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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치기 (25/104)

뒤통수치기

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집무실 밖을 서성거리는 가운데 도현은 식사도 하지 않고 밤새 집무실에 혼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충격과 분노에 흥분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감정이 가라앉자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일을 도모해야 하지만, 조선을 개혁시켜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거나 핍박받지 않는 강대국으로 키우려는 꿈을 가진 든든한 동지였던 소현세자가 급사한 이상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숙원 조씨와 김자점이 다음 목표로 도현을 노릴 것이 분명했다.

이걸 막아 내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도현이 세자 자리를 이어받고 조선의 국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우선은 상대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견제부터 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한 도현은 고개를 들어 칠현을 불렀다.

“칠현이, 게 있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칠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마마.”

“지금 당장 예친왕부에 사람을 보내 섭정과 약속을 잡아.”

갑자기 예친왕을 만나러 가는 것이 의아했지만 도현이 충격에서 벗어나 평상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보이자 칠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예.”

“그리고 지시할 것이 있으니까 장 총관을 불러들여.”

“알겠습니다.”

청나라가 천도를 하자 봉황상단도 따라서 본점을 옮겨 현재 장 총관은 북경에 와 있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봉황상단도 비상이 걸려 있었기에 언제든 도현의 호출이 있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게 대기하고 있던 장 총관은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관저로 들어왔다.

온돌방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되어 있는 집무실에 들어온 장 총관은 대뜸 바닥에 엎드리며 죄를 청했다.

“죽여 주십시오, 마마.”

“일어나게.”

“아닙니다. 마마께서 그렇게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셨는데 세자 저하를 지켜 드리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만들었으니 목숨으로도 이 죄를 다 씻지 못할 겁니다.”

침통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는 장 총관을 보며 도현은 엄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그럼 무책임하게 도망칠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일해 형님의 꿈을 이루고 흉수들한테 복수를 해야지, 이게 무슨 약한 모습이야!”

“마마.”

“못난 꼴은 그만 보이고 어서 일어나.”

슬픔이 더 클 텐데도 의연하게 이겨 내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다독이는 도현의 모습에 장 총관은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손짓을 해서 맞은편 자리에 장 총관을 앉힌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고, 지금부터는 상황이 악화되는 걸 막아야 하네.”

“뭐든지 하교만 하십시오.”

“우선 아바마마를 등에 업은 숙원 조씨가 독주를 하지 못하게 제동을 걸어야 해.”

“그럼 세자 저하께서 급사하실 때 치료를 맡았던 이형익을 물고 늘어져 조씨의 파렴치한 죄상을 꼭 밝혀내면 어떻겠습니까?”

분연한 장 총관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건 상책이 아니라 하책이야. 이형익은 그저 숙원 조씨의 독수에 걸린 꼭두각시에 불과하니 여차하면 꼬리를 자르고 오리발을 내밀겠지. 게다가 자칫 잘못하면 형님이 싫다는데도 억지로 그를 동궁전에 보낸 아바마마를 의심한다며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 그러지 않는 게 좋아.”

“그럼 마마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은 여론이 중요해. 형님께서 돌아가신 이상 세자 자리가 비게 되었는데,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지. 내가 나서지 않아도 반드시 대신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걸세.”

“……?”

“그리고 숙원 조씨는 자기 소생을 세자 보위에 올리려고 하겠지. 그걸 위해서 여태까지 온갖 악행을 저질러 왔으니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것만은 막아야 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말한 도현은 앞에 있는 장 총관을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숙원 조씨 쪽에서 먼저 움직이기 전에 신료와 사대부 들을 부추겨서 날 세자로 밀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머리가 똑똑한 사람답게 도현의 뜻을 알아차린 장 총관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한양에 서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선수를 빼앗기면 그때는 지금까지 애써 준비한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수밖에 없으니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돼.”

“예.”

결연한 얼굴로 대답한 장 총관은 몇 가지 더 은밀히 지시를 받고는 서둘러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칠현이 들어와 섭정과 약속이 잡혔다고 하자 도현은 바로 관저를 나와 예친왕부로 향했다.

자금성 바로 옆에 있던 명나라 고관대작들의 저택 여섯 개를 합쳐서 증축한 새로운 예친왕부는 가지고 있는 권세를 보여 주듯 아주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커다란 전각만 무려 열 개가 넘고 예친왕이 머무는 곳은 높이가 오 층이나 되어 창문을 열면 북경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끝도 없는 돌담과 마차 두 대가 그대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큰 정문은 방문자들을 절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정문에는 팔기군 중 하나로 예친왕의 친위대 격인 백기단 병사들이 살벌한 기세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마부석 옆에 조선왕실을 뜻하는 봉황기를 단 마차가 달려오자 병사들이 경계 자세를 취하며 앞을 막았다.

“멈추시오!”

“워워!”

마부가 고삐를 당겨 마차를 세우자 허리에 검을 찬 하급 군관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가왔다.

“어디서 오는 마차인가?”

상전인 예친왕의 권세를 믿고 그러는 건지 황도에서 이두 마차를 탈 정도면 제법 행세깨나 하는 인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급 군관은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

아니꼬웠지만 괜히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었기에 마부 옆자리에 타고 있던 칠현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조선 관저에서 왔습니다.”

“누가 타고 있지?”

“둘째 왕자님이신 봉림대군께서 타고 계십니다. 섭정 전하와 약속이 잡혀 있는데, 연락을 못 받으셨나 봅니다?”

원래 이런 자들은 더 큰 권력을 보여 주면 찍소리도 못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친왕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하급 군관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뒤로 돌린 하급 군관은 괜히 부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문을 열어 드리지 않고 뭣들 해!”

“예. 옛.”

잠시 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좌우로 열리자 도현을 태운 마차는 그대로 왕부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중하게 말한 집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도현은 오늘로써 두 번째인 접견실 내부를 스윽 훑어봤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전각과 저택보다 한층 더 호화롭고 웅장한 실내 장식을 무심한 눈빛으로 훑은 도현은 고리가 달린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탁 트인 하늘 아래 끝없이 늘어서 있는 자금성의 위용이 한 폭의 멋들어진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언제 봐도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할 정도로 넓은 자금성이지만 도현은 반대로 예친왕의 권세가 황제와 필적할 정도로 높아졌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창틀에 몸을 기댔다.

자금성은 황제의 위신과 권력을 대변하는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기에 항상 올려다봐야 하는 존재이지, 내려다보거나 비슷한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하기에 아무리 나라에 공을 세우고 부를 쌓아도 자금성보다 더 높은 건물을 세우지 못하는 것인데, 예친왕은 보란 듯이 바로 옆에서 황제와 비슷한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의 야망을 단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만약 그가 섭정왕이 아니었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현이 눈부신 듯 바깥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인기척이 들려 뒤를 돌아보니 예친왕이 안으로 막 들어오고 있는 참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전하.”

청국식으로 도현이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취하자 예친왕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이리 와서 앉게.”

“네.”

값비싼 향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진 사각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자 아까 안내를 해 줬던 집사가 인삼차를 갖다 놓고는 한쪽에 조용히 섰다.

