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남겨진 자와 떠나간 자 (34/43)

힐름 6권

● 차 례

#남겨진 자와 떠나간 자

#마룡 전쟁

#석판을 찾아서

#남겨진 자와 떠나간 자

“히힉!”

일이 오히려 더 커졌음에 놀랐는지 제롬의 몸은 빳빳하게 굳었다.

그러게 감히 내 성질을 건드려? 운영진에서 준비한 나머지 꼼수인 엘프, 너희들도 잠시만 기다려라!

“이제 남은 건 엘프뿐인가?”

“아, 아니. 엘프가 있는 건 또 어떻게 아는…….”

“남은 건 엘프뿐이냐고 물었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진 내 입에서 고운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숨겨둔 패가 있는지 묻자 제롬은 내 의도를 알아채기 위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머리를 굴리고 있음을, 눈동자를 굴림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드러냈다.

“저기, 그게……. 이, 있습니다. 당연히 숨겨둔 비장의 패가 있죠. 그 패만 사용하면 여기 있는 모든 몬스터들의 전멸은 물론이고…….”

횡설수설. 너무 말이 많다. 고로, 필시 거짓말이다.

“더는 없나 보군.”

“이, 있다니까요! 일이 더 커지면 당장에라도 그 패를 꺼낼 겁니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만두심이…….”

“진짜 있으면 난 더 화났을 거다. 그리고 정말 있다면 이왕 쓸릴 것 거하게 한 판 벌이는 수도 있지. 저들 중 중요한 놈들만 이끌고 도망치면 내가 누구에겐들 도망치지 못할까? 그들을 데리고 마지막 패가 오기 전에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펼친다면 아주 재밌겠지?”

“마, 마지막 패는 없습니다. 나중에 만들어 질 수도 있지만 일단은…….”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음 제롬은 이제야 사실대로 불었다.

“엘프뿐이라면 간단하지. 흐음, 죽일 때 죽이더라도 굳어진 몸은 풀어줘야겠지? 다시 쳐라!”

“컥!”

리치들은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해서 제롬의 몸을 시원하게 두드렸다.

아차차, 빼먹은 말이 있었군.

“아참, 제롬. 나중에 만들어 질 수도 있다는 그 마지막 패 말인데, 드래곤은 쓰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만일 그랬다간! 내가 죽더라도 드래곤을 구슬려서 일을 더 크게 벌여버릴 테니까. 죽여라!”

마지막 경고를 마치고 명령을 내리자 라노크가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회색으로 물드는 드레이크의 몸. 쩝, 저 몸뚱이는 아깝군. 이럴 때 네크로맨서라도 있으면……. 아!?

“라노크!”

“예.”

“혹시 네크로맨서 기술을 할 줄 아나?”

“네크로맨서 기술이라 하시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서먼 스켈레톤!”

“그것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마법을 접해보면서 배워본 적 있죠. 하지만 실력이 미숙하여 저 정도의 몬스터에게 사용하자면 제 마나의 대부분을 사용해야 합니다. 게다가 소환된 본 드레이크의 몸체는 실체보다 조금 더 약해질 겁니다.”

마법의 끝을 복구하기 위해 수백 년 동안 부단히 노력해 온 리치라면 혹시 네크로맨서에 관련된 책도 읽어보지 않았을까 했던 생각이 적중했다. 빙고!

“괜찮으니까 당장 시작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소환을 마치면 저는 5일간 회복기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심히 쳐다보는 듯했지만 라노크의 눈에서는 적지 않은 불안감 같은 것이 엿보였다. 라노크가 없으면 낮 동안엔 오히려 유저들에게 밀릴 수가 있지만 본 드래곤, 아니 본 드레이크만 있다면야……. 하늘을 나는 몬스터의 활용도는 어마어마하니까!

“나의 종들이여, 일어나라. 서먼 스켈레톤!”

드드드드득!

살을 뚫고나오는 뼈들. 그 모습이 꽤나 징그럽긴 했지만 뭐 어떤가? 결국엔 내 종이 될 터인데. 정확히는 라노크의 종이겠지만 라노크는 내 종과 다름없으니 그게 그거지.

“본 드레이크. 내가 없는 동안 이 분의 명령을 따라라.”

“크워어어!”

라노크는 본 드레이크의 소유권을 임시로 내게 넘기고 상급 리치 둘의 부축을 받아 리치들 사이로 사라졌다.

본 드레이크가 등장하자 성안이 시끄러워졌다. 본 드레이크를 처음 소환했던 놈은 울고불고 난리쳤고, 엘프들은 생명의 법칙을 거스르다 못해 서있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풀들까지 말라 죽게 만드는 본 드레이크를 보며 한껏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섣불리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드레이크의 브레스 한 방에 내 언데드 군대가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누구든 어서 언데드 군대의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뱀파이어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가장 고위급인 리치들 중 하나가 신속히 움직이며 피해 상황 집계를 시작했다.

뭉쳐 있어서 더 큰 피해를 입었군. 빌어먹을 운영자!

“내가 가진 죽음의 기운이 더 강하다는 건가?”

다른 놈들은 본 드레이크의 주위에도 가지 못하고, 본 드레이크 주변에 있던 생명을 가진 것들은 금세 죽어버렸지만 난 가까이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본 드레이크가 죽음의 기운을 내뿜어도 나 역시 고위 마족으로서 죽음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 영향을 못 미치는 듯.

“죽음의 기운이라니, 잘 됐군. 한번 타볼까?”

본 드레이크는 내가 목 뒤에 올라타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다른놈들에겐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면서도.

그나저나 본 드레이크, 본 드레이크. 부르기도 힘들고 귀찮군. 애칭 같은 걸 정하는 게 좋겠어.

“이제부터 널 본드라고 부르겠다. 본드, 날아올라!”

“크오오!”

뼈만 앙상한 날개인데도 희한하게 파닥거리니 공중으로 몸이 떴다. 군대를 조금 뒤로 물리고 난 본드를 타고 성의 위를 날아다녔다. 몇 발의 화살이 날아오긴 했지만 닿기도 전에 다시 땅으로 추락. 좀 더 자세히 성안을 살필 수 있었다. 뭐, 날개가 있으니 혼자서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타는 재미가 있으니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 몇 바퀴 돌고 내려오자 대기하고 있던 리치가 군대의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를 했다.

“대략 드레이크의 공격으로 스켈레톤 500마리, 본 나이트 200마리, 스켈레톤 나이트 230마리, 구울 150마리, 레이스 80마리가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외에도 브레스에 의한 충격파에 당해서 전투에 참여하기 힘든 숫자도 600마리 가량 됩니다.”

사망 1,160마리에 전투불능 600마리. 전체 병력으로 따져보면 아주 큰 숫자는 아니지만 무시하지 못할 상당한 피해임은 분명했다. 전투에 참여하기 힘들진 않아도 한쪽 팔이 날아갔다던가 하는 식의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놈들까지 생각하면 2천의 병력 손실쯤으로 봐야 할 테니까.

“생각보다 많군. 할 수 없지. 전열을 가다듬고 후퇴시켜라. 공격은 리치들이 온 뒤에 작전을 세워서 한다.”

“예.”

낮인 데다 라노크까지 없는 지금 내 밑의 최고 통솔권자는 상급 리치들이다. 리치들은 바삐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정렬시키고 숲의 근처까지 군대를 후퇴시켰다. 물론 그 덕에 뒤에서 우릴 감시하던 정보원들도 놀라서 더 뒤로 달아났고. 생각해보면 지금이 우릴 공격할 최적의 시기인데도 유저들 측에선 특별한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전체 병력이 많이 감소했지만 믿는 게 있다는 건가? 후후, 꽤나 멍청한 생각이군.

“경계를 강화해라. 스켈레톤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안쪽에 있는 놈들도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전해라!”

대대적인 공격은 안 해올지라도 소수에 의한 기습의 가능성은 적지 않았기 때문에 경계를 강화시켰다. 나 역시 본드를 타고 하늘을 배회하며 경계를 섰고 세 번의 작은 기습이 끝났을 때, 드디어 해가 저물었다.

“주인님, 언데드들의 숫자가 많이 준 것 같은데 어찌 된 것입니까? 그리고 라노크가 안 보이는군요? 또……. 본 드레이크?”

해가 짐과 동시에 한 떼의 박쥐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왔다. 박쥐들은 다시 한데 모여 인간의 형상을 띄었고, 제일 먼저 형상을 갖춘 레이얼이 오면서 둘러봤는지 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한참의 시간이 걸려 설명을 해주고, 레이얼과 나는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흐음, 아직도 성 주위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트랩들이 깔려 있어서 정면 공격은 힘들 듯 싶습니다. 게다가 궁술이 뛰어난 엘프들이 인간들에게 협조하고 있으니 피해는 더 커지겠지요.”

“엘프에 대한 건 걱정할 필요 없다. 큰 힘을 쓰지 못하게 할 방법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는 건 힘들 것 같군. 라노크가 함께한다면 모르겠지만.”

“흐음, 라노크는 5일간 쉬어야 한다고 했던가요?”

“그래. 라노크의 공백을 본드가 채워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다소 무리가 있을 것 같더군. 본드는 일반 본 드레이크에 비해 약하니까. 별수 없이 이번엔 나도 힘을 좀 써야겠어.”

“주인님께서 힘을 쓰신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날 밤, 라노크 없이 성을 칠 계획을 세우고 하루를 더 기다렸다. 엘프들을 무력화시키기엔 이 밤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 * *

“열혈님. 마인의 군대는 어제 오후부터 숲을 등진 채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마인만이 본 드레이크를 타고 배회할 뿐입니다.”

“흐음, 그들도 일단 낮에는 딱히 공격할 방도가 없겠지요. 주력으로 꼽히는 뱀파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니…….”

“예. 때문에 지금이 기회입니다. 숲에 불을 질러서 퇴로를 막고 사방을 점하면 놈들의 숫자가 아무리 막아도 수월하게 물리 칠 수 있을 겁니다. 숫자가 많아도 결국 놈들의 병력 구성은 그리 강하지 못한 것들뿐이니까요.”

“그건 안 됩니다!”

참모쯤으로 보이는 자가 길드장인 열혈에게 작전을 설명하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엘프들이 반대하며 일어났다.

“숲을 불태우다니, 그건 찬성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겠다면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저희에게 숲을 파괴하는 인간은 마인의 군대와 다를 게 없으니까요!”

입을 모아 외치는 엘프들. 하지만 엘프들 중 제일 상석에 앉은 엘프만은 입을 다물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젠장, 괜히 엘프들을 데려왔나? 이래서야 돕기는커녕 방해만 되잖아!’

그는 에류시온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힐름의 운영자 중 하나였다. 에류시온은 마인의 군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엘프를 데려오는 역할을 맡았지만 너무도 깐깐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엘프들 때문에 오히려 골머리를 썩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투력만큼은 남부럽지 않다는 것쯤?

“엘프분들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할 수 없지요. 다른 방법은 없겠나?”

“죄송합니다. 아직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군요.”

“괜찮다. 저들도 우릴 쉽게 공격하지는 못할 테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도록. 그런데 본 드레이크에 대한 대비책은 생각해 봤나? 하늘 위에서 브레스만 쏴대면 피해가 클 텐데.”

그동안 지상군들과 뱀파이어, 리치에 대한 대비책은 어느 정도 세워봤지만 어제 막 등장한 본 드레이크는 미처 대비할 틈이 없었다. 와이번을 테이밍한 소환술사들이 몇 있다지만 드레이크에게는 턱도 없을 테고, 더구나 본 드레이크의 등에는 최강자인 마인이 타고 있으니……. 걱정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방어책은 있습니다. 일단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드레이크는 드래곤과 달리 하루에 단 한 번의 브레스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위력도 당연히 떨어지고요. 물론 그것도 받아내기는 힘듭니다만……. 고레벨의 프리스트 분들께서 대기하고 계시다가 피해를 최소화시켜 주시기로 했습니다. 언데드인 본 드레이크는 가스 브레스를 내뿜는다니 프리스트 분들이 방어에 적격이죠. 그 다음은 마법사와 궁수들이 조를 이뤄서 본 드레이크만을 노리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쉽게 땅으로 내려오지는 못하겠죠.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입니다만 마인과 본 드레이크가 적들과 합류하는 걸 늦추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적군의 수를 줄인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적이 먼저 공격해 올 때까지 농성해야 한다는 소리군. 알았다. 방어를 철저히 하고 적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체크하라. 별동대를 조직해 계속해서 치고 빠지되,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연락하도록!”

* * *

“오늘 기습으로 입은 피해는?”

“주위에 방어선을 치고 있는 스켈레톤의 피해는 약 300마리로 컸으나 방어선 안쪽에 있던 다른 언데드들은 피해가 전무합니다.”

스켈레톤의 피해가 점점 심해져서 방어선을 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더 강한 전투 인력을 잃는 것보단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고지도 멀지 않았고.

“좋아, 저 성은 오늘로 끝장을 본다. 내가 신호하면 작전대로 실행해!”

“예. 주인님.”

뒷일은 레이얼에게 맡기고 난 본드의 등에 올라탔다.

“가자, 본드! 조화가 어쩌고 떠벌이는 놈들을 골탕 먹여 주자고!”

먼저 저공비행으로 성 주위에 있는 숲들을 한 바퀴 돌았다. 본드가 가까이 가기만 해도 죽음이 기운에 시들해지는 꽃과 나무들. 주위에 생명의 기운이 적어질수록 우리 편은 강해지고 엘프들은 약해질 거라는 게 내 계산이다.

몇 군데를 제외하고 크게 성 주위를 돌자 진짜 효과가 있는지 유저들과 함께 성벽 위를 지키던 엘프들이 하나 둘씩 가슴을 부여잡고 제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어디 한 번 죽어봐라. 본드, 브레스!”

“크오오오오!!!!”

성벽 위, 화살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본드의 입 주위에 검은 기운들이 몰려들더니 땅을 향해서 분출되었다. 에너지 덩어리가 아닌 가스의 형태라 그런지 뚜렷한 형상은 아니었고 소독차가 소독약을 뿜어낼 때와 비슷하게 공중 어느 지점에서 넓게 퍼져나갔다.

“홀리!”

“디아인 실드!”

“인페느로!”

브레스의 형태가 가스라는 점에 착안했는지 몇몇 마법사들은 화염 속성의 마법을 퍼부어 브레스를 막아냈다.

“저러다 가스 폭발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몰라?”

아쉽게도 가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 가스가 폭발했으면 성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아쉽군. 흠. 그랬다면 나까지 위험했을라나?

“마법사들, 그쪽이 아냐! 전담에게 맡기고 이쪽을 도와!!!”

쿵! 쿵! 쿵!

성벽 아래에 마법사들이 몰리자 성벽 위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레스를 시작으로 전군이 공격을 시작했을 테니 당황할 만도 하겠지.

“본드, 성벽 근처를 맴돌아라.”

본드가 날고 있는 높이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쉼 없이 날아오는 화살들 때문에 어설프게 내려가지는 못했다. 엘프가 쏜 화살이라면 여기까지 닿을지도 모르지만 본드의 죽음의 기운을 이용한 숲 파괴 이외에도 곳곳에 배치해 둔 스켈레톤이 숲에 불을 지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엘프들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냥 흥분하고 약해지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군.

“난 내려가 볼까? 블링크!”

난 한적한 곳에 내려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성벽 근처 으슥한 골목으로 이동했다. 혼란한 틈을 타서 골목에서 나오니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고 서둘러 성문 쪽으로 갔다.

“여기 막을 걸 더 가져와!”

“끄응차!”

계속해서 성문을 두드리는 언데드 군단을 성안으로 들여놓지 않기 위해 유저들은 온갖 무거워 보이는 잡동사니들을 성문에 쌓고 있었다. 사람들은 단지 쌓는 것뿐 아니라 몸으로 성문을 밀기까지 했고 내가 다가갔어도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도우러 왔다고 생각할 뿐.

“이봐, 밀리면 안 돼. 힘껏 밀어!”

힘 좋은 기사들은 팔뚝에 핏줄까지 솟아오르며 필사적으로 성문이 열리지 않게 버티고 있었다. 이래봐야 결국 성문에 구멍이 나기 시작하면 뚫릴 테지만 이들이 오래 버틸수록 성벽 위에 있는 자들이 내 부하들의 수를 줄여줄 것이다.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시작해 볼까?

“크악!”

“커헉.”

“너, 넌?!”

일단은 거치적거릴 기사들부터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처리했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늘어난 손톱으로 기사들의 목을 한 번씩 찔러주자 그들의 몸이 회색빛으로 물들어갔고, 죽기 직전 로브 안의 내 얼굴을 봤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귀찮아지기 전에 빨리 문 열고 도망쳐야겠군.

“하압!”

끼기기기기기긱!

뒤쪽에서 지켜보던 자들이 끼어들기 전에 성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마, 막아!”

“실드!”

뒤늦게 정신 차린 자들이 공격해 왔지만 엄청난 마나를 가진 내가 펼친 실드에는 별다른 충격을 줄 수 없었다. 실드도 그리 오래 유지시키지는 않았다. 실드를 펼치고 잠시 서 있는 사이, 활짝 열린 성문으로 밀려 들러온 내 언데드 군단이 그들의 손발을 어지럽게 만들었으니까.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콰아아앙!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성문의 반대쪽, 리치와 뱀파이어들이 기습을 가하기로 약속된 장소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일차적인 리치들의 마법 공격이겠지. 그럼 나도 놀아볼까?

“아직 함락시켜야 할 곳이 많으니 마나는 아껴야겠군. 큭큭!”

나는 손톱을 길게 늘이고 마법사들이 대거 몰려 있을 성벽 위로 날아올라갔다. 캐스팅 시간이라는 것이 있는 마법사들은 내 빠른 속도를 감당해내지 못했다. 멀리 있던 마법사나 궁수가 동료의 몸을 꿰뚫으면서까지 내게 공격을 시도하긴 했지만 손톱에 약간의 마나를 불어넣어주니 그마저도 간단히 찢어발겼다.

그렇게 성벽 위의 마법사, 궁수들을 혼자 정리했을 때, 레이얼이 내 곁으로 왔다.

