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천사 타브리스
짜악!
여러 가지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나 자신의 따귀를 힘껏 때리고 가면을 꾹 눌러썼다.
아슈라에게 미리 연락을 해서 가넷과 함께 만날 약속을 잡아 놨다.
이번에는 감정 격해지지 말자. 이번에 들키면 정말 끝장이다. 몇 번 되새겨 보고 힘껏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아, 스트 형!”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베셀 외곽의 풍차 앞에 도착하자 아슈라가 반갑게 날 맞이했다.
그런데, 혼자뿐이잖아?
“누나는 지금 오고 있다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도착할 거예요. 아, 저기 오네요. 그런데…….”
“아슈라, 쟤 좀 어떻게 해봐!”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가넷이 언덕을 넘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쟤라니?
“찐득이가 달라붙은 것 같네요. 저번에 말했죠? 돈황이라고. 본 프리즌!”
아슈라는 본월을 만들 때보다 배 이상 많은 숫자의 뼈다귀들을 던졌고 가넷은 익숙한 듯 그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가넷의 머리 위를 지나간 뼈다귀들이 당도한 곳은 가넷의 뒤를 쫓던 허약한 남자의 눈앞.
“으힉!!”
깜짝 놀란 남자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수많은 뼈들은 그의 몸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않고 몸 주위에 새장 같은 감옥을 만들어 버렸다.
잠시 후, 아무런 충격이 느껴지지 않자 눈을 뜨는 사내.
“에헤헤헤. 처남! 야박하게 왜 이러시나.”
“누가 네 처남이야!”
꿈틀!
‘처남’이란 소리에 절로 이마에 내 천(川)자가 생겨났다.
저 놈이 가넷을 스토킹한다는 그놈인가? 후후, 너 잘 걸렸다!
“쑥스러워할 것 없다니까!”
“흥! 우린 갈 테니까 넌 혼자 거기서 헛소리나 실컷 해라.”
“이 정도론 날 가둘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왜 이러실까. 알렌, 알렉. 날 가두고 있는 걸 부숴라!”
서걱!
놈의 말과 함께 뒤에서 나타난 기사 둘이 본 프리즌을 부수고 놈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언덕 뒤에 있어서 못 봤나 보군. 실력은 대충 검기 급?
“놀랐잖아! 뼈를 베면 벤다고 말을 해야지.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죄송합니다. 마스터.”
자기가 부수라고 해놓고서 부순다는 말을 안 했다고 소리 지르는 놈에게 어이없어 하다가 두 기사의 대답에 이상한 점을 느꼈다.
마스터라니, 그렇다면 둘 다 NPC? 검기 급 이상의 NPC라면 대체 얼마를 줘야 살 수 있는 거야?
“저 검기 급 기사들이 NPC라고?”
“말했잖아요. 재벌가의 도련님이라 현금으로 게임머니를 왕창 샀다고. 캐릭터 레벨까지 손대 달라고 돈 싸 짊어지고 회사로 찾아갔다가 퇴짜 맞았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니 알 만하죠?”
이렇게 보고 들은 얘기를 종합한 결과 딱 한 가지 답이 나왔다.
“물질 만능 주의에 빠진 온실속 화초로군.”
“저언 애는 내버려두고 우린 이만 가자.”
저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동안 우리 곁으로 다가온 가넷은 나와 아슈라의 한 팔씩을 잡고 딴 곳으로 갈 것을 재촉했다.
“기다려, 가넷!”
“이게 봐주니까 맨날 반말이야! 내가 네 친구야? 친구냐고!”
스토커의 외침에 발끈한 가넷이 뒤돌아서서 소리쳤다.
가만, 저건 또 무슨 소리야? 그렇다면 저 놈이 연하?
“그건 아니지만…… 요. 그나저나 그놈은 누구야…… 요?”
놈은 가넷이 째려보는 것을 의식해서 뒤늦게 존댓말을 붙였다.
보아하니 평소에 명령만 하고 살아온 놈 같은데, 웃기지도 않는군.
“내 남자친구다. 어쩔래?”
“뭐라고…… 요!”
날 남자친구라고 거짓 소개한 가넷은 살짝 몸을 틀어 손가락으로 ‘한번만’이라는 표시를 보내왔다.
이런 거짓말이야 백 번, 천 번이라도 환영이지!
“네가 우.리. 가넷을 쫓아다닌다는 그 녀석이냐? 이름이…….”
“돈황이요, 돈황.”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자 아슈라가 잽싸게 다가와 알려줬다.
“그래. 누런 돼지.”
“뭐, 뭐? 우리? 누런 돼지?”
“돼지 돈(豚)에 누를 황(黃). 맞잖아.”
먼저 가볍게 말장난으로 신경을 자극했다.
쯧쯧, 그러게 누가 아이디를 그딴 식으로 지으래?
“돈황은 그런 뜻이 아니라 돈이 많다는…….”
“그럼, 전황이라고 짓던가. 금황도 있고. 안 그래?”
“……!”
“머리가 비었구만. 그런 놈이 어디서 감히 우.리. 가넷을 넘봐?”
“이, 이……! 그래도 너한테는 지지 않는다! 알렌! 알렉! 저놈을 죽여!”
누런 돼지는 말로 안 되니까 이번엔 힘으로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후후, 이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지.
“그야말로 정당방위가 성립되었다. 스톤 오브 월, 더블!”
놈이 NPC들에게 공격 명력을 내렸으니 난 자동적으로 반격을 가해 놈은 물론 NPC들을 죽여도 되는 정당방위 상태로 전환된다. 굳이 더블 스펠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하압!”
콰앙!
사고가 단순한 NPC답게 검기를 끌어올려 정면으로 부딪혀왔다. 박살난 돌조각들은 사방으로 비산했고 NPC들은 파편이 튀어 박힌 몸도 돌보지 않고 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식한 것들. 대지에 작렬하는 불꽃의 분노, 플레임 스원! 내려치는 거신의 해머, 자이언트 윈드 해머!”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작렬하고 거대한 바람의 망치가 땅을 내리친다.
이 두 가지 마법이 한 번에 사용되는 바람의 망치는 불꽃으로 뚜렷한 형상을 드러내게 되고, 떨어지는 속도와 파괴력은 더욱 상승한다!
두 NPC들에게 떨어진 마법은 NPC들을 전멸시키는 것은 물론 일정 범위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물론 약간 거리를 벌렸기 때문에 돈황이란 놈에게는 충격파 정도로만 타격을 줬다. 그것만으로도 상당량의 HP가 깎여나간 듯했지만.
“형, 죽이지는 마요.”
어떤 공격으로 마무리를 지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아슈라가 내 팔을 잡고 말렸다.
허공에 거대한 돌을 소환하는 스톤 엣지와 자이언트 윈드 해머를 결합해서 압사시켜 버릴까 했는데 아깝군.
“알았어. 이제 NPC도 없어서 못 쫓아올 테니 이만 가자.”
“똑똑히 봤지? 또 따라오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놔둘 거야!”
가넷은 돈황을 향해 소리치고 재빨리 뒤따라왔다. 그리고 보란 듯이 내 팔짱을 끼고 돈황의 시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갑자기 그런 부탁을 해서 정말 미안해.”
더 이상 돈황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가넷은 팔짱을 풀고 두 손을 모아서 내게 용서를 구했다.
“괜찮아. 아슈라에게 대충 사정 설명을 들었는걸. 그런데 왜 마지막에 말린 거야?”
“그게 아빠 회사가 걔네 집안 쪽에 도움을 조금 받고 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조심하는 거죠.”
부모님 회사와 관련이 있다니 내가 끼어들 수 있을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쳇, 귀찮게 됐군. 그래도 스토킹 할 정도로 가넷을 좋아한다니 어지간한 일로 보복하진 않겠지.
“흐음, 귀찮겠군. 그래도 이렇게 따끔한 맛을 보여줬으니 당분간 귀찮게 굴진 않겠지. 더 확실하게 놈이 오지 못할 만한 곳으로 사냥 갈까? 그 돈황이란 녀석 레벨이 몇이야?”
“레벨은 얼마 안 돼요. 레벨 높은 용병을 구입해 써서 그렇지. 본인 레벨은 3,40 정도 될 걸요?”
“그럼 걱정할 것 없겠군. 어디가 좋을까?”
걱정거리도 처리했겠다, 홀가분하게 원래의 목표인 사냥을 가기로 했다. 문제는 사냥터, 적당히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곳이 어디가 있으려나?
“빛의 신전! 나 거기 가보고 싶어. 거기가면 진짜 천사들을 볼 수 있다던데……. 비록 몬스터지만.”
