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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지는 부자 관계
청군이 북경에 들어간 역사적인 순간 멀리 바다 건너 한양에서는 소현세자가 보낸 서신으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탕!
“명국과의 관계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된다니, 조선의 세자께서 어찌 이런 망발을 하실 수 있는 겁니까!”
한쪽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친 영의정 김류가 소현세자의 행동을 질책하자, 다른 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불만을 드러냈다.
“영상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금 어렵다고 오랜 시간 동안 신의로 이어 온 관계를 버리고 북방의 오랑캐 놈들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반란군들에게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가 강남으로 피난을 떠났다고 하는데, 계속 명과 관계를 유지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소?”
우의정 심기원이 신중하면서도 소현세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척화파인 대사헌 이명한이 발끈했다.
“임진년에 무도한 왜군에게 패해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있을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줬는데, 명이 약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고 바로 등을 돌린다니, 그건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세자 저하께서 심양에 너무 오래 계시다 보니까 청국 오랑캐들에게 물이 드신 게지요.”
병자호란 이후 친청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사대부와 신료 대부분이 성리학을 신봉하고 명을 상국으로 떠받들고 있었기에, 소현세자의 서한에 다들 불편함을 넘어 상당한 반감을 나타냈다.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주의자들이 옹호하고 나선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겠지만, 이미 소현을 세자 자리에서 쫓아내기를 원하는 숙원 조씨와 손을 잡은 상태였기에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다물고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나마 심양에 있는 박황과 박노가 보낸 서신을 받은 우의정 심기원이 친명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를 두둔해 주고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고 있었다.
어찌 됐건 전체적인 분위기는 소현세자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제일 안 좋은 건 병자호란 때 아들인 김경징이 세자와 왕실 식구들이 피난 가 있던 강화도 방어 임무를 소홀히 한 죄로 처형을 당하고 자신도 사임을 했지만, 곧 다시 등용돼 영의정 자리를 꿰찬 인조의 최측근인 김류가 앞장서서 소현세자를 공격하고 있다는 거였다.
병자호란 이후 어느 정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직 국왕의 입 노릇만 충실히 수행해 왔기에, 이건 단순히 김류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인조의 뜻으로 신하들은 받아들였다.
“아무리 화가 난다지만 그래도 세자 저하신데 그건 너무한 것 아니오.”
심기원이 약간 질책하듯 말하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병조판서 김자점이 툭 끼어들어서는 비아냥거렸다.
“세자 저하라도 잘못하셨으면 지적을 받으셔야지요. 그래야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 아닙니까?”
김자점이 숙원 조씨와 손을 잡았다는 걸 알고 있는 심기원은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지만 여기서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기에 애써 욕이 나오려는 걸 눌러 참았다.
다른 신하들도 가장 골수 친청주의자로 분류되는 김자점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지만 김자점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아 놨는지 모르는 척 앉아 있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그냥 넘길 수 없소이다.”
“그래서, 폐세자라도 시키자는 거요!”
짜증이 난 심기원이 조금 언성을 높이자 김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필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진심이오!”
놀란 심기원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김류를 노려보는 순간 젊은 관리 한 명이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원하는 폐세자 문제가 나오려는 순간 흐름이 끊기자 화가 난 김자점은 얼굴을 구기며 호통을 쳤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
“그게 뭔데?”
김자점이 다그치듯 묻자 눈치를 보던 젊은 관리는 용건을 떠올리고는 다급히 말했다.
“청군이 반란군을 무찌르고 북경에 입성했다고 합니다.”
“뭐!”
“헉.”
폭탄이라도 터진 듯 방 안은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북경이 함락되다니, 정말인가?”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방금 심양 관저에서 보낸 급전이 도착했사온데 거기에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허어.”
여기저기서 탄식성이 터져 나왔고 척화파 중심인물 중 하나인 조경은 멍한 얼굴로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찌 이런 일이…….”
김자점도 놀랐는지 표정이 굳은 채 머릿속으로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자신한테 유리할지 고민했다.
처음 소현세자가 돌아가는 사정을 알리고 명이 무너질 수도 있다며 경고했을 때는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부 사정이 혼란스럽지만 대부분의 신료들은 일시적인 어려움일 뿐이고 곧 수습이 되어, 이번에도 청은 산해관에 막혀 내륙으로 들어가지 못할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출병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산해관을 넘었을 뿐만 아니라 북경까지 함락시키다니, 신료들은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반란 때문에 내부가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산해관을 어찌 그리 쉽게 넘을 수 있단 말인가?”
대사헌(현대의 감사원 역할) 이명한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자 소식을 전하러 온 젊은 관리가 침통한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해 줬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 총병이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청국에 항복하며 성문을 활짝 열어 줬다고 합니다.”
“저런…….”
“오삼계 총병이라면 명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데 그런 사람이 배신을 하다니. 허어.”
신료들은 마치 한양이 함락되기라도 한 것처럼 탄식을 쏟아 냈다.
“망조가 들었다는 징조 아니겠소이까.”
계속 코너에 몰려 있던 우의정 심기원이 약간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 신료들은 눈가를 찌푸렸지만, 명국의 몰락이 실제로 눈앞에 닥쳐왔다는 걸 다들 느꼈기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끄으응.”
“이럴 것이 아니라 주상 전하께서도 서신을 읽으셨을 테니 어서 대전으로 가서 대책을 의논하도록 합시다.”
“그러는 것이 좋겠소.”
“어서 갑시다.”
김류의 말에 신료들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방을 나섰다.
급히 대전 회의가 소집됐지만 멀리 바다 건너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조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신료들이 급히 명나라에 지원 병력을 보내 예전 임진왜란 때 도와준 제조지은을 갚아야 된다며 아주 황당한 의견을 내놓자, 인조한테 호통만 한바탕 얻어먹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가 청나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명나라에 지원 병력을 보내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조선에는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뭄과 전란으로 팍팍해진 나라 살림에 청국의 강요로 몇 차례 파병을 하며 그나마 있던 재정마저 고갈되어 버렸다.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가 틀어진 것도 있었지만, 오죽했으면 작년부터 심양에 보내는 관저 운영비마저 절반으로 줄여야 했다.