“주인님, 기습이 성공했습니다. 현재 상급 뱀파이어 일부가 성의 위쪽으로 날아 들어가 위에서부터 공략을 하고 있고 일부는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며 도망을 막고 있습니다.”

“고작 그걸 보고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이럴 시간에 성으로 올라가 뱀파이어의 피해를 최소화시켜!”

상급 뱀파이어라면 마스터급 유저들이 못 막을 것도 없다. 때문에 뱀파이어들의 희생이 적지 않을 것. 그런데 그 피해를 확 줄일 수 있는 뱀파이어 로드란 녀석이 고작 이 정도 보고 때문에 자리를 뜨다니! 이건 정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레이얼은 황급히 박쥐로 변해 성으로 날아갔다.

에휴, 그래도 이제라도 갔으니 피해는 줄겠지.

“사악한 마인이여, 너의 야망도 여기서 끝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파티가 나를 향해 각자의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참 멍청한 놈들이군. 나 같으면 한눈파는 사이 공격했겠다. 그리고…….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 대사가 너무 유치하잖아!”

“내가 사악이면 너희는 정의냐?”

“당연하지!”

“정의라는 것들이 한 명을 상대로 하나, 둘, 셋, 넷……. 일곱이서 공격하냐?”

“그, 그건……. 너도 엄청난 쪽수로 성을 공격하잖아!”

순간 당황해서 멈칫거린 기사는 눈을 좌우로 굴리다가 내 언데드 군대를 보고 소리쳤다.

후후, 나랑 말로 해보자는 건가?

“쯧쯧. 사악한 마인이라며? 정의라는 것들이 그 사악한 놈하고 똑같은 짓을 해서야 되겠어?”

“닥쳐!”

할 말 없는지 기사는 소리를 지르고 검을 움켜쥐었다.

“왜, 덤비려고? 보아하니 자신의 정의에 대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싸움에 임해서 남는 게 뭔데? 명성? 웃기는군. 그딴 헛된 명성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히게 되어 있어. 자신의 정의에 대한 가치관 확립도 못한 것들이 용사는 무슨…….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흰! 날 못 이겨.”

내가 이놈들에게 지지는 않겠지만 상대하려면 마나를 써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고 물러나는 쪽으로 살짝 유도해봤다.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할 수 없지. 어차피 한 번은 죽여야 할 놈들일 테니까.

“좋아. 그럼 나 혼자서 상대해주마!”

“그러시던가.”

딱 5분 걸렸다.

차례로 덤비는 일곱 명을 모두 처리하는 데까지.

그들이 생각보다 약해서이기도 했지만 내 능력치나 마나가 너무 엄청났다. 그 5분 중에서도 2, 3분가량은 말싸움이었으니까.

전장을 훑어보니 성에 올라가지 않은 리치들의 활약으로 거의 상황이 종결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끝이군.”

콰앙!

쿠그그그!

유저들이 스켈레톤, 구울 등을 상대하는 동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리치들이 공격을 퍼부어 수를 줄이는 식으로 점차 우위를 점해가고 있을 때, 성에서 큰 폭음이 일며 커다란 돌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설마, 뱀파이어들이 당한 것인가? 레이얼이 있는데도?

“제기랄!”

날개를 펴고 당장에 성의 위쪽으로 날아갔다.

“레이얼이 죽었다면 큰일이군. 주 전력인 걸 떠나서 부려먹기 딱 좋은 녀석이었는데……. 응?”

천장이 날아가 버린 성. 그 꼭대기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레이얼이었다. 주위의 유저들은…… 전멸?!

“어떻게 된 거지?”

“죄송합니다, 주인님. 인간 마법사가 마지막 남은 마나와 생명력을 이용해 자폭을 시도하는 바람에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마법사, 자폭……. 빅뱅을 쓴 건가? 어지간히도 절망적인 상황이었나 보군. 이 정도 위력이라면 적지 않은 레벨이었을 텐데.

“됐다. 너라도 살았으면 된 거지. 이제 내려가서 떨거지들을 처치해라!”

“예, 주인님.”

레이얼은 이번엔 커다란 한 마리의 박쥐가 되어 전투가 진행중인 땅으로 내려갔다.

그럼 나도 내려가 볼……. 응? 저건?

“피잖아?”

이상했다. 분명 힐름에서는 유저들이 칼에 베여도 피가 나오지 않는데? 혹시 뱀파이어들이 죽으면서 핏물로 변한 건가? 흠, 알 수 없군.

“퇴각! 퇴각하라!”

레이얼이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저들의 퇴각 명령이 들려왔다. 이번엔 피해가 컸지만, 그래도 점령을 하긴 했군.

“본드!”

다른 명령이 없어 계속해서 하늘을 배회하던 본드는 내가 있는 성 꼭대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본드를 이용했다면 더 쉽게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분명 소멸됐겠지. 더구나 본드가 활개 치기엔 여기가 너무 작아서 힘을 전부 활용할 수 없었을 테고.

“한 바퀴 돌아보자!”

본드의 등에 올라타자 본드는 작게 포효하며 날아올랐다.

땅에 보이는 것들은 거의 언데드뿐이었다. 아직도 도망치지 못한 유저들이 발악이라 할 수 있는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레이얼이 바삐 움직이고 있으니 그것도 오래 못 갈 것이다.

“숲이 파괴돼서 어디 숨었나 했더니 저기였군. 좋아, 좋아.”

본드를 타고 날아다니던 중, 저 멀리 연못 근처에 모여 있는 정찰병들이 보였다.

위치 파악도 됐으니 또 이용해줘야겠군. 저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일단 돌아가자.”

* * *

“길드장, 큰일 났습니다!”

요 며칠간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저 말에 거트는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마인, 마인, 마인! 비코 영지와 폴메르 근처 던전을 청소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그놈의 마인은 뭐가 그리도 하는 일이 많은지 뻑하면 보고가 날아오게 만들었다.

“또 무슨 일이냐?”

“베셀 영지가 함락 당했습니다.”

“벌써? 제길, 어찌 된 놈들이 삼일을 못 버티냐!”

거트는 혀를 차며 성을 쉽게 내어준 투혼 길드를 비웃었다.

“밤에 양동작전으로 기습을 당했답니다. 그리고 이번엔 마인이 직접 나서서 성문을 여는 등 모습을 드러냈다고…….”

“언데드가 밤에 기습하는 건 당연하지. 그리고 그 쪽수 가지고 정직하게 정면으로만 공격하면 그게 오히려 바보 아니야? 나 같으면 사방팔방으로 다 공격했겠다.”

실제로 대책 없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공격을 했다면 오히려 언데드 군대의 피해가 커졌겠지만 거트는 그 정도 전략이 뭐 대수냐는 듯 큰소리를 쳤다.

“그래서, 그 후 이동은? 또 성에 머무는 거냐?”

“예. 아직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듀폰 영지를 습격했던 몬스터 군단이 오마이스 영지 근처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그 잘난 척하는 놈들 이번엔 혼 좀 나겠군. 설마 못 막진 않겠지?”

“팬클럽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여성 유저와 동맹을 거느리고 있으니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다만…….”

“다만?”

“몬스터 군단에 만티코어란 괴물이 있는데 그놈 꼬리에 달린 독침 한 방이면 마스터 급 기사도 맥을 못 춘다니……. 그게 걱정입니다.”

“그게 몇 마리나 되지?”

“많지는 않습니다. 한 다섯 마리 정도…….”

“그럼 됐어. 아무리 강해도 결국 다구리엔 장사 없으니까. 피해는 크겠지만 그래도 이길 순 있겠지.”

거트는 엔젤하트가 동원할 수 있는 여성 유저의 쪽수를 믿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으로 지지는 않겠지만 피해가 크기를 바랐다. 그가 봐도 엔젤하트는 너무 재수가 없었다.

“그럼 저희 병력은……?”

“계속 던정 정리시켜. 마인의 군대가 움직이는 걸 보고 그 다음에 결정한다. 여차하며 포고문을 내려 일반 유저들을 왕창 동원하면 되겠지.”

무지막지한 세금 때문에 민심이 자신을 아주 오래 전에 떠난 사실을 혼자 모르는 거트였다.

* * *

“흐음, 오마이스 영지가 당할까?”

“에이, 설마 당하기야 하겠어? 엔젤하트라면 목숨 걸고 나설 광녀들이 얼마나 많은데. 걔들이 활 한 번씩만 땅겨도 반수는 나가떨어지겠다.”

성의 수비는 레이얼에게 뤼크레스 때와 같은 방법을 일러주고 난 각 길드의 정찰병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내가 하이딩으로 숨어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하는 정찰병들은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아, 몬스터 군단을 잊고 있었군. 엔젤하트……. 두고 보자.

“별다른 정보는 없는 것 같군. 거트 형은 아직도 관망하는 건가?”

난 성으로 돌아와서 레이얼을 찾았다.

“예, 주인님.”

“난 지금부터 몬스터 군단을 지휘하러 잠시 자리를 뜰 것이다. 그때까지 성을 잘 지키도록. 특히 뱀파이어와 리치는 확실하게 보호해야 한다.”

“예, 주인님. 한데 낮에는…….”

뱀파이어가 없는 낮이 불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리치들에게 맡겨라. 수성을 하는 것이니만큼 그들로도 충분하겠지. 최대한 빨리 올 테니 조금만 수고하도록.”

“예. 주인님.”

“본드!”

내 옆으로 본드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솔직히 몬스터 군단만으론 부족할 드 싶은데 이 녀석이라도 데려가면 전력에 보탬이 되겠지.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오마이스 영지 근처 공터로 이동했다. 아까 정찰병들이 몬스터 군대가 오마이스에 거의 다다랐다고 했으니까. 다행히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북쪽이면……. 저기군. 가자!”

익숙한 지형을 통해서 대충 방향을 가늠하고 본드를 부려 빠르게 날아갔다. 과연 오마이스에 다다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몬스터들은 가까이에 있었다. 이제 반나절쯤 걸릴 정도?

“몇 번 습격을 받았나 보군.”

“췩, 그렇다.”

숫자는 줄어 있었지만 피해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오크 같은 하급 몬스터나 죽었을 뿐 트롤, 오우거, 와이번, 만티코어 같은 상급 몬스터들은 생채기도 없이 말짱했다. 기습으로 죽일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었나보군. 그렇다면 적은 레벨이 높기보단 사람 수만 많다는 소린가?

“그나마 다행이야. 가자!”

솔직히 막막했다. 언데드 군대라면 리치와 뱀파이어들을 이용해서 어찌 공략해보겠는데 몬스터 군단은 언데드들에 비해 너무…… 힘이 약했다.

“이거, 뱀파이어들을 데려와서 밤에 급습해야 하나?”

그 방법은 그나마 승산이 있어 보였지만 일단 접어두고 계속해서 걸었다.

깊은 어둠이 사라지고 옅은 빛이 세상을 덮어갈 무렵 마침내 오마이스 영지가 보이는 공터에 도달했다. 그리고 몇 천은 될 법한 여성 유저들이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것 또한 보였다.

“이런, 제기랄.”

척 보기에도 우리가 올 것을 예상하고 기다린 대형이었다. 제법 레벨이 있어 보이는 여기사를 중심으로 화살표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이 정면으로 우릴 뚫겠다는 것 같은데, 날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는군.

“천천히 진격하다가 적이 공격해오면 중심부터 뒤로 빠진다. 적이 화살표라면 우리도 화살표로 만들어서 감싸는 거지. 알겠나?”

“취이, 알겠, 다.”

“이동 속도를 반으로 줄이고 진격!”

“진격하라!”

쿵! 쿵! 쿵! 쿵!

내 말에 맞춰 여성 유저들 쪽에서도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한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북을 울려 기세를 돋웠다. 어디서 본 건 있나 보군. 하지만 그 정도로 마인인 나와 함께 있는 몬스터들이 위축되진 않지!

“뒤로 빠질 준비를 하라!”

쿵쿵쿵쿵!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적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거의 한계치에 다다랐다. 몬스터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반응하기 쉬웠다.

“중앙 후퇴! 만티코어들은 내 옆으로 와라!”

“크아앙!”

쿠웅!

점차 빨라지던 북소리가 더는 힘들 정도로 빨라지더니 한 번의 큰 울림으로 끝을 맺었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함성.

“쳐라!”

“와아아아아아!!!”

“전군 후퇴, 진형을 유지한 채 천천히 뒤로 이동한다!”

진형 모습 그대로 화살처럼 빠르게 쏘아져오는 여성 유저들을 보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기껏 진형을 이뤘으면 끝까지 맞추기나 할 것이지 레벨 높은 사람 따로, 낮은 사람 따로. 능력치의 차이를 무시하고 돌진해오는 바람에 이미 진형은 진형이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상대하기 쉽지.

“만티코아, 가자!”

우리편 진형의 정중앙에 서 있던 나는 빠르게 쇄도해오는 우두머리를 잡기 위해 만티코어들과 함께 몸을 날렸다.

“꺄악!!!”

휘청!

한껏 자세를 잡고 달려가는데 격돌하기 전에 달려오던 여성 골벨들의 입으로부터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맥이 풀린 내 다리는 휘청. 근데 뭐야? 저 울 것 같은 표정은?

“으, 으……. 으아앙!”

거리가 10미터쯤으로 접혀졌을 때, 제대로 서있는 사람은 두 명. 다리를 후들거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사람은 세 명.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거나 뒷걸음질 쳐 도망가는 사람이 이십여 명이었다.

뭐지? 뭐가 그리 무섭다고……?!

“만티코어였군.”

피처럼 붉은 피부. 인간과 비슷한 얼굴에 회색 눈동자. 사자의 몸. 전갈과 같은 꼬리. 천사의 것과 비슷한 날개. 콧김을 푹푹 뿜어대는 만티코어의 모습은 여자들이 징그러워할 만도 했다.

“이, 이잇!”

약 5미터 앞까지 도달하니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세 명의 여기사가 검을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하나 그 중 둘은 만티코어가 쏘아낸 독침에 적중당해 픽 쓰러졌고 내 앞까지 도달한 것은 적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공격이 단순하군.”

스르륵!

본인이 피하기도 힘들어지게 점프해서 검을 내리긋는, 적 대장의 아주 정직한 공격에 지면을 미끄러지듯이 이동해서 배후를 점했다.

“컥!”

“넌 본보기로 삼는 것이 좋겠군. 음? 큭큭큭. 좋아.”

텅 빈 등 뒤를 점했으니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죽일 수 있었지만 본보기라는 것을 이용하면 꽤 많은 여성 유저들을 도망치게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뒤에서 양팔을 움켜쥐었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을 놓치는 여기사. 이 제압된 녀석을 어떻게 해야 확실한 본보기가 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꽤나 징그러운, 하지만 확실한 효과가 있을 법한 상황이 눈에 띄었다.

“날 죽여라!”

“죽이는 것도 좋지만 일단 저길 좀 보지? 참 아름답지 않은가?”

“우욱!”

내게 제압된 여기사에게 억지로 보게 한 곳에는 자신이 죽인 유저들의 시체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는 만티코어들이 있었다.

물론 나도 역겹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강한 모습을 보여야 성을 공략하기가 훨씬 쉬워지는데. 같이 토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조금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차피 마인이 되면서 얼굴이 변화된 상태인데 저들이 억지인지 알게 뭐야?

“꺄아아아악!”

효과는 직빵이었다. 낮은 레벨 때문에 상대적으로 능력치가 낮아 늦게 도착한 대다수의 여성 유저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누구라도 몬스터 밥이 되긴 싫겠지.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나저나 효과 본 건 좋은데……. 잔인한 건 저놈들이 다 보여서 난 뭘 하냐고?

“이젠 애물단지로군.”

이 여자한테는 미안하지만 최대한 잔인한 모습으로 죽이려 했는데 이젠 그걸 해도 큰 반응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저걸 어따 써?

“아! 큭큭큭. 좋은 생각이 났다. 나한테도 정신 공격이 되는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잘하면 무혈입성도 가능하겠어.”

순간, 어찌 보면 양날의 검과 같은, 솔직히 내가 이런 짓까지 해가면서 이 일을 성사시켜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한테도 큰 정신적 데미지가 오는 계획이 떠올랐다. 왠지 이 방법을 실행하고 나면 어디든 가서 난동을 부릴 것 같았지만 이걸 쓰지 않으면 이 병력으로 저 탄탄한 성을 무너뜨리기란 불가능할 것 같으니……. 내가 총대를 메는 수밖에.

“모두 다시 정렬! 오마이스 성 앞까지 전진한다.”

만티코어의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날아온 몇 발의 마법과 화살로 오크의 수가 조금 줄어 있었지만 별로 표시 날 정도는 아니었다. 만티코어를 앞세우니 성 앞까지 우리를 막아서는 자들은 없었다.

“오, 오빠들이 도착하기 전까진 우리가 성을 지켜야 해!”

차마 밖으로 나와 대적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성 유저들은 성안에서 우릴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호오, 저 말은 지금 엔젤하트가 성에 없다는 뜻?

“그렇다면 처리가 더 쉽지. 저들도 눈치 볼 필요가 없을 테니까.”

두려움 반, 군중 심리 반으로 버티고 있는 여성 유저들을 보며 손발을 끈으로 묶어 끌고 온 좀 전의 돌격대 대장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아들고 앞으로 나섰다.

“세일리님!”

이 여자의 아이디가 세일리인지 성안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후후후, 잘 알려진 여자라면 더 효과가 크겠군.

“크크크크크크!”

낮지만 크게,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세일리란 여자를 내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쏠리는 시선들.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세일리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만지기 시작했다. 이에 격하게 반응하는 세일리. 하지만 내 힘을 이길 순 없었다.

“어떡해!”

“운영자가 저래도 돼?!”

더듬는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자 그나마 잘 정돈된 듯한 느낌이던 성안이 어수선해졌다.

경멸어린 눈빛으로 날 쏘아보는 세일리.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운영자?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흠, 옷 위로는 감질 나는군.”

더듬는 것을 멈추고 손톱을 세웠다. 그리고 세일리의 방어구를 하나하나 잘라내기 시작했다. 내구력 개념을 이용해서 옷을 벗기려는 것이다. 원래 이런 짓을 하면 바로 계정 정지를 당하지만 난 지금 유저가 아니라 운영자이다. 그것도 무슨 짓을 하던 책임을 지지 않는 일회용 운영자.