“자네한테 이야기를 듣고 계속 이것만 마시고 있는데 아침마다 일어날 때 개운하고 힘이 나는 것이 아주 효과가 좋더군.”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예친왕은 허리에 차고 있던 비단 주머니에서 남초를 꺼내 담뱃대에 채워 넣고는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순간 하얀 연기와 함께 담배 특유의 냄새가 풍겼는데 예친왕이 피고 있는 남초는 얼마 전 도현이 선물로 준 거였다.

“역시 남초는 조선에서 재배한 것이 최고란 말이야. 그런 걸 보면 이 차도 그렇고 조선은 땅이 좋은 것 같아. 안 그런가?”

“이번에 수입해 온 것들 중에 특상품이 있는데 나중에 몇 상자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고맙네.”

담뱃대를 한 모금 길게 빨았다가 내뿜은 예친왕은 앞에 있는 도현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갑자기 날 보자고 한 건가?”

그러자 정색을 하며 자세를 바로 한 도현은 약간 침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실은 오늘 한양에서 기별이 왔사온데 형님인 소현세자께서 급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깜짝 놀란 예친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소현세자가 죽었다니 그게 사실인가?”

“예.”

“허어. 이런 일이…… 얼마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때만 해도 아주 건강했었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가?”

혹시 무슨 흑막이 있는지 탐색하듯 눈을 번들거리며 묻자 도현은 괜히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학질에 걸려 치료를 받다가 갑자기 병이 악화돼서 그만…….”

“저런.”

그래도 심양에 머물며 많은 친분을 쌓았기에 예친왕은 짧게 혀를 차고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어찌 됐건 그런 일을 당하다니 상심이 크겠군.”

“지금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 마음 이해하지. 참 영민하고 우리 쪽과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는데, 아깝게 됐어.”

예친왕의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눈을 반짝인 도현은 넋두리를 하듯 말했다.

“형님이 돌아가신 것도 슬프지만 이 일로 인해 그동안 애써 쌓은 양국 간의 우호 관계가 훼손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예상대로 예친왕이 얼굴을 굳히며 묻자 도현은 마치 실수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예친왕의 관심을 더 끌었다.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속 시원히 이야기를 해 보라.”

재촉에 도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북경 공략에 참가하기 전 형님께서 조정에 서신을 보내, 이제 명과 관계를 정리하고 청나라를 새로운 패자로 인정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소현세자가 청에 우호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주장을 드러내고 국왕에게 건의까지 했다는 것은 미처 몰랐던 예친왕은 약간 놀라면서도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나?”

“네.”

“정말 아까운 사람을 잃었군.”

“지금 생각하면 그것 때문에 고초를 많이 겪었습니다.”

무례하게 생각될 정도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추는 도현에게 예친왕이 물었다.

“무슨 고초 말인가?”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명나라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작자들이 형님을 공격해서 물어뜯는 바람에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타앙!

“무어라? 그럼 그 무지몽매한 자들의 이름을 대라.”

격분한 예친왕이 탁자를 내리치자 도현은 반대로 뒤로 한발을 빼듯이 말끝을 흐렸다.

“워낙 그 수가 많아 딱히 누구라고 하나 집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러며 도현은 예친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형님께서 국왕 자리를 이어받으셨다면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뜯어고치셨겠지만, 일이 이리되는 바람에 모조리 헛된 바람이 되어 버렸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하다가 다시 표정을 바꿔 말했다.

“행여나 그자들이 자신의 욕심만 내세워 자질도 없는 엉뚱한 자를 세자 자리에 앉혀,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

예친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다면 몰라도 강남으로 내려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중인데, 후방인 조선의 정세가 불안해진다면 청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더군다나 북경을 함락시켰다고 하지만 이자성과 장헌충같이 수십만의 군세를 거느린 반란군이 아직 버젓이 남아 있어 아직 화북 지역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예전부터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건 어려운 일이었는데, 특히나 청나라처럼 인구가 적은 국가는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거기다 조선군은 지휘부는 무능할지 몰라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단련된 강군이고, 화포까지 잘 다뤄 상대하기 어려운 군대였다.

“얘기는 잘 들었네.”

예친왕은 담뱃대를 황동 재떨이에 탁 쳐서 다 태운 남초 찌꺼기를 버리고는 등을 뒤로 기대며 평소와 같이 거만하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보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최대한 빨리 조선으로 보낼 조문단을 꾸리라고 명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섭정 전하의 마음 씀씀이에 조정 대신들도 모두 고마워할 겁니다.”

이야기가 일단락됐음을 안 도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했다.

배웅은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예친왕이 손을 들어 올렸고 도현이 자리를 뜨자 이윽고 조용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새로 남초 가루를 채워 넣은 담뱃대를 입에 물고 한참 고심을 거듭하던 예친왕은 눈을 매섭게 번뜩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것 참, 뒤통수를 까이기 싫으면 자신을 세자 자리에 앉혀 달라 이건가……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봉림대군을 절대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그걸 어렵게 만들었다.

아니, 봉림대군 스스로 먼저 조선의 내부 사정을 까발리면서 예친왕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새롭게 대륙의 패자로 떠오른 청나라 섭정이 조선 국왕도 아니고 둘째 왕자에 불과한 봉림대군에게 휘둘린다는 것이 어처구니없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예친왕은 봉림대군을 경계하고 항상 지켜볼 수 있는 곳에 두려고 했었다.

그날 오후 측근들을 소집한 예친왕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알리고 차후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의논했다.

“감히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들이 있다니. 섭정 전하 저한테 팔기군 두 부대만 주시면 바로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오겠습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예친왕은 야골타의 말에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왜 그렇게 생각이 없어! 그게 가능했다면 이러고 있지도 않을 거잖아.”

괜히 나섰다가 야단을 들은 야골타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만월개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는 조선을 손보는 건 무리입니다.”

“조선이 명나라와 유대 관계가 깊은 건 저도 알고 있지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저희하고 가까운데 설마 무모한 짓을 벌이겠습니까? 전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고 싶은 욕심에 일을 부풀려 말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청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 용골대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평소 도현과 사이가 안 좋은 야골타는 방금 혼이 났으면서도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음험한 봉림대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요.”

그러자 만월개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말했다.

“물론 그런 의도도 있겠지만,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이 기본적으로 명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무엇보다 재조지은이라고 해서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남으로 간 숭정제가 도와 달라는 칙령을 보내면 아무리 친청파가 권력을 쥐고 있어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재조지은이 뭐요?”

“거의 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해 준 은혜라는 뜻인데, 과거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해 준 것을 말하는 겁니다.”

설명을 들은 용골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그리고 내가 알기로 명군이 출병한 건 왜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북경까지 몰려올까 봐 나선 것이고, 지원병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군량미만 축낸 데다 실제로 적을 무찌른 건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들로 알고 있는데, 그걸 은혜라고 아직까지 고마워한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이해가 안 가지만 사실입니다.”

“거참.”

“으음.”

후금 시절부터 사신으로 조선을 드나들던 만월개였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침음성을 흘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빨리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조선이 뒤를 친다면 상당히 곤욕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주력이 대부분 만리장성을 넘어와 있어 만주가 텅 비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용골대와 무장들의 표정을 심각해졌다.

