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천사의 최후 (31/43)

#타천사의 최후

“역시 유저들의 힘만으론 무리인 이벤트였나? 거트 형이 기한을 연장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군. 일주일이라, 수도를 비롯한 대도시만 공격당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그나저나 크루드랑은 잘 피했을까?”

사태가 진정되고 나니 크루드, 쿤, 아슈라가 구경한다고 비코에 갔던 생각이 났다.

아까 헤븐지 레이가 발동하지 않아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지만 그 전에 이미 상당수 목숨을 잃었던데 설마하니 그 안에 끼어 있는 건 아니겠지?

“에휴, 내 코가 석잔데 남 걱정 할 때가 아니지.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묘책을 떠올려 볼까나?”

잘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느릿느릿 혼자 고민할 곳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몬스터가 살지 않는다고 알려진 인근 야산이었다.

“그런데 소환된 천사들이 과연 타브리스를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전투천사라고는 하지만 오늘 본 타브리스는 지금껏 보아온 적들 중에 최강……. 아, 드래곤이라면 또 모르겠군. 아무튼 경악할 만한 수준이던데 말이야.”

잠시 가상으로 측정한 전투천사들의 전투력과 타브리스의 전투력을 비교해봤다.

하지만 역시나 전투천사들의 패. 아무리 생각해도 대천사 급이 아니라면 불가능 할 것 같았다. 아니, 대천사라해도 일대일로는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설마하니 전투 천사의 전투력을 대천사나 그에 필적할 정도로 설정해 놓지는 않았을 것이고, 결국 시간 끌기? 전투천사의 전멸 후에 다시 한 번의 소환이 있을 거란 말인가? 미쳤군. 그러다 인간계가 멸망하기라도 하면 이 게임은 끝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당최 운영자들의 속셈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거 확 그냥 일 저질러버려? 내 손으로 해결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내게 남은 최후의 보루를 이용하면, 그리고 그걸로 계획했던 일을 서둘러 실행시키면 타브리스라 해도 잡을 수 있을 법 했지만 그러기엔 무엇보다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운영자야말로 구워삶으면 되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있고. 무엇보다 스토리, 혹은 시스템이 꼬여버릴 것 같단 말이야? 이걸 저질러 말아? 거참, 고민되네.”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고민하다가 결국은 이 방법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기로 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여유를 가지고. 설마하니 운영자가 게임을 말아먹지는 않을 것 아닌가? 자기들도 최후의 안전핀 정도는 준비해 놨겠지.

“일단 빛과 어둠, 두 가지 속성의 마법서나 구해보자. 어쩌면 타브리스를 잡는데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고달픈 고민도 떨쳐버릴 겸 하루 동안 죽음의 땅과 빛의 신전을 초토화시켰다.

* * *

“흐응, 일단 마법서는 꽤 많이 구했는데 말이지.”

어제는 다행히 만족할 만한 숫자의 마법서를 모았다.

모으고, 사들인 마법서는 거의 현재 나온 빛과 어둠의 마법서 전부에 달했고 이제 조합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마지막 걸림돌은 시간.

가넷을 만나기도 빠듯한 시간인데 어느 세월에 조합까지 시키냐고~!

“저번에 조합마법 몇 개 만드는 데도 시간이 엄청 걸렸는데 이번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어? 더군다나 다루기 까다로운 빛과 어둠의 조합인데. 에휴.”

“스트 형!”

오늘도 어김없이 가넷과 아슈라를 만나기로 했다. 쿤과 크루드는 둘이 따로 퀘스트 수행할 것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합류하지 못했고.

뒤돌아보니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슈라. 그 뒤로 가넷도 보였다.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응? 뭐가?”

가넷은 다짜고짜 내게 알 수 없는 질문을 했다.

“그 타천사! 날개는 검게 변했지만 그건 분명 어제 만났던 타브……. 읍, 읍!”

가뜩이나 타천사에 관한 얘기에 민감한 사람들인데 가넷이 그에 대해 아는 듯 소리치자 몇몇의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했다. 다행히 내가 일찌감치 그것을 느끼고 가넷의 입을 막았지만.

“바보야. 어제 일로 민감해져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소리치면 오해받잖아! 따라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가넷을 데리고 이동했지만 뭔가 꺼림직한 기분이, 누군가 따라오고 있음을 내게 경고했다.

“저리로 가자.”

“펍?”

얘기를 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곳은 펍, 그러니까 주점이었다. 서로의 말소리를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시끄러운 곳이지만 그만큼 내 말들을 남이 들을 수 없게 묻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들어가 빈자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난 입모양도 들키지 않기 위해 빈자리들을 마주하고 앉았다.

“내가 보기에도 어제 그 타천사는 빛의 신전에서 봤던 그 천사가 맞아. 어차피 거기 말고는 천사라는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게 뭐?”

“뭐라니. 공지에 나온 그 마법사, 너 아냐?”

“사악한 마법사?”

“응.”

면전에 대고 사악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기 어려웠던지 가넷은 ‘사악한’이라는 대목에서는 어물쩍 넘겼다.

“그럴 리가. 난 닌자인 걸!”

“하지만 마법사이기도 하잖아!”

“너, 내가 사악해 보여?”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그럼 된 거네. 날 못 믿는 거야? 그럼 슬픈데.”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라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란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야. 네가 정 날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난 절대 사악한 마법사가 아니라고.”

조금은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길에 보니 엿듣기에 실패해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머리를 맞대고 하는 소리를 오 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엿들을 수야 없지. 큭큭큭.

“의심해서 미안해. 스트, 내가 잘못했어.”

밖으로 나가고 나서 곧바로 가넷과 아슈라가 뒤쫓아 나왔다. 그리고 온갖 애교를 부리며 화를 풀어주기 위해 애썼다.

이거 반은 맞는 말이라 뜨끔 하는군. 하지만 ‘사악한’ 마법사는 아니니깐, 뭐.

“알았어. 그럼 오늘은 어디로 갈까?”

“마녀의 언덕! 천사도 봤으니까 이번엔 마녀를 한번 보고 싶어.”

“마녀의 언덕이라, 거긴 꽤나 고렙 존인데……. 좋아, 혹시 모르니까 텔아몬 마을에 가서 마녀사냥 퀘스트를 받아서 가자.”

명칭은 마녀의 언덕이지만 마녀의 언덕에 실존하는 마녀의 수는 단 한 명뿐이다.

텔아몬 마을에서 고아로 태어나 갖은 고생 끝에 위치(witch : 마스터 클래스의 여성 마법사)의 칭호를 얻은 그녀는 자신을 멸시하고 구박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마을을 공격하지만 번번이 마을에 들른 여행자들에게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근처의 언덕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배경 설정을 가진 마녀 실리아드. 불행한 삶을 살아온 그녀를 동정해서 원하는 대로 하도록 놔두는 게 좋을지 모르지만 이런 만들어진 스토리에 일일이 연연하다 보면 잡을 몬스터가 없어진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그녀가 숨어 있는 언덕은 마녀의 언덕으로 불리고 있고 그녀의 분노를 산 텔아몬 마을에서는 그녀를 죽여서라도 마을에 평화를 가져다 달라는 퀘스트를 주고 있다.

물론 퀘스트를 주며 마을 사람이 설명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사뭇 사실과 다르다.

이 마녀 실리아드 때문에 마녀의 언덕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70레벨 초반의 유저가 사냥하기 좋은 산적들이지만 80레벨 이상의 고렙존으로 분류된다. 그만큼 마스터 클래스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소문을 들어보면 실리아드의 AI가 레벨에 비해 뒤떨어져서 비검기를 쓸 수 있는 레벨(기사 기준. 85레벨) 이상의 파티라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소모형 아이템이라면 거기 가서 사도 될 테니 바로 이동하자. 매스 텔레포트!”

마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넷이 알면 마녀사냥에 반대 할 것이 뻔히 눈에 보였기 때문에 진실은 묻어뒀다.

모르는 게 약이겠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퀘스트 NPC에게 가서 퀘스트에 대한 내용 설명을 들었다. 물론 진실을 알고 있는 내 귀엔 역겨운 소리로밖엔 안 들렸지만.

“그녀의 이름은 실리아드. 예전에 우리 마을에서 살던 꼬마아이였지. 그녀는 날 때부터 제 어미를 죽이고 태어났어! 처음부터 손에 피를 묻히고 태어난 게지.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지만 우리는 부모 없는 불쌍한 아이라고 따뜻하게 감싸줬지.”

부모가 아이 낳다 죽은 게 어째서 아이 탓이야? 그리고 따뜻하게 감싸줘? 감싸주는 게 구타에, 거지꼴을 만들어서 빌어먹게 하는 거냐?

“하지만 그 아이는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늘 마을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둑질을 했지.”

너 같으면 주먹, 발로 때리고 돌팔매질하는데 가만히 있겠냐? 그리고 먹을 게 없어서 쓰레기통 뒤지는 게 도둑질이야?

“그래도 우리는 그 아이를 감싸주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난 양녀로 들이려고까지 했지. 그런데 그 몹쓸 년은 내게 칼질을 하고 보석까지 훔쳐서 달아나 버렸다!”

양녀? 넌 양녀를 성적 노리개로 삼냐? 덮치려다 실패한 놈이 칼침 한 번 맞았으면 양호한 거지!

“그 뒤로 어떤 사악한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웠는지 이십여 년 후, 위치의 칭호를 얻어 돌아온 그 마녀는 더 높은 경지로 가기 위해 인간의 피와 살을 이용한 연구를 계획했고, 우리 마을에 쳐들어왔지. 은혜도 모르고 말이야.”

점입가경이라. 마녀사냥 퀘스트를 수행하던 어떤 기사가 퀘스트를 준 이 NPC에게서 뭔가 꺼림칙함을 느끼고 실리아드를 제압해 들은 이야기와는 전혀 딴판인 이야기를 하는 이 빌어먹을 놈에게 강한 살심이 일었다.

후우, 참자. ‘그 계획’ 때까지만 기다리자. 그때까지만!

“하지만 악인은 절대 정의를 이길 수 없는 법. 마침 우리 마을에 들른 여행자들이 그 마녀를 쫓아버렸고 그 마녀는 아직까지 저 언덕 위에서 호시탐탐 마을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지. 그대들이라면 그 악랄한 마녀를 해치울 수 있을 것 같군. 부디 그 마녀를 해치워주게. 그렇게만 해주면 보상은 넉넉히 주지.”

[마녀사냥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놈의 말이 끝나자 퀘스트 수락 메시지가 떴다.

못마땅했지만 할 수 없이 수락. 저택을 빠져나와 마녀의 언덕으로 향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자기한테 그렇게 잘해준 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도망치다니. 게다가 사람의 피와 살로 연구하려고 자신을 돌봐줬던 마을 사람들을 공격 하다니…….”

진실을 모르는 가넷은 분노하고 질책할 대상을 잘못 잡고 있었다.

“가넷. 한 사람의 얘기만을 들어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거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걸 기억해두는 편이 좋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굳이 말해봤자 기분만 상하고 잘못하면 가넷이 범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욱하는 마음에 NPC를 죽여 버리거나 한다면) 그 다음 내용은 생략했다.

“음홧홧홧! 우리는 붉은 호랑이단.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져라!”

마녀의 언덕에 오르자 아주 산적스러운 대사와 함께 한 무리의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수는 모두 여섯. 큰 무리는 없을 숫자였다. 그나저나 작명 센스 하고는…….

“콜 라이트닝!”

쿠르릉!

“흐이익!”

