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시간을 뛰어넘어 (1/104)

효종

1-20권 完

출판사 : 로크미디어 

작자 : 강동호

1권

시간을 뛰어넘어

[고딕]-안녕하십니까, 기장입니다. 앞으로 10분 후에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즐거운 여행 되시기를 바라며 저희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행기 좌석에서 좁은 창문으로 베이징 국제공항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기장의 안내 멘트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이윽고 부산스레 돌아다니는 스튜어디스들과 벌써 짐을 챙기려 일어나는 성질 급한 승객들 틈바구니에서 도현이 양팔을 들어 올리고 기지개를 켰다.

“끄으응!”

좌석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바람에 관절 마디마디가 쑤시는 기분에 도현이 자꾸 꼼지락거리자 옆에 있던 백민훈 교수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고작 2시간 동안 앉아 있었던 것뿐인데 그것도 못 견디나, 자네?”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죠.”

도현은 고개를 숙이면서 애교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후 우르르 몰려 나가는 승객들에 섞여서 게이트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낯선 공항 풍경을 바라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어쩌죠, 교수님?”

“음, 저쪽 대학교에서 누가 마중 나오기로 했는데……. 아, 저기 있군.”

백민훈 교수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니 삐뚤빼뚤한 한국어로 ‘한성대학 백민훈 교수님 일행’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그쪽도 도현 일행을 발견했는지 반가운 기색으로 인파를 헤치고 가까이 다가왔다.

“니하오你好. 백민훈 교수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리홍장李鴻章이라고 합니다. 베이징에 체류하시는 동안 제가 가이드를 맡게 되었습니다.”

“오, 그렇군요.”

백민훈 교수와 악수를 나눈 리홍장이 옆에 멀뚱하니 서 있는 도현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분도 같은 일행이십니까?”

“아, 이쪽은 내가 가르치고 있는 제자입니다.”

인사하라는 듯이 백민훈 교수가 눈짓하자 도현은 재빨리 한 발 앞으로 나서 손을 내밀었다.

“사학과 4학년 강도현이라고 합니다. 칭 뚜어 쯔츠请多支持(잘 부탁드립니다).”

“니하오. 중국말이 굉장히 유창하시군요.”

백민훈 교수는 중국학을 전공한 데다 교수직까지 오른 사람이니 중국어가 유창한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20대 초반인 젊은이가 현지 사람 못지않게 발음을 하니 리홍장이 살짝 놀란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부전공으로 중국어를 좀 배웠습니다.”

“하하, 그러시군요.”

너털웃음을 터뜨린 리홍장은 두 사람이 다 중국어를 웬만큼 한다는 걸 깨닫자 어설픈 한국어 대신 중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바깥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두 분, 짐은 그것뿐입니까?”

가벼운 크로스백만 메고 있는 백민훈 교수를 보고 리홍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현은 헉 숨을 들이켰다.

“이런, 큰일 났다! 교수님, 저 짐 찾아올게요!”

“쯧쯧쯧. 정신머리하고는. 냉큼 다녀오게.”

자기도 똑같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으면서 혀를 차는 백민훈 교수를 뒤로하고 도현은 여행 가방이 나오는 게이트를 찾아 재빨리 뛰었다.

“헉헉……. 아, 다행이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다른 승객들은 이미 다 자기 짐을 찾아간 뒤라 한산했고, 주인이 아직 가져가지 않은 가방들 몇 개만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벨트 위에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 눈에 익은 가방 두 개를 집어 아래로 내려놓은 도현은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고 가방을 집어 갔다면…….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상상에 도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현의 가방 안에는 논문에 필요한 자료들과 참고 책자, 그리고 앞부분만 완성시켜 놓은 원고가 있었다. 만약 이것들을 잃어버렸다면 졸업 논문을 기간 내에 완성시키지 못할 테고, 그럼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한 학기를 다시 다녀야 될 형편이었다.

올해로 사학과 4학년인 도현은 이번 학기가 마지막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친구들은 일찌감치 다 완성해서 제출한 졸업논문을 아직도 반밖에 쓰지 못했다.

물론 대학 등록금을 대느라 방학 때도 쉬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도현 자신이 택한 주제가 꽤 어려워서 자료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탓이다.

