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다크엘프의 비밀 (37/43)

힐름 7권

● 차 례

#다크엘프의 비밀

#마지막 석판

#계약 결혼

#마왕군 침공

#던전 획득

#신의 뜻이라면

#힐름(Hilm)

#다크엘프의 비밀

내 외침에 카오스 마스터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넷의 팔목을 좀 더 꾸욱 짓밟았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가넷. 또다시 살심이 치밀어 올랐다.

“선더 볼트, 더블!”

“흥! 샤이닝 볼! 다크 볼! 퓨전 매직 카오스 볼이다!”

츠즈즈즈!

내가 즉시 시전할 수 있는 한계인 5써클의 전격마법 선더 볼트 두 발과 놈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카오스 매직이 마주쳤다. 커져가는 회색빛과 사그라져 가는 전격의 노란빛. 흡사 놈의 마법이 선더 볼트를 먹어치우는 것 같다.

“큭, 블링크!”

콰광!

빌어먹게도 두 발의 선더 볼트는 모두 카오스 볼에 흡수되었다. 덕분에 주먹만 한 크기에서 머리통만 하게 변해버린 놈의 마법. 샤이닝 볼과 다크 볼은 각각 2써클의 마법인데도 불구하고 살짝 돌아보니 땅은 6써클의 플레임 스트라이크가 떨어졌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움푹 패어 있었다.

“어떻게 저런……?!”

순간 움찔 했지만 그것도 잠시. 놈의 발밑에 아직 가넷의 팔목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들었다.

마법은 어떨지 몰라도 육탄전이라면야……!

“흥, 가소롭군!”

채쟁!

움직임을 봉하기 위해 던진 표창 두 개를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무력화 시킨 카오스 마스터는 발로 가넷을 차서 내게로 날려 보냈다.

“크윽!”

“이제 너희에겐 볼일이 없다. 나중에 석판 구하면 다시 보자고. 으핫하하하하!”

날아오는 가넷을 받아들 동안 카오스 마스터는 등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기다려! 석판이라면 가지고 있다!”

흠칫!

카오스 마스터의 움직임과 함께 웃음소리가 그치고 놈이 다시 내게로 걸어왔다.

“석판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 이것이면 나와 겨룰 이유가 되겠지?”

품에서 가넷, 아슈라와 함께 찾았던 석판을 꺼내 놈에게 보여줬다. 입가에 미소를 띠우는 카오스 마스터. 이제 싸울 마음이 생기는 듯했다.

일단 가넷을 건물 밖으로 내보내자 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차고 넘치지. 후훗, 나를 도발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카오스 애로우!”

양손에서 뻗어 나온 빛과 어둠이 합쳐지며 회색의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모든 것을 흡수한다는 혼돈 속성의 마법. 그러나 내 손에는 이미 중얼거림으로 이루어낸 6써클의 마나를 담은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츠즈즈즛!

아무리 혼돈이라 해도 1써클 마법 두 개의 혼합으론 한계가 있는지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잡아먹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뒤로 밀려나면서 속도를 늦추는 바람에 카오스 마스터가 몸을 피하긴 했지만 혼돈 속성이 무적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권풍!”

“흡!”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다시피 한 카오스 마스터는 허공에서 내게 왼 주먹을 힘껏 뻗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겨누자 적지 않은 압력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카오스 마스터란 놈의 손에 껴진 것은 격투가 클래스가 사용하는 건틀렛. 놈의 서브 클래스는 최소 70레벨 이상의 격투가인 것이다. 권기를 날리지 않은 걸로 봐서 85레벨은 넘지 않는 것 같지만 다른 클래스들과 달리 70, 80, 90레벨마다 특별한 능력이 생기지 않는 로그 클래스인 나로선 상당히 골치 아픈 것임에 틀림없다.

큭, 육탄전도 쉽지 않겠군. 그렇다면!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내가 택한 해결책은 범위 마법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혼돈 마법을 구성하는 빛, 어둠 속성의 마법 중에는 실드나 광역 마법이 없으니까. 하나 카오스 마스터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신의 인장, 샤이닝 크로스. 악마의 인장, 리버스 크로스. 절대 방어를 보여주마!”

빛의 십자가와 어둠의 역십자가가 교차하는 모습이 잠깐 보였으나 이내 불길이 휩싸여 버렸다. 인페르노의 효과가 끝날 때쯤 표창을 몇 개 던져 확인해 보았다. 하나 들려오는 건 따당! 하는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 뭔가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제길, 드래곤 슬레이어만 괜찮았어도…….

“……큭. 내가 언제부터 아이템에 의존했지?”

자조 섞인 웃음을 짓고 있을 때, 불길이 걷히고 십자간지, 역십자간지 분간이 안 되는 형태의 마법 뒤에서 카오스 마스터가 걸어 나왔다.

“이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겠지?”

“아직은 아니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좌우로 붕붕 휘두른 후 짓이겨 들어갔다. 이에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마주쳐오는 카오스 마스터. 놈의 주먹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권기!

80레벨은 넘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봤자다!”

까앙!

드래곤 슬레이어는 검강과 부딪히고도 흠집 하나 없는 유니크 아이템이다. 그런데 권기 따위에 밀릴까?

드래곤 슬레이어와 맞부딪힌 카오스 마스터는 건틀릿이 잘리는 낭패를 보며 연신 뒤로 밀렸다.

“쳇, 빼앗아야 할 게 하나 더 늘었군. 블링크!”

“팔방 수리검!”

카오스 마스터가 블링크로 자리를 피하는 순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서 완성해낸 팔방 수리검을 펼쳤다.

여덟 방향을 점하며 날아가는 표창들. 적지 않은 힘이 실린 탓에 카오스 마스터는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옆구리에 상처가 나고 말았다. 놈이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휘두르자 또다시 회색의 구체가 내게로 쏘아졌다.

“아무리 강해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왼쪽으로 몸을 날리며 카오스 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다시 카오스 마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놈의 두 주먹에 둘러진 회색빛의 마나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주먹에…… 혼돈 마법을?!”

“후후후, 내가 이런 방법까지 쓰게 하다니 놀라운 검이군. 구울의 손길과 샤이닝 핸즈다. 이것도 뚫을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뚫어봐라!”

