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군 침공
현금화 시켰던 돈들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며칠 동안은 술에 절어 살았다. 하지만 전혀 속이 풀리지 않는다.
아무리 마셔도, 울어도 답답함만 쌓여갈 뿐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그러다…… 청첩장을 받았다.
결혼식 날짜는 그렇게 헤어진 뒤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는 날이었고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수십 차례 고민 끝에……. 인사는 하지 않고 먼발치에서만 보고 왔다.
소연이는 날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명훈은 날 발견했다. 그리고 짙은 조롱과 같은 웃음. 심장 깊숙이 파고드는 그의 비웃음은 내게 심한 자괴감을 들게 했다.
“접속.”
그 상처 때문일까? 난 돌아오자마자 한동안 끊었던 힐름에 접속했다. 이 자괴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치 있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로 도피한 걸지도 모른다. 접속하자마자 향한 곳은 은행이었다.
“잔고 확인 부탁드립니다.”
은행용 카드를 내밀자 은행원 NPC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받아서 처리한다.
“모두 15,300골드가 예금되어 있습니다. 인출하시겠습니까?”
“헉! 들었어? 1만 5천 골드래!”
“어, 엄청난 갑부잖아? 누구지?”
“알게 뭐야, 아이템 좀 달라고 해보자.”
은행원 NPC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주위에서는 난리가 났다.
1만 5천 골드. 원래는 8천 골드가 있어야 정상이지만 4만 골드에 달하던 돈을 모두 제 주인에게 돌려주는 과정에서 에크만과 알테어가 한사코 반만 받겠다고 우겨서 내게 떨어진 7천 골드를 더한 금액이다. 예전에 그 장소를 팔았던 정보 길드가 손해배상을 요구해 왔지만 그 돈은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조금씩 걷어서 배상해줬다.
“2천 골드만 인출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하다가 2천 골드를 인출하고 보석상점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줄줄이 따라붙는 초보 유저들이 귀찮게 굴었지만 무시에 무시를 거듭함으로써 떼어놓았다.
일단 보석상점에서 파는 보석들 중 필요한 종류의 것들은 상급품으로만 전부 사들였다. 그리고 부족하다 싶은 종류의 것들은 바로 옆에 있는 광장으로 나가 보석상이 사들이는 것보다 조금 더 비싼 가격에 사들였다. 준비를 끝마치고 마지막으로 한 것은 누군가에게로의 귓속말이었다.
“귓속말, 에크만.”
“에크만님, 콜로니스트입니다.”
“으잉? 네가 웬 일이냐?”
“저번에 말씀하신 그 사냥터로……. 절 데려가 주십시오.”
“음?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냐? 뭐, 좋아. 그러면 블로흐에서 저번에 만났던 곳으로 와라. 어차피 우리도 이곳에서 그 늙은 도마뱀 때려잡을 수 있을 때까지 있을 거니까. 물이랑 음식은 넉넉하게 챙기고.”
“귓속말 해제.”
목적지는 정해졌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버틸 생각이니 물과 음식은 넉넉히 준비하고, 블로흐에서 회색분자를 만났던 곳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에크만에게 귓속말을 하니, 저번에 나타났던 곳에서 빛의 기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로 와.”
“예.”
에크만이 있는 곳으로 가자 에크만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시 솟구치는 빛의 기둥. 그 말이 약속의 언어였는지 눈떠보니 주위가 확 달라져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넓은 황무지.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그려진 커다란 원이었다.
“이 원안이 안전지대니까 쉴 때는 여기서 쉬면 되고, 처음부터 2마리씩 잡는다고 설치다간 죽기 딱 좋으니까 알아서 해. 아마 처음엔 한 마리도 버거울 걸? 뭐, 여러 번 죽어도 한 마리만 잡으면 충분히 복구가 되니까 처음엔 죽는 거 두려워하지 말고 공략법을 찾는 게 좋을 거야. 이곳의 몬스터들이 주는 경험치는 타이탄도 비할 바 못 되니까.”
“……!”
나를 순식간에 마스터 레벨로 끌어올려준 타이탄. 그런데 그놈들이 주는 경험치와도 비교가 안 된다라?
“여기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어떤 놈들이죠?”
“나랑 알테어가 노는 곳은 여기와 좀 다르지만 여기라면……. 오크던가?”
“예에? 오크라고요?”
“그래. 오크. 그런데 일반 오크와는 달라. 아마도 지금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오크는 엄청나게 퇴화된 것이고 이곳의 오크는 퇴화되기 전, 그러니까 고대의 오크인 것 같더군.”
“고대의 오크…….”
듣기론 뭔가 대단한 것 같지만 솔직히 약간 경시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대에는 강해서인지 몰려다니지 않으니까 한 마리씩 끌고 와서 사냥하면 할 만할 거야. 아, 저기 온다.”
“어디……. 헉?!”
에크만이 가리킨 곳에는 오우거 만한 키에, 놀처럼 둥글둥글한 체형의 몬스터 하나가 어슬렁대고 있었다.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이는 에크만. 그가 나에게 거짓말 칠 이유는 없지만……. 도무지 그 조그맣고 약한 오크와 매치가 안 된다.
“그럼……. 일단 상대해 보죠.”
“아, 잠깐만!”
“왜 그러시죠?”
“아까 그곳에서 여기로 오는 시동어는 ‘잊혀진 대륙으로!’다. 난 이제 다른 곳으로 갈 거거든. 너도 이곳에서 쭉 있다가 이놈들 상대하는데 여유가 생긴다 싶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봐. 이놈들보다 훨씬 강력한 고대의 몬스터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예.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이곳으로 오는 약속의 언어를 알려준 에크만은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가기 위해 북서쪽으로 뛰어갔다.
“나도 시작해 볼까?”
일단 어느 정도의 몬스터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드래곤 슬레이어와 화룡의 검의 특수 능력은 쓸 생각을 버렸다.
정면을 향해 달려가자 제법 빠른 속도로 주먹을 내려치는 오크. 상당한 속도였지만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옆으로 살짝 피하고 검을 찔러갔다.
“컥!”
“퍼억-!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을 잃었다.
오크가 팔꿈치를 휘둘러 나를 즉사 시킨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첫 번째 공격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속임수였다. 더 빠르고 강한 공격을 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날 속인 것이다.
고대의 오크. 이놈, 생각보다 영악했다.
* * *
이곳에 들어온 지 몇 달이 흘렀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다만, 내가 로그 클래스와 기사 클래스, 성직자 클래스, 격투가 클래스를 마스터하고 새로 궁수 클래스의 레벨을 올리고 있다는 것과 5번째로 발견한 지역에 와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가끔 에크만과 알테어가 놀러왔지만 약간의 기술 교환과 그들의 목표인 에인션트 드래곤 사냥을 위한 호흡 맞추기를 위한 것이지, 딱히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다.
그간 에크만, 알테어를 제외하고 대화를 나눈 건 창고 NPC와 식료품점 NPC 정도가 고작이다.
“음뭐어어~!”
콰광!
그동안 내가 한 일 중 하나가 정해진 몇 군데의 안전지대 이외에 나만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이 안전지대에는 내가 설치한 고위 마법 트랩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고, 지금처럼 멍청한 몬스터가 접근을 하려다간 혼자 죽기 딱 좋다. 물론 그렇게 죽고 남긴 경험치와 아이템은 모두 나에게로 돌아왔다.
“미노타우르스인가?”
바깥세상의 미노타우르스와 이곳의 미노타우르스는 사뭇 달랐다. 바깥의 미노타우르스는 거대한 도끼를 들고 두 발로 서있는 소머리 괴물이지만, 이곳의 미노타우르스는 정말 말 그대로의 소였다. 도끼 같은 무기 없이, 그저 네 발로 돌진해서 상대를 죽이는 소. 그 덕에 트랩에 걸려 죽는 일이 제일 많기도 했다.
“간단해서 좋기는 한데 너무 트랩에 손상을 많이 입힌단 말이야…….”
돌진이다 보니 항상 미노타우르스는 안 터져도 될 마법 트랩을 터뜨리고 죽었다. 그리고 죽어서도 꽤 많은 트랩을 발동시킨다. 뭐, 그냥 상대하려면 무시무시한 돌진 공격력을 피하느라 진땀 빼야하니 이편이 낫긴 하지만.
“음, 벌써 트랩이 다 떨어진 건가……. 별 수 없이 나갔다 와야겠군.”
망가진 안전지대를 수리하기 위해 품을 뒤지다가 트랩이 다 떨어졌음을 알았다.
물론 트랩 없이도 사냥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종종 처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진땀을 빼거나 기분 나쁜 두통을 맛봐야 하므로 조금의 귀찮음을 감수하는 편이 좋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사야 할 것들이고.
“보석과 식량도 조금 사와야겠군.”
이곳에서는 리턴이나 텔레포트 스크롤이 먹히지 않았다. 오직 정해진 안전지대와 안전지대를 잇는 마법진(이것은 직접 가서 NPC에게 등록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과 밖으로 나가는 마법진만이 사용 가능했다. 결국 꽤 멀리 있는 안전지대까지 가서 밖으로 낭ㄴ 후 다시 리턴을 사용해서 인근 마을로 돌아가는 수고스러움을 겪어야 했다.
“너 어제 홈페이지 봤어?”
“응? 안 봤는데, 왜?”
“이런, 바보! 그걸 안 봤단 말이야?”
“왜, 무슨 일인데?”
“곧 힐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이벤트가 열린데. 이름 하여 마왕군 침공!”
식료품점에 들어와서 대량 주문할 음식을 고르고 있는데 한 테이블에서 두 사람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장비를 보니 레벨은 70대 후반 정도. 한참 사람들에게 레벨을 뽐내고 레벨 올리기가 고비일 시기이다.
최대 규모……. 마왕……. 나하곤 상관없는 얘기지.
“우와~. 마왕이라니, 대단한데? 마인 이벤트보다도 큰 이벤트라면 대체 병력이 얼마란 소리야?”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데 이 이벤트가 재밌는 건 단지 크다는 이유 하나만이 아니라고!”
“또 뭐가 있는데? 천사들이 우리 편이라도 든데?”
“에…….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중요한 건 우리가 마왕군 편에 설 수 있다는 거야! 오늘부터 일주일 간 신청을 받는데, 마왕군이 되면 이마에 마족의 낙인이 그려지고 인간을 죽이면 인벤트가 끝난 후에 선 수치가 대신 올라간대. 그리고 이름난 사람이 신청하면 몇 명 추려서 백인장 같은 것도 시켜준다던데? 전쟁이 끝나고 이긴 쪽에는 공에 따라 아이템을 지급하고.”
“인간과 인간이 싸우는 대규모 전쟁이란 소리잖아? 재미있겠다! 근데……. 그러면 마족 편에 서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을까? 어차피 마족이 이겨도 아이템을 준다면 마족 편에 서려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마즌 말이다. 아무리 성을 가지고 있는 이점이 있어도 마왕의 군대라면 많은 병사와 강한 힘을 지닌 몇몇의 간부가 있을 공산이 크니까. 저울질 해보면 마왕 쪽에 더 기울어질 공산이 컸다.
정의감에 똘똘 뭉친 바보들이나 울며 겨자 먹기로 성을 지켜야하는 성주들이 아니라면.
“아, 그것 때문에 약간의 페널티를 부여한다더군. 마족의 편에 선 자는 같은 마족이나 몬스터를 죽이면 안 된다나? 만약 실수로라도 죽이면 PK처럼 인식돼서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인간과 마족, 둘 다한테 공격 받게 된대. 뭐, 실수로 죽였어도 그만큼 인간을 많이 죽이면 원상태로 회복된다고는 하지만. 결국 인간을 죽여서 경험치를 얻어야 한다는 소리니 이벤트 동안 사냥하는 건 무리지. 그리고 마족 편에 섰다가 인간이 승리했을 경우 배신자 딱지가 붙으면서 성향이 팍 깎인다던데? 사람에 따라선 성향이 악으로 변할 수도 있대.”
“끄응, 복잡하네.”
“그러니까 이길 자신이 없으면 참가하지 말라는 소리지. 아! 프리스트 같은 성 속성 클래스는 마왕군에 참가할 수 없고, 네크로맨서나 어쌔신 같은 암속성 클래스는 무조건 마왕군 참가라더군. 대신 마스터 클래스 유저는 프리스트 쪽 스킬이 암속성으로 바뀌고 일부 스킬 사용이 제한되면서 참가가 가능하고.”
제법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머리를 쓴 듯하다. 유저가 마왕군에 참가하는 이벤트. 흥미 끌기는 성공이지만 양측 군대의 균형이 맞을지가 문제군.
“으흠, 그런데 양쪽의 균형이 너무 안 맞으면 어떻게 해? 예를 들어 마왕군 쪽에 유저가 너무 많이 몰려가서 수비할 유저의 수가 너무 적다던가.”
“그것도 다 대비가 되어있지! 신청기간은 일주일 동안이지만 시작하는 건 2주 정도 후거든. 그동안 운영진들이 양측 병력을 계산하고 그에 맞춰서 NPC를 내놓는대. 결국 어느 쪽이 병력 운용을 잘하느냐가 문제겠지.”
결국은 간부급들의 머리싸움이 되겠군. 마왕군 측의 간부는 전부 AI일 공산이 크니 변칙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인간들이 조금 유리한 건가?
“윽, 그럼 인간이 질 수도 있겠는데? 보나마나 레이지가 진두지휘할 텐데 콜로니스트가 있던 때라면 몰라도……. 거트 그놈은 마인 이벤트 때도 판단 제대로 못 내려서 다 말아먹을 뻔 했잖아?”
“쩝. 그렇긴 하지. 그나마 한 소리하던 아론이랑 글로린도 빠져버려서 더 제멋대로 일 텐데……. 걱정이다. 걱정이야. 나도 마왕군 편에나 서버릴까.”
“그것도 그렇고 병력 계산할 때 숨어서 안 나오는 고렙들도 체크해 넣을 거 아니야? 그럼 병력이 부족할 텐데……. 그렇다고 마왕군 쪽에 붙자니 이런데 꼭 나오는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라는 말이 걸리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 둘을 뒤로하고 음식들을 사서 밖으로 나왔다. 보석상과 도둑 길드에 들러 보석과 트랩들을 채워 넣고 잊혀진 대륙으로 돌아왔을 때, 마왕군이네 하는 내용들은 모두 먼지처럼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2주 후, 물리적 방어력에서 만큼은 드래곤의 비늘과 필적할 정도로 단단한 비늘을 자랑하는 초록 도마뱀, 리자드맨들이 출몰하는 지역에서 새로운 나만의 안전지대를 만들고 있을 때 에크만과 알테어가 찾아왔다.
“여어~. 잘 지냈나?”
“그럭저럭요. 한데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이벤트 때문에 왔지. 너, 인간 편에 남는다며?”
“인간…… 편?”
에크만은 오자마자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으잉? 설마 모르고 있었냐? 몰라서 신청 안 한거야? 뭐, 상관없지. 우리야 어차피 너랑 반대이기만 하면 되니까. 흐흐흐!”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마왕군 침공 이벤트! 네가 마지막 날까지 마왕군 참가자 명단에 없는 걸 보고 우린 마왕군에 지원했지. 흐흐흐, 이제 너랑 정당한 방법으로 대결할 수 있게 됐다!”
내가 매번 듀얼을 거절하자 이젠 별 방법을 다 쓴다. 하지만…….
“전 그 이벤트에 참가 안 할 건데요. 며칠 전 운영자가 병력 파악한다고 체크하러 왔을 때도 인간 편은 안 들 거라고 말해놨고요.”
“뭐, 뭣이?! 그럴 순 없어! 넌 꼭 참가해야해! 우리가 뭣 때문에 마왕군 편에 섰는데!”
광분하는 에크만과 알테어. 하지만 뜻을 굽힐 생각은 없다.
1대1이라면 아직 에크만과 알테어에게 밀리겠지만 게릴라전을 병행해서 대규모 부대와 싸운다면 날 막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니까. 속에 쌓인 울분을 푼다거나 학살을 즐기려는 마음도 없고, 그저 조용히 지내련다.
“에라이, 독한 놈! 이 인정머리 없는 놈! 의리 없는 놈!”
“아무리 그러셔봤자 소용없습니다.”
“에잇……. 아! 흐흐흐, 생각났다. 널 움직일 묘책이!”
“……?”
이름난 사람에게는 백인장 같은 직책을 맡긴다더니 한 자리 떠맡았는지 ‘그럼 나도 안 해!’라는 소리는 못하고 악의 없는 욕만 해대던 에크만이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오면서 한 가지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지~. 이번 이벤트 준비 자금으로 레.이.지.가 약 2만 골드 정도를 풀었다더라? 현금으로 따지면 2억씩이나 되는 돈을 말이야. 너, 8천 골드 빌리러 갔다가 창피만 당하고 왔다며? 2억이나 되는 돈을 그 사이에 벌어들였을 리는 없고, 그때도 충분한 돈이 있었다는 소린데……. 그 돈만 빌려줬으면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여자 애.”
“……!”
내전 사건 때문에 나한테 악감정이 있다는 거, 그 당시 8천 골드가 아니라 2만 골드가 있었어도 소연일 구하지 못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하지만 그 얘길 듣고 나니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이성을……. 서서히 지워갔다. 8천 골드로는 안 됐을지 몰라도 2만 골드 정도라면……. 그걸 자본으로 독립까지 해서 소연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거트 형의 성격에 2만 골드를 선뜻 풀 정도라면 남겨둔 돈도 꽤 된다는 소리일 텐데 그때 충분히 빌려줄 수 있지 않았을까…….
가슴속 깊이 잠재워뒀던 슬픔과 분노가 레이지에 대한, 거트라는 인간에 대한 증오로 빠르게 변해갔다.
“험험, 네가 하겠다고만 하면 우리가 운영자한테 말해서 우리 대신 마왕군 쪽에 넣어줄 수도 있는데……. 대신 우리는 인간 쪽에 가서 너랑 싸우고 말이야. 어때?”
“……그래 주시겠습니까?”
“무, 물론이지!”
에크만은 말을 꺼내놓고도 미안한지 연신 머리를 긁적이고 말을 더듬었다.
하기는, 지금 나와 싸우기 위해서 이용하고는 있지만 그 일이 있었을 때 자기 일처럼 도와줬던 게 이들이니까.
잠시 후, 운영자를 불러 설득하는 알테어와 에크만. 그러나 운영자의 일관된 대답은…….
“그건 안 됩니다. 이렇게 큰 전력의 변동이 있으면 NPC 밸런싱을 처음부터 다시 맞춰야 하는데 고작 이벤트까지 이틀 남은 상황에서 그건 무리입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인심을 좀 써서…….”
“절대! 안 됩니다. 더구나 두 분은 마왕군에 몇 없는 천인장의 자리까지 맡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그거야 다른 사람 주면 되고, 우린 꼭 쟤랑 싸워야 한다니까!”
“어차피 콜로니스트님은 인간 측이 아닙니까! 비록 계산에서 빼놨었지만. 인간 편은 어차피 상승 쪽이라면 약간의 변동도 허용되니 콜로니스트님이 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아, 글쎄. 쟤는 꼭 마왕군 편에 서야 한다니까?”
“아무튼 절대, 안 됩니다!”
운영자는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그러자 콧김을 내뿜는 알테어. 불같은 성격에 운영자와 한판 붙기라도 할 태세이다.
“그만들 두십시오. 어차피 마왕군 쪽은 안 갑니다.”
“뭐? 너 레이지랑 싸우는 걸 포기할 셈이냐?”
“아니오. 그럴 순 없죠.”
“그럼?”
“당일날……보여드리겠습니다.”
에크만과 알테어는 못 마땅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자신들과 반대편으로 참가한다니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날 밤, 나는 잊혀진 도시를 떠나서 필요한 아이템들과 정보를 모았다. 내게 큰 도움이 되어줄 보석과 트랩은 돈을 아끼지 않고 최상급으로, 무한의 주머니가 꽉 찰 때까지. 그리고 나와 에크만, 알테어만 아는 잊혀진 대륙에도 일부 가져다 놓았다.
일을 벌인 후, 상점을 이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한 준비다.
“마왕군 페널티가 더 있었군. 전쟁 중에 죽은 마왕군 유저는 단 세 번만 부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벤트가 시작됨과 동시에 마왕군의 거점인 마계의 입구라는 섬이 생겨난다. 섬과 대륙을 잇는 건 모두 다섯 개의 게이트와 세 개의 긴 다리. 마왕군의 패배 조건은 오직 마계의 입구에 있는 마왕의 죽음? 재미있군.”
마오아만 죽으면 끝난다. 이것은 인간들에게 주는 어드밴티지이면서 페널티였다. 마왕만 죽이면 쉽게 끝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왕군은 계속해서 리젠될 테니까. 즉, 마왕군은 마왕만 잘 빼돌리면 지지는 않을 수 있다는 소리다.
무게 잡고 자존심 세울 마왕이 도망 가잔다고 순순히 따라올 리는 없겠지만
* * *
“자, 카운트다운! 10, 9, 8, 7, 6…… 2, 1!”
“와아아아!!!”
거친 먹구름이 낀 하늘에 전형적인 모습의 마왕의 영상이 떠오르며 인간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지옥으로 오라! 크하하하하하하!”
“지겹군. 저런 멘트.”
너무 흔해빠진 멘트에 고개를 저으며 마계의 입구가 있는 죽은 자의 땅 남쪽으로 향했다.