효종!

중국에서 볼모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후에 조선으로 돌아와 북벌을 꿈꿨던 임금.

바로 그가 도현의 졸업 논문 주제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 깊다고 생각하던 왕이었기에 이걸로 하자고 결정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의외로 필요한 자료가 많이 없어서 낑낑거리던 차에 백민훈 교수가 중국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며칠간 베이징으로 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베이징 하면 옛날의 북경, 중국의 오랜 수도였던 곳이다.

효종 임금은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으니 혹시나 그쪽에서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또 중국 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는 오래된 문서들을 열람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눈뜨고 날려 버릴 도현이 아니다.

‘게다가 혹시 모르지. 교수님한테 잘 보이면 논문을 쓰는데 도움을 주실지도.’

이번 여행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되새긴 도현은 무거운 여행 가방을 질질 끌고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로비로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제야 왔군.”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백민훈 교수가 도현이 오는 것을 보고 일어섰다.

“그럼 가실까요.”

리홍장이 앞장서고 백민훈 교수가 그 뒤에, 그리고 여전히 온갖 짐을 다 떠안은 도현이 가장 끝에서 뒤따랐다.

검은색 SUV 차량의 짐칸에 두 사람분의 짐 가방과 등에 진 배낭까지 모조리 다 옮겨 싣고 나서야 겨우 시트에 앉은 도현을 돌아보며 리홍장이 껄껄 웃었다.

“많이 더우시죠? 방금 에어컨 켰으니 좀 있으면 시원해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공항을 나서자 바깥은 찜통처럼 더웠기에 리홍장의 말이 마냥 반갑기만 했다.

“교수님을 성실히 모시는 제자를 둬서 좋으시겠습니다.”

“뭘. 어차피 짐꾼으로 따라온 녀석이니 그렇게 신경 안 써 줘도 되오.”

리홍장이 인사치레로 한 말에 백민훈 교수가 얄미운 말투로 답했다.

늙은 교수들 중에서 유독 젊은 사람을 못 부려 먹어서 안달 난 사람이 있는데, 백민훈 교수가 바로 그런 타입이었다.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골려 먹기를 좋아한달까.

어차피 처음부터 짐꾼이든 심부름꾼이든 뭐든 할 테니 데려만 가 달라고 조른 건 도현 자신이었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빈정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몰래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뒷좌석에 꽁하니 앉아 있는데 어느새 자동차는 공항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렸다.

“오오!”

베이징 시내가 점차 가까워지자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린 도현은 창문을 내리고 낯선 거리의 공기를 그대로 들이마셨다.

도시의 중앙부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빌딩 숲이 즐비했고, 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면 이번엔 과거로 타임 슬립을 한 것처럼 옛 건축물들이 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었다. 특히 역사를 전공하는 도현의 눈에는 하나같이 흥미 깊은 것들뿐이라 절로 눈이 반짝거렸다.

잠시 후 북경 시내를 가로질러 호텔에 체크인을 한 도현은 바로 다음 날부터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중국인 교수들 앞에서 할 발표 준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백민훈 교수의 시중을 드는 것은 물론 사전에 배포할 자료의 편집, 검토, 그리고 자잘한 복사 업무부터 커피 심부름까지 그야말로 비서가 따로 없었다.

물론 한국에서 준비를 철저히 해 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발표 당일 날까지 계속 이랬다저랬다 수정을 하는 바람에 도현만 죽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발표 당일.

중국 사학계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학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친 백민훈 교수가 무척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도현은 회장 한쪽 구석에서 얌전히 허기진 배를 채웠다.

“우물우물……. 응?”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 치는 감각에 돌아보니 이틀 전 공항에서 만났던 리홍장이 손을 들고 알은척을 했다.

“아, 안녕하세요.”

“하하하. 간밤에 뭘 했길래 다크서클이 가득한가?”

어느새 편하게 말을 놓게 된 리홍장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묻자 도현은 입속에 가득 찬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는 겨우 답했다.

“말도 마세요. 새벽까지 교수님 발표 준비 돕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까.”

“그거 고생했구만.”