“나의 종이여, 일어나라. 서먼 스켈레톤!”

기습적인 콜 라이트닝과 함께 표창 세 개를 던지자 모두 세 명의 산적이 죽고 두 명은 검을 타고 흘러 들어온 전류에 감전되었다.

죽은 산적들이 다시 재활용되어 살아나자 숫자에서부터 상황이 완전히 반전! 육대 삼으로 우리는 숫자적 우위까지 점하게 되었다.

“사람 살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산적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아가기도 맥 빠졌지만 그래도 저놈들 하나하나가 다 경험치이기 때문에 등에 칼을 꽂아줬다.

너무도 싱거운 사냥. 마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꽤나 지루한 사냥이 될 거 같다. 하지만 차라리 마녀가 안 나오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스트, 저기!”

가넷이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의 끝에 있는 건 빗자루를 타고 있는 마녀 실리아드.

리젠 시간도 들쑥날쑥하고 나타나는 곳도 정해지지 않아서 삼십 분 이상 사냥을 해야 만날 수 있다더니 다 뻥이었나 보다. 제기랄.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형, 뭐해요. 빨리 공격해서 떨어뜨리지.”

“알았어. 오늘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라.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선더!”

“꺄악!”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배회하던 실리아드는 선더의 기미를 알아채고 피해보려 했지만 빗자루의 끝에 선더가 적중되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나, 그대에게 부유의 힘을 부여하나니, 레비테이션!”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선더!”

실리아드는 바닥에 내리꽂히지 않기 위해서 자신에게 부유마법을 사용했지만 난 그 위로 다시 한 번 선더를 떨어뜨렸다.

부유마법의 최대 약점은 허공에 떠있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속도가 매우 늦다는 것. 때문에 선더를 피할만한 속도를 내지 못한 실리아드는 자신의 주위로 실드를 펼쳤다.

“잡았다!”

“아니, 그녀도 마스터 클래스야. 실드를 사용했으니 버텨낼 수는 있겠지. 추가 공격이 필요해. 대지를 작렬하는 불꽃의 분노, 플레임 스웜! 내리치는 거신의 해머, 자이언트 윈드 해머!”

돈황이란 녀석에게 사용했던 기술을 사용해 실리아드의 실드를 강하게 내려쳤다.

마나의 소비는 심하지만 속전속결로 최소한의 고통을 받고 죽게 해주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이다.

“거대한 낙석의 위용, 스톤 엣지!”

마지막으로 커다란 바위가 실드로 떨어져 내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축될 만한 바위는 가냘픈 한 겹의 막을 가뿐히 찢어발겼고 그 안에 있는 대상을 찍어 눌렀다.

“이야, 언제 봐도 스트 형은 대단하다니까.”

“그러게. 그 악랄한 마녀를 순식간에 해치워버리다니. 정말 대단해!”

칭찬이 이렇게 씁쓸해 보기는 처음이다.

실리아드가 깔린 바위 근처로 가보니 목걸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확인!”

[마녀 실리아드의 목걸이][퀘스트 아이템]

마녀 실리아드가 아끼는 목걸이.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하다. 이것을 텔아몬 마을의 나킨스에게 보여주면 퀘스트가 완료된다.

“이제 퀘스트를 완료하러 가자.”

콰앙!

목걸이를 품에 넣고 돌아서는데 마을 쪽, 정확히는 우리에게 퀘스트를 줬던 나킨스의 저택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무너지는 저택의 외벽.

“뭐지?”

“뭔가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요?”

“가보자!”

저택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실리아드에 대한 진실을 아는 누군가가 난동을 피우는 게 아닐까? 아는 기대가 생겼다. 만일 그렇다면 절대로 안 막는다!

“잘못 걸렸다. 튀어!”

“왜 하필이면 여기야?”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몇 명의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다 마을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딱히 말하지 않아 알 수 없었다.

“뭔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확실하지?”

“아마도.”

“형, 저기!”

잔뜩 긴장하며 서 있는데 아슈라가 마을의 중심에 해당하는 광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누군가 텔레포트, 혹은 리턴 등을 사용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빛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 수십 개가!

“누구지?”

“엔젤하트다!”

텔레포트인지 뭔지 모를 이동이 마쳐지고 네 명의 사내와 수십 명의 여성들이 나타나자 아직 도망가지 않고 있던 유저 하나가 큰소리로 소리쳤다.

엔젤하트?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서더라?

“엔젤 하트면 가수 아냐?”

“맞아, 누나. 요즘 한참 뜨고 있는데 팬클럽의 지원 덕분에 힐름을 시작한지 반년 만에 고수 반열에 올랐고, 블러드가 물러나고 빈집이 된 오마이스 영지를 차지했지. 스트 형 정도면 뭔가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걸?”

가넷도 연예인에 딱히 관심이 없는지 엔젤 하트란 녀석들을 잘 모르고 있었다. 아슈라는 약간 아는 듯했고. 또한 놈들이 성을 하나 차지해서 내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난 전.혀. 아니다.

“아니, 나도 잘 몰라. 팬클럽에만 의존해서 까부는 녀석들, 내 알 바가 아니지. 그런데 원래 저렇게 뭉쳐 다니는 건가? 한 번 움직이는 데 드는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 값만 해도 장난이 아니겠군.”

내가 궁금한 것은 ‘저놈들이 누구냐’가 아니라 ‘저놈들이 왜 왔느냐’이다.

상황으로 봐서는 뭔가 일이 터진 걸 알고 찾아온 듯한데, 별로 크지도 않은 이 마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타천사 타브리스는 저희 엔젤 하트가 처치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타락한 천사 따위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타브리스를 죽일 것을 호언장담하는 엔젤 하트란 멍청이들을 보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나저나 타브리스가 여기에 왔다고? 이거 낭패로군.

“도망가야 하나?”

“스트, 우리 구경하자!”

타브리스와 마주치기 전에 도망가려고 생각하는 나에게 가넷이 달려들어 팔을 잡았다. 그리곤 엔젤 하트가 있는 쪽으로 끌고 갔다.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사악한 마법사의 꼬임에 넘어가 신을 져버리는 바보짓을 한 타브리스여, 너를 처단하러 우리가 왔다. 도망치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죽음을 재촉하는 자, 누구인가!”

엔젤 하트 중에서도 리더로 보이는 기사 하나가 스킬까지 섞어가며 타브리스를 도발하자 미처 숨기도 전에 타브리스가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미치겠군!

“제기랄……!”

“타브리스, 신을 거역한 자여! 너의 배후가 누구인지 순순히 불어라. 그자가 어디 있는지 말하면 고통 없이 끝내주마!”

“배후? 그자? 누굴 말하는 것인가?”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네가 사악한 마법사의 꼬임에 빠져 신을 져버린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엔젤 하트의 주장에 타브리스는 기도 안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 눈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헛, 이런……!”

눈이 마주쳐버렸다. 하지만 타브리스는 날 본 척도 안 하고 엔젤 하트들을 향해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난 자유의지를 관장하는 자. 난 나의 자유의지로 신에게 검을 겨눈 것뿐이다!”

순간 머릿속에서 상황 정리가 되었다.

그는 내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로 신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좋았어. 이 틈에 도망을……!”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힘으로 실토하게 만들어주지!”

“건방지다!”

둘이 말싸움하는 동안 도주하기 위해 가넷과 아슈라를 잡아끌었다. 하나 그와 동시에 엔젤 하트와 타브리스가 격돌! 서두르지 않으면 여지없이 싸움에 휘말릴 상황에 이르렀다.

“빨리 뛰어!”

“왜 도망치는 거야?”

가넷은 도망치는 것이 못마땅한지 선뜻 발걸음을 옮기려 하지 않았다.

“몰라서 물어? 여기 있다간 개죽음이라고!”

“하지만 너라면……. 저들을 도울 수 있잖아?”

“도울 수야 있지. 그랬다간 나까지 같이 죽는다는 게 문제지만!”

“이길 수도 있잖아? 성을 차지한 길드라면 분명 강할 테고 숫자도 엄청 많은데?”

“너 어제 상황을 몰라서 그래? 레이지가 전멸 당했어. 그것도 오십 명씩이나! 그리고 저걸 보라고!”

뒤를 돌아보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칠십여 명은 될 법한 숫자는 어느새 3분의 2 정도로 줄어 있었고 지금도 계속 줄어가는 중이었다. 물론 타브리스는 생채기조차 입지 않았다.

“엔젤하트라는 것들을 지키느라 피해가 더 커지고 있군.”

그랬다. 도발을 시도한 리더에게 달려드는 타브리스를 길드원들이 몸 바쳐 막아내고 있기에 그 피해는 훨씬 커지고 있었다.

차라리 저놈 하나를 희생하고 계속 공격했다면 조그만 상처 정도는 입힐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멍청한 것들!

“공격, 공격하라!”

꼴에 90레벨은 넘겼는지 엔젤 하트의 멤버 네 명은 각자 검강, 수강, 마나샷, 홀리를 사용했지만 타브리스의 검 앞에선 한줄기 바람과도 같이 흩어져버렸고 피해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봤지? 어서 도망가야 한다고!”

약속을 했으니 가넷을 죽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다. 타브리스가 저들을 다 죽이고 나에 대해 다른 식으로 입을 열 수 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이 의심할 만한 발언이 나오기라도 하면 난…… 끝이다.

“너희들 먼저 가.”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설득해 보겠어.”

“뭐?”

“내가 만났던 타브리스는 이렇지 않았어. 분명 뭔가 잘못 된 거야. 그러니까 내가 설득해 보겠어.”

가넷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이미 타천사가 된 타브리스에게 무슨 설득을 하겠단 말인가? 마음을 고쳐먹는다 해도 검게 변한 날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미 검게 변해버린 날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시도는 해보고 싶어. 내가 죽는 건 상관없어. 설득하다 죽는다 해도 후회는 안 해!”

아주 단호하게 말하는 가넷의 모습에 기가 막혀버렸다.

“대화 자체가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해? 입도 뻥끗하기 전에 죽어버릴 걸?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고! 그리고 그런 몇 마디 말로 돌아올 수 있다면 애초에 저렇게 되지도 않았어!”

“사, 살려줘!”

억지로라도 가넷을 끌고 가려는데 누군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니 엔젤 하트인가 엔젤 화이튼가 하는 놈들 중 하나였다. 그렇다는 것은 이놈들이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소린데…….

“빌어먹을, 큰소리 친 값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니야!”

“사, 살려…….”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결국엔 도망인가? 후후, 인간의 본성은 이렇지. 한데 신은 어째서 너희를 총애하는 것이란 말인가? 자신을 창조한 신에게 누가 될까 소멸을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우리를 곁에 두고서!”

이 타브리스라는 놈, 완전히 천사 우월주의에 빠져버린 듯싶었다.

“아니에요. 신께서는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세요!”

타브리스가 번뜩이는 눈으로 검을 치켜드는 순간 가넷은 이름 모를 엔젤 하트의 인물 앞에 서며 타브리스의 말에 반박했다.

이런, 기어이 일이 터져버렸군.

“너는…….”

“그래요. 저번에 빛의 신전에서 만났던 가넷입니다. 당신은 지금 잘못을 하고 있어요. 착각하고 있다고요!”

가넷이 얼굴을 붉히며 감정이 섞인 목소리를 냈지만 타브리스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래도 가넷은 죽이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 같아 다행이군.

“……너,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검을 거둔 타브리스는 벌벌 떨고 있는 엔젤 하트의 인물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휴우, 다행히 별 탈 없이 끝났군.

