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사리오 (23/104)

로사리오

거처를 옮긴 지 이틀쯤 지났을 때 봉황상단 북경 지부장인 김하방이 일꾼으로 위장해 은밀히 도현을 찾아왔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대군마마?”

칠현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김하방의 인사에 도현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자네가 신경을 써 준 덕분에 잘 있었네.”

“보내 드린 일꾼들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다들 성실하고 일을 잘하더군.”

“다행입니다.”

한쪽 팔을 들어 자리를 권한 도현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

온돌이 아닌 중국식 방이라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은 김 지부장은 품속에서 여러 번 접혀진 종이를 하나 꺼내 도현 앞에 내려놨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일을 다 끝냈습니다.”

“벌써 말인가?”

“숫자가 적어서 빨리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접혀진 종이를 펼치자 북경과 텐진에 거주하는 선교사들의 이름과 신상 내력이 자세히 적혀 있었는데 김 지부장의 말처럼 모두 열두 명밖에 안 됐다.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도현은 로사리오라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로마 교황의 지시를 받고 파견된 가톨릭 선교사인 데 비해 로사리오라는 사람은 특이하게도 원양무역선 선원이자 뛰어난 화포 기술자였다.

칠현이 가져다 놓은 차를 마시며 조용히 기다리던 김 지부장은 도현이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자 덧붙이듯 말했다.

“서양인들을 찾으신다면 멀리 강남에 아오먼(마카오)이라는 곳에 가면 수백 명이 모여 산다고 합니다.”

김 지부장이 말하는 곳은 바로 마카오澳門였는데 이미 백 년 전인 명나라 가정제 때 포르투갈이 땅을 빌려 자리를 잡고 비단과 도자기, 금, 은의 중계무역을 하며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었다.

“언젠가는 한번 가 봐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렵고. 그것보다 로사리오라는 자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 봐.”

잠시 기억을 더듬은 김 지부장은 알고 있는 걸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하고 달리 이력이 특이해서 저도 흥미롭게 생각한 인물입니다. 무역선 선원 출신이자 화포 기술자로 천진에 주둔하던 명나라 수군 병기창에서 최근까지 일하다가 황제가 강남으로 달아나면서 버려졌습니다.”

화포 기술자라는 말에 도현은 눈을 반짝였다.

“지금은 뭘 하고 지내지?”

“처자식과 함께 포구 근처에 있는 집에서 머물며 아오먼으로 가는 배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했어?”

“예. 한족 출신 여자와 혼례를 치르고 세 살 먹은 딸과 그 위에 아들도 하나 있더군요.”

“그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김 지부장.”

“예.”

“가서 로사리오를 데려와.”

처음에는 왜 낮도깨비처럼 생긴 것들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조사를 하면서 조금씩 그들이 가진 지식이 얼마나 유용한 건지 깨달은 김 지부장은 도현의 지시에 바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싫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끌고 오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도움을 받아야 되는데 처음부터 껄끄럽게 관계가 만들어지면 안 되지. 가급적이면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머리를 굴려 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그냥 놔둬. 대신 그들이 가진 기술 서적이 있으면 최대한 구해서 가져오도록 해.”

“네.”

종교에 대한 편견은 없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오면 자칫 전통적인 유교나 불교와 충돌하며 내부적으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도현은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물론 로사리오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는데, 아니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선교사와 접촉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김 지부장에게 회유 작업을 맡겼던 도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바꿔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게 김 지부장을 중간에 끼는 것보다 이쪽의 진실성을 보여 줄 수 있고 상대가 필요한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파악할 수도 있었다.

예친왕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심한 감기가 걸려 집 안에서 쉰다고 거짓말을 했다.

계속 자금성 안에 있었다면 속이기 어려웠겠지만 따로 떨어져 나와 있고 일꾼들이 모두 한편이었기에 꾀병을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텐진으로 가지 않고 일부러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아픈 척 연기를 했다.

“어쩌다가 한여름에 고뿔이 걸리셨소이까?”

