지만,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하들의 힘이 강해 아무리 주상이 어명을 내려도 신료와 사대부 들이 들고일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심기원처럼 휘하에 많은 세력을 거느린 인물이라면 더 건드리기 어려웠는데,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괜히 가만히 있는 자를 밀어내는 무리수를 두려는 숙원 조씨의 행동에 김자점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찌 됐건 이제 혼인동맹을 맺어 끝까지 함께 가야 될 공동 운명체가 된 만큼 김자점은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하며 좋게 숙원 조씨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혼례를 치르자마자 제가 우의정으로 승차하게 되면 여기저기서 뒷말이 나와 주상 전하와 마마님께 누가 될 수 있으니 다음 기회로 미뤄 주십시오.”

기껏 생각해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김자점이 거절하자 마음이 상한 숙원 조씨는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평양 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라고 병판께서 내키지 않으신다니 어쩔 수 없네요.”

“화가 나셨습니까?”

“아니에요.”

“다른 세력들의 견제를 조심하는 것도 있지만 제가 계속 병조판서직을 맡으려는 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자점의 말에 숙원 조씨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봤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그러자 김자점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살짝 낮춰 이야기를 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전하의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생겼을 경우 제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야 마마님께 유리하게 뒷수습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명을 듣자마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숙원 조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으음. 내가 그것까지 미처 생각을 못 했군요.”

“그건 최악의 경우고 전하께서 보위에 계실 때 빨리 숭선군 마마를 세자로 만들어야 되는데, 지난번에 말씀하신 건 어떻게 됐습니까?”

독살에 대해서 묻자 숙원 조씨의 고운 이마가 찡그려졌다.

“손을 쓰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숙원 조씨의 모습에서 김자점은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다는 걸 짐작했다.

처음부터 독을 쓰는 것에 회의적이던 김자점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마마, 그러지 마시고 다른 방법을 써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좋은 수라도 있어요?”

“세자뿐만 아니라 나중에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 강빈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묘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숙원 조씨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관심을 보이자 김자점은 자신이 계획한 음모를 말해 줬다.

“제가 알아보니 대궐에서 나간 이후 강빈과 세자가 자주 서한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취한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형수라고 세자가 챙기는 모양인데 그래 봤자 저들이 뭘 할 수 있겠어요?”

냉소에 찬 숙원 조씨의 말에 김자점은 씨익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혹시 압니까? 권력에 눈이 먼 아들과 지아비를 잃고 악에 받친 며느리가 손을 잡고 전하를 시해할 음모를 꾸밀지.”

말이 끝나지 무섭게 숙원 조씨는 눈썹 추켜올리며 다그치듯 말했다.

“설마 정말 그런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자 김자점은 양팔을 들어 숙원 조씨를 진정시키고는 얼굴 가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흥분하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십시오.”

“으음.”

“아직 드러난 증거는 없지만 원래 이런 일은 어떻게 꾸며 내느냐에 따라 의미가 확 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서야 김자점의 의도를 파악한 숙원 조씨는 눈을 반짝였다.

“그럼…….”

“살짝 양념을 뿌리고 옆에서 부추긴다면 의심이 많은 전하께서 당장 두 사람을 잡아들이실 겁니다. 그러면 저희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 뒤에 우리 숭선군을 세자로 올리면 되겠네요.”

“바로 그겁니다.”

김자점의 계획이 마음에 든 숙원 조씨는 웃음을 터트리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 역시 병판 대감이에요.”

“그럼 이대로 진행을 시켜도 되겠습니까?”

“내 얼마든지 뒷배를 봐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말해요.”

“알겠습니다.”

머리를 살짝 숙이며 대답하는 김자점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어렸다.

김자점이 떠난 후, 기분이 좋아진 숙원 조씨는 처소의 궁녀들을 데리고 궁궐에 있는 수많은 정원들 중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동쪽의 후원 쪽으로 향했다.

넓디넓은 궁궐에 펼쳐져 있는 큰 정원과 곳곳에 있는 전각마다 딸린 작은 것들까지 합하면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동쪽 후원은 특별했다.

사시사철 각기 다른 꽃이 피는 너른 뜰과 항상 푸른 잎을 뽐내는 수목, 산수의 풍경을 축소해 놓은 듯 물길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그 위로는 둥그런 다리가 놓아져 있어 걷다가 피곤해지면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갈 수도 있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궁궐 안에는 이보다 더 크고 멋지게 조성된 정원도 있기 때문에 그다지 특별한 건 아니었다.

숙원 조씨가 동쪽 후원을 유독 마음에 들어 하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정자로 이어지는 다리 옆에는 성인 남자 두 명이 팔을 벌려 안아도 다 감지 못할 만큼 둘레가 큰 매화나무가 있는데 사방으로 가지가 넓게 뻗어 있어 그 그늘 아래 서면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바람이 잘 들어 무척 기분이 좋았다.

