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태징 (27/104)

조태징

자신을 독살하려 했는데 상대를 그냥 내버려 둘 정도로 점잖은(?) 성격이 아닌 도현은 서 지부장에게 지시를 내려서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어허. 잘 먹었다.”

도현이 볼록 튀어 나온 배를 두드리며 숟가락을 내려놓자 궁녀들이 들어와 상을 가지고 나갔다.

독을 쓴 걸 알게 된 이후부터 도현은 일부러 더 음식을 깔끔하게 먹어 치워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벌써 보름째가 되어 가는데 발작은커녕 약간의 낌새도 보이지 않으니 숙원 조씨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것 때문에 거의 매일 숙원 조씨에게 불려가 들들 볶인 수라간 책임자는 처음과 달리 음식에다가 비상을 한 움큼씩 집어넣었지만 도통 반응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

도현의 물음에 문을 닫고 가까이 다가온 칠현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준비가 다 끝났고 내일부터 상소를 올릴 거라고 합니다.”

“우암 선생도 참여했겠지?”

“네. 처음에는 거절하셨지만 박황 대빈객께서 직접 충북 황간까지 내려가셔서 설득하셨습니다.”

우암 선생은 바로 노론의 영수이자 뛰어난 문인으로 당대 모든 사대부들에게 존경을 받던 송시열宋時烈을 지칭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직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봉림대군의 사부를 맡은 인연이 있었는데, 현재는 병자호란 이후 좌절감에 고향으로 낙향해 학문과 제자 양성에 몰두하고 있었다.

“큰 신세를 졌군.”

“아무튼 내일 상소가 접수되면 사헌부가 아주 발칵 뒤집어지겠습니다.”

기대가 된다는 듯이 약간 들뜬 얼굴로 칠현이 말하자 도현 씨익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헌부가 아니라 대궐 전체가 들썩일 거야.”

“아무튼 제대로 복수를 하게 됐습니다.”

“내가 원래 받은 건 확실히 돌려주는 성격이잖아.”

“그렇죠.”

쏟아지는 상소에 기겁할 숙원 조씨와 관리들을 떠올리며 도현은 얼굴 가득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아침 육조 거리에 위치한 사헌부 건물 앞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의관을 정갈히 갖춰 입고 갓을 쓴 양반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그 모습에 주위를 지나던 평민들은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무슨 일로 양반님네들이 저렇게 몰려 있는 거지?”

“글쎄.”

“뭔 난리라도 난 거 아냐?”

불과 몇 년 전에 청나라 팔기군한테 한양이 짓밟힌 아픈 경험이 있기에 이런 소동이 벌어지면 더 안절부절못했다.

“이 사람아,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하긴 그런 일이라면 벌써 봉수대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겠지. 그나저나 뭔 일인지 궁금하구먼.”

중년인은 친구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괜히 기웃거리다가 치도곤이나 당하지 말고 어서 우리 갈 길이나 가자고.”

“양반들 일에 끼어들어 봤자 좋은 일이 없지. 그래, 가세.”

그렇게 평민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가운데 보신각종이 울리자 닫혀 있던 사헌부 건물 문이 열렸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양반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민원 접수나 방문객을 상대하는 일을 맡은 관리는 떼로 몰려온 양반들을 보고는, 약간 위축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충청도에서 올라온 송 아무개요.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릴 것이 있어서 왔소.”

무리의 우두머리인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한 양반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하는 말에 관리는 슬쩍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다른 분들도 같은 일로 오신 겁니까?”

“그렇소.”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사람이 송 아무개라고 밝힌 중년인 옆에 있다가 대답하자 관리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시다면 관청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주상 전하께 올리는 상소는 대궐로 가셔서 승정원에 접수를 시키시면 됩니다.”

시골 양반들이 관청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온 거라고 생각한 관리의 말에 젊은 양반이 약간 화가 난 듯 입을 열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여길 찾아온 것 같소!”

“그럼…….”

“상소를 하는 대상이 승정원 관리인 우승지인데 어찌 그리로 가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

“지금 우승지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헉.”

당당하게 대답하는 젊은 양반과 달리 관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삼품 당상관인 고위 신료를 고발하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우승지를 맡고 있는 자가 바로 인조의 총애를 받는 숙원 조씨의 아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관리가 기겁을 하는 것이다.

왜 하필 자신이 있는 날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한탄을 하며 관리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뒤편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 이명한이었다. 등청하는 길에 양반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걸 보고 무슨 일인지 살피러 온 것이었다.

“대감.”

직속상관의 등장에 관리가 얼른 허리를 굽히자 손을 살짝 들어 받아 준 이명한은 근엄한 어투로 말했다.

“아침부터 양반들이 여길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그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될지 잠시 망설이던 관리는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승지 대감에 대한 상소를 올릴 것이 있다고 찾아왔습니다.”

“우승지라면 조 대감 말인가?”

“예.”

순간 미간을 찌푸린 이명한은 시선을 돌려 결연한 얼굴로 서 있는 양반들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이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자네, 우암 아닌가?”

“오랜만입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이명한과 달리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송시열은 차분한 어투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 같은 척화파에다가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송시열이 낙향한 이후에도 가끔씩 서신을 주고받곤 했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들으셨다시피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리러 왔습니다.”

“상소를?”

“네.”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는 송시열과 달리 이명한은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로 놀랐다.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현실에 좌절하고 낙향한 그가 몇 년 만에 한양으로 올라온 것도 사건이었지만, 노론의 영수로 많은 양반들의 지지를 받는 송시열이 나섰다는 건 정국에 엄청난 파장을 예고하는 사건이다.

살짝 얼굴을 굳힌 이명한은 앞에 있는 송시열을 보며 말했다.

“뭘 상소한다는 건가?”