“가, 간 건가?”

타브리스의 모습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골목, 혹은 건물의 자내 속에서 남자 셋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 녀석들과 여기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놈을 합쳐서 엔젤하트라고 부른다지, 아마?

“가, 갔어?”

숨을 때 자기 눈에만 아무것도 안 보이면 되는 줄 아는 타조처럼 타브리스를 뒤에 두고 머리를 땅에 박고 있던 놈은 동료들의 목소리에 조심조심 고개를 들었다. 손과 발은 여전히 떨고 있는 채로.

“것봐. 네 말은 듣지도 않을 거랬지? 이제 가자.”

“왜 그냥 갔을까……?”

거만 떨다가 피본 엔젤 하트 녀석들은 무시하고 의문에 빠져있는 가넷을 재촉해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그 나킨스라는 퀘스트 NPC는 무사하려나? 저택이 아주 박살났는데 말이야.

“잠깐만!”

“뭐지?”

나킨스의 저택으로 향하는 우리를 엔젤 하트 중 하나가 불러 세웠다. 저런 놈들과 말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쁜 일이기 때문에 말에 약간 짜증이 실렸다.

“그쪽 말고. 레이디,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꿈틀.

눈에 보이는 뻔한 수작에 분노 게이지가 솟구쳐 올랐다.

이것들이 감히 날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가넷을 넘봐?!

“가넷…… 인데요.”

“아, 가넷 양!”

“가넷, 아슈라. 상대하지 말고 가자.”

“이봐, 우린 그 레이디와 할 얘기가 있으니 가려면 당신이나 가라고!”

더 얘기해봤자 귀찮아질 뿐이란 걸 알기 때문에 무시하고 가려는데 저것들이 살짝 시비를 걸어왔다.

후후, 초면이라 봐줬더니 그리들 나오시겠다?

“꺼져라.”

“뭐야? 레이디 앞이라 좋게 말로 해주려 했더니 이 친구 말로 해선 안 되겠구만?”

삼루 건달들이나 쓸 법한 수작으로 날 떼어놓으려 하자 짜증이 확 일었다.

연예인이란 것들이 이딴 식의 수작을 건단 말이지? 좋아.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봐주지 않겠어.

“그만큼 추태를 보였으면 부끄러운 줄을 알고 물러나야지. 너희들이 양아치냐? 아니지, 요즘 양아치도 쪽팔린 건 알겠다.”

“뭐, 뭐야? 양아치? 그 말 지금 우리한테 한 거냐?”

“혀, 형. 참아요.”

싸우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아슈라가 말렸지만 이미 시작한 이상 쉽게 끝낼 생각은 없다.

이럴 땐 처음부터 다시는 못 기어오르게 지그시 밟아주는 편이 좋으니까.

“너희 말고 여기 양아치스러운 놈들이 더 있나?”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감히……!”

“팬클럽의 치마폭에 숨어서 허세나 부리다가 전멸당한 멍청이들 아니던가?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길드의 위세를 내세워 핍박하려는 놈들의 정곡을 찔러주자 네 명 모두 한결같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굳히기를 해볼까?

“이런, 실수했군.”

“흥, 이제야 잘못을 깨달았…….”

“미안하다. 정정하지. 전멸은 아니었군. 살아보겠다고 자신들을 위해 목숨 건 길드원들을 뒤로 하고 도망친 겁쟁이들.”

“뭐야?!”

“사실 아닌가?”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자 엔젤 하트라는 놈들의 얼굴은 더 이상 빨개 질 수 없을 정도로 달궈졌다.

자, 이제 마무리 작업을 해보실까?

“아슈라, 가넷을 데리고 먼저 가 있을래? 아무래도 이놈들에게는 약간의 정신 교육이 필요할 것 같다.”

“형, 하지만…….”

“내 실력 알잖아? 후딱 해치우고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 아니, 어쩌면 내가 먼저 도착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내 빽이 더 세.”

마지막 말이 믿음을 심어준 것일까? 아슈라도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가넷을 재촉해 데려갔다. 이쯤 되면 저놈들이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겠지?

“흥, 너 혼자 우리 넷을 상대하겠다는 거냐?”

“왜, 안되나? 아, 무섭다면 사람을 더 불러도 좋다.”

“건방진 자식!”

도발은 확실하게 성공했다. 엔젤 하트는 쪽수의 이점을 믿는 것인지 궁수, 프리스트가 끼어 있음에도 원형으로 날 포위했고, 난 천천히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첫 번째로 할 공격은 전방위로 표창을 뿌리는 일명, 팔방수리검!

“엇, 저거 엔젤하트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근데 누구랑 싸우는 거야? 타천사는 어디 가고?”

“크윽, 어느새 구경꾼이 생겨버렸군. 오늘은 우리가 참도록 하지. 운 좋은 줄 알아라!”

나름대로 공인인지라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지 엔젤 하트는 무기를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제길, 이러면 공격 할 수가 없잖아!

“그거, 누가 타브리스에게 들었던 말 아니던가?”

“큭!”

“리턴!”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 놈들은 공격해 봤자 비겁하다느니 하는 소리밖에 듣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차마 공격 할 수는 없었고, 아쉬운 대로 말로 쪼아줬다.

이거 맥 빠지는군.

“에휴, 퀘스트 보상이나 받으러 가자.”

더 이상 상대할 사람도 없고, 가넷과 아슈라가 향하고 있을 나킨스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저택에 도착하자 나킨스는 돌 더미에 깔려 죽어있었다. 잠시 ‘이런 게 천벌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번 일을 벌인 게 타천사 타브리스라는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킨스가 리젠되기를 기다려 얻은 것은 무려 십 골드. 퀘스트 보상 치고는 상당히 많은 돈이었다. 원래는 이번에도 내 몫의 분배를 거절하려 했으나 그 동안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 값을 운운하며 억지로 손에 오 골드를 쥐어주는 가넷을 막을 수는 없었다.

보상의 분배까지 끝나자 다시 다른 사냥터를 찾아 이동했다. 마녀 사냥 퀘스트는 한 사람이 딱 한 번만 수행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다음 이동한 곳은 무리하지 않고 편안하게 사냥 할 수 있는 죽음의 땅, 망자의 협곡이었다.

“여기는 인간의 발자국 소리에 반응해서 주위에 쓰러져 있는 구울들이 일어나니까 시체만 잘 확인하면 기습당할 걱정은 안하고 사냥할 수 있어.”

“여기, 길어요?”

“제법 긴 편이지. 하지만 말했듯이 발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에 사방이 구울로 둘러싸인다 해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문제없어.”

“오, 편리한데요?”

“그렇지? 하지만 여긴 사람들이 잘 안 오는 곳이야. 구울들이 발소리에 반응한다는 걸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이 마나 회복할 시간도 없다고 기피하는 곳이지. 고렙 중에는 아는 사람이 꽤 있지만 그 사람들은 여기 올 레벨을 한참 지났으니까. 가자.”

누군가 보기 전에 가넷, 아슈라를 재촉해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파이어 애로우, 더블!”

빠른 진입을 위해서 초입에 있는 구울들은 미리 저격했다.

망자의 협곡의 장점 중 하나가 발소리를 듣고 일어나기 전의 구울이라면 머리를 겨냥해 얼마든지 저격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으므로. 물론 가까운 거리에 또 다른 시체가 있다면 폭발음에 반응해 일어날 수 있다.

“자, 이제 난 손 놓고 있을 테니 이 앞부턴 둘만의 힘으로 진행해 봐. 내가 죽여서 얻는 경험치로만 레벨 업을 한다면 나중엔 단순히 레벨만 높은 허수아비가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맡겨만 두라고요! 나의 종이여, 일어나라. 서먼 스켈레톤!”

“도루루, 스파크. 소환!”

내가 뒷짐을 지고 한걸음 물러나자 아슈라와 가넷은 각각의 소환수들을 소환해냈다. 아슈라의 스켈레톤은 구울의 몸에서 뽑아낸 것이라 일반 것들에 비해 약했지만 느려터진 좀비를 만드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도루루, 스파크. 앞에 있는 시체들의 머리를 공격해!”

물고기 형태를 한 도루루나 작은 악마 같은 형태를 한 스파크 모두 땅에 발을 디디지 않는 공중형이었기에 바닥에 몸을 뉘고 있는 구울의 저격이 용이했다.

그러고 보니 그걸 얘기 안 해줬군.

“아참, 일어나지도 않은 구울을 죽이면 경험치가 4분의 1밖에 안 들어온다. 그러니까 실전 경험도 할 겸 일어날 때까지는 기다리는 편이 좋을 거야. 구울이 많이 몰려 있지 않는다면.”

그 말에 가넷은 정령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이번엔 아슈라의 스켈레톤이 앞장섰다.

스켈레톤들이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걸어가자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구울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아, 시체처럼이 아니라 애초부터 시체였군.

“공격, 본 스로우!”

“도루루, 아쿠아 캐논. 스파크, 라이트닝!”

두 마리가 일어나자 가넷, 아슈라는 각각 한 마리씩을 맡았다. 아슈라는 뼈를 던져 견제하고 스켈레톤이 마무리하는 식의 사냥법이었고, 가넷은 물과 전기의 정령이 각자의 마법을 사용하게 해 그것들을 조합시켜 위력을 내는 공격법이었다.

언데드라 마비 효과는 기대 할 수 없지만 팔을 들어 막아내도 물 덩어리가 폭발하면서 온몸을 적시니 어딜 맞춰도 데미지는 꾸준히 입힐 수 있는 그저 그런, 하지만 어지간히 만만한 적이 아니라면 딱히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방법이었다.

휴우, 난감하군. 어서 90레벨까지 끌어올려 상급 정령을 소환하게 하던가 해야지, 원.

“도루루, 워터 홀드. 스파크, 차지 볼트!”

구울의 발밑에 고였던 물이 구울을 휘감고 올라와 속박하고 차지볼트 한 발이 머리를 강타했다. 머리가 잔뜩 일그러져 뒤로 넘어가는 구울. 이 방법은 제법 그럴싸했다.

“하지만 한 마리 잡는데 명령이 너무 복잡하군.”

캐스팅을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일일이 이름을 부르고 명령을 내려야 하니 그것 나름대로 불편해보였다.

가넷보다 아슈라의 사냥 속도가 더 느렸다. 구울의 몸에서 뽑아낸 스켈레톤이다 보니 약한 것도 약한 것이지만 무기가 없는 맨손인 것이다. 따라서 치명타는 입히지 못하고 때려죽여야 하는 상황이었고,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에휴, 여분의 검이 없는데 큰일이네. 아, 그렇지!”

자기도 스켈레톤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있는지 한숨을 푹 내쉬던 아슈라는 갑자기 품속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그리고 꺼낸 것이 드워프제 미스릴 소드!

아무리 근처에 사람이 없다지만 저건 좀 오버하는 것 같은데?

“자,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고!”

기어이 미스릴 소드를 스켈레톤에게 장비시킨 아슈라는 신이 나서 스켈레톤을 전진시켰다. 아슈라가 흥분한 탓에 한 번에 다섯 마리나 되는 구울이 일어나버렸지만 미스릴 소드를 휘두르는 스켈레톤 앞에선 그야말로 짚단 인형과 같았다. 전혀 막힘없는 휘두름이라니, 과연 장비빨이 좋긴 좋구나.

“아슈라, 너무 무기에 의지하는 것도 안 좋아. 미스릴 소드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적을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예를 들면……. 그래, 듀라한 같은. 난 그럴 때를 대비해 전술 훈련을 하라는 거지 무기 선능 실험해보라고 한 게 아니야.”