숙원 조씨가 궁녀로 막 입궐했을 무렵, 배정받았던 처소가 바로 이 근처였다.

낮에는 매일같이 허드렛일을 배우고 밤에는 함께 입궐한 어린 여자애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던 시절, 아직 촌티를 벗지 못한 또래들 사이에서도 숙원 조씨의 외모는 눈에 띄었고 성격상 쉽게 어울리지 못해서 항상 혼자 있는 일이 많았다.

물론 그때도 자존심이 세서 남들이 따돌리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으나 가끔씩 쉬는 시간이 생기면 숙원 조씨는 이 매화나무 그늘 아래 앉아 홀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주로 생각나는 것은 바깥에 두고 온 어머니로, 아직도 본처에게 눌려서 욕설을 듣거나 해코지를 당하며 사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조금씩 궁궐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숙원 조씨는 우연히 동쪽 후원에 들른 인조의 행렬과 마주쳤다.

아무리 쉬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해도 감히 왕의 행렬 앞에 나설 수는 없는 법.

숙원 조씨는 앞장선 내관의 눈에 띄지 않게 재빨리 매화나무 뒤로 숨어 행렬이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조심스레 고개만 내밀어 훔쳐보니, 생전 본 적도 없는 비단 옷을 걸치고 비싼 장신구와 비녀를 주렁주렁 매단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당시 있었던 수많은 후궁 중 한 명이었겠지만 그때까지 첩의 자식으로 온갖 핍박을 받고 자란 숙원 조씨의 눈에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리땁게 보였다.

-나도 저 자리에 서고 싶다.

그런 욕망이 불쑥 솟아오른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도 예쁜 옷을 입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처럼 꾸며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저 여자는 되고 나는 왜 안 돼?

질투와 시기 그리고 이유 없는 분노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멀어져 가는 인조와 후궁의 뒷모습을 지켜본 숙원 조씨는 그 순간부터 마치 한 꺼풀 허물을 벗은 것처럼 변해 가기 시작했다.

몰래 분첩과 연지를 사들여서 조금씩 치장을 하고 다니니 숙원 조씨의 미모는 나날이 꽃을 피우려는 봉오리처럼 화사해졌다.

나이 많은 상궁들은 어린것이 벌써부터 색기가 돈다며 숙원 조씨를 질타했고, 궁녀들 틈바구니에서도 평판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에 괴롭히려 드는 무리가 생겨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꾀를 써서 도둑질을 했다며 누명을 씌우거나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등 갖은 수를 써서 물리치니, 나중엔 아무도 그녀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귀찮게 트집을 잡는 무리가 없어지자 이윽고 숙원 조씨는 타고난 미색을 무기로 궁궐의 위사며 내관 들에게 접근해 인조가 자주 다니는 길목, 좋아하는 음식, 여자 취향 등을 알아내 철저하게 준비했고, 결국엔 성은을 입는 데 성공하여 지금 이 위치까지 올라왔다.

매화나무 아래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숙원 조씨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동쪽 후원의 매화나무는 항상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며 그럴 때마다 숙원 조씨의 마음속에선 아직 부족하다고, 더 올라갈 자리가 남아 있다고 야망을 불태우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자점이 찾아와서 계획을 세우고 갔으니, 곧 다시 한 번 대전이 발칵 뒤집힐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매화나무 쪽을 향하던 숙원 조씨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저게 무엇이냐?”

숙원 조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엔 어린애 셋과 궁녀 몇이 함께 모여서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김 상궁은 이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숙원 조씨에게 말했다.

“세자빈 아니, 강빈의 자식들이옵니다, 마마.”

“뭐라?”

애초에 아이를 싫어하는 숙원 조씨다.

물론 자기 자식은 예외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버릇없이 떼를 써 대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 대는 어린애들을 무척이나 경멸하는 성격인데, 꼴 보기 싫은 강빈의 자식들이라 하니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까지 거슬렸다.

숙원 조씨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강빈의 세 아이들은 각자 화살을 손에 들고 투호 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에잇!”

“하하, 또 빗나갔어!”

“우 씨, 다음엔 꼭 성공할 거야.”

“형은 두 번 연속으로 했잖아, 다음은 내 차례야!”

“자자, 둘 다 진정해라.”

투닥거리는 둘째, 셋째와 동생들 사이에 껴서 싸움을 말리는 맏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우애 좋은 형제의 표본을 보는 듯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을 따라온 궁녀들 역시 같은 마음인지 한 발자국 물러나서 조용히 웃고만 있었는데, 귀신같은 얼굴로 등 뒤에 딱 버티고 선 숙원 조씨를 발견하자마자 안색이 새파래져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제일 먼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맏이가 의아한 듯 물었고, 이윽고 뒤를 돌아보자마자 그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직 철이 없는 둘째는 숙원 조씨를 보자마자 바로 이를 갈며 덤벼들려고 했으나, 맏이가 안 된다며 억지로 붙잡곤 고개를 숙이게 했다.

