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
석판에 관련된 일을 해결한 지 7일이 지났는데도 가넷과 아슈라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아슈라에게 메일을 보냈다.
3일이 지나서야 도착한 답장. 몇 시간이 멀다하고 메일을 보낸 덕인지 그곳에는 간단한 약도와 함께 집 주소, 전화번호 등이 적혀있었다.
띠리리링!
“여보세요?”
“아슈…… 라?”
생각해보니 아슈라의 본명은 모르고 있었다.
“태연이 형? 명훈이에요. 어디세요?”
“집 앞.”
“아, 잠시만이요. 누나 내려 보낼게요.”
마침 소연이가 집에 있는지 명훈이는 바로 내려 보내겠다 말했다. 하나 전화를 끊은 뒤 안에서 약간의 큰 소리가 오갔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소연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안…… 녕.”
“그래, 안녕. 무슨 일이야? 요즘 통 접속도 안 하고?”
“미안. 일이 좀 있었어. 그리고 나 앞으로, 게임하기 힘들 것 같아.”
“뭐? 어째서?!”
“미안. 그냥 그렇게만 알아줘. 내가…… 지금 좀 바쁘거든? 그래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소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선명히 붓고 충혈된 눈. 그리고 희미한 눈물 자국. 그것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미안…….”
미안이라는 말을 연발하며 등을 돌리는 소연이를 잡지 못했다. 한동안 상황 파악을 못하고 멍한 상태로 그 자리에 굳어있자 다시 문이 열리며 아슈라, 아니 명훈이가 밖으로 나왔다.
“형, 저랑 얘기 좀 해요.”
집 앞에서 얘기하긴 뭐한 말인지 우리는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주문을 하고 커피가 나올 때까지 무표정하게 창밖만 바라보던 명훈은 목이 탔는지 커피도 아닌 물을 한 잔 마시고 입을 열었다.
“누나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엔 형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여기까지 불러낸 거예요.”
“…….”
뭔가 심각한 명훈의 말에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꾹 참고 경청했다.
“우리 누나, 곧 결혼할지도 몰라요.”
“뭐?!”
“아마도……. 거의 확실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이가 몇인데……. 그리고 나랑 사귀고 있으면서 무슨 결혼을 해?!
“사실, 며칠 전에 저희 아버지 회사가 크게 휘청거렸어요. 그리고 지금은 거의 부도 직전인 상태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사가 잘 돌아간다고 알고 있었다. 저번엔 소연이와 명훈이가 함께 외국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여유 있었는데……. 아니, 회사는 어느 순간 휘청거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그것과 결혼이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거지?”
“채권자들이 가진 채권의 90%이상을……. 돈황, 그 빌어먹을 자식이 가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것들을 탕감해주는 조건으로 누나와의 결혼을 요구하고 있어요.”
“하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대체 빛이 얼마나 되기에 돈황이 이렇게 뒤흔들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재벌가의 외동아들이라지만…….
“사실 그 자식 부모님이 운영하는 회사의 도움을 받아서 제법 잘 돌아가던 회사였는데……. 뒤통수 맞은 거죠. 전에 몇 번 회장님을 만나 봤는데 이런 치졸한 짓을 할 분은 아니셨어요. 그렇다는 것은 박찬업, 그 자식이 꾸민 일이란 거죠.”
돈황의 본명인 듯싶었다. 이런 치졸한 짓을 꾸미다니, 지금까진 가만히 있던 놈이 어째서? 저번에 그 분위기가 변한 것과 관련 있는 일인가?
“형한텐 참 미안해요. 그렇게 애타게 찾았는데, 겨우 이루어지나 싶었는데…….”
“내가 만나볼게. 그놈 주소 알지?”
“알기는 하는데……. 잠깐만요.”
잠시 휴대폰을 꺼내 뒤적거리던 명훈이 종이에 뭐라 적어서 내게 넘겨주었다. 아마도 그놈의 주소. 명훈이도 내게 작은 기대를 거는 듯했다.
* * *
“무슨 볼일이시죠?”
보디가드까지 데리고 나온 찬업은 입가에 조롱과도 같은 미소를 띠며 내게 물었다.
“네가 돈 많다는 건 충분히 아니까 그만 해라.”
“무슨 말씀이신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돈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비웃음이든 그냥 웃음이든 실실거리던 찬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음은 살 수 없어도 몸은 살 수 있겠지. 마음은……언젠가 몸과 함께하게 될 거야.”
“그러고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결국 전부 불행해진다고!”
“그건 네 생각이겠지! 난 소연이가 곁에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어! 그리고 소연이도 내 곁에서 결국 행복해질 거야!”
“이익!”
녀석의 면상에 주먹을 갈기려는 순간, 옆에 있던 보디가드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 제지를 가했다.
제기랄!
“나와 결혼하면 소연이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 편해져. 너 따위와 사귀는 것보단 백 배 낫다고!”
본인의 능력은 아니지만 큰 소리 치는 찬업을 보며 휴학하고 게임이나 하는 나 자신에 대해 약간의 자괴감이 생겼다.
“어째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게임에서의 일과 관련된 건가?”
찬업을 게임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표정을 기억해냈다.
“왜냐고? 그건 더 이상 소연이가 날 봐주지 않기 때문이지. 네놈 때문에!”
“뭐?”
“그동안은 그래도 소연이가 날 봐주기는 했어. 그런데 네놈이 나타난 이후로는 더 이상 내게 신경도 쓰지 않았지! 엘프 마을에 홀로 떨어져있을 때, 소연이가 내 존재조차 잊어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쾅!
찬업은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한 번 치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화가 나긴 나도 마찬가지. 서로가 서로를 죽일 듯한 기세로 노려보다가 찬업이 먼저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회유해 보려고 온 것이지만 아무래도 협상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띠리리링!
혼자 차를 마시며 화를 삭이다가 소연이의 집 근처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소연이 좀 나오게 해줄래?”
“……나가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얘기해 볼게요.”
“다 안다고……통보만 할 게 아니라면 나오라고 해.”
“……예.”
잠시 후, 명훈과 갔던 커피숍으로 소연이가 나왔다. 좀 전까지도 울었던 듯 빨갛게 부어있는 눈.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짚을 상황이 아니었다.
“왔어?”