“어차피 알게 될 테니 말씀을 드리지요.”

이명한의 나이가 더 많았기에 송시열은 존대를 했다.

“주상을 보필하는 본분을 저버리고 우승지 조태징 대감이 사람들에게 온갖 뇌물을 받는 건 물론이고 매관매직까지 하며, 심지어 상소를 모두 주상께 올려야 하는데도 이해관계에 따라 중간에 없애 버리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있기에, 이를 탄핵하고자 합니다.”

“으음.”

숙원 조씨를 등에 업은 조태징의 비리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그걸 송시열이 수면 위로 드러내려는 거였다.

“쉽지 않은 일이네.”

숙원 조씨를 의식한 이명한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자 송시열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맹의 도리를 공부한 선비로서 불의를 보고 그냥 못 본 척 넘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문현답이군. 우담 자네를 보니 내가 부끄럽네.”

“대감께서 그동안 조정이 바른길로 가도록 많은 노력을 하신 걸 알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니 고맙군.”

미소를 지어 보인 이명한은 고개를 돌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관리를 보며 말했다.

“상소를 받게.”

별 볼일 없는 시골 선비로 생각했던 사람이 유명한 대학사인 송시열이라고 하자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놀란 관리는 이명한의 말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망설이는 관리의 모습에 눈가를 찡그린 이명한은 엄한 목소리로 재차 지시를 내렸다.

“관리의 부정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은 사헌부가 당연히 할 일이 아닌가!”

그러자 관리는 이제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거, 저 때문에 대감이 곤란해지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송시열의 말에 이명한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닐세. 그동안 조금은 잊고 지냈던 초심을, 자네 덕분에 다시 깨닫게 됐네. 괜찮으면 나랑 같이 안으로 들어가 차나 한잔 하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어떤가?”

“그러지요.”

함께 온 제자에게 뒷일을 맡긴 송시열은 이명한을 따라 그의 집무실로 갔고, 관리는 양반들이 가져온 상소의 접수를 받았다.

그걸 시작으로 충청도뿐만 아니라 전라도와 경상도등 각지에서 양반들이 올라와 사헌부에 상소를 냈다.

첫날에만 무려 오백 통이 넘는 상소가 접수됐는데, 이걸 처리하느라 사헌부 소속 관리들은 아무런 일도 못하고 여기에만 매달려야 했다.

상소가 천 통 아니 만 통이 들어온다고 해도 그냥 무시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송시열을 포함한 사대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사들이 여기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거기다가 이명한이 수장으로 있는 사헌부까지 나서서 조태징의 비리를 조사하고 나섰다.

그러다 보니 숙원 조씨 쪽에서 손을 쓸 새도 없이 상소와 조태징의 비리 내용이 임금인 인조에게 모두 보고됐다.

아무리 총애하는 숙원 조씨의 아버지였지만 비리 내용이 너무 심했고, 상소에 이름을 올린 명사들의 무게감에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이명한을 비롯한 척화파들이 들고일어나 조태징의 행태를 비난하자 일이 점점 커졌다.

탕!

“그러게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화가 많이 났는지 손바닥으로 서탁을 세게 내려치며 소리치는 숙원 조씨의 모습에 호출을 받고 달려온 조태징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게, 조심한다고 했는데…….”

“노력했다는 것이 이거예요!”

“흠흠.”

날카롭게 째려보며 숙원 조씨가 하는 말에 조태징은 무안한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자점이 끼어들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승지도 반성을 하고 있을 테니 이제 그만하시죠.”

“흥.”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지만 어찌 됐건 아버지였기에 숙원 조씨도 더 이상 다그치지 않고 이쯤에서 멈췄다.

“지금 해야 될 건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빨리 이번 일을 봉합하는 겁니다.”

“주상께서는 뭐라고 하세요?”

“대전에서 따로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을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으음.”

다른 사람들을 아래로 보며 권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임금인 인조의 눈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신은 여러 명의 후궁 중 하나로 추락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숙원 조씨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걸 보며 내심 주제도 모르고 마구 설쳐 대더니 꼴좋다는 비웃음을 지으며 김자점이 입을 열었다.

“전하를 편하게 해 드리시려면 아무래도 마마님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결자해지라고 우승지가 자리에서 물러나 근신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 마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조태징을 보고 숙원 조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미우나 고우나 같은 핏줄이기도 했지만 조정 내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내보내야 된다는 것에 숙원 조씨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미련을 보이자 김자점은 약간 차가운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선택은 마마님의 몫이지만 송시열을 포함한 재야 거두들이 이번 상소에 이름을 올렸고 대사헌인 이명한을 비롯한 척화파들이 전하를 들볶고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

아무리 총애를 한다고 해도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최악의 경우 조태징이 문제가 아니라 인조가 자신을 버릴 수도 있었다.

살벌한 궁중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올라온 여인답게 김자점이 이야기하는 뜻을 파악한 숙원 조씨는 손으로 치맛단을 꽉 움켜쥐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냥 조용히 지방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그자들은 뭐 주워 먹을 것이 있다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건지…….”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아버지인 조태징을 보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상황이 이러니까 잠시 집에서 쉬고 있으세요.”

“저보고 벼슬을 내놓으라는 겁니까!”

“그럼 이렇게 있다가 다 같이 망할까요!”

숙원 조씨의 일갈에 조태징은 목을 움츠리며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해지면 다시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까 그때까지 나서지 말고 죽은 듯 지내세요. 제 말 알겠어요?”

아쉬웠지만 숙원 조씨의 서슬에 조태징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꼭 자리를 만들어 주셔야 됩니다.”

“후우. 염려 마세요.”

끝까지 못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숙원 조씨는 이내 정색을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제 만족해요?”

“우승지한테 따로 감정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드린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흥! 됐으니까. 뒷수습이나 확실히 해 줘요.”