실제로 의주 근처에 전진 배치해 인조와 신하들을 두렵게 만든 부대는 겉만 번지르르하지 팔기군에 편성되지 못한 질이 떨어지는 이 선 급 병력이었다.

그 때문에 명나라를 공략하면서도 예친왕을 비롯한 청군 지휘부는 혹시나 조선군이 국경을 넘지나 않을까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그렇다고 화북 지역에서 주력을 빼내 압록강 쪽으로 옮길 수도 없었기에 예친왕의 고민이 깊어졌다.

“어쩌면 좋겠나?”

좌중을 둘러보며 예친왕이 물었지만 다들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찬 예친왕은 만월개에게 시선을 줬다.

“쯧. 자네가 조선통이니 이야기를 해 봐.”

시선이 자신한테 모이자 만월개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흠. 제 생각에는 조선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는 저희에게 우호적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해서 하루빨리 한양으로 보내야 될 것 같습니다.”

“역시 그 방법뿐인가?”

이맛살을 찡그린 채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한참을 고심하던 예친왕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대륙 장악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될 때이니 어쩔 수 없지. 황상께 말씀드려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을 받을 수 있게 준비하도록.”

“옛.”

예친왕의 지시에 수하들은 머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 찾아봤지만 결국 도현이 의도한 대로 청국 조정이 움직이게 됐다.

회의를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온 만월개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중을 나온 집사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일찍 오셨습니다.”

“그래.”

손을 살짝 내저은 만월개는 곧장 안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손님은 아직 서재에 계시지?”

“예.”

정원을 가로지른 만월개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혼자 차를 마시고 있던 장 총관이 얼른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혼자 지루하지 않으셨소?”

“정원이 잘 꾸며져 있어서 그걸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나도 정원이 마음에 들어서 이 저택을 선택한 거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을 보며 만월개가 자랑하듯 이야기를 하자 장 총관도 맞장구를 쳐 줬다.

“역시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아부인 줄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으며 만월개는 장 총관과 서재 가운데 있는 의자에 마주 앉았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장 총관이 조심스럽게 묻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만월개는 상당히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만간 황궁에서 칙사가 갈 거요.”

“그럼!”

“이런저런 의견이 많았지만 내가 섭정께 강하게 주장해서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을 받을 수 있도록 했소.”

긴장한 채 이야기를 듣던 장 총관은 얼굴을 활짝 펴며 만월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도현은 직접 예친왕을 찾아가 자신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유도하면서 동시에 섭정이 조선 내부 사정에 밝은 만월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장 총관을 보내서 미리 지지를 부탁했다.

그런 이유로 아까 끝난 회의에서 만월개가 도현이 유리하도록 의견을 제시한 거였다.

“이건 약소하지만 이번에 도와주신 것에 대한 답례입니다.”

말을 하며 장 총관은 옆자리에 놔둔 작은 궤짝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뚜껑을 열었다.

궤짝 안에는 누런 금원보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얼핏 봐도 수만 냥은 되어 보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금원보를 본 만월개는 얼굴 가득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장 총관은 계산이 확실해서 좋다니까.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시오.”

“그러겠습니다.”

궤짝을 챙기는 걸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지만 장 총관은 끝까지 미소 띤 얼굴로 만월개를 상대했다.

대업을 앞두고 후방이 흔들리는 걸 원치 않았던 예친왕은 일단 결심이 서자 신속하게 움직여 도현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께서 드시옵니다.”

내관의 외침과 함께 궁녀들이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어 주자 관복을 입고 선 도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넓은 대전에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많은 관리들이 도열해 있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색 비단을 따라 바로 정면에는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좌에 어린 순치제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섭정인 예친왕이 근엄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양옆에 늘어서 있는 청국 관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도현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황궁 예법에 따라 황제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숙인 도현은 황좌를 네 걸음 정도 앞두고 멈춰 서서는 양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청국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도현이 인사를 했지만 어린 황제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이 자리가 따분하고 귀찮은지 하품만 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예친왕이 대신 입을 열었다.

“봉림대군은 고개를 들라.”

도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예친왕은 자못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조선으로 떠났던 소현세자가 병을 얻어 안타깝게도 세상을 버린 것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세자라는 중요한 자리를 이대로 비워 둘 수 없기에 황제 폐하의 뜻을 받아 다음 계승권자인 봉림대군을 조선의 세자로 책봉冊封하려고 한다.”

“황공하옵니다.”

“봉림대군에게 책봉서를 하사하라!”

한쪽에 서 있던 대전 내관은 예친왕의 지시에 앞으로 나와 비단 두루마리를 양손으로 바쳐 조심스럽게 도현한테 건네줬다.

책봉서를 받은 도현은 그대로 고개를 세 번 숙이며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걸로 봉림대군이 조선의 세자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선언하노라!”

예친왕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치는 걸 들으며 도현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에 책봉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책봉식이 모두 끝났다.

책봉식이 가진 의미를 생각하면 상당히 간소하게 끝났는데 아무래도 자신들의 일이 아닌 조선의 세자를 임명하는 일이고 갑자기 결정되다 보니까 여러 가지로 준비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식이 끝나자마자 순치제는 유모한테 안겨 대전을 떠났고 도현도 예친왕을 따라 자금성 내에 있는 조용한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축하하네.”

“다 예친왕 전하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일이 있다고…… 그것보다 이제 세자가 됐으니 조선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나?”

귀국 이야기가 나오자 도현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형님 일도 있고 가능하면 저도 그러고 싶지만 황제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황제라고 해 봐야 이제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이니 결국 도현의 말은 앞에 있는 예친왕의 의중을 묻는 거였다.

능구렁이 같은 모습에 예친왕은 잠시 정말 도현을 이대로 조선으로 보내도 될지 망설였지만 이미 세자 책봉까지 해 준 마당에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우스웠기에 미련을 접었다.

“이미 승낙을 하셨으니 그건 걱정 마시게.”

“정말이십니까?”

“그러네.”

“이렇게 기쁜 일이…… 감사합니다.”

“반대도 있었지만 양국이 지금처럼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어렵게 결정을 내린 것이니, 그걸 명심해 주게.”

“물론입니다.”

은근슬쩍 세자 자리에 앉혀 줬으니 반항하지 말고 내부를 잘 단속하라며 압박을 준 예친왕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며칠 뒤에 조선으로 조문단을 보낼 건데, 이왕이면 그때 함께 귀국하는 것이 어떤가?”

도현은 예친왕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 전 조금 늦게 출발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아무튼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능한 한 편의를 봐줄 테니 부담 가지지 말고 이야기를 하게.”

“예.”

그 뒤로 얼마간 소소한 대화를 나눈 도현은 예친왕에게 인사를 하고 자금성을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탄 도현은 등을 뒤로 기대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흥! 누굴 죽이려고.”

실제로 귀국을 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았지만 무리를 한다면 조문단과 함께 북경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면 여러 가지로 편한 점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거절한 건 인조와 사대부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인조의 허락도 없이 청나라 황제에게 세자 책봉서를 받았으니 순서가 거꾸로 됐을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과 국왕을 무시한 것이 되어 상당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조문단이라고 하지만 청국 관리들과 함께 마치 점령군처럼 한양에 들어간다면 자칫 큰 반발을 사게 될 가능성이 컸다.