“@%#^$%%”
시작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의 게이트 및 다리 파괴를 막기 위해 이벤트 시작 1시간 전부터 몬스터들을 배치시켜 놓은 죽은 자의 땅 최남단.
인간의 몸으로 그곳에 도착하자 몇몇이 무기를 겨누고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역시 인간과 마왕군 측은 유저라 할지라도 서로 말이 안 통하는군. 귓속말이나 메시지도 안 통한다더니……. 이쯤 어디라고 했는데?”
무기는 겨눴지만 혼자 온 것이 뭔가 수상해 선뜻 공격하진 못하는 마왕군 측 병사들. 그들에게 둘러싸여 한참을 두리번거리자 익숙한 얼굴을 한 사내가 손을 흔들며 나섰다.
“@$%^%#^#”
“알테어님,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도 내 말을 알아듣진 못할 테지만 미리 말해놓은 것이 있기에 그는 주위 병사들을 물리고 나를 게이트로 데려갔다.
“#$%#^#*^"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손짓으로 보아 따라오라는 듯했다. 게이트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워프 게이트를 지나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장소는 으스스한 분위기의 섬으로 바뀌어 있었다.
“&%^%#”
다시 한 번 알테어가 뭐라 말하자 주위의 병사들이 물러섰다. 일단 알테어는 천인장이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참을 이동하자 드디어 알테어의 행동에 제지를 하고 나서는 자가 있었다.
간부 급 중 하나인지 다른 리치들과 달리 금테가 달린 로브를 입은 해골바가지. 리치 로드쯤으로 보였다.
“$&^#%^”
“#&%^%$”
나로사는 알아 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로 말을 주고 받던 알테어와 리치로드는 서로 노려보다가 등을 돌렸다. 계급상으로는 리치로드가 위겠지만 알테어나 에크만이 언제부터 그런 걸 따지는 자들이던가? 돌아선 리치로드에게 중지를 치켜세우기까지는 했다.
그 다음에도 간부 급으로 보이는 데스 나이트 등을 보긴 했지만 그들은 알테어와 시비 붙기 싫었는지, 아니면 날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선지 슬쩍 쳐다보기만 하고 지나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걷자 미노타우르스보다는 조금 작은 덩치의 마족이 왕좌처럼 생긴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마왕인 듯.
“넌 뭐냐?”
과연 운영자에게 들었던 대로 마왕은 마족의 언어 이외에도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콜로니스트. 인간이다.”
“당돌하군. 여기가 어딘줄 알고 그렇게 뻣뻣한 건가?”
“내가 비굴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너에게 손 비비며 아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와 협상을 하기 위해서다.”
“협상이라?”
마왕은 내 태도가 재미있었는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협상. 공동의 적을 가진 자는 아군이라 했지. 그래서 널 내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온 것이다.”
“공동의 적을 가진 자는 아군이라, 맞는 말이군. 그렇다면 너도 인간을 적대시한다는 소린가?”
“아니,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를 적대하고 있지. 그리고 그 일부를 박살내기 위해 인간 전체라도 상대하겠다. 하지만 혼자서는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지. 그래서 너의 협력을 얻으러 온 것이다.”
비굴할 필요는 없었다. 마왕이 거절하면 혼자서라도 하면 된다.
“후후, 재미있는 자로군. 그래, 내가 너와 손을 잡으면 뭘 얻을 수 있지?”
“무력이다. 이곳으로 오다 본 몇 백 마리의 떨거지보다는 낫다고 단언하지.”
“크하하하! 재미있군, 재미있어. 네가 그 정도의 무력을 가졌다는 건가?”
“마지막 말을 하는 마왕의 눈은 싸늘히 식어있었다.
믿지 못하는군.
“그렇다면 보여주도록 할까?”
스르릉-!
마왕 주위를 지키고 있는 간부들과 몇몇 떨거지들을 훑어보며 드래곤 슬레이어를 빼들었다.
“그만! 좋다.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럼 어떻게 해주면 되지? 이제 와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건 불가능한데 말이지.”
“그건 필요 없다. 난 인간으로……. 인간인 채로, 그들에게 복수해 줄 생각이니까. 혹시 내가 마족의 언어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나?”
“그건 가능하다. 카브!”
마왕이 나를 향해 마법을 쓰자 주위에서 수근대는 마족들의 목소리가 다 들렸다.
내가 자신들 전부와 싸우려 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좋은 소리는 없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좋군. 그럼 이제 그럴싸한 자리 하나만 주면 되겠군. 쓸 만한 병력을 통솔하려면 제법 높은 자리인 것이 좋겠지.”
“음……. 천인장의 자리가 아직 남아 있는지 모르겠군.”
“천인장? 훗,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건가?”
“저런 무엄한!”
이제는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마왕에게 함부로 대하자 화가 난 마족들이 들고 일어날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자리를 바라는 거지?”
“음……. 아, 그게 좋겠군.”
“그것이라?”
“저기 리치의 자리 정도면 괜찮겠군. 리치들로만 부대를 짜서 게릴라 한 번 해볼까 생각 중이니까.”
아까 마주쳤던 그 리치로드다.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벌떡 일어난다. 뼈만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분노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는 이번 일의 간부다. 절대 자기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내가 들어왔으니 한 놈 정도는 사라져도 괜찮겠지. 내가 저놈과 싸워서 이기면 내가 그 자리를 갖는다니 괜찮겠지?”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제가 이 버릇없는 인간의 버릇을 확실히 고쳐놓도록 하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흐흐흐!”
“그렇다는군. 말했듯이 리치로드는 우리 군의 간부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마왕은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나와 리치로드의 대결을 인정하고, 관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해골을 끝에 단 뼈 지팡이를 고쳐 잡고 전투 자세를 취한 리치로드. 당장이라도 싸움을 시작할 기세였다. 싸우는 것도 좋지만 그전에…….
“잠깐!”
“뭐지?”
“흐흐, 벌써 무서워진 것이냐? 마왕님의 허락도 이미 떨어졌으니 도망쳐도 소용없다.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내가 한 손을 들고 멈출 것을 요구하자 리치로드는 기고만장해져서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뭔가 착각하는군. 난 싸우기 전에 한 가지를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것뿐이다.”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
“저놈, 죽여도 되나?”
손가락으로 리치로드를 가리키자 놈은 또다시 광분했다.
“뭐, 뭣이?! 인간 따위가 어디서 감히 그런 말을!”
“……마음대로 해라. 능력이 된다면.”
마왕은 흥분한 리치로드를 한번 쓰윽 훑어보더니 내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하며 팔짱을 꼈다. 난 관전할 테니 잘 해봐라. 뭐 그런 의미로 보였다.
“크흐흐, 쉽게 죽이진 않으마. 네놈을 한 번 가지고 놀다가…….”
“한 번.”
“뭐? 한 번만 봐달라는 거냐? 이제 와서? 크하하하, 그건 안 되지!”
“딱 한 번이다. 내가 딱 한번만 손을 쓰면 넌 죽는다.”
“이놈이 끝까지! 다크 선더!”
츠파팟!
리치로드가 지팡이를 모로 휘두르자 검은 번개가 굉장한 속도로 뿌려졌다. 물론…… 옛날 기준으로.
“민첩성에 많이 투자한 보람이 있군.”
로그와 기사, 격투가 클래스를 올리는 동안 상당히 많은 양의 보너스 능력치를 민첩성에 투자했더니 리치로드의 움직임이 보이다 못해 예고하고, 미리 방향까지 찍어주고 쏘아내는 것처럼 피하기 쉬웠다.
“이익, 쥐새끼 같은 놈. 체인 다크 선더!”
“백스텝!”
그냥 직선 공격으로는 날 맞추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번엔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는 체인 계열을 택했다.
하나 체인 라이트닝이나 체인 다크 선더나. 일반의 것들보다는 속도가 느렸고 난 백스텝을 이용해서 다가오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인간 따위가! 메테오 스웜!”
내가 자신을 조롱한다고 느꼈는지 리치로드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무식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메테오 스웜을 시전해 버렸다.
일ㄴ 수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던 듯 마왕마저 벌떡 일어선 상황. 그러나 나는 여유 있게 폭발 범위에서 도망쳤다. 워낙 메테오 스웜의 파괴 범위가 넓은지라 완벽히는 빠져나가지 못했지만 약간의 그을림 정도가 고작이었다.
“큭,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군.”
“리치로드, 네 이놈!”
“마, 마왕님. 그게…….”
마법 한 방으로 마왕의 처소를 엉망으로 만든 리치로드는 마왕의 호통에 찔끔해서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리고 그동안 난 한 가지 아이템을 빼들었다.
귀찮게 오래 끌 것 없이 단번에 해치울 생각으로.
“귀찮게 투덕거릴 것 없이 한 번에 끝내주마.”
“그딴 깃털로 무슨…….”
멋들어지게 생긴 붉은 깃털을 꺼내들자 리치로드가 비웃는다.
“피닉스의 꼬리, 사용!”
과거 화탑 정벌이 끝나면서 얻은 피닉스의 꼬리.
대장사를 경험치 손실 없이 100% 확률로 살려내는 아이템이지만 타깃이 리치로드라면 또 상황이 달라졌다.
“끄어어어억!!!”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포션에 닿아도 데미지를 입는 언데드다. 그런 언데드에게 되살아나는 아이템을 사용한다면 결론은……?
“즉사지.”
투둑!
몸속 가득 찬 죽음의, 어둠의 기운이 모두 사라져버린 리치로드는 단순한 뼛조각에 불과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뼛조각들과 펄럭이며 그 뼛조각들을 덮는 로브. 그걸 쳐다보는 주위 마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리치로드라하면 간부라 불릴 정도의 강자 중 하나인데 너무도 쉽게 당해버렸으니까. 아니, 당한 게 맞나 싶기까지 할 테니까.
“이제 그 자리는 내 차지군.”
“그렇군. 리치들은 네게 맡기지.”
마왕은 토 달지 않고 순순히 내게 그의 권리를 양도했다. 그러자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인간족의 배신자의 수식어를 획득하셨습니다.]
“인간족의 배신자라, 우습군. 하지만 나쁘진 않아.”
갑자기 오한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 성향이 선에서 악으로 변하는 듯했다.
이제부터 PK를 하게 될 테니 상관은 없지만 미리부터 이렇게 제약을 걸어놓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군.
“잠깐!”
“또 뭐지?”
이번엔 알테어와 에크만이 동시에 나섰다.
“우리도 직책에 불만 있소이다!”
“천인장으로 모자라단 건가?”
“당연하지! 적어도 우린 저 녀석과 비슷한 위치에는 있어야 하거든!”
“좋다. 그럼 각자 상대를 정하도록.”
마왕의 대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둘은 각자 상대를 한 명씩 골라잡았다.
잠시 후, 에크만은 데스 나이트 로드와 맞붙어서 죽이지 않고 제압했고, 알테어는 야수계의 수장인 라이칸스로프 대장과 붙어서 힘으로 눌러버렸다. 다시 둘이나 되는 간부 자리가 바뀌었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승리를 쟁취하자 자신감이 붙은 유저들 중 일부 천인장들이 다른 간부들에게 도전을 했다. 하지만……결과는 참패. 혹은 아깝게 패배였다. 그 과정에서 소문보다 실력이 못 미치는 자와 소문보다 실력이 뛰어난 자가 추려졌지만 우리 이외에 바뀐 간부는 없었다. 우리 때문에 간부급들이 자존심 상해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것이 컸다.
“앞으로의 군 진로를 취한 간부 회의가 있으니 간부들은 남고…….”
“커헉!”
“누구냐!”
종류까진 잘 모르겠지만 창을 사용하는 계통의 간부 하나가 장내를 정리하는 동안 갑자기 목을 잃었다. 계속 그늘진 곳에 있어 존재감조차 느끼지 못하던 자가. 그리고 그의 목을 벤 자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이제 이자의 자리는 내 것인가?”
“로즌 크랜츠!”
죽은 간부가 암살자 계통이었는지 로즌 크랜츠는 주위의 살기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마왕만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는 마왕. 이로써 4명이 간부 자리를 꿰찼다.
“저자까지 낀다면, 재미있어지겠군.”
과거 로즌 크랜츠와 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르에 대한 배신감이 컸을 뿐, 로즌 크랜츠 본인과는 큰 악감정이 없다. 그러니 이번 일에 로즌 크랜츠 정도의 실력자가 합류한다는 것은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입니다.”
“아직도 어쌔신의 일을 하고 있는 건가?”
“전 이미 살수의 길을 걸었거든요. 밝은 세상이니 한 점의 어둠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몇 개의 클래스를 마스터 했는지는 몰라도 로즌 크랜츠는 여전히 PK를 하고 있었다.
“저 정도 실력자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을 노린다 생각하면……. 섬뜩하군.”
잠시 인사를 나누고 마왕에게로 가는 로즌 크랜츠. 저자가 마음만 먹으면 알테어나 에크만보다 위험인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수는 정면 승부를 하는 게 아니니까.
“험험, 그럼 다시 알려야겠군. 간부급들은 남고 다른 자들은 내려가시오!”
대충 간부 자리가 확정되고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이 천인장의 자리로 대신 내려가니 그 다음부터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지만 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봐, 너도 이제 간부이니 회의를 해야지 어디 가는 건가?”
“말했을 텐데, 게릴라전이라도 할까 한다고. 어딘지 말하고 가면 그게 어디 게릴라전이야? 그냥 작전이지. 그리고 난 너희들과 다르게 속박되지 않았으니까 날 마음대로 부리려는 생각 같은 건 접어라.”
걸어가면서 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역시 난 지시받는 입장보다 직접 지시를 내리고 작전을 세우는 쪽이 좋다.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뒤쪽에서 언성을 높이고 투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추측컨대 알테어와 에크만이 자기들도 따로 행동하겠다고 소란 피우는 소리다.
“리치라……. 이것들을 어떻게 써먹는다?”
아이템 창에 들어온 마왕군 진형도를 보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찾아왔다. 리치들이 가득한 곳. 이곳에 설치된 막사에서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공격할 대상과 방법을 찾으려니 너무 머리가 아팠다. 게릴라전 같은 걸 펼치려면 정보가 필요한데 벌써 성향이 벌써 악으로 변해서 적의 병력이 어디어디 포진해 있는지 알아보러 갈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콜로니스트님, 안에 계십니까?”
“누구지?”
“로즌 크랜츠입니다. 에크만, 알테어님도 함께 왔습니다.”
“음, 들어와라.”
한참 동안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느닷없이 알테어, 에크만, 로즌크랜츠가 내 막사로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콜로니스트님이 회의에 불참하시고 내려오신 뒤, 저희도 마왕에게서 독자적 행동권을 얻어냈습니다. 이제 NPC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 작전을 세우는 게 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개별적으로 게릴라전을 펴실 거라 들었습니다. 하지만 리치들의 수만 따져도 게릴라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 같군요. 크게 병력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저희 넷의 병력을 한데 모아서 작전을 짜면 어떻겠습니까?”
확실히 리치들을 데리고 게릴라전을 펼치려 해도 나와 함께 이동하는 몇몇의 리치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놀아야 한다. 이것은 상당한 전력 손실. 그렇다고 리치로드까지 소멸시켜 놓고 다른 자에게 떠맡길 순 없는 노릇이니 골치 아프던 차에 로즌 크랜츠가 이런 부탁을 하니 고맙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그 작전은, 내가 짜고?”
“작전의 대가이신 콜로니스트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작전을 짜겠습니까?”
로즌 크랜츠는 넉살좋게 싱긋 웃었다. 확실히 데스 나이트 부대와 야수 부대, 암살자 부대가 더해지면 병력 운용의 폭이 넓어지긴 하지만……. 그만큼 작전 짜는 게 더 골치 아파지는 게 문제지.
“끄응, 그렇게 하지. 일단 앉아.”
셋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다시 눈을 돌린 곳은 세계 지도. 그곳에는 붉은색 동그라미가 하나 쳐져 있었다.
“마왕군이 이기려면 뭘 해야 할까?”
“음, 당연히 잘 싸워야겠지.”
너무도 당당한 알테어의 발언. 뭐라 해줄 말이 없다.
“그것 말고는?”
“효율적인 성의 공략?”
“그것도 필수지. 그것 말고는?”
“음……. 생각이 안 나는데. 뭐야?”
잠시 생각해보던 에크만도 고개를 저으며 포기했다.
“더 메지션의 행동 봉쇄. 가장 세력이 큰 것은 레이지 길드지만 가장 조심해야 할 적은 더 메지션이지. 새로운 마법을 창조해내려고 애쓰는 이들인 만큼 머리 굴리는 데는 탁월한 자들이니까. 더구나 레이지도 무시하지 못할 무력을 갖췄고.”
“하긴, 그렇기는 해. 예전이라면 몰라도 그 붕어 대가리 길드장 밑에서 뭐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모두 수긍했다. 레이지가 사람들을 모으고, 돈을 풀어서 무언가를 생산, 지급하는 것보단 더 메지션의 행동이 자유로울 때 생길 게릴라전이 훨씬 위험하다는 판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의 발을 묶을 수 있을까?”
“그거야……. 놈들의 본진을 공격했을 때? 자기들 밥그릇 뺏기게 생겼는데 남의 밥그릇까지 신경써줄 여유가 없겠죠.”
“바로 맞췄어. 끊임없이 놈들의 본진을 뒤흔들어주면 그들은 행동에 큰 제약을 받게 될 거야. 단, 절대로 성을 빼앗아서는 안 돼. 지킬 것이 없는 자들은 위험해지거든.”
“그렇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들의 본진인 일리아드는 사방이 물로 덮여있어서 난공불락의 요새이지 않습니까?”
“후후,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그리고 그 다음은…….”
병력에 여유가 생겨서일까? 안 풀리던 작전이 술술 나왔다.
일단 일차적인 목표는 더 메지션의 행동 봉쇄!
이 일에 도움이 안 되는 알테어, 에크만, 로즌 크랜츠는 2차 목표 지점으로 병력들과 함께 보내고 나는 300여 마리의 리치들과 함께 일리아드로 향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했기에 이동 중의 병력 손실은 없었다.
“호수를 건너서 일리아드 근처의 섬으로 이동한다. 도중에 배를 발견하면 무조건 격침시키고,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서 가도록.”
“예.”
“출발하라!”
“플라이!”
명령을 내리자 리치들이 일제히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올랐다. 목표는 일리아드 근처에 신전이 있는 섬. 리바이어선이 있던 바로 그 섬이다.
“후후, 드디어 이걸 써보게 되는군.”
내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바다 속 깊은 곳의 어둠을 닮은 듯한 푸른 구슬이었다. 이 아이템의 이름은…….
“봉인의 구슬, 사용.”
푸슈슈슈슈슉!
구슬이 사라지며 호수의 물이 크게 솟구쳤다. 그리고 나타난 거대한 수룡. 봉인되어 있던 물의 그랜드 마스터 리바이어선이다!
“날 태우고 전에 네가 있던 섬으로 가라!”
“예. 주인님.”
수룡의 형태인 리바이어선의 등에 올라타자 쾌속선 이상 가는 속도로 빠르게 물살을 가르고 이동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날아서 오는 리치들보다 한참이나 먼저 도착하고 섬을 둘러보자 약간의 유저와 신전을 지키는 NPC들이 보였다.
“반절은 휴식하고 반절은 나를 따라 섬에 있는 자들을 소탕하러 간다. 신속하게 끝내야 하니 서둘러!”
“예!”
“리바이어선은 다른 자들이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도록! 배를 타고 오거나 날아서 오는 자들이 있으면 모두 죽여 버려!”
“예, 주인님!”
약 150마리의 리치를 이끌고 작은 섬 하나 정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신전 내부와 섬 해안가까지 모두 점령하고 곳곳에 리치를 배치시켰을 때, 비로소 더 메지션이 행동을 개시했다.
“드디어 오는군. 리바이어선, 저들을 모두 죽여라!”
“예, 주인님. 바다의 망령!”
크우우우우~
뭔가 음침한 소리가 호수 쪽에서 들려오더니 사람의 손 모양을 가진 물들이 올라와 바다와 하늘로 이동해 오는 더 메지션의 마법사들을 잡아챘다. 속절없이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더 메지션의 마법사들. 그들에게 남은 건 익사뿐이다.
“이번엔 이쪽에서 경고를 내리도록 하지. 리바이어선, 가자! 일리아드 성 근처로.”
다시 리바이어선의 등에 올라타자 금세 일리아드 앞까지 도착했다. 수룡의 등 위에 사람이 올라타고 있자 구경하러, 또 경계하러 몰려든 사람들. 내가 뭔가 입을 열어 말해주길 원하는 듯했지만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옛말에…….
“문답무용이라 했지. 리바이어선, 대해일!”
“끼에에에에에엑!”
파과과과과과과과-!
리바이어선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자 등 뒤에서 엄청난 해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리아드를 덮쳤다. 나까지 휩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물의 수호라도 사용할까 했지만 해일이 덮치기 직전 리바이어선의 둘레로 어떤 막이 형성되었고, 그 대해일이 지나갔음에도 물 한 방울 안 맞을 수 있었다.
리바이어선 자신도 휩쓸리지 않기 위한 능력인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됐군. 좋아,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두 번만 공격하고 자리를 피한다!”
쾅! 쾅!