카오스 마스터는 오히려 내게 돌진해 왔다. 모든 것을 흡수해버린다는 혼돈의 힘. 드래곤 슬레이어로 베어낼 수 있을까?

“……부딪혀 보는 수밖에.”

“하아압!”

티잉-!

베지 못했다. 하지만 먹힌 것도 아니다. 검과 주먹이 맞닿는 순간, 강한 반발력이 느껴지며 둘 다 뒤로 튕겨나간 것이다. 그러나 땅바닥을 뒹굴 정도의 충격을 입은 나와 달리 몇 걸음 물러선 정도에 불과한 카오스 마스터.

놈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이건 아무래도…… 능력치의 차이다.

“무식하게 힘으로만 부딪히면 이길 수 없겠군. 쳇.”

“아무래도 내가 우위를 점하는 것 같군. 이제 끝을 내주마!”

파팟!

놈이 쓰러져있는 나를 향해 달려오려는 순간, 건물의 맨 앞에서 커다란 빛의 기둥이 솟더니 무언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q#$^&$%^*%*$%^!"

퍼엉!

“크아악!”

자신을 향해 쏘아진 무언가를 두 손으로 막아낸 카오스 마스터는 큰 폭발과 함께 두 팔이 넝마가 되어버렸다.

혼돈 마법이 깨어졌다는 소리!

문득 내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말이 있었다.

[혼돈 마법은 모든 것을 흡수하지만, 포용할 수 없는 것을 빨아들이려 하다간 되레 빨려 들어가고 만다!]

“빨려 들어간 후에는 폭발……인가?”

“어디서 감히 남의 먹잇감에 손을 대는 거냐!”

“에…… 크만? 알테어?”

빛 속에서 걸어 나온 자들은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내가 마스터 레벨에 오른 뒤, 정당하게 겨뤄서 마법사 클래스 1위의 자리를 빼앗겠다던 에크만과 알테어인 것이다.

한동안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더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일단…… 죽어라!”

“신의 인장, 샤이닝 크로스! 악마의 인장, 리버스 크로스!”

두 팔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카오스 마스터는 절대 방어라 자신하는 마법을 펼쳤다. 그러나…….

“커허억!”

에크만이 쏘아낸 사람 머리통만한 구체가 보호막에 닿는 순간, 놈은 실 끊어진 연처럼 구슬픈 비명소리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저 둘은 혼돈 마법을 깰 방법을 알고 있다?!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부르르!

바닥에 몇 번 튕기며 날아간 카오스 마스터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축 늘어졌다. 그리고 이내 회색으로 물드는 몸.

서브 클래스로 격투가를 택하면서 HP에 상당한 어드밴티지를 받았을 것임에도 단 두 번의 공격에 아웃되다니, 무시무시한 공격력이다.

“여어, 콜로니스트! 잘 있었어?”

에크만과 알테어는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오른손을 흔들어 보이며 내게로 걸어왔다.

공격할 의사는 없어 보이니 다행이지만……. 여기엔 어쩐 일로?

“그럭저럭요. 한데 어떻게 여기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여긴 우리 아지트거든.”

“아지트?”

에크만은 이곳 지리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의자 형상을 한 돌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음, 말해도 상관없겠지. 이곳, 지하도시 블로흐는 지상이 아닌 또 다른 대륙으로 이어지는 통로거든.”

“다른 대륙?!”

“그래.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지상에 있는 놈들과는 상대도 안 되는 놈들로 가득 찬 곳이지. 지상에서 그놈들을 상대할 만한 놈들이 있다면 타이탄이나 드래곤 정도? 아무튼 아무리 약해도 오우거 이상급들이니까 알아서 상상해.”

타이탄 급. 그 말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나보고 타이탄을 상대하라고 한다면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드래곤 슬레이어와 화룡의 검이 온전한 상태일 경우에.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필패다. 아마 마스터 레벨의 유저 다섯은 모여야 상대할 만할 것이다. 그런 곳이 존재했다니,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레벨 올리기엔 좋던데, 관심 있어? 그렇다면 데려다 줄 수도 있는데.”

“아, 아뇨.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할 일? 아, 혹시 저 회색분자를 말하는 거야?”

“예. 저 카오스 마스터와 해결할 일이…….”

“거창하게 카오스 마스터는 무슨! 저놈 아이디는 회색분자인데. 그런데 오래 걸릴 필요가 뭐 있어? 그냥 마법 한두 방이면 끝나잖아?”

처음 알았다. 놈의 아이디가 회색분자라는 것을. 그렇다면 에크만은 저자를 알고 있다는 소리?

“저자를 아십니까?”

“알지. 전에 빛과 어둠 속성을 융합시켜서 깐죽대다가 우리한테 몇 번 쥐어 터졌거든.”

“그, 그럼 혼돈 속성의 마법을 깰 수 있는 방법을 아시는 겁니까?”

“혼돈? 아 그 카오스 매직인가 뭔가 하는 거? 당연히 알……. 가만, 그럼 넌 모르는 거야?”

“예. 그 방법을 저한테도 가르쳐주실 수 있습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정말 몰라?”

“예.”

“진짜로?”

“예!”

“푸핫! 우리도 아는 걸 네가 모른다고? 정말로?”

“예. 그러니 좀 가르쳐주십시오.”

일단 아쉬운 건 이쪽이니 저 자세를 취했다.

“싫어! 안 가르쳐 줄 테다. 히히히히!”

에크만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부탁을 거절했다.

음, 이럴 땐…….

“그럼 할 수 없군요. 제가 알아보는 수밖에.”

“응? 안 매달리는 거야? 나, 방법을 알고 있다니까?”

“안 가르쳐주신다면서요?”

“그거야……. 으으, 에잇! 모르겠다. 맘대로 해! 어차피 우린 지금부터 지상으로 올라가서 각 클래스 최강자라는 놈들을 깨부술 거니까. 너한텐 제일 마지막에 올 생각이니, 상관없겠지.”

역효과다. 일부러 재미없게 만들어서 역으로 가르쳐주겠다고 매달리게 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조금 틀어져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꼬투리 잡을 것이 생겼군.