“아, 그것도 그러네요. 그럼 할 수 없죠. 스켈레톤, 무기 장착 해제.”

아슈라의 명령에 따라 스켈레톤은 미스릴 소드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잽싸게 줍는 아슈라.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전진하려는데 협곡을 가득 메우는 메아리가 있었다.

“가넷! 아슈라!”

누군가 가넷과 아슈라를 찾는 소리였다.

목소리로 봐선 쿤이나 크루드도 아닌데? 아니, 쿤이나 크루드도 지금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건 알지 못하지. 그럼 누구?

푸쉬쉬쉬!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를 기다리는 동안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는 뭔가 강한 압력에 의해 뿜어지는 물의 소리였다.

물 속성 마법도 저런 소리는 안 나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엇, 찾았다. 가넷!”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치며 달려오는 놈은 아주 낯이 익은, 그래. 돈황이란 놈이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누나. 헤헤헤.”

가넷의 따가운 눈총에 돈황은 금세 뒷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 뒤에 짊어진 건 뭐야?”

놈의 뒤로 따라오는 호위는 이해하겠는데 나도 놈이 짊어진 이상한 장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가방도 아니고, 무슨 고스트 버스터즈에 나오는 기계 같군.

“어? 이거요? 이건 제가 직접 개발한 언데드 퇴치용 물대포에요.”

“언데드 퇴치용 물대포?”

“네! 이 등 뒤의 통에 성수를 가득 채운 다음 마늘 두 접을 빻아서 넣었죠. 거기다가 성수를 발사하는 호스의 모양은 십자가! 어때요, 언데드는 무서워 할 만하죠?”

‘언데드가 무슨 전부 뱀파이어냐?’ 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만든 성의가 가상해서 참아주기로 했다.

이래저래 결국은 돈지랄이군. 성수 값이 얼만데 그걸 물대포로 쏴서 내보내?

“그건 그렇고. 그 정도론 약했다는 건가? 다시 찾아온 걸 보니.”

“아, 하, 하. 왜 이러십니까, 형님. 우리말로 해요. 말로. 네?”

주먹과 목에서 뚜둑 소리를 내며 한껏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자 돈황은 뒤로 물러서며 두 손을 가로저었다.

잘난 척에 돈지랄만 하는 뻣뻣한 인간으로 봤는데 저런 비굴한 면도 있었군.

“내가 왜 네 형님이지?”

“가넷 누나의 친구이시니 당연히 제겐 형님이시죠. 헤헤.”

돈황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무협소설에 나오는 점소이 같은 행동을 했다.

갈수록 더하는군. 이거 어디 힘 빠져서 상대하겠나.

“좋아. 말로 해주지. 사라져라. 지금 당장.”

“아이고, 여기까지 힘들게 온 사람한테 문전박대라니요, 너무하십니다. 형님.”

“뭘 어쩌라는 거야?”

“헤헤헤헤. 그러니까 제 말은 저도 같이 다니게 해주십사 한다는 거죠. 일행에 합류시켜 주십시오. 형님!”

“싫다. 내가 왜 그래야하지?”

“이유라면 있죠. 그건 바로 형님과 가넷 누나가 연인 사이라는 게 거짓말 같다는 것! 전 그것을 확인해야겠습니다.”

돈황이 거짓말을 했던 것을 짚어내자 가넷의 몸이 움찔 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가넷과 내가 사귄다고 말은 해놨지만 사귄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이렇게 생각한 이유를 대볼까요? 첫째, 요즘엔 일이 생겨서 접속 하지 못했지만 거의 매일 가넷 누나를 쫓아다닌 제가 형님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것.”

“너와 내가 엇갈렸나 보군.”

“둘째, 둘 사이가 전혀 다정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내가 좀 무뚝뚝한 편이지.”

“셋째, 형님은 가넷 누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점! 물론 이건 제 추측이죠.”

“사귄다는 건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란 소리 아니겠나? 처음부터 다 알고 있다면 사귄다는 의미가 없지.”

돈황이 짚어내는 족족 그대로 답을 내줬다. 하지만 전혀 실망하는 표정이 아닌 녀석.

또 무슨 속셈이야?

“큭, 화술에 상당히 능하시군요. 뭐, 사실 사귄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온라인에서의 외도도 눈감아주지 못할 만큼 속 좁은 남자가 아니거든요. 저는.”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요, 게임 내의 커플 정도는 인정해 드린다는 소리죠. 저는 현실에서의 가넷 누나를 가질 테니 형은 게임 내에서 얼마든지 가넷 누나와 잘 지내보세요. 음홧홧홧홧!”

“내가 물건이야? 가지고 말고 하게. 그리고 내가 왜 네 거야?!”

돈황은 우리를 소위 겜앤으로 불리는 게임 속 애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현실 세계에서 가까이 있으니 걱정되지 않는다는, 그런 건가?

“웃기는군. 누가 현실에서 가넷을 내준댔나?”

“아무리 허세를 부리셔도 형은 현실에서의 가넷 누나에 대해 하나도 모르잖아요? 누가 뭐래도 이번만큼은 저의 승리입니다. 음홧홧홧홧!!!!”

“본명 이소연. 꽤 오래전부터 교회 열심히 다니고 있고, 초등학교는…….”

내가 알고 있는 소연에 대한 정보를 쫘악 읊어줬다. 그리 많지도 않지만 적지도 않은 정보들. 그것들을 듣는 돈황의 눈은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가넷도 놀랐지만 돈황 때문에 억지로 묻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지막으로 너와의 관계는 스토커와 스토킹 당하는 사람의 관계. 더 알아야 하나?”

“어, 억, 억, 억!”

쿵!

점점 뒤로 넘어가던 돈황의 몸이 결국엔 단단한 바닥과 조우하고 말았다.

이 녀석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괜찮으십니까, 마스터?”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NPC가 부축 했지만 충격이 컸던지 돈황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비틀대며 일어선 돈황은 마지막으로 가넷을 붙잡고 물었다.

“그럼 저 사람, 저 사람 이름은 뭐에요? 진짜 현실에서도 사귄다면 누나도 알 것 아니에요!”

허를 찌르는 돈황의 물음에 순간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됐으니 가넷이 분명 누군가의 이름을 말할 텐데, 과연 그게 누구의 이름일까. 혹시 내 이름은 아닐까?

헛된 기대를 품자 가넷이 입술을 떼는 그 찰나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승…… 현. 양승현.”

양승현. 소연이의 예전 남자친구 이름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가슴속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쌓아올려진 무언가가 콰르르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물어본다면 ‘아 걔? 둘이 다시 사귄대?’라는 말이 나올 테니 이러는 편이 좋은 거겠지. 하지만 씁쓸함만은 어쩔 수 없군.

“이럴 수가…….”

털썩!

돈황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장난 같기만 하더니 진심이었나?

잠시간의 침묵.

우리들 사이로 흐르는 어색한 공기에 가넷이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돈황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도 나 따라다닐래요. 합류 안 시켜주면 콱 죽어버릴 거야!”

돈황은 자신의 검을 뽑아 검 끝에 목을 가져다대었다.

그런데 말이야, 손이 베일까 봐 검날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있으면 전혀 설득력이 없잖아!

“좋다. 데리고 다녀주지. 하지만! 가넷에게 집적거리거나 거치적거릴 땐 가차 없이 버리고 간다.

하지만 왠지 모를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는 바람에 허락해버렸다.

“지, 진짜요?”

“아참, 그 거추장스러운 NPC들 좀 치워라.”

“예, 옙!”

돈황에게 NPC를 지적하자 그 자리에서 해고 시키고 우리를 뒤쫓아 왔다.

“흐음, 그런데 넌 클래스가 뭐냐?”

계속 물대포를 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돈황의 본래 클래스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에 관련된 스킬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이거, 알 수가 있나.

“가넷 누나를 위한 기사도로 똘똘 뭉친 기사죠.”

“집적대지 말라고 했지! 떼어놓고 갈까?”

“아, 아니. 그냥 기사인데요.”

“그런데 그 물대포는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에이, 몰라서 물어요? 당연히 사냥하려고 그러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돈황을 보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기사라는 놈이 검은 안 들고 성수를 뿌려서, 아니 쏴서 레벨을 올려?

“하아? 그럼 너 검을 잡아본 게 몇 번이나 되냐?”

“검이라면 처음 접속해서 몇 번 휘둘러보다가 손가락 베인 이후론 안 잡아봤는데요. 아, 좀 전에 한번 또 잡아봤고요.”

여기서 좀 전이라 함은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할 때이다.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란 건 알겠는데,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기사란 놈이 검을 잡아 본 게 꼴랑 두 번?

“앞으로도 검을 쥘 생각은 없고?”

“네. 이것만 있으면 충분한데 뭐 하러 굳이 검을 들어요? 힘들게.”

개념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는 없다.

성수로 모든 것이 해결 된다라? 그럼 인간형, 동물형 몬스터나 골렘, 정령들은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이런 개념 없는 놈! 하고 생각하고 말수도 있지만 나중에 거치적거리지 않게 하려면 조금은 가르쳐두는 게 좋았다.

“검 좀 줘볼래?”

“여기요.”

검은 기사의 생명이라는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돈황은 너무 쉽게 검을 넘겨줬다.

“휴우. 이 검으론 안 되겠고. 아슈라! 미스릴 소드 좀 줘볼래?”

“여기요!”

미스릴 소드 대신 구울 한 마리의 시체를 찢어 스켈레톤에게 한쪽 다리를 몽둥이 삼아 휘두르게 한 아슈라는 여유 있게 검을 건네주고 다시 뛰어갔다.

이 검이라면 적어도 죽게 만들지는 않겠지.

“자, 받아라.”

“뭐 이런 걸 다…….”

“주는 게 아니고 빌려주는 거다. 너도 나가서 싸워!”

“예엣? 저보고 지금 이 검을 들고 싸우란 말이에요?”

미스릴 소드를 아슈라에게 넘겨받아 전해주자 진짜로 주는 거라 생각했는지 돈황은 매우 강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 기사가 검을 들고 싸우는 게 뭐 잘못된 일인가?”

“하지만 전 검을 휘둘러 본 적이 딱 한 번밖에 없다고요! 저 무서운 놈들 앞에 섰다간 꼼짝없이 죽을 거예요!”

“지금까진 저 무서운 놈들을 물대포로 잘도 쏴죽였잖아? 계속 우릴 따라다니고 싶으면 어서 나가!”

“하, 하지만 구울의 손톱에는 독도 있다고 들었는데…….”

돈황은 내 강제에 의해서 물대포 기계를 벗으면서도 끝없이 구시렁댔다.

독이 문제야? 그럼 여기 딱 좋은 방법이 있지!

“여길 이렇게 조종하는 건가?”

푸쉬쉬쉬! 돈황에게 빼앗은 물대포의 호스를 돈황에게 맞추고 이리저리 조작해봤다. 몇 개의 버튼을 만지니 시원스럽게 뿜어져가는 물대포.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것이다.

“오, 되는데? 이제 성수로 온몸을 적셨으니까 독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 안 가면 우리가 가고.”

“끄응, 너무하십니다. 형님!”

졸지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린 돈황은 터덜터덜 구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곤 일절의 스킬 사용 없이 달려들었다.

이런, 검을 써본 적 없으니 스킬 또한 써본 적이 없겠군.

“으아아아아악!!!”

