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석판 (38/43)

#마지막 석판

“더 이상 산맥을 뒤질 필요는 없을 거야. 저번에 그놈이 말하길 이 산맥에서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했거든. 놈이 못 찾은 어딘가에 다른 석판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네, 어디 아픈가?”

“끄응, 아닙니다.”

촌장에게 석판을 보여주고, 또 설명해 주자 그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의견을 내놓았다.

크윽, 그새 코의 마비가 풀렸나? 코가 썩겠다!

“음, 마지막 남은 석판이 Sanct(방어, 성스러운)라고? 나도 이 석판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뜻으로 보아……. 신전 쪽에 있지 않을까 싶네만.”

“신전이라고요? 큭,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이봐, 이봐!”

더는 참기 어려웠기 때문에 의견을 듣자마자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왔다.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리턴 스크롤을 이용해 마을로 돌라왔다.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중심으로 멀리 퍼지는 사람들.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코를 막는 것이었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누구 하수구 들어갔다 왔어?”

움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우리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새…… 냄새가 밴 거야?

“여관으로 뛰어!”

그 후 1시간 뒤, 겨우 몸과 옷에서 나는 냄새를 제거하고 밖에서 모일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어디 있을지 모를 석판을 찾아야 하는 상황.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려 했으나 아쉽게도 둘은 로그아웃을 해야 했다.

“나 혼자 찾아봐? 아냐, 그것보단 화룡의 검부터 충전시켜야겠군.”

드래곤 슬레이어는 5일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별 수 없고, 그나마 화룡의 검은 용암에 충전을 시키면 되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셋이라는 적은 인원으로 위험한 곳엘 들어가려면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할 테지. 10써클 마법이 없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도 충분히 강하긴 하지만 아까도 화룡의 검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면 오우거 로드에게 도망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강력한 무기는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목적지는 화산으로 정해졌다.

“텔레포트!”

하얀 빛무리가 나를 화산으로 인도했다.

삘릴리~!

화산에 도착하자마자 들려온 건 병장기 소리도 아니고, 몬스터의 괴성도 아닌 피리소리였다.

“이곳은 제법 레벨 대가 높아서 저럴 여유는 없을 텐데? 혹시 저번에 봤던 음이라는 녀석인가?”

삐리리리~!

생각해 보니 음은 하프를 연주했던 것 같다. 악기를 바꿨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음은 말을 병행하며 특이한 공격을 하지 저렇게 좋은 소리만 내지 않는다.

“가보자.”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이상함이 느껴지자 화룡의 검을 근처 아무 용암 속에나 내팽개치고 소리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으며 발견한 것은 꽤나 심한 다구리를 당한 듯 여러 가지 무기에 당해 널브러져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삐릭!

제법 빠른 속도로 걷는데도 따라잡지 못하는 걸 보니 무식하게 강한 파티일 걸로 예상됐다. 어떤 자들인지 얼굴이나 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은은하게 퍼지던 피리 소리가 일순간 격해지며 끊겼다.

“강한 적이라도 만난 건가?”

더 이상 피리를 불 여유가 없을 정도의 강한 적을 만난 거라는 생각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돕고, 여유 있다 싶으면 구경을 하기 위해서.

그러나 내가 피리를 한 손에 든 사내를 만났을 때, 이 모든 생각이 다 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됐다.

“뭐냐?”

거대한 다섯 마리의 미노타우르스 시체를 밟고 있는 단 한 명의 사내. 그의 주위에 동료들의 시체 같은 것은 없었고 다만 그의 등에 크로스보우와 창, 도끼 등의 온갖 무기들이 매여 있었다.

지금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까지 소리를 쫓아오면서 본 몬스터들은 모두 이자 혼자서 처치한 것이다.

“당신은 누구지? 당신 같은 강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푸슛-!

