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인 (32/43)

#마인

“저번엔 올해 안으로만 하면 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 한번만 살려주시는 셈치고, 어떻게 안 될까요?”

“이미 한번 살려드렸습니다만…….”

좀 전, 새 맵에 대한 비밀 보장을 부탁하면서 제롬은 이미 한 번만 살려달라는 소리를 했었다. 난 그러마했고, 안 됐지만 두 번은 없다.

“그, 그건 그렇지만…….”

“자, 협상을 해봅시다. 나도 마인의 권한 같은 거에 대해 확실한 이야기를 들어야 시작을 해도 하는 거고, 아직 확답을 듣지 못한 마인 이벤트를 진행하는 대가에 대해서도 들어야 하고 말입니다. 솔직히 지금 상황으론 뭘 준다 해도 오랜 시간 투자해서 마인 이벤트를 진행시키고 싶진 않지만 협상을 해서 그럴싸한 답이 나오면 당장이라도 해 볼 의향이 있죠.”

“저, 저랑요?”

하도 당한 게 많다 보니 제롬은 내 입에서 ‘협상’이란 단어가 나오자 화들짝 놀라며 피하려 했다.

불쌍한데 한 번만 더 봐줄까?

“저야 빨리만 오신다면 누구랑 해도 상관없습니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금방 연락해서…….”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 제롬은 신이 나서 열심히 동료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그러나 오 분, 거의 십 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 이 사람들이……. 소환, 에류시온. 소환, 고블린, 소환……!”

귓속말을 보내도, 보내도 답이 없는지 제롬은 급기야 운영자 특권인 소환까지 사용했지만 강제 소환이 아닌 선택권이 주어지는 소환은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다.

다급해진 제롬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내 앞에 있는 테이블 위로 조그만 종이 한 장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다른 운영자의 능력인 듯?

“미안. 사장님이 퇴직금은 넉넉히 주실 거라는데요?”

“자기가 협상의 전문가니 뭐니 하더니, 이 배신자들! 크흑!”

누군가 평소에 ‘난 협상 전문가다. 나 같으면 콜로니스트에게 그런 식으로 안 당한다.’라는 식의 말을 하며 갈구기라도 했는지 제롬은 종이를 구기더니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이제 협상 좀 하죠?”

“그, 그래야죠.”

입 안에 넣은 종이를 꿀꺽 삼킨 제롬은 뻣뻣하게 굳은 몸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저번부터 느끼는 거지만 운영자들이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군. 나 같이 선량한 사람이 뭐가 무섭다고…….

“일단 마인의 권한에 대해 묻죠. 저번에 마인으로 변하면 마족의 권위를 지닌다고 하셨는데 그 권위가 어느 정도 입니까? 어느 정도의 언데드 군단을 만들 수 있죠?”

“고위 마족의 권한이니까 전부 다일걸요? 인간계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라고 들었는데요. 높은 급을 소환해내수록 엄청나게 많은 마나가 소환된다는 게 문제지만.”

마인으로 변하면 뿔에 담긴 마나가 재충전 되지 않는다는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지위를 높여준 건가? 그렇다면 실수했군. 후후.

“그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어둠 속성 몬스터가 복종한다는 소립니까? 무조건 순종하는 거 맞나요? 반항하는 놈 없이?”

“예. 마족은 서열을 중시하기 때문에 서열 축에도 끼지 못하는 좀비, 구울 같은 놈들은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 위단계의 다른 놈들도 복종할 거예요. 고위급 소환해서 쓰시게요? 소모되는 마나가 만만치 않을 텐데.”

“흐흐흐흐. 걱정 마십시오. 그럼 두 번째로, 보상은 뭡니까? 저번에 듣기론 유저를 죽인 수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는데 맞습니까?”

“예. 그렇게 될 것 같네요. 대신 5백 명 미만은 무효. 먼저 5백 명을 죽일 시에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사항인지 제롬은 품에서 목록으로 보이는 종이를 꺼내 읊기 시작했다.

“남자가 쩨쩨하게 백 단위가 뭡니까? 화끈하게 천 단위로 하죠. 대신 보상 물품도 센 걸로.”

“처, 천 단위요? 마인으로 변한 뒤에 한번 쓴 마나는 회복 할 수 없는 데도요?”

“알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에요?”

빙고! 걸려들었다. 제롬의 눈엔 내가 걸려든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럼 천 명 죽였을 때 보상 물품은 준비된 대로 착용시 공기의 저항을 줄여 이동속도를 30% 상승시켜 주고 화염과 바람 속성 마법의 위력을 10% 증폭시켜주는 바람의 망토로 하고, 2천명을 죽이면…….”

“혼돈 속성의 마법을 마법서로 만들어 주십시오. 대신 혼돈 마법을 사용할 때 더블 스펠은 사용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빛과 어둠의 혼합. 혼돈, 즉 카오스 속성의 마법이 퓨전마법을 익힌 걸로 해달라는 거지만 마법서로 받는 편이 조금은 덜 위법하지 않겠는가?

“그건 무린데요. 혼돈 마법 자체가 퓨전 마법인데다 지금까지 나온 마법 중에 혼돈 마법이 가장 조합이 성공하기 어려운 케이스라 가장 쉬운 카오스 애로우도 조합 성공률이 0.01%가 채 안 돼요!”

제롬은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밝혔다.

제길, 결국은 수련의 탑에 처박혀서 죽기 살기로 연습해야 하는 건가?

“대신 혼돈 마법을 깰 수 있는 힌트는 알려드릴 수 있는데.”

“그게 뭐죠?”

“헤헤, 보상으로요. 아, 그냥 그 걸로만 때운다는 게 아니라 다른 것과 합쳐서요!”

내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자 잔뜩 졸아버린 제롬은 스스로 무언가를 더 얹어주겠다고 말했다. 그것만이라도 긍정적으로 고려해보려 했는데 다행이군.

“천 명이든 2천명이든 전부 그 힌트를 껴주십시오. 대신 보상 물품의 등급은 레어 정도로 만족하죠.”

“저, 저기. 애초에 몇 명이든 다 레어 급으로 생각을……. 하, 하,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죠.”

“보상 물품에 대한 건 그냥 그때 가서 말하기로 하고, 리스트 좀 뽑아주십시오.”

“네? 무슨 리스트 말씀이신지?”

“마인이 됐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에 대한 리스트 말입니다. 쓸 수 있는 기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 타브리스처럼 멍청하게 기술을 모른다고 육체적인 힘만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없는데요. 예정대로 그 마족이 이벤트를 주도했다면 고유의 기술을 썼겠지만 마인으로 대체되면서 고유 기술은 사라졌거든요. 뭐, 손톱이 나오고 들어가고, 손톱에 마기가 맺히게 하는. 이미 알고 계신 게 전부에요. 나머지는 유저로서 활동하실 때 쓰던 모든 마법, 스킬들을 쓰시면 되죠.”

이거 희소식이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익숙하지도 않은 이상한 이름들의 기술들만 외워서 남발해야 하면 어떡하나 은근히 걱정하고 있던 게 사실이니까.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남았군.

“자,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꿀꺽.

긴장했는지, 제롬의 목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났다.

“만약에 제가 이번 이벤트로 힐름을 말아먹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저들을 전멸시키고, 여섯 개의 영지와 수도를 점령해 버리면 어떻게 하실 거냐고요.”

“예, 옛? 그런 게 가능 할 리가……?”

“있으니까 물어보는 겁니다. 전 아무리 이벤트라도 우리 편이 다른 사람들한테 밀리거나 학살당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거든요. 그래서 일 벌이는 거, 제대로 벌여볼 생각입니다. 제가 보기엔 성공할 확률이 30% 이상은 될 것 같은데요? 장기전으로 갈수록 확률은 더 높아지겠고요.”

“옛? 콜로니스트님의 마스터 아이템이 대단위 전투에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거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 정도로는 생각되지 않는데. 일곱 개 성을 모두 점령하려면 그만큼 지키는 병력도 많아야 할 텐데 아무리 마인의 마나가 많다 해도 그 정도 병력을 뽑은 뒤엔 고위급 마법을 담은 매직 트랩을 몇 개 설치하지 못하실 걸요? 게다가 마인이 된 후엔 원래 가지고 있던 아이템까지는 사용 가능해도 거래나 땅에 떨어진 걸 줍는 일은 불가능해요!”

“마스터…… 아이템? 아! 그러고 보니 로그가 된 후에 한 번도 보질 않았군. 확인!”

[매직트랩퍼의 장갑][로그 전용][마스터 아이템]

능력 : 착용자의 트랩 설치 스킬에 따라 1~8써클까지의 마법을 담은 마법 트랩을 설치 할 수 있게 한다. 마법을 담아두는 매개체는 각 마법의 속성에 따른 보석들이며 보석의 등급에 따라 담을 수 있는 마법의 써클도 달라진다.

전에는 물음표로 나오던 것들이 이제는 확실하게 밝혀졌다.

보석을 매개로 마법을 담는다고? 쳇, 대단위 전투 몇 번하면 돈이 엄청나게 깨지겠군. 딱히 쓸 데가 없어서 전부 상점에 싼 값으로 넘기는 보석들이라지만.

“그래도 이걸 잘 활용하면 확률이 40%까지는 올라갈지도.”

“예에엣?”

“아, 대답은 멀었습니까?”

“그, 그게 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딱히 말씀 드릴 내용이 아니라서 지금 답을 내려드리기가 어렵네요.”

생각해보니 제롬으로선 뭐라 말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제롬이 회사 사장이나 뭐가 되는 것도 아니니 그 다음 상황은 알 수 없겠지. 사실 나도 딱히 그걸 알고 신경 쓸 이유도 없고.

“음, 그러면 질문을 바꾸죠. 제가 마인이 아닌 마왕이 되어서 세상을 말아먹어도 별다른 제지는 없죠?”

“그렇겠…… 죠? 아마도.”

“그럼 됐습니다. 아참, 정말 빠른 시일 내에 이벤트가 열리길 바라신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죠?”

“전에 마인으로 변했을 때 사람을 가려가며 죽이지 못하도록 모두의 얼굴이 똑같이 보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에 예외를 딱 한 명만 두었으면 합니다.”

“그건 기술적으로 좀 무리가…….”

“얼굴을 보이게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 사람의 옷차림에 표시를 하겠다는 거죠. 제가 알아볼 수 있게.”

“그 정도라면이야. 대신 진짜 서둘러주셔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빠르면 내일이나 모레라도 당장에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휴우, 슬슬 불안해지는 것이 느긋하게 패치 해보려다가 오히려 더 바빠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있던 마을로 보내드리면 되죠?”

“아, 될 수 있으면 오마이스 영지로 보내주십시오. 일행을 만나야 하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아참, 이따가 수식어 한번 확인해 보세요! 강제이동, 오마이스로!”

운영자가 만든 특수한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전, 시끄러울 것을 대비해 미리 가면을 썼다. 오마이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재빨리 갈아입고 먼저 제롬이 말한 수식어 확인부터 해봤다.

[당신의 수식어는 사기꾼, 오크 슬레이어, 마법사 최강자, 화탑의 정벌자, 반역자, 개척자, 개국 공신, 위저드, 마인, 사악한 마법사, 인간계의 영웅. 총 열한 개입니다.]

“인간계의 영웅이야 아까 받았고, 사악한 마법사? 홈페이지의 공지에 나왔던 그거? 사기꾼에 이어 사악한 마법사라니. 제롬, 이거 시비 거는 거 맞지?”

마인 이벤트를 통해 세상을 제대로 말아먹어 줄 것을 다짐하며 가넷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가넷, 어디야?”

“아, 성 밖으로 나왔어. 타브리스가 죽었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내쫓더라? 지금은 오마이스 영지 아래 마을의 잡화점이야.”

“알았어. 지금 내가 그리로 갈게.”

“귓속말 해제. 엔젤하트, 가넷이 이제 쓸모없어졌다고 내쫓아? 그래, 니들은 마인 이벤트 때 각오해라. 빠득!”

운영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얼굴을 모두 똑같게 한다면 개인은 분간 할 수 없는 게 분명하지만 어지간한 단체는 구별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을 가진 길드는.

얼굴을 몰라보는 것이지, 방향 감각까진 잃는 게 아니다. 이 말씀이야!

“스트, 여기야!”

잡화점에 들어서자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가넷이 소리쳐 불렀다.