“하지만 누나, 거긴 몬스터가 뭉쳐 나와서 힘들다던……. 아! 쿤이랑 크루드 형 부르면 되겠다. 스트 형이 앞장서서 천천히 들어가면 충분하지 않겠어? 정 안 되면 스트 형 등 떠밀고 도망치면 되고. 킥킥!”
“뭐, 그러면 되겠네. 그런데 나보다는 HP 많은 크루드 등을 떠밀어야 정상 아냐? 쳇!”
내 농담을 마지막으로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슈라는 크루드와 쿤에게 연락을 취했고, 가넷은 빛의 신전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잠시 접속을 끊고 나갔다.
그리고 난 정보 길드로 가 빛의 신전으로 이동하는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샀다.
“이야, 스트! 오랜만이다.”
“가넷 누나!”
마침 크루드와 쿤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뭉그적거리던 중이었기에 금세 우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왔다.
모두가 모으지 가넷이 홈페이지에서 온 정보를 말했다.
“빛의 신전. 말 그대로 ‘신전’이야. 주로 사제와 성기사, 몽크들이 나오고 맨 마지막에는 ‘천사’가 나온대. 속성은 당연히 빛. 사제나 몽크 같은 경우에는 회복 주문을 쓸 수 있다고 하니까 우선적으로 죽여야 할 것 같아. 드랍하는 아이템도 당연히 빛 속성이 붙은 무기와 방어구들. 그리고 빛 속성의 마법서야. 언데드에게 어둠 속성의 마법서가 나오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 것 같아. 질문 있는 사람?”
“천사까지 있다면……. 그럼 신은 안 나온대냐?”
“모르지. 특정 조건을 충족시키면 나올지도. 하지만 아직까지 신을 봤다는 사람은 없어. 더 질문 없지? 그럼 출발이다!”
“매스 텔레포트!”
우리는 모여 앉은 그대로 빛과 함께 이동했다.
빛의 신전이라, 얼마나 휘황찬란한 곳인지 볼까!
* * *
“우와!”
가장 먼저 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동굴 안에 있는 던전 같은 개념인지 앞뒤를 제외한 모든 곳이 돌로 뒤덮여있었고 전방에는 하얀색의, 거기다 자체적으로 은은하게 빛을 내는 돌로 만들어진 신전 입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까. 대리석도 아니고 그렇다고 은도 아니고, 대체 뭘로 만든 거지?
“신기하다!”
뒤따라 가넷, 아슈라도 소리쳤다. 아무래도 현실에는 없는 돌로 만든 것 같은데 운영자에게 물어보면 보나마나 신의 축복을 받은 어쩌고 하겠지?
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구경은 이쯤하고 들어가 볼까?”
“어? 저기 사람이 나와요.”
아슈라가 가리킨 신전의 입구에서는 정말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음? 지금 오신 파티인가요?”
“네, 그런데요.”
“천사를 잡기 위해 오신 거라면 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저희가 막 잡고 나왔거든요. 오면서 길을 싹 뚫어놨으니 간혹 일찍 리젠 된 놈들만 잡으시면 될 겁니다. 그럼 저흰 이만.”
꽤 매너 플레이 하는 사람인지 친절하게 상황 설명을 해주고 사라졌다.
역시나 그랬군. 하지만 우린 천사를 잡기 위해서라기보단 일반 몬스터를 잡으러 왔는데. 곤란하게 됐어.
“몬스터가 별로 없다는데?”
“그래도 어떻게 해.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까지 사서 왔는데 본전은 뽑고 가야지. 들어가자.”
레벨을 위해서라면 돈을 조금 더 들여서라도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옳겠지만 다들 레벨 업에 대해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았는지 재밌다는 표정으로 신전을 향했다.
신전 안은 앞서간 파티의 말대로 썰렁했다.
간간이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회색 시체들도 보일 정도였으니 리젠까지 멀었다는 건 말해봐야 입 아픈 일이었고 2천 3백 미터 일방통행인 길에서 일행은 사냥이 아니라 소풍 온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이야,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진짜 정교하다.”
“누나, 누나, 여기!”
“아주 신들이 나셨고만. 응?”
신경을 쏟아야 할 몬스터도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자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걷는데 갑자기 길이 두 개로 보였다. 내 눈이 이상한가 싶어 비비고 다시 쳐다봤지만 여전했다.
“갈림길?”
“급하게 보느라 홈페이지에서 내부 지도까지는 확인 못 했는데.”
“뭐, 어때. 몬스터도 얼마 없다니까 아무 곳이나 가보면 되는 거지. 가봐서 길이 아니면 돌아 나오면 되는 거 아니겠어? 어차피 천사가 아니라 일반 몬스터를 잡으러 온 거잖아.”
가넷이 곤란해 하는 거 같아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누가 뭐랬냐? 왜 괜히 오버하고 난리야.”
“그러게, 삼촌. 히히!”
크루드가 음흉한 눈으로 정곡을 찌르자 쿤이 덩달아서 맞장구쳤다. 이, 이것들이?!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크흠! 일단 왼쪽부터 가자.”
무안함을 무마시키려 앞장서 나가자 크루드, 쿤, 아슈라가 키득거리며 뒤따라왔다.
몇 분간을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결과 녀석들의 입을 막을 성기사 셋이 나타났다.
“성역에 발을 들여 놓은 자, 살아나갈 생각은 버려라!”
“이봐, 발을 들여놓은 건 그쪽도 마찬가지라고.”
일제히 외치는 성기사들에게 대꾸를 해봤지만 프로그래밍 된 말인지 반응이 없었다.
쳇, 재미없게.
“난 하나만 맡을 거다! 차지 볼트, 더블!”
“에엑? 야!”
심술이 가득 담긴 말을 내뱉고 두 개의 전격의 구를 날려 코앞에서 부딪히게 만듦으로써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성기사라고 해서 신의 금속으로 된 갑옷을 입고 어쩌고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철제 갑옷, 검에는 전류가 아주 자알 통했고 멈칫하는 사이에 원조격인 더블 파이어 볼을 날렸다.
“크읍!”
찌릿찌릿한 전류 때문에 몸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을 대 코앞에서 파이어볼이 터지자 세 명의 성기사는 속절없이 뒷걸음질 쳤고 난 그들의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뒤로 돌아갔다.
“하이딩!”
파박!
그들의 등 뒤에서 점프해 둘의 옆구리를 찼다. 불시의 기습이라 둘은 비틀대며 간격이 벌어졌고 난 반격이 있기 전에 재빨리 블링크를 사용해서 몸을 피했다. 성기사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모하게 공격하는 건 자살행위가 될 수도 있으니까.
“칫, 저 놈 진심인가 본데? 좋아. 한 놈은 내가 맡는다!”
한 놈만 떨어뜨려 놓는 걸 본 크루드가 호기롭게 외치며 한데 뭉쳐있는 둘에게로 달려갔다.
“차앗!”
차앙-!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두 명의 성기사에게 달려든 크루드가 한 명에게 검을 휘두르는 한 편 쇠로 만들어진 자신의 부츠로 다른 한 명을 차버린 것이다.
상대가 검기를 쓸 수 있었다면 위험했을 아슬아슬한 공격이었지만 효과가 있는지 발에 채인 성기사는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섰다.
“무식하게도 싸우는군. 블링크 & 하이딩!”
일단 내 몫의 성기사를 해치우고 관전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뒤로 돌아가 목을 찌르자 한 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던 성기사는 반항 한 번 못 해보고 그대로 킬. 남은 두 명의 성기사 중 한 명은 크루드가 몰아붙였고 나머지 한 명에겐 가넷의 정령과 아슈라의 뼈 공격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제법 잘 싸우는데?”
“라이트닝!”
크루드가 걱정되는지 쿤은 자꾸 힐끗 거렸지만 붙어서 싸우는 이상 돕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아슈라와 가넷이 밀어붙이고 있는 성기사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승부는 어렵지 않게 갈렸다. 크루드는 혼자 승부내기 어려운 듯했지만 끊이지 않는 원거리 공격에 다른 성기사가 뭘 해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한 명만 남게 되니 자연히 이어진 일점사.
크루드가 딱히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 남은 성기사도 자연스럽게 몰매 맞고 죽음을 맞이했다.
상황이 종료되자 날 노려보는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외면하고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응? 이게 그 빛의 마법서라는 건가?”
“형, 나도 보여줘요!”
자체적으로 하얀색의 은은한 빛을 내는 책을 집어 들자 쿤이 쪼르르 달려와 내 옆에 섰다. 책의 제목은 <샤이닝 볼>
“샤이닝 볼?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그래. 맞아! 저번에 그 놈이 썼던 기술이 다크 볼과 샤이닝 볼을 융합시킨 카오스 볼이란 거였어!”