병문안 겸 진짜인지 살피러 온 만월개의 말에 상체를 일으켜서 침대에 앉은 도현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무예를 수련하고 흘린 땀을 식히려고 밤에 목욕을 했더니 다음 날부터 으슬으슬 몸이 떨리고 춥더군요.”

“저런, 그래서 여름이라도 몸을 너무 차게 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소.”

걱정해 주는 척하지만 진심이 전혀 담기지 않은 표정에 도현은 일부러 만월개를 향해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침이 얼굴에 튄 만월개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거, 마안하오이다.”

“흠흠.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도현이 얼른 사과를 하자 얼굴이 벌게진 만월개는 화가 났지만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옆에 있던 칠현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침을 닦아 냈다.

그 모습에 도현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면서도 계속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으니 난 이만 가 보겠소이다.”

“그러시겠소? 아 참, 예친왕 전하께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주시오. 콜록!”

“알겠소. 그럼 몸조리 잘하시오.”

말을 하며 도현이 한 번 더 기침을 하자 또 침이 튈까 봐 화들짝 놀라 뒤로 피한 만월개는 인사도 대충 하고는 급히 방을 나갔다.

“큭큭큭. 청국 관리라고 만날 목에 힘을 팍 주고 다니더니 꼴좋다.”

만월개를 배웅하고 돌아온 칠현은 혼자 침대 위에 누워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도현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당연하지 저놈 잘난 척하는 게 얼마나 눈꼴 시렸는데.”

“하긴 저도 그랬어요.”

“만월개까지 다녀갔으니까 이제 더 이상 찾아올 사람이 없겠지?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도현은 고급스러운 비단 옷을 벗고 미리 준비해 놓은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없는 동안 들키지 않게 연기 잘하고 있어.”

대역을 맡아 관저에 남게 된 칠현은 아쉬운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네. 네.”

“그러면 집 잘 보고 있어.”

“제가 무슨 집 지키는 똥개예요!”

“갔다 올게.”

“저 없다고 괜히 엉뚱한 사고나 치지 마세요.”

“내가 애냐?”

툴툴거리는 칠현을 남겨 두고 약 올리듯 한쪽 손을 들어 흔들어 준 도현은 뒷문을 이용해 은밀히 관저를 빠져나갔다.

자신의 부재를 감춰야 했기에 일부러 위사들을 그대로 관저에 놔둔 도현은, 얼마 전에 와서 합류한 박영식 대장과 호위대 대원 열 명만을 데리고 곧장 천진으로 향했다.

꼬박 반나절 동안 말을 달려 도착한 천진은 도시 규모에 비해 상당히 조용하고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숭정제를 따라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수군함대와 돈 많은 상인들이 모두 강남으로 피난을 떠나 버려 빈껍데기만 남았다.

도시에는 돈은 물론이고 어디 갈 곳도 없는 빈민들만 잔뜩 남아 하루하루 힘들게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천인대 하나가 와서 점령만 하고 가 버렸지 아직 청국 조정에서 관리가 한 명도 파견되지 않아 치안마저 어지러운 상태였다.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객잔에서 쉬시고 내일 찾아가시지요.”

말을 타고 달려오느라 뿌연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도현은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기에 안내역으로 김 지부장이 붙여 준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저쪽으로 가시면 깨끗하고 음식 맛도 좋은 곳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로 가세.”

“예.”

사내를 따라 말을 몰아가자 객잔이 하나 나왔는데 제법 규모가 크고 깨끗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에 서 있던 점소이 하나가 도현 일행을 보고는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말고삐를 잡았다.

“며칠 쉬어 가야 되는데, 방이 있느냐?”

도현의 말에 도현 일행을 재빨리 훑어본 점소이는 싹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개나 준비해 드릴까요?”

“붙어 있는 걸로 세 개를 다오.”

“다 들어가시려면 큰 방으로 해야 되겠죠?”

“그래.”

“일 층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걸로 머무는 동안 말 먹이를 든든하게 챙겨 줘.”

도현이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은자를 하나 던져 주자 점소이는 입이 귀에 걸려서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제일 좋은 걸로 먹여서 살을 토실토실 찌워 놓겠습니다.”

“녀석.”

