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룡 전쟁 (35/43)

#마룡 전쟁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뭘 한다?”

가넷이 돌아올 때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는데 할 일은 없었다. 이 찝찝한 기분을 날려버리려면 뭐든지 몸을 움직여야겠는데 마땅한 일이 없는 것이다.

“흐음, 오랜만에 퀘스트나 할까?”

목적 없이 돌아다니기보단 작지만 그나마 목적을 갖는 것이 좋다는 판단 하에 의뢰소로 향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의뢰의 레벨은 A급 후반까지지만 간단히 몸을 푸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C급 몬스터 처지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파티용 퀘스트이니 심심하진 않겠지.”

그 퀘스트 레벨의 유저 혼자서는 힘들고, 파티 단위로 구행하면 알맞다는 파티용 퀘스트를 혼자 해결하는 것이니 C급이라 해도 제법 몸을 움직여야 할 거다.

목적지는 그로티우스 산맥의 초입. 잡아야 할 몬스터의 종류는 코볼트. 숫자는 100마리였다. 다른 곳에서도 코볼트를 찾을 수 있겠지만 굳이 위험하게 그로티우스 산맥으로 향하는 이유는? 지하나 광산에 많이 서식하는 코볼트의 특성상 알려지지 않은 광산이 많은 그로티우스 산맥에 많이 출몰할 거라는 계산이다. 눈에 띄는 드래곤 슬레이어보다 아직은 좀 더 손에 익은 그림자의 단검을 꺼내고 스크롤을 통해 산맥 인근 마을로 이동했다.

“거기, 튼튼히 동여매!”

도착한 마을은 방책을 세우느라 분주했다. 어라?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방책을 세우는 거지?

“저걸 왜 세우는 거죠?”

“요즘 그로티우스 산맥 쪽에서 흉폭한 몬스터들이 내려와 이 근처 마을들을 파괴한 답니다. 그래서 마을 청년들이 그들을 막아보려고 저렇게 방책을 세우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걸로 그 흉폭한 놈들을 막을 수 있을지…….”

근처의 NPC에게 물어봤더니 자세히 설명해줬다. 갑작스런 몬스터들의 습격이라, 분명히 난 명령한 적 없는데? 음, 그로티우스 산맥의 던전에는 가지도 않았으니 던전에서 흘러나온 녀석들도 아닐 테고. 뭔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군.

“혹시 이게 제롬이 고블린에게 속삭였던 그것인가? 아니야. 고작 몇몇 몬스터의 마을 습격을 그렇게 감출 리는 없어.”

재빨리 머리를 굴려봤다. 그 동안 잠잠했던 몬스터들이 갑자기 마을을 습격한 이유가 무엇일까. 몬스터들의 반란? 몬스터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강력한 흑마법사의 등장? 그것도 아니면…….

“에이, 그건 말도 안 되지. 마인 이벤트로 그렇게나 피해를 입혔는데 그런 무모한 짓을 하려고?”

마지막 떠올렸던 생각은 머리를 흔들어 털어내 버렸다. 일단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선 놈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되짚어 올라가는 것이 필요할 듯했다.

“몬스터다!”

때마침 마을 청년드르이 외침이 들려왔다. 그와 함께 무기를 꼬나 쥐고 달려가는 몇 명의 유저들. 이곳에서 마을 수비에 관한 퀘스트를 받고 지키던 중인 듯싶었다.

“그럼 몬스터들의 처리는 저들에게 맡기고 난 뒤를 밟아볼까?”

아무런 수확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시도도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 하에 방책을 넘고 몬스터들이 온 길로 달려갔다.

“추적!”

선명하게 찍혀 있는 몬스터들의 발자국에 대고 중얼거리자 발자국들 주위로 파란색 테두리가 둘러졌다. 추적은 이것을 쫓아가면 되니 몬스터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만 하면 된다. 뭐, 들킨다 해도 조금 수고스러워질 뿐이겠지만.

“으흠, 뭔가 구린 구석이 있군.”

추적하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느 한 지점에 상당수의 몬스터가 몰렸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찍혀 있는 것이다. 그 발자국들은 분명히 마을을 습격한 몬스터의 수보다 훨씬 많았고, 모이기 위해 이동해 온 방향도 각기 달랐다. 즉, 누군가 이곳으로 몬스터들을 불러 모았다가 다시 흩어 보낸 것이란 소리다.

“뭔가 있는 게 확실해. 기다려보자.”

또다시 몬스터를 불러 모으는 장소가 이곳이라 장담할 순 없지만 그래도 그나마 확률이 있는 곳이라 조용히 하이딩을 한 채 기다려보기로 했다. 받아놓은 퀘스트가 C급이긴 하나 파티용 퀘스트라 시간은 넉넉했고, 겨우 C급 퀘스트를 포기한다고 해서 내게 큰 불이익이 돌아오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크루루!”

“크륵!”

“끼릭!”

반나절이 지나서야 커지는 웅성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어지간히도 할 일이 없지 않았으면 참지 못하고 코볼트나 잡으러 갔을 테지만, 지금은 코볼트를 사냥한다 해도 여전히 심심할 것이기 때문에 참고 견딘 것이다.

“크흐흐흐, 다들 모였군. 지금부터 인간의 마을을 공격한다. 이번엔 강도를 조금 높여서……. 30마리씩 뭉쳐서 습격하도록. 실패해도 도망쳐 오진 마라. 만일 실패하고도 도망쳐 온다면!”

순간, 몬스터들에게 명령하던 사내의 눈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약 200의 몬스터들.

저건 설마……?!

“드래곤 아이?”

드래곤 피어와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체를 겁에 질리게 만든다는 드래곤만의 권능. 정말로 저것이 그 드래곤 아이라면 저자는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는 소린데……. 흑발에, 내가 마인이었을 때와 비견 될 만큼 탄탄한 근육. 수려한 외모. 자세히 뜯어볼수록 드래곤일 확률은 높아져만 갔다.

“이만 가봐라!”

삼삼오오 짝을 지은 몬스터들은 30명을 딱딱 맞춰서 각기 이동 경로를 택해 움직였다. 몬스터들이 사라지고, 드래곤의 출현을 알리기 위해 움직이려다가 더 이상 알릴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만 나오시지?”

블랙 드래곤-으로 추정되는-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길, 발각당한 건가?

“크흐흐흐! 그래, 죽을 준비는 다 됐겠지?”

“흥, 누가 순순히 죽어준다고 하더냐? 죽는 건 오히려 네놈이다!”

“흐흐흐, 재밌군. 그렇게 나와야 나도 데리고 노는 재미가 있지.”

각자의 무기를 겨누는 오인조를 블랙 드래곤은 장난감 취급했다. 드래곤이란 걸 알면서도 검을 겨눈다는 것은 꽤나 높은 레벨의 유저란 소린데……. 과연 본체로 현신하지 않은 드래곤에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스톤 엣지!”

몰래 주문을 외운 마법사의 공격을 시작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의 머리 위로 빠르게 떨어지는 바윗덩어리.

“겨우 이거냐!”

“피해!”

아주 가까이까지 내려온 바위를 피하지 않고 있던 드래곤은 한 손으로 바위를 막아내고, 오히려 그것을 오인조에게 집어던졌다. 저 정도면……. 마인의 힘과 거의 동급?

“이 빌어먹을 자식!”

바윗덩이를 받아낸 힘만큼 던지는 힘도 강했기에 마법사가 피할 수 있는 수준의 속도가 아니었다. 결국 넷만 간신히 피하고 마법사는 바위에 부딪힌 충격으로 아웃. 이번엔 기사 둘이 좌우로 나뉘어 달려들었다.

“하압!”

채앵!

“……?!”

어찌나 마나를 불어넣었는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은 검을 드래곤은 맨손으로 잡아챘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드래곤의 손에도 똑같이 뭉쳐 있는 마나. 즉, 수강 때문이었다.

이놈도 소위 말하는 변종 드래곤이란 거야? 드래곤인 주제에 무술까지 익힌?

“으으윽!”

“선더, 더블!”

“제기랄!”

하늘에서 두 줄기의 낙뢰가 검을 봉쇄당한 둘을 노리고 달려왔다.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날렸지만, 기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검은 드래곤의 손에 들려진 상태. 그들도 노련한 기사이니 여분의 검쯤은 있을 테지만 그만큼 힘의 차이도 잘 느낄 것이었다. 그들은 절대, 드래곤을 이길 수 없다.

“내게 칼을 들이댔으니 자비를 바라지 마라. 클라우드 킬!”

리치들의 손에서 펼치는 것을 수차례 보았던 죽음의 구름이 순식간에 사방을 덮었다. 리치들이 쓰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공간 장악 속도와 색의 짙음. 다행히 내가 있는 곳까진 오지 않았지만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과연 드래곤……!

“후후후, 곧 이런 놈들은 지겹도록 볼 테니 벌써부터 힘 뺄 필요 없지.”

유유히 녹색 구름을 뚫고 하늘로 떠오른 드래곤은 산맥의 깊은 곳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곧……지겹게 본다고?

“운영자들이 미쳤군. 안 그래도 마인 이벤트로 전체적인 유저 레벨이 내려갔는데 벌써부터 드래곤으로 이벤트를 하면 어떻게 막아내라고……. 에휴, 운영자들도 생각이 있다면 뭔가 대책을 세워뒀거나 지금은 기반을 다지는 정도로 해두겠지. 윈드!”

많은 마나를 투자해서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죽음의 구름이 멀리 날아가도록. 그리고……. 오인조가 남긴 아이템이 잘 보이도록.

“오! 이 녀석들 꽤나 부자였군?”

드래곤에게 빼앗겼다 버려진 두 자루의 검은 둠 블레이드로 레어급에 속하는 희귀 물품이었고, 나머지 부츠, 망토도 꽤 고급에 속하는 방어구였다. 어디에 속한 놈들인지는 몰라도 속 좀 쓰리겠군.

“돌아오기 전에 얼른 도망가야겠지?”

드래곤이 무서워서 지금 당장은 오지 못할 테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드래곤이 사라졌다는 판단이 서면 아이템을 찾으러 다시 올 것이기에 난 서둘러 자리를 떴다. 목적지는 당연히 코볼트가 출몰할 산맥 곳곳의 동굴들. 둠 블레이드 한 자루가 이런 C급 퀘스트 수백 번 완료하는 것보다 값어치 나갔지만 딱히 할 일도 없고 받아놓은 것 안하는 것도 상당히 찝찝하다.

“자, 이번 목표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손에 익히는 거다. 응?”

첫 번째 동굴. 입구부터 코볼트가 잔뜩 몰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기쁜 마음에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들었더니 덤벼야 할 코볼트들이 오히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뭐야, 드래곤 슬레이어에 공포 효과도 있는 건가?

“이거야 원. 일방적인 학살이 되겠군.”

그래도 손에 익는 것은 어느 정도 충족 될 것이기에 양팔을 늘어뜨리고 동굴을 향해 달려갔다.

“하아앗!”

100마리의 코볼트를 찾아 죽이기까지 모두 다섯 개의 동굴을 돌았다. 입구에는 코볼트가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엉뚱하게 놀, 리자드맨이 있는 경우가 허다해서 꽤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지만 그런 대로 만족할 결과이다. 아직까지 공포의 효과에서 벗어난 몬스터는 없었으니까.

“확인!”

[드래곤 슬레이어 : 이도류]

고대의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고룡 세이나스를 잡고 얻은 드래곤 본으로 만든 전설의 무기 중 하나.

내구력 : 무한(영구적 보존 마법)

특수 능력 : 마력 증폭. A급 이하 몬스터에게 공포 효과

????????????

“드래곤 슬레이어가 전설의 무기이긴 하지. 내구력과 마력 증폭은 이미 경험했고, A급 몬스터라면 오우거쯤 되려나? 그런데 저 물음표들은 대체 뭐야?”

확인 스크롤을 사용했는데도 밝혀지지 않는 내용이 있었다. 물음표라? 잘못 표시 된 건 아닐 테고, 나 스스로 알아내라는 건가?

“뭐, 까짓것 쓰다보면 언젠가 알게 되겠지. 나밖에 없는 무기이니 다른 사람이 먼저 비밀을 풀어서 낭패 볼 일도 없을 테고.”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의뢰비를 받기 위해 의뢰소로 이동했다. 솔직히 C급 퀘스트 하나 처리하자고 텔레포트 스크롤을 남발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내가 언제 돈 걱정 했던가? 걸어가는 시간에 사냥을 하면 훨씬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으므로 아끼지 않고 스크롤을 찢었다.

“아, 저기 왔다!”

이제 레이지의 길드원도 아니니 더 이상 크게 귀찮을 일 없을 거란 생각에 가면을 벗고 다녔더니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가만, 저들은…… 아까 그 오인조잖아?

“콜로니스트님?”

“예. 맞습니다만…….”

설마……. 아까 집어먹은 아이템을 돌려달라고 온 건 아니겠지? 흠흠, 그래. 흔적도 안 남겼고. 저들은 내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니까…….

“드래곤 일로 왔습니다.”

커, 컥! 젠장, 누가 날 본 건가?

“험험,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다른 곳으로 가서…….”

“아,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가시죠.”

오인조는 순순히 다른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줬다.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엎어버렸을 텐데, 꽤 참을성이 좋은 녀석들이군. 그렇게 하면 못 돌려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가? 다행히 증거는 없나보군.

“그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온 이유는 드래곤…….”

“자, 여기…….”

“……을 잡는데 협력해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몇 시간 전에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들으셨겠죠?”

“……에?”

둠 블레이드를 돌려주려고 품안에 손을 넣는 순간, 오인조 중 리더로 보이는 사내의 입에선 전혀 쌩뚱맞은 소리가 나왔다.

드래곤을 잡아? 드래곤한테 죽으면서 드랍한 아이템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이런, 못 들으셨나 보군요. 게임 시간으로 약 일곱 시간 전에 블랙 드래곤 한 마리가 그로티우스 산맥에 나타났습니다. 몬스터를 조종해서 그 근처의 마을을 공격하고 있더군요. 저희는 우연히 산맥 근처의 마을에 갔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몬스터들이 왔던 길을 되짚어 가본 것인데 예기치 않게 드래곤의 이목에 걸려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싸웠다가 참패를 당했지만……. 전력을 보강해서 간다면 자신 있습니다.”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 한 상태에서도 상처 하나 못 낸 것들이 자신감만 하늘을 찔렀다.

후우, 이론상으로라면 놈이 본체로 현신한다 해도 드래곤 슬레이어로 상처를 입힐 수 있겠지만…….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다.

“그래서 인원은 얼마나 보충해서 가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드래곤이다 보니……한 20명?”

“농담 잘 들었습니다. 재미있군요. 그럼 전 이만…….”

“아, 아니. 콜로니스트님!”

“전 자살하는 취미가 없거든요. 그러니 제게 확실을 주실 수 있을 때 다시 찾아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말 그대로 어떤 사람으로 보강을 해가든, 고작 25명 정도의 인원으론 자살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저놈들이 드래곤에게 아이템을 바치러 갈 만큼 부자일 줄은 미처 몰랐군.

“아론 등에게도 연락을 해놔야 하나?”

나에게 왔다면 아론 등에게도 갈 확률이 높았으므로 즉시 귓속말을 돌렸다. 혹시나 꼬임에 넘어가서 괜한 죽음을 맞이하지 말라고. 아론이 혹시라도 거인의 단검을 드랍하는 날에는…….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그나마 본체로 현신한 드래곤에게도 통할 것 같은 무기니까.

“오리하르콘 소드도 통하기야 하겠지만 본체로 현신한 드래곤에게는 가시에 찔린 것만 못한 상처겠지.”

거인의 단검과 오리하르콘 소드는 낼 수 있는 크기에서부터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 후로 게임 시간 오일이 지나고, 두 가지 소식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었다.

“멍청한 자식들, 결국은 일을 저질렀군!”

[첫 드래곤 원정대 무참히 패배]

원정대로 인해 화가 난 드래곤이 인간들과의 전쟁을 선포함. 이벤트 명 ‘마룡전쟁’. 운영진 측에서는 원래 지금 진행될 이벤트가 아니었으나 AI의 판단에 의해 변경되었다고 함. 회사 방침 상 되돌릴 순 없으므로 유저들이 잘 헤쳐 나가야 한다는 입장.

모처럼 홈페이지를 뒤적여 보려고 접속했다가 발견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사건이었다. 가넷이 여행에서 조금 더 늦게 돌아온다는 아슈라의 메일이 기분이 상해 있던 터라 더 화가 나는지도 몰랐다. 드래곤은 진짜 AI이니 사정 봐줄 리도 없고……. 잘못하면 진짜 ‘멸망’까지도 갈 수 있는 노릇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번엔 지키는 입장이니 뭔가 수를 내야겠는데 이미 레이지에서 추방당해 전에 비해 모을 수 있는 유저들의 수가 적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략에 전자도 모르는 거트 형에게 맡기자니 진짜 세상을 말아 먹을 것 같고……. 이번엔 더 메지션 쪽에 붙어야 하나?

“가만, 게다가 드래곤 슬레이어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또 골치 아파 질 텐데……? 환장하시겠군. 일단 접속이나 해보자.”

아직 드래곤이 이끄는 군대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구성은 어떤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더 모을 정보도, 세울 계획도 없으므로 일단은 접속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마을 안은 여느 때보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곧 쳐들어 올 드래곤의 군대 때문인지 비싸디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상점은 북새통을 이뤘다.

역시 전쟁 나면 가장 잘 팔리는 게 소모형 아이템이다. 아무래도 나중에 가면 구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자비의 신 이스피넬을 믿으십시오.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신의 영역엔 손을 대지 못합니다. 이스피넬을 믿고 구원을 얻으십시오.”

이제는 별 희한한 사이비 종교까지 생겨났다. 하긴, 이렇게 복잡하고 소란스러울 때는 사이비 종교가 한몫 잡기 좋지. 힘들수록 절대자를 찾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저런 것들을 보면 짜증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일단 펍으로 향했다.

다들 예전 RPG게임을 하던 버릇이 있는지라 정보를 얻으면, 혹은 얻고 싶으면 펍으로 오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회사 측에서도 펍의 주인에게 방대한 양의 정보를 주입시켰고, 또 계속해서 최신 정보를 주입하고 있다. 난 일행이 없는지라 일단 바에 앉아서 사람들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으흠, 그러니까 전쟁을 선포해놓고 아직까진 잠잠하다 이거지?”

“그래. 그로티우스 산맥 인근의 몇 개 마을이 전멸 당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더군. 아마도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라 생각 되는데…….”

콰앙!

펍의 문이 박살날 정도로 벽과 부딪치며 한 사내가 다급히 들어왔다.

“세티스, 떴다!”

“뭐?”

상황 설명하던 사내가 세티스인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떴어. 드래곤의 군대! 지금 비코 영지 쪽 능선을 타고 내려온대!!”

“숫자는?”

호들갑 떠는 사내에 비해 세티스라는 자는 제법 침착한 모습으로 하나하나 물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저번 마인 이벤트에서 나타났던 만티코어와 바포메트로 보이는 몬스터가 나타났대.”

“바포메트……!”

바포메트. 산양의 머리에 여성의 몸을 가졌다는 괴물. 만티코어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강해서 지금까지 잡았다는 사람을 손에 꼽을 정도인 최강급 몬스터 중 하나!

이쯤 되는 녀석들이 끼어 있다는 것은 드래곤도 결코 장난으로 병력을 모은 게 아니라는 소리다. 죽, 다 죽었다…….

“드래곤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판에 일 났군. 일단 가보자!”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비코 영지지!”