이런 상태에서 명나라를 돕기 위해 대규모 지원 병력을 바다 건너에 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만 봐도 신료와 사대부 들이 그동안 입으로만 복수를 외치며 준비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괜히 이런 이야기가 청국의 귀에 들어가서 나중에 있을 보복을 걱정해야 될 판이었다.
이때 청국에서 보낸 사신이 도착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며 실제로 팔기군 한 개 부대를 국경선으로 진전 배치시키자, 명나라를 돕자는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아무튼 북경 함락 소식 덕분에 소현세자의 서신 문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이번 일로 소현세자는 숙원 조씨 일당뿐만 아니라 골수 친명주의자들과도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볼썽사나운 꼴입니까!”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은 방에서 숙원 조씨의 앙칼진 목소리가 매섭게 울려 퍼졌다.
“한양에 있지도 않은 세자 한 사람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라면서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됐느냔 말입니다!”
“여론이 받쳐 준다면이라고 했었죠.”
화가 나서 팔팔 날뛰는 숙원 조씨와는 달리 김자점은 차분히 가라앉은 태도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조씨는 손톱을 세워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래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다르지요. 명과 청에 대해 소현세자가 경고했던 일이 맞아떨어졌으니 주상 전하께서도 그를 쉽게 내치지 못하실 겁니다.”
향후 대륙의 패권이 어느 쪽에 넘어가느냐에 따라 조선이 취해야 할 태도도 매우 달라진다. 자칫 잘못해서 줄을 잘못 잡으면 예전처럼 또다시 나라가 쑥대밭이 되는 전쟁을 겪거나 무지막지한 공물을 바쳐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인조는 물론이고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대륙에서 전해져 오는 정보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리 지금과 같은 일을 예견한 소현세자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
“지금은 때가 좋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왜 너만 모르느냐 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김자점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됐었는데…… 이대로 물러나란 말이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숙원 조씨는 김자점을 날카롭게 노려본 후 빨갛게 칠을 한 입술을 요염하게 핥았다.
“그럼 내가 직접 주상 전하를 찾아뵙도록 하죠.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시니까.”
“허어.”
김자점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무릎에 손을 탁 치면서 몸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평소 국정에는 통 관심이 없으시던 주상 전하께서도 매일 밤을 새듯이 하며 조정 대신들과 계속 의논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마당에 마마께서 찾아가신다면 하룻밤 위안은 될지 모르나, 그 이상 간섭하면 아니 됩니다.”
“왜요, 설마 전하께서 나를 내치기라도 하실까 봐요?”
“그런 말까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깥일로 정신없이 바쁜데 괜히 집안일을 내세워서 들쑤시는 건 어떤 사내라도 좋아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요.”
“이익!”
한마디로 말해 괜히 수선 피우며 돌아다니지 말란 뜻이다.
냉정하면서도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한 김자점의 말에 조씨는 답답한 듯 이를 악물었다.
“흥! 세자가 이대로 보위에 오르면 병판도 좋을 일이 없을 테니 어떻게든 그 전에 수를 써야 할 겁니다. 그것만은 잊지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만 있을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지요!”
조씨는 몸을 홱 돌리고 등을 보인 자세로 말했다.
“이제 그만 됐습니다. 나가 보세요!”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내쉬는 조씨의 뒷모습을 고까운 눈초리로 쳐다본 김자점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물러났다.
끼이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조씨의 거처를 힐끔 뒤돌아본 김자점은 혀를 쯧 차고 중얼거렸다.
“천한 암탉 주제에 하늘 모르고 날뛰다니. 과연 그 권세가 얼마나 오래 갈지 두고 보자꾸나.”
한편 북경을 함락한 예친왕은 이곳을 완전한 청국 영토로 만들기 위해 병사들에게 일체의 약탈 행위를 금지시켰다.
이자성이 바닥까지 탈탈 털어 가서 더 나올 것도 없었지만 이런 청군의 행동에 또다시 큰 곤욕을 치를까 봐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은 크게 안도하며 반발심도 많이 희석됐다.
그렇게 북경성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예친왕은 휘하 병력을 세 개로 나눠 무주공산처럼 비어 있는 주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숭정제가 강남으로 달아나면서 자신들이 버려졌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의외로 순순히 성문을 열고 청군에게 항복했다.
물론 끝까지 저항하는 곳도 있었지만 그런 곳은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파괴하고 죽이는 걸로 확실히 실력 행사를 하자, 그 뒤부터는 소문을 듣고 청군 깃발이 보이면 알아서 백기를 내걸었다.
“예친왕을 만나러 갔다가 들은 소식인데 이틀 전에 제남성을 접수했다고 하네요.”
다행히 화마를 피한 자금성 서고에서 가져온 희귀본 서적들을 살펴보고 있던 소현세자는 도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럼 산동성도 이제 청군의 손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구나?”
“그렇다고 봐야죠.”
의자를 빼서 털썩 앉은 도현은 목이 말랐는지 탁자 위에 있는 찻주전자를 들어 빈 잔에 따라 한 모금 꿀꺽 마셨다.
“청군이 강한 건 알았지만, 벌써 산동성까지 세력을 확장하다니 너무 빠르게 무너지는 것 같구나.”
“저항의 구심점도 없고 워낙 청군에 대한 공포가 큰 데다 계속된 전란에 지친 영향도 있을 거예요.”
“구심점이라면 명국 황제인 숭정제가 있지 않느냐?”
그러자 도현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겨우 목숨은 보전했지만 강남 역시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시끄러운 상태인 걸 생각하면 화북 지역을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예요.”
단언하듯 도현이 말하자 맞은편에 있던 소현세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청이 명나라를 밀어내고 새로운 대륙의 패자가 되겠구나.”
“당분간 전체를 다 집어삼키는 건 힘들겠지만 최소한 화북 지역은 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봐야겠지요.”
“상황이 이런데 아직도 아바마마와 조정 대신들은 명나라를 못 버리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구나.”
소현세자의 이야기에 도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명나라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형님의 생각은 저도 찬성이지만 이번에는 너무 성급하셨어요. 나중에 왕좌를 물려받거나 최소한 한양에 돌아가 반대 의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꺼내도 됐잖아요.”