브레스처럼 입에서 강한 두 줄기의 물을 뿜어낸 리바이어선은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원래 있던 섬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경고가 됐겠지. 좋아, 리바이어선. 이곳의 관리는 너에게 맡긴다. 넌 이곳에 있으면서 수시로 일리아드를 공격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이리로 피해서 리치들의 도움을 받도록. 물론 이곳으로 오는 배나 인간을 발견하면 접근하지 못하도록 죽여야 한다. 알겠나?”
“예. 주인님.”
믿음직스럽게 답한 리바이어선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섬에서 휴식을 취했다. 소모한 마나를 회복하려는 듯. 얼마만큼의 마나가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300마리에 달하는 리치들도 있으니 안전할 터였다. 어차피 방금 전에 받은 경고 때문에 정신없어서 금방 토벌대가 오진 못할 테고.
“토벌대가 와도 이 섬에 내릴 수나 있을까?”
솔직히 내가 반대 입장이라면 암담할 것 같다. 물의 지배자와 물에서 싸워야 하다니…….
“하지만 이 정도는 해야 발을 묶어둘 수 있겠지.”
리치들에게 리바이어선의 행동에 적극 협조할 것을 명령하고 나는 엘빈 호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동한 곳이 엘빈 호수 남서쪽에 있는 선착장! 눈의 도시 에르가도로 가는 유일한 뱃길이 있는 곳이다.
“여어~. 왔어?”
선착장은 이미 데스 나이트와 추위에 잘 견딜 수 있는 야수, 그리고 내가 잠시 통솔권을 넘긴 리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선착장으로 들어오는 배. 배에 탄 사람들의 대부분은 당황해하며 이동 스크롤을 찢었지만 돈이 없는 일부 사람들은 그대로 야수들의 먹이가 되었다.
일단 데스 나이트와 야수, 리치를 고루 섞어 첫 배에 실어 보냈다. 두 번째 배도, 세 번째 배에도……. 계속해서 배에 실어 보내고, 첫 번째 배가 도착할 시간을 즈음해서 스크롤을 이용해 에르가도 외곽으로 이동했다. 경비병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인피면구를 착용하고서.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겠군.”
“그럼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우리 휘하의 병력이 곧 도착할 것을 알리자 미리 몇 명씩 사람들과 뒤섞여 바다를 건너온 로즌 크랜츠의 암살자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싸움이 시작됐을 때 혼란한 틈을 타 각 전투 길드의 간부급들을 죽이기 위해 매복할 것이고, 로즌 크랜츠와 실력이 뛰어난 몇몇은 일찌감치 최고위 NPC들을 해치우러 갈 것이다. 무적을 자랑하는 상인들만 건들지 않으면 충분히 이곳을 점령할 수 있다.
“상인만 빼고 다 죽여라!”
“크으으!”
상인의 무서움은 이미 말해뒀기에 알테어와 에크만은 명령에 상인만 빼고. 라는 전제를 붙였다. 배가 도착함과 동시에 불이 나는 몇몇의 건물들. 미리 침투한 암살자들이 내부에서 호응하는 것이다.
“모두 죽여라!”
알테어와 에크만이 말만 앞세우는 지휘관 스타일이 아님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았다. 오히려 최전선에 뛰어들어 수도 없이 경비병과 유저들을 때려눕히는 둘.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상황은 쉽게 종료되었다.
“얼음의 대륙에는 마을이 이거 하나밖에 없으니 이곳만 충실히 지켜도 이 섬을 가진 거나 다름없지. 언데드나 추위에 엄청나게 강한 놈들이 아니면 발열제를 먹지 않는 이상 이 대륙의 추위에 얼어 죽을 테니까. 발열제도 이 마을에서만 팔고.”
“과연 그렇군요. 추위가 걸리긴 하지만 이곳은 마계의 입구와 가장 가까운 섬. 이곳을 통해서 마왕을 기습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은 방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무리해서 마을을 거치지 않고 마왕에게 가려다간 얼어 죽기 십상이니까. 어서 마왕군 측에 연락해서 이곳에 주둔할 병력을 보내라고 해. 그들이 오면 우리는 다시 대륙으로 넘어간다.”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마왕군 편이 아닌 나는 멀리 떨어진 마왕군과 연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로즌 크랜츠에게 연락을 떠맡겼다.
그로부터 3일 후, 현재 주둔해 있는 병력에는 전혀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에르가도에 주둔시킬 병력이 도착했고, 우린 그들이 타고 온 배를 타고 다시 대륙으로 나갔다.
이벤트가 시작되고 3일이나 지나서일까? 대륙으로 돌아와서 소문을 들어보니 각지에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적게는 몇 십에서 크게는 몇 천의 병력이 맞붙는 전투가.
“크으, 우리도 빨리 그런 대단위 전투를 좀 해보자고! 저 얘길 들으니 몸이 근질거려 죽겠다.”
몇 천의 병력끼리 맞붙는 전투 얘기가 나오자 좀이 쑤시는지 알테어와 에크만이 나를 닦달했다.
“우리 병력이 얼마나 되죠? 넷이 합쳐서 2천이 좀 못되던가요?”
“그렇긴 하지만 하나같이 고급 병력이니 4천이 와도 안 무섭다고!”
솔직히 나도 안 무섭다. 유저들 병력 4천이래 봐야 저레벨도 상당수 끼어있는 병력인데 우리는 하나같이 고위급 몬스터들로 포진해 있으니 꿀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대단위 전투에서라면 비장의 카드도 몇 개 있고.
“다들 화끈하게 노는데 우리만 소극적으로 투덕거리면 재미없겠죠? 좋습니다. 병력을 넓게 포진시키세요. 야수 계열이 선두, 중앙에 리치, 중간과 후방에 데스 나이트를 배치하고 암살자들은 군데군데 껴서 이동하는 겁니다. 적들이 우리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리고 그에 대비해서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을 수 있도록 발 구르기를 크게 하면서 가는 겁니다!”
“아싸!”
내가 같은 편이 되는 바람에 듀얼을 할 수 없어서 실망했지만 눈 깜짝할 새 목이 달아나는 대단위 전투를 하게 되자 에크만과 알테어는 열광했다. 그리고 로즌 크랜츠도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내가 말한 대로의 배치가 끝나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주위 땅이 흔들릴 정도의 발 구르기를 해가며 진군하자 기겁하고 달아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인피면구를 사용하고 인근 성인 오마이스 영지에 정탐 갔을 때, 사람들이 우리 군대를 막기 위해 유저들을 끌어 모으느라 분주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적의 병력은 약 천오백 정도로 보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NPC만 2천이 넘으니 힘을 모아 아주 박살을 내버립시다!”
“와아아아아!!!”
잘난 척 해대던 엔젤 하트는 언젠가 내가 찍은 그 비굴한 모습이 담긴 영상 때문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렸고 현재 오마이스 영주는 이름 모를 다른 길드였다.
“천오백이라? 사이사이 숨어 있는 암살자들은 못 본 모양이군.”
기고만장해하는 유저들에게 코웃음을 쳐주고 다시 우리 진영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존재를 충분히 알렸으니 일부러 크게 발 구르기를 하는 건 그만뒀다. 다만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며 조금씩 오마이스 영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모두 정지!”
저 멀리, 우리의 배만큼은 되어 보이는 군대가 집결해 있는 것을 보고 우리 군의 행군을 멈췄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각 길드를 나타내는 문장이 그려진 깃발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이번 기회를 빌어서 길드의 이름을 알려보겠다는 거겠지. 물론 선택의 실수로 묻히는 길드가 될 테지만.
“어둠의 존재들이여, 감히……!”
적의 사령관으로 보이는 기사의 웃기지도 않는 연설이 시작됐다.
“우리는 잔소리할 필요 없지?”
“물론!”
에크만과 알테어는 손목과 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고 로즌 크랜츠는 어둠속에 녹아들며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자, 그럼 진군이다!”
“크우우우!!!!”
“이, 이런 비겁한!”
한참 연설하는 중에 우르르 돌진하자 적의 사령관은 크게 당황해했다. 죽고 죽이는 전쟁에서 상대가 나 하고 싶은 거 다 할때까지 기다려 줄 거라고 믿다니, 바보로군.
“첫 승리의 축포를 미리 쏘아 올려주지. 메테오 스웜!”
“크아아악!!!!”
콰과과과과광!!!
드래곤 슬레이어에서 발사된 다섯 개의 커다란 화염구가 무더기로 뭉쳐 있는 적진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절규하는 유저들과 녹아내리는 갑옷. 순식간에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병력이 사라졌다.
“크핫핫하! 다 죽여주마!!!”
무시무시한 힘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한 번에 서너 명을 날려버리는 알테어와 어지간한 자들에겐 한줄기 빛으로밖에 안 보일 쾌검을 구사하며 접근하는 자들의 목줄을 끊어놓는 에크만. 그리고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게 어둠속에서 숨을 거두어가는 로즌 크랜츠. 거기에 무시무시한 데스 나이트와 리치, 야수들까지 합세하자 첫 기세부터 눌린 인간측은 지리멸렬, 도망치기 바빴다.
“쫓지 마라!”
그래도 NPC들은 목숨 걸고 끝까지 덤비기는 했다. 거의 개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하지만 유저들은 나 몰라라 도망. 추격해서 죽일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엔 다시 만날 거란 생각에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전리품을 챙기고 전열을 가다듬어라!”
물론……. 유저가 넷뿐인 관계로 NPC와 유저가 남기고 간 아이템들은 모두 우리 차지였다. 아이템 창에 공간이 부족할 지경에 이르자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우리만 아는 공간에 가져다놓기도 했고, 중급품 정도로만 생각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전리품의 처분이 끝나고 전열도 정비되자, 이번엔 직접 성을 치러가기로 결정했다. 오마이스와 일리아드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후방에서 기습 받는 것도 경계해야 했지만 일리아드에 있는 더 메지션은 이미 발을 묶어둔 상태. 눈앞의 적만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좀 전과 같은 방법으로 진열을 정비하고, 오마이스 성까지 진군하자 우리에게 겁먹는 유저들은 요격할 생각을 일찌감치 접고 농성에 들어간 상태였다.
“성을 치려면 적어도 3배의 병력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고대의 전투에서나 통하는 말이지. 마법이란 편법이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보군. 특히 내가 적으로 있을 때는 더욱더.”
“차라리 요격전을 펼쳤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걸 저들은 모르고 있나 보군요. 저 성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있다는 걸 깨달지 못했으니……. 그 대가는 죽음으로 갚아야겠죠.”
로즌 크랜츠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차라리 인원수를 앞세워 요격이라도 했으면 조금의 피해는 더 입혔을지 모르는데……. 저들의 판단 미스다.
“그럼 성문은 제가 뚫도록 하죠. 메테오 스웜!”
콰과앙-!
드래곤 슬레이어에 충전되어 있던 마지막 10써클 마법을 사용했다. 새까만 재처럼 그을린 성문. 그러나 아직 삐걱거리기만 할 뿐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화룡의 이빨!”
드래곤 슬레이어를 집어넣고 이번엔 화룡의 검을 휘둘렀다.
아가리를 벌리고 돌진하는 한 마리의 화룡. 굉음을 내며 성문을 들이받은 화룡은 남은 부분들을 모두 새까맣게 태우고 사라졌다.
“오호, 제법 성문 업그레이드를 많이 했나 본데? 그렇다면, 화룡점정!”
성문 강화 공사를 제법 했는지 삐걱거리기는 해도 끝까지 붙어는 있었다. 그래서 다시 사용한 화룡점정! 성문 바로 아래에서 커다란 화룡이 솟구치며 성문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할 말을 잃고 입을 쩍 벌리는 유저들.
“이거, 날 몬스터로 보지 않을까 걱정이군.”
“킥킥킥킥!”
“푸하하하!”
어깨를 으쓱여보이자 셋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컷 웃고 난 뒤, 내 어깨를 툭툭 치는 알테어.
“그건 걱정 마라. 우리가 너보다 더한 괴물로 보일 테니까. 에크만, 가자!”
“흐흐흐. 오케이!”
성문이 뚫리자 둘은 신이 나서 성 안으로 달려갔다.
입구 진입과 동시에 마나를 아끼지 않는 공격을 퍼붓는 에크만, 그에 반해 알테어는 마법 한 번 쓰지 않고 그냥 뒤따라 달려갈 뿐이었다.
“크흐흐흐, 모두 점프!”
콰앙!
음흉한 미소를 짓다가 느닷없이 모두에게 점프 명령을 내린 알테어는 커다란 무언가를 휘둘러 땅을 내려쳤다. 그가 든 아이템은 바로 토황추!
경매에 올려놨었지만 결국 팔리지 않아 나에게 다시 돌아왔던, 그래서 7천 골드를 받는 대신 알테어에게 선물했던 토황추였다.
토황추의 특수 능력대로 토황추의 진동에 휘말린 유저, NPC들은 모두 바닥을 굴렀고 약간의 경직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그 경직 시간 동안 공중으로 뛰어서 토황추의 능력에 휘말리지 않은 우리 편은 여유 있게 적들을 학살해 나갔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전쟁도 아니다. 그저…… 학살일 뿐이다.
“대단하군요, 두 분.”
조금 더 입구가 뚫리면 들어가려는 생각인지 내 옆자릴 지키고 있던 로즌 크랜츠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확실히 대단하죠. 벌써 몇 클래스를 마스터 했는지 종종 보던 저도 가늠이 안 되니…….”
그랬다. 내가 5개 클래스를 마스터하는 동안 놀기는커녕 내가 사냥하는 곳보다 더한 곳에서 레벨 업을 한 두 사람이니 지금은 몇 클래스 마스터일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비록 내가 매직 트랩 덕분에 레벨 업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레벨을 따라잡기란 요원한 일이다.
“그야말로 종횡무진. 야생마가 따로 없군요. 벌써 유저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어요. 제가 따로 나설 필요도 없겠군요.”
“덤벼라, 덤벼!”
시간이 지날수록 둘은 지치기는커녕 힘이 나는 듯, 더욱더 활개치고 다녔다. 거기에 나와 로즌 크랜츠, 그리고 그가 이끄는 암살자들까지 합세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내 드래곤 솔레이어를 막을 자 없었고, 알테어의 힘을 받아낼 자 없었으며, 에크만을 쫓을 자 없었고, 로즌 크랜츠를 찾아낼 자 없었다.
개개인이 압도적인 무위를 자랑하고, 또 이끄는 부하들도 어지간한 던전의 상급 몬스터나 보스 급으로 등장할 법한 놈들이니 유저들은 물론 성의 주인들까지 기가 질려서 일찌감치 성을 포기해버렸다.
“이거, 이거, 너무 싱거운데?”
“맞아. 내가 원한 건 이렇게 간단하기만 한 전투가 아니라고!”
아주 깔끔하게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알테어와 에크만은 뭐가 불만인지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댔다.
아마도 너무 쉬운 전투라 죽고 죽이는 전쟁의 긴박감이 떨어졌던 거겠지.
“끄응…….”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직책을 맡은 이상 저것들을 책임지기는 해야 할 텐데.”
오마이스 성의 집무실 창문을 통해 모여 있는 데스 나이트 등을 가리키자 알테어, 에크만은 또 앓는 소리를 냈다.
관리야 거의 나와 로즌 크랜츠가 도맡아서 하지만 내키는 대로 행동하던 그들이니만큼 이것만으로도 갑갑하겠지.
“흠, 이거 곤란하게 됐군요.”
“무슨 일이지?”
“우리가 맡고 있는 대륙의 남서쪽은 마왕군 측이 우세하지만 남동쪽은 그렇지 못한 모양입니다. 레이지가 제법 준비를 철저하게 했는지 투석기 같은 병기들을 다수 만들어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군요.”
“거기에 남동쪽이라면 꽤 세력이 강한 길드가 많으니까.”
“레이지가 이번 일에 돈을 엄청나게 퍼부었다더니 대량 살상용 병기 제작을 위해서였나 보구만. 아차!”
레이지에 대해 말하던 에크만은 아차!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레이지……. 내가 이 전쟁에 참여한 이유…….
난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느긋하게 전쟁놀이나 하고 있다니, 이래도 되나? 궁극적으론 레이지를 깨부수기 위한 것이라지만, 거트에게 복수하기 위한 거라지만 정작 레이지는 활개치고 있는데…… 이래도 되나?
“후우우…….”
속에 담긴 복합적인 마음이 한숨에 담겨 뿜어져 나왔다.
“레이지 목표시죠?”
“……그래.”
내가 한숨 쉬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즌 크랜츠가 내 목적에 대해 물어왔다.
“아무리 레이지를 치기 위한 일이지만 정작 레이지는 활개 치고 다니는데 여기서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시죠?”
“그래.”
“그럼 가십시오. 콜로니스트님의 그 마법 공격이 빠지면 다소 어려워지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전력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너무 쉽다보니 알테어, 에크만님도 흥미를 잃으시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저희 실력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 있는 셋 모두 마법사 클래스를 마스터한 사람들이니 리치들의 통솔도 문제없습니다. 가시기 전에 통솔권만 넘겨주십시오.”
“……고맙다.”
결국 리치들의 통솔권을 그들에게 넘기고 홀로 대륙의 남서쪽에서 남동쪽 전장으로 넘어갔다.
* * *
“다음 전투는 언제쯤이래?”
“글쎄, 워낙 대부대끼리의 전투라서 어느 쪽도 쉽게 도발에 응할 것 같지는 않던데. 그저 별동대만 조직해서 조금씩 적의 숫자를 갉아먹을 생각인가 봐.”
“그러다가 마왕군이 열 받으면 전면전 치르는 거고?”
“뭐, 그렇겠지. 숫자는 비슷해도 레벨로만 따지만 인간이 불리한 게 사실이니까.”
“혹시 콜로니스트가 적을 지휘해 버리면 어떻게 하지? 더 강해지려고 마왕하고 계약했다며?”
마왕과 계약? 나도 모르는 사이 이상한 소문이 도는 듯했다.
“마왕과 계약해서 파워 업했다는 소리도 있고, 레이지를 무너뜨리려고 그리로 갔다는 소문도 있고. 하여간 소문이 많아서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걱정할 것 없어. 콜로니스트는 지금 오마이스 영지에 있거든.”
“오마이스 영지? 거기 왜?”
“넌 모르겠지만 옛날에 유명했던 3명과 함께 벌써 성을 점령해버렸다는 거 아니냐! 알테어, 에크만, 로즌 크랜츠! 캬하! 옛날에 이 3명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런 자들하고 콜로니스트가 손을 잡았으니 얼마나 대단하겠어? 모르긴 몰라도 서부 쪽 애들은 눈물깨나 흘릴 거다.”
어떻게 소문이 퍼진 건지는 모르지만 비교적 정확한 정보가 이미 유저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로즌 크랜츠는 그렇다 쳐도 알테어와 에크만을 기억하다니, 꽤나 올드 유저인가 보군.”
다행히 마왕군의 낙인이 찍힌 게 아니라 인피면구 하나를 착용하자 마을을 돌아다녀도 날 의심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덕분에 현재 전쟁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적지 않게 주워들을 수 있었고, 몇몇 곳의 전투 예상 시간까지도 알아 낼 수 있었다.
“녹색의 평원 전투. 공격 시각은 내일 아침 11시. 전투 규모는 약 1천 500 대 2천. 도합 3천 500짜리 대규모 전투. 마왕군 우세?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마왕군이 500마리나 더 우세하다고? 뭔가…… 좀 구린 냄새가 나는데?”
* * *
녹음이 우거진 숲. 마왕군 침공 이벤트가 발생하면서 대부분의 지역에 먹구름이 끼었지만 이곳만큼은 따사로운 햇살, 그대로를 유지했다. 그 덕에 이곳을 지나는 마왕군은 능력치 다운의 페널티를 유지했다. 그 덕에 이곳을 지나는 마왕군은 능력치 다운의 페널티를 겪어야 했고, 인간 유저들 입장에선 가장 좋은 기습 위치가 되었다.
“준비됐나?”
“예.”
부하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명령했다.
“좋아. 그럼 가자!”
“와아아아!!!!”
슈슈슉-
콰앙!
다수의 화살과 마법을 시작으로 인간 측의 기습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처하는 마왕군. 역시 기습 다발 지역이라 대비하고 있던 것이다.
“해치워라!”
“크워엉!”
기습은 시작할 때의 마법만 효과를 조금 보았을 뿐 화살은 방패에 막혀 떨어지는 등 별다른 맛을 보지 못했다. 너무 뻔한 곳에서 나타나 마왕군이 사전에 예측하고 있던 탓이다.
그렇게 기습은 철저한 대응에 의해 실패하고, 전투는 난전으로 변했다.
“혼자서 뚫지 말고 항상 동료와 함께 뭉쳐라!”
그렇다. 난전에서 무식하게 혼자 뚫고 들어가다간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눈먼 검에 맞아 비명횡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왕군은 천인장급 유저의 외침 덕분에 난전 속에서도 제법 체계적으로 싸울 수 있었고 그와 반대로 인간들은 이전투구만을 반복하다가 볼썽사납게 죽어나갔다. 게다가 난전이라는 자체가 실력의 고하보다 인원수가 중요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500명이 적게 덤빈 인간 측은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다.
“큭, 이놈들은 언제 오는 거야?”
인간 측의 대장은 확실히 밀리는 게 눈에 보이는 데도 도망치거나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고 시간을 벌 생각만을 해댔다.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쏴라!”
피이잉-!
“컥?”
“엘프다!”
“와아! 증원군이다!”
슈슉-
슈슈슉-!