“그때까지도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가 수없이 레벨다운 되어 버리면……. 듀얼이 재미없어질 텐데요?”

“그건……. 쳇, 이 치사한 놈! 좋아. 그러면 답 대신 힌트를 주지. 혼돈 마법은 가장 강한 마법인 동시에 가장 약한 마법이다. 그래서 놈 또한 가장 강하면서도 약한 게 되지. 마스터 클래스에게도 이길 수 있지만 레벨 1짜리한테도 질 수 있는 게 놈이야. 아, 힌트를 너무 많이 줬나? 나머진 알아서 추리해봐. 너라면 알고도 남을 테니까. 그럼 우린 가봐야겠다. 알테어! 그놈이 뭐 먹을 것이라도 안 떨궜냐?”

“달랑 석판 한 조각 떨궜다. 쳇, 먹을 것이나 떨굴 것이지.”

“석판!”

“응? 너도 저거 모으냐?”

에크만이 뭔가 안다는 듯이, 그러나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며 턱짓으로 석판을 가리켰다.

알고 있으면서도 탐내지 않는다?

“예. 한데 저게 뭔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알지. 몇 개 모아서 문장으로 조합하면 마법 나가고……. 뭐, 그런 거 아냐?”

“그런데 탐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탐낼 게 뭐 있어. 저런 거 모아봐야 쓰려면 머리만 아프고, 또 저거 모을 시간에 사냥을 하면 레벨을 몇이나 올리는데. 저런 것에 힘을 빌려서 아무리 강한 마법을 써봤자, 레벨로 커버하면 장땡이야.”

참으로 고전틱한 방법이다. 모든 것을 레벨로 커버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일본어를 몰라서 불 속성 마법으로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보스급 몬스터를 검으로 패서, 그것도 데미지 1씩 입히면서 잡아 죽였다고 하긴 하더군.

“그럼, 두 분은 지금 레벨이……?”

“레벨? 이 정도였던가?”

에크만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폈다.

“50? 그게 아니라 총 레벨이……?”

“아니. 파이브 클래스 마스터! 여섯 번째 클래스 레벨은 83이던가?”

“파이브 클래스 마스터!”

그의 레벨은 경악, 그 자체였다. 한 가지 클래스를 마스터하고 다음 클래스를 올리면 필요 경험치가 1.5배로 늘어나고, 두 가지 클래스를 마스터하고 다음 클래스를 올리려면 1.8배, 그 다음은 2배! 이런 식으로 갈수록 필요한 경험치가 막대해지는데 벌써 다섯 가지 클래스를 마스터 하다니?!

내가 아무리 레벨 업에 치중하지 않고 생활했다지만 이 정도의 격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에헴, 우리가 좀 대단하긴 하지.”

에크만은 으쓱거리며 턱을 매만졌다.

꼬르르륵!

“험험, 요 며칠 식사를 제대로 못 했더니……. 알테어, 그만 가자!”

배에서 흘러나온 꼬르륵 소리에 무안해진 에크만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알테어를 재촉했다. 그리고 품에서 몇 개의 석판을 꺼냈다.

“어차피 우리한텐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 맘대로 해라. 하지만 네가 아이템에 의존하는 모습은 안 어울린다는 것만 알아둬. 음, 차라리 우리가 강화시켜 줄까? 그딴 아이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낄 정도로만. 우리가 있었던 사냥터에서 네가 버틸 수만 있다면 쓰리 클래스 마스터 정도는 일도 아닐 텐데. 어때?”

꽤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내가 강해져서 자신들과 긴장감 넘치는 대결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일 테니 계산적인 생각은 안 해도 될 테고…….

“……괜찮습니다.”

이 정도의 힌트를 얻어놓고 포기한다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가넷을 내버려두고 혼자 사냥에만 열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 그럼 말고.”

에크만은 알테어가 내놓은 것과 합쳐서 모두 7개의 석판을 내게 넘겼다.

이로써 내가 가진 석판의 수는 모두 9개. 나머지를 회색분자가 모두 가지고 있다 생각해도 9대8로 내가 우세한 상황이지만 마법을 발현시키는 4개의 석판 중 내가 가진 것은 An이라 적힌 하나뿐이라 딱히 우세하다고 말하기도 뭐했다.

“그럼 수고하고, 다음에 보자. 아, 그리고 안 되겠다 생각되면 언제든 말만 해. 사냥터로 이동하는 법을 가르쳐줄 테니. 우린 그럼 지상에 있는 놈들 깨부수러 가야겠다. 매스 텔레포트!”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에크만과 알테어는 주저 없이 지상으로 이동했다.

아차, 가넷!

“괜찮아?”

“으응……. 그럭저럭.”

회색분자에게 짓밟힌 팔목이 아직도 아픈지 손목을 주무르는 가넷. 그러나 다행히도 특별한 외상은 없는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팔목에 포션을 붓고 있을 때, 폭음을 듣고 달려온 아슈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 무슨 일이에요?”

“별 일 아냐. 이제 밖으로 나가자. 여기엔 더 이상 볼일이 없을 것 같군.”

어리둥절해하는 아슈라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가넷을 데리고 일단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잠시 쉬면서 상황 설명을 했다.

“이렇게 됐으니 아마도 카오스 마스터는 나와 에크만과 알테어를 노릴 거야. 자신의 석판이 하나 줄었다는 것은 에크만과 알테어도 석판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니까. 물론 지금은 그 석판들 모두를 내가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면 놈이 누굴 먼저 공격할까?”

“우리……가 아닐까요? 형 말대로라면 그 둘은 파이브 클래스 마스터인데 아무리 기습을 한다 해도 다른 한 명에게 죽을 게 뻔하잖아요. 그러니 상대적으로 약한 우릴 먼저 노릴 것 같은데요.”

“내 생각도 그래. 아무리 혼돈 마법이 강하다 해도 에크만과 알테어 둘을 동시에 상대하긴 무리가 있어. 더군다나 그들은 혼돈 마법을 깨부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 그러니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를 노리거나 나머지 석판을 모으는데 주력하겠지. 아직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이렇게까지 기를 쓰고 모으는 석판이니 위력이 대단할 테니까. 그 둘에게 덤비는 건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외의 석판을 다 모은 후일 거야.”