“청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린단 말이냐? 그리고 제조지은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 사대부들이 혹시나 엉뚱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그렇게 충격을 줘서라도 정신을 차리도록 해야지.”
“무슨 말인 줄은 알지만 그러다가 형님이 다치실까 봐 그러는 거죠.”
“그 정도로 흔들릴 내가 아니니 염려 마라. 그리고 잘못된다고 해도 뒤를 받쳐 주는 든든한 동생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느냐?”
소현세자가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쳐다보자 도현이 괜히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됐어요.”
“후후후. 아무튼 북경까지 함락됐으니 이제 조선에 있는 사대부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겠지.”
이번 일로 조정 대신과 사대부 들이 조금이라도 명나라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기를 기대하는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들이 쉽게 바뀌겠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뭔가 깨닫는 것이 있겠지.”
“그러면 다행이죠.”
양쪽 어깨를 으쓱인 도현은 잔에 남아 있는 차를 마저 다 마시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볼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볼게요.”
“어딜 가는 거냐?”
“밖에요.”
한쪽 눈을 찡끗 감으며 하는 말에 소현세자는 북경에 있는 봉황상단 직원들을 만나려고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위험하니까 혼자 가지 말고 항상 위사들과 함께 다니도록 해라.”
“염려 말아요.”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소현세자를 뒤로하고 방을 나갔다.
김덕술과 박태철 두 위사만 데리고 반쯤 불에 탄 자금성을 나온 도현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상인들이 하나둘 나와 장사를 시작한 시장으로 향했다.
“자! 쌉니다, 싸요.”
“잘 말린 생선이 있어요!”
불과 얼마 전에 두 번에 걸친 약탈과 온갖 고초를 겪고 지금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생활을 이어 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도현은 너무나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평상복을 입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간 도현 일행은 삼 층으로 지어진 객잔 앞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부서져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집기와 이런저런 쓰레기들을 치우고 있던 점소이가 귀찮은 듯 말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장사 안 합니다.”
“여기가 해산객잔이 맞나?”
“맞기는 한데 보시다시피 사정이 이래서 손님을 못 받으니까 다른 곳으로 가세요.”
점소이의 말에 도현은 다른 객잔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홀 안으로 들어가 빈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어어? 이봐요!”
짜증을 내며 다가오는 점소이를 보며 도현 대신 옆에 서 있던 김덕술이 약간 위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인한테 가서 봉황이 오셨다고 해라.”
“예에?”
약간 주눅이 든 얼굴로 점소이가 머뭇거리자 김덕술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다그치듯 말했다.
“어서 안 가고 뭘 멍청히 서 있는 거야?”
“아? 예.”
그때서야 점소이는 손에 든 빗자루를 내려놓고는 허둥지둥 내실로 뛰어갔다.
“거, 애 놀라게 왜 눈을 부라리고 그래. 넌 얼굴이 흉기라고 했잖아.”
“내 얼굴이 뭐 어때서?”
“솔직히 편안한 인상은 아니지.”
“뭐야!”
“안 그렇습니까, 나으리?”
신분을 감추기 위해 박태철이 나으리라고 부르며 쳐다보자 도현은 옆에 있는 김덕술에게 힐끗 시선을 줬다.
“김 위사.”
“예.”
“부인한테 잘하게.”
“……?”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덕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도현이 입을 열었다.
“자네한테 시집을 오고 애까지 낳아 주신 걸 보면 부인이 참 자애롭고 측은지심이 많은 것 같군.”
“큭큭큭.”
“끄으응.”
김덕술이 와락 얼굴을 구기며 앓는 소리를 낼 때 내실 문이 벌컥 열리며 뚱뚱한 체격의 중년인이 허둥지둥 달려와 도현을 보고는 꾸벅 허리를 굽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주인은 봉황상단 소속으로 본명은 오삼돌이었는데 왕태춘이라는 가명을 쓰고 객잔을 운영하며,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해 지부장에게 넘기는 일을 맡고 있었다.
“연락을 하고 온 것도 아닌데, 뭘.”
“안쪽에 별채가 있으니 거기로 가시죠.”
“그럴까.”
의자에서 일어난 도현은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객잔 뒤편에 있는 별채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담이 쳐져 있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다시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해산객잔 주인으로 있는 오삼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왕태춘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절을 올리며 중국어가 아닌 조선말로 주인이 인사를 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고를 치하했다.
“타국에서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노예로 끌려가 심양에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고 있었는데, 제게 새 인생을 주신 대군마마를 위해서라면 뭐든 못하겠습니까.”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쑥스럽군.”
진심이 가득 담긴 눈빛에 멋쩍어하는 도현과 달리 양옆에 선 위사들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김 지부장을 만나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물론입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북경 지부장인 김하방한테 연락을 취하기 위해 주인이 방을 나가자 김덕술이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도현을 쳐다봤다.
“징그럽게 뭐야?”
“헤헤헤. 그냥 저희가 주군은 정말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혹시나 예친왕이 보낸 벼룩이 있는지 주위나 잘 살펴봐.”
“저희들이 누굽니까? 벌써 미행이 있는지 다 확인했으니까 염려 마십시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함께 오래 다녀서 그런지 넉살이 늘어난 김덕술을 보며 도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칠현이랑 자주 어울려 다니더니 뺀질거리는 게 옮았네.”
아까 입구에서 마주쳤던 점소이가 가져다 놓은 차를 마시며 얼마쯤 기다렸을까 김 지부장이 주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대군마마.”
“김 지부장, 오랜만이군.”
“제가 먼저 찾아뵈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청군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연락을 취하기 쉽지 않았을 거야. 괜히 의심을 받는 것보다 내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낫지. 서 있지 말고 앉아.”
“예.”
도현의 말에 김 지부장이 의자에 앉았고 객잔 주인은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지난번 일은 정말 잘해 줬어.”
“전 그냥 대군마마께서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계획대로 실행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특히나 전장 한복판에서 말이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북경에서 고생하는 김 지부장을 격려한 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자네한테 시킬 일이 하나 더 있어서네.”
“뭔지 말씀만 하십시오.”