김자점은 쌀쌀한 숙원 조씨의 말을 여유 있게 받았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우승지 조태징은 숙원 조씨가 말한 대로 거론된 죄목이 다 사실은 아니지만 정국을 어지럽히고 인조를 근심스럽게 했다며 스스로 사직했다.

안 그래도 숙원 조씨 때문에 어떻게든 무마시키려고 했지만 쏟아지는 상소와 척화파 신하들의 처벌 요구에 슬슬 한계점에 와 있던 인조는 반색을 하며 얼른 사직서를 수리했다.

“우승지가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이번 문제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것이 어떻겠나?”

인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사헌 이명한이 나서며 반대 의견을 냈다.

“지금까지 드러난 죄상만 해도 삭탈관직은 물론이고 사판에서 삭제하고 멀리 귀향을 보내도 부족한데, 고작 사직서 한 장으로 용서해 주다니 그건 아니 되옵니다.”

“맞사옵니다.”

“이번에 일벌백계를 하여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법을 우습게 알고 또다시 이런 일이 재발할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쯤에서 끝냈으면 좋겠는데 이명한과 척화파 신하들이 계속 물고 늘어지자 인조는 살짝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때 왼편에 앉아 있던 김자점이 입을 열었다.

“그 죄라는 것이 이렇다더라 하는 의심만 있을 뿐이지 명확한 증거가 드러난 건 얼마 없지 않소?”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김자점이 딴죽을 걸자 이명한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국문을 정식으로 열어 우승지의 죄를 밝히자는 거외다. 만약 억울한 것이 있다면 여기서 다 드러날 것이 아니오!”

옆에 있던 대사간 조경도 이명한의 말을 거들었다.

“우승지를 위해서도 의혹을 남겨 두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런데 자꾸 여기서 묻으려고 하니 더 의심을 사는 것이오.”

마지막 말은 마치 자신을 보고 하는 것 같아 인조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렇게 상대가 계속 강경하게 나오자 김자점은 승부수를 띄웠다.

“대사헌이 원하는 대로 국문을 열었다고 칩시다. 가뜩이나 돌아가신 소현세자에 대한 헛소문이 저잣거리에 돌아 민심이 흉흉한데 숙원 마마의 아버지인 우숭지 문제까지 불거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진실 여부를 떠나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자칫 불충한 마음을 품는 자들이 나올지도 모르오. 그런데도 일을 크게 벌려야 되겠소!”

그러자 분위기에 밀려 잠자코 있던 주화파들이 김자점의 이야기를 두둔하고 나섰다.

“병조판서의 말씀처럼 이런 상황에서 국문을 여는 건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경쟁 관계에 있는 김자점이 척화파와 대립하는 걸 보며 내심 흐뭇한 표정을 짓던 우의정 심기원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자 슬쩍 격론에 끼어들었다.

“병판이야말로 상황을 너무 확대해석 하는 것 아니오?”

심기원을 보며 한쪽 뺨을 실룩인 김자점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설마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했을 것 같습니까?”

“근거라…… 그게 뭐요?”

김자점은 맞은편에 있는 척화파들을 스윽 쓸어 보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돌아가신 소현세자에 대한 유언비어는 물론이고 이번 우승지의 일까지 모두 뒤에 청과 싸우기를 원하는 사림 세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폭탄 발언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조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외쳤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자 이명한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면서 부인했다.

“아니옵니다. 저희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이건 모함입니다.”

“그따위 망발을 내뱉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소!”

척화파들이 발끈하자 인조도 약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김자점을 쳐다봤다.

대전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김자점은 약간의 동요도 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상경하라는 주상 전하의 말씀에도 번번이 거절을 하고 낙향해 있던 송시열과 여러 학사들이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상소를 올려 이번 사건을 촉발시킨 것도 수상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데려온 젊은 선비들이 술집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떠들다가 포도청에 갇혀 있는데도 내 이야기가 틀렸다는 겁니까?”

“……!”

순간 이명한을 비롯한 척화파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송시열과 학사들은 조태징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를 보다 못해 상경한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포청에 잡힌 선비들은 자세한 사정을 몰라도 금기시되는 소현세자 문제를 거론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치명타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운데 앉아 있던 인조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크게 소리쳤다.

“감히 날 능멸하다니!”

소현세자 문제는 인조에게 치부와 같은 거였기에 자칫 잘못하면 이걸로 엄청난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그걸 잘 알기에 척화파들은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하려고 황급히 변명을 늘어놨다.

“혈기왕성한 선비들이 술김에 저지른 실수일 겁니다.”

“전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참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척화파의 기세를 꺾어 놓으려고 마음먹은 김자점은 불에 기름을 붓은 이야기를 했다.

“이게 다 내명부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벌어진 일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전하께서 고심을 거듭한 끝에 봉림대군 마마를 국본으로 세우셨는데 거기에 복종을 하지 못하고 반발하는 이들이 있으니, 어찌 민심이 조용하길 바라겠습니까?”

김자점이 누굴 지목하는 건지 깨달은 신하들은 모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놀란 신하들과 달리 인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병판 말이 맞아. 이미 새로운 세자가 정해졌는데 강빈이 대궐에 남아 있다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즉시 사저로 내보내고 세자빈 자격도 박탈하도록 하라!”

“저, 전하!”

“할 말이라도 있나?”

“얼마 전 지아비를 잃고 아직 슬픔을 이겨 내지 못한 강빈 마마께 너무 가혹한 처사이시옵니다.”

대사간 조경이 선처해 줄 것을 간언했지만 인조는 단호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왕실의 법도를 바로 세우자는 건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건 내명부의 일이니 경들은 간섭하지 말라.”

“하오나…….”

