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토벌 2
도현은 임경업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근처를 둘러보고 싶다며 순찰 함대에 동승했다.
“바람이 아주 시원하군.”
“그렇지요.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구름 한 점 없이 날씨가 참 좋습니다.”
함교 난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던 도현은 함장인 이혁민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이혁민은 비교적 낮은 종육품 초도현감으로, 판옥선 다섯 척을 지휘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럼 저기 보이는 섬까지만 둘러보고 가세.”
“예, 마마.”
판옥선들이 작은 돌섬 옆을 막 돌아 나가는 순간 수평선 너머에서 정체불명의 배 두 척이 불쑥 나타났다.
“우현에 배가 보입니다!”
돛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견시수의 외침에 도현과 이혁민은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경고성대로 배가 보였는데 돛대가 두 개 나란히 달려 있는 것으로 볼 때 크기가 꽤 큰 걸 알 수 있었다.
“어느 나라 선박이지?”
“글쎄요. 거리가 너무 멀어서 확인이 어렵습니다.”
“쩝. 이럴 때는 망원경이 있으면 편한데 아쉽군.”
“예?”
입맛을 다시면서 무심코 꺼낸 말에 이혁민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살짝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어떻게 할까요?”
멀리 배를 바라보며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해적일지도 모르니까 일단 확인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이혁민이 부장한테 손짓을 하자 판옥선들은 빠르게 속력을 올려 정체불명의 배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둥! 둥! 둥!
“으싸! 으싸!”
간격이 짧아진 북소리에 맞춰 아래층에 있던 격군들이 노를 젓는 속도를 올리자 판옥선은 거센 물결을 헤치며 앞으로 죽죽 나아갔다.
그러자 이쪽을 발견한 상대는 잠시 우왕좌왕하는 것 같더니 배를 돌려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놈들이 도망치는데요?”
“더 수상하군. 정지 신호를 보내고 우리도 속도를 더 높여.”
“예.”
나팔과 깃발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꽁무니를 뺐다.
그런 가운데 양측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어느새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했다.
“이거 아무래도 해적선 같습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이혁민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뭘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지?”
“저길 보십시오. 교역선이라면 홀수선이 잠길 정도로 화물을 싣는 것이 보통인데 앞에 있는 배들은 반대지 않습니까. 그러고 선원들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설명을 듣고 배를 살펴보자 확실히 수상한 것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정선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냥 도망치는 걸 보면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기에 도현은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포격으로 놈들을 멈춰 세우게.”
“옛.”
얼마 뒤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대장선에 탑재되어 있던 화포가 불을 뿜었다.
꽝! 꽝!
슈우우웅! 퍼어엉!
후두두둑.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포탄은 정확히 도주하는 배 앞에 떨어져 하얀 물기둥 두 개를 만들었고 갑판에 서 있던 상대편 선원들은 그대로 물세례를 뒤집어썼다.
“와악!”
“히익.”
선원들은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고 일본 전통 방식으로 이마를 넓게 깐 선장은 한 팔로 뒤쫓아 오는 판옥선들을 가리키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칙쇼! 들켰다. 어서 불화살을 쏴서 놈들의 돛을 태워 버려라.”
도주하던 배들의 정체는 바로 등주 일대를 노략질하러 온 일본 왜구들이었다.
거칠게 살아온 인생답게 왜구들은 바닥에 숨겨 놓은 무기를 꺼내 들며 눈을 번들거렸고 기름 먹인 헝겊이 달린 불화살을 날렸다.
슈슈슉! 슈슉!
“화살이다!”
“피해.”
투투툭!
불화살을 발견한 아군 병사들은 황급히 난간을 빙 둘러서 설치해 놓은 커다란 사각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재빠른 대처 덕분에 전사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선체 여기저기에 불이 붙었다.
“화약에 불이 옮겨 붙으면 끝장이다. 어서 꺼!”
이를 악문 이혁민의 외침에 병사들은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놓은 모래를 뿌려 서둘러 화재를 진압했다.
그러는 한편 갑판 한쪽에서는 일단의 궁사들이 복수에 불타는 눈으로 화살을 빼 들었다.
“적들을 다 쓸어버려라!”
흥분한 도현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며 소리치자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쐈다.
쉬이익! 슈슉! 슉!
“꾸에엑!”
“컥!”
아군과 달리 마땅한 엄폐물이 없었던 상대는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비명을 지르면서 무더기로 쓰러졌다.
“마마, 여긴 위험하니 선창 안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혹시나 눈먼 화살에 다치기라도 할까 봐 이혁민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지만 도현은 함교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들 목숨 걸고 적과 싸우고 있는데 나 혼자만 숨어 있을 수는 없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이 현감은 어서 부하들이나 지휘해!”
“하지만…….”
“뭘 하고 있어!”
도현이 버럭 호통을 치자 머뭇거리던 이혁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옆에 있는 부장에게 시선을 줬다.
“자네가 여기 남아 대군마마를 지켜 드리게.”
“예. 염려 마십시오.”
위험한 함교에 도현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이 못내 불안했지만 한가하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여유가 없었기에 이혁민은 앞으로 가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렇게 양쪽이 서로 화살 공격을 하는 사이에 아군이 해적선을 완전히 따라잡아 이제 서로 멈춰 서서 싸움을 벌였다.
평저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그 자리에서 방향을 틀어 상대에게 측면을 드러낸 판옥선들은 포문을 열고 탑재되어 있는 화포를 발사했다.
“쏴라!”
꽝! 꽝! 꽝!
슈우우웅! 꽈아앙!
삼십 보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발사된 포탄은 정확히 명중해 해적선 곳곳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무쇠로 단단히 만들어진 철환뿐이라면 선체는 부서져도 배에 탄 왜구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았겠지만 판옥선들은 세 발에 하나꼴로 자갈을 화약과 섞어 넣은 일명 조란탄을 발사해 갑판에 있는 적들을 쓸어버렸다.