반면 이제 명 대신 청나라 황제가 조선의 왕위 계승을 주관한다는 걸 조야朝野(조정과 민간)에 심어 줄 수 있으니 예친왕이 이런 제안을 한 거였다.

이런 꼼수를 모를 리가 없는 도현은 조문단이 가고 나서 약간 시차를 두고 북경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도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혼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관저에 도착하자 부인을 비롯한 식솔들이 입구에 모두 나와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 책봉을 받으신 걸 경하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박황의 말에 열 명 남짓한 관저 소속 관리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부인인 장씨도 다소곳한 모습으로 축하를 해 줬다.

“축하하옵니다.”

“고맙소, 부인.”

고개를 숙이며 살포시 미소를 지어 주는 부인의 모습에 도현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타지에서 함께 고생한 일종의 동지들이었기에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일일이 다 인사를 받은 도현은 안채에 위치한 전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석에 자리를 잡은 도현은 모여 있는 관리들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먼저 머나먼 타지에서 그동안 고생들이 많았소. 형님인 소현세자를 잃는 아픔이 있었지만 내가 그 뒤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다 경들 덕분이오.”

소현세자 이야기가 나오자 대빈객 박황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한양에서 벌어진 일도 그렇고 저희들이 제대로 보필을 하지 못한 것 같아 그저 죄스러울 뿐입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그러자 도현은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관리들을 따뜻하게 다독여 줬다.

“어찌 그대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자책하지 말고 각자 얻은 교훈을 머리에 새겨 놓도록 합시다.”

“알겠사옵니다, 저하.”

“그리고 한 가지 더 경들에게 알려 줄 희소식이 있소.”

궁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리들을 향해 도현이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내년 설날은 조선에서 보낼 수 있을 것 같소.”

“……!”

“설마?”

처음에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해하던 관리들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도현을 쳐다봤다.

“섭정인 예친왕에게 귀국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

“오! 이렇게 기쁜 일이…….”

볼모 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다들 뛸 듯이 기뻐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향수병을 앓으며 가족을 그리워했기에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북경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짐을 싸게 돼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니 고생들 해 주시오.”

“이런 고생은 몇 번이든 할 수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하하하! 맞습니다.”

“귀국 준비는 박 대빈객이 맡아서 해 주시오.”

도현의 말에 박황도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관리들이 일단 돌아가자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장씨 부인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서방님, 한양에 돌아가게 됐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게 묻는 장씨 부인의 볼에는 십 대 소녀처럼 발그스레한 홍조가 떠올랐고,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얼굴에 바로 드러날까, 생각하며 도현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 부인의 손을 잡아 옆에 끌어 앉혔다.

“나중에 내 직접 말해 줄 요량이었는데, 소문이 바람보다 더 빠른 모양이로군.”

“아까 관리들이 나가면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장씨 부인은 도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인가요?”

“음. 그동안 신세진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처리해야 할 일도 조금 남아 있으니, 당장 오늘내일은 무리더라도 이번 달 안으론 출발하게 될 거요.”

“……!”

장씨 부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잘됐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청나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정에 인사차 들렀을 때 이제 가면 언제 또 얼굴을 볼 수 있겠느냐며 눈시울을 붉히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였기에 이미 속으로 각오를 굳히고 있던 장씨 부인조차 눈물을 참지 못하고 한없이 고귀한 신분인데도 남의 나라로 떠나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한탄했었다.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도 살아생전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던가.

그런데 이제 당당히 세자 책봉까지 받고 금의환향하게 되었다니 장씨 부인은 그저 굵은 눈물방울만 뚝뚝 떨어뜨렸다.

“울지 마시오. 모처럼 생긴 좋은 일이라 활짝 웃어 줄 거라 생각했건만.”

“죄송해요. 기쁜데도 이리 눈물이 나니 부끄럽습니다.”

도현은 다 이해한다는 듯 장씨 부인을 안고 등을 톡톡 토닥였다.

한편 눈엣가시 같았던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희희낙락하고 있던 숙원 조씨는 북경에서 전해진 소식에 발칵 뒤집어졌다.

당장 김자점을 거처로 불러들인 숙원 조씨는 연신 손바닥으로 서탁을 내려치며 앙칼진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청나라 황제가 봉림대군에게 세자 책봉을 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숙원 조씨가 마치 아랫사람을 추궁하듯 몰아붙이자 울컥 속에서 뭐가 치밀어 올랐지만 상황이 안 좋은 만큼 김자점은 애써 화를 참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도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방심하고 있다가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어요.”

“그래서 감탄만 하고 있을 거예요. 빨리 대책을 세워야 될 것 아니오!”

“이미 황제에게 책봉서까지 받았다는데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상께서 승인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세자 행세를 하다니 난 절대 인정할 수 없어요!”

절차에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명나라를 밀어내고 새롭게 대륙의 패자로 떠오른 청국 황제가 승인했다면, 아무리 인조라도 뒤집기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숙원 조씨가 쌍심지를 켜고 억지를 부리자 김자점은 짜증이 났다.

“그럼 어쩌겠다는 겁니까?”

“당장 주상 전하께 말씀을 드려 세자 책봉을 무효로 돌려야지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잘못했다가는 황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큰 벌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숙원 조씨가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자 김자점은 정색을 하며 겁을 줬다.

“김상헌과 최명길 두 대감처럼 되고 싶은 건 아니시겠지요.”

“으음.”

순간 얼굴이 창백해진 숙원 조씨는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김상헌이야 원래부터 골수 척화파의 거두로 미운털이 박혔었지만 최명길은 주화파의 수장으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적극 권했을 정도로 청나라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었다.

하지만 명나라와 내통을 했다는 이유로 심양에 끌려가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대신들도 이렇게 힘없이 내주는 처지에 그녀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숙원 조씨는 겁이 나는지 살짝 꼬리를 내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소이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요. 아쉽지만 이번에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보다 조만간 청나라에서 조문단이 온다는데 그것부터 해결해야 될 겁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같아 심통이 난 숙원 조씨는 입술을 삐죽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거야 영전靈前을 보여 주고 적당히 뇌물이나 좀 쥐여 주면 끝날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태평한 숙원 조씨의 모습에 김자점은 내심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이 들은 정보를 이야기해 줬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청국에 있는 제 지인이 알려 온 정보에 의하면, 이번 사절은 단순히 조문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죽은 소현세자의 사인에 대해서 조사를 하는 임무도 함께 받았다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숙원 조씨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게 정말이에요?”

“네.”

“도대체 누가 그런 지시를 내린 거랍니까!”

“섭정을 맡고 있는 예친왕이 직접 명령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섭정인 예친왕이 관련되어 있다면 아무리 뇌물을 많이 준비해 놨어도 소용없을 가능성이 컸다.

이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숙원 조씨는 창백해진 얼굴로 김자점을 쳐다봤다.

“아니, 예친왕은 왜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혹시라도 저들이 이번 일에 마마님과 제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아내면 골치 아파진다는 겁니다.”

주도권을 잃는 것 정도가 아니라 잘못했다가는 세자를 시해한 죄로 사약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숙원 조씨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의심을 하더라도 확증을 잡지 못하도록 꼬리를 잘라야지요.”