“그럼 경들은 한 나라에 세자빈이 두 명이나 있는 상황을 계속 놔둬야 된다는 건가!”

인조의 호통에 신하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지금 상황이 정상이 아니긴 했다.

강빈 때문에 도현이 책봉식을 거치고 정식으로 세자가 됐는데도, 부인인 장씨는 아직 세자빈에 오르지 못하고 계속 예전 품계인 풍안부인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인조의 말대로 세자빈이 둘이나 있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었지만 문제는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너구리 같은 김자점은 교묘히 인조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강빈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려 자칫 자신한테도 불똥이 튈 수 있었던 조태징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는 수완을 보였다.

인조의 명이 정해지자 강빈은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황급히 달려온 궁녀들이 손발을 주물러 주고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올려 주는 등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강빈은 아직도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지 몇 번이고 내관에게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정녕 전하께서 그리하라 하셨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마마.”

강빈의 참담한 표정을 보니 어명을 전하러 온 내관조차도 딱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는지라 다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자신들이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지금 당장 짐을 꾸리셔야 날이 저물기 전에 사가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어서 서두르시지요.”

차가운 내관의 말에 강빈은 가냘픈 몸을 휘청거리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 버텼다.

소현세자라는 든든한 버팀목을 잃었을 때부터 앞날이 그리 밝진 않으리라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당당한 사대부의 여식으로서, 세자빈으로서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고 각오도 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막상 모질게 내치려는 인조의 태도를 눈앞에 맞닥뜨리니 역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알겠네. 주상 전하의 명이시니 따를 수밖에 없지.”

강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상궁에게 눈짓을 했다.

“자네가 적당히 알아서 짐을 챙겨 주게. 당장 갈아입을 옷가지만 몇 개 추리면 되니 시간은 얼마 안 걸릴 걸세.”

뒷말은 상궁이 아니라 가만히 서서 강빈이 궁을 나가는 것만 기다리고 있는 내관에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제일 오랜 시간 곁에서 모셨던 상궁이 눈물을 훔치며 일어서려고 하는데 강빈이 손짓으로 불러 세웠다.

“아이들 옷은 화려하지 않은 것으로 골라서 챙기게. 궁을 벗어나면 그런 건 짐만 될 테니까.”

“네, 마마.”

인사를 하고 방을 물러나려던 상궁은 내관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강빈 역시 내관이 상궁의 앞을 가로막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의아해 물었다.

“왜 그러는가?”

“마마, 죄송합니다만…… 아기씨들은 궁에 남겨 놓으라고 주상 전하께서 명하셨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강빈은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이하여……!”

탄식과도 같은 말을 내뱉으며 강빈은 손으로 바닥을 탕탕 내리쳤다.

“아비는 죽도록 미워했어도 손자는 곁에 두시겠다고? 하! 청에서 돌아오자마자 문안 인사를 드렸을 때도 아이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안아도 주지 않으셨는데, 어찌하여 없던 정이 하루 이틀 만에 샘솟았다 하시더냐!”

강빈은 손톱 끝이 파고들어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너무하시다, 너무하셔! 왜 이리도 모질게 구십니까!”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하자던 남편을 허무하게 잃은 것도 분통이 터져 잠 못 이룰 지경인데, 하물며 며느리는 궁 바깥으로 쫓아내면서 자식까지 떼어 놓겠다 하니, 강빈 역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화를 쏟아 내었다.

“마마, 진정하십시오!”

그러나 내관은 큰 목소리로 고함치며 오히려 강빈은 윽박질렀다.

“더 이상 말씀하시면 능멸죄가 됩니다. 아무리 마마라 해도 그만한 중죄를 저지르고선 살아 나가실 수 없사옵니다!”

“네, 네 이놈”

강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손가락만 쳐 든 채 부들부들 떨 뿐 말을 잇지 못했다.

항상 자애롭고 침착하던 강빈이 이렇게까지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라 궁녀들도 어찌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그때 마룻바닥을 우당탕탕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어머니!”

“도와주셔요! 이자들이 저희를 억지로 끌고 가려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뛰어 들어온 것은 장남인 석철과 둘째 석린이었다.

석철은 올해 열두 살, 석린은 여덟 살로 둘 다 아버지인 소현세자를 닮아 선이 가늘고 성격이 온후하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석린은 강빈의 품으로 와락 안겨들어 울음을 터트렸고, 그나마 나이가 더 많은 석철은 금방 주위 분위기를 파악한 듯 적개심 어린 눈빛으로 내관을 노려보며, 어머니를 보호하듯 앞에 떡 버티고 섰다.

“이게 무슨 무례냐! 냉큼 썩 꺼지지 못할까!”

그러자 내관은 뒤이어 쫓아 들어온 자들을 보고 이 정도 일 처리도 못하느냐는 듯 혀를 쯧 차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휴우. 여봐라.”

인조의 명을 받든 내관은 애초에 그가 끌고 왔던 다른 젊은 내관들과 뒤늦게 두 아이를 쫓아온 궁녀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두 분 마마를 강빈 마마에게서 떼어 놓아라. 하나 옥체에 상처가 가서는 안 될 것이니라.”

“예!”

그러자 젊은 내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석철과 석린을 들어 올리고 억지로 잡아당겼다.

“어머니!”

“안 돼! 이놈들!”

아직은 어린 나이인지라 아무리 반항을 해도 젊은 청년들의 힘을 당해 내지 못했다.

석린이 새된 소리로 어머니, 어머니 하고 악을 질러 대자 이성을 잃은 강빈이 품에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지만, 도리어 궁녀들에게 손발을 억압당해 허공만 허우적거렸다.

“마마를 놓지 못할까, 이 못된 것들!”

“닥치시오! 주상 전하의 어명이신데 감히 항명을 하려는 겐가!”

