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대
당시 조선 국왕인 인조의 거처는 정궁인 경복궁이 아니라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창덕궁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아픔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한양을 함락한 왜병들이 노략질을 하며 모든 궁궐을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경복궁도 화마에 당해 잿더미가 되어 여러 차례 중건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궁핍해진 재정과 연이어서 닥친 전란으로 번번이 좌절됐다.
결국 1867년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다시 중건할 때까지 무려 이백칠십 년 넘게 폐허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인조는 창덕궁에서 지내야 했는데, 거처할 곳이 없어 사대부의 집과 인근 가옥 여러 채를 합쳐 급히 임시 행궁을 만들어 죽을 때까지 머물러야 했던 선조보다는 나았다.
창덕궁 내원 깊숙한 곳에는 왕비와 후궁들의 거처가 있었다. 거기에는 늙은 인조를 치마폭에 감싸고 새롭게 권력자로 떠오른 후궁 조씨의 처소도 있었다.
“호호, 정말 아름답구나.”
조씨는 주위 사람들을 다 물리고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 안에서 자개함에 담긴 보석들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연신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출세를 바라는 일부 양반들이 궁 내외를 오갈 수 있는 상궁들과 그녀의 외척을 통해 전달한 것으로, 중국에서 건너온 머리 장식품하며 진주를 꿰어 만든 목걸이, 은 귀고리 등 평범한 양민들은 평생을 일해도 손에 넣지 못할 장신구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끔 돈이나 비단 같은 것도 받긴 했지만 그런 것들은 쉽게 눈에 띄는 탓에 남의 눈을 피해 몰래 건네려면 이런 보석류가 최고였다.
그중에서도 조씨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진주로, 흠 하나 없이 매끈한 결을 자랑하는 유백색의 알들을 손끝으로 만지며 그 감촉을 느끼는 것이 그녀의 비밀스러운 취미였다.
“마마, 김 상궁이옵니다.”
닫혀 있는 장지문 너머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씨는 자개함을 닫아 옆으로 밀어 놓고는 말했다.
“들어오게.”
조씨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녀들이 장지문을 소리 없이 양옆으로 열었다.
길게 찢어진 눈에 족제비처럼 얼굴형이 길쭉하게 생긴 김 상궁은 후궁 조씨의 오른팔 격으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마마, 심양에서 세자 저하가 보낸 서한이 도착했다 하옵니다.”
“그래? 내용이 뭐라고 하더냐.”
대전 내관을 통해서 은밀히 인조 앞으로 보내온 서한의 내용을 살피고 온 김 상궁은 행여나 장지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릴까 주의하면서 속닥거렸다.
“봉림대군이 임경업 장군과 함께 해적들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청국 황제 역시 크게 기뻐하며 치하를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봉림대군이? 하!”
후궁 조씨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무릎을 탁 쳤다.
“소현세자도 모자라 이젠 그 동생까지 설치고 다니는구나.”
못마땅한 듯 혀를 차던 후궁 조씨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일전에 명했던 건 어찌 되었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심양 관저에 있는 궁녀들과 내관 몇을 이쪽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그들이 마마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것입니다.”
“잘했다. 이제부터 소현세자의 동향을 낱낱이 보고해 줘야 해.”
“네. 그런데 봉림대군은 어떻게 할까요?”
이제까진 소현세자만 경계했지 봉림대군은 후궁 조씨의 안중에도 없었다.
문무에 뛰어난 것도 아니고 인조가 총애하는 것도 아니며 세자의 위도 가지지 못한 왕자까지 일일이 신경 쓰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방금 김 상궁이 말한 서한의 내용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는지 조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봉림대군도 마찬가지야. 청국에서 두 사람이 누굴 만나는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내가 다 알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겠다.”
“예, 알겠사옵니다.”
김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고는 방을 나가자 조씨는 탁자 위에 손을 얹고 초조하게 톡톡 두드렸다.
“내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 인열왕후의 자식들이 두각을 드러내선 안 돼. 반드시 끌어내리고 말겠어.”
이렇게 한양에서 후궁 조씨가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소작농들이 지낼 마을 공사를 다 끝낸 도현은 소현세자에게 결과를 보고하고는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아! 여기가 천국이네.”
후원 정자 바닥에 드러누워 망중한을 즐기고 있던 도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저게 정말.”
도현의 시선이 향한 곳에 칠현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헉헉! 마마, 여기 계신 것도 모르고 찾아다니느라 관저 안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뭣 때문에 날 찾은 거야?”
“벌써 신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퉁명스러운 반응에 칠현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라니요? 신시부터 학사님과 공부를 하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벌써 한참 전에 방으로 오셔서 대군마마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씨!”
바로 이게 풍광이 좋기도 했지만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도현이 정자에 나와 누워 있는 이유였다.
“그냥 못 찾았다고 해.”
그러자 칠현이 울상을 지으면서 그를 쳐다봤다.
“대군마마를 모시고 가지 않으면 제가 대신 혼나는 걸 아시잖아요.”
“김 학사가 널 죽이기야 하겠냐? 눈 딱 감고 야단 좀 듣고 와.”
“마마!”
“나 귀 안 먹었다.”
얄밉게 말을 하고 도현이 다시 드러누우려고 할 때 뒤쪽에서 한겨울 불어오는 북풍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 며칠 동안 계속 얼굴 뵙기가 힘들다 했더니 이렇게 절 피하신 거군요.”
“헉! 기, 김 학사.”
언제 왔는지 시강원 학사인 김종일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걸 보고 도현은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이거 섭섭하군요. 제 강의가 그렇게 재미가 없었습니까?”
“그런 게 아니고…….”
“오늘부터는 심기일전해서 다시는 꾀부릴 생각이 들지 않게 더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겠습니다.”
이를 꽉 다문 채 하는 말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오한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며 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대군마마를 가르치는 일인데 소홀히 할 수 없지요. 마침 정자에 나와 계시니 오늘은 답답한 방이 아닌 여기서 수업을 하지요.”
성큼성큼 정자 안으로 걸어 들어간 김종일은 도현과 마주 앉아 옆구리에 챙겨 가지고 온 서책을 펼쳤다.