“꼬리라면…….”

김자점은 뱀처럼 눈을 차갑게 번뜩이며 말했다.

“이형익만 사라진다면 저희와 연관된 끈이 모두 끊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쪽에서 자기를 버릴 조짐이 보이면 이형익, 그자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러니까 입을 열 여유를 주면 안 되겠지요.”

“암살을 하겠다는 건가요?”

약간 놀란 얼굴로 숙원 조씨가 쳐다보자 김자점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침 의금부 감옥에서 풀려나 집에서 근신을 하고 있다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흐음.”

소현세자가 급사를 하자 가장 큰 비난을 받고 있는 자는 바로 치료를 담당했던 이형익이었다.

조선 시대의 관례로 보면 왕이나 세자가 병을 얻어 죽게 되면 담당 의관이 책임을 지고 멀리 귀향을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찌 된 건지 의금부에서 며칠 갇혀 있은 걸 제외하고는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는데 심지어 인조는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사인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연사도 아니고 병세가 호전되어 가다가 갑자기 악화되어 급사했다는 걸 고려하면, 이건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이것 때문에 저잣거리에는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해 의도적으로 죽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고, 삼사三司(조선 시대 언론을 담당하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지칭하는 것)에서 이형익을 벌하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인조는 어쩜 이럴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절로 나올 정도로 장례 절차마저 간소하게 하며 서둘러 소현세자의 존재를 지우려고 했다.

아무튼 그런 상황 속에 논란의 핵심인 이형익은 내의원 의관 자리를 계속 유지한 채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손에 낀 옥가락지를 매만지며 잠시 고심하던 숙원 조씨는 이내 표독스러운 얼굴로 앞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판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그러자 김자점은 씨익 미소를 짓고는 살짝 머리를 숙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뒤처리는 깨끗하게 하셔야 됩니다.”

“물론이지요.”

이로써 이형익의 운명이 결정됐다.

대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 김자점은 집사에게 명해 누군가를 은밀히 불렀다.

“대감마님, 안악골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들여보내게.”

“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냉막한 인상의 건장한 젊은 사내였는데, 전체적으로 아주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사내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찾아뵙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동안 잘 지냈나?”

“그럭저럭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약간은 건방져 보이는 말투였지만 김자점은 신경 쓰지 않고 피식 미소를 짓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가 해 줄 일이 하나 생겼네.”

“말씀하십시오.”

“이형익이라고, 요즘 저잣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니 잘 알 걸세. 그자를 처리해 줬으면 해.”

그러자 사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앞에 있는 김자점을 쳐다봤다.

“이거 아주 위험한 냄새가 풍기는데요.”

“호위도 없고 고작 의원 하나 죽이는 거니까 위험할 일은 없어.”

“그냥 평범한 의원이 아니고 얼마 전 급사한 세자와 관련이 된 인물이니까 문제지요.”

사내의 말에 김자점은 옻칠이 된 궤짝에서 엽전 꾸러미를 집어 앞으로 던졌다.

쩔그렁.

“착수금으로 하고 일이 끝나면 그만큼 더 주지.”

얼추 이백 냥은 되어 보이는 거금이었다.

“역시 대감님은 통이 크십니다.”

능글맞은 얼굴로 사내가 엽전 꾸러미를 챙겨 넣자 김자점이 다짐을 하듯 이야기를 했다.

“일이 끝나면 당분간 지방으로 내려가 조용히 있어야 될 게야.”

“염려 마십시오. 포청 할아비가 와도 찾지 못하게 아주 바짝 엎드려 있겠습니다.”

“좋아. 급하니까 이틀 안에 끝내 주게.”

“예.”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사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사내의 정체는 한양 저잣거리에서 일명 작두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본명은 도철이고, 조선의 신분제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에 속하는 백정의 자식인데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왈패 무리끼리 시비가 붙어 패싸움을 하다가 사람을 찔러 죽여 포도청에 갇혀 있는 걸 김자점이 빼내 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졌는데, 그 이후로 지금처럼 은밀히 처리해야 될 더러운 일이 있으면 돈을 받고 도철이 해결해 줬다.

김자점을 만나고 나온 도철은 그날로 수하들을 풀어 이형익의 집과 주변을 조사했다.

이야기를 들은 대로 하인 몇 명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호위가 없자 도철은 바로 믿을 수 있는 수하 세 명을 데리고 다음 날 밤 담을 넘었다.

탁!

“저쪽이 안방이라고 했지?”

“예, 형님.”

족제비처럼 생긴 사내의 말에 주위를 살핀 도철은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빼 들고는 조심스럽게 안방을 행해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라오는 수하들도 하나같이 검을 들고 있었는데 전혀 긴장하지 않는 걸 보면 사람을 여러 번 죽여 본 자들이었다.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올린 번듯한 집이었지만 건물이라고는 달랑 세 개뿐인 아담한 구조였기에 안방을 찾는 건 아주 쉬웠다.

“여깁니다.”

“쉿!”

수하의 말에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갖다 댄 도철은 이내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이익.

사방이 고요한 밤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도철은, 목표인 이형익이 이부자리에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걸 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깨워.”

“네.”

도철의 지시에 족제비 사내는 검을 집어넣고는 발로 이형익을 툭툭 찼다.

“으음.”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할 뿐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족제비 사내는 자리끼(밤에 마시기 위해 잠자리 머리맡에 놔두는 물)로 놔둔 대접을 집어 들어 얼굴에다가 물을 확 뿌렸다.

촤악!

“어푸푸. 뭐, 뭐야?”

물을 뒤집어쓰고 짜증을 내며 상체를 일으킨 이형익은 그때서야 방 안에 수상한 이들이 들어와 있는 걸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웬 놈들이냐!”

하인들을 부를 요량으로 일부러 크게 고함을 지르자 도철은 들고 있던 검을 이형익의 목에 갖다 대며 짧게 혀를 찼다.

“쯧! 바로 뒈지고 싶은 모양이지.”

“헉.”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헛바람을 삼킨 이형익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도철을 보며 사정했다.

“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오.”

“듣자 하니 엽전을 제법 모았다고 하던데 우리랑 좀 나눠 써야겠어.”

“오해요. 한낱 의원 나부랭이가 무슨 돈이 있겠소이까.”

돈 욕심이 많은 이형익이 오리발을 내밀자 도철은 미간을 찡그리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이 살짝 살을 파고들며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자 기겁을 한 이형익은 양손을 비비며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기 병풍 뒤 궤짝 안에 돈이 들어 있습니다.”

도철이 눈짓을 하자 수하 두 명이 재빨리 병풍을 걷어 내고는 숨겨져 있던 궤짝을 가져왔다.

베개보다 조금 더 큰 궤짝은 뭐가 들어 있는지 건장한 장정이 들기에도 힘들 정도로 무게가 많이 나갔다.

궤짝에 달려 있는 자물쇠를 본 도철은 검날로 이형익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열쇠.”

그러자 이형익은 아까운 듯 약간 머뭇거리다가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꺼내 줬다.

철컥.

자물쇠가 풀리고 궤짝을 열자 엽전 꾸러미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목, 이거 제대로 한몫 잡았는데요.”