기억나버렸다. 놈이 썼던 기술의 이름과 그 전에 외쳤던 말들이. 그렇다면 다크 볼이란 마법만 구해서 연구해보면 놈의 기술에 대해 알아 낼 수 있다는 소린가? 좋았어!
“뭐야, 그럼 이제 마법서 하나만 더 구하면 너도 그걸 쓸 수 있겠네? 드워프제 미싈 갑옷을 한방에 박살내버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그 마법을.”
“아마도 그렇겠지. 이 책, 내가 갖는다?”
“뭐, 어차피 쿤이 가지고 있어봐야 더블 스펠이 불가능하니까.”
그러고보니 그때 카오스볼에 맞아 찌그러진 크루드의 미스릴 갑옷은 너무도 완벽하게 박살난 탓에 수리조차 불가능하다 했었다. 아니, 정확히는 수리는 할 수 있되, 드워프의 손길이 아닌 인간 장인의 손이 닿은 만큼 내구력과 방어력이 떨어진다고 했던가? 아무튼 못쓰게 되어버렸다.
미스릴이란 금속 자체가 마법에 대해 상당한 내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어둠의 합이 혼돈이라. 후후, 조합 마법이라면 또 내 특기지.”
여기서 더 많은 빛의 마법서를 모으고 나가자마자 어둠의 마법서를 싸그리 긁어모으기로 결심했다. 물론 못 얻은 빛의 마법서가 있다면 그것도 같이.
“자, 계속 전진하자. 오늘 이놈들 씨를 말려주지.”
그 자리에서 샤이닝 볼을 익히고 일행들을 재촉했다.
가만, 그런데 조합마법을 연습하려면 최소 며칠은 수련의 탑에 처박혀 있어야 할 텐데? 그럼 그 동안은 가넷을 못 본다는 소리잖아? 이거, 심각하게 고려해봐야겠는 걸.
“이번엔 다섯인가? 스트, 큰소리 친 값은 해야지?”
“물론이지. 가넷, 저놈들을 흠뻑 적셔줘.”
“알았어. 도루루, 아쿠아!”
물의 중급 정령인 도루루가 소환해낸 물의 양은 결코 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아서 우리에게까지 튀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도루루가 머리 위로 소환해낸 한 덩이 물을 막기 위해 실드를 만들어낸 프리스트 형 몬스터도 있었지만 수압에 못 이겨 실드가 해제되었고 결국 모두 물에 젖고 말았다.
“무지한 자들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한 방. 딱 한 방으로 다섯 명의 인간형 몬스터들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있던 곳에는 고맙게도 샤이닝 스피어라 적힌 한 권과 둔기류 무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빛의 마법서가 원래 잘 나오는 걸까, 아니면 운이 좋은 걸까? 아무튼.
“이 여세를 몰아서 모든 종류의 책을 다 모아버리자!”
그렇게 시작된 사냥은 한 시간 동안이나 반복되었다. 가넷이나 아쿠아, 쿤이 건드려 놓으면 내가 큰 거 한 방을 날려 처리하는 식으로. 한 시간쯤 헤매자 대충 지형의 윤곽이 잡히며 나오는 몬스터도 조금은 더 강해졌다.
체인 라이트닝 한 방에 눈 뒤집고 쓰러지던 놈들이 이젠 제법 버티다가 쓰러지는 게 그 증거였다.
“아무래도 천사와 가까워진 것 같군. 지금까지와는 저항력에서부터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아무래도 천사씩이나 되는 놈이라면 대신관이네 하는 소위 높으신 분들이 떠받들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갈수록 몬스터가 강해진다는 것은 천사에 근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천사라, 과연 어떤 마법서를 줄까? 흐흐흐!
“그럼 천사를 볼 수 있는 거야? 잘 됐다!”
천사와 가까워졌단 소리에 가넷은 뛸 듯 기뻐했다.
하긴, 가넷은 꽤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니까. 가만! 그러면 혹시 천사를 못 잡는 거 아냐? 신성 모독이 어쩌고 하면서 말이야.
“천사를 빨리 만나려면 서두르는 게 좋겠지? 가자!”
단순한 사냥이 목표였던 게 어느 샌가 천사를 만나는 일로 바뀌어져 버렸다. 천사를 만나고 난 다음엔 또 달라지겠지만.
내가 독하게 마음먹고 손을 쓰자 길을 뚫는 일 따위는 아주 쉬웠다. 갈수록 저항이 심해지긴 했지만 더블 스펠로 펼치는 8써클 대단위 공격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길을 제대로 왔는지 한참을 뚫고 나가는 동안 점차 방이 넓어졌다.
“거기 서라! 감히 천사께서 강림하신 이 신성한 신전을 어지럽히다니, 우리 신전 근위기사가 신을 대신해서 널 심판해 주마!”
“흥, 누가 네놈들에게 신을 대신할 권리를 준 거냐?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신 따윈 안 믿어!”
“닥쳐라!”
모처럼 AI인지 여덟 명의 신전 근위기사라는 놈들은 내 말에 대꾸를 하며 덤벼왔다.
후후, AI라? 그럼 딱 한 놈만 살려주지.
“가넷, 쿤!”
“도루루, 아쿠아!”
“아쿠아 스파이크!”
“얼마나 버티나 볼까? 무지한 자들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오라 소드. 검막!”
위에서는 커다란 물 한 덩이가 떨어지고, 앞에서는 날카롭게 회전하며 달려드는 송곳 같은 물과 전격의 힘이 물을 타고 거미줄처럼 퍼져 날아오자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먼저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시범을 보였다.
마나 대신 신성력을 사용해서 검기와 같은 효과를 내는 오라 소드를 펼치고 빠르게 검을 휘둘러 사방에 막을 씌우는 검막을 시전한다!
이 방법은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고 몇몇 실력이 떨어지는 근위기사를 제외하곤 모두 옷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하지만!
“폐 속까지 얼려버리는 혹한의 추위! 블리자드!”
사방이 돌로 둘러싸인 방 안에 갑자기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한 두 명 정도라면 프리즈를 사용해도 될 테지만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었기에 그만큼 대단위 마법을 쓰는 것이 좋았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자 신전 근위기사들의 발밑에 고여 있는 물들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그로인해 검막으로 상체와 하체 일부분을 보호했던 근위기사들도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였다.
움직일 수 없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바로 죽음!
“아쿠아 볼!”
쩌저저적!
쿤의 손에서 떠난 한 덩이는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블리자드의 영향을 받아 아이스볼이 되어 근위기사 한 명에게 직격했다. 충격으로 날아가고 싶어도 발이 움직이지 않아 날아가지 못하는 근위기사. 고통에 신음했지만 쿤은 아랑곳 하지 않고 한 번 더 공격을 날렸다.
“아쿠아!”
그냥 아쿠아일 뿐이라면 별 충격이 없을 테지만 지금은 블리자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 또 다시 얼어붙은 물은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되어 근위기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도루루, 아쿠아!”
쿤이 하는 것을 보고 이번엔 가넷도 도루루를 이용해 동참했다. 하지만…….
“크아아악!”
“응? 쿤은 됐는데 난 왜 안 되지?”
도루루가 소환해낸 물은 완벽히 얼지 않고 떨어져 세 명의 근위기사들의 얼굴이며 몸을 흠뻑 적셔버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기사들은? 당연히 블리자드의 냉기에 얼어 죽어버렸다. 블리자드로 얼리기엔 도루루가 소환해낸 물의 양이 너무 많았어.
“이대로 뒀다간 다 죽여 버리겠군. 나머진 내가 맡을게!”
모처럼 AI형 몬스터를 이대로 다 죽여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일행들의 공격을 제지했다. 그리고 안전하게 뒤로 돌아가 하나하나 목을 땄다. 리더로 보이는 한 놈을 제외하고.
“너희에겐 신의 분노가 내려질 것이다. 어서 죽여라!”
누가 성기사 아니랄까 봐 마지막까지 신을 운운하는 놈을 보고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나도 전에는 신을 믿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니, 그때도 막연하게 내 소원을 들어줄 절대자를 찾은 것이지 그 대상이 꼭 신은 아니었다.
모두에게 공편하지 못한, 날 고통 속에서 구해주지 못한 신 따윈 있으나마나다. 오히려 있다면 난 신을 증오할 것이다.
“누가 죽인댔나? 보아하니 다른 놈들과는 달리 사고를 할 줄 아는군. 널 살려주지. 대신 우릴 천사에게로 데려다줬으면 한다.”
“내가 순순히 네놈 말을 들을 것 같으냐? 내 목숨은 이미 신의 것, 그분을 배신 할 순 없다. 죽여라!”
좀 전의 아쿠아로 몸이 얼어붙어 있지 않다면 당장에라도 할복할 기세였다. 하지만 이렇게 믿음이 과한 놈들은 오히려 이용해 먹기 쉽지.