무슨 미친놈처럼 검을 하늘 위로 높게 치켜든 채 달려가던 돈황은 마지막엔 눈까지 질끈 감으며 검을 휘둘렀다.

“끄워어!”

“응?”

두 팔을 교차해서 방어하는 구울. 하지만 미스릴 THEM는 두 팔의 교차점을 그대로 잘라버림으로써 구울을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양팔이 없는 구울의 마지막 공격 수단은 이빨뿐인데 그것에 당해줄 멍청이는…… 있었군.

“끄으윽!”

치지지직!

팔을 베고 나서도 꽤 시간이 지난 뒤에나 눈을 뜬 돈황은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구울의 모습에 지레 겁먹고 몸을 움츠려버렸다. 덕분에 구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입을 돈황의 어깨에 가져갈 수 있었다.

하나 성수가 잔뜩 묻어 있는 옷에 입이 닿자 큰 데미지를 입었고, 고통에 신음하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 베어버려!”

“응? 으응!”

서걱!

돈황이 아슈라의 외침에 반응해 검을 휘두르자 이번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두부 자르듯 구울의 몸이 잘려버렸다.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돈황. 그리고 곧 자신이 구울을 해치웠음을 깨닫고 폴짝폴짝 뛰며 돌아왔다.

저런 바보. 저러면…….

“크우우우.”

“구울이 또 일어나지.”

“히힉! 사람 살려!”

폴짝거리는 돈황의 발소리에 새로운 구울들이 일어났다.

“귀찮군. 무지한 자들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돈황이 내 옆을 지나가자마자 네 마리의 구울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광역 마법을 사용했다.

파괴력은 있되 이렇다 할 폭발음은 없는 체인 라이트닝. 구울들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와 감전 될 때 난 약간의 소리가 그들이 전멸하는 데까지 난 소리의 전부였다.

“킁, 킁. 이거 무슨 냄새야?”

“그러고 보니 어디서 지독한 마늘 냄새가……?”

“돈황. 너지! 가까이 오지 마!”

마늘을 잔뜩 넣은 성수로 목욕을 한 돈황의 몸에서는 아주 진한 냄새가 풍겨왔다. 절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진한 마늘 냄새가.

흠흠, 그래도 한번 살려 줬으니 난 죄 없다고.

“누, 누나. 아슈라!”

“오지 말라니까!”

“혀, 형님!”

“……좀 떨어져서 걷는 게 좋겠다.”

마늘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아슈라는 미스릴 소드를 돌려받는 것도 나중으로 미뤘다. 물론 냄새 안 나도록 깨끗이 씻어서 돌려주는 조건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치인 돈황은 결국 자포자기 상태로 들어갔다. ‘너희들밖에 없다.’를 외치며 구울들에게 달려가는 돈황.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얼굴을 보니 아주 쬐끔 미안해지기는 한다.

“그래도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줄었네.”

“몬스터들밖에 자길 안 받아주는데 친숙해질 수밖에 없겠죠.”

“…….”

이젠 곧잘 구울들을 베어 넘기는 돈황을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몬스터를 쉽게 쓰러뜨리는 놈이 불쌍해 보이기는 또 처음일세.

“이래서야 실전 연습은커녕 동점심만 늘어나겠다. 돌아갈까?”

“그래. 그 편이 좋을 것 같네.”

“돈황! 이제 마을로 돌아가자. 일단 마을로 돌아가서 씻!고! 다른 곳을 돌아보러 가는 거야. 우린 먼저 갈 테니 넌 따!로! 오도록 해. 마을은 뤼크레스다.”

아슈라는 유독 ‘씻고’란 단어와 ‘따로’란 단어를 강조했다. 하긴, 같이 가려면 근처로 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또 냄새가 진동을 할 거고 씻지 않으면 물속이 아닌 이상 같이 다니기 힘들지.

“나도 같이 가!”

“안 들려! 리턴!”

아슈라는 돈황의 목소리가 아주 또릿또릿하게 들림에도 불구하고 안 들린다고 소리치며 재빨리 리턴 스크롤을 찢었다.

독한 것.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 생각해 주세요.”

아슈라는 무안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슈라……. 독해줘서 고맙다.”

그로부터 다음 사냥을 떠나기까진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룻밤이 지나갔으니까.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옷에 배인 마늘 냄새는 옷을 버림으로써 해결해봤지만 몸에 배인 냄새와 미스릴 소드에 배인 냄새는 쉽게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돈황은 여관방에서 생전 해보지도 않은 빨래와 목욕으로 하룻밤을 꼴딱 지새웠다.

덕분에 언제 끝날지 몰라 마냥 기다려야하는 우리는 모처럼만에 야시장 구경이나 잔뜩 하고 왔다.

“킁, 킁. 이제 좀 괜찮네.”

미스릴 소드드와 돈황의 몸에 대고 코를 킁킁거린 아슈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받아 넣었다. 어제 뼈저리게 겪어봐서인지 돈황의 물대포는 어디론가 치워진 상태였고 새로운 검 한 자루가 허리에 차여있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보군. 자, 그럼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어제는 미스릴 소드 덕에 사냥이 쉬웠던 거라 안전한 곳으로 가서 이 녀석 훈련시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찬성!”

“나도 찬성인데 스트,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응? 뭐가? 가넷의 말을 듣고 주위를 살피니 과연 분위기가 뭔가 평소와 달랐다. 자기들끼리 얘기하면서도 우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우리에 대해 뭔가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누구도 이렇다하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뭐야? 궁금하게시리!

“제가 물어보고 올까요?”

돈황이 물었다. 대답은 당연히!

“아니. 됐어. 차라리 내가 갔다 올게.”

돈황에게 맡기면 아마 이렇게 할 것이다. 다짜고짜 반말로 ‘니들 우리를 보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 라던가 품에서 몇 골드 꺼내면서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알려주면 이거 드릴게요.’라고 말이다. 내가 앓느니 죽지!

“꺄아악!”

아직 난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둘이 얘기하던 여성 유저 둘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이거야 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엔젤 하트다!”

“꺄악! 오빠!!”

“뭐야, 저거였어?”

내가 뭘 잘못했나 당황했다가 별것 아님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라? 근데 왜 저것들은 이리로 와?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어제 못다 한 싸움을 마저 하자는 것은 아닐 테고.

척척척척!

힘차게 발 구르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엔젤 하트. 설마하니 말도 없이 선공하진 않을 테고, 설사 기습한다 해도 피해낼 자신이 있기에 난 뒷짐 지고 서 있었다.

“응?”

그러나 엔젤 하트를 비롯한 호위대(여성으로 이루어진)는 날 지나쳤다. 대신 도착한 곳은 가넷의 앞. 가넷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엔젤 하트 사인방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성녀를 뵈어 영광입니다.”

“성……· 녀? 그게 무슨 소리죠?”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어제 타천사 타브리스가 텔아몬 마을을 습격했을 때의 동영상을 허락도 받지 않고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예? 아, 뭐.”

동영상? 타천사에 관한 동영상, 그리고 가넷이 나올 만한 동영상이라면 자신들의 추한 모습도 같이 나올 텐데? 흠, 조작했군!

“그 동영상으로 인해 타브리스가 당신을 해할 수 없어 도망간 모습이 잡혔습니다. 외모로 보나 자태로 보나 다인은 성녀로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저희가 성녀님을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꺄악, 너무 멋있다!”

“그, 그건…….”

가넷이 난감한 표정으로 내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오호라, 이제 이것들의 속셈을 알겠군. 타브리스가 가넷을 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가넷을 곁에 두어 자신들의 피해를 줄인다? 거기에 성녀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어 자신들의 주가도 올리고? 어디서 이런 얄팍한 수를!

“웃기는군. 가넷이 성녀라 한들 너희에게 함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어제 그 추태를 보이고?”

“쟨 또 뭐야?”

“누군데 오빠들을 욕하는 거야?”

엔젤 하트에게 한마디 하자 주위에서 수십 마디가 쏟아져 나왔다. 철없는 것들의 말은 무시. 훗, 저런 재잘거림에 흔들릴 레벨은 지나도 한참 지났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리더인 듯한 금발머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제길,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니 조작을 해도 아주 완벽하게 해놨나 보군. 자칫하면 낭패 보겠어.

“한번 보고 싶군. 그 동영상. 얼마나 고쳐놨을 지 아주 궁금해. 아니, 처음부터 앵글을 잘 잡은 건가?”

“이상한 분이군요. 더 할 말 없으시면 그만 가던 길 가주시겠습니까? 저흰 이 레이디께 대답을 들어야 해서요.”

“가넷은 절대 너희와 가지 않는다. 어제 누구누구의 추태를 본 당사자이기도 하니까. 안 그래? 그 정돈 예상하지 않았나?”

“더 떠벌일수록 네가 죽을 횟수는 늘어난다. 몸 사리는 편이 좋을 거야. 명심해.”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다가온 리더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기도 안 차는 협박을 던지고 돌아섰다.

이것들을 지금 확 엎어버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아무 일 없다는 목소리로 다시 묻는 리더의 가증스러움에 역겨움을 느낄 때 돈황이 끼어들어 대신 답했다.

“스트 형님은 가넷 누나의 현재 남자친구다.”

“사실입니까?”

“예……. 맞아요.”

돈황이 바로 옆에서 보고 있는 자리인지라 가넷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현재’ 남자친구라니. 돈황 녀석,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가?

“으흠. 그럼 본인의 뜻도 그러하신 겁니까?”

“네.”

“정히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대신 저희 성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이 초대까지 거절하진 않으시겠죠?”

“알겠습니다. 갈게요.”

‘안 돼!’하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제기랄, 이렇게 초대해서 밥 먹여 놓고 놔주지 않는 건 아주 뻔한 수잖아!

“어쩔 수 없군.”

“어쩔 수 없다뇨? 저흰 그 쪽을 초대한 게 아닌데요? 자꾸 이런저런 생각이 헷갈리시는 걸 보니 정신이 꽤나 산만하신 분인가 봅니다? 하하하!”

“킥킥킥킥!”

일부러 무안을 주려고 작정을 했는지 어제 바닥에 머리박고 떨던 놈은 내 면전에서 비웃음을 흘렸다.

그놈이 웃자 동조하는 팬들.

“그래? 그럼 가넷이 가려 할지 모르겠군? 이미 나와 선약이 된 상태였으니까. 가넷, 혼자 가보겠어?”

“아니, 혼자서라면 나도 싫은데…….”

“그렇다는군. 아쉽지만 잘들 가라고. 자, 우린 사냥이나 가자.”

이 정도면 카운터였다. 놈들은 날 기분 나쁘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중요한 가넷을 놓치게 생겼다. 계속해서 가넷을 재촉하자 엔젤 하트들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노, 농담입니다. 당연히 일행도 같이 초대 한 거죠. 이러지들 마시고 어서 저희 성으로…….”

“싫다. 내가 속이 좁다보니 벌써 기분이 상해버렸거든. 정 아쉬우면 꼭두각시로 세우기 좋은 성녀 하나 새로 찾아보던가. 매스 텔레포트!”

“이봐요, 이봐! 야!”

당황해서 소리치는 싸가지들을 뒤로하고 매스 텔레포트를 이용해 사냥터로 이동해버렸다.

누가 네놈들 장단에 놀아날 줄 알았더냐?

“아, 더워. 여긴 어디야?”

“이글거리는 협곡. 더운 게 탈이긴 하지만 아이스 인챈트만 제대로 걸어준다면 여기만큼 경험치 얻기 쉬운 곳도 없지. 가넷이 물 속성 정령을 다루니까 어렵지 않을 거야. 음?”