대충 사정을 알겠다는 듯 리홍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여행의 첫 번째 목표인 백민훈 교수의 발표가 무사히 끝났으니 내일부터는 리홍장과 함께 중국 곳곳을 돌아보게 될 터였다. 아무리 중국어를 잘한다고 해도 둘만 돌아다니는 건 위험했기 때문에 현지 사정에 밝은 리홍장을 가이드로 고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도 옛날에 이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했거든. 뭐, 결국 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예전에 신세 진 교수님들도 뵙고 인사도 드릴 겸 해서 왔지.”

“아, 그래서…….”

중국 대학 측에서 주선해서 소개시켜 준 사람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또 이런 인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참, 그렇지. 리홍장 씨, 혹시 이쪽 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제가 열람할 수 있을까요?”

“자네가?”

“네. 저도 졸업논문 때문에 조사 중인 게 있는데 혹시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요.”

“논문이라.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졸업했을 때가 생각나는군. 요즘에야 인터넷이란 편리한 게 있지만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전부 발로 뛰고 수소문을 해 가면서 힘들게 적어 냈지.”

옛날 추억이 떠오르는 듯 회상하는 표정을 짓던 리홍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좋아. 나만 믿게. 안 그래도 나랑 같은 동기가 마침 서고 자료실에 근무하고 있는데, 그 녀석한테 말하면 출입하는 것쯤은 눈감아 줄 거야.”

“정말요?”

도현이 기뻐하며 소리치자 리홍장은 쉿 하고 손가락을 세웠다.

“소란 피우지 말고. 여기 있는 교수님들은 전부 깐깐한 노친네들뿐이라 외국 사람이 자료실에 들락날락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게 뻔하거든.”

“네, 알았어요.”

도현은 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까 봐 목소리를 죽이고 리홍장이 친구에게 전화 거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 나야. 일하는 중인가? 그래, 잘됐군. 응, 응…….”

리홍장이 짧은 통화를 끝내고 도현 쪽을 돌아보았다.

“뭐래요?”

“서고 자료실에서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군. 원래는 다른 동료가 한 명 더 있는데 휴가를 간 모양이야. 지금 찾아가도 되겠냐고 물어보니까 심심한데 잘됐다면서 언제든지 놀러 오라는데.”

“잘됐네요.”

그렇게 말하고 도현은 백민훈 교수 쪽을 힐끔 쳐다봤다.

여전히 백민훈 교수는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친목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술도 한 잔씩 돌아간 분위기라 앞으로 한두 시간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아무도 모를 듯싶었다.

“지금 가 볼 텐가? 나도 여기서 용건은 다 끝난 터라 슬슬 일어날 참이었는데.”

“당연하죠!”

도현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배낭을 어깨에 메고 리홍장을 따라나섰다.

지금은 여름방학 기간.

회장을 나서니 텁텁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고 저 멀리 대로변에서 들리는 차 소리 외엔 조용했다.

방학 중에도 학교에 와서 공부 중인 학생 몇몇을 제외하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학교 복도를 지나 끄트머리에 있는 무거운 철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니 주차장과 이어져 있는 지하층이 나타났다.

“학생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은 본관 2층에 있지만 서고는 좀처럼 찾는 사람이 없어서 작년에 이리로 옮겨 왔다고 하더군.”

리홍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유리로 된 두꺼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리홍장! 오랜만일세.”

“하하하, 그동안 잘 지냈나.”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와 리홍장이 서로를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잠시 동안 가벼운 잡담을 나눈 리홍장이 마침내 도현을 가리키며 사정을 설명하자 장예라는 이름의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대신 안에 있는 책자나 서류들을 들고 나갈 수는 없네. 복사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도 절대 엄금이야. 눈으로만 읽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허락해 주지.”

“네, 물론이죠.”

대학에서 애써 모은 귀중한 자료들이니 그 정도 제약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그럼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리홍장이 돌아간 이후 도현은 혼자서 서고 안을 탐험했다.

“우와!”

오래되어 낡은 종이 냄새가 가득한 서고는 그야말로 도현에겐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앞쪽은 그나마 최근 것, 1990년대에 출간된 책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지만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니 그보다 훨씬 이전 시대에 나온 서적과 지도, 화집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이 섞여 있었다.

