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판을 찾아서
“형, 여기에요!”
약속 장소인 잡화점으로 가자, 아슈라가 반갑게 불러주었다.
“그, 그런데 그 옆에 것들은……?”
“그게 말이죠…….”
“우리만 떼어놓고 놀다 온 벌이야!”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는 수레로 한 가득 잡다한 아이템들이 쌓여 있었다. 이거 대충 내가 계산해야 하는 분위기인 거지?
“그래, 가넷이 쓴다는데 뭔들 못 사주겠어?”
웃으면서 물건값 20골드 가량을 잡화점 주인에게 지불했다.
내 닭살 어린 말에 얼굴이 빨개지는 가넷. 훗, 귀엽다니까.
“그럼 화산에 또 가야 할까요?”
아! 실수다. 크루즈를 리바이어선에게 데리고 가기 전에 석판에 대해 물었어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크루즈를 불러내거나 그 산에 다시 다녀올 수도 없고, 귀찮아졌군.
“이번엔 다른 곳에 가자. 어차피 다른 화산이야 나중에 가면 되잖아?”
“그야 그렇지.”
실은 화산을 일제히 돌고 난 후에 다른 곳을 공략하고 지워나가는 것이 더 편했다. 하지만 어찌하랴, 가넷의 의견인데. 그리고 나도 화산은 뜨거워서 오래 있기 싫었다.
“그럼 어디로 갈까?”
“키메라의 탑 어때?”
“뭐? 거긴…….”
내가 알기론 거긴 1층에 매점이 있을 정도로 신식 던전인데, 그런 곳에 석판이 있을 리는 없지 않을까?
“거긴 너무 최신 던전인데…….”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흑마법사가 운영하는 던전이잖아. 몬스터도 전부 키메라고. 그런 곳에 석판이 있을 리 없지.”
“어허, 모르는 소리! 오히려 그 흑마법사가 석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잖아? 연구 보조 자료 갚은 걸로라도.”
살짝 수긍이 갈 듯 하면서도 쉽게 동의할 순 없었다.
“뭐, 한 번 가보자. 밑져야 본전일 텐데.”
결국은 가넷의 말을 따라보기로 했다. 가기 전에 먼저, 가넷, 아슈라, 돈황에게 레벨에 맞는 스킬을 배우게 했다. 그들 자신은 몰랐겠지만 화산에서 내가 헬 하운드와 미노타우르스를 몰살시키면서 엄청난 경험치를 받았던 까닭이다. 순식간에 어디 가서 중수 소리는 들을 정도로 성장한 둘은(돈황은 애초에 워낙 레벨이 낮아 예외였다.) 기쁜 마음으로 새 스킬을 배워 돌아왔다.
으흠, 키메라의 탑이라, 드래곤 슬레이어에 내재된 10써클 마법 없이 클리어할 수 있을까?
“혼자라면 몰라도 이 멤버론 힘들지도…….”
확실히 혼자일 때보다 더 손이 많이 가고 갈 수 있는 곳도 줄어드는 파티였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몸을 빼서 숨어있겠지만 파티 플레이에선 그게 안 되니.
“형, 빨리 가요.”
재촉하는 아슈라가 미워 보였다. 남은 걱정돼 죽겠는데 속 편한가보군.
“매스 텔레포트!”
발걸음은 무겁고 입은 썼지만 그래도 어쩌랴? 이왕 가기로 한 것을. 던전에 도착해서 올라가려고 했다가 제지를 받아야 했다. 여긴 번호표를 받아서 올라가야 한다나?
“뭔 놈의 던전이 이래?”
“그러게요. 세상에 번호표 받아서 들어가는 던전이라니!”
“그것만이면 말을 안 하지. 던전 1층에 음료수랑 요깃거리를 팔 줄이야?”
가넷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주방 쪽을 쳐다봤다. 묵묵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르는 청년. 어디서 온 놈인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처음부터 이곳을 관장하던 놈이란 것밖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뭔가 수상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325번 팀!”
“우리다.”
주스 한 잔씩 시켜 마시면서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줄을 서서 차례로 탑을 올라가자, 환각인지 올라왔던 계단이 사라졌다.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나가려면 스크롤을 쓰거나 죽어서 나가라는 소리군?
“모두 조심들 해. 처음 보는 몬스터들인 만큼 방심하다간 약한 몬스터한테도 죽을 수 있어.”
“소환, 도루루. 스파크!”
내가 주의를 주자 가넷은 즉시 정령들을 꺼내놓았다.
길은 일단 일방통행이었다. 어른 셋 정도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인 통로였는데, 횃불이 환하게 놓여 있어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키륵”
드디어, 첫 번째 몬스터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크의 몸에 고블린의 얼굴이냐?”
“농구공에 껌 딱지 붙여놓은 것 같이 보이는데요?”
그랬다. 어린 아이만한 몸을 가진 오크의 몸에 문자 그대로 주먹만 한 고블린의 얼굴을 붙여놓으니 엽기가 따로 없는 것이다.
“스파크!”
“끼룩!”
보다 못한 가넷이 나서서 가볍게 정리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1층에 있는 것들은 1+1=2가 아니라 1+1=0.5로 만드는 그야말로 실패작 퍼레이드였다.
2층도 별 다를 건 없었다. 합성한 몬스터들의 질도 워낙 떨어졌고 합성한 부위도 그다지 쓸 만하진 못해서 1+1=1정도 되게 만든 정도였다. 여기도 가넷과 돈황이 정리했다.
“크어어!”
“얼씨구? 무슨 천수관음이냐? 팔이 몇 개야?”
3층은 1+1=1.3정도로 봐줄까? 오크, 코볼트 같은 놈들에게 팔만 여러 개. 다리만 여러 개. 갖다 붙여놓은 황당한 경우였다.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놈에게 팔을 여러 개 붙여놓으면 제법 강해질지도.
“슬슬 조심해야 할 것 같군.”
4층은 3층과 별 다를 바 없지만 합성시킨 몬스터의 질이 높아졌다. 그래봐야 아직은 놀 정도의 중급 몬스터들뿐이지만.
“모두 물러서.”
놀 정도 되는 중급 몬스터라면 실전 경험이 많이 부족한 가넷이나 아슈라도 조금 힘들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상대했다.
일단 파이어 볼을 날리고, 팔을 들어 그것을 막는 사이 다가가서 목을 벤다. 아무리 팔이 많다 해도 목이 잘리니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목을 두 개쯤 붙여놓으면 조금은 골치 아플지도.
“나의 종이여, 일어나라. 서먼 스켈레톤!”