설명을 마치고 이제 안으로 진입하려는데 하얀 빛 무리가 생기며 누군가 이동해 오고 있음을 알렸다.

다른 파티인가?

“휴, 다행히 근처로 이동했군요.”

“너흰……!”

엔젤 하트였다. 목적지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따라온 거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넷은 끈질기게 조르고 또 졸랐다.

어떻게 따라 왔는지는 몰라도 엔젤 하트는 용서를 빌며 그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또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했고 난 무시한 채 사냥에 나섰다.

하지만 옆에서 계속 쫑알거리는 놈들 때문에 도저히 사냥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좋다. 가지.”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다.”

“무슨?”

“우리가 성에 들렀다는 소문도 나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소리가 언뜻이라도 들리면 우린 바로 나올 것이며, 엔젤 하트 길드는 약속을 어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갈까요? 리턴!”

“리턴!”

놈들은 성의 파괴만은 막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인지 흔쾌히 승낙하고 우리를 나누어서 데려갔다.

얼마동안 생활했던 곳이기에 꽤 익숙한 오마이스 영지.

그들은 우리에게 방을 하나씩 내주고 목욕이라도 하면서 노곤한 몸의 피로를 회복하라고 권했다.

쳇, 역시나 내 방은 별로 좋지 않은 곳이군.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앉으시지요. 먼저 바쁘신 와중에도 저희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저희 소개를 하자면 전 릭, 이쪽 격투가는 환. 사제는 실런, 궁수는 에드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시작한 말은 자기소개와 자화자찬, 그 다음 뻔하디뻔한 인사치레와 가넷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사탕발림. 뭐, 그런 것으로 쭉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나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하룻밤 묵고 가십시오.’ 아마 내일도, 모레도 저 마지막 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 결국은 와버렸군.”

“그러게.”

“이왕 이렇게 된 거, 조심해서 술수에 걸려들지 않는 수밖에.”

“그래.”

저들의 목적은 가넷이 이 성안에 있는 그 자체였기 때문에 식사 후 우리의 행동에 아무런 제약도 걸지 않았다. 어차피 제약을 걸어봤자 열 받으면 스크롤로 빠져나가 버릴 수 있지만.

아무튼 덕분에 옛날을 떠올리며 산책을 하다가 가넷을 만났다. 가넷도 산책 겸 조용한 곳을 찾고 있었고 난 성의 뒤쪽으로 뚫린 발코니로 안내했다.

몇 마디 나눈 후,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아, 맞다. 저번에 돈황한테 했던 말 있잖아. 그거 어떻게 알았어?”

“돈황한테? 아, 네 신상정보? 그거 아슈라가 귓속말로 계속 알려줬어. 난 들은 대로 입만 움직인 거지.”

“그랬구나. 난 또……놀랐지.”

다시 둘 다 침묵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화젯거리를 찾았지만 그새 머리가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잘 찾을 수가 없었다.

“아참, 아까 엔젤 하트가 우릴 따라왔었잖아? 대체 어떤 방법으로 찾아온 걸까?”

“너, 몰라? 저번에 추적 스크롤 생겼잖아. 스크롤에 쫓아갈 사람 아이디를 적고 스크롤을 찢으면 그 사람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거. 무조건 그 사람 옆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있는 지역으로만 가는 거라서 넓은 지역의 경우 추적 스크롤을 사용하고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던데. 좀전과 같은 화산 지역에서는 용암 위로, 해변가에서는 바다 위로 떨어질 위험도 있고.”

“그럼 돈황도 그걸로 찾아왔던 거겠군.”

이런 정보도 모르다니, 내가 한동안 헛짓을 많이 하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또 화젯거리가 떨어져버렸네. 말이 끊기면 안 돼. 아무거나 말하자. 아무거나…….

“돈황을 뿌리쳤잖아? 누구……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사랑이란 감정을 알지 못하는 걸. 아니, 정말 사랑이란 감정이 실제하긴 하는지 궁금해.”

직감적으로 뭔가, 사연 같은 게 있음을 느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난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둘 있었어. 한번은 중학교 때, 한 번은 고등학교 때.”

중학교, 고등학교. 그 중에 나는 없구나……. 킥, 쓸데없는 기대였나?

“그런데 두 번 다 졸업하고 나서 떠나보냈어.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댔나? 정말 그렇더라고.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씩이나……. 그렇게 두 번의 이별을 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정말 그 둘을 사랑하긴 한 걸까, 사랑이란 게 약간의 물리적 거리 때문에 이렇게 쉽게 사그라져 버릴 수 있나. 한참 쉽게 만날 수 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땐 어디에 있든 사랑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조금 멀어졌다고 이렇게 빨리 가슴이 식어버릴 수 있나…….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난 사랑을 한 적이 없다.’야. 사랑이 이렇게 간사한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럼 십년을 하루같이 한 사람만을 바라본 기다림은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뭐?”

“그냥. 네가 물리적 거리에 쉽게 굴복한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기에. 그렇다면 십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어 이어가는 기다림은 너에게 사랑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글쎄…….”

소연은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가는 감정의 절제가 될 것 같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뒤로 오 분쯤 후에야 다시 말문이 트였지만 그저 농담에 가까운, 가벼운 말들뿐이었다. 그렇게 우린 밤이 깊어갈 때까지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을 마냥 바라보다가 각자의 방으로 달아갔다. 언제쯤 가넷과 난 같은 달을 쳐다 볼 수 있을까?

* * *

오기 전에 했던 예상 그대로. 엔젤 하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넷을 자신들의 성에 잡아두려 했다.

자신들이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항상 접속해 있지 못한 점을 이용, 대접해 준 집주인에게 인사 한마디 안 하고 가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부로 나갈 수 없게 했고, 이틀이라는 시간을 붙잡아 두는데 성공했다.

게임에서의 삼일이 현실에서의 하루이다. 타브리스가 인식하고 있는 일주일은 당연히 게임시간.

“이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군. 아직 비코 이후로 대도시는 파괴되지 않았다지만 벌써 중소도시 세 개가 초토화됐다니. 이제 남은 시간이 삼일이지?”

텔아몬은 타브리스가 가넷을 보고 자리를 피했기 때문에 저택과 건물 일부가 부서진 정도에서 그쳤다.

“응. 될 수 있으면 설득시키는 쪽으로 했으면 좋겠지만 이미 너무 많은 희생이 생겼어…….”

다행히 세 개의 중소 도시가 타브리스의 손에 박살나면서 가넷의 생각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아직도 설득했으면 하는 생각이 남아 있긴 하지만 힘으로 쓰러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인 것이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타브리스를 쓰러뜨리는가이지만.

“그런데 콜……로 니스트가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전술, 전략을 잘 짜도 최강으로 불리는 레이지 길드원 오십 명이 달려들어도 못 이겼는데. 그때도 전술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잖아?”

가넷은 콜로니스트란 이름을 입 밖으로 내기 불편한 듯했지만 내가 뭘 알겠냐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인 척 말했다.

“그래도 이겨야 돼. 무조건! 안 그러면 우린 끝이라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가넷에게 아슈라가 열을 내며 소리쳤다. 아슈라에게는 지난 이틀 간 내가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 놓아서 제법 상황 파악 할 줄 알게 되었지.

“응? 삼일 후면 전투 천사들이 소환되어 온 댔잖아? 소환만 되면 상화 끝나는 거 아니야? 어차피 타브리스와 약속한 날짜도 삼일 후까지고. 콜로니스트가 차라리 아예 안 나타나주면 피해 없이 해치울 수 있잖아?”

하지만 이것이 돈황 같은 일반 사람들의 관점이다. 차라리 콜로니스트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라는 것 말이다. 미안하게도 난 이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다.

설사 내가 지게 되어 무차별적 파괴가 시작되고, 전투천사들의 실력이 내 상상을 초월해서 타브리스를 가볍게 때려잡는 일이 있더라도.

타브리스를 상대할 계획은…… 이미 세워 놓았다. 남은 것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가다듬는 일뿐.

“바보야. 루시퍼도 타천사가 되면서 대천사의 힘이 신에 필적할 정도로 변했는데 타브리스라고 뭐 다를 것 같아? 원래 강한 편은 아닌 힘이지만 그래도 타천사가 된 이상 전투 천사 셋이 이길 만큼 약골은 아니라고!”

“그 정돈 거야? 그럼 전투 천사들이 지고 나선 어떻게 해?”

“그야, 아마도 더 강한 천사를 소환하는 의식이 벌어지겠지? 유저들은 그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 타브리스를 버텨내야 할 것이고.”

아슈라는 내가 말해준 그대로, 가넷과 돈황에게 잘도 설명했다.

“하지만 걱정 마. 콜로니스트라면 이기진 못해도 뭔가 할 수는 있을 거야. 그의 강점은 강한 힘이나 전략, 전술 따위가 아니라 임기응변과 잔머리거든.”

“콜로니스트를 잘…… 알아?”

가넷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잘 안다면 잘 안다고 할 수도 있겠지. 모른다면 모르겠고.”

이 말은 해석하기 나름인데 본래의 뜻은 이것이다.

‘내가 안다고 말하고 싶으면 아는 거고 모른다고 말하고 싶으면 모른다.’

아직 스트와 콜로니스트가 서로를 아는 편이 좋은지 모르는 편이 좋은지 이해득실을 따져보지 않아서 뭐라 말 할 수가 없군.

“실은 나만 그쪽에 대해 조금 아는 것뿐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순간적인 판단으론 일단 모르는 편이 좋다, 라는 생각이 우위를 점했다. 콜로니스트에 대해 아는 듯이 말했을 때 가넷의 불안한 듯한 모습이 ‘안다’ 쪽의 큰 감점 요인.

“그나저나 당일까지 여기에 붙잡혀 있어야 하나?”

잠깐 얼굴 비추고 같이 식사만 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엔젤 하트들 때문에 한숨밖에 안 나왔다.

결국은 가넷을 콜로니스트가 실패할 경우 시작되는 무차별 공격에 방패막이로 사용할 모양이군. 그때까진 안 놓아줄 작정이야…….

삼일이란 시간 동안 내가 한 것은 요즘 너무 나태해져 있는 몸을 움직여주는 일이었다.

엔젤하트가 원하는 건 가넷 하나 사라지는 건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기 때문에 아슈라에게 내가 무언가를 고민하는 중이라 방에서 나오지 않고 누굴갈 방에 들이지도 않는다는 거짓말을 하도록 시켜 놓았다.

오마이스 영지를 빠져나와 수도인 폴메르 성으로 간 나는 레이지 길드원들을 상대로 특훈을 했다. 죽여도 상관없고 어떤 방법이든 다 시도해 볼 수 있는 같은 길드의 사람들은 훌륭한 실험도구(?)가 되어 줬고 대 타천사용 기술의 타이밍이 이젠 제법 맞아떨어져 갔다.

유저의 타이밍에 맞추기엔 타브리스의 속도가 너무 빠르지만 그나마 로그 클래스의 움직임에 맞추었으니 시도 할 만은 하겠지.

“정말 괜찮겠어? 이제 천사가 소환되기까지 삼십 분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굳이 가지 않아도 천사들이 다 알아서…….”

“삼십 분이라, 조금은 서둘러야겠군. 부탁한 대로 준비는 다 됐지?”

“그거야 다 준비시켰다만 그거 가지고 되겠어? 검강에, 상급 주문까지 한 칼에 흩어버리는 놈한테 이런 게 통할까?”