몬스터들도 할 짓 없어서 편한 산길 놔두고 비코 영지 쪽 능선을 탈 리는 없으니 비코 영지를 공격하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옳았다. 물론 나라면 몬스터들이 비코 영지를 공격하는 동안 단신으로 듀폰 영지라도 깨부수겠지만 드래곤은 은근히 폼을 중시하는 족속들이니 산맥에 홀로 앉아 상황을 지켜 볼 가능성이 크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틈을 타서 드래곤만 쓱싹 해버리는 건데……. 뭐, 결국은 그렇게 되겠지만 일단은 지켜보는 것도 좋겠지.”

술값은 선불로 지급했기에 단숨에 마셔버리고 나도 비코 영지로 이동했다. 어쩌면 거트 형과 마주칠 수 있겠군.

“물러서라!”

도착하자마자 한 사내가 내 가슴을 밀쳤다. 아니, 밀려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스물 정도 되는 수의 사내들은 사람들을 밀치며 공간을 확보했고, 곧이어 그곳에선 하얀빛과 함께 레이지 길드가 등장했다.

보통 국왕의 등장이라 하면 열렬히 환호해야 마땅하나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거나 그 이하였다.

“하긴, 세율이 그 모양이니…….”

아직도 세율은 50%였다. 더 이상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손 놓고는 있지만 확신할 수 있다. 이대로 가면 레이지 길드는 유저들의 손에라도 끌어내려진다. 과거 시민혁명이란 게 괜히 있던 게 아니다.

“음……. 들어가자!”

주위를 둘러보던 거트 형과 내 눈이 마주쳤다. 하나 모르는 사람처럼 철저히 외면. 이제 우리는 남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성문이 열리고, 레이지 길드원들이 들어갔다. 그리고 닫혔다.

“저 빌어먹을 자식들. 마인 이벤트 때도 해준 것 하나 없으면서 거드름 피우긴!”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비록 게임이라지만 일국의 왕이 됐으면 왕다운 모습을 보여야지, 여자 하나 때문에 세율을 50%로 올려? 저런 X새끼!”

레이지의 앞에서라면 입조심할 필요가 있었지만 다 성안으로 들어가고 없는 이 상황에선 그들에 대한 욕이 난무했다. 그리고 그들의 행패 때문인지 내가 내전을 벌인 것도 소문이 왜곡돼서 저들이 날 두려워해 추방시킨 걸로 퍼져 있었다. 아마 저들의 평판이 좋았다면 내가 권력에 눈이 멀어 길드장의 뒤통수를 때린 극악무도한 놈이 되었겠지. 뭐, 그랬다면 내전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만.

“그런데 어떻게 결정 날까?”

“어떻게 결정 나긴, 당연히 싸워야지. 그럼 항복이라도 할까 봐?”

“아니, 내 말은 정면 승부를 하느냐 농성을 하느냐 하는 거지.”

“헹, 수비라면 농성밖에 모르는 성 가진 바보들이 전면전을 생각이나 할까봐? 마인 이벤트 때 그렇게나 당했어도 또 농성을 하려 들걸? 기습을 하거나 전면전을 벌이려면 우리 일반 유저들끼리 힘을 모아야 할 거야.”

누군진 모르지만 하는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마인 이벤트 때 군대를 이끌었어도 성을 가진 놈들 중에 기습을 해오는 놈들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어쩌면 이번에도 정신 못 차리고 문 앞에 올 때까지 기다릴지 모른다.

약 30분 후, 에린 누나와 거트 형의 합의가 끝났는지 레이지 길드원 하나가 성벽에 올라 사람들에게 외쳤다.

“적 병력의 숫자와 구성이 밝혀 질 때까진 성을 지킨다. 일반 유저들도 쉽게 움직이지 말고 이곳에서 상황을 주시하도록!”

“뭐야, 지가 우리 상관이야?”

강압적인 레이지 쪽 포고문에 유저들은 분노했다. 사실 레이지가 어느 정도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그건 유저들의 협조를 얻고 행하는 통솔권이지 유저를 자신의 밑으로 보는 명령권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 권한은 비단 레이지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참, 더러워서!”

“저딴 것들은 저희들끼리 놀라고 하고 우린 우리대로 뭉칩시다!”

“옳소!”

민심이…… 돌아섰다. 아마도 이곳에 모인 유저들 중 8, 90%는 레이지의 깃발 아래 뭉치지 않고 따로 세력을 구성할 것이다. 나 역시, 그쪽으로 합류할 생각이다.

“이 정도의 대인원을 이끌려면 중심이 필요할 터, 여러분이 허락하신다면 나 파천무가 그 자리를 맡아보겠소.”

“와아아!!!”

파천무. 언젠가 한 번은 들어 본 적 있는 유저이다. 광오한 아이디만큼이나 실력은 출중하고 길드에는 들지 않는다고 했던가?

“환호해 주셔서 감사하오. 여러분이 주신 이 자리를 더럽히지 않으리라 맹세할 터이니 많은 협조 부탁드리겠소.”

파천무는 포권을 취하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거, 이름도 중국식이더니 말도 그쪽으로 하는군? 재미있는 녀석이야.

“그럼 1차적인 공격조를 만들겠소. 저레벨 유저들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처음은 고레벨들이 가서 상대 실력을 가늠해 보는 편이 좋지 않겠소? 고로, 90레벨 이상의 유저들은 이쪽으로 모여 주시오.”

파천무가 한쪽을 가리키자 발 빠른 이동이 이루어졌다. 꽤 많이 모였다. 이렇게 되면 한 번 더 거르겠군.

“음, 생각보다 고레벨 분들의 수가 많구려. 그럼 혹시 마스터 레벨의 분들이 있다면 이쪽으로 나와 주시겠소?”

몇 명이 말없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걸음을 옮겼다. 이름이 밝혀지면 꽤나 시끄러워질 테지만 이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다는 게 내 판단이다.

“오, 아홉 분이나 되다니 생각보다 큰 전력이구려. 각자 소개 좀 해주시겠소?”

“리발. 클래스는 격투가. 아마 들어 본 적 없을 거요.”

“반톨. 클래스는 프리스트. 마찬가지일 거요.”

“알디. 클래스는…….”

두어 명 정도는 내가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의 유명인이었지만 나머지는 조용히 레벨만 올린 은둔자들이었다. 차례가 돌고 돌아 결국 나까지 왔다.

“마법사, 콜로니스트. 제법 이름은 알려졌다고 생각하는데……. 내 착각일지도 모르고.”

“코, 콜로니스트?!”

“오오오오!!!”

반응은 제법 뜨거웠다. 내전에 관해 퍼진 잘못된 소문 때문인지 오히려 전보다 더 추켜세우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니……. 한바탕 사람들의 함성이 떠나갈 듯 울리고 파천무가 말을 이었다.

“콜로니스트님이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을 이끌겠다고 나선 제가 민망해지는 군요.”

파천무는 어느 샌가 말투를 바꾸었다.

“아닙니다. 저에겐 이렇게 큰 자리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도 한 명의 유저로서 참여할 테니 계속 잘 이끌어주시지요.”

사실 이 많은 사람들을 이끈다는 게 너무 귀찮았다. 대단위 전투를 하려면 이것저것 생각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럼, 제가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예. 그러죠.”

대충 합의를 봤다. 파천무가 뻑하면 내게 조언을 구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대인원들 직접 떠맡지는 않은 것이다. 난 그냥 그걸로 족했다.

“그럼 여기 계신 아홉 분과 95레벨 이상의 유저 21분이 팀을 이뤄 정찰을 가도록 하겠습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적의 세력 파악이며, 다음 공격에 대한 논의는 이분들이 다녀오신 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각자의 장비를 점검하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어찌 보면 레이지의 결정과 비슷했지만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또 직접적인 확인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달랐다. 각 성에서도 정찰병을 보내 확인할 테지만 은밀히 하는 일이니 일반 유저들이 알아 줄 리 없다.

“이번 척후조의 지휘는 콜로니스트님에게 맡기고 싶은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희야 좋습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였다.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지만.

“그럼 부족하지만 제가 맡도록 하죠. 나머지 분들을 빨리 추려내 주십시오.”

파천무는 즉시 나머지 인원을 추리기 시작했다.

일단 자원하는 사람을 받고, 그 중에서 최고 레벨을 고르는 단순한 방법이었지만 딱히 탓할 생각은 없다. 단순한 정찰 임무이니만큼 굳이 클래스까지 따져가며 모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추려낸 인원을 데리고 매스 텔레포트로 비코의 서쪽 사냥터로 이동했다.

“반톨님, 부탁합니다.”

“예. 블레스, 블레스, 블레스, 블레…….”

특정 능력치가 아닌 전체적 능력치를 상승시켜 주는 축복마법. 그것을 모두에게 걸고 다시 서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비코 영지의 서쪽 사냥터는 그리 고렙존이 아니기 때문에 몬스터들이 우릴 방해할 수는 없었고, 유일한 장애물인 프리스트와 마법사들의 부족한 스태미나만 이따금씩 채워주며 계속해서 달렸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날이 밝았다.

“앗, 저기!”

“숨어!!”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도 씻지 못한 채 이동만을 계속하던 일행의 눈에 발 맞춰서 다가오는 대인원이 보였다. 선봉은 역시 오크! 숫자가 많은 만큼 소모형으로 쓰이고 있었다.

“으흠…….”

오크의 뒤에는 다수의 코볼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놀, 트롤, 오우거, 바포메트. 하늘에는 하피, 와이번, 만티코어. 확실히 눈에 띄는 놈들이 이 정도고 사이사이엔 정체를 알기 힘든 녀석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포메트가 맨 뒤? 드래곤이란 놈도 생각보다 멍청하군.”

중간쯤에 있을 줄 알았다. 다른 놈들을 방패삼으며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할 줄 알았는데 세 마리의 바포메트는 맨 뒤에서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저러다가 뒤에서 기습하면 제일 먼저 죽어나가지.

“뒤에서 공격하죠?”

“안 됩니다.”

“왜요? 이 파티로 지금 공격하면 바포메트 한둘쯤은…….”

기습을 가하면 바포메트와 붙어서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이들에게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 끝에 있는 것은 만티코어. 바포메트를 상대하는 동안 만티코어가 기습하면 당하는 것은 이쪽이다.

“아……!”

“마인 이벤트 때 저 만티코어를 죽인 건 더 메지션 뿐이고 그 과정에서 더 메지션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놈들과 바포메트가 협공한다면 사냥당하는 건 아마 우리일 겁니다.”

“그럼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너무 억울하겠죠? 마법사분들은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고의 광역 마법을 준비해주시고 궁수분들도 다수의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기술을 준비해 주십시오. 프리스트 분들은 디바인 실드를 준비해 주시고……. 전사 계통의 분들은 여섯 명만 제외하고 모두 전투 준비를 해주십시오. 혹시 여섯 분이 리턴을 사용하는 동안 적이 덤벼들면 강기를 날려 막는 겁니다. 일단은 저희가 척후조이니 임무를 완수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벼운 인사 정도는 괜찮겠죠.”

모두 자세를 가다듬었다.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고, 방어할 수 있게. 긴장감을 잔뜩 끌어올리고 그에 맞춰 마나도 최고조로 끌어 올렸을 때, 신호를 보냈다.

“선더, 더블!”

“체인 라이트닝!”

“헬 파이어, 더블!”

“헬 파이어!”

나의 선더를 시작으로 적의 후방을 향해 집중 포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바포메트라면 이 정도론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쪽은 피했다. 내가 노린 것은 만티코어! 이 녀석들 역시 죽을 거라 믿지는 않지만 그 충격으로 추락시키는데 의의가 있었다. 추락하면서 아랫놈들을 깔아버리고, 선더의 영향으로 또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거기다 만티코어가 우리에게 달려 들 수 없게 발을 묶는 역할도 하고.

“좋았어!”

“디바인 실드!!”

“리턴!”

그 사이 다른 마법사들이 사용한 광역 마법들도 큰 효과를 거두었다. 레벨 위주로 뽑다보니 나까지 마법사가 네 명밖에 안 되긴 했지만 인원에 비해 입힌 타격은 꽤 큰 것이었다.

마법이 작열하는 즉시, 기사들의 검강이 바포메트를 노렸고, 바포메트가 상쇄하는 동안 프리스트는 디바인 실드, 여섯 명의 기사는 리턴을 사용했다. 하지만 역시……. 다음 기습조를 편성할 때는 마법사의 수를 늘려야겠어.

“캬아, 조금 더 공격 했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다.”

기습으로 크게 손맛을 본 마법사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하지만 안전이 우선입니다. 일단 보고부터 하죠.”

더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하는 마법사를 뒤로하고 파천무에게 가보도록 했다.

적의 구성과 대략적인 병력의 수.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긴 했지만 그냥 기분뿐일지도 몰랐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흐음, 1만 명의 병력이면 드래곤의 군대치고는 너무 적은 것 아닙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습니다만, 저희가 본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기동력이 뛰어나거나 먼 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몬스터는 보이지 않으니 마법사 별동대를 만들면 바포메트나 만티코어 같은 보스급을 제외한 병력의 수는 수월히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흐음, 그렇군요. 역시 조심할 건 드래곤뿐인 이벤트라는 건가……?”

“글쎄요.”

마인 이벤트라는 대형 이벤트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시점에서 또다시 엄청난 유혈사태를 벌일 리가 없으니 ‘이번 이벤트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만들어 마인 이벤트 때의 보상을 해주기 위한 보너스 이벤트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파천무도 이쯤 되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우는지 다가오는 드래곤의 군대를 얕보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거, 위험하군.

“그럼 콜로니스트님께서 마법사들을 추려서 별동대를 맡아주십시오.”

내게 별동대를 떠맡기면서 파천무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자, 뭔가 꾸미고 있군!

“그렇게 하죠.”

대충 무슨 짓을 할지 보이긴 했지만 물증도 없고, 그런다고 해서 나에게 큰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니니 그냥 모른 척 했다.

본부로 삼고 있는 여관을 나와, 바로 마법사 별동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약 20명의 인원으로 잘게 쪼개 되, 전부 체인 라이트닝 이상의 광역 마법을 쓸 줄 아는 자들로 뽑고, 1회 기습에 1번씩 공격이라는 원칙도 주입시켰다. 공격 후 도망은 너무 먼 곳으로 가지 말 것이며, 금방 다시 돌아와서 재차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위치를 선택하도록 신신당부를 했다. 또한 조장에게 조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재량권을 주되, 1회 기습에 1번 공격이라는 원칙을 어기면 그 조의 조장은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렇게 대략 15개의 조가 만들어지고 서로가 처음 기습 공격을 할 위치를 정한 다음 연락책을 한 명씩 뽑았다.

“이번 일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타격을 입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침착하게 수를 줄여 가느냐입니다. 아직 시간은 많이 있고, 시간 내에 전멸시키지 못한다 해도 여기 있는 인원이면 전면전도 해볼 만하니 조급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각 조는 조장의 명령에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도 내게 할당된 19명의 조원들을 이끌고 매복 지점인 텔아몬 마을로 이동했다.

“아니, 여긴……·.”

“왜 그러십니까?”

텔아몬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나와 실이아드가 해놓은 그대로, 각각의 집은 불타 재로 변한 채 바윗덩어리에 박살이 나 있었고 나킨스의 저택은 거의 터만 남았을 정도로 무참히 파괴되어 있었다. 성을 제외한 다른 마을들은 자동 복구가 아니었던가?

“이곳은 어째서 아직 페어인 채로 남아 있는 거죠?”

“아, 모르셨습니까? 다른 곳이야 무차별 학살이었지만 이곳은 그 배은망덕한 마녀 실리아드가 퀘스트 형식으로 파괴한 것이라 복구가 안 된답니다. 별로 사냥에 중요한 지역도 아니라 유저들은 그냥 안 됐다는 생각만 할 뿐이니 죽은 마을 사람들만 불쌍하게 됐죠. 게다가 뻔뻔하게 실리아드는 아직도 마녀의 언덕에서 어슬렁거린다니…….”

“아직도……말입니까?”

“예. 운영자 말로는 마인 이벤트 때 살아남은 실리아드가 자신의 은인인 마인을 계속 기다리는 거라나 뭐라나, 그렇다던데요.”

실리아드에게 미인계에 이은 빅뱅을 시키면서 주었던 포션과 텔레포트 스크롤이 효과를 본 건가? 후후, 잘 됐군. 잘됐어.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곳에선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우리도 다른 이들처럼 기습 공격을 하지요. 비트님, 본부에 연락해 주세요.”

원래는 매복해 있다가 드래곤의 군대가 이곳을 지날 때 덮치려고 했었지만 폐허가 되어 숨을 곳도 마땅치 않은 이곳에선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아 계획을 수정했다.

쳇, 마인 이벤트만 아니었으면 매직 트랩으로 도배를 해버리는 건데…….

“적의 위치가 파악되는 대로 허리 부분을 칩니다.”

“허리요?”

“예. 허리 부분이 적의 레벨도 적당해서 위험하지도 않고 적의 이동속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거든요. 그리고 어차피 오크 같은 하급 몬스터야 성문에서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으니 공성할 때 주력이 될 중급 몬스터들을 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당장 연락하겠습니다.”

우리 조의 연락책을 맡은 비트가 본부의 연락 담당에게 귓속말을 보내는 동안 다른 이들은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해서 이동을 시작했다. 적들의 예상 이동 루트, 속도를 계산해서.

“이곳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이동하면 적과 조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미 3조, 6조, 17조가 기습을 한 뒤라는데요? 만티코어는 몰라도 바포메트는 지능이 상당히 높을 태니 경계가 심할 것 같습니다. 곧 5조와 11조가 합동 기습을 할 예정이었으니 저희가 기습한다는 말에 기회를 양보하겠답니다.

“이쪽 실력을 보겠다는 소리군.”

상황으로 봐서는 뭔가 특별한 전략, 혹은 힘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나라고 뭐 다를 게 없었다. 더구나 내 입으로 한 번의 공격만 하고 도망치지 않으면 조장의 권한을 박탈한다는 소리까지 했으니 말이다. 내가 엄청나게 대단한 히든 피스를 발견해서 대량 살상 스킬이 따로 있다든지 하는 것도 아니고……이거 죽겠고만.

“그래도 특별한 수를 쓰긴 써야 할 텐데……. 그걸 써볼까?”

오크들한테 큰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 떠올랐다. 트롤, 오우거에게까지 통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런 작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마스터 레벨이신 레조님은 저와 함께…….”

그리 대단한 작전은 아니지만 여차하면 나와 레조의 목숨이 위험해 질 수 있기에 제법 시간을 들여 설명했다. 조금 불안해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는 조원들. 어차피 잘못돼도 위험한 건 나와 레조뿐이니 밑져도 본전이라는 식의 표정이라 레조만 더 불안에 떨었다.

* * *

“선더!”

“선더!”

“헬 파이어!”

“체인……!”

두 줄기의 벼락을 시작으로 드래곤의 군대에 또 한 번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총 5번에 걸쳐 선빵을 맞은 만티코어는 상당한 타격인지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비틀댔고, 다른 몬스터들도 폭발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나 같이 강력한 마법들이라 피해는 컸지만 폭발은 그리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계속되던 폭발이 멈추자 바포메트는 손에 든 사이드를 휘두르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크루루!”

“제기랄, 개떼처럼도 몰려드는군.”

명령 때문에 마법을 쓰고 바로 텔레포트를 하지 못한 1조의 조원들은 3분 후, 방향을 잃고 잠시 비틀거리게 된다는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헤이스트 마법을 걸고 도주를 시작했다.

“미치겠군.”

슬쩍 뒤를 돌아보니 와이번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자신들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마리는 급강하하며 먹이 낚듯이 자신들을 채가려 하고 있었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두 사람이 날린 크고 작은 파이어 볼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폭발이 일어났다. 원래라면 파이어 볼 따위론 와이번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지만 눈앞에서 터진 파이어 볼은 와이번을 크게 놀라게 했고, 심지어 추락하는 상황까지 만들어졌다.

“나이스!”