키메라 놀의 떨어졌던 머리통이 다시 붙으며 뼈다귀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호, 키메라에게 서먼 스켈레톤을 사용하니 팔도 여러 개인 채로 소환된다?
“재미있군.”
“전진!”
4층, 5층까지도 별다를 것 없는 개그대행진이었다. 하나 6층부터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아우!”
6층에 들어서자마자 늑대 울음소리가 우릴 반겼다. 저 멀리 갈림길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늑대들. 한데 특이하게도 각자의 등에 이상한 날개들을 달고 있었다.
“저건 박쥐, 저건 하피? 뭐야? 저것들은.”
“아슈라, 미끼를 던져라.”
“예. 1번 전진!”
1번으로 명명된, 여덟 개의 손을 가진 놀이 늑대들 사이로 걸어갔다. 경계의 으르렁거림을 보이던 늑대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컹! 하고 짖더니 사방에서 휘몰아쳐갔다. 지상은 물론, 공중에서 선회해가며.
“대단하군. 저거에 걸리면 얄짤 없겠는데?”
“그, 그렇겠죠?”
“할 수 없다. 지금부터는 마나를 개방하는 수밖에. 무지한 자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검 끝을 타고 퍼진 번개는 대다수의 늑대를 노릇노릇하게 구워버리고 두세 마리의 늑대만을 남겼다.
너무 멀었나 보군. 다 죽지 않은 걸 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두르자!”
남은 늑대를 향해 달려가자 늑대들도 따라서 마주 달려왔다. 앞발을 쳐들었지만 드래곤 슬레이어의 예기에 가볍게 잘려나갔다. 인간과 달라서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너무도 간단한 죽음이었다.
“이쪽!”
세 갈래 길에서 일단은 왼쪽을 선택했다. 미로에서 탈출하는 방법에도 왼손 법칙이란 게 있다 하지 않던가? 때문에 갈림길이 나오면 무조건 왼쪽 길을 택한 것이다. 왼쪽 통로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에서 횃불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 뭔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파이어 볼!”
어둠을 향해 파이어볼을 던져봤다. 잠시나마 환해지는 주위 모습들. 저 끝에는 희미한 불이 켜져 있고 어두운 길의 곳곳에는 시체가 쓰러져 있는 걸로 보아 망자의 협곡과 같이 발소리에 반응해서 구울들이 일어나는 형태인 것 같았다.
유저들의 시체가 아니라 다행이군.
“구울들을 어둠 속에 숨겨둔 것 같다. 망자의 협곡 때처럼 발자국 소리에 반응하는 것 같으니 미리 처리해 놓으면 문제 없…… 응?”
킁킁!
개가 냄새 맡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눈동자가 보였다.
또 늑대? 그럴 리가. 파이어 볼이 비춘 자리에 늑대는 없었는데?
“크르르!”
“실드!”
갑자기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무언가 때문에 실드를 펼치긴 했으나 무엇인지 마냥 궁금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실드에 부딪히며 모습을 드러낸 실체를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코를 킁킁거리고 갑자기 덤벼든 몬스터는 구울에게 늑대의 코와 다리를 이식한 키메라인 것이다.
“네발로 움직이는 구울이라니? 푸하하하!”
생긴 건 꽤나 웃겼지만 돈황처럼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구울의 손톱이라는 공격 수단은 사라졌지만 대신 빠른 기동력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독 데미지를 입히는 건 입으로도 충분했다.
귀찮게 변해버렸군.
“시체는 불태우는 게 제일이지.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 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실드를 품과 동시에 인페르노를 시전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남아 있는 구울들을 일거에 소탕했다.
제기랄, 소탕하는 것까진 좋은데 벌써부터 마나를 너무 쓰는군. 아직 3층이나 더 남았는데.
“달려!”
이렇게 가다간 끝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면서 걸음을 재촉하게 됐다. 어차피 쓸 거면 일찌감치 퍼붓고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포션으로 회복하면 되겠지.
“소환수랑 정령을 모두 앞으로 돌리고 무조건 뚫는다!”
정령이 소멸되면 30분 후에나 다시 소환할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해 도루루나 스파크 정도의 레벨론 정찰 이외의 의미는 갖질 못한다. 때문에 아론의 소환수와 마찬가지의 취급을 당하는 거고. 전력에 보탬이 되려면 가넷의 레벨이 올라 상급 정령을 뽑아내야지. 아니, 뽑아낸다 해도 물속성이라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달려, 달려!”
달려드는 놈이 있으면 아슈라의 스켈레톤이나 가넷의 정령 하나를 던져주고 무작정 길을 달리기 시작한지 어언 10분여. 드디어 7층에 오를 수 있었다. 남아 있는 소환수? 가넷의 스파크와 아슈라의 스켈레톤 한 기가 전부다. 아슈라가 다섯 기 정도 뽑았던 것 같은데 많이도 버리고 왔군.
“좀 쉬자.”
“찬성.”
계단에서 다음 층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계단도 사라지지 않고, 계단에 있는 동안은 몬스터의 공격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안심하고 포션을 들이켰다.
후우, 지금까지야 어찌어찌 왔다지만 이 다음부터는 어떻게 이동한다?
“마나는 아직 꽤 남긴 했는데…….”
마나를 움직여보나 대충 80%정도까지는 차오른 듯했다. 원래는 리얼모드 1단계나 2단계로 변경해서 확인해 봐야 하지만 워낙 3단계로 많이 활동하다 보니 그냥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80%라, 어차피 이럴 거라면…….
“이걸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조금 전에 얻었던 화룡의 검과 수신의 방패를 꺼내 착용했다. 여타의 게임이라면 클래스가 맞지 않으니 착용할 수 없다는 소리나 해대겠지만 힐름은 현실과 다음 없이 쓸 줄 알 든 모르든 착용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다. 내가 이도류를 집어넣고 검과 방패를 차자 셋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저 눈빛을 해석해보자면……. ‘저 인간은 대체 몇 가지 클래스를 선택한 거야?’ 정도일까?
“이제부터 아이템이나 스킬에 관한 질문은 안 받는다. 가자!”
“응, 그래.”
가넷은 갸우뚱하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7층에 올라가자 멀리서 팔만 굵은 트롤이 보였다. 아무래도 트롤의 몸에 오우거의 팔뚝을 이식시킨 듯. 저렇게 되면 꽤 골치 아플 수도 있었다.
“자, 자. 더 모여라. 더!”
한번 쓸 때마다 빠져나가는 마나의 량이 장난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몸을 사리며 키메라들이 일직선상에 모이길 기다렸다.
“됐다, 화룡의 이빨!”