“꺄악!”

“꺄아아악!”

갑옷이 하나씩 해체되기 시작하자 성안에서는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한 개, 두 개, 세 개째 갑옷을 해체하면서 반응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내키진 않지만 한 가지 행동을 추가했다.

“스릅, 모두 나의 노예로 만들어주마. 크핫핫핫핫하!”

혀로 세일리의 목을 한번 핥아준 것이다.

“꺄아아아아아악!!!!!”

“변태!”

“난 갈래!”

반응은 뜨거웠다. 성벽 위를 가득 메웠던 여성 유저들이 썰물 빠지듯 도망가 버린 것이다. 남은 건 고작해야 진짜 엔젤하트 길드원들 뿐. 하지만 보아하니 그마저도 상당수 달아난 듯했다. 이쯤이면 더 이상 연극할 필요는 없겠군.

“만티코어, 와이번, 오우거와 트롤을 태워서 성안에 흩뜨려라!”

“크릉!”

“우욱, 만티코어! 가기 전에 이 자를 처리해라.”

오바이트가 쏠릴 것 같아서 차마 직접 죽이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몸을 만질 때야 솔직히 좋았지만, 지금 내게 보이는 모든 얼굴은…… 제롬의 얼굴인 것이다.

“제기랄, 오늘 밥은 다 먹었군.”

성은, 엔젤하트가 도착하기도 전에 간단히 정리되었다.

* * *

“팀장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수형아, 여기 좀 와봐!”

김수형. 운영자 아이디 제롬인 그는 드레이크 역할 하나도 AI보다 못한다고 한참을 팀장에게 구박받다가 갑자기 뛰어 들어온 김호, 운영자 아이디 고블린의 호출에 재빨리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무슨 일이야? 또 사고 터졌어?”

“그렇다면 그런 건데……. 일단 상황 종료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놈의 콜로니스트. 유저로 놔두면 유저인 대로 운영자로 쓰면 운영자인 대로 말썽이군. 내 밑에 저 머리 반만이라도 닮은 놈들이 있었으면……. 에휴, 말을 말자!”

주석태 팀장은 신세 한탄을 하며, 제롬을 꾸중하느라 밀린 서류들의 정리했다.

지금 약간이라도 일 처리를 해놓지 않으면 저놈의 콜로니스트 때문에 서류에 깔려죽을 것 같았으니까.

“형, 살려줘서 고마워요. 형은 내 구세주야!”

“지금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니다. 여기 좀 봐.”

고블린이 가리킨 곳은 힐름 내부 사정을 모니터링하는 특수 스크린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마인이 아리따운 여자 하나를 붙잡고 온몸을 더듬고 있었다.

“형, 아무리 노총각에 급했어도 그렇지 회사에서 이런 걸 보면…….”

빠악!

이마에 굵은 핏줄 하나를 드러낸 고블린은 제롬의 뒤통수를 강타하고 귀를 잡아 스크린 앞으로 끌었다.

“응? 이건……. 마인?”

“그래. 지금 마인이 몬스터 군단으로 오마이스를 치고 있는 거다. 아무래도 성을 지키는 게 전부 여자이다 보니 알아서 도망가게 하려는 것 같은데 제대로 먹힐 것 같애. 이 전에 만티코어가 유저들 시체를 씹어 먹는 괴기스러운 모습을 보였거든.”

“헛, 핥는다!”

마인에게 잡혀 있는 여인과 성안에서 지켜보는 이들, 그리고 그에 동화돼서 고블린과 제롬까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보다 그녀를 핥고, 만지면서 묘한 미소를 띠고 있는 마인의 모습은 그들마저도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으윽…….”

“아, 다 도망간다.”

스크린에 성벽이 하얀빛으로 물들며 자리에서 대규모로 이탈하는 모습이 잡혔다. 그리고 오우거, 트롤을 등에 태우고 성벽 위로 날아오르는 만티코어, 와이번들의 모습. 이쯤이면 성의 함락이 확실하단 걸 그들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스크린에 눈을 두지 않았다.

“너,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네? 에이, 함락 됐으면 함락 된 거죠. 이번 일은 저랑 상관없는데 제가 뭘, 어떻게 할 게 뭐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마인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 얼굴이 다 네 얼굴로 보이잖아? 남자든, 여자든. 그런데 마인이 저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혹시 콜로니스트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야?”

“그, 그럴 리가요. 콜로니스트는 남자고, 저도 남잔데.”

“아니야, 아니야. 잘 생각해봐. 콜로니스트처럼 괴팍한 인간이라면 남색에 관심을 둘 수도 있잖아? 그리고 왜 맨날 너만 괴롭히는데? 그게 다 어릴 때 좋아하는 애 괴롭히듯 관심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어.”

“…….”

스크린을 끝까지 보지 않아, 마인이 헛구역질한 것을 모르는 둘은 콜로니스트가 남색을 밝히고, 더구나 제롬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제롬은…… 그 자리에 동상이 되었다.

* * *

“길드장!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야?”

급보니, 큰일이니 하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 이제는 거트도 뛰어 들어오는 사내의 모습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오마이스 성이 함락됐잖습니까.”

“그건 어제 얘기했잖아. 마인이 변태라는 것과 함께.”

“그랬죠. 그런데 지금 또다시 성을 부수고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뭐? 벌써? 이동 방향은 어느 쪽인데?”

“오마이스에 있던 몬스터 군단은 일리아드 쪽으로, 베셀에 있던 언데드 군대는……. 비코 쪽입니다. 아무래도 각각 남은 두 곳의 성을 친 다음에 마지막으로 수도를 협공하려는 것 같습니다.”

“역시!”

비코라는 말에 흥분한 거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그랬어. 비코 영지의 성벽 수리에 치중하길 잘했지. 길드원들 집합시켜! 비코로 전원이 지원 나간다.”

“길드장, 아무리 그래도 성을 지킬 인원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다른 성에서의 지원 요청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다가 갑자기 300명 전원을 지원 보낸다니, 사내가 깜짝 놀라서 말렸다. 그에 거트는 심기가 불편해졌지만 나름대로 일리는 있는 말이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좋다. 그럼 50명만 남겨라. 나머진 나와 함께 비코로 간다!”

“길드장도……. 가실 겁니까?”

가서는 안 된다는 말투에 거트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저놈은 왜 사사건건 시비란 말인가? 이게 에린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하지만 지금은 쓸모없는 한 명이라도 아쉬울 때였기 때문에 쫓아내거나 할 수는 없었다.

“이번엔 말려도 소용없다. 내가 친히 통솔해서 갈 것이다! 그래, 네가 여기 남아서 남은 자들을 통솔해라. 만약 성을 빼앗기면…… 알지?”

“예, 예엣?”

“긴 말할 것 없다. 당장에 준비 시켜!”

거트는 에린에게 점수 따기 위해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 * *

“켁! 그렇게 다른 성들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할 때는 꿈쩍도 않더니, 비코 영지로 간다니까 250명이나 동원했다고?”

“예. 그게 말이나 됩니까? 아무리 여자에 미쳤어도 그렇지.”

또다시 정보를 뱉은 건 말 많은 레이지의 정찰병이었다.

250명이란 대규모 인원이 이동을 했다라……. 그럼 성에 남은 건 고작 50명 뿐? 후후, 이거 생각보다 더 적은 숫자인데?

“이거야 원, 날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는 거 아니야?”

정찰병들의 위치를 모두 파악해 두고 본대로 합류했다. 어제 오마이스 영지를 함락시키자마자 몬스터 군단에게 하루만 성을 지키다가 듀폰 때와 같이 성을 부수고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단, 그동안이 것보다 훨씬 심하게 부수도록 하는 명령을.

다음 목적지는 일리아드. 단, 공격은 말고 근처까지만 이동하도록 했다. 또한 그곳에 당도하면 최대한 서로 간격을 벌리라고도 명했다. 마법사, 그것도 엘리트라 불릴 만한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더 메지션이 지키는 일리아드에서 뭉쳐 있는 것은 곧 죽여 달라는 소리니까.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언데드 군대가 있는 베셀로 돌아와서 이쪽도 정리를 시작했다. 밤을 이용해 성을 파괴하고 비코 영지를 향해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정찰병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수도 쪽의 반응을 살핀 것이다.

거트 형이 비코 영지 쪽으로 상당한 병력을 돌릴 것이란 건 예상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심하군.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지.

“레이얼!”

“예. 주인님.”

“상급 뱀파이어들을 데리고 숨어 있는 쥐새끼들을 처리해라. 동시에 공격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도록.”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주인님.”

레이얼이 공중으로 몸을 띄움과 동시에 수십의 뱀파이어들이 따라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하늘을 까맣게 메우는 박쥐들. 솔직히 저들이 한 번에 덤빈다면 나로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까맣게 몰려갔던 박쥐 떼는 10분도 되지 않아 다시 까맣게 하늘을 덮으며 날아왔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주인님.”

“수고했다. 레이얼. 상급 뱀파이어로만 추렸을 때 3, 400정도의 숫자가 하룻밤 사이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되지?”

“어느 곳으로 이동하길 바라시는지요?”

“수도, 폴메르.”

“여기서 수도까지라면 오늘밤 안으로 가긴 힘듭니다. 대신 내일까지라면 날이 저물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동할까요?”

“그래. 그럼 날이 저물고 두 시간 정도 뒤에 폴메르 근처 헬노스 던전에서 만나도록 하지. 할 수 있겠나?”

“그 정도 시간이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숫자는 300~400정도로 너 편할 대로 데려가라.”

“예, 주인님. 그럼 내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레이얼은 커다란 박쥐 한 마리가 되어 바람을 가르고 북서쪽으로 날아갔다. 자신을 따르는 수백의 박쥐 떼와 함께.

“라노크!”

“예.”

중급 리치들 사이에서 라노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저기에 있었군. 한데……. 저렇게 숨어 있을 이유가 있나?

“너도 상급 리치로 3, 400정도를 추려 놔라. 내일, 수도를 친다.”

“알겠습니다.”

이동이 느린 리치들은 따로 이동할 방법을 생각해 두었기에 약 400마리의 상급 뱀파이어와 레이얼이 빠진 언데드 군대는 그대로 진군을 계속했다.

* * *

“거트 오빠?”

“아, 에린!”

언데드 군대가 비코 영지를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여인궁의 길드장 에반제린은 하얀 빛무리와 함께 예고도 없이 성문 앞에 나타난 거트를 보고 깜짝 놀랐고 그 뒤로 나타난 수백의 유저들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이긴, 너의 영지가 공격을 당한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당연히 길드원들을 이끌고 도와주러 왔지.”

“하지만……. 레이지는 지금까지 다른 길드들 구원 요청을 거절했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수도 방어에만 치중할 거라고 생각 했는데…….”

“내겐 다른 누구보다 네가 더 중요하니까.”

거트는 느끼한 멘트를 날리며 속으로 점수 땄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너무 멀어서 에린의 찡그린 얼굴을 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흐음, 일단 들어오세요.”

돕겠다고 왔는데 문전박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에린은 일단 성문을 열고 거트를 맞이했다. 솔직히 에린은 둘이 있기가 거북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성안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내놓고 거트와 대화를 나눴다.

이번 사태에 대해 의논하려는 자신과는 달리 자꾸 사적인 쪽으로 빠지려 하는 거트 때문에 힘들었지만 참고 이야기의 방향을 제대로 돌려놓으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첫날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사적인 이야기로 채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날, 이번엔 제대로 얘기를 해보자는 생각에 둘만이 아니라 각 길드에서 두세 명씩을 더 데리고 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트가 늦장 부리는 바람에 벌써 날이 저물긴 했지만 베셀에서 비코까지의 거리가 있으니 시간은 그럭저럭 넉넉할 것이다.

“성벽 수리는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레이지 길드의 도움으로 주변 던전들을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일반 유저들을 모으기도 더 쉽죠. 즉, 성을 빼앗긴 어떤 길드보다도 상황은 더 좋다는 뜻이에요. 이제 그들의 공격 루트를 예상해보고 또 대응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에이, 아직 이곳에 도착하려면 며칠 남았는데 벌써부터 그럴 것 있어? 오늘은 그냥 쉬면서 얘기나 하고…….”

“거트 오빠! 아니, 거트님! 일곱 개의 성 중에 네 개의 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대비를 하고 또 해도 모자랄 판에…….”

“알았어, 알았어. 그렇다고 화낼 필요까진 없잖아. 자, 그럼 계획을 세워 봅시다.”

에린이 화난 표정을 짓자 그제야 거트가 조금은 참여 의지를 보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관라놀이를 지그시 누르는 에린.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려는데 정보를 담당하는 레이지의 길드원 하나가 뛰어들어 왔다.

“길드장, 큰일 났습니다!”

“뭐냐?”

회의를 하건 말건 에린의 얼굴 보는 것에 마냥 즐거워하던 거트는 갑자기 회의실로 뛰어 들어온 길드원을 보고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아니라면 이번 일이 끝난 뒤, 길드에서 추방시켜 버리리라 생각하며.

“수도가 함락당하기 직전이랍니다!”

* * *

“라노크!”

“준비됐습니다.”

“공간의 흐름에 따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워프 게이트!”

내 의지에 따라 푸른색 타원형의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라노크와 상급 리치들이 게이트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동안 되도록 마나를 아껴왔던지라 지금도 쭉쭉 빠져나가는 마나가 상당히 아깝긴 했지만 수도를 함락시키기 위해서 이 정도 마나 손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격이라면 뱀파이어들로도 충분할 테지만 수성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마지막 뱀파이어까지 게이트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워프 게이트를 닫았다. 서서히 줄어드는 게이트. 나머지 언데드 군대에게 목적지를 정해주고 나 역시 게이트 속으로 몸을 날렸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그래. 주위에 너희를 본 사람은 없겠지?”

“예. 근처에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좋아. 그럼 당장에 성을 기습한다. 오래 끌어봐야 사람들에게 발각될 확률만 높아져. 뱀파이어들은 최대한 빨리 성안으로 침투해서 침대를 부수고, 그 안의 사람들을 죽여라. 위치는 알고 있겠지?”

“예. 주인님.”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뱀파이어들에게 미리 침대가 있는 곳을 설명해 준 상태였다.

이것으로 적의 지원 병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좋다. 가라! 그리고 라노크와 리치들은 바깥에 있는 적들부터 죽이고 곧 당도할 적의 지원군을 막는다. 알겠나?”

“예.”

“시작하라!”

이동과 그에 이은 기습은 아주 빠르게 이루어졌다.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몰려 들어간 박쥐들은 순식간에 성을 제압하고 침대를 파괴했고, 비교적 느리게 성으로 진입한 리치들은 성벽 위에 올라 철저하게 바깥으로부터의 침입을 저지했다.

“후후후. 이렇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수도를 빼앗기면 되찾기 위해 지금까지완 비교도 안 되는 숫자가 성을 공격해 오겠지. 그렇게 되면……. 학살 시작이다!”

일단 그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곧 들이닥칠 레이지 길드를 막아야 했다.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이 온전한 성벽과 그 위에 있는 상급 리치들 덕분에 걱정이 되진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트 형이 100여 명의 길드원들을 이끌고 성문 바깥쪽에 나타났다. 콧김까지 뿜어대며 씩씩거리는 것이 화가 잔뜩 난 듯.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봐줄 이유가 없다.

“돌격! 성을 되찾아라!”

“클라우드 킬!”

성벽 위의 리치를 확인했을 텐데도 거트 형은 정면 공격을 명했다.

흐음, 200명도 넘는 인원이여야 할 텐데 100명 정도밖에 없고 무식한 정면 공격이라? 이렇게나 간단한 페인트라니,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뭐야?

“레이얼, 상급 리치 80마리와 뱀파이어 200마리를 데리고 성의 반대편으로 가라. 150명가량의 적이 쳐들어 올 것이다.”

“예. 주인님.”

예상은 적중했다. 독을 연상시키는 녹색 구름. 죽음의 구름인 클라우드 킬과 다크 선더 등에 정면 공격을 감행한 인원의 반절이 나자빠질 즈음에 성의 뒤쪽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곧 비명 소리로 바뀌긴 했지만.

“길드장, 실팹니다.”

“크윽, 작전상 후퇴다!”

속전속결을 노린 것 같지만 오히려 속전속결로 패배하고 도망치는 거트 형. 모두가 사라진 후에 후방으로 갔던 레이얼이 보고를 했다.

“뱀파이어 34마리가 사망하였고, 리치는 13마리가 사망했습니다.”

“으흠, 수고했다. 성벽 수비는 리치들에게 맡기고 가서 쉬어라.”

“예, 주인님.”

레이얼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른 뱀파이어들과 함께 성을 향해 날아갔다.

명령만 내려두고 온 언데드 군대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걸릴 예상 시간은 약 삼일. 중간에 유저들에게 공격받아 적지 않은 타격은 입겠지만 상당수의 리치와 뱀파이어들이 있으니 전멸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러니 그쪽에 대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고……. 일단 대단위 유저 연합군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전부 병력은 아껴야 하니 모아뒀던 마나를 개방해야겠군.”

수성을 위해 내가 할 일을 떠올리고 준비를 위해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수도가 함락된 다음날, 온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어딜 가나 이야기의 주제는 레이지 길드의 무능력함이었고 간혹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콜로니스트를 원망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한참 각 던전의 몬스터들을 막아낸 유저들이 수도 함락 사건을 안주삼아 펍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알비츠 마을.

한 파티가 한창 목소리 높여 레이지를 비난하고 있을 때, 웬 병사들이 들어와 벽에 포고문을 붙이기 시작했다.

신기한 듯 모여드는 사람들. 그 포고문엔 레이지 길드장의 친필로 적힌 사죄의 글과 수도를 되찾기 위해 힘을 실어달라는 부탁의 말이 적혀있었다. 수도에 있는 뱀파이어와 리치는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별동대이기 때문에 적 수뇌부를 섬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부추김과 함께.

“쳇, 이제 와서 반성하면 뭘해?”

“그래도 정신 차린 게 어디야? 갈 거냐?”

“뭐, 어차피 잡아야 할 놈들인데 본대와 떨어져 있을 때 잡는 편이 좋겠지.”