“크아악!”
“으윽.”
주먹보다 작은 자갈 수십 개가 한꺼번에 쏟아지자 살상 범위 안에 있던 왜구들은 온몸이 피 떡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판옥선들은 상대와의 거리를 삼사십 보 정도 유지한 채 화포와 화살을 써서 철저히 원거리 공격을 가했다.
해적선 두 척을 가운데 두고 동그랗게 주위를 둘러싼 조선 수군은 마치 훈련을 하는 것처럼 상대를 일방적으로 마구 두들겨 댔고 그렇게 일다경 정도 지났을까, 형편없이 부서진 적선에서 항복을 알리는 백기가 올라왔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화포와 화살 세례에 왜구들이 반수 이상 쓰러지고 전투를 독려하던 선장마저 조란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찢겨 죽자 싸울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이다.
“공격 중지!”
백기를 본 도현의 외침에 병사들은 동작을 멈췄지만 언제든 상대가 수상한 짓을 하면 바로 공격을 재개할 수 있게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잠시 뒤 전장을 뒤덮고 있던 뿌연 화약 연기가 바람에 걷히며 여기저기 시체와 부상병들이 널려 있고 완전 엉망이 된 해적선의 모습이 드러나자 그때서야 아군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무기를 위로 치켜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함교에 있던 도현도 주먹을 불끈 쥐며 병사들과 함께 승리의 벅찬 감동을 나눴다.
조선 수군은 이번 전투에서 획득한 포로 마흔 명을 도망치지 못하게 동아줄로 꽁꽁 묶어 선창에 가두고는 너무 심하게 부서져 도저히 쓸 수가 없게 된 해적선에 불을 질러 침몰시키고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배 한 척만 뒤에 끌고 당당하게 귀환길에 올랐다.
시간이 너무 늦어 어쩔 수 없이 바다 위에서 하룻밤을 지낸 도현과 병사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웅도에 도착했다.
이곳에 자리를 잡고 해적과 싸워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기에 도현 일행은 병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와아아! 대군마마 만세!”
“우리의 첫 승리다!”
선착장에까지 나와 두 팔을 하늘 높이 들고 연신 환호성을 외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가슴 깊이 뿌듯함을 느꼈다.
벌 떼같이 몰려든 병사들을 물리치고 잔교를 이용해 배에서 내린 일행은 도현을 필두로 해서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드높은 함성 소리에 도현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걸어가면서 간혹 가다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일행의 끄트머리에는 포로로 잡은 왜구들이 밧줄에 꽁꽁 묶인 모습으로 뒤를 따랐다.
“대군마마!”
낯익은 목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돌리니 임경업 장군이 병사들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왔다.
“대체 이게 무슨…….”
그저 순찰을 나갔다 온다더니 설마 왜구 놈들을 격파하고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의 얼굴엔 당혹스러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아, 장군.”
도현은 미안한 듯 말을 걸었다.
“진작 연락을 했어야 하는데, 이것저것 일이 많아서 미처 신경을 못 썼소. 간밤에 속 좀 썩었겠군.”
금방 돌아올 것처럼 나간 사람이 하룻밤 내내 소식이 없으니 임경업 장군이 얼마나 걱정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아닙니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자신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아랫사람의 고충을 알아주는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선물까지 주렁주렁 달고 오셨으니 이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그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마마의 신분을 생각하셔서 앞으로는 더욱 신중히 행동하셔야 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건 마마 혼자의 일로는 끝나지 않으니까요.”
“알고 있소. 걱정해 줘서 고맙소.”
싱긋 웃은 도현은 임경업 장군의 어깨에 팔을 둘러 툭툭 두드렸다.
“오래간만에 힘을 썼더니 목이 타는군. 장군, 아껴 놓은 비장의 술 같은 게 있으면 좀 내놓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피곤하실 테니 얼른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싱글벙글하는 임경업 장군과 함께 도현은 선착장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이틀 후.
아직 첫 승리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 도현은 모처럼 임경업 장군과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도현이 포로로 잡아 온 왜구들을 상대로 그간 자행해 온 약탈에 대한 심문과 피해 상황의 조사,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놈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과 아군 병력의 재정비 등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많이 쌓여 있어 한가롭게 차를 마실 여유조차 없었던지라 임경업 장군으로서는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 같은 휴식 시간이었다.
그때 급한 발소리와 함께 병사 한 명이 나타나 예를 올리고는 말했다.
“장군! 동쪽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수상한 무리가 발견됐습니다.”
“뭐야?”
임경업 장군이 서둘러 찻잔을 내려놓고 옆에 풀어 놓았던 칼을 움켜쥐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냐?”
“저, 그것이…… 일단 붙잡아 놓긴 했는데 배는 무장이 거의 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상선이고, 지시에도 잘 따라 줘서 위험한 놈들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런가.”
살짝 긴장을 늦춘 그는 의아한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다고 하더냐?”
“예.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지만 일단 대군마마를 불러 달라고 계속 고집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허어…….”
의외의 말에 임경업 장군은 도현을 돌아보았다.
곁에서 아무 말 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도현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군. 장군도 함께 가겠소?”
“예에.”
마치 누군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도현의 모습에 임경업 장군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그와 함께 지휘소를 나와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선착장에는 최대한 화물을 많이 실을 수 있도록 개조된 커다란 상선 스무 척이 정박되어 있고, 그 앞에는 일단의 병사들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장군님께서 오셨다.”
“여봐라, 물러서라!”
임경업 장군과 도현을 알아본 병사들 몇몇이 길을 터 주자 그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대군마마!”
“역시 장 총관이로군.”
넙죽 허리를 구부리는 장 총관에게 도현이 살가운 웃음을 건넸다.
“이맘때쯤이면 슬슬 자네가 돌아올 줄 알았지.”
“역시 총명하십니다, 마마.”