엘프 특유의 궁술이 빛을 발하며 혼전 속에서 마왕군의 몸만 꿰뚫었다.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으면 눈앞의 적이 검을 휘두르고, 검을 막으면 어느새 화살이 목에 틀어박히니 마왕군의 손발은 자연 어지러워졌고 뒷걸음질 치는 이도 많아졌다.
엘프들은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활을 당기면서 인간들 쪽으로 몸을 날렸고, 부상당했거나 실력에 자신이 없는 인간들은 엘프들이 있는 안전한 후방으로 도망쳐 왔다.
“큭, 방패로 몸을 가리고 후퇴하라!”
마왕군이 전열을 가다듬자 제법 실력에 자신이 있어, 앞장서서 싸우던 자들도 뒤로 물러났다.
대충 거리가 벌어지자 이를 악물며 후퇴를 명하는 천인장. 그러나 등 뒤도 어느새 다른 무리가 막고 있었다.
“크크크. 후퇴하려고? 그건 안 되지! 너희들은 여기서 뼈를 묻는 거다!”
처음부터 기습에 투입된 인원은 2천명이었다. 다만 그 중 500명은 엘프들에게 협조를 얻고, 배후를 치기 위해 멀리 숨어서 돌아왔던 것일 뿐.
“이런, 빌어먹을!”
“쳐라!”
후방에 대한 대비가 없는 상황이라 천인장은 더 암담해졌다. 뒤에서 덤벼오는 500명가량의 인원을 막겠다고 병력을 함부로 움직였다간 정면의 엘프와 인간들을 막지 못하겠고, 그렇다고 이대로 등을 내줄 수도 없는 것이다.
“모두 정면으로……!”
천인장은 지휘자로서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려는 순간, 태양과도 같은 커다란 다섯 개의 불덩어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 불덩어리가 인간, 엘프 연합 쪽에 떨어지는 것도.
“크아아악!!!”
“캬아악!”
아비규환.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땅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깊게 패였고 사람들의 옷마다 강렬한 화염이 춤을 췄다.
압박을 가한답시고 한데 모여 있어서 피해는 더 컸다. 몇몇이 물의 정령을 소환하거나 수계 마법을 사용해서 억지로 불을 껐지만 정신 못 차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방패를 앞세워 정면을 뚫어보려던 마왕군이나, 후방을 치려던 인간들이나 모두 행동을 멈췄다. 모두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 한 사내가 새까만 검신의 이도류를 들고 나타났다.
당연히 모드의 시선은 그에게 집중.
그는 자신의 이도류와 아비규환인 전장을 번갈아본 뒤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스트라이크!”
* * *
녹색의 평원 기습 작전. 솔직히 인간 진영에서는 공공연한 이야기이니 기습이라 할 것도 없고, 그곳에서의 기습은 아주 빈번하게 이루어진다니 기습이란 말을 붙이기가 민망하다.
생각 같아선 인간들이 기습을 시도하기 전에 내가 10써클 마법을 동원해서 몽땅 쓸어버리고 싶지만, 적의 인원이 너무 많았고 뭔가 놓치는 찜찜한 기분이 들어 가만 지켜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난전이 뭔지 아는 마왕군 측의 대장에게 걸려 꼼짝 못하던 인간들이 녹색의 평원 근처 숲에 살고 있는 엘프들을 불러와서 전세를 역전 시키지 않는가? 게다가 마왕군의 후방에 의외의 복병까지 준비해 놓았다.
이대로는 힘도 못 써보고 마왕군의 전멸. 돕기 위해 둘러보니 마침 멍청한 인간과 엘프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뭉쳐 있었다.
“메테오 스웜!”
대기를 달구며 다섯 개의 거대한 화염구가 작렬했다.
인간과 엘프가 한데 뭉쳐 있기에 그 효과는 극대화! 메테오 스웜의 여파에 휘말이지 않은 사람은 고작 일이백 명에 불과했다.
쿡, 저렇게 널브러져 있는 걸 보니 꼭 볼링 친 기분인데? 그렇다면!
“스트라이크!”
힘껏 소리쳐줬다. 그런 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과 마족들.
“……쳇, 그래. 아직 일이백 정도 남았다! 깐깐하기는. 그럼 스페어 처리를 해보실까?”
“어, 어엇?”
남은 일이백의 인간, 엘프들을 처리하기 위해 달려가자 멍하니 있던 엘프는 넋이 나간 상태에서 손만 젓다가 목숨을 잃었다.
한 명의 엘프가 죽자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린 유저들. 내가 어느 편인지 확실해지자 상황이 급반전 됐다.
“너희는 저분을 돕고, 나머진 나를 따라 후방의 적을 섬멸한다!”
“와아아아!”
“크윽!”
엘프까지 섞인 적이 약 2백 명. 확실히 기선 제압을 했다고는 해도 혼자서는 불가능한 숫자였다. 지금 내 속도는 엘프보다도 빨라서 게릴라전이라면 승산이 있지만.
아무튼 혼자서는 다소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마왕군의 천인장은 다행히 날 과신하지 않았고, 약 300의 지원군을 보내 그들을 섬멸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후방의 500명도 그보다 훨씬 많은, 약 800명이 포위하며 공격하자 무릎을 꿇었고, 아주 큰 피해는 없이 상황이 종료되자 천인장이 내게 와서 말을 걸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공동의 적을 가졌으니 서로 도와야지요.”
“아, 눈이? 인간이십니까?”
PK의 표식인 붉은 눈을 보았는지 천인장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가만, 그럼 어떻게 마족의 언어를?”
“마오아과 협상을 하면서 얻은 것이죠. 마족들과 공동 작전이라도 펴려면 언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니까요.”
“아, 콜로니스트님?”
나에 대한 소문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충 말하니 알아서 알아들었다.
“그렇습니다. 흠, 천 명은 조금 넘어 보이는군요.”
“예. 콜로니스트님 덕분에 전멸을 면한 것은 물론 적은 희생으로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전 이만.”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전장을 찾아서 다니는 것이죠. 도움을 줄 곳이 있으면 도와주고, 혼자 해결할 수 있겠다 싶으면 어떻게든 혼자 처리하고.”
“그럼 살펴 가십시오!”
천인장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보를 얻기 위해 수모 폴메르로!
“들었어? 엄청난 마법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나타났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새까만 칼 두 개를 들고 다닌다는 그?”
“그래! 아까도 녹색의 평원에서 마왕군을 기습하는데 나타나서 공격 한 방으로 무려 천 명을 죽였대!”
소문이 돌고 돌면서 허풍이 가미된 듯싶다. 수백이 죽거나 다친 것은 맞지만 천명까지는 아니다. 그리고 몬스터? 나도 자신들과 같은 유저라는 걸 믿기 싫었나 보군.
“으으, 그런 놈을 어떻게 잡으라고 풀어놓은 거야? 설마 그놈이 마왕은 아니겠지?”
“그,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둘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저런 놈들한테는 고급 정보가 나오길 기대하기 어렵고, 어디…….”
펍 안을 주의 깊게 둘러봤다. 뭔가 비싼 아이템으로 덕지덕지 칠해놓고 잘난 척하기 좋아할 것 같아 보이는 놈들로. 그러자 역시, 답 나오는 놈들이 몇 보였다.
“이번 마왕 이벤트는 언제 끝날까?”
“내가 장담하건데, 며칠 못 버텨.”
“뭐? 에이, 설마~. 엄청난 대규모 이벤튼데 쉽게 끝나겠어?”
“에헴, 이건 비밀인데 말이지. 지금 우리 레이지 길드에서 마왕을 기습할 예정이거든. 거기에 나도 참가하게 됐다, 이 말씀이지.”
저 정도면 극비사항쯤 될 텐데 자기 자랑하느라 퍼뜨리다니. 저런 놈을 받고, 또 중하게 쓸 정도면 레이지도 볼장 다 봤군.
“그런데 어떻게 기습을 해? 가장 좋은 장소인 얼음의 대륙은 이미 마왕군에게 점령당했잖아?”
“바로 그걸 이용하는 거지. 얼음의 대륙을 점령했으니 기습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테니 우리가 허를 찌르는 거야! 얼음의 대륙은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안 되지만 화산지대라면 얼마든지 몸을 숨길 수 있지. 죽은 자의 땅과도 가깝고, 마왕군도 그곳만큼은 신경을 안 쓰거든. 마왕군의 대부대가 화산을 지나가고 난 뒤에 우리가 몰래 화산을 빠져나와서 마계의 입구로 잠입하는 거야. 그리곤 마왕을 치는 거지!”
“오오오오!”
친구들이 놀라워하자 우쭐한 기분이 들었는지 놈은 묻지도 않은 말들을 덧붙였다.
“사실은 말이야, 화산에 매복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야.”
“뭐? 그렇게나 빨리?!”
“쉿! 이건 비밀이라니까!
이미 말할 거 다 해놓고 친구가 큰 소리를 내자 입을 틀어막는다. 지금까지 관심 갖고 귀 기울인 사람이라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해놓고서.
“험험, 오늘 당장 공격하는 것은 아니고 그곳에서 며칠 기회를 보다가 잠입할 거야. 이거 진짜 비밀이니까 너희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된다?”
“알았어, 알았어.”
“에헴, 이 형님이 마왕만 잡으면 크게 한 턱 쏠 테니까 기대들 하고 있으라고.”
“오오오!”
정신 나간 레이지 길드원은 끝까지 비밀이라면서 할 말 다했다. 오늘부터 매복에, 화산이라……. 시간이 촉박하군.
“흠, 어떻게 하지?”
펍에서 나와 마왕군 쪽에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난 순수한 마왕군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연락망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마왕군과 인간은 귓속말이나 메시지도 통하지 않고……. 연락망을 사용하려면 최소 천인장 급은 되어야 하는데 천인장들은 언제 찾을 것이며, 멀리 있는 천인장을 찾는다 해도 그들이 마계의 입구로 잠입하기 전에 도착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
“큭, 대부대가 이동하고 난 후 잠입할 거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다시 죽은 자의 땅으로 가봐야겠군. 텔레포트!”
대부대가 이동하면 잠입할 거라고 했으니 그 대부대를 화산으로 잠시 돌리거나 그 일부를 화산으로 돌리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발길을 죽은 자의 땅으로 돌렸다.
과연 죽은 자의 땅을 가득 메운 마왕군들. 일대 결전이라도 벌이려는 듯, 천인장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음, 이 부대의 최고 통솔자가 누구지?”
천인장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천인장쯤 되면 제법 이름을 알린 유저라는 소리였지만 잊혀진 대륙에 너무 오래 있어서일까? 전혀 알아 볼 수 없었다.
“서큐버스 퀸이신 듀리아님이십니다. 콜로니스트님.”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이리로 쭉 가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아는 듯싶었다. 하기사, 내가 그동안 벌려놓은 일이 좀 많기는 하다.
그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쭉 가자 보라색과 짙은 청색을 섞어놓은 듯한 묘한 색깔의 채찍을 든 노출증 환자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네가 듀리아인가?”
“호호호호, 그렇답니다. 무슨 일이죠, 멋쟁이 씨?”
듀리아는 서큐버스답게 내게 몸을 밀착시키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유혹하려는 듯이.
“이 병력을 움직일 거라고?”
“호호호, 그렇답니다. 이대로 수도까지 밀고 올라갈 생각이지요. 제 옆에서 함께 가시겠어요?”
귀에 입을 대고 간질이 듯 속삭인다. 몸은 여전히 밀착시키고서.
“병력을 잠시 화산으로 돌려라. 그곳에 마계의 입구를 기습하기 위해 잠복해 있는 자들이 있다.”
“그건 안 되지요. 저는 서둘러서 병력을 그곳으로 이동시킬 책임이 있는 걸요.”
“음, 그럼 약간의 병력을 빌려다오. 내가 처리하지.”
“오호호호! 당연히 그것도 안 되지요. 자신에게 맡겨진 리치들도 내팽개친 자에게 병력을 내어줄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마족도 아니고 인간한테!”
조금 전의 나긋나긋한 표정, 말투와는 다르게 싸늘한 모습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나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 이렇게 되면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할 수 없군. 이 근처에 천인장이나 백인장 정도 되는 자들 없나?”
“물론 있지요.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데 어쩌죠? 그들은 모두 제 휘하에 있는데. 오호호호호호호!!!”
듀리아는 노골적으로 내게 안 좋은 감정이 있음을 표시했다.
이래선…… 협조를 얻긴 글렀군. 그럼 어떻게 하지?
“언제 출발할 거지?”
“오늘 저녁!”
내가 출발을 미뤄 달라고 할 거라 생각했는지 듀리아는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없군. 나 혼자서라도 하는 수밖에.”
도움도 안 되는 탕녀 따위 상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곧장 몸을 돌려 화산으로 향했다. 인피면구를 썼어도 혹시나 들키면 일이 틀어질까봐 인비지빌리티를 시전하고 한참을 돌아다니자 예전 불의 그랜드 마스터 크루즈가 있던 동굴 안에서 한 무리의 유저를 볼 수 있었다.
“좀 더 기다려봐야 하나?”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그러나 나는 그들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로 가서 일단은 그들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이따금씩 동굴 안으로 몰래 들어가 보면 뭐라도 있을 줄 알고 뒤져봤는지 난장판인 모습. 통솔할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질서도 없고 심지어 주사위로 도박까지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개판이다.
“모두 정렬!”
그들이 개판치고 있는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밖으로 나가려는데 몇 명의 호위와 함께 프리스트가 들어왔다. 그리고 큰 소리로 길드원들을 정렬시켰다.
“옙!”
“음? 벌써 모여?”
신입과 활동한 지 오래된 길드원의 반응이 딱 갈렸다. 신입은 깍듯한 대답과 함께 재빨리 뛰어갔고, 오래된 길드원은 귀찮다는 투로 뭉그적거리며 걸어왔다. 도박에 쓰던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면서.
명색이 힐름 내 최고의 세력을 갖춘 길드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마왕군의 대부대가 오늘 저녁부터 이동에 들어간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고로, 내일 정오부터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질문 없지? 그럼 해산!”
해산이라는 소리에 길드원들은 귀를 후비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호통을 쳐도 모자랄 판이건만 아랑곳하지 않고 호위들과 함께 돌아나가는 거트. 그저 큰 소리로 말만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군.”
내일 정오라고 했으니 제법 시간이 남았다. 어떻게 할지는 그동안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화룡의 검을 용암 속에 넣어 충전부터 시켰다.
다음날 아침 11시.
12시에 출발이니 슬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온갖 포션과 만일을 대비한 예비 무기들. 그리고 방어구 점검. 다시 한 번 갑옷을 단단히 동여매며 20여 분의 시간을 보내자 거트가 호위들과 함께 나타났다.
크루즈가 있던 동굴의 앞은 아무것도 없던 공터인지라 그들이 집합하기 좋았다.
길드원들을 줄맞춰 세워놓고 일장 연설을 시작하는 거트. 연설이 끝나면 스크롤을 이용해 이동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서둘러 행동을 개시했다.
“봉인의 구슬, 사용.”
이번엔 핏방울보다 짙은 붉은색의 구슬이었다.
화르르륵!
정해진 연출이 있는지, 구슬이 사라지며 내 앞에 사람 키만 한 불꽃이 일더니 불의 그랜드 마스터, 크루즈로 변했다. 그러나 뭔가 허전한 모습.
“무기가…… 없어?”
그의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려있지 않았다. 죽으면서 떨군 게 맞기는 하지만 너무하잖아? 내가 화룡의 검을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렇습니다. 주인님.”
“제기랄! 화룡의 검 소환.”
그냥 맨주먹으로 싸우게 할까 생각해봤지만 그러기엔 너무 힘의 차이가 클 것 같아서 울며 겨자 먹기로 화룡의 검을 소환해서 쥐어줬다.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 제가 죽으면 화룡의 검은 주인님께 돌아갑니다.”
크루즈의 위로 아닌 위로에 마음이 조금 풀리긴 했지만 화룡의 검의 특수능력을 못 쓰는 것은 조금 아쉽다.
“좋아.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을 알려줄게. 내가 저기에 마법을 한 방 날리면 그 다음부터 네가 공격하는 거야. 목표는 저들의 전멸. 알겠어?”
“알겠습니다. 주인님.”
“후우! 자, 간다. 메테오 스웜!”
“어? 어?”
“피해!”
화르르르륵!
흡사 태양 같은 거대한 다섯 개의 화염구가 정렬한 채 연설을 듣고 있는 레이지 길드에게로 떨어졌다.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메테오 스웜. 그나마 넓게 퍼져 있어서 피해가 적었지만 무사한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크으윽, 누구냐!”
“화탄!”
크루즈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뻗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따라 날아간 4개의 화탄. 각각 정신 못 차리고 있거나 쓰러져있는 자들에게 꽂히며 확실한 마무리를 했다.
“이잇!”
공격당한 것도 모자라 무시까지 당하자 화가 났는지 거트가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들었다. 신성 주문의 시선 속도와 위력을 대폭 상승시켜 주는 프리스트의 마스터 아이템, 디바인 마크다.
“슈팅스타!”
휘리릭!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빛 무리를 슬쩍 쳐다본 크루즈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검만 휘둘렀다.
이러지러 튕겨져 나가는 슈팅스타. 그리고 그 튕겨져 나간 것들은 정확히 쓰러진 레이지 길드원에게 떨어졌다. 거기에 또 한 번 쏘아진 크루즈의 화탄도 작열했다.
“크큭! 뭐해? 죽여!”
“예? 아, 예!”
공격에 실패한 거트는 이를 갈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메테오 스웜에 영향을 받지 않아 멀쩡한 자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수가 대략 20. 크루즈 혼자서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는 숫자지만 상대가 레이지인 만큼 나도 한 손 거들기로 했다. 그런데.
“증원 요청인가?”
뒤로 물러난 거트가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포착되었다. 아마도 성에 지원 요청을 하는 듯. 이쯤 되자 지금 내려가는 것보단 조금 더 기다리는 게 좋다는 답이 나왔다.
잠시 후, 크루즈에게 덤벼든 기사의 수가 한 자리 수로 줄었을 때 공터에 흰 빛 무리가 무더기로 생겨났다. 누군가 이동 마법, 혹은 스크롤을 사용해서 도착한다는 신호이다. 그렇다면…….
“메테오 스웜!”
“음, 화룡의 갑옷!”
콰과과과과광!!!
드래곤 슬레이어에 충전된 오늘의 마지막 10써클 마법. 이것은 막 도착한 레이지 길드원의 3분지 2를 다시 성으로 돌려보내는 큰일을 했다. 폭발 범위에 휘말렸지만 화룡의 갑옷 덕분에 무사한 크루즈. 그는 멀쩡한 자신의 몸을 쓰윽 훑어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검을 휘둘러갔다.
“저 새끼는 또 뭐야?!”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리고 돌진했다.
“막아! 이놈도, 저놈도. 다 막으라고!”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으면서 거트는 소리만 꽥꽥 질러댔다. 멀러서 나를 아직 알아보지 못한 건가?
“꺼져라!”
그들 중 누구도 크루즈의 강맹한 공격에 대항하지 못했고 최배달, 골드 드래곤과 싸운 기억 때문에 에크만처럼 속도를 상당히 중시한 내 검을 막지 못했다.
숫자는 줄어만 가는 레이지 길드. 그럴수록 나와 거트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너, 너는?!”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나를 발견한 거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는 뒷걸음질. 다른 길드원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허겁지겁 리턴 스크롤을 찢으려 했다.
“누구 맘대로!”
푸욱-!
겨냥한 건 아니지만 다급히 집어던진 드래곤 슬레이어가 거트의 이마에 꽂혔다. 너무…… 허무했다.
“오옷!”
내게 남은 검이 하나뿐이자 주위에 있는 기사들은 더욱 몰아쳐서 공격했고 거트의 주위에 있던 한 녀석은 거트의 이마에 꽂힌 내 검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앗!”
치지직!
스파크와 함께 드래곤 슬레이어를 만진 자는 적지 않은 데미지를 입었고, 드래곤 슬레이어는 나에게로 돌아왔다. 이도류라는 것이 하나하나 놓고 보면 일반 검들보다 길이가 꽤 짧아서 하나만 남은 뒤, 방어만으로도 고전하고 있다가 왼손에 드래곤 슬레이어의 감촉이 느껴지자 불끈 힘이 났다.
“으랏차차차! 백스텝!”
채쟁! 챙! 챙! 챙!
3명의 기사가 휘두르는 검을 모두 세게 쳐내고 백스텝으로 일단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다시 돌진했다.
“검강, 파워 스텝, 연속 베기!”
양손에 들린 이도류에 파란 검강이 맺히고, 발을 크게 굴러 순간적인 속도를 높인다. 그리고 세 번 검이 무언가에 부딪히기 전까지 휘두르는 속도 1.5배. 세 기사의 목이 눈 한번 깜짝할 사이 달아났다.
“타오르는 불꽃의 힘이여!”
난 겨우 셋을 상대했지만 크루즈는 한 번에 여섯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탓에 쉽게 승부를 내지 못하고 적들에게 자잘한 상처만 입히다가 마음을 먹었는지 큰 기술을 쓴다. 검 끝으로 모여드는 화염, 그 열기만으로도 적들은 조금씩 물러섰다.
“작열하라!”
“이런 미친! 물의 수호!”
콰과과과과광-!
그야말로 대폭발이 일어났다. 과거 리바이어선과 싸울 때 사용했던, 내가 버티지 못하고 물속으로 뛰어들게 만든 기술. 일진광풍이, 폭염이 휩쓸고 간 자리엔 흙먼지만 잔뜩 날렸다.