미노타우르스의 시체를 뒤적이던 사내는 맨 밑에 깔려있던 미노타우르스의 눈에서 옥색 피리를 뽑아 털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음, 이건 당분간 못쓰겠군. 나? 나는 바람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바람의 전사라고나 할까. 바람의 의지를 깨달은 자로서 방랑을 즐기는 방랑객이지.”

바람의 의지를 깨달은 자! 바람의 그랜드 마스터가 틀림없다!

바람의 자유로움을 따와서 무기에 제약받지 않고 싸우는 건가? 골치 아프군. 지금까지 싸워온 어떤 녀석들보다도 힘들지 모르겠어.

“화룡의 검이라도 있었으면…….”

불은 바람을 먹어치우며 몸집을 불린다. 물론 바람이 너무 강하면 되레 꺼져버릴 수도 있지만 10써클의 글레이셜 게일도 막아낸 화룡의 갑옷이 놈의 바람에 꺼질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놈에게 바람이 전부가 아닌 듯싶지만, 그래도 큰 짐 하나는 덜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찼다.

도전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화룡의 검이 충전된 후 기회를 봐서 공격해야 할까?

“날 불러 세운 이유가 뭐지?”

바람의 그랜드 마스터가 묻자 속으로 성질 급한 놈이라 욕을 해준 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10써클 마법도, 화룡의 검의 특수 능력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저자를 이길 확률은?

“……거의 없겠지. 당신 이름은 뭐지?”

“최배달.”

“케, 켁!”

아주 판타지틱한 복장에, 판타지틱한 장소에서 그가 말한 이름은 참으로 한국적이었다.

최배달이라, 어디서 들어본……?

“아, 바람의 파이터?!”

“정확히는 워리어지만 그런 셈이지. 할 말은 그것뿐인가?”

“아, 아니. 그럼 이제 이곳을 지나서 어디로 갈 거지?”

지금은 승산이 없다는 판단으로 다음 목적지를 알아두려 했다.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의 10써클 마법과 화룡의 검이 충전되면 찾아가려고.

“그야 바람만이 알겠지.”

그는 딱히 행선지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이자를 찾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 걸릴 테고 찾는다 해도 확실히 이기리라는 보장은…….

“제길,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싸워보자!”

“덤비려는 건가? 어째서지?”

“뻔한 걸 왜 물어? 네가 바람의 그랜드 마스터기 때문이지!”

“내게 칼을 겨누었으니……. 죽을 이유는 충분하군.

피슉-

따다당!

최배달의 팍목에 달린 크로스 보우에서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드래곤 슬레이어로 그것들을 쳐내는 사이 가로로 베어오는 항버드. 피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라 간신히 드래곤 슬레이어를 교차해서 막아냈으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크흣!”

“차합!”

반동을 이용해 할버드를 회수한 최배달은 이번엔 할버드의 창 부분을 이용해서 매섭게 찔러왔다.

“블링크!”

도저히 막을 엄두가 나지 않아 블링크를 사용했지만 할버드 끝의 뾰족한 날이 내 심장을 파고드는 듯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재빨리 뒤돌아서자 눈앞을 가득 메우는 날카로운 도끼날. 어느새 할버드를 버리고 도끼로 찍어오는 최배달의 공격이었다.

“크앗!”

최대한 빠르게 손을 놀려 드래곤 슬레이어로 도끼날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힘을 모두 상쇄시킬 순 없었고 두 팔이 튕겨나가며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다.

“큭, 차지 볼트!”

아직 바람의 힘도 제대로 쓰지 않은 것 같은데 죽는 건 너무 억울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사용한 마법. 다행히 최배달은 차지 볼트를 쳐내며 뒤로 물러섰고 난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파이널 헤븐.”

뿜어져오는 화염을 가만히 지켜보던 최배달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모두 땅에 놓더니 권투의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커헉?!”

화염을 가르며 내 심장에 작지 않은 구멍을 뚫었다. 딱 주먹 크기의. 눈앞이 까매지며 죽음을 알렸다.

“큭, 이건 사기야!”