화룡의 검을 들고 시동어를 외치자 한 번 본적 있듯이 검에 엄청난 화염이 몰려들었다. 검을 들고 있는 내가 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 불꽃의 응집에 주춤주춤 물러서는 키메라들. 언데드 쪽이다 보니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 놈들에게 씨익 잔인한 미소를 지어주고 힘껏 검을 휘둘렀다.
“가라!”
화르르르륵!
검 끝을 따라서 한 마리의 화룡이 키메라들을 집어삼키며 쭉쭉 뻗어나갔다. 검 끝으로 막대한 량의 마나가 빠져나간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이미 난 10%의 마나를 지불한 상태이고 그 이상 추가로 빠져나가고 있지는 않으므로 힘든 걸 참고 검을 지탱했다.
“크흣!”
화룡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많은 키메라 들을 집어삼키면 삼킬수록 검에 전해지는 진동이 커지더니 급기야 더 이상 잡고 있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검을 놓치자 그렇게나 난폭하게 굴던 화룡도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화룡이 지나간 자리엔 검게 그을린 자국과 수많은 키메라의 시체만 남아 있었다.
“너, 너…….”
“서둘러!”
가넷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뭔가를 물으려 했지만 지금은 다른 키메라들이 몰려오기 전에 도망치는 것이 급했으므로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화룡이 어찌나 빠르고, 또 멀리까지 움직였는지 한참을 달리는데도 여전히 고기 노린내가 진동을 했고 살아 있는 키메라는 없었다.
내 마나의 10%라는 게 그렇게나 대단한 건가?
“만약 이걸 에크만이 썼다면……?”
갑자기 예전 나와 승부를 가리자고 난리를 치던 에크만과 알테어가 떠올랐다. 다음날에라도 나타나서 승부를 가리자고 할 것 같더니 어디로 사라진 거지? 아직도 게임을 하긴 하는 건가?
“잡생각은 나중에 하자.”
리얼모드를 조정한 다음 몇 가지 메뉴를 만져서 접속 중인지를 알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현재 상황을 떠올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여기를 클리어하는 생각만 하자!
“이런…….”
화룡의 힘도 여기까지였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또다시 수많은 몬스터들이 길이 가로막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화룡의 이빨을 써? 아냐, 이번엔 그걸 써보자!
“다들 내가 움직이면 바로 따라서 뛰어. 속도에서 따라오지 못해도, 몬스터가 앞에 있어도 그냥 무조건 뛰는 거야. 알았지?”
“응.”
“아, 예.”
다시 화룡의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냥 들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떠한 자세를 취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누군갈 쏘아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검을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렇게 쓰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화룡 질주!”
검에 큰 불길이 일더니 그 불꽃이 내게로 옮겨 붙었다. 하지만 버닝소울을 사용한 듯, 조금 따뜻하기만 하고 내겐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바위로 족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과 자신감이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화룡질주의 힘인 것을 알았다. 내 힘을 믿고 키메라들을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
“달려!”
쿠궁!
바닥이 깊게 패이며 일보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감히 상상키도 어려운 속도!
눈이 변하는 주변의 환경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다음 발을 딛지도 않고 수십 미터를 날아났다. 그동안 수십 마리의 키메라와 부딪히는 듯했지만 내 몸에 붙어 있는 불이 어찌나 강렬한지 일부의 몸은 녹여서 뚫고 나왔고, 일부는 부딪힌 채 같이 날아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 보를 내딛었을 때 바닥이 패이는 대신에 검게 그을린 자국만 남았다.
삼 보, 사 보, 오 보……. 약 칠 보 정도를 내딛었을 때, 내 전신을 두르고 있던 불꽃이 사라졌고 다리에 전해지던 측정하기 어려운 힘들도 사라졌다.
“크르륵!”
“크룩!”
내게 떠밀려 날아가던 수많은 키메라들은? 그 자리에 넘어져서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누르고 있으니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제일 앞에서 다른 놈들을 누르고 있는 키메라는 머리가 다섯 개나 달린, 머리만 큰 오우거였다.
“빨리 와!”
키메라들이 다시 정신 차리고 일어서기 전에, 뒤늦게 도착한 일행을 이끌고 계단을 찾아서 도망갔다. 워낙 대형 몬스터들로 포진을 시켜놔서인지 7층은 상당히 짧은 편이었다.
넘어뜨려 놓은 놈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이 나왔고 무사히 계단에 앉아 포션을 들이켰다.
여기서 마나를 다 채우고 가야겠군. 8층에서도 똑같은 짓을 하려면. 9층은 보스가 있는 방인데 설마 똘마니들을 깔아놓겠어?
“후욱, 가자!”
십여 분에 걸쳐 마나를 모두 채우고 8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저건 또 뭐야?”
저 멀리서 보이는 것은 와이번 날개를 달고 우아하게 날고 있는 오우거였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팬티 하나 걸치고 저러고 싶을까?
“왠지 초형귀라는 게임이 생각나는군.”
“히이잉!”
크라켄의 다리를 한 와이번, 켄타우르스의 다리를 한 사이클롭스. 인간의 다리에 말의 머리를 한 마두인? 뭐, 뭐야? 저건?!
“별 희한한 것도 다 만들어놨군. 자, 가자! 화룡의 이빨!”
화룡 질주보다 화룡의 이빨 쪽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화룡 질주를 다시 한 번 쓸 일은 없었다.
화룡의 갑옷은 나 혼자만 살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니 일단 제외고, 화룡점정은 무슨 기술인지 알 수 없으므로 그것도 제외였다. 검 끝 가득 몰려든 화염의 기운이 또다시 한 마리의 난폭한 용이 되어 쏘아졌다.
“크르르륵!”
제법 버티는 놈들만…….
“히이이잉!”
정정하겠다. 입만 산 녀석들만 간신히 비명 소리를 남기고 나머진 찍소리 한 번 못한 채 명을 달리했다. 난 또 검을 놓칠 때까지 들고 있다가 도망치듯 달려갔다. 온통 신기한 놈투성이었지만 여유 있게 구경할 틈이 없었다. 달려가다가 멈춰서 화룡의 이빨을 쓰고, 달리다가 쓰고, 또 쓰고……. 그렇게 다섯 번을 사용할 때쯤 계단 대신 커다란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 일방통행이었으니 아마 저게 통로 대신일 것이다.
“젠장, 마나 회복할 틈을 안 주겠다는 건가?”
더럽고 아니꼬웠지만 어쩌겠는가? 아쉬운 놈이 참는 수밖에.
“다들 이 마법진 밖에서 회복하다가 몬스터 리젠되면 바로 들어가.”
하지만 약간의 머리는 굴리면서 참는다 이거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마나 포션을 들이키다가 크라켄의 다리에 미노타우르스의 몸이 붙은 놈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9층이겠지. 이 탑의 최종 보스가 사는 곳.”