가넷과 아슈라도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이제 결정할 것은 딱 한 가지. 앞으로의 행로다.

“자, 놈이 우릴 노릴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아는 상태에서 앞으로의 행로를 정해보자. 내가 생각하기엔 우리가 끌어들이던가, 아니면 놈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이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너희 생각은 어때?”

“끌어들인다고 하면?”

“소문을 퍼뜨리는 거지. 나머지 석판을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놈이 BBS를 볼지 안 볼지 알 수 없지만 내 아이디를 넣어 올리면 제법 소문이 퍼져갈 것도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놈이 우리에게 접근해 올 때까지 우리도 나름대로 나머지 석판의 행방을 쫓으며 기다려야지.”

각자 생각의 시간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놈을 끌어들이는 건 다소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째서?”

“그렇게 대놓고 소문을 낸다면 의심할 게 뻔하잖아요? 더구나 에크만과 알테어가 형을 도와줬다면서요? 이번에도 도와줄 거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혼돈 마법을 깨는 방법을 가르쳐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래저래 안 나타날 것 같아요. 그냥 우리 나름대로 석판을 찾다가 마주치면 깨부수죠.”

“나도 아슈라의 의견에 찬성이야. 에크만과 알테어도 있고, 소문을 퍼뜨려도 쉽게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아.”

들어보니 그럴 듯도 했다. 너무 자신 있게 소문을 내고 부르면 경계심만 더 커지겠지.

그럼 기다려야 하나? 좋아, 놈이 접근하기 전까지 혼돈 마법을 깰 방법을 찾고 만다!

“응? 저거 돈황 아니야”

서둘러 혼돈 마법의 약점을 찾아내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가넷이 펍 밖으로 걸어가는 돈황의 모습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두리번거리는 돈황. 이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펍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여어, 엘프들이랑 잘 놀았……?”

찌릿!

나를 보는 돈황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서글서글하던 눈매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독기를 품은 듯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넷을 보는 눈빛은 나완 또 달랐다. 그 역시 전에 비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이었다.

“엘프 마을에선 네가 없어진 것도 몰랐지 뭐야. 헤헷, 미안.”

“없어진 것도…… 몰랐다고요?”

“으응. 나중에 마을에 와서야 알았는데 엘프들과 딱히 원수 진 것도 아니고, 무사히 잘 빠져 나올 거라고 생각해서 우리끼리 잠시 움직였어.”

“그래요…….”

돈황은 다시 눈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무겁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

이 녀석……. 분위기가 달라졌다?

“뭐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다시 고개를 돌린 돈황은 가넷에게 그간의 사정과 앞으로의 행로에 대한 말들을 조용히 들었다. 끝까지 바뀐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뭐, 큰 문제는 없겠지.

“이제 문제는 나머지 석판이란 게 있긴 하느냐와 있다면 어디에 있느냐로군. 이거야 원, 점쟁이도 아니고…….”

“음, 그로티우스 산맥은 어때요? 아직 위험하긴 하지만 아직 전부 다 개척되지 않은 곳이고, 석판이 있을 확률이 꽤 될 것 같은데요.”

아슈라의 의견도 충분히 일리 있었다. 석판이 주로 잊혀진 곳에 숨겨져 있는 만큼 미개척지인 그로티우스 산맥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확률도 적지 않은 것이다. 미개척지인 이유가 막강한 몬스터 때문인 만큼 이 파티로 갔을 경우 전멸 가능성도 적지 않겠지만.

“위험할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 레벨이야 형이 다 올려준 건데 조금 떨어진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하진 않아요. 정 미안하면 다시 올려주면 되죠. 안 그래, 누나?”

“아슈라 말이 맞아. 그동안 도움만 받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갚아야지. 또 짐만 될지 모르지만, 이젠 상급 정령도 있으니 작게나마 도움은 될 거라고 생각해.”

“…….”

돈황을 제외한 둘은 두 팔 걷어붙이며 도울 뜻을 밝혔다.

레벨이 안 돼서인지 나에게 무슨 악감정이 생겼는지 침묵하는 돈황. 솔직히 그로티우스 산맥이라면 짐만 될 테니 안 따라와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굳이 따라온다면 막을 수야 없지. 안전은 책임 못 지지만.

“쩝!”

“전……. 빠지겠습니다.”

“응?”

“그로티우스 산맥이라면 같이 가봐야 짐만 될 거고……. 로그아웃해서 할 일도 있고 말이죠. 그럼 이만.”

음흉한, 그리고 독기가 서린 듯한 눈으로 날 슬쩍 쳐다본 돈황은 이 일에서 빠지겠다는 의사표시를 하고 로그아웃 해버렸다.

확실히……. 분위기가 바뀌었어. 한데 뭣 때문에?

“뭐, 별 일 없겠지. 다들 준비하고 그로티우스 산맥으로 이동하자.”

지도야 이미 있으니 몇몇 포션류만 준비하면 되었다.

넓디넓은 그로티우스 산맥 중에서도 우리가 목표로 삼은 건 아직 개척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산맥의 북쪽. 산맥의 최남단인 오크 요새부터 3분지 1의 지점까지는 마인 이벤트를 하면서 이동해 봤지만 그 이상은 나도 가보지 않은 곳들이라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마인의 피부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만티코어들에게 죽어 나자빠졌을 것이다.

“큰 소리 내지 않도록 조심해. 주변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없지만 하나 둘씩 어슬렁대는 놈들은 있을 지도 모르니까.”

“으응.”

“예, 옙!”

오는동안 살벌하기 짝이 없는 몬스터들 간의 싸움을 보고 난 뒤라 아슈라와 가넷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만티코어와 하피 떼의 서식지를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저런 상태라면 위험한데…….

“뚜렷한 목표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단순 탐사 목적이 아닌데 아직 개척되지 않은 산맥의 곳곳을 뒤지고 다녀야 하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넓이도 넓이지만 어느 던전보다도 높은 난이도의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니 심력만 잔뜩 소진되고 얻는 것은 별로 없는 것이다.

꿩 대신 닭으로 몬스터를 사냥해서 전리품을 얻으려 해도 큰 소음에 만티코어 같은 놈들이 나타날까봐 그러지도 못했다.

바스락!