주위 사람들이 보건 말건 난 병원에서 깨어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변변한 공격 한 번, 제대로 된 방어 한 번 못해 보고 죽다니! 속도에서라면 누구에게도 쉽게 뒤지지 않을 거라 자신하고 있던 터인데 말이다.

이건……사기다!

“화룡의 검이 있었더라도 무리야. 저놈을 상대할 수 있는 유저나 NPC가 있을까?”

내가 가진 4개의 구슬에 봉인된 그랜드 마스터와 비교해 봤지만 개개인의 힘이라면 오히려 최배달 쪽이 우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저 중에서 놈을 상대할 만한 자는……. 에크만 정도? 아직 실력을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그라면 속도와 마나량에 치중해서 능력치를 올렸을 테니 쉽게 밀리진 않을 테지.

“후우, 결국 지금의 나로선 무리란 소리군.”

무슨 짓을 해도 안 될 거란 결론이 나오자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물론 방법이야 찾으면 있다. 두 가지 정도.

하나는 내가 가진 그랜드 마스터를 소환해서 싸우게 하는 것인데 그런 아까운 짓은 굳이 할 필요가 없으니 패스고, 다른 하나는 에크만과 싸움을 붙이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봉인의 구술이 에크만 소유가 될 것 같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제 생각해야 할 일은 나머지 석판이 있는 장소. 하지만 이건 가넷, 아슈라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기로 한 일이라 역시 생각을 접었다.

딱히 할 일도 없는 상황. 접속 종료 시간도 다가왔기에 머리 아픈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로그아웃과 함께 휴식을 취했다.

* * *

“형!”

현실로 하루, 게임 시간으로 약 3일이 지난 뒤 약속 장소인 광장에 나와 기다리자 멀리에서 아슈라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슈라, 가넷은?”

“아……. 그게 일이 좀 생겨서요. 저도 지금 형한테 말을 전하려고 접속한 거예요.”

“무슨 말?”

“당분간 누나랑 저 접속 못할 것 같아서요. 기다리지 말라고요.”

“무슨 일 있어?”

“아뇨, 뭐……. 별건 아니에요.”

“그럼 며칠이나?”

“그건 잘 모르겠는데……. 접속하면 연락할게요.”

아슈라의 표정이 별로 심각하지 않은 걸로 보아 큰 문제는 아닌 듯싶었다.

또 어디로 여행을 가거나 일이 좀 바쁜가 보군.

“그래. 그럼 석판은 나 혼자 찾아야 하나?”

“미안해요. 형, 도움도 못 되고…….”

“아냐, 괜찮아. 대신 누나나 빨리 데리고 와.”

“예. 다음에 봐요. 로그아웃.”

뭔가 급한 일이 있는지 아슈라는 곧장 로그아웃을 했고 난 또 혼자 남겨졌다.

“흐음, 혼자서 석판을 찾아야 하나? 뭐, 솔직히 그쪽이 더 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심심한걸.”

아론을 부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기동력을 높이려면 혼자가 편했다. 조금 위험한 곳에 잠입할 때도 그렇고.

“신전이라……. 일반 신전을 모두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던전 같은 신전이라면 거기뿐인가? 근데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싫은데.”

신전이면서 던전인 곳이라면 빛의 신전 밖에 없었다. 과거, 내가 천사를 꼬드겨서 타천사로 만들어버린 그곳.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기억이라 별로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별 수 없다.

“한 번 더 대신관을 족치면 알아서 불겠지, 뭐. 텔레포트!”

혼자라는 게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유리한 점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잠입하기 편하다는 점. 하이딩과 인비지빌리티를 잘 조합해가며 이미 밝혀놓은 지도를 따라 찾아가자 신전 근위기사들과 마주치지도 않고 쉽게 대신관의 방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영광을!”

쿠구구구구궁!

신의 이름으로 된 약속의 언어를 외치자 문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열렸다.