“흥. 투호라…….”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콧방귀를 뀐 숙원 조씨는 통 안에 들어가 있는 화살을 집어 들고 장난치듯 손 안에서 굴려 댔다.

“여봐라. 너희는 뭐 하는 것들이냐?”

숙원 조씨의 지목을 받은 어린 궁녀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김 상궁의 매서운 눈초리에 식은땀을 흘리고 답했다.

“저, 저희는 주상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당연히 전하의 명이 있었겠지! 그러니까 너희들이 하는 일이 뭐냐는 게다!”

“마, 마마님들이 심심하실까 봐 같이 놀아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숙원 조씨는 손에 든 화살을 냅다 궁녀에게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그래?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무엇이냐!”

“마, 마마, 죄송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궁녀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반사적으로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아무리 심심하지 않게 놀아 준다고 하지만 벌건 대낮부터 할 일 없는 한량들이나 하는 투호를 하다니!”

그러면서 숙원 조씨는 화살이 꽂힌 통을 발로 차서 뒤엎었다.

“마마, 고정하십시오. 이 사람들은 그저 저희가 하자는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는 궁녀들을 보다 못해 제일 맏이가 앞으로 나서서 항변하자 숙원 조씨는 오히려 불쌍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강빈께서 사가로 내려가셔서 훈육이 부족한 건 알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요.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하실지 심히 걱정됩니다. 듣자 하니 지금도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며 궁궐에 두고 온 자식들을 그리워하신다는데…….”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슬쩍 눈을 치켜뜨자 아이들은 금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씩씩하게 나선 맏이조차 그 말을 듣고 숙원 조씨에 대한 분노와 굴욕감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주먹을 꽉 쥔 채 겨우 버티고 서 있는데, 하물며 아직 철이 없는 막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쯤 하시죠.”

바로 그때 도현의 목소리가 홀연히 날아들었다.

“……!”

숙원 조씨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도현이 다리 위를 천천히 걸어 건너오고 있는 중이었다.

설마 이 상황을 누가 지켜보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지라 숙원 조씨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이내 표정을 싹 바꿔 평정을 가장했다.

“세자 저하께서 남 몰래 엿보는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흐르는 강물을 막을 수 없듯이, 바람에 섞여 날아오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숙원 조씨의 날 선 빈정거림에도 개의치 않고 도현은 어깨 너머로 정자를 가리켰다.

“마침 저 정자에서 발을 쉬고 있던 참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와 봤습니다. 설마 제가 숙원께서 훈계를 하시는 데 방해한 건 아니겠지요?”

그러고 나서 도현은 성큼성큼 걸어와 흠, 하고 강빈의 세 아이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이들은 심양 관저에서 이미 그와 안면이 있었기에 살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도현은 그런 바람에 응답하듯이 싱긋 웃더니 주먹을 들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아야!”

“요 녀석들, 숙원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옳다. 시간이 있으면 다른 할 일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왜 이런 투호 따위를 해서 속을 썩이느냐?”

설마 도현이 숙원 조씨의 편을 들 줄은 몰랐기에 세 아이들은 물론 궁녀들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울먹울먹하는 막내의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린 도현은 아이를 품에 들쳐 안고 말했다.

“숙원의 말씀대로 이런 건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놀이지. 너희들이 진짜 투호를 모르는 모양이니 내가 가르쳐 주마.”

그러면서 그는 화살을 들고 뒤로 열 걸음을 걸었다.

너무 멀어서 도저히 닿을 것 같지 않은데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궁금해진 아이들이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쳐다보자 도현은 피식 웃고는 손에 힘을 주어 가장 입구가 좁은 통을 노려 잽싸게 화살을 던졌다.

휘익!

통!

바람을 가르는 세찬 소리와 함께 도현이 던진 화살이 정확히 통에 쏙 들어가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 대체 어떻게 하셨어요, 저하?”

“대단해!”

아이들이 신 나서 도현에게 매달렸고, 그는 으쓱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 보았느냐? 이게 진짜 투호라는 거다. 선비들이 즐기는 고상한 놀이 중에 하나이지.”

“흥. 제 눈에는 별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만.”

어느새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 것이 마음에 안 든 숙원 조씨가 딴죽을 걸었다.

“숙원께서는 아녀자라 그런 것이지요. 조선에서는 조상대대로 내려온 여러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이 투호는 무릇 선비라면 누구나 몸에 익혀야 할 교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활이나 던지면서 노는 게 무슨 교양이란 말씀입니까!”

“여인의 눈에는 그저 놀이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사실 투호는 신체를 단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화살을 정확하게 통에 던져 넣으려면 거리를 재는 신중함과 민첩성 그리고 바람이 바뀔 때를 기다리는 끈기까지 다 갖춰야 하니까요.”

“고작해야 투호에 그런 효능이 있었다니 놀랄 일이로군요. 세자께서는 하나를 보면 열로 부풀리는 능력까지 있으셨나봅니다.”