“가넷!”

“알았어. 소환. 선더!”

치지지직!

가넷이 가슴에 모았다 편 손에서 퍼져 나온 빛은 점점 크기를 더해 가다가 한 마리의 노란 새의 형상을 이루었다.

번개의 상급 정령 선더.

녀석은 소환되자마자 자신의 할 일을 알기라도 하는 양 조금 전 소리가 난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치지직 소리와 함께 손님을 모시고 왔다.

“크워어!”

일반 오우거보다는 작지만 근육으로 똘똘 뭉친 튼실한 몸. 멋들어진 문양이 새겨진 철제 도끼. 그리고 붉은색 피부.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건 다름 아닌 오우거 로드였다.

“제기랄, 튀어!”

오우거 로드의 뒤를 따르는 일반 오우거의 수는 셋. 생각보단 적었지만 오우거 로드란 놈 자체가 내가 싸워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놈이라 도주를 택했다.

“소환, 선더! 저들을 막아!”

일반 오우거를 막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넷이 무리해서 선더를 하나 더 소환하자 일반 오우거들은 뿌리치지 못하고 발이 묶여버렸으니까. 덕분에 과도한 마나를 사용한 가넷이 힘들어하는 모습이었지만 오우거 로드의 이동 속도가 잠시 늦췄으니 득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셋을 세면 점프해. 하나, 둘, 셋!”

콰앙!

로그를 택하면서 속도 중심형이 된 나조차도 오우거 로드가 쫓아오면 따돌리기 어려운데 가넷이나 아슈라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도망치긴 어려웠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토황추!

전체 마나의 10분의 1이나 잡아먹는 괴물 같은 아이템이었지만 범위 내의 모든 생명체를 넘어뜨리고 또 몬스터의 경우 일정시간 타깃을 잡을 수 없다는 이점이 있었다.

언제 써보나 했는데 이렇게도 써먹는군.

“크우?”

“서둘러!”

토황추의 범위 내에 들어서 한번 넘어졌다 일어선 오우거 로드는 타깃을 잡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선더, 저놈을 공격해!”

“기다려!”

치지직!

두 마리의 전격의 새는 날카로운 부리를 앞세워 오우거 로드의 등을 공격했다.

제기랄, 목을 꿰뚫었으면 몰라도 등이라면…….

“크르워!!!”

선더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오우거 로드의 등에 제법 큰 상처가 생겼지만 심장까지 파고들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화만 돋운 셈이군.

“이틈에 도망가자. 저놈 하나라면 몰라도 주위의 오우거가 몰려오면 골치 아파져.”

두 마리의 선더가 시간을 벌긴 하겠지만 그리 긴 시간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가넷의 마나 부족도 한 원인이지만 모든 보스급 몬스터들은 정령, 혹은 마나에 대항하는 능력이 있고, 또 그럴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일반 오우거들은 특별한 형체가 없는 정령에서 큰 타격을 주지 못하지만 보스급 몬스터들은 일격에도 정령을 강제 역소환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런 능력이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보스급 몬스터들의 무기에는 미스릴 성분이 적지 않게 들어있다.

“크워어엉!”

“큭, 뛰어!”

선더는 생각보다 빨리 강제 역소환 당했다. 아직 한 마리도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리해가며 두 마리를 조종하려니 선더들끼리의 연계가 매끄럽지 못하다 못해 뻣뻣하기까지 한 탓이다.

쭈뼛거리던 선더는 오우거 로드의 도끼에 의해 날개가 달아나고, 목이 달아나며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보고 정령계로 강제 귀환 당했다.

“월 오브 스톤!”

콰광!

비교적 느린 둘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벌릴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 돌벽을 세웠다. 그러나 전혀 달려드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몸통 박치기로 벽을 파괴하는 오우거 로드. 돌의 파편이 놈의 시야를 가릴 때 나 역시 놈에게 몸을 날렸다.

“차앗!”

죽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놈을 죽이자면 나도 상당한 모험을 해야 했고 때문에 목이나 심장이 아닌 다리를 베며 놈의 몸을 축으로 빙글 돌아갔다.

“크엉!”

힘이 부족해 놈의 다리에 깊은 상처까진 못 냈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특유의 예리함으로 작지 않은 상처를 내자 놈이 발광하며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둘렀다.

한 번 한 번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대기가 찢어지며 바람이 서글피 운다. 자칫 빗맞기라도 하면 몸이 두 동강날 게 뻔한 상황. 그러나 다행히 놈의 다리 밑은 안전했다.

“크웡엉!”

쿵! 쿵! 쿵!

놈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발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자 놈은 약이 올랐는지 다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한참이나 발을 굴러댔다.

“시간은 벌었는데……. 이번엔 피하기가 문제군.”

또 다른 몬스터에게 쫓기지만 않았다면 가넷과 아슈라는 안전한 곳까지 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도 몸을 피해야하는데 이놈의 오우거 로드는 포기할 줄을 모르니…….

무식하게 휘둘러대는 도끼를 피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순간의 판단에 목숨을 맡겨야 하니 긴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설프게 블링크를 쓰다간 등에 도끼 꽂혀 죽을 수도 있고…….

“거대한 낙석의 위용, 스톤엣지!”

“크륵!”

쿠웅!

우리들의, 정확히는 오우거 로드의 머리 위로 커다란 바윗덩이가 생성되어 떨어졌다.

한참 성질 부리느라 반응이 늦은 오우거 로드. 놈이 피하지 못하고 두 손으로 바위를 받아내는 동안 난 재빨리 몸을 날렸다.

“이건 내가 가져간다.”

몬스터의 다리 사이를 폴짝거리며 도망 다니는 수고까지 했는데 그냥 갈수야 없었다. 놈이 바위를 받쳐 드느라 내팽개쳐진 도끼를 신속히 품에 넣고 전력을 다해 가넷 등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었다.

“크우우우!”

오우거 로드도 제법 지능이 있는 터라 마냥 바위를 들고만 있지 않았다. 잠시 버티는가 싶더니 바로 땅에 떨어뜨려 놓았고 바위를 우회해서 나를 쫓기 시작했다.

“헹, 잡힐 성 싶으냐?”