비트는 한 건 했다는 생각에 소리쳤지만 그 뒤로 몰려오는 수십 마리의 와이번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렇게 와이번과 잡힐 듯 말듯 술래잡기를 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어스퀘이크, 더블!”

쿠구구구구구-!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의 근원지는 1조를 쫓고 있는 트롤, 오우거들의 한 가운데.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콜로니스트였다. 과거 오크 요새에서 단 한 번에 수많은 오크를 공포에 떨게 했던 마법이다. 그런데 그 마법이 중첩되었으니……. 하늘을 날던 와이번들조차 놀라서 움직이지 못했고 지상에 있는 몬스터들은 지옥을 맛봐야 했다.

“놈을 죽여라!”

바포메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몬스터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바포메트 본인의 힘이 아니라 그를 조종하는 드래곤의 힘이 섞여 들어간 까닭이다.

“크워어어!!!”

“무식하게도 달려드는군. 하지만 뭐, 그럼 나야 좋지.”

지진으로 인해 시전자인 콜로니스트의 주위로는 크고 작게 셀 수 없을 만큼의 틈이 생겼다. 떨어지면 어디까지 갈 지 모르는 나락이 생긴 것이다. 이미 어스퀘이크가 발동하면서 상당한 숫자의 오크, 트롤, 오우거들이 빠져죽었는데 또다시 몬스터들이 틈새는 생각하지 않고 달려드니, 이건……가만히 앉아서 죽는 꼴을 구경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취이익! 칙!”

피시시식!

오크 메이지 하나가 파이어 애로우를 날렸으나 실드를 담당한 레조의 마나를 이기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겨우 1써클의 마법이 한 번 실드를 건드렸을 뿐이지만 콜로니스트의 반응은 조금 오버라 할 정도였다.

“이제 가죠.”

“예? 벌써요? 이대로라면 조금만 더 있다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레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스퀘이크가 만든 틈새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열심히 빠져죽고 있다는 사실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제가 예민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법이 한 번 닿았다는 것은 계속 닿을 수 있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더 큰 공격으로 실드가 깨어지기 전에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비단 마법뿐 아니라 혹시라도 여기에 도착할지 모르는 오우거, 트롤이나 오크 궁수들의 화살도 걱정되고요. 그리고 아마 우리가 사라진 이후에도 저 틈새 때문에 상당수의 몬스터가 죽을 겁니다. 수를 줄인다는 점에선 확실히 한 건 한 거죠.”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하죠. 이미 다른 조원들도 이동한 것 같은데.”

레조는 1조원들이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동의에 스크롤을 꺼내 찢는 콜로니스트. 약속 장소가 기억되어 있는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이었다.

“매스 텔레포트.”

* * *

“이야, 대단했습니다. 콜로니스트님.”

돌아오자마자 조원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하지만 우쭐하는 기분이 들 수는 없었다. 만약 바포메트가 재빨리 나섰다든가 만티코어가 금세 회복하고 달려들었다면 모두가 죽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음……. 적의 남은 병력은 얼마나 될까요?”

“남은 조들이 기습을 가하고 나면 많아도 5천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크를 공격하는 조가 있다면 더 숫자는 줄어들 테고요. 그때쯤 각 조가 한 번씩 더 공격을 하거나 일제히 공격을 한다면 남는 건 만티코어, 바포메트 같은 보스급 몬스터뿐일 겁니다.”

“만티코어는 매번 기습 때마다 첫 번째로 공격당하기 때문에 그 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아까 만티코어의 상태로 보아 계속해서 기습이 이루어진다면 맥을 못 추고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건 바포메트뿐.

그들도 성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이 협공하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즉, 드래곤의 군대는 비코 영지에 닿기도 전에 전멸할 것이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고, 우린 이쯤에서 쉬면서 다른 조들의 소식을 기다리기로 하죠. 근처에 솜씨 좋은 식당 아시는 분?”

이 정도면 우리 할 일은 한 셈이고, 무리해 봤자 돌아오는 것도 없으니 밥이나 먹으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본부에는 나에게 뭐라고 할 누군가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저요! 제가 압니다.”

레조의 안내를 받으며 근처 식당에서 느긋하게 음식을 시켜 먹었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았음을 알았다.

“어라? 저건…….”

“파천무로군요. 다른 사람들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식당에 벽걸이 TV처럼 설치된 스크린엔 파천무 일당들이 블랙 드래곤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잡혀 있었다. 아마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나오는 장면을 알리려는 운영자의 특별 배려 쯤 되는 것 같았다. 물론 저들이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주로 기사 파티인가?”

“그런 것 같군요. 아무래도 마스터 아이템인 오리하르콘 소드를 믿고 저러는 것 같은데 오리하르콘이라면 상처를 입힐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저 파티로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군요. 히든 피스 발견자라든지, 뭔가 특별한 아이템을 지닌 사람들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고, 평범한 마스터급 레벨의 유저들만, 그것도 기사만 모아놓은 파티라니……. 이것으로 2차 원정까지 실패이겠군요.”

“앗, 시작한다!”

한 사내가 소리치자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으흠, 비싼 돈 내고 2층으로 올라왔기에 망정이지 아래에 있었으면 사람들에 가려서 화면도 제대로 못 볼 뻔했군.

“이 사악한 마룡! 너의 악행도 여기까지다!”

“사악? 악행? 훗, 웃기는 녀석이군. 내가 뭘 했기에 마룡이란 것이냐?”

“뭐? 뭘했냐니, 몰라서 묻는 것이냐!”

“그래. 몰라서 묻는다. 내가 모아놓은 몬스터들도 아직까진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뭐가 사악이고 악행이란 거지?”

“에, 그러니까, 그게……. 으으, 날 말로써 혼란스럽게 만들다니, 역시 마룡이군! 누가 당할 줄 아느냐? 문답무용! 쳐라!”

“우아아아아!!!!”

말문이 막힌 파천무가 억지를 부리며 공격 명령을 내리자 마룡은 코웃음을 쳤다. 그와 함께 덤벼드는 수십의 기사들.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선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드래곤은 본체로 현신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플레임 그라운드!”

드래곤의 손에서 뻗어나간 바람 같은 불길이 대지를 훑으며 지나갔다. 그리고 불길이 지나친 자리에 있던 자들은 다리 부분이 새까맣게 탄 채 바닥을 뒹굴었다. 가볍게 지나간 불길에 내제된 엄청난 열기 때문에 부츠 계열 방어구의 내구력이 다함은 물론, 다리에 화상까지 입은 것이다.

“포, 포션을!”

점프 등을 통해서 불길이 닿지 않았던 파티원들은 드래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다른 이들에게 포션을 뿌려주었다. 나라면 가만히 안 둘 텐데, 이제 보니 저 드래곤도 꽤 마음이 넓군?

“으윽, 방금은 우리가 방심해서 당했지만 이번엔 쉽지 않을 것이다. 전원, 검강!!!”

수십 명에 이르는 기사들이 일렬도 서더니 검을 들고 일제히 검강을 쏘아냈다. 이제 땅에서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상태. 하늘로 피할 수는 있지만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하늘로 뛰었다간 집중 공격을 당할 것이 뻔했다.

뭐, 드래곤쯤되면 플라이 마법이 대단해서 요리조리 잘 피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훗, 블링크!”

“아!”

블랙 드래곤의 회피 방법에 감탄했다. 일렬로 피할 곳 없이 날아노는 검강을 블링크 한 번으로, 그것도 바로 조금 앞으로 이동해서 피해버린 것이다.

이걸 생각 못하다니…….

“제기랄, 이번엔 시간차다!”

이번엔 각기 시간차를 두고, 또 한 사람당 여러 번의 검강을 뿌려댔다. 이거라면 정말 피할 수 없는 상황. 드래곤도 그렇게 느꼈는지 조용히 실드를 형성했다.

쿵! 쿠궁! 쿠구구궁!

드래곤이 실드 속에서 움직이지 않자 이때다 싶었는지 검강이 쏟아졌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실드. 깨어질듯 말듯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실드가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실드 안쪽에서 퍼져 나왔다.

“크아아앙!”

“본체…… 현신이군.”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블랙 드래곤의 본체라, 처음 보는군. 얼마나 강할지 한 번 볼까?

“크기에 겁먹지 마라! 그래봐야 몬스터일 뿐이다. 인간에게 사냥당하는 몬스터!”

“그 말…… 거슬리는군.”

순간, 드래곤의 눈빛이 변했다. 장난기 많은 눈에서 싸늘하고 무서운 눈으로. 뭔가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을 건드릴 느낌이랄까?

“스톤 엣지!”

“피해!”

콰앙!

자신의 앞으로 커다란 바위를 소환해낸 드래곤은 몸을 한바퀴 돌리며 꼬리로 바윗덩이를 날려 보냈다. 바윗덩이가 소환되는 즉시 피했기에 망정이지 압사당할 뻔한 파천무는 식은땀을 흘리며 땅속 깊이 박힌 바위를 쳐다보았다.

“으윽, 접근전이다! 덩치가 큰 만큼 붙어 있는 상태에선 별다른 힘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

파천무는 포기하지 않고 드래곤에게 달려갔다. 두 번째 직업으로 속도 중심인 것을 골랐는지 제법 빠른 몸놀림을 보이며 요리조리 마법을 잘도 피해냈다. 덕분에 몇 발은 동료들이 대신 맞았지만 드래곤의 본체에 찰싹 달라붙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으흐흐, 죽어라!”

티잉!

검강을 머금은 오리하드콘 소드드가 약간의 흠집만을 냈을 뿐, 튕겨져 나왔다.

저런 멍청이! 비늘의 결을 보고 검을 휘둘러야지!

“플레임 스트라이크!”

자신의 발에 달라붙은 파천무를 떼어놓으려 발을 몇 번 흔들던 드래곤은 심지어 자신의 발을 향해 6써클의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시전했다.

“이 미친놈!”

콰앙!

어떻게든 검을 박아 넣어 보려고 드래곤의 발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파천무는 어쩔 수 없이 발에서 뛰어내렸고, 플레임 스트라이크는 드래곤의 왼발을 때렸다.

“흥, 제 꾀에 제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려던 파천무는 그을린 자국 하나 없는 드래곤의 발을 보고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한 인간. 나에겐 6써클 이하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다는 걸 모르나 보군. 자, 이제 나에게 대항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이런 젠장, 그래도 상관없어! 다구리엔 장사 없다. 쳐라!”

파천무는 쪽수를 믿고 다시 한 번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클라우드 킬!”

“컥, 이건? 다들 숨 쉬지 말고 뛰어!”

클라우드 킬 특유의 녹색 구름을 알아본 파천무가 소리치자 다른 이들도 한 손으로 코를 막고 클라우드 킬의 영향권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플레임 링!”

드래곤이 손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자 원형의 불꽃이 생기며 클라우드 킬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비록 그 불꽃의 근처에서는 클라우드 킬이 사라졌지만 불꽃에 너무 가까이 갔다간 산소 부족으로 죽을 판이었기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가만, 클라우드 킬이 사라져?

“훗, 깰 방법을 자진해서 알려준 셈이군.”

“예? 그게 무슨…….”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보다 이만 일어나죠? 식사도 대충 한 것 같은데.”

조원들을 재촉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끝까지 보고 싶어 했지만 내 생각엔 저대로 끝이었고, 우리가 나가기 전에 사람들의 탄식과 함께 전멸을 알리는 글이 스크린 위에 떴다.

역시나.

“이제 다시 기습을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이대로 본부로 가서 기다리죠. 우릴 드래곤의 군대와 싸우게 해놓고 드래곤을 노리다가 실패한 자들의 표정도 볼 겸 말입니다.”

“하지만…….”

“아까 얘기했듯이 모든 조에서 한 바퀴 돌면서 공격을 끝내면 적들 중에 강한 놈들은 얼마 남지 않습니다. 성에서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죠. 성에 있는 사람들도 심심할 테니 그 정도 여흥거리는 남겨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대충 설득해서, 드래곤의 군대가 성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먹고 놀았다.

명색이 같은 조인지라 따로 행동하게 둘 수는 없어서 같이 사냥도 해가면서. 그렇게 삼 일쯤 지나자 성안이 분주해졌다.

너덜너덜해진 드래곤의 군대가 성 밖에 도착한 것이다.

“모든 조를 모아서 후방을 쳐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했듯이 이젠 저들의 여흥거리입니다. 남의 것까지 뺏어먹을 이유가 있나요? 우린 그냥 지켜봅시다.”

성벽보다 높은 곳이라면 관람하기 좋을 테지만 성벽보다 높은 곳이라곤 성 밖에 없으니 아쉬운 대로 여관을 이용해야 했다. 며칠 전 2차 원정처럼 중계를 해준다고 했으렷다?

“적들이 밀려온다!”

스크린 속과 문 밖에서 똑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 그대로 밀고 들어오는 몬스터들. 하지만 공성의 주축이 될 중급이 몬스터들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인지라 오크들만 계속해서 죽어나갔다.

“이거야 원, 상대가 안 되는군. 이기는 건 시간문제겠는데?”

끼이익!

너무 압도적인 차이에 흥미를 잃고 나갈까?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척 보기에도 고레벨인 듯, 온갖 화려한 아이템으로 장식한 유저 셋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일일이 사람들 얼굴을 쳐다보며 누군갈 찾았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기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리더니 곧장 내가 있는 2층으로 올라왔다.

“콜로니스트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래곤 원정대에 합류해주십시오.”

세 번 째 드래곤 원정대인가? 흐음, 드래곤 슬레이어를 사용한다면 가능성이 있을 법도 하지만……. 일단 이들이 누군지부터 알아야겠지?

“이런 걸 부탁할 때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밝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 실례했습니다. 저희는 엔젤하트 소속의…….”

엔젤하트라는 말에 주먹이 먼저 나갈 뻔했다.

이것들이 감히 누구한테 그딴 놈들과 손을 잡으라는 거야?

“죄송하지만 생각이 없습니다.”

“으흠, 정말 드래곤을 잡으실 생각이 없습니까?”

“예. 그러니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예의는 차리되, 한기를 풀풀 날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품에서 뭔가 이상한 종이를 꺼내는 사내.

뭐하는 짓이야?

“그럼 여기에 사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느 원정대에도 들지 않겠다는 각서입니다. 어길 시에는…….”

“하!”

기가 막혔다. 지들이 뭔데 나한테 각서까지 쓰게 만든단 말인가? 어길 시에는 보상금 3천 골드를 물라고? 내가 왜 이걸 지켜야 하는데?

“엔젤하트가 나한테 이런 것까지 쓰게 하랍디까?”

“그게……. 아무래도 경쟁자가 많다보니 이렇게 실력자들을 다른 곳에서 영입해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좋다는 판단 하에…….”

“잘 들어. 난 내가 내키는 대로 움직일 거고, 날 막으려하면 엔젤하트건 뭐건 다 박살내 버릴 거다. 알았어? 그리고 엔젤하트에게 전해. 니들이 드래곤을 잡으면 토끼가 브레스를 쏠 거라고. 알았어?”

각서는 집어서 불태워 버리고 당장에 세 사내를 내쫓았다.

제길, 저놈들 때문에 기분 더러워졌군. 엔젤하트, 네놈들이 내가 레이지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날 얕보는 모양인데, 언젠가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이 빌어먹을 자식들을 어떻게 망가뜨려 주지?”

끼이익!

엔젤하트를 폭삭 무너뜨릴 계획을 짜고 있을 때, 또 한 번 요란한 문소리가 들리며 고레벨 유저 다섯이 들어왔다. 좀 전의 셋과 같은 행동을 하는 이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다?

“아! 괜히 드래곤 들쑤셔놓은 놈들이군.”

다섯은 이번 모든 일의 원인 제공자들이었다. 한참을 1층에서 서성이던 다섯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역시나 2층으로 뛰어올라왔다.

“또 드래곤 원정대에 대한 얘깁니까?”

“예. 이번엔 진짜 자신 있습니다. 저희와 합류해 주십시오.”

“혹시 안 하겠다고 하면 각서라도 쓰게 할 참이오?”

“아뇨, 저희가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번엔 진짜 자신 있다니까요?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음……. 그런데 당신들은 누굽니까?”

“말해도 잘 모르실 텐데……. 그래도 얘기하는 게 예의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저희는 모두 친구인데 정상적인 클래스는 한 명도 없습니다. 제 이름은 현이고 직업은 현술사입니다.”

은빛 머리카락의 사내는 자신을 현술사라고 밝혔다.

현술사? 은사라는 개념이 있다는 건 알지만 스킬화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히든 피스 격인가?

“이쪽은 피에로, 직업은 광대입니다.”

그러고 보니 간단히 덧대 입은 갑옷 속에 피에로 복장으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옷이 보였다. 광대라……. 어떤 공격을 해서 레벨을 올릴 수 있던 걸까?

“그리고 이쪽은 루드라. 카드술사입니다.”

“카드술사?”

“예. 어떤 그림을 특수한 카드에 그리면 그에 해당하는 마법이 나가죠. 문제는……. 써보기 전까진 무슨 마법이 나갈지 모른다는 겁니다. 카드도 구하기 어렵고.”

그렇다고는 하지만 운 좋게 엄청난 마법이라도 찾아내면 대단할 것 같기는 했다. 아무래도 카드는 스크롤처럼 어떤 마법이든 즉시 시전이 가능한 것 같으니.

“이쪽은 파이오니어. 우연찮게도 콜로니스트님과 같은 뜻을 지닌 이름이죠. 직업은 탐험가입니다. 초창기에 여기저기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다닌 덕에 그런 직업이 생겼다더군요.”

탐험가, 대충 어떤 스킬들이 있을지는 짐작이 갔지만 전투 요원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싶었다.

“마지막으로 이 녀석은 음……. 직업은 바드립니다.”

“……!”

음이라는 이름에 다른 누굴 소개할 때보다 깜짝 놀랐다.

음이라면 내가 맨 처음 가입할 때 낭패보고 결정될 뻔한 이름이 아니던가? 어떻게 보면 그는 내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떤 녀석일까 했는데 바드라니, 설마 노리고 만든 건가?

“으흠, 그럼 함께할 사람들은 모았습니까?”

“아직은 부족하지만 곧 kaj지도 채워질 겁니다. 현재 마스터 레벨과 그에 준하는 유저 5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50명이라……. 결코 쉽게 모을 수 있는 인원이 아닌데 많이도 모으셨군요. 누굽니까?”

마스터나 마스터에 준하는 레벨의 유저 50명.

절대 쉽게 모을 수 있는 인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엄청 대단한 길드의 사람도 아니고…….

즉, 누군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린데 그게 누군지 알아야 합류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예? 누구냐니요?”

“당신들의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제 생각엔 결코 일반 유저가 그만한 인원을 모을 수 있을 리 없을 것 같은데요.”

“음, 역시 예리하시군요. 굳이 따지자면 레이지입니다.”

순간, 내 인상이 크게 구겨졌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레이지는 저희가 맨 처음 드래곤 원정을 했다는 것을 알고 후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거거든요. 대신, 자신들의 길드에서 몇 명이 합류하도록 해달라면서……. 하지만 정말로 몇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저희가 다리품 팔아서 모았습니다.”

표정이나 눈빛으로 보아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레이지, 나와 아론 등이 나가면서 영웅시할 인물이 필요했나보군. 길드원 중 몇을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으로 만들어서 전면에 내세울 생각이겠지.

“흐음…….”

확실히 이들에게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내 드래곤 슬레이어가 진짜 드래곤에게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지라니……. 꺼려지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아무래도 전 안 되겠습니다.”

“아아…….”

“대신, 저 이상의 실력자를 붙여드리죠.”

“오옷, 그런 실력자가 있었단 말입니까?”

“예. 제가 말하면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나 자신이니까…….

“그래 주신다면 저희야 정말 고맙죠. 그리고 죄송하지만 아론님과 글로린님한테도 말을 좀…….”