“원하시면 투호의 이점에 대해 써 놓은 서책들을 처소까지 갖다 놔 드릴까요? 물론 청나라에서 수집한 책들뿐이라 읽는 덴 시간이 좀 걸리시겠지만, 적어도 심심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런 책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말싸움에선 절대 지지 않는 도현의 대꾸에 숙원 조씨는 이를 갈며 치맛자락을 꾸깃거렸다.

게다가 한갓 아낙네가 사내들의 놀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냐는 말투에 빈정이 상한 것은 물론, 남몰래 열등감을 느끼는 부분을 쿡쿡 찌르는 도현의 공격에 숙원 조씨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사대부집 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좋은 집안에 시집가기 위해 바느질과 자수 등 교양을 몸에 익히지만, 숙원 조씨는 서출이기 때문에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 후궁이 되어 글자를 모르면 곤란하기 때문에 열심히 한자와 언문을 익히긴 했으나 그것도 일상생활에 쓰이는 말 정도지, 사내들이 쓰는 어려운 글이나 고사 같은 것은 지금까지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다른 여자들도 다 비슷하다며 위로하려고 해도 첩의 자식이라는 출신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숙원 조씨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 같은 것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거침없이 건드리며 비웃는 도현의 말을 듣자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기분이 마구 치밀어 올랐다.

“이! 이!”

파들파들 떨며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하는 숙원 조씨를 무시하듯, 도현은 변함없이 느긋한 표정으로 가볍게 인사하고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마침 점심때로구나. 밥은 먹었느냐?”

“으응. 아직요.”

“그럼 잘되었군. 바람이 잘 통하고 시원한 정자가 바로 저 앞에 있으니 나와 함께 먹자꾸나.”

“네!”

희희낙락하며 떠드는 아이들과 함께 도현이 궁녀들을 데리고 정자로 떠나자, 그 자리에는 숙원 조씨 일행만이 닭 쫓던 개처럼 홀로 남게 되었다.

“마, 마마…….”

김 상궁은 슬슬 분위기를 살피다가 이내 숙원 조씨의 얼굴에 악의와 불길한 기운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 황급히 어깨를 움츠렸다.

“돌아가자!”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발을 쿵쿵 구르며 숙원 조씨가 치맛자락을 홱 돌리자, 궁녀들은 행여나 자기한테 불똥이 튈세라 조심조심하며 그 뒤를 쫓았다.

도현에게 창피를 당한 것이 분한지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방 안에 있던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지며 화풀이를 한 숙원 조씨는 그래도 성에 안 차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놈을 그냥…… 김 상궁!”

이럴 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불벼락을 뒤집어쓰기에 눈치를 보면서 한쪽에 시립해 있던 김 상궁은 얼른 대답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예, 마마.”

“세자의 방자함을 말씀드려야지 이대로는 그냥 못 있겠어. 전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저, 그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김 상궁이 머뭇거리자 숙원 조씨는 미간을 좁히며 버럭 화를 냈다.

“빨리 말하지 않고 뭘 하는 게야!”

“최 상궁의 거처에 계시옵니다.”

“뭐야!”

숙원 조씨의 양쪽 눈꼬리가 무섭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최 상궁은 아직 첩지를 받지 않았지만 얼마 전 인조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은 궁녀였다.

가뜩이나 도현 때문에 열이 뻗히는데, 대낮부터 인조가 다른 계집을 끼고 있다니 화가 안 날 수 없었다.

“이년을!”

성난 암고양이 같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숙원 조씨가 방을 나가려는 걸 김 상궁이 황급히 만류했다.

“고정하십시오, 마마.”

“내가 지금 참게 됐어!”

“그렇다고 최 상궁의 거처로 가셔서 화를 내신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입니다.”

“으음.”

그러자 흥분해서 잠시 잃고 있던 이성이 돌아오는지 숙원 조씨는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국왕은 무치無恥(부끄러움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 여성편력에 대해 한없이 관대한 것이 대궐 법도였는데, 만약 숙원 조씨가 패악을 부린다면 상대편으로부터 탄핵을 받기 딱 좋은 핑계거리였다.

아니, 그러기 전에 인조가 진저리를 내고 등을 돌린다면 그 순간 숙원 조씨의 권력은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자네 말이 맞아. 여기서 흥분하면 안 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귀엽게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더 크기 전에 잘라 버려야겠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숙원 조씨가 말하자 김 상궁은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다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래.”

비단 보료 위에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은 숙원 조씨는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인조의 총애를 받기 위해 숙원 조씨는 온갖 비열한 술수를 다 썼는데, 대전 내관에게 뇌물을 주는 건 기본이고 때에 따라서는 사고로 가장해 자신보다 예쁜 후궁의 얼굴을 망치거나 지저분한 소문을 내 주상의 귀에 들어가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권력을 위해서는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숙원 조씨의 원한을 사게 됐으니, 최 상궁이라는 여자도 앞날이 어두워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손을 쓰기 전에 대궐을 뒤흔드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마마! 마마!”