“며칠 쉰 것까지 다 보충하려면 오늘은 늦게까지 강의를 해야겠군요.”
“허억!”
도현이 기겁했지만 김종일은 못 본 척 싸늘하게 말했다.
“어서 책을 펴시죠.”
“다시는 꾀 안 부릴 테니까 한 번만 봐주시오.”
그가 사정했지만 김종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칠현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대군마마께서 공부를 하시려면 책상이 있어야 되니 냉큼 가져오너라.”
“예!”
쌤통이라는 듯이 웃으면서 대답한 칠현은 바로 안채로 뛰어갔다.
그걸 보며 도현은 살짝 얼굴을 구기고는 칠현의 뒤통수를 째려봤다.
결국 이날 도현은 의외로 꽁한 구석이 있는 김종일한테 붙잡혀 밤늦게까지 사서삼경을 외워야 했다.
“마마, 이러다가 걸리면 또 혼나신다니까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뒤를 따라오며 칠현이 계속 잔소리를 해 대자 걸음을 멈춘 도현은 뒤를 돌아보면서 짜증을 냈다.
“계속 그렇게 떠들려면 넌 따라오지 말고 여기 남아 있어.”
“마마의 그림자 같은 존재인데 제가 어떻게 혼자 가시게 둘 수 있겠습니까?”
“그림자 좋아하네. 그러는 놈이 어제 내가 김 학사한테 당하니까 옆에서 혼자 히죽거렸냐.”
고리눈을 뜨며 도현이 째려보자 켕기는 것이 있는 칠현은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흠흠, 그럴 리가요. 잘못 보신 거겠지요.”
“이게 날 바보로 아나. 안 그래도 어제 하는 꼴을 보고 울화가 치밀었는데 오늘 푸닥거리 한번 할까?”
도현이 손가락을 꺾으며 다가오자 칠현은 해쓱해진 얼굴로 황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제가 살짝 맛이 갔나 봅니다.”
“그럼 벌을 받아야지.”
“마마, 다 좋은데 여기서 소란을 피우다가 걸리면 오늘 강의를 째겠다는 마마의 원대한 야심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
칠현의 필사적인 외침에 도현은 주먹을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멈칫했다.
“쳇.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에헤헤, 감사합니다.”
칠현은 두 손을 쓱싹 비비며 냉큼 도현 곁에서 실실거렸다.
“시간 없어. 빨리 가자.”
도현은 수풀을 두 손으로 헤치며 가려 놓았던 개구멍을 찾았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었지만 그동안 얼마나 자주 애용했던지 두 사람은 옷자락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능숙하게 담 너머로 쑥 빠져나왔다.
관저 밖으로 나온 도현은 양팔을 벌려 크게 기지개를 켜며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이 자유의 향기.”
이건 또 뭔 엉뚱한 짓이냐는 눈으로 쳐다보던 칠현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학사님이 찾으러 나오시기 전에 어서 여길 뜨시죠.”
“그래.”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칠현과 함께 서둘러 관저를 벗어나 저잣거리로 나갔다.
전쟁 중이었지만 심양 거리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이것저것 둘러보며 구경하던 도현은 배가 출출해 마침 눈에 띈 봉황상단에서 운영하는 객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이제 한 열일곱이나 먹어 보이는 점소이가 달려와 두 사람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식사를 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싹싹하게 대답하는 점소이를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마침 창가에 자리가 있자 거기로 가서 앉았다.
“음식은 뭘로 드릴까요?”
“뭐가 맛있어?”
도현의 물음에 점소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 냈다.
“저희 가게는 오향장육五香醬肉이 일품이지요. 알고 계시겠지만 다섯 가지 향이 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계피, 향초, 정향, 회향, 진피를 넣어 향을 내고 양념한 간장에다가 돼지고기를 졸여서 만드는데 이게 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진미라는 것 아닙니까.”
“이거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걸. 그걸로 가져와 봐. 아참, 술도 빠뜨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돌아가자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도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장사가 제법 잘되는 모양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번화가라고 하지만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인데도 자리가 거의 다 차 있는 걸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상단 소유의 객점이 장사가 잘된다고 하자 기분이 좋아진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잠시 뒤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점소이가 장담한 대로 맛이 괜찮아서 도현은 더욱 흡족한 마음이 됐다.
그렇게 한창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무심코 창밖으로 눈을 돌린 도현은 죄인을 호송하듯 창살이 쳐진 짐마차 다섯 대가 노예들을 가득 싣고 줄지어 길거리를 지나가는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뭐야?”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본 칠현이 마차 행렬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노예들 아닙니까.”
“이봐!”
도현의 부름에 아까 안내를 해 줬던 점소이가 계단 옆에 서 있다가 쪼르르 뛰어왔다.
“뭐 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고, 저기 보이는 마차 행렬은 뭐야?”
슬쩍 밖을 쳐다본 점소이가 이내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마 대인이 며칠 뒤에 열리는 노예 시장에 내놓을 노예를 데려오는 겁니다. 복장으로 봐서 다들 조선인 같네요.”
“그럼 저들도 고향으로 도망치다가 잡힌 거야?”
“뭐 그런 경우도 있지만 행색으로 볼 때 이제 갓 노예로 잡힌 사람들이네요.”
“지금 저놈들이 국경선을 넘어 들어가 사람들을 잡아 오기라도 한다는 거야?”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도현은 살짝 커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점소이는 양쪽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그게 아니라면 몽고나 한족도 있지만 노예 시장에서 거래되는 인원 상당수가 어떻게 조선인으로 채워지겠습니까? 노예 상인들이 직접 들어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마적들이 국경선 근처 마을에 쳐들어가 사람을 잡아 오는 겁니다.”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은 그걸 그냥 내버려 두는 거야?”
“모두 말을 타고 움직이는 놈들이라 빠르기도 한 데다 인원이 많고 싸움마저 능해서 병자호란 이후로 머릿수만 겨우 채우고 보급도 제대로 안 되는 북방 병사로는 막는 것이 역부족이지요.”
“끄으응.”