넉살 좋은 점소이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일행과 함께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실내에는 절반 정도 자리가 채워져 있었는데 도시 분위기 때문인지 다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을 둘러본 박영식은 만약의 경우 재빨리 밖으로 피할 수 있게 입구 바로 옆자리로 도현을 이끌었다.

인원이 많았기에 탁자 세 개를 차지하고 앉자 아까 입구에서 봤던 점소이가 찻주전자를 들고 왔다.

“식사도 하시겠어요?”

앞에 있던 박영식이 쳐다보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방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것도 귀찮으니까 지금 먹도록 하지.”

“예.”

“여기서 제일 잘하는 음식이 뭐야?”

본능적으로 도현이 결정권자라는 걸 알아차린 점소이는 양손을 비비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숙수님은 북경 제일루에서 일하셨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 음식이 전부 맛있지만 그중에서도 잉어찜이 제일입니다.”

“그럼 그걸로 줘.”

“술도 가져다 드릴까요?”

“간단히 한 잔씩들 해.”

그러자 박영식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탁자마다 한 병씩 죽엽청으로 갖다 줘.”

“네. 죄송하지만 선금입니다.”

박영식이 돈을 건네주자 점소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주방으로 뛰어갔다.

곧이어 탁자 위로 음식이 날라져 왔는데, 간장에 졸인 마늘과 종이처럼 얇게 썰어 새큼한 맛이 나는 무, 신선한 나물 등의 작은 반찬들이 먼저 깔리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잉어찜이 올라오자 뜨끈하게 올라오는 김과 함께 확 퍼지는 맛있는 향기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모처럼 건배나 한번 하지.”

도현이 먼저 잔을 들어 올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흥겨운 표정으로 손을 한데 모아 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을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한 남자가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상당히 큰 키에 하얀 얼굴 그리고 금색 곱슬머리는 중국 전통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상당히 이국적이었는데, 서양인이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기에 도현은 단번에 그가 자신이 찾아온 로사리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곧장 계산대에 앉아 있는 주인한테로 간 로사리오는 한참을 뭔가 하소연하듯 대화를 나누었다.

박영식도 로사리오를 발견했는지 약간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 저자는…….”

“맞아. 이거 뜻밖이군.”

“가서 데려올까요?”

잠시 고심을 한 도현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아니, 일단 내버려 둬.”

“예.”

그사이 이야기가 다 끝났는지 로사리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침울한 얼굴로 돌아서 객잔 한쪽 구석에 앉았다.

그러고는 안주도 없이 독한 죽엽청을 연신 들이켰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현은 다른 손님한테 음식을 가져다주고 지나가던 점소이를 조용히 불렀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그건 아니고 물어볼 게 있는데…….”

귀찮을 만도 했지만 말먹이 값을 두둑이 받아서 그런지 점소이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저쪽에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 보이지.”

시선을 옆으로 돌린 점소이는 로사리오를 보고는 알은척을 했다.

“아! 노虜씨 아저씨요.”

“저 사람 성이 노야?”

“그건 아니고 따로 이름이 있는데 말하기가 어려워서 다들 그냥 노씨라고 불러요.”

“그렇구나.”

아무래도 노虜 자가 포로, 화외化外 사람,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고 로사리오의 이름 첫 글자와 비슷하기에 그냥 노씨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근데 노씨 아저씨는 왜요?”

약간 경계하는 듯한 얼굴로 점소이가 묻자 도현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야기를 했다.

“아까 보니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해서 그래.”

그러면서 은자 한 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잠시 망설이던 점소이는 냉큼 은자를 챙겨 소매 주머니에 넣고는 불쌍하다는 듯 로사리오를 힐끔 쳐다보며 사정을 이야기해 줬다.

“보시다시피 한족이 아니라 양이洋夷잖아요. 듣기로 원래 바다를 오가는 큰 무역선 선원이었다고 해요. 어쩌다가 여기에 정착을 하게 돼서 얼마 전까지 수군 병기창에서 일을 했는데, 난리가 나고 북경이 반란군에게 함락되면서 그만 일자리를 잃고 말았어요.”

