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름 5권
● 차 례
#어긋난 화살들
#타천사 타브리스
#타천사의 최후
#마인
#변해가는 마음들
#어긋난 화살들
“아, 아슈라. 매형이라니?”
“전 항상 형을 동경해 왔어요. 형이라면 누나에게 오히려 과분하죠. 누나도 싫다곤 안 할걸요? 헤헤.”
아슈라는 뭔가 음흉하면서도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며 내게 매달렸다. 어딘가 꺼림칙하지만 그래도 환심은 산 것 같군.
“아니야, 내가 부족하지. 그리고 소연인 날 달가워하지 않아. 이미 한 번 날 피했으니까.”
“피하다뇨?”
“그래. 예전 듀얼토너먼트 때도 그랬고, 우리 길드가 역모로 쫓겼을 때 알지? 그때 소연이가 위험한 상황에서 우릴 도와줬어. 하지만 다음에 다시 가보니 사라지고 없더라.”
말을 하기 위해 기억을 떠올리자 또 가슴이 아려왔다.
“그때라면 우리가 정글에 살 때? 아! 그거라면 걱정 마요, 형. 그때 우리가 이사한 건 형 때문이 아니라 누나를 따라다니는 스토커 놈 때문이었으니까.”
“스토커?”
“그래요, 스토커. 누나가 다니는 학교에 재벌가 도련님이 하나 있는데 그 녀석이 자꾸 누나한테 집적대거든요. 스토커로 신고해도 경찰을 매수해버리고, 게임 속에까지 따라와 쫓아다닌다니까요. 레벨을 높여서 따라 올 수 없는 사냥터로 가버려도 현금으로 사들인 아이템에 용병으로 커버해버리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에요.”
재벌가 도련님이 끌어다 쓸 수 있는 돈이 얼만지는 몰라도 그 돈을 게임머니로 바꿔서 값비싼 아이템과 용병으로 치장하면 고작해야 60레벨 대인 둘이 있는 곳까지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둘은 도망가고 싶어도 텔레포트 몇 번이 고작일 테고 나중엔 도망갈 여력이 남지 않았겠지.
스토커라, 소연일 괴롭히다니, 가만 놔둬선 안 되겠군.
“그 녀석 아이디가 뭐야?”
“금황이요. 근데…… 복수는 안 돼요.”
“왜?”
“사실은 저희 아빠 회사가 그 녀석 덕을 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떼어놓고 달아난다던가 하는 것 정도는 괜찮아도 일이 커지면…….”
대충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았다.
소연이의 부모님 회사가 그 금황이란 놈 아버지의 회사의 계열사이거나 하청업체겠지. 그런데 내가 일을 크게 벌여서 문제라도 생기면 금황이란 녀석이 울고불고 부모님께 이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연이 부모님. 아니, 장인어른의 회사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 분하긴 하지만 만나지 않게 도망 다니는 걸로 해야겠군.
“무슨 말인지 알았어. 게임 안에서라면 나 역시 금황이란 놈 이상 가는 재력가니까 매스 텔레포트로 도망 다니면 되겠지.”
“그런데 너희들 마치 가넷이랑 사귀기로 한 것처럼 말한다?”
금황이란 녀석의 처리에 관해 말하고 있을 때 크루드가 끼어들어 정곡을 찔렀다.
큭, 그러고 보니 소연이에 대한 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군.
“그거라면 제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걱정 마요. 어차피 누나도 대학 들어온 이후로 남자친구 하나 없는 걸요! 옆에서 바람 잡고 형이 대시하면 누나도 넘어갈 거예요.”
“오오! 그래 주겠어, 처남?”
“물론이죠, 매형!”
어느새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바꿔버린 우리 두 사람은 두 손을 마주잡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미룰 것 없이 다음 날 당장에 작전을 실행키로 했다. 아슈라가 소연에게 아는 형을 만나기로 했다고 하고 기다리면 내가 나타나는, 작전 같지도 않은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펼쳤던 그 어떤 작전보다도 초조하고 긴장됐다.
처음 이 작전을 세울 때, 아슈라는 내가 소연을 만나는 순간에 가면을 벗으라고 했었다. 하지만 또 다시 차이고, 주위를 맴돌 수도 없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난 그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괴로움을 또 느끼긴 싫었다.
“매형, 지금이에요. 빨리 와요!”
아슈라의 귓속말이 머릿속에 울려왔다.
때가 됐군!
“텔레포트!”
혹여 소연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최대한 수수하게 차려입은 내 몸을 하얀 빛이 휘감아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토록 원하던 소연과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너, 넌 태연?”
의외의 상황에 소연은 별다른 말을 못 하고 동그랗게 뜬 눈만 깜박거렸다.
많이……놀랐겠지?
“오랜만이야.”