“키레마의 탑 최종 보스라면?”
마법진으로 들어가자 뭔가 발동하는 그런 것도 없이 바로 9층으로 이동됐다.
키메라의 탑 최종 보스라, 그게 아마…….
“좀비 드래곤 일걸?”
“뭐어? 드래곤?!”
죽은 드래곤의 시체에 강력한 네크로맨서가 마법을 걸어 되살아나게 함으로써 탄생되는 괴물. 이지를 상실하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나 가스 브레스는 쓸 수 있는 좀비 드래곤!
이 탑의 최종 보스가 놈이라는 소리에 다들 깜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뭐야, 알고 오자고 한 거 아니었어?
“크워어어!”
“양반은 못 되는군.”
쿵쿵쿵쿵!
덩치 크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세게 발을 구르며 썩어 문드러진 드래곤이 나타났다. 더 이상 외피도 강하지 않고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는 드레이크나 다름없는 신세인 주제에 잘도 나서는군!
“크, 크다!”
“크오오오오오!!!!”
드래곤과 대면해 본 적 없는 셋은 제자리에 딱딱하게 굳어서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유일한 자랑인 가스 브레스를 날리려는 좀비 드래곤.
“젠장, 어쩔 수 없군. 이걸 믿어보는 수밖에.”
화룡의 검을 땅에 박아 넣고 수신의 방패를 높이 치켜들었다.
“콰아아아!!”
“물의 수호!”
시동어를 외치자 방패를 중심으로 반구형의 투명한 실드가 생겨났다. 그 위로 덮치는 가스 브레스.
얇디얇은 실드가 무척이나 불안했지만 잡아먹는 내 마나가 아까워서라도 믿기로 했다.
“10분은 안전하다고 했으렸다?”
설명대로라면 10분간은 이 안에서 안전하다니 포션을 왕창 들이켰다. 이것으로 소모된 마나도 마나지만 8층에서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온 마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 분간, 포션을 마시다 보니 수신의 방패의 특수 능력을 위해 사용한 10%의 마나는 회복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마나는 모두 채워졌다.
“화룡의 이빨!”
가스 브레스가 끝나고, 계속해서 실드에 몸총 박치기를 시도하는 좀비 드래곤. 놈이 몸을 뒤로 뺀 사이 방패를 거둬 실드를 해제시키고 화룡의 검 특수 스킬을 사용했다.
“크아앙!”
화룡과 좀비 드래곤이 서로 얽혀들었다. 그래도 마법 저항력은 꽤 남아 있는지 바로 관통당할 거란 예상과 달리 밀고 밀리는 접전을 펼치다가 내 힘이 팽겨서 검을 놓치는 바람에 좀비 드래곤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뇌궁이 궁수용인 것처럼 이건 기사용이라는 건가?
“제기랄!”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내가 말한 대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숨어 있는 것이다. 내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게.
다시 한 번 화룡의 이빨을 쓸까 하다가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기술이 생각났다.
화룡점정!
옛 고사를 가진 말로,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리니 그림이 진짜 용이 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인데 어떤 위력과 효과를 보여줄지는 알 수 없었다.
“못 먹어도 고다! 블링크!”
화룡의 이빨에 적중당한 좀비 드래곤이 내게 강한 적개심을 보이며 발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준비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는 이 기술을 쓰려면 거리를 벌려야했다.
“화룡점정!”
검신에 그려진 문양이 붉게 타올랐다. 화룡이 승천하는 문양. 그 문양이 크게 타오르더니 검끝이 빛났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쏘아내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차핫!”
쿠구구구구!
좀비 드래곤을 향해 힘껏 휘둘렀지만, 타오르던 검의 문양을 사라졌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두더지 땅 파는 듯한 소리만 들릴 뿐.
“뭘 잘못한 거지?”
쿠구구구!
뭐 이상한 점이 있나 검을 들고 이리저리 살필 때였다.
콰과과과!
좀비 드래곤의 발밑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화룡이 승천해 올라간 것이다!
그 화룡은 엄청난 열을 동반했는지 좀비 드래곤의 발을 걸레짝처럼 만들어버렸고 이제 좀비 드래곤은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이거 완전 사기템이잖아! 10써클, 그 이상일지도?!
“좋았어. 한 번 더! 화룡점정!”
[사용 한도를 넘어섰습니다.]
“에엥? 이게 무슨 소리야? 확인!”
[화룡의 검]
화룡 리비에라가 애용하던 검. 화룡이 죽은 후, 드래곤 슬레이어 크루즈가 사용했다. 화룡의 이빨, 화룡의 갑옷, 화룡 질주, 화룡점정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단, 각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사용자 전체 마나의 10분의 1이 사라지며 사용자의 마나량에 따라 위력도 달라진다.
특이사항 : 연속해서 쓸 수 있는 기술의 수는 정해져있다. 그것을 모두 사용할 시에는 용암에 담가 충전시켜야 한다. 주인을 인식하기 때문에 화룡의 검 소환이라고 외치면 용암 속에서 꺼낼 수 있다.
“갑자기 이런 게 생겨나는 게 어딨어? 쳇!”
충전 기간이 얼만지는 모르지만 결코 적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하루 이틀로 충전되기엔 기술의 위력이 너무 강력했으니까. 어쩌면 한 달쯤 될지도…….
“결국은 드래곤 슬레이어군.”
솔직히 화룡의 검이 파워 면에서는 마음에 들었지만 개인적으론 드래곤 슬레이어가 더 좋았다. 일단 손에 익었고, 이도류라는 매력도 있으니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더블!”
콰광-!
두 개의 파괴의 구슬이 좀비 드래곤의 머리에 부딪혔다. 하지만 터져나가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좀비 드래곤. 드래곤이 이렇게 돌, 아니 오리하르콘 머리인 줄은 처음 알았다.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마법도 쓰지 못하고, 하루 한 번의 제약이 있는 브레스도 쓰지 못하고, 움직임에까지 제약이 있는 좀비 드래곤은 내 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잠시 후, 조금의 괴롭힘 후에 좀비 드래곤은 숨을 거두었다. 이미 죽었던 것을 살린 것이라 떨어지는 아이템은 전무했고 9층 한 구석에 하얗게 빛나는 마법진만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가만, 좀비 드래곤이 있다는 소리는……?”
좀비 드래곤을 만든 네크로맨서도 있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네크로맨서는 보이지 않는군? 어디 숨어 있나?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리고 저렇게 환히 열린 마법진을 통해서 자신의 것을 부순 자들을 내보내려 할까?