“흠, 알겠습니다. 연락하도록 하죠. 언제까지 모이면 되는 겁니까?”

“빠를수록 좋기는 하지만 내일 정오까지 이곳으로 모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원정대를 꾸리는 게 저희뿐만이 아니거든요. 엔젤하트에서도 드래곤 슬레이어를 노리고 있어서…….”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아참, 그 친구에 대해 너무 아시려고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성격이 별로 좋지 못하거든요. 이름은 스트입니다.”

다섯은 내게 주의사항을 듣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아론, 린에게 연락을 취해서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 내가 ‘스트’로 동참한다니 선뜻 승낙한 것이다. 난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잡다한 물품들을 사고 다음날을 기다렸다.

“스트!”

아론과 린이 팔짱 끼고 들어와서 나를 불렀다. 이젠 닭살 커플이 다 됐군.

“아론, 린. 준비는 다한 거야?”

“준비랄 게 뭐 있나?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곧 올 거야.”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현이 들어왔다.

“아론님? 글로린님? 그리고…… 스트님?”

“그렇소.”

일부러 말투를 조금 변화시켰다. 아론과 린도 대충 이해했는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현도 스트가 성격 안 좋다는 소리를 들었던지라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

현은 우릴 데리고 곧장 그로티우스 산맥의 아래로 향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수는 대략 6, 70명. 그사이 1, 20명을 추가로 모집한 듯했다.

“현, 서둘러야겠다!”

도착하자마자 피에로가 달려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일 있어?”

“그래, 저번에 비코 영지로 향했던 몬스터들은 그냥 척후조 같은 거였대.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숫자가 또다시 비코 영지로 향하고 있다나 봐!”

바포메트에, 만티코어까지 섞여 있는 1만의 병력이 척후조로 생각 될 정도면……. 이건 본대는 얼마나 많은 숫자란 말이야? 이거 환장하겠군.

“그거 큰일이군. 서둘러 드래곤을 해치우는 수밖에 없겠는데?”

“그리고 엔젤하트 쪽이 방금 이동하기 시작했대!”

“이런! 우리도 서두르자. 모두 집합시켜!”

엔젤하트가 먼저 출발했다는 소리에 다급히 정렬을 시키기 시작했다. 저들도 분명 길을 아니까 움직였을 것 아닌가? 이대로 있다간 그들이 드래곤을 잡는 동안 손가락 빨며 기다리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엔젤하트 쪽이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길을 아는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질서를 지켜서 신속하게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

“그럼 출발!”

다섯이 제일 앞에 서고, 그 뒤를 나와 아론, 린이 이으며 산맥을 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비코 영지를 치는 데 동원돼서일까? 도중에 습격해 오는 몬스터는 전혀 없었다. 뭐, 나왔더라도 순식간에 고깃덩이가 되었을 테지만.

“시험을……받아라.”

산길을 오르고 올라 평지에 도착하자 돌로 만들어진 골렘이 길을 막아섰다. 이거이거, 분위기로 봐선 가디언 같지?

“이상하군요. 전에 올땐 이런 게 없었는데.”

“아무래도 드래곤이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아서 만든 가디언 같습니다. 어차피 박살내지 않으면 못 지나갈 것 같은데 빨리 상대하고 끝내죠.”

“그렇군요. 제가 나서겠습니다.”

앞장서던 파이오니어가 뒤로 빠지고 현이 나섰다.

현술사라,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볼까?

“단!”

현이 손을 위에서 아래로 힘껏 휘두르자, 무언가 반짝이며 골렘의 팔이 떨어져나갔다. 은사 특유의 절단력에 스킬이 효용이 더해진 듯. 절단력 만큼은 대단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골렘은 심장을 파괴하지 않는 한 재생하죠.”

골렘의 떨어졌던 팔이 다시 날아와 달라붙었다. 드래곤이 만든 놈이니 만큼 심장에 있는 마나가 쉽게 떨어지지 않을 테니 직접 심장을 파괴하는 수밖에 없겠지.

“흐음, 그렇군요. 그렇다면……. 충!”

이번엔 현이 골렘을 향해 손을 뻗은 채로 손가락만 튕겼다. 그와 함께 들리는 둔탁한 소리. 고렘의 가슴에 조그만 점과 같은 구멍이 네 개 생겼다.

투두둑, 쿵!

순식간에 골렘이 바닥에 몸을 뉘었다. 아무래도 골렘의 심장에 은사가 틀어박힌 듯. 은사 끝에 추 같은 게 달려 있기야 했지만 꽤나 놀라운 정확도였다. 위력도 대단하고.

“대단한 능력이군.”

“과찬이십니다. 어서 가시죠. 다른 자들이 먼저 먹잇감을 채가기 전에.”

또다시 파이오니어가 앞장을 서고 이동을 시작했다. 평지를 지나자 다시 꼬불꼬불한 외길의 연속이었고 또다시 한참을 올라갔을 때, 평지가 나왔다. 머리 둘 달린 덩치 큰 오우거와 함께.

“트윈 헤드 오우거?”

“저거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잡았다는 사람은 없는 거 아냐?”

“이번엔 제가 해보죠. 안 되도 할 수 없지만.”

“야! 너 그걸 쓰려고?”

“할 수 없잖아. 저걸 그냥 쓰러뜨리려면 우리 쪽 피해도 엄청날 텐데.”

뒤쪽에서 웅성거림이 커지자 이번엔 루드라가 나섰다. 뭔가 대단해 보이는 카드를 들고.

대체 뭐기에 현이 저렇게 말리는 거지?

“아론!”

루드라가 실패할 경우, 힘으로 유일하게 놈과 맞설 수 있을만한 자는 아론뿐이기에 눈치를 주어 대기시켰다.

당당히 걸어 나가서 카드를 들고 외치는 루드라.

“카드 매직, 사신의 낫!”

높게 치켜든 카드에서 검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트윈 헤드 오우거의 등 뒤로 낫을 든 해골바가지 사신이 나타났다. 크게 낫을 들어 휘두르는 사신. 그 거대한 낫에 트윈 헤드 오우거의 목이 단박에 잘려나갔다.

“저걸……. 한 방에?”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위풍당당하던 트윈 헤드 오우거가 일격에 두 목이 다 잘리고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루드라가 상당히 지친 모습을 보였지만 포션 한 병이면 될 것이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엄청난 자들이었군.”

다시 앞장을 선 건 파이오니어였다.

평지 다음엔 또다시 비탈길. 이리저리 돌고 돌아가며 도착한 곳은 커다란 동굴 입구였다.

“가만, 저건 싸이클롭스?!”

“이런, 한 발 늦었군요.

두 마리의 싸이클롭스 시체가 바닥에 누워있는 걸로 봐서 우리보다 엔젤하트 쪽이 먼저 도착한 듯싶었다.

으흠, 그렇다는 것은 놈들도 만만치 않은 가디언들을 뚫고 왔다는 소린데 실력이 대단한가 보군. 쪽수가 많았거나. 뭐, 엔젤하트라면 여성팬 수백을 제물로 삼고 올라왔는지도 모르지.

“우리도 빨리 들어가죠.”

“제길, 리젠 됐다!”

바닥에 뉘어져 있던 싸이클롭스들의 시체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새로운 놈들로 교체되었다.

싸이클롭스 두 마리면 상당한 전력인데…….

“두 마리라? 저랑 피에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번엔 음과 피에로가 앞으로 나섰다. 천천히 하프를 꺼내는 음과 공 돌리기를 하는 피에로. 난폭한 몬스터를 앞에 두고 둘이 하는 짓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랄랄라~!”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싸이클롭스 앞으로 다가가는 피에로. 금세 공격받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싸이클롭스는 눈에서 빔도 쏘지 않고 멀뚱멀뚱 공 돌리기 하는 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후욱, 후욱!”

싸이클롭스의 코앞에까지 다가간 피에로는 갑자기 품에서 풍선을 꺼내 불더니 강아지 모양으로 묶어서 오른쪽에 있는 싸이클롭스에게만 주었다. 그러자 머리를 긁으며 강아지 모양 풍선을 받더니 피에로와 악수까지 하는 싸이클롭스.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때,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뭐? 너도?”

끄덕끄덕.

오른쪽에 있는 싸이클롭스에게만 풍선을 주자 왼쪽에 있던 싸이클롭스가 피에로를 불러서 풍선을 달라는 몸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에로는 외면했다. 화가 난 왼쪽 싸이클롭스는 손을 번쩍 들어 피에로를 후려쳤다.

“부, 분신술?”

싸이클롭스의 손바닥이 땅을 내려치는 순간, 피에로의 몸이 다섯으로 변했다. 이것도 광대의 기술인가?

“이제 시작이군요.”

띠리링~!

그제야 음이 연주를 시작했다. 아주 편안한 음색.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 소리에 화를 내던 싸이클롭스마저 고개를 돌렸다.

“싸이클롭스 A가 싸이클롭스 B에게 말했습니다.”

“응?”

“싸이클롭스 B, X발놈.”

“크으? 크으으으!!!”

말도 안 되는 가사에 놀라는 것도 잠시, 싸이클롭스 B로 명명된 오른쪽 싸이클롭스가 광분을 하며 왼쪽 싸이클롭스를 몽둥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진짜 저 말에 속았다는 거야?

“뭐 저런 어이없는……!”

“저게 음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사전에 피에로가 나서서 둘의 사이를 살짝 틀어놓으면 성공확률은 더 높아지죠. 이제 둘 중에 살아남는 놈만 사냥하면 됩니다. 똑같은 놈들끼리 싸우니 살아남는다 해도 남아있는 체력은 얼마 안 되지요.”

현의 말대로 싸이클롭스들은 엄청나게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치고, 박고, 물고, 꼬집고, 할퀴고. 약 오 분여간의 사투 끝에 살아남은 승자는 오른쪽에 있던 싸이클롭스였다.

“몬스터가 측은하게 느껴져 보긴 참 오랜만이군.”

콰앙!

그때, 동굴 안쪽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안에 먼저 들어간 엔젤하트가 뭔가를 벌이고 있다는 뜻. 사람들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두릅시다, 단!”

힘겹게 버티고 선 싸이클롭스는 현의 은사에 힘없이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장애물이 사라지자 재빨리 안으로 이동했다. 다들 각자의 무기를 빼들었고, 나 역지 두 자루의 드래곤 슬레이어를 빼들었다.

“크아아앙!”

멀지 않은 곳에서 드래곤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혹시 엔젤하트 놈들이 제법 타격을 준 건가? 이건 고통에 찬 비명소리?

“서둘러요!”

동굴 안이 제법 넓자, 옆으로 흩어져서 우르르 몰려가는 상황이 되었다. 소리가 난 곳은 정면. 안에서 조금씩 병장기 소리가 들리고 간간이 폭음도 들리는 것이 한창 전투 중인 듯싶었다.

“한 발 늦었군.”

“후훗, 늦었군. 안됐지만 드래곤은 우리 엔젤하트 차지야.”

엔젤하트 중 하 S놈이 금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잘난 척 말했다. 짜증나는데 저것들을 싹 베어버리고 드래곤을 잡아?

“가소로운 것들, 감히 누가 누굴 사냥한다는 것이냐!”

드래곤의 분노가 담진 크아아앙 소리와 함께 여자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래곤이 몸을 흔들 때마다 날아가서 벽에 처박히는 여성 유저들. 그러나 엔젤하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호, 니들 잘 걸렸다.

“동영상 촬영 시작!”

돌아가는 상황이, 결코 엔젤하트에게 좋게 돌아가지 않음을 느끼고 조용히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후후후, 이번에야 말로 매장시켜 주지.

“너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너희는 돕지 않을 것인가?”

“흥, 저들은 우릴 위해 죽는 걸 영광으로 아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우리가 왜 목숨을 걸어야 하지? 당신들 같은 민간인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스타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서 아이템을 갖다 바치거든.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 이 말씀이야.”

“그래서 끝까지 전투에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군?”

“당연하지. 몸으로 때우는 일 같은 건 천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우리같이 귀하신 몸은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만으로도 저들에게 힘이 되거든.”

천한 자라……. 멘트 한 번 제대로 날리는군. 니들은 이제 죽었다.

“상황이 저런 대도?”

“응?”

드래곤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여성 유저들의 수는 이미 30명도 채 못 됐다. 더구나 다들 지친 모습. 이제 전멸은 시간문제이지 않을까?

“이, 이럴 수가…….”

“으음, 차핫!”

엔젤하트 쪽을 한 번 쳐다본 여성들은 다시 한 번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역부족. 달려가기가 무섭게 날아든 화염구에 의해 까맣게 그을린 채 튕겨져 나왔고, 살아남은 이들은 일제히 엔젤하트를 바라보았다. 후퇴 명령을 바라는 듯한 눈빛이다. 그러나…….

“드래곤도 지쳐 있다! 공격! 우린 오늘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는 거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허명과 아이템에 대한 욕심에 빠진 엔젤하트는 오로지 공격 명령만을 내릴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려드는 여인들.

“버러지 같은 것들! 클라우드 킬!”

드래곤의 주위로 녹색의 구름이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덕분에 사력을 다해 달려들던 여인들은 모두 전멸. 엔젤하트는 이제 본인들만 남았을 뿐이다.

“전멸이군.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허, 험! 우리도 당신들 파티에 끼워주시오.”

엔젤하트가 태도는 물론 말투까지 바꾸며 부탁했다.

“그런데 어쩌지? 우린 고귀하신 분들이 바라봐 주는 걸로 힘이 나지 않는데. 보나마나 뒤에서 얼쩡대다가 드래곤이 잡히면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나눠 받으려는 수작이겠지. 꺼져라.”

“아, 아닙니다. 싸울게요. 싸워요!”

“그래? 그럼 니들이 앞장서라.”

“그, 그건…….”

음흉한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도 엔젤하트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며 끼어보려고 애썼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조금 골려줄까?

“그럼 이 연기를 마셔봐라. 이걸 마시고도 살아남는다면 끼워주지.”

내가 내민 병에는 녹색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실은 회복약 계열이었지만 클라우드 킬의 근처로 가서 그 구름을 병에 담는 시늉을 하고 왔으니 놈들에겐 죽음의 연기로 보일 것이다.

“왜, 싫어?”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아악!”

내가 병의 뚜껑을 열고 강제로 연기를 마시게 하려 하자 엔젤하트의 리더는 울고불고 발광을 하면서 난리쳤다.

좋아, 좋아. 아주 좋은 화면이 잡히는군. 계속 더 하라고!

“으허엉……. 그냥 갈게요.”

리더의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다른 놈들에게 들이밀었더니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가 숨 막혀 죽을 뻔하는 놈이 있질 않나, 엎드려 절까지 하며 한번만 봐주세요를 연발하는 놈이 있질 않나…….

“가라, 가.”

“흑흑, 고맙습니다.”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놈들은 눈물범벅인 채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도망쳤다.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는 녹색 구름. 이제는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시작하죠.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 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치지지직!

내 예상이 맞았다. 인페르노의 불길이 닿자, 녹색 구름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안에 숨어 있던 블랙 드래곤에게 데미지를 입혔다. 이건 놈의 비늘이 견딜 수 있는 6써클을 2단계나 넘어선 8써클의 마법이니까.

“크아아앗! 아이스 스톰!”

드래곤의 몸을 뜨겁게 달구던 인페르노에 상극인 얼음의 힘이 대항하기 시작했다. 아이스 스톰은 비록 6써클의 마법이었지만 드래곤이 쓰니 그 힘은 8써클 못지않았다.

밀고 밀리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같이 왔던 일행 중 하나가 내 옆으로 와서 거들었다.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그를 시작으로 하나 둘 씩 마법사 클래스 유저들이 내 옆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계속 밀리는 드래곤의 마법. 안 되겠는지, 드래곤은 다른 마법을 시전했다.

“글레이셜 게일!”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인페르노를 훌쩍 뛰어넘었고 10명의 마법사들이 힘을 합치는 것에 맞먹었다. 가만, 혹시 이건……?!

“10써클 마법인가?”

10써클의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많지만 10써클 마법서가 나오지 않아 그 누구도 배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막연하게, 이 마법이 10써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드래곤을 잡고 10써클 마법서를 얻을 수도 있다는 소리?

“그렇다면야……!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더블!”

이번엔 품에 잠시 넣어뒀던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들고 마법을 시전했다. 과연 헬 파이어는 지옥의 불꽃이라는 걸까? 다른 화염계 주문처럼 푸른색이 아니라 검붉은 색을 띄게 된 화염의 구는 인페르노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드래곤에게 쏘아져갔다.

“크아아악!!!”

잠시 후, 형세가 역전되어 쉴새 없이 밀리던 인페르노가 저항하는 힘이 사라짐에 따라 다시 드래곤의 몸을 뒤덮었다. 고통에 발광하는 드래곤. 덕분에 동굴이 흔들렸지만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빙결!”

쩌저저적!

순식간에 블랙 드래곤의 몸 주위로 크고 두꺼운 얼음이 생겨났다. 좋게 말하면 얼음으로 불꽃을 방어했다. 이고 나쁘게 말하면 불꽃을 피하려고 자진해서 얼음에 갇혔다. 상황이 되자, 마법사들도 한숨 돌렸다.

“인간, 그 검은 어디서 났느냐!”

딱히 누굴 지칭한 게 아니었지만 그것이 나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이렇다 할 검이라곤 아론의 거인의 단검과 내 드래곤 슬레이어뿐이니까. 그런데, 용언이라는 건가? 얼음에 갇힌 채로도 말을 할 수 있군?

“알아서 뭐 하게?”

“이런 건방진!”

쩌적!

드래곤이 화가 났는지 움직이려 했지만 얼음이 너무 두껍게 얼어서 움직이는 게 여의치 않은 듯했다.

아이고, 뻘쭘하겠네? 큭큭큭.

“그 검은 혹시 세이나스님의 뼈로 만든 것이 아니냐?!”

“음, 그러고 보니 그렇다고 했던 것 같군.”

“로드의 뼈로……. 빌어먹을 인간들, 죽어라!”

콰지직!

하얗던 드래곤의 눈에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이 버서커에 걸렸다는 증거였을까? 힘이 세졌는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얼음을 순식간에 박살내고 나온 드래곤은 우릴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젠장, 브레스다!”

“크오오오오오!!!!”

“모두 흩어져!”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7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우왕좌왕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그 자리를 지켰다. 블랙 드래곤에게 배운 바가 있으니 써먹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스트, 피해!”

“크아아아!!!”

“블링크!”

블랙 드래곤 특유의 에시드 브레스가 나를 덮쳐오는 순간, 내가 이동한 곳은 드래곤의 발밑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랙 드래곤은 힘껏 브레스를 내뿜었고 난 그 사이 놈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드래곤 하트에 한 방이면 크리티컬 히트렸다? 블링크, 하이딩!”

뒷목으로 올라갔음에도 브레스 쏘는데 정신이 팔린 놈은 전혀 알아채질 못했다.

“하압!”

푸욱!

드래곤 하트가 위치해있는 것으로 알려진 목젖 부근을 향해 힘껏 검을 박아 넣었다. 검강을 씌운 오리하르콘 소드도 튕겨 나온 비늘이었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앞에서는 무력했다.

“크아앙!”

종잇장 뚫듯이 쉽게 뚫고 들어간 검. 그러나 그곳에서 있어야 할 묵직한 손맛이 느껴지질 않았다.

드래곤 하트가…… 없다?

“커헉!”

찔림과 동시에 드래곤이 몸부림을 한 탓에 난 검과 함께 날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크윽, 치사하게 받아주는 놈이 하나도 없냐.

“빌어먹을 놈, 브레스 때문에 드래곤 하트가 목 위까지 넘어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군. 그레이트 힐!”

잠시 정신을 차렸는지 눈빛에 약간 흰자가 돌아온 놈은 상처를 치료하고 곧바로 눈 색깔을 바꿨다. 자기 편리할 때만 정상으로 돌아오기냐? 이런 치사한 자식!