뜻밖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도현은 얼굴을 와락 구긴 채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점소이를 봤다.
“그런데 넌 어떻게 조선인 노예들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아무리 여러 가지 소문을 들을 수 있는 객점에서 일한다지만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상세히 알고 있는 게 의아했던 것이다.
질문을 받은 점소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조선인 노예 출신이거든요.”
“……그렇구나. 이건 이야기값이다.”
잠시 아무런 말도 못 하던 도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점소이에게 줬다.
“고맙습니다, 나리.”
꾸벅 허리를 숙인 점소이가 동전을 받고 물러나자 도현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백성들이 여전히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데 명색이 왕자라는 놈이 그런 것도 모르고 시시덕거렸다니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군.”
“마마…….”
한참 괴로워하던 도현은 이내 뭔가를 결심했는지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잇새로 말했다.
“모르고 있었다면 몰라도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또 무슨 사고를 치는 것이 아닌지 칠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당장 저 마 대인이라는 놈에 대해서 하나도 빼놓지 말고 알아 오고 장 총관한테 말해서 새로 만든 호위대를 준비시켜 놓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분노에 찬 도현의 모습에 칠현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노예 시장에서 큰손으로 통하는 마부대였기에 정보를 알아 오는 건 아주 쉬워서 몇 시간 되지 않아 봉황상단 본단에 있던 도현은 보고서를 읽을 수 있었다.
“원래는 노예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매상이었는데 병자호란 때 청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대량으로 잡힌 포로들을 거래하면서 큰손이 됐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마마.”
장 총관의 대답에 도현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절대 그냥 놔둬서는 안 될 놈이군.”
“맞습니다. 하지만 거칠기로 유명한 노예 상인인 만큼 조심하셔야 됩니다.”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것보다 호위대는 준비 다 끝났어?”
“예.”
“좋아. 그럼 오늘 밤 놈이 노예를 가둬 놓은 창고를 칠 거니까 그렇게 알고 밥 든든히 먹이고 미리 잠도 재워 놔.”
“그렇게나 빨리요?”
깜짝 놀란 장 총관이 되묻자 도현은 눈을 서늘하게 번득이며 입을 열었다.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 내야지. 그리고 그런 악독한 놈이 같은 하늘 아래 나와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어.”
도현의 결심이 확고했고 무엇보다 노예 출신인 장 총관도 조선인들의 고혈을 뽑아 먹고 사는 마부대가 절대 용서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마마, 저기가 마부대가 노예를 가둬 두는 곳입니다.”
뛰어난 무예 실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호위대 대장에 임명된 박영식의 말에 검은색 야행복을 입은 도현은 고개를 들어 정면에 있는 커다란 창고 건물을 쳐다봤다.
창고는 장정 백 명을 가둬도 될 만큼 아주 컸는데 마부대의 개인 사병으로 보이는 사내 십여 명이 횃불을 피우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소란이 일면 포청에서 출동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놈들을 제거한다. 알겠나?”
“옛.”
같은 야행복을 입은 호위대 대원 스무 명이 머리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하자 도현은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가자.”
지시가 떨어지자 대원들은 발소리를 죽인 채 창고로 접근했고 도현도 함께 움직였다.
이십 보 앞까지 다가간 도현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눈짓을 하자 뒤에 있던 대원 두 명이 품속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 들더니 집어 던졌다.
쉬이익!
푹!
“커헉.”
“큭.”
단검에 심장과 목이 찔린 사병 두 명은 낮게 심음을 내뱉으면서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와 동시에 은신해 있던 도현과 호위대 대원들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웬 놈들이냐!”
“너희들을 처단하러 온 저승사자다!”
느닷없이 나타난 인영들을 보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크게 소리치자 선두에 선 도현은 냉소와 함께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이런.”
얼굴을 일그러뜨린 우두머리는 황급히 검을 들어 올려 방어했다.
채앵!
쇳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치고, 달려오는 가속도가 그대로 실린 도현의 검격에 밀려 상대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도현은 상대를 따라가면서 검을 있는 힘껏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하압!”
“크아악.”
어깻죽지에서 반대편 옆구리까지 그대로 베인 우두머리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는 피를 뿌리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사이 나머지 적은 박영식과 대원들이 모조리 다 처리했다.
다들 노예 생활을 하다가 봉황상단이 구해 준 이들이라 복수라도 하듯 사병들을 하나도 살려 주지 않고 다 죽여 버렸다.
“다 처리했습니다.”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창고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열어.”
“예.”
도현의 말에 대원 중 한 명이 죽은 사병들의 몸을 뒤져 찾아낸 열쇠를 구멍에 끼웠다.
철컥!
자물쇠가 풀리자 만약을 대비해 박영식과 대원 두 명이 근처에 있던 횃불을 들고 와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도 피가 묻은 검을 들고 바로 뒤를 따랐다.
탈출을 막기 위한 듯 창문이 하나도 없어 창고 안은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횃불에 어둠이 밝혀지고 내부가 드러나자 도현은 낮은 침음성과 함께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넓은 창고가 비좁게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팔다리가 묶인 채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앉아 있고 용변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악취가 코를 찔렀다.
기본적인 인권이 지켜지지 않은 건 물론이고 이건 개나 닭보다 못한 취급이었다.
특히나 사람들 사이에 아직 어린 아이들까지 끼여 있는 걸 본 도현은 마부대를 향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을 이렇게 취급하다니,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조, 조선 사람이십니까?”
앞쪽에 있던 중년인이 도현의 말을 듣고 더듬거리며 묻자 옆에 있던 박영식이 대신 입을 열었다.
“조선의 둘째 왕자님인 봉림대군이시다. 말을 가려서 해라!”
“헉!”
“와, 왕자님이시라니.”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은 사람들은 이내 마지막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아주 간절한 얼굴로 그에게 매달렸다.
“마마,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모두 조용! 그대들을 구하러 왔으니 다들 안심해라.”
“정말이십니까?”
“그래. 박 대장.”
“예, 마마.”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게 사람들을 어서 풀어 주게.”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박영식이 눈짓하자 주위에 있던 대원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단검으로 포박을 끊어 줬다.