방 밖에서 들리는 다급한 소리에 잠이 깬 숙원 조씨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일어났다.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야?”

“큰일 났사옵니다.”

“뭔데 그래?”

“전하께서 쓰러지셨다고 하옵니다.”

“……!”

잠이 확 달아난 숙원 조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게 사실이야!”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 상궁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내의원에서 당직을 서던 어의들이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갔다고 합니다.”

“이런.”

고운 이마를 찡그린 숙원 조씨는 자신도 모르게 치마 옆을 손으로 꽉 움켜줬다.

“도대체 어쩌시다가 그렇게 되신 게야?”

“…….”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치를 보자 숙원 조씨가 버럭 호통을 쳤다.

“냉큼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최 상궁과 함께 잠자리에 드셨다가 그만…….”

인조가 쓰러진 것도 화가 나는데 그게 젊은 여인과 무리하게 동침했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하자, 숙원 조씨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허어.”

이유가 어찌 됐건 지금 인조가 죽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됐기에 정신을 차린 숙원 조씨는 굳은 얼굴로 신발을 신었다.

“가자.”

“예.”

앞장서서 걸어가는 숙원 조씨를 따라 김 상궁과 궁녀들이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정식으로 첩지를 받지 않아 그리 크지 않은 최 상궁의 거처에는 이미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숙원 조씨가 나타나자 다들 분분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오셨사옵니까?”

곧장 방으로 들어가려는 걸 상선이 제지하듯 막아서자, 안 그래도 돈은 다 받아 처먹고 최 상궁에게 인조를 데려간 것에 화가 나 있던 그녀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도대체 주상을 어떻게 모셨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면목이 없습니다.”

“상세를 직접 살펴봐야겠으니 저리 비키게.”

“그건 안 되겠습니다.”

“뭐야!”

숙원 조씨가 매섭게 노려봤지만 내시부의 수장이자 인조의 최측근답게 상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의원들이 진료 중이라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 숙원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중전께서 오셔도 안 됩니다.”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숙원 조씨가 언성을 높이며 소동을 피울 때 뒤에서 굵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찔렀다.

“아무리 못 배웠다고 하지만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데, 시끄럽게 해서 되겠습니까.”

“어떤 놈이!”

몸을 돌린 숙원 조씨는 언제 왔는지 도현이 서 있는 걸 보고 와락 인상을 구겼다.

“세자께서도 오셨군요.”

“아바마마께서 쓰러지셨다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내가 후궁이라지만 방금 한 말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니에요?”

숙원 조씨가 눈을 치켜뜨며 쏘아붙이자 도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숙원께서 먼저 몰상식한 행동을 하시니 제가 나선 것 아닙니까.”

“뭐예요!”

분한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숙원 조씨가 소리치는 걸 깔끔하게 무시한 채 도현은 상선 쪽으로 걸어갔다.

“용태가 어떠신가?”

그러자 상선은 살짝 머리를 숙이고는 굳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정신을 차리시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으음. 그렇군.”

웬만해서는 감정 표현을 잘 보이지 않는 상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걸 보면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눈치 빠른 숙원 조씨도 그런 분위기를 읽고는 온몸을 휘감는 불안감에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이빨로 뜯었다.

잠시 뒤 중전을 비롯한 왕실 식구들이 소식을 듣고 속속 모여 들었는데, 얼마나 빨리 오는가 하는 걸로 그 사람이 가진 위치와 세력을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훗날 비운의 황후로 불리는 중전이 가장 늦게 도착해 존재감이 유명무실할 정도로 대궐에서 입지가 좁다는 걸 보여 줬다.

그렇게 각자 이번 일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며 초조해하고 있을 때 드디어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서 어의가 지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어떻게 됐소?”

“주상께서는 무사하시겠지요?”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를 둘러싸고 질문을 해 대자 잠시 당혹스러워하던 어의는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일단 어려운 고비는 넘겼습니다.”

“역시.”

“그렇게 쉽게 세상을 버리실 분이 아니시지.”

안도하던 사람들은 이어진 어의의 이야기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머리에 고인 피를 빼내지 못해 언제 정신이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고, 최악의 경우 영영 못 깨어날지도 모릅니다.”

“이런!”

“그럴 수가…….”

다들 큰 충격을 받은 가운데 숙원 조씨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내젓고는 인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야!”

덜컹!

방 안에는 인조가 마치 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양옆에 의녀들이 앉아 있다가 그녀를 보고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저리 비키지 못해!”

“하지만…….”

앞을 막아서는 의녀들을 거칠게 밀쳐 낸 숙원 조씨는 누워 있는 인조한테 다가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지요.”

하지만 인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조바심이 난 숙원 조씨는 흔들어서 깨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의녀들이 황급히 팔을 붙잡으며 그녀를 제지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거 놔라!”