“그, 그래. 근데 어떻게……?”
“어떻게긴, 동생한테 못 들었어? 레벨업을 도와줄 아는 형이 온다고 말이야.”
“듣기는 했지만 너일 거라고는…….”
소연은 아직도 얼떨떨한지 정신을 못 차렸다. 이틈을 이용해서 딴소리 못하게 끌고 가야겠군.
“자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이동부터 하자고. 매스 텔레포트!”
“어? 어?”
소연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아슈라가 옆에서 슬쩍 잡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납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동한 곳은 어느 한 무인도였다. 레벨업을 할 수 있으면서 분위기도 좋은 곳을 찾다가 우연히 어떤 사람에게 스크롤을 산 곳인데, 크라켄(대형 오징어 괴물)이 간혹 출몰한다고는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었다.
사방은 ‘물’이고, 내게는 ‘선더’가 있으니까.
“우와, 여긴 어디야?”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백사장과 푸른 물결들. 그리고 뒤로는 녹음이 우거진 숲. 이 멋진 광경에 반해 소연은 납치(?) 당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감탄했다.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야.
“이제 사냥을 하러 가볼까?”
“응? 아! 잠깐만! 너 알고 온 거지?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소연에게 대답 대신 미소만을 보여주고 몸을 돌려 섬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다행히 들키진 않은 것 같았다. 아슈라도 별말 없이 따라오니 소연이로서도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왔다.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만 여긴 숲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낯선 무인도니까 일단 작전은 성공이다.
“이쯤이 좋겠다.”
“야, 너…….”
계속되는 소연이의 말에 웃음으로 일관하며 준비해 온 죽은 생선들을 바다로 던졌다. 그리고 ‘바다사냥꾼의 피리’를 물속에 넣고 힘껏 숨을 불어넣었다.
이제 내가 던진 생선을 먹으러 더 큰 놈들이 몰려 올 것이다.
“소연아.”
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응?”
“저길 좀 볼래?”
내가 가리킨 곳은 생선을 던진 바로 그곳이었다. 던졌던 생선들은 이미 다른 물고기들에 의해 상당수 잡아먹힌 상태였다. 물이 워낙 맑다보니 내가 던진 생선들이 다른 물고기들에게 뜯어 먹히는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그 모습이 징그러웠던지 슬쩍 훔쳐본 소연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힘이 없으면 저렇게 뜯어 먹히고…… 콜 라이트닝!”
하늘에서 제법 굵은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일정 범위 안에 있던 물고기들을 모두 죽여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난 다시 물속에 바다 사냥꾼의 피리를 넣고 힘껏 불었다.
“형, 이 정도론 레벨이…….”
물고기들이 죽으며 미미한 양의 경험치가 들어오자 아슈라는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댔다.
음……. 저기 오는군.
“약한 힘을 가져도 더 강한 자에게 뜯어 먹히지, 콜 라이트닝. 더블!”
다시 몰려온 조금 전보다 큰 물고기들이 죽은 물고기들을 먹다가 두 줄기의 벼락에 맞아 같은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물고기들이 빠짐없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바다사냥꾼의 피리를 물에 넣은 뒤 힘껏 불었다.
“혀, 형! 저기 상어에 머맨까지……!”
“뒤로 물러나.”
들은 바대로 바다사냥꾼의 피리는 주변에 물고기가 많을수록 죽었든 살았든 더 상급의 물고기들을 불러냈다. 조금 뒤로 물러나자 시야에서 벗어났는지 상어와 머맨들이 서로 물고기들을 차지하려 싸우기 시작했다.
상어와 머맨들은 싸울수록 수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숫자가 늘어났다. 머맨은 지능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동료를 불러 모았고, 상어는 본능에 충실해서 피 냄새를 맡고 싸움이 난 지역으로 몰려든 것이다. 상어에게 동료애 따위는 없지만 머맨들의 공격에 대응하다보니 어느새 연합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난 다시 입을 열었다.
“심지어 강하다고 하는 것들조차도…….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선더!”
콜 라이트닝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굵고 빠른 빛줄기가 전장의 한복판에 내리꽂혔다. 결과는 전멸. 수십 마리의 상어, 머맨들의 시체가 두둥실 떠올랐다.
“오오오! 하루 종일 해도 벌릴까 말까한 경험치가 한꺼번에!”
이번엔 상당량의 경험치가 들어왔는지 광분하는 아슈라를 뒤로하고 다시 물속에 피리를 넣었다. 회색으로 변한 시체들이 사라지기 전에 제물로 사용하면…….
쿠고오오오오오!
잠시 후,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리며 바닷물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아슈라, 소연일 데리고 뒤로 가서 숨어!”