“안 되면 되게 하라. 내가 되게 만들 테니까 걱정 말고 타이밍이나 잘 맞추게 해. 알았지? 텔레포트!”

거트 형에게 준비 상황에 대한 확답을 들은 후, 타브리스의 거점이 되어버린 비코 영지로 텔레포트를 감행했다.

성문 바로 앞이 아니라 성 아래에 있는 마을로 이동했는데 마을에는 간혹 난민과 같이 초췌한 NPC들만 보일 뿐, 유저는 흔적조차 발견 할 수 없었다.

처참하군.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복구 작업에도 손을 놓은 것 같은데…….

“타브리스를 때려잡기 전까진 변하지 않겠군. 이래저래 이번 작전이 성공하길 빌어야지.”

고개를 저으며 성으로 올라갔다. 성에 도착하기 150미터 가량 전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나와 타브리스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한 구경꾼인 듯.

“저기 온다!”

“오!”

“쳇, 왜 온 거야?

뒤섞인 소음이 귀를 어지럽혔지만 곧 파견된 레이지 길드원들이 소음을 잠재웠다. 귀찮긴 하지만 저들 중 일부는 혹시나 도움이 될지 모르지.

“넓혀.”

“자자,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레이지 길드원 하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자 재깍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나와 타브리스의 대화를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들이 가까이에 있으면 안 되지.

“타브리스!”

딱히 목소리를 증폭 시키는 무언가를 쓰진 않았지만 황량한 성안 곳곳에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타브리스가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내가 타브리스라는 이름을 큰소리로 세 번째 외칠 때였다.

“이제야 나왔군.”

“네가 콜로니스트인가?”

타브리스는 아주 거만하게 팔짱끼고 날 깔아보며 말했다.

“그렇다.”

“우리……언제 본 적 있던가? 그대와 비슷한 영홍을 가진 자를 보았던 것 같군.”

“가면을 쓰면 알아보겠나?”

“아! 그렇군. 그때 자신이 최강자 중 하나라더니 진짜였어. 나와 대화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그럼 시작해 볼까?”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뭐지?”

“왜 마계로 가지 않지? 지금도 인간계에 널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지만 궁극적 목표인 신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면 마계로 가는 편이 더 나을 텐데?”

“흠흠. 마계로 가는 길을……모른다.”

타브리스는 쪽팔린 듯 팔짱을 풀고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하아, 고작 그런 이유였어? 천계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치나?

“아무튼 간닷!”

“이봐, 이봐! 제길. 윈드 봄버!”

두 주먹 불끈 쥐고 급강하하는 타브리스의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내가 원하는 건 검을 든 타브리스지 주먹을 쥔 타브리스가 아니라고!

퍼엉!

타브리스의 주먹질은 아주 단순했기 때문에 대응하기가 무척 쉬웠다. 물론 빨라서 피하기는 어려웠지만 윈드 봄버를 정확히 타브리스의 주먹에 맞출 수는 있었고 반탄력에 몸이 붕 떠서 날아가긴 했지만 타격은 전혀 없었다.

예측 못한 상황이지만 이것으로 오히려 승률은 높아졌다.

“그 정도론 어림없지. 날 무시하는 거냐? 어서 검을 꺼내라!”

“그렇게나 죽음을 재촉하고 싶다면 들어주지. 오라!”

타브리스가 오른손을 번쩍 들자 성의 어딘가로부터 검이 뽑혀 날아왔다. 매서운 속도로 날아오다가 타브리스의 손에서 멈추는 검.

“이제 만족 했나? 그럼 죽…….”

“뻥이었다.”

“뭐?”

“너한테 했던 말들. 전부 뻥이었단 말이다. 신한테는 코딱지만큼도 관심 없는 내가 어떻게 천사가 소모품이고 하는 것들을 알 수 있겠냐? 다 지어낸 말이지. 넌 그 뻥에 속아 널 창조한 신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이 믿음이 부족한 순딩이 천사야.”

쉽게 머릿속에 정리가 안 되는지 타브리스는 한동안 눈만 깜박거렸다. 그러다가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쥐며 덤벼들었다.

“그럴 리 없어!!!”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걸까? 뻥을 쳤던 상대가 진실을 말해주는데도 타브리스는 애써 부정하려 했다.

저걸 인정하는 순간 타브리스는…… 엿 되는 거지. 그건 그렇고, 왔다!

“공간의 흐름에 따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워프 게이트!”

무식한 파괴력을 믿는 것인지 흥분해서인지, 저놈 자체가 단순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일체의 기교 없이 사선으로 덤벼드는 타브리스와 나 사이에 파란색 타원형의 워프 게이트가 열렸다.

“이까짓 거!”

워프 게이트를 일종의 보호막쯤으로 여긴 듯한 타브리스는 검을 종으로 휘둘러 워프 게이트를 쪼개갔다. 물론 쪼개질 리는 없었다.

“이크!”

워프 게이트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모르되, 만드는 순간부터 마나 공급을 줄여 서서히 크기를 줄여가는 중이라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타브리스의 검은 내 머리에 닿기 전 워프 게이트에 닿았다.

“큭, 뭐지 이건?”

워프 게이트는 일단 닿으면 물건이건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무서운 흡입력으로 빨아들이고 만다. 그 흡입력은 타브리스라 해도 힘으로 이겨 낼 수 없는 것이었고 타브리스와 워프게이트의 힘겨루기는 워프 게이트의 우세 속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크윽, 안 돼!”

점점 작아지는 워프 게이트와 이젠 거의 자루까지 빨려 들어간 검을 보며 타브리스는 절규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몸까지 빨려 들어가 버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됐다!”

칼자루에 이어 손까지 빨려 들어가게 생기자 타브리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검을 놓아버렸다.

완벽하게 빨려 들어가 자취를 감춘 검과 닫혀버린 워프 게이트. 이제 타브리스에게는 검이 없다.

검을 쓰던 자가 검을 잃어버리면 전투력은 반 이하로 뚝 떨어지는 법! 설사 다른 누군가를 죽이고 새 검을 구한다 해도 손에 익지 않으면 본 실력의 70% 정도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 승산이 생겼다.

“내 검을 어떻게 한 것이냐!”

“글쎄?”

능글맞게 웃으며 답하자 타브리스의 얼굴은 그에 비례해 점차 심하게 일그러졌다.

생각해 보니 아쉽군. 팔이라도 같이 빨려 들어간 상태에서 닫혔다면 팔이 잘려져 버렸을 텐데. 천계의 좌표를 모르는 건 더더욱 아쉽고.

“천계의 검은 인간 따위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 세상 어딘가로 보내졌겠지. 이 세상의 어딘가에만 있다면, 검은 내 부름에 응할 것이다. 오라!”

타브리스는 진실을 바로 짚어내며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훗, 하지만 네 검은 이미 여기서 가장 먼 곳에서 쇠사슬과 스톤 엣지로 만든 바위에 의해 봉인되어 있을 거라고.

“그런 믿음과 자부심을 가진 놈이 몇 마디 말에 속아 타락하냐? 아무튼 지금 끝장을 보자. 제 1포 발사!”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선더!”

“하늘을 대신하는…….”

“바이바이. 블링크!”

크게 소리치자 대기하고 있던 레이지, 더 메지션의 마법사들이 인비지빌리티를 풀고 주문을 영창했다. 그러나 도망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오히려 하늘로 솟구치는 타브리스. 구름보다 높게 올라갈 생각인가?

쿠르르릉!

“명중했다!”

그러나 곧바로 떨어진 선어데 다시 추락 할 수밖에 없었다. 맞기 전, 또 날갯짓을 해서 검은 바리어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과연 이번에도 막아낼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하늘을 대신하는…….”

“하늘을…….”

새하얀 빛 때문에 타브리스의 상태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인페르노도 검풍만으로 갈라버린 놈이다.

검이 없다고 해서 절대 얕볼 수는 없는 일. 확인하기 전에 일단 제 2포를 발사했다.

“이놈들이……!”

실패였다. 분명 직격탄으로까지 맞추기는 했는데 놈의 몸, 혹은 바리어의 마법 저항에 많이 약해진 것이다.

“제 3포. 스톤 엣지다!”

“거대한 낙석의 위용, 스톤 엣지!”

“거대한 낙선의…….”

마법이 안 통하면 물리 공격이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스톤 엣지를 사용하자 하늘에서 수도 없이 떨어지는 바윗덩어리들을 피하느라 타브리스는 정신이 없었다.

이거, 테트리스하는 기분이군.

“이런!”

몇 개나 되는 바윗덩어리 날아서 피한 타브리스는 피할 공간을 주지 않고 떨어지는 세 개의 바위에 결국 피할 공간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포기 하지 않았다.

“하앗!”

검이 있었다면 조각을 내버렸겠지만 그렇지 못한 지금, 그는 지금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주먹으로 바위 깨기를 시도했다.

쾅!

성공이었다. 방 하나만한 바위가 십여 개로 쪼개지며 떨어져 내린 것이다. 하지만 기뻐하기엔 아직 일렀다.

“크헉! 제기……!”

부서진 바위의 파편이 시야를 가리는 동안 새로운 바위가 그를 찍어 내린 것이다.

그가 바위에 찍힌 채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은 신이 나서 환호했다. 수십 개의 스톤 엣지. 이쯤 되면 메테오도 부럽지 않다.

“기사들, 준비하라!”

내 명령에 마법사들은 물러나고 기사들이 스톤 엣지로 소환한 바위의 위로 뛰어 올라갔다. 이유는 혹시나 타브리스가 죽지 않고 바위를 깨부수며 걸어 나올 시 목을 치기 위해서이다.

“이벤트 종료 공지가 뜨기 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라!”

이벤트 공지가 뜨지 않은 걸로 봐선 타브리스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인데 바위 밑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추정해 볼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로군. 하나는 바위에 다리가 깔렸다든지 갈비뼈가 나갔다든지 하는 부상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고, 나머지 하나는 바위틈에서 체력을 회복하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최악의 경우!

후자일 시엔 우린 체력이 회복 될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다. 잘못 바위를 들춰냈다간 도망갈 틈을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또, 한 바위를 들춰냈는데 반대편에서 바위를 깨고 도망가면 그만한 낭패가 없다.

“아! 그 수가 있었군. 모두 바위를 주위로 울타리를 쌓아라. 정령을 이용해 흙을 만들든 나무판자를 박든 서둘러! 천사들이 소환되기 전에 우리 손으로 해결 본다!”

예정에도 없던 내 말 때문에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구경나온 사람들 중 정령술사를 차출하고 여기저기 인근 길드에 연락을 취해 정령술사를 불러왔다. 이십여 명의 정령술사를 모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십 분 남짓. 이제 천사가 소환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라, 서둘러!”

하급 정령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상급을 부리는 사람도 몇 있은 덕에 바위들의 주위로 벽을 세우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아슬아슬하겠군.

“저 안에 물은 반쯤 채워라. 단, 아쿠아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번 일도 정령들을 이용해서 이루어졌다.

아쿠아를 사용하면 기사들이 저 위로 올라갈 수 없으니 그건 안 되지.

“마법사들은 앞으로! 셋을 세면 일제히 체인 라이트닝이다. 하나, 둘, 셋! 무지한 자들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무지한 자들에게 심판을……!”

“무지한 자들에게……!”

체인 라이트닝을 사용할 공간이 적었기 때문에 아까처럼 많은 수의 마법사가 동원되지는 못했지만 열 명도 넘는 숫자이니 어지간한 보스들은 이것 한 방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었다.

“크아아악!”

콰지직!