엽전 꾸러미를 하나 집어 들면서 족제비 사내가 희희낙락하며 말하자 도철도 입꼬리를 씨익 위로 말아 올렸다.

“챙겨.”

“예.”

수하들이 궤짝을 챙겨 드는 걸 보고 다시 고개를 바로 한 도철은 앞에 있는 이형익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돈은 잘 쓰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이형익은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사, 살려 주기로 했지 않소이까.”

“그러고 싶은데 윗전에서 네가 거치적거린다는군.”

“서, 설마…….”

그때서야 단순히 재물을 노리고 들어온 이들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이형익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나 나나 비슷한 처지라 동정이 가지만 어쩔 수 없어. 대신 고통 없이 죽여 주지.”

“안 돼!”

최후의 발악을 하듯 이형익이 소리를 쳤지만 도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방문이 부서지며 검은색 야행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뛰어 들어와 도철의 검을 막았다.

채챙!

“이것들은 뭐야!”

도철이 눈을 부라리며 외치자 새로 나타난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힐끗 너무 놀라 바지에 오줌을 지린 채 주저앉아 있는 이형익을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

“전부 제압해.”

“옛.”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흑의인들은 일제히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도철과 수하들도 들고 있던 무기를 휘두르며 맞상대를 했다.

“다 없애 버려!”

챙! 챙! 챙!

“으악!”

“큭.”

삽시간에 안방은 양쪽이 맞붙어 싸우는 싸움터로 변했는데, 무기를 막 휘둘러 대는 도철 패거리와 달리 흑의인들은 제대로 무예를 익힌 것처럼 동작이 아주 깔끔하게 날카로웠다. 숫자도 흑의인들이 다섯 명으로 두 사람이나 더 많았기에 금방 주도권을 잡고 도철 패거리를 몰아붙였다.

몇 번 검을 부딪치지도 않아 도철 패거리들은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는 무기를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끝까지 저항하던 도철도 흑의인이 내지른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고 무릎을 꿇었다.

“으으윽.”

신음을 흘리며 넘어져 있는 도철을 내려다보면서 검을 집어넣은 우두머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다급한 상황이라 뛰어들기는 했지만 이제 어쩌지요?”

“어쩔 수 없지. 안가로 다 데려간다.”

“이놈은 가슴을 다쳐서 살기 어렵겠는데요.”

고개를 돌리자 도철 패거리 중에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게 보였는데 내장이 다 보일 정도로 상처가 깊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빨리 보내 줘.”

“네.”

우두머리의 말에 부하는 검을 심장에 박아 넣어 고통을 없애 줬다.

“가자.”

흑의인들은 쓰러져 있는 도철 패거리와 이형익을 어깨에 들쳐 메고는 방을 나갔는데 바닥에 있던 돈 궤짝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마지막에 남은 우두머리는 이형익한테서 빼앗은 호패를 죽은 사내의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한쪽에 있는 기름등잔을 쓰러뜨려서 깨고는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불은 순식간에 이부자리로 옮겨붙으며 크게 번져 갔고 그걸 본 우두머리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과 함께 담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매캐한 연기와 타는 냄새에 잠에서 깨어난 이형익의 가족과 노비들은 안방에 난 불을 보고 화들짝 놀라 허둥거렸다.

“부, 불이야!”

“어서 물을 떠 와.”

급히 우물에서 물을 떠 와 뿌렸지만 불길이 잡히기는커녕 순식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키고 활활 타올랐다.

“주인어른은 어디 계신 거지?”

“안에서 못 빠져나오신 거 아냐?”

“아이고. 영감!”

뒤늦게 이형익이 보이지 않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불길에 휩싸인 본채를 쳐다봤다.

이웃 사람들까지 모두 몰려나와 진화에 나선 덕분에 불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지만 본채는 기둥만 몇 개 남고 시커멓게 타 버리고 말았다.

잔불을 끄며 이리저리 잔해를 뒤지던 노비들이 안방에서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하나 발견했다.

도철이 데리고 있던 왈패 중 하나였지만 얼굴과 몸이 심하게 훼손됐고 품에서 반쯤 탄 호패가 나오자 사람들은 그 시신의 주인을 이형익이라고 생각했다.

하얀 천을 덮어 씌워 놓은 시신을 붙잡고 이형익의 가족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주위에서 구경하던 이웃 사람들은 비명횡사한 소현세자가 찾아와 벌을 내린 거라며 수군거렸다.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 있던 김자점 집안의 하인은 슬금슬금 뒤로 빠져 얼른 이 소식을 알렸다.

“이형익이 죽었다고?”

김자점이 담뱃대를 입에 물고는 비스듬히 앉아서 묻자 아까 이형익의 집 앞에 있었던 하인이 몸을 엎드린 채 대답했다.

“예. 불에 탄 시신의 몸에서 호패가 나왔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 김자점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 봐.”

“네.”

하인이 밖으로 나가자 김자점은 손짓으로 한쪽에 시립해 있는 집사를 가까이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불을 내서 살인을 감추다니, 무식한 왈패인 줄 알았는데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군. 아주 깔끔하게 처리를 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지금 바로 포청에 사람을 보내서 죽은 자가 정말 이형익이 맞는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신중한 성격답게 하인한테 보고를 받았지만 김자점은 다시 한 번 포청을 통해 죽은 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가족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 상태인 데다 딱히 자세히 수사를 할 이유가 없었던 포도청에서는 품에서 나온 호패를 가지고 이형익이 죽었다는 확인을 해 줬다.

거기다가 도철이 보냈다는 사내 한 명이 잔금을 받으러 오기까지 했기에 김자점은 이형익이 살아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자들인가?”

봉황상단 한양 지부장인 서상수의 물음에 흑의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그냥 집만 감시하라고 했더니 엉뚱한 일을 벌였군.”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는 이형익과 도철 패거리를 본 서상수가 미간을 찌푸리자 흑의인이 변명하듯 이야기를 했다.

“저희도 처음에는 그냥 지켜만 보려고 했는데 저자들이 목표를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후우. 나도 알고 있네. 그냥 답답한 마음에 해 본 말이야. 그건 그렇고 조장은 어디 있는 건가?”

“아, 예. 그게…….”

시선을 받은 흑의인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서 지부장은 얼굴을 굳히며 재차 행방을 물었다.

“어서 말하게.”

“실은 김자점을 확실히 속여야 한다고…….”

“그래서?”

“저기 있는 왈패 대신 잔금을 받으러 갔습니다.”

“뭐야!”

서 지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 문이 열리며 산동성에서 도현이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흑치영이 들어왔다.

“어? 일찍 오셨네요.”

“자네 지금 어딜 다녀오는 건가!”

화가 난 듯 서 지부장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지만 흑치영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병조판서 집에 갔다 왔는데 이야기를 못 들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거길 왜 갔냐고!”

“일을 시켰는데 저 도철이라는 왈패가 돈을 받으러 안 오면 뭔가 잘못됐다고 의심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마무리까지 확실히 하고 온 거지요. 아마 김자점은 이형익이 살아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할 겁니다.”

틀린 행동은 아니었지만 너무 무모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아 서 지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김자점이 속아 넘어가든가?”