“후후, 대충 알 것도 같군. 가넷, 아슈라!”
그제야 숨어 있던 가넷, 아슈라, 돈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는 저 마법진을 타고 먼저 내려가.”
“응? 그럼 너는?”
“난 네크로맨서에게 받을 게 조금 있어서 말이야. 후후후!
* * *
키메라의 탑 1층 마법진.
장식용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빛과 함께 세 명의 남녀가 나타났다.
[축하드립니다. 세분께서는 키메라의 탑 최단 시간 클리어의 영예를 안으셨습니다.]
그들의 등장과 함께 누가 마이크에 대고 말한 듯한 알림말이 울려 퍼졌다.
“에엣?”
“최단 시간 클리어?”
“하긴, 빨리 나오기는 했지.”
셋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초고수로 생각했고, 셋은 질문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어떻게 했냐고요? 에……. 그냥 달렸는데요.”
“오오! 그 많은 키메라들을 무시하고 달릴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방어구!”
“근데 저거 허접들이나 입는 싸구려 방어구 아니야?”
“멍청한 녀석! 오히려 저렇게 허름해 보이는 게 더 고급품인 거야. 고대의 아이템이라는 거지!”
한 마리 할 때마다 두세 마디씩 말도 안 되는 해석이 달렸다. 그렇게 1층 전체가 시끌벅적해졌을 때,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이가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로브를 깊게 눌러쓴 1층 매점의 점원이었다.
그는 아무도 못 보는 주방의 안쪽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덮어놓은 천을 치웠다.
그곳에 그려진 것은 가넷 등이 타고 왔던 것과 매우 흡사한 마법진. 그가 뭐라 중얼거리자 마법진에서는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동!”
빛이 사그라지며 그의 모습은 1층에서 사라졌다.
“이런, 내 좀비 드래곤이!”
칠흑 같은 어둠이 감싸고 있는 9층. 그곳에 도착한 로브 사내는 곧장 처참하게 망가진 좀비 드래곤에게로 달려갔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내가 이걸로 금방 고쳐줄게. 앗!”
그가 뼈로 만든 막대를 꺼내드는 순간 그것을 가로채는 손길이 있었다. 놀란 로브 사내가 쳐다본 곳에는 그의 막대를 들고 태연히 웃는 사내가 있었다.
“넌 누구냐!”
“나? 그건 알아서 뭐하게?”
* * *
역시나, 처참하게 망가진 좀비 드래곤을 본 네크로맨서는 당장에 달려와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놈이 좀비 드래곤을 회복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지팡이를 캐치! 이로써 약점을 잡았다.
이제 대화를 시작해볼까?
“넌 누구냐!”
“나? 그건 알아서 뭐하게?”
“이, 이……!”
지팡이를 빼앗긴 데다 무시당하기까지 한 네크로맨서는 화가 났는지 이, 이! 만을 반복했다.
이래서야 대화가 안 되겠군. 말문을 틔워줘 볼까?
“네가 이곳의 주인이냐?”
“그렇다!”
“오호, 1층 매점에서 일하기에 하수인 정도로 봤더니 제법이군? 나이도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좀비 드래곤을 다룰 수준이라니.”
“험험, 내가 천재 소리를 좀 많이 듣긴 했지.”
띄워주니 날려고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너, 이거 필요하지?”
끄덕끄덕.
지팡이를 흔들거리며 묻자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꽤 중요한 거긴 한가 보군.
“그럼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내놓아라. 알겠나?”
“그건 원래 내 건데 왜 내가…….”
“부숴 달라고?”
“아, 아니. 말만 해.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면 뭐든지 줄 테니까!”
지팡이를 드래곤 슬레이어에 가져다대자 네크로맨서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내 뜻을 따를 것을 약속했다.
“석판. 이상한 언어가 적힌 석판을 혹시 가지고 있나?”
“석판? 처음 듣는 얘기군.”
목소리 톤으로 봐서는 진짜였지만 한 번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뭐야?!”
“지, 진짜 모른다니까!”
지팡이를 드래곤 슬레이어에 더 바짝 가져다대자 네크로맨서는 더 크게 동작하며 만류했다.
끄응, 헛다리짚었나 보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지팡이라도 가져가버릴까.”
“아, 안 돼! 다른 건 필요 없어? 돈이나 스킬북 같은 건? 다른 거 다 줄 테니까 그것만은 돌려줘!”
이 정도까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지팡이가 적어도 레어 급 이상이란 소린데……. 확 내가 먹어버려? 아슈라도 네크로맨서니까 가져다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럼 네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쫙 읊어봐. 마음에 안 들면……알지?”
“그, 그러니까 그 동안 모은 고대의 네크로맨싱 연구 서적이랑 돈, 그리고……, 그리고…….”
생각이 막혔는지 네크로맨서는 거의 울 듯한 말투를 했다.
이거, 불쌍해서 더 놀려먹지도 못하겠군. 이쯤에서 봐주도록 할까?
“그럼 가져와.”
“네?”
“돈하구 연구 서적. 되는 대로 가져오라고.”
“아, 예!”
네크로맨서는 연구서적과 돈을 빼앗기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크게 밝아진 목소리로 답하고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왔다. 책은 커다란 걸로 하나였고, 돈은 사람 머리 크기만 한 주머니로 하나 가득이었다.
“쯧쯧, 다음부터는 칠칠치 못하게 이런 거 남한테 뺏기지 말고 잘해라.”
“예!”
나는 혹시 공격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받은 아이템을 모두 품에 갈무리하고 지팡이를 옆으로 던졌다. 슬라이딩을 해가면서 받아내는 네크로맨서. 그러는 동안 나는 텔레포트로 탑 바깥으로 이동했다.
“여기에도 없으면 어디에 있는 거지? 골치 아프군.”
주머니도 두둑해졌고 아슈라에게 줄 선물도 챙겼지만 정작 중요한 석판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후우, 그냥 카오스 마스터를 유인해내는 쪽이 빠르지 않을까? 어쩌면 놈이 우리가 가진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다 모았을 지도 모르는데.
“얘들아, 가자!”
“으응!”
뭣 때문인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곤란한 표정을 짓던 둘은 내 부름에 기쁜 듯, 당장에 자리에서 벗어났다.
“휴우, 석판은 없더라. 대신 이것.”
커다란 책자 한권을 아슈라에게 넘겼다. 내가 가지고 있어봐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니까.
“이게 뭐에요?”
“뭐라더라? 네크로맨서에 관한 무슨 연구 서적이라는데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 받아왔다.”
“오옷! 고마워요. 형!”
저렇게 생겼어도 스킬북이었는지, 아슈라가 뒤적거리자 환한 빛을 내다가 사라졌다. 스킬을 다 익혔다는 뜻이겠지.