“믿음이 부족하군.”
“뭣이?”
“지금 강림했다는 그 천사는 신의 대리자인가?”
“그렇다. 그분이 신을 대신해 네놈들을 처단해…….”
“그러니까 네 녀석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거다. 그가 진정한 신의 대리자라면 그에 합당한 무력을 갖췄을 것이고, 우리 따위는 덤벼봐야 상대도 안 될 것 아닌가? 한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네놈이 그에게 우릴 데려다 주길 꺼려한다는 것은 그 천사가, 신의 대리자가 죽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 걱정돼서가 아니냔 말이다!”
“……좋다. 그분께 안내하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흰 그분의 검에 몸을 뉘일 것이다.”
신전의 근위기사단장쯤 되면 나름대로 자신의 믿음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 적절하게 통했다.
그의 믿음에 대한 부정으로 그 자부심을 건드리자 그는 이를 악물고 안내 할 것을 약속했다.
파이어로 몸을 녹여주긴 했지만 동상 때문에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가 우리를 안내해 줄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끄응, 왜 꼭 내가 업어야 하는 거야?”
“시끄러. 이 중에서 네가 가장 한 일이 없잖아. 그리고 기사가 힘써야지 마법사 계통인 우리 힘쓰리?”
“시끄럽군. 이 앞에서 우회전이다.”
크루드는 그를 업고 가는 내내 투덜댔고 근위기사단장은 내가 건드려놓은 것 때문인지 딱딱한 얼굴로 업혀 계속 방향을 지시했다.
근위기사단장을 업고 가서일까?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는지 나타나는 사제, 성기사들마다 되레 자리를 피하고 공손한 자세까지 취했다.
이거 엘도라도에서 대신관 테이밍했을 때가 생각나는군.
“이곳이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문부터가 삐까뻔쩍, 호화찬란, 으리으리 등 별 수식어가 다 붙어도 모자랄 정도로 화려하고 거대했다. 마치 특별한 곳임을 말하고 싶기라도 한 듯이.
하여간 종교단체들은 돈 벌어서 쓸데없는 곳에 다 쓴다니까.
“그 녀석은 여기 내려놔. 같이 들어가 봐야 별로 좋을 것도 없을 테니까. 살려준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어?”
만약 이 상황에서 전형적인 스토리 라인을 타고 나간다면 근위 대장은 아마도 들어가서 상황 설명하는 즉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안에 있는 대신관이나 천사에게. 이놈이 죽으면 경험치가 들어와서 좋기는 하지만 가넷에게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약간의 양보도 필요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나도 들어가겠다. 들어가서 그 분께 너희의 처단을 부탁…… 크흑!”
아까 너무 큰 자극을 줬던 것일까? 아직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근위 대장은 기어서 문으로 다가갔다.
저걸 말려, 말아?
“에라, 모르겠다. 난 분명 살아날 길을 열어줬다고. 굳이 벌주를 택한 건 어니까 나중에 날 원망하진 마라. 크루드, 부축해줘.”
일단 나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애써 경험치를 외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왕 움직이는 거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영광을!”
쿠구구구궁!
근위대장이 문 앞에서 소리치자 문이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움직였다.
열려라 참깨! 하면 열리는 식으로 약속된 언어를 외치면 열리는 마법 문이었나 보군.
“대신관님!”
“오, 휘렌 경! 무슨 일인가? 자네 뒤로 들어오는 저자들은 누구고?”
대신관이라는 자가 우리를 깔아보며 물었다.
여기엔 그 천사가 없나보군. 저 대신관 뒤에 있는 쪽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침입자들입니다.”
“침입자들을 막는 게 그대의 임무가 아니오? 한데 어찌……?”
“그것이…….”
대신관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근위 대장은 재빨리 전후사정을 설명 했다.
다 듣고 난 뒤에도 대신관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 그 자체. 그리고 예상했던 결과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저 비천한 자들의 말장난에 놀아났다는 얘기로군.”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지금 내 앞에서 저자들을 처단하라!”
“전 이들에게 그분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멍청한 놈! 말장난에 놀아나 성역을 더럽힌 것도 모자라 내게 항명을 해? 너 같이 아둔한 자는 신을 모실 자격이 없다. 홀리 메이스!”
대신관은 고개를 숙이고 저항하지 않는 근위 대장에게 신성력으로 만든 메이스를 휘둘러 쓰러뜨렸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메이스를 몸으로 받아낸 근위 대장은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보였지만 비틀대면서도 또다시 일어나는 의지를 보였다.
신성력 자체는 어떨지 몰라도 믿음만큼은 저 대신관이란 놈보다 근위대장이 더 강한 것 같군.
“슈팅 스타!”
퍼버벅! 퍽!
별 같은 빛 덩어리들이 또다시 근위대장의 몸에 날아가 박혔다. 이젠 정말 다리까지 풀려버린 상황. 하지만 근위 대장은 검에 의지하여 꿋꿋이 버티고 일어서려 했다.
더는 못 보겠군.
“라이트닝 랜스!”
“디바인 실드!”
샛노란 전격의 창은 반투명한 막에 막혀 허공으로 흩어졌다.
“꼴에 보스급이라는 건가? 제법이군. 스톤 오브 월! 파이어 랜스!”
“우우스 디바인 실드!”
내가 돌의 벽을 일으켜 세운 곳은 바로 대신관의 발 밑. 실드나 디바인 실드가 발밑은 방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착안한 이 공격은 충분히 대신관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당혹감으로 디바인 실드가 풀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신관의 반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쳇, 언제까지 방어만 하나 보자. 파이어 볼, 더블! 내리치는 거신의 해머, 자이언트 윈드 해머!”
이번에는 파이어 볼을 코앞에서 터지게 하지 않았다. 시간차를 두고 날린 두 개의 화염구는 앞의 걸 크게 만들어 뒤쪽의 파이어 볼이 안 보이게 만들었는데, 첫 번째 파이어 볼을 막아내고 방심하는 사이 두 번째 파이어 볼로 실드를 크게 뒤흔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시간차를 두고 날아간 두 개의 파이어 볼이 작렬하고, 머리 위해서는 거대한 바람의 망치가 강하게 내려쳤는데도 디바인 실드는 조금의 일그러짐 없이 굳건하게 버텼다.
“세상으로부터의 단절, 리버스 그라비티!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선더!”
쿠르릉! 콰광!
이번엔 색다른 공격을 시도해 봤다. 역중력 마법을 펼쳐서 놈을 공중에 띄운 후, 떨어뜨림과 동시에 하늘에선 번개가 내려치는 것! 떨어질 때의 충격에 대비해 바닥 쪽에 신성력이 모일 것을 예상한 공격이었다.
“헹, 이것도 버틸쏘냐?”
바닥에 먼지가 자욱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아무리 대신관이라 해도 실드가 깨어졌으리라 생각했다. 하나 들려오는 건 다 죽어가는 신음소리가 아니라 힘찬 기합소리.
“홀리!”
“젠장할, 블링크!”
신성 계열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궁극주문 홀리. 아론이면 몰라도 HP 많은 파이터 계열이 아닌 내가 이걸 맞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피하면서도 내 뒤에 누가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가넷, 쿤, 크루드, 아슈라는 이미 문 밖으로 나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구경하는 중이었고 홀리는 애꿎은 벽만 강타했다.
“쥐새끼 같은 놈!”
방금 전까지 실드만 치고 숨어 있던 게 누군데 대신관은 내 한 번의 회피로 화를 냈다.
쯧쯧, 명색이 신관이란 놈이 성격이 글러먹었군.
“그나저나 저걸 어떻게 처리한다? 성격 더럽고 재수 없는 놈이긴 해도 보스 급이라 실력 하나는 뛰어난 것 같은데.”
뭔 공격만 했다하면 두꺼운 실드로 방어를 굳건히 하니 혹시라도 저놈의 신성력이 내 마나보다 월등하기라도 하면 자칫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딱 세 가지인가?
“첫째는 도망가는 것. 이건 말도 안 되고. 둘째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마력 싸움을 하는 것인데 이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슈팅 스타!”
다섯 개의 광구가 하늘 위에서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몸싸움이지. 블링크 & 하이딩!”
이렇게 된 이상 프리스트가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HP 적고 몸싸움에 약한 점을 이용해 접근전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접근전에 능하기까지야 하겠어? 아니, 그렇다고 해도 암살엔 별수 없겠지!
“디바인 실드!”
까앙!
빌어먹을 대신관은 내가 사라지는 즉시 디바인 실드를 펼쳐 또다시 방어를 굳건히 했다.
이래서야 승부가 안 나잖아! 어떻게든 저 뭣 같은 실드를 해제 시켜야 하는데…….