“…….”
차를 시키고 나서도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빠르게 돌아가는 생각과 달리 시간은 동결된 듯 사람들의 행동이, 그리고 입술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얼마래?”
“응?”
“찬업이란 놈이 만들어놓은 빚. 모두 얼마냐고.”
“……어떻게든 끌어올 수 있는 돈을 다 합쳐도 5억 정도의 빚이 남아. 찬업의 아버지 회사에서 빨리 결제를 해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작정하고 그러는 것이니 그놈이 해결해 줄 리 없겠지.”
끌어 모을 수 있는 돈을 제하고도 5억. 실감이 안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미 현실감이 떠나버린 상황에서 침묵이 다시 이어졌다.
“……미안해. 나도 네가 좋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족들이야.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
“언제까지야?”
“태연아…….”
“언제까지냐고. 그 돈을 갚아야 할 날이.”
“앞으로……. 10일.”
“기다려줘. 그 안에……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드륵!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너무 무모해 보이고, 미친 짓 같은 내 말에 소연이가 소리치며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10일…… 5억…….”
솔직히 그런 엄청난 돈을 이 짧은 시간 내에 모은다는 것.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통장에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모아놓은 돈 몇 백만 원이 있지만 5억에 비하면 턱도 없는 작은 액수였다.
부모님께 어떻게든 돈을 융통해 봐도…… 도저히 무리다. 있다 해도 빌려주실 리 만무하지만.
“방법은…… 하나군.”
걸음을 재촉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둘러 힐름에 접속했다. 현실의 내겐 없는 것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 이곳의 돈은 현실의 돈과 직결된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제발…… 제발…….”
제발 내가 은행에 맡겨놓은 돈이 많기를, 또 창고에 맡겨놓은 고급 아이템이 많기를 빌며 은행과 창고를 돌았다. 골드로 5천에 시가 3천 골드 어치의 고급 아이템들. 다 합쳐보니 대략 8천 골드 정도 될 듯싶었다. 현금으로 모두 8천만 원 어치의 돈. 분명히 많은 돈이었지만 내겐 한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이것들을 현금화 시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각 그랜드 마스터가 남긴 아이템 중에 뇌궁과 토황추는 타인에게 양도가 가능하지만 수신의 방패와 화룡의 검은 불가능했다. 드래곤 슬레이어도 마찬가지고. 이것들을 팔면 막대한 돈이 들어올 텐데…….
“토황추만이라도……. 팔자.”
사실 그리 큰 효용성이 없어서 누가 사갈지 의문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랜드 마스터가 떨어뜨린 아이템인데……. 하는 생각으로 경매에 제법 높은 시작가를 붙여서 내놓았다. 나머지 고급 아이템들도 마찬가지. 다행히 내가 팔려는 것들이 경매에 올라오지 않았거나 극히 적은 양만 올라온 상태라 약간 값을 높여서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토황추가 팔린다 해도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녀석들을……. 믿자.”
힐름 속에서 내가 모을 수 있는 돈은 다 모았다. 이제 모자란 금액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채워야 한다.
먼저 첫 번째로 아론을 찾았다. 대강의 사정을 설명하자 아론은 물론 곁에 있던 린까지 한 걸음에 은행과 창고로 달려가 여분의 돈과 아이템을 몽땅 넘겨줬다. 아니, 아이템은 장사할 시간 아까울 거라고 직접 장사를 시작해 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둘이 마련해준 돈과 아이템이 무려 6천이었다.
그 다음은 예전 초창기 레이지 길드의 멤버인 레이, 나키르, 세리, 드라이저, 카엘, 베르 등을 찾았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부탁을 했다. 한참 드래곤 슬레이어로 열을 올려서 사냥하는 아론과 달리, 그들은 레이지에서 맡은 업무에 치여 사냥할 시간이 없었기에 큰돈도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모아줘서 4천 골드 정도가 또 모였다.
“길드장 계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길드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혹시 사전에 약속을 하셨나요?”
“아니오. 하지만 콜로니스트ㅏ고 하면 만나 주실 겁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예전의 동료들을 다 만나고 내가 찾은 곳은 에린 누나의 여인궁이 지배하는 비코 영지였다.
에린 누나라면…… 적지 않은 도움을 주겠지.
“안으로 들어가시죠.”
잠시 연락을 취해보던 문지기는 내게 출입을 허락했다.
익숙한 길을 걸어 도착한 영주의 집무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건 에린 누나가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콜로니스트님.”
“저, 에린 누나는 어디에…….”
“아직 모르셨군요. 에반제린님은 레이지 길드장의 지독한 구애에 진절머리가 나서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이곳의 일은 저에게 일임하셨죠. 물론 아직도 길드장은 에반제린님이십니다.”
“그럼 어디로?”
“음, 레이지를 떠나신 콜로니스트님께라면 얘기해 드려도 괜찮겠죠. 밀림입니다. 예전 밀림에서 생활할 때를 그리워하는 몇몇의 길드원들을 이끌고 다시 밀림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가끔 오셔서 중요한 일 몇 개를 처리해 주시고 가거나 길드원들을 독려해 주시고 가시지만 그리 오래 머물진 않으시죠.”
거트 형의 도를 넘어선 구애에 에린 누나가 밀림으로 도망쳤다 한다. 위치는 대강 알기에 서둘러 밀림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에린 누나가 있는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 콜?”
“누나, 오랜만이에요.”
“야, 정말 오랜만이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그게…….”
앞서 애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 사정 설명에 들어갔다. 진지하게 듣는 에린 누나. 얘기가 끝나자 거침없이 성에 있는 부 길드장에게 명령하여 남는 길드 자금을 가져오게 했다. 더불어 자신이 가진 돈과 아이템도 모두 찾아왔다.
그렇게 모인 돈이 무려 3천 골드. 한 길드의 수장으로서 사적인 일 때문에 길드원들에게 강제 징수할 수 없고, EH 길드 자금을 과하게 끌어 쓸 수 없음에도 이 정도면 대단한 것이다.
이제 대충 모인 돈은 모두 2만 1천 골드. 현금화 시키면 2억 1천만 원이니 반절 조금 못 모인 셈이었다.