시험 삼아 책 한 권을 들어 펼쳐 보니 고어체로 문장이 쓰여 있어 읽기는커녕 무슨 내용인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 바퀴 돌아보는 것만으로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나서 백민훈 교수가 있는 연회장으로 돌아가려고 나선 도현이 문득 생각나 이게 무슨 내용인지 물어보자 장예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쪽으로 자리를 옮긴 지 1년 정도밖에 안 되어서 말이네. 대강 정리를 한다고 했지만 완벽히 다 끝내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하긴 저 많은 책들을 일일이 다 분류하고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도 여간 큰일이 아닐 터다.

그래도 정리가 다 되어 있지 않은 편이 들춰 보고 살펴보는 재미가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며 도현은 연회장으로 향했다. 마침 타이밍 딱 좋게 연회가 슬슬 끝나려는 분위기라 도현은 술에 잔뜩 취한 백민훈 교수를 어깨로 부축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예정대로라면 리홍장과 함께 답사 여행을 떠나야 했지만 백민훈 교수가 숙취 때문에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끙끙거리는 바람에 일정이 늦춰졌다.

전화로 리홍장에게 오늘 하루는 쉬게 되었다고 전달한 도현은 갑자기 생긴 자유 시간에 뭘 할까 생각하다가 북경 시내에 있는 유명한 골동품 거리를 구경하기로 결정했다.

“구경해 보세요!”

“손님! 친구, 애인, 가족한테 선물할 기념품을 찾으십니까? 그럼 이게 딱이죠!”

안 그래도 인구가 많은 베이징 시내인 데다 관광객들까지 섞여서 거리는 무척이나 혼잡했다.

길거리 상인들이 좌판을 내놓고 손님들을 마구 호객하고 있었으며 그 사이사이에 금은방, 유명 브랜드숍들이 마구 섞여 그야말로 중국다운 거리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정신없이 치이며 걸어 다니던 도현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찾아 눈에 띄는 대로 제일 가까운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 겨우 한숨 돌렸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날도 더운데 사람은 많지, 뭘 구경하고 싶어도 정신이 없어서 눈이 팽팽 돌 지경이라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때 가게 안쪽에서 걸걸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경하러 오셨소?”

“아, 예.”

“마음껏 둘러보시구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고.”

카운터 너머에 앉아 있는 노인은 등이 조금 굽었고 덩치는 작은 편이었는데, 동그란 안경 너머로 도현을 힐끔 보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신문을 펼쳐 들었다.

이왕 안으로 들어온 거 금방 다시 나가는 것도 좀 그래서 가게를 둘러보기로 결심한 도현은 선반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골동품들을 구경했다.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 상자, 태엽을 돌리면 음악과 함께 인형이 춤을 추는 오르골같이 서양 냄새가 나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족자에 걸려 있는 미인도와 난초, 새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는 작은 도자기 등 동양풍의 물건도 많았다.

동서양의 문화가 이리저리 뒤섞인 가운데서도 종류로 치자면 그중에서도 장신구가 제일 많았다.

시계, 반지, 목걸이, 귀걸이 등등.

그때 문득 눈길을 잡아끄는 물건이 있어 도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 무늬도 없는 밋밋한 형태의 반지.

투명한 옥빛을 띠고 있어 마치 조선시대 여인네들이 꼈을 법한 가락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지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도현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느낌이 들어 노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음, 별일이구만.”

“네?”

“그 반지는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가게를 이어받을 때부터 있던 물건일세. 모양새는 괜찮은데 희한하게 안 팔리더란 말이지. 뭐, 이제야 제 주인을 만난 모양이니 내 싸게 줌세.”

노인은 귀찮은 재고품을 빨리 팔아넘기려는 듯 처음부터 제법 싼 가격을 불렀다.

결국 40위안이라는 밥 한 끼 정도의 가격에 반지를 산 도현은 가게를 나와 잠시 어슬렁거리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이윽고 오후가 되자 다시 대학교에 있는 서고로 향했다.

어제는 갑자기 들른 것이라 오래 머무를 수 없었지만 오늘은 아예 작정하고 저녁때까지 틀어박힐 생각이었다.