[드래곤 슬레이어에 추가 정보가 생성되었습니다.]

“응?”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날 쫓고 있는 드래곤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하니까.

“뭣들 합니까? 공격해요!”

“아? 예. 공격!”

멍하니 나와 드래곤의 일대일 대결을 보던 현이 드디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쇄도하는 검강과 온갖 고위 마법들. 이쯤 되자 드래곤도 마냥 나만을 쫓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야 숨 좀 돌리겠네. 그럼 일단……. 확인!”

[드래곤 슬레이어 : 이도류]

고대의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고룡 세이나스를 잡고 얻은 드래곤 본으로 만든 전설의 무기 중 하나.

내구력 : 무한(영구적 보존 마법)

특수 능력 : 마력 증폭. A급 이하 몬스터에게 공포 효과.

드래곤에게 버서크 효과.

???????????????????

“이런 빌어먹을, 드래곤에게 버서크 효과? 이런 걸 왜 숨겨놓은 거야? 오호라, 제롬. 네가 날 엿 먹여 보겠다는 건가 본데, 최후에 웃는 건 누군지 볼까?”

언제부턴가 모든 걸 제롬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나였다.

“흠, 그럼 나머지 하나의 효과는 뭐지?”

“크아악!”

제길, 언젠간 이것도 생겨나겠지. 일단 발등의 불부터 끄고 보자!“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때문에 고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쪽 사정도 그리 좋지만은 못한 상황이었다. 기사들은 15미터 가량에 달하는 드래곤의 몸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다리만을 베어댔고, 마법사들도 드래곤과의 마법 싸움에서 이렇다 할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하던 루드라의 카드 마법도 미리 그려놓은 카드가 다 떨어졌는지 큰 효과를 못 보고 있었고 현의 은사는 드래곤의 비늘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그나마 큰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 아론의 거인의 단검과 린의 엘프 궁술. 아론의 검은 다섯 번을 쳐야 검이 비늘을 뚫을 수 있었지만 매번 칠 때마다 전해지는 충격이 적지 않아 드래곤을 크게 흔들어놓았고, 린은 집요하게 드래곤의 눈을 노려, 계속해서 시야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더블!”

“크윽, 리플렉트 매직!”

“크아악!”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개의 검붉은 구슬을 발견한 드래곤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상한 마법을 사용해서 반사해내 버렸다. 제기랄, 이것도 10써클 마법인가?

“생판 보도 못한 10써클을 이렇게 막 써대는 건 너무 하잖아!”

반사된 내 헬 파이어에 일격사한 기사, 마법사들을 뒤로하고 드래곤을 향해 달려갔다. 이미 발밑에서 얼쩡대던 몇몇은 커다란 발에 밟혀 죽은 상태였고, 아론을 비롯한 몇 명만 간신히 힘을 짜내서 지속적인 데미지를 입히는 중이었다.

“흐아아압!”

콰앙!

드래곤의 비늘에 아론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는 가히 철퇴가 부딪히는 소리와 맞먹었다.

확실히 생긴 걸로만 보면 아론의 거인의 단검이 훨씬 더 드래곤 슬레이어답게 생기긴 했지.

“크아아앗! 메테오 스웜!”

“튀, 튀어!”

마인 이벤트 때 뱀파이어들을 상대하면서 라노크가 쓴 메테오 스웜의 위력을 알고 있는지라 드래곤의 말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망칠 포즈를 잡는데 이미 떨어지고 있는 화염구들. 한데 이상하게도 낙하 위치가 내가 있는 곳이 아니라 드래곤이 있는 자리였다.

저 마법이라면 본인도 큰 타격을 입을 텐데 어째서?!

“아차! 아론, 린. 피해!”

콰광! 쾅! 콰과과과앙-!

뒤늦게 외쳐봤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내 목소리는 폭음 속에 묻혀 버렸고 구하러 가기는커녕 멀리서 전해져 오는 충격파에 실드를 만들어 보호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충격파가 가시고, 흙먼지가 뿌옇게 눈앞을 가리는 상황에서 짐작할 수 있는 생존자는 맨 처음 우릴 이끌었던 다섯을 포함한 마법사 대여섯 정도였다. 그들은 마나의 고갈, 또는 전력에 보탬이 안 되는 이유로 후방에 빠져 있었으니까. 즉, 살아는 있되 도움은 못 된다는 소리다. 만약 드래곤이 저걸 맞고도 살아 있다면 나 혼자 놈과 맞서야 한다는 건데…….

“죽겠군.”

“큭큭큭, 그래. 넌 죽는다.”

재수없는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

“젠장, 명줄도 길군.”

이상하게 말소리는 들려오는데 그 큰 덩치가 움직이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드래곤이 유희하면서 잠깐 어쌔신 기술을 익혔다든지 하는 황당한 설정을 내세우진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역시 빈사 상태? 좋았어!

“널 죽이기 전엔 절대 못 죽는다.”

“왜, 이게 갖고 싶으냐? 그럼 가져라!”

소리가 나는 방향을 파악해 뒀다가 그 방향으로 드래곤 슬레이어 중 하나를 힘껏 던졌다. 만약 저 방향에 있다면 반드시 잡아채 것이다. 그것을 잡아낼 여력조차 없지 않다면. 왜? 이게 세 뭐시기의 뼈라는 소리에 눈 뒤집힐 정도로 열 받아했으니까!

“감히 이걸 함부로……. 크윽!”

예상대로였다. 던진 드래곤 슬레이어를 잡았는지 스파크 같은 게 일어나며 위치가 드러났고 주인을 인식하는 기능에 따라 드래곤 슬레이어는 내 앞으로 자동 소환됐다.

“거기 있으렸다? 하이딩!”

이미 뿌연 흙먼지가 서로의 시야를 가려주곤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이딩까지 걸고 조심조심 드래곤이 있는 곳으로 돌아서 다가갔다. 정면으로 갔다간 눈먼 마법에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더듬더듬 이동했지만 블랙 드래곤의 커다란 몸은 전혀 감지할 수가 없었다.

소리치는 소리만 계속 들려올 뿐. 젠장할,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어디 숨은 거냐! 으득! 그래, 언제까지 숨을 수 있는지 보자. 거스트 오브 윈드!”

놈의 말에 따라 일진광풍이 몰아치며 동굴 안을 가득 메웠던 흙먼지가 걷혔다. 하나 둘씩 모습이 보이는 생존자들. 하지만 생존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드래곤의 공격에 의해서 빠르게 죽어나갔다. 하이딩 때문에 나는 못 찾고 있나 보군.

“상처가 있다?”

자세히 보니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한 놈의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잔존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너무 화가 나서 몸을 돌볼 새가 없었거나 치료할 여력이 없다는 소린데……. 그러고 보니 지금 날리는 마법들도 한결같이 낮은 클래스란 말이야?

“보아하니 후자 쪽이군?”

“나와, 나오란 말이야!”

“사, 살려줘!”

멍청하게도, 현과 루드라는 지금이라면 자신들의 공격이 통함에도 벌벌 떨며 다가갈 엄두를 못냈다.

저래서야 스킬이 아깝군!

“카, 카드매직. 번개의 창!”

비스듬히 눌러놓은 Z자와 같은 모양의 번개가 드래곤에게 쏘아져 갔으나 간단히 손바닥에 잡혀 소멸되었다. 더더욱 자신감을 잃은 현 일행들. 그러나 나에겐 자신감을 주는 장면이었다. 더더욱 자신감을 잃은 현 일행들. 그러나 나에겐 자신감을 주는 장면이었다. 번개를 잡았던 놈의 손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던 것이다. 몸 상태가 정상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놈이 지금 정상이 아니란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태라면 붙어볼 만 하겠군.”

“흥, 네놈 하나 정도는 충분히 눌러 죽일 수 있으니 걱정 말고 덤벼라!”

“눌러 죽여? 그러려면 본체로 현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폴리모프를 한 거냐? 폴리모프 중에는 본신의 힘을 다 쓰지 못하지 않던가?”

왜 본체로 현신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내 말에 드래곤이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그에 대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그 검 앞에서는 드래곤의 비늘도 필요가 없는게 굳이 큰 덩치를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지. 허점 많은 본체보단 차라리 작은 편이 낫다. 힘은 본체의 80%밖에 내지 못하지만.”

참 친절하기도 했다. 낼 수 있는 힘의 한도까지 알려주다니.

뭐, 그래봐야 80%가 얼마고 100%가 얼만지 알 방법은 없지만.

“그럼 이제……. 죽어라!”

“싫다!”

나름대로 기습을 노렸는지 쏘아져오는 드래곤. 하지만 이미 염두에 두던 바였고, 상처 등으로 속도가 많이 느려진 상태라 어렵지 않게 맞상대할 수 있었다. 아무리 손에 강기를 둘렀다지만 드래곤의 비늘도 꿰뚫는 검인지라 놈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거의 잽 수준의 견제만 계속해서 이루어졌고, 난 차분히 그것들을 막았다. 상대는 마나를 사용하고 나는 사용하지 않으니 이대로 계속하면 결국 승리하는 건 나라는 계산이었다.

“무기에 의지하다니, 비겁한 놈!”

드래곤은 계속해서 잽만 날리다가 나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훗, 말이 많다진다는 건 다급해졌다는 증거지. 서서히 마나가 떨어져 가나 보군?

“그럼 너도 네 뼈 뽑아서 만들어!”

“이익! 죽어라!”

“싫다!”

때리면 막고, 마법을 쓰면 쳐내고. 이 행동들은 한동안 계속 반복됐다. 갈수록 눈에 띄게 지쳐가는 드래곤. 하지만 계속하다 보니 나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바로 체력. HP에는 변함이 없어도 스태미나가 달려서 숨이 차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재수 없으면 내가 먼저 지쳐서 죽는다!

“으흠, 블링크!”

일단 접근전은 내 전공이 아닌 관계로 거리를 벌렸다. 재빨리 몸을 틀어 쫓아오는 드래곤.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벌리기 위해 백스텝으로 이동하며 주문을 외웠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더블!”

“헬 파이어, 더블!”

콰광! 쾅!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쪼개서 검붉은 파괴의 구슬을 만들어 쏘아냈다. 그에 맞서 재빨리 헬 파이어를 만들어내는 드래곤. 하지만 그 충격의 여파에 휘말린 건 그 혼자였다.

폭발이 일어난 뒤, 난 당장에 그 흙먼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휘청거릴 드래곤을 끝장내기 위해서다. 비록 이렇게 하면 드래곤 하트는 구경도 못하고 떨어지는 아이템도 격이 다를지 모르지만 죽는 것보단 이편이 낫다.

“하아압!!!”

“크앗!”

빠각!

두꺼운 나무판자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고개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얼굴에서 뭔가 떨어져나가는 느낌이 들여 시원한 바람이 스쳤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수강! 급히 양손을 놀려 막아냈지만 워낙 강한 힘이 실렸던 주먹인지라 크게 낭패를 보며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크헉!”

“크아악!!”

땅에 몇 바퀴 구른 뒤에야 겨우 정신 차리고 드래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날 때린 그곳에 그대로 서 있는 드래곤. 그러나 날 공격 했던 주먹은 검에 베여 못 쓰게 된 상태였다. 무리해서 검날을 쳤던 게 화근이었군.

“다, 단!”

옆에서 눈치만 보던 현이 조금 어색한 은사를 날려 드래곤을 공격했다.

저게 어디서 남이 다 잡아놓은 걸 거저먹으려고!

“비겁한 인간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더냐! 투스 오브 윈드!”

다행히도 드래곤은 은사에 당하지 않고 오히려 잡아챘다. 그리고 휘두른 손. 모여든 바람이 아가리를 쳐든 사자의 형상으로 변하며 난폭하게 현을 물어뜯었다.

“끄아아악!!!”

다음으론 덜덜덜 떨면서 두 장의 카드를 꺼내드는 루드라. 눈이 시뻘겋게 변한 드래곤이 한 발 한 발 걸어오자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주문을 외웠다.

“카, 카드 매직 퓨, 퓨, 퓨전. 도, 독가스 분사!”

“저런 멍청이!”

실수로라도 저런 놈에게 드래곤이 죽을까 봐 걱정하긴 했지만 루드라가 외치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마시던 포션을 뿜을 뻔 했다. 클라우드 킬 안에서도 아무런 효과를 안 받고, 브레스도 에시드 브레스를 쓰는 놈에게 쓴다는 게 독가스 분사아? 차라리 아까처럼 번개의 창이나 날릴 것이지. 뭐하는 짓이야?

“꺼져라!”

드래곤이 손을 휘젓자 그에게 뿜어지던 독가스가 방향을 바꿔 현 일행에게 퍼졌다. 별다른 독 저항력도, 방어할 마법도 없는 현과 파이오니어, 음, 광대는 그대로 독에 중독됐고, 독의 효과가 제법 강했는지 해독제를 마시기도 전에 부들거리다가 픽픽 쓰러졌다.

“코, 콜로니스트님. 도와주세요!”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져 뒤로 기어가던 루드라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가만, 콜로니스트라고? 그걸 저놈이 어떻게……. 내 변장이 들킨 건가? 그동안 아무도 몰랐는데 그럴 리……?!

“어, 없다?”

아까 뭔가 얼굴에서 떨어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을 떠올리고 얼굴을 매만지자 맨살이 만져졌다. 내 가면이 드래곤의 수강에 내구력을 다하고 박살난 것이다.

젠장, 이거 일 터졌군.

“크으윽, 와라!”

금방 바지에 오줌이라도 지릴 듯한 루드라를 뒤로하고 내게 멀쩡한 한손을 치켜드는 드래곤. 나는 곧장 덤빌까 하다가 루드라가 카드를 꺼내는 것을 보고 멀뚱멀뚱 루드라만 쳐다보았다. 내가 자세를 풀고 쳐다보기만 하자 이상한 낌새를 챈 드래곤. 뒤를 힐끗 보더니 화가 나서 그를 내리쳤다.

훗, 감히 내 것을 가로채려 들어?

“먹어라!”

또다시 왼손에 들고 있던 드래곤 슬레이어를 놈에게 던졌다. 이번엔 잡지 않고 피하는 드래곤. 놈에게 큰 여력이 없음을 확인하고 재빨리 달려들었다.

“흐아앗, 블링크!”

다섯 걸음쯤 뛰다가 블링크를 사용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곧장 드래곤의 가슴팍으로 뛰어든 상황. 드래곤이 움찔하는 사이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가슴을 향하는 검과 내 머리를 노리는 손. 곧 전해져 올 충격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손에 힘을 더했다.

푸욱, 챙!

“……?”

손끝에 묵직한 느낌은 들었지만 머리에 전해져 와야 할 충격은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실눈을 떠보자 내 머리 옆에 커다란 금속 하나가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정도 크기의 검이라면……?

“아론?”

“큭, 그래. 이젠 반쪽도 안 남은 검이라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도 쓰이는군.”

내 머리 옆에 버티고 있으면서 드래곤의 수강을 막은 것은 두 동강 난 거인의 단검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론이 끼어들어서 내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그 폭발에서 살아난 거야?”

“있는 마나를 전부 검에 쏟아 부었더니 간신히 살 수는 있더라. 대신 검이 두 동강 나버렸지만. 실은 정신 차리자마자 놈에게 달려든 건데 운 좋게도 네놈이 거기 끼인 거다.”

“휴우, 정말 다행이군. 응? 이거 왜 안 빠져?”

다시 목을 베어 확인사살을 하려는데 심장에 틀어박힌 검이 도통 빠질 생각을 안 했다. 무언가 꽉 잡고 있는 듯. 아니, 뭔가가 계속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 이놈이 아직 살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찝찝한 기분이었다.

“아론, 이놈 목을 베!”

“뭐?”

“빨리!”

“그래. 알았어. 하압!”

아론이 반 토막 난 검으로 목을 내리찍었다. 어렵지 않게 잘리는 목. 듀라한도 아니고, 죽은 것이 확실한데 심장에 박힌 검은 빠질 줄을 몰랐다.

“아! 아론 너 지금 HP 많냐?”

“꽤 있지. 좀 전엔 정신을 잃었다 뿐이지 데미지는 크지 않았으니까.”

“그럼 이 검을 잡아봐.”

아론에게 심장에 박힌 드래곤 슬레이어를 잡게 하고 나는 얼른 뛰어가서 나머지 하나의 드래곤 슬레이어를 집어 들었다. 내가 신호하자 드래곤 슬레이어를 힘껏 잡는 아론. 그러나 잡자마자 스파크와 함께 뒤로 튕겨났고 심장에 틀어박혔던 검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람 심장만한 크기의 무언가와 함께.

“이건……? 어!”

함께 딸려온 요상한 물체에 대해 신기해하고 있을 때, 내가 들고 있던 드래곤 슬레이어까지 그리로 딸려가더니 맨 처음 고블린이 소환해냈을 때처럼 X자 모양을 이뤘다. 그리고 X자로 교차된 그 지점에, 그 알 수 없는 물체가 내려앉더니 흡수되듯 녹아들기 시작했다.

“호오?”

순간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물음표 표시된 기능을 위한 것이라 직감했다. 그래서 변하는 대로 가만히 놔둔 채 지켜봤다. 혹시나 드래곤이 살아나진 않을까 힐끔 쳐다보면서

“다 됐나?”

그 검은 물체가 모두 녹아 없어지는 것을 보고 집으려는 순간, 두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신이 까맣게 변하는 것을 보고 다시 검에서 손을 떼었다. 뜨거운 물에 잉크 퍼지듯 빠르게 확산되어가는 검은 빛깔. 두 자루의 검 모두가 손잡이까지 검에 물든 뒤 검들은 바닥에 떨어졌다.

“어디보자……. 응?”

어떤 능력이 밝혀졌는지 확인을 해보려는 순간, 드래곤의 사체가 눈부신 빛을 내기 시작했다. 눈가를 찌푸리며 안력을 돋우자 간신히 보이는 몇 개의 아이템들.

흐음, 이대로 있다간 나눠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감도 설정 변경, 1단계로. 수거!”

점점 크게 번지는 빛 때문에 아론도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나 역시 입으로만 떠들면 되니 아이템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즉시 눈을 감았고 약 삼 초 후, 동굴 안을 가득 비추던 빛이 사라진 다음에야 눈을 떴다. 아주 천천히.

“으음…….”

“헉! 드래곤이……. 드래곤이……!!!”

아론이 아니었다. 탁탁탁탁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루드라의 것으로 보이는 절규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지다아!!!!”

역시 아이템이 없다는 것에 대한 절규였다.

훗,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 아이템들은 내 아이템 창 안에 들어있겠지. 내가 죽을 둥 살 둥 움직여서 얻은 걸 뭣 하러 남을 줘?

“크윽, 힘 빠지는군.”

몰랐다는 듯 연기하며 제자리에서 뒤로 쓰러졌다. 감도 설정 변경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어지러웠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드래곤과 싸우며 얻은 피로 때문이라 생각했고 나는 여유 있게 다시 감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었다.

“으으, 그럼 비코 영지로 향하던 몬스터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회군하는 건가? 아니면 그 상태로 뿔뿔이 흩어져?”

“글쎄다. 그 상태로 흩어놓는 것도 문제 있긴 한데 회군하는 것도 이상하고. 운영자들이 어떻게든 하겠지. 그보다 어떻게 이벤트 몬스터가 거지일 수 있냐? 진짜 해도 너무한다! 희생자가 몇 명인데!”

난 속으로 웃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론과 루드라는 울상이었다.

[당신에게 드래곤 슬레이어의 수식어가 부여되었습니다.]

새로운 수식어가 추가되었다. 벌써 몇 개짼지 모르겠군. 후후, 아무래도 수식어 숫자로 등수를 먹이면 내가 1등일 것 같지?