“토황추가 비싸게 팔리면 거의 반절은 모은 셈이 될 테지만……. 후우, 이제 손 벌릴 만한 곳이 몇 안 남았군.”
그 다음 행로로는 더 메지션 길드를 택했다.
스크롤을 이용해 일리아드로 진입해서 한걸음에 성으로 달려가자 내 얼굴을 확인한 문지기가 재빨리 문을 열어줬다. 아무래도 길드장인 파트리크가 특별한 얘기를 해둔 듯.
별다른 제지 없이 논스톱으로 영주 집무실에 들어가자 파트리크가 반갑게 맞아줬다.
“오랜만입니다. 콜로니스트님. 앉으시죠.”
1분, 1초가 급했지만 마다할 수 없어서 일단 자리에 앉았다.
“참 오랜만입니다. 한데 무슨 일로……?”
“돈을……. 빌리고 싶습니다. 솔직히 언제 갚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갚겠습니다.”
“흠, 좋습니다. 콜로니스트님이라면 신용이 있지요. 그럼 얼마나?”
“최대한 많이……. 부탁드립니다. 수천 골드가 있어도 부족한 상황이거든요.”
“허, 혼자 전쟁이라도 벌이실 생각이십니까? 뭐,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자금을 모아 보겠습니다.”
파트리크는 잠시 내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가더니 이십여 분 후에 돌아왔다. 40개의 미스릴 동전이 담긴 주머니를 들고. 모두 4천 골드의 어마어마한 돈이다.
“감사합니다.”
“하하,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자는 없지만 이렇게 콜로니스트님에게 빚을 지워놓으면 나중에 한 수 정도는 배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유가 있을 때 갚으시고 후에 한 수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파트리크는 무이자로, 무기한 돈을 빌려 주겠다 약속했다. 돈이 필요한 이유도 묻지 않고, 나와 그렇게 자주 어울린 것도 아니건만 이렇게까지 대우해주다니 참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두 곳 정도뿐이군. 아직 2만 5천 골드가 부족하고……. 후우, 그래. 그깟 자존심 찾을 때가 아니지. 가자, 그들을 찾아서.”
다음 행로를 정하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들이라 찾아다니기가 무척 까다로웠으니까. 결국 추적 스크롤을 일곱 번이나 사용하고 나서야 겨우 그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각 클래스의 최강자로 평가되는 자들을 1대1 듀얼로 깨부수고 다니는 에크만과 알테어.
“으잉? 네가 여긴 웬일이냐?”
“두 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우리 둘을?”
“예.”
“어째서? 넌 맨 마지막에 꺾어줄 거라니까?”
“그게 아니라……. 두 분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끄응, 네가 뭘 부탁한다고 하면 무서운데…….”
“두 분께도 무서운 게 있다니 처음 알았군요.”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최강인 우리에게 누가 감히 겁을 줄 수 있겠어? 드래곤? 데리고 와! 토막 내서 찜 쪄 먹어 버릴 테니까!”
역시 자신감이 가득한 둘이라 순식간에 발끈했다.
“진정하십시오. 실은……. 두 분께 돈을 빌리고 싶어서입니다. 아이템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자신의 능력만을 중시하시는 두 분이라면 그동안 모아두신 돈이 적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렇기야 하지. 얼마나 필요한데?”
“두 분이 가지신 여유 돈의 전부요. 수천 골드가 있어도 모자란 상황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뭐, 어차피 안 쓰는 돈이니 빌려주는 거야 별 문제가 안 되지만 뭣 때문인지나 알자.”
대충 앉을 만한 자리를 찾고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만이 아니라 예전부터 내가 기다려왔던 것까지.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이상하게 술술 입에서 풀어져 나왔다. 어쩌면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얘기를 끝내고 숙였던 고개를 들자 울먹거리는 에크만과 알테어를 볼 수 있었다.
“흐아앙!”
“이 불쌍한 것! 도와줄게. 도와주고말고!”
패앵-!
알테어는 내 옷에 눈물을 닦고 코까지 풀어가며 울었다.
“흑흑, 남자라면 당연히 한 여자를 위해 모든 걸 걸 줄 알아야지. 암, 그렇고말고! 돈이 필요하댔지? 지금 당장 가자. 전부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상당 부분 메워줄 수 있을 거야.”
알테어는 그 무지막지한 힘으로 날 집어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은행과 창고를 들러 에크만과 함께 상상도 못한 엄청난 거금을 내게 안겨주었다.
미스릴 동전 150개. 즉, 1만 5천 골드. 현금으로 바꾸면 1억 5천만 원에 달하는 엄청나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거금을!
“지금 우리한테 이것밖에 없네. 쩝! 그래도 꼭 그 빌어먹을 놈에게서 여자 친구를 구하길 바란다!”
둘은 진심으로 내가 잘되길 빌어줬다. 토황추가 팔리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 모인 돈은 약 4만 골드. 즉, 4억이었다. 부족한 금액은 약 1억……. 이제 힐름 내에서 돈을 구할만한 곳은 단 한 곳. 1만 골드라는 거금을 가지고 있을 만한 곳도 한 곳.
“텔레포트!”
위치니 좌표니 하는 건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헛, 당신은?!”
“길드장을 만나러 왔다.”
“기, 기다리시오!”
문지기로 있는 길드원 하나가 굉장히 당황한 모습으로 내게서 거리를 벌리며 안에 나의 등장을 알렸다. 그리고 잠시 후, 20여 명의 기사들이 성문으로 마중 나왔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정중히 안내하는 것 같았지만 20여명의 기사가 나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둘러싸고 정면에서 앞서가는 기사들마저 칼자루에 손을 대는 것이 명백한 포위였다.
반기진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하는군.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익숙하다 못해 눈 감고도 걸어 다닐 길들을 지나 도착한 문 앞. 날 포위하고 여기까지 온 기사들은 더 이상 따르지 않고 뒤로 빠졌다. 이제 살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래도 예우는 해주겠다는 건가?”
기사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은 안 좋았던 마음이 풀렸다. 그래도 1대1로 만나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끼이익!
두 팔에 힘을 주고 문을 열자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들이 여기저기에서 반사되어 비쳤다. 정면에 놓인 왕좌에 앉아 있는 거트 형에게로 가는 일렬의 길 양옆으로 완전 무장한 기사 수십 명이 서 있던 것이다.