“거스트 오브 윈드!”
혹시 모를 기습을 피하기 위해서, 물의 수호를 풀지 않고 마법으로 먼지를 날려버렸다. 레이지는 전멸. 그리고 크루즈는…….
“어째서 본인까지?!”
쓰러져 있었다. 저번엔 그렇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크루즈의 몸도 폭발에 휘말린 듯했고 곧 숨이 넘어갈듯, 헐떡거렸다.
“힐! 힐! 힐!”
회복 주문을 걸어봤지만 크루즈의 몸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어째서?”
“쿨럭, 검과 부딪히며 모이던 마나에 변화가……. 쿨럭, 쿡!”
화르르륵!
힘겹게 입을 떼던 크루즈는 그렇게 허무하게 불꽃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화룡의 검만 남기고서.
“마나를 모을 때 부딪혔던 기사의 검이 문제였던 건가? 바보 같은 놈! 무리해서 상대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직도 도울 일이 많은데 벌써 사라진 크루즈를 원망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혹시나 다시 찾아올 레이지 길드를 기다리기 위해.
“……포기한 건가?”
아무리 기다려도 레이지 길드의 인물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기습 자체를 포기한 걸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기습할 준비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다른 전장으로 이동했다.
화산에서의 일이 있은 후, 레이지 길드의 마계의 입구 기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화산을 떠나서 이곳저곳 전장을 떠돌아 다녔고 오히려 인간들에게 정보를 얻어, 그들의 기습작전을 되레 기습했다. 그 와중에 몇 번의 죽음도 있었지만 매번 수백 명의 유저, NPC를 학살했고 학살자의 수식어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내가 몬스터가 아닌 유저, 그것도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자라는 것을 알았고 어느새 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악수치가 끝을 모르고 상승하는군. 뭐, 상관없지.”
또 한 차례 전쟁에 끼어들고 난 뒤, 전리품과 레벨 업에 의한 보너스 능력치 분배를 하다가 한계치에 다다른 악수치를 발견했다. 이 상태로 죽으면 드래곤 슬레이어나 화룡이 검, 수신의 방패 같은 드랍 불가 아이템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템들을 떨굴 테지만 안 죽으면 그만이고, 죽어서 떨군다 해도 아이템에 큰 욕심이 없으니 별 상관없다.
“하지만 아까는 좀 위험했어.”
중급에 속하는 아이템은 땅바닥에 던져버리고 고급 이상의 아이템만 품에 챙겨 넣으며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려 봤다. 내가 인간들 속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얻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몇몇이 일부러 조작된 소문을 풀었고 난 그것을 철석같이 믿었다가 포위당했다.
“메테오 스웜과 화룡의 갑옷. 제법 쓸 만한 조합이란 말이야?”
그때 사용한 것이 화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만든 조합. 메테오 스웜과 화룡의 갑옷! 화룡의 갑옷을 사용하면 메테오 스웜 속에서도 아무런 데미지를 받지 않으니 주위를 적에겐 지옥이고 나에겐 천국이나 다름없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두 번을 반복하며 도주만을 생각하니, 아무런 피해도 없이 수백에 달하는 적들만을 죽이고 유유히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도착한 곳이 지금 이곳. 내가 오기 전에도 마왕군이 다소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10써클의 마법이 없어도 쉽게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전리품의 분배가 끝나자 백인장 셋이 나에게 찾아왔다.
“콜로니스트님?”
“그렇습니다만.”
“마왕님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수도로의 총공세 시작. 각 지역에 있는 마왕군들은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뤼크레스로 집결하여 인간들과의 최종 결전을 준비하라.”
백인장은 목소리까지 변조해가며 마왕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성의를 보였다.
“최종 결전이라, 벌써?”
“벌써라니요. 이미 현실 시간으로 3주가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현실 시간으로 3주. 그러니까 게임 시간으론 9주가 넘는 시간이 지났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인간과 마왕의 결전이 겨우 9주만에 시작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적어도 몇 년 정도는 되어야지…….
“이게 다 이동수단이 너무 편리해서 그래.”
마법이라는 편이한 이동 수단 때문에 이렇게 빨라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걸어서 목적지에 닿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이 걸려야 하는데 전 토지의 약 60%를 집어삼키는데 고작 9주라니!
“예?”
“아냐. 아무것도. 총공세는 언제 시작한다고 하지?”
“3일 후입니다. 인간들도 병력을 모아서 마지막으로 한 번 붙어볼 모양인데 마땅한 지휘관이 없으니 큰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전장에서 겪어보니 인간들에겐 뛰어난 책사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작전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힘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만들어진 것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이기는 전략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사실, 그 정도로 우위에 있다면 그냥 싸워도 할 만하다.
“3일이라, 재미있겠군. 다른 셋의 소식은 들은 바 없나?”
“다른 셋이요? 아! 에크만님은 현재 1번 부활하셨고 알테어, 로즌 크랜츠님은 두 번씩 부활하셨습니다. 세분 다 이번 전투에 참여하신다고 하더군요. 두 분은 이번에 죽으면 마지막 부활이 될 텐데…….”
난전 속에서는 제 아무리 알테어, 에크만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나보다. 그래도 참여한다니, 꽤 흥미진진해 질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나도 참가해야겠군.”
마왕군을 유리하게 할, 그리고 재미를 더해 줄 방법도 찾았다. 바로 나머지 두 개의 구슬을 사용하는 것! 볼거리도 제공하고 전력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만약 두 그랜드 마스터와 함께 알테어, 에크만, 내가 선두에 서면?
“아주 재미있겠어. 후후후!”
뤼크레스에 미리 도착해서 뭔가 작전을 세워보다가 문득 전에 석판을 얻으면서 생각해놓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다른 마법은 포기하면서 유독 디스펠만은 남겨둔 이유. 검증도 되지 않았고 위험부담이 무척이나 컸지만 어차피 남는 시간이고 아이템의 드랍과 레벨의 다운 같은 것은 두렵지 않았기에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경비가 영 허술하군.”
수도 폴메르. 그것도 성벽 위. 어둠을 틈타 잠입했다고는 하지만 너무도 쉽게 담을 넘을 수 있었다. 한참 며칠 뒤에 있을 결전 때문에 시끄러워선지 오히려 경비가 허술해진 듯.
담을 넘고, 사람들을 피해 내가 찾아간 곳은 왕족의 서고였다. 여긴 더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직위에도 제한이 있는 데다 그런 자들이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늦은 저녁에는 더욱.
“이쯤이었을 텐데……·?”
드르르륵!
책 한 권을 꺼내자 기관을 작동하며 책장이 돌아갔다. 그리고 드러나는 비밀통로. 이미 한 번 와본 경험이 있는지라 횃불을 켜들고 지도를 보며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봉인 지역이라 불리는 지하 감옥. 마법으로 공격해 봐도, 검강으로 베어 봐도 갑자기 생겨나는 보호막 때문에 문을 열수가 없던 이상한 곳이었다.
“디스펠!”
피시시식!
뭔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감옥 문에 둘러진 보호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하기를 반복했다. 꺼지기 전에 촛불처럼 위태위태한 모습. 거기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두르니 보호막은 산산이 깨어져 흩어졌다.
“디스펠, 디스펠, 디스펠!”
나머지 3개의 감옥 문에도 마찬가지의 행동을 했다. 사라진 듯 보이는 보호막들. 누군가 있다면 대신 문을 열도록 시켜도 좋을 테지만 여기엔 나 혼자뿐이었기 때문에 재빨리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멀찌감치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르!”
“크으으음!”
“누구냐? 나를 이곳에서 해방시켜 준 기특한 녀석이. 크흐흐!”
한 곳은 비어있었다. 하지만 다른 세 곳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풍기는 짐승과 두 괴인이 걸어 나왔다.
“크르륵!”
“구해준 사람도 몰라보다니. 이런 개새끼가!”
제일 안쪽 문에서 나온 표범 같은 모습의 짐승이 나에게 덤벼들려하자 3번째로 나온 괴인이 놈을 잡고 패대기쳤다.
자신을 공격하자 강한 적의를 보이는 짐승. 그러나 자신을 향해 으르렁대는 짐승에게 적의를 보이는 것은 괴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갑자기 좁은 복도는 짐승과 인간의 싸움터로 변해버렸다. 목을 물어뜯고 발톱으로 찍으려는 짐승과 목을 잡고 패대기치거나 아가리를 벌려서 찢어버리려는 괴인.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둘의 싸움은 한동안 계속됐다.
결국 만신창이가 된 놈으로 승리한 것은 괴인. 마지막에 짐승의 목을 오히려 물어 뜯어버린 것이 컸다.
“흐흐흐, 널 공격하려던 개새끼를 내가 해치워줬으니 이제 빚은 없는 거다?”
괴인은 처음부터 이걸 노렸다. 내게 빚을 없애기 위해서. 나야 이들이 나가서 소란만 피워주면 그만이니 상관없지만.
“흐흐! 겨우 천 명 조금 넘게 죽였다고 날 이렇게 가둬놔? 나가기만 하면 이놈들을 가만 안 놔둔다!”
“음, 난 구해달라고 한 적 없다. 그러니 빚고 없지.”
두 번째로 감옥에서 나온 괴인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어이없는 말을 남기고 위로 올라갔다.
이자,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이봐! 당신은 인간들에게 복수하고픈 생각 없나?”
“난 지울 수 없는 죄를 졌다. 앞으로 남은 생도 그곳에서 보내는 게 맞겠지만 거긴 너무 답답하더군. 남은 죗값은 바깥에서 조용히 치르고 싶다.”
이건 뭔가 아군이 아닌 적군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서둘러 조치를 취해놓아야 했다.
“인간들을 도울 셈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건 맞지만 그들도 내게 죄를 지었으니까. 그저 세상과 연을 끊고 조용한 곳으로 갈 생각이다. 혼자 되새기면서 죗값을 치러야지.”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인간을 돕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저 짐승이 살아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됐을 테지만 이미 죽어버렸고, 믿을 건 저 괴인밖에 없다.
“힐!”
“큭, 또 빚져버린 건가?‘”
그놈의 빚은 되게 찾는다.
덩치가 덩치이고 상처가 꽤 중했던 만큼 상당량의 신성력을 사용하고 나서야 회복을 마칠 수 있었다. 상처가 아물자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는 괴인. 그것에 나는 인간들의 학살이라 답했고 그도 원하던 바라 선뜻 응했다.
그리고 그날 밤.
수도, 그것도 본성에 나타난 두 괴물 때문에 한바탕 큰 소란이 일었다. 결국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이백도 넘는 길드원들이 죽어나갔다는 소문이다. 하나가 아니라 둘인 이유는 회개하러 간다는 가가 세 번째로 나온 괴인의 일에 말려들어서 인 듯했다.
“그래도 한 번 제대로 뒤흔들어 놓은 것 같군.”
거트의 성격대로라면 이런 일이 한번 있었으니 불안해서 잠도 못 잘 것이고, 외곽에 배치시켜 놓았던 병력을 안으로 불러들여 성을 수색이라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성밖의 수비력과 경비가 허술해 질 테고 거트는 또 한 번 유저들에게 신용을 잃는다. 물론 더 이상 잃을 신용이 있을 경우지만.
“아차, 내일 있을 전투에서 뭘로 출정할지를 신청하지 않았곤.”
유저들은 특별히 원하는 위치를 적어서 신청하면 그리로 배치시켜 준다. 자신의 클래스와 능력에 맞는 곳으로 알아서 빠지란 소리다.
잠시 생각하다가 마음을 굳히고 신청서를 작성하러 갔다. 그리고 똑똑히 적어 넣었다. 전방이라고.
최전방도 있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최전방은 화살받이야.”
전쟁이 시작하면 화살과 마법이 난무할 게 뻔한데 최전방에 있으면 그것들을 모두 몸으로 감내해야 한다. 그러려면 물의 수호를 쓰거나 상당한 마나를 사용해서 검강 등으로 쳐내야 할 텐데. 안 그래도 마나를 많이 잡아먹는 화룡의 검을 사용하면서 그것까지 해내긴 무리다.
“어? 이게 누구야. 콜로니스트 아니야?”
고개를 돌리니 막 서류를 작성하고 오는 알테어와 에크만이 보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우리야 늘 안녕하지. 너도 위치 신청하러 온 건가? 어디 보자, 으잉? 전방? 최전방이 아니고?”
“혹시 두 분은 최전방이라고 쓰셨습니까?”
“당연하지! 남자라면 당연한 거야! 피 끓는 최전방에서의 전투. 캬하!”
둘은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
“두 분, 제 얘기를 잠시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둘이 최전방으로 갔다가 일찍 죽어버리거나 대다수의 마나를 써버려서 기진맥진 해버리면 나 역시 재미없어지기 때문에 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전방을 쓰면 안 되는 이유, 전방을 쓰면 좋은 점들을 역설하자 눈 동그랗게 뜨며 수긍하는 두 사람. 얘기가 끝나자 앞 다투어 자신이 작성했던 서류를 수정하러 뛰어갔다.
* * *
“하~암!”
전투가 시작되기까지 7시간도 넘게 남은 탓에 한숨 자고 일어났다. 아직도 1시간 이상 남은 상황. 벌써 접속해봐야 딱히 할 일도 없기에 컴퓨터를 켜고, TV를 켰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확연히 눈에 띄는 공지. 이번 대규모 전투를 알리는 공지 옆에는 홍보용 동영상까지 있었다.
“TV에도 광고 나가는 동영상이라……?”
쿠궁!
동영상을 실행시키려는데 같이 켜둔 TV에서 깜짝 놀라게 만드는 소리와 함께 광고가 나왔다. 가만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화면들.
“이거…… 나잖아?”
이번 이벤트가 벌어지고 나서 일어난 전투들이 사진으로 찍혀서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다가 나타나는 로즌 크랜츠의 클로즈업 화면. 사진 옆으로 그의 게임 속 경력들이 나열되었다. 그리고 활약하는 동영상 화면. 그 다음은 알테어였고, 또 그 다음은 에크만이었다. 마지막은……. 나.
“인간이지만 인간을 버린 자, 두 손을 수천 명의 피로 흠뻑 적신, 학살자 콜로니스트!”
거창한 말과 함께 나열되는 경력들. 내 레벨에 관한 부분은 없으니 안심이다. 경력의 나열 다음엔 동영상이다. 전쟁 중에 끼어들어 메테오 스웜을 날리는 모습. 엄청난 속도로 유저들을 베어가는 모습이 제법 멋들어지게 잡혔다.
“마음대로 남의 화면을 가져다 쓴 건 괘씸하지만 그래도 잘 나왔으니 봐주기로 하지.”
마지막 멘트는 역시나 이들로부터 세상을 구해보라는 소리였다.
“쳇, 마왕은 달랑 한 컷 잡아주고 그런 소릴 하면 우리가 보스인 것 같잖아?”
마왕은 스쳐가며 한 컷만 잡아줘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긴 했지만 인심 쓰는 김에 이것 역시 봐주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홈페이지를 살폈다. 눈에 띄게 날 포장해 놓은 글과 사진들. 그곳에는 내가 아주 차갑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으며 인간을 증오한다는 식으로 적혀 있었다. 조금 과장된 표현들이 있었지만…… 부정은 않겠다.
“슬슬 접속해야겠군. 접속!”
간단한 본인 인증을 끝내고 게임에 접속했다.
전쟁 준비로 분주한 평원. 모두들 여차하면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앗, 저기!”
“마왕이다!”
한참을 지루하게 기다리자 어디선가 나타난 마왕이 전투 시작 전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마지막으로 짧게 물었다.
“모두 준비되었나?”
“예!”
“그럼 가자!”
“와아아아아아!!!!”
최전방을 택한 유저들과 NPC몬스터들이 환호하며 전진했다. 그리고 그 뒤를 내가 에크만들과 따랐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동시에 밀고 나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나와 알테어, 에크만은 계속 붙어 있는 상태로 전진했다.
“쏴라!”
슈슈슉-!
맨 먼저 예상했던 대로 최전방의 병사들이 화살 세례를 받았다.
콰광! 쾅! 쾅! 쾅!
그 다음은 역시 마법 세례. 인간 측은 아주 기본에 충실한 전법을 써서 마왕군에 맞서고 있었다. 그 덕에 마왕군도 기본에 충실하게 마법에 의해 약간의 병력을 손실했고, 그 다음은 근접전의 시작이었다.
“와아아아!!!”
“죽여라!”
“우리도 가볼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 전에 할 일이 있거든요. 봉인의 구슬, 사용!”
이번엔 두 개다. 노란색과 갈색. 두 개의 구슬을 꺼내 사용하자 제법 화려한 등장 씬이 연출되었다.
쿠구구구구구!
먼저 전기의 그랜드 마스터 라무는 등장하기 전에 땅이 솟아올랐다. 기둥처럼 10M가량 솟아오른 땅 위로 번개가 내리쳤고, 번개가 번쩍이고 난 뒤엔 번개 맞은 땅 위에 어느새 라무가 소환되어 있었다.
“라무, 저 인간들을 공격하라! 모두 죽여!”
“하늘의 심판!”
쿠르르릉!
라무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자 엄청난 양의 번개가 인간들의 진영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러는 사이 쥐도 새도 모르게 등장한 잠지드. 우람한 근육과 덩치가 눈에 확 띄었다.
“자, 이제 우리도 합류하도록 하죠. 잠지드, 인간들을 모두 죽이는 거다!”
“예. 주인님!”
잠지드에게도 인간 말살의 명령을 내리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뛰어듦과 동시에 사용한 건 메테오 스웜!
순식간에 적의 전열을 흩어버리고 우리 편의 사기는 북돋아준다.
“크하하하하하하!!!!”
“죽어라, 죽아!”
알테어와 에크만은 신이 났다.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존재를 베어 넘겼고, 발목 잡을 놈들이 없으니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거기다 든든한 일당백의 잠지드가 있으니 등 뒤는 걱정하지 않고 전진에 전진만 계속했다.
그러다 보니 너무 깊이 들어간 감도 없지 않았지만 적들도 에크만들을 피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위험하진 않았다.
“화룡의 이빨!”
다수의 적이 뭉쳐 있다 보니 특별히 어디를 노리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아무데나 날려도, 아무렇게나 날려도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끊이질 않았고 이게 지옥인가 이승인가 헷갈리기까지 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빨리 끝내야 한다는 거지! 메테오……?!”
다시 한 방의 메테오 스웜을 날리려는데 얼핏 인간 측 진영에서 소연일 본 것 같았다.
“잘못본 거겠지. 메테오 스…….”
“태연아!”
“……!”
확실했다. 목소리도, 얼굴도 틀림없는 소연이었다.
이젠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가슴이 뛰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듯 울컥 치미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비켜!”
소연까지 휘말릴 수 있는 메테오 스웜은 사용할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빠르게, 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이도류를 휘두르며 소연에게로 달려갔다. 급하게 서두르느라 미처 막아내지 못한 몇 개의 검들이 몸에 자잘한 상처를 남겼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행돌파를 해서 소연이 앞에 도착했을 때, 한 기의 데스 나이트가 소연이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리스트레인!”
품에서 주먹만 한 구슬, 프리스트 마스터 아이템인 디바인 마크를 꺼내면서 외쳤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의 움직임을 속박하는 신성력. 다행히 데스 나이트는 더 이상 검을 내려치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건방진 놈!”
서걱!
소연이에게 칼을 휘두르려 한 대가로 데스 나이트는 목이 달아났다. 내 주위로 다가오는 몬스터건 인간이건 모두 사살.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만의 공간이 생겨났다.
“괜찮아?”
“으응…….”
제법 여유가 생기자 바닥에 쓰러진 소연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이런 위험한 곳엔 왜…….”
“널 말리러 왔어.”
“뭐?”
“이러지 마.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이렇게 무리해서 PK만 해대봐야……. 너한텐 아무런 도움도 안 돼!”
“……그럴 순 없어. 돌아가.”
“태연아!”
“너야말로 이러지마. 아무리 말려도 난 마음을 돌리지 않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고생은 그만두고 돌아가.”
“네가 그만둘 때까지 안돌아갈 거야.”
“……맘대로 해. 메테오 스웜.”
콰과과과과광-!
두 번째 메테오 스웜이 인간 측 진영에 작열했다. 한 지역의 초토화. 역시나 10써클의 마법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며 적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블레스.”
소연을 남겨둔 채, 디바인 마크를 사용해서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블레스를 빠르게 시전한 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베었다. 중간 중간 쏘아내는 마법에 수강, 퀵 스텝, 연속 베기…….
한 클래스에만 국한되지 않은 변칙적인 공격에 상대하는 이들은 크게 당황했고 손발을 어지럽게 놀리다가 죽음을 맞기 일쑤였다.
둥! 둥! 둥! 둥-!
한참을 어울려 싸우고 있는데 인간들의 진영에서 먼저 큰 북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썰물 빠지듯 도망가 버리는 유저들. 좀전의 북소리는 퇴각을 알리는 북인 것이다.
“화룡의 이빨! 화룡의 이빨! 화룡의…….”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대는 인간들을 향해 계속해서 화룡의 이빨을 퍼부었다. 거의 발악하듯이.
“그만둬. 이젠 사정거리도 안 닿잖아?”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지. 흐흐!”
어느새 다가온 알테어와 에크만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행동을 제지했다. 그제야 밀려드는 공허함. 총 마나량의 10분의 1이나 잡아먹는 화룡의 검 특수능력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한 탓이다.