“저런.”

여기까지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도현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맞장구를 쳐 줬다.

“그래서 가족을 데리고 양이들이 모여 산다는 아오먼(마카오)이라는 곳에 가려고 배편을 구하려다가 그만 못된 놈들한테 사기를 당해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다 빼앗기고 그때부터 사기꾼을 찾으러 다니는데, 벌써 도망쳤지 아직 여기 있겠어요.”

“그렇구나.”

도현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주방 쪽에서 점소이를 부르는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이! 뭐 하고 있어? 손님들 기다리신다.”

“이크.”

잠깐 얘기한 사이에 어느새 내갈 음식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점소이는 어깨를 움츠리며 답했다.

“지금 가요! 죄송해요, 그럼 전 이만…….”

“아, 그래. 수고해.”

점소이가 꾸벅하고 허둥지둥 반대쪽으로 사라지자 도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여전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로사리오에게 시선을 준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십니까?”

“내일 찾아갈 필요 없이 지금 만나 보려고.”

그러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마, 마마.”

놀란 박영식은 따라 움직이려는 대원들에게 손짓을 해서 그냥 있게 하고는 황급히 도현을 뒤쫓아 갔다.

로사리오에게 간 도현은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에 묻지도 않고 털썩 앉았다.

“당신 뭐야?”

약간 붉어진 얼굴로 상대가 쳐다보자 도현은 로사리오의 잔을 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나도 한 잔 주시오.”

“놀아 줄 기분이 아니니까 저리 꺼져.”

조금 어눌했지만 분명한 어조의 명나라 말로 로사리오가 눈을 부라렸지만 도현은 태연하게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따랐다.

“까칠하기는…….”

쪼르르르.

“크으. 쓰다.”

무례한 도현의 행동에 로사리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게!”

“그렇게 앞뒤 못 가리고 덤벼드니까 멍청하게 사기나 당하지.”

“……!”

순간 멈칫한 로사리오는 도현을 노려보며 경계하듯 말했다.

“너 누구야!”

의자 등받이에 삐딱한 자세로 몸을 기댄 도현은 잔에 술을 새로 따라 로사리오 앞에 놔두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괜찮은 일자리가 하나 있는데 해 볼 생각이 있나?”

이리저리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내자 막 화를 내려던 로사리오는 물론이고 옆에서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던 박영식까지 깜짝 놀랐다.

“무슨 수작이야?”

“속고만 살았나? 하긴 뭐, 얼마 전에 사기를 당했다니 의심할 만도 하지.”

“방금 처음 봤는데 당신이 날 어떻게 알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너무나도 당당한 도현의 태도에 약간 기세가 꺾였지만 그래도 날 선 시선으로 째려보며 로사리오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로사리오 밸른, 에스파니아 발렌시아 시 출신이고 원양 무역선 선원이자 제법 실력 있는 화포 기술자로 얼마 전까지 천진에 주둔하는 명나라 수군 병기창에서 홍이포 제작 일을 맡아 했고, 한족 아내와 자식 둘이 있으며 최근 사기를 당해서 주머니 사정이 아주 안 좋음. 이 정도면 당신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에 대해서 샅샅이 알고 있는 듯한 도현의 말에 로사리오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원하는 게 뭐야?”

“아까 말했잖아, 널 고용하고 싶다고. 병기창에서 일할 때보다 더 많은 봉급과 가족이 안전하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주지. 어때?”

최근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많이 궁핍했던 로사리오는 도현의 제안에 솔깃했지만 얼마 전 사기를 당한 것도 있어서 경계를 쉽게 풀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보다 말투가 확연히 달라졌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소?”

상대가 끌려 한다는 걸 눈치챈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제법 묵직해 보이는 비단 주머니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계약금이야. 이 정도면 내 진심을 확실히 보여 준 거라 생각해. 당분간 여기서 머물고 있을 테니까 제안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으면 찾아와.”

거기까지 말한 도현은 멍하니 돈주머니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로사리오를 놔두고 의자에서 일어나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마마, 그러다가 저자가 돈만 챙겨서 달아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맞은편에 앉은 박영식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도현은 태연하게 잉어찜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인물이었으니 그냥 액땜했다고 생각하면 돼.”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박영식은 정색을 했다.

