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획득 (41/43)

#던전 획득

마왕을 죽이고 난 후, 그가 떨어뜨린 몇 개의 아이템을 품에 넣고 기절한 에크만을 들쳐 멨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지려는 내 앞을 아론이 막아서긴 했지만 찔리는 것도 있고, 내가 표정이 좋지 못한 채 걸어가자 결국은 비켜섰다.

나와의 내기에서 아론은, 더 이상 전쟁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었다.

“끄응, 여긴 어디냐?”

“보면 모르냐, 우리 아지트지.”

잊혀진 대륙으로 몸을 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에크만이 정신을 차렸다.

“마왕은?”

“저놈이 죽였다.”

“그래? 쳇, 아직 수련이 더 필요한가보군. 알테어, 가자!”

“아니. 그게. 전 별로 한 게 없는데…….”

“뭐가 어떻게 됐든 결국 죽인 건 너잖아? 우린 죽이지 못했고. 그거면 된 거야. 음, 역시 수련이 더 필요하겠어. 그런 놈에게 밀리다니.”

다 잡아놓은 것을 마무리만 한 것뿐이라 미안한 마음이 적지 않았는데 알테어, 에크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마왕과의 1대1에서 이기지 못한 것에 분개하며 더욱 수련에 대한 의지를 불태울 뿐.

“아, 이것들 받으십시오.”

“응? 이건 뭐냐.”

“마왕이 죽으면서 떨어뜨린 아이템들입니다.”

모두 4개의 아이템을 꺼내놓았다. 책 두 권에 반지 하나, 주먹 크기 정도의 수정구 하나. 그러나 에크만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그걸 우리가 왜 받아?”

“전 마무리만 했을 뿐, 실제 마왕의 힘을 다 빼놓은 건 두 분 아닙니까.”

“그래도 잡은 건 너잖아?”

“하지만…….”

한동안 서로 아이템의 소유권을 미루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두 권의 책을 알테어, 에크만이 한권씩 나눠 갖고 수정구와 반지는 내 차지가 되었다.

[마왕의 반지]

마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반지. 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 주위 20m내에 60레벨 이하의 언데드 몬스터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단, 조종중인 몬스터가 사망할 시 조종자는 그 몬스터가 주는 경험치의 3배 만큼의 경험치를 깎인다.

[던전키퍼의 수정구]

던전 키퍼용 아이템. 던전의 주인만 사용 가능. 던전을 획득한 뒤, 그 던전의 층수만큼 이동 마법진을 생성할 수 있다. 이동 마법진 설치 명령어는 ‘마크’. 이동 명령어는 각 층수를 말하면 된다.

“던전 키퍼?”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돌발 공지가 올라왔다.

[어둠의 마법사들을 위한 특혜! 패치명 ‘던전의 주인’이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유저가 개인 소유의 던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던전을 획득하는 방법은 다른 유저의 도움 없이 원하는 던전을 뚫고 들어가 그 던전의 보스를 죽이면 되는 것으로, 간단합니다. 던전 획득에 도전하면 그 유저가 실패할 때까지 그 던전에는 다른 유저가 진입할 수 없습니다. 던전 획득 도전 중에는 던전의 몬스터 리젠 속도가 느려지나, 각 던전마다 최소 클리어 시간이 존재하므로 조금 서두르셔야 합니다. 던전 키퍼의 의무와 책임, 혜택은 홈페이지에 따로 공지됩니다.

던전 키퍼 자격 제한 : 최소 마법사 클래스나 네크로맨서 클래스를 마스터 한 자. 그와 동시에 악수치가 전체의 100위 안에 들거나 총 PK횟수가 500회 이상인 자]

“미쳤군. PK를 양산하겠다는 건가?”

모르긴 몰라도 던전을 얻으면 돌아오는 혜택이 상당할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해도 마법사 유저라면 누구나 개인 소유의 던전을 가져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비록 제한이 마스터 레벨이지만 현재 마스터가 그리 적지만은 않을 테지.

물론 단신으로 마법사 클래스가 던전을 클리어한다는 것은 꽤나 무리인 감이 있지만 보상이 대단하니 한번쯤 도전 의식은 꽃피워 볼 만할 터이다. 그렇다면 추가로 붙는 자격 제한이 더 높아야하는데 악수치가 전체의 100위 안이거나 총 PK횟수 500회 이상?