도현과 장 총관이 반갑게 인사하는데 옆에서 뚱하니 서 있던 임경업 장군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대군마마, 이 상인들은?”
“아, 인사하시오. 여기는 장 총관이라고, 심양에 위치한 봉황상단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오.”
“장태범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명성이 자자한 임경업 장군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 총관이 먼저 정중히 허리를 숙이자 임경업은 엉겁결에 인사를 받았다.
“반갑소.”
“봉황상단은 형님과 내가 설립해 은밀히 운영하는 곳이오. 앞으로 교역을 위해 웅도를 들르는 일이 많을 테니 임 장군이 신경을 좀 써 주시오.”
“……!”
도현이 귓속말로 하는 이야기에 깜짝 놀란 임경업은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치켜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직업적 차별을 확연히 두고 있었는데 선비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왕족이 제일 밑바닥에 두고 천대하는 상업에 손을 댔다는 건 이 당시 통념상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있으면서 나오지도 않는 중앙 정부의 지원만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밀무역을 살짝 눈감아 주고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부족한 군비를 충당할 정도로 융통성이 있는 임경업 장군이니까 이 정도에 그쳤지 앞뒤가 꽉 막힌 문관 출신이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며 한바탕 난리를 피웠을 게 틀림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해 주겠소. 그리고 이건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오.”
“……아, 예.”
멍하니 있는 임경업 장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도현은 장 총관을 데리고 언덕 위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걸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도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임경업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으면서 미간을 좁혔다.
“으음, 아무래도 갑자기 해적 토벌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군.”
네모반듯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장 총관과 마주 앉은 도현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쌀은 잘 팔렸나?”
“말도 마십시오. 그사이에 시세가 더 뛰어서 무려 일곱 배나 되는 차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호오! 일곱 배라니 정말 대단하군.”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이익에 도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감하게 수익금을 모두 투자해 쌀을 가져올 생각입니다.”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해상 교역이라는 것이 워낙 도박성이 강한 데다 투자금마저 생각보다 훨씬 커졌기에 도현은 살짝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장 총관은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면서 평소와 달리 과감한 태도를 보였다.
“전쟁이 끝나면 이만한 수익을 올릴 수 없을 겁니다. 기회가 왔을 때 최대한 돈을 벌어야지요.”
“흠…….”
도현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위험부담이 크긴 하지만 장 총관의 말대로 그냥 두 눈 뜨고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운 기회인 것도 사실이다.
몸을 사려서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기왕 벌인 일 크게 한 방을 노릴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이로울까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던 도현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장 총관, 성공시킬 자신은 있나?”
“예, 물론입니다.”
“좋아. 자네 생각대로 한번 밀고 나가 보게.”
“감사합니다, 마마.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장 총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화물이 늘어나는 만큼 해적들이 노릴 가능성이 더욱 커질 텐데, 거기에 대한 대비는 어쩔 셈인가.”
“안 그래도 수익금의 일부를 떼어 심양에서 조선 출신 노예 마흔 명을 사들였습니다. 몸이 건장하고 병사 출신이라 무기를 제법 다룰 줄 알아, 호위 병력으로 이용하면 유용할 겁니다.”
“그래?”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도현이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임 장군에게 선단을 호위할 판옥선을 두세 척 보내서 붙여 달라고 말해 놓지. 그럼 해적들도 섣불리 손을 못 댈 걸세.”
“그리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앞으로 손안에 들어올 막대한 이익이 벌써 눈앞에 보이는지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장 총관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상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긴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 임경업 장군을 찾아간 도현은 봉황상단의 존재에 대해서 필요한 만큼만 설명을 해 줬다.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임경업은 크게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었고 상단 호위를 위해 판옥선을 내어 달라는 요구도 큰 반발 없이 받아들였다.
“그럼 이곳에 무역 거점을 마련하실 계획이란 겁니까?”
“그렇소. 지난날 해상 왕국을 건설한 장보고 장군처럼 웅도를 기반으로 해상 교역로를 장악해 청에 당한 치욕을 되갚고 우리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울 디딤돌로 삼을 것이오.”
“…….”
지금 상황에서는 다소 허무맹랑한 계획이었지만 한양에 있는 대신들처럼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니라 뭐든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임경업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조선을 위한 일인데 당연히 저도 도와 드려야지요.”
성격으로 볼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거라 낙관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내심 초조해하던 도현은 기쁜 표정으로 상대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아닙니다. 앞으로도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알겠소이다. 그리고 장 총관이 병사들을 위해 술과 돼지 예순 마리를 가져왔다고 하니까 그걸로 오랜만에 잔치를 벌이도록 합시다.”
“이거, 소식을 들으면 다들 좋아하겠습니다.”
이렇게 도현은 임경업 장군도 공범으로 끌어들였다.
다음 날 물을 보충한 상선단은 임경업 장군이 내준 판옥선 세 척의 호위를 받으면서 중국 남부 지방을 향해 떠났다.
숨겨진 도현의 진짜 계획을 알게 된 임경업 장군은 더 적극적으로 해적 토벌에 나섰고 그 결과 보름 만에 소규모 해적단 네 개를 박살 내는 성과를 올렸다.
그 과정에서 노략질한 물건을 빼앗는 부수적인 수익까지 올린 조선군은 청군 지휘부에 자신들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포로가 된 해적 중 말을 잘 안 듣는 악질 백 명을 골라 도르곤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머지 포로들은 철저한 감시 속에 거점을 만드는 여러 가지 토목 공사에 강제로 투입해 힘든 노동을 시켰다.
이처럼 조선 수군의 활동이 시작되자 그동안 청과 명의 전쟁 때문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아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던 발해만 일대에서 왕 노릇을 하던 해적 무리인 수룡단에 비상이 걸렸다.
꽝!
“놈들이 웅도에 터를 잡을 때까지 도대체 뭣들 하고 있었던 거야!”