“마마님을 어서 밖으로 모시지 않고 뭣들 하는 게야!”

“예.”

뒤따라 들어온 상선의 호통에 의녀들은 발버둥치는 숙원 조씨를 강제로 끌고 나갔다.

문지방에 선 도현은 숙원 조씨가 난리를 피우는 것이 진정 인조를 걱정하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잃어버릴까 봐 발악하는 거란 걸 알기에 짧게 혀를 찼다.

시선을 방 안으로 돌린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죽은 듯 가만히 누워 있는 인조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럴 걸 자식까지 죽여 가며 권력에 집착하다니…….”

“뭐라고 하셨습니까?”

옆에 있던 칠현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도현은 한쪽 손을 살짝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지금 당장 서 지부장에 기별을 넣어서 대궐 상황을 알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해.”

“예.”

살짝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칠현이 뒤로 물러서자 도현은 다른 왕실 식구들과 함께 인조 곁을 지키며 세자로서 도리를 다했다.

응급조치를 끝낸 인조는 국왕의 거처인 내전으로 옮겨졌고 그사이 연락을 받은 신하들이 속속 대궐로 들어왔다.

왕실 가족들 외에는 인조를 직접 볼 수 없었기에 신하들은 평소 친분이 있거나 같은 파벌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변할지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역시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김자점은 숙원 조씨를 만난 뒤 측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김자점이 들어오자 측근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모두 그를 쳐다봤다.

“뭐라고 합니까?”

상석 자리로 가서 앉은 김자점은 첫째 아들인 김익의 물음에 좌중을 둘러보고는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겠네.”

김자점의 말에 측근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럼…….”

“평소 지병이 있는 데다 무리하게 방사房事를 치르신 것이 컸어.”

“이런 황망한 경우가 있나.”

“허어.”

탄식과 허탈감이 방 안에 묵직이 내려앉은 가운데 심지연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약간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강빈과 세자를 한꺼번에 역모로 엮으려던 계획은 어찌 되는 겁니까?”

“전하께서 저렇게 되셨는데 별수 없지. 폐기시키게.”

“후우. 알겠습니다.”

그동안 어렵게 준비했는데 써 보지도 못하고 버려야 된다는 것이 아까웠지만 김자점의 말대로 이제 쓸 수 없는 패였기에 심지연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지금 급한 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거야.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자칫 우리 위치가 흔들릴 수도 있어.”

김자점이 지적한 것처럼 이 상태라면 세자인 도현이 자연스럽게 왕위를 넘겨받게 되어 있었고, 그러면 적대 관계인 김자점의 일파가 숙청되거나 몰락하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저희 뒤에는 청나라가 있으니, 아무리 세자라도 함부로 못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연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가닥 희망을 걸었지만 김자점은 가차 없이 머리를 내저었다.

“지난번 세자 책봉 때 못 봤나. 볼모 생활을 하면서 우리 못지않게 청국에 많은 인맥을 깔아 놓은 자가 바로 세자일세. 특히 섭정인 예친왕과 친분이 아주 두텁다고 하더군.”

친분도 있었지만 일찌감치 도현의 능력을 알아보고 경계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기에, 만약 김자점이 도움을 청했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박을 가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깊은 속사정을 알 수 없었던 김자점과 측근들은 지레짐작하고 청나라에 기대는 걸 포기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섭정이 뒤에 있다면 도움을 받는 건 포기해야겠군요.”

“끄으응.”

“이거 갈수록 태산입니다.”

얼굴이 어두워진 측근들을 둘러본 김자점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면서 입을 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오.”

“그게 뭡니까?”

“무력을 동원해 봉림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숭선군을 대신 추대하는 거요.”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세자를 폐할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제일 끝자리에 앉은 황현의 이야기에 김자점은 한쪽 입꼬리를 치켜 올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명분이야 조정과 대궐을 장악한 다음에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면 되는 것 아니겠소. 아니, 강빈과 세자를 엮어 넣으려고 준비한 것이 있으니 그걸 쓰면 되겠군.”

다소 어설픈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역모라면 세자를 폐할 명분으로 충분했다.

“좋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요. 저도 찬성입니다.”

“까짓 거 해봅시다.”

측근들이 모두 찬성하자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 김자점은 시선을 돌려 아들인 김익을 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넌 경기병사에게 내 뜻을 은밀히 전하고 수어청 병력을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아라.”

“네, 아버님.”

수어청은 조선의 핵심 무력 집단인 오군영 중 하나로 남한산성과 한양 동부의 방어를 맡은 부대였는데, 원래는 경기병사가 관할했지만 병자호란 이후 인조가 군영으로 독립시키고 규모를 키웠다.

모두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들인 데다가 한양 사대문 안에도 오륙백 명의 병력이 상주했기에 언제든 지시만 내리면 대궐을 칠 수 있었다.

바로 이곳 지휘관인 수어사가 김자점의 수하였다.