으흠, 며칠간 사라져야 하는데 가넷에게는 뭐라고 설명하지?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특정한 표시를 하도록 만들지?

“삼일 간이나 어딜 갔다 온 거야?”

“아, 일이 좀 생겼었거든. 말 못하고 가서 미안. 이제 붙잡고 있던 녀석들도 사라졌고, 어디부터 갈까?”

“미안. 나랑 아슈라는 지금 나가봐야 해. 그리고 현실 시간으로 며칠은 접속 못 할 것 같은데?”

“왜, 무슨 일 있어?”

“아빠가 더 늦기 전에 견문도 넓힐 겸 아슈라랑 배낭여행이라도 갔다 오라고 하셨거든. 비행기 표까지 벌써 끊어 놓으셨다니 어쩔 수 없이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그래서 얼마간은 접속 못 할 것 같아. 다른 나라에서는 한국 서버로 접속할 수 없으니까.”

“음, 얼마나?”

“글쎄? 여행사를 통해서 정해진 코스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서 딱히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하지만 아마도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 같아.”

일주일이라, 일주일이면 게임시간으로 21일 가량. 그 정도면 마인 이벤트를 할 만한 시간이 얼추 나올 것 같았다. 현실에서라면 오가는 시간이 있으니 아군 끌어 모으기도 빠듯하겠지만 이곳엔 스크롤이 있고 마법이 있으니까.

좋았어. 마인 이벤트 낙찰이다!

“알았어. 아, 그런데 한 가지 부탁 좀 들어줄래?”

“부탁?”

“응, 이유는 묻지 말고 다음에 접속했을 땐 무조건 오른팔에 하얀 천을 묶어줘.”

“하얀 천?”

“그래. 이유는 묻지 말고.”

“알았어. 그렇게 할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럼 다음에 보자.”

가넷과 아슈라가 동시에 로그아웃을 했다. 돈황은 눈만 껌벅거리다 뒤따라서 로그아웃 했고 이제 나 혼자만 남았다.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준비물은 보석들과 정보인가?”

나는 또다시 길드의 협조를 받기 위해 성으로 이동했다.

세상을 뒤엎기 위해서 세계의 수호자 격인 레이지 길드의 도움을 받는다라, 이것 참 아이러니하군.

“어? 콜. 이번엔 무슨 일이야?”

쌩판 오지도 않고 밖으로 나돌다가 갑자기 연속해서 두 번이나 성에 들르자 거트 형은 반갑다기보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보 좀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몇 번의 수성을 하면서 정보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거트 형은 길드 내에 자체적으로 정보 길드와 같은 정보 담당 반을 편성했다. 그들도 레벨을 올려야 하니 그 수준이 정보 길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역별 몬스터 분포도와 같은 기본적인 정보는 충분히 확보하고 있을 것이었다.

“정보? 그거라면 2층에 있는 정보 담당반에 가서 말하면 정리해서 줄 거야. 걔들도 네 얼굴은 아니까.”

“2층? 알았어. 아참, 그런데 타브리스가 죽고 나서 봉인했던 검은 어떻게 됐어?”

“아, 그거? 타브리스가 죽고 나서 확인해 봤는데 주인 따라 죽었는지 회색으로 변하고 날도 상점에서 파는 싸구려 롱소드보다 무뎌져서 전투천사한테 딸려 보냈다. 그런데 벌써 가게? 아론이라도 좀 보고가지?”

“아니, 됐어.”

아론 얘기를 하니 린과 연관된 일이 떠올라 애써 자리를 피하게 됐다. 그 후로 도통 못 봤는데 둘은 어떻게 됐을라나?

“엇, 콜!”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아론은 양반이 못 된다. 반문을 닫고 나오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아론이 내게 손을 흔들며 불렀다. 린과 같이 있네? 잘된 건가?

“어…….”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대충 그럭저럭.”

“오랜만이에요, 오빠.”

“어, 그래.”

아론과는 달리 린과는 아직 서먹서먹했다. 아론도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아, 내가 얘기했던가? 우리 둘, 사귄다.”

입가에 미소를 가득 띠고 말하는 아론 옆에서 린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후로 어떻게 된 거지?

“역시 힘들 때 힘이 되어주는 사람한테 넘어오기 쉽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지 뭐냐. 그 덕에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다. 우하하하!”

“아론 오빠도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제게 과분할 정도의 관심을 보여주시는데 전 이렇게밖에 해드릴 수가 없네요. 아, 물론 지금은 저도 아론 오빠를 좋아하고 있어요.”

“이렇게밖에라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네가 곁에 있는 게 나한텐 최고의 행복이라니까! 우헤헤헤헤헤!”

잘 해결 됐다니 다행이다. 계속 서먹서먹하게 될까, 린이 나처럼 오랫동안 아파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 하고 있었는데…….

“축하한다. 다행이야. 아참, 난 가볼 데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

“후딱 사라져!”

“옛썰!”

아론의 장단에 맞춰 일부러 약간의 오버를 섞어 대답하며 정보 전담반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지역별 출몰 몬스터와 레벨 대, 약점이 적힌 자료는 이미 정리되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좀 보겠다고 하자 정보 전담반이 사람들은 다시 만들면 되니 그냥 가지라고 쥐어주며 성문까지 나와 깍듯이 배웅했다.

내가 봐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나? 내가 없는 사이, 과잉 충성하는 인물들이 꽤나 많아진 듯싶다.

흐음, 별로 안 좋은 징후인데.

“엑? 어제까진 안 이랬잖아. 뭐가 이렇게 비싸!”

“죄송합니다, 손님. 물건의 값은 어제와 똑같습니다. 다만 세금이 추가로 붙었을 뿐입니다.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지요.”

보석 상점이 있는 광장으로 가는데 한 잡화점에서 물건 값에 대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뭐? 세금이 추가로 붙어?

“뭣? 세금? 세금이 얼마기에?”

“40%입니다. 특별 징수 기간이라더군요.”

“뭐? 40%?”

내가 알기론, 세금은 10%도 채 안 되었다. 민심을 잡기 위해 그 세율을 주장한 게 바로 나였으니까. 그런데 40%라고? 폭군 디아블로도 세율 40%를 넘겼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뭔가 잘못 됐군.”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야, 참아. 듣자하니 완전히 망가진 비코 영지 수리비를 대주기 위해서 레이지 길드가 무리하고 있다더라.”

“비코 영지? 그 타브리스가 초토화시킨 곳? 그런데 거기 부서진 걸 왜 레이지 길드가 고쳐줘?”

“이렇게 소식이 어두워서야. 레이지 길드장이랑 여인궁 길드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잖냐.”

“쳇, 그러면 지 사비나 털어줄 것이지 왜 죄 없는 서민들 주머니는 터는 거야? 내참 서러워서.”

“참아라, 참아. 힘없고 빽 없는 우리가 참아야지 별 수 있겠냐. 잘나신 분들 마음대로 돌아가는 게 이 세상 아니겠어?”

분개하는 한 명과 체념한 듯한 다른 한 명의 대화를 들으니 뭔가 잘못 되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는 사이, 길드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군. 다시 돌아와야 하나? 하지만……. 그래, 조금만 더 지켜보자. 설사 잘못되고 있어도 이번 마인 이벤트를 통해서 유저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겠지.

“일단 보석부터 구입하자.”

가볍게 한숨을 쉬고, 광장에 있는 보석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석 상점에서 죽치고 있으면서 보석을 팔러오는 사람들에게 웃돈주고 사들이길 몇 십 번. 각 속성별로 모아둔 보석 주머니들이 제법 묵직해졌다.

“이래서야 내 돈이 남아나질 않겠군. 세금이 올라버린 탓에 상점에 파는 가격도 올라가 버렸으니. 추가로 날린 돈만 벌써 얼마야? 그 돈이면 상급 보석 몇 십 개는 사겠다. 쳇!”

하급은 조금, 중급과 상급의 보석들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보니 돈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이걸 충당하려면 여지없이 보상으로 받는 물품을 팔아치워야겠군. 그럼 보상으로 받을 물건은 무기류로 결정인가? 아무래도 무기가 아이템 중에 가장 비싸니까.

“이쯤하고 소비형 아이템을 사러 가봐?”

마나는 회복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체력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때문에 고렙 전사들이나 쓰는 상급 체력 회복 포션을 잔뜩 사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도 마인인 상태에서 효과 없으면 나중에 아론에게 팔아먹어야지. 꿀이라도 탄 다음에 더 비싼 값으로!

“아저씨, 루비하고 사파이어, 토파즈, 캣츠아이 10개씩 주세요.”

마지막으로 큰맘 먹고 상점에서 보석을 구입한 다음, 체력 회복 포션을 사기 위해 잡화점으로 향했다.

* * *

“크아아악!!!”

저번에도 느껴본 것이지만 마인이 될 때의 고통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무언가 머리에 뿌리내리는 느낌. 그리고 전신의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 몸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오르는 듯하다가 갑자기 북극에 온 듯 얼어 죽을 것만 같은 느낌. 이것들이 한참동안 반복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몸의 열기도, 한기도 가라앉고 근육도 자리를 잡은 듯 뒤틀림이 약해졌다. 그래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지만 처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다. 가진 바의 힘이 더 강해서인지 저번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서야 마인이 될 수 있었다.

이래서 내가 마인 되는 게 안 내켰다니깐. 자, 아무튼 시련도 끝났으니 이젠 내 세상이다!

“멍청한 운영자들! 마족의 권위가 그렇게나 높다면 굳이 소환해서 몬스터를 부릴 이유가 있어? 기존에 있는 놈들을 규합시키면 되는 거지. 그럼 어디부터 가볼까. 통곡의 절벽? 라노크의 동굴? 후후, 이것 참 행복한 고민이로군.”

일단은 ‘난다’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날개를 쫙 펴고 날아올랐다.

“어디든 일단 가보자!”

마법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날개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마나를 소비하지 않는다. 즉, 밑져야 본전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고 일단은 아무 방향이나 잡고 전 속력으로 날았다.

“음, 이 방향이면 통곡의 절벽이 가깝겠군. 먼저 그리로 가자!”

방향을 확인해 보니 동쪽이었다.

동쪽. 가까이 가면 누군가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난다는 통곡의 절벽 위에 있는 한 채의 저택. 그곳에 뱀파이어 로드가 산다고 했던가?

“여기부턴 상급 뱀파이어가 나오니까 조심해야 돼. 응? 어이, 이봐! 순서를 지켜. 뱀파이어 로드는 우리 거라고!”

근처에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로브를 쓴 채 올라가자 사냥 중이던 한 파티가 내 걸음을 제지했다. 날개가 생각보다 얇고 옷처럼 안 쓸 때는 몸에 두를 수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알아보지 못하는군.

“………….”

“야, 야!”

“조심해, 온다!”

저럼 놈들쯤 죽여 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지금은 괜히 소란 피워선 안 될 시기이다. 때문에 그냥 무시한 채 계속 올라갔고 놈들은 새로 나타난 상급 뱀파이어에게 막혀 날 잡을 수 없었다.

“여긴가?”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올 것을 알았나?”

“물론입니다. 당신의 기분이 풍겨오는데 제가 그걸 모를 리 있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인간계에 떨어져 있지만 저도 중급 귀족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 누추한 곳에.”

뱀파이어 로드, 마계에서 중급 귀족이었나? 뱀파이어 일족이 귀족가라는 건 언뜻 들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지위가 높군.

“난 인간계를 뒤엎어버릴 것이다. 요 얼마 간 인간들의 세력이 너무 커졌어. 대학살의 장이 되겠지. 그때, 너의 힘도 보태라.”

제롬으로부터 마족은 무협에 나오는 마교처럼 철저하게 힘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강자에게는 절대적 복종을 한다는 이야길 들은 터라 청유형이 아닌 명령형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정말 통할까? 혹시 심사가 뒤틀려서 덤비는 거 아니야? 만약 잘 안 되면 제롬……죽었어!

“물론입니다. 전 당신의 종.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좋다. 그럼 내가 통보하는 날, 부하들을 이끌고 지시하는 장소로 이동하라. 너희들에게 인간의 피를 잔뜩 마시게 해주마.”

“감사합니다. 주인이시여.”