강빈을 가엽게 여긴 궁녀들이 그들을 말리려고 했지만 사나운 윽박지름에 움찔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아이들이 강제로 끌려 나가자 강빈은 넋이 나가 그 자리에 엎드린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마.”

상궁이 옆에서 몇 번이나 불렀지만 강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곧 출궁하실 시간이오. 앞에 가마를 준비해 놨으니 얼른 마마를 모시고 가게나.”

가차 없는 내관의 말에 상궁은 더 시간을 끌었다간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험한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선 강빈을 재촉해서 억지로 일으켰다.

“마마, 기운 내십시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강빈은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기만 했다.

몸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두 사람이 겨우 부축을 해서 밖으로 나오자 세자빈이 탈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가마가 덜렁 놓여 있었다.

복장이 터질 정도로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겨우 강빈을 안에 앉혀 놓고, 상궁과 어린 궁녀 하나만이 겨우 짐을 챙겨 따라 나왔다.

둘 다 손에는 급히 싸맨 듯한 보따리 하나씩만이 들려 있어 행색이 너무나 조촐했다.

내관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내자, 가마꾼들이 말없이 가마를 들어 올렸다.

좌우로 흔들리는 가마 속에서 강빈은 하염없이 눈물만 주르륵주르륵 흘리다가, 창문 틈 사이로 엿보이는 궁궐의 모습을 바라보며 너무나도 무상하고 잔인한 세상사에 한탄하여 그저 마지막으로 보았던 소현세자의 모습만을 떠올렸다.

“어찌 됐느냐?”

측근인 김 상궁은 숙원 조씨의 물음에 허리를 숙이며 얼른 대답했다.

“방금 대궐을 떠나 사가로 갔사옵니다.”

“그래. 호호호! 그동안 눈엣가시 같더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구나.”

한쪽 손으로 입을 가르며 간드러지게 웃음을 터트린 숙원 조씨는 이내 정색을 하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늙은 너구리처럼 보통 약삭빠른 머리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상황을 역전시키다니, 병판도 제법이야.”

그러면서 숙원 조씨는 또 뭔가를 꾸미는 듯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이번 일로 그녀는 욕심 많고 잔머리만 굴리는 자로 생각했던 김자점에 대한 평가를 몇 단계 위로 올리면서 동시에 자신이 지금처럼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됐다.

한편 동궁전에 있던 도현은 칠현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어. 이것 참! 일이 이렇게 되다니, 형수님과 조카들에게 정말 면목이 없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전혀 예상 밖의 결과인데요.”

칠현 역시 굳은 얼굴로 동조를 했고 도현은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상대를 너무 쉽게 생각했어.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이번에는 완전히 당한 거야. 괜히 나 때문에 엉뚱한 피해자가 나온 것 같아 미안하구나.”

도현이 너무 자책을 하는 것 같아 보이자 칠현이 옆으로 위로를 했다.

“일이 이상하게 풀렸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강빈 마마께서 겪으셔야 되는 일이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어. 조카들은 어디에 맡겨졌지?”

“일단 중전 마마께 보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럼 계속 중전께서 보살피는 거야?”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상께서 강빈 마마에게 보내 드릴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 같으니, 당분간은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도현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한탄하듯 말했다.

“아무리 간신배와 여우같은 숙원 조씨에게 눈과 귀가 다 가려지셨다고 하지만, 어미와 자식 사이의 천륜을 억지로 끊고 떼어 놓으려고 하시다니, 아바마마께서 너무하시는군.”

그러자 칠현이 기겁을 하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조심하십시오. 아무리 동궁전 궁인들을 저희 쪽으로 거의 다 포섭했다지만 벽에도 귀와 눈이 있는 곳이 바로 대궐입니다. 행여나 그런 이야기가 주상 전하께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감옥이 따로 없군. 알았으니까 그만해. 그건 그렇고 형님 이야기를 하다가 술집에서 잡혔다는 선비들이 진짜 있는 거야?”

“예. 포도청에 확인을 해 본 결과 사실이었습니다.”

“쯧.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일이 이렇게 꼬이는 데 큰 빌미가 됐기에 도현은 혀를 차며 함부로 혓바닥을 놀린 선비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때 칠현이 약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조사를 하던 중에 뭔가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걸리는 거라니?”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함께 있던 주모와 다른 손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에는 선비들이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누군가 먼저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거론하며 시비를 걸었다고 합니다.”

순간 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도현은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며 다급히 물었다.

“그럼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번 사건을 벌였다는 거야?”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포도청에 잡혀 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런 사실은 싹 빠지고 시비를 걸었던 인물들의 존재가 지워진 걸 보면 뭔가 구린내가 풍기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한참 동안 혼자 생각을 정리한 도현은 이내 이를 부드득 갈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자점 이 개자식이 날 물 먹인 거군.”

“병판이요?”

단번에 배후를 찍어 내는 도현을 보고 칠현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그는 눈을 형형하게 번득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 줬다.

“배후 세력 어쩌고 하면서 대전에서 제일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바로 김자점이잖아. 거기다가 사건을 맡은 포도청의 수장인 포도대장도 그자의 수족이고 말이야. 이 정도면 답이 나오지 않아?”

“그렇군요.”

설명을 들은 칠현도 김자점 쪽으로 무게가 실리는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얄팍한 수를 쓰다니.”

“지금이라도 함정이 있었다는 걸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칠현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무 소용없을 거야.”

“잘하면 상황을 다시 역전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김자점이 금방 거짓이 드러날 정도로 허투루 처리했겠어.”

“하지만 증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도현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증인이라…… 뭐 일반적인 경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번에는 아니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전하께서 진실이 밝혀지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야.”

“예?”