어차피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작용하여 사람들은 하나 둘씩 모여 들라고 요청된 장소인 성 밖 1km 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제길! 내가 저런 것들한테 머릴 숙여야 한다니.”

에린의 끈질긴 설득에 사죄의 글이 담긴 포고문을 써서 전국에 배포했지만 거트는 내심 못마땅했다. 자신이 한 번 실수 한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을 떠받들어야 할 것들한테 머리 숙여 사죄하라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에린만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약속 장소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언뜻 봐도 몇 만은 족히 될 법한 머릿수.

이 정도라면 자신의 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거트는 기분이 조금 풀렸다.

“쳇, 에린의 부탁이니 할 수 없지.”

다시 한 번 자의가 아님을 자신에게 말하고 거트는 단상 위로 섰다. 그리고 포고문에 썼던 내용을 그대로 종이를 보고 읽었다.

반응은 시큰둥했다. 말하는 사람이 열정적이지 않으니 듣는 사람도 달아오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운영자 고블린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자, 마인을 죽이시는 분에게는 수식어 용자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마인 정도나 되는 최고위 몬스터를 잡고 나면 어떤 레벨의 아이템이 드랍될지는……. 다들 예상하고 계시겠죠? 그럼 행운을 빕니다.”

“오오오오!!!”

갑작스런 운영자의 등장과 격려로 사람들의 눈은 불타올랐다. 정확히는 용자라는 폼 나는 수식어와 마인에게 떨어질 엄청난 아이템 때문이지만. 게다가 사람들은 운영자가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이벤트가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멋대로 믿고 있었다. 운영자가 노린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자, 진격!”

거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격 명령을 내렸다. 좀 더 작전을 짜고, 설명한 후에 공격하는 게 옳았겠지만 이 정도 숫자면 언데드 군대 전체와도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또 자신의 말과 운영자의 말에 커다란 반응의 차이를 보인 유저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한번 당해보라는 심술도 작용한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저들은 폴메르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크크크. 먼저 가봐야 리치의 마법에 당하기 밖에 더해? 이럴 땐 천천히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마무리만 하는 게 제일이지.”

거트는 혼자 중얼거리며 에린을 데리고 행렬의 뒤쪽으로 빠졌다.

“한낮인 지금 성에는 리치밖에 없다. 쓸어버리자!”

“우오오오!!”

질서고 뭐고 없었다. 그나마 형태를 이뤄 걸어가던 유저들은 이제 서로 먼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밀고 밀치고 자기들끼리의 싸움을 시작할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성과의 거리가 약 400m 가량 되었을 때, 폭음과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지뢰다!!”

* * *

내 예상대로 수만에 이르는 유저들이 몰려들었다.

성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연설하는 거트 형. 하지만 별 호응은 없었고 급기야 운영자가 나서서 유저들을 선동했다.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운영자의 몇 마리 안 되는 말에 유저들은 거의 버서커 상태가 되었다. 쪽수를 믿는 것인지 진형이고 작전이고 할 것 없이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유저들. 그들을 보며 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지뢰다!!”

콰앙!

선두의 발아래서 폭발이 일어나며 수십 명이 화상을 입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으흠, 매직 트랩이 제대로 작동하는군. 저게……. 플레임 스트라이크였던가?

“지뢰 같은 게 어딨어? 헛소리 말고 돌격해!”

촤악! 치지직!

이번엔 콤보였다. 1써클의 아쿠아 마법에 4써클 가량의 마나를 담아놓고, 아쿠아가 떨어지는 압력에 의해 근처에 있던 체인 라이트닝 트랩이 발동하는. 물에 흠뻑 젖은 자들은 체인 라이트닝에 의해 감전 되었고 몸을 부르르 떨다가 트랩 하나를 잘못 밟아서 또다시 폭발에 휘말렸다.

“모두 후퇴!”

이제야 두려움을 느꼈는지 광전사에 가깝던 유저들은 제정신을 차리고 트랩의 영역 밖으로 물러났다.

후후, 그래봐야 결국 방법은 하나야. 몸으로 때우는 것!

“나무를 굴려라! 나무를 굴려서 지뢰를 파괴한 뒤 공격한다!”

내가 전에 썼던 방법을 떠올린 것일까? 누군가 사람들에게 나무를 굴려 트랩을 파괴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헉! 그러고 보니 나무가 없잖아?!”

나무는 어젯밤에 내가 전부 불태워버렸다. 나무를 찾으려면 꽤 멀리까지 다녀와야 할 걸? 찾아와도 화염 계열 마법이 담긴 트랩에 걸리면 단박에 못쓰게 될 테고. 엄청나게 많은 나무를 가져다가 트랩이 전부 박살 날 때까지 굴린다? 그때쯤이면……. 언데드 군대의 본대가 도착하겠지.

“서둘러서 찾아라!”

소용없는 짓인데도 유저들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한 시간도 넘는 시간이 흐른 뒤, 어찌어찌 구해온 나무를 겨우 다듬은 유저들은 힘을 모아 굴리다가 절망해야 했다. 재수 없게도 화염계 마법이 담긴 트랩에 바로 걸려서 오히려 나무의 파편이 인명 피해를 낸 것이다. 결국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유저들은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이거야 원……. 바보들의 행진이구만.”

불속으로 달려드는 부나방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들, 로그를 데려오면 될 것 가지고. 물론 로그가 나타나도 마법 트랩을 해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고 해제한다 해도 내가 가만히 둘 리는 없지만.

콰앙! 펑! 콰과광!

내 마나의 3분의 1 가량을 털어서 만든 트랩 밭을 반쯤 통과하는 동안 희생된 유저들의 수는 거의 천 명에 육박했다.

으흠, 아직 멀었어!

“조금만 더 힘내라! 고지가 눈앞에 있다!”

“흥, 눈앞에 있으면 뭘해? 그림의 떡인데.”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맛보기였단 걸. 진짜 높은 클래스의 마법이 담긴 트랩은……. 지금부터다.

“하지만 굳이 그걸 다 쓸 필요는 없겠지. 하늘의 축복, 때로는 저주. 레인 폴!”

손바닥 위에 뭉친 빛 덩어리는 하늘로 올라가 큰 먹구름이 되었다. 원래 써클에 해당하는 마나보다 더 많은 마나를 먹은 먹구름은 거침없이 세상을 덮었고, 곧이어 타는 듯한 태양까지 집어삼켰다. 그리고…….

“라노크!”

“예. 공격하라!”

“다크 선더!”

비와 함께 검은 번개가 쏟아졌다.

“크아악!!!”

다크 선더. 원래가 맞으면 살이 썩어 들어가는 마법이다. 때문에 인간은 사용할 수 없고. 자체적인 데미지도 큰데 이건 그냥 포션으로도 치유가 안 되고 신성력이 닿아야 치료가 돼서 유저들로서는 골치 아픈 마법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이런 상황에서 맞으니 제대로 맞든 스쳐 맞든 맞은 사람은 즉시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

후퇴하지 않으면 피해만 더 커질 뿐이란 게 뻔히 보이는데 유저들은 인원수를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거이거, 이렇게 되면 더 쓴 맛을 보여줘야겠군.

“본드!”

상징적인 의미 비슷하게 성 꼭대기에 올려놓은 본드가 내 부름을 듣고 날아왔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위에 있다가 번개 맞으면 어쩌지?

“본드, 브레스다!”

“크오오오오오오!!!”

본드의 브레스는 앞쪽이 아닌 적 진영 중앙에 떨어졌다. 혼비백산하는 유저들. 하지만 끈질긴 인간들은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질려버리는군. 진형이 이렇게나 흔들리는데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버티는 거야? 이렇게 되면 리치들이 위험해질 것 같은데…….

“레이얼!”

본드를 타고 선회하면서 레이얼을 불렀다. 내 뜻을 이해했는지 수백의 뱀파이어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오는 레이얼. 태양이 먹구름에 가려진 지금 레이얼은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미소 짓게 하는 따스한 봄날의 햇볕. 파인!”

뱀파이어가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본 마법사 하나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기후조절 마법 중 하나인 파인을 시전했다.

하늘로 올라간 빛덩이. 그리고 일렁이는 먹구름. 하지만 먹구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정도 생각이야 나도 했지.”

어젯밤 실험한 결과 더 많은 마나로 만든 컨트롤 웨더는 더 적은 마나로 만든 컨트롤 웨더에 깨지지 않는다. 내가 컨트롤 웨더 레인을 만드는데 사용한 마나는 원래 써클보다 3단계나 높은 9써클이니 6써클짜리 파인에 깨질리 없지.

“쳐라!”

레이얼의 명령에 따라 100마리 가량의 뱀파이어들은 리치들의 곁에 남아있고 나머지는 측면으로 돌아가 적들을 공격했다. 리치들이 다크 선더를 쓰는데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압도적인 숫자의 차이이긴 하지만 뱀파이어들은 히트 앤 런 전법을 잘 활용하며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피해를 입혔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본드, 저공비행!”

본드는 유저들의 머리에 닿을 듯 말듯, 검을 치켜들면 벨 수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날았다. 그 덕에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생겼지만 풍압에 의해 내동댕이쳐진 적들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 넘어진 유저들은 뱀파이어들에게 공격당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너덧 번을 반복하자 본드의 몸은 넝마가 되었다.

“할 수 없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파이어. 더블!”

두 손에 피어오르는 검은 불꽃. 진정한 지옥의 불꽃이었다.

“본드, 돌아가.”

본드를 돌려보내고 날개를 펴서 적이 몰려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땅에 내려앉아 사방으로 날 둘러싸는 유저들. 탐욕 어린 그들의 눈을 보며 피식 비웃음을 날려주고 양 옆으로 헬파이어를 쏘아냈다.

“하압!”

그걸 신호로 여겼을까? 사방에서 검과 화살, 마법이 날아들었다.

“실드!”

내 주위로 반구를 그리며 탄탄한 마법의 장막이 형성되었다.

그 위로 쏟아지는 검강 다발들. 하나 엄청난 마나를 자랑하는 내 앞에선 무력할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자신들에게 위험한 것이었다.

“크악!”

“누굴 맞추는 거야?”

“네깟 놈들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마인은 내거야!”

내게 검강을 날리던 기사가 마법사의 마법에 휘말리고, 그 마법사는 또 멀리서 날아온 궁수들의 화살에 몸을 꿰뚫리고, 서로가 나를 못 잡아먹어서 난달이 난 상황에서 나에게 날아오는 칼질의 횟수는 오히려 지극히 적었다.

“헉! 저, 저기!!”

뒤늦게 내가 쏜 헬 파이어의 흔적을 발견했는지 근처에서 칼질하던 기사 하나가 검까지 떨어뜨릴 정도로 흥분해서 소리쳤다. 관통, 관통, 관통, 관통. 헬 파이어가 지나간 자리에 놓인 시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주먹만 한 구멍과 그 주위가 녹아내린 흔적이었다.

“저, 저건 아까……?!”

“제길, 튀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내가 한두 명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걸 안 이상…….

“으……. 임시 휴전이다!”

협공을 할 거란 말이지!

“블링크 앤 하이딩!”

제법 빠른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내가 눈치 챈 것이 더 먼저였다. 설마하니 마인이 로그 쪽 기술을 가졌으리라곤 생각 못했는지 애꿎은 땅만 발로 차는 유저들. 조금만 망설였으면 큰일 날 뻔했다.

“크윽! 퇴각하라!”

성문에 닿아보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하는 유저들을 보고 거트 형은 입술을 깨물며 퇴각 명령을 내렸다. 거트 형 밑에 있는 부하가 아닌 일반 유저들이라 통제는 잘 안됐지만 그들도 이대로는 위험하단 걸 깨달았기에 후퇴하는 속도는 제법 빨랐다.

“후우, 위험했다.”

사실 쪽수가 쪽수인 만큼 계속 밀고 들어왔으면 결국 전멸 당했을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마도 상대가 우리의 숫자를 잘못 파악한 것이 클 터. 리치들이 성벽 위에만 잔뜩 포진해 있으니 숫자를 잘못 가늠할 만하지만 천운이 작용한 것은 틀림없다.

“그럼 다시 복구를 해보실까? 레이얼! 트랩을 가져와라!”

“예. 주인님.”

레이얼은 승리의 기쁨 때문인지 눈을 번뜩이며 대답한 뒤 뱀파이어들과 함께 성으로 날아갔다. 성안 내 방 안에 있는 트랩들을 가져오기 위해서.

“가져왔습니다. 주이님.”

잠시 후, 레이얼과 뱀파이어들은 각자 한 아름씩 트랩을 안고 내 앞에 섰다.

후우, 저걸 다 설치하려면 또 마나를 퍼부어야겠군.

“저기에 쌓아놓고 주변 경계를 서라. 주위에 남아 있는 인간들이 없는지 철저하게 경비를 서도록.”

“음, 저 먹구름은 얼마나 유지되는 겁니까?”

“걱정마라. 적어도 오일 이상은 갈 테니까.”

“그렇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이얼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인사를 하고 순찰을 돌았다. 한참 후, 이번엔 성과 가까운 쪽에 설치한 대단위 마법이 멀쩡한 상태였기 때문에 3분의 1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한 마나를 쏟아 붓고 돌아왔다.

트랩의 설치를 위해 오랫동안 쭈그려 앉아 있었더니 피곤하군.

“난 좀 쉴테니 적이 공격해오면 알리거라.”

앉을 곳을 찾다가 레이얼이 국왕의 집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왕좌에 앉았다. 아무도 없는 곳보다는 그래도 보디가드가 있는 편이 좋을 테니까.

“후후후후. 쉬어야지. 단, 영원히.”

갑자기 변한 레이얼의 말투에 놀랄 새도 없이 몸을 할퀴어오는 손톱을 피해야 했다. 푸욱 소리와 함께 왕좌를 잘라내는 레이얼의 손톱.

“무슨 짓이냐!”

“아직도 모르겠나? 널 죽이려는 것이다. 감히 진짜 마족도 아니고 인간이었던 주제에 하급이긴 하나 진짜 마계의 귀족인 내게 명령을 내려? 잠시 내 계획을 위해 머리를 숙였으나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 블러드 스트라이크!”

또다시 손톱을 세워 짓이겨 오는 레이얼. 굉장히 빠른 속도이긴 하지만 나 역시 마인이 되면서 엄청나게 능력치가 상승된 상태이기 때문에 충분히 반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능력치 면에서는 내가 우위인 것 같군.

“차합!”

한 발자국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오른손으로 손등을 쳤다. 제사가 무너지는 레이얼. 그런 놈을 향해 왼 주먹에 배신감을 가득 담아 크게 휘둘렀다. 놈이 달려들던 속도가 있는 만큼 카운터의 위력을 낸 펀치. 레이얼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큰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제길, 쪽수가 장난이 아니군.”

나를 공격하기 위해 움직인 것은 비단 레이얼뿐이 아니었다. 주위에 호위라고 믿었던 뱀파이어 전원이 나를 공격해 왔고, 난 전 방위에서 강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설마 리치들까지 배신하는 건 아니겠지?”

좌측에서 달려들던 놈의 얼굴을 딛고 발차기로 장내를 한 바퀴 휩쓸면서 중얼거렸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저 빌어먹을 놈의 박쥐 새끼가 그 정도 대비도 없이 일을 벌일 정도로 무모하진 않다고 보니까. 자신과 비슷한 세력을 지닌 라노크를 쉽게 적으로 돌리려 하진 않을 것이다.

“블링크! 하이딩!”

실드를 펼쳐도 아까 그 멍청이들 같은 반응은 보이지 않을 것이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마나만 낭비할 것이기에 일단은 몸을 숨기기로 했다.

“크윽, 제길. 입구를 막아라!”

벽에 부딪혔던 레이얼이 코를 매만지며 일어났다. 내가 하이딩을 사용하는 것을 몇 번 봐서인지 아직 방안에 있다는 걸 눈치 챈 레이얼. 먼저 입구를 봉쇄하고 찬찬히 주위를 살폈다.

“블러드 볼!”

레이얼의 손에 선홍색의 액체가 아쿠아 볼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래도 숨어 있을 수 있는지 보자!”

내게 카운터를 맞고 화가 잔뜩 났는지 레이얼은 계속해서 블러드 볼을 이곳저곳에 난사했다.

이크! 맞을 뻔 했다.

“큭큭큭, 거기 숨어 있었군.”

“에……. 내가 보여?”

낮게 웃으며 내 쪽을 바라보는 레이얼. 놈이 날 바라보는 눈빛은 단순한 허세가 아닌 진짜였다.

“피 뿌리기였군!”

“그걸 이제야 눈치 채다니, 생각보다 둔하군?”

“둔한 놈한테 얻어맞은 넌 뭐냐?”

“큭, 아직도 입은 살았군. 쳐라!”

레이얼, 이 치사한 놈은 정작 자신은 덤비지 않고 부하들만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캐스팅 없이 쓸 수 있는 간단한 마법들로 위기를 넘겨가며 박투를 펼치는 가운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같이 상급 뱀파이어일 텐데 각자의 기량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떤 놈들은 못 막을 것이라 생각한 공격을 막고, 또 어떤 놈들은 막혔구나 싶은 것에 맞고. 적중에 약한 놈이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큭, 개떼로군.”

몇 분 되지 않아 숨을 헐떡일 정도로 격한 움직임을 보였는데도 뱀파이어들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질 않았다. 좁은 공간이다 보니 한 놈을 패면 다른 놈이 앞을 가로 막아서 마무리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은 좀 더 넓은 공간으로 가는 편이 낫겠군. 여기에 리치들까지 합류하면 골치 아파지겠지만 이대로도 힘든 건 마찬가지야.

“라이트!”

“크윽!”

마인인 상태에서 빛 속성인 라이트 마법이 써질까 의문이었고 또 써진다 해도 몸에 부담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라이트는 패널이 없이 사용 가능했다. 라이트의 강렬한 빛 때문에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은 뱀파이어들. 지금이 기회다!

“블링크!”

단숨에 문 앞까지 이동해서 손톱으로 문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도주. 뒤늦게 뱀파이어들이 쫓아오는 것이 보였지만 이미 거리가 벌어진 상태라 쉽게 좁혀지진 않았다. 마인의 능력치는 오히려 뱀파이어들을 압도했으니까.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화르륵!