확실히 악수치 전체 100위권 안이라면 제법 쓸 만한 제한이다. 어쌔신들의 악 성향을 따라가려면 급히 PK를 해댄다고 되는 것이 아닐 테고 전부터 여러 방면에서 꾸준히 악수치를 쌓아온 진짜 사악한 마법사여야 할 테니까. 그런데 PK횟수 500회 이상은 문제가 있다. 대부분 마법사 클래스들이 첫 번째 제한에 해당되긴 어려울 테니 이 방법을 택할 텐데 마스터 레벨들이 PK횟수 500회를 채우기 위해 무차별 PK를 해댄다면?

“게임이 난장판이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500회를 채운다 해도 던전을 얻으리란 보장도 없고. 던전은 얻지 못하고 악수치만 엄청나게 늘어버린 자들 중엔 다시 선으로 성향을 되돌리지 못하고 그냥 PK로 전향하는 자들도 나올 게 분명해.”

결국은 범죄자를 양성하겠다는 공지나 다름없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쯧쯧 혀를 차다가, 문득 저 제한이 나에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마법사 클래스야 진즉에 마스터했고, 악수치? 아마 내가 전체 랭킹 1위가 아닐까 싶은데. 마왕을 죽이면서 많이 깎였다고는 하지만 전쟁을 통해서 내가 죽인 유저 수가 일만이 훌쩍 넘어갈 테니까. PK횟수? 음, 헤아릴 수가 없군!”

조건이야 이미 충족되었고, 한번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음, 마왕이 죽으면서 기껏 던전 키퍼용 아이템까지 남겨줬는데 써주는 게 예의겠지?”

어차피 성실하게 몬스터를 잡아서 성향을 되돌리고, 인간들의 틈바구니로 끼어들 생각은 없다. 이곳도 좋기는 하지만 언젠가 다른 사람이 찾아올 수도 있는 일. 언제까지나 안전할 수만은 없었기에 다른 아지트가 필요할 것 같기는 했다.

사실 이건 다 핑계고 마법사로써 던전이라는 것에 큰 매력을 느낀 것이 주된 이유였다.

“좋아. 그럼 어디를 목표로 잡지?”

던전 획득에 도전하는 것은 이미 마음을 굳혔고, 이제는 어디에 도전할 것이냐만 남았다.

나중에 다른 유저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상급 던전으로 고르자니 나 혼자 클리어할 수 있을까 걱정이고, 무난하게 중급으로 고르자니 침입이 너무 잦을 것 같아 꺼려졌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에 로그아웃을 했다.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몇 가질 운영자에게 메일로 질문하기 위해서다.

“흐흐흐, 이러면 충분하겠군.”

공지를 접한지 몇 시간 후, 운영자에게서 온 답변 글을 잃ㄱ고 크게 만족하며 다시 게임 속으로 재접속했다.

“여기가 좋겠군. 던전 획득 도전.”

던전 안에 들어가서 명령어를 외치니 던전의 입구가 갑자기 나타난 돌에 의해 막힌다. 순간적으로 짙은 어둠이 찾아왔지만 사방에 꽂힌 횃불 덕에 사물을 구별할 수는 있다.

그때 들려오는 안내음.

[중급 던전 메이헴. 총 4층. 클리어 제한 시간은 4시간입니다.]

클리어 제한 시간이 들려온다. 4층에 4시간. 각 층을 1시간 만에 돌파하라는 소리다.

사실 돌파 자체는 갓 마스터에 오른 자라도 시간 안에 할 수 있다. 마나만 충분하다면. 하지만 마나를 회복시키고, 그 동안 몬스터들로부터 몸을 지키려면 4시간이란 시간은 무척이나 빠듯하다. 그래서 비교적 약한 몬스터가 나오는 1, 2층에서 최대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나한텐 해당 없는 말이지.”

물론 지금까지의 얘기는 일반적인, 그리고 원 클래스 마스터 정도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블레스!”

축복을 사용해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키고, 달리기 시작한다. 손에 제대로 된 무기조차 들지 못한 스켈레톤들이 삐그덕 거리며 다가오지만 무시하고 지나친다. 느려터진 스켈레톤들이 공격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릴 때쯤이면 난 이미 5m이상 지나간 후이다.

그렇게, 1층은 달려서 내려갔다.

“물러나라!”

중급 던전의 2층이라고 해봐야 4, 50레벨 대의 몬스터가 고작이다. 하지만 수가 제법이었기에 입이 아프더래도 마왕의 반지를 이용했다. 60레벨 이하인 놈들이 마왕의 권위에 눌려 반항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 그렇게 최단 루트를 통해 3층으로 내려갈 때쯤 하도 말을 많이 해서 턱이 아파왔다.

“으흠, 시간은 널널하군. 여기서부턴 걸어볼까?”