“어, 어라? 형, 뭔가 이상한데요?”
“왜, 뭐가 잘못됐어?”
“그게 아니라, 방금 것들 전부 고위 스킬인데……. 다 배워버렸어요.”
아슈라는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댔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겨우 80초입이던 제 레벨이 90을 넘겼다고요! 폭렙한 고예요. 폭렙!”
“아…….”
난 또 무슨 소린가 했다. 화산에서 헬 하운드 스무 마리 가량과 미노타우르스 두 마리를 잡고 방금은 또 셀 수도 없이 고위 몬스터들을 잡아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키메라의 탑이 아이템은 전혀 획득할 수 없는데 번호표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인기인 것은 주는 경험치가 많아서이니까.
“이참에 다들 레벨 확인 해 봐. 꽤 많은 상승폭을 보일 거야. 잘하면 가넷은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겠는데?”
“어? 정말! 나도 90이 넘었어!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
“축하해.”
그들의 성장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물론 그들이 실전의 부재로 인해 레벨에 비해 형편없는 실력을 가졌을 것이란 걸 알고 있지만. 실전은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차근차근 시키면 되는 것이다.
“너도 확인 해봐!”
“나? 글쎄, 난 마법만 써서 별로 안 올랐을 텐데.”
마법으로 적에게 데미지를 입히면 그만큼의 경험치가 마법사 쪽으로 돌아가서 전혀 경험치를 얻지 못하는 나로서는 별로 알랐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상태 창 확인!”
키메라의 탑 1층은 마을과 같은 효과이기에 리얼모드 2단계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굳이 감도 변경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살펴보니 현재 내 로그 레벨은 84. 생각지도 못하게 높았다. 검에 담긴 기술을 쓰는 건 마법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인가? 좋군!
“84. 생각보다 많이 올랐군.”
“드래곤을 잡으면서 올랐는지도 모르죠!”
일리는 있었다. 드래곤과 맞상대할 때는 마법을 주로 썼지만 피니쉬할 때는 검을 이용했으니까. 몇 차례 공방도 있었고.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로그의 기술이라고 해봐야 레벨이 늘어난다고 검기 같은 특수한 게 생기지 않으니까.
사실, 어느 정도 레벨을 넘으면 강력한 기술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사나 격투가가 부럽기는 했다.
크윽, 이게 다 그놈의 마스터 아이템에 눈이 멀어서이지.
“돈황은?”
“……63.”
처음 레벨이 지독히도 낮았기 때문에 이것도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지만 본인은 마음에 차지 않는 듯했다. 하긴, 좋아하는 여자보다도 한참 레벨이 낮고 해줄 수 있는 일도 하나 없으니……. 그 마음은 이해한다, 이해해.
“그럼 이젠 어디로 가야 할까?”
“일단 마을부터 들러요. 새로운 스킬도 배워야 하고 장비도 싹 교체해야겠어요. 아까 사람들이 제 허름한 장비를 뭔가 대단한 걸로 착각하는데 어찌나 무안했던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재정비는 할 필요가 있었기에 다음 목적지는 일단 마을로 잡았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네크로맨서라는 비주류 직업을 가진 아슈라는 구석에 숨어 있는 네크로맨서 길드를 찾기 위해 먼저 이동했고, 나와 돈황은 포션 몇 개를 사면 딱히 할 일도 없었으므로 가넷을 따라다녔다.
“으음, 어떻게 하지?”
“왜?”
정령술사 길드에 들어갔다 나온 가넷이 낭패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상급 정령을 소환하려면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 대. 그래서 지금부터 퀘스트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린 괜찮아. 어차피 석판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닌 걸 뭐. 우리가 도와주면 금방 끝날 거야.”
“정말 고마워.”
가넷이 환하게 웃으며 답하니 그걸로 만족했다. 뭐, 정 늦으면 카오스 마스터란 놈을 때려잡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아슈라가 오면 바로 떠나자.”
“그게, 이번엔 아슈라는 빼야 할 것 같은데?”
“어째서?”
“목적지가 엘프의 숲이야. 이 반지를 엘프 마을의 이실리에에게 전해줘야 해.”
가넷이 꺼내 보인 판지는 파란색과 초록색 두 줄이 한데 엮인 투박하면서도 은근한 아름다움을 지닌 반지였다. 정령술사 길드에서 무엇 때문에 엘프에게 반지를 전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그들의 입장에선 네크로맨서라면 꺼려 할 수밖에 없겠지. 그럼 아슈라에게 연락하고 우리끼리 가보자. 우리라고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린이 엘프의 목걸이를 가지고 엘프 마을에 들어갔을 때 따라 들어가려다 죽을 뻔한 기억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 가보기로 했다. 한 가지 믿을 만한 것도 있고.
“매스 텔레포트!”
목적지는 엘프의 숲이 있는 녹색의 평원이었다.
오크, 트롤, 오우거가 꽤 잘나오는 편이라 여전히 사람들도 북적거렸다.
“저쪽이야.”
엘프의 숲이라면 얼떨결에 한 번 들어가 봤으므로 자신 있게 안내했다. 그 당시 오우거 로드를 만났던 장소, 그리고 도망친 경로를 생각하니 얼추 방향을 잡을 수 있었고 나중에는 정확한 장소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쯤에서 뛰어가면?”
“멈춰라, 인간!”
“물의 수호!”
피슉-!
일부러 조금 깊이 뛰어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화살이 빗발쳤다. 나를 직접 노린 게 아닌 위협용이라고는 해도 하나같이 마나를 실은 무시무시한 화살이었다. 하지만 난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수신의 방패를 들고 시동어를 외치자 투명한 막이 쳐지면서 그 많은 화살을 다 방어해내었다. 그 마법에 놀라서 진짜로 마나를 가득 담아 쏘아버린 엘프의 화살까지.
“어, 어떻게 저런……!”
자신들의 화살이 하나도 먹히질 않자 놀란 엘프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는 몇 명을 시켜 제대로 마음먹고 화살을 쏘아보기까지 했다. 물론 뚫릴 리는 없었다.
“엘프들이 이렇게 의심 많은 종족인 줄 몰랐군요!”
직접 화살을 날려보려던 정찰조의 대장은 내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 화살을 내려놓았다. 너무도 하얀 얼굴이라 확실히 티가 난다. 엘프들은 표정 읽기가 무척이나 쉽겠군.
“모두 물러나라!”
정찰조의 대장이 소리치자 다른 엘프들은 머뭇거리면서도 천천히 화살을 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라도 시위를 당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때문에 눈먼 화살이 있을까 봐 난 실드를 푸지 않았다. 이 실드를 만드는데 들어간 마나가 아깝기도 했고.