“천사가 있던 방은 폐쇄된 건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대신관의 등 뒤로 열지 못하게 나무판자로 봉해진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 천사가 있던 방이지만 천사가 떠나면서 폐쇄된 듯했다.

“저잔 누구지?”

전과 다르게 방 안에는 대신관 이외의 또 한 사람, 얼굴을 로브로 가린 누군가가 의자에 앉아 내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로브 속에서 눈만을 빛내며.

“좋지 않은 눈빛이군. 조심해야겠어.”

생각 같아서는 다짜고짜 대신관에게 공격을 퍼붓고 싶지만 옆에 있는 누군가가 자꾸 마음에 걸려서 조심, 또 조심했다.

“이번엔 무슨 일이냐!”

다행히 대신관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죽은 다음엔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잘됐군. 일이 쉬워지겠어.

“이번엔 당신을 해하려 온 게 아닙니다. 단지 뭐 하나를 묻고 싶을 뿐입니다.”

“뭐?”

“혹시 Sanct라고 적힌 석판 하나 본 적 없습니까?”

“그거라면…….”

대신관이 아는 듯한 눈치를 보였다.

역시 여기에 있던 건가?

“내가 가지고 있지. 카오스 볼!”

대신관의 의자 옆에 앉아있던 자가 벌떡 일어나며 다짜고짜 내게 마법을 날렸다.

회색의 구체. 그리고 카오스 볼이라는 이름, 그렇다면……!

“회색분자!”

놀랄 새도 없이 바닥을 굴러야 했다.

터져나가는 바닥. 그 여파로 몇 바퀴 더 뒹굴었지만 체력은 많이 깎이지 않았다.

“슈팅스타!”

“큭!”

일어나기도 전에 대신관의 신성 주문이 내게 쇄도해 왔다.

“제길, 대신관을 꼬드긴 건가?”

회색분자와 대신관의 협공. 대신관이 자잘한 공격을 날리는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가진 회색분자가 결정타 격인 혼돈 마법을 쏘아대니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신성력도 답이 아닌 건가?”

대신관의 공격이 그렇게 매섭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신성력과 놈의 혼돈 마법이 부딪히게도 해봤다. 그러나 신성력 역시 혼돈 마법에 흡수. 내가 찾던 답은 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지쳐가는 대신관. 하지만 회색분자는 틈틈이 포션을 마셔가며 마나를 유지했다.

나도…… 슬슬 피하기에 지쳐간다.

“쳇, 이런 쓸모없는 놈!”

퍼억!

대신관의 신성 주문이 나에게 약간의 피해도 주지 못하자 짜증이 난 회색분자는 대신관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괜히 힘만 빼다 죽은 대신관. 적이었지만 참으로 불쌍해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편인데 너무하는군.”

“흥, 도움도 못되는 놈 따위가 죽어서 이 몸의 경험치라도 되는 걸 고마워해야지.”

“그런데 나머지 석판을 네가 가지고 있다고?”

“그래. 큭큭. 만일을 대비해서 하나 빼돌렸었지. 내가 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소리다. 회색분자는 그때 모두 7개의 석판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6개만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 그래도 믿었건만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며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데에 마음이 기울었다.

“다…… 부숴버린다!”

“안 돼! 카오스 애로우!”

“칫!”

석판 하나를 꺼내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리려는 순간, 날아온 카오스 애로우 때문에 행동을 멈춰야 했다.

“카오스 애로우! 카오스 애로우! 카오스…….”

내가 석판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회색분자는 쉴 새 없이 마법을 펼쳐야 했다.

그것도 내가 막을 수 없는, 그리고 마나 소비가 많은 혼돈 마법으로. 파이어 애로우 같은 마법을 사용했다가 내가 버닝 핸즈로 막고 석판을 파괴하면 그로선 난감한 탓이다.

“으윽, 구울의 손길, 샤이닝 핸즈!”

계속해서 혼돈 마법을 뿌려대던 회색분자는 마나가 딸림을 인식했는지 방법을 바꿔서 두 손에 혼돈의 기운을 담았다. 그리고 내게 달려들었다.