“그래도 이거 하난 위안이 되는군.”

“그러게 말이다. 그만 돌아가 볼까?”

“그래, 드래곤의 보물!”

돌아가는 것을 부추기는 동안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루드라는 동굴의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도 드래곤이 쌓아놓고 산다는 보물을 생각 안 해본 게 아니지. 하지만 그 정도의 엄청난 보물들을 독식하도록 회사 측에서 가만 놔둘까?

내 생각엔 절대 아니다. 애초에 없는 것으로 설정하거나 있어도 엄청난 가디언, 혹은 함정을 준비해놓아서 가지고 나가지는 못하게 해놓았겠지. 수도 지하에 있는 보물 창고처럼.

“우리도 가볼까?”

“아서라, 아서. 그런 보물이 있다면 독식하도록 회사 측에서 그냥 놔둘까 보냐?”

“그래도 어차피 드래곤은 여럿이 잡을 테니까 서로 나누도록 해놓은 것일지도 모르잖아?”

“네 말대로 드래곤을 잡는 건 여럿이지만 전부 한 팀일 거 아냐? 심하면 한 길드일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결국엔 다 독식인 거잖아. 그런 걸 가만 놔둘 리 없어.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런 보물이 있었어도 없애겠지. 라는 생각으로 동굴 안에 울려 퍼지게 큰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뒷정리 같은 것을 위해 운영자가 여기 와 있을 테니.

만약 루드라가 보물을 몽땅 차지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면? 다 뒤집어엎는 게지. 클클클클.

“무슨 표정이 그러냐?”

“험험, 아냐. 이만 가자. 사람들에게 꽤나 시달리겠지만.”

“그럴 것 같군. 리턴!”

아론도 내 가면이 깨진 것을 보고 동의를 표했다. 리턴을 사용해 돌아온 곳은 비코 영지. 드래곤의 군대를 막기 위해 모여 있던 사람들의 수가 장난이 아닌지라 광장에 모인 환영 인파도 장난이 아니었다.

여관에 있는 스크린을 통해 다 봤겠지. 어디까지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다!”

“콜로니스트다!”

“아론도 있다!”

“와아아아!!!!”

한 사람이 소리치자 축포 터지듯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와 아론의 이름,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란 명칭을 연호하는 사람들. 일반 유저들이야 기분 좋게 외칠 수 있겠지만 이번 원정에서 죽은 사람들과 거트 형은 뭣 씹은 얼굴일 거라 예상한다. 자신들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수 있었고, 만들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코앞에서 놓쳤으니까.

“가…… 넷?!”

수많은 환영 인파 속에서 외국에 있어야 할 가넷의 모습이 보였다. 날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뒤돌아서 도망치는 가넷.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가넷!”

쫓아가려 했지만 거의 벽을 쌓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가넷이 벌써 여기 있을 리 없어.

“제기랄!”

* * *

“어? 누나. 벌써 접속하게?”

짐 정리를 하다가 누나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고 묻는 청년. 그는 일정이 꼬여서 생각보다 일찍 귀국 하게 된 아슈라였다.

“어. 오면서 인터넷으로 보니까 벌써 커다란 이벤트 하나가 끝나고 지금 또 무슨 이벤트가 열렸다던데 구경 좀 해보려고.”

“일주일 사이에 큰 이벤트가 두 개씩이나? 이야, 아깝다. 어쩜 우리가 여행가길 기다렸다는 듯이 이벤트가 열리냐. 그럼 나도 짐 정리만 대충 하고 접속할 테니까 여관에서 기다려!”

“응, 알았어. 접속!”

이소연. 아이디 가넷인 그녀는 습관적으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외우고 힐름에 접속했다. 도착한 마을은 마지막에 로그아웃했던 오마이스 영지. 일단 저번에 같이 로그아웃 했던 동생이 곧 접속한다고 했기 때문에 근처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여관은 웬일인지 무척이나 분주했고, 밀렸다.

“저기, 무슨 일이죠?”

“말 시키지 마!”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근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가 면박만 당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 가넷은 기웃거리다가 어렵게 사람들 틈을 비집고 얼굴을 내밀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스크린. 그 안에선 거대란 블랙 드래곤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자들과 함께 자폭(?)을 시도하고 있었다.

콰광! 쾅! 콰과과과앙-!

대폭발이 일어났다. 진짜 자폭이라 생각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고 동굴 안은 순식간에 뿌연 흙먼지로 가득 찼다.

잠시 후, 절망적인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굴 찾는 듯. 검이 어쩌고 했지만 가넷은 물론 여관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하는 내용 전부 다 들리는 것도 아니고 크게 말한 몇 부분만 단편적으로 들려온 까닭이다. 혼자 화를 내던 드래곤은 급기야 마법까지 써서 흙먼지를 모두 걷어버렸다. 화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드래곤에게 고마움을 느꼈지만 원정대의 상태를 살피느라 말로 꺼내진 못했다.

“나와, 나오란 말이야!”

“사, 살려줘!”

소리치는 드래곤. 그리고 그렇게 소리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자들이 화면에 잡혔다. 드래곤이 겁을 주거나 공격할 의사를 보인 것도 아닌데 지레 겁먹고 벌벌 떠는 사내들. 그러다가 한 명이 이상한 종이 쪼가리를 꺼냈다.

“카, 카드 매직. 번개의 창!”

종이가 스크롤이었는지 주문을 외우자 번개가 쏘아져나갔다. 하나 약한 기술이었는지 드래곤에게 쉽게 잡히고 말았다. 죽을 거라 예상했는지 잔뜩 고개를 움츠린 사내. 하지만 그때 아주 눈에 익은 한 사람이 나타나서 드래곤의 시선을 끌었다.

“스트?”

가넷이 놀라서 중얼거렸지만 그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래곤을 부른 스트는 몇 마리 대화를 나누더니 드래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드래곤의 기습을 받으면서. 드래곤의 수강을 맞아 열심히 흰색 이도류를 휘두르는 스트의 모습은 정말 대단하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실은 드래곤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데 흰색 이도류는 처음 보는데? 그새 새로 얻은 건가?”

가넷은 스트에게 하얀색 무기가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보다가 다시 스크린에 집중했다. 한참의 공방이 이어지면서 둘은 서서히 지쳐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공방이었지만 조금씩 지쳐가는 걸 보는 입장에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좋은 수비를 펼치고 있던 스트가 먼저 승부를 걸었다.

“으흠, 블링크!”

블링크를 이용해 시간을 번 스트는 뒤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주문을 외웠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더블!”

“헬 파이어, 더블!”

검붉은 빛이 도는 두 개의 파괴의 구슬이 드래곤에게 쏘아지자 드래곤도 덩달아 같은 마법을 써서 맞부딪혀 갔다.

콰광! 쾅!

꽤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드래곤의 몸을 집어삼켰다. 스트는 이미 폭발의 영향권을 벗어난 상태였고, 영향권 안은 폭발의 흔적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로 뒤덮였다. 원거리에서 마법을 퍼부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스트가 한 행동은 돌진이었다. 직접 베어서 끝을 보겠다는 듯 흙먼지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갔다.

“하아압!”

“크앗!”

빠각!

하지만 두꺼운 나무판자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튕겨져 나온 것도 역시 스트였다. 흙먼지 속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드래곤에게 당한 것 같았다.

“어? 가면이……!”

드래곤에게 당한 충격으로 내구력이 다했던 걸까? 스트가 늘 쓰고 있던 가면에 금이 가더니 두 쪽으로 쪼개졌다. 드디어 드러나는 스트의 얼굴. 그것은…… 충격이었다.

“콜로니스트?!”

“맞아. 콜로니스트다!”

“드래곤과 접근전으로 호각을 이루다니, 역시 대단해!”

여관 안에 있던 한 사람이 의문성으로 던진 말이 확신으로 바뀌며 사람들 머릿속에 확실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가넷도 스트의 얼굴을 보고 그가 누구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태연이……!”

충격과 배신감, 놀람 등의 감정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그래서 딱히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스크린 속에서는 어떤 멍청이들이 드래곤에게 기습을 했다가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죽는 모습. 스트, 아니 콜로니스트가 드래곤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모습도 보였다. 잠시 후에는 드래곤의 시체가 밝은 빛을 내뿜고 그 시체가 사라진 곳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한 유저가 절규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때까지도 가넷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저들이 어디로 돌아올까?”

“그야 비코 영지겠지!”

“돈은 좀 들더라도 한 번 가봐야 겠지?”

“당연하지. 처음 나타난 드래곤 슬레이어들인데!”

콜로니스트와 아론을 보러 갈 거라는 사람들의 말에 정신 차린 가넷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텔레포트!”

하얀빛과 함께 이동한 가넷. 도착하자마자 콜과 아론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광장에서 끌려 나와야 했다. 혹시라도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 때문에 콜과 아론이 광장에 나타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사람들의 호들갑 때문이었다.

처음 나타난 곳에서 조금 떨어져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을 지켜본지 오 분도 안 돼서 기다리던 콜로니스트와 아론의 모습이 나타났다.

“드래곤 슬레이어다!”

“콜로니스트다!”

“아론도 있다!”

“와아아아!!!!”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커다란 함성소리가 광장 가득, 마을 가득 울려 퍼졌다. 워낙 유명인사들인 데다 이번에 드래곤 슬레이어란 큰 위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가넷은 복잡한 감정으로 콜로니스트를 쳐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던 콜로니스트와 눈이 마주쳤다.

어떡하지? 이대로 있을까? 도망갈까?

“가……넷?”

실프가 자신도 모르게 도움이라도 준 걸까? 가넷은 커다란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희미하게 콜로니스트가 자신을 알아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넷!”

콜로니스트가 다시 한 번 크게 부르는 순간, 가넷은 뒤돌아서 밖으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째서 도망치는 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저 지금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 *

“콜, 무슨 일이야?”

“아냐, 아무것도…….”

아론이 날 붙잡고 물었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일이라 대충 얼버무렸다. 드래곤이 어떤 아이템도 내놓지 않은 것을 모두 본 것일까? 드래곤이 드랍한 아이템에 관한 얘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가진 검에 대한 물음과 마지막에 일어난 기현상에 대한 질문만 쇄도했다.

으흠,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솔직히 말했다간 난리 나겠지?

“이 검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지만 마지막의 그 기현상은 블랙 드래곤을 쓰러뜨림으로써 그에 대한 속성이 추가된 것이다.

아마도라는 말은 꾹 삼켰다.

사실 나도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현상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빨리 조용한 곳으로 가야 확인해 볼 텐데……. 끈질기게도 따라붙는군.

“아론, 조용한 곳으로 좀 가자.”

“응? 안들려!”

“따라오라고!”

아론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하자 그제야 알아들었다. 확실히 시끄럽기는 엄청 시끄럽군. 어디 보자, 그래. 저기가 좋겠다.

“어서 오십시오.”

“방 하나!”

돈을 던져주자 곧바로 키를 내놓았다.

2층 가운데 방. 이 정도면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을 테고 아이템들을 꺼내놓기에도 불편함이 없을 것이었다.

“휴우, 깔려죽을 뻔했군!”

“그러게나 말이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 근데 여긴 왜 들어온 거냐.”

“사람들 기분도 좀 가라앉히고, 정리할 것도 있고 해서.”

“정리할 것? 포션 같은 거야 상점가서 정리하면 되잖아? 난 이거 고칠 수 있는 곳 없는지 확인 좀 해봐야 하는데……. 쩝!”

아론은 아쉬운 듯 부러진 거인의 단검을 들고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이젠 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렸는데 아쉽겠지. 내가 보기엔 인간 중엔 고칠 수 있는 자가 없을 것 같지만. 드워프라면 혹시 모르겠군.

“내가 겨우 포션 정리하러 여기까지 들어 왔을까봐? 후후, 내가 사람들 눈을 피할 정도라면 드래곤이 남긴 아이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뭐? 드래곤이 남긴 아이템? 아무것도 없었잖아?”

“그야 누가 보기 전에 내가 먼저 쓱싹했으니까 그런 거지.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감도 설정 변경, 2단계로.”

아이템 창에서 아이템을 꺼내려면 아이템의 이미지를 떠올려야 하는데 나 역시도 내가 수거한 아이템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템 창을 열어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리얼 모드 2단계로 변경시켰다.

“아이템 창 오픈.”

칸칸이 네모로 나뉜 아이템 창이 열리며 수많은 아이템들의 이미지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 가장 위, 처음 보는 아이템의 이미지에 시선을 집중했다.

첫 번째 것의 형태는……. 검?

“이, 이건……!”

내가 놀란 것은 검의 모양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검의 색깔과 재질 때문! 순백색에 동물의 뼈와 같은 이것은 틀림없이 드래곤 슬레이어였다. 그것도 기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바스타드 소드의 형태를 띈!

“이, 이거 초대박이잖아?!”

조심스레 검을 꺼내다가 문득 고블린이 한 말이 생각났다. 유니크 아이템은 주인을 인식한다!

검을 잃어버린 아론에게 이것을 주려 했던 내게 큰 골칫거리인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응?”

우웅! 우웅!

바스타드 소드의 형태인 드래곤 슬레이어를 품에서 꺼냄과 동시에 가슴에서 작은 공명음이 들리더니 들고 있던 드래곤 슬레이어가 강하게 밀려났다. 마치 극과 극긔 자석끼리 만난 것처럼.

[당신은 이미 드래곤 슬레이어 : 이도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유권을 포기하고 드래곤 슬레이어 : 바스타를 획득하시겠습니까?]

“아니.”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니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한 사람당 하나씩이라는 건가? 오히려 잘됐군!

“아론, 빨리 저걸 집어.”

“이거?”

나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같은 극을 밀어내는 자석처럼 멀찍이 밀려나던 또 하나의 드래곤 슬레이어는 아론이 집어 들자 더 이상 날 밀어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끌어당기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드래곤 슬레이어다. 내 것과 같은. 드래곤이나 드레이크 같은 놈들에게서 극악한 확률로 떨어진 댔는데 운이 좋았군. 앞으론 그걸 써라. 아마 거인의 단검보다 더 좋을 거야.”

“드, 드래곤 슬레이어? 그럼 아까 네 검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와 검을 번갈아보는 아론. 녀석이 떨리는 손으로 확인 주문서를 쓰는 동안 나머지 아이템도 정리해봤다.

“으흠, 돈도 꽤 들어왔군. 역시 드래곤은 부자라니까. 그리고……. 이빨과 수염? 비늘? 뭐야, 본체로 현신한 상태도 아닌데 이런 걸 주는 건가? 나야 좋지만…….”

폴리모프로 인간의 형태를 한 상태에서 죽었는데도 수염과 이빨, 비늘이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뭐, 나야 있으면 좋으니 아무 말 안한다지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론, 수염은 린에게 가져다주고 활시위로 쓰라고 해. 비늘은 겨우 5장 밖에 없군. 어떡하지?”

“그냥 너 다 써. 난 이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린도 드래곤의 수염이라면 한 번 죽어서 날린 경험치 따위 아까워하지 않을 거야. 그것만 있으면 에린 누나의 뇌궁도 부럽지 않을 테니까.”

활대 자체가 달라서 어떤 위력의 차이를 보일지는 모르지만 드래곤의 수염으로 활시위를 바꾼다면 상당한 위력 증강이 될 것임에 분명했다. 어쩌면 다섯 배 이상의 위력을 낼지도 모르지.

“고맙게 먹으마. 용의 이빨은 땅에 던지면 용아병이 나올 게 뻔하니 가지고 있는 게 좋겠다. 내가 보관해도 되지?”

“나머진 너 다 가지라니까. 아참, 그것보다 니 드래곤 슬레이어 좀 구경하자. 아까 까맣게 변하던데 그건 무슨 현상이야?”

그러고 보니 정작 내 드래곤 슬레이어를 체크해보지 못했다. 까맣게 변한 것이 무슨 의미일까? 정말로 내가 둘러댄 것처럼 독 저항력이 높아진다던지 하는 간단한 것일까? 아니면……. 흐흐!

“확인!”

[드래곤 슬레이어 : 이도류]

고대의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고룡 세이나스를 잡고 얻은 드래곤 본으로 만든 전설의 무기 중 하나

내구력 : 무한(영구적 보존 마법)

특수 능력 : 마력 증폭. A급 이하 몬스터에게 공포 효과

드래곤에게 버서크 효과

드래곤 하트를 흡수 했을 시

: 12시간에 한 번씩 10써클 마법 사용 가능. 24시간 충전하여 두 번 연속 사용 가능. 세 번 연속 사용할 경우 오일 간 10써클 마법 사용 불가.

“허억! 10, 10써클 마법!!!”

그것도 내 마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검 자체에 내장된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다. 하루에 두 번 씩이나! 10써클 마법서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기능이라면……!

“사기 템이다아!”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 질렀다.

“응? 그런데 10써클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랬다. 이 내용을 해석해 보면, 모든 10써클을 하루 두 번까지. 무리하면 세 번까지 연속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인데 정작 중요한 10써클 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었다. 또한 주문을 외우고 써야하는지, 그냥 쓸 수 있는지조차도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이래서야 원, 그림의 떡이잖아?

“아니, 주문을 외울 필요만 없다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겠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10써클 마법으로 추정되는 마법이 무려 세 개나 있었다. 먼저 첫 번째는 라노크와 드래곤을 통해서 뼈저리게 위력을 체감한 메테오 스웜. 그리고 두 번째는 마법사 10명이 인페르노를 쓰며 달라붙어도 오히려 밀리는 감이 있었던 글……. 뭐였더라? 아무튼 얼음 계열의 마법. 이건 나중에 인터넷에서 재방송 같은 걸로 돌려보면서 찾으면 나오겠지. 마지막 세 번째는 궁극 마법의 단골손님인 타임 스톱! 뭐, 써봐야 별 효과가 있겠냐마는 쓸 수 있는 수가 늘어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떠오른 김에 나가서 써보고 싶었지만 당장 나갔다간 시끄러워질 것 같고, 또 나와 싸우며 거의 마나가 고갈되었던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이기에 남아 있는 마나가 얼마 없을 것 같기도 해서 사용해 보는 것은 나중으로 미뤘다.

“아무래도 내 드래곤 슬레이어가 검게 변한 건 블랙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를 흡수해서인 것 같군. 그것에 대한 별다른 능력은 없나 본데?”

하다 못해 독 저항력이라도 붙어 있을 줄 알았기에 아쉬움은 있었지만 10써클 마법 사용이라는 기쁨에 가볍게 잊혀졌다.

중첩된 메테오 스웜의 사용. 생각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혼자 쇼를 하는 구나. 이제 그만 나가지?”

“그러자. 아, 드래곤 슬레이어는 남이 잡으면 그 사람한테 데미지를 주고 주인에게로 돌아온다. 주인 인식이니까 잊어먹을 걱정은 안해도 돼.”

“오케이! 나 먼저 간다?”

“그래라.”

어차피 아론은 스크롤을 사용해서 이동할 것이기에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린에게 줄 드래곤의 수염을 챙기고 사라지는 아론. 흐음, 부럽군. 챙겨 줄 사람이 있다는 게.

“아까 그게……. 정말로 가넷이었을까?”

아무리 나한테 답을 물어봤자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이렇게 되면 직접 돌아다니고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하지만 답은 생각보다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후드를 눌러쓰고 돌아다녀 봤다가 허탕만 친 그날 저녁, 아슈라에게 메일이 온 것이다. 일이 꼬여서 예정보다 일찍 귀국했다고.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접속했던 누나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내가 본 건 가넷이 확실했다.

“또……. 피하는 거냐?”

그로부터 삼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가넷은 물론 아슈라에게까지 연락이 닿질 않았다. 리얼모드 1단계로까지 변경시켜 가며 이것저것 만져본 결과, 현재 접속 중이라는 것까진 알아냈지만 리얼모드 3단계로 사냥하는 건지 전혀 귓속말이 통하질 않았다. 아님 저쪽에서 무시하고 있던가.