“우린 무기를 거두었는데 너흰 어째서 실드를 거두지 않는 것이냐?”
“엘프도 의심이란 걸 할진데 어찌 인간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린 눈 먼 화살이 있을까 두려워 실드를 풀 수 없습니다.”
“크윽.”
속을 한 번 긁자 그에 대한 감정이 여실히 얼굴에 드러났다.
화가 났군.
“그만들 둬라!”
몇 번 더 긁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숲속에서 중년의 엘프가 걸어 나왔다. 보아하니 이자들의 상전이군? 음, 나이로만 봐도 그러려나?
“아주 순수한 물의 장막이군요. 저희를 못 믿으신다면 장막은 그대로 둔 채로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신 겁니까?”
“장로님!”
“넌 조용히 하거라!”
제법 높은 신분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장로씩이나 될 줄은 몰랐다. 상대가 이렇게 예의를 차리고 나오니 이쪽도 제대로 인사해야겠지?
“이 친구가 정령술사 길드의 부탁으로 엘프 마을에 있는 이실리에에게 반지를 대신 전해주기로 했습니다. 꼭 해결해야하는 임무이기에 이렇듯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겁니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안으로 드시지요.”
“장로님, 저 여자는 그렇다 쳐도 다른 자들은 안 됩니다! 저들까지 마을에 들이는 건 규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엘프 사회에서는 지위 낮고 나이 어린놈에게도 상당한 발언권을 주는지 정찰조장은 꼬박꼬박 장로에게 말대꾸를 했다.
거참 말 많은 놈이네.
“그렇다면 제가 저들을 초대하지. 그럼 규칙에 어긋나지 않겠군. 그렇지 않은가?”
장로의 권한 중에는 이 종족에 대한 초대권도 있는지 규칙이 어쩌고 하며 땍땍대던 정찰조장도 입을 다물었다.
“여성분은 이실리에에게 데려다주도록 하세요. 그리고 남성분은 저와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엘프 장로는 다른 엘프를 시켜 가넷을 데려다주게 하고 나는 따로 불렀다.
정말이지 잘생긴 것도 피곤……. 험험, 농담이고, 그녀가 날 부른 이유야 뻔했다. 바로 수신의 방패! 마나에 민감한 엘프이니 지극히 순수한 물의 힘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것이다.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엘프 마을 구경은 하는군.
“원하신다면.”
저쪽에서 불퉁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나오지 나라고 톡톡 쏘는 대답을 할 리 없었다.
서로 부드럽게 대화하니 쉽게 합의가 되었고, 그 장로의 집에서 차라도 마시며 얘기를 하기로 하였다. 가넷의 일이 끝나면 가넷이 이리로 오기로 하고.
“제가 무슨 얘기를 할지 알고 계시겠지요?”
“제가 아까 펼쳤던 실드에 대한 것 아닙니까?”
“바로 보셨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그 마법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신 것인지 얘길 들을 수 있을까요?”
별로 NPC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기에 크루즈와 싸움 붙였다는 말은 쏙 빼고 물의 그랜드 마스터인 리바이어선이 죽으면서 남긴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총 마나량 중 10분의 1을 소모하여 펼치는 것이라는 말도 함께. 그것 말고도 몇 가지 말을 더 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다한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말을 하다가, 한 가지 귀가 번쩍 뜨일 말을 들었다.
“제가 숲을 깨달은 지 올해로 100년이 흘렀…….”
숲을 깨닫다. 다른 말은 다 필요 없고 그 부분이 반복해서 들려왔다.
숲을 깨달은 자. 나무의 그랜드 마스터! 엘프일 거란 생각은 대충 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대로 덮칠까?
“끄응. 그럴 순 없지.”
여긴 적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린을 통해 겪어본 바, 엘프들의 뛰어남을 아는데 섣불리 움직였다간 장로 암살범이란 누명을 쓰고 곤란에 쳐할지도 몰랐다. 더불어 나와 함께 온 가넷까지도 낭패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참는다.
“흐음, 그렇군요. 그럼 혹시 다른 것도 가지신 게 있습니까?”
장로의 눈에 특별한 탐욕의 빛이 떠오르는 게 아닌지라 꺼리지 않고 내어줬다. 물론 하나 돌려받고 하나 주는 식으로. 그렇게 토황추와 화룡의 검까지 살펴본 장로는 좋은 검이라고 칭찬하며 돌려줬는데 제 아무리 엘프 장로라도 무기 속에 봉인된 기술 같은 것까지는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엘프 장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가넷이 들어왔다.
“무슨 얘기 했어?”
“별 거 아니야. 아이템 얘기지, 뭐. 이만 갈까?”
“응!”
가넷은 볼 일 다 봤는지 길을 재촉했다. 아마도 빨리 돌아가서 사급 정령을 소환해 보고 싶은 거겠지.
“안녕히 가십시오. 더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해 아쉽군요.”
난 널 잡지 못한 게 아쉽다. 라고 속으로 되뇌는 속사정도 모르고 엘프 장로는 사람 좋은 얼굴로 우리의 뒤통수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나 아닌 다른 사람도 못 건드리는 건 마찬가지니깐…….”
“뭐라고?”
“그냥 혼잣말이야.”
가넷과 나는 썩 괜찮은 기분으로 다시 마을에 돌아왔다.
가만,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돈황은?”
“걔도 엘프 마을에 들어왔었어?”
같이 갔던 돈황을 떨궈놓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정령술사 길드로 향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임무 완료를 인정받고 필요한 서류를 챙겨서 어떤 방으로 들어간 가넷은 약 10분 후에 밝은 표정으로 다시 나왔다. 드디어 상급 정령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축하해.”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정말 기쁜지 가넷은 내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좋아하다니, 정말 잘됐군. 그런데 아슈라는 갔던 일 잘됐을까 몰라?
“어라? 아직도 여기 있었네요?”
정령술사 길드의 문을 열고 나가는데 문 앞에 아슈라가 서있었다. 네크로맨서 길드에 가서 배울 거 다 배운 듯. 하지만 아직 장비는 그대로였다.
“잘 만났다. 오늘 남은 시간은 너희 둘, 장비 맞추는 데에 투자하자.”
레벨은 90을 넘겨놓고 장비는 아직도 60대의 것들을 쓰는 둘을 위해 많은 시간과 거금을 투자해서 장비를 화려하게 쫙 빼 입혔다. 비록 나는 편하면 장땡인 상점가 50실버도 안되는 흑의만 입지만 가넷만큼은 삐까뻔쩍하게 입혀놓으니 뭔가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챙겨둔 블랙 드래곤의 비늘로 갑옷을 해 입어야 되겠는데 맡기러 갈 시간이 없군.