“치잇!”

흥분하기는 했으나 마구잡이는 아니고 나름대로 체계가 잡혀 있는 휘두름.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주먹이기 때문에 막지도 못하고 힘들게, 힘들게 피해냈다.

“백 스텝! 매직 애로우!”

속도 면에서는 내가 우위를 점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많은 거리를 벌린 것은 아니었으므로 백스텝을 이용해 뒤로 빠지면서 매직 애로우로 견제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콰앙-!

“크아악!”

견제용으로 날린 매직 애로우가 회색분자의 주먹에 닿자, 놈의 주먹에 뭉쳐 있던 혼돈의 기운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지하도시 블로흐에서 놈이 에크만에게 당했을 때처럼.

“매직 애로우가?”

[흡수하지 못하면 흡수당한다.]

[가장 강하지만 가장 약한 마법이다.]

[마스터한테 이길 수 있지만 1써클짜리에게도 질 수 있다.]

지금까지 들었던 3가지 힌트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의문이 풀렸다.

매직 애로우는 바로 순수한 마나 그 자체. 즉, 혼돈이 흡수할 수 없는 건 순수한 마나라는 소리다.

추측컨대 혼돈 역시도……. 마나의 일부인 것이다.

“빛과 어둠을 섞어도, 나머지 원소들을 똑같이 섞어도 혼돈이 된다는 설정은 여러 번 봤지. 그런 원소들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혼돈도 결국엔 마나의 일부란 말인가? 맞는 말이지. 맞는 말이야. 이렇게 단순한 걸 몰랐다니…….”

“크, 크윽! 석판…….”

주먹은 물론 얼굴, 몸까지 성치 않게 된 회색분자는 끝까지 석판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끝내자!”

푸욱!

바닥에 쓰러진 회색분자의 목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꽂으며 상황을 종료시켰다. 놈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마지막 한 조각의 석판. 이것을 집어 들면서 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말 이 석판이 나에게 필요한 걸까?”

알테어와 에크만을 만나고, 최배달을 만나면서 내가 너무 아이템에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확실히 난 강력한 아이템에 의존하고 있다. 스스로 강해질 생각은 안하고 그저 놀면서 운 좋게 얻어진 아이템에 의존하며 생활을 한 것이다. 과연 여기에 저 석판 마법이 더해질 필요가 있을까?

“없겠지. 난 이 석판이 없어도 충분히 강할 수 있어.”

이미 나를 주인으로 인식해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는 다른 사기성 아이템들은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있는 것까지 억지로 사용하지 않을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마나만 많이 잡아먹는 새로운 힘은 사양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건…… 남겨두기로 하지.”

An과 Ort. 디스펠을 이루는 이 두 개의 석판만 남기고 다른 모든 석판들은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먼저 석판 마법의 주가 되는 In, Uus, Des를 파괴했고 다른 것들도 차근차근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길고 파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4개의 석판을 들고 고대인의 유적으로 향했다.

“노인장!”

하이딩과 인비지빌리티를 써가며 5층에 다다르자 노인의 형상을 한 고대인의 망령이 보였다. 들은 대로 그에게 An과 Ort 석판을 주자 그는 그 석판들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내 손을 잡아끌었다. 평소에 그가 누워있던 돌 위다.

“으음?”

파바밧!

묘한 빛이 손을 휘감더니 그 위에 올려놨던 석판이 사라지고 두 손등에 각각 An과 Ort라는 문신이 새겨졌다 사라졌다.

“이것으로 마법화가 끝났네. 시동어는 디스펠.”

“호오!”

쓸모없는 나머지 2개의 석판은 그냥 돌조각으로 변해버렸다. 새로 얻은 마법 디스펠. 이것은 상당히 유용할 듯하지만 어지간히 위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쓰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의 실험 때만 쓸 것이다.

“음, 리턴!”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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