“큭……!”
밀려드는 무기력감에 비틀거리며 마왕군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것을 가르는 게 아닌 만큼 고위급 인사를 위한 막사가 준비되어 있었고, 나름대로 간부직을 맡은 나에게 하나 배당이 되었다.
“하아…….”
어째서 소연이가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거트가 날 설득하도록 부탁한 것일까? 아니면 진짜 내가 걱정되는 순수한 마음으로? 어느 쪽이든 거트에게 충분한 응징을 하기 전까진 멈추지 않을 생각이지만……. 궁금하긴 했다. 이러는 걸 그 빌어먹을 돈황이 가만히 놔둘까?
바스락!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간부급쯤 되는 내 막사에 기웃거린다는 것은 어지간한 계급으론 힘든 일. 누굴까 의아해하며 알테어, 에크만쯤을 예상하고 있을 때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스스슥 낭창거리는 채찍을 든 서큐버스 퀸 듀리아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오호호호. 축 쳐진 어깨가 아주 볼 만하군요.”
“무슨 일이지?”
상대가 호의를 보이지 않으니 나로서도 좋은 말투가 나올 수 없다. 날 원수 보듯이 깔아보며 막사 안으로 한 바퀴 도는 듀리아. 내키지 않는 듯 표정을 굳히며 말을 전했다.
“마왕님께서 오늘 전투에서 당신이 세운 공을 사서 치하하시겠답니다. 중앙 막사로 가시지요.”
“싫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호히 거절하자 듀리아의 눈이 찢어질듯 날카로워지며 날 노려봤다.
자신의 상관의 명령을 거절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겠지.
“마왕님의 명령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난 너희처럼 마왕의 쫄따구가 아니야. 난 목적을 위해 그와 계약을 했을 뿐이지 그의 밑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누구도 내게 명령을 내릴 권리는 없다. 알았어? 지금 난 어디로 움직일 기분이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돌아가라!”
“으으! 쳇!”
쾅!
듀리아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등을 돌려버렸다. 화가 나서 몸을 부르르 떨다가 돌아서는 듀리아. 나가는 길에 분풀이로 의자 하나를 부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나를 싫어하는지 모르겠군. 뭐, 내 알 바 아니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왜 듀리아가 나를 싫어하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잊어버렸다. 그딴 건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녀는 그녀대로, 난 나대로 각자 할 일만 하면 그만이다.
“북을 울려라!”
둥! 둥! 둥! 둥!
다음날, 인간들은 인간들대로, 마왕군은 마왕군대로 북에 해당하는 악기를 두드리며 제 2차전의 시작을 알렸다.
어제에 이어 나와 알테어, 에크만은 전방에 위치했고 오늘은 추가로 전기의 그랜드 마스터 라무와 땅의 그랜드 마스터 잠지드도 동참했다. 다행히도 어제 약간의 피해는 있었지만 둘 다 살아남은 것이다.
“매스 프로텍션, 블레스!”
격돌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방어력 상승 주문과 축복을 걸었다. 그리고 전장을 훑어보았다. 무슨 울트라 니뽄 응원단도 아니고 인간들의 방어구가 파란색 일색이다. 아마도 메테오 스웜에 조금이라도 저항해보기 위한 방책이겠지. 방어구마다 담겨 있는 냉기의 기운 때문에 선선한 날씨에도 추위에 떠는 인간들을 보니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가라, 나의 병사들이여!”
“악을 멸하고 이 세계를 구하자!”
마왕과 거트의 입에서 각각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에 따라 전투를 시작하는 군대. 어제와 마찬가지로 최전방이 화살, 마법을 몸으로 받아내고 전방부터의 병력이 맞붙는 형태였지만 오늘은 리치들의 활약이 제법 두드러져서 날아오는 마법 피해를 많이 줄였다. 궁중에서 상쇄를 일으킨 것이다.
“우리도 슬슬…… 응? 저건?!”
“먹어라!”
콰과과과과광!!!
최전방끼리의 격돌이 대충 끝나고 전방의 병력끼리 맞붙을 eo가 되어 나서려는데 저 멀리서 한 여인이 크고 푸른 활을 잡아당기는 것이 보였다. 잡아당긴 것은 빈 시위였건만 강렬한 빛을 내며 생성되는 전격의 화살. 그 화살이 쏘아졌을 때, 달아오르려던 전장의 열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뭐, 뭐야? 저 위력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50도 넘는 병력이 죽어나갔다. 그것도 각도가 커서 그랬지 정면에서 쏘거나 낮은 각도로 쏘았다면 1백 정도의 병력을 죽이는 것도 문제가 아닐 듯싶었다.
나야 저게 무엇인지 알고, 또 심심치 않게 사용해 보았으니 고개만 끄덕였지만 저것, 뇌궁에 대해 모르는 자들은 인간, 마왕군 할 것 없이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마왕군에만 대량 살상 가능한 능력을 가진 자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인간 편에도 만만치 않은 자가 있으니 잠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에린 누나, 뇌궁으로 이 정도 위력이라면 마법사 클래스도 마스터 한 건가?”
자신의 편에도 굉장한 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들의 기쁨에 찬 환호를 들으며 에린 누나는 또 한 번 뇌궁의 시위를 당겼다.
콰과과과과과광!
역시나 대단한 위력. 이번엔 조금 각도 조절을 했는지 최전방이 아니라 전방에 있는 마왕군 한 무더기가 죽어나갔다.
이쯤 되자 두려움이란 걸 모르는 NPC와 달리 죽을 것을 염려한 일부 유저들이 후방으로 이동하려는 낌새를 보인다. 사기가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다는 뜻. 여기서 그냥 놔두면 전력의 강약과 상관없이 참패를 당할 수도 있다.
“저 궁수부터 처리해야겠군. 내가 하지. 대신 너희는 길을 뚫고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한 방에 잠재워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사기를 살리기 위한, 그리고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최우선 과제를 에린 누나의 죽음으로 보고 에크만이 나서자 나머지는 그를 서포트하기로 했다.
더 메지션, 에린 누나. 다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내 앞을 막는다면……힘으로 무너뜨린다.
“모두 물러나십시오. 글레이셜 게일!”
극한의 바람이 전장을 휩쓸었다. 불과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갑옷에 서리가 내렸고 극심한 체온 감소를 불러일으켰다.
먼저 쓰러진 것은 메테오 스웜만을 경계하고 한기를 가진 방어구를 착용한 자들이다. 방어구 자체가 내뿜는 한기에 글레이셜 게일이 일으킨 한기가 더해져 먼저 체온이 저하된 탓이다.
다른 사람들도 약간의 시간차만 보인다 뿐이지 결과는 똑같았다. 화산에서 미노타우르스 같은 대형 몬스터도 얼려 죽인 마법에 한낱 인간이 버틸 수 있으랴!
“……우리 쪽이 더 괴물이다! 겁먹지 말고 공격하라!”
적의 최전방 병력 전멸을 멍하니 지켜본 마왕군 유저들이 사기를 올리기 위해 목청 돋워 소리쳤다.
괴물이라는 단어가 거슬리긴 했지만 지금 상황은 내가 봐도 괴물 같은 짓이라 못들은 걸로 쳤다.
최전방의 병력이 몽땅 사라지자 전방에서 비교적 느긋하게 있던 자들이 허둥지둥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인간 유저들은 급하게 움직인 터라, 그리고 또다시 펼쳐질지 모르는 마법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싸움은 마왕군의 우세로 기울었다.
그때, 다시 시위를 당기는 에린 누나.
“화룡의 이빨!”
콰츠츠츠츠측!
화룡과 번개의 화살이 맞부딪히며 눈부신 빛, 그리고 굉장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결과는 당연히 화룡의 우세! 가진 바의 마나량으로 위력이 결정되는 무기들이다 보니 에린 누나가 절대 날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번개를 집어삼킨 화룡은 번개의 주인에게까지 이빨을 들이댔지만 주인은 이미 자리를 피한 뒤였다. 역시 궁수 클래스를 마스터한 터라 스피드는 상당했다.
“모두 공격!”
방금 전의 격돌에서 되레 뇌궁이 밀리자 자신감을 잃었는지 에린 누나는 시위 당기기를 주저했다. 그러는 사이 밀고 들어가는 마왕군. 그 중심에는 알테어와 에크만, 잠지드가 있었다.
“으랏차차!”
“크하하압!”
알테어와 잠지드. 힘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둘이 열성적으로 난동을 피우자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히 그리로 쏠렸다. 그 사이 은밀하게, 그리고 빠르게 이동하는 에크만. 목표는 에린 누나였다.
“컥!”
그러나 비명성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도 나와 멀지 않은 곳. 비명의 주인공은…….
“라무?”
심장에 새하얀 무언가가 박힌 채 부르르 떨던 라무가 한줄기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자세히 보니 라무의 심장에 박혔던 것은 드래곤 하트를 흡수하지 않은 드래곤 슬레이어. 내가 아는 한 나 이외의 드래곤 슬레이어의 주인은 단 한 명이었다.
“아론……. 소연이?”
아론이 드래곤 슬레이어를 앞세우고 어느새 이곳까지 뚫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소연이의 모습이 보였다.
“네가 데려온 거냐?”
“그래. 부탁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네 녀석의 미친 짓을 막을 수 있는 건 쟤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판단 미스다. 너, 실수했어.”
“그만둘 순 없냐? 비록 지금 악수치가 엄청나긴 할 테지만 마왕을 잡으면 어느 정도는…….”
“성향 수치 따질 거였으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어. 뭐라고 말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태연아…….”
안타까운 소연이의 목소리에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말로 회유하길 포기한 듯한 아론. 자신의 드래곤 슬레이어로 나를 겨누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랑 나랑 겨뤄서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의 말을 듣는 거다. 어때?”
“후회할 텐데…….”
“그거야 겨뤄보면 알지. 대쉬!”
아론과 소연으로서는 사방이 포위된 상황이었지만 내가 있기 때문인지 마왕군 중 아무도 끼어드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동그랗게 둘러싸고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자존심이 상한 듯, 오른발을 박차고 달려오는 아론. 대쉬 스킬까지 섞어 제법 빠르긴 했지만 애초에 파워 중심의 기사로 나섰던 지라 나나 에크만에 비해 형편없이 느렸다. 더구나 잊혀진 대륙에서 나와 필적하는 몬스터들의 속도에 눈이 익숙해져 버린 상태다.
“검강!”
드래곤 슬레이어를 매개로 펼친 검강이라서일까? 검강도 증폭되는지 푸르스름한 기운이 유난히 더 크고 길어 보였다. 그러나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선풍각!”
드래곤 슬레이어를 찔러오는 아론의 머리를 향해 선풍각을 사용했다.
카운터!
아론이 달려드는 속도에 내가 움직이는 속도가 더해지자 선풍각은 이렇다 할 마나를 싣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간 힘을 적지 않게 올린 탓도 있어서 아론은 곧장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머리에 타격을 받아서인지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더 할 테냐?”
“크윽, 물론!”
제법 충격이 컸던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아론은 일순간 튕겨져 나오며 검을 휘둘렀다. 나름의 기습이었겠지만 기습이 통하기엔 너무 속도 차이가 났다.
쿠웅-!
“더 할 테냐?”
오른손에 들린 드래곤 슬레이어로 휘둘러오는 아론의 검을 쳐내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숄더 차지! 힘이 아주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속도라는 게 붙어서 아론의 가슴을 쳐서 넘어뜨리기엔 충분했다.
“이얏!”
“백스텝!”
크게 엉덩방아를 찧은 아론은 바닥에 흙을 집어던지며 또다시 덤벼왔다. 그러나 역시 너무 큰 속도 차이. 뿌려진 흙이 나에게 닿기도 전에 난 2m 정도 뒤로 물러났고 아론이 일어나자마자 내 드래곤 슬레이어는 녀석의 목에 닿았다.
미안한 소리지만 아론은 힘 중심으로 캐릭터를 육성하다가 도중에 무리해서 속도를 중시했기 때문에 단지 일반 마스터 레벨의 기사들보다 힘과 속도가 조금 나은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뭐, 드래곤 슬레이어를 얻음으로써 충분히 일반 유저들과 격차가 났지만.
“더 할 테냐?”
“제기랄!”
드디어 결과에 승복한 아론. 검을 집어넣어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내게 요구하는 바를 물어왔다.
“떠나라. 소연이랑 너. 둘 다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마.”
“……알았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하지만 쟤는…….”
“싫어. 약속한 건 쟤지 내가 아니잖아? 난 계속 널 따라다니면서 말릴 거야.”
소연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마음대로 해. 거듭 말하지만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복합적 의미를 지닌 말을 남기고 또 다시 전장으로 몸을 날렸다. 어느새 에크만에게 제압된 에린 누나. 더 이상의 대량 살상 공격이 없자 마왕군들은 기세등등하게 인간들을 몰아붙였다.
거기에 내 메테오 스웜이 더해지자 사기를 하늘을 찔렀다. 최전방에 비해 대비가 없던 전방의 유저들은 메테오 스웜이 가지는 화염 속성 데미지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저항해 볼 새도 없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검기급 공격까지도 맨몸으로 튕겨내는 잠지드의 땅 속성 공격들.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가 어스퀘이크를 사용하는가 하면 산처럼 커다란 바윗덩이를 소환하여 적진 한가운데로 던져버렸다. 무서운 속도로 유저들을 도륙하고 이따금씩 인페르노나 체인 라이트닝 같은 광역 마법을 사용하는 알테어, 에크만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음, 저것들은 뭐야?”
최전방의 인원만 사라진 상탤 인간들의 전방에 해당하는 지역을 쓸어버렸다. 드디어 나타나는 본진의 유저들. 그런데 선두에 서서 달려오는 자들은 하나 같이 특이한 무언가가 있는 자들이었다.
“히든…… 클래스인가?”
카드를 든 자, 척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이는 아이템들을 든 자, 복장이 특이한 자들이 본진의 유저들을 이끌고 전방에 해당하는 마왕군과 맞부딪혔다.
개중에는 이미 봤던 자도 있다. 현과 루드라라고 했던가? 은사를 사용하는 자와 카드에 그림을 그려서 사용하는 자. 현은 일정 레벨에 올랐는지 은사에 강기까지 씌워서 이리저리 뿌려댔고 루드라도 강한 마법을 많이 만들어냈는지 상당한 능력을 보였다.
“회(回)!”
강기의 힘을 입어 더욱 강해진 절삭력으로 마왕군을 쓸어가던 현이 이번엔 전방으로 은사를 넓게 회전시킨다. 마치 리본체조라도 하는 듯한 모습. 그러나 적들에겐 그 모습이 두렵기 그지없다.
“하지만 얼마 못 가겠군.”
가늘디가는 은사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니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그만큼 단점이 눈에 들어왔다. 현의 평온한 듯한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이 보인다는 것. 저 작고 긴 은사에 강기를 씌워 줄기차게 휘둘러대니 마나가 남아날 리 없는 것이다.
그의 활약이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파악하고 이번엔 루드라에게로 눈을 돌렸다. 저번에 보여준 사신의 낫이란 기술은 꽤 흥미로운 것이었으므로.
“절망의 낫!”
루드라가 카드를 내밀며 외치자 카드에서 커다란 낫이 회전하며 튀어나왔다. 그리고 걸려드는 모든 생명체를 그대로 베어버렸다.
방패로 막아도 소용없다. 방패는 방패대로, 몸은 몸대로 잘려나갈 뿐이다. 그 크기도 거대해서 잡아 챌 수도 없다. 위력이 대단한 것이니 만큼 루드라의 표정도 좋지 못했지만 모두 절망의 낫에 정신이 팔려 신경 쓰지 못했다.
“가소로운 것!”
휘릭-
텁!
거칠 것 없이 날아가던 절망의 낫도 잠지드의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절망의 낫을 잡아챈 잠지드는 그 큰 덩치만큼이나 낫이 잘 어울렸다. 하지만 마법적인 것이었기에 절망의 낫은 잠지드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지기 시작했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히익! 굴절!”
또 절망의 낫 같은 기술을 쓸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마왕군의 누군가가 루드라를 향해 상당한 위력의 화탄을 발사했다. 그에 급히 카드를 꺼내 방어하는 루드라. 굴절이란 이름 그대로 날아오던 마법의 방향을 틀어버렸지만 안색이 파리해졌다. 절망의 낫을 사용하면서 무리한 것이 틀림없다.
마법의 방향이 틀어지자 직접 공격해가는 기사들. 그러나 그 앞을 검은색 일색인 갑옷에 흑색 기병창을 든 사내가 막아섰다.
그 역시 특수 클래스거나 특수한 아이템을 앞세운 전사인 듯 안정된 자세로 겨누는 그의 창끝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무시할 자는 못 됐다.
“흑기사다!”
“와아아아!”
제법 유명한 자인 듯, 그를 알아본 유저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안색이 굳어지는 마왕군 유저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 수 있었다.
“칠연격!”
3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무거운 창을 들고도 흑기사의 움직임은 꽤나 민첩했다. 달려드는 자들을 향해 순식간에 7번의 찌르기를 시도했고 4명의 적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나마 버틴 1명의 유저도 지레 겁을 먹어 방패로 몸을 가린 덕이다.
“쐐기 찌르기!”
“크아악!”
팔을 뒤로 당기면서 응축시킨 힘을 한 점에 모아 폭발시킨다. 온 몸을 가리는 히터 실드까지는 아니어도 몸을 반 정도 가리는 카이트 실드를 들고 있던 사내는 굉장한 타격을 받았는지 뒤로 날아가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방패를 든 왼손이 덜렁거렸다. 왼팔에 대한 제어권을 잃은 모양이다.
“오오오오!!!!”
두 번의 공격으로 다섯의 적을 쓰러뜨리니 주위의 호응이 대단하다. 그러나 우쭐대지 않고 침착하게 다음 적을 맞이하는 흑기사.
이자, 진짜배기다.
“여기 나도 있다!”
붕! 부웅-!
흑기사가 주목받자 못 마땅했는지 적발의 사내가 역시 3m는 되어 보이는 두꺼운 봉을 휘두르며 마왕군을 쓸어갔다. 힘에 자신이 있는 자인지 그의 휘두름엔 주저함이 없었고, 두꺼운 갑옷이 걸리든 가느다란 검이 걸리든 모두 힘으로 날려버렸다.
“오옷, 적발신장이다!”
꽤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에 처박혀 있어서인지 둘 다 유명한 자인 듯한데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둘의 등장으로, 그리고 등장과 함께 발휘한 능력으로 한풀 꺾여 있던 인간군의 사기가 제법 상승했다. 곧이어 속속 등장하는 유명인사들. 물론 내가 아는 얼굴은 전무했다.
“흐흐흐! 이거 재미있는 놈들이 나섰군. 저 빨갱이는 내거다!”
“그럼 저 씨커먼스는 내 거로군. 클클클.”
유명 인사. 즉, 강자의 등장을 무척이나 반기는 알테어와 에크만이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알테어 앞에서 힘 자랑한 적발신장은 곧바로 찍혔고 에크만 앞에서 창의 빠르기를 선보인 흑기사 또한 에크만에게 찍혔다.
“적이지만 저 둘이 불쌍해지는 건 왜일까…….”
그들 말고도 마왕군을 도륙하고 있는 자들이 몇몇 보였지만 어차피 수적으로 대단한 우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둘의 전투를 관전했다.
“크핫핫핫하! 감히 이 몸에게 대항하려 하다니 뼈마디를 가루로 만들어주마!”
“음홧홧홧! 감히 내 앞에서 그딴 건방질 소릴 하는 놈이 있을 줄 몰랐군. 덤벼라, 하룻강아지!”
적발신장이나 알테어. 다른 건 몰라도 성격과 자신감만큼은 똑같은 놈들이었다.
“태산압정!”
부웅-
텁!
선제공격은 커다란 봉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적발신장의 몫이었다. 좌우로 봉을 돌리다가 벼락같이 내려쳤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사람들이 느끼기에다. 자신의 머리를 뽀개기 위해 떨어지는 봉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은 알테어는 가볍게 오른 손을 들어 봉을 잡아채 버렸다.
“……!”
봉에 실린 힘과 무게 때문에 땅이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워낙 힘이 세기로, 강맹한 공격을 하기로 유명한 자이다 보니 최선을 다한 일초가 가볍게 잡혀버리자 심적인 타격이 컸다.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이 두 눈 동그랗게 뜨고 그 자리에 굳어버릴 정도니 자신감에 넘치던 본인의 마음은 어떠할까!
너무나 어이없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손에서 힘이 풀리자 알테어는 힘을 줘서 봉을 빼앗아버렸다.
“흐흐, 아가야. 힘은 이렇게 쓰는 거란다!”
빠각!
적발신장의 봉을 빼앗아든 알테어가 장난처럼 봉을 휘둘렀다. 다급하게 두 팔을 들어 막는 적발신장. 그러나 엄청난 충격에 두 팔이 부러지며 가드가 풀리고 단단해 보이는 머리마저 가볍게 터져나갔다.
“커, 컥! 괴물이다!”
적발신장의 이름값을 믿고 적어도 쉽게 지진 않으리라 생각하던 주위의 인간 유저들이 기겁을 하며 달아났다. 아니, 겁을 먹은 건 비단 인간 유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같은 마왕군끼리는 죽이면 안 된다지만 행여나 불똥이 튈까 마왕군 유저들도 알테어 주위를 슬금슬금 떠났다. 저 정도의 힘으로 공격을 할 때 괜히 주위에 잘못 서있다가는 빗맞아 죽지 십상인 것이다.