“어? 쟤들이 웬일이래?”
가넷이 가리킨 곳에는 엔젤하트와 호위기사 10명이 자신들 길 가는데 방해된다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있었다.
저것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니들 딱 걸렸다.
“가넷, 나 잠깐만 로그아웃하고 올게.”
“응? 무슨 일 있어?”
“아니, 잠깐이면 돼.”
“알았어. 여기서 기다릴게.”
“로그아웃.”
로그아웃을 하자마자 컴퓨터로 기기를 가져가서 동영상을 옮겨 담았다. 뒷부분에 있는 드래곤에 관한 내용은 편집해서 잘라내고, 전후 사정과 함께 엔젤하트의 추태만을 남겨놓은 후 홈페이지에 띄웠다.
예상컨대, 내일 아침쯤이면 이달의 베스트 동영상이 되어 있으리라.
“니들은 침몰이야. 엔젤하트.”
엔젤하트를 한 번 비웃어 주고 가넷이 기다릴 힐름 속으로 접속했다.
“넌 뭐 안 사?”
“나야 살게 있나. 흑의 한 벌과 이 이도류만 있으면 못할 게 없는 걸.”
대충 살 물건은 다 산 것 같았다.
포션도 싸게 대량으로 파는 녀석에게 잔뜩 사놨고, 이제 봉착한 문제는 또다시 어디로 가느냐인데…….
“아참! 슈호프에서 아래쪽으로 사막을 벗어날 때까지 쭉 가면 지하도시라는 게 나온다던데? 이름이…… 블로흐라던가? 엘프 마을에 갔다가 우연찮게 들었어. 우리 거기 가보자. 이름부터 지하도시라니, 뭔가 있을 것 같지 않아?”
지하도시라, 설정부터가 모래 속에 묻혀 잊혀진 도시라니, 정말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정도는 꼭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군.
“좋았어. 그럼 다음 목적지 결정이다!”
이미 짐 같은 건 다 챙겨놓은 상태라 따로 뭔가를 준비할 필요없이 몸만 가면 되었다. 그런데…….
“돈황, 이 녀석은 연락 안 해봐도 되는 거냐?”
“냅둬요, 냅둬. 예쁜 엘프들이랑 놀다가 질리면 돌아오겠죠.”
저녁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떨궈놓은 곳이 엘프 마을인지라 별 탈 없으리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이동해볼까?
“지도상에 위치를 대충 파악해 보면, 슈호프에서 어렵게 사막을 건너는 것보단 조금 거리상으로 멀더라도 베셀 영지 쪽에서 출발하는 게 나을 듯싶다.”
“그럼 그렇게 해요.”
“좋아. 매스 텔레포트!”
가넷, 아슈라와 함께 베셀 영지로 이동했다.
베셀에 도착하자마자 마차를 구했다. 근처로 가는 스크롤이 없으니 천상 직접 달려가야 할 텐데 걸어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다.
사두마차로 달리고 달려서 도착한 블로흐. 출발한 지 이틀 만에 이룬 쾌거였다. 그냥 걸어왔으면 한참이나 걸렸을 텐데.
“그런데 도시가 어딨어?”
“여기.”
가넷이 허허벌판에서 가리킨 곳은 땅 밑이었다.
아하, 땅 밑에 있어서 지하 도시? 난 또 지하도시가 반쯤 지상으로 떠올랐다는 뭐 그런 것인 줄 알았네.
“그런데 어떻게 들어가지?”
“저리로 가면 마법진이 있어.”
방위를 가늠해 보던 가넷이 북서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멀찍이 보이는 오두막 같은 곳 위에 서있는 세 명의 마법사. 저들이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 보내주는 역할인 듯싶었다.
“우릴 내려 보내 주십시오.”
문지기 세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금세 외면했다. 그리고 빈손을 덜렁거리는 걸로 보아 돈을 달라는 표시 같았다. 아무리 상대가 NPC라지만 이런 걸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주머니에서 약간의 돈을 꺼내 넣어주었다. 그제야 반응하는 NPC들.
“이리로 서시오.”
우리를 마법진 위로 올라서게 한 그들은 뭐라 뭐라 마법 영창을 하더니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어 어디론가 날려버렸다.
“으음?”
“들어왔어, 블로흐야!”
가넷은 지하도시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무척이나 흥분했다. 하늘을 보니 확실히 막혀 있었다.
돔 형식인가?
“일단은 믿어주지!”
사실 이곳이 우리가 있던 곳의 밑, 지하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장난치는 것일 수도 있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감히 이렇게 스케일 큰 사기를 키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믿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없다?”
“당연하지. 이걸 찾아낸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그럼 할 수 없다. 흩어져서 찾아보자!”
주위에 물어볼 사람도 없고 우리 쪽 인원도 적어서인지 가넷은 흩어져 찾아볼 것을 제안했다.
“괜찮을까? 아직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괜찮아. 위험해지면 네가 구하러 와주면 되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결국 가넷에게 넘어가고만 탓에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탐사를 시작했다.
나는 남쪽, 가넷은 서쪽, 아슈라는 동쪽. 위험하면 귓속말로 신속히 알리는 것으로 하고 탐사가 시작되었다.
“흐음, 큰 건물 위주로 조사해봐야겠군.”
작은 건물들까지 치면 수십, 수백에 이르기 때문에 비교적 큰 건물들을 중심으로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번째 건물에 들어 가봤다. 인기척은 전혀 없고, 뭔가 제사를 지내던 장소인 것 같다. 이럴 경우 석판이 신과 관련된 물건으로 많이 쓰일 수 있어서 샅샅이 뒤져봤지만 헛수고였다.
두 번째 건물. 이곳도 종교 쪽과 관련된 곳인 듯했다. 여기저기 종교 의식에 쓰이는 용품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떨어져 있었고 외부의 공기가 통하지 않는 지하라서인지 보존도는 아주 좋았다.
뭐, 그래봐야 내가 역사학자 같은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만.
“살려줘!”
가넷의 목소리였다.
세 번째 건물을 돌아보려다가 다급한 가넷의 비명소릴 들은 나는 다 내팽개치고 가넷이 이동한 서쪽으로 죽을힘을 다해 뛰어갔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가넷!!!”
“태, 태연아……!”
“또 너인가? 번번이 고맙군 그래. 크핫핫핫!”
회속 로브의 사내는 가넷의 팔목을 발로 지그시 밟으며 그녀의 손에 들린 석판 한 조각을 주워들었다.
“카오스 마스터!”
<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