“처음에는 저놈이 직접 오지 않은 걸 의아해했지만, 발목을 다쳐서 거동이 불편하다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더군요.”

“꼼꼼한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의외군.”

“원래 그런 자들이 평범한 곳에서 허점을 보이는 법 아닙니까.”

“하여튼 다시는 그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도록 하게. 행여 김자점이 수상하게 여겨 자넬 붙잡았으면 어쩔 뻔했나.”

엄한 목소리로 서 지부장이 말하자 흑치영은 양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다 때려눕히고 도망치면 되지요. 제가 한 힘 하지 않습니까.”

“끄으응.”

살짝 얼굴을 구기며 앓는 소리를 낸 서 지부장은 더 이야기를 해 봤자 자기 속만 터질 것 같다는 생각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중에 김자점과 숙원 조씨를 공격할 때 유용한 패로 쓸 수 있으니까 일단 저들은 아무도 모르는 안가에 가둬 놓도록 하게.”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네.”

“그게 뭡니까?”

“조만간 도련님이 오신다고 하네.”

북경에 있는 도현이 귀국한다는 소식에 흑치영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정말입니까?”

“그래. 늦어도 설날 전에는 오실 거라고 하더군.”

“이런 기쁜 일이.”

“도련님이 오시면 앞으로 자네가 활약할 일이 많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이 좋을 거야.”

“하하하! 물론입니다.”

흑치영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한편 인조는 파발을 통해 도현이 청나라 황제에게 세자 책봉을 받았다는 걸 전해 듣고는 노발대발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병자호란 이후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하지만 감히 나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마음대로 세자를 정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얼굴을 벌겋게 상기시킨 채 인조가 호통을 치자 호출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측근들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건 날 업신여기는 처사가 아닌가!”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맞사옵니다.”

영의정인 김류를 포함한 측근들이 애써 진정을 시키려고 했지만 인조는 앞에 있는 서탁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당장 북경에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게!”

인조의 말에 측근들이 기겁을 했다.

“전하, 그건 너무 과한 처사이시옵니다.”

“황제가 직접 내리고 섭정인 예친왕의 인장까지 찍힌 칙명이온데 그걸 거부한다면 자칫 청나라와 큰 마찰이 생길 수도 있사옵니다.”

화가 나서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인조도 측근들의 이야기를 듣자 머뭇거려졌다.

하지만 국왕의 체면상 방금 한 말을 뒤집는 건 신하들에게 면이 안 서는 거였기에 바로 철회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럼 이대로 굴욕적인 지시를 받아들이자는 건가?”

인조가 약간 누그러진 모습을 보이자 측근들은 이때다 싶어 얼른 입을 열었다.

“나쁘게만 보시지 마시고 순서가 조금 잘못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순서상 봉림대군께서 돌아가신 소현세자의 뒤를 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청국에 책봉 허가를 받아야 되는 걸 빨리 처리했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측근들의 이야기대로 서열상 도현이 가장 세자 자리에 근접한 데다 소현과 달리 그동안 눈 밖에 나는 일을 한 적이 없어 인조도 내심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는데, 바로 새로운 강대국인 청나라가 자신을 조선의 왕으로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친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를 그렇게 냉대하고 숙원 조씨의 암수를 은근슬쩍 모른 척하며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왕좌를 지키기 위한 거였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또 청나라가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세자를 책봉해 도현을 귀국시킨다니 불안하고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나라가 왕위 계승에 관여한 사실보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노심초사하는 거였다.

“으음.”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고심을 한 인조는 칙명까지 왔는데 여기서 반발을 해 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판단에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들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오.”

“물론이옵니다, 전하.”

인조가 계속 고집을 피웠다면 자칫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큰 외교적 마찰로 번질 수도 있었던 일이 잘 마무리가 되자 측근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인조의 재가를 받으면서 이제 도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세자가 됐다.

더 늦으면 겨울이 되어 여행길이 험난해지는 걸 고려한 도현은 조문 사절단이 떠나고 정확히 보름 뒤에 관저 식솔들을 이끌고 북경을 출발했다.

관저 전체가 이동하는 것이다 보니까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오십 개가 넘고 수행원만 사백 명에 육박하는 아주 큰 행렬이 만들어졌다.

조선으로 가기 전에 비밀 거점으로 만들어 둔 웅도에 들르려고 마음먹은 도현은, 북경 성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육로를 따라 이동하는 행렬에서 떨어져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항구인 천진에 가서 장 총관이 준비해 놓은 배를 탔다.

“이제 웅도가 보일 겁니다.”

선장의 말에 따라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니 이른 아침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웅도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 오는 것도 꽤 오랜만이군.”

시간이 이리 흘렀나, 하며 도현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배와 섬과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자 이젠 눈으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착장에 가까이 다가갔는데, 주위 시설이 몰라보게 발전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인원이 나와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웅성거리는 모양새에 도현이 말했다.

“다들 저기서 뭘 하는 거지?”

“아마 저하를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요.”

당연하다는 선장의 말투에 도현은 깜짝 놀라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고작 나 하나 때문에?”

“고작이라니요. 저하께서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덕분에 섬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 사람들이 주민의 태반인데요. 당연히 다들 저하께 이렇게나마 은혜를 갚고 싶을 겁니다.”

“허, 그것참.”

도현은 기쁘고도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배가 선착장에 정박하고, 길쭉한 나무판자가 내려졌다.

선장의 재촉을 받아 도현이 일행의 선두를 맡았는데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군마마시다!”

“어서 오십시오, 마마!”

간혹 가다 누가 옆자리를 찌르며 이젠 마마가 아니라 세자 전하라고 불러야 한다고 정정하는 말소리까지 들려 도현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주민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데, 그동안 웅도에 머무르면서 섬 관리를 총괄하고 있던 임봉기 행수가 앞에 나와 그를 맞이했다.

“웅도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 저하.”

“임봉기 행수.”

아는 얼굴이 나타나자 반색을 지은 도현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네도 오랜만이로군. 반갑네.”

“저야말로 저하를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임봉기는 먼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가 안내하겠다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자연스럽게 인파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작은 길 같은 게 만들어졌다.

산에서 야생화 같은 걸 따 오기라도 했는지 도현 일행의 머리 위로 꽃잎까지 뿌리면서 환영하는 주민들에게 웃음으로 인사하면서 도현은 그의 뒤를 따라 웅도에 오면 항상 묵게 되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 행수가 항해에 피곤할 테니 준비해 둔 거처에서 쉴 것을 권했지만 괜찮다고 한 도현은 바로 본부 건물에 있는 회의실에서 각 부서장들에게 현황 보고를 받았다.

“제가 먼저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해상 교역을 담당한 유돌석 행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가운데 앉아 있는 도현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임경업 장군께서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철수하면서 잠시 중단됐던 해상무역은 새로 호위 함대가 구성된 작년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보유한 선박은 판옥선 여섯 척과 교역선 서른 척으로 올해만 총 칠십만 냥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막연히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고 짐작만 하고 있었지 구체적인 액수를 몰랐던 다른 간부들은 엄청난 액수에 놀란 얼굴로 술렁거렸다.

“대단하군.”

“칠십만 냥이라니…….”