“으음……!”
아무리 내전이 있었다고는 해도 거트 형이 날 이렇게 못 믿나? 하는 생각이 들며 큰 배신감이 밀려왔다. 지금 내 입장이 입장인 만큼 불쾌한 기색은 드러내지 못했지만 이건 정말 속에서 울화가 치밀 일이다.
“날 보자고 했다고?”
“주위를…… 물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렇게 있는 것도 소문나면 안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으으……. 고위 간부들만 남고 물러가라!”
가장 세가 강하다는 레이지 길드의 길드장이 단 한 명에게 겁먹어서 수십의 기사를 대동한 채로 얘기를 나눴다는 소문이 돌면 결코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거트형은 기사들을 물렸다. 그것도 전부는 아니고 일부를 남겼지만 이 정도면 충전된 드래곤 슬레이어의 10써클 마법과 화룡의 검만으로도 해볼 만했다. 뭐,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돈을…… 좀 빌려줘.”
“뭐?”
“옛정을 생각해서…… 돈을 좀 빌려줘.”
“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돈을 빌려주면 그 돈으로 또 날 몰아내려 할지 모르는데? 옛정? 넌 그 정이란 것 때문에 날 배신한 건가?”
내가 숙이고 나오자 두려움 같은 게 사라졌는지 거트 형은 꽤나 냉소적인 태도로 나왔다.
아직도 반성 같은 건……. 전혀 못하고 있군. 단지 내가 자기를 끌어내리려 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어.
“부탁…… 할게.”
털썩!
아무리 말로만 떠들어봐야 삐뚤어져 있는 거트 형의 마음을 돌리긴 무리라는 생각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내게……자존심 따위는 사치일 뿐이니까.
“아, 아니. 갑자기 이러면…….”
목소리에서부터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거트 형. 떨리는 목소리에 따라 마음도 흔들리는 듯했다.
“어, 얼마면 되는데?”
“……일단 필요한 돈은 약 8천 골드. 그러니까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토황추가 2천 골드 이상에 팔릴 거라는 예상에서 나온 값이다. 아니었다면 1만 골드를 불렀으리라.
“8천? 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네가 정말 나와 전쟁을 해보겠다는 것 같은데, 내가 속아 넘어갈 줄 알고? 없어! 나한텐 그런 돈 없으니까 썩 꺼져!”
8천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제시하자 거트 형은 또 곡해를 하고 코웃음 쳤다. 확실히 8천 골드를 모두 지불하면 잠깐 휘청할 수도 있지만 세금을 50%까지 끌어올린 레이지라면 못 만들 금액도 아닐 텐데 말이다.
“8천을 다 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될 수 있는 만큼만…….”
“닥쳐! 너한테 줄 돈은 단 1브론즈도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거트 형은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따라 나가는 간부들. 하지만 난 기다렸다.
“뭐야, 아직도 안 갔어?”
잠시 후, 돌아온 거트 형이 신경질적으로 핀잔을 주며 다시 왕좌에 앉았다.
지금이 나에겐 마지막 기회. 서둘러 입을 열고 내 사정에 대한 말들을 꺼내놓았다. 하나 돌아오는 말은 여전히 냉소.
“하하, 전에 소설을 좀 썼다더니 아주 그럴듯하게 지어내는구나!”
찰그랑!
거트 형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 쪽으로 던졌다.
“나한테 그럴싸한 얘길 들려준 이야기 값이다. 끌어내기 전에 썩 꺼져버려!”
잠시 멈칫 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길드원들을 부르는 거트 형을 보며 주머니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은 고작 100골드. 다른 사람들에겐 많은 돈일지 몰라도 지금의 나에겐 밥값이나 하라면서 던져준 돈으로밖에 안 보였다.
“아직도…… 1만 골드.”
더 이상 손을 벌릴 만한 곳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은 기간 동안 죽도록 사냥만 하면? 그래도 무리다. 아무리 몰이를 해놓고 드래곤 슬레이어나 화룡의 검의 특수 능력을 사용한다 해도 둘 다 한계가 있었고, 자잘한 것들을 모아서 팔아봤자 1만 골드 정도의 큰돈을 만들긴 요원했다. 결국…… 생각의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1만 골드 정도의 돈을 단번에 모을 수 있는 방법……. 역시 하나뿐인가?”
그 방법을 떠올리며, 또 그 위치를 떠올리며 두 손에 들린 내 무기를 쳐다보았다.
“드래곤 슬레이어!”
과거 드래곤을 잡았을 때도 골드로만 1만이 나왔으니 다른 드래곤을 잡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드래곤이 무섭긴 하지만 과거 잡았던 전적도 있고……. 그때는 없던 막강 전력 또한 있으니까 전보다 수월하겠지.
“멤버를 정해야겠군. 사람이 많은 것도 좋지만 직접 죽이는 건 정예들일 테니…….”
머릿속으로 드래곤을 잡으러 갈 멤버들의 편성을 시작했다. 드래곤을 잡을 때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무력을 갖추고 내가 아이템을 갖는데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사람들. 추리고 추리니 그렇게 많은 숫자는 나오지 않았다.
* * *
“여어~!”
6척 장신에 우람한 몸집을 가진 청년이 마법사인 듯, 로브로 온몸을 가린 자에게 손을 들며 인사를 건넸다. 손에 흔듬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새하얀 검신의 본 소드. 바스타드 소드의 형태를 띤 본 소드는 그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모습을 보이며 주위의 빛들을 반사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곧 올 거야. 좀 더 기다려보자.”
아직 약속 시간까진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어 둘은 별말 없이 기다렸다. 속속 도착하는 멤버들. 일단 아론과 함께 올 것으로 예상했던 글로린도 따로 도착했고, 더 메지션에게 지원받은 마법사 부대도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 도착했다. 역시 가장 늦는 건 문제아들. 에크만과 알테어였다.
“으잉? 이게 전부야?”
“드래곤한테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들로만 추렸습니다. 혹시…… 겁먹으신 겁니까?”
“겁먹긴 누가 겁먹어? 그깟 도마뱀 따윈 나 혼자로도 충분해!”
마법사의 간단한 도발에도 쉽게 넘어가는 에크만. 그래도 덕분에 의욕은 불타오르는 듯했다. 멤버가 모두 도착하자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마법사가 얼굴을 드러내며 지시했다.