“다른 것이 아니고 이곳에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많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뜻밖의 질문에 김 지부장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선교사라면 하얀 피부에 눈이 파래서 낮도깨비처럼 생긴 이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그자들이라면 여기 북경과 천진에 몇 명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잘됐군. 나중에 긴히 쓸 일이 있으니까 그들의 소재를 파악해 두고 가진 재주가 뭐가 있는지 알아 두게.”
“……알겠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종교인이면서도 뛰어난 기술자이자 지식인이었기에, 지금은 억울하게 죽었지만 명나라의 명장인 원숭환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통해 몇몇 앞선 기술을 습득하려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도현의 깊은 뜻을 모르는 김 지부장은, 선교사한테 왜 관심을 가지는지 의아해하면서도 그가 하는 일이었기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북경 주민들의 분위기는 어때?”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남아 있지만 입성 이후 청군이 별다른 약탈을 저지르지 않고 치안을 유지하자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습니다.”
“청군에 대한 반발심은 없고?”
“당연히 있지요. 하지만 워낙 반란군한테 고초를 당하고 숭정제가 자신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배신감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차라리 강한 청군의 보호를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흐음. 그렇겠지. 그러면 예상보다 청군이 화북 지역을 빨리 안정시키겠군.”
“돌발 변수가 없는 한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넓은 화북 지역을 쉽게 소화시키고 바로 아직 혼란을 벗어나지 못한 강남마저 청나라가 넘본다면,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조선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게 점심 식사를 함께하며 북경 지부에서 추진하는 일의 경과와 주변 정보를 자세히 보고 받은 도현은 오후 늦게 서야 거처로 돌아갔다.
북경이 함락된 지 한 달도 안 돼서 하북성을 비롯해 산동성, 산서성을 차례로 점령한 예친왕은 대륙에 기반을 완전히 굳히기 위해 전격적으로 천도를 결정했다.
심양에 있는 청국 황실을 북경으로 옮기겠다는 거였는데 일부 장수들이 좀 더 점령지가 안정된 다음에 실행하자며 반대했지만, 예친왕은 자신의 뜻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사실상 어린 순치제 위에 있는 그림자 황제인 예친왕이었기에 그가 결정을 내리자 다른 신하들은 불만이 있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도현과 소현세자는 예친왕의 부름을 받고 그가 거처로 쓰고 있는 전각으로 갔다.
이곳 역시 약탈을 당했지만 그동안 보수를 해서 불에 그슬린 벽과 기둥이 깨끗하게 치워지고 예친왕의 권력을 보여 주듯 값비싼 장식물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이리들 앉게.”
두 사람을 본 예친왕은 미소 띤 얼굴로 일어나 넓은 방 한쪽에 마련된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예.”
원탁을 사이에 두고 놓인 의자에 세 사람이 앉자 시종이 들어와 차를 내놓고 나갔다.
은은한 차향이 느껴질 때 맞은편에 있던 예친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동안 제대로 신경을 써 주지 못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황궁 안에 따로 전각을 내주시고 시종들까지 보내 주셔서 불편함 없이 편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소현세자의 대답에 예친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네.”
“그건 그렇고 자네들도 북경으로 천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겠지?”
안 그래도 가장 신경 쓰고 있던 문제를 꺼내자 도현과 소현세자는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 폐하가 이쪽으로 오시면 조선 관저도 옮겨 와야 되니 미리 준비를 해 두게.”
천도가 결정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조선에서 더 멀리 떨어진다고 생각하자 소현세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와 달리 도현은 비교적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상반된 모습에 예친왕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거처는 명국 승상의 저택이 규모도 크고 거의 피해 없이 비어 있다고 하니 그걸 쓰면 될 걸세.”
이미 머물 곳까지 다 정해 두고 하는 말이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두 사람은 그저 조용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운영비는 남초 수입으로도 충당이 될 테니 심양에서처럼 따로 경작지를 내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떤가?”
남초 수입으로 조선 관저가 많은 이득을 보고 있다는 걸 예친왕이 다 알고 있었기에 엄살을 부릴 수 없었던 소현세자는 옆에 있는 도현과 살짝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심양에 있는 땅은 계속 조선 관저에서 관리하도록 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할 이야기가 있는데…….”
상대가 말끝을 살짝 흐리며 뜸을 들이자 무슨 요구를 하려고 저러는지 도현과 소현세자는 괜히 긴장이 됐다.
“봉림대군만 북경에 남고 소현세자는 이제 그만 조선으로 돌아가도 좋네.”
“……!”
순간 바로 이해가 안 돼서 멍하니 있던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지, 지금 영구 귀국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러네. 다음 대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가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좋지 않으니 특별히 귀국을 허락하는 걸세.”
전혀 기대도 안 했던 일이었기에 소현세자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기는 도현도 마찬가지였는데 원래 역사대로라면 북경에서 몇 년 더 볼모 생활을 하다가 귀국을 하는 거였기에, 이걸로 이제 역사의 방향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많이 틀어졌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몇몇 반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소현세자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인데 별로 기쁘지 않은 모양이군?”
짐짓 화가 난 듯 예친왕이 말하자 소현세자는 손사래를 치며 이야기를 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무 갑작스럽고 믿기지 않는 일이라……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장난을 쳐 본 거니까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으이. 조선에 돌아가서도 양국이 지금처럼 우애롭게 지낼 수 있게 가교 역할을 잘해 주길 기대하겠네.”
웃는 얼굴로 가볍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 있었는데, 조선에 보내 주는 대신 인조와 사대부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잘 다독이라는 거였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소현세자는 약간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사실 이번 결정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예친왕이 치밀한 계산 끝에 내린 거였다.
북경을 함락시키며 명과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니 이제 볼모로서 가치가 떨어진 소현세자를 조선에 돌려보내 인심을 얻고 더불어 청의 힘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그를 통해 조선 조정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속셈이었다.
거기다가 둘째 왕자인 도현을 계속 붙잡아 두고 있으니 최소한의 안전판은 확보해 두는 거였다.
사실 볼모의 가치로 따지면 소현세자가 훨씬 높았지만 가끔씩 자신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마음에 걸린 예친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현을 선택했다.