3층부터는 60레벨 이하에게만 통하는 마왕의 반지도 잘 안 먹힌다. 시간을 체크하니 아직 던전에 들어온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남은 층수는 둘. 제법 여유 있었기에 천천히 걸었다.

물론 오르는지 알 수도 없는 경험치나 주는 놈들을 상대하긴 귀찮아서 로그의 마스터 아이템, 은신의 망토를 쓰긴 했다.

“여기부터가 진짜군. 뭐, 그래봐야 중급이지만.”

3층도 몬스터와 일체의 시비가 붙지 않고 무사히 내려왔다. 이제 마지막 4층!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며 은신의 망토를 벗었다.

알아보니 인비지빌리티를 이용해서 보스만 잡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던전의 마지막 층에서는 은신 마법이나 스킬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고작해야 80레벨 대인 놈들. 한 층 정도라면 가뿐히 쓸어주지.”

“키에에에!”

제일 먼저 앞을 가로막고 나선 건 듀라한이었다. 그러나 나선지 몇초 되지 않아 손에 들고 있던 머리통을 발로 차여 놓치고, 몸은 갑옷 째 동강났다. 다음 놈도, 그 다음 놈도 마찬가지다. 놈들의 검 휘두르는 속도, 움직이는 속도가 도저히 내 몸놀림을 따라오지 못하는 탓이다.

“으흠, 이래서야 어디 도움이 되레나?”

아무리 내 능력치가 높다고는 해도 전혀 상대가 안 되는 던전의 몬스터들을 보며, 뭔가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두 층만 정리해줘도 감사하지.”

삐이익!

드디어 4층의 마지막. 90레벨 대의 데스 나이트가 버티고 있는 보스의 방으로 들어섰다. 칙칙한 회색의 안광을 빛내며 앉아있는 데스 나이트. 제법 멋있어 보였지만 내가 또 남 폼 재는 꼴은 못 보지.

“받아라!”

“흠?”

치지지직!

내가 품에서 꺼내 던진 무언가를 왼손으로 잡아챈 데스 나이트의 손에서 하얀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잡아든 무언가를 재빨리 집어던지는 데스 나이트. 회색 안광이 붉게 변하며 검을 집어든다.

“오호? 이거 먹히네? 생각보단 효과가 없지만. 쩝!”

내가 던진 것은 프리스트의 마스터 아이템, 디바인 마크였다.

“와라!”

이렇게 말 안해도 이미 달려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상 한 번 외쳐줬다. 우에서 좌로, 사선을 그리며 베어오는 데스 나이트.

혼자서 마스터 급 유저 여럿도 상대한다는 놈이니 무시하지 못할 속도였지만 그렇다고 크게 긴장할 정도도 못됐다.

“제법 도움은 되겠어.”

제압을 해야 하면 힘들겠지만 죽이는 거라면 문제없다. 첫 번째 베기가 실패하자 다시 횡으로 베어오는 데스 나이트. 나는 자세를 더욱 낮추며 검을 피하고 진각을 밟았다.

“먹어라!”

수강이 가미된 정권에 데스 나이트의 갑옷이 부서지며 한참을 뒷걸음질 친다. 이어지는 선풍각. 데스 나이트가 황급히 팔을 들어 방어해보지만 이번엔 손목 보호대가 파괴되는 것은 물론, 뼈에 금까지 갔다.

“크흑!”

“더블 어택!”

왼손으로 한 번, 오른 손으로 한 번 베는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그 위력과 속도는 배가 되는 쓸 만한 스킬이었다. X자를 그리며 베어가는 공격을 데스 나이트는 힘겹게 막았다.

“퀵스텝, 연속 베기!”

더블 어택을 막느라 둔해진 몸으로 퀵스텝에 이은 연속 베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어디에든 3번 닿기 전까진 속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켜주는 연속 베기. 첫 번째 공격을 받아내긴 했어도 나머지 두 번의 공격에 데스 나이트는 가슴팍이 잘리고, 머리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콜로니스트님께서 중급 던전 메이헴을 획득하셨습니다. 던전의 입구에 주인의 이름이 표시되며, 던전 방어를 위해 던전 획득 중에 죽었던 몬스터는 모두 즉시 리젠됩니다.]

“흠, 됐군.”

중급 던전 메이헴이 나에게 귀속되었다. 그와 함께 내 손에 생겨나는 하나의 수정 구슬. 이것은 던전의 주인에게만 생기는 던전의 감시 카메라 화면 같은 것이었다. 이것으로 던전 내에 들어온 모든 유저의 모습을 제자리에서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벌써부터 쓸 일은 없지.”