“위치를 아는 건 저희 셋뿐이니 각자 아론과 글로린, 저에게 나뉘어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예. 콜로니스트님.”
물론 이런 대답을 한 것은 더 메지션의 마법사들이었다. 에크만과 알테어는 귀만 후비며 걸음을 옮길 뿐, 사람의 배분이 대충 끝나자 셋은 동시에 스크롤을 찢었다.
“매스 텔레포트!”
* * *
“주위에 강하진 않지만 몬스터들이 출몰하니 주의해 주십시오.”
바스락!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몬스터의 기척이 들려왔다. 이곳에 나오는 몬스터라면 간단하게들 처리할 수 있는 놀이 고작.
“크륵!”
“이건 또 뭐야?”
“윈드 커터!”
여전히 귀만 후비는 에크만 등에 비해 신속하게 대처하는 더 메지션의 길드원들. 나타난 놀의 수보다 공격하는 숫자가 더 많았기에 처리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크에엑!”
“넌 또 뭐냐?”
퍼억-!
둘로 나뉘어서 한쪽은 배후를 치려했는지 에크만, 알테어가 있는 후방에서 전에 상대해 본 적 있는 보스급 놀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나기가 무섭게 알테어의 주먹질 한 번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몸이 회색빛으로 물들면서.
“아무리 그래도 70레벨 대의 몬스터인데 어떻게 주먹질 한 번에…….”
그 광경을 본 모두가 경악했다. 70레벨대의 보스급 몬스터가 주먹질 단 한 번에 죽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달려드는 속도까지 이용한 카운터였다지만 이건 설명하기 어려웠다. 파이브 클래스 마스터라지만……. 해도 너무 하는군.
“자, 뭣들 해? 어서 가자고!”
알테어는 처음 드래곤을 만난다는 게 기대되는지 일행의 걸음을 재촉했다. 드래곤이 사는 레어까지 가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레어는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에서 멀지않은 산중턱에 있었으니까. 레어의 앞에 도착하자 더 메지션 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왠지 낯이 익은데?”
“나도, 나도.”
“꿈에서 봤나? 희한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자 그들은 그냥 데자뷰 현상 정도로 치부하려 했다. 뭐, 말해 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다들 보신 기억이 있을 겁니다. 오프닝에 나왔던 그 드래곤의 레어거든요.”
“아아……!”
다들 알아채고 놀라는 분위기. 하나 역시 에크만과 알테어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 없다는 투였다. 그 증거로 모두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긴장하고 있을 때 알테어가 레어 앞으로 가 소리를 질렀다.
“덩치만 큰 도마뱀아, 당장 튀어나왓!”
“헉!”
전장의 외침이란 스킬까지 섞었는지 쩌렁쩌렁하게 울린 알테어의 목소리는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너무 갑작스런 행동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대처라도 확실히 해야 했다.
“모두 모여 있지 말고 퍼지십시오!”
“크아아앙!”
알테어의 외침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 동굴 안에서 드래곤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난 처음 듣는 것이 아니라 오싹한 정도로 그쳤지만 더 메지션의 길드원들은 털이 쭈뼛쭈뼛 서는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물론 이번에도 에크만과 알테어는 예외이다. 오히려 둘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굴 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온다, 온다!”
“감히 내 영역에서 소란 피우는 것이 누구냐!”
“퍼져요!”
동굴 안에서 골드 드래곤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나오는 것이 보이자 에크만과 알테어는 환호했고 반대로 나는 다급해졌다. 다행히 내 외침에 정신 차린 더 메지션의 길드원들. 허겁지겁 사방으로 퍼지며 자리를 잡았다.
“또……네놈이냐?”
골드 드래곤은 날 기억하고 있었다. 하긴, 드래곤이라면 망각을 모르는 생물이란 게 널리 통용되고 있으니 당연한 걸지도…….
“널 죽이러 왔다.”
“큭, 웃기는군. 얼마 전 그로티우스 산맥에 살던 멍청한 어린놈이 인간에게 죽었다더니 그게 너였나 보지? 하지만 그런 갓 성룡이 된 멍청한 어린놈과 날 같다고 생각하면 네놈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다.”
“같건 다르건 상관없다. 확실 한 건……. 내가 널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지.”
확실치는 않지만 골드 드래곤의 눈에 불쾌한 빛이 스치는 듯했다.
“그렇다면 보여주마. 마법에만 의지하는 바보 같은 어린놈과 에인션트의 칭호를 받은 나의 차이점을!”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골드 드래곤이 소리치자 놈의 굵고 큰, 그리고 날카로운 손톱 발톱이 숨겨져 있다가 튀어나왔다. 그게 호응해서 흐뭇한 표정을 짓는 에크만, 알테어.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까지 치는 그들을 보자 내가 이 인간들을 왜 데려왔나 하는 생각하며 들었다.
“인페르노!”
우리가 잡담을 나누는 사이 정신차린 더 메지션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인페르노를 시전했다. 8써클의 인페르노라면 5써클까지의 마법을 무효화 시킨다는 드래곤의 비늘이라도 무사할 수는 없을 터! 하나 골드 드래곤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실드!”
부웅-!
블랙 드래곤은 뿜어져오는 인페르노에 10써클의 마법, 글레이셜 게일로 맞섰지만 골드 드래곤은 그러지 않았다. 다만 꼬리에 실드를 두르고, 몸을 크게 돌리며 꼬리를 휘두를 뿐이었다.
“피, 피해라!”
콰앙!
실드가 둘러진 드래곤의 꼬리가 바닥을 강타하자 인페르노를 사용하는데 전념하던 마법사들 중 일곱이 움직여 보지도 못하고 즉사했다. 실드가 보호해주지 못한 엉덩이 부분 약간이 데미지를 입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양호한 골드 드래곤. 놈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손발을 놀려 마법사들을 도륙해 갔다.
“크하하하! 그렇지. 드래곤도 처음엔 덩치 큰 도마뱀이었는데 귀찮다고 마법만 써서는 안 되지. 저게 바로 드래곤 고유의 전투 방법이구만! 크하하하!!!”