“생각해 봐. 이게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또다시 정국이 혼란 속에 빠져들며 조태징의 처벌과 함께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올 텐데, 그러고 싶으시겠어? 아마 아바마마도 어느 정도는 김자점이 술수를 부렸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실 거야. 그런데도 모르는 척 눈을 감으시는 걸 보면 의도를 짐작할 수 있잖아.”

“끄으응. 그렇군요.”

“결국 형수님과 조카들만이 억울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지.”

마지막 말을 하며 도현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의 짐작대로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있던 인조는 정국 주도권을 틀어쥐는 선에서 더 이상 문제를 확대하지 않았고, 김자점도 조금 더 욕심을 낼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 상대가 깊이 파고들면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 슬쩍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척화파 역시 문제가 커지면 경우에 따라 자칫 사화士禍(조선 시대에 신료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 몰려 화를 입는 사건)로 번질 수도 있었기에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조태징 문제를 덮기로 했다.

그렇게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지자 포도청에 잡혀 있던 선비들은 곤장 서른 대라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났다. 그리고 송시열을 비롯해 상소를 올리기 위해 상경했던 선비들도 얼마 있지 않아 한양을 떠나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번 사건은 완전히 마무리가 됐다.

위기를 무사히 넘긴 숙원 조씨는 이번 일의 일등공신인 김자점을 처소로 불러 크게 치하했다.

“그런 묘수를 쓰다니 정말 감탄했어요.”

“다 마마님께서 어려운 결단을 내려 주신 덕분입니다.”

“아니에요. 병판께서 나서 주지 않았다면 아버님께서 사직을 했다고 해도 일을 수습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과찬이십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김자점을 보며 숙원 조씨는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느낀 건데, 병판과 내가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띄워 주는 건지 김자점은 살짝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듣자하니 병판의 손자 중에 영특한 아이가 하나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김자점은 약간 당황해하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이야기를 했다.

“네. 세룡世龍이라고, 제법 총명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름이 세룡이었군요. 그 아이와 우리 효명孝明을 짝지어 줬으면 좋겠는데, 병판의 생각은 어떤가요?”

“옹주 마마를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담이 큰 김자점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앞에 있는 숙원 조씨를 쳐다봤다.

“지금도 관계가 나쁘지는 않지만 앞으로 큰일을 함께해 나가려면 서로 진짜 가족이 되는 게 좋지 않겠어요.”

혼인 동맹을 제안하는 거였다.

아직 어린 자식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희생시키는 것 같아 비정하게 느껴졌지만, 솔직히 혼인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다.

혼인을 해서 가족이 되면 서로 단단한 끈으로 연결되는 거니 지금보다 관계가 끈끈해지고 믿을 수 있었다.

김자점 입장에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 진짜로 혼인이 성사된다면, 국왕인 인조와 사돈을 맺는 거니까 권력이 더 커질 거고 나중에는 효명 옹주의 오빠인 숭선군을 왕으로 올려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다.

숙원 조씨도 도현의 등장과 이번 조태징의 비리 사건으로 흔들리는 권력을 단단히 다지고 김자점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 것이다.

또 아무리 인조가 아끼는 여식이라고 하지만 상황에 따라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 옹주의 신분이었는데, 김자점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지게 되면 남은 인생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테니 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김자점의 손자와 효명 옹주의 혼인은 양쪽한테 다 이득이 되는 거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으로 계산을 다 끝낸 김자점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주상 전하께서도 허락하신 겁니까?”

“아직 말씀을 드리지 않았지만 명망 높은 집안인 병판과 사돈을 맺는다면 흔쾌히 수락하실 거예요.”

숙원 조씨의 말에 김자점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부족하지만 제 손자를 사위로 삼으시겠다니, 집안의 영광입니다.”

“그럼 승낙하시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숙원 조씨는 방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앞으로 잘해 봐요, 사돈.”

“네.”

사돈이라는 말에 김자점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숙였다.

숙원 조씨는 미적거리는 것 없이 그날 저녁 바로 처소를 찾아온 인조에게 혼인 이야기를 꺼냈다.

“혼인을 시키자고?”

“네, 전하.”

마시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은 인조는 그다지 탐탁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이도 아직 어린데 벌써 혼인을 시키는 건 너무 빠르지 않나?”

“아니옵니다. 일반 사대부 집안에서도 어린 신랑 신부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도…….”

인조가 말끝을 흐리며 내켜 하지 않자 숙원 조씨는 주전자를 들어 빈 잔에 술을 따르면서 이야기를 했다.

“병조판서라면 조상 대대로 벼슬을 지내 왔고 바로 윗대는 강원도 관찰사까지 지낸 아주 뼈대 있는 집안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정도라면 우리 효명의 시댁으로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옵니다.”

“그건 그래도 나이가 너무 어리잖소.”

예쁘게 여기는 자식인 효명 옹주를 일찍 시집보내기 싫었던 인조는 여전히 싫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걸 눈치챈 숙원 조씨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효명이 애교를 못 보게 되실까 봐 그러시는 거지요?”

“흠흠.”

“시집을 보내더라도 사위와 함께 자주 대궐에 들어와 인사를 하라면 되잖습니까.”

“출가외인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될까?”

“전하께서 찾으시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흐음.”

인조가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숙원 조씨는 쇄기를 박는 말을 했다.

“그리고 저 흉측한 청국 오랑캐들이 매년 공녀를 요구하고 있는데, 행여나 우리 옹주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일반 백성들의 딸이 공녀라는 명목으로 청나라에 수없이 끌려갈 때는 못 본 척 넘어갔던 인조였지만, 아끼는 효명 옹주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하자 정색을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건 절대 안 돼!”