곁에 있다가는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아슈라를 시켜 소연이를 숨도록 만들었다. 놀라서 숨는 둘과 달리 갑작스런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대략 알고 있는 나는 천천히 타이밍을 맞춰가며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하늘을 대신하는…….”
“쿠오오오!”
물살이 거세에 요동치며 대왕 오징어 크라켄이 등장했다.
“헉, 크라켄!”
“심판의 빛, 선더. 더블!”
수면을 박차고 몸을 일으킨 크라켄은 곧 바로 두 줄기의 낙뢰에 맞아 고통의 몸부림을 쳐댔다.
“휘몰아치는 신의 검, 제피로스 블레이드!”
거대한 바람의 칼날이 울부짖는 크라켄의 몸을 걸레조각으로 만들어놓았다. 열 개 였던 다리는 이제 일곱 개, 아니 반 이상 잘려 덜렁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다섯 개의 다리가 남았을 뿐이다.
고통에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던 크라켄은 본능에 충실하게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솟구쳐 오르는 물의 주먹, 아쿠아 플라이 드래곤 펀치!”
사망이 물인 덕분에 마나의 손실이 엄청나게 급감했다. 물로 이루어진 주먹은 크라켄의 머리를 강타했고 가뜩이나 힘이 빠진 크라켄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려났다.
“망자의 강, 끌어당기는 손길, 망자의 손길!”
물에서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손이 올라와 크라켄의 몸을 잡아당겼다. 만들어놓고 보니 죽은 자들이 산 자를 끌어당기는 손길이 연상되어 붙은 이름의 마법.
크라켄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빠져나간 마나의 량이 엄청났지만 아직 할 일은 많이 남았다.
“후우, 블링크!”
최상급의 마나포션 두 병을 연달아 들이키고 크라켄의 위로 블링크를 시전했다. 그리고 떨어질 때에 맞춰서 버닝 소울을 시전! 조금씩 크라켄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입에는 마나포션을 물고서.
“아앗, 형!”
“태연아!”
뚫고 들어온 구멍을 통해 아슈라와 소연이가 소리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아, 소연이가 걱정을? 위험한 짓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큭큭!
“내재된 힘의 폭발, 그리고 분출. 빅뱅!!”
순간 온 몸의 마나가 모조리 빠져나가며 내 몸을 중심으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빅뱅은 주문 그대로 내재된 힘, 그러니까 자신이 가진 모든 마나를 폭발시켜 뿜어내는 거의 자폭형 기술이다. 마나와 더불어 HP도 거의 바닥으로 만들어버리는 단점 때문에 이 기술을 쓴다는 자체가 미친 짓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효과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
크라켄은 그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각조각 나서 터져버렸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추락!
“제기랄!”
떨어질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쳐보니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아이템 창에서 꺼내야 할 믹스포션(mix potion : 체력 회복 포션과 마나 포션의 혼합물. 효과는 떨어지지만 hp와 mp를 동시에 회복할 수 있다.)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았다.
“잡았다!”
반쯤 떨어져 내렸을 때, 간신히 믹스 포션을 찾아 입에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행동이 너무 늦은 탓에 살아남을 수 있고 없고는 운에 맡겨야 할 상황. 블링크는커녕 떨어지는 속도를 늦출 마나도 없는 상황에서 이대로 떨어지면 80% 이상은 죽음이었다.
“도루루, 안전하게 받아!”
멀리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수면 위로 무언가 튀어 올라와 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 속도를 상당히 줄여서 착지. 약간의 데미지를 입긴 했지만 다행히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자, 죽음을 거스르는 자여, 깨어나라. 크리에이트 좀비!”
물의 중급 정령인 도루루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또 육지에 가까워지는 동안 아슈라는 죽은 머맨들을 좀비로 되살려내서 바닷속에 빠진 아이템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매정한 녀석.
“괜찮아?”
“그럭저럭 살아는 났네. 고마워.”
“오오오! 폭렙이다. 폭렙!”
이미 아슈라의 행동은 의식의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간신히 육지로 올라오자 소연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몸 상태를 물어왔다. 뒤늦게 찾은 믹스 포션 덕에 마나도, 체력도 그럭저럭 회복한 상태라 웃으며 답하자 갑자기 소연이가 새침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거야?”
“……보여주고 싶었어.”
“뭐? 너 잘났다는 거?”
“아까도 말했지만……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뜯어 먹히고, 그 강한자도 더 강한 자에게 뜯어 먹히지. 그리고 그 상한 자들마저도. 결국 크라켄 같은 포식자에게 잡아먹혀. 돌물들만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인간도, 세상도 저 바다와 같아.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런 세상에서 내가 널 지켜 줄 수 있다는 거야. 내게…… 널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너……!”
또 너무 성급했던 걸까? 지금 이 행동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난 아닌 척, 안 그런 척 소연이 곁에서 맴돌 수 있을 만큼 강한 심장을 갖고 있지 못한데…….