“어디 보자…….”

무작정 뒤지려면 한도 끝도 없었으므로 일단 조선이 언급되었거나, 아니면 효종이 살아 있을 때의 시대와 연관 있는 책들만 추슬러서 보기로 했다.

마땅히 앉을 자리도 없었기에 그냥 바닥에 퍼질러서 페이지를 넘기는 도현의 눈동자는 학구열로 불타올랐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저녁 5시쯤 되어 조금 출출함을 느낀 도현은 미리 배낭에 준비해 온 초콜릿 바를 으적거리며 근육이 뭉친 어깨를 풀었다.

“어?”

바닥에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진 책 하나가 책장 틈새 사이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간신히 손을 뻗어 꺼내 보니 얼마나 오래됐는지 종이가 다 낡아 만지면 부스러질 듯했고, 표지엔 아무런 글자도 없이 그냥 누렇게 변색만 되어 있었다.

저자명도, 책 제목도 없어 갑자기 호기심이 동해 책장을 넘겨보니 붓으로 흘려 쓴 손 글씨가 눈에 띄었다.

“일기 같은데…….”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흥미 삼아 책장을 넘기던 도현의 눈이 이윽고 점점 커졌다.

꼼꼼하게 읽어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지만, 중국 궁정에서의 생활을 짤막하게 기록한 앞부분의 내용과 가끔씩 나오는 조선이라는 단어, 그리고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를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는 다짐과도 비슷한 말이 도현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건 설마 효종의 일기인가!

“에이, 그럴 리가…….”

책장을 넘기는 도현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일기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목에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침에 골동품 가게에서 산 옥빛 반지가 무척 마음에 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남자가 평상시에 끼고 다니기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는 모양이라서 목걸이 줄에 펜던트처럼 달아서 걸고 있었던 것이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부릅뜬 눈으로 일기를 읽던 도현은 어느새 자신이 만지고 있는 반지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책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이 스르륵 감겼다.

어라. 깜박 잠이 들었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말소리에 반쯤 잠이 깬 도현은 흐릿한 천장 무늬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하, 저하, 기침하셨습니까?”

누가 텔레비전을 틀어 놨나.

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고풍스러운 말투였다.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내며 억지로 상체를 일으킨 도현은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야?”

그가 누워 있는 곳은 잠들기 전에 있었던 대학교 서고도, 그리고 북경에 와서 투숙한 호텔 방도 아니었다.

온돌 바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이 딱딱하고 네모난 침상 위에 몇 겹으로 비단 이불을 깔고 베개는 나무로 만든 목침, 눈을 위로 돌려 보면 얇고 하늘하늘한 천들이 겹겹이 드리워져 있어 바깥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벽에 나 있는 육각형 모양의 창문까지 전형적인 중국 전통 가옥의 모습이었다.

“여긴 어디지…….”

도현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답을 하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마마.”

조선시대 환관 복장을 한 젊은 남자의 말에 도현은 잔뜩 경계하는 시선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당신 누구야!”

“마마, 왜 그러십니까? 저 칠현이입니다.”

칠현이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눈을 떠 보니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곳인 데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마치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알은척을 하니 뭐가 어찌 된 일인지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인신매매? 아니면 사기단?

중국에서는 멋모르는 외국인을 잡아다가 참치잡이 배에 팔아 버린다느니, 호텔에서 잠을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콩팥이 하나 없어졌다더라 등등 인터넷에서 흔하게 떠도는 괴담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제길!”

영문도 모르고 당할 순 없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도현은 이것저것 따질 틈 없이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 마마?”

주위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방 안을 가로질러 문을 탁 연 순간 눈앞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이게 뭐야…….”

축구를 해도 될 것처럼 넓은 마당에 야트막한 담,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잘 손질된 정원.

옆으로 눈을 돌려 보면 몇백 년 전의 전통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른 별채들이 이어져 있었으며 아무리 발돋움을 하고 멀리 내다보아도 주위에 고층 빌딩이라곤 하나도 없이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중국은 초행길인 도현이지만 적어도 여기가 북경 시내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대체 여긴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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