“아무래도 후자 같지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한잔 더 들이켰다. 꽤 독한 술임에도 하도 마셔서 이젠 물같이 느껴졌다. 더 독한 걸로 한 병 더 시킬까 하다가 그만뒀다. 그것마저 귀찮아진 것이다. 게임의 설정상 유저는 취하지 않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탁자에 몸을 뉘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이젠 환청까지 들린다. 가넷의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일어나.

취하지도 않을 텐데 환청까지 듣다니, 새삼 내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일어나라니까? 정말 안 일어나? 나, 그냥 간다?”

“응? 진짜……. 가넷이야?”

계속해서 들리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가넷의 모습까지 확실히 보였다. 그럼……. 진짜였단 말이야?

“그럼 가짜도 있나?”

“아니, 없지.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연락도 없다가 무슨 일로……?”

“연락 못한 건……. 미안해. 일부러 안 했던 거야.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때 스트가 사실 너였단 걸 알고서.”

예상 했었다. 그럴 것이라고. 내 눈치를 살피던 가넷은 내가 담담한 반응을 보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고 배신감까지도 느꼈어. 하지만 생각을 달리 라니까 또 다르게 느껴지더라. 너, 아직도 날 좋아하니?”

“그래.”

이렇게 된 마당에 아니라고 부인해 봤자 눈에 뻔히 보이는 변명일 뿐이다.

“그럼……. 우리 사귀자.”

“뭐?”

“그렇게 오랫동안 날 생각해 준 너라면 쉽게 변할 것 같지도 않고, 꽤 냉정하게 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 곁에서 변장까지하고 계속 지켜줬잖아. 그 사실에 조금은 감동 받았어. 스트로서의 네 모습에 반하기도 했고. 싫어?”

“아, 아니. 그럴 리가.”

마음에 들면 내가 먼저 가서 고백한다, 라더니 진짜였다.

이렇게 얼떨결에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나가자, 애들이 기다리고 있어.”

“애들?”

“아슈라와 돈황.”

한동안 안 봤더니 잠시 까먹고 있었다. 그런데 돈황은 좀 빼면 안되나?

“형!”

“으윽!”

어색하게 팔짱을 끼고 둘이 기다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아슈라는 환호를, 돈황은 신음을 토했다. 내가 들어가자 많은 시선이 쏠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며칠 전에 비해 많이 나아지긴 했군. 그때였으면 깔려죽었을지도.

“형, 진짜 멋있었어요!”

“말이라도 고맙다.”

“진짜리니까요! 근데 그 검은 진짜 뭐에요? 오리하르콘도 튕겨내는 드래곤의 비늘도 그냥 뚫어버리던데. 우리 여행 간 사이에 뭔가 엄청난 걸 잡은 거예요?”

“글쎄……. 나중에 말해 줄게.”

아슈라와 가넷에게는 말해도 별 상관없겠지만 이곳은 듣는 귀가 너무 많았고, 또 돈황도 아직 못 미더웠다. 드래곤 슬레이어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주인을 인식하네 어쩌내 하고 말해 봐야 전혀 들어먹질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되면 날 파리만 잔뜩 꼬여서 게임 생활에 지장이 많아지겠지.

“이럴 게 아니라 모처럼 만났으니 사냥이라도 가야지?”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진짜로 기다렸는지 아슈라는 손바닥을 비비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쿨럭, 이거 말을 괜히 꺼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보다 우리, 목표를 정하고 움직이는 게 어때? 마냥 레벨만 올리기는 지루하잖아.”

가넷이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목표라? 그거 좋군.

“목표라, 예를 들면?”

“석판 모으기!”

“아…….”

잠시 잊고 있었다. 카오스 마스터란 놈을. 고대인의 석판을 찾아내서, 그걸로 놈을 유인해내야 하는데 현재 내가 가진 석판이 두 개였나?

“카오스 마스터를 불러내서 죽이면 떨어지니까 그걸 모으면 될까?”

“아니, 어차피 계속 죽어서 가진 석판이 몇 개 안 남게 되면 놈도 도망 다닐 테니 우리가 나머지 석판들을 모두 찾아서 결절을 벌이는 게 어때? 이긴 쪽이 석판을 전부 갖게 될 거고.”

“호,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석판을 어디에서 찾는다?”

“그걸 이제부터 고민해 봐야지. 저번엔 고대인의 유적에서 찾았고, 그 다음엔 지하수로에서 찾았단 말이야? 그럼 또 어디 있을까?”

“잊혀진 곳을 잘 찾아보라고 했었지. 고대인의 유적 깊숙한 곳에 있던 망령이. 석판을 관장하던 놈이니 만큼 허튼 소린 아닐 거야.”

나도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정보를 꺼내놓았다. 하지만 너무나 정보가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이래가지고서야 몇 년이 걸릴 지 알 수 없겠군.

“일단 가지고 있을 법한 사람이나 장소를 추려보자.”

가넷이 가지고 있던 지도와 또 다른 종이, 그리고 펜을 꺼냈다.

“평소에 숨겨진 곳을 많이 돌아다닌다거나 던전 탐사의 달인이라거나 하는 사람에 대해 아는 바 없어?

도리도리.

나도 잘 모르는 사실을 이들이라고 잘 알 리 없었다.

“이건 할 수 없이 정보 길드에 의뢰해야겠군.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중에 석판이 있을 만한 곳이 어디가 있을까요?”

“음, 제 생각엔 여기랑, 여기가 의심스러운데요.”

아슈라가 찍어낸 곳은 각기 화산과 얼음의 동굴이었다. 확실히 있을 법하기는 하군.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야.

“밀림도 있을 것 같지만 너무 광범위하지?”

“엘프의 숲과 사막!”

“에, 또…….”

대략 석판이 잠들어 있을 만한 곳이 추려졌다. 너무 뻔하기도 하고, 눈에 훤히 보이는 곳들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체크하지 않은 상태에서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목적지는 대충 정해졌다. 잠시 정보 길드에 다녀올 동안 어떤 순서로 이동할지 고르고 있어.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뤼크레스로 이동했다. 왜냐하면 이곳이 가장 가기 쉬우니까. 다른 곳에서 정보 길드를 찾으려면 연락원을 찾는 수고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이다.

“길드장에게 가자.”

광장을 자시 살피니 전에 봤던 정보원이 그대로 있었다. 날 보고 흠칫 떨더니 순순히 안내하는 정보원. 꼬불꼬불한 골목을 지나서 10분정도 이동하니 길드에 도착했다.

“오랜만입니다. 길던스턴 씨.”

“이름을 기억해주시니 감사하군요. 드래곤 슬레이어 콜로니스트님.”

살짝 비꼬는 듯 들렸지만 그냥 참았다. 아, 나도 성질 많이 죽었군.

“의뢰입니다. 평소 던전 탐사를 자주하고, 실력이 있어서 깊숙이까지 들어가는 자들과 숨겨진 곳을 찾아다니는 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주십시오. 기간은 일주일!”

“어렵지 않은 의뢰군요. 받아들이죠. 의뢰비는 10골드. 어떻습니까?”

바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어차피 나에게 10골드는 그리 큰돈도 아니고 달리 돈을 쓸 데도 없으니까. 간간히 현찰화해서 계정비와 용돈으로 쓰는 것 빼고는.

“하죠.”

계약서에 서명을 해서 한 부씩 나눠 갖고 길드를 나왔다.

다시 가넷들에게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떠오른 자가 있어 잠시 이동을 멈췄다.

“귓속말, 파이오니어.”

“파이오니어님?”

“누구……?”

“콜로니스트입니다.”

“헉! 어, 어쩐 일로……?”

“게임 초반에 여러 곳을 개척하고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와중에 조그만 석판 같은 걸 보지 못하셨습니까? 알 수 없는 영어가 적혀 있는 석판 말입니다.”

“석판이요? 글쎄요, 흐음……. 아! 있습니다. 신기해서 창고에 고이 모셔둔 게 있어요.”

“그걸 제게 파시겠습니까? 값은 후히 쳐드리죠.”

“그런 아무 쓸모없는 걸 어디에 쓰시려고……. 좋습니다. 팔죠. 그런데 가격은 얼마나?”

“만나서 말씀드리죠. 뤼크레스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가고말고요.”

“귓속말 해제!”

운이 좋았다. 이런 저레벨에게 석판이 있다니. 그리 좋은 효과의 석판은 아닐 거라 예상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지금은 나머지 석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때인데.

광장으로 가서 기다리자 오래지 않아 파이오니어가 나타났다. 손에 거무튀튀한 돌조각을 들고서. 뭔가 이상한데?

“이걸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맨 처음 그로티우스 산맥에 들어갔을 때…….”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예? 아, 그게…….”

“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설마 제가 돈 떼어먹고 도망이라도 가겠습니까?”

파이오니어가 넘겨주길 꺼려하는 모습에 준비한 돈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 그럼 돈이랑 동시에 교환하심이…….”

서두르는 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혹시 물건에 뭔가 하자가 있는 것 아닙니까?”

“아, 아니오. 그럴 리가요!”

파이오니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석판을 넘겼다.

음, 돌의 종류가 다르다.

“가짜로군.”

파삭!

확인 차원에서 돌에 마나를 불어넣자 글씨에 푸른빛이 감돌기는커녕 조각나 부서져버렸다. 내가 찾던 석판이 아니라는 증거. 파이오니어가 나에게 사기를 치려던 것이다.

“히익, 텔레포트!”

“어딜!”

이동 계열 스크롤을 사용하면 생기는 잠시간의 무방비 상태일때 파이오니어를 발로 차서 마법을 캔슬시켰다. 감히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생각할수록 열 받는 것이, 드래곤을 잡을 때도 여차 했으면 이놈들에게 빼앗길 뻔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한테 사기까지 치려고 해? 이것들을 그냥!

“그, 그래서 어쩔 건데! 척살도 못하는 주제에 날 어떻게 하려고?”

되레 큰소리치는 파이오니어를 보며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그리고 레이지란 빽이 사라진 뒤의 처량함에 씁쓸해졌다. 그동안 파이오니어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도망쳤다. 마을 안이니 PK는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방어 같은 건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달렸다.

“뒷배경이 사라졌다고 이렇게나 나를 무시하는 놈들이 있을 줄이야.”

새삼 드래곤 슬레이어를 얻은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이것만 있으면 이제 일개 길드와 맞붙어도 두렵지 않으니까!

“일단은 돌아가 봐야겠군. 너무 늦었어. 텔레포트!”

급히 스크롤을 찢어 비코로 이동했다.

일행들이 기다릴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가넷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이크!

“미안, 미안. 생각보다 말이 길어져서.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

“화산이요!”

아슈라가 신나서 외쳤다.

“화산이라, 한두 곳이 아닐 텐데 어디로 가봐야 하지?”

말이 화산이지 화산 지대에 밀집해 있는 화산의 수만 해도 10개가 넘었다. 그것들을 일일이 뒤져야 하는 상황인 건가? 난리났군.

“대부분의 화산은 이미 정복당했는데 또 갈 것 있나요. 보스 급도 없다는 산들은 일단 젖혀두고 생각하면 네 개 정도의 후보가 나오니까 거기만 돌면 되죠.”

하기야, 보스급 몬스터도 없는 곳에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한다. 화산에 사는 불 속성 몬스터들이라면 하나같이 강하기로 유명하니까. 설마 잊혀진 화신이네 뭐네 하면서 엉뚱한 언덕 같은 곳에 던져놓진 않았겠지?

“그럼 일단 가보자.”

“제가 할게요. 매스 텔레포트!”

이동하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음, 준비 없이 온 게 실수군.

“이거라도 마셔.”

더워하는 가넷에게 상급 마나 포션을 꺼내 내밀었다. 그냥 마시면 소다맛 음료나 다름없으니 괜찮겠지.

“고마워.”

대충 방향을 파악하고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산의 이름은 나도 모른다. 아슈라만 알고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정복해야 할 산이니 이름 따위는 상관없다.

“아쿠아 캐논!”

조그만 불의 혼령들이 나타나자 가넷이 물대포를 쏘아 소멸시켰다. 가만히 놔둬도 피해는 주지 않지만 저것들이 모여 있으면 거대한 불의 정신으로 변해 공격해오기 때문에 미리 없애두는 편이 좋은 것이다.

“그래, 여기서는 정령을 직접 꺼내지 않는 편이 좋아.”

정령을 직접 소환해내면 지형 효과를 받아서 약화되고, 또 유지 마나가 많이 들 것이다. 그래서 가넷이 선택한 방법은 정령 마법만을 빌려 쓰는 것.

정령은 소환해내지 않고 마법만을 빌려 쓰는 이 수법은 부릴 수 있는 정령의 등급에 따라 마법의 힘이 달라지지만 주문을 외울 필요가 없다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두 마리의 정령을 한 번에 부릴 능력이 된다면 비교적 낮은 레벨부터 더블 스펠이 사용가능했다.

“올라가자!”

산의 초입은 대부분 불의 혼령이나 코볼트, 살라만다 같은 하급 몬스터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이 가넷의 몫. 아슈라에게 미스릴 소드를 산 돈황도 조금 거들긴 했지만 녀석이 뒤뚱거리며 움직이는 속도보다 아쿠아 애로우를 연사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뜨거워어!”

산의 중턱까지 올라가자 교수형 처하는 죄수 같은 복장의 덩치가 얼굴에 불이 붙은 채 느릿느릿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화나틱이군. 같이 죽자는 식으로 껴안고 안 놔주니까 잡히지 않게들 조심하고, 덩치에 비해 체력은 형편없으니 원거리에서 공격해!”

“아쿠아 캐논!”

“본 스로우!”

나도 얘기를 들어서 알기만 하는 놈이었지만 체력이 약해도 너무 약했다. 표장 다섯 개를 채 던지기도 전에 사망하다니. 그래도 인간형 몬스터인 놈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다시 올라가는데 뭔가 위잉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드래곤 플라이?”

한 떼의 곤충들이 날개를 팔락이며 산 아래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드래곤 플라이가 아니군, 내 기억으론 저놈들 이름이……?

“피파리스였던가? 모두 귀 막고 벽으로 붙어!”

돌연변이 거대 생명체인 드래곤 프라이보다 크기는 조금 작지만 그만큼 날렵하고 지능이 높은 피라리스. 나 혼자라면 싸울 만해도 이들을 데리고는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우리를 노리는 게 아닌지라 그냥 스쳐지나갔고 꽤나 강한 진동을 만들어 귀를 괴롭히는 날갯짓 소리도 귀를 막음으로써 상당히 해소되었다.

“휴우, 큰 일날 뻔했군. 올라가자.”

‘키륵?’

다시 길을 따라 올라가려는데 이번엔 웬 꼬마가 물끄러미 우릴 쳐다봤다. 가만, 사람이 아니라 악마잖아? 그럼?

“키륵! 키륵!”

화르륵!

꼬맹이의 주먹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꽤 강렬한 열기를 띄며 우리에게 날아왔다.

놈은 꼬마 아이가 아니라 하급 악마, 임프였던 것이다. 재빨리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 후려쳐서 방향을 틀었기에 망정이지 위험할 뻔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겁을 하며 도망가는 임프. 뭐야?

“아, A급 이하 몬스터에게 공포 효과!”

임프에게 등급을 매기자면 잘 쳐줘봐야 B급 정도이기 때문에 드래곤 슬레이어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진작부터 이걸 꺼냈으면 됐을 것을, 나도 늙었나보군.

“이제 우릴 방해하는 놈들은 없을 거야. 가자!”

중간에 봄을 비롯한 여러 몬스터들을 만났지만 전부 드래곤 슬레이어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공포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파이어 골렘을 제외하고.

“에…… 에엣?”

“크르르르!”

아직 정복되지 않은 산이라서일까? 산의 꼭대기에 가까워지자 드래곤 슬레이어의 공포 효과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헬 하운드! 드래곤 슬레이어 때문인지 금방 덤비지는 않았지만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공격의 기회를 엿보는 것이, 공격 의사는 분명히 하고 있었다.

“아쿠아 캐논!”

선제 공격을 한 것은 오히려 가넷이었다.

“크앙!”

물을 극도로 싫어하는 듯, 쉽게 쳐내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헬 하운드는 곡예를 부리며 덤블링으로 아쿠아 캐논을 피해냈다.

“아쿠아 캐논, 더블!”

이번에도 역시 공격 자세를 풀고 기묘한 자세로 점프하며 공격을 피했다. 아니, 정확히는 물을 피했다. 물이 약점인가 보군!

“그렇다면, 아쿠아!”

놈의 머리 위로 상당향의 물을 소환해 떨어뜨렸다.

“깨갱!”

두드려 맞은 강아지처럼 깨갱거리며 움직이지 못하는 헬 하운드. 놈에겐 물이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행동 불능이 된 놈의 마무리는 드래곤 슬레이어로 가볍게 끝냈다.

“휴우, 생각보다 약점이 큰 놈이라 다행이군. 서두르자!”

쿵! 쿵! 쿵! 쿵!

좀 더 걸음을 재촉하려는 순간 지축이 울리며 덩치 커다란 소대가리 몬스터, 미노타우르스가 등장했다.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미노타우르스. 이 틈에 도망가는 편이 좋았다.

“셋 세면 무조건 위로 뛰어. 하나, 둘, 셋!”

“걸음아, 날 살려라!”

가넷을 안아들고 뛰느라고 속도가 많이 늦춰졌지만 그래도 아슈라, 돈황보단 빨랐다. 그러나 뒤늦게 우릴 발견한 미노타우르스와 주변에 있던 헬 하운드는 우리보다 더 빨랐다.

“평지까지 달려! 아쿠아! 아쿠아!”

치지지직!

물을 극도로 싫어하는 헬 하운드의 이동속도를 늦추기 위해 뒤편으로 물을 뿌려댔지만 땅 자체가 워낙 달궈져 있다 보니 오래가지 못하고 말라버렸다.

“아! 거대한 낙성의 위용. 스톤엣지!”

우리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더니, 비스듬한 경사 때문에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헬 하운드와 미노타우르스를 차례로 덮치는 바윗덩이. 그러나 미노타우르스의 무식한 힘은 내 예상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크워우오!!!”

거의 날아오다시피 하는 바윗덩이를 힘으로 받아낸 것이다. 비록 뒤로 밀려나는 소리는 들렸지만 막아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경악할 일이었다. 그, 그래도 시간을 벌었으니 다행이군.

“모두 저 동굴로 들어가!”

미노타우르스가 열심히 힘쓰는 동안 산을 올라 정상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까지 오게 되었다. 다행히 정상에는 꽤 넓은 평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로 놈들을 상대할 공간은 만들어진 셈이고, 근처에 있는 동굴 입구에 섬으로써 가넷 등을 보호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잠시 후, 쿵쿵 소리가 커지더니 두 마리의 미노타우르스와 20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헬 하운드들이 내 앞에 쫙 늘어섰다.

“크르르르!”

“크워엉!”

동굴의 입구는 사람 다섯 정도가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편이었지만 미노타우르스로서는 혼자 들어가기도 벅찬 공간이었고 헬 하운드도 셋 이상은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때문에 놈들을 동굴 밖에서 주저했고, 난 왼손에 들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로 놈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네놈들이 첫 제물이다. 글레이셜 게일!”

엄청난 한기와 함께 돌풍이 몰아쳤다. 맨발로 있으면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폴짝폴짝 뛸 만큼 뜨거운 바닥이었지만 서리마저 끼며 싸늘히 식었고 가만히 서 있던 몬스터들은 하나하나의 얼음 조각이 되었다. 특히나 물에 약한 모습을 보이던 헬 하운드들은 한기 서린 돌풍이 불기 시작한 직후부터 눈에 생기를 잃어버렸다.