“감사합니다.”
“흑흑, 이제 살았어.”
풀려난 사람들은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한데 손을 모아 감사 인사를 했고, 연신 허리를 꾸벅이는 통에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러자 박영식이 얼른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올 수 있으니 모두 조용하시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예상보다 인원이 더 많은데요.”
“어쩔 수 없지. 아까 보니까 창고 옆에 노예를 옮기는 데 쓰는 마차가 여러 대 있던데 그걸 이용하자고.”
도현의 말에 박영식은 머리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옛.”
그러고 나서 도현은 사람들 앞에 한발 나서서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데리고 나갈 텐데,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도록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될 것이오.”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서로 숨을 죽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입도 벙끗하지 않겠습니다.”
“자, 둘씩 짝지어서 차례로 움직이시오.”
도현의 명을 받은 대원들은 창고 문을 열고 안에 있던 사람들을 신속하게 마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쇠창살이 쳐져 있고 퀴퀴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딱히 별다른 방도가 없는지라 일단은 급한 대로 마차에 사람들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좁아서 좀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으시오.”
“절대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됩니다.”
대원들이 거듭해서 강조하자 사람들도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마차가 일곱 대나 됐지만 워낙 인원이 많다 보니 정원이 넘어 빽빽하게 채워 넣은 탓에 숨이 막힐 정도로 비좁았지만 사람들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준비 다 됐나?”
“예.”
“좋아. 그럼 출발하지.”
도현이 말에 올라타자 대원들도 그 뒤를 따라 마차 주위를 둘러싸는 모양의 대형을 만들어 움직였다.
덜거덕! 덜거덕!
어둠이 내려앉은 밤거리에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무거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퉁불퉁한 길을 이동할 때마다 마차가 흔들거리자 그중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 칭얼거리며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엄마아…….”
“쉬잇. 얌전히 있어야 해. 알았지?”
밤늦은 시각이라 통행인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도현과 대원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한편 봉황상단 본단 정문에는 장 총관이 초조한 얼굴로 연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꽤 많이 흘렀는데……. 끄응.”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아닐까요?”
등燈을 손에 들고 함께 나와 있던 직원의 이야기에 장 총관은 정색하며 말했다.
“떽! 대군마마가 어떤 분인데, 실패하실 리가 없어.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마마가 오시는지 주위나 잘 살펴.”
“……예.”
노기 어린 장 총관의 질책에 직원은 찔끔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얼마쯤 더 시간이 흘렀을까, 직원이 눈을 크게 뜨며 길 저편을 가리켰다.
“초, 총관님! 저것 좀 보세요.”
“뭐? 아, 드디어 오셨구나!”
어스름한 횃불 아래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있는 도현의 모습을 보자마자 장 총관은 화색을 띠며 직원을 재촉했다.
“뭣하느냐! 얼른 문을 열지 않고!”
“예에!”
대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히는 것과 동시에 본단 앞에 도착한 도현은 장 총관을 향해 인사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말했다.
“이 마차들을 빨리 안으로 들여보내야 하네.”
“알겠습니다. 어서어서 들어오시게!”
아직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던 상단의 직원들이 모두 나와 마차와 대원들을 이끌었다.
도현은 마지막 마차까지 다 들여보낸 것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주위에 보는 눈이 없는지 고개를 돌려 휙 둘러보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끼이익. 쿵!
“고생하셨습니다.”
말에서 내린 도현은 옆으로 다가온 장 총관의 말에 살짝 손을 들어 보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창고가 털린 걸 알면 놈들이 추적을 해 올 테니까 직원들을 내보내 여기로 온 흔적을 지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잠시 뒤 장 총관은 직원 다섯 명에게 빗자루를 들려 밖으로 내보내 길바닥에 남은 마차 바퀴 자국을 모두 지우도록 했다.
그사이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나눠 주는 주먹밥과 물로 허기를 달랜 뒤 미리 준비해 놓은 숙소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박 대장.”
“말씀하십시오.”
“피곤하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호위대가 돌아가면서 본단을 지키도록 해.”
“예.”
박영식이 허리를 숙이면서 대답할 때 사람들을 숙소로 들여보낸 장 총관이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데려오셨군요.”
“가 보니까 그 큰 창고가 비좁아 보일 정도로 조선인들을 많이 가둬 두고 있더군.”
사람들이 갇혀 있던 창고의 열악한 환경을 다시 떠올린 도현은 얼굴에 노기가 잔뜩 어렸다.
자신도 노예 출신이었기에 오늘 구출된 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을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장 총관은 도현의 반응을 이해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단으로 쓰고 있는 장원이 넓기는 하지만 백 명이 넘는 인원을 오래 숨겨 두기는 어려울 텐데 어쩌지요?”
그 말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사람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지. 잠잠해질 때까지 여기 숨겨 둘 수밖에.”
“그도 그렇지요. 어쨌든 저도 최대한 힘써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장 총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도현은 칠현과 함께 관저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새로 들인 애첩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늦잠을 자던 마부대는 급보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왔다가 텅텅 빈 창고를 보고 아연실색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마부대가 소리쳐 묻자 맨 처음 소식을 전한 부하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다가와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노예들을 시장으로 호송하려고 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제가 안을 살펴봤을 땐 이 상태였습니다.”
“창고를 지키고 있던 놈들은?”
“전부 단칼에 당한 것 같습니다. 시체는 뒤편에 숨겨져 있었고요.”
“제기랄, 대체 어떤 놈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머지 마부대의 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당장 애들 풀어서 노예들을 찾아! 밤이라 성문이 닫혀 있어서 아직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거야.”
“예, 예!”
노예들을 빼돌린 범인이 눈앞에 있다면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것 같은 마부대의 기세에 부하들은 서둘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잔뜩 독이 오른 마부대의 부하들은 저잣거리를 들쑤시고 다니며 노예들의 행방을 찾았지만 밤사이 장 총관이 흔적을 말끔하게 지웠기에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강의를 빼먹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관저로 돌아온 것 때문에 아침부터 형님인 소현세자에게 불려 가 한바탕 야단을 들은 도현이 지친 기색으로 나오자 칠현이 옆에 바짝 다가서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장 총관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마부대가 어제 구출한 사람들을 찾느라고 온 저잣거리를 다 뒤지고 있답니다.”