“설마 시험을 하시는 겁니까?”

“뭐, 겸사겸사.”

즉흥적인 행동이었지만 상대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된 도현은 이런저런 수를 쓰지 않고 바로 직접적으로 영입을 제안하는 동시에 로사리오의 인성을 시험해 보는 거였다.

만약 여기서 박 대장이 걱정하는 것처럼 주머니에 든 돈을 욕심낸다면 나중에 영입을 했다가 조직에 더 큰 피해를 입히기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두세 수 앞을 내다보고 행동했다는 걸 깨달은 박영식은 앞에 있는 도현이 새삼스럽게 더 대단해 보였다.

한편 난데없이 돈주머니를 앞에 두게 된 로사리오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끈을 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헉!”

진짜 안에 돈이 들어 있을지도 의심스러웠지만 그래 봤자 몇 푼 안 되는 철전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번쩍거리는 은전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 왔다.

“노 아저씨, 왜 그러세요?”

안절부절못하는 태도가 눈에 띄었는지 지나가던 점소이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자 로사리오는 황급히 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품에 집어넣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

점소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거라면 바로 요 근처에 의원이 있으니 불러 드릴까요?”

“괜찮다니까!”

“그래도…….”

“이봐, 여기 주문 안 받나?”

“아, 예! 지금 갑니다.”

마침 다른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점소이가 물러가자 로사리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혹시 주머니 안에 은전이 가득 들어 있는 걸 점소이가 봤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지나친 걱정이었는지 별다르게 그를 눈여겨보는 기색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는 곳에서 이런 큰돈을 놔두고 사라지다니.

로사리오는 도현 일행을 찾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그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곳에 묵고 있다고 했으니 아마 이 층에 올라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따라가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일어서는데, 품속에서 묵직한 돈주머니의 무게가 느껴지자 로사리오는 우뚝 발을 멈춰 세웠다.

이만 한 돈이 있으면 지금보다 좀 더 큰 집을 살 수도 있고, 아이들이 원하는 장난감도 마음껏 사 줄 수 있다.

아니, 그것보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마카오로 가는 배표를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도 저도 다 안 되면 고국, 에스파냐로 돌아가는 수도 있으니 선택의 길은 언제든지 열려 있었다.

“이 돈만 있으면…….”

로사리오는 돈주머니를 숨겨 놓은 왼쪽 가슴 아래에 손을 가져가 꾹 누르면서 이 층 복도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그는 발길을 돌려 객잔을 나섰다.

지금 바로 돈주머니를 돌려주는 것은 굴러든 호박을 걷어차는 것만 같아서 쉬이 마음이 안 내켰던 탓이다.

하지만 뚜렷한 이유도 없이 큰돈을 가지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져 절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져 집집마다 밥을 짓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오는 가운데, 허름한 주택가 한편에 로사리오의 집이 있었다.

원래는 이것보다 더 번듯한 집에 살았지만 명나라가 흔들리고 북경을 빼앗겨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가 되자 관청에서 일하고 있던 로사리오 역시 실직 상태가 되었다.

외국인이지만 한족 여인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룬 로사리오는 어떻게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남들과는 다른 외모 탓에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고,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급기야 원래 살던 집을 팔게 되었다.

“…….”

로사리오는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남자가 되어서 가족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집 앞에 서서도 차마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여보?”

그때 문이 활짝 열리면서 머리 수건을 둘러쓴 아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왔으면 들어오시지, 뭐 하고 계세요?”

“아니, 그냥.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배고프죠? 얼른 씻고 자리에 앉으세요.”

아내는 로사리오의 손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겉으로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집이었지만 일단 한 발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빛을 발하는 등불과 온기가 로사리오의 온몸을 감쌌다.

값이 싼 대신 거의 폐가 직전의 수준이었던 집이 그래도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나아진 것은 전부 다 아내가 열심히 쓸고 닦고 한 덕분이다.