마법 저항이 뛰어난 건 바이러였던 것일까? 아니면 바위 밑으로 반쯤 채워진 물 때문에 숨이 막혀서일까?

결국 참지 못한 타브리스는 주먹을 마구 휘둘러 바위들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했다.

“저기다. 기사들은 준비하라!”

“천사 소환이다!”

주위가 조금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을 때 누군가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수도 쪽에서 굵은 빛줄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운영자들이 예고했던 천사 소환인가?

“엇, 도망친다!”

이번엔 반대편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복부를 비롯한 몸 이곳저곳에서 피를 흘리며 힘들게 날갯짓하고 있는 타브리스가 보였다.

제길, 지키던 놈들도 한눈팔았군!

“도망가지 못하게 견제하라!”

“검강!”

“엑젝터, 플레임 사이드!"

사방에서 공격이 쇄도하자 타브리스는 다친 몸을 추슬러 다시 한 번 날갯짓을 했다.

시전자가 다쳤어도 그 견고함만은 변하지 않는 바리어. 저것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쉽게 승부를 가리기 힘들 것 같았다.

“마법으로는 안 되니 물리적인 공격을 해야 한다는 소린데……. 저기까지 점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

내 기억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 해도 지금 상황으로선 아무것도 못할 테지만.

“결국 천사들의 손을 빌리게 되겠군. 공격이 먹히진 않아도 움직이지 못하게 계속 잡아두고 있으니.”

공격해봐야 타브리스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한시라도 공격을 멈추면 타브리스가 달아날 까봐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공격을 잇고 있었다.

“천사다!”

사람들의 공격이 멈춘 건 남서쪽 하늘에서 하얀 날개의 천사 셋이 날아오는 걸 발견한 후부터였다. 그 덕에 타브리스에게도 도망갈 틈이 생겼지만 타브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부상 입은 몸으로 도망가 봐야 힘이 펄펄 넘치는 저들에게 쉽게 따라잡힐 걸 알기 때문일까?

“타브리스. 맞나?”

“그렇다. 너흰 날 잡으러 온 자들인가?”

“아니, 널 죽이러 왔다. 주살하라!”

말에는 재주 없는 전투천사라는 것인지 그들은 타브리스의 말을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갔다.

“으득, 쉽게 죽어주진 않는다!”

“모두 대피하라!”

타브리스를 포위하기 위해 두 명의 전투 천사가 양 옆으로 이동하자 타브리스는 가만히 서있는 정면의 전투천사에게 달려들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싸움이 시작 될 것 같자 몇몇이 나서서 구경꾼 및 길드원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피 시기는 매우 적절했다.

“크아아압!”

콰앙!

주먹과 검이 격돌할 때 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며 그 충격파가 반경 십 미터를 휩쓸었다. 다행히 재빠른 대피 덕분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이들이 물러난 후에 복구를 위해서 여인궁은 꽤나 많은 돈을 퍼부어야 할 듯싶었다.

격돌 후, 손해를 본 건 오히려 검을 든 전투 천사 쪽이었다.

“나를 죽이러 왔다기에 얼마나 대단한가했더니 실망이군.”

“큭, 건방지군. 쳐라!”

이번엔 세 명의 전투 천사 모두가 타브리스에게 덤벼들었다.

제자리에서 크게 날갯짓을 해 위로 솟구치는 타브리스. 세 명의 전투천사도 뒤따라 올라갔다. 그 다음 전투 장면은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궁수 등 먼 곳을 살피는 스킬이 있는 유저들이 간신히 알아보고 중계를 해줬지만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울 따름이었다. 격돌이 있은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중계하던 유저가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저, 저, 저! 떨어진다!!”

쿠웅!

“쿨럭!”

한껏 어울려 싸우던 천사들 중 전투천사 한 명이 먼저 바닥으로 추락했다. 재빨리 프리스트들이 달려가 회복 주문을 퍼부어봤지만 결국 사망. 이제 이대일의 싸움이 되었다.

“내려온다!”

전투 천사 하나가 죽고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타브리스를 선두로 세 녀석들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제길, 무슨 전투기끼리의 싸움 같군. 끼어들 틈이 없어.”

타브리스는 땅에 내리꽂힐 듯 말듯 할 때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전투천사 따돌리기를 시도했다.

타브리스보다 비교적 나는 속도가 느린 전투천사들은 다행히 미리 방향 틀기를 시도했지만 한 명은 바닥을 구르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역시 이들만으론 무리인가? 그래도 부상당해서 기대해봤건만…….”

“허억, 허억.”

혼자 남은 전투천사는 차마 혼자서 덤비지 못하고 타브리스와 대치 상태를 유지한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나머지 전투천사를 기다렸다.

조용해진 상황, 그 속에서 타브리스도 많이 지쳐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저 둘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서지 않는군. 모처럼 좋은 일 한번 해봐?

“타브리스가 이겨버리면 나 역시 곤란해지니까 할 수 없지. 새처럼 하늘로, 플라이!”

바닥을 구른 전투천사가 몸을 추스르고 날갯짓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늘로 올라가 자리 잡았다.

“너도, 헉! 덤빌 텐가?”

여전히 숨을 몰아쉬는 타브리스의 발밑으로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피들이 고여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쩝, 밑에 저 피 좀 받아놓을 걸 그랬나?

타천사의 피.

재생력이 뛰어나 특제 포션의 재표가 되는 트롤의 피나 마력이 넘쳐서 마법 촉매로 비싸게 팔리는 드래곤의 피처럼 뭔가 특별한 효능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덤벼라!”

“사양하지 않고 가지. 이거나 먹어라!”

“페더 애로우!”

허리춤에서 단검 몇 개를 집어던지자 타브리스는 날개 깃털을 날려 응수해왔다.

단검들을 가볍게 밀쳐내고 내 전신으로 쇄도해 오는 깃털들.

“블링크!”

깃털을 피해서 이동한 곳은 타브리스의 뒤였다.

이번에도 다 들리도록 ‘먹어라!’를 외치며 단검을 던지자 상처 때문인지 반응이 조금 늦은 타브리스는 날개로 단검을 쳐내고 다시 페더 애로우를 사용했다.

“블링크!”

또다시 시야에서 사라지자 타브리스는 재빨리 뒤로 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 트릭. 내가 실제 이동한 곳은 타브리스의 정면이다.

“큭!”

“브링…….”

소매에서 재빨리 드워프제 단도를 꺼내 목을 찔렀지만 타브리스가 뒤늦게 알아채고 목을 움직인 탓에 목에 한줄기 혈선을 만들고 단도는 어깨에 박혔다.

실패했음을 깨닫고 블링크를 사용하려 했지만 타브리스의 날개가 몸을 강타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거대한 쇠망치로 후려친 듯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추락하고 있다는 중력감!

그리고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눈을 떴을 땐 상당한 두통이 일었다.

“죽었나 보군. 제길, 폭렙도 가능했었는데. 음……. 다시 가? 에이, 관두자. 어깻죽지에 단도가 박혀서 이젠 한쪽 팔도 못 쓰게 됐을 텐데 그거 하나 처리를 못하겠어.”

깨어난 곳이 원래대로 비코 영지 내였다면 다시 가봤겠지만 비코 영지가 파괴되어서인지 내가 깨어난 곳은 인근 다른 마을의 병원이었다. 대충 두통이 가시고 나서 가넷에게나 가보려는데 마침 공지가 떴다.

[타천사 타브리스 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살아남은 마지막 전투천사가 천계에 돌아가 보고를 할 것입니다. 타브리스를 해치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신 콜로니스트님에게는 ‘인간계의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부여됩니다.]

마지막 전투 천사? 그 상태에서도 타브리스가 한 놈은 죽였나 보군. 그런데 인간계의 영웅이라? 나쁘진 않은데?

병주고 약준 격인 내가 이런 칭호를 받아도…… 되지. 아무렴.

[운영자가 당신을 소환했습니다. 응하시겠습니까?]

또다시 얻게 될 마나 소비 1% 감소 효과에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운영자 소환? 설마하니 이미 끝난 타브리스 건을 문제 삼으려는 건 아닐 테고? 마인 때문인가?

“승낙.”

텔레포트할 때와 다름없는 빛이 날 운영자에게로 데리고 갔다. 빛에 가려진 시야가 확보되고 확인하니 날 소환한 운영자는 제롬. 오랜만에 보니 꽤 반가웠다.

“하핫,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방금 전 공지는 보셨죠? 수식어가 추가되신 거, 다른 운영자들이 원인 제공자가 해결했으니 수식어 주지 말자고 하는 거 제가 우겨서 수식어 넣어 드린 것 아닙니까. 멋진 걸로 골라서 말입니다. 핫핫핫핫!”

어색한 웃음에 말이 많은 것까지. 분명 할 말이 있었다.

“……부탁 할 거라도 있습니까?”

“크흠,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이번 타천사 이벤트가 예정되었던 게 아니란 건 잘 아실 테고……. 아,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폭주하도록 설정되어 있던 놈이니까요. 시기가 너무 빨랐고 예상보다 분노가 커서 너무 강해져버렸던 것뿐입니다.”

분노에 비례해서 타천사의 힘도 강해진다는, 뭐 그런 설정이었나 보다. 그렇다면 내가 뻥이라고 해서 흔들린 마음이 조금은 힘을 약화시킨 게 되려나?

“아무튼 그래서 한 삼 일 만에 대천사 둘 정도를 소환시켜서 상황을 종결시키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유저들이 말로 일주일간이나 시간을 벌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또 회의가 벌어졌죠. 그 결과 나온 답이 ‘일단 칠일 만에 전투 천사 셋을 소환시키고 전멸 당하면 또 삼일 만에 대천사들을 소환시키자.’였죠. 물론 보석에 담긴 힘을 제물로 삼는다는 그런 식의 설정으로 패널티를 부과하면서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전투천사 셋한테 타브리스가 죽어버린 겁니다.”

“그래서요? 어차피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벤트이니 운영자들은 별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 그게 말이죠. ‘요즘 유저들의 평균 레벨이 너무 올라가는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평균 레벨을 낮추고 느긋하게 새 맵 추가 작업을 해보자!’는 게 운영자들 생각이었거든요.”

“새 맵 추가 작업? 신대륙이라도 나오는 겁니까?”

“앗, 제가 그런 말을 했나요?”

“분명히 했습니다.”

“비, 비밀인데……. 콜로니스트님!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저 이번에도 사고 치면 진짜 잘려요!”

얼마나 절박했는지, 제롬은 내 팔에 매달리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하긴, 제롬이 사고를 많이 치긴 했지. 나한테 걸려든 것만 벌써 몇 번이야?

“알겠습니다. 하던 얘기나 마저 하죠.”

“지, 진짜죠? 나중에 딴말하시는 거 아니죠?”

제롬, 정말 속도만 살았…… 구나.

어찌 보면 운영자이면서도 참 기구한 인생이란 말이야? 상사한테 치여, 유저한테 치여. 이거야 축구공이 따로 없구만.

“정말 다른 사람한테 말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아, 네. 그랬는데 타브리스가 별 피해도 못 입히고 죽어버려서 새로운 이벤트가 필요해졌다. 이거죠. 그래서 말인데 콜로니스트님, 마인 이벤트를 서둘러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결론은 나보고 유저들 좀 죽여줘라. 뭐, 그런 건가?

올해 안으로만 해주면 된다더니 갑자기 급해들 지셨군. 후후.

이렇게 낮추고 나오면 어떻게 되지 알면서 매번 되풀이하는 제롬도 참 신기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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