“꼬리가 잡힌 건 아니지?”
“예.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하지만 이렇게 찾아다니다 보면 결국 우리가 한 일이라는 걸 알아내지 않겠습니까.”
걱정이 가득한 칠현과 달리 의외로 도현은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기 전에 먼저 놈을 제거해 버리면 돼.”
“……설마!”
“박 대장한테 말해서 오늘 밤 마부대의 목을 자르러 갈 테니까 준비하라고 해.”
도현이 뭘 하려는지 눈치챈 칠현은 기겁하며 그를 말렸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걱정 마. 내가 노예 상인 하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그러면 직접 가지 마시고 호위대에 일을 맡기세요.”
그러자 도현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아니. 그놈은 꼭 내 손으로 죗값을 받아 내고 말겠어.”
“마마…….”
이를 부드득 갈면서 살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은 더 만류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노예장사로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마부대는 황도에서도 고관대작이나 부자들만 산다는 구역에 커다란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삼 층 전각만 다섯 개에 이것저것 딸린 부속 건물까지 치면 열다섯 채가 넘고 앞뒤로 작은 연못과 정원까지 있었다.
마침 그믐이라 달빛마저 어두운 밤 이런 마부대의 저택에 은밀히 접근하는 일단의 인영이 있었다.
바로 도현과 호위대 대원들이었다.
신분을 감추고 몰래 기습을 하기 위해서 검은색 야행복에 눈만 드러낸 두건까지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사사사삭.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골목 사이로 빠르게 움직인 도현과 대원들은 마부대의 장원 앞에 도착해 잠시 멈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장원을 쓸어 본 도현이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그동안 불쌍한 조선인들의 고혈을 빨아 혼자 떵떵거리며 살고 있군. 모두 잘 들어. 최우선 목표는 마부대니까 절대 놓치지 마. 그리고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놈들이니 손 속에 인정사정 두지 말고 눈에 띄는 것들은 다 죽여서 지금까지 고통받은 백성들의 원한을 갚아 주는 거야. 알겠지?”
“옛.”
낮게 대답하는 대원들의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했다.
“가자!”
도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원들은 앞으로 달려가 발로 벽을 짚고 도약해 반 장이 훌쩍 넘는 돌담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타탁! 휘리릭.
바닥에 착지한 대원들은 두 패로 나뉘어 움직였다. 하나는 마부대를 척살하기 위해 내원으로 직접 들어갔고, 나머지는 지붕 위로 올라가 활로 지원을 해 주었다.
슈슉!
“큭.”
“으윽.”
내원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던 사병 두 명은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온 화살에 맞아 그대로 절명했다.
그렇게 화살을 쏴서 진입로를 열어 준 덕분에 도현과 대원들은 싸움을 벌이지 않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가끔씩 저격이 힘든 상황도 있었는데 그때는 단검을 날리거나 직접 검을 휘둘러 처리했다.
“저깁니다.”
순식간에 내원 깊숙이 침투한 도현은 어두운 건물 그림자 안에 숨은 박영식이 한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봤다.
거기에는 다른 건물보다 유달리 화려하고 높은 전각이 한 채 있었다. 사병 여섯 명이 화톳불을 피워 놓고 경비를 서고 있는 걸 볼 때 마부대의 거처가 확실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도현이 손짓하자 대원들이 등에 둘러메고 있던 활을 꺼내서는 상대를 겨냥했다.
도현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한팔 거들었는데 시위를 당긴 활을 몸에 딱 붙여 고정하고는 가운데 있는 적을 노렸다.
컴컴한 밤이었지만 전각 주위에 불을 피워 놔서 목표를 조준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지금이야.”
슈슉! 쉬이익.
도현과 대원들이 일제히 활을 쏘자 일직선으로 날아간 화살은 무방비 상태로 있던 적들의 몸에 정확히 명중했다.
“컥.”
“아악.”
대부분 화살을 맞고 쓰러졌지만 몇몇이 치명상을 피하고 서 있자 도현과 대원들은 곧바로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치, 침입자다!”
“죽어라!”
슈칵!
“끄헉.”
“하얍!”
채챙! 챙!
“커허억.”
어깨에 화살을 맞고 비틀거리며 고함을 지르려던 적은 단번에 거리를 좁혀 있는 힘껏 휘두른 도현의 검에 머리가 잘렸다.
나머지도 대원들의 공격에 숨이 끊어졌고 도현은 주위에 더 이상 살아 있는 적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전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젊고 예쁜 애첩들을 모아 놓고 마부대가 할렘처럼 쓰는 곳이었기에 실내에는 경비가 몇 명 없었다.
무법자처럼 안을 누비면서 도현과 대원들은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젖혀 내부를 수색했다.
벌컥!
“꺄아아악!”
검을 들고 흉포한 기세를 풍기며 방에 들어와 안을 마구 뒤지자 속살이 다 비칠 정도로 얇은 옷을 입고 있던 애첩과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두려움에 떨었다.
“시끄럽게 하면 목을 베어 버릴 테다!”
“사, 살려 주세요.”
박영식이 일갈하자 여자들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마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면 살려 주마.”
돈을 보고 왔거나 아니면 강제로 끌려와 첩 노릇을 하고 있었기에 애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여자들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마부대의 위치를 알려 줬다.
“마 대인은 삼 층에 있어요.”
“맞아요.”
박영식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 있던 도현이 앞으로 나와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거짓말이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지, 진짜예요.”
믿어 달라는 듯 상대가 손을 싹싹 비벼 대자 도현은 박영식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약간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히 돌아다니다가 휩쓸려서 목숨을 잃지 말고 끝날 때까지 여기에 얌전히 있어.”
“예.”
드르르륵, 탁!
“삼 층이다. 가자.”