“그러니까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기 전에 효명을 시집보내 버리면 청국도 어쩌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 고심을 하던 인조는 다행히 아직은 그런 요구가 없었지만,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실제로 효종 일 년 청나라 황족인 구왕이 조선에 공주를 자신의 배필로 달라고 요구하면서 논의 끝에 종친인 금림군 개윤의 딸을 양녀로 받아들여 의순 공주로 봉해 보낸 치욕적인 일이 있었다.

기대와 달리 용모가 아름답지 않자 구왕은 의순 공주를 구박하며 방치했고 얼마 후 역모에 휩쓸려 구왕이 몰락하자, 황제의 지시에 따라 부하 장수에 넘겨지는 아픔을 겪었다.

나중에 금림군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런 사실을 알고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황제에게 간청해 겨우 귀국했지만, 죽을 때까지 홀로 불행한 삶을 보내야 했다.

“좋아. 혼인을 진행하도록 해.”

“역시 전하밖에 없습니다.”

품에 안긴 숙원 조씨가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자 인조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냐?”

“예.”

한편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에서 일하는 궁녀를 통해 도현의 귀에 들어갔다.

“김자점의 손자와 효명 옹주를 혼인시킨다고?”

“예. 숙원 조씨가 주상 전하를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전 역사에서 있었던 일이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현 상황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밀착되는 건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서로 사돈을 맺고 사이좋게 조선을 말아 먹겠다 이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도현을 보며 칠현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혼인을 못 하도록 막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바마마께서 딸을 시집보내겠다는데 무슨 수로 그걸 막아.”

“그건 그렇지만…….”

“섣불리 나섰다가는 지난번처럼 역풍을 맞게 될지도 몰라.”

“……예.”

칠현은 숙원 조씨와 김자점이 밀착되는 걸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내심 찝찝했지만 도현의 말에 관심을 끊었다.

“이 문제는 일단 지켜만 보기로 하고, 지난번에 내가 지시한 건 어떻게 됐어?”

“내일 밤에 명월관이라는 기생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 놨습니다.”

중요한 일인지 도현은 눈을 반짝이고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비밀은 철저히 유지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서 지부장과 흑치영의 도움을 받아서 꼬리가 생기지 않도록 확실히 처리를 해.”

“네.”

다른 때보다 더 보안에 신경을 쓰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도 덩달아 긴장을 하며 대답했다.

다음 날 밤 저녁상을 물린 도현은 평상시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니, 잠자리에 든 척만 했는데 눈에 확 띄는 세자복 대신 일반 사대부들이 입는 한복에 두루마리를 걸치고 머리에 갓까지 쓴 도현은 마찬가지로 변복을 한 칠현과 함께 처소를 몰래 빠져나왔다.

“여깁니다, 저하.”

낮게 외치는 목소리를 따라 재빨리 뛰어가자 역시 붉은색 위사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박태철과 김덕술이 어두운 담벼락 아래 서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저희도 이제 막 도착한 참입니다.”

도현은 혹시 누가 나가는 기척을 알아차리지 않았는지 동궁전 쪽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후문 쪽에 미리 손을 써 놨습니다. 가시지요.”

박태철이 앞장을 서고 김덕술이 뒤를 지키는 모양으로 일행은 재빨리 어둠 속에 숨어 이동했다.

마당에 피워 놓은 횃불에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담벼락에 딱 붙어 한참을 가니, 궁문 경비를 맡은 위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서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건지 도현이 궁금하단 얼굴로 쳐다보자, 박태철이 벌떡 일어나서 위사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냥 태연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김덕술이 조용히 속닥이는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어. 밤늦게 고생들 하는군.”

박태철이 밝은 목소리로 알은척을 하자 처음엔 누군지 몰라 경계하던 위사들도 얼굴을 알아보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나으리 아니십니까?”

“나으리는 무슨, 다 같은 위사 아닌가. 말을 낮추게나.”

박태철이 친근한 태도로 그리 말하자 위사들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에이, 그래도 두 사람은 세자 전하께서 자주 부르시니 어디 우리들하고 같은가. 혹시 나중에 더 출세할지도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미리미리 윗사람처럼 모시는 연습을 해 둬야지.”

말은 그리해도 위사들의 표정에 질투심이나 시샘 같은 감정은 드러나지 않아서 원래 친한 사이끼리 농담하는 거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뒤에 같이 있는 청년들은 누군가? 낯선 얼굴인데…….”

“아, 미처 소개를 못 했군. 내 조카들일세. 우리 누님들이 시집간 이후로 각각 아들을 하나씩 낳았는데, 나이만 비슷하지 얼굴은 형부를 꼭 빼닮아서 서로 완전 딴판이라네.”

“정말 그렇군. 하기야 사촌끼리는 안 닮은 경우도 흔하지.”

호기심 서린 눈빛으로 위사들이 살펴보자, 칠현은 혼자 괜히 찔끔해서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도현은 당당하게 입가에 웃음까지 띠면서 마주 보았다.

“허, 고놈 참 맹랑할세. 아, 그럼 아까 낮에 말했던 아이들이 바로 이 녀석들이로군.”

“그래. 곧 있으면 집안에 큰 제사가 있는데, 누님들 말을 전하러 심부름 왔다가 마침 오랜만에 얼굴을 봤고 해서 이야기 좀 하다가 이리 늦었지 뭔가. 지금쯤 집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저런, 집에 걱정을 끼치면 안 되지.”

“이미 밤이 늦었으니 집까지 데려다 줘야 하긴 할 텐데, 정문으로 나가기가 좀 그래서 말이야. 편의 좀 봐줄 수 있겠지?”

“그럼. 자네한테 신세 진 것도 많으니, 그 정도쯤이야.”

“고맙네.”

박태철은 위사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미안한 얼굴로 덧붙였다.