당시 조선의 일 년 조세수입이 상평전으로 오륙백만 냥 전후인 걸 고려하면 일개 상단이 칠십만 냥이나 되는 수익을 올렸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장 총관을 통해 이미 보고 받았던 내용이었지만 도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유돌석 행수의 노고를 치하했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이익을 올리기 힘들었을 텐데 고생이 많았네.”

“저하께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일이 있다고. 그건 그렇고 주로 곡물 거래를 통해 이익을 올렸다고 들었는데, 맞나?”

유 행수는 자랑하듯 설명했다.

“예. 거듭된 전쟁과 흉년에 청국 내 곡물 가격이 폭등한 데 반해 강남 지역은 풍년이 들어 거의 폭락 수준으로 값이 떨어져 중간 차익을 많이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

“그리고 저하께서 지시하신 일도 성과가 있었습니다.”

“아오먼(마카오)에 가 보라고 한 것 말인가?”

“네.”

도현은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큰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됐나?”

“말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유 행수가 손짓을 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단 점원들이 여러 물건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제일 먼저 꺼내 든 건 조총鳥銃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맞춰서 떨어뜨릴 수 있다고 이름이 붙여진 조총은 일 미터 정도의 길이에 유효사거리가 백오십 미터 정도 됐는데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순식간에 도성까지 빼앗기도록 만든 원흉이었다.

당시에는 큰 충격을 안겨 준 무기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도 조총을 자체 생산하게 되면서 지금은 무과 과목 중 하나로 시험을 볼 만큼 많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총을 본 사람들은 약간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거 조총 아니오?”

“이곳 병기창에서도 소량이지만 생산되고 있는 걸 굳이 먼 아오먼까지 가서 가져올 필요가 있소?”

그러자 유 행수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조총을 긴 회의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야기를 했다.

“겉보기에는 기존 무기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건 유효사거리가 백칠십 보로 늘어났고 무게 또한 일곱 근에서 다섯 근으로 줄어든 개량형입니다.”

모여 있는 간부들 대부분 군사적인 지식보다는 상업에 더 밝은 사람들이라 설명을 듣고도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직접 조총을 구해 오라고 지시를 내렸던 도현과 무관 출신으로 북경 지부장에서 새롭게 호위 함대 지휘관으로 옮긴 김하방은 눈을 반짝이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게 정말이오?”

“확인해 보십시오.”

유 행수가 자신 있게 말하자 도현의 허락을 받은 김하방은 조총을 집어 들어 꼼꼼히 살펴봤다.

“으음. 사정거리는 쏴 봐야 알겠지만 무게는 확실히 기존 것보다 가볍고 방아쇠도 훨씬 부드럽군요.”

“자네가 보기에 쓸 만한 것 같나?”

도현이 진지한 얼굴로 묻자 김하방은 조총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볍고 사정거리가 길다면 야전에서 유리하기는 하지요. 이건 한 정에 가격이 얼마나 됩니까?”

“양이들한테 구입한다면 상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대략 청은 서른 냥은 할 겁니다. 물론 자체 생산을 한다면 이것보다 비용이 낮아지겠지요.”

유 행수의 말에 김하방은 머리를 살짝 내저었다.

“성능이 우수한 건 맞지만 현재 만들어지는 조총과 가격 차이가 두 배나 난다면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 같은 경우에는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조총을 쓰는데 이때에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배에 타고 싸우는 거라 무게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거리도 이십 보 정도는 승패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겁니다.”

“하긴 개량형을 비싸게 주고 열 정 사는 것보다 기존 조총을 스무 정 배치해서 화력을 강화하는 게 더 효과적이겠습니다.”

“그렇지만 자체 생산을 한다면 가격이 떨어져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 행수가 반발하듯 말하자 도현은 병기창 책임자인 박호에게 시선을 줬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겠나?”

“자세히 살펴봐야 확실한 걸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양이들이 쓰는 조총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있으니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생산 가격은 크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군요.”

박호가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도현이 찾아내 포섭한 로사리오였는데 현재 웅도 병기창에서 장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왜 그렇지?”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다고 해도 대량생산 체제가 갖춰지지 않으면 단가를 줄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바로 결정을 내렸다.

“성능은 좋지만 분명 문제점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일단 배치하는 건 보류하기로 하지. 대신 병기창에서는 개량 조총을 연구해서 기존 무기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해.”

“예.”

기대했던 것보다 개량 조총에 대한 호응이 적어 아쉬웠지만 전혀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유 행수는 다음 물건을 보여 줬다.

“다음은 양이들이 쓴 서적들입니다. 지시하신 대로 기술과 항해에 관계된 걸 중심으로 구해 왔습니다.”

어린아이가 한 명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큰 궤짝에는 두꺼운 책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는데 저걸 어디다 쓰냐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간부들과 달리 도현은 마치 금은보화를 가져온 것처럼 크게 기뻐했다.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정말 고생했어.”

“아닙니다.”

개량 조총에서 약간 의기소침해졌던 유 행수는 도현의 칭찬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깨를 활짝 폈다.

그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병기창은 잘 돌아가고 있나?”

“지난달에 두 번째 용광로를 완성했고 일꾼도 마흔 명으로 늘어나 이제 매달 각종 구경의 화포 스무 문과 조총 쉰 정을 생산해 낼 수 있게 됐습니다.”

“기대한 것보다 적군.”

“죄송합니다.”

“생산량을 더 늘릴 수는 없을까?”

“일꾼들의 숙련도가 올라가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만 그래도 현재 보유한 설비와 인원으로는 표시가 확 날 정도로 늘리는 건 어려울 겁니다.”

지금 병기창에서 만들어 내고 있는 수량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계획보다 일찍, 그것도 세자가 되어 조선에 돌아가는 데다 상대인 숙원 조씨와 김자점 일파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기에, 도현은 최악의 경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병의 무장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이제 제법 길게 자란 수염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고심을 한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매달 화포 서른 문과 조총 백 정을 만들려면 지원을 얼마나 더 해 줘야 되지?”

“그러려면 용광로를 하나 더 만들어야 되고 숙련된 일꾼도 보충되어야 합니다. 또 가장 중요한 철괴와 석탄도 지금보다 많이 필요하겠지요.”

한마디로 돈이 엄청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임 행수.”

“말씀하십시오.”

옆에 있던 임봉기가 고개를 돌리는 걸 보며 도현이 지시를 내렸다.

“비상금으로 보관하고 있는 거 있지?”

“예.”

“그걸로 병기창에서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줘. 숙련된 일꾼은 여기서 구하기 어려우니까 내가 한양에 가면 임경업 장군을 통해 관아에 속한 장인들을 몰래 보내 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들어줄 테니 내년 설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도록 하고 신형 조총 연구도 계속해 주기 바라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각 부서의 보고가 이어졌고 도현은 격려와 함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거나 새로운 목표를 할당해 줬다.

보고가 모두 끝나자 도현은 모여 있는 간부들을 천천히 쓸어 보며 힘이 가득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지만 자네들이 흘리는 땀 한 방울이 조선을 살찌우고 번영으로 이끄는 밑바탕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금 더 힘을 내 노력해 주게.”

그러자 간부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저하.”

가운데 앉은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든든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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