“아! 그 수가 있었군. 흐흐흐, 각오해라. 디그!”
실드가 단단하게 유지하고 있는 대신관의 발밑으로 디그를 사용해 발목 높이 정도의 땅이 푹 꺼져버렸다.
“겨우 이따위 기술로 날 놀래게 해서 실드를 풀 생각을 하다니, 한심한 놈. 하하하하!”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놈이 웃거나 말거나 난 계속해서 디그를 시전했다. 발목, 무릎, 허리, 어깨, 심지어 머리까지 서서히 잠긴 대신관은 당황해하면서도 내가 들고 있는 시퍼렇게 날이 선 도 때문에 실드를 풀지 못했다.
예전에 제롬이 말했던 대로 디그로 파지는 땅의 깊이 제한에 걸렸는지 어느 순간부터 놈의 몸이 더 깊게 파묻히진 않았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땅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이 놈! 내가 이런다고 디바인 실드를 해제 할 줄 아느냐! 어림없다!”
땅속에서부터 악에 받친 대신관의 고함소리가 울려왔다.
그런데 이 양반이 뭔갈 착각하고 있군. 난 이미 댁은 포기했는데!
“얘들아, 들어와라. 이제 천사란 놈을 만나러 가자.”
“뭐, 뭣이?!”
“우린 천사나 만나러 갈 테니까 댁은 거기서 잘 살아보슈. 거대한 낙선의 위용, 스톤 엣지!”
“그, 그만 둬! 크아아악!!”
쿠웅!
허공에 소환된 거대한 돌덩이는 대신관이 들어가 있는 구멍에 정확히 꽂히며 그가 빠져나올 구멍을 완벽하게 막아버렸다. 안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릴 방해 할 수 없다는 건 확실한 듯하군.
“드디어 천사와의 대면인가?”
끼이익!
대신관이 등지고 있던 문이 열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천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와아……!”
“아아……!”
은은한 정도가 아니라 몸에서 확실히 밝은 빛을 내고 있는 천사에게 쿤과 가넷은 넋이 나가버렸다.
가넷이 멍하니 놈을 쳐다보고 있으니 살짝 화가 나려고 하는데?
“너희는 누구인가?”
“우리? 우린 인간이지. 널 죽……, 읍읍!”
‘널 죽이러 온 인간!’이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내 입을, 정확히 말하자면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가면의 입 부분을 막고 뒤로 확 잡아끌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 입을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가넷. 얼떨떨하게 쳐다보자 가넷이 이유를 설명했다.
“왜 그래?”
“나, 결심했어.”
“결심? 무슨 결심?”
“이 세계에서도 신을 믿을 거야.”
“에엑?”
가넷이 날 끌고 와서 하는 소리가 뜬금없이 이 세계에서 신을 믿겠다는 것이었다.
얘가 뭘 잘 못 먹었나. 갑자기 왜 이래?
“저 천사를 봐. 천사가 있다는 건 진짜 신도 있다는 소리잖아?”
“그야 그렇겠지.”
“이렇게 신이 존재하심이 확실한데 어떻게 안 믿을 수 있겠어?”
“하지만 그건 프리스트의 신성력만 봐도 알 수 있었잖아? 그리고 현실에서의 신과 이쪽 신은 다르다고! 프로그래밍된 신을 믿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가넷의 신앙심이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신을 믿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컴퓨터로 만들어진 신까지 믿으려는 거냐고!
“프리스트의 신성력은 말이 신성력이지 진짜 신의 힘인지는 모르잖아? 단순히 회복계가 뛰어난 마법사를 한 가지 클래스로 분류해 놓은 것일 수도 있고.”
아마도 백마법사를 얘기하는 것 같다. 그럼 보통 마법사가 흑마법사란 소린데 그럼 청 마법사는?
“그리고 컴픁가 만든 신이라도 그 모델은 현실 세계의 신에서 따왔을 것 아니야? 그럼 결국 같은 거지. 이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면 모든 것을 굽어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다 아실 거야.”
가넷의 억지스러운 지독한 신 예찬론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더 하리오.
“그래서 결론은?”
“천사와 싸우지 마. 신의 미움을 사긴 싫으니까.”
평소에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신 따위 있으나마나지.’, 혹은 ‘자신에게 간절히 비는 사람들을 구경만 하는 신이 내 앞에 있다면 죽여 버리겠다.’ 등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무신론자에게 종교인의 세계는 너무 어렵다니까.
“에휴, 알았다. 알았어. 하지만 그렇다고 프리스트로 전직하거나 하는 짓은 하지 마라. 골치 지니까.”
“응!”
갑자기 몸에 힘이 쫙 빠져서 한숨을 내쉬는 동안 가넷은 천사에게로 다가가서 이것저것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왠지 저 천사에게 심술이 나는데?
“…….”
“……!”
“……아슈라, 네 누나 원래 저러냐?”
“하핫, 그게……. 신에 관련된 것만 나오면 좀…….”
무려 한 시간이나 지나도록 계속되는 질문과 답변 속에 기다리는 우리는 지쳐버렸다. 나가서 사냥하다 오고 싶어도 이제 성기사와 사제를 공격하면 안 된다는 가넷의 엄포에 사냥도 못 하고, 가넷만을 두고 가자니 가둬놨던 대신관이란 놈이 언제 죽어 리젠 될지, 리젠 돼서 가넷을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앗,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야, 끝났다!”
가넷이 천사에게 마무리 인사를 하자 크루드가 환호했다.
하긴, 하시간도 넘게 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 질릴 법도 하지. 나도 가넷의 얼굴 보는 게 아니었으면 밖으로 뛰쳐나갔을지 모르니까.
“미안해. 나 때문에 많이 기다렸지?”
“조금.”
“조금은 무슨. 한 시간 씩이나 아무것도 못하게 하고 앉혀두다니, 이거 고문이야. 고문!”
나 역시 난리치는 크루드와 같이 괴로웠지만 가넷에게 대놓고 뭐라 할 수 없었기에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어쩌지? 나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는데 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정말 미안해.”
나조차도 짜증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불쑥 솟아오를 법한 상황이었지만 두 손을 모으고 귀엽게 웃는 가넷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화낼 수가 없었다.
아아, 여자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라!
“하는 수 없지. 다음에 보자. 아참, 마을로 가서 로그아웃 하는 거 잊지 말고.”
“응. 다음에 보자.”
가넷은 급한 일이 있는지 먼저 마을로 돌아갔고 우리 남자는 남자들끼리 모여 다음 목적지에 대해 상의했다.
“어디로 갈까? 가넷도 없겠다, 일단 나가면서 성기사랑 사제를 한 번 더 쓸어?”
“그냥 적당한 곳 골라서 안전하게 사냥하자, 삼촌.”
“흐음, 전 형들 하자는 대로 할게요. 유령 같이 몸이 없는 몬스터가 있는 곳만 아니라면.”
아슈라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령 계통 몬스터가 나오는 곳만을 제외하면 어디든 좋다는 뜻을 밝혀 사실상 중립을 표명했고 크루드와 쿤 중에 이기는 쪽이 말하는 곳으로 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나야 뭐, 어디든 그게 그거니까.
“가위 바위 보!”
“아싸! 승리!”
결국 신전을 다시 한 번 돌자는 크루드와 안전하게 죽음의 땅엘 가자는 쿤의 싸움의 결론은 가위 바위 보의 승자인 쿤의 뜻대로 되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희들 먼저 가. 난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너 혹시 아까 그 대신관을 혼자 쓱싹 하려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아니니까 걱정 말고 가서 기다려.”
크루드도 농담으로 해본 말이었기에 그냥 웃고 말았다.
크루드가 쿤과 아슈라를 데리고 죽음의 땅으로 가서 나서, 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저 천사에게 어떤 식으로 심술을 부려야 할지를.
“음, 그 방법이 가장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과연 통할까? AI라서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확률이 너무 희박할 것 같은데…….”
저 천사에게 심술부릴 방법을 하나 생각해내긴 했지만 통할 지의 여부가 너무도 불투명해서 시도해야 할 지 말아야 할지 심하게 망설여졌다.
실패하면 여지없이 싸워야 할 텐데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안 통하면 까짓 거 싸우면 되지!”
이 방법이 통하든 안 통하든 일단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천사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를 보고 웅크리고 있던 날개를 쫙 펴는 천사. 그와 함께 잘게 빻은 진주가루 같은 것들이 생겨나며 황홀한 광경을 이루어냈지만 척 보기에도 남자인 게 분명한(일반적으로 천사는 중성으로 표현되지만) 천사 따위, 별 관심 없다.
“이봐, 천사!”
“타브리스이오.”
한껏 건들건들한 분위기를 내서 말하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누가 네 이름 물어봤냐? 춤 좀 춰봐라.”