“그럼 준비할 것이 많을 테니 이만 나가들 보게나.”
“네.”
예친왕의 말에 두 사람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거처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앞에 앉아 있는 도현을 미안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고국을 떠날 때처럼 함께 돌아가야 되는데, 나만 먼저 가게 돼서 너한테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형님이라도 귀국하실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니 고맙다.”
서운할 텐데도 표시를 내지 않고 애써 미소를 지어 주는 모습에 소현세자는 도현의 손을 꼭 잡아 줬다.
“귀국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한양에 가시면 숙원 조씨가 더 집요하게 형님을 노릴 테니 걱정입니다.”
“아바마마가 총애하는 여인과 다툼을 벌이는 것이 썩 내키지 않지만,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뭔가 결심한 것이 있는지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소현세자의 모습에 도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시겠지만 그래도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요. 특히 김자점을 주의하십시오.”
“김자점이라면, 병판을 말하는 거냐?”
“예. 제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김자점이 숙원 조씨와 손을 잡았다고 하더군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현세자는 짧게 혀를 찼다.
“쯧. 병자호란 때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전투를 피했고 후에는 비굴할 정도로 청국에 아부하며 권세를 키우더니, 이제는 숙원 조씨와 작당을 해. 정말 상종 못 할 사람이군.”
“소인배이면서도 눈치가 빠르고 조정에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 자이니 조심하셔야 됩니다.”
도현의 충고에 소현세자는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마. 그나저나 북경에 혼자 남을 네가 걱정이구나.”
“염려 마세요. 이번 기회에 대륙의 여러 문물을 배우며 지내지요.”
“그래. 넌 항상 긍정적이고 똑똑하니까 잘 해낼 거다.”
어리게만 느껴지던 동생이 어느새 훌쩍 자라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에 소현세자는 흐뭇하고 대견한 시선으로 도현을 바라봤다.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려는 마음에 이틀 뒤 소현세자는 북경성을 나와 천진에서 배를 타고 심양으로 갔다.
그보다 먼저 황궁을 통해 귀국 소식이 전해진 조선 관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반면 전령을 통해 소현세자를 돌려보내겠다는 청국의 통보를 받은 조선 조정은 기쁨보다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왕위 계승자를 오래 붙잡고 있는 건 도리가 아니니 다시 돌려보낸다고…… 흥!”
인조가 청국에서 보내온 서신을 서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자 대전에 모인 신하들은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숙였다.
“언제부터 청국이 조선의 왕위 계승에 참견을 했다고 이따위 글을 적어 보낸 거야!”
세자 부부가 돌아오는 것보다 청국 황제가 문서로 소현을 왕위 계승자로 못 박아 적어 놓은 것이 거슬린 것이다.
세자 책봉을 받았으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소현이 자신을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있는 인조이기에 사소한 표현 하나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현은 명이 아니라 청국 황제에서 세자 책봉을 받았고 심양에서 수년간 볼모 생활을 하면서 섭정인 예친왕을 비롯한 여러 청나라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기에 불안감이 더 컸다.
특히나 인조가 의지하던 명이 몰락하고 청나라가 새롭게 대륙의 패자로 떠오르는 시점에서 갑자기 영구 귀국을 시킨다고 하자, 혹시나 예친왕이 자신 대신 청에 우호적인 소현세자를 국왕으로 세우려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연세가 있으시니 그걸 생각해서 세자 저하를 돌려보내 주는 걸 겁니다.”
딴에는 인조를 진정시키려고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화를 더 돋우고 말았다.
“대사간은 이제 나이가 많으니 내가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야 된다, 이건가!”
“그게 아니오라…….”
꽝!
당황한 대사간 조경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인조가 한쪽 손바닥으로 서탁을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듣기 싫소! 대신이라는 사람들이 그따위 말을 하니까 저잣거리에서 짐 대신 세자가 왕이 되어야 된다는 소문이 도는 것 아니오.”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무것도 모르는 상것들이 지껄이는 소리이니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달랬지만 인조는 화를 좀처럼 풀지 않았다.
“이렇게 태평스러워서야. 자고로 작은 구멍에 둑이 터진다고 그런 이야기들이 돌다가 자칫 역심을 품는 무리라도 나오면 경들이 책임을 질 거요!”
역심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인조의 입에서 나오자 순간 대전 안은 한겨울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흔히들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신권, 즉 신하들의 힘이 강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국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역모와 관련된 일이었다.
사대부들이 숭배하는 성리학의 기본 바탕이 충과 효이다 보니까 아무리 크게 강한 권세를 부리는 신하라도 일단 역모 죄를 뒤집어씌우면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달리 조선 왕조 육백 년 역사를 보면 왕을 넘어서는 권력을 지닌 인물은 상당히 많았지만 반정을 일으켜 새 왕조를 열려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무튼 엄청난 피바람을 동반하는 역모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하들을 숨죽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영상!”
인조의 부름에 영의정 김류는 머리를 숙이며 얼른 대답했다.
“하명하시옵소서.”
“불필요한 서신을 보내 조정을 어지럽힌 세자는, 돌아오는 즉시 동궁전에서 석 달간 근신시켜 부족한 학문을 갈고닦도록 조치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수년간 힘겹게 볼모 생활을 하고 겨우 돌아온 세자에게 근신을 명령하다니, 너무 가혹한 조치에 신하들은 크게 술렁였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를 했다가는 무슨 불똥이 튈지 몰랐기에 다들 그냥 숨만 죽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대전을 나온 신하들은 삼삼오오 모여 오늘 있었던 인조의 지시를 가지고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신하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삼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우정)을 비롯한 주요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인조의 지시 때문인지 의정부議政府(조선 시대 최고 회의 기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대부분 어두웠다.
“본인도 명을 버리고 청을 선택해야 된다는 세자 저하의 주장에는 반대지만 이번 조치는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대사헌으로 있는 이명한의 말에 우의정 심기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고뿔에 걸려 고생하시면서도 아침 문안을 거르지 않으실 정도로 효자신데, 지난번에 잠시 귀국하셨을 때도 그렇고 주상께서 왜 자꾸 냉대를 하시는지 모르겠소이다.”