미닫이문을 닫고 나온 도현은 대원들과 함께 곧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한편 한꺼번에 노예를 백 명이나 잃어버린 충격에 잠이 안 와 독한 화주 반병을 먹고 침대에 잠들어 있던 마부대는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함께 있던 애란이라는 애첩이 몇 번이나 몸을 흔들어 깨워서야 겨우 눈을 떴다.
“으음, 왜 그래.”
“어서 일어나 보세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끄응.”
마부대는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안고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물 좀 줘.”
“여기요.”
애란이 대접에 떠다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마부대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지 꺼억 트림을 내뱉었다.
야밤에 대체 무슨 일이냐며 불평하려는 찰나 아래층에서 병장기가 부딪는 금속음과 함께 신음 소리, 거친 발소리가 귀에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때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마부대는 침대에서 허겁지겁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이런 씨팔!”
컴컴한 어둠 아래 바깥을 지키고 있던 부하들은 피 구덩이 속에 쓰러져 있고, 검은 야행복을 입은 무리가 검을 들고 서성였다.
아직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간신히 복도를 막고 있는 것 같지만 뚫리는 건 시간문제일 터, 몽롱했던 정신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확 깨는 걸 느끼며 마부대는 당황한 손길로 옷가지를 찾았다.
“뭔데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시끄러워! 제길, 시간이 없어!”
옷을 갈아입을 시간조차도 모자란 듯 마부대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겉옷 하나만 걸치고 허리띠를 졸라맨 후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흥!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놓길 잘했지.”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상관 않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먼지로 가득한 침대 밑에 손을 뻗어 더듬거리던 마부대는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 품에 안았다.
이런저런 나쁜 일에 손을 대고 있는 만큼 보험 삼아 준비해 두었던 것인데 그 안에는 언제 어디서나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금원보와 값비싼 보석류가 들어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언제든 재기할 수 있어.”
마부대가 그러는 사이, 눈치 빠른 애란도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어떻게 해요. 설마 절 버리고 가시는 건 아니죠?”
앙칼진 목소리로 애란이 마부대를 붙잡자 그는 쳇 혀를 차고 손을 뿌리쳤다.
“저리 가!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널 왜 데리고 가?”
“나쁜 자식.”
애란이 이를 갈면서 손바닥을 쳐들자 마부대는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잡고는 뒤로 확 밀쳐 냈다.
“꺄악!”
“이런 쌍년이 오냐오냐해 줬더니 어딜 기어올라.”
콰앙!
마부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문짝이 요란하게 부서지면서 도현과 부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쥐새끼처럼 어디 숨어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도현을 중심으로 대원들이 물샐틈없이 포위하자 마부대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누, 누구냐?”
말을 더듬으며 마부대가 묻자 도현은 피식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염라대왕의 지시를 받고 지옥에서 네놈을 벌하러 온 저승사자다!”
“이런 쌍!”
도현의 말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마부대는 재빨리 품속에 숨겨 놓은 단검을 꺼내 던졌다.
쉬익!
다섯 보나 될까, 아무리 도현이라고 해도 미처 피할 틈이 없을 정도로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피하십시오!”
상대가 단검을 날린 걸 보고 뒤따르던 박영식이 깜짝 놀라 소리를 치는 순간 도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츄악!
가까스로 단검을 피해 내기는 했지만 왼쪽 어깻죽지를 살짝 스쳐 옷이 찢어지고 시뻘건 피가 배어 나왔다.
“큭.”
마치 뜨거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느낌에 이맛살을 찌푸린 도현은 튕기듯 앞으로 몸을 날려 마부대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해 버렸다.
빠각!
“커헉!”
뼈가 부서진 듯한 끔찍한 소리와 함께 코피가 터진 마부대가 뒷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도현은 그걸로 부족했는지 쫓아가서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이 자식이!”
퍽! 퍽!
“으윽.”
“어디 더 발악을 해 봐!”
그러자 박영식이 다가와 양팔을 붙잡으며 흥분한 도현을 만류했다.
“이런 버러지보다 못한 놈은 저희가 처리할 테니 참으십시오.”
“후우.”
길게 숨을 몰아쉬며 도현이 발길질을 멈추자 박영식은 우선 도현의 상처 부위부터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그냥 살짝 스친 거야.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박영식이 뭐라고 말하려는 걸 손을 들어서 제지한 도현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는 마부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아프냐?”
“사, 살려 주시오.”
“네놈 때문에 노예로 팔려 짐승보다 못한 생활을 했던 조선인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잘못했소.”
“그럼 죗값을 받아야지.”
도현의 말에 여기저기 피멍이 들고 부어 엉망이 된 마부대는 엉금엉금 필사적으로 기어 와 그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다시는 노예장사를 하지 않을 테니 한 번만 봐주십시오. 그러면 저기 있는 금원보와 보석을 다 드리겠습니다.”
한쪽에 있는 나무 상자를 힐끗 쳐다본 도현은 냉소를 지었다.
“자기는 이토록 죽기 싫어하면서 노예를 잡기 위해 마적들과 결탁해서 무고한 조선 백성들이 사는 마을을 습격해 온갖 추악한 일을 다 벌이다니, 정말 가증스럽군. 부족하지만 그 죄는 네 목숨으로 갚아라!”
“아, 안 돼!”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마부대는 등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도현이 검을 찌르는 것이 더 빨랐다.
“잘 가라!”
푸욱!
“크아악!”
섬뜩한 소리를 내며 살을 파고든 검 끝은 정확히 심장을 관통해 가슴으로 튀어나왔다.
“이럴 수는 없어…….”
몸이 꿰뚫린 마부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힘이 빠지며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냉혹한 얼굴로 검을 뽑아낸 도현은 슬쩍 고개를 돌려 한쪽 구석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줬다.
“제, 제발…….”
자신도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여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가 뭐에 걸렸는지 넘어지자 도현은 검에 묻은 피를 죽은 마부대의 옷에 닦으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이 뭐지?”
“애, 애란이에요.”
“오늘 밤 여기서 본 건 다 잊고 누구한테든 입도 벙긋하지 마. 알았나?”
“예.”
“만약 내 말을 어긴다면 그때는 이놈하고 같은 처지가 될 거야.”