속도에서라면, 더구나 이렇게 나무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라면 오우거 로드에게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오우거 로드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몸으로 들이받아 파괴하며 나오고 있음에야!

“저런 무식한 놈. 응?”

지치지도 않고 나무들을 쓰러뜨리며 돌진해 오는 오우거 로드를 보며 혀를 차다가 전방에 있는 나무 위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개의치 않으려 했으나 조금 더 달려가니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들.

“큭, 물의 수호!”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공격들에 눈을 질끈 감으며 수신의 방패를 들었다.

나를 중심으로 퍼진 반구형 보호막. 또다시 총 마나량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마나가 빠져나갔지만 그것은 두 번이나 내 목숨을 구했다.

쿠웅!

“크르르륵!”

화살과 마법들에 이어 뒤에서 쫓아오던 오우거 로드의 몸통 박치기까지 막아낸 것이다. 큰 충격에 잠시 흔들리기는 했지만 절대방어답게 꿋꿋이 형태를 유지하는 보호막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엘프들인가?”

이런 상황에서 엘프들의 출현은 반길 만한 것이었다. 나야 보호막 안에서 안전하겠지만 오우거 로드는 그렇지 못할 것이므로. 그리고 오우거 로드가 처리되면 이 보호막의 순수한 물의 힘을 알아본 엘프 쪽 장로가 날 대접하겠지?

“큭, 저자에겐 닿지 말고 몬스터만 처리하라!”

리더격인 엘프 하나가 숲의 어둠 속에서 외쳤다.

“헉! 다크…… 엘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다크 엘프였다. 일반 엘프들과는 다르게 활과 지팡이를 집어넣고 검을 빼드는 다크 엘프들. 그들이 매섭게 달려들자 오우거 로드도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크워어!”

부웅! 부웅!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던 오우거 로드는 자신에게 무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근처에 있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 휘둘렀다.

그게 꽤나 위협적이었는지 놈을 동그랗게 포위하지만 하는 다크 엘프들. 그 모습에 다급해졌는지 오우거 로드는 참지 못하고 휘두르던 나무를 자신의 등 뒤에 있던 다크 엘프에게 던지고 도망가려 했다.

“죽여라.”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검기, 검강들.

다구리엔 장사 없다는 말을 새삼 확인시켜주며 오우거 로드는 명을 달리했다.

아차, 아슈라와 가넷은 어디 있는 거지?

“이곳은 이미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인 곳.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인간.”

어둠 속에서 눈만 빛내고 있는 다크 엘프들의 리더는 뭔가 나를 꺼려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다른 다크 엘프들도 결코 내 주위로 오려하지 않았다. 인상만 잔뜩 찌푸린 채.

“이곳에 온 것은 우연입니다. 혹시…… 내 동료들을 보지 못했습니까?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인데.”

“큭! 역시 그 빌어먹을 것들과 한패였나?”

둘이 나 없는 사이 무슨 짓을 했기에?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결코 호의적인 말투가 아닌데……. 그럼 혹시?

“그들을 어떻게 했지?”

“아직 어떻게 하진 않았다. 그 빌어먹을 정령술사 때문에.”

가넷을 말함이 틀림없었다.

“날 그들에게 데려다주겠나?”

“……좋다. 단, 그곳에서 수계 마법을 쓰면 너흴 죽이겠다. 이건 네 동료한테도 확실히 해둬. 또 한 번 물의 정령을 부르면 죽인다고.”

물? 아무리 다크 엘프가 어둠 쪽에 관련되어 있고 물이 정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도 아쉬운 건 내 쪽이니 하라면 해야지.

“좋다. 캔슬!”

그들의 접근을 허용하고 나 역시 이동하기 위해 물의 수호를 풀었다. 그러자 코끝으로 밀려들어오는 역한 냄새. 숨쉬기 괴로울 정도로 역한 냄새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것을 느끼고 독이 아닌가 의심해봤으나 체력이 깎이지 않는 것이 중독된 건 아닌 듯싶었다.

“뭐야, 이 냄새는?”

“흥!”

다크 엘프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앞장서서 숲속으로 걸어 나갔다. 인간의 감각 중에 가장 쉽게 마비되는 것이 후각이라고 했던가? 참기 힘들 정도로 역하던 냄새도 시간이 지나자 차츰 무디게 느껴졌고 결국 별다른 냄새를 맡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넷! 아슈라!”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물의 정령 도루루 두 마리를 소환해 놓고 주위를 경계하는 가넷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발견하고 조심히 다가오는 가넷과 아슈라.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와 함께 온 다크 엘프들의 표정이 굳어갔고 몇몇은 활로 손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넷, 정령들을 역소환시켜!”

“뭐?”

“이유는 묻지 말고, 어서!”

“음……. 역소환.”

가넷이 마지못해 도루루들을 역소환시키자 그제야 다크 엘프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왜 이렇게 물을 싫어하는 거야? 가만, 혹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또 한 번 수계 주문을 사용하거나 물의 정령을 소환하면 너희 모두 죽는다. 따라와라.”

왜 그렇게 물을 싫어하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타이밍을 놓쳐서 말을 못 꺼내보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 속. 나무를 집으로 이용하는 엘프들이니 가장 큰 집이라 할 수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촌장님.”

“수고했네. 나봐.”

“큭!”

나무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정확히는 촌장에게 다가가는 순간 이미 마비되어 버렸다고 생각한 코 속으로 전보다 더 역한 냄새가 파고 들어왔다.

큭,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군.

“허허, 익숙하지 못한 자들에겐 참기 힘들겠지.”

후다닥!

촌장이 입을 여는 순간 하수구 썩은 물 냄새가 더해졌고 우리 셋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전에 만난 엘프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음, 다른 엘프들을 만난 적이 있는가?”

아슈라가 두 손가락으로 코를 잡으며 중얼거리자 촌장이 반응했다.

“예. 하지만 이곳처럼 냄새는…….”

“크흠!”

아슈라가 말을 하면서 코를 파고드는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자 주위에서 우릴 감시하던 몇몇의 다크엘프들이 언짢음을 표시했다.

“놔두게. 이곳에 처음 오는 자들이니 그럴 수도 있지. 그건 내가 설명해주지. 우린 그들 엘프와 조금 다른 생각을 지녔다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우리를 다크 엘프라고 부르지.”