이렇게 김자점이 위험한 선택을 한 가운데 도현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저하, 계속 이러고 계시면 행여나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잠시 나가셔서 오반午飯이라도 드시고 오십시오.”

상선의 말에 새벽부터 지금까지 인조 옆을 지키고 있던 도현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괜찮네.”

“전하께서 누워 계신데 저하마저 병이 나시면 앞으로 조정을 누가 이끌어 가겠사옵니까. 여긴 제가 있을 테니 쉬다가 오십시오.”

재차 상선이 권하자 도현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네. 그럼 금방 오반만 들고 오도록 하지.”

“예.”

동궁전으로 가자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방 안에 점심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한동안 인조 옆에서 병간호를 해야 되는 걸 생각해 속에 부담이 되지 않는 음식 위주로 만들어졌다.

“간호는 의녀들이 다 하는데 내가 왜 피곤한지 모르겠어.”

“원래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더 고역이지 않습니까.”

“하긴.”

“식기 전에 어서 식사를 하십시오.”

“그래.”

칠현이 국에 씌워 놓은 뚜껑을 열자 맛있는 어탕 냄새가 그의 식욕을 돋웠다.

도현은 얼른 숟가락을 들어 얼큰한 국물을 떠먹었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네.”

금방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 도현은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고는 앞에 앉은 칠현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지시한 건 다 처리했어?”

그러자 칠현은 안전한 곳인 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살짝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예. 탐보망을 총동원해 김자점 일파와 고관대작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성 밖에 머물던 호위대도 은밀히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번에 실수하면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이 한순간에 모두 다 무너질 수 있으니 한 치의 빈틈도 없어야 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 번 서 지부장에게 단단히 일러 둬.”

“예.”

약간 머뭇거리던 칠현은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저, 그런데 정말 저쪽에서 먼저 일을 벌일까요?”

“지금 다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김자점과 숙원 조씨일 테니까 분명 어떤 식으로든 행동에 나설 거야. 형님을 독살할 만큼 권력에 집착이 큰 자들이니 틀림없어.”

말을 하는 도현의 얼굴은 마치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 같았다. 식사를 끝낸 도현은 바로 내전으로 돌아가서 인조 옆을 지켰다.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이 생각나 주막을 찾은 포졸 정지택은 장날도 아닌데 자리가 가득 차 있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정 포졸 나리, 오셨어요.”

푸짐한 인상의 주모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다가오자 포졸도 벼슬이라고 정지택은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요즘 장사가 잘되는가 봐?”

정 포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자 주모는 행여나 상납금을 더 내놓으라고 할까 봐 얼른 그를 비어 있는 자리로 잡아끌면서 엄살을 피웠다.

“어제오늘 반짝해서 그렇지 계속 파리만 날린 거 아시잖아요?”

“그런가?”

“제가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말아 드릴 테니까 드시고 가세요.”

“막걸리부터 한 사발 줘.”

튼실한 엉덩이를 한쪽 손바닥으로 툭 치며 정 포졸이 말하자 주모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부엌으로 갔다.

“아이 참. 잠깐만 기다려요.”

“크으. 좋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있을 때 쾌자(조선시대 포졸들이 입던 옷)를 입은 사내 두 명이 주막 안으로 들어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한참 찾았는데 여기 있었소?”

아는 사이인지 정 포졸은 힐끗 사내들을 쳐다보고는 살짝 손을 들었다.

“어서들 와.”

사내들이 평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정 포졸은 깨끗이 비운 사발을 건네며 막걸리를 따라 줬다.

“이런 날에는 뜨끈한 국물에 막걸리가 최고야.”

“하여튼.”

“최 포졸하고 김 포졸도 오셨구려.”

눈치 빠르게 주모가 막걸리 사발 두 개와 작은 술 단지를 들고 오자 새로 온 포졸들이 얼른 받아 들었다.

“우리 예쁜 주모가 보고 싶어서 왔지.”

털보 수염을 기른 포졸의 농담에 주모는 싫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시구려.”

“정말이야.”

“됐으니까, 술이나 마시고 가요.”

주모가 새침한 표정을 짓고 몸을 돌리자 포졸들은 낄낄 웃음을 터트리고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막걸리를 마셨다.

“그런데 갑돌이 형님 소식 들었수.”

“왜, 뭔 일 있어?”

“오늘 투전판에 못 온다고 합디다.”

털보의 말에 정 포졸은 들고 있던 막걸리 사발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화를 냈다.

“씨불 놈이 지난번에 혼자 다 따 놓고 배 째는 거야!”

“하여튼 성격 급한 건 알아줘야 된다니까.”

“이 자식이!”

속 긁는 소리에 정 포졸이 눈썹을 치켜 올리자 털보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를 마저 다 했다.

“일부러 안 오는 것이 아니라 비상이 걸렸답니다.”

“그건 또 뭔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야?”

“경기병사가 훈련을 한다고 병영에 속한 군사들을 다 소집했다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갑돌이 형님도 며칠 뺑뺑이 치게 생겼다고 엄청 투덜대던데요.”