“우리도 한 번 붙어볼까? 클클, 누구 창 가진 거 있는 사람 없나? 아니, 막대기에 쇳조각 하나만 꽂아서 가지고 와봐!”
“건방지군.”
“자신감이지!”
알테어가 힘을 앞세운 적을 힘으로, 그것도 적이 사용하는 봉으로 때려죽인 것에 자극 받았는지 에크만도 상대와 같은 무기인 창을 찾았다. 정확히는 창의 형태를 지닌 아무거나였지만.
“이걸 쓰십시오.”
가만 생각해보니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얻은 전리품 중에 창 종류가 몇 개 있던 것을 떠올리고 품안을 뒤적거려 에크만에게 던져줬다.
“호오, 칠흑의 창인가? 제법 좋은 놈을 가지고 있군!”
“뭐, 어떤 놈이 죽어서 흘렸나보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에 주위 인간 유저들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PK로 얻은 물품이라는 소리였기에. 하지만 그것뿐이다. 내게 덤비거나하는 간 큰 놈은 없다.
“이런 놈에게 과분한 감이 있지만 뭐, 상관없지. 덤벼라, 애송이.”
“그 주둥이에 이 마창 백야를 쑤셔 넣어 주마!”
제법 이름 있는 창인지 흑기사는 자신감을 보이며 칠연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내 눈에도 훤히 보이는 공격이다. 조금 빠른 감이 있지만 나라도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공격으로 에크만을 맞춘다?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렇게 느려 터져서야 어디 파리 한 마리나 잡겠냐?”
채앵-!
히죽거리며 흑기사를 놀리던 에크만이 놈의 가슴으로 창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마창이라는 무기만큼이나 쓸 만한 갑옷인지 창은 튕겨 나왔고 이번엔 흑기사의 비웃음이 들렸다.
“후후, 그렇게 약해빠진 공격으로 어디 오크 한 마리나 잡겠나?”
저런 놈에게 놀림 받았다는 사실에 에크만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지금까지의 장난스런 모습이 아니라 모처럼 진지한 모습이다. 잊혀진 대륙에서 새로운 곳을 개척하러 나설 때처럼.
“크아아악!”
그 결과는 5초도 안 돼서 들려오는 흑기사의 비명이었다. 놈의 갑옷이 아무리 견고하고 빈틈없다 해도 두 눈을 가리고선 전투에 임할 수 없는 법. 놈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고 접근한 에크만이 오른 눈에 칠흑의 창을 박아 넣은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창을 박아 넣은 채로 창대를 튕긴다. 상급품답게 큰 탄력을 가지고 있는 칠흑의 창은 한껏 몸을 떨며 흑기사의 눈 속을 휘저었다.
“끄허어억, 끄억!”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쥐고 있던 마창 백야도 놓고,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거기서 에크만이 창을 더 밀어넣 었으면 즉사였겠으나 그러지 않아 큰 고통과 함께 빈사 상태가 된 것이다.
“실력은 쥐뿔도 없는 게 입을 잘못 놀리면 그렇게 되는 거다.”
“끄으윽!”
흑기사는 제법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고통 속에서 창대를 끊고 눈에 박힌 창날을 빼낸다. 이를 악물고 포션을 대충 뿌린 다음 마창 백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모습.
그것에 에크만은 더 기분이 나빠진 듯했다.
“덤벼.”
‘크아아악!!!“
무기도 없으면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도발하자 흑기사도 열 받았는지 자리를 박차고 달려간다. 창에 실린 힘이 쐐기 찌르기 때보다 강맹했고 속도 또한 여느 때보다 빨랐지만 에크만은 뒤로 3보, 좌로 1보 신속히 이동하며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 품에 손을 넣어 기다란 무언가를 꺼냈다.
“이러면 억울하지 않겠지!”
푸왁-!
에크만이 찔러낸 창에 견고한 흑기사의 갑옷이 종잇장처럼 뚫렸다.
믿었던 갑옷이 아주 간단하게 관통 당하자 죽어가는 흑기사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 이건?”
“궁그닐. 사람들이 전설의 창인가 뭔가라고 하는 것 같더군.”
회색으로 몸이 물드는 흑기사의 눈에 또 한 번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궁그닐이라면 룽기누스의 창과 더불어 최강으로 치는, 창 계열 유저라면 한번쯤 꿈꿔봤을 전설의 무기였으니까. 저런 무기를 에크만이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자, 계속 해볼까?”
“으, 으아아아!!!”
“사람 살려!!”
에크만이 빙긋 웃으며 인간들의 진영을 쳐다보자 대결을 지켜보던 모든 유저들이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그에 맞춰 들려오는 퇴각의 북소리. 뒤쫓으려 했지만 내키지 않는 북소리가 마왕군 쪽에서도 들려왔기에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약 일주일간 지루한 공방이 계속됐다. 워낙에 각 진영에 병력이 많았던 지라 쉽게 승부가 갈리지 않는 것이다.
초반에는 마왕군의 절대적 우세였지만 숨어있던 히든 클래스와 고수들의 등장으로 현재는 비등한 상황이다. 1대1로라면 나나 알테어, 에크만, 잠지드를 이길 자가 없었지만 우리가 한쪽을 치는 사이 우리가 없는 곳을 고수나 히든 클래스들이 도륙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고수의 쪽수에서 밀렸다. 더구나 그들과 맞서던 고수 중 일부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마왕군은 3번의 제한된 부활이란 페널티로 점점 고수의 수가 줄고 있었다. 일반 병력을 죽이는 건 우리가 우위였지만 고수가 죽어나가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 치열한 공방 속에서 하루 한 번은 소연이 찾아왔다. 내가 너무 전진해서 싸운 탓도 있겠지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소연은 죽지 않고 내 앞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 몇 번의 죽음은 있었는지 호위하는 정령이 상급이 아닌 중급으로 바뀌긴 했다. 하지만 하는 말은 늘상 같다. 이런 의미 없는 일 그만 둬라, 이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알고는 있지만 내 마음은 거트를 그냥 둘 수 없어…….”
혼자 중얼거리며 적들을 향해 이도류를 휘둘렀다.
“태연……. 꺄악!”
“응?”
적을 베고, 또 베다가 오늘도 거르지 않고 찾아온 소연을 발견했다. 그런데 소연이 입을 여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가느다란 채찍이 소연의 허리를 감더니 끌고 가버렸다. 죽인 것도 아니고 끌고 간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듀리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보고 있다.
“오호호호! 사냥감 하나를 채갔다고 화내시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서 또다시 비웃음과 같은 묘한 미소를 짓는다.
“기다려!”
그러나 소연을 들쳐 맨 듀리아의 몸은 멈추지 않는다. 마왕군 진영 깊숙이, 안전한 곳으로 들어갈 뿐이다.
“빌어먹을!”
필시 듀리아는 알고 있다. 소연이 내게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위를 떨치고 본진으로 돌아가려는데 이름깨나 날렸다는 인간 유저 셋이 날 가로막는다.
“어딜 도망가시려고!”
“흐흐, 이런 호기를 놓칠 수야 없지.”
내가 본진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마나 고갈이나 체력 고갈로 생각했는지 셋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아직도 이곳에서 한 번도 죽지 않은 나를 죽이면 적지 않은 명성을 얻을 수 있고, 악수치가 극을 달리는 내가 죽으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량의 아이템 거의 모두를 떨굴 거라는 계산이겠지.
“니들, 실수하는 거다.”
“글쎄. 실수인지 아닌지는 이제 알게 되겠지!”
셋은 일제히 검을 날렸다. 꽤 빠른 편이었지만 백스텝의 속도를 따라오진 못했다.
쿵 소리가 나며 검이 땅을 칠 때, 세스이 가슴에 연속으로 권풍을 쏘아냈다.
“큭!”
비틀거리는 세 사람. 균형을 잃은 사이 이번엔 양쪽 검 끝에서 두 개의 파이어 볼이 뿜어졌다.
퍼엉!
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두 개의 파이어 볼이 서로 부딪혀 폭발하면서 시야를 가리고, 균형을 빼앗았다. 그 사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제일 왼쪽 놈의 심장에 박혔다. 두 사람이 정신 차리기 전에 드래곤 슬에이어를 회수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자 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병든 호랑이인 줄 알고 덤볐더니 잠자는 사자인 것이다.
그래도 아직 큰 공격이 나오지 않은 것에 힘입었는지 둘은 긴장한 채 겨눈 검을 내리지 않는다.
“멍청한 놈들이군.”
이들은 뭔가 착각하고 있다. 나나 알테어, 에크만이라도 근접전에서는 큰 공격을 사용하지 않는다. 마법이나 신성력은 보조적인 것일 뿐, 접근전에서는 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둘에게 두 줄기의 검은 빛을 보여주고 그 대가로 심장에 구멍을 뚫었다.
“크흐흐흐! 인간들이여, 잘 보거라.”
멍청이 셋을 처리하고 본진으로 가려는 순간, 먹구름 잔뜩 낀 하늘에 처음 선전 포고할 때와 같은 영상이 생겨났다. 클로즈 업 돼서 비추는 마왕의 얼굴.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전투를 멈췄다.
“저, 저건?!”
의자에서 일어난 마왕이 움직인 곳. 그곳에는 풍만한 몸매로 매혹적인 기운을 뿌리는 듀리아가 한 명의 인간 여성을 묶은 채 데리고 있었다.
그 여성은 다름 아닌 소연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불안한 느낌이 엄습해왔다.
“후후후, 신을 믿는가? 신이 너희를 보호해 준다고 생각하나? 지금 그것이 개소리라는 것을 보여주마.”
헛소리를 지껄인 마왕은 손으로 소연의 고개를 잡고 이리저리 살핀다. 그리고 맛을 보듯, 혀로 볼을 살짝 핥았다. 뭐가 우스운지 허리를 잡고 광소를 터뜨린다. 손톱을 잔뜩 세우고, 소연이의 왼쪽 가슴에 찔러 넣는다.
푸왁!
마왕의 힘과 손톱의 예리함을 보여주듯 거침없이 왼손 가슴을 파고 들어간 손에 팔딱거리는 심장이 들려져 나왔다. 그리고 소연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일반인이 보기에 징그럽고 역한 모습에 대다수의 유저들이 고개를 돌렸다.
“신이 너희를 버린 게 아니라면, 신도 날 어쩌지 못하는 것이겠지. 포기하라. 인간들이여. 크하하하!”
마왕은 손에 힘을 주어 심장을 터뜨리고 소연의 몸에도 뭔가 마법을 써서 날려버렸다.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당장에 달려가서 저 둘을 육시해 죽이고 싶지만 아직 초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다. 참아야 한다.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다짐한다. 목적을 이룬 뒤, 저 연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본진으로 돌아와서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한 채 듀리아를 추궁했다. 분명히 마왕을 부추긴 것이 그년일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적의 사기 저하를 위한 것이었다고 발뺌했고 어쩔 수 없이 내 막사로 돌아와야 했다.
“사기 저하는 무슨! 인간군의 분노에 불을 당긴 주제에!”
그랬다. 그 영상은 처음에는 징그러운 모습에 거부감을 보이며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들었지만, 복수를 해야 한다. 가만히 놔둘 수 없다는 주장이 역으로 들끓으며 적이 한데 묶일 수 있는 구실점 역할만 하게 만들었다.
“더는 못 기다리겠어. 결단을 내려야겠군.”
이대로는 언제 전쟁이 끝날지도 불투명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알테어와 에크만, 로즌 크랜츠를 찾았다.
“좋습니다. 도와드리도록 하죠.”
“그래, 그까짓 거 해보는 거지.”
“어차피 전쟁놀이에 질려가던 참인데 잘 됐군. 흐흐!”
셋이 모두 동의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당일 새벽. 너무 눈에 띄는 잠지드만 전장에 남기고 나와 알테어, 에크만, 로즌 크랜츠가 수도로 잠입을 시도했다.
“모두 은신의 망토는 가지고 계시죠?”
두르기만 하면 망토에 닿지 않는 다른 부분들까지 사람들의 눈에서 지워주는 로그, 어쌔신 클래스의 공통 마스터 아이템.
다행히 넷 모두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수도의 담을 넘기 수월하게 만들어줬다.
“여전히 허술하군. 이리로.”
복도에선 작게 말해도 크게 울려 퍼지기 때문에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고 셋을 인도했다. 내 눈에도 나머지 셋이 보이지 않아서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파티를 맺었다면 볼 수 있었겠지만 그들과 달리 난 정식 마왕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파티 결성은 불가능했다.
“여기입니다.
끼이이익-!
다행히 국왕의 집무실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문을 움직였고, 약간의 소음은 들렸지만 아무도 모르게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었나 봅니다.”
거트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 하나가 열려진 집무실의 문을 닫고 들어오며 말했다. 거트의 호위는 모두 셋. 각자 한 놈씩 맡으면 딱이었지만 소리가 들릴까 봐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지금, 여차하면 기습이 실패할 지도 몰랐다.
“그까짓 거, 어차피 다 죽일 거잖아?”
“누구냐!”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성격이 불같은 알테어가 은신의 망토를 벗고 달려 나갔다.
엄청난 힘이 실린 기습에 맞고 날아가 버리는 호위 기사. 그 모습을 보니 고민한 내가 바보 같았다.
“어차피 죽일 거, 꼭 한 번에 죽일 필요가 없었군!”
“코, 콜로니스트!”
나를 포함한 넷이 모두 은신의 망토를 벗고 모습을 드러내자 거트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빛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차앗!”
팅-!
거트가 죽자마자 왕좌에 앉은 채로 다시 나타났다. 또 한 번의 죽음을 안겨주기 위해 검을 날렸지만 알 수 없는 보호막이 형성. 그를 보호했다.
“큭, 무한 PK를 막기 위한 시스템이 날 방해할 줄은 몰랐군.”
그랬다. 텐트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침대나 왕좌에서 살아날 경우 곧바로 죽지 못하도록 인간에게 공격 받을시 실드가 형성된다. 그 실드의 방어력은 가히 절대적. 때문에 눈앞에 원수를 두고도 죽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휴, 살았……!”
서걱!
거트가 안심하는 순간, 전혀 실드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날아들어 온 칼날이 있었다. 바로 로즌 크랜츠의 검. 그 검에 목이 꿰뚫린 거트가 의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이며 답을 내줬다.
“아무래도 지금의 저희는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나 보군요.”
“아……!”
그러고 보니 인간은 안 되지만 ‘몬스터’라면 가능했다. 생각해 보니 마왕군인 로즌 크랜츠와 알테어, 에크만은 몬스터로 취급 된 상태. 내가 직접 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로즌 크랜츠에게 부탁해서 50번. 딱 50번만 거트를 연속 PK했다. 그가 작업을 끝낼 동안 나는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 매직 트랩들을 깔아서 구원군의 발목을 붙잡았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야 조금 속이 풀리는 군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예. 이제 목표가 바뀌었거든요. 그 빌어먹을 서큐버스 퀸과 마왕으로. 이제 여러분과 적이 되겠군요.”
“오옷! 그럼 드디어 듀얼을……!”
“그건, 무리일 것 같군요. 전쟁이란 게 그리 느긋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상대하려는 자들이 적중에서도 수뇌부이니 그럴 여유까진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끄응, 그 여자애 때문이냐?”
“……예.”
내 대답을 들은 알테어와 에크만은 끙끙거리며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는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네가 약속 하나만 해주면 우리가 그 일을 도와주지.”
“예?”
마왕군인 알에터와 에크만이 마왕을 치는 일을 돕는다? 그에 부과되는 페널티가 만만치 않은 것임을 떠올리자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 전쟁이 끝나고, 우리랑 듀얼 한 번 하는 거야. 어때?”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오케이! 어차피 네가 적으로 돌아서면 마왕군이 밀릴 게 뻔하고, 듀얼도 할 수 없다면 이 이벤트에 참가한 의미가 없지! 차라리 이 이벤트를 빨리 끝내고 너랑 듀얼 하는 게 나아. 흐흐흐!”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알테어와 에크만이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로즌 크랜츠.
“저는 그냥 빠지는 걸로 하겠습니다. 더 이상 있어봐야 승산이 없는 것 같고, 역으로 동참해도 얻는 게 없거든요.”
로즌 크랜츠는 이 전쟁에 대해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제 마왕군의 주력은 대부분 빠진 셈. 몇몇 NPC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마법사인 리치로드도 죽은 마당에 대량 살상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마왕을 비롯한 몇몇이 고작이었다.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일단은 돌아가자. 내일 아무렇지 않게 적당히 싸우다가, 기회를 봐서 서큐버스 퀸부터 치는 거야. 명색이 마왕인데 기습을 한다 해도 쉽게 죽어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에크만이 웬일로 그럴싸한 말을 햇다. 생각해 봐도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다시 본진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10써클 마법들을 아껴두며 접근전으로만 싸움을 치렀다.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서 절대 봐주지 않고. 어차피 버리는 패인 이런 병사들에게 뭐가를 기대하긴 어렵다.
“슬슬 움직이자.”
“예.”
중요한 전력이지만 너무 덩치가 커서 눈에 띄는 잠지드는 일찌감치 순찰을 돌라는 명목으로 내보냈다. 우리가 듀리아의 막사에 도착할 즈음 근처에 있도록 루트를 정해주고.
계산이 정확했는지, 우리가 듀리아의 막사 앞에 도착했을 때, 순찰을 돌고 있는 잠지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화룡의 이빨!”
“궁그닐!”
막사 안으로 들이닥치자마자 난 화룡을 쏘아냈고, 알테어는 궁그닐을 던졌다. 궁그닐은 원래 에크만의 것이지만 그냥 창을 다루는 게 아니라 던지는 것이라면 알테어가 낫다는 판단 하에 잠시 빌려준 것이다.
“이얏, 정열의 채찍!”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것처럼, 화룡을 피해낸 듀리아. 그녀는 알테어의 궁그닐마저 간신히 빗겨내고 되레 나에게 달려들었다.
“몽환의 채찍!”
이름 그대로, 꿈을 꾸거나 허깨비를 보는 것처럼 채찍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더니 내 몸을 덮쳐왔다. 솓도를 이용한 공격이면 꿰뚫어 보겠지만 아무래도 마법적인 능력이 가미된 듯 하다.
“화룡의 갑옷!”
화르르륵!
사용 후 행동에 제약이 오는 물의 수호보다는 조금 데미지를 입을 지 모르지만 반격이 가능한 화룡의 갑옷을 택했다.
치익- 칙! 칙!
불의 보호를 받는 내 몸을 때릴 때마다 칙칙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채찍. 부딪히긴 많이 했으나 나에게 돌아오는 데미지는 극히 적었다.
“칫!”
안 되겠는지 공격 방법을 바꿨다. 채찍으로 주변 잡기들을 잡아서, 나에게 던지는 식이다. 이것도 물론 내가 다 피해버렸기 때문에 효과는 없다.
알테어나 에크만은 빨리 자신을 공격해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듀리아는 오직 나만을 공격했다. 효과도 없는 공격들을.
“보스 급 몬스터치고는 너무 약하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조금 전에 썼던 몽환의 채찍만 해도 화룡의 갑옷이기에 망정이지 자칫 전신을 난자당할 무서운 공격이다. 아마 한 방 한 방에 담긴 위력이 뼈를 부수고, 두개골을 으깨버릴 만큼 대단하겠지.
다만 내 아이템 빨이 너무 강했다.
“으음?”
“타핫, 폭열의……. 컥?!”
너무도 극심한 능력 차이를 보였기에 조급해하지 않고 듀리아를 옥죄고 있는데 제한 시간이 된 듯, 일순간 화룡의 갑옷이 사라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뛰어오르는 듀리아. 그러나 다시 화룡의 갑옷을 쓰기도 전에 그녀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궁그닐. 원래는 차원을 가르고 날아가는 창이지만 밸런스 조정 때문인지 그저 맞을 때까지 쫓아다니는 창이더군. 그래도 위력은 뭐, 저 정도면 괜찮지?”
듀리아와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주위로 몰려든 서큐버스를 처치하던 에크만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답해줬다.
확실히 차원을 가른다는 본래의 능력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위력 하나만은 그럴싸하군.
“카르단…… 님.”
“응?”
“나의…… 카르단……. 당신의…… 큭…… 복수를…….”
몸이 회색으로 물들어가며 내뱉는 듀리아의 말에 그동안의 의문이 풀렸다. 듀리아가 좋아하던, 혹은 연인 사이이던 자를 내가 죽인 것.
이 이벤트가 시작되고 내가 죽인 마왕군의 수가 극히 드무니 대충 따져보면 답이 나올 터였다.
“설마……. 그 건방진 리치로드?”
서큐버스 퀸과 리치로드. 상당히 언밸런스한 조합이었지만 따져보니 기억에 남는 게 그놈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군. 자, 이왕 이렇게 된 거 곧장 놈에게로 갑시다! 잠지드, 길을 뚫어라!”
마왕군 진영 한복판인 만큼 적이 넘쳐났지만 길을 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잠지드가 그 육중한 몸과 무식한 힘을 앞세워 달려 나가면 우리는 그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기 보인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마왕의 거처가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이군.”
뒤를 슬쩍 돌아보니 꽤 많이 뒤쳐졌지만 서큐버스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 뿐이다. 그간 워낙 많은 인간을 죽여서인지 서큐버스 퀸 정도 되는 간부를 죽였는데도 다른 마왕군이 알테어를 인식하지 못했다. 간부를 죽인 죄가 그간의 공으로 자동 상쇄된 것이다.