역시 이들은 다크 엘프였다. 흔히 어둠의 기운을 받은 엘프. 혹은 마족과 계약한 엘프. 아니면 착해 빠지기만 한 일반 엘프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내는 숲의 그림자. 등으로 묘사되는 다크 엘프 말이다.

그런데…… 그거랑 냄새는 무슨 상관인 거야?

“다른 생각?”

“그렇네. 일반 엘프들은 자연 그대로, 자연과 하나 되어 산다고 떠들면서 정작 자연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빗물이 아닌 무의 정령이나 계곡의 물로 일정한 기간마다 몸을 씻지. 물론 계곡의 물이나 물의 정령도 자연의 일부분임에는 틀림없으나 우린 그게 못마땅하네. 자연과 동화되어 살면서 먼지와 티끌도 우리의 일부분이 되었거늘 어째서 그것들을 따로 씻어내 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활을 주로 사용하는 것도 그러네. 최대한 주위 동식물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산다고 하면서 매년 활과 화살을 만들려고 많은 양의 나무를 희생시키지 않나? 우린 다르네. 활과 화살의 사용은 최소한으로 하고 자연에 조금의 인위를 가했지만 드워프들의 철검을 사서 사용하지. 지속적인 나무의 희생도 막고, 얼마나 좋은가?”

“그러니까……. 다크 엘프가 ‘다크’ 엘프인 이유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안 씻어서 축적된 ‘때’ 때문에 검게 보여서란 소리입니까?”

“바로 맞췄네.”

휘청!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황당무계한 이유를 듣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정말 이 게임 만든 작자의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다니까.

“가만, 그럼 혹시 조금 전에 오우거 로드가 괴로워하며 도망치려 한 이유가…… 위기감 때문이 아니라 이 냄새 때문에?”

“호오, 우리도 겪어보고 나서야 안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다니 응용력이 제법인 친구로군.”

“하아……!”

어이가 없어 더 말도 안 나왔다.

다크 엘프들의 피부가 까만 것이 오랜 세월 축적된 때 때문이라니! 그리고 몸에서 풍기는 악취에 상대가 괴로워할 때 빈틈을 노리는 검술이라니……! 이건 정말 누구한테 말해도 안 믿어줄 황당의 극치를 달리는 일이었다.

“이제 본론을 말하지. 지금 이곳을 나가면 다시 여길 찾지 말게. 우린 이곳에 인간의 발길이 닿는 걸 원치 않아.”

뭔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내 머리는 상하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악취로 가득한 곳엔 다시 오고 싶지 않으니까.

그때였다.

콰과광!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온 건.

“뭐지?”

“……또 온 건가.”

“또 오다뇨?”

촌장은 뭔가 알고 있다는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발밑을 뒤적거렸다.

“여기 있군. 이깟 물건이 무엇이라고…….”

“저건?!”

촌장이 꺼낸 것은 Wis라고 적힌 석판이었다.

그렇다면 밖에서 난동 피우고 있는 놈은?

“회색분자!”

밖으로 뛰쳐나가니 과연 회색분자가 마을에 불을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차마 수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다크 엘프들은 대부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고, 몇몇의 다크 엘프들만 땅의 정령들을 불러내서 불을 꺼보려 노력했다.

혼란한 틈을 타서 별다른 제지 없이 다가오는 회색분자. 놈을 상대하려 뛰쳐나가려는 순간 촌장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큭!”

촌장의 냄새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별 수 없이 뒤로 물러서는 사이 촌장은 석판을 높이 치켜들고 회색분자에게 외쳤다.

“멈춰라! 더 가까이 오면 네가 원하는 이것을 부숴버리겠다!”

“훗, 넌 그걸 못 부숴. 최소 석판 5개 이상을 가져야만 석판을 부술 자격이 생기거든.”

석판에 대해 더 많이 알 고 있는 회색분자는 촌장에게 이죽거리며 계속 거리를 좁혀왔다.

“그럼 내가 하면 어떨까?”

탁!

촌장의 손에 들린 석판을 빼앗아들며 회색분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넌……?”

날 알아본 회색분자는 잠시 눈에 이채를 띠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것까지 합쳐서 내가 가진 석판의 수는 모두 10개. 내가 이것들을 전부 부숴버리면 어떻게 될까?”

“……!”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던 회색분자는 내가 석판을 10개나 가지고 이t다는 말에 흠칫 몸을 떨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석판을 10개나 가지고 있다고?”

“사실 내가 가진 석판의 수는 겨우 2개였지. 그런데 에크만과 알테어가 가진 석판들을 모두 내게 넘기더군. 그들은 아이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능력만을 믿는 타입이니까.”

“큭, 그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네가 그걸 부술 수 있을까? 너도 그걸 힘들여 찾았는데 말이지.”

회색분자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이 석판에 목을 맬 필요가 있을까?

답은 노다

사실 이 석판이 없어도 난 충분히 사기성 아이템들을 많이 모았고 이것들만 잘 활용하면 혼자서 일개 길드와도 전쟁을 벌일 수 있을, 아니 전쟁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또 난 아직까지 이 석판의 힘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뭔가 착각을 하는군.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이도류만 해도 석판 전부를 줘도 안 바꿀 최강의 아이템이다. 이것 말고도 사기성 아이템이라 불릴 것들을 몇 개 가지고 있지. 그런데 내가 굳이 이런 것에 목을 맬 필요가 있을까? 웃기는군.”

서걱!

내 입장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아깝지만 손에 들고 있던 석판을 드래곤 슬레이어로 산산조각 내버렸다.

경악한 표정을 짓는 회색분자. 그의 놀람은 내가 부서진 석판을 발로 밟아 가루로 만드는 동안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하나 쉽게 달려들진 못했다.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나?”

“……원하는 게 뭐냐!”

“원하는 것이라, 어쩌지? 난 더 부족한 게 없는데. 돈이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있고, 아이템도 말했듯이 사기성으로 불릴 만한 것들로 치장했고 말이야.”

화가 나는 듯 꽉 움켜쥔 회색분자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으나 칼자루를 쥔 것은 내 쪽이다.