안으면 한 팔에 쏙 들어올 만큼 체구가 작고 여린 아내지만 다람쥐처럼 열심히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로사리오가 대충 얼굴과 팔다리를 씻고 오자 아내는 벌써 하얀 쌀밥을 담은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반찬을 나르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최근엔 계속 보리나 조를 섞은 밥만 먹었지 하얀 쌀밥은 오랜만이었기에 로사리오가 묻자 아내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봤어요. 마침 시장에 싱싱한 생선이 싸게 나와서 그것도 하나 사고, 당신 좋아하는 고기도 구웠으니 맛 좀 봐 봐요.”

그러면서 아내는 소금을 뿌려 간을 한 생선 구이와 조림 그리고 두툼하게 썬 소고기를 로사리오 쪽으로 내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은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힘을 쓴다잖아요.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아, 목말라요? 물을 아직 안 내놨네.”

로사리오는 평소답지 않게 말이 많아진 아내의 모습을 보고 어딘지 이상하다고 느꼈다.

“잠깐만, 여기 앉아 봐.”

억지로 손을 잡고 옆에 앉히자 아내는 까만 눈동자로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요?”

“날 생각해서 이렇게 차려 준 건 고마워. 근데…… 돈이 필요했을 텐데, 어디서 난 거야?”

“아, 그거 말예요.”

아내는 별걸 다 물어본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답했다.

“옆집 아줌마한테서 돈을 좀 빌렸어요. 남편이 도박을 했는지 뭘 했는지 몰라도 목돈이 생겼다기에 부탁했더니, 선뜻 빌려 주더라고요.”

그 말에 로사리오는 굵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동네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들 주머니 사정이 고만고만한 편이었다.

아무리 눈먼 돈이 생겼다 해도 일단 자기 입에 풀칠하는 게 더 급하지, 남한테 빌려 줄 여우가 있으면 여기 살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됐죠? 이 손 좀 놔요.”

아내는 생글 웃으면서 부드럽게 로사리오의 손을 떨쳐 낸 뒤 부엌으로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로사리오는 아내가 왜 자기한테 거짓말을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그럴듯한 이유 하나 떠올리지 못하고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무래도 직접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속이 개운하지 못할 것 같아 부엌 쪽으로 향하는데,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여보?”

“아!”

아내는 로사리오를 보고 황급히 돌아섰지만 그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리게 하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뭐야? 왜 혼자 울고 있었어?”

“야, 양파 껍질을 까다가 눈이 매워서 눈물을 흘린 것뿐이에요.”

하지만 도마 위에는 양파는 고사하고 아무것도 올라와 있지 않다.

왜 자꾸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어 로사리오가 아내의 얼굴을 살펴보는데 순간 살짝 흘러내린 수건 사이로 비치는 짧은 머리카락을 보고 그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잠깐, 이거 뭐야? 머리카락이 왜 이래?”

로사리오가 수건을 옆으로 홱 벗기자 탐스럽게 출렁거려야 할 긴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사내아이처럼 빡빡 깍은 동그란 머리통만이 드러났다.

“보, 보지 말아요.”

아내는 부끄러워하면서 로사리오의 손에서 머리 수건을 빼앗아 얼른 뒤집어썼다.

그러곤 한참을 주저하다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시장에 가면 여자 머리카락을 사고파는 상인이 있어요. 길고 결이 좋은 머리카락일수록 값을 더 쳐준다고 해서…….”

“그래서 머리카락을 잘라 돈을 받은 거야?”

“네.”

아내는 로사리오의 눈치를 보다가 머뭇머뭇 그를 껴안았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어차피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니까…… 그보단 당신이 잘 먹고 힘을 내 주는 게 더 좋아요.”

“바보같이. 나 때문에…….”

로사리오는 까끌까끌한 아내의 머리를 만지면서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걸 억지로 참았다.

“기껏 차려 놓은 밥이 식겠어요. 얼른 가서 먹어요, 네?”

아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안쪽 방에서 아이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아~, 어디 있어? 나 배고파.”

“조금만 참아. 자, 여기 앉고.”

아내는 아이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준 후 로사리오를 바라보았다.