“내가 궁에서 일하다 보니 집안 식구들하고 연락해야 할 일이 있어도 자주 나가지 못해 불편했는데, 마침 이 녀석들도 다 컸고 하니 가끔씩 나한테 전할 말을 들고 찾아올 걸세. 알아서 내 숙소로 찾아올 테니, 다음에도 얼굴 보면 통과시켜 주게나.”

“뭐, 자네 조카들이라고 하니 신분은 믿을 만하겠지. 좋아.”

설마하니 박태철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위사들은 웃는 낯으로 흔쾌히 허락했다.

“자네들한테 피해 안 가도록 이른 새벽이나 밤에만 오라고 단단히 일러 놓겠네.”

“그렇게 해 주면 우리야 고맙지. 윗분들한테 들키면 괜히 잔소리나 들을 테니 말이야.”

위사들은 껄껄 웃으면서 일행이 지나갈 수 있도록 조용히 문을 살짝 열어 주었다.

생각 외로 손쉽게 궁궐을 빠져나온 도현은 히죽거리며 박태철에게 말했다.

“조카와 삼촌이라? 용케 그런 핑계거리를 생각해 냈군.”

“죄송합니다, 저하.”

“뭐라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조금 번거롭지 않나? 그냥 돈 몇 푼 쥐여 주고 입을 다물게 하는 편이 더 빠를 텐데.”

“그리하면 저하의 정체에 대해 저들이 궁금해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김덕술이 저하의 명을 따르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 소문이 퍼지면 금방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이 새어 나갈 염려도 없고, 또 앞으로도 종종 저하께서 바깥에 나가실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박태철에 이어 김덕술도 거들 듯이 말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궁궐 곳곳에 숙원 조씨의 눈과 귀가 있으니 조심하면 할수록 좋지.”

그러고 나서 일행은 서로 비밀을 공유하듯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미 잘 때가 한참 넘은 시각이라 주위에는 불 꺼진 민가가 대부분이었고, 인적 또한 끊긴 지 오래라 멀리서 순라꾼들이 순찰을 돌면서 딱딱 치는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이 매우 조용했다.

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밝은 달을 등불로 삼아, 길을 아는 박태철과 김덕술의 등만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 붉고 푸른 등을 환하게 밝힌 저택이 나타났다.

격조 높은 사대부의 집이라도 되는 양 기와를 올린 지붕 끝자락은 여인의 버선발처럼 둥글게 위로 향해 있고, 불을 환하게 밝힌 정원엔 손질이 잘된 정원수와 꽃이 만발했으며 정자 주위로는 연꽃이 위로 둥둥 떠서 넓게 잎을 펼치고 있는 작은 호수까지 만들어 놓았다.

방금 전 지나쳐 온 민가는 모두가 자는 듯 찍소리 하나 나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는데, 이곳은 마치 별세상인 것처럼 밝고 화려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행이 저택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가마가 한 대 도착했는데,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른 젊은 양반 하나가 푸른 장포를 펄럭거리며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머리를 틀어 올린 기생이 뛰쳐나와 그에게 안기는 모습까지 보였다.

“저 아가씨는 마치 선녀같이 예쁘네요.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인가 봅니다.”

“아서라. 너한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니까.”

“칫. 보고 감탄하는 것도 안 됩니까요?”

궁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궁녀들 중에서도 제법 얼굴이 고운 아이가 있긴 하지만, 비빈들 앞에서 화려하게 치장할 수는 없으니 수수한 옷차림에 미모가 묻히는 반면, 한껏 분을 찍어 바르고 입술을 빨갛게 칠한 기생의 모습을 보니 설레는 모양이라 도현은 피식 웃어넘겼다.

“하루 종일 여기서 서 있을 게냐? 얼른 들어가자.”

도현이 박태철과 김덕술을 데리고 저택 문간을 넘자 반들반들 윤이 흐르는 백색 저고리에 옥빛 노리개를 차고, 자수를 놓은 풍성한 치맛자락을 한 손에 말아 쥔 여자가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다소곳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아까 언뜻 보았던 기생보다는 나이가 많은 듯싶었으나 여염집 아녀자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피부가 하얗고 움직이는 모양새도 조용조용한 것이 마치 교양 있는 양반집 부인 같았다.

하지만 살짝 미소를 띠거나 눈웃음을 칠 때마다 언뜻언뜻 흘러나오는 색기가 요염해, 과연 이런 쪽 장사를 하는 여인네다운 기색이 엿보였다.

“남촌에서 오신 선비님들이십니까?”

“그러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일행께서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셔요.”

“그래?”

“네. 이제 다 오셨으니 주안상을 마련해 올릴까요?”

“아니, 됐네. 먼저 할 얘기가 있으니 나중에 필요하면 부르지.”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여주인은 사락사락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일행을 저택 안쪽으로 안내했다.

바깥채 쪽에는 누군가가 연회를 벌이고 있기라도 하는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호쾌하게 웃어 젖히는 사내와 아양을 떠는 여자의 목소리가 섞여 나와 소란스러웠지만, 여주인을 따라 점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소음은 약해지고 정원수의 가지가 바람에 스쳐 쏴아쏴아 흔들리는 소리만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원하신 대로 양쪽 방을 다 비워 놓았으니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네.”

“별말씀을요.”

등불을 마루 위에 내려놓은 여주인이 얘기가 끝나면 다시 불러 달라며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김덕술이 불이 켜져 있는 방문을 밀어젖혔다.

안에는 곰처럼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혼자 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는데, 기다리는 동안 목이나 축이라며 갖다 놓은 찻잔과 주전자에도 전혀 손을 댄 흔적이 없어 사내의 우직한 성품을 대변해 주었다.

이미 사람이 오는 기척을 알아차리고 있었는지 놀란 표정 하나 없이 박태철과 김덕술을 차례대로 쳐다본 사내는, 이내 도현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찬찬히 일어나 절을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자 저하. 소인 이관이라 하옵니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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