알테어는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면서 달려 나갔다. 하긴, 드래곤도 처음부터 마법만 쓰진 않았을 터, 그렇다면 육체를 이용한 고유의 전투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귀찮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드래곤들이 마법만 사용해 버릇해서 그렇지.
문득 성룡이니 웜급이니 에인션트급이니 하는 것들이 나이 말고도 이런 것들로 나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게 된 시기를 성룡이라 하고 육체를 이용한 고유의 전투법을 익히기 시작하는 때를 웜급, 다 익혔을 때를 에인션트 급이라고 말이다.
“파이어 볼!”
“크하하하! 부강!”
골드 드래곤이 어느새 큼지막한 도끼 한 자루를 빼들고 달려드는 알테어에게 사람 크기만 한 파이어 볼을 날렸지만 워리어 클래스를 마스터했는지 알테어는 강기를 일으켜 파이어 볼을 갈라버렸다. 그리고는 계속 전진.
“메가 그라비티!”
알테어의 주위로 검은 원이 둘러지더니 땅이 푹 꺼졌다. 원안에는 엄청난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알테어의 움직임도 정지. 알테어의 움직임이 멈추자 드래곤은 커다란 앞발을 들어 그를 밟아 버렸다.
“안 돼!”
중요 전력 중 하나인 그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해버리면 승산이 확 줄어든다. 더구나 저번처럼 마법만 줄기차게 써대는 멍청한 드래곤도 아닌데…….
“낄낄낄! 안 되겠지? 그럼 이번엔 내 차례다!”
에크만은 친구가 당해버렸는데도 재미있다는 듯 웃기만 했다.
들썩!
그때였다. 에크만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드래곤의 발에 밟혀 죽을 줄 알았던 알테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리고 짓누르던 드래곤의 발이 들썩거린 것은.
“끄으으, 난 아직 안 끝났다고! 소환, 듀라한 나이트x4, 소환, 실라이론!”
그 엄청난 압력 속에서 짓누르는 드래곤의 발을 힘으로 막아내던 알테어는 소환술사 쪽 스킬을 발휘해서 듀라한을 소환해냈다. 중력 마법은 범위 안에 사람이 많을수록 가해지는 압력이 줄어드니까. 더구나 듀라한들도 드래곤의 발에 대항하는 것에 힘을 보태니 알테어의 표정이 한결 여유 있어졌다. 거기에 바람의 상급 정령인 실라이론을 소환. 골드 드래곤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제피로스 블레이드!”
“리플렉트 매직!”
“피해라!”
골드 드래곤의 주위를 돌던 실라이론이 고위 마법으로 공격해오자 드래곤은 가볍게 반사시켰다. 그것도 살짝 비틀어서 마법사들을 향하게.
콰과광!
너무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에 제피로스 블레이드 자체가 워낙 고위 마법이라 마법사들은 변변한 대처도 못해보고 죽어나갔다. 그 덕에 더 메지션 마법사들 중 남은 건 달랑 세 명. 이제 전부 합쳐도 8명밖에 안 됐다.
“크흐흐흐……. 컥?”
쾅!
주르르륵-!
별 힘도 안 들이고 마법사들이 죽는 것을 보며 웃음 짓던 드래곤이 갑자기 비명성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배와 눈앞의 사내를 쳐다봤다.
“쳇, 확실히 혼자서는 안 되겠군. 에크만! 같이하자!”
“낄낄낄. 것 봐, 에인션트 급한테는 안 될 거라고 했지? 더 안 놀아도 되겠어?”
“분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방 먹였으니까.”
그랬다. 알테어는 실라이론이 정신을 분산시키는 사이, 발밑에서 빠져나가 온갖 보조 주문을 걸고 드래곤의 배를 주먹으로 후려친 것이다. 그 한 방에 드래곤의 몸이 밀려난 것이고.
대체 힘이 얼마나 돼야 드래곤의 육중한 몸을 날려버릴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걸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골드 드래곤이……. 화났다.
“비천한 인간 따위가 감히!”
“모두 이리로 모이세요!”
화가 난 골드 드래곤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올라갔다.
쳇, 이래서 내가 밖에서 싸우기 싫었던 건데……. 동굴 안이었으면 놈이 날개를 못 썼을 거 아냐!
“크오오오오오!!!”
“물의 수호!”
콰과과과과과과과-!
골드 드래곤 고유의 에너지 브레스. 과연 물의 수호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다행히도 절대의 방어는 깨지지 않았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골드 드래곤. 놈이 머뭇거리는 사이 놈의 이점 하나를 없애야 했다.
“모두 동굴 안으로!”
에크만과 알테어가 고집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놈이 하늘에 있으면 공격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는지 순순히 따라줬다. 솔직히 동굴 안으로 들어온 것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놈이 동굴 안으로 브레스를 쏴서 동굴을 무너뜨려버리면 낭패를 봤을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놈은 그러지 않았고 우리를 따라 자신의 레어로 들어왔다.
“엄청나군.”
뭣 때문인지 몰라도 드래곤의 레어안은 엄청나게 컸다. 저번에 잡았던 블랙 드래곤의 레어보다 수배는 더.
“메테오 스웜!”
하늘에서 운석과 같은 화염구들이 떨어져 내렸다. 뱀파이어와 싸울 때도, 블랙 드래곤과 싸울 때도 봐서 그 무시무시한 위력을 잘 알았기에 물의 수호를 쓰려는데 사람들 간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별 수 없군. 리플렉트 매직!”
“크워어엉!”
드래곤 슬레이어에 저장된 마나를 이용해 메테오 스웜을 되돌렸다. 아직까지 내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빼들지도 않았었기에 그걸 되돌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하던 골드 드래곤이라 피해는 꽤 컸다.
달려들던 그대로 화염구들에 의해 튕겨나간 것이다. 화염구에 적중당한 부분은 비늘이 녹아내렸고 상대적으로 피부가 얇은 날개는 한 부분이 뜯겨져 나갔다.
“오오, 언제 그런 마법을 배운 거야?”
척 보기에도 엄청난 위압감이 들던 마법을 순식간에 역으로 돌려버리자 에크만과 알테어가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그건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서 공격을!”
“실라이론 애로우!”