이 패치가 된 후 첫 번째 던전 획득이므로 곧 구경을 위해 사람들이 몰릴 것이 뻔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작은 꾀.

남이 오기 전에 재빨리 던전의 입구로 가서 스톤엣지를 사용했다.

쿠웅-!

던전 획득을 도전했을 때처럼, 던전 입구가 커다란 바위로 가려졌다.

“후후, 이걸로 일단은 해결됐군.”

얄팍한 눈속임이었지만 던전에 주인이 생기는 일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라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서성이기만 할 것이다. 던전의 주인이 바뀌면서 몇 가지 내부 변화를 겪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쯤 생각하겠지.

“모두 모여라.”

던전을 얻으면서 생긴 수정구에 대고 말하자 곳곳에 있던 몬스터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다. 4층만이 아니라 3층, 2층, 1층의 몬스터들까지. 원래는 시스템 상 경계가 구분되어 이동하지 못하지만 던전의 주인으로써 몬스터의 재배치가 허용됐기에 모두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것이다.

“공간의 흐름에 따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혼자가 아닌 모두와 함께, 워프 게이트!”

타원형의 게이트가 내 앞에 나타났다.

“모두 들어가라!”

명령에 따라, 몬스터들이 쉴 새 없이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심한 마나의 유출이 느껴졌지만 마나의 반 정도는 날릴 각오를 하고 꿋꿋이 버티고 기다렸다. 그렇게 몬스터를 이동시키기 시작한지 한참 후, 스켈레톤 같은 허접한 몬스터 몇만 남은 것을 확인하고 나 역시 게이트 속으로 몸을 날렸다.

“뭐, 뭐야? 저것들은.”

“저 구멍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버그인가?”

“누가 운영자 좀 불러봐!”

웅성웅성.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적지 않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모두 지금 상황을 버그쯤으로 오해하는 분위기. 이런 어수선할 때를 이용해 서둘러 작전을 실행해야 했다.

“모두 저 안으로 들어가라!”

딸그락. 딸그락.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며 게이트에서 나왔던 몬스터들이 모두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 저게 뭐하는 거지?”

“저건 누구야?”

“몬스터를 마음대로 부리는데? 혹시 또 이벤트?”

많디많은 몬스터들이 모두 동굴 안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번엔 나를 둘러싼 웅성거림이 커졌다. 하지만 깡그리 무시. 던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밖을 향해 씨익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던전 획득 도전.”

쿠구궁-!

어디선가 나타난 커다란 돌이 던전 입구를 막으며 누군가의 침입을 차단했다.

[상급 던전 트레보. 총 6층. 클리어 제한 시간은 14시간입니다.]

클리어 제한시간 14시간. 총 6층. 상급 던전이라 다른 건지 제한 시간이 중급에 비해 확 늘어났다. 상급 던전은 1층부터 은신 계열 스킬, 마법이 사용 불가라는 페널티가 그 이유 중 하나로 크게 작용했겠지.

“그래서 내가 이놈들을 준비해 온 거지. 모두 전진! 덤비는 적은 모조리 죽여라!”

내가 중급 던전을 먼저 정복한 이유. 쓸데없는 체력 낭비, 마나 낭비를 막기 위해서다. 상대적으로 레벨은 떨어지지만 적지 않은 수의 몬스터가 밀려가니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2층까지 가는데 겨우 반절 밖에 병력을 잃지 않은 것이다. 3층에서 나머지의 3분의 2를 잃었지만, 4층에서 무려 세 마리나 되는 몬스터가 내 곁을 지켰다. 내가 일부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앞장서라.”

드디어 5층. 90레벨 대의 몬스터로 바글바글할 테지만 90대라고는 예전 던전의 보스였던 데스 나이트뿐인 셋을 먼저 앞세워 보냈다.

“휴, 골치 아프겠군.”

앞세웠던 셋 중에 둘은 순식간에 도륙되고 보스였던 데스 나이트만 분투한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데스 나이트와 싸우는 것이라 승부는 쉽게 갈리지 않았고, 그 사이 몬스터가 꽤나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90레벨 이상의 고레벨들이다.

“화룡의 이빨.”

화르르르륵!

금방이라도 포효를 할 듯한 화룡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몬스터들에게 달려든다. 뼈밖에 없어서 뭐 먹을 것도 없어 보이지만 화룡은 마냥 좋은 듯, 언데드들의 볼품없는 몸을 씹고 또 씹는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어쨌든 길이 뚫렸다. 달린다. 몬스터 레벨이 90대면 어쩌다라도 날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주위 경계는 철저히 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빌어먹게도, 계속 한적한 모습을 보이던 던전의 어느 지점에 몬스터들이 엄청나게 몰려있었다.