아주 순종적인 뱀파이어를 보고 매우 흡족했다. 보통 뱀파이어라 하면 귀족이기 때문에 도도하고 자존심 강하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이렇게 복종한다는 것은? 나머지 놈들은 말 할 것도 없이 절대 복종이라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뱀파이어 로드에게 확답을 받고, 좀 전의 파티와 마주치지 않게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근처에 있는 던전은 데포우, 켄라스, 또…….”

집결지로 생각하고 있는 죽은 자의 땅과는 거리가 멀어서 대단위 전투에는 큰 도움이 못 될 테지만 적의 전력 분산에는 큰 도움을 줄 각종 던전들도 타깃으로 잡았다.

먼저 도착한 곳은 데포우 던전. 예전에 4층에 나와야 할 듀라한 나이트가 3층에 잘못 리젠된 것을 세르가 실수로 끌고 온 탓에 위험했던 적이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세르와 로즌 크랜츠가 그때 이후로 통 안 보이는군. 어디서 뭐하고 지내려나.

“저 사람 뭐야?”

“몬스터가 공격을 안 하네? 어떻게 한 거지?”

이번에도 몬스터들은 내게 길을 터주었고 그걸 지켜본 유저들은 입을 모아 신기함을 표했다. 이러다 일을 실행하기도 전에 명물이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듀라한, 리치, 그리고 이 던전의 끝을 지키는 수호자, 데스 나이트가 나왔다. 마스터 레벨의 기사 다섯이 덤벼도 최소 셋은 죽고서야 잡을 수 있다는 그 명성은 익히 들은 터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인간들에게 복수를 할 기회를 주마. 나를 따르겠는가?”

“물론입니다.”

“내가 연락하는 날 저녁에 던전 안에 있는 모든 죽은 자를 이끌고 지상 위로 나가라. 그날은 피의 향연이 벌어질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데스 나이트도 당연하다는 듯 복종했다. 그 역시 자존심 강한 기사일진대도. 슬슬 재미있어지겠는데? 중급 이상의 던전에서 몬스터가 쏟아지고 한쪽에선 대군이 쳐들어가면 아주 볼만 하겠어.

“그럼, 다음은…….”

일단 오 일이란 시간을 들여 키메라, 골렘 등 나로서도 통제가 안 되는 놈들이 있는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 상, 최상급 던전에 들어가 각 던전의 보스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 와중에 힐름 홈페이지에는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가 화젯거리가 되었다. 하나는 거의 모든 던전에 출몰하는 몬스터의 공격을 받지 않는 사람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을 나는 괴 생명체에 관한 것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몬스터의 공격을 받지 않고 던전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이 가진 특수한 아이템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괴 생명체의 레벨과 잡으면 드랍하는 아이템은 무엇인가? 라는 것 말이다.

“그래봐야 그런 잡다한 소문은 한방에 잠재워 줄 일이 벌어질 테니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이제 언데드 계열 중 남은 곳은 라노크의 동굴뿐인가? 그 곳을 마지막으로 이젠 대군을 만드는 일에 주력해야겠군. 운영자들, 지금쯤 뒤집어졌을 거다.”

내가 마인 이벤트를 시작한 이후로 쭉 날 지켜봤을 테니 내가 각 던전의 보스들에게 내린 명령에 대해서도 알 테고, 머리가 있다면 무슨 뜻인지 알아챘을 것이다. 후후, 그러기에 누가 날 부려먹을 생각을 하래?

“텔레포트!”

홈페이지에 내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스크린 샷으로 올라온 이후 날아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많이 받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텔레포트 스크롤. 원래 가지고 있다는 물건들은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에 떠올린 이 방법은 그곳에서 사냥 중이던 유저들에게 내가 그들과 같은 유저라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던전 내에 안전하게 진입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네가 라노크인가?”

“그렇습니다.”

라노크의 동굴은 세상 리치의 총본부라고 할 수 있었다. 리치 킹으로 불리는 리치 로드 라노크를 비롯해 상, 중, 하급의 리치들이 고루 포진해 있는 초대형 던전이었으니까.

그 덕에 최상급 던전으로 분류되어, 레이지 길드의 독점 사냥터로 이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지 역시 그 끝에 도달해 라노크를 만난 적은 없었다. 고로, 내가 라노크를 만난 첫 번째 인물인 것이다.

“난 인간계를 뒤엎을 생각이다. 복수의 기회를 주지. 결전의 때가 오면 나에게 힘을 보태라.”

“싫습니다.”

순간 당황했다. 리치 로드가 강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상급 마족의 명을 거역할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라노크의 입이 또 한 번 열렸다

“비록 언데드가 되었지만 우리는 인간에게 복수의 뜻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부득이하게 쳐들어오는 인간들을 죽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언데드의 영생을 이용해서 마법의 끝을 보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복수엔 참여할 수 없습니다. 높으신 분의 말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랬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면서도 언데드는 모두 인간에게 복수하려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지는 실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회유할 방법은 있지.

“마법도시 일리아드. 그곳을 너희에게 주겠다. 인간들은 너희가 할 수 없는 빛에 관한 연구도 했을 테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닌가? 그곳에 있는 마법 서적을 통해 너희는 연구에 한층 더 진척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날 돕겠는가?”

“돕겠습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자에게는 그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실마리만 던져주면 된다. 그러면 세상 그 누구보다 충성하고, 항상 전투의 선두에 서리라. 라노크에게 이 방법은 정확히 먹혔고 라노크의 눈에는 살아있는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일리아드를 치는 건 나중 일이지.

일리아드 자체가 섬이라 공략하기 어려움이 있을뿐더러 그래야 이들의 열망을 철저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큭큭큭큭.

“그럼 그나 박쥐를 이용해 연락하겠다. 박쥐가 네 주위를 맴돌면 결전의 날이 온 거라 여기고 부하들을 이끌고 죽은 자의 땅에 집합하도록.”

“알겠습니다.”

언데드 계의 마지막 보스인 리치 로드, 라노크까지 설득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소수 정예 부대는 다 모았고, 남은 건 대군을 모으는 것뿐인가? 음, 몬스터가 가장 많은 곳이라면 단연 그로티우스 산맥인데 거기는 죽은 자의 땅과 너무 멀단 말이야? 할 수 없지. 두 패로 나뉘어 공격하는 수밖에.

“텔레포트!”

이동한 곳은 일단 오크가 가장 많이 모여 있기로 알려진 그로티우스 산맥 남부에 있는 오크 요새였다. 워낙 방대한 규모였기에 아무리 고레벨 파티라도 한, 두 파티로는 어림없다는 게 정설이었고 때문에 이곳은 사람이 우글거리거나, 아예 없기 쉬웠다. 하지만 겨우 오크 따위를 잡으러 수십, 수백 명의 유저가 모이는 일은 드문 게 현실. 길드 차원에서 놀러오는 것이 아닌 이상 이곳은 너무도 한산했다.

“위, 위대하신, 분, 봤다.”

일반 판타지 소설에서 드래곤을 봤을 때 하는 말인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를 말하고 싶었던 듯하나 인간 말이 서툰 관계로 오크 로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알았으면 고개를 끄덕여라. 알겠나?”

끄덕. 끄덕

오크에게 말을 시키면 꽤나 귀찮고 짜증이 치밀기 때문에 그냥 내가 말하고 오크 로드는 고개만 움직이는 방법을 택했다.

“내일이나 모레쯤 해서 난 언데드 대군을 이끌고 인간들을 공격할 것이다. 내가 오늘 여기 온 것은 그때 너도 인간들을 공격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로티우스 산맥에 있는 트롤과 오우거들도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 할 수 있겠나?”

끄덕. 끄덕

오크는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힘차게 목을 끄덕거렸다. 이것으로 오크도 해결. 이제 그로티우스 산맥을 헤집고 다니면서 오우거, 트롤 등의 무리를 오크와 합류시키면 몬스터 대군은 소집이 끝난다.

“좋다. 박쥐가 네 주위로 날아와 맴돌면 어둠을 틈타 듀폰 영지를 습격하라. 성문을 부수고 안에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인 다음 오우거들에게 침대를 부숴버리도록 말해라. 할 수 있겠지?”

끄덕.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는 오크 로드. 그래봐야 오크 대가리이긴 하지만 저 정도의 자신감이라니. 조금은 믿어 봐도 좋을 듯싶었다.

오크 요새를 빠져나와서부터는 그야말로 중노동의 시작이었다. 넓디넓은 그토티우스 산맥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트롤, 오우거, 하피들을 일일이 만나 복종시키고 오크 요새로 보내야했으니까. 도중에 와이번과 만티코어 한 무리씩을 만나 복종시키는 행운이 있기는 했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아니, 이놈의 무한 체력은 지칠 줄 모르니 피곤하다. 지루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어쨌거나 몬스터 대군은 대충 구색을 맞추었군. 이제 마지막! 내가 직접 이끌 언데드 부대만 남은 건가?”

발바닥에 땀나도록 그로티우스 산택을 휘젓고 다닌 터라 피곤했지만 나만의 군대를 만든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절로 솟았다. 아참, 그런데 이렇게까지 활동을 했는데 아직 마인 이벤트에 대한 공지가 안 올라왔단 말이야? 내가 어디 한 군데를 습격하기 전까진 비밀로 할 참인가? 약았군.

“그래주면 나야 기습의 묘미가 살아나서 좋지만. 텔레포트!”

마지막 작업을 위해 죽은 자의 땅으로 이동했다. 죽은 자의 땅에서 군대를 모으기는 아주 간단했다. 그냥 입을 열고 ‘모여라’라고 한 마디만 하면 반경 100m 안에 있는 좀비, 구울, 스켈레톤 등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눈으로 개떼처럼 몰려들었으니까. 죽은 자의 땅 끝에 있는 해안가에서부터 모으기 시작한 군대는 중간에 해당하는 곳까지 가는 동안 수백, 수천 배로 불어났다. 그렇게 모인 좀비, 구울, 스켈레톤 계열 몬스터의 수는 물경 수만 마리! 이 정도면 잡다한 전법 없이 전면전을 치러도 숫자 면에서는 큰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생각보다 빨리 모였군. 자, 이제 하루만 더 기다리자!”

혹시나 유저들에게 들켜서 기습이 수포로 돌아갈까, 죽은 자의 땅 초입에서 지키고 있던 일부 몬스터만을 남기고 모두 뒤로 철수시켰다.

다음날이 되어 날이 밝고, 또 저물기 시작했다.

“뱀파이어면 몸을 수십 마리의 박쥐로 변화시킬 수 있지?”

“예. 등급에 따라 나뉠 수 있는 박쥐의 수가 달라지긴 하지만 가능하긴 합니다. 그런데 그건 왜……?”

미리 뱀파이어들에게만 연락을 취해 죽은 자의 땅으로 불러들였다. 그 많디많은 던전에 연락을 취할 수단은 이들 밖에 없으니.

“그럼 지금 당장 하급과 중급 뱀파이어들에게 박쥐로 변해서 내가 알려주는 곳들로 가게 해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가서 딴 것 할 필요 없이 던전의 마지막 보스들 주위로만 맴돌다 오면 된다.”

상급 뱀파이어들에게 시키면 더 빠르고 적은 숫자에게 시킬 수 있겠지만 상급 뱀파이어들은 나중을 위해 힘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래도 박쥐로 변했을 때 박쥐 몇 마리가 죽기라도 하면 그만큼 힘이 약화되는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명령하죠.”

난 복종시킨 보스들이 있는 던전에 엑스 표를 친 지도를 꺼내 뱀파이어 로드에게 건넸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군.

“너, 이름이 뭐지?”

“비트레이얼입니다. 비트, 혹은 레이얼로 불러주십시오.”

“그래, 레이얼. 수고해라. 아, 그리고 박쥐들이 돌아오는 즉시 내게 알리도록.”

“그것이라면 그들이 돌아오지 않아도 진행 여부를 알 수 있는데 목표를 모두 달성한 즉시 알려드리면 되겠습니까?”

“오, 그래 줄 수 있나? 그럼 그렇게 하도록.”

과연 고급 AI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굳이 일일이 지적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처리를 해내니, 생각보다 군대 통솔이 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좋아. 이제 세상이 뒤집어지는 소리만 들으면 되는 건가? 크핫핫핫핫핫!!!!!”