“……?”
“춤 말이야, 춤. 춤 몰라? 알았어, 그럼 노래 좀 불러봐라.”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지?”
예상했던 대로 천사, 아니 타브리스는 내 무례한 행동과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불만을 표했다.
좋아좋아,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그거야 넌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시다바리니까. 아, 시다바리가 뭔지 모르지? 똘마니, 부하. 뭐 그런 거야.”
“내가 어째서 그 시다바리라는 것이냐?”
“네가 여기 내려 올 때 신이 뭐라고 하든?”
“인간계로 가서 인간들을 돕고 신의 존재함을 알려라, 였다.”
천사씩이나 되는 놈을 보내면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신의 존재함을 알려라.’라니. 그놈의 신도 참 명예욕이 대단하군. 지금도 프리스트라는 추종자가 있는데 이렇게까지 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있을까?
“것 봐. 신의 존재함이야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그게 아니라도 너 자체가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까 넌 결국 인간들의 도우미 역할로 내려 보내진 거야. 인간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닌 뒤치다꺼리나 하는 시다바리로서 말이야. 고로,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라서 우울하니까 네가 노래라도 불러서 기분을 좀 풀어줘 봐. 인.간.을. 도.와.야.지. 천사 씨?”
“큭, 그런…….”
승기를 잡았다. 또박또박 근거를 들먹여 가며 구슬리자 타브리스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가며 갈등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라? 그냥 화 낼 줄 알았는데 갈등을 해? 설마 진짜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겠지?
“그 말은 들어 줄 수 없다. 난 인간들에게 천사로서의 위엄을…….”
“위엄이고 나발이고 네가 신에게 받은 임무가 뭐야? 완벽, 완전하다 할 수 있는 천사께서 불완전하기 짝이 없고 온갖 음모, 암투, 배신으로 가득 찬 인간들을 받들어 모셔야 하는 거 아냐!”
“그래, 그렇다. 한데 어째서이지? 신께서는 어째서 우리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신 거지? 어째서 당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생명체인 우리를 불완전하고 오만방자하고 치졸한 인간 따위의 하인으로 만드신 거냐고!”
타브리스의 일갈과 함께 그의 빛나던 날개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오오, 계획대로 되어가는군.
“그거야 너희 천사는 신이 만든 소모품이니까. 너희 천사는 인간을 만들기 전 시험 삼아 만들어 본 거고, 신이 진짜 만들려던 건 인간이었거든. 너희가 그런 일을 맡게 된 이유를 알려줄까? 신이 너희를 이용해 실험을 끝내고 마침내 인간을 만들었어. 그런데 원하던 인간들 만들었으니 이제 너희가 쓸모없게 됐거든. 그래서 처분을 해야 하는데 파괴하자니 공들인 게 아깝고, 그대로 두자니 자신이 유.일.하.게. 아끼는 인간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거야. 그래서 평소엔 자기 밑에 두다가 유사시에만 대신 내려 보내는 거지. 인간들의 뒤치다꺼리를 시키기 위해서 말이야.”
“그, 그럴 수가……!”
타브리스의 눈동자가 심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미 찬란한 빛을 잃어버린 날개는 그의 믿음이 깨어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고, 더불어 내 계획이 제대로 먹혀들어 갔음을 뜻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 것이냐?!”
타브리스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나에게 마지막 저항을 했다.
“난 이계인이니까. 이계인들이 너희와는 확연하게 다른 지식을 가진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현실을 외면하려 하지 마. 방법은 이미 나와 있잖아? 이미 전례도 있어. 루시퍼라는!”
“……!”
모름지기 아무리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전례가 있으면 더 결정하기 쉬워지는 법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자신의 우상과도 같고 대단한 인물이라면.
루시퍼가 타락하기 전, 대천사의 직책으로 모든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었다지 아마?
“그분은……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셨다. 그러다 어느 날 타락하여 신께 반기를 들었지. 지금까지는 그 분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그 분의 고통을, 그 분의 분노를!”
순간, 그의 어깻죽지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퍼져나가 온 날개를 뒤덮어버렸다.
이제, 그는 검을 날개의 천사. 타천사 타브리스다!
“한데 너는 왜 인간이면서 내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거지?”
“난 무신론자요. 설령 신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난 신을 믿지 않소. 아니, 간절히 빌어도 도와줄 생각조차 않고 위에서 구경이나 하는 신 따위, 정말 존재해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내 분노를 받아야 할 것이오.”
상황이 어느 정도 진행 됐기 때문에 건들거리는 말투는 때려치우고 조금은 정중한 말투로 바꾸었다.
“난 지금부터 신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이다. 그가 가장 아끼는 인간들을 죽이고 또 죽여서 그에게 슬픔을 맛보여 줄 것이며, 나를 잡기 위해 내려오는 동료들에게 진실을 전해 줄 것이다. 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이 내 검을 받아야겠지.”
날개와 더불어 검은색으로 바뀌어버린 자신의 검을 들어보던 그는 다시 날 쳐다봤다.
아, 이참에 전부터 궁금하던 것 좀 물어봐야겠군.
“잡으러 내려오는 천사들은 하나같이 만만한 힘은 아닐 것이며, 혼자 오지도 않을 터인데 어이없이 죽어버리는 것 아니오?”
“전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신에게 검을 들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내 힘은 배 이상 강해졌다. 온몸에 충만한 이 기운이면 설사 대천사라해도 날 꺽지 못할 것이다.”
그는 ‘대천사에 불과했던 루시퍼가 어떻게 신에게 대적할 만한 힘을 얻게 되었을까?’라는 내 궁금증을 단번에 풀어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느끼는 것보다 더 강해졌을 것이오. 마음 약해서 살살 공격하는 천사들과 달리 손에 사정을 두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군. 그런데 넌 내가 두렵지 않나? 난 분명 인간을 말살시키겠다고 선언했는데 말이다.”
“이래 뵈도 난 인간들 중 최고수로 꼽히는 자들 중 하나이외다. 천사가 아니라 천사 할아비가 와도 내가 달아나고자 한다면 막을 수 없다 자부하오.”
“큭큭, 대단한 자신감이군. 좋다. 나의 각정을 도와준 대가로 너만은 살려주도록 하지.”
“아, 잠깐. 난 그런 특권 필요 없고, 아까 그대와 대화했던 여자 애를 기억하오? 내 대신 그 애에게 특권을 줬으면 하오.”
“그러지. 그럼 다음번에 만날 때, 너와 난 적이다. 하압!”
검은 날개를 쫙 펼친 타브리스는 자신의 검을 휘둘러 천장에 구멍을 뚫고 유유히 던전을 빠져나갔다.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저놈도 꽤나 순딩이군.”
이것으로 나의 심술부리기는 일단락되었다.
밖이 꽤나 소란스러워지겠군. 간만의 이벤트라 오히려 좋아들 하려나?
“죽음의 땅. 침묵의 초소 앞이랬지? 텔레포트!”
* * *
원래는 인간이 세운 초소였지만 지금은 언데드가 된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침묵의 초소.
언데드가 된 경비병이 지키면 그곳에서 공격을 받지 않느냐? 그건 아니다.
언데드가 되어버린 경비병들에게 남은 것은 초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기 때문에 접근하는 자는 이유 불문,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 심지어 같은 언데드마저도.
“아, 형 왔어요?”
이미 세 구의 스켈레톤을 소환해낸 아슈라가 웃으며 맞이했다. 초소 근처에는 초소를 노리는 이런저런 몬스터가 많다는 설정이라 나오는 행복한 표정이리라.
“어때, 할만 해?”
“예. 여기서 사냥하는 게 우리 만이 아니라 조금 과하게 몰렸다 싶으면 다른 분들께 도움을 청하면 되고 , 너무 많이 몰려서 두 파티로도 힘들다 싶으면 초소로 들어가면 되니까요.”
초소 근처에서 사냥하면 좋은 점 또 한 가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몬스터들이 달려들면 초소로 끌고 들어가면 된다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초소의 경비병들이 날 공격하지만 첫 공격만 피하고 초소에 등을 돌리면 경비병들은 내가 아닌 초소로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우선 공격한다.
이렇게 초소 경비병들의 도움을 받아 몬스터들을 상대하다가 숫자가 많이 줄었다 싶으면 도망!
이 방법은 널리 퍼져 이 근처에서 사냥하는 팀들에겐 아주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 되어 버렸다.
“아참, 아까 남아서 할 일이라는 게 뭐였어요?”
“아니, 뭐 그냥. 천사와 담소를 좀 나눴지. 별거 아냐.”
그 와중에 천사가 타천사로 변하는 아주 사소한 일이 있긴 했지만 굳이 말할 필요까진 없겠지?