진태룡이 책상을 치면서 고함을 치자 좌우에 앉아 있던 소두목들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실내는 일개 해적 무리의 소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려했는데, 여기저기서 노략질해 온 전리품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어 고급스럽다기보다는 난잡한 느낌이 들었다.
진태룡이 앉아 있는 의자 역시 두세 사람은 거뜬히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스러운 장식이 달려 있는 데다 등받이에는 오래전 중국 남부로 내려가던 교역선 하나를 털었을 때 나온 백두산 호랑이 가죽이 떡하니 얹혀 있어 도무지 조화가 잘되지 않았다.
팔뚝이며 목에는 굵은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아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옆에서 보기에는 볼썽사나운 꼴이었지만 본인은 그게 멋있다고 생각하는 듯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녔다.
“왕가 놈도 당했다고?”
진태룡의 물음에 오른편에 앉아 있는 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중년 남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중년 남자의 이름은 모문척이었는데 다른 소두목들과 달리 명나라 수군 장수 출신으로, 전투에서 패배 귀환해 봤자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 확실해지자 그길로 탈영을 해서 진태룡의 수하가 된 인물이었다.
지금은 그의 참모이자 오른팔 역할을 하며 수룡단의 이인자가 됐다.
“예. 확인해 본 결과 벌써 소규모 해적단 여러 곳이 토벌된 상태였습니다.”
작은 어촌 마을이나 노리는 소규모 해적단과 열 척 이상씩 떼로 몰려다니지만 메뚜기 떼처럼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왜구들은 어차피 다 경쟁 상대였기에 토벌을 당했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앞서 거론한 왕가는 그에게 매달 상납금을 바치는 일종의 하부 조직 중 하나였기에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문제였다.
사실 수룡단이 조선 수군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도 왕가 해적단에 속해 있던 해적 일부가 운 좋게 탈출해 소식을 전해 준 덕분이었다.
“어디서 보낸 놈들이야!”
“생존자들의 말에 의하면 상대편 배의 돛대에 조선군 깃발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명이나 청을 생각하고 있던 진태룡은 뜻밖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모문척을 쳐다봤다.
“조선이라고?”
“저도 의심이 가서 확인을 해 봤지만 조선군이 맞았습니다.”
대부분의 명나라 사람들이 그렇듯 조선을 아래로 깔아 보는 경향이 있던 진태룡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말했다.
“그딴 놈들한테 당하다니 멍청한 것들.”
그러자 탈영 전까지 요동에 주둔하는 수군 장수로 있으면서 조선군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모문척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조선군은 그렇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뭐야?”
“지난 임진왜란 때 십여 척밖에 안 되는 배로 수백 척의 왜국 함대를 박살 낸 적이 있을 정도로 저력 있는 군대입니다. 오죽했으면 청국 황제도 조선을 칠 때 제일 걱정한 것이 조선 수군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진태룡은 충고를 새겨듣기는커녕 오히려 콧방귀를 뀌었다.
“흥! 다 옛날 이야기지. 병자년에 청이 조선에 쳐들어갔을 때는 수군이 아무런 힘도 못 썼잖아.”
“그건…….”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어찌 됐든 강화도를 공격하는 청군을 조선 수군이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진 건 사실이었기에 모문척은 말끝을 흐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전투함 숫자가 여든 척이 넘으니 정면으로 부딪치면 승산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위험한 결정을 내리는 걸 막기 위해 모문척이 애를 썼지만 진태룡은 전혀 듣지 않았다.
“그까짓 놈들이 떼로 몰려 있어 봤자지. 싸움은 쪽수보다 기세야. 그리고 아직 이쪽 바다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그걸 잘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거야.”
“맞습니다, 두목.”
“이번 기회에 놈들을 모조리 다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리고 이곳 바다가 누구 건지 확실히 알리는 겁니다.”
평소에 굴러 온 돌인 모문척이 진태룡의 신임을 받는 걸 시기하던 소두목들은 이때가 기회라는 듯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조선군과 싸울 것을 부추겼다.
“좋아. 놈들을 친다. 각자 휘하에 있는 배를 모두 끌고 사흘 안에 여기로 집결하도록 해.”
“옛!”
진태룡의 지시에 소두목들은 잔뜩 기세가 오른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마치 벌써 조선 수군과 싸워 이긴 것처럼 왁자지껄 떠들며 자신만만해하는 모습을 모문척은 굳은 얼굴로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이렇게 진태룡이 강하게 나가는 건 사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얼마 전 명나라 수군 장수를 통해 몰래 구입한 홍이포 삼십 문이었다.
사용과 보관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아주 중요한 병기였지만 해적들까지 뒷돈을 찔러주고 입수할 수 있을 정도로 명군의 군기는 무너져 있었다.
그렇게 대두목인 진태룡의 지시에 따라 본거지로 수룡단에 속한 해적선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그 수가 무려 마흔 척이 넘었다.
자신들을 노리는 커다란 위협이 점점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조선 수군은 평상시처럼 주변 해역을 순찰하거나 거점 건설 공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하늘은 시리도록 맑고 파도까지 잠잠해서 배를 타기에 딱 좋았다.
“마흔 자입니다.”
끝에 무거운 돌을 매단 줄을 바닷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끌어 올린 병사의 말에 가벼운 가죽 갑옷을 걸친 하급 장교가 들고 있는 책에 붓으로 뭔가를 기록했다.
“여긴 수심이 꽤 깊군. 아까 잰 곳은 서른 자였지?”
“예.”
“이쪽은 다 됐으니까 섬 반대편으로 가서 다시 깊이를 재자고.”
“알겠습니다.”
현재 이들은 수심을 측정하고 있었다.
여길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도현의 요청에 따라 며칠 전부터 순찰을 나가면 틈틈이 조사를 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배가 움직이지 않도록 내려놓은 닻을 끌어 올리고 막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할 때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방에 미확인 함대 출현! 최소 서른 척 이상!”
