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름(Hilm)
“……저…….”
아득한 저 멀리에서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배…….”
누구지? 들릴 듯 말 소리가 조금은 선명해졌다.
“선배!”
선……배?
“선배, 수업 다 끝났어요. 일어나세요.”
뚜렷해진 음성은 하늘에 붕 떠있는 듯한 내 정신을 바로잡았다.
“으, 응?”
정신을 차리고 눈앞을 살피자 같은 수업을 들어서 제법 안면이 있는 후배, 정은이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두 팔로는 내 몸을 잡고 흔든다.
“수업 다 끝났다고요. 언제까지 주무실 거예요?”
“뭐? 수업?”
“네. 한국사의 이해 수업 다 끝나면 깨워달라면서요?”
“내가?”
내가 모르는 듯 묻자 정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럴 리가, 난 분명 방금 전까지 신과…….
“네! 설마 매번 깨워주는 게 고맙다고 내일 밥 사주신다고 한 약속도 잊은 건 아니겠죠?”
“아? 무, 물론 아니지.”
솔직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정은이가 쀼루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달랬다. 이 녀석은 평소 하는 행동이나 말은 귀엽지만 가끔 술 먹고 한풀이할 때는 꽤 무섭다.
결국 비싼 편에 속하는 곳에서 밥을 사기로 하고 화를 달랬다. 학교 근처에서 값나가는 곳이라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마는.
“그럼 그것들은 뭐였지……·?”
처음 게임에 접속했을 때부터, 쿠테타를 하고, 성을 치고, 마스터가 되고, 소연일 만나고, 마왕과 싸우고, 신과 싸우기까지 꿈에서 본 모든 일들을 떠올려 봤다.
꿈이라 하기엔 너무 생생한 기억. 꿈이란 건 알지만 도무지 현실과 분간이 안 되는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힐름이라…….”
“응? 선배, 아랍어도 할 줄 알아요?”
나를 깨우고 책을 챙겨서 나가려던 정은이 내 중얼거림을 듣고 묻는다.
“뭐?”
“방금, 힐름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긴 한데……. 힐름을 알아?”
힐름을 아는 듯한 정은이의 반응에, 꿈이 아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요. 아랍어로 꿈이란 뜻이잖아요?”
“응?”
“헤헤, 집에 아랍어 사전이 있어서 예전에 심심하면 뒤져보곤 했거든요. 그래서 미그위즈라든가, 힐름이라든가 하는 몇 가지 단어의 뜻은 알아요.”
“아랍어…… 꿈…….”
정은의 설명에 막연하게 가졌던 기대감이 깨져버렸다.
꿈. 그래, 아마도 어디선가 힐름이란 말을 들어보고 꿈에서 평소 애타게 기다리던 가상현실 게임에 대입시켰나 보다.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에 허탈해지긴 했지만 한결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꿈이었지만 마지막 부분의 내용은 정말 아직까지 가슴이 아팠다.
“태연아!”
축 늘어진 어깨로 강의실 문 밖을 나가는 순간, 목에 두꺼운 팔 하나가 감겨온다.
“켁!”
“자, 우리 함께 게임방엘 가세나.”
“야, 야! 나 집에 가서 글 써야 해!”
“허어! 게임방에도 한글 깔려 있어. 넌 어차피 항상 메일에다가 파일 백업시켜 놓잖아? 그거 다운받고 거기서 쓰면 되겠네. 내가 쏠 테니까 가자!”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인택은 몇 가지 억지를 쓰며 나를 힘으로 끌고 게임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됐다, 됐어!”
“조용히 못해!”
퍼억!
집중이 안 되기 때문에 게임방에서는 글을 쓰지 않는 나를 억지로 끌고 온 것도 모자라 정신마저 산만하게 만든 죄로, 녀석의 뒤통수에 커다란 혹을 만들어줬다.
“흐흐흐흐!”
“대체 뭣 때문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는 거냐?”
“놀라지 마라, 힐름 베타 테스터에 당첨됐다!”
“……!”
인택의 말에 벼락 맞은 듯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상황, 이 대화. 분명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다름 아닌 아까 강의실에서 꾼 꿈에서!
[황인택님, 힐름 베타 테스터에 당첨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건……!”