조금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드래곤을 향해 린이 먼저 공격을 퍼부었다. 정령을 화살로 삼아 쏘아내는 하프 엘프 클래스만의 특수 능력. 이번에 쏘아낸 정령은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이었다.
“엑젝터, 나와라!”
파츠츠츠츠!
사마귀 형태의 엑젝터가 골드 드래곤의 소환에 응하여 실라이론에 맞섰다. 낫과 같은 두 팔로 쐐기처럼 짓이겨오는 실라이론을 막는 엑젝터. 하지만 하프 엘프의 스킬이 더해지면서 더 큰 위력을 갖게 된 실라이론이었기에 엑젝터의 두 팔은 물론 몸까지 꿰뚫고 지나갔다.
“꺼져라!”
쾅!
엑젝터를 뚫긴 했지만 많이 약해져버린 실라이론을 발로 밟아 없애버린 골드 드래곤. 놈의 시선은 역시나 내가 든 드래곤 슬레이어에 고정되어 있었다.
또 시작이군.
“그것은 세이나스님의 뼈로 만든 무기! 감히 인간 따위가……. 용서할 수 없다!”
“이제부터가……. 진짜인 듯싶군요. 조심하십시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넓게 퍼졌다. 뭉쳐있으면 내가 가끔 물의 수호를 써주기야 하겠지만 그만큼 위험도 커지는 것이다.
린은 이제부터 별 도움이 안 될 더 메지션의 마법사 셋과 함께 멀리 물러났고 아론과 나, 에크만, 알테어가 각각 한 방위씩을 점하고 골드 드래곤을 둘러쌌다.
“플레임 노바!”
골드 드래곤의 몸 주위로 굵직한 화염의 원이 생기더니 전 방위로 퍼져나갔다. 그 열기가 대단해서 쉽게 생각할 수 없을 정도. 아론까지는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막아내기 힘들었다.
“쳇, 화룡의 검 소환! 화룡의 갑옷!”
다가오는 화염을, 더 큰 화염으로 맞섰다. 역시나 화염의 갑옷 사용 중엔 화염 계열 공격은 거의 무효화. 덥다는 느낌마저 들지 않고 굵직한 불꽃을 지나보냈다.
“화룡의 이빨!”
마나가 검으로 쭉 빨려 들어가면서 검에는 화염이 넘실거렸다.
마나의 연소가 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검을 내뻗자 한 마리의 화룡이 입을 벌리고 골드 드래곤에게 맞서갔다.
“크윽, 파이어 드래곤이라니! 메이즈 오브 윈드!”
화룡과 골드 드래곤 사이에 허리케인 하나가 떡하니 나타났다. 그리고 화룡을…… 집어삼켰다. 허리케인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화룡의 모습이 언뜻 언뜻 보였지만 화룡은 허리케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한참을 맴돌다가 사라져버렸다.
“저 녀석만 멋진 걸 시킬 수야 없지!”
알테어와 에크만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뒤따라 아론도 자신의 드래곤 슬레리어를 들고 달려들었다.
“크으윽! 포지션 체인지!”
“헉? 물의 수호!”
개개인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데 적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서 공격하기도 여의치 않자 골드 드래곤은 나와 자신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에크만, 알테어, 아론 등이 퍼붓는 온갖 마법, 강기 공격에 노출 되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의 수호부터 쓰고 봤다.
츠즈즈즈!
물의 수호에 막혀 사라지는 온갖 마법과 강기들. 간신히 막아내긴 했지만 그 덕에 내게 남은 마나는 그리 많지 않아졌다.
“트랜스포메이션!”
우리가 서로를 공격하는 동안 나와 위치를 바꾼 골드 드래곤은 형태 변이 마법을 시전했다. 빠르게 작아지는 드래곤의 몸. 인간의 형태로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자신의 몸을 축소시킨 것이었지만 온몸에 나있던 상처는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비늘이 더 매끈해 보인다.
“이 모습으로 변하면 다른 드래곤들에게 비웃음을 사서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확실히 무섭다기보단 귀여운 느낌이다. 큭!
“내가 이걸 사용하게 했으니 이제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스르륵-
콰앙!
눈으로 쫓지도 못한 사이 다가온 골드 드래곤은 아직 내 주위로 둘러져있는 물의 수호를 힘껏 후려쳤다. 그러나 반탄력으로 밀려나기만 했다. 물의 수호의 방어는 절대이니까.
첫 번부터 체면 구긴 셈이 되었지만 확실히 좀 전에 보여준 속도를 가공할 만하다. 바람의 그랜드 마스터를 보는 느낌이랄까?
“큭! 엄청난 보호막이군. 좋아, 네놈은 제일 마지막에 죽여주지. 동료들의 죽음을 잘 지켜보도록. 그럼 첫 번째는……. 음? 세이나스님의 뼈를 가진 놈이 또 있었군. 빠득!”
골드 드래곤은 이를 갈며 아론에게로 달려갔다. 아니, 사실은 몸이 흐릿하게 변했을 뿐이다. 다만 조금 전의 말로 유추해 보아 아론을 죽이러 갔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챙! 챙! 채쟁-!
“커걱!”
아론이 갑자기 드래곤 슬레이어를 몇 번 휘두르더니 바닥에 몸을 뉘었다. 회색으로 물들면서.
아마 죽기 전 몇 번의 휘두름도 눈으로 봐서가 아닌 본능적인 휘두름이었으리라. 아론의 갑옷을 뚫고 심장에 박혀 있는 골드 드래곤의 손톱. 가슴과 목만은 두터운 갑옷들로 착용하던 평소 아론의 습관을 생각할 때, 그 손톱의 공격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 공격에 맞으면…… 어떤 것이라도 관통 당한다!
“다음은…….”
“덤벼라, 도마뱀!”
알테어가 먼저 나섰다. 속도보다는 힘에만 중시해 나처럼 놈의 움직임을 포작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그저……자신감일 뿐인가?”
푸욱-!
무모해 보이던 행동은 결국 순식간에 알테어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가슴에 꽂힌 골드 드래곤의 손톱.
그러나 알테어는 웃었다.
“크큭, 걸렸다.
부웅-!