그래.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고백도 하기 전에 심장이 터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모든 짐을 소연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짓인데, 비겁한 짓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당장 사귀어 달라는 건 아니야. 다만 날 피하지 말고 네 곁에 있을 자격이 되는지 알 수 있게 곁에 있게만 해줘.”
“그런……. 난 그렇게 대단한 여자가 아니야.”
“아니, 넌 충분히 대단해.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한동안 소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슈라는 아이템을 건지러 바다 속에 뛰어든 지 오래였고, 덕분에 주위는 조용했다.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시간이, 그리고 공기가 멈춰버린 듯 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해졌다. 일 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소연이의 입이 열렸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긴 시간동안 날 향해준 네 마음은 고맙지만 난 사랑이란 감정을 알지 못해. 로그아웃.”
거절. 또 한 번 차이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소연이의 몸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손을 뻗어보았다. 그리고 허공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손 안에는 그녀의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형, 힘내요. 제가 누나한테 잘 말해서 같이 다니는 것 정도는 어떻게 해볼게요. 같이 다니다보면 정도 들고, 마음이 변하지 않겠어요?”
“……고맙다.”
“근데, 형!”
“왜?”
날 위로하던 아슈라가 갑자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형, 너무 느끼한 거 알아요? 무슨 80년대 멜로 영화 보는 것 같았다니까요?”
“그, 그 정도였냐?”
“동영상으로 찍어놨는데 한 번 볼래요?”
“도, 동영상으로? 끄응!”
동영상 얘기와 함께 두 손을 싹싹 비비는 것이 뭔가 심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슈라는 동영상을 유포시키겠다는 협박과 미래의 처남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사탕발림, 그리고 나중에 중매비 안 받겠다는 조건을 내걸면서 수십 골드짜리 장비들을 뜯어내 갔다.
하지만 하루 이틀 정도로 소연이의 마음이 돌아서진 않았고 결국 난 다시 가면을 눌러썼다.
“스트! 여기야.”
“어, 그래.”
‘콜로니스트’는 피하는 소연이 아니, 가넷이었지만 ‘스트’에게는 환한 미소까지 보여줬다.
역시…… 이중 신분을 갖길 잘했어.
“그동안 연락도 없고, 너무한 거 아니야?”
“뭐, 이런저런 일로 바빴거든. 그리고 항상 귓속말이 통하지 않는 리얼모드 3단계였으니까.”
이 얇은 판 하나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콜로니스트로서의 나를 만나면 당장에라도 도망칠 것 같은 그녀인데…….
“바빴다니 할 수 없지. 자, 오늘은 뭘 할까?”
“쇼핑만은 참아줘.”
“알았어, 알았어. 아참, 너 로그였지? 그럼 지도 해석도 할 줄 알겠네?”
“조금은.”
“좋았어. 그럼 오늘은 보물찾기로 결정이다! 실은 내가 보물지도를 몇 개 얻었거든. 헤헤.”
가넷이 내 얼굴 앞으로 쑤욱 들이민 지도에는 2라는 숫자가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2단계라……. 그리 높은 급은 아니군.
“이 정도라면이야…….”
보물지도를 받아들고 몇 차례 ‘지도 해석’을 외치자 지도에 붉은색 엑스표가 나타났다. 이제 내가 가진 마법지도와 대조시켜 보면 끝!
“음……. 아니지, 아니지.”
마법지도를 꺼내려다가 문득 잊고 있던 아이템이 생각났다.
모험왕의 돋보기!
지도에 돋보기를 가져가자 어디에 입이 달린 것도 아닌데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셀 지하수로. 1,025보 앞 좌측 금이 간 벽.”
베셀이라면 여섯 곳의 대도시 중 하나이니 찾는데 문제는 없겠군. 그런데 지하수로라……. 맨홀 뚜껑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건가? 한 두 개가 아닐 텐데?
“스트, 그게 뭐야?”
“이거? 모험왕의 돋보기란 건데 보물찾기에 아주 유용한 아이템이야. 나도 써보는 건 처음이지만.”
“와아! 위치를 말로 알려주면 앞으로 보물찾기 하는데 아주 유용하겠는데?”
“앞으로?”
“응, 앞으로!”
가넷은 씨익 웃으면서 보물지도 몇 장을 더 꺼내 펼쳐들었다.
삐질!
저 미소를 보면서 식은 땀 흘려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자자, 이제 장소도 알았으니 출발!”
가넷은 힘차게 소리치며 앞장서 걸어갔다. 아무래도 상황 파악을 못한 모양이군.
“잠깐만.”
“응? 왜?”
“여기에서 베셀은…… 걸어서 일주일은 족히 걸리거든?”