“여보…….”

“응, 알았어.”

비록 밥이 제대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앞에선 무슨 말도 할 수 없었기에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배를 채웠다.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저녁을 먹은 뒤, 아내가 안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있는 동안 대문 밖으로 나온 로사리오는 하늘에 휘영청 밝게 뜬 달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품속에서 느껴지던 돈주머니의 무게가 지금은 너무나 무거워서 마치 돌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사리오는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서 은전 하나를 꺼내 든 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게 달하고 똑같군.”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로사리오는 결국 돈주머니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가족을 위해서 못할 게 뭐 있겠어. 삶을 살면서 인생을 바꿀 기회가 딱 세 번 온다는데, 이번이 그중 하나일 수도 있잖아?’

설령 그게 정체도 모르는 사람의 수상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로사리오는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제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로사리오는 아침때가 지나자마자 도현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찾아갔다.

빗자루로 객잔 앞을 쓸고 있던 점소이는 로사리오를 보고 알은척을 했다.

“어? 노씨 아저씨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어제 나랑 이야기를 나눴던 공자님은 일어나셨냐?”

“공자님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점소이는 이내 누굴 말하는 건지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그 인심 좋은 분 말씀이세요.”

“그래.”

“그분들이라면 벌써 일어나셨죠.”

“지금 어디 계시지?”

“아마 방에 있을걸요.”

“방이 어디야?”

“이 층 오른쪽에 있는 방 세 개를 쓰고 있어요.”

“고맙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황급히 객잔 안으로 들어가는 로사리오의 모습에 점소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청소를 했다.

이 층으로 올라간 로사리오는 점소이가 알려 준 대로 가다가 복도에 검은색 무복을 입은 호위대 대원 두 명이 검을 들고 서 있는 걸 보고는 멈칫했다.

“저, 저기…….”

번뜩거리는 눈빛에 기가 죽은 로사리오가 머뭇거리고 있자, 어제 미리 도현에게 언질을 들었던 대원들은 몸을 돌려 방문을 살짝 두드렸다.

똑똑.

“무슨 일이야?”

문이 열리며 박영식 대장이 얼굴을 내밀자 왼편에 서 있던 대원이 눈짓으로 엉거주춤 선 로사리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보십시오.”

“흐음.”

로사리오를 아래위로 훑어본 박영식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예.”

크게 숨을 들이마신 로사리오는 용기를 내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탁자 앞에 앉아 있던 도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로사리오에게 시선을 줬다.

“결정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왔군.”

그러자 로사리오는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받아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도현은 짐짓 차분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날 따르면 여길 떠나야 되고 명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객잔으로 찾아올 때 어느 정도 각오를 했는지 자칫 힘든 질문일 수도 있었지만 로사리오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어차피 여길 떠나려고 했고 명나라와의 인연은 절 버렸을 때 이미 끊어졌습니다.”

미련이 전혀 없다는 듯이 단호한 로사리오의 태도에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앞으로 걸어가서 로사리오에게 한쪽 손을 내밀며 말했다.

“Vamos a hacer un mejor.”

“……!”

에스파냐어로 정확하게 도현이 잘해 보자고 말하자 로사리오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얼떨결에 악수를 했다.

“어, 어떻게 저희 나라 말을 하실 줄 아십니까?”

“후후후. 앞으로 더 놀랄 일이 많을 거야.”

묻는 것에 대답을 제대로 해 주지 않고 도현은 로사리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목적을 달성했고 감시의 눈길 때문에 관저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었기에 도현은 다음 날 바로 북경으로 돌아갔다.

로사리오 일가는 며칠 뒤 주변 정리를 끝내고 이웃들에게는 아오먼(마카오)로 간다고 속이고는 봉황상단 배를 타고 웅도로 떠났다.

거기서 이미 마련된 병기창에 소속되어 화포의 개량과 생산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생긴 능력인지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여러 가지 언어를 읽고 들을 수 있었던 도현은 심양에 있는 식솔들이 북경으로 오는 걸 기다리며 김 지부장이 구해 온 서양 기술 서적을 꼼꼼하게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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