견시수의 말에 수심을 기록하고 있던 하급 장교는 재빨리 함교 위로 뛰어 올라가 앞을 살폈다.
경고성대로 얼핏 봐도 수십 척은 넘는 배들이 수평선을 넘어 다가오자 하급 장교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저건 다 뭐야?”
“어, 어쩌지요?”
옆으로 다가온 병사의 말에 정신을 차린 하급 장교는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전투준비! 어서 비상종을 치고 함장님을 모셔 와.”
“옛!”
땡땡땡! 땡땡땡!
곧바로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병사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각자 무기를 챙겨 들고 자기 위치로 달려갔다.
“총원 전투 배치!”
“빨리 뛰어.”
그런 가운데 선실에서 쉬고 있던 함장이 황급히 함교로 올라왔다.
“무슨 일인가?”
“정체불명의 함대가 나타났습니다.”
하급 장교가 팔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함장은 이내 새카맣게 몰려오는 배들을 보고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이쪽 방향은 웅도로 가는 길이잖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군. 자네는 현재 상황을 적어서 본진에 전서구를 보내게.”
“네.”
짧게 대답한 하급 장교가 밑으로 뛰어 내려가자 손으로 난간을 짚고 선 함장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며 정면을 바라봤다.
잠시 뒤 다리에 쪽지를 매단 전서구가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상대편 배에 꽂힌 해적 깃발을 본 판옥선은 바로 뱃머리를 돌리고는 웅도로 퇴각했다.
“마마!”
봉황상단에서 쓸 창고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있던 도현은 멀리서부터 촐싹대며 다가오는 칠현을 보고 살짝 혀를 찼다.
“또 뭔 일인데 난리야?”
퉁명스러운 도현의 물음에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칠현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급하게 이야기를 했다.
“헉헉! 큰일 났습니다. 정체불명의 함대가 여길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답니다.”
“뭐?”
“저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어서 대군마마를 지휘소로 모시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젠장!”
뭔가 심상찮은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한 도현이 날아갈 듯이 빠른 걸음으로 내달렸다.
“마마! 조, 좀 천천히 가시…….”
이제야 겨우 숨을 돌린 참이던 칠현은 벌써 저만큼 앞서 있는 도현의 뒷모습을 울상으로 바라보다가 흐느적거리며 뒤를 따랐다.
도현이 도착했을 땐 이미 지휘소가 발칵 뒤집힌 후였다.
각자 병장기를 손에 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도현은 가까스로 임경업 장군을 찾아냈다.
“장군! 대체 무슨 일이오?”
“아, 마마! 오셨군요.”
도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임경업 장군은 잔뜩 굳은 얼굴로 상석을 양보하고는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서쪽 해역을 순찰하던 배에서 전서구로 급보를 알렸는데 아무래도 대규모 해적단이 우리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으음.”
지휘소로 오면서 생각하던 여러 가지 경우의 수 중에 가장 최악의 상황인 것을 알게 된 도현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지만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것 아니오.”
“아무래도 우리가 연이어 소규모 해적단을 토벌하자 위기감을 느낀 모양입니다.”
임경업 장군의 짐작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군의 규모는 얼마쯤 되는 거요?”
“전서구에 적힌 내용이 맞다면 최소 서른에서 마흔 척 사이입니다.”
“적은 숫자는 아니군.”
순찰 등의 이유로 웅도에 남아 있는 판옥선이 마흔 척 정도인 걸 생각하면 상당히 부담되는 숫자였다.
“그 정도는 문제없이 격파할 수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임 장군과 우리 수군의 힘을 믿소. 하지만 고작 해적 놈들을 상대하는 데 아까운 수군 병사들을 잃어서야 되겠소이까?”
“그럼…….”
“정면 대결보다 근처에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해 놈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원거리에서 화포로 박살 내 버리는 것이 어떻겠소?”
휘하 병사들이 상하는 걸 좋아할 지휘관은 없었기에 도현의 설명을 들은 임경업 장군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요.”
“이번 기회에 일일이 놈들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한 방에 몽땅 다 토벌해 버립시다.”
“좋습니다.”
어느새 충격과 놀람은 다 잊어버리고 눈을 매섭게 번득이며 도현이 하는 말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임경업 장군도 비장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비상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판옥선으로 달려간 병사들은 순식간에 출항 준비를 끝마치고 바다로 나왔다.
쏴아아아!
파도를 가르면서 선착장을 벗어난 판옥선들은 일단 한 곳에 모여 전열을 정비했다가 대장선 돛대에 걸린 신호 깃발에 따라 세 개의 무리로 나뉘었다.
“좌익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적이 덫에 걸려들기 전에 아군의 위치를 눈치채면 안 되니까 철저히 은신하라고 이르게.”
“옛.”
지시를 내린 뒤 시선을 든 임경업 장군은 섬 앞바다에 모여 있는 중군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군마마께 중군을 맡긴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군.”
위험하다고 극구 만류했지만 도현이 억지로 고집을 피워서는 미끼 역할인 중군 지휘를 맡았다.
덕분에 임경업 장군은 보다 자유로운 위치에서 판옥선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됐지만 왕자인 도현이 이번 전투에서 가장 격전이 벌어질 곳에 머물게 됐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강하고 영민하신 분이니 문제없이 해내실 겁니다.”
부장인 박도치의 말에 임경업 장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아무튼 전투 중에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
이야기를 하면서도 임경업 장군은 불안한 마음에 도현이 있는 판옥선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중군을 남겨 두고 각각 열 척의 판옥선들이 좌우에 위치한 작은 무인도 뒤로 숨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순찰을 나갔던 판옥선이 해적선 한 무더기를 달고 아군 쪽으로 쫓겨 왔다.
“나타났습니다!”
견시수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계속 정면을 주시하고 있던 도현은 수평선을 가득 메운 해적선을 발견하고는 함교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이거 떨리는데.”
“마마, 제가 목숨을 걸고 지켜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은 자기 몸보다 큰 사각 방패를 든 채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 칠현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그래, 고맙다.”