이동 속도를 높이기 위해 박쥐로 변해 날아오던 뱀파이어들은 갑자기 복도 전체를 메우며 날아온 불꽃에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바삭바삭하게 구워졌다.

“이걸로 시간은 조금 벌었군. 한데, 리치들까지 공격해오면 막아낼 수 있을까? 제길! 이것도 분명 빌어먹을 운영자 짓일 거야. 두고보자, 제롬.”

복도가 제법 길었던 탓에 한참 동안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계속됐다. 그러다 돌연 창문을 딛고 밖으로 점프했다. 5층 높이였지만 내겐 날개가 있었고, 또…….

“본드!”

날 태워줄 본드가 있었다. 크륵거리면서 날아온 본드는 날 태우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브레스를 갈기고 싶지만 이미 하루 한 번 사용 가능한 브레스는 유저들에게 써버린 상태. 이제 도망갈 것이냐 내려가서 다시 싸울 것이냐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 싸우자. 싸우다 정 안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빅뱅이란 자폭 기술은 괜히 있는게 아니지! 본드, 내려가자. 내려가서 저 박쥐 새끼들을 쓸어버리자!”

“크르릉!”

내 분노에 동조하듯 본드는 크게 울부짖으며 땅으로 돌진해갔다.

“파이어 개틀링!”

손가락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나간 불꽃의 탄환엔 마나가 잔뜩 실려 있어 한 발 한 발이 파이어 볼에 맞먹는 위력을 지닐 터였다.

“크아악!”

무모하게 팔을 X자로 교차해서 불꽃 탄환을 막으려던 세 마리의 뱀파이어가 전신이 화염에 휩싸여 한줌 재로 변했다. 역시 화염 계열이 잘 통하는군. 그러고 보니 이럴 필요가 없잖아?

“큭큭큭, 나도 참 바보 같군. 레이얼, 넌 이제 끝이다. 미소 짓게 하는 따스한 봄날의 햇볕, 파인!”

기후조절 마법. 이것 한 방이면 모든 상황이 종결될 것을 너무 바보처럼 굴었다. 햇빛에 닿으면 제 아무리 뱀파이어 로드라 해도 치명상을 입는다고 했으렸다?

“큭큭……. 응?”

치직…….

뭔가 저항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내가 이미 핏빛 결계 안에 갇혀 있었고 내가 사용한 컨트롤 웨더 주문은 그 결계를 뚫지 못하고 사라진 상태였다.

핏빛 결계라니, 리치들의 짓인가?

“크크크큭. 이제 깨달았나? 넌 이미 결계 안에 갇힌 거다. 빠져나가기 위해선……. 날 죽여야 하지.”

뭐? 라노크가 아니라 레이얼을 죽여야 해? 그럴 리가, 뱀파이어한테 무슨 마법이 있다고……. 혹시 페인팅인가?

“레이얼, 이게 무슨 짓인가!”

잠시 혼란스러워 하는 동안 라노크가 앞으로 나서며 레이얼에게 호통을 쳤다. 뭐야, 그럼 레이얼만 배신한 건가?

“보면 모르나? 저자를 죽이려는 것이다. 너도 느꼈겠지. 저자는 진짜 마족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그가 마족이건 뭐건 난 그와 약속했다. 그에게 힘을 보태고 일리아드를 받기로.”

그게 뭐 대수냐? 라는 식의 라노크의 말을 들으며 안도하는 한편, 또 불안해졌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와 손을 잡았으니 목적을 위해 레이얼처럼 배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후후. 그렇다면 그 계약을 내 쪽에서 넘겨받기로 하지. 확실히 저자의 트랩은 위력적이어서 성을 방어하는데 효과적이지만 그뿐이다. 지금처럼 트랩이 다 깔려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인간들 따위는 두려워할 것이 못 되지. 저자를 제거하고 난 세상을 지배하는 거다! 그때, 너에게 일리아드를 주지.”

“…….”

라노크는 잠시 침묵했다. 득의의 미소를 짓는 레이얼. 라노크가 넘어올 것이란 걸 확신하는 듯했다. 솔직히 뱀파이어들이 없다면 일리아드 공격 자체가 어려워지니……. 넘어갈 법하군. 젠장, 이렇게 되면 빅뱅이다. 너 죽고 나 죽…….

“웃기는군. 주인을 배신한 개의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응?”

라노크의 반응은 의외였다. 연기였다고는 하나 주인으로 모시던 나를 배신한 레이얼을 믿지 못한다는 그는 허공에 손을 휘저어 지팡이를 소환해내고 싸울 자세를 취했다.

오, 저 소환마법 마음에 드는데? 어떻게 스킬북 같은 거 못 구하려나?

“굳이 벌주를 들겠다니 할 수 없군. 후후, 네가 나와 맞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지.”

“훗, 네가 이럴 것이란 건 대충 예상했었다.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지. 본 드레이크를 소환하면서 사용한 마나는 이미 어제 모두 회복했다. 하지만 네 체력은 어떻지? 그리고 블러드 매직을 쓰면서 사용한 마나는? 지금의 넌, 날 이길 수 없다.”

“크윽, 그럼 이건 어떠냐. 나와라!”

라노크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린 레리얼은 크게 손을 휘둘렀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인기척들. 성안과 골목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숫자는……. 1천도 훌쩍 넘는 엄청난 대병력!

“어, 어떻게 이런 숫자가?!”

“잊었나 보군. 비록 하급이지만 우린 인간들을 흡혈해서 뱀파이어로 만들 수 있다.”

“크흠, 선공을 해야겠습니다. 쳐라!”

“흥, 리치 따위가 어딜! 저들을 죽여라!”

혼전이 벌어졌다. 뱀파이어들이 수적 우세에, 접근전에서 더 강하긴 하지만 리치들에게 다가가는 동안 리치들은 한 번, 많으면 두 번의 마법 공격을 성공 시켰다. 비록 그것을 마지막으로 사망하기 일쑤지만 마법의 좋은 점이 무엇인가, 바로 한 번에 대량 살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리치들은 뱀파이어와 호각을 이루었다.

“이럴 땐 대장을 잡아야지. 라노크, 가자!”

“예.”

라노크의 허리를 왼팔로 감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와 함께 상당수의 뱀파이어들이 박쥐로 변해 따라 올라왔지만 내 주위로 두른 실드에 가로막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대략적인 방향을 잡고, 그대로 돌격! 실드의 단단함을 무기로 나 스스로가 탄환이 되어 레이얼에게 쏘아져갔다.

“블러드 익스플로젼!”

레이얼이 쏘아낸 핏빛의 구가 실드에 부딪혀 폭발했다. 하나 상당한 마나를 투자해서 만들어낸 실드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레이얼은 얼굴을 찡그리며 수백 마리의 박쥐로 변신했다.

“파이어 볼, 더블!”

레이얼의 변신과 함께 급히 실드를 풀고 파이어 볼을 날렸다. 새까맣게 불탄 몸으로 추락하는 박쥐들. 그대로 다시 형태를 이루 F수 없으면 좋겠으나 아쉽게도 레이얼의 힘을 조금 약화시킨 것에 그쳤다.

“클, 블러드 홀드!”

죽은 박쥐들이 팔에 해당하는 놈들이었는지 오른손으로 왼팔을 부여잡는 레이얼. 놈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이번엔 발밑에 고인 핏물들이 발목을 붙잡았다.

“미디어 스웜!”

“실드!”

라노크가 지팡이를 땅에 내리찍자 지팡이에서 잠시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다섯 개의 커다란 불덩어리. 척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녔을 것 같은 그 마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일단 8써클에 해당하는 마나를 실드에 불어넣었다.

쿠웅!

8써클 급의 마나인데도 실드는 깨어질 듯 크게 흔들렸다. 근처에 모여 있던 뱀파이어들은 순식간에 전멸. 살아남은 건 수십 말의 뱀파이어들의 시체를 방패삼아 피해를 최소화 시킨 레이얼 혼자였다. 물론 멀리에는 아직도 수백의 뱀파이어들이 있었지만.

“빌어먹을 리치! 인간도 마족도 아닌 변종 따위가!”

입고 있던 옷이 넝마가 되고 머리도 산발이 되어버린 레이얼은 핏발 선 눈으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레 반해 무표정하게 레이얼을 쳐다보는 라노크.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뭐야, 난 꿔다놓은 보리자루야?

“소닉 슬러쉬!”

“크아앗!”

다시 한 번 라노크의 지팡이가 땅을 때리자 2미터는 될 법한 진공의 칼날이 레이얼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하지만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정면으로 달려오는 레이얼.

“이까짓 것!”

소닛 슬러쉬를 눈앞에 둔 레이얼은 핏빛을 머금은 손으로 진공의 검, 그 중심부를 움켜쥐었다.

1초간의 멈칫거림. 그리고 흩어져버린 마법. 레이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라노크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지팡이로 땅을 때릴 뿐이었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흥!”

레이얼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는 화염의 구. 하지만 레이얼은 손짓 한번으로 튕겨내 버렸다. 그리고……. 후회했다.

콰앙!

튕겨진 플레임 스트라이크가 작열한 곳엔 한 무더기의 뱀파이어가 있던 것이다. 뱀파이어들의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 어디로 쏴도 뱀파이어들만 맞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약아 빠진!”

“날 잊었나 보군!”

접근전으로 몰고 가려는지 최대한 마법들을 하늘 위로 튕겨내며 다가오는 레이얼. 하지만 나라고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처음에 행했던 카운터를 통해서 내가 압도적인 능력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놈을 맞상대하러 달려 나간 것이다.

채쟁!

레이얼과 나의 손톱이 서로 맞물렸다. 핏빛과 묵빛 손톱들의 힘겨루기. 우위를 차지한 건 당연히 나였다.

“젠장!”

자신의 핏빛 손톱이 밀리다 못해 잘려질 위기에 처하자 레이얼은 즉시 상체를 뒤로 뉘이며 내 몸을 팔로 찼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멀찌감치 이동. 하지만 자세를 잡기도 전에 라노크의 마법 공격을 받아야 했다.

“크윽, 비겁한 녀석들!”

“배신자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닥쳐라! 라노크. 마법의 끝을 보려 한다는 거창한 리츠들의 수장이면서 저런 반쪽짜리의 뒤에 숨어만 있을 거냐!”

“너도 말했듯이 난 마법의 끝을 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무엇이든에 협공도 예외는 아니지.”

“빌어먹을, 두고 보자!”

마지막 회우가 실패하자 레이얼은 뒤도 안 돌아보고 전력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놓칠 수야 없지!

“라노크, 따라가자!”

“잠시만…….”

라노크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더 지체했다간 놓쳐버릴 것 같았기에 난 먼저 달려 나갔다. 내 발목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뱀파이어들. 그들에겐 살포시 라이트를 소환해서 눈을 멀게 해주고 계속해서 레이얼을 뒤쫓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리치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 갔기에 대장인 레이얼을 잡아서 이 싸움을 끝내려는 것이다. 뱀파이어들도 대장을 잃으면 내 어둠의 힘 앞에 다시 복종하겠지.

퍼억!

“이제 다 도망쳤냐!”

능력치의 차이로 인해 조금씩 거리를 좁히다가 어느 순간에 점프를 해서 레이얼의 등을 발로 차버렸다. 등에 느껴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는 레이얼. 그러나 땅을 짚고 일어나는 놈의 얼굴엔 뜻 모를 미소가 걸려 있었다.

“뭐, 뭐냐? 재수 없게.”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블링크를 써서 도착한 라노크를 보며 레이얼의 입은 더 크게 찢어졌다.

“큭큭큭, 걸려들었군.”

“뭣?”

“피하십시오!”

“블러드 패러사이트!”

라노크가 날 밀쳤지만 바닥에서 솟구친 핏빛 막에 부딪혀 다시 제자리로 튕겨 돌아와야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뭐지, 이 찝찝한 느낌은?”

아주 재수 없는,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장막 밖에서 우릴 쳐다보는 레이얼의 눈빛 이외에도 알 수 없는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생겼다. 핏빛 장막이 쳐진 이후로.

내가 친 실드는 아니고, 레이얼이 사용한 것인가? 우리의 발을 묶기 위해서?

“이런 얕은 수를……!”

터엉!

핏빛 장막을 찢어버리기 위해 손톱에 마나를 불어넣어 강기를 일으키는 순간, 주먹에서 상당한 손실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손톱도 장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강기가……. 사라졌다?”

“블러드 매직의 최상급 속박 마법 블러드 패러사이트입니다. 마법진 안에 갇힌 자들의 마나를 조금씩 빼앗아 결국은 마나 고갈로 만드는 마법이죠. 그 안에 있는 자가 마법이나 강기와 같은 마나를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를 할 시, 그 기술의 마나를 흡수해버립니다. 흡수된 마나는……. 장막을 더 강하게 만드는데 쓰이죠.”

“그럼 마법이나 강기를 쓸 수 없다는 소리야? 내 손톱으로도 뚫리지 않는 단단한 장막을 기술 없이 뚫으라고?”

라노크의 설명을 듣고 난 기가 막혔다.

명검 이상의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가진 내 손톱으로도 뚫리지 않는 장막을 기술 없이 어떻게 뚫고 나가란 말이야? 하다하다 이젠 별 사기 같은 스킬까지…….

“그렇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마법을 한 번 써보시지요. 단, 장막이 더 강해지면 안 되니 낮은 써클로요.”

“하라면 못할까봐? 파이어 애로우!”

스르륵!

1써클의 파이어 애로우는 2미터도 못 날아가서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대단한 위력을 지닌 마법인 만큼 사전에 자신의 피로 만든 마법진도 그려야 하고, 적어 넣는 마법 수식도 복잡합니다. 그런데 이런 게 여기 있다는 소리는……. 꽤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소리군요. 수식 계산까지 미리 끝마친 걸 보니.”

“빌어먹을 자식, 그럼 이걸 깨는 방법은?”

“일반적인 방법 중에는……. 없습니다.”

라노크는 절망적이지만, 작은 희망의 불씨를 내비치는 대답을 했다. 일반적인 방법에 없다면 일방적이지 않은 방법에는 있다는 소리?

“그럼 방법은 있다는 소린가? 그게 뭐지?”

라노크는 안달하는 나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어렵게 입을 떼었다.

“……먼저,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십시오.”

“약속? 내 목을 달라는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제가 없어도……. 당신의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리치들을 이끌고 일리아드를 정복해주십시오. 전 꼭 제가 아니어도 누군가 마법의 끝을 보는데 일조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네가 없어도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이건 마치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장막을 부수겠다는 소리 같잖아?!

“이 장막을 깨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빅뱅.”

“……!”

극소량의 HP만을 남기고 모든 HP, MP를 폭발시키는 일명 자폭 마법 빅뱅. 지금 여기서 그걸 쓰겠다고? 마나 흡수를 당하는 상태에서 그걸 써봐야 장막만 두껍게 하고 성공한다 해도 둘 다 무사하지 못할 텐데?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빅뱅은 자신의 몸속에서 이미 모든 마나와 생명력을 태우기 때문에 장막에 흡수될 일이 없지요.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건 폭발력뿐입니다. 그리고 충격에 대한 방어는……. 빅뱅이 시전되는 순간을 잘 맞춰서 최대한의 마나를 개방해 실드를 펼치십시오. 엄청난 양의 마나라면 제 아무리 장막이라 할지라도 단숨에 흡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10분의 1도 흡수하기 전에 빅뱅에 의해서 파괴되겠지요. 약속해주시겠습니까?”

라노크는 족집게처럼 내 의문들을 풀어줬다. 제길, 부하를 희생시키는 보스라니……!

“알았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라도 되어주지. 마법의 끝을 본 자가!

“그럼, 물러서 주십시오.”

라노크는 나에게 최대한 피해를 덜 주기 위해, 또 나를 레이얼과 최대한 가깝게 만들기 위해 장막의 맨 뒤에 가서 섰다. 준비가 됐는지 나를 쳐다보는 라노크.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재된 힘의 폭발, 그리고 분출. 빅뱅!”

비장한 음성과 함께 지팡이가 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신호다.

“실드!”

콰과과과광!!!!

9써클도 넘는 마나를 쏟아 부었는데도 빅뱅의 파괴력에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블러드 애로우!”

쐐애액!

자욱한 먼지 사이로 길고 붉은 무언가가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날아갔다.

“크읍!”

곧이어 라노크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저 상태에서 공격이 명중했으면 필시 HP가 0이 되었을 터. 순간 레이얼에 대한 분노가, 나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죽여버린다!”

어찌나 강하게 발을 굴렀는지 다리 근육이 끊어 질 것 같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고통스럽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한 발, 두 발. 이를 악물고 달리자 몸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그 후부턴 오히려 온몸에 힘이 넘쳤다. 다시 한 번 일갈을 내질렀을 때, 그간 느껴보지 못한 미증유의 힘이 피어오름을 느꼈다.

“마, 마투기!”

이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다만 이 힘으로 레이얼을 죽일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크핫!”

평소의 2배 가까운 속도에 얼어붙은 레이얼은 변변한 반항 한 번 못하고 목을 떨궜다. 한 짓을 생각하면 너무 간단한 죽음이었다.

“파이어 월!”

만일을 대비해서 레이얼의 목과 몸통 모두를 불태웠다. 그리고 한줌 남은 재마저도 바람에 흩날려 한데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두 싸움을 멈춰라!”

새로 생겨난 힘과 마나를 합쳐 내지른 소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제자리에 우뚝 서는 리치와 뱀파이어들. 이제 나 이외에는 명령권자가 없으니 내게 복종하는 것이다.

“모두 이리로 모여라!”

최면에 걸린 듯 우르르 몰려오는 리치, 뱀파이어들. 이제는 서로 옆에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리치와 뱀파이어는 나뉘어서라!”

또다시 명령이 떨어지자 리치와 뱀파이어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양쪽으로 편을 갈랐다. 이 뱀파이어들에게 잘못은 없지만……. 차마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뱀파이어들은 제자리에 서있고 리치들은 뱀파이어를 동그랗게 둘러싸라! 뱀파이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말도록!”

뒷말은 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놈은 없을 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명령을 내렸다. 복수는……자신의 손으로!