손톱이 심장에서 살짝 빗겨나갔는지 알테어는 왼손으로 골드 드래곤의 손을 잡고 오른 손에 든 도끼로 놈의 어깨를 찍어버렸다. 강기까지 형성되어 어깨를 파고드는 도끼. 골드 드래곤이 임기응변으로 미리 어깨를 도끼에 가져다댄 탓에 동선에 의한 힘이 충분히 실리지 않아 아주 깊이는 박히지 않았지만 꽤 큰 타격이다.
그러나 도끼의 방향을 바꿔 목을 베기 전에 골드 드래곤의 손톱은 먼저 심장을 베어냈다.
“컥……!”
“독한 놈이군!”
“크큭, 아직이다. 빅뱅!”
콰과과광!
마나량보다는 주문의 위력에 치중한 알테어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빅뱅에 비해 약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근접해 있는 상태에게 치명타를 주기엔 충분해 보였다.
나는 물의 수호의 보호를 받고 있고 에크만은 이미 가진바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려서 폭발 범위 밖으로 도망친 상태. 위험에 노출된 것은 골드 드래곤뿐이다.
“크으으, 지독한 놈!”
동굴의 벽까지 날아가 부딪혔던 놈은 그리 심한 타격을 받지 않은 듯, 툭툭 털고 일어났다.
“급하게 만들어냈다고는 하지만 마지막에 내 실드를 깨다니, 인간치고는 강하다는 걸 인정해주마. 자, 다음은 네놈 차례인가?”
“어디 한 번 어울려 보자꾸나!”
어느새 근처까지 이동한 에크만이 골드 드래곤을 향해 돌진했다. 골드 드래곤도 눈으로 쫓기 힘들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움직이는 에크만!
갑자기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아쵸, 아쵸, 아쵸쵸쵸쵸쵸!”
강기를 씌운 주먹을 수없이 내뻗는 에크만과 그것들을 다 받아내는 골드 드래곤.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난타전에 기가 질려버렸다.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던 공방.
균형은 에크만이 먼저 깼다. 에크만이 생각지도 못한 속도를 내자 당황한 골드 드래곤이 먼저 실수를 한 것이다.
퍼억!
한 번 가격하자 그 다음부터는 샌드백이었다. 순식간에 이십여 번을 공격하는 에크만. 한 번 바닥에 몸을 뉘어보지도 못하고 공중에서 맞고 또 맞던 골드 드래곤은 갑자기 몸을 틀며 마법을 날렸다.
“파이어 볼!”
“잔재주는 집어치워!”
발을 높게 치켜들었다가 파이어 볼을 내려찍는 에크만. 결국 골드 드래곤은 자신이 쏘아낸 파이어 볼에 안면을 직격당해야 했다. 또다시 이어진 구타.
“끝장내요!”
“크극, 누구 마음대로! 포지션 체인지, 블링크!”
“차앗!”
에크만과 자신의 위치를 바꾸고 재빨리 블링크로 도망치는 골드 드래곤. 에크만이 뒤돌려 차기를 시도했지만 이미 놈은 도망친 상태였다.
“크그극, 이놈들! 글레이셜 게일!”
“이런, 제길!”
“버닝 소울!”
글레이셜 게일은 주위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광역마법. 이건 딱히 리플렉트 매직을 사용해도 반사가 불가능했다. 엄청난 한기가 몰아치자 자신의 마나를 연소시켜 몸 주위로 불꽃을 일으키는 버능소울을 사용하는 에크만.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뿌옇게 변한 보호막 안에서 볼 수 없었다.
“메테오 스웜!”
“큭!”
콰과과과과과광!
보이지 않으니 리플렉트 매직을 시전할 수도 없다. 엄청난 열기를 가진 화염구들은 그대로 땅에 작열했고 물의 수호도 투명한 빛을 되찾았다.
다시 투명해진 물의 수호 밖에 펼쳐진 광경은 믿지 못할 크기의 구덩이들과 한 구의 회색빛 시체. 에크만이었다.
“당해버렸군.”
츠즈즈즈!
한계 시간이 되었는지 물의 수호가 약간의 소음을 내며 사라졌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골드 드래곤. 수신의 방패와 화룡의 검을 집어넣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빼들었다. 어차피 더 이상 특수 능력들은 도움이 안 될 거라는 판단에서다.
“크하하앗!”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다. 그래도 약간의 승산은 있다고 보고 인원과 고수를 더 끌어 모아서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 우리가 놈에 대해 알아가는 것 이상으로 놈은 우리를 잘 알아가는 것이다.
놈의 학습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즐겜하세요.”
“……예.”
결국 에인션트급 골드 드래곤을 잡는 일은 포기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없었고, 또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드래곤의 서식지라도 알면 좋겠지만 아직 다른 드래곤의 서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일단 가진 골드부터 현금화 시켰다.
4억이 조금 넘는 돈. 모두 하나의 통장에 모으고 소연이를 찾아갔다. 급한 불부터 끄게 하기 위해서다.
“무슨 일이야?”
“이거……,”
지난번에 만났던 커피숍. 소연이가 도착하자마자 통장을 내밀었다. 통장을 보고 놀라는 소연이. 그러나 다시 안색이 굳어졌다.
“나머지도 구해볼 테니까, 일단 이걸로 급한 불부터 꺼. 그리고 말만 잘하면 조금 기간을 연장 시킬 수 있지 않을까?”
“……미안해. 이 돈, 받을 수 없어.”
소연이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통장을 내게 밀었다.
“어째서?”
“일단 여러 군데로 퍼져있던 빚들을 명훈이가 모두 한 곳으로 몰았어. 그래서 한 번에 갚아야 해.”
“빌어먹을 자식!”
“그리고……. 나 이미 마음을 굳혔어. 부모님과 명훈에게도 말해놨고, 아마 곧 식을 올릴 거야.”
“뭐? 어째서? 조금만 기다려주면 내가…….”
“이것만 갚는다고 끝이 아니야! 아빠 회사는 계속 명훈이 아버지 회사로부터 도움을 받아와서……. 이제 와서 떨어져 나온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 이번 일이 해결된다 해도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날 거야. 난……. 가족들을 버릴 수 없어.”
털썩!
몸에 힘이 쫙 빠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고,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서 일어날 수 없었다.
소연이가 눈물 흘리며 나가는데도.
“그걸 생각 못하다니……. 난 정말 바보인가? 하아, 하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이젠 자그마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끝인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잡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