“화룡 질주!”

화룡의 갑옷을 일으킨 것처럼, 온몸에 불꽃이 넘실거린다. 그리고 두 다리에 새로움 힘이 가득 차온다. 한 번의 도약이면 5m고 10m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힘껏 발을 구르니 앞으로 뻗어나가는 몸이 멈추질 않는다.

“좋구나!”

길이 쭉쭉 뚫렸다. 그대로 들이받으면 아무리 덩치 큰 몬스터라도 같이 날아가 버리고 방어력이 약한 놈들은 그대로 녹아내린다. 길이 아주 좁아지는 길목이었기에 몬스터들의 피해는 더 컸다.

“후우, 후우.”

잠시 후, 화룡 질주의 지속 시간이 끝났지만 달궈진 몸은, 빠르게 뛰는 심장은 쉽사리 가라앉질 않았다. 그 여세를 몰아 5층도 클리어. 그 와중에 화룡의 검 특수 능력을 무려 5번이나 써서 정확히 반절의 마나가 사라졌지만 6층에는 보스 몬스터 하나뿐이기에 마음 놓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쯤에서 작업을 해놔야겠군.”

6층은 외길을 따라 가다가 보스가 있는 넓은 방으로 가는 구조이다.

먼저 방에 들어가기 전에, 약간의 사전 작업을 해놓고 문을 박찼다.

“메테오 스웜!”

넓은 천장을 가득 메우며 생성된 화염의 구들이 땅으로 쏟아졌다.

콰과과광-!

“크워어어!!”

“글레이셜 게일!”

이번엔 반대로 엄청난 한기가 모든 생명체를 얼려 죽이고야 말겠다는 듯 맹렬히 불어 닥쳤다.

갑작스런 온도의 변화로, 조금전 메테오 스웜을 간신히 받아냈던 변종 미노타우르스의 도끼에 균열이 생긴다.

“화룡의 이빨!”

“크워!”

쨍그랑!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덤벼드는 화룡을 힘으로 베어버리려던 변종 미노타우르스의 도끼에 균열이 심해지더니 이내 박살나 버렸다.

빗 맞긴 했지만 나머지 화룡을 몸으로 막아낸 변종 미노타우르스! 몸은 더 쓸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졌지만 눈만큼은 붉게 충혈 돼 당장에 누구 하나 죽어 나갈 것 같았다.

“크아아아앙!”

“따라와라!”

쾅! 콰광! 콰과과광!

변종 미노타우르스를 유인해 간 곳은 이미 지나왔던 외길. 그곳에 깔려있던 온갖 마법 트랩들은 잊혀진 대륙에서 미노타우르스를 상대할 때처럼 아주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결국 멍청한 소인건 똑같군.”

털썩

퍼벙!

사람들이 100레벨에 가깝다고 추정하던 변종 미노타우르스는 죽으면서까지 남은 매직 트랩들을 깔아뭉개면서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했다.

[콜로니스트님께서 상급 던전 트레보를 획득하셨습니다. 던전의 입구에 주인의 이름이 표시되며, 던전의 방어를 위해 던전 획득 중에 죽었던 몬스터는 모두 즉시 리젠됩니다.]

“휴우, 생각보다 쉽게 끝나서 다행이군. 이제…… 시작해 볼까?”

또다시 입구로 달려가서 몰래 바위를 만들어 입구를 막고, 마왕에게서 얻었던 던전 키퍼의 수정구로 각 층으로 가는 이동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 다음엔 1층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다 2층으로 몰았다. 대신 1층은…… 가지고 있던 모든 트랩과 보석을 이용해서 마법 트랩들로 꽉꽉 채웠다.

한두 팀 잡고 말 것도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연쇄 폭발은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고, 일반 트랩도 섞어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공격도 준비했다.

그렇게 1층은 트랩 밭으로, 2층은 1,2층의 몬스터를 몽땅 몰아넣은 몬스터 밭으로, 3층은 트랩 반, 몬스터 반으로. 4층은 3층의 몬스터 반과 4층의 몬스터. 그리고 막판에 허를 찌르는 트랩들로. 5층은 군데군데 트랩을. 그리고 마지막 6층은……나에게로 오는 외길에 수도 없는 마법 트랩과 문 앞에 변종 미노타우르스를 배치시켜 놓는 식으로 상급 던전이되, 최상급 던전 이상 가는 수비를 자랑하는 마의 던전으로 탈바꿈 시켜갔다.

난 이제 여간해선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도 싫고, 세상도 싫다. 난…… 세상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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