“리치들이여, 눈앞의 뱀파이어를…… 죽여라!”

화르르륵!

주로 화염 계열 마법이 쏟아졌다. 명령에 따라 뱀파이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차곡차곡 데미지가 쌓여 사망했다. 죽은 뱀파이어들의 시체를 한데 모으고 불을 질렀다. 혹시라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놈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수도는 이쯤에서 포기한다. 50명만 성에 남아 적들의 눈을 속이고 나머지는 일리아드로 이동하라!”

리치들을 트랩이 없는 곳을 통해서 이동시키고 난 언데드 군대의 본대가 있는 곳을 찾아 떠났다. 스켈레톤 걸음으로 하루 거리였기에 찾는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본대와 조우하고 뱀파이어들을 보는 순간 살심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모두 끝난 일. 깊은 한숨과 함께 쌓인 감정을 토해내고 그들을 일리아드가 있는 엘빈 호수로 이동시켰다.

“많이……줄었군.”

본대를 다시 찾았을 때, 이미 그 숫자는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리치와 뱀파이어들의 싸움이 일어났는지 살아남은 리치들의 수는 많지 않았고 뱀파이어도 600마리 가량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스켈레톤, 구울 등의 보병 몬스터들은 처음의 반도 안 되는 숫자로 줄어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오면서 수차례 기습을 받았으니……. 언데드 몬스터들이라 피로를 모르기 때문에 버티는 거지, 일반 몬스터만 됐으면 쓰러져도 진작 쓰러졌을 터였다.

“라노크, 적어도 일리아드만큼은……. 꼭 차지해주마.”

엘빈 호수 정중앙에 있는 마법도시 일리아드.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결정을 내렸다.

“이곳의 물은 너무 깨끗해. 이런 곳이라면 물이 튀기만 해도 언데드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겠어. 그렇다면 더럽혀주지. 지금부터 뱀파이어와 리치를 제외한 모든 언데드들은 저 성을 향해 전진한다. 오직 똑바로! 전진뿐이다!”

일리아드 공략을 마지막으로 누구에게가 됐든 죽어서 마인 이벤트를 끝낼 작정이다. 때문에 더 이상 보병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냥 버리기는 아까우니, 물에 시체 특유의 사기를 퍼트릴 생각.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일임은 알지만 7천 가량의 언데드들을 일리아드로 진격시켰다.

혹시 모르지. 언데드들은 숨을 안 쉬니 진짜로 일리아드에 당도해 공격을 감행할지도. 큭큭.

“그때의 그 기운은……뭐였을까?”

레이얼이 마투기라 불렀던 그 붉은 기운은 본대를 통솔하기 시작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 기운만 내게 있다면 단신으로라도 일리아드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쉽군.

“주위를 경계하고 대형을 유지하라! 공격은 호수에 사기가 어느 정도 퍼질 내일 저녁에 시작한다.”

군대를 이끌고 하는 마지막 전투를 남겨두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달과, 호수를 보며 시름을 달랬다. 인간도 싫지만……. 이젠 몬스터들도 싫어졌다.

“뱀파이어들은 모두 한 마리의 박쥐로 변해 리치들을 태우고 날아간다. 만티코어와 와이번은 오우거와 트롤을 태우고. 나머지는 그냥 대기하다가 인간들이 오면 죽여라.”

다음날, 웬일로 기습이 없었다. 이유가 궁금해서 정보병들 틈 사이로 숨어 들어가 보니 하룻밤 사이 없어진 언데드 군대의 행방을 알기 전까진 움직일 수 없다는 결정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덕분에 아무런 제지 없이 공격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마법이 닿지 않는 높이로 이동하라!”

나 역시 날개를 펴고 와이번, 만티코어, 뱀파이어들을 따라가며 명령을 내렸다. 소환자인 라노크가 죽으면서 본드 역시 뼛조각으로 변했기에 직접 날아가는 것이다. 성이 가까워질수록 더 메지션이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만티코어는 좌로, 뱀파이어는 우로, 와이번은 정면. 마법이 닿지 않는 높이로 이동한다.”

부대가 셋으로 갈라졌다. 좌와 우에 주력을 두고 중앙에서 교란시킨다. 이게 내 이번 작전이다.

“와이번, 트롤들을 마법사가 있는 곳으로 떨어뜨려!”

“키륵!”

콰아앙!

마법도 닿지 않는 무지막지한 높이에서 떨어진 트롤들은 다리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졌지만 특유의 재생력으로 금세 회복하고 일어섰다.

갑작스런 트롤 폭탄으로 당황한 마법사들. 일부는 침착하게 트롤들을 죽여 나갔지만 일부는 손발을 어지럽게 놀리다가 아웃 당했다.

“와이번, 공격!”

트롤의 수가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가는 것을 보고 와이번에게 협공 명령을 내렸다. 독수리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며 유저들을 낚아채가는 와이번들.

땅과 하늘에서의 협동 공격에 마법사들은 조를 나눠 대응했다. 반절은 와이번을 상대하고 반절은 트롤을 상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중앙에서의 일일 뿐, 동요가 있을 거라는 내 생각과 달리 성의 양 측면을 지키는 마법사들은 그들을 나 몰라라 하고 자신들의 방향으로 날아오는 만티코어와 뱀파이어를 주시했다.

“난 만티코어 쪽을 도와야겠군.”

만티코어의 숫자는 고작 다섯. 따라서 등에 타고 있는 오우거의 숫자도 다섯이 고작이었다. 수백에 이르는 뱀파이어, 리치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전력이었지만 이번 작전에 큰 역할을 해줄 것이었다. 만티코어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일당백. 다섯이라고 우습게보고 병력을 우측으로 돌리면 적지 않은 전력 손실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측과 비슷한 전력을 유지했다간 우측이 돌파당해 좌측까지 뚫리겠지.

내가 노리는 건 리치, 뱀파이어들의 우측 돌파이다. 내가 만티코어와 함께 좌측 성벽으로 공격해 들어간다면 쉽게 병력을 돌릴 수 없지 않겠어?

“전부, 공격!”

퍼버벙! 콰앙! 피시식…….

공격 명령과 함께 우측에서는 화려한 마법 공방이 이어졌다. 한 마리의 거대한 박쥐로 변신한 뱀파이어들에게 어깨를 잡혀 날아온 리치들과 성벽 위를 사수하려는 마법사들 간에 싸움이 붙은 것이다. 여러 가지 화려한 이펙트. 그에 비해 이쪽의 공격은 매우 단출했다.

“크르륵!”

공격명령이 내려지자 만티코어들은 그 흉폭한 본성을 드러내며 등에 타고 있던 오우거들을 내동댕이치고 마법사들을 향해 쏘아져갔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노련한 움직임으로 한 마법사가 만티코어의 험악한 모습에 기가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마법사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하나 6써클의 플레임 스트라이크는 만티코어의 앞발에 손쉽게 찢겨졌다.

“헉!”

“키악!”

자신의 발바닥을 화끈거리게 만든 것에 화가 났는지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무력화시킨 만티코어는 굳어 있는 마법사를 발톱으로 찍어 누르고 입으로 자신을 공격한 마법사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크아악!!!”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오른 어깨를 부여잡는 마법사. 그러나 이미 어깨의 살점은 뜯겨나간 뒤였다. 피가 안 나오기에 망정이지 심하게 역겨울 뻔했군.

“쳇, 일단은 다 죽이고 보자!”

1대1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개인적 능력 차가 컸지만 이쪽의 숫자는 나까지 겨우 여섯이기 때문에 일단은 적을 섬멸하는 것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트롤과 와이번은…… 벌써 전멸했군.

“젠장!”

중앙에서 적의 발을 묶고, 혼란시켜야 할 트롤, 와이번이 전멸함으로써 나와 리치들의 부담이 커졌다. 중앙에 있던 마법사 중 8, 90%가 뱀파이어, 리치가 있는 우측으로 이동. 서로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잘못하면 밀리게 생겼군. 멸망으로 이끄는 홍염의 불꽃, 그랜드 파이어!”

이번에도 필요 이상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사람 몸통만해야 할 불꽃은 이미 사람 키보다 커졌고 위력도 적지 않게 증폭되었을 것이다. 증폭된 그랜드 파이어가 날아간 곳은 이곳과 정 반대쪽인 우측 성벽이었다.

“크아아악!”

눈앞의 리치, 뱀파이어들에게 정신이 팔려 뒤쪽은 생각도 않고 있던 마법사들은 갑작스레 훌고 지나가는 거대한 화염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HP가 낮은 마법사들은 증폭된 그랜드 파이어를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수십 명이 죽어나가자 미묘하게 흐름이 뒤바뀌었다.

“만티코어, 저쪽 놈들을 공격해라!”

“크릉!”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의 공격으로 인한 미세한 흐름의 변화를 읽고 만티코어를 우측으로 이동시켰다. 내가 잘못 읽은 걸지도 모르지만 난 내 감을 믿는다.

“크와앗!”

좀 전의 마법으로 인해 뒤쪽도 경계하던 마법사들은 엄청난 덩치에 흉악한 인상을 자랑하는 만티코어의 모습에 놀랐고 자신들의 마법을 앞발로 손쉽게 소멸시키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수많은 먹이감 앞에선 만티코어들은 자신들의 강함을 한껏 과시했다. 블링크 마법을 익힌 것도 아닌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만티코어들. 어찌나 빠르고 교묘하게 사람들 틈으로 숨어드는지 누구 하나 변변한 타격 한 번 못 입히고 혼란만 가중됐다. 그리고 그 틈에 성벽 위로 내려앉은 뱀파이어들. 저들이 합류하면 싸움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라노크, 기다려라.”

더 메지션과의 친분 관계가 있긴 하지만 라노크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 * *

“왠지…… 허무하군.”

바닥에 뉘인 수많은 시체를 내다보며 탄식했다. 치열했던 전투의 끝에 내게 남은 건 단 한 마리의 만티코어와 1백의 뱀파이어, 50남짓의 리치뿐이었다.

라노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리치들은 성의 수비에서 제외시키고 마법사의 탑으로 들여보냈다. 약간의 AI를 가지고 있는 상급 리치들이니 나머진 알아서 하겠지.

“이걸로 내 역할은 끝인가?”

어차피 1백의 뱀파이어 가지고는 성을 지킬 수 없다. 아니, 가능할지는 모른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와야 하는데 뱀파이어들이 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요격한다면. 하나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조용히 죽어주면 된다.

“……하지만 그냥 죽어 줄 수는 없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깽판 한 번 제대로 치자!

“텔레포트!”

내가 이동한 곳은 마녀의 언덕 근처 깊은 산속이었다. 원래는 바로 수도로 가려 했지만 잊고 있던 누군가가 생각나서 이곳에 먼저 들른 것이다.

“빙고! 찾았다.”

마녀 실리아드. 일반 유저들 사이에선 배은망덕한 마녀로 불리고 있지만 실제론 아주 불행한 삶을 살아온 불쌍한 여자였다.

큭, 진즉에 찾아와서 복수를 해주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잊고 있었군. 복수는 지금이라도 해주면 된다지만 그녀가 있었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씁쓸하군.

“실리아드!”

“다, 당신은?!”

빗자루에 몸을 실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실리아드는 갑작스레 등장한 내 모습에 흠칫 몸을 떨며 경계했다.

NPC는 기운이란 걸 느낄 수 있으니 대충 내 정체를 짐작했겠지. 그래도 힘의 차이를 알아선지 바로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복수하고 싶나?”

갑자기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실리아드는 또다시 움찔거렸다.

“내……영혼을 원하나요? 아니면 마력을? 좋아요. 뭐든지 드리죠.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빗자루를 잡은 실리아드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가늘게 떠진 두 눈에는 독기가 서려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무모한 일이겠지만 날 도와서 인간들을 죽이는 일이다.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상관없어요.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난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니까.”

“계약은, 성립됐다.”

지금은 유저들이 다른 곳으로 몰려 텔아몬 마을은 한산했기에 우릴 발견하고 막아서는 유저는 없었다. 아니, 우릴 발견한 사람이 있다 해도 공중에서 막아설 사람은 없었겠지.

곧장 나킨스의 저택으로 갈까 하다가 실리아드의 복수의 대상이 비단 나킨스 하나만이 아니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복수 대상은 마을 전체인가?”

“……예.”

“좋아. 그럼 시작하지. 대기 속을 떠도는 불꽃의 망령이여, 이곳으로 와 너의 뜻을 이루라. 파이어 레이저(fire-raiser:방화범)!”

마나가 공급되는 한 주위를 무작위로 불태우는 불에 미친 자. 어찌 보면 소환 마법이라고 볼 수도 있는 마법이지만 불태우기만 할 뿐 별다른 물리력은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환 마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마법이기도 하다. 유저가 방화를 저지를 일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꺄아아악!”

“사람 살려!!”

집이 불타오르자 사람들이 하나 둘 씩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중에 아는 얼굴이 있는지 지켜보는 실리아드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파이어 월, 더블!”

그녀도 위치의 칭호를 받은 마스터 레벨의 마법사인 만큼 더블 스펠을 사용해서 도망가는 사람들의 도주로를 차단했다.

지옥 불에서 심판받는 모습이 이러할까? 사방이 온통 불바다인 상태에서 오가지도 못하고 갇혀버린 사람들은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스스로 불속으로 뛰어들었으나 온몸이 불타 사망했다.

“스톤 엣지, 더블!”

남김없이 불타버린 집 위로 거대한 바위들이 떨어졌다. 일종의 확인 사살이요, 분풀이였다.

“이제 나킨스의 저택만 나았군. 가자!”

끝없이 이어지던 사람들의 비명이 잦아들 때, 서둘러 나킨스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너무 오랫동안 있다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유저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꼴사납군.”

이미 한 번 만나본 적 있었기에 나킨스가 있는 위치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마을이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설마 NPC가 자리를 이탈하겠냐라는 생각으로 쳐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척 보기에도 값나갈 물건들로 부산을 떨며 짐을 챙기고 있었다. 하인에게 호통을 치다가 우릴 발견하자 그 자리에 굳은 나킨스.

“너, 너, 이년. 인간이길 포기했구나! 마족과 손을 잡다니 하늘이 무섭지도……컥, 컥!”

실리아드와 놈의 과거 이야기를 아는 나로서는 놈이 위선 떠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한 손으로 놈의 목을 잡고 몸까지 들어 올린 다음 패대기쳤다.

“켁, 켁, 켁.”

“나머진 네 몫이다.”

“예!”

나킨스란 놈이 더 이상 내가 손을 쓸 가치도 없는 놈이란 걸 새삼 깨달으며 근처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실리아드가 어떻게 놈을 끝장내는지 지켜보기 위해서다.

내가 의자로 가서 앉는 동안 나킨스란 놈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보석으로 알록달록하게 치장된 검을 빼들었다. 저러다 스스로 자신을 베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네가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울 때 나는 풀뿌리를 뜯어먹으며 견뎠고, 네가 순진한 사람들을 등쳐먹으며 부를 쌓을 때 난 죽을 각오로 마법을 익혔다. 나를 비롯해 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 네가 인간이라면 조금이라도 반성의 기미를 보일 줄 알았는데……. 기대한 내가 바보였군. 죽어라!”

연속해서 다섯 발의 매직 애로우가 날아갔다.

양손과 양발, 그리고…… 다리 사이의 무언가에까지. 관통되진 않았지만 순식간에 행동불능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의미의 불능이 되어버린 나킨스. 이젠 빌고 싶어도 몸이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내, 내가 잘못했어. 제발 목숨만은!”

원래 세치 혀로 사람들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놈이니 살려둬 봐야 다시 악행만 저지를 게 뻔했다. 실리아드도 그걸 아는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나킨스에게 걸어갔다. 억지로 입을 벌리고 그녀 자신의 작은 손을 입속에 살짝 넣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시동어를 외쳤다.

“파이어.”

“끄아아아!!!!!”

입속에서, 아니 정확히는 나킨스의 입속에 넣은 그녀의 손에서 불꽃이 일었다. 아마도 놈의 혀는 화상 등으로 인해 입천장에 달라붙어버렸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겠지.

“이 정도면 됐습니다. 죽이는 것보다 이게 더 고통스럽겠지요.”

“아직 아니다. 포션의 존재를 잊고 있나 보군.”

입안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는 나킨스를 발로 밟아 고정시키고 왼쪽 어깨에 체력 회복 포션을 뿌렸다. 희미한 빛을 내며 아물어가는 상처들.

실리아드의 눈에 놀람의 빛이 스쳐갔다.

“이런 건 이렇게 처리해야지.”

서걱!

놈의 왼팔을 잘라내서 멀리 던져낸 다음 재빨리 포션을 부었다.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다가 다시 잠잠해진 나킨스. 그 다음은 오른 팔이었고, 또 그 다음은 다리 사이의 무언가였다.

“다리는…… 놔두도록 할까?”

화상을 입어 입이 붙어있고 얼굴이 일그러진 데다 두 팔이 없는 나킨스의 모습에 실리아드도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꺼져라. 죽기 싫으면.”

“으, 으으읍!”

인심 써서 다리에도 포션을 부어주었기에 멀쩡해진 다리로 나킨스는 허겁지겁 도망쳐 나갔다. 도망간다 해도 갈 곳이 없고, 누군갈 만난다 해도 얘기할 수 없겠지.

“이제 이곳을 정리하도록 하지. 며칠 정도 쉴 예정이니 마나를 사용해서 부숴라. 그 동안의 한을 담아서.”

“예.”

실리아드는 저택의 밖으로 빠져나와 마나가 고갈 될 때까지 부수고, 또 부쉈다. 저택이 가루가 될 때까지.

이젠 터만 남은 저택의 입구에 메시지를 담은 종이 한 장을 돌에 괴어놓고 자리를 피했다.

* * *

“길드장, 급보입니다!”

마인이 더 이상 수도에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수천에 이르는 언데드 군대가 없어진 걸 핑계로 유저들에게 수도 근처에 깔린 마법 트랩을 해제하도록 명령 내린 거트는 에린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잡담을 나누다가 지겹도록 들은 소리를 또 들었다.

“뭐야? 이번엔?”

“텔아몬 마을이 습격당했습니다. 마을은 폐허가 됐고 단 한 명 있는 생존자는 얼굴과 입 안에 큰 화상을 입고 두 팔과……. 흠, 거시기가 잘린 상태였습니다.”