그래도 주인을 지키겠다는 용기가 가상했기에 칠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준 도현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크게 외쳤다.
“모두 위치를 지키고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 공격하지 마라!”
도현의 명령은 깃발 신호를 이용해 전투태세를 갖추고 서 있는 각 판옥선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한편 순찰선을 쫓아 웅도로 온 해적들도 진형을 이루고 모여 있는 조선 수군을 발견했다.
“예상보다 숫자가 적군.”
“보나 마나 도망쳐 온 놈들이 겁에 질려 규모를 부풀린 걸 겁니다.”
소두목 중 하나인 왕치가 하는 말에 진태룡은 삐죽삐죽 자란 수염을 매만지며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지. 조선 놈들이 그렇게 많은 수군 병력을 여기에 보냈을 리가 없지. 이거 괜히 배를 잔뜩 끌고 왔군.”
“원래 산 중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호랑이는 토끼가 앞에 있어도 사냥을 할 때는 전력을 다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호랑이에 비유하자 기분이 좋아진 진태룡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맞아, 오랜만에 형제들이 모두 모였으니 적들을 단번에 쓸어버리고 오늘 밤에는 거나하게 잔치를 벌이자고.”
“벌써부터 군침이 돕니다.”
그렇게 해적들은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대형도 갖추지 않은 채 도현이 있는 중군을 향해 무질서하게 달려들었다.
“백오십 보!”
“아직이다. 더 가까이 오기 전까지 참아.”
해적 선단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도현이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자 긴장된 마음에 병사들은 무기를 든 손에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왔다.
“심장 터져 버리겠네.”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라는 거야?”
“낸들 알아.”
“젠장 이러다가 포 한 번 못 쏴 보고 적들이 코앞까지 오겠다.”
아무래도 양쪽이 서로의 배에 올라타 전투를 벌이는 단병접전이 벌어지면 사상자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걸 잘 아는 병사들은 해적선이 다가올수록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해적선을 조준한 화포 심지에 불을 댕기고 싶었지만 함부로 움직이면 바로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추상 같은 명령에 포수들은 손에 든 횃불을 만지작거리며 긴장한 채 그저 함교에 서 있는 도현만 바라봐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적선들이 백 보 안으로 들어오자 전방을 주시하던 도현은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언제까지고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을 벌렸다.
“발사!”
도현의 명령에 신호수가 붉은색 삼각 깃발을 흔들자 일렬로 늘어서 있던 판옥선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제일 먼저 쏜 건 대장군전大將軍箭이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포인 천자총통을 이용해 날려 보내는 대형 화살로, 길이가 열 자에 달하고 전체 재질은 나무였지만 끝부분을 철로 마감해 단번에 적선 갑판을 뚫어 버릴 수 있는 아주 위력적인 공격 무기였다.
쉬이이익!
꽈아앙! 꽈앙!
우지끈!
수십 개의 대형 철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해적선 선체 깊숙이 틀어박혔다.
“으악.”
“흐억.”
충격에 많은 해적들이 중심을 잃고 바닥을 뒹굴거나 배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졌다.
피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갑판을 뚫고 들어간 대장군전 일부는 선창을 관통해 배 밑바닥에다가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그러자 당연히 부서진 곳을 통해 짠 바닷물이 거세게 밀려 들어왔고 해적선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가라앉았다.
“물이 들어온다!”
“어서 널빤지로 구멍을 막아!”
해적들이 널빤지와 망치를 들고 급히 수리에 나섰지만 빠르게 차오르는 바닷물 때문에 침수를 막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선공을 세게 얻어맞은 진태룡은 곳곳에 구멍이 나 한쪽으로 기운 배들을 보고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반격해! 우리도 함포를 쏴서 저것들을 박살 내란 말이야!”
“옛.”
진태룡의 지시에 해적선들도 탑재한 홍이포를 쏘기 시작했다.
꽝! 꽝! 꽝!
슈우우웅! 퍼엉!
하지만 매일 사격 훈련을 하는 조선 수군과 달리 화포 조작이 숙련되지 않은 해적들이 쏜 포탄은 대부분 목표를 빗나가 바다에 떨어져 하얀 물기둥만 만들어 냈다.
비록 조준이 형편없기는 해도 제대로 한 방 맞으면 피해가 컸기에 조선 수군은 가지고 있는 화력을 총동원해 상대를 공격했다.
“적이 다가오지 못하게 계속 쏴라!”
“어서 포탄을 가져와.”
포를 쏘면 다섯 명이 한 조로 이루어진 포수들이 달려들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포구 청소와 재장전을 끝내고는 곧바로 이 탄을 쐈다.
그렇게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발을 발사하는 조선 수군과 달리 화포 조작에 익숙하지 않은 해적들은 재장전을 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화포 숫자도 월등히 많은 데다 재사격 시간까지 짧은 조선군의 공격에 해적들은 돛대가 부러지고 갑판에 구멍이 뚫리는 배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럼에도 해적들은 꾸역꾸역 거리를 좁혀 왔고 거기에 비례해서 상대가 쏜 홍이포에 맞는 판옥선도 하나 둘 생겼다.
꽈아앙!
“으윽.”
“몽금포 만호가 탄 배에 침수가 발생했습니다.”
“뒤로 빠져서 응급 수리를 하라고 해. 그리고 빈자리는 예비선으로 메워!”
“옛.”
하급 장교에게 지시를 내린 도현은 옆에 있는 이혁민을 돌아보며 크게 말했다.
“이 현감!”
“말씀하십시오, 마마.”
“계획대로 전열을 조금씩 뒤로 물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잠시 뒤 중군 대장선에서 깃발 신호가 올라가자 일자진을 형성하고 있던 판옥선들은 화포를 쏘면서 천천히 상대를 덫 안으로 더 깊숙이 끌어들였다.