대전에서 야단을 들은 대사간 조경이 한탄하듯 이야기를 하자 상석에 앉아 있는 영의정 김류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다 그러실 만하니까 역정을 내시는 것 아니겠소. 당장 저잣거리에 퍼지고 있는 이야기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으실 텐데, 엉뚱한 서한이나 보내서 화를 내게 만드시니 근신을 지시하신 것도 많이 봐주신 게요.”
그러자 김자점이 기다렸다는 듯 나서며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한양에 계실 때는 효자시고 생각도 바르셨지만 심양에 가신 이후부터는 사람이 바뀌셨어요.”
눈가를 찌푸린 심기원이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일흔두 살의 고령으로 원로인 호조판서 이명이 낮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안팎으로 나라가 뒤숭숭한데 우리끼리 싸워서야 되겠소.”
“흠흠.”
“으음.”
나이가 많다고 몇 번이나 벼슬을 내려놨지만 그때마다 인조가 친히 다시 불러들일 정도로 신임이 두텁고 다른 신료들의 인망마저 큰 이명이었기에 천하의 김자점과 심기원도 한발 물러서 줬다.
“아직 세자 저하께서 오시려면 시간이 있으니 그때까지 주상 전하가 오해를 푸실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이명이 그렇게 정리를 하자 심기원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김류와 김자점 역시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다만 떫은 감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짓기만 했다.
대신들이 이렇게 갑론을박하는 사이, 숙원 조씨의 거처에서는 높은 교성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호호호! 그게 정말이더냐?”
“네. 틀림없습니다, 마마.”
숙원 조씨는 상궁이 전해 준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아 한껏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소현세자가 한양에 귀국하게 됐다고 했을 때만 해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게로구나. 하긴 주상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데, 그토록 교만한 태도를 보인 세자를 고이 놔두실 리가 없지.”
그동안의 이간질로 인해 부자 관계가 아무리 나빠졌다곤 해도 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숙원 조씨에게 제일 큰 숙적은 뭐라 해도 소현세자다.
다행히 한양을 떠나 심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는 인조의 총애를 등에 업은 조씨가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지만, 세자가 돌아오면 안 그래도 그녀를 요망한 계집으로 여기고 있는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터.
게다가 조정의 원로대신들이 정통 왕위 계승자인 소현세자를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숙원 조씨에게는 소현세자의 귀환이 일생일대의 대위기나 다름없었다.
하나 소현세자가 돌아오면 그를 한시적이지만 근신 상태에 두겠다는 인조의 뜻이 전해지자마자 조정이 발칵 뒤집힌 것과는 반대로 숙원 조씨에게는 하늘이 편을 들어 준 것만 같아 절로 어깨춤이 춰질 정도였다.
“잘되었습니다, 마마. 이제 세자께서 돌아오시더라도 아무 걱정도 할 것이 없습니다. 두 손 두 발을 다 결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힘이 있어 마마께 대적하겠사옵니까.”
“호호, 그렇지. 차라리 심양에 있던 시절이 더 나았더라며 후회하게 될 것이야.”
조씨는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도록 머릿기름을 묻힌 풍성한 머리칼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애지중지하는 보석함을 꺼내 열었다.
“오늘은 특별히 더 공들여서 치장을 해야겠구나.”
그러면서 조씨는 후궁에 처음 들어와 인조를 모신 후 선물로 받았던 비취색 귀고리와 비녀를 들었다.
“어때, 잘 어울리느냐?”
“궁에서 제일로 아름다우신 마마께 뭔들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흥,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오만한 표정으로 대꾸한 조씨는 보석함 제일 아래에서 손톱만 한 은색 가락지를 하나 꺼내더니 상궁에게 던졌다.
“내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이니 너에게 주마. 좋은 소식을 가져와 준 상이니라.”
조씨는 아무렇게나 내던졌지만 언뜻 봐도 상당히 값어치가 나갈 듯한 귀중품이다.
상궁은 행여나 조씨의 마음이 바뀔세라 허둥거리며 가락지를 주워 들고는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옵니다, 마마!”
그러나 조씨는 상궁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시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제 됐다, 그만 나가 보거라.”
“네.”
문이 스르륵 닫히고 홀로 남은 조씨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면서 사내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오른 자리인데 절대 끌려 내려갈 수 없지.”
이렇게 한양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을 때 당사자인 소현세자는 심양 관저를 정리하고 영구 귀국을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짐은 북경으로 가져가야 되니까 따로 빼놔.”
“먼 길을 가야 되니까 부서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으싸.”
일꾼들이 짐을 싸서 소달구지 위에 차곡차곡 올려놓는 걸 보고 있던 소현세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성 밖에 있는 농장은 어떻게 됐소?”
그러자 대빈객 박황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봉황상단에 운영권을 넘겼습니다.”
“잘했소.”
예친왕이 농장을 계속 운영해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현실적으로 심양 관저가 옮겨 가는 상황에 직접 관리를 하는 건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도현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결정 내린 것이 봉황상단에 맡겨 운영을 하도록 하고 북경으로 옮기는 관저에 수익금 육 할을 주기로 했다.
이러면 힘들게 가꾼 농장을 청국에 넘기지 않아도 되고 운영권을 주는 대신 봉황상단에서 상당한 금액의 돈을 넘겨받아 그걸로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예들의 몸값을 내주고 귀환 행렬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빈 일손은 봉황상단에서 다른 조선인 노예들을 구해 채워 넣은 후 이 년간 열심히 일하면 자유를 줄 계획이었다.
그동안 자금은 충분히 있어도 청국의 눈치 때문에 노예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애써 외면해야 했지만 이렇게 하면 마음 놓고 많은 동포를 구해 낼 수 있었다.
“북경에 가서도 불편한 것이 없도록 짐을 꼼꼼히 챙겨 주시오.”
“예.”
“그리고 내가 없더라도 대빈객이 봉림대군을 옆에서 잘 보살펴 주시오.”
“염려 마십시오, 저하.”
“그대만 믿겠소.”
시강원 소속 관리들도 세자와 함께 모두 귀환해야 하지만 박황은 소현세자의 부탁으로 일부 신하들과 함께 북경에 가서 도현을 보좌하기로 했다.