보고하던 사내는 거트 옆에 있는 에린을 의식해서 헛기침을 한번 넣었다. 민망해서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에린과 콧방귀를 뀌는 거트.

“그게 뭐 어때서? 텔아몬이라면 마녀 실리아드가 호시탐탐 노리던 곳이니 유저가 없는 틈을 타서 습격이라도 했나보지. 그걸 보고라고 하는 거냐?”

“그게, 그뿐 아니라 완전 붕괴된 나킨스의 저택 앞에 이런 종이가…….”

사내는 거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가져온 종이를 건넸다.

“도전장?”

몇 초 간, 종이를 응시하던 거트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가 싶더니 이내 밝아졌다. 머리를 굴려보니 생각이 바뀐 것이다.

“크흐흐흐. 좋았어. 이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트랩 해제를 서둘러라!”

에린은 종이가 사내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내용을 한 번 읽어보았다. 내용인 즉, 앞으로 삼일 후에 정면 대결을 펼치자는 것. 마족의 명예를 걸고 뒤통수는 치지 않을 것이며, 유저들의 수가 최소 3만은 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었다.

대충 확인된 언데드 군대와 몬스터 군단의 수를 합쳐도 1만이 채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뭔가 꼼수가 있으리라 생각은 되지만 마족의 명예를 걸겠다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일반적인 사실로 따져보면 마족은 명예를 엄청나게 중시하니까. 그저 마족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것이라 믿을 수밖에.

* * *

게임 시간 삼 일 후, 약속 시간인 저녁 8시까지 10분 남겨둔 상황에서 결전 장소인 갈락 평원에는 무려 3만 2천에 달하는 유저들이 꾸역꾸역 몰려든 상태였고, 또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이미 사전 답사를 통해 마법 트랩의 유무를 점검했고 안전하다는 결론이 나와 거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지긋지긋한 마인을 드디어 끝장 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빌어먹을 지뢰만 아니면 언데드들이 무슨 짓을 하건 이 인원을 이길 수 없지. 마인이란 놈도 한 백 명? 그 정도 희생하면 잡을 수 있을 테고.”

거트는 마법 트랩 때문에 실패하긴 했지만 빼앗긴 수도를 공격할 때 마인이 3, 40명의 유저들에게 도망간 걸 생각하고 100명 정도가 덤비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별다른 계획 없이, 사람만 몰려드는 가운데 십 분이 지나고 저 멀리서 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헛, 혼자야?”

“언데드 군대는?”

“만티코어 구경하러 왔는데 어딨는 거지?”

마인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뒤따라야 할 군대는 보이지 않자 유저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우리가 뭔가 속고 있는 게 아니냐, 레이지가 마인과 손을 잡고 우릴 궁지로 모는 게 아니냐, 마인이 우리의 시선을 끌 동안 언데드들이 다시 수도를 점령할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가 나오자 거트도 찔끔해졌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으니까. 거트는 마족의 명예라는 걸 믿지 않고 있었다.

“잠깐, 누가 잡혀 있는데?”

“여자다! 상당한 미인인데……. 인질인가?”

심각해지려던 말들이 마인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미인 때문에 쏙 들어가 버렸다.

가녀린 여인, 그것도 미인이 마인의 손에 잡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 유저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다. 아무리 흉악한 마인이라도 미인에겐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놈! 정정당당하게 싸우자고 해놓고 인질을 잡다니, 그러고도 마족의 명예를 들먹이느냐!!!”

한 기사가 스킬을 활성화시켜 목소리를 증폭 시킨 후 마인에게 호통을 쳤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마인. 잠시 후, 손에 힘을 풀어 여인을 놓아주었다. 여인이 뒤를 힐끔거리며 유저들 쪽으로 떨면서 걸어오자 유저들은 ‘왜 내가 먼저 호통을 치지 않았을까!’하고 탄식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미인은 호통을 쳐서 마인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낸 사내에게 마음이 갈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놔둘 순 없지.”

푸욱!

살인이 일어났다. PK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 한 사내가 마인에게 호통 친 사내의 목을 검으로 찔러버린 것이다. 순간, 사람들의 안광이 폭사했다.

스르르륵!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들 시체의 모습을 가렸다. 그리고 그를 처리함으로써 PK가 된 사내도 마저 처리했다. 이제 그녀가 마음 줄 사람은 사라졌다. 자신이 챙겨주며 대쉬하면 넘어올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어디 다치신 데라도……?”

“힘드셨을 텐데 이걸로 목이라도 축이십시오.”

그들에게 마인의 존재는 어느새 잊혀졌다. 그만큼 그녀가 아름답기는 했다. 엘프라 해도 믿을 정도로…….

“저기, 좀 쉬고 싶은데…….”

“제가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오. 저놈은 늑댑니다. 제가…….”

“이런 사기꾼 같은 놈들 말은 듣지 마시고 저와…….”

“뭐야? 사기꾼?”

“넌 나한테 늑대라며?”

그녀가 쉴 곳을 찾아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서로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녀는 누구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여기는 무서워서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촤좌좌좍!

순식간에 안쪽으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굉장한 미녀인데,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얼굴 한 번 못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안쪽에 위치해 있던 사람들로선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 그녀는 일자로 뚫린 길을 따라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갔다.

“아아…….”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옆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쓰러지려는 사내까지 있었다. 그렇게 단 오 분 만에 그녀는 유저들 진영의 중심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험험, 이곳은 안전하니 쉬세요.”

지휘를 위해 진영의 중심부에 있던 거트는 그녀의 미모에 놀랐지만 옆에 있는 에린 때문에 별다른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실상 에린은 거트의 행동에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있었지만.

“하지만 이곳이……지금은 가장 위험한 곳인 걸요.”

“뭐라고요?”

“내재된 힘의 폭발, 그리고 분출. 빅뱅.”

미녀가 고통스러운 듯 이마를 찡그리더니, 잠시 후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과광!!

* * *

콰과과광!!

실리아드는 연기를 성공적으로 해내며 적진 한 가운데에서 빅뱅을 사용했다. 처음 이 일을 위해 실리아드를 꾸며놨을 때는 나도 놀랄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넘어갈 만도 하지.

“마나가 충만한 상태에서 위치가 쓴 빅뱅……. 생각보다 위력이 대단하군.”

그녀를 중심으로 한 원형의 공간. 살아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녀가 살아 있기는 했다. 빅뱅이 대부분의 HP, MP를 소모하긴 하지만 최소한의 HP는 남겨주니까. 하지만 어린 아이가 던진 돌멩이 하나에도 죽을 수 있는 체력으로 살아날 수 있을 거라 보진 않는다.

“자, 이제부터 진짜로 놀아보자. 멍청이들아!”

폭발로 인해 지휘할 만한 간부급들이 사라지고, 최소 천 명 이상의 유저가 사라져서 혼란한 틈을 타, 단신으로 3만에 이르는 유저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크하압!”

멍하니 빅뱅이 남긴 흔적만을 쳐다보던 유저들 중 일곱은 날 쳐다보지도 못하고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유저들. 공격을 시작해 보지만 이미 탄력 받은 내 움직임을 따라오기엔 늦었다. 처음엔 속도를 이용해 치고 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그것이 통한 것도 잠시,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뭉쳐 있는 유저들은 움직일 공간을 봉쇄하며 검을 날렸고 결국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채쟁!

하나, 일반 검들론 내 갑옷 같은 피부를 뚫을 수 없었다. 충격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맨몸으로 십여 개의 검을 튕겨낸 후, 주먹에 마나를 담아 네 명을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물론 그 뒤에 있던 자들까지 합하면 쓰러진 자는 10명도 넘지만. 이게 다 실험해 본 결과, 검기나 검강이 아니고선 나에게 조금의 상처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덕이다. 아, 혹시 미스릴 소드나 오리하르콘 소드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걸 가지고 있을 정도의 인물이 검기, 검강을 못 쓰진 않겠지.

“크악!”

숫자만 3만이지 검기조차 쓰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가 반절 이상이고 잘못 무기를 휘둘렀다간 PK범이 될 판이니 이건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한번 손톱을 휘두를 때마다 기본 세 명씩 쓸려나가는 유저들. 하지만 진짜배기들은 이곳이 아니라 중심과 후방에 포진해 있다는 걸 알기에 학살을 그치고 길을 뚫는데 전념했다.

“으랏차차차!”

기합을 넣어가며 힘으로 뚫고 나가자 어렵지 않게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리아드의 빅뱅으로 인해 텅 빈 공간이 되었던 중심부는 어느새 다른 유저들로 메워져 있었다.

그럼 여기가 중심보다 조금 뒤쪽이 되겠군. 큭큭큭, 좋았어.

“모두 조심해라!”

“조심하면 뭐가 달라지나?”

또다시 세 명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며 비웃었다.

긴장하는 유저들. 그들은 서서히 내게 검을 겨누고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이런, 흩어지거나 멀어지면 안 되는데……. 뭐, 그래도 이 정도라면 달라질 건 별로 없지.

“잘들 있으시게. 으흐흐흐!”

“뭐, 뭐냐!”

“내재된 힘의 폭발, 그리고 분출. 빅뱅!”

콰과과과과과광!

실리아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굉음이 들려왔다. 하기야, 이론상으로만 봐도 몇 배의 위력일지 짐작이 안 가는데……. 일단 대부분의 마나를 소모했다고는 해도 내 마나가 최소 실리아드의 10배 정도는 되고, 체력은 수십, 어쩌면 100배가 넘을지도 모르니까. 예상되는 피해는 전멸……이지만.

뜻대로 되려나 몰라?

“크윽, 텔레포트!”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유저와 운영자들을 엿 먹일 생각으로 스크롤을 이용한 텔레포트를 감행했다.

“큭큭,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떤 식으로 나오나 한 번 보자.”

이동된 위치는 초보마을 칼라일.

칼라일로 보냈던 좀비들은 진즉에 전멸했기 때문에 이번 이벤트와 상관없는 초보 유저들은 마음 놓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마, 마인이다!”

“도망쳐!”

지금 내가 레벨 1짜리는 좀 무리고……. 레벨 10짜리 유저가 휘두르는 목검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초보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런이런, 지금부터 내가 좋은 선물을 줄 텐데 도망가면 안 되지. 너희들 손해라고!

“엇?”

나중에 돌아올 운영자들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서 다리가 꼬인 척 연기하며 최대한 세 개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바로 사망.

[마인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눈을 뜬 곳은 칼라일 마을의 병원이었다. 근처에 마인이 죽으면서 드랍한 아이템들이 널려 있을 터이나 갈 생각은 애초에 버렸다. 괜히 가서 하나라도 먹었다간 운영자들한테 꼬투리 잡혀 약속대로 계정 정지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마 지금쯤이면 어느 운 좋은……. 아니, 운 나쁜? 초보가 아이템을 획득 했을 테지.”

레벨 10도 안 될 초보자가 마인이 드랍한 아이템을 얻으면 오히려 독이 되기 쉬웠다. 그 아이템을 노리는 자들이 곧장 PK를 시도할 테고 예전의 나처럼 팔아치운다 해도 그 돈을 노리는 자들이 PK 대상 1순위로 뽑을 테니까. 즉, 재빨리 팔아서 돈을 다른 캐릭터에 넘기지 않는 이상 게임 자체를 접어야 한다.

“용자의 칭호는 어떻게 됐을라나?”

내가 자살을 해버렸으니 죽인사람에게 주기로 한 용자라는 수식어는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충 어떻게 처리할 지 짐작은 가지만…….

[세르카디안님이 용자의 수식어를 획득하셨습니다.]

준비해 놓은 것을 사용 안 할 수는 없는지 누군가에게 용자의 칭호를 부여하긴 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래저래 캐릭터는 삭제해야 할 불쌍한 인생이겠군.

[운영자가 소환을 요청했습니다. 응하시겠습니까?]

“그래.”

예상했던 대로 운영자 소환이 이루어졌다. 이번 일에 대한 보상도 있고, 여러 가지로 할 말이 많겠지.

“앉으시죠.”

이번엔 제롬 혼자가 아니라 고블린이라는 아이디로 기억하는 운영자와 함께였다.

미리 준비된 자리에서 기다리던 둘은 심하게 머리 굴리고 있음을 암시하듯 진지한 표정에 눈을 하늘로 돌리고 있었다.

“어떤 것부터 말을 꺼내 볼까요?”

“그 전에. 용자의 호칭은 아이템을 집은 사람에게 한 겁니까?”

“헛, 보셨습니까?”

“아뇨. 그냥 그럴 것 같더군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제가 죽인 총 유저수는 얼마나 됩니까?”

“……53,261명입니다.”

고블린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오호, 약속은 지킨 셈이군. 마지막 빅뱅에서 거의 전멸한 건가? 5만 명의 값어치가 있는 아이템이라……. 뭐가 좋을까?

“그럼 주실 아이템은?”

“레어 급 중에서는 아무거나 고르실 수 있습니다.”

“레어 급?”

심사가 뒤틀렸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말투로 말끝을 올리자 고블린, 제롬은 어색하게 웃으며 겨우 입을 떼었다.

“하, 하……. 시작 전에 분명히 카오스 마법을 깰 수 있는 힌트를 드리면 레어 급으로만 받으시겠다고…….”

“그거야 그때 이야기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죠.”

“아, 아니. 갑자기 말을 바꾸시면…….”

“마족의 권위면 언데드가 무조건 복종이라면서요? 그런데 뱀파이어가 배반을 하고, 리치도 조건을 내세우지 않았으면 회유할 수 없을 뻔했습니다만? 게다가 드레이크와 엘프 건도……!”

빠득!

운영자 측의 실수를 짚어주며 이를 갈자 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느라 정신없어졌다.

감히 날 엿 먹이려 해? 이것들을 확!

“드레이크와 엘프는 마인의 세력이 너무 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고, 뱀파이어와 리치는 정말 저희 잘못이 아닙니다. 둘에게 부여된 AI가 너무 높다보니 제 멋대로 꼬인…….”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정말이라니까요!”

이제 고블린의 말투는 애원에 가까웠다.

훗, 내가 운영자였다면 오히려 나를 협박했을 텐데 아직 미숙하군. 지금 상황에서 내가 마인이었다! 라고 밝히면 난 매장당할 텐데 말이야. 뭐, 나야 고맙지.

“휴우, 믿어드리죠. 대신! 사람 수에 맞는 아이템으로 주십시오. 카오스 마법을 이길 수 있는 힌트와 같이!”

“……예.”

결국 운영자들은 승복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유니크 급이든 뭐든 다 좋은 대신에 내가 가질 아이템을 고르라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유니크 급이라면 좋되, 아니어도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제길, 머리 좀 굴렸군,

“드래곤 슬레이어.”

“헙!”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그냥 가장 확실한 유니크 급을 고르자! 라는 생각으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부르자 운영자들은 화들짝 놀랐다. 뭐 혼자 먹다 들킨 사람처럼.

“왜 그러시죠?”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 곧…… 텐데, 안 되……아니에요?”

고블린이 손을 젓는 동안 제롬이 고블린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얘기했다.

제길, 중요한 부분만 못 들었군. 뭘 한다는 거지?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어떤 종류로?”

종류라니? 드래곤 슬레이어는 그냥 검 이름 아니었어?

“종류요?”

“예. 드래곤 슬레이어는 각 종류의 무기로 하나씩 제작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드레이크에게 0.00001%도 안 되는 확률로 드랍되거나 드래곤, 나중에 패치 될 발록 등의 ‘절대’ 몬스터들이 낮은 확률로 드랍하는 유니크 아이템입니다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하죠.”

예외인 이유는 아마 내가 깽판 치는 것이 두려워서. 일 것이다. 종류 별로라……. 그렇다면!

“이도류!”

“이…… 도류요? 이런……. 좋습니다. 하지만 각 검의 길이가 일반 롱소드보다 약간 짧다는 건 아시죠?”

“물론!”

“드래곤 슬레이어, 종류는 이도류. 소환!”

고블린의 앞으로 눈부시게 하얀 두 자루의 검이 X자로 교차되어 나타났다.

오오오오, 드래곤 본으로 만들었다는 건가? 색이 너무 밝아서 기습용으론 적합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좋군!

“에휴, 이거 또 시말서 감이로군요. 아참! 유니크 아이템은 주인을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콜로니스트님 이외의 사람은 드래곤 슬에이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거죠. 그 이외의 사람이 만지게 되면 대상에게 적지 않은 데미지를 입히고 주인에게로 이동됩니다.”

어찌 보면 약간의 페널티이긴 하지만 팔 생각도, 남에게 양도할 생각도 없으니 나에겐 오히려 좋은 기능이었다. 뭐, 팔아도 좋을 테지만 나에게도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있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카오스 마법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카오스는 모든 것을 빨아들인 다는 것입니다. 단, 자기가 흡수할 수 있는 것만. 그렇지 못한 것을 빨아들이려 하다간 되려 빨려 들어가고 말죠. 설령 그게 아주 작은 힘이라도 말입니다. 자, 그럼 이동. 칼라일로!”

“아니, 잠깐……!”

고블린은 뭐라 물어볼 틈도 안 주고 나를 칼라일로 강제이동 시켰다.

“카오스가 흡수할 수 없는 것? 어떤 물건인가? 석판이라도 던져봐? 제길, 카오스는 혼돈. 뭐든지 집어삼키는 것이잖아!”

‘카오스, 그것이 포괄할 수 없는 무언가.’ 한동안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닐 과제였다. 그것도 종류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으흠, 가넷이 여행에서 돌아오려면 아직 이틀 정도 남았군. 그동안 뭘 한다?”

고민을 멈추고 일단 내가 갈 곳부터 생각해 봤다. 이벤트를 진행 시킨 날짜는 현실 시간으로 오 일. 가넷이 일주일 이상 다녀온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이 꽤 남은 셈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복구상황도 볼 겸 수도로 향했다.

“볼만하군.”

수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남은 50마리의 리치들에게 죽기 전 수도의 파괴를 명령해 놨더니 성을 아주 걸레로 만들어 놓았다. 빅뱅까진 쓰지 않은 것 같지만 넝마가 따로 없을 정도니, 얼마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응?”