파도가 거세 수십 척의 배가 진형을 똑바로 유지하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배가 서로 뒤엉킬 수도 있지만 갑판 아래에 있는 격군들이 북소리에 맞춰 팔 근육이 터져라 노를 젓고 키잡이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배를 조종하는 덕분에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둥둥둥! 둥둥둥!
“어여차! 어여차!”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도 조금만 참아라!”
한편 약이 바짝 오른 진태룡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마구 부하들을 다그쳤다.
“속도를 더 올려! 배를 바짝 붙여서 건너가란 말이야!”
진태룡의 재촉에도 해적들이 다가오는 만큼 조선 수군이 뒤로 물러섰기에 양쪽의 거리는 백 보에서 좀처럼 좁아지지 않았다.
“제기랄!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가는군.”
잡힐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마치 약 올리듯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조선 수군을 바라보며 진태룡은 이를 바득 갈았다.
“계속 그렇게 도망칠 순 없을 거다.”
일단 상대편 배에 올라타기만 하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진태룡은 확신했고, 조선 수군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소극적으로 뒤로 물러나기만 하는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아마도 조선 수군은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다가 진태룡이 지쳐 나가떨어지는 걸 바라고 있을 터.
하지만 진태룡 역시 믿는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조선 수군의 뒤에는 웅도가 병풍처럼 서 있어 물러서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때는 배를 버리고 섬에 올라가든가 해적들에 맞서 백병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함정을 팠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하는 조선 수군을 바라보며 진태룡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양옆에 있는 작은 돌섬 뒤에서 일단의 배들이 불길한 북소리를 울리며 나타났다.
“적이다!”
“뭐야?”
찢어지는 듯한 부하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 새로 나타난 배들을 살핀 진태룡은 돛대 위에 나부끼는 조선군 깃발을 확인하고 그대로 몸이 굳었다.
“이럴 수가.”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걸 알아차렸다. 양쪽에서 나타난 판옥선들은 도현이 지휘하는 중군과 함께 순식간에 해적들을 가운데 두고 동그란 포위망을 형성했다.
“때가 왔다. 모두 현재 자리에서 멈춰 서서 해적들이 탄 배를 다 박살 내 버려라!”
검을 위로 치켜들고 소리치는 도현의 명령에 화답이라도 하듯 중군에 소속된 판옥선들이 일제히 배를 선회시켜 측면을 드러내고는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상대에게 퍼부어 댔다.
앞뒤에는 각각 두 문씩밖에 화포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측면은 육 문의 각종 화포들이 설치되어서 이걸 모두 쏴 대자 중군의 화력은 몇 배나 강력해졌다.
조선군은 구경과 사정거리에 따라 천, 지, 현, 황으로 나뉜 총 네 종류의 화포를 썼다.
그중에서 화력이 가장 강력한 천자총통天字銃筒은 약 쉰다섯 근이 넘는 철환을 최대 천이백 보까지 날려 보낼 수 있었다.
도현이 지휘하는 중군뿐 아니라 좌우익도 무차별적인 포격을 실시했다.
“쏴라! 적들을 몽땅 다 바다에 수장시켜라!”
꽝꽝! 쉬이이잉! 쿠쿵!
척당 여섯 문씩, 무려 이백 문이 훨씬 넘는 화포가 쉴 새 없이 불을 뿜어 대며 포위망에 갇힌 해적선들을 헤집었다.
특히나 노련한 아군 포수들은 사격 각도를 아래로 내려 선체가 바닷물에 잠기는 홀수선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우지끈, 쿵!
“커헉.”
갑판에 구멍이 몇 개 뚫려도 전투를 계속할 수 있지만 선체가 부서져 바닷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 배는 손을 쓰기도 전에 균형이 깨지며 한쪽으로 기울어져 침몰해 버렸다.
“틀렸어. 배를 포기해!”
“으아아악.”
풍덩!
“살려 줘.”
그런 배에 타고 있던 해적들은 살기 위해서 무기를 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자신이 자랑하는 해적단이 조선 수군의 화포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자 진태룡은 미친 사람처럼 주먹으로 난간을 내려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멍청한 것들!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반격을 하란 말이야! 홍이포를 쏘고 가까이 배를 붙여서 난전으로 몰고 가!”
하지만 진태룡의 명령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사라졌고 해적들은 쏟아지는 포격에 완전히 공황 상태가 됐다.
슈우우웅꽈아앙!
“크흑.”
급기야 함교 바로 옆에 포탄이 날아와 터지는 충격에 진태룡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대두목! 괜찮으십니까?”
“으윽,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다행히 살상 범위에서 살짝 벗어나 목숨은 건졌지만 파편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 진태룡은 몰골이 엉망이었다.
그걸 보며 왕치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은 무립니다. 조금이라도 전력이 남아 있을 때 포위망을 뚫고 여길 빠져나가야 됩니다.”
“무슨 소리야! 화력에서 밀리지만 상대편 배로 넘어가서 난전을 벌이면 우리가 유리해.”
“그 전에 다 물고기 밥이 되게 생겼습니다. 이미 스무 척이 넘게 침몰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입니다.”
왕치가 재차 후퇴를 건의했지만 이미 눈이 뒤집힌 진태룡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두목!”
“닥쳐! 뭣들 하는 거야. 어서 돌격 깃발을 높이 올리고 북을 쳐라!”
졌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진태룡이 벌떡 일어나 무모한 돌격을 명령하자 뒤에 있던 왕치의 눈빛이 달라졌다.
스르릉.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든 왕치는 조용히 진태룡에게 다가가서는 그대로 등을 찔렀다.
푹!
“어억.”
등을 관통한 날카로운 검 끝이 그대로 앞쪽 가슴으로 삐죽 튀어나왔고 진태룡이 입고 있던 갑옷은 금방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네, 네놈이…….”
입가에 피를 머금고 고개를 돌린 진태룡은 믿었던 왕치가 자신을 찌른 걸 확인하고는 배신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두목, 미안하오. 하지만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않소.”