“네가 가진 석판은 몇 개나 되지?”

“……6개다.”

“한 개가 부족하군. 할 수 없지. 너에게 기회를 주마. 이 석판들을 갖고 싶지? 그렇다면 나와 내기를 하자.”

“내기?”

“그래. 너와 내가 듀얼을 해서 이기는 쪽이 상대가 가진 석판 전부를 갖는 거다. 어때, 꽤 구미가 당기지 않나?”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는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회색분자는 이내 표정이 풀리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석판은 그냥 죽여도 무조건 떨어지는데 어째서 듀얼을 하자는 거지?”

하지만 의심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냥 죽이면 몇 개가 떨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 번거롭게 여러 번 붙는 것보다 쌈빡하게 한 번으로 끝내는 게 서로 편하지 않겠어?”

“좋다.”

“일단 불부터 RM도록 하지.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너도 도와라.”

촌장에게 말해 다크 엘프들을 뒤로 물리고 수계 마법과 물의 정령을 이용해서 불을 껐다.

촌장은 물을 사용한 게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물이 튀거나 한 다크 엘프가 없어선지 별소린 없었고 불똥이 튈까봐 그들의 연무장격인 공터도 우리에게 내줬다.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듀얼 신청을 하자 내기 듀얼을 할 것인지 순수한 듀얼만을 할 것인지 물어왔다. 그리고 나타나는 저울.

저울 위에 내가 가진 석판들을 모두 꺼내놓고 반대편에 회색분자도 석판들을 꺼내놓자 저울이 빛을 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인식일 뿐, 실제로 내 품속에는 석판들이 남아 있다.

“내가 수년에 걸쳐 찾아다녀 모은 석판들이다. 그런 검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지. In Vas Flam!”

화르르륵!

이렇다 할 주문도 없이 회색분자가 석판에 마나를 주입하며 외치자 인페르노 급, 그 이상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열기가 내게로 뿜어져 나왔다.

“브, 블링크!”

다급한 마음에 블링크를 쓰고, 또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회색분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전에 봤던 그 조합의 석판을 들고.

“In Vas Flam!”

“젠장할, 블링크!”

이미 후끈한 열기가 덮쳐오는 중이고 넘실대는 불꽃이 지상을 가득 메운 상태라 블링크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은 딱 하나로 압축되었다.

“큭!”

“끝이다. In Vas Flam!”

바로 허공!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또 한 번 화염이 덮쳐오니 블링크로도 피하기 쉽지 않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 하나는 물의 수호고, 다른 하나는…….

“An Ort!”

스르르륵!

화염 방사기처럼 뿜어져 나오던 화염이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당황한 회색분자는 보고도 믿지 못하는 듯 눈만 껌벅거렸다.

“블링크! 하이딩!”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놈이 당황해하는 동안 난 즉시 파고들었고, 내 모습을 놓친 회색분자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나는 놈의 정면에서 나타났다.

“차앗!”

피슛-!

아쉽게도 내 드래곤 슬레이어는 놈의 가슴과 복부만을 베는 데 그쳤다.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하는 회색분자.

쳇, 기습은 이걸로 끝이군.

“크으……. 이럴 순 없다. In Vas Flam!”

“An Ort!"

방금 전 상황을 못 믿겠다는 듯 다시 한 번 마법을 쓰는 회색분자. 그러나 화염은 내게 미치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것들이 룬어라는 것을 알고 검색하다가 우연히 찾아냈지. 디스펠 주문이다. 후후, 넌 끝이야.”

“그, 그런……!”

“거대한 낙석의 위용, 스톤엣지. 바인드!”

하늘에서 커다란 바윗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멍한 상태로 바라보다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는 회색분자. 놈이 물러서려 할 때 땅에서 솟아난 나무줄기들이 발목을 휘감아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큭!”

그러나 놈의 힘도 보통이 아니라 바위가 떨어지기 전에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가까스로 바위를 피한 회색분자는 재빨리 바위를 우회해서 나를 찾았다. 그러나 난 이미 어디론가 이동한 상황이었다.

“어디……. 컥!”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회색분자의 목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왔다. 바로 내 드래곤 슬레이어!

놈이 바위를 피하는 순간 나는 오히려 바위 위로 올라가 있다가 소리 없이 기습을 가한 것이다.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쓰러지는 회색분자. 그러나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다.

[콜로니스트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회색분자님께서 내기에 거신 물품은 모두 콜로니스트님에게로 이동됩니다.]

“아싸!”

듀얼의 승리를 알리는 멘트와 함께 회색분자가 가지고 있던 석판들이 모두 내게로 이동됐다.

이제 남은 석판은 하나뿐인가?

“석판의 마법이라, 좋기는 한데…….”

석판 마법을 사용해 본 결과 소모되는 마나량이 너무 많았다.

무한마나를 지향하는 에크만이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나로서도 함부로 사용하기 힘들 정도로.

그럼에도 회색분자와의 싸움에서 여러 번 사용한 이유는? 놈도 석판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각 마법마다 차이야 있겠지만 놈은 3개의 석판을 조합했고, 나는 2개의 석판을 조합했으니 적어도 놈보다는 적은 마나가 들 거란 믿음 때문에.

뭐, 내 쪽의 마법 레벨이 더 높아 소모 마나가 더 많을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실험해 볼까? In Vas Flam!”

화르르륵!

디스펠과 맞먹는, 아니 오히려 조금 더 많은 양의 마나가 빠져나가며 하늘 위로 굵은 불기둥이 솟구쳤다. 이정도면 마나 싸움을 했어도 좋을 뻔 했군.

“형, 이제 남은 하나도 찾으러 가요!”

“그래. 음, 가장 빠른 방법은 촌장에게 물어보는 것인가?”

마냥 또다시 그로티우스 산맥을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촌장에게 묻는 게 가장 현명했지만 둘은 또다시 그 악취를 맡기는 싫은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내저었다.

“쩝. 그럼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나 혼자 다녀올 테니.”

내가 혼자 다녀오겠다는 뜻을 밝히자 노골적으로 싫어하던 표정이 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끄응, 할 수 없지.

“형, 미안해요~!”

“미안!”

멀어지는 나를 향해 둘이 뒤에서 소리쳤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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