‘누구라고 봐줄 순 없지’를 중얼거리며 성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성 전체가 하얀 빛에 휩싸이더니 완전 복구 되었다.

“뭐지? 운영잔가?”

서둘러 달려가 보니 허공에서 제롬이 사람들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날 보고는 깜짝 놀라 도주.

쓰읍, 기껏 파괴해 놓은 걸 바로 복구해버려? 그럼 난 삽질 한 거 아냐!

“콜?”

“아, 거트 형. 방금……. 어떻게 된 거야?”

“유저들의 힘으로 성을 복구 시키는 건 무리라고 운영자가 복구시켜줬다. 단, 각 성마다 엄청난 돈을 받고서. 근데 넌 어디 있다 이제 온 거야?”

“그냥……. 일이 좀 있어서.”

“뭐, 일이 있었다니 할 수 없지. 이벤트는 ‘내가’ 잘 막아냈으니.”

5만명도 넘게 죽도록 내버려 둔 게 잘 막은 거야?

“그건 그렇고, 마인 이벤트도 끝났는데 이제 세금은 다시 내려야지?”

순간, 거트 형의 표정이 변했다.

“너까지 그 소리야? 안 해. 못 해! 방금 성을 복구하면서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데……. 10%도 안 되는 세금 모아 가지고는 그 돈 다시 모으는 일 턱도 없어!”

“형!”

“왕은 나야. 세율 조정은 왕의 고유 권한이고! 아무리 너라도 내 권한을 넘보는 일은 용서치 못해!”

“정말……. 끝까지 이러기야?”

변했다. 너무도 변했다. 그냥 내버려둔 채 혼자 돌아다닌 내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 이렇게나 권력욕에 찌들었을 줄이야……. 주위의 조언도 잔소리 정도로 치부하는 독재자가 되어 있을 줄이야.

처음, 더 메지션의 협조를 얻으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권력에, 돈에 눈이 멀게 된다면 내가 직접 문을 열고 단죄의 칼을 받겠다.’

아무래도 지금이…… 그때인 것 같다.

“단죄의 칼을…… 받으리라.”

“뭐?”

“난 이만 가볼게. 하지만 곧…… 다시 올 거야.”

“그래, 잘 가라. 배웅은 안 하마. 그리고 너도 명심해. 왕은 나야!”

거트 형은 끝까지…… 날 실망시켰다.

“큭큭큭,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가 거두는 수밖에.”

“우리도 한몫 거들어주지.”

폴메르의 한 골목에서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난 방향에 서 있는 건 아론과 린, 레이였다.

“레이지는 이미 썩었다. 우리도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지켜보고 있었지. 네가 움직일 때까지. 다른 길드의 힘을 빌려 몰아내 볼까 했지만 사실 성을 가진 세 개의 길드가 모인다 해도 공성에 성공하긴 힘들어. 인간이 썩은 거지 실력이 썩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네가 움직이면 상황이 달라. 넌 왕족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니까.”

“내전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왕족의 칭호를 수여받아 왕의 권위를 대신할 수 있는 자. 그 칭호를 받은 자가 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권리는 내전이었다.

공성으로써 성문을 공격하지 않고도 왕좌를 빼앗을 수 있는 방법. 내전이 일어난 후에는 장거리 이동 마법이나 스크롤이 사용 금지되고 왕과 왕족 중 어느 한쪽의 HP가 0이 되기 전엔 끝나지 않는다. 이때, 그 소속의 길드원들은 왕과 왕족 중 어느 한쪽의 편에 서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공격하게 된다. 중립을 지킬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 너도 그럴 생각이잖아?”

“만약 실패하면……. 또다시 도망자가 될 수도 있는데?”

“걱정마라. 한번 해본 일인데 두 번이라고 못할 게 뭐 있어?”

아론은 빙긋 웃었다. 린과 레이도 각자의 활을 들어 보이며 함께할 뜻을 밝혔다.

이 녀석들과 함께라면 든든할 것 같다.

“한 가지 밝혀 둘 것이 있다. 이번 내전은 레이지를 재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레이지를 해체시키려는 것이다. 난 이번 내전에서 승리하면…… 길드를 해체 시킬 거다.”

“솔직히 난 널 왕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나도 얽매이는 건 이제 지쳤다.”

“그럼……. 가자. 어차피 싸울 거라면 마인 이벤트의 여파로 어수선한 이때를 노리는 게 좋겠지.”

우리 넷은……. 골목을 빠져나와 당당히 성으로 향했다.

“내전, 시작!”

성문 안으로 들어가서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성 전체에 동그란 막이 형성되었다. 생각 같아선 국왕의 집무실 앞에서 내전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내전을 시작하면 무조건 성문 아래로 튕겨져 나가니 할 수 없었다. 이 상태에선 로그아웃도 불가랬던가? 아무튼 결판이 나기 전까진 아무도 못 나가지. 밖에 있던 놈들은 강제 소환되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뿐.

“죽여라!”

“제기랄, 실드!”

피잉!

내전의 시작과 동시에 성의 창문 곳곳에서 궁수와 마법사들이 나타나 우리를 공격했다.

이건 마치 내전을 시작할 걸 알고 있었던 반응이잖아?

“공격 중지!”

5층에 있는 발코니에서 거트 형이 나타나 소나기처럼 몰아치는 공격을 중단시켰다.

무표정한, 아니 조금은 거만한 표정. 마치 독안에 든 쥐를 바라보는 듯한 그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열이 치밀어 오르게 했다.

“실프 애로우!”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 같아 일단 실드를 풀자 린이 활을 들어올렸다. 텅 빈 린의 활시위에 희뿌연 무언가가 생기더니 길게 늘어나며 화살이 되었다. 정령의 화살이 노린 것은 5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거트 형의 목! 도중에 방향을 틀 수 있는 정령이라면 한 방에 끝낼 수도 있었다.

“큭, 디바인 실드!”

여러 가지 아이템의 도움을 받는 거트 형은 반응이 늦었음에도 완벽한 디바인 실드를 만들어 방어할 수 있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로 쉽게 끝내는 건 무리겠지.

“네놈들이 길드를 해체시키려는 건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봐줄 테니 이쯤에서 끝내!”

길드를 해체시키려는 것을 안다? 어떻게? 이건 골목에서 한 우리 넷만 아는 이야긴데……. 설마 우리 중에 스파이가? 아니야. 둘은 나와 수년을 함께 보낸 친구고 린도……. 그럴 리 없어.

혼란스러웠지만 머리를 흔들어 의심을 지웠다. 설사 등 뒤에서 칼을 맞는다 해도 난 이들을 믿을 것이다.

“형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도 못 멈춰요.”

“으으, 이것들이! 죽여라!”

“뛰어!”

아론은 거인의 단검을 눕혀서 들고 그 밑을 커다란 히터 실드로 받침으로써 화살, 마법 공격을 막아냈다.

아론의 보호 하에 성안으로 진입하는 린과 헤이. 난 물론 블링크를 써서 일찌감치 진입했다.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보는군. 잘해보자고, 친구!”

스스로 빛을 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부시게 하얀 드래곤 슬레이어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습이 아닌 정면 돌파이니……. 그림자의 단검보다 이쪽이 좋겠지.

“상대는 마법사다. 쳐라!”

마법사인 내가 검을 들자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흘렀다. 두 번째 직업으로 어떤 클래스를 골랐는지는 모르지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쭈욱 검을 잡은 자신들을 이길 수는 없을 거라는 판단일 것이다. 확실히, 예전의 나였다면 저들의 검강을 받아낼 방법이 없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까앙-!

검강을 피워 올린 기사의 검과 드래곤 슬레이어가 맞부딪쳤다. 자신감의 표현인지 기사는 아주 단순하게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고 나는 비스듬히 검의 방향을 틀어 검면을 후려쳤다. 정면으로 부딪혔다간 무기의 우월을 떠나서 힘에 밀릴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검면에 충격을 받은 기사는 애꿎은 땅만 내리쳤고 땅에 박힌 검을 회수하려는 순간 내 두 번째 검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

“일단 하나!”

검강과 부딪히고도 멀쩡한 드래곤 슬레이어를 보며 호기롭게 외쳤다. 그제야 경계하기 시작하는 기사들. 이번엔 둘이 협공을 해왔다.

“차합!”

둘은 가끔 호흡을 맞추어봤는지 좌와 우를 잘 나누어 공격해 들어왔다. 당연히 검에는 마나를 잔뜩 불어넣은 검강을 피워올리고서.

“파이어 볼, 더블.”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두르자 검 끝에서 커다란 불덩어리 두 개가 날아가 바닥에 작열했다.

터져나가는 바닥, 그리고 튀어 올라오는 돌조각들을 막느라 고생하는 기사들.

“마력…… 증폭이란 건가?”

파이어 볼에 불어넣은 마나에 비해 너무 강한 위력이 나타났다. 거의 두 배 가량의 파워? 어째서일까 생각하다가 두 손에 들린 드래곤 슬레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드래곤 본은 미스릴 뛰어넘는 마력 증폭 기능이 있었지!

“후후, 찢어발기는 진공의 검. 소닉 슬러쉬. 더블!”

“크흡!”

자신감이 붙었다. 주문과 함께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두르자 검의 궤적을 따라 형성된 검이 십자 모양으로 통로를 휩쓸었다. 위력이 증폭된 덕에 검강으로 막은 기사들도 두어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멸망으로 이끄는 홍염의 불꽃. 그랜드 파이어!”

불꽃의 색이 변했다. 붉은색이었던 불꽃의 색이 푸른색으로 바뀌어 내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지옥으로 이끌었다. 몇몇의 마법사가 실드를 펼쳐봤지만 견디지 못했고 검강으로 불꽃을 갈라보려 한 이들도 여지없이 숯 더미가 되었다.

“가자!”

어느새 뒤따라온 아론이 서둘러 발을 놀리며 앞장섰다. 잠시 후, 열댓 명의 길드원들이 나타났지만 거인의 단검 자체가 풍기는 위압감에 아론의 기세가 더해져 쉽사리 덤비는 자들은 없었다.

그때, 거트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을 죽인 사람에겐 죽은 자가 가지고 있던 권력을 주겠다!”

“우오오!”

그 말에, 사람들은 광전사화 되었다.

날 죽이면 왕족, 그러니까 실질적인 부길드장의 직위에까지 오를 수 있으니 당연한 것이긴 했지만……. 실망감과 배신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직접 가르치고 통솔한 아론, 린, 레이는 더 심하겠지.

“엘리멘탈 월!”

린의 활에 각양각색의 화살 다섯 개가 생겨났다 쏘아졌다. 화살은 공격의 목적을 띄지 않았다.

땅, 불, 바람, 물, 전기의 속성을 지닌 화살은 땅에 박혔고, 곧이어 커다란 벽으로 변모했다. 다섯 속성의 벽…… 이란 건가?

“제길, 마법사!”

“시간은 벌었는데…….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길드원들은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마법사의 힘을 빌려 벽을 깨는데 주력했다. 얼마 못가 다섯 개의 벽도 허물어질 터, 그 전에 뭔가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넌 가라. 우리가 막는다.”

“뭐?”

“어차피 이대로 같이 있다가는 전멸 당할 뿐이야. 그나마 상대의 눈을 속이고 숨어 들어갈 수 있는 네가 먼저 가는 게 옳아.”

“……이 웬수는 잊지 않으마. 하이딩!”

약 300명의 길드원. 물론 이곳에 300명 모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200명도 넘는 숫자를 넷이서 상대하는 건 무리였기에 어쩔 수 없이 시선 끄는 역할은 아론, 린, 레이에게 맡기고 난 몸을 숨긴 채 한쪽 구석에 숨어 있었다.

치지지직!

돌, 전기, 불, 바람의 벽이 차례로 깨지고 마지막 물의 벽마저 화염계 마법에 의해 소멸되었다. 허세를 부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는 아론, 그 모습에 길드원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난 그들 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람 없는 곳에서 가서 인비저빌리티를 시전했다.

장거리를 이동할 때는 하이딩보다 이쪽이 더 좋으니까. 이미 익숙한 자리이기 때문에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충 감을 잡히는군.”

국왕의 집무실 앞.

경비 하나 없이 한가로웠고, 또 조용했다. 그렇다는 것은 두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거트 형이 이곳에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안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린다는 것. 최악의 경우, 둘 다에 해당되는 거트 형이 없는 상태에서 매복이 있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때문에 인페느로 주문을 미리 외워두고 문을 박찼다.

쾅!

“쳐라!”

“인페르노, 더블!”

빌어먹게도, 문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들려온 목소리는 내게 세 번째 상황임을 암시했다. 지휘자의 목소리가 거트 형의 것이 아닌 것이다.

양손에 들린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신을 타고 퍼진 푸른 불꽃은 방안을 휩쓸었다. 그랜드 파이어를 능가했으면 했지 그 이하는 아닌 파워였지만 이번엔 날아온 검강의 수가 많은 만큼, 실드와 공격 마법을 펼친 마법사의 숫자가 많은 만큼 그 위력이 반감되었다. 일종의 상쇄를 당한 것이다.

“젠장!”

“죽여라!”

이번엔 뒤쪽이었다. 몰려온 건지 매복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방안에서 매복하던 숫자의 반 이상 정도 되어 보이는 숫자가 뒤를 막아섰다. 그리고 이번에도 거트 형은 없었다. 큭, 최악의 경우 빅뱅을 쓰면 살아남는 사람은 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당해버렸군.

“도망갈 곳은 없다. 순순히 투항해라!”

“거트 형은 어딨지?”

“그건 네가 알 것 없다. 길드장께선 옛정을 생각해서 투항하면 핍박하지 말라고 하셨다. 투항하겠는가?”

잠시 머리를 굴렸다. 투항, 만일 거짓 투항을 한다면? 왠지 포박해서 거트 형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좋다. 어차피 혼자서 이 인원을 상대로 승리하긴 무리니까.”

드래곤 슬레이어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공격할 뜻이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다. 물론 마법사는 맨손으로도 충분히 위험하지만.

“포박하라!”

세 명의 기사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밧줄을 가져왔다. 내가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자 손을 등 뒤로 돌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동여맸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정면을 향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겠군.

“어디로 가면……. 컥?!”

어차피 지리도 알고, 어딘지만 말하면 앞장서서 가려는데 갑자기 뒷목에 시퍼런 예기와 고통이 느껴졌다. 까맣게 변하는 눈앞. 죽음이었다.

“으음……?”

다시 눈을 떠보니 병원은 아니었다. 머리는 땅에 박고 있었고 다리는 무릎 꿇은 상태였다. 그리고 두 손과 온몸에 느껴지는 압박감. 밧줄로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트 형이 보였다.

[내전에 실패했습니다. 당신은 국왕의 처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현 상황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랬던가……. 내가 죽으면서 내전이 끝난 거였군. 그럼 다른 애들은?

“다른 녀석들은 이미 길드에서 추방돼서 성 밖으로 쫓겨났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 해코지는 안 했으니 걱정마라.”

감정이 갈무리된 제법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미리 알고 대비했냐고? 너희 중에 배신자는 없으니 걱정 마라. 길가다가 우연히 너희 얘길 듣게 된 유저 하나가 신고해 왔을 뿐이니까. 너희가 운이 없었던 거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변신 한 게 아니라니. 잠시간의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거트 형이었다.

“그런데 꼭 이렇게 해야만 했나?”

“이미…… 변했으니까.”

“변했다라……. 변했지. 난 변했어. 그런데 그게 어째서 나쁜 거지? 왕은 나야. 지금까지는 너희 말만 따르는 꼭두각시 왕이었다가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왕이 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못 마땅했어? 난 꼭 너희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왕이어야 했냐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렇게 생각하는 이상 뭐라고 하든 더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플 뿐이다. 그냥 이즘에서 절연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열을 내서 말하던 거트 형은 고개를 홱 돌리고 말했다.

“그간의 공을 생각해 이번엔 용서해주마. 하지만 너와 나의 관계는 이걸로 끝이다. 더 이상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

거트 형이 방에서 나갔다. 그와 동시에 온몸에 묶여있던 밧줄이 사라졌다. 아직도 묵직한 압박감이 남아 있지만 움직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성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곳곳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더 이상 이들과 엮일 이유도, 필요도 없다.

“콜!”

성 밖에는 아론, 린, 레이. 그리고 파트리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으흠, 일단 자리를 옮기죠.”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한 길드의 수장인 파트리크를 이대로 세워둘 수 없어 자리를 옮겼다.

조용한 곳을 찾다가 여관을 택했다. 가장 큰 방을 잡고, 다 같이 들어갔다. 그 와중에 남자 넷에 여자 하나가 한 방을 잡는 것을 보고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놈들도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파트리크님에게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변하지 않을 거라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렸군요.”

“콜로니스트님이 변한 게 아니니 됐습니다. 이분들에게 내전에 관한 얘기는 들었습니다. 힘든 결정을 하셨더군요.”

“결국 그것마저 실패했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적어도 더 메지션 앞에서는 난 죄인이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을 때, 파트리크가 슬며시 말을 꺼냈다.

“그것을 탓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전 한 가지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콜로니스트님. 저희 길드에 들어와 주십시오.”

“예?”

“예전부터 저희 길드가 콜로니스트님을 노린 것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안 된 일이지만 이번에 길드에서 추방 당하셨으니, 이렇게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희 길드에 들어와 주시기만 한다면 어떤 위치든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길드 마스터의 자리도?”

“예.”

내가 원한 것이 자신의 자리임에도 파트리크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 이제 길드에 들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냥 아는 사람들과 여행을 다닐까 합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음……. 안타깝군요. 콜로니스트님만 와주신다면 길드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언제든 마음 바뀌면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레이지가 너무 행패부리지 못하도록 저희가 압력을 넣을 테니까요. 네 분이 빠진 레이지는 수십 명, 그 이상이 빠진 것과 같은 전력 손실을 입은 것과도 같죠.”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대충 얘기를 끝내고 여관을 빠져 나왔다. 파트리크는 다시 길드로 돌아갔고 아론과 린, 레이는 나와 마찬가지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 밝혔다. 이미 돈에는 구애받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 어디든 마음껏 돌아다니겠다고.

레이와 아론, 린을 배웅하고 나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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