다른 말도 많았지만 한 줄 멘트가 눈에 들어왔다. 꿈에서도 확실히 본 적 있는 문장이다. 아니,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다!
“흐흐! 부럽지? 난 내일부터 3달간 클로즈 베타를 맘껏 즐길 테니 네놈은 나중에 아주 천천히 따라와라. 크핫핫핫!”
3달간의 클로즈 베타……. 이것까지도 똑같다.
서둘러 꿈속에서 알았던 홈페이지 주소를 인터넷 주소창에 적어 넣었다.
“응? 너도 클로즈 베타 신청했었냐? 하긴, 네가 얼마나 기다리던 종류의 게임인데 안 했겠냐. 어때, 됐어?”
“하…… 하하……!”
모든 게 기억대로다. 공개된 스킬이나 마법, 몬스터, 심지어 마을 지도까지 내 머릿속에 있는 그대로다. 그렇다면 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다 알고 있다는 말. 이제 앞으로 기억 속의 일들이 모두 그대로 일어난다? 순식간에 기억은 흐르고 흘러 후반의 내용까지 닿았다.
배드 엔딩. 소연에 관한 내용이 떠올랐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고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줬다. 그러나 곧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다신 빼앗기지 않는다. 다신 보내지 않는다. 5억? 그까짓 거 미리미리 준비해놓으면 되는 거다. 난 앞으로의 일들을 모두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 바꾸는 거다. 내 미래를!
* * *
“크아아악!!!!”
신의 공격을 받은 콜로니스트의 몸이 하늘 저 높이 튕겨져 오른다. 그리고 그 밑에서, 다시 한 번 시리도록 흰 빛이 날아와 콜로니스트의 몸을 뒤덮었다.
더 이상의 비명도 없다. 의식이 끊어진 듯, 걸레조각과 같이 너덜너덜해진 몸이 땅으로 추락했다.
“콜!!”
“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자신의 모니터를 지켜보던 직원 하나가 갑자기 늘어난 그래프 상의 수치를 보며 기겁을 했다.
“무슨 일이야?”
“콜로니스트가 받은 충격의 강도가……. 규정 수치를 훨씬 초과했습니다. 이 정도면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입니다!”
팀장은 보고하는 직원을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뭐? 그 지경까지 됐으면 제어를 했어야지!”
“시스템 자체에서 부여한 수식어들 때문에 제어가 안 됐습니다. 이 유저가 가진 수식어만…… 무려 20개입니다!”
“제길, 지금 저 유저 접속 위치 파악되지? 당장 구급차 불러!”
“예. 알겠습니다!”
“크으으…….”
병원 응급실. 인택이 안절부절 못하고 왔다갔다 거린다. 그 옆에서 질끈 눈을 감고 기도하는 재연.
쿵! 쿵! 쿵!
분을 못 참겠는지 인택은 맨주먹으로 병원 벽을 때린다. 한 때 제법 운동을 했던 터라 병원 벽이 심하게 울린다.
“그만해!”
주먹이 다 까지도록 벽을 치는 인택을 어느새 도착한 승준이 말렸다. 말리는 사람의 얼굴을 힐끗 본 인택. 주먹은 물론 온 몸에 힘을 풀고 승준에게 기대서 흐느낀다.
“그 바보 같은 자식! 지가 뭐라고, 지가 뭐라고!”
“그래, 그 바보 같은 놈. 다 나으면 한 방 먹여주자.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 못하도록.”
끼이익!
문이 열리고, 태연과 함께 들어갔던 의사가 나왔다.
“선생님, 어떻게 됐죠? 그놈, 그 멍청한 놈. 살았죠?”
“그게…… 살기는 살았습니다만…….”
“……?”
“의식을 차리지 못합니다. 식물인간…… 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럴 리 없어요. 그놈이 얼마나 독한 놈인데 의식을 차리지 못하다뇨! 그럴 리 없다고요!”
인택은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절대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직접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죽은 듯,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태연의 몸.
“야, 일어나 봐. 일어나 보라고!”
인택이 아무리 흔들어 봐도 태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힘이 풀린 듯 제자리에 주저앉는 재연. 인택의 절규에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들어온 의사가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래도, 무의식 속에서 뭔가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합니다. 치료를 하는 내내 환자의 표정이 웃고 있더군요.”
<지금까지 힐름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