“님아, 헬프!”
“앗, 스켈레톤. 공격!”
근처에서 사냥하던 기사가 두 마리의 몬스터에게 쫓겨 오자 아슈라가 재빨리 스켈레톤을 부려 한 마리를 맡았다.
그 기사도 두 마리라는 압박감 때문에 도망 온 것이지 몬스터가 너무 강해서 도망 온 것이 아니라 처리는 금세 끝났다.
“감사합니다. 친구한테 연락받고 비코로 구경 가려는 찰나 몹이 리젠되지 뭡니까. 하핫.”
“구경요? 비코에서 무슨 행사라도?”
“모르셨습니까? 지금 비코에 악마가 출현했다고 떠들썩한데요.”
“악마? 마족이 출현한 건가요?”
악마란 소리에 크루드와 쿤도 달려와서 질문했다. 이미 마족의 성인식 퀘스트를 통해서 마족을 본 적 있기에 더 관심이 가는 듯했다.
“예. 그런데 보통 천사는 비둘기 같은 깃털로 된 날개를 생각하고, 마족은 박쥐 날개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마족은 천사 같은 날개 모양에 색깔만 검다고 하더군요.”
움찔!
찔리는 게 있는 지라 검은 천사 날개라는 소리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비코 영지라면 에린 누나의 영지인데……. 아무래도 이번 일은 비밀로 해야겠군. 거트 형이 알면 날 죽이려고 할 테니까.
그런데 괜찮을까? 인간을 말살시키겠다고 큰소리쳤으니 피해가 적지는 않을 텐데
“이름이 뭐래요? 혹시 자기를 위대하다고 치켜세우면서 이름을 말하지 않던가요?”
“치켜세우는 건 모르겠고 타브리스라던데요.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더 늦었다간 얼굴 한 번 못 볼지도 모르거든요. 아참, 님들도 가실 거면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그놈이 비코 영지를 초토화 시키고 있다니까요. 텔레포트!”
초, 초토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긴 하지만 비코 영지에도 적지 않은 수의 고렙들이 있을 텐데? 역시 가면 안 되겠어. 갔다가 타브리스가 NPC에, 그것도 천사라고 내 기운을 느끼니 어쩌니 하면서 날 아는 척이라도 하는 날엔……. 으으, 끔찍하다.
“삼촌, 우리도 구경 가자!”
“그럴까? 스트, 어때?”
“으응? 난 별로……. 마을이 초토화됐다잖아. 가봐야 죽기밖에 더할 것이며…….”
“에이, 소심하게 왜 그래? 가자!”
어떻게든 빠져나가보려 중얼거렸지만 크루드는 힘으로 날 잡아 끌었다.
큭, 이런 아론 같은 놈!
“싫어, 못 가! 절대 안 가! 블링크!”
“쳇, 비코에 무슨 빚쟁이라도 있냐? 관둬라, 우리끼리 가면 되지. 매스 텔레포트!”
내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크루드도 포기하고 쿤, 아슈라만을 데리고 비코 영지로 이동했다.
휴우, 누가 타브리스를 잡기 전까진 절대 타브리스와 마주칠 수 없어!
“그래도 타천사는 어떻게 싸우는 지 궁금하니까 나가서 TV로 봐야겠다. 로그아웃!”
절대 타브리스와 마주쳐선 안 되지만 그래도 타천사의 전투 방식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기 때문에 즉시 로그아웃을 하고 TV앞으로 달려갔다.
“네, 여인궁의 고렙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집니다!”
TV를 켜자마자 나온 화면은 타브리스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마냥 하늘에서 추락하듯 떨어져내려 궁수 둘을 베는 것이었다.
다음 화면으론 전체적인 상황이 비추어졌다.
생채기 하나 없이 말짱한 모습의 타브리스와 바닥에 즐비하게 널린 회색 시체들. 이 대조를 이루는 화면에서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높이 날아오른 타브리스가 땅에 있는 다섯 명의 궁수 무리를 향해 쏘아져 가려는 그때였다.
“홀리!”
쿠웅!
타브리스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홀리는 타브리스의 흑빛 날개에 막혀버렸다.
홀 리가 날아온 곳을 무표정한 눈빛으로 돌아보는 타브리스와 소리치는 리포터.
“아앗, 레이지입니다. 레이지! 레이지의 길드장 거트가 직접 길드의 정예를 이끌고 비코 영지에 구원을 왔습니다. 이제 살았습니다!”
화면으로 보이는 길드원의 수는 약 오십여 명. 개중에는 마스터도 있을 것이고 낮아도 허공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95레벨 이상은 될 것이니 타브리스가 도망가지 않는 이상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산개하라!”
거트 형이 손을 들며 외치자 수십 명의 길드원들이 타브리스를 중심으로 원형 진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이 끝날 때 까지도 팔짱낀 채 묵묵히 서 있는 타브리스.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쳐라! 신이 주신 무한한 영광의 힘이여, 홀리!”
“진노하는 파괴의 불꽃, 플레임 스트라이크!”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오기 전에 이미 얘기를 들었는지 거트 형은 처음부터 자신의 최강 공격 주문을 사용했다. 그에 뒤따라 십여 명의 마법사가 연달아 캐스팅했고 드디어 타브리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가 신이 주신 무한한 영광이며 힘이더냐!”
타브리스가 찍은 상대는 거트 형. 날아가며 하는 말로 보아 거트 형이 외웠던 홀리의 주문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하긴, 신 때문에 열 받아 있는데 코앞에서 신이 주신 힘이 어쩌고 하면 기분 나쁠 법도 하지.
“헉! 어찌 저런 무모한……! 막아라!”
거트 형에게 닿기 위해서 거쳐야 할 필수 코스 중 하나인 홀리. 타브리스는 그 홀리를 몸을 감싼 날개로 가볍게 받아내고 오히려 더 속도를 높여 달려들었다.
맙소사! 거트 형의 홀리라면 여러 가지 증폭 기구를 통해서 일반 것보다 파워가 월등히 높을 텐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다니!
“혹시 천사였다가 저렇게 된 거라 빛 속성에 강한 내성이 있는 건가? 지금 상태라면 암흑 쪽에도 내성이 있을 텐데?”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일이 꽤 심각해진다.
빛과 어둠 모두에 내성이 있다면 일단 프리스트들의 공격은 전혀 안 먹힐 테고, 상극이란 게 사라져서 치명타를 주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고만고만한 타격으로 죽여야 한다는 소리인데 원래도 보스였던 놈이 HP가 좀 많겠는가?
두 배 이상 강해지면서 HP도 그만큼 늘었다면……. 그야말로 난리 난다.
“검강!”
“인페르노!”
“차앗!”
거트 형이 공격당하자 원형으로 타브리스를 포위하고 있던 길드원 중 일부가 빠져나와 타브리스의 앞을 막아섰다. 각자의 강력한 일격과 함께.
순식간에 세 가닥의 검강과 인페르노에 노출된 타브리스는 이번만큼은 경시 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날아오던 것을 멈추고 흙빛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그와 함께 그의 주위로 형성되는 검은 바리어.
“성공했다!”
“경계를 늦추지 말고 공격을 퍼붓는다! 적도 보스 급 이상인 만큼 이정도 공격으로 죽진 않을 것이다!”
타브리스가 인페르노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히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거트 형은 방심하지 않았고 주위를 독려해 긴장감을 유지시켰다.
좋았어, 방심하지 않고 이대로 나간다면 잡을 수 있다!
“고작 이 정도인가. 신의 총애를 받는다는 인간의 힘이?”
매섭게 날이 선 검풍이 인페르노의 불길을 반으로 쪼개갔다.
인페르노의 불길을 가르고 시전자를 베는 그 속도를 가히 경악할 정도!
잠시라도 눈을 뗀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눈 깜빡할 새 마법사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순식간에 환호는 경악으로 변했다. 설사 마스터 급 로그, 어쌔신이라 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은 검풍을 보자 사람들의 표정은 경계에서 두려움으로 변했고, 모두 타브리스가 자신에게 덤벼들지 않기를 바라는 듯 숨죽이고 있었다.
“신이여, 당신이 이들을 총애하는 이유는 이들의 나약함 때문입니까? 자신의 안위밖에 챙길 줄 모르는 비겁함 때문입니까? 자신보다 강한 자의 눈치만 보는 비굴함 때문입니까?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증명하겠습니다. 페더 애로우!”
파트비르사 크게 한 번 날갯짓을 하자 날개에서 수십 개의 깃털이 빠져나가더니 그 어떤 화살보다 빠른, 섬전과 같은 빠르기로 레이지 길드원들에게 날아갔다.
“크악!”
“크허억!”