* * *

평온한 오후,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세상의 중심, 수도 폴메르의 궁전에서는 한 사내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톡 치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파괴된 성과 성 아래의 마을 수리비용이란 게 만만치가 않군. 세금을 40%로 올렸는데도 빠듯할 정도라니, 50%로 올려볼까? 그렇게 하면 콜이 찾아와서 따질지도 모르는데. 에이, 아직까지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세금이 40%가 된 것도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잠깐 올렸다가 다시 낮추면 모르겠지. 그리고 왕은 나잖아? 비록 콜이 날 이 자리까지 올려줬다지만 내가 왕인 건 사실이지. 그리고 세금 책정은 왕의 고유 권한이야. 그래, 왕인 내가 고유 권한을 행사하는 데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지. 50%로 올리자!”

허공에 대고 자기 자신을 설득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거트의 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가고 있었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자의 눈으로.

“길드장, 급보입니다!”

“아, 마침 잘 왔네. 이 서류를 집정관에게 좀 가져다주게.”

“알겠습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사내 1은 부복을 풀고 거트에게 한 장의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급보라고?”

“아, 그렇습니다. 조금 전부터 데포우 던전을 시작으로 몇 개 던전에서 이상 현상이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 현상이라?”

“던전 안에 있어야 할 몬스터들이 던전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끊이질 않고 나온다는데 이대로 보스 급까지 밖으로 나오면 상당히 소란스러워질 것 같습니다.”

진지한 표정의 사내와는 달리 얘기를 듣는 거트의 표정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시큰둥할 뿐이었다.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나온다? 그럼 잡으면 되지. 던전 안으로 들어갈 수고를 덜어주면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데포우 던전의 경우 듀라한과 리치가 다수이고 마지막엔 데스 나이트까지 있어서 그들이 나오면 유저들의 피해가 상당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데스 나이트라? 좋군. 이건 기회다. 마스터 급 길드원들을 추려서 정리하러 가! 아니, 나도 간다.”

거트는 데스 나이트를 잡고 나올 아이템을 생각하고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자신이 함께 간다면 당연히 아이템은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이고, 그 아이템을 팔면 에린에게 좋은 선물을 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에린에게 점수를 딸 수 있겠지.

“그게 그렇게 간단한 사안이 아닙니다. 지금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나오는 곳은 데포우뿐 아니라 켄라스와 달타란, 또…….”

“그거 잘 됐군. 차례로 정리한다. 길드원 소집해!”

데스 나이트 하나뿐 아니라 다른 던전들의 보스들이 드랍하는 아이템을 먹을 생각을 하니 거트는 신이 났다. 이번 성, 마을의 수리에 재정적인 도움을 주고 이번에 얻을 아이템들로 환심을 사면 에린의 마음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아니, 자신에게 미안해서라도 고백을 거절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되면 껍데기만 갖는 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후의 마음이야 어떻게든 돌리면 되고, 끝내 에린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아도 곁에 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거트가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며 왕관을 벗고 전투용 장비로 갈아입을 때, 또 한 번 문이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길드장, 큰일 났습니다!”

“뭔가?”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좀전에 들어온 사내1과 같은 말을 했지만 이번에 들어온 자의 표정과 목소리엔 다급함이 묻어있었다.

“그거라면 이미 들었다. 안 그래도 출전 준비를…….”

“추가 정보입니다!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곳이 일부 던전이 아닌, 거의 모든 던전에서입니다! 현재 사냥하러 갔던 유저들 대부분이 마을로 귀환하고 있으며 몇몇의 대형 길드에서만 소탕 작전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거의 모든 던전? 이벤트 공지도 없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거의 모든 던전에서 몬스터가 나오고 있다는 소리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거트는 챙기고 있던 전투 장비들을 팽개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게다가…….”

“게다가?”

“통곡의 절벽 위에 있던 뱀파이어들을 비롯해, 최상급 던전인 라노크의 동굴과 상당수의 상급 던전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질 않는다?”

“그렇습니다. 모두 감쪽같이 증발했습니다. 일부를 제외하곤 상급 이상의 던전에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곳은 전부 중급 이하의 던전입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대체 뭘 했나! 중급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나온다는 것은 몹따(몬스터다운. 일시적으로 서버 내의 몬스터가 모두 사라지는 것.)가 아니라는 소리고, 그렇다면 전부 어디론가 이동했다는 말인데, 내가 겨우 일이 터진 다음에나 얘기 듣자고 네놈들을 길드에 붙여놓는 줄 아나!”

거트는 불같이 화를 내며 들고 있던 장비들을 보고하던 사내2에게 힘껏 던져버렸다. 길드장이 던진 것이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은 사내2는 바닥을 두어 바퀴 구른 후 다시 재빨리 자리로 돌아와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씩, 씩. 다른 길드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비코 영지는 상황이 안 좋은 관계로 유저들을 끌어 모아 수비를 강화하고 있고, 나머지 영지들은 약간의 수비 병력만 남기고 이상 현상을 보이는 던전들을 돌며 소탕작전을 펼 것이라고 합니다. 몇몇 대형 길드들도 따로 몬스터 소탕에 나선다고 하고요.”

“좋아, 우리도 소탕 작전에 나선다. 30명씩 여덟 개의 팀을 구성하고 각 던전으로 이동시켜라. 구성은 마스터나 그에 준하는 정예들로. 성에는 90대 초, 중반의 길드원만 남긴다. 서둘러!”

명령이 내려지자 부복해 있던 두 사내는 무슨 소리를 더 듣기 전에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나가기 직전에 또 한 번 거트의 말소리가 들렸다.

“잠깐! 계획을 수정하겠다. 여덟 개의 팀 중에 두 팀은 비코 영지로 보낸다. 거기서 복구 작업을 돕다가 몬스터가 오면 성을 지키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둘은 만나본 적도 없는 여인궁 길드장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현실이 못마땅했지만 거트 앞에서 표를 낼 순 없었다. 언제까지나 말 잘 듣는 신하여야만 평탄한 앞날이 보장 될 테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포션 같은 것들이 잘 팔리겠군. 수리에 필요한 돈을 금방 모으겠어. 큭큭큭큭!”

거트에게는 세상에 일어나는 이상 현상보다 그 이상 현상으로 인해 벌어들일 막대한 량의 돈이 더 중요한 듯했다.

거트. 그는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레이지 길드의 장이다.

* * *

“주인이시어, 모든 던전에 연락을 취했나이다.”

마냥 기다리기 지루해 질 무렵, 레이얼이 다가와 일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각 던전의 몬스터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 했단 말이지. 좋았어, 이제 이쪽에서도 호응을 해볼까?

“수고했다. 그럼 이제 전열을 가다듬고 우리도 전진한다. 난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알아서 열을 맞춰 놓도록. 좀비와 스켈레톤, 그 뒤로 구울, 본 나이트, 스켈레톤 나이트, 메이지, 아쳐를 세우고 그 뒤로 레이스. 마지막 열에는 리치와 뱀파이어들이 선다. 목표는 북동쪽에 있는 인간들의 대도시, 뤼크레스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레이얼, 라노크. 그럼 내 대신 수고하도록. 텔레포트!”

대군을 정렬시키는 것은 레이얼에게 일임하고 난 오크들이 일을 꾸미는 곳으로 이동했다. 도착하자 정리는 그런대로 되어 있었다. 그저 같은 종족끼리 뭉쳐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다루는 입장에선 꽤나 편리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오크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 트롤과 오우거가 선다. 그리고 와이번과 만티코어는 각자 트롤 한 마리씩 태우도록.”

“크륵!”

길들여지지 않은 와이번과 만티코어는 트롤이 자신들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현실 앞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하긴, 와이번은 몰라도 만티코어의 경우에는 등에 타는 트롤보다 그 자신이 훨씬 더 강하니까.

“이제 명령을 내리겠다. 와이번이나 만티코어에 올라타지 않은 오크, 트롤, 오우거는 이대로 듀폰 성을 공격한다. 그리고 하피, 와이번, 만티코어는 공중으로 날아 들어가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트롤을 땅에 내려놓고 마음껏 인간들을 사냥하도록. 성 안으로 들어간 트롤들은 안쪽에서 성문을 열고 하피들은 트롤들을 공격하려는 인간들에게 유혹의 향기를 사용해서 방해해라. 자, 공격이다!”

“크르륵!”

“크루우으!”

“취익, 공격!”

대충 요령은 알려줬으니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능력껏 결정 날 것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성을 지켜야 할 길드의 정예들이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몬스터들을 잡으러 간 사이에 성을 획득한다. 이긴 한데 과연 어떻게 되려나? 가만, 듀폰 영지의 주인이 베테랑 길드던가?

“전부터 이름답지 않게 얼빵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오크들에게 성까지 빼앗기는지 두고 보겠어. 킥킥킥. 텔레포트!”

이미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끝났기 때문에 미련 없이 나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는 죽은 자의 땅으로 이동해 갔다. 도착하자 군대는 이미 레이얼의 손에 의해 정렬되고, 또 약간이지만 이동한 상태였다.

역시 훌륭한 부관을 두니 활동이 편해지는군.

[마인 이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인 이벤트]

‘마인의 성인식’ 이벤트에서 마족의 뿔을 얻은 마법사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에 뿔을 붙였다 그와 함께 마법사의 몸에는 마족의 엄청난 마력이 흘러들어갔고 뿔은 그를 마인으로 만들었다. 뿔을 통해서 마족의 힘과, 권위를 물려받은 마인은 그 힘과 권위를 바탕으로 군대를 모았고. 지금, 세상을 뒤흔들려 하고 있다. 마인을 막지 못한다면 세상엔 파멸만이 있으리라.]

“역시 일을 벌이는 순간에 이벤트 시작을 알리는군. 원래는 누가 하라고 할수록 더 하기 싫어지는 성격이지만 운영자들이 이렇게나 밀어주는데, 이번만큼은 적응 호응해 주도록 하지. 단, 뒷일은 책임 못 진다고! 후후후!”

* * *

“마인?!”

갑작스런 공지에 거트는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길드장, 큰일 났습니다!”

그와 함께 누군가 또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이렇게도 많은 건지……. 거트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사내3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눈치 보느라 말하지 않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했으므로.

“듀폰 영지가 함락당하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공성전? 평소에 어리바리하게 굴더라니……. 내 그놈들이 언젠가 당할 줄 알았지. 쯧쯧쯧.”

“공성전이 아닙니다.”

“음? 그럼 마인이란 놈의 짓인가? 이벤트 몬스터인 주제에 꽤나 요란하게 시작하는군.”

“그게, 마인 짓도 아닌 듯싶습니다. 마인으로 보이는 자는 발견되지 않았고 성을 공격하는 건 그로티우스 산맥에 서식하던 오크와 트롤, 오우거, 하피, 와이번, 그리고 알 수 없는 괴 생명체. 이것들의 연합입니다. 평소에는 자기 지역만 지키던 놈들이라 이번 일이 마인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마인이 직접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험험,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을 했어야지!”

두 번이나 단정적으로 말했는데 틀리자 무안해진 거트는 괜히 보고 하던 사내에게 화를 냈다. 그는 내심 더럽고 아니꼽다고 생각했지만 어쩌겠는가? 길드에 붙어있으려면 참아야지.

“죄송합니다.”

“그럼 마인에 대한 정보는 없나?”

“아직까진 모으지 못했습니다만 최선을 다해 수집 중입니다.”

“그래…….”

“길드장, 급보입니다!”

사내 3과의 얘기가 대충 끝날 무렵, 또 한 명의 사내가 호들갑스럽게 뛰어들어 왔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할 시간조차 얻지 못한 거트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상황보고부터 받아야 했기에 꾹 눌러 참았다.

“또 뭔가?”

“듀폰 영지가 몬스터에 의해 결국은 함락 당했습니다. 베테랑 길드원 중 하나와 연락을 취해봤는데 성 안에 있는 침대가 모두 부서졌는지 귀환을 해도 근처 마을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분명 유저들에 대해 잘 아는 누군가가 개입했습니다.”

“마인이 그들을 조종한다, 이건가?”

“그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뒷말이 더 붙자 거트는 참았던 짜증까지 확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또, 뭐!”

“마인의 위치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그래? 거기가 어디지?”

“죽은 자의 땅에서부터 대군을 이끌고 북상 중입니다. 약간 동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목표가 이곳은 아닌 듯싶지만 아무래도 뤼크레스를 함락시키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뤼크레스? 거기라면 스피릿 떨거지들이 버티고 있는데 아니야? 그 정도라면 내줘도 상관없어. 좋아, 뤼크레스를 치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라 이거지? 마스터 레벨의 길드원들을 불러 모아라! 놈의 병력이 뤼크레스를 치는 동안 우리는 마인을 친다.”