“크흑. 네놈이 얼마나 잘 사는지 지옥에 가서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겠다.”
독기 어린 저주에 미간을 찌푸린 왕치는 왼팔로 진태룡의 목을 꺾어 마무리를 했다.
“말이 많군.”
두드득.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숨이 끊어지자 왕치는 축 늘어진 진태룡의 몸에서 장검을 뽑았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진태룡의 시신을 일별한 왕치는 놀란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는 해적들을 스윽 훑어보고는 크게 외쳤다.
“이제부터 내가 해적단을 지휘한다. 모든 배에 퇴각 명령을 내려라! 진형을 유지할 필요 없이 각자 알아서 포위망을 돌파해 본거지로 오라고 해.”
“…….”
명령을 내렸는데도 서로 눈치만 보고 해적들이 움직이지 않자 왕치는 진태룡의 피가 그대로 묻어 있는 장검을 들어 올리며 서늘하게 호통을 쳤다.
“뭐하고 있어!”
“아, 예.”
말을 듣지 않으면 그대로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은 살기등등한 모습에 해적들은 허둥지둥 사방으로 흩어졌다.
후퇴 깃발이 올라오자 힘겹게 버티고 있던 해적선들은 곧바로 뱃머리를 돌려 포위망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이미 그물에 몰아넣고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되는 물고기를 그냥 도망치게 놔둘 조선 수군이 아니었다.
“놈들이 도망칩니다.”
초도현감 이혁민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보며 도현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난 한번 손에 들어온 먹잇감은 절대 안 놓쳐. 일 열은 계속 포위망을 유지하고 나머지는 앞으로 나아가서 놈들을 박살 내라!”
도현의 명령이 떨어지자 판옥선 일부가 노를 저어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달아나는 해적들을 쫓아갔다.
“이 현감!”
“예, 마마.”
“우리도 배를 전진시키게.”
이혁민은 기겁하며 손을 흔들었다.
“위험합니다!”
“이미 우리가 이긴 싸움인데 위험할 것이 뭐 있어.”
“하지만…….”
“하라면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계속 재촉하자 이혁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잠시 뒤 도현이 탄 판옥선은 전열에서 이탈해 소탕전에 가담했다.
“쏴라!”
꽝꽝! 꽝! 꽝!
탑재된 화포가 명령에 따라 일제히 불을 뿜자 양옆에 있던 해적선 선체에 구멍이 뻥뻥 뚫리면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꾸에엑!”
“크억.”
서로가 바짝 붙어서 벌이는 근접전이었기에 이번에는 화포뿐 아니라 그동안 활약이 미미했던 궁수들도 공격에 나섰다.
슈슈슉! 슈슉!
정확한 조준 사격에 몸을 드러내고 있던 해적들은 여지없이 화살에 맞아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화포 공격에 이은 화살 세례로 상대편 기를 꺾어 놓은 도현은 확실히 마무리를 짓기 위해 도선을 시도했다.
쿵! 끼끼끼.
밧줄이 달린 갈고리를 던져 병사들이 선체를 바짝 갖다 붙이자 어느새 함교 아래로 내려온 도현은 장검을 치켜들며 크게 소리쳤다.
“돌격!”
우와아아!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거침없이 해적선으로 건너간 수군 병사들은 손에 든 병장기를 마구 휘둘러 댔다.
채챙! 챙!
“죽어!”
슈캉!
“크억…….”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도가 갑판 위에서 펼쳐지는 가운데 도현도 날렵하게 몸을 날려서 막 아군 병사의 등에다 삼지창을 찌르려는 해적을 걷어차 쓰러뜨린 뒤 그대로 가슴에 검을 쑤셔 박았다.
푸욱!
“으윽.”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반항하는 놈들은 모조리 다 베어 버려라!”
“우오!”
피 묻은 검을 뽑아 든 도현의 외침에 병사들은 함성으로 호응하며 우왕좌왕하는 해적들을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왕족인 도현이 함께 난전을 벌이자 병사들은 절로 힘이 나서 상대를 격살했고, 저돌적인 돌격에 해적들은 맞서 싸우기보다 뒤로 도망치기 바빴다.
결국 도현이 세 번째 상대를 검으로 베었을 때 해적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했다.
쨍그랑.
“사, 살려 주십시오.”
도현과 병사들은 공격을 멈추고 항복한 해적들을 무장해제시킨 뒤 단단히 포박해 임시로 선창에 가뒀다.
이렇게 포위망을 탈출하려던 해적선들은 조선 수군의 공격에 배가 부서져 침몰하거나 항복해서 나포당했다.
살려고 배신까지 했던 왕치는 진태룡이 죽어 가며 퍼부은 저주처럼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목이 꿰어 숨이 끊어졌고, 공격을 만류했던 모문척은 전황이 기울자 미련을 두지 않고 돛대에 백기를 올려 포로가 됐다.
이날 전투에서 웅도에 쳐들어온 해적선 마흔다섯 척 중 무려 서른 척이 침몰했고 나머지는 모두 나포됐는데 선체가 성한 배가 없을 만큼 심하게 당했다.
아군도 두 척이 침몰하고 다섯 척이 한동안 수리를 받아야 될 만큼 크게 파손됐지만 발해만에서 제일 큰 해적인 수룡단을 전멸시킨 걸 생각하면 이건 피해도 아니었다.
침몰한 배가 많았지만 다행히 전투가 섬 바로 앞에서 벌어졌기에 바다로 뛰어든 해적들 대부분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기진맥진한 채 해안에 올라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아군 병사들에게 모조리 다 체포돼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렇게 포로가 된 해적들의 숫자가 사백 명이 넘었다.
죽은 자들은 그것보다 더 많아서 한참 동안 바닷물 속에서 몸이 탱탱 분 시신이 아침저녁으로 해안에 밀려와 그걸 치우느라 애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