도현이 턱 끝으로 마부대를 가리키자 애란은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하며 세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게요.”
“좋아. 한번 믿어 보지.”
검을 집어넣은 도현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자 박영식은 옆에 있는 대원에게 보석이 든 나무상자를 챙기게 하고는 황급히 뒤를 따랐다.
목표를 달성하고 덤으로 비상금까지 두둑이 챙긴 도현과 대원들은 신속하게 장원을 빠져나갔고 뒤늦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포졸들이 도착했지만 이미 상황이 다 끝난 후였다.
고관대작과 부자 들이 사는 구역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라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조사에 나섰던 포청은 피해자가 노예 상인이고 별다른 진척이 없자 이내 범죄단체 간의 세력 싸움으로 흐지부지 수사를 마무리 지어 버렸다.
평소 마부대는 수익을 부하들에게 배분하지 않고 독식하며 여자 문제도 아주 복잡해 장성한 자식만 다섯 명이 넘는 폭군형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죽자 복수에 나서기보다 밑에 있던 간부들은 서로 부하를 모아 주도권 싸움을 벌였고, 자식들도 재산을 한 푼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다퉜다.
이런 상황이라 자연스럽게 마부대를 죽인 범인을 찾는 일은 관심에서 멀어졌다.
포청과 노예 거래 조직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도현은 장 총관의 보고를 받고 빙긋 미소 지었다.
“한동안 바짝 엎드려 있어야 될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 일이 풀리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괜히 꼬리 잡혀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는 게 상책입니다.”
장 총관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언제까지 구출한 사람들을 본단에 숨겨 둘 수는 없는데 걱정입니다.”
“아무래도 심양에 있는 건 위험하겠지?”
“다른 이들처럼 돈을 주고 노예 문서를 넘겨받았다면 상단에서 일을 시키거나 당당하게 조선으로 돌려보낼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라서…….”
“그럼 국경을 넘지 않고 상단이 소유한 배를 이용해서 몰래 귀국시키는 건 어때?”
이야기를 듣자마자 장 총관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능은 하겠지만 나중에 청국에서 도망쳐 온 것이 발각되면 다시 노예 신세가 될 겁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백성들이 타국에 노예로 끌려간 것도 한심한데 목숨 걸고 탈출해 오면 감싸안아 주지는 못할망정 청국의 눈치를 본다고 다시 잡아다 바치는 조정의 작태가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웠다.
“이것 참, 구해는 놨는데 안전하게 데려다 놓을 장소가 없다니.”
딱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도현이 답답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서도 장 총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단으로 쓰고 있는 장원이 넓다고 해도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몰래 숨겨 놓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특히나 물품을 거래하기 위해 많은 외부인이 들락거리는 걸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은신처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렇다고 돈을 쥐여 주고 알아서 살라고 그냥 내보낼 수도 없는 것이, 그건 애써 구한 사람들을 다시 사지死地로 내모는 짓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머리가 아파진 도현은 술 대신 가져다 놓은 차를 마시며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뭔가 해결책이 생각났는지 눈을 반짝이면서 머리를 들었다.
“장 총관.”
“말씀하십시오.”
“사람들을 심양성에서 빼내 배에 태우는 것까지는 가능하지?”
“예.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냥 조선으로 보내는 건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습니다.”
“조선이 아니라 웅도로 가서 살게 하는 건 어때?”
“……지금 웅도라고 하셨습니까?”
뜻밖의 말에 장 총관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도현은 허리를 죽 펴고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라면 청국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잖아. 마침 웅도를 무역 거점으로 키우기 위해서 인력이 필요했는데 그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고 말이야. 이게 바로 일석이조 아니겠어?”
잠시 득실을 따져 본 장 총관은 굳어 있던 얼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본인들 의사가 중요하니까 일단 사람들한테 상황을 설명해 주고 선택을 하게 해. 절대 강제적으로 말하지 말고. 만약 웅도로 가지 않고 그냥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면 약간의 노잣돈을 주겠다는 이야기도 미리 해 주고.”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사람들을 다 웅도로 데려간다면 마부대가 했던 것처럼 또 한 번 자유를 구속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도현은 그들에게 중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그런 도현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장 총관은 새삼 그를 섬기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을 했다.
“알겠습니다. 분명 대부분 마마의 제안을 따를 겁니다.”
“그러면 나야 좋지.”
도현이 관저로 돌아가자 장 총관은 바로 사람들을 숨겨 놓은 안채로 가서 오늘 결정된 이야기를 해 줬다.
장 총관의 예상대로 마적의 습격에 생활 기반인 마을이 다 불탔고, 그나마 어렵게 돌아온 사람들마저도 관청에 잡혀 청국으로 압송되는 걸 봤기에 열 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 웅도로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결정이 내려지자 장 총관은 신속하게 움직여 일단 사람들을 모두 노예와 상단 점원으로 위장시킨 뒤 영구로 가는 상행에 포함시켰다.
영구에 도착하면 배를 타고 웅도로 갔다가 거기서 조선에 돌아가겠다고 한 인원은 다시 서해를 건너 고향에 보내 줄 계획이었다.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봉황상단까지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지만 한꺼번에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심양성 밖으로 빼내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드넓은 만주 지역을 제패하고 이제 중원까지 넘보는 제국의 수도답게 심양성 문은 크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했다.
네모반듯한 돌들을 빈틈없이 쌓아 올린 벽은 삼 장이 넘고 성문은 짐을 가득 실은 마차 두 대가 한꺼번에 지나가도 여유가 있을 만큼 넓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성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각종 마차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어서 앞은 매우 혼잡했다.
그중엔 봉황상단의 마차와 직원들도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인파에 섞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번 상행의 책임자인 서상수 행수가 장 총관을 돌아보고 말했다.
“마침 장이 열리는 날이니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린 거겠지. 우리한텐 더 잘된 일 아닌가. 이 틈에 섞여 있으면 눈에 띄지 않고 쉽게 성을 빠져나갈 수 있어. 검문도 허술해질 테고.”
“그렇군요.”