자신 있게 소리치는 거트와 달리 소식을 들고 온 사내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명령을 받고도 움직이지 않던 그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트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내비쳤다.

“그 결정은 재고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냐, 이런 적기에.”

“별동대를 조직해 마인을 치는 것은…… 현재로썬 불가능합니다.”

“무슨 헛소리냐! 마스터 레벨 유저만 몇 명인데!”

이미 정보를 듣고 현실을 파악한 사내와 달리 거트는 자신의 길드원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서 화만 냈다.

“타브리스에게는 50명의 공격도 소용없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전원이 마스터 레벨인 건 아니었지만.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마인의 힘에 대해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가 이끌고 다니는 몬스터의 숫자가 물경 수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수, 수만?”

수백도 아니고, 수천도 아니고. 수만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거트는 귀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레이지 길드원이 모두 300명. 6대 영지의 길드원의 인원을 합치면 600명이니까, 총 900명. 거기에 어지간한 대형 길드의 길드원 숫자를 합치고 중소 길드, 혼자 노는 사람의 숫자를 합쳐도……. 택도 없이 모자랐다.

“화, 확실한 것이냐?”

“예.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하급 몬스터가 끼어 있다고는 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강한 몬스터들이 포진하고 있다 하니 유저들을 총동원하고 좋은 전술을 짜지 않는 한 무척이나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흐으음, 어서 빨리 전 유저 동원령을 내리고 콜로니스트에게 귓속말을 보내! 당장에 오라고 말이야.”

“안 그래도 콜로니스트님께 계속 연락을 시도하지만 리얼모드 3단계나 4단계이신지 연락이 닿질 않고 있습니다.”

콜로니스트에게까지 연락이 닿질 않는다고 하니 거트는 다급해졌다. 상황이 이 정도이니 공지를 보고라도 콜로니스트가 이곳에 달려올 것을 믿지만 그전까지 지휘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거트는 남의 위에 설수는 있어도 남의 목숨을 맡아 책임 질수는 없는, 그런 남자였다.

“연락 될 때까지 계속해! 던전으로 보냈던 길드원들은 모두 다시 불러들이고, 뤼크레스와 수도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야. 이게 다 수도를 치기 위한 위장 전술일 수가 있어. 방어를 튼튼히 한다!”

지금의 거트로서는 방어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괜히 뭔가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잘못되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럼 유저들은 어떻게……?”

“일단 놔둬. 지켜보다가, 놈들이 진로를 바꾸거나 뤼크레스를 함락시키면 그때 모은다. 지금은 모아봤자 딱히 쓸데도 없어.”

“예.”

보고하던 정보팀 사내들은 왕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심하다 싶을 정도로 의존하는 거트가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생각일 뿐 입 밖으로 내거나 경멸의 눈빛을 보내진 못했지만.

* * *

“주인이시어, 오크와 기타 몬스터들이 방금 막 듀폰 성을 함락시켰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오, 그래? 그거 잘됐군. 조금 뒤에는 수비 요령에 대해 가르치고 와야겠다. 그런데 진군 속도가 너무 느린 게 아닌가?”

아무리 대군이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걷는 게 아니라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이래서야 기습은커녕 대규모의 매복에나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군.

“가장 선두에 있는 좀비들의 이동 속도 때문입니다. 전군이 그들의 속도에 맞춰 이동하고 있죠.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이동 속도를 문제 삼을 거면 처음부터 데려오지 말았어야 합니다.”

“네 이놈! 감히 주인님의 결정에 토를 다는 것이냐!”

“토를 다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과잉 충성이라 할 정도로 날 극진히 모시는 레이얼과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날 돕는 라노크는 나에 대한 말투의 문제로 으르렁대기 일쑤였다. 라노크가 나에게 반말을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극존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레이얼은 못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레이얼의 잔소리를 무시해 버리는 라노크였기 때문에 싸움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끝이 났다.

“그만들 해라. 할 수 없군. 레이얼, 좀비의 숫자가 얼마나 되지?”

“7천을 조금 넘는 것으로 아옵니다.”

“많군.”

7천. 이렇게 말로만 들어서는 실감이 안 나는 숫자였다. 7천의 좀비. 이동 속도 때문에라도 이들을 뤼크레스에 데려갈 수 없는 건 거의 확실해졌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스켈레톤은 이동 속도에 지장을 주지 않나?”

“그렇사옵니다. 이동 속도에 지장을 주는 것은 좀비부대 뿐이옵니다. 좀비의 상위 계급인 구울은 스켈레톤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사옵니다.”

“좀비 부대를 빼면 전군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스켈레톤이 좀비와 비슷한 숫자이옵고, 그밖에 구울, 본 나이트, 스켈레톤 나이트, 메이지, 아쳐가 다 합쳐서 1만 5천 가량 되옵니다. 그리고 레이스가 3천정도, 리치는 2천, 뱀파이어가 1천 8백이옵니다. 전부 합치면 좀비 7천을 제외하고 약 3만 정도로 추산되옵니다.”

생각보다 많은 전력에 깜짝 놀랐다. 리치가 2천, 뱀파이어가 1천 8백 마리나 된다고? 통곡의 절벽 근처에 있는 뱀파이어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뱀파이어를 몽땅 끌어 모은 것인가?

“리치는 그렇다 치고, 뱀파이어의 숫자가 예상 외로 많군?”

“보잘 것 없는 능력이지만 뱀파이어 로드는 근처에 있지 않아도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뜻을 전할 수 있사옵니다.”

“좋은 능력이군. 전투에서 아주 유용하겠어. 결정했다, 좀비 부대를 본대에서 뺀다!”

“주인님, 좀비 부대를 뺀다는 것은 상당한 전력의 손실을 가져오는 일이옵니다. 재고해 주시옵소서.”

“아니, 그렇지도 않다. 레이얼, 네가 7천의 좀비 중 얼마나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러서서 힘을 보충해 싸우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전부 죽일 수 있을 것이옵니다.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 해도 반 이상은 해치울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것 봐라. 너나 라노크 정도의 강자에겐 7천의 숫자라 해도 좀비는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다. 어차피 좀비들을 뤼크레스로 데려가 봤자 큰 도움은 못 될 터, 다른 곳으로 빼내서 공격하게 만들면 적의 전력 분산이라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초보 마을이 습격당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좌시하기엔 그들의 명예와 정의가 허락하질 않거든. 큭큭큭큭.”

“주인님의 지혜에 감복하옵니다.”

레이얼은 넙죽 엎드려 내게 절을 올렸다. 아무리 봐도 이놈은 너무 오버한단 말이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금 즉시 좀비 부대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러 칼라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본대는 이동 속도를 높이도록! 난 잠시 오크들에게 다녀오겠다.”

“성심을 다해 따르겠나이다.”

“텔레포트!”

듀폰 영지의 성 앞으로 이동했다. 사정이란 걸 모르는 몬스터들이 쓸고 간만큼 마을은 황폐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성의 상태는 양호. 성을 습격하는 동시에 안에서 트롤들이 성문을 연 덕분인 듯했다. 성안으로 날아 들어가자 오크를 비롯한 모든 몬스터들이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숙였다.

“취익, 임무. 성공했슴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크와 오우거의 숫자가 약간 준 것 같기는 했지만 크게 티가 안 날 정도였다. 그만큼 베테랑 길드원들이 멍청했다는 소리겠지.

“침대는 파괴했나?”

“취익,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젠 방어를 해야겠군. 아직까지 성에 쳐들어 온 자들은 없나?”

“취이익. 그렇다.”

“좋아. 이제 방어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와이번, 만티코어!”

“크륵!”

“너희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마라. 인간들을 발견해도 절대 혼자서는 공격하지 말고 너희 모두가 모이면 그때 공격해라. 그리고 인간의 숫자가 너의 세 배를 넘으면 공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성을 공격하기 전까진. 알겠나?”

“크륵, 크륵!”

만티코어와 와이번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거리며 긍정을 표했다. 비록 만티코어 한 마리 한 마리가 마스터 급들도 이길 수 있다지만 각개 격파 당하면 곤란해지지.

“그리고 트롤들은 성벽 위로 던질 수 있을 만한 것들을 가지고 올라가서 성문을 공격하는 놈들에게 그것들을 집어던져라. 오크들도 마찬가지고 오우거와 하피는 성문이 부서지면 그때부터 인간들을 공격해라.”

오우거가 잘못 성벽에 올라갔다가 성벽이 무너져버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므로 오우거는 제외시켰다. 하피도 몸을 일정 시간 동안 못 움직이게 만드는 ‘유혹’을 쓰려면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그 전에 죽을 것 같아 제외시켰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들의 공격을 세 번 막아내면 성을 파괴하고 이동하라. 방향은 남서쪽 오마이스 영지이다.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

“취익, 안다. 안다!”

“좋아. 그럼 난 가볼 테니 잘들 하도록. 텔레포트!”

* * *

“그럼 뤼크레스에 도달하는 예상 시간이 사 일 뒤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다행히 진군 속도가 느려서 충분히 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 동안 뤼크레스에 지원 병력을 보내서…….”

“안 돼! 아까도 말했듯이 언제 방향을 틀어서 우릴 공격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병력을 이동시킬 순 없어!”

사내는 ‘하지만 비코 영지에는 지원 병력을 보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거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꾹 참았다.

“말씀 드렸듯이 이동속도는 매우 느립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고요. 놈들이 도중에 방향을 튼다 해도 충분히 병력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지만 일개 길드원, 그것도 전투 쪽이 아닌 정보 쪽 일을 맡고 있는 말단 길드원이 길드장에게 대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대들어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할 것 같으면 그랬겠지만 전혀 말을 들어먹질 않을 것 같은 길드장 앞에서 사내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영지를 내준 베테랑, 그 바보 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안 그래도 지금 계속해서 우리에게 지원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길드장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아직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뭘 그런 것까지 물어? 당연히 안 되지. 우리도 마인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고 연락 보내. 우리는 일단 수도와 비코 영지만 지키면 되는 거야. 그나저나 콜과는 아직도 연락이 안 되나?”

“예. 콜로니스트님과는 아직 연락이 닿질 않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론님께 부탁해서 그 분의 현실상의 집으로 찾아가 얘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콜로니스트님은 항상 리얼모드 4단계로 활동하시니까요.”

“으음, 계속 귓속말 보내면서 기다려봐. 세상이 떠들썩한 일인데 콜이라고 모를 리 없고, 곧 찾아오겠지.”

아론을 시켜서 콜을 부르는 것이 더 빠르고 쉽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왠지 그렇게 불러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거트였다. 왕은 자신인데 군대의 통솔권을 넘겨주기 위해 누군가를 찾는다. 군대의 통솔권이야 어차피 그렇게 되겠지만 그것을 위해 왕인 자신이 애타게 찾는다는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이 거부하고 있었다.

“듀폰 영지야 빼앗긴 놈들이 찾게 내버려 두고, 뤼크레스는……. 알아서 하겠지. 그래! 지금 당장 정령술사와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성 주위에 해자를 파고, 기사 오십 명을 비코 영지로 더 보내서 성벽이라도 수리를 서두르도록 하라!”

“비코 영지로 오십 명을 더……말입니까?”

이미 비코 영지에서 막노동하고 있는 기사만 육십 명이다. 거기에 오십 명을 추가하면? 110명. 레이지 길드 전체의 3분의 1도 넘는 숫자를 이동시킨 게 된다. 지금 당장 위험한 뤼크레스에는 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으면서…….

“왜? 불만 있나?”

“아닙…… 니다.”

“그런데 왜 말꼬리가…….”

“길드장, 큰일 났습니다!”

거트가 감히 말단 길드원 주제에 자신의 말에 토를 단 눈앞의 사내를 혼내려는데 또 다른 정보팀의 사내가 방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오늘은 정보팀을 자주 보게 되는군. 그것도 안 좋은 일로만. 또 무슨 일이냐?”

“뤼크레스로 향하고 있던 마인의 군대 중에 좀비들만 방향을 바꿔 뤼크레스 남쪽의 칼라일로 향하고 있습니다!”

“칼라일이면 초보 마을이잖아?”

“맞습니다.”