좀 전의 검풍보다 빠른 깃털들을 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레 겁먹고 방패에 강기까지 씌워 자신을 보호하던 몇 명의 실드 파이터만 겨우 목숨을 부지했을 뿐, 깃털 화살의 표적이 된 나머지 사람들은 그대로 회색빛 시체가 되었다.
심지어 강기 씌운 방패로 방어했던 사람들마저도 깃털을 막고 나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야 했으니 그 파괴력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으리라.
“이, 이길 수 없어!”
결코 마지막 순간까지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부터 터져 나옴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라는 감정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중에, 타브리스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지금은 내게 검을 세우고 있지만 내가 이걸 사용한 뒤에도 그럴 수 있는지 보겠다. 너희의 겁쟁이 근성을 끌어내 주마. 크핫핫핫핫!!! 헤븐즈 레이!!”
“사람 살려!”
“도망 가자!”
“난 죽기 싫다고!!”
높게 치켜든 타브리스의 손에서 검은 빛줄기가 하늘로 뻗어나갔다. 이번 공격이 광역 마법임이 거의 확실해지자 리포터를 제외한 숨어 있던 사람들 전부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타브리스와 대치하고 있는 레이지 길드원들과 성벽 위에서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는 여인궁 길드원들. 그리고 리포터가 전부인 상황.
저 공격 범위에 도망가는 사람들이 들어갈지는 모르지만 도망가지 않고 버틴 사람들이 대충 이 정도이다.
“크윽……!”
대다수의 사람들이 곧 닥쳐올 엄청난 고통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멍청이들! 저럴 시간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공격을 해서 캐스팅을 방해해야 할 것 아니야?!
“으응?”
눈을 감고 기다린 지 십여 초. 아무런 소리도, 고통도 없자 사람들이 슬며시 눈을 떠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들어 온 건 하늘에서 내리 꽂히는 빛이 아니라 방전된 듯 손에 하얀 전류 같은 게 흐르고 있는 타브리스의 모습.
대충 상황을 알 만 했다. 아, 물론 나만.
“헤븐지 레이. 천국의 빛. 후후, 천사일 때를 생각하고 기술을 써버린 건가? 타락해버린 천사의 요청 따위 위에서 들어줄 리 없지. 가만, 그렇다는 것은 아직 타브리스가 자신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른다는 소리군?”
그렇다면 놈을 처치하기에는 지금이 제일이다. 나중에 자신의 기술을 알거나 개발하면 얼마나 더 강해질지 모르니까.
한데 상황을 봐선 지금도 이기기 힘들 것 같군. 뭔가 약점을 찾아내던가 아니면 다른 천사들이 응징하러 내려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협공하는 수밖에 없겠어. 천사가 내려오는 건 나중 일 같으니까, 일단은…… 약점부터 살피자
“라고는 해도 도무지 약점을 모르겠군. 마족이라면 뿔을 자를 테지만 천사는 약점이 뭐야, 대체?”
타천사는 마족처럼 뿔도 없어서 악마 쪽의 약점보다는 천사 쪽의 약점을 찾아 적용 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 하에 머리를 굴리는 동안, 타브리스는 하늘로 쳐들었던 손을 내리고 다시 검을 들었다.
“할 수 없군. 모두 내가 직접 죽여주마!”
무안함을 떨치기 위해서일까? 타브리스는 서둘러 검을 들고 급강하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가속도와 타브리스 본인의 강한 힘이 합쳐지자 그의 일격을 받고 무사한 사람은 많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 첫 격돌에서의 충격으로 검을 놓치거나 손이 마비되는 등의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고, 겨우 받아낸 사람들도 타브리스의 뛰어난 검술에 맥을 못 췄다.
그렇게 사상자가 속출하자, 거트 형도 최후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포기한다. 여인궁은 당장 타지역으로 이동하라! 그리고 레이지 길드원들은 여인궁의 인원이 대피할 때까지만 저자의 발을 묶는다! 공격하라! 검을 휘두르고 주먹을 내질러라! 목을 조르든 물어뜯든 막으란 말이다!”
악에 받친 거트 형의 외침에도 선뜻 나서서 덤벼드는 자는 없었다. 타브리스의 압도적인 무력에 자기 몸 지키기도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여인궁의 대피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성벽에서 지켜보던 인원이 급속도로 줄어가는 것이 눈에 보였고 다행히 타브리스는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습군. 보아하니 너희가 인간들 중 가장 강한 것 같은데 나 하나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나약함이라니.”
“크윽, 인간을 우습게보지 마라! 비록 우린 너에게 졌지만 너를 꺾을 존재는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훗! 막연한 기대감 따위는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기대가 클수록 절망감만 깊어질 테니까. 크핫핫하!!!”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다! 이미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짐작되는 사람이 있으니까.”
저 상황에서도 꿋꿋이 미소 지어보이는 거트 형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싹 터왔다.
설마…… 그게 난 아니겠지?
“그게 누구지?”
“콜로니스트! 힘으로 널 꺾는 건 불가능 할지 몰라도 그 녀석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 녀석의 무서운 점은 힘을 이기는 머리니까!”
젠장!
거트 형은 내 동의도 없이 타브리스에게 내 이름을 앞세웠다.
이렇게 되면 꼼짝없이 저 녀석이랑 싸워야 하잖아? 싸우는 건 둘째 치고 타브리스가 날 알아보고 뭐라고 하기라도 한다면……미치겠군.
“후후, 그렇단 말이지? 좋다. 기다려주지. 그를 데려와라.”
“아쉽게도 그는 지금 접속해 있지 않다.”
“접속?”
“아, 그는 우리와 같은 이계인이다. 이 세계에 존재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 그런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삼 일…….”
“길드장, 잠시만……!”
거트 형이 삼일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길드원 중 하나가 갑자기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얘기했다.
“정정하겠다. 일주일. 아마 일주일 정도 후에는 이 세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확실한가?”
“그렇다.”
“좋아, 속아주지. 일주일 간 하루에 하나의 마을만을 공격하겠다. 크든 작든 말이다. 그가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피해는 적어진다. 물론 그가 날 막지 못한다면 무차별적 파괴가 시작 될 것이다.”
그 말과 함께 타브리스는 날개를 접고 비코 성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거트 형이 왜 삼일에서 일주일로 말을 바꾼 거지?
“에휴, 모르겠다. 지금은 그것보다 타브리스의 약점을 찾는 게 더 시급한 일이니까. 발등의 불부터 끄는 수밖에!”
어차피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는 약점, 남의 힘을 빌려보자는 마음에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천사의 약점, 천사, 혹시나 악마와 악마의 약점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 봤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천사와 악마의 서열과 이름 등의 설명뿐, 어디에도 천사의 약점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알아낸 것은 타브리스가 자유의지를 관장하는 천사라는 것 단 한 가지. 이걸론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약점을 만들 수 없었다.
“결국 죽을 때까지 공격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함정에 빠뜨리는 수밖에 없나? 제길, 그놈의 닭 날개 때문에 쓸 수 있는 방법도 꽤나 줄어들겠군.”
결국 속임수나 함정을 파기로 하고 힐름 홈페이지를 열었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건 단연 반짝이는 공지사항.
먼저 타천사 타브리스라고 적힌 공지를 살폈다.
[이벤트 : 타천사 타브리스]
자유의지를 관장하는 천사인 타브리스는 신의 명을 받고 인간계에 내려왔다가 사악한 마법사의 꼬임에 빠져 타락천사가 되어버렸다.
타브리스는 신이 자신들 천사를 소모품으로 만들었다는 오해를 하고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들을 말살시키려 한다.
천사 중에 강한 편은 아니었던 타브리스지만 타천사가 된 후의 힘은 막강 그 자체! 가히 세상을 뒤엎을 만하다.
사악한 마법사의 꼬임이 있었다고는 하나 타천사가 되어 신에게 반기를 들기로 한 것은 모두 그의 자유의지!
세상은 그의 의지를 꺾을 영웅을 필요로 한다.
“사악한 마법사? 이거 나 말하는 건가? 쳇, 나중에 항의해야겠군. 내가 어딜 봐서 사악하다는 거야? 나같이 순진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말도 안되는 운영자의 모함에 콧방귀를 한 번 뀌어주고 다음 공지인 [천사 소환 의식]을 클릭했다.
[이벤트 : 천사 소환 의식]
인간계를 혼란에 빠뜨린 타브리스를 처단하기 위해 신계에서 세 명의 전투 천사가 파견된다. 하지만 보통의 방법으로 내려오기 까진 너무 많은 시간이 소모되고, 결국 인간계에서 소환진을 사용하여 그들을 소환하기로 한다.
신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실행하는 대신관의 소환 주문은 모두 칠일에 걸쳐 완성되며 그때까지 인간들은 타브리스에 저항하여 인간계의 멸망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시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