똑똑하고 씩씩한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청국에 혼자 남아 있어야 된다는 것에 소현세자는 미안하고 걱정이 됐다.
그때 세자전 소속 내관인 최형외가 옆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하, 봉황상단에서 사람이 찾아왔사옵니다.”
“봉황상단?”
“예.”
“지금 어디에 있지?”
“집무실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일이 생겨서 그러니, 여긴 대빈객이 알아서 정리해 주시오.”
“알겠사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의아한 마음이 든 소현세자는 몸을 돌려 급히 세자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장태범 봉황상단 총관이 온돌방에 앉아 있다가 급히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예를 갖췄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농장 운영권 때문에 며칠 전 인사를 와서 안면이 있던 소현세자는 편히 있으라는 듯이 한 팔을 살짝 내젓고는 상석 자리에 앉았다.
“장 총관이라고 했지?”
“그렇사옵니다.”
“서 있지 말고 앉게.”
“예.”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될 소현세자였기에 장 총관은 평소와 다르게 약간 긴장한 얼굴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지 않나. 고개를 들게.”
“하지만…….”
“괜찮아. 동생인 봉림대군이 거느린 수하면 내 식구나 마찬가지이니 편히 대하게.”
재차 소현세자가 권하자 장 총관은 한쪽에 서 있는 최 내관의 눈치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상체를 들었다.
“서로 얼굴을 보니 편하고 좋잖아.”
“황공하옵니다.”
“농장 문제는 다 정리가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일로 날 찾아왔나?”
소현세자의 물음에 장 총관은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가서 옆에 놓여 있던 비단 보자기를 살짝 앞으로 밀며 대답했다.
“대군마마께서 세자 저하께 전해 드리라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봉림대군이?”
“예.”
북경에 있는 도현이 자신한테 뭔가를 보냈다고 하자 소현세자는 의아한 얼굴로 최 내관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최 내관은 비단 보자기를 들어 소현세자 앞에 가져와서는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었다.
안에는 옻칠이 된 제법 커다란 나무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누런 황금빛을 뿜어내는 금원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충 봐도 족히 수만 냥은 넘을 것 같았다.
“이게 뭔가?”
엄청난 거금에 소현세자가 눈이 동그래져서 묻자 장 총관은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이제 한양에 가시면 이리저리 돈을 쓰실 일이 많으실 거라며 대군마마께서 준비를 하신 겁니다.”
“허허. 이런…….”
“시간이 촉박해서 십만 냥밖에 넣지 못했습니다.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한양에 있는 저희 봉황상단 지부로 연락을 주십시오. 그럼 바로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걸로도 충분하다네. 나 때문에 갑자기 돈을 준비한다고 수고가 많았겠군.”
“아닙니다.”
말을 하며 소현세자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도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앞에 있는 돈 상자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동생한테 잘 쓰겠다고 전해 주게.”
“예, 저하.”
며칠 뒤 소현세자 부부는 관저 식솔들과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 출신 노예 수백 명을 데리고 귀향길에 올랐다.
비단 옷과 장신구, 다른 귀중품 등은 먼저 챙겨 마차에 실었지만 움직이는 인원이 많은 만큼 각자의 짐을 등에 지고 정리하는 데만도 며칠이 걸렸다.
떠나는 당일 아침에도 넓은 마당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짐마차와 말 그리고 함께 한양으로 가는 사람들이 나와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세자 부부를 마중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단장을 마친 장씨 부인은 곱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린 강빈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아, 자넨가.”
강빈은 장씨의 목소리를 듣고 밝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어쩐지 들뜬 기색에 볼에는 홍조까지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장씨 부인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강빈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얼굴에 그리 드러나는가? 나도 아직 한참 모자라는군. 이런 때일수록 체통을 지켜야 하는데…….”
“괜찮지 않습니까. 저라 해도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기뻐서 며칠은 잠을 설칠 것 같은데요.”
“아. 미안하네.”
한양으로 돌아가는 세자 부부와는 달리 도현은 계속 청국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황도가 심양에서 북경으로 바뀌었으므로 장씨 부인 역시 도현을 따라 다시 관저를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귀한 신분인데도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하는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런데 그 앞에서 고국에 간다고 마냥 좋아하기만 했으니 윗사람이 되어서 미처 배려가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에 강빈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무슨 사과를 하십니까? 세자빈 마마께서 제게 잘못하신 것도 없는걸요.”
강빈의 마음을 눈치챈 장씨는 부드럽게 미소를 띠고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
“어차피 심양에 있으면 낭군님을 만날 수도 없으니 북경에 가는 게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들 두 사람이라면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걸세.”
강빈은 장씨의 손을 꼭 붙잡고 마음 굳세게 먹으라는 듯 당부했다.
“마마, 이제 출발하실 시간이옵니다.”
상궁의 목소리에 퍼뜩 주위를 둘러보니 대충 정리가 끝난 듯 짐을 짊어 멘 장정들과 보따리를 든 궁녀들이 나란히 서 있었고 마차와 말 들도 출발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관저에서 나온 소현세자는 장씨와 함께 있는 강빈을 발견하고 옆으로 다가와 살짝 눈인사를 보냈다.
“세자 저하.”
조씨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소현세자는 그럴 것 없다는 듯이 작게 웃고는 말했다.
“나중에 북경에 가서 봉림대군을 만나면 안부 전해 주시오. 떠날 때 이야기를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군요.”
“네에. 꼭 전하겠습니다.”
“그럼 강빈, 이만 갑시다.”
소현세자의 재촉에 강빈은 사뭇 아쉬운 듯이 장씨를 돌아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
우렁찬 구호 소리와 함께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장씨 부인은 그 뒷모습을 눈부시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대문을 마차가 통과하는 순간 세자 부부의 마음속엔 기쁨과 회한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지만, 장씨 부인의 심정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언젠가 저 문을 나서는 일이 있다면 그건 조선으로 돌아갈 때뿐이라고 생각했건만.
“마님…….”
장씨 부인을 모시는 상궁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안타까운 듯이 불렀다.
“이 관저도 쓸쓸해지겠군. 나름대로 정이 들었는데 아쉽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북경엔 대군마마께서도 계시고, 대륙의 오랜 수도였던 만큼 구경하실 것도 많아서 지루하지 않으실 겁니다.”