“으흠, 초보 마을이라면 좀비만으로도 위협적이겠군. 거기라면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도 구원해야겠어. 쳇, 그렇게 되면 뤼크레스에 지원 안 보내는 게 꼬투리 잡힐 수가 있는데……. 할 수 없지. 좀비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어림잡아 8천은 되는 듯 합니다.”

“뭐, 뭣이? 8천?! 확실 한 거냐? 8백이 아니고?”

“8천입니다. 물론 어림잡아서라 실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7천 정도는 될 듯싶습니다.”

“끄응…….”

좀비라는 소리에 경시했던 거트는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은 깨달았다. 각지에 있는 던전들에서 흘러나오는 몬스터들에 듀폰 영지를 습격한 몬스터들도 벅찬데 수만에 이르는 마인의 군대와 7천의 좀비라니……. 한참을 고민하던 거트는 콜로니스트가 오기 전에 간단한 무언가라도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길드원 팔십 명을 보내서 좀비를 친다. 한 명이 백 마리씩 처리하면 되겠지? 혹시나 좀비 말고 배후에 뭔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전하고 당장 출발시켜!”

“길드장, 그건 무립니다. 아무리 상대가 좀비라지만 몇 백 명도 아니고 겨우 팔십 명으로 8천의 좀비를 상대하라니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될지는 몰라도 힘 팽겨서 못 싸웁니다. 지친 거 회복 할 새에 칼라일에 도착하고 말거라고요! 게다가…….”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가 움찔하고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그걸로 문책 받지 않을까 거트의 눈치를 보면서.

“게다가?”

“칼라일은 이미 공격받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좀비들은 이제 출발한 거 아니었나?”

“좀비들이야 이제 출발했죠. 하지만 칼라일 근처에 리자드맨 던전이 있다는 거 잊으셨습니까? 그곳에서 흘러나온 놈들이 지금 칼라일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나마 아는 사람을 키워주러 간 것으로 보이는 몇몇의 고렙 유저들이 막아내고 있다는데 계속 밀려오는 리자드맨에, 리자드 마스터까지 합세해서 고렙 유저들도 아는 사람들을 데리고 칼라일로 떠나고 있답니다. 이대로 가면 좀비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칼라일은 전멸입니다.”

거트는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 지끈거림이 심해질수록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콜로니스트에 대한 원망도 커져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론을 보낼 순 없었다.

“제길, 칼라일은 포기하나. 대신 구십 명의 길드원에게 각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몬스터들을 처치하게 해라. 아무래도 그대로 내버려두면 크게 뒤통수 맞을 것 같다.”

“구십 명이나요? 혹시 그 속에 비코 영지로 보내라던 육십 명도 포함된 겁니까?”

“당연히 아니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럼 성에는 백 명의 인원 밖에 남지 않는데요?”

“마인의 군대는 진군속도가 느려서 수도 쪽으로 방향을 틀면 그때 인원을 되돌려도 돼!”

거트는 아까 사내가 뤼크레스에 구원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비코 영지에 110명. 몬스터 소탕에 90명. 200명이란 대인원을 밖으로 돌리면 성에는 백 명밖에 남지 않는다. 아니, 현재 접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니 적으면 오십 명 정도 밖에 남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럴 때, 마인이 별동대라도 조직해서 보내면? 아주 허무하게 수도를 내어 줄 수도 있는 일이다. 정보팀은 아주 강력하게 이것을 주장해서 거트를 뜯어 말리고 싶었지만! 말이란 건 상대가 알아들을 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고할 게 있습니다.”

“또?”

“좀비들이 빠짐으로 해서, 마인의 군대의 진군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습니다. 나흘로 예상했던 도착 예정 시간이 반으로 단축 될 것 같습니다.”

“반? 그럼 이틀이면 도착한다는 소린가?”

“예.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그럴 것으로 예상됩니다.”

“흐음, 구십 명에게 비코 영지 근처의 던전부터 정리하라고 전해라. 비코 영지 근처를 다 정리하고 난 다음엔 수도 근처의 던전을 정리하도록 하고.”

거트는 자신이 있는 수도보다도 비코 영지를 먼저 챙겼다.

“뤼크레스는 돕지 않으실 겁니까?”

“당연하지.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도와?”

“그렇군요. 한데 어째서 비코 영지가 먼저입니까? 뤼크레스와 비코 영지 사이의 거리는 수도와의 거리의 두 배가 넘습니다. 게다가 수도 근처에 있는 던전의 수는 비코 영지 근처 던전의 세 배가 넘고요. 만약 지금부터 수도 근처의 던전을 정리하지 않으면 마인이 뤼크레스를 함락시키고 곧장 수도로 쳐들어 올 경우 우리는 근처 던전도 다 정리하지 못한 채 마인의 군대와 싸워야 합니다.”

“하라면 해! 이벤트에서 수도를 다른 곳보다 먼저 칠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보다는 비코 영지가 우선이다.”

사내들은 이번에도 못마땅했지만 억지 쓰는 거트에게 뭐라고 해봤자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하며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참았다. 몬스터를 소탕하러 가게 될 구십 명에게 최대한 서둘러 달라고 당부하기로 마음먹고.

“그럼 성 주위로 해자를 파고, 비코 영지에 육십 명을 지원 보내고 전투 병력 구십 명을 차출해서 몬스터 소탕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가서 서두르라고 전해. 특히 비코 영지로 가는 기사들에게.”

“……예.”

셋은 일제히 일어나 방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속으로 거트에게 한마디씩 했다.

‘여자 때문에 길드 말아먹을 놈!’

‘뭐가 중요한지 앞뒤 구분도 못하는 놈!’

‘남은 죽건 말건 제 욕심만 채우는 돼지 새끼!’

* * *

“길드장, 정말 괜찮을까요?”

“레이지에서 지원 요청을 거절한 마당에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타브리스한테 박살이 난 비코 영지에 도움 요청을 하겠냐, 마인의 군대에 습격 받을 위기인 뤼크레스에 도움 요청을 하겠냐? 베셀 영지는 뤼크레스와 인접해 있어서 그쪽 도와주기도 빠듯할 거고 일리아드는 뤼크레스가 함락될 경우 다음 표적이 될 수 있는데 도와줄 리 만무하고. 오마이스의 그 재수탱이 연예인들은 연락하니까 뭐랬지? 주변 던전 정리하기도 벅차다고? 어디 던전 정리에 안 바쁜 곳도 있냐? 그리고 지들은 정식 길드원 말고도 팬클럽이 2진까지 있으면서 비겁한 자식들.”

듀폰 성 근처의 한 폐허. 인근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다가 얼떨결에 성을 빼앗긴 비운의 길드, 베테랑의 길드원들이 한데 모여 성을 되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얼떨결에 성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래봐야 지들이 성을 방버하는 법을 알 리가 없잖아? 공중에서 날아오는 와이번하고 그 이상한 괴물만 조심하면 성문을 여는 덴 큰 어려움이 없을 거다. 놈들에겐 원거리 무기가 없으니까. 기껏 던져봐야 자기가 들고 있던 무길 텐데 무기를 던지면 우리야 좋지.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놈들을 상대하기 더 쉬울 테니까.”

“하지만 성문도 아주 지능적으로 열던 놈들인데…….”

“그게 한계라니까. 그리고 어차피 우리에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저 흉폭한 놈들을 성안에 방치했다간 우리도 비코 영지 꼴 날 수 있다고!”

길드장인 칼날의 말에 길드원들은 모두 비코 영지처럼 박살이 난 듀폰 영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박살이 난 성을 복구하기 위해 돌을 짊어지고 몸을 혹사시키는 자신들, 성 수리비를 충당하기 위해 날을 새워가며 소득 없는 사냥하는 자신들을 생각했다. 생각만 있을 뿐인데 절로 몸이 떨려왔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감 없던 모두가 전의를 불태웠다.

“셋 세면 성문으로 뛰어가는 거다. 알았지? 하나, 둘, 셋!”

“뛰어!”

“우와아아아아!”

“크루?”

백 명의 사내들이 각자의 무기를 꼬나 쥐고 성문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힘껏 뛰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성벽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오크, 트롤들의 손에는 원거리 무기로 사용될 온갖 건물의 잔해들이 들려 있었다.

“크르륵!”

“취익, 던져라!”

“허억?”

쿵, 콰앙!

주먹만 한 돌에서부터 성인 남자의 키보다 큰 나무와 돌덩이까지. 각양각색의 건물 잔해들은 트롤 특유의 무서운 힘에 의해 성벽 아래로 던져졌다. 그리고 그 어떤 원거리 무기보다 큰 위력을 발휘하며 달려든 베테랑 길드원들을 처참히 뭉개버렸다.

“저건 박살난 침대?”

“커헉, 저게 얼마짜린데……!”

“길드장,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그, 그렇지. 후퇴! 후퇴하라!”

이미 칼날이 외치기 전부터 길드원들은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칼날은 몇 번 더 외쳤다. 다시 인근 폐허로 돌아온 베테랑 길드원들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길드장인 칼날을 노려봤다.

“원거리 무기가 없을 거라면서요?”

“그게 한계라면서요?”

“하, 하. 나라고 저놈들이 부순 물건들을 던질 줄 알았나.”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에휴……. 성을 되찾긴 글렀네, 글렀어.”

“무슨 소리야?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방금 전, 크게 낭패를 봤음에도 칼날은 성 탈환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잠시 후, 트롤에 의해 던져진 건물의 잔해들에 맞고 죽은 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의 토의를 마친 뒤, 베테랑은 세 패로 나뉘어 성을 둘러쌌다.

“이렇게 해서 sa들이 들고 있는 것을 던지게 하고, 더 이상 던질 게 없어지면 그때 공략하면 된다 이 말씀이지! 어때, 나 똑똑하지 않냐?”

“예, 예. 어련하시려고요.”

“이봐! 여기야, 여기!”

“크워어!”

쾅! 쾅! 쾅! 쾅!

성벽 위에서 적을 발견한 트롤들은 무차별 폭격을 시작했다. 하나 작정하고 피하기만 하는 베테랑 길드원들을 맞추기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 가뜩이나 힘만 세서 컨트롤이 안 되는 트롤들이기에 더욱 약 올라 죽으려고 했다.

“응? 갑자기 왜 이렇게 어두워지냐?”

한참을 트롤들 놀리면서 돌덩이 피하고 있는데, 갑자기 칼날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 길드장! 위에!!”

“와이……번?”

“히익! 모두 뒤로 빠져!”

와이번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걸 확인한 칼날은 황급히 회피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도망을 말하는 후퇴는 아니었다. 와이번 정도라면 충분히 상대할 만하니까.

“크륵.”

“히얏! 컥!?”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사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와이번을 향해 점프 한 기사 하나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와이번에게 목을 물린 것도 아니다. 그와 와이번의 거리는 아직 5m는 족히 남아 있었다.

“뭐, 뭐야. 저건?”

피처럼 붉은 피부. 인간과 같은 얼굴에 회색 눈동자. 사자의 몸. 전갈과 같은 꼬리. 천사의 것과 비슷한 날개.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드는 이 괴물은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아서 인간들을 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입맛을 다시듯이.

“이, 이놈은 또 뭐야?”

“혹시…… 만티코어?”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의 모습에 모두가 긴장하며 천천히 물러서고 있을 때, 누군가 믿기 힘들다는 투로 놈의 이름을 말했다.

“크륵, 크륵!”

“컥!”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 호응하듯 소리를 낸 만티코어는 장난하듯 꼬리를 흔들다가 순식간에 독침을 쏘아냈다. 만티코어가 쏘아낸 독은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마스터 레벨의 기사마저도 맞은 뒤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런 젠장! 튀어!”

소직히 저놈이 한 마리뿐이라면 칼날도 상대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 위에는 네 마리의 만티코어가 더 버티고 있었다. 거기에 와이번들까지.

성 탈환이고 뭐고, 게임이 되어야 뭘 해도 하는 것이지, 이건 게임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크르륵!”

먹잇감들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와이번, 만티코어들은 주저 없이 사냥에 나섰다. 고리를 몇 번 흔들며 독침을 픽픽 쏘면 될 테지만 그냥 달려가서 잡는 게 더 좋은지, 만티코어들은 독침 사용을 자제하고 신나게 땅을 박찼다.

* * *

“음? 좀비를 빼면 이동속도가 올라간다더니 벌써 저 멀리로 가버렸군. 뭐, 저런 대군에게 함부로 덤빌 바보들은 없을 테니 느긋하게 돌아보고 갈까?”