미노타우르스는 덩치 값을 해보겠다는 건지 조금 몸을 움직이며 버텼지만 세 발자국을 나서지 못하고 제 자리에 달리기 자세로 얼음 동상이 되었다.

이것이, 10써클 마법의 힘이다.

“이, 이건 상상 이상이군!”

그저 막연하게 인페르노를 쓰는 마법사 셋 정도와는 호각을 이룰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사용해 보니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미노타우르스 정도의 고위 몬스터를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것이 무려 광역 마법이라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사살을…….”

혹시라도 얼었던 게 녹으며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일이 돌아다니며 드래곤 슬레이어로 놈들을 깨뜨려 죽였다. 상당수의 아이템을 남기며 사라지는 몬스터들. 이제 10TJ클 마법이 한 번 남았다.

“꺄아악!”

손을 털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가넷!!!”

블링크를 섞어가며 황급히 달려간 동굴 안에서는 타는 듯한 붉은 머리의 기사가 마법검인지 붉은 검신인 롱소드를 휘두르며 가넷 등을 위협하고 있었다. 어디서 감히!

“아쿠아 캐논, 더블!”

“또 웬 놈이냐!”

치지직!

과연 마법검이었던 것인지 검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에 두 물 덩어리들이 허공에서 증발해 버렸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통해 증폭된 힘인데 그걸 증발시키다니, 혹시 저것도?

“넌 누구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너흰 누구며, 이곳엔 어떻게 올라왔지? 저들의 실력으로 봤을 때 결코 이곳까지 살아서 올라올 수 있는 실력이 아닌데.”

“NPC?"

자세히 보니 놈은 유저가 아니라 NPC였다. 척 보기에 화려한 것이 상급 이상의 등급을 지닌. 놈은 가넷들에게 겨누던 검을 내게로 돌렸다. 그들은 별 볼일 없다는 판단 같았다.

“이계인인가? 그렇다곤 해도 저 실력으로 올 수 없었을 텐데.”

“내가 데려왔다.”

“그 정도 실력이 된다면 대단하군. 한데 여긴 뭣 하러 왔지? 화룡 리비에라는 이미 내 손에 목숨을 잃었다.”

“뭐, 뭐라고?”

예상도 못 했던 놈의 말에 깜짝 놀랐다.

화룡? 그리고 목숨을 잃어? 그렇다면 저자가 NPC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말이야?

“그, 그럼 너도 드래곤 슬레이어?”

“그런 셈이군. 이 손으로 드래곤을 죽였으니.”

“한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잡은 지 얼마 안 됐나?”

“이제 약 300년 쯤 되가는 건가? 얼마 안 됐다면 얼마 안 된거군.”

갈수록 기가 막혔다.

300년? 아무리 NPC라지만 300년을 살 리가 없잖아? 혹시 소드마스터가 되면 육체를 재구성하니 뭐니 하는 소릴 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신도 사람인데 어떻게 300년을 삽니까? 아무리 뻥이 심해도…….”

“화룡의 저주다.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게 하되, 100년 간 이곳에서 나갈 수 없게 하는. 이미 이곳에 속박된 기간은 지났지만 지금 나가봐야 날 아는 사람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갔을 터, 굳이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 썩 꺼져라!”

화룡을 죽이고 이곳을 300년 동안이나 차지했다면 여긴 그의 집이나 다름없었고 축객령을 들었으니 나가야 마땅했다. 하지만 한 가지, 갈 때 가더라도 궁금한 건 묻고 가야겠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죽은 겁니까? 설마하니 혼자 화룡을 상대 했을 리는 없고.”

“처음 화룡을 상대할 땐 함께하던 동료들이 있었지. 하지만 모두 화룡의 브레스에, 마법에 당해 흙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마지막에 불꽃을 깨닫지 못했다면 목숨을 잃었겠지.”

마지막 독백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불속성 그랜드 마스터! 네 번째로 찾아낸 한 속성의 그랜드 마스터인 것이다. 그가 불의 그랜드 마스터란 사실에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내가 말이 많았군. 자, 이제 돌아가라!”

“너희들 먼저 가라. 난 아무래도 할 일이 생긴 것 같다.”

주춤주춤 벽을 잡고 내 쪽으로 온 가넷 등에게 먼저 돌아가 있으라하고 나는 오히려 불의 그랜드 마스터에게 다가갔다.

“안 가고 뭐하는 거냐. 정말 죽고 싶은가?”

그는 검집에서 검을 살짝 빼며 나를 위협했다.

“쉽게 죽지는 않을 겁니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고쳐 잡고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다. 앉아 있던 자세에서 스프링 튕기듯 일어나 검을 휘두르는 기사.

그의 검 주위로는 시뻘건 불꽃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맞부딪히는 건 위험하겠군.

“차핫!”

왼손에 들고 있는 검으로 부딪히는 척 흘리며 몸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곤 시야가 미치지 않는 내 등 뒤로 오른손에 들린 검을 찔러 넣었다. 조금 짧다 싶긴 해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낼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쓰러진 것은 내 쪽이었다.

“크흑! 아이고, 머리야.”

그가 폼멜을 이용해서 내 머리를 찍어버린 것이다. 내가 바닥을 뒹구는 동안에 그는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길, 강자의 여유다 이거냐?

“이걸 맞고도 버틸 수 있나 보자!”

솔직히 움직임의 차이로 보나 뭘로 보나 수백 년간 수련한 기사와 나는 차이가 컸다. 결국 내가 믿을 것은 마법뿐. 마법을 쓰기 위해 백스텝으로 거리를 벌렸지만 기사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날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가만둔 걸 후회할 거다. 글레이셜 게일!”

동굴 안, 가득 싸늘한 광풍이 몰아쳤다. 블리자드보다도 싸늘한 바람은 동굴 전체를 얼려버렸고 그것은 불의 그랜드 마스터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춥군. 화룡의 갑옷!”

화르르륵!

그가 입은 갑옷에 서리가 앉기 시작할 무렵, 그가 던진 한마디의 말에 세 마리의 화룡이 그의 전신을 감싸며 보호하기 시작했다. 극도의 한기 속에서 오히려 땀까지 흘리는 기사. 10써클 마법이 사용한지 두 번 만에 깨어졌다.

“끝난 건가?”

기사는 더 보여줄 것 없냐는 식으로 말을 했다. 속 쓰리지만 완벽하게 졌다. 그렇다면 이대로 포기하느냐? 그건 아니다.

“역시 나로는 무리군.”

“알았다면 죽어라.”

기사는 검을 높게 쳐들었다. 금방이라도 엄청난 스킬을 뿜어내 박살낼 기세이다. 하지만 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잠깐!”

“뭐지?”

“당신, 강자와 싸워보고 싶지 않나?”

“……?”

무반응인 듯하지만 반응이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치켜들었던 검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 중에서도 상대가 당신과 상극인, 물을 깨달은 자라면?”

눈썹이 꿈틀거린다.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몰론! 가서 싸워 보겠어?”

“……부탁하지.”

예상은 들어맞았다. 100년 간 갇혀 있고, 200년 간 자의로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갇혀 있던 자. 사람들과의 관계도 일체 끊은 그가 관심 보일 일은 강자와의 대결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생명에까지 위협을 줄 수 있는 물의 그랜드 마스터와의 싸움이라면 마다하지 않겠지, 라는 생각이 적중한 것이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불에 대한 깨달음까지 얻어 근처에 더 이상 상대가 없던 그라면 누구보다 강자와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이 그리울 것이다.

“대신 내가 관전하는 정도는 허락해 주겠지? 물론 싸움에 끼어들거나 기습을 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허락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얼마나 걸어야 하지?”

“걸을 필요 없다. 내가 마법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이쪽으로 와라.”

좀 전까진 자신을 공격했기 때문인지 기사는 여전히 경계하면서 한 발자국씩 접근했다.

훗, 내가 기습한다 해도 이길 수는 있을까?

“크루즈다.”

“뭐?”

“내 이름.”

“그래. 크루즈. 게이트가 열리고 내가 들어가면 10초 후에 따라 들어와라. 공간의 흐름을 따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워프 게이트!”

내 앞으로 푸른색의 타원형 게이트가 열리자 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들어가 물의 그랜드 마스터, 리바이어선을 구워 삼기 위해서다.

예전에 리바이어선에게 패할 때 기억시켜 두었던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한 것이 성공했는지 게이트 반대편은 그리 크지 않은 바위섬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입니다.”

“재도전인가요?”

화사하게 웃으며 재도전 여부를 묻는 리바이어선. 꽤나 얄미웠다.

“아니오. 오늘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도전하는 겁니다. 전 그냥 관람객일 뿐이죠. 설마 관전하는 것도 안 된다고 하시진 않겠죠?”

“전투 중에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그럼 전……. 아! 저 바위 위에서 지켜보도록 하죠. 그럼 잘 싸워보세요!”

플라이를 시전해서 근처의 큰 바위로 갔을 때, 게이트에서 크루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한지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옷을 툭툭 털고 크게 심호흡 한 번 하더니 리바이어선에게 검을 겨눴다.

“난 크루즈다. 이름은?”

“리바이어선입니다.”

리바이어선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를 대했다. 역시나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크루즈. 이번엔 다른 걸 물었다.

“무기는? 마법사인가?”

“그런 셈이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리바이어선은 안심하라는 듯, 손바닥 위로 몇 방울의 물을 만들어내었다가 흩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크루즈. 자시 검에 불꽃을 일으켰다가 마찬가지로 흩어버리고 리바이어선을 쳐다봤다.

“그럼, 간다.”

“오십시오.”

자세를 낮추고, 비스듬히 들었던 검을 수평으로 눕힌 크루즈가 외쳤다.

“플레임 발칸!”

“물의 장막!”

퉁퉁거리며 검 끝에서 쏘아져 나간 화염구들이 리바이어선의 물의 장막에 막힐 때, 크루즈는 고속으로 이동하며 리바이어선의 측면을 노렸다.

“하압!”

“필라 오브 워터!”

검을 내리치는 크루즈와 리바이어선의 사이에 굵은 물줄기가 생성되어 검의 진로를 막았다.

이를 악물고 검을 내리긋는 크루즈. 그의 검에선 계속해서 붉은 화염이 뿜어졌지만 물기둥의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튕겨져 나갔다.

“화룡의 이빨!”

검을 높게 치켜드는 그의 뒤로 한 마리의 흉폭한 화룡의 모습이 겹쳐졌다. 휘둘러지는 검 끝을 따라 뿜어져 나가는 화룡. 날카로운 이빨을 뽐내며 날아가는 화룡의 모습에 넋을 잃기 직전일 때, 리바이어선에게서도 무언가 만들어 졌다.

“수룡의 방패!”

끼아아악, 하는 도저히 인간의 입에서는 날 수 없는 초고음이 귀를 강타하더니 주변에 있는 물이 리바이어선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강철 방패와 같은 원형의 방패 모양을 만들어낸 물들. 기묘한 모양들이 어지러이 춤추는 그 물의 보호막에 화룡이 이빨을 들이댔다.

“흐읍!”

“큭!”

커다란 입으로 입안 가득히 물어뜯는 화룡과 그 이빨이 안까지 닿지 않도록 필사의 힘을 다해 막아내는 방패. 용과 방패의 싸움이 치열해 질수록 크루즈와 리바이어선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헉헉……!”

“후욱, 후욱.”

둘의 승부는 무승부. 아니, 막아낸다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으니 리바이어선의 승리였다. 잠시 숨을 고른 둘은 다시 죽일 듯 노려보다가 또 한 번 격돌을 시도했다. 역시 먼저 움직인 것은 크루즈였다.

“화탄!”

고속으로 리바이어선의 주위를 회전하던 크루즈는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뻗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따라 날아간 네 개의 화탄. 일종의 화염지 같은 기술인 듯했다.

“물의 수호!”

치직!

리바이어선의 손가락이 하늘을 향하자 그것을 중심으로 반구형의 보호막이 쳐졌다. 화탄은 그것에 가볍게 막혔고, 크루즈도 혀를 차며 섣부른 공격을 하지 못했다. 일단은 저 실드의 강도를 더 확인해 보려는 의도인 것 같다.

“타오르는 불꽃의 힘이여!”

크루즈의 말에 반응해 그의 검으로 어마어마한 불꽃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운 이마를 한껏 찡그리며 난색을 표하는 리바이어선. 그녀도 실드 안에서 뭐라고 주문을 다시 외우기 시작했다.

“작렬하라!”

콰과과과과광-!

검에 가득 모여들었던 불꽃의 기운이 한 점에 폭사되면서 엄청난 폭발을 만들어냈다. 그 위력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나도 차마 끝까지 구경하지 못하고 물속으로 몸을 날릴 정도였다.

그야말로 대폭발. 지독한 폭염이 물위를 지나가고 한참 뒤에야 고개를 빼꼼이 내밀 수 있었다.

“거스트 오브 윈드!”

궁금한 건 내 쪽이었기에 친히 섬을 가득 메운 연기를 걷어내었다. 바닥에 무릎 꿇은 상태로 손을 짚고 있는 리바이어선과 검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크루즈. 일견하기에는 크루즈의 승리처럼 보였다.

“크윽. 이 모습까진 보이기 싫었는데……. 크아아앙!”

리바이어선의 몸이 바닥에 픽 쓰러지는가 싶더니 곧 커다란 바다뱀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것이 괴수, 리바이어선의 진짜 모습! 이렇게 되면 인간인 크루즈의 패배인가?

“큭, 실체는 괴물이었군. 회복하기 전에 끝장을 내주마!”

“크윽, 누구 마음대로? 대해일!”

또 한 번 크아앙 하는 듣기 괴로울 정도의 소리가 들려오더니 호수의 물들이 급격히 요동쳤다. 출렁거리기를 일 분 여, 곧 엄청난 크기의 해일이 되어 섬을 덮쳐갔다.

제, 젠장할!

“화룡의 갑옷!”

해일에 의한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물속 깊숙한 곳으로 잠수하려는 순간, 크루즈가 자신의 앞에 검을 깊게 꽂으며 한 번 보여준 바 있는 화룡의 갑옷을 사용했다.

설마 겨우 저걸로 10미터도 넘는 해일에 맞서겠다는 거야?

“미친놈!”

해일이 빠르게 다가와서 선택의 시간이 없었다. 크루즈가 어떻게 되든 일단 물속으로 뛰어들어 목숨부터 구해놔야 했다. 생각은 재빨리 실천으로 옮겨졌고, 약간의 파동은 있었지만 큰 탈 없이 해일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 이 물속 깊은 곳까지 우렁찬 소리가 퍼져왔다.

“화룡 질주!”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고 조금씩 위로 올라가자 불그스레한 무언가가 천천히 해일을 뚫고 움직이는 것이 눈에 잡혔다.

이, 이럴 수가!

“크아아아앗!!!”

해일에 의한 물의 파동은 점점 잦아들고 그럴수록 나와 수면의 거리는 좁혀졌다. 조금이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호수가 잔잔해지고,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 꽂혀 있던 크루즈의 검이 본체로 현신한 리바이어선의 미간에 꽂혀 있는 것이다!

“끄어어억!”

쾅!

미간에 검이 꽂힌 리바이어선은 사력을 다해 고개를 흔들어 크루즈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 듯, 바닥에 널브러져 일어날 생각을 못하는 크루즈. 그러나 리바이어선도 마무리를 못하고 쓰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면 뒷정리는 내가 해주는 수밖에. 멋진 싸움을 봤으니 그만한 대우는 해주마. 메테오 스웜!”

치지직!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듯, 드래곤 슬레이어에서는 노란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하늘은 붉은 화염구들로 가득 메워졌다.

콰광, 쾅, 콰과과과과광!!!

회색으로 물드는 크루즈와 리바이어선의 몸. 생각 같아선 당장에 섬으로 뛰어가고 싶지만 메테오 스웜의 여파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항인지라 잠시 참았다.

“이런, 서둘러야겠군!”

메테오 스웜의 영향으로 크루즈, 리바이어선이 있던 섬이 붕괴되었다. 호수 속으로 떨어지는 아이템들. 재빨리 블링크를 사용해 푸른색과 붉은색. 두 개의 구슬부터 집었다.

“으아앗!”

풍덩!

결국엔 빠지고 말았다. 다른 아이템들도 있겠지만 일단 특수하거나 대단해 보이는 아이템들을 먼저 찾았다. 눈에 띄는 것은 파란색 방패와 붉은색 검. 각 속성의 특징이랄 수 있는 공격과 방어를 나타내는 것이니 더 확신이 갔다.

“푸아!”

몇 개의 아이템이 추가로 더 있었지만 두 개를 집고 나니 숨이 차올라서 어쩔 수 없이 위로 올라왔다. 급하게 들어가느라 충분히 숨을 들이키지 못했던 탓이다.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잠수해 봤지만 짙푸른 어둠만 있을 뿐, 아이템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쩝. 그래도 이걸로 만족해야지. 10써클 마법은 오일 간 못쓰게 되어버렸지만 그랜드 마스터 둘의 봉인석과 마나를 10분의 1씩 잡아먹는 특수 아이템 두 개라면…….”

아직 이 아이템들이 전과 같이 전체 마나를 10분의 1씩 잡아먹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인지 확인은 안 했지만 왠지 확실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뭐, 확인해보면 알겠지.

“일단은 옷 좀 말리고.”

물속에 많이도 뛰어들었으니 옷은 당연히 젖어있었다.

가넷을 만나기 전에 빨리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군. 목욕도 좀 하고.

“으아아, 시원하다~.”

얼렁뚱땅 가넷과 아슈라에게 변명을 대서 넘어가고 여관에서 목욕을 했다. 새로운 옷을 준비해놓고.

제법 큰 방을 잡아선지 시설도 좋은데?

“이제 감정에 들어가 볼까? 확인, 확인, 확인, 확인!”

[봉인의 구슬(水)]

수 속성의 그랜드 마스터 리바이어선을 1회에 한해 소환할 수 있다.

부가 설명 : 한 가지 원소라도 진정으로 터득한 자들은 죽지 않는다. 그들을 쓰러뜨린 자들에게 언제든 자신을 부를 수 있는 구슬을 남기고 떠나는데 이 구슬을 사용하면 구슬 속 인물은 무조건 사용자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장난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수신의 방패]

물의 신의 축복을 받은 방패. ‘물의 수호’를 외치면 시전자를 중심으로 반구형의 보호막이 형성된다. 이 보호막은 10분간 무엇이든 막을 수 있으며 사용 시에는 사용자 전체 마나의 10분의 1이 사라진다.

[봉인의 구슬(火)]

화 속성의 그랜드 마스터 크루즈를 1회에 한해 소환할 수 있다.

부가 설명 : 한 가지 원소라도 진정으로 터득한 자들은 죽지 않는다. 그들을 쓰러뜨린 자들에게 언제든 자신을 부를 수 있는 구슬을 남기고 떠나는데 이 구슬을 사용하면 구슬 속 인물은 무조건 사용자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장난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화룡의 검]

화룡 리비에라가 애용하던 검. 화룡이 죽은 후, 드래곤 슬레이어 크루즈가 사용했다. 화룡의 이빨, 화룡의 갑옷, 화룡질주, 화룡점정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단, 각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사용자 전체 마나의 10분의 1이 사라지며 사용자의 마나량에 따라 위력도 달라진다.

“심봤다아!!!”

역시나, 챙겨왔던 아이템들은 마나를 10분의 1씩 먹는 괴물들이었다. 그게 아니었어도 두 개의 봉인구 덕분이 신이 났을 테지만.

“이걸로 봉인의 구슬은 네 개째군. 이걸 전부 사용하면……. 흐흐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구슬들을 사용할 날이 기다려졌다. 이거, 나중에 마왕 이벤트 같은 걸 혼자서 종결시켜버리는 거 아니야? 큭큭.

“아차! 가넷이 기다리겠다.”

가넷과 아슈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황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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