“다른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속전속결이다!”
마왕의 거처에는 병력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마왕의 능력을 믿었고 그게 오히려 마왕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같은 편 만큼 무서운 적도 없으니까. 설사 누군가 배신을 한다 해도 등 뒤에서 칼 맞기보단 멀리서 칼 들고 달려오는 걸 보겠다는 것이다. 그럼 대처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저것들은 어떻게 하지?”
알테어가 고개를 까딱이며 뒤따라오는 서큐버스들을 가리켰다. 저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도착해서 마왕과의 싸움에 훼방을 놓을 텐데…….
“잠지드, 넌 이곳에서 다가오는 서큐버스들을 모조리 죽여라. 그리고 다 죽이면 뒤따라 올라오도록.”
“예. 주인님.”
도리가 없었다. 잠지드가 큰 전력이긴 하나, 마왕과의 싸움에서 저들이 귀찮게 알짱거리면 굉장히 힘들어질 수 있었다. 아니, 그냥 이대로 마왕과 싸워도 꼭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결국, 잠지드를 떼어놓고 마왕의 능력으로 소환해낸 저택으로 진입했다.
“이쪽으로!”
나는 매번 거절했지만 몇 번 마왕의 저택에 놀러 와서 실컷 얻어먹고 돌아온 적이 있는 알테어와 에크만이 길 안내를 자청했다. 거침없이 2층으로, 3층으로 계속해서 올라간 끝에 마왕의 방이 있는 5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누가 마왕 아니랄까봐 폼 나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앉아있는 모습. 배알이 뒤틀려서라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게 놔둘 수는 없었다.
“화룡점장!”
“크왓!”
크와아아아아-!
놈이 앉아있던 의자 밑에서 커다란 화룡이 아가리를 벌리고 솟구쳐 올랐다. 폼 잡고 있다가 깜짝 놀라 도망치는 마왕. 운 좋게 피해내기는 했지만…….
쿠웅
꼬고 있던 다리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 그대로 발이 넘어지고 말았다.
“…….”
“뭐야, 저거? 지금 개그 해?”
마왕도 쪽팔린지 금세 일어서지 못한다.
“화룡의 이빨!”
“히익! 서먼 데스 나이트!”
어이없긴 하지만 호기라 여기고 무리해서 화룡의 검을 한 번 더 사용했다. 그에 바닥을 뒹굴며 5기의 데스 나이트를 소환해 대처하는 마왕. 그러나 소환된 5기의 데스 나이트 중 3기는 손 한 번 못써보고 화룡의 먹이가 되었다.
“공격하라!”
아쉬운 대로 나머지 2기의 데스 나이트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는 마왕. 얼마 걸리지 않아 알테어, 에크만에게 박살이 났지만 그 약간의 시간을 원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휴, 큰일 날 뻔했네.”
데스 나이트가 박살나건 말건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한숨을 쉬는 마왕. 자신이 소환한 데스 나이트들이 죽건 말건 전혀 관심도 없는 모습은 정말 사람 기가 막히게 했다.
“뭐야, 겨우 너희 셋이냐?”
먼지를 모두 털어내고 주위를 살피던 마왕의 눈이 동그래지며 뭔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너같이 얼빵한 마왕은 우리 셋으로도 충분하지.”
“뭐, 뭣이? 얼빵?”
얼빵이란 말에 콤플렉스라도 있는지 발끈하는 마왕. 그 화가 제법 컸던지 콧김까지 씩씩대며 먼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압!”
주르륵!
마왕과 알테어. 주먹 대 주먹의 대결! 그 결과는 알테어 2보 후퇴. 마왕은 셀 수도 없는 걸음의 밀려남이었다. 일단 힘에서는 무려 알테어가 우세! 이번엔 에크만이 마왕을 덮쳐갔다.
“섬광 찌르기!”
에크만이 빼든 것은 구불구불한 것이 특징인 단검, 크리스였다. 그야말로 섬광과 같은 찌르기!
강기까지 씌워진 연속 찌르기에 마왕도 경시할 수 없었는지 연신 뒷걸음질 치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크으윽!”
마왕의 단단한 피부도 강기에는 어쩔 수 없는지 몸의 여기저기에서 상처가 눈에 띈다. 또 한 번 몰아치려는 에크만. 그러나 마왕이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을 쏘아낸 탓에 물러서야 했다.
“인간들의 힘이 이렇게나 강해졌던가……!”
마왕은 순수하게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숨겨두었던 손톱을 길게 내빼고 양 날개로 쫙 펼쳤다. 이쯤 되면 우리도 쉽게 생각하던 것을 접어야 했다. 제대로 마음먹은 마족의 위력은 이미 마인 이벤트 때 경험해봐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휘릭!
날개를 펴고 올라가나 싶던 마왕의 몸이 직선으로 쏘아져 왔다.
“화룡의 갑옷!”
마왕의 대쉬 속도와 내 피하는 속도가 아슬아슬했다. 예전이라면 간단한 마법이라도 쓰고 몸을 날렸을 테지만 화룡의 갑옷이 있는 지금,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몸에 거대한 화염이 이는 것을 느끼며 나 역시 전진해갔다. 손톱을 휘둘러 베어오는 마왕. 그 힘 또한 무시할 것이 못 돼서 드래곤 슬레이어로 비껴 흘리며 놈의 몸을 붙잡았다.
치이이익!
고기타는 냄새와 함께 내게 안긴 마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떨어져라, 떨어져!”
데롱! 데롱!
세차게 팔을 휘젓는 마왕이지만 난 꿋꿋이 마왕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잠시 저항하다가 안 되겠는지 문을 부수고 나가는 마왕. 그대로 5층 높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를 바닥에 깔고서.
“큭, 물의 수호!”
“후우, 후우.”
“쳇, 캔슬!”
살기는 했지만 적지 않은 충격이 있었기에 잡고 있던 팔에 힘이 풀렸다. 어느새 빠져나온 마왕. 이 안에 둘이 갇혀 있어 봐야 좋은 꼴 못 당할 걸 알기에 일찌감치 물의 수호를 취소시켰다.
“궁그닐!”
듀리아에게 썼을 때의 교훈으로 이번엔 에크만이 궁그닐을 사용했다. 비교적 처음 파워는 약해지겠지만 회전해서 적을 노리는 속도는 더 빨라지니까.
“흐아아압!”
비교적 힘이 약한 에크만의 공격이어서일까? 마왕은 떨어지는 궁그닐을 손으로 잡아챘다. 그리곤 다시 땅으로 내려오는 에크만을 향해 던졌다.
“쳇, 알테어!”
“알았어. 차핫!”
궁그닐이 맹렬한 기세로 에크만을 향하자 에크만이 혀를 차며 알테어를 불렀다. 그러자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지는 알테어.
알테어가 던진 무언가는 궁그닐과 부딪히며 큰 소음을 만들었고 궁그닐은 한쪽 별에 처박혀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알테어에게 돌아가는 무기.
망치로 보이는 그 무기를 다시 잡은 알테어는 그대로 마왕을 내리쳤다.
콰앙-!
번개 같은 불똥이 번쩍이며 바닥이 움푹 파인다.
“이 괴물 같은 놈들!”
반경 1m 가량의 땅이 움푹 내려앉는 것을 본 마왕이 치를 떨며 말했다. 마왕이라고는 하지만 운영자 중 하나가 컨트롤 하고 있을 테니 경악할 만하겠지.
“자, 2라운드를 시작해볼까?”
“드래곤 슬레이어에 화룡의 검, 수신의 방패도 모자라서 궁그닐에 묠니르라니.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어느새 벽에 처박혔던 궁그닐은 에크만 손에 들려있었다.
그런데 묠니르라니, 저 무식한 망치가 전설의 무기인 그 묠니르라고?
“아이템은 있으되, 그것까지 들 필요가 없었다는 건가…….”
새삼 알테어, 에크만이 두려워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굉장한 아이템을 더 가지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걸 활용하면 얼마나 엄청난 위력이……?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마나 연소!”
고개를 가로젓던 마왕이 비장한 목소리로 외치자 마왕의 목이 부풀어 오르며 덩치가 약 2배가량으로 커지고 인상도 험악해졌다. 마나 연소라고 한 걸 봐선 체내의 마나를 태워 능력치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듯. 그 말은 반대로 시간만 때우면 장땡이라는 말이었지만 알테어, 에크만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흐흐, 원래 약한 개가 짖고, 힘없는 놈들이 몸집 부풀리기 마련이지.”
“어디 시험해 보시지?”
“까짓 거, 원한다면!”
먼저 알테어가 묠니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명색이 전설의 무기인 묠니르를 힘이라면 유저 중 최고일 알테어가 휘두르는 데도 여유 있게 한 팔만 드는 마왕.
콰앙!
예상보다 대단했는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막는 순간까지 마왕은 전혀 밀려남이 없었다.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반격까지 할 수 있다는 말! 황당함이 들 정도로 강해진 마왕의 힘에 놀라고 있을 때 에크만이 나섰다.
“칠연격!”
궁그닐을 짧게 잡은 에크만은 연속해서 섬광과 같은 눈부신 속도로 목과 가슴 부위를 찔러댔다. 그러나 그에 필적하는, 혹은 더 빠른 속도로 오른손을 들어 막아내는 마왕. 일곱 번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득의양양하게 손을 내렸다.
“음홧홧, 컥?”
비틀!
한 번 더 들어온 찌르기에 목을 맞은 마왕은 목을 부여잡고 켁켁 댔고, 그 사이 에크만은 재차 공격해 갔다.
“유성 팔연격!”
궁그닐의 날 끝에 하얀 빛 무리가 형성된다. 그리곤 마왕의 몸에 하나씩 수놓아진다. 모두 여섯 개의 빛. 마지막 빛까지 마왕의 몸에 심어지자 에크만이 외쳤다.
“폭!”
퍼벙-!
마왕의 몸에 심어진 여덟 개의 빛이 일제히 폭발하며 마왕의 몸을 날려버렸다. 데굴데굴 구르는 마왕. 꽤나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오히려 표정이 더없이 딱딱해진다.
강기가 실린 공격에도 단지 아파하기만 할 뿐이고 스킬을 써도 피부에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이 말은 거의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큭큭큭큭!”
“에고, 에고. 칠연격이라고 해놓고 여덟 번 공격하는 게 어디 있어? 이 치사한 놈!”
“으하하하! 재밌군, 재밌어! 칠연격이란다고 일곱 번만 방어하고 마는 놈이 바보인 거지. 크흐흐! 자, 다시 놀아보자!”
궁그닐을 짧게 잡고 엄청난 속도의 찌르기를 구사하는 에크만이나, 그걸 대부분 방어하는 마왕이나 엄청나다는 소리밖에 안 나왔다.
“아무리 파워 업이라지만 고작해야 아까는 나랑 비슷한 속도였는데…….”
지금은 에크만에 필적하는, 아니 약간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과 전투를 겪어보지 않은 탓에 반응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에잇, 마광포!”
퍼벙!
수십, 수백 번의 공격을 받아내던 마왕이 답답해졌는지 대뜸 이상한 마법을 쏘아낸다. 너무 가까운 거리가 미처 피하지 못한 에크만. 그대로 벽에 날아가 처박혔고 이번엔 알테어가 마왕에게 쏘아져나갔다.
“블레스! 힐! 힐!”
시간을 끌수록 유리한 건 우리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나까지 달려 나갈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알테어에게 축복을, 에크만에게 회복 주문을 걸며 마왕의 행동을 살폈다. 아직 죽지는 않았는지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는 에크만.
상대가 자기 생명을 갉아먹는 기술을 사용했다고는 해도 힘에서 밀렸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는지 알테어 또한 자신의 방어력을 버리는 기술을 사용했다. 전신의 세포가 활성화 되고, 가볍게 차려입은 갑옷이 가려주지 못하는 부분이 전부 굵게 솟은 핏줄로 뒤덮였다. 등 뒤라서 보이진 않지만 아마 두 눈이 붉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사용함으로써 이제 알테어의 힘은 2배! 받는 데미지가 1.5배로 변하긴 했지만 알테어에겐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닐 터였다.
“죽어!”
부웅!
묠니르를 다루는 알테어의 기세가 아까와는 사뭇 다르다. 아까는 그래도 단정하고, 정체된 힘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난폭하기 그지없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보는 것 같다.
그에 따라 알테어를 대하는 마왕의 태도도 조심스러워졌다. 힘껏 휘두르는 알테어의 묠니르를 아까처럼 그냥 손으로 받아내지 않고 길게 뽑아낸 손톱으로 조심스레 막는다.
채앵-!
“헉!”
마나를 불어넣어 강기를 씌웠음에도 묠니르에 닿은 손톱은 젓가락마냥 부러져버렸다. 그리고 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풍압이 두 뺨을, 심장을 압박한다.
“뭐 이런……!”
“파워 스텝, 스트라이크!”
세상에! 파워 업을 한 상태에서도 한 대 빗맞으면 살이 한 움큼 뜯겨져 나갈 것 같은데 진각을 밟음으로써 데미지를 1.2배 상승시켜주는 파워 스텝과 데미지를 1.5배로 증가시키는 스트라이크를 더한다.
“엇?”
그야말로 태산을 가를 듯한 위력에 움찔한 마왕의 뒷걸음질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부와앙-!
그게 마왕을 살렸다. 폭주족의 오토바이에서 나는 것 같은 굉장한 소리가 듣는 사람까지 소름을 오싹 돋게 한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이정도면, 스쳐도 죽는다고 봐야 했다.
“마, 마광포!”
“개수작 마라!”
알테어의 기세에 위축된 마왕이 소극적으로 마광포를 쏘아냈다. 에크만을 날려버리고, 잠시 정신을 놓게 한 굉장한 위력의 마법이었지만 알테어에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티잉-!
알테어는 마광포가 뿜어진 즉시 묠니르를 휘둘러 멀리 쳐내버렸다. 벽을 부수고도 쭉 뻗어나가는 광선. 그 위력을 실감케 해주는 모습이었지만 알테어에겐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닌 듯했다.
“일어나!”
퍼억-!
단순한 발길질 같은데 두 팔을 교차시켜 막은 마왕의 몸이 5m쯤 밀려난다. 팔에 전해오는 충격이 대단할 텐데 그것도 잊고 다급히 일어서는 마왕. 부러진 한쪽 손의 손톱들과 아직은 건재한 다른 손톱들을 앞세우고 방어 자세를 취한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버서크!”
“……!”
그냥일 때의 힘에서 밀리는 바람에 버서크까지 썼는데, 그래서 다행히 우위를 점했는데 마왕도 버서크란다. 또다시 벌어질 격차에 알테어나 나나 놀라서 움찔거렸다.
그런데…….
“……?”
시간이 지나도 마왕의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버서크의 특징인 온몸에 핏줄이 돋는 것이나 두 눈이 붉게 충혈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에, 역시 마왕한텐 버서크 스킬이 없나?”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이는 마왕.
“……죽어버려!”
“히익!”
까앙-!
화난 것 때문에 아까보다 더 힘을 줘서일까? 이번엔 젓가락도 아니다. 묠니르는 자신을 막아선 손톱을 수수깡처럼 부러뜨렸고 그 풍압은 마왕을 절로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사, 사람 살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혈광에 운영자는 자신이 지금 마왕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도 잊고 도주를 택했다.
“흥, 스로잉!”
적 앞에서 등을 보이고 도주하는 마왕에게 코웃음을 치며 묠니르를 던지는 알테어. 스킬의 영향까지 받아 강맹한 기세로 날아간 묠니르는 창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왕의 왼쪽 어깨를 관통하고 다시 날아서 알테어에게로 돌아갔다.
“궁그닐과 마찬가지로 묠니르 역시 던지고 나면 주인의 손으로 돌아오지. 후후, 내게서 도망치려 하다니. 건방진 놈!”
“크으으으!”
왼쪽 어깨가 날아간 마왕은 어차피 제어권을 잃고 달랑거리는 왼팔을 힘으로 뜯어냈다. 그 모습에 주춤거리자 오히려 기회다 싶었는지 뜯어낸 팔을 알테어에게 집어던진다.
그 사이 도망가려는 것이다.
“저, 저런……!”
텁!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팔을 입으로 잡아챈 알테어. 이제 도망갈 곳은 없다는 듯 씨익 웃기까지 한다. 알테어는 마왕의 예상을 뛰어넘는 독종이었다.
“쳇, 그놈 씻고 좀 다니지. 짜서 못 물고 있겠군. 크흐흐!”
“이, 이 미친놈!”
“버서커한테 미쳤다는 건 칭찬이지!”
알테어의 묠니르가 마왕의 머리 위로 벼락같이 떨어져 내린다. 그런데 도중이 이상하다. 흐름이 끊긴 듯 갑자기 속도에 변화가 생겼고 조금 전까지 수족처럼 다루던 알테어가 이젠 묠니르에 휘둘리는 느낌이다.
“크흣! ……으응?”
하나 남은 팔을 위로하고 눈을 질끈 감았던 마왕의 팔에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에 슬며시 눈을 떴다. 큰 충격을 받지도 못했는데 묠니르가 수월히 막혀 있자 마왕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제길!”
그 사이 버서크가 풀린 것이다. 버서크의 후유증인 일시적 능력치 다운 때문에 비틀대면서 몸을 빼는 알테어. 하지만 금세 상황 파악을 한 마왕은 그가 몸을 피하도록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냥 가면 섭하지!”
얼굴에 생기가 돈 마왕은 바닥에서 부러진 자신의 손톱 중 긴 것을 하나 골라들고 알테어의 목을 찔렀다. 아직 몸을 잘 가누지 못하던 터라 저항하지 못하고 죽는 알테어. 이제 남은 건 기절한 채 정신 못 차리는 에크만과 나뿐이다.
“마광포!”
“물의 수호!”
더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마광포를 써서 쉽게 끝내려던 마왕은 마광포가 웬 투명한 막에 너무 쉽게 막히자 인상을 찌푸렸다.
“제길, 10분간은 아무 짓도 못하겠군.”
아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전부 알아보더니 수신의 방패의 특수 능력, 물의 수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끄응, 그러니까 이게 이거고 저게……. 응? 크앗!”
콰지지지직-!
땅바닥에 뭔가를 적으며 계산하던 마왕이 뭔가를 발견하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마왕이 있던 자리에 떨어지는 강력한 번개. 번개가 날아온 방향을 보니 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콜, 도와주러 왔다!”
“하아앗!”
아론과 에린 누나였다. 방금 전의 그 번개는 에린 누나의 뇌궁.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 마왕에게 먼저 아론이 달려들었다.
“가소로운 것들!”
“크억!”
맨처음 상황이었다면 어찌해볼 만도 했을지 모르지만 마나 연소를 통해 능력치 급상승을 이룬 마왕에게 아론은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덤비기가 무섭게 튕겨나가는 아론.
“마광포!”
“크읏!”
그래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마광포는 간신히 비껴냈다.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아론. 마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끝장을 보려 했지만 또다시 날아온 번개에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파워 업을 하긴 했어도 뇌궁의 번개나 내 화룡은 무서운가 보다.
“끄응, 마광포!”
마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린 누나에게 마광포를 쏘아냈다. 하지만 에린 누나고 궁수를 마스터하면서 민첩성이 상당히 높았고, 먼 거리에서 날아오는 마법쯤은 가볍게 피했다.
“쳇!”
못 맞춰서 짜증내는 것 치고는 심한 반응을 보이는 마왕을 관찰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왕의 마나 고갈! 가뜩이나 체내의 마나가 연소되고 있는 시점에서 마광포 같은 강한 마법을 써대니 마나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렇다면 이제 곧 변신이 풀리겠군?”
그렇게만 되면, 에크만이 깨어나지 않아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아니, 마나가 완전 고갈돼서 육체적인 능력도 형편없이 떨어질 테니 필승이다.
“그렇지! 그대, 화염에 몸을 맡길지니, 버닝 소울!”
놈의 마나 고갈을 더 빠르게 하기 위해서 대상의 마나를 연소시켜 몸 주위로 불길을 만들어 내는 버닝 소울을 시전했다.
온몸에 강렬한 불길을 일으키는 마왕. 급속도로 마나가 빠져나감을 느꼈는지 다급히 달려와서 새로 사용한 물의 수호를 죽어라 두드려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풀었던 몸이 원 상태로 돌아가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불꽃도 사라졌다. 완벽한 마나의 고갈이다.
“캔슬. 화룡의 갑옷.”
마왕이 축 늘어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물의 수호를 풀어버렸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화룡의 갑옷을 사용. 이제 남은 마나는 얼마 없지만 마왕을 죽이기엔 충분할 터였다.
“크윽, 처음부터 괴물 같은 놈들에게 걸려서는…….”
이미 포기했는지 몸에 힘을 뺀 마왕의 중얼거림. 확실히 너무 대단한 놈들을 만나기는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법 활약을 했을 텐데.
서걱!
검강으로도 상처내기 힘들던 질기고 단단한 피부는 어디가고 칼을 슬쩍만 가져가도 잘려지는 낡은 피부조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치열했던 전투의 끝 치고는 너무 허무한 죽음이다.
[중간계의 영웅의 수식어를 획득하셨습니다.]
“인간족의 배신자이면서 중간계의 영웅이라, 웃기는군.”
원치 않았음에도 생겨난 수식어를 보며 가볍게 냉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