어차피 한 이틀은 움직여야 할 거고, 언데드 군단에게 이 저녁에 덤빌 바보는 존재하지 않을 거란 판단하에 서둘러 본대를 쫓아가지 않기로 했다. 어떤 바보가 덤빈다 해도 나 대신 지휘할 놈이 둘이나 있고 말이다. 그런 탓에 난 정보 수집을 할 겸 마을로 가기 위해 로브를 걸쳤다.

“서둘러 쫓아!”

“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들킬 위험이 있습니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으려는데 인근 숲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 내용을 들어보니 대충 정보 길드나 어느 단체의 소식통인 듯. 그냥 가려다가 어느 정도 정보를 모았나 싶은 마음에 미행을 시도했다.

“하이딩!”

마인이 되기 전에 쓰던 기술들을 쓸 수 있다더니 진짜인 듯, 손발이 반투명하게 변했다.

“이제 각 길드의 정보력을 평가해 보실까?”

조용히, 여러 정보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숨어들어갔다.

“선배, 이대로 뤼크레스에 도착하기 전까진 지금이랑 별 차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하지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게 우리 일이야. 지루해도 참아.”

처음 만난 유저들. 그들의 얼굴을 보고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롬, 그렇게 죽고 싶었던 거냐? 모든 유저를 자신의 얼굴로 바꾸어 놓다니. 이걸 나중에 만나면 확 죽여 버리고 ‘아, 유저 죽이는 게 습관이 돼서’라고 때워버려?”

왠지 한 놈 죽일 거 두 놈 죽이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살인의 충동을 억누르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정보원들은 언데드 군단의 이동 속도에 맞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숲이 있으면 최대한 숲을 이용해서, 숲이 없으면 조금 더 거리를 벌리고 따라가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한 정보원이 누군가와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쉿!”

그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다른 정보원들이 못 듣게 동료를 끌고 으슥한 곳으로 이동했다. 오호, 뭔가 쓸 만한 정보인 것 같은데?

“아무도 없지?”

“예. 무슨 일입니까?”

“우리 레이지는 뤼크레스를 돕지 않는 댄다.”

‘우리’라는 말이 붙은 걸로 봐서 이들은 레이지 길드의 정보 담당반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뤼크레스를 돕지 않는다고? 어째서?

“예? 그럼 뤼크레스는 베셀 영지의 도움과 유저들의 힘만으로 마인의 군대를 막아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겠지.”

“그럼 우리 병력은 어쩌고요? 혹시 좀비를 치러 간 겁니까?”

“아니, 좀비를 잡는 것도 포기했다는군. 칼라일 근처에 있는 리자드맨 던전에서 나온 리자드맨들이 벌써 칼라일을 친 모양이야. 때문에 좀비를 섬멸해도 큰 의미가 없지.”

“그럼요? 뤼크레스도 안 돕고, 좀비도 안 잡고. 병력은 어디로 뺀대요? 한 2백 명쯤 동원해서 던전의 몬스터부터 섬멸한답니까?”

“25%는 맞췄다.”

“예? 맞추면 맞춘 거고 반만 맞춘 거면 반만 맞춘 거지. 25%는 또 뭡니까? 그런 애매한 답이 어디 있어요.”

“너도 들어보면 공감할 거다. 후우…….”

연장자로 보이는 정보원은 생각만 해도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고서야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길드장 말이, 내 코가 석자다, 란다.”

“에?”

“일단 우리 레이지는 듀폰이나 뤼크레스. 어디도 돕지 않는다. 대신, 비코 영지에 기사 육십 명을 추가로 보내 총 110명이 성벽 수리를 돕고 구십 명을 따로 차출해 비코 영지 근처의 던전부터 정리한다. 수도 주변의 던전 정리는 비코 영지 주위의 던전이 안정된 다음 일이지. 네 대답이 25%만 맞는다는 게, 일단 던전 정리만 하는 게 아니니 반절 깎이고 또 200명이 아니니 반절 깎여서다. 이제 공감이 가냐?”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런데 어째서 비코 영지가 먼접니까? 아무리 타브리스 때문에 영지가 초토화 됐다지만 수도가 뤼크레스에서 훨씬 더 가깝잖아요? 주변에 있는 던전 수도 훨씬 많고.”

“왜겠냐, 잘나신 길드장이 사랑하는 여자가 비코 영지의 주인이니까지. 아무리 여자가 좋다지만 정말 이러다가 길드 말아먹는 게 아닌지 원.”

듣고 있던 나도 기가 탁! 막혔다. 아무리 에린 누나를 위해서라지만 위험에 처한 뤼크레스와 듀폰 영지는 모른 척하고 아직까진 침공에 대해 안전한 비코 영지에 길드원을 110명이나 보내? 그것도 막노동꾼으로? 거기다가 던전 정리도 비코 영지가 먼저? 완전히 제멋대로인 명령이군.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해도 너무하는 건 하나 더 있다.”

“또요?”

“그래. 너도 얼마 전에 세율이 40%까지 오른 건 알고 있지?”

“물론이죠. 그것도 비코 영지에 수리비를 대주기 위해서라면서요? 잠깐, 그렇다면 설마……!”

“그 설마다. 세율이 방금 50%로 올랐어. 이 정도면 자기 레벨보다 꽤나 낮은 레벨 대의 사냥터로 가지 않는 한 사냥을 해도 적자를 면할 수 없을 거다. 몬스터가 넘쳐나는 지금 한몫 단단히 챙겨놓겠다는 것 같은데 미친 짓이지. 저렙들은 죽으란 소리니까. 수도의 세율이 올랐으니 자동으로 다른 곳들의 세율도 조금씩 상승했을 테고, 걱정이다. 걱정이야.”

세율 50%. 이건 폭군 디아블로도 한 번 해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세율이다. 아무리 잠시 동안이라고 하지만. 거트 형이 변해버린 걸까? 만일 그렇다면……. 아니야, 곁에서 조언해 줄 사람이 없어서 잠시 실수한 걸 거야. 이번 기회에 크게 뒤흔들어서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지.

“하아? 그럼 어떻게 해요?”

“어떡하긴 어떻게 해. 임마. 우린 우리 임무나 잘 하고 있으면 되는 거야. 곧 콜로니스트님이 돌아와서 바로 잡아주겠지. 우리야 길드장에게 찍소리 못하지만 콜로니스트님이라면 그 반대니까. 솔직히 콜로니스트님이 아니었으면 길드장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잖냐. 턱도 없었지.”

둘의 대화에서 기가 막힌 얘기를 듣고 어이가 없어진 나는 더 이상 정보를 수집할 생각도 못하고 곧장 본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군의 통솔은 계속 레이얼에게 맡긴 뒤, 혼자 생각에 잠겼다.

거트 형이 진짜 변한 거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변해서 더 이상 내 말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을 해야 하나…… 라는.

“주인님. 이제 곧 뤼크레스에 도착합니다.”

이곳에 당도하는 동안 레이얼과 뱀파이어들은 낮 시간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밤이 되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레이얼에게 ‘넌 로드인데 그래도 빛을 피해야 하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햇빛에 소멸은 안 되도 소멸 직전의 극심한 타격을 입는다.’였다. 아무튼 이렇게 낮에는 라노크가, 밤에는 레이얼이 통솔한 군대가 드디어 뤼크레스의 앞까지 당도했다.

“새벽이 가까워오는군. 공격은 내일 하겠다. 군대를 이곳에 주둔시키고 사방을 살피도록 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오는 동안 레이얼에게 끈질기게 요구해서 부담스런 극존칭을 존칭으로 변화시켰다. 그 역시 평소 존댓말 들을 기회가 없던 내겐 상당한 부담이었지만. 레이얼은 자신의 할 일을 깨끗이 끝내고 박쥐로 변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날이 밝아오면서 소식을 전해들은 뤼크레스의 진영 쪽에서 뭔가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들은 숫자적 불리함을 농성으로 커버하려하고 있었고 마음 편히 낮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 이 정보는 우리 뒤쪽에서 얌전히 따라오는 여러 길드의 정보원들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이다. 저들은 설마하니 자신들의 정보가 역으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겠지.

“곧 있으면 날이 저물겠군. 라노크!”

“말씀하십시오.”

“난 잠시 할 일이 있으니 군대의 통솔권은 일단 너에게 맡기겠다. 날이 저물고 레이얼과 뱀파이어들이 돌아오면 너희들끼리 뤼크레스를 공격해라. 먼저 리치들이 본 나이트의 방패 아래서 마법으로 성문과 성벽을 공격하고 어느 정도 성문에 타격을 입혔다 싶으면 공격을 명령해라. 여기서 명심할 것은 성문을 부술 때 스켈레톤을 화살받이로 쓰되, 직접적인 성문 공격은 스켈레톤 나이트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스켈레톤 나이트가 공격력이 좋은 편에 속하니까.”

“알겠습니다. 한데 저들은 그냥 놔두실 겁니까?”

라노크가 슬쩍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꽤나 멀리에서 숨어 있는 정보원들이었다. 아니, 저들이 숨어 있는 것을 어떻게?

“저들이 숨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가 어제 저녁 당신께서 저곳에 다녀오시는 것을 보고 확신했죠. 저들을 어째서 놔두시는 겁니까?”

“저들은 인간들 집단의 연락책이다. 우리들의 정보와 그 밖의 정보를 모아서 인간들 중 중요 인물들에게 그 정보를 전하고 있지. 하지만 난 오히려 저들을 역이용해서 정보를 빼내고 있다. 어차피 죽여도, 죽여도 또 나타날 것이라면 이용해 먹는 편이 좋지 않겠나? 후후후.”

“그렇군요.”

내 설명에 라노크는 수긍했다.

“가만, 저들의 존재를 아는 게 너 말고 몇이나 되지? 혹시 레이얼도 알고 있나?”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라면 알고 있을 겁니다. 더구나 밤마다 박쥐로 변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니 오가는 중에 봤을 확률도 꽤 높군요. 하지만 오가다 본 뱀파이어가 아니라 순수한 능력만으로 알아챈 자는 저와 비트레이얼 뿐일 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에게 말하지 않은 거지?”

뭔가 의심 가는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확인하고 내 안위를 살피는 레이얼이 뒤쫓아 오는 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는 것은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 뤼크레스 공략이 끝나면 한 번 물어봐야겠군.

“일단 나 먼저 움직이겠다. 레이얼이 오면 곧바로 공격을 시작하도록. 아마 성 안으로 진입하기 전엔 돌아올 거다. 못 돌아오면 할 수 없고.”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뒤에 뵙죠.”

라노크의 배웅을 받고, 나는 아주 조심스레 로브를 둘렀다.

* * *

“길드장, 곧 날이 어두워집니다. 저들은 아마 해가 지는 즉시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그래야 공격할 시간이 많아 질 테니까요.”

“스피릿님. 슬슬 준비를 하시죠.”

“그래야죠. 열혈님. 베셀 영지 주변의 던전 정리도 만만치 않으실 텐데 이렇게 도와주시는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요. 이번 일은 비단 뤼크레스 한 곳만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힐름 안에서 살고 있는 자라면 당연히 도와야지요.”

뤼크레스의 주인인 스피릿 길드의 길드장인 스피릿과 베셀 영지의 주인인 투혼 길드의 길드장인 열혈. 이 둘은 서로의 손을 꼭 마주잡고 재차 우정을 확인했다.

“빠득! 그런데 정작 레이지 놈들은……!”

“길드장,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가시죠.”

길드원이 인도를 받아서 발코니로 향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성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스피릿, 투혼 길드원들도 있고, 뤼크레스에 길드 하우스를 짓고 생활하는 길드도 있으며 아주 순수하게 세상을 지키고 뤼크레스 성을 지키는데 일조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불순한 목적으로 온 사람도 있었다.

“뤼크레스 성을 지키는데 힘을 실어주기 위해 모이신 분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레이지를 비롯한 대영지의 영주들 중, 유일하게 지원 요청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베셀의 영주 열혈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지금 밖에는 날이 저물기만을 기다리는 마인의 3만 대군이 포진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들이 아주 멍청하게 돌격해오지 않는 이상 전 저들을 막아낼 자신이 없습니다.”

웅성웅성.