“훗. 자네가 날 위로하는 겐가?”
“아, 아닙니다. 어찌 감히 제가…….”
행여나 장씨의 기분이 상했을까 싶어 상궁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강빈이 걱정하는 건 그렇다 쳐도, 궁녀들에게까지 위로를 받다니 대체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만 됐다. 어차피 며칠 후엔 우리도 떠나야 하니까 나머지 가재도구랑 짐 정리나 하자꾸나. 사람은 떠날 때 마무리를 깔끔히 해야 하는 법이다.”
“네, 마님.”
장씨는 바람에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매만지면서 북경이 있을 방향의 먼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서방님마저 안 계셨다면 이 상황을 견디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현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속이 따뜻한 느낌으로 가득 채워지며 든든해지는 것을 느낀 장씨는 궁녀들을 재촉하며 돌아섰다.
하북성과 산동성, 산서성을 차례로 점령한 청군은 진군을 멈추고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밀어붙여서 최소한 강북 지역은 모두 장악하고 싶었지만, 병력도 부족하고 반란군에 북경이 함락되며 갑자기 시작된 전쟁이라 이것저것 부족한 것이 많아 더 이상은 무리였다.
대신 예친왕은 반쯤 불에 탄 자금성 재건에 착수하며 점령지 안정과 청국의 중심을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겨 오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했다.
그와 동시에 아무리 청군이 용맹하고 전투력이 뛰어나다지만 드넓은 대륙을 순수한 여진족 전사들만으로 점령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항복한 한족 중에 충성심이 높은 자들을 골라 한인팔기를 구성했다.
순혈을 흐린다며 장수들 사이에 약간의 반발이 있었지만 이미 흡수한 몽고족들을 팔기에 편입한 선례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추진됐다.
“한족으로 팔기를 만든다고?”
“예. 그 이야기 때문에 지금 북경성 안이 떠들썩합니다.”
특유의 친화력을 이용해 자금성에서 일하는 고용인들로 이루어진 정보망(?)을 가진 칠현이 알려 준 소식에 무예 수련을 하고 있던 도현은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 내며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움직임이 상당히 빠르군.”
대번에 예친왕의 의도를 파악한 도현은 원래 역사보다 청나라가 더 빨리 대륙을 장악해 나가는 것 같아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주민들 분위기는 어때?”
“아직은 청나라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서 약간 부정적이지만 일부 투항한 한족 병사들은 기인旗人이 되려고 벌써부터 여기저기 손을 쓰는 모양입니다.”
기인이란 팔기군에 속한 병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청나라가 가진 무력의 핵심으로 일종의 지배 계층에 속했다.
“팔기가 되면 신분이 보장되고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지니 그럴 수밖에.”
수건을 칠현에게 건네주며 도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걸로 한족을 두 패로 분열시키고 서로 반목하게 해서 앞으로 지배층이 될 여진족에게 감히 덤벼들지 못하게 만들 토대가 갖춰지겠군.”
“아 참! 그리고 새로 관저로 쓸 저택 정리가 모두 끝났다고 언제든 들어가도 좋답니다.”
“그래? 안 그래도 자금성 안에 있으니까 이것저것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잘됐군. 머뭇거릴 것 없이 오늘이라도 바로 옮기자고.”
“알겠습니다.”
예친왕과 청군 지휘부가 머물고 있어 정보를 알아내기는 편했지만 반대로 도현의 움직임도 낱낱이 파악되기에 그동안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김덕술과 박태철 두 위사가 있었지만 청군 병사들이 연무장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전쟁에 나온 거라 챙길 짐도 얼마 없었기에 도현은 바로 예친왕을 찾아가 새 관저로 가겠다고 이야기하고는 거처를 옮겼다.
황제 바로 아래 직위인 승상이 살던 곳답게 새 관저는 상당히 넓고 화려했는데, 전체적으로 야트막한 담을 경계로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되어 있고 작은 건물들을 빼고도 삼 층 이상의 전각이 일곱 개나 됐다.
얼핏 둘러봐도 심양 관저보다 두 배 이상 큰 것 같았다.
도현을 비롯해 이십 명도 안 되는 인원뿐이라 썰렁한 느낌마저 들었다.
끼이익.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진 전각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고 내부를 살펴보자 칠현이 따라와 입을 열었다.
“약탈이 벌어졌을 때 여기도 반란군 놈들한테 다 털려서 남아 있는 물건이 거의 없습니다. 일단 급한 대로 김 지부장을 통해 대군마마의 거처와 저희들이 사용할 곳에만 집기를 들여놨습니다.”
“잘했어. 그나저나 관저 식구들은 언제쯤 북경에 도착한다고 했지?”
“안전을 위해서 청 황제가 움직일 때 동행한다고 했으니까, 빨라도 가을이나 돼야 될 겁니다.”
“그렇군.”
아내인 장씨와 얼마 전 태어난 아기가 보고 싶었지만 거리도 멀고 중간에 패잔병과 마적 떼가 들끓었기에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새 관저를 둘러보고 있을 때 대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위사들이 본능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가며 경계 자세를 취할 때 낯익은 얼굴의 사내가 도현을 보고 꾸벅 인사를 해 왔다.
“대군마마, 안녕하십니까?”
“자네는 해산객잔 주인 아닌가. 이름이…… 그래, 맞아. 오삼돌이라고 했지.”
도현의 말에 오삼돌은 커다란 배를 흔들며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마께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자금성에서 나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당분간 시중 들 인원을 데려왔습니다.”
마침 일손이 필요했던 도현은 반색을 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됐군.”
“다들 조선인이고 저희 상단 식솔이니 믿고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도현이 쳐다보자 오삼돌 뒤에 서 있는 열 명의 남녀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까마득하게 높은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도현이 먼저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자 사람들은 놀란 목소리로 얼른 대답했다.
“예. 옛.”
“자! 그럼 해가 떨어지기 전에 어서 짐부터 옮기자고.”
“네.”
도현의 말에 사람들은 위사와 함께 가져온 짐을 하나씩 옮겨 정리한다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북경 관저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