왜 하필이면 오늘로 결행 일자를 정했는지 이해했다는 듯 서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을 더 기다린 후에 마침내 앞에서 긴 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하게 앞으로 조금씩 움직이다가 드디어 봉황상단의 차례가 돌아오자 검문을 맡은 병사가 서상수를 보고 알은척을 했다.
“봉황상단인가? 이번엔 어디로 상행을 나가나?”
“영구로 갑니다.”
“헤에, 바다 쪽으로 가는군. 부럽네.”
상단 일을 하다 보면 성 바깥으로 자주 나가기 때문에 성문 경비를 맡은 병사들하고는 대체로 안면이 있는 편이다.
그에게 말을 건 자는 일반 병사보다는 조금 높은 위치인 십인장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 크게 권력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실무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서상수가 몇 번 객잔에 데려가 술을 사고 소소한 용돈을 쥐여 주는 식으로 접대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외가가 어촌 마을에 살고 있어서 말이야. 막 잡아 올린 생선을 그대로 회를 쳐서 먹으면……. 크! 맛이 죽인다네.”
쩝쩝 입맛을 다시며 아무래도 상관없는 잡담을 중얼거리던 십인장은 건성으로 마차 짐칸을 가리켰다.
“안에는 뭐가 있나?”
“담비 가죽이랑 녹용, 그 외에 잡다한 것들이죠.”
“한번 열어 보게.”
그러자 행수인 서상수는 약간 머뭇거리는 손짓으로 화물에 덮어 씌워 놓은 천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짐칸에는 겹겹이 쌓인 가죽들이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흐음.”
검은색으로 반질거리는 담비 가죽을 검집으로 한번 쑤셔 보고, 녹용이 담긴 나무 상자까지 열어서 안을 확인한 십인장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별건 없군.”
“헤헤.”
속으로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십인장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었다.
“반대쪽에 있는 저 마차도 한번 보지.”
“네에?”
“왜, 싫은가?”
“아, 아닙니다.”
평상시엔 일 처리를 설렁설렁하던 사람이 갑자기 꼼꼼하게 살펴보겠다고 나오니 서상수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오늘은 왠지 평소랑 다르시군요, 나리.”
“응? 그런가.”
십인장은 서상수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실제로는 머릿속으로 간밤에 수문장한테 깨진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간 몇 번 뇌물을 받은 일이 들통 나서 한바탕 쓴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금액은 아니어서 훈계 정도로 끝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 조금은 성실하게 일하는 척이라도 해야 될 것 아닌가.
“뭣하고 있어? 얼른 열어 보게.”
“예에.”
십인장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서상수가 천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짐마차들을 하나하나 살펴본 십인장은 뒤편에 쇠창살이 박힌 마차에 노예들이 잔뜩 타고 있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허어, 가죽이랑 녹용뿐이라더니 또 다른 특별 화물도 싣고 있었군. 이것들은 다 뭔가?”
가까이 가자 안에서 풍겨 나오는 고약한 악취 때문에 코를 찡그리며 뒤로 물러선 십인장이 서상수를 보고 물었다.
“이 노예들도 영구에 갖다 팔 상품입니다. 심양은 워낙 노예들이 넘쳐 나서 시세가 땅을 치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을 판이라.”
“하긴 그렇지.”
전쟁 때문에 대규모로 포로들이 유입되어 지금 심양에서는 그야말로 걸어가다 발에 차이는 게 노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로 어제도 전장에서 보내온 명군 포로 수백 명이 성문을 통과했기에 십인장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보시겠습니까?”
“에이, 됐네. 괜히 이라도 옮을라.”
보기만 해도 더럽다는 듯 손사래를 친 십인장은 눈썹을 찡그렸다.
“자네도 고생이구만.”
“하하, 장산데 고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서상수가 싹싹하게 굴며 슬쩍 눈치를 보자 십인장은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듯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괜히 딴청을 부렸다.
아무래도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속담처럼 또 평소 습관이 도진 모양이었다.
“헤헤. 나리, 그러고 보니 낼모레면 아드님 생일이라고 하셨지요. 이런, 제가 깜박하고 아직 선물을 안 드렸습니다그려.”
그러면서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슬쩍 돈이 든 가죽 주머니를 찔러주자, 금방 받아 들고서는 묵직한 감촉에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큼큼, 자네 기억력도 좋구만.”
“그럼요. 저랑 나리가 어디 보통 사이입니까.”
“그렇지.”
서상수가 의미심장하게 그리 말하자 십인장 역시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점잔을 빼듯이 뒤로 물러섰다.
“갈 길이 바쁠 텐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아유, 아닙니다요.”
“이봐! 통과시켜.”
십인장이 손을 휘휘 흔들며 소리치자 경비를 맡고 있던 병사가 창을 위로 세워 길을 터 줬다.
“감사합니다, 나리. 나중에 돌아올 때 또 한 번 인사차 들릅지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서상수는 냉큼 장 총관이 있는 마차에 올라탄 뒤 신호를 보내 상단을 전진시켰다.
“검문이 통과됐나 봅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초조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검문을 받는다고 잠시 멈췄던 상단 마차들이 다시 움직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제 한시름 놨군.”
“성문도 무사히 통과했으니까 나머지는 장 총관한테 맡기시고 이제 그만 관저로 돌아가시죠.”
칠현의 말에 도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그냥 하루 빼먹으면 안 될까?”
“그러다 세자 저하께 또 야단 들으시려고요. 동궁전 내관한테 매일 마마께서 강의를 제대로 듣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니까요.”
“내가 무슨 수능을 앞둔 수험생도 아니고 이게 뭔 꼴이야.”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냐.”
가끔씩 지금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종종 했기에 칠현은 더 묻지 않고 다시 재촉했다.
“지금 안 가시면 늦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만 보채.”
살짝 짜증을 낸 도현은 이제 마차 행렬이 성문을 완전히 빠져나간 걸 보고는 타고 있는 말 옆구리를 발로 차며 관저로 돌아갔다.
“이랴!”
따각따각!
그렇게 심양성을 빠져나간 상단 행렬은 계획대로 닷새 뒤 영구항에 도착했고 거기서 화물선으로 옮겨 타고 웅도까지 무사히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