뤼크레스를 지키기 위해 온 사람들은 정작 영주인 스피릿의 자신감 없는 말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분들이 제게 힘을 모아 주신다면, 전 저들에게 인간의 저력을 보여줄 것입니다. 비록 성을 내줄지라도 인간의 용기와 끈기와 저력을 보여주어 인간계를 노린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절 믿고 따라주신다면 저들에게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여러분, 제가 힘을 모아 주십시오. 그리고 저들의 뼈 마디마디에 인간에 대한 공포를 심어줍시다!”

“우오오오오!!”

스피릿은 연설을 마치고 자신도 전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복장은 던져버리고 성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그의 뒤를 모든 스피릿 길드원들이 쫓아내려갔다.

“마법사와 궁수는 성벽 위로 올라가라!”

“곧 날이 저문다. 서둘러라!”

궁수와 마법사 이외에 정령술사, 네크로맨서들도 성벽 위에 올랐고 원거리 공격이 쉽지 않은 나머지 클래스들은 스피릿을 선두로 성문 뒤에 서있는 부대의 뒤에서 힘을 실어줬다.

“온다!”

콰아앙!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성문과 성벽이 크게 뒤흔들렸다.

* * *

“……공포를 심어줍시다!!”

“우오오오오!!”

“놀고들 있네.”

스피릿 길드장은 자기가 연설을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세상에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질 것을 확실하고, 또 그걸 남에게 퍼트리는 놈이 어디 있어? 질 것을 확신해 버리면 이길 싸움도 지게 될 텐데. 뭐? 공포를 심어줘? 퍽도 그러겠다.

“니들은 나가 놀아라. 난 안에서 작업 할 테니. 하이딩.”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최대한 성과 가까이로 움직인 다음, 스피릿을 비롯한 그의 길드원들이 성을 빠져나오는 순간을 이용해 성안으로 몰래 잠입했다. 이 성의 내부에 온 것은 처음이지만 6대 성은 구조가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원하는 장소를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콰아앙!

누군가의 찢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리치들의 공격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충격음이 내성 깊숙이까지 들려왔다.

“빙고! 찾았다.”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스피릿 길드원들의 침대가 모여 있는 리스존!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는지 깨끗한 방을 보며 난 손톱을 길게 늘렸다.

“이걸로 좀비 짓(죽자마자 살아나서 다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못하겠지. 하압!”

서걱! 서걱!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들은 늘어난 손톱 앞에 너무도 무력했다. 한 번의 휘두름에 침대 한 구씩. 아주 간단하게 잘려진 침대들은 이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한 가지만 하면 끝이군.”

스피릿 길드원들이 죽었을 때 성안에서 살아나는 것을 막고 다시 로브를 눌러썼다. 이번에 가려는 곳은 성벽 위. 어느 곳에 마법사가 많은지를 체크하기 위해서이다.

“좋았어. 고루 퍼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왼쪽에 약간은 치우쳐 있군. 안팎으로 뒤흔들어주지. 횃불, 사용!”

밖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부서진 침대들을 끌어다 모아놓고 횃불에 불을 붙여 던졌다. 굳이 횃불을 사용 할 것 없이 마법을 사용해도 됐지만 아직은 마나를 소모할 때가 아니다.

“부, 불이다! 성에 불이 났다!”

“마법사, 정령술사들을 성으로 올려 보내!”

“텔레포트!”

지켜야 할 성 위엣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르자 부산떠는 유저들을 보며 다시 본대가 있는 성 밖으로 이동했다.

“오셨습니까.”

“아아, 돌아오셨군요. 분부하신 대로 리치들이 성문과 성벽을 피해 없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오래지 않아 성문, 혹은 성벽에 구멍이 날 것으로 추정되옵니다.”

본대로 돌아오자 라노크는 가볍게 인사를, 레이얼은 상황 보고를 했다. 아참, 여유가 있을 때 레이얼에게 그걸 물어봐야겠군.

“레이얼, 너도 저 뒤쪽에 인간들이 있단 걸 알고 있었나?”

“예!”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지?”

“별 위협을 못 느껴서입니다. 그리고 주인님께서 저들이 있는 쪽으로 가시는 걸 봤고요. 꽤 오래 전부터 저들 사이를 오가시더군요. 그런데도 저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던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음, 그랬군. 알았다. 이제 전투에 신경 쓰도록. 라노크!”

“예.”

“저기, 저쪽 성벽 보이나?”

“그렇습니다.”

“지금 리치 몇을 데리고 가서 저 성벽 위를 공격해라. 그리고 죽은 마법사와 정령술사들을 이용해서…….”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라노크에게 명령을 내렸다.

상급 리치 열을 데리고 움직이는 라노크. 내가 지정한 성벽을 보고 주문을 외우는 라노크의 손에는 녹색의 무언가가 생기기 시작했다.

“클라우드 킬!”

라노크가 손을 뻗자 갑자기 성벽 위에 녹색 구름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녹색의 구름 안에서 보이는 검은 실루엣들은 구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움직이는 실루엣이 없을 때, 상급 리치들은 큰소리로 외쳤다.

“스펙터!”

라노크의 손을 휘젓자 짙게 깔렸던 죽음의 구름은 흔적도 없이 흩어졌고 마법사들이 있던 자리엔 1~7써클까지의 주문을 랜덤하게 사용하며 공격하는 이지가 없는 생명체, 스펙터만이 있었다.

갑자기 스펙터가 한 마리도 아니고 열 마리씩이나 나타나자 불까지 난 성 내부는 더욱 크게 술렁거렸다.

“성공이군. 자,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전진이다!”

스켈레톤 계열 중에 가장 공격력이 높은 스켈레톤 나이트를 움직여 성문 공략에 나섰다. 열 마리의 스펙터. 그들이 성벽 위를 휘젓는 동안 스켈레톤 나이트들은 리치들의 견제 속에서 어렵지 않게 성문에 도달 할 수 있었다.

쿵! 쿵! 쿵! 쿵! 콰직!

“뚫렸다. 성문이 뚫렸다!”

성문이 뚫리자 성의 안쪽에서 비명인지 뭔지 모를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내가 아까 본 대로의 전력과 진형이라면 스켈레톤 나이트가 큰 낭패를 볼 거란 말이지.

“레이얼, 지금 즉시 모든 뱀파이어들을 이끌고 성벽 위로 올라가라. 그리고 적들을 섬멸하도록.”

“맡겨주십시오.”

저번에 말했던 ‘말하지 않고 뜻을 전하기’를 사용 했는지 레이얼은 곧장 성벽 위로 박쥐가 되어 날아갔다.

성벽 위에서 제 본모습을 되찾는 뱀파이어들. 그들 앞에서 오합지졸 유저들은 우수수 떨어지는 추풍낙엽과도 같은 존재였다.

“라노크, 리치를 모아라. 우리도 가자.”

라노크를 놀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기에 리치들을 이끌고 역시 성벽 위로 올라갔다. 우리가 성벽 위로 올라갔을 땐 이미 뱀파이어들이 성벽 위를 장악한 상태였다.

“레이얼, 적들보다 먼저 성을 장악하라!”

“예, 주인님!”

성벽 위로 장악한 뱀파이어, 리치들에게 겁먹은 다수의 유저들이 슬금슬금 성안으로 숨어들어가기 시작한 것을 발견하고 레이얼에게 미리 성의 창문으로 들어가 성을 장악할 것을 명했다. 일제히 날아오르는 뱀파이어들. 하지만 유저들은 그들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라노크, 인간들을 남김없이 섬멸하라. 하이딩.”

고작 뤼크레스를 치면서 모습을 드러내기엔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때문에 잔챙이를 섬멸하는 것은 라노크에게 맡기고 난 하이딩을 써서 모습을 감췄다.

“큭, 살아난 자들은 어디 있나?”

“길드장, 큰일 났습니다. 죽은 자들이 성안이 아닌 마을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침대가 파괴된 듯한다. 큭! 게다가 성안이 적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부관으로 보이는 자는 스켈레톤 나이트 넷의 공격을 어렵사리 막아가면서도 스피릿에게 확실히 보고했다.

“성이 어떻게 벌써……. 이런 제기랄!”

“이미 세는 기울어졌습니다.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이크!”

평소엔 몬스터 취급도 안 해주던 놈들에게 오히려 자신들이 밀리자 스피릿은 화가 치미는지 계속해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 물러서면 우리 길드는 뭐가 되겠냔 말이다! 검을 휘둘러라, 베고 베고 또 베어서 죽는 그 순간까지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발악적인 스피릿의 외침에도 일부 도망가는 자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외침에 호응해 자신이 가진 모든 마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검강, 수강, 검풍. 금세 지쳐버릴 테지만 마구잡이로 마나를 뿜어대는 그들의 행동은 상당수의 스켈레톤, 스켈레톤 나이트를 파괴하는 성과를 보였다.

“클라우드 킬!”

피해가 커질 듯싶어 라노크에게 명령을 내리려고 쳐다보니 라노크는 이미 주문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성벽 위의 마법사들을 죽일 때도 썼던 죽음의 구름! 그 구름 앞에선 HP 많은 기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컥! 체, 체력이……!”

“블러디 네일! 블러드 스트라이크!”

라노크가 다수의 적이는 것을 보고 경쟁심이 불타올랐는지 성 안에 있던 레이얼이 땅으로 뛰어내리며 손톱을 길게 늘려 적들을 베어갔다.

“히, 힐!”

나야 마인으로 변하면서 훨씬 좋아진 눈으로 쫓고는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인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레이얼. 그 때문에 프리스트들은 동료들을 회복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레이얼은 계속해서 회복 주문을 외우는 프리스트를 가만히 두고 있었다. 원래 프리스트가 제 1척살 대상 아닌가?

“회, 회복 주문이 안 먹혀!”

프리스트들의 비명 같은 외침에 레이얼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레이얼의 손톱에는 회복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가?

“이건 개죽음이야!”

레이얼이 유저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고, 라노크가 성벽 위에서 무지막지한 공격 마법을 퍼붓고 있을 때 누군가 절망의 목소리를 터트렸다.

“이제……끝났군.”

그 한 마디로 인해 그래도 꿋꿋이 버티던 자들의 의지가 무너져버렸다. 도망치는 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길드장을 잃은 스피릿, 투혼 길드원들도 계속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럴수록 죽어가는 자들의 숫자는 늘어났다. 수적, 능력적인 열세인 데다 싸움에 집중을 하지 못하니 당연한 결과지.

“주인님, 인간들은 전멸했습니다. 다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스켈레톤 아쳐와 메이지, 레이스는 성벽 위에 배치시키고 스켈레톤을 성 입구 근처에 스켈레톤과 스켈레톤 나이트, 본 나이트, 구울들은 성 주위에 배치시켜라. 최대한 성과 가까운 거리로. 그리고 리치와 뱀파이어들은 휴식을 취하도록. 오늘 수고가 많았다. 아참, 레이얼. 좀 전에 보니 인간들이 회복하지 못하던데 특별한 능력을 쓴 것이냐? 아니면…….”

“손톱을 통해 인간들의 몸에다가 제 피를 섞음으로써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기술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을 뱀파이어로 변화시키진 못하지만 꽤 유용한 기술이죠.”

“정말 그렇군. 회복을 못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이간에겐 커다란 짐이 될 테니까. 이제 가서 쉬어라.”

“휴식 명령을 내리자 성안으로 들어가려던 레이얼은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섰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힘을 보충할 겸 오늘 죽인 인간들을 흡혈하면 하급이긴 하겠지만 뱀파이어의 수가 약간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 그런 식으로 계속 뱀파이어의 숫자가 늘어난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되겠어. 그럼 오늘은 쉬도록 하라. 이제 딱 한 번만 공격을 막아낸 뒤 성을 파괴하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것이다. 성을 되찾으려는 자들의 공격은 내일 새벽이나 낮에 이루어질 테니 너희 뱀파이어가 움직일 일은 없지만 만일 적들이 게릴라전으로 나오면 너희가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힘을 비축해 두도록!”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도 그렇게 일러두도록 하지요. 그럼 주인님, 내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레이얼은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다른 뱀파이어들과 함께 박쥐가 되어 성안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다.

나도 여기는 라노크에게 맡기고 정보를 좀 캐러 가볼까?

“라노크!”

“다녀오십시오. 이곳은 제가 알아서 수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뭐라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서있던 라노크는 미리 알고 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역시 똑똑한 부관이 둘이나 있으니 군대를 관리하기가 아주 편하군!

“그래, 맡기마. 텔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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