이야기를 들은 정 포졸은 미간을 찌푸렸다.

“날도 쌀쌀하게 추운데 갑자기 무슨 훈련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양쪽 어깨를 으쓱이는 털보를 보며 정 포졸은 괜히 입맛을 다셨다.

“쩝.”

지난번에 잃은 돈을 만회하려고 단단히 준비해 왔지만 그런 일이라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오늘 판은 접는 거예요?”

가장 젊은 김 포졸이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먹으며 하는 말에 정 포졸은 정색을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접긴 뭘 접어.”

“하지만 쪽수가 하나 비잖아요?”

“사거리 약방 오 씨가 예전부터 한번 끼워 달라고 했으니까 부르면 돼.”

“그래요?”

“어차피 일찍 들어가 봤자 마누라가 바가지밖에 안 긁는데 잘됐시다.”

“지난번처럼 초저녁에 개털 돼서 술만 축내지 말고 밑천 넉넉히 챙겨 와.”

정 포졸의 핀잔에 털보는 허리춤에 있는 돈주머니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걱정 마쇼.”

이렇게 포졸들이 떠들어 대는 걸 주막 한쪽에 앉아 있던 보부상 차림의 젊은 사내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몰래 듣고 있었다.

얼굴이 안 보이게 패랭이를 깊이 눌러쓰고 조용히 국밥을 먹고 있던 흑치영은 경기병사의 수상한 움직임에 눈을 반짝 빛냈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옆에 앉아 있던 호위대 백인장 윤형철이 낮게 말하자 흑치영은 힐끗 포졸들에게 시선을 줬다 바로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상이 쓰러지자마자 한양과 가까운 경기병사가 휘하 군사들을 소집하다니 확실히 이상하군.”

“혹시나 주상이 중태라는 소문이 돌면 불순한 무리가 나타날까 봐 경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자 흑치영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아닐 거야. 만약 그런 일이라면 경기병사보다는 한양에 위치한 오군영이 움직이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어?”

“하긴 그렇군요.”

나무 숟가락을 손에 쥐고 국밥을 뒤적거리며 뭔가 고심하던 흑치영은 이내 윤형철에게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똘똘한 녀석들로 한 다섯 명 골라서 경기 병영의 움직임을 감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잠시 뒤 식사를 끝낸 흑치영과 부하들은 커다란 등짐을 하나씩 지고 주막을 나섰다.

“주모, 잘 먹었네.”

“벌써 가시게요.”

“내일 첫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가려면 서둘러야 되지 않겠나.”

“그럼 장사 잘하고 다음에 또 들러 주세요.”

“알았네.”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인근 산속에서 훈련을 하던 호위대 대원들은 보부상으로 위장해 이삼십 명씩 패를 나눠 한양으로 들어갔다.

대원들이 쓸 무기도 봉황상단이 운영하는 선박을 통해 한양으로 몰래 반입시켰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큰 희생 없이 출정했던 병사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공을 세웠지만, 적국인 청나라를 이롭게 했다는 척화파의 비난과 그가 영웅이 되는 걸 꺼려 한 주화파의 공격에 상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벼슬을 내놔야 했던 임경업 장군은, 한양에 있는 사저에서 병서를 읽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장답게 꼿꼿한 자세로 서탁 앞에 앉아 있던 임경업 장군은 창문 밖에서 들리는 까치 소리에 책장을 넘기던 걸 멈추며 바깥을 쳐다봤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려나?”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의 혼잣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감마님.”

“무슨 일이냐?”

“봉황상단에서 서 행수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어느새 소문이 대궐 담장 너머까지 퍼져 인조가 중태에 빠진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도현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서 지부장이 왔다고 하자 본능적으로 드디어 때가 왔다는 걸 직감한 임경업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을 내뱉었다.

“으음.”

그러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으로 모시게.”

“예.”

잠시 뒤 폭이 좁은 갓을 쓴 서상수 지부장이 방 안으로 들어와 절을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서 오게. 나야 뭐 그럭저럭 지내고 있네. 그것보다 요즘 대궐이 시끄럽던데 뭐 들은 이야기가 있나?”

앞에 앉은 서상수는 임경업의 물음에 담담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찾아왔습니다.”

“말해 보게.”

“주군께서 진달래꽃이 피었다고 하셨습니다.”

“……!”

도현 측에서 쓰는 암호였는데 바로 숙원 조씨와 김자점 일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내심 각오를 했으면서도 워낙 엄청난 일이었기에 절로 주름살이 이마에 만들어진 임경업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결국 그렇게 됐군.”

“정확한 날짜는 다시 따로 연통을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전 이만.”

필요한 말을 다 전한 서상수는 차 한 잔 마시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홀로 방 안에 남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임경업 장군은 이내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애검을 가져와 뽑아 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피를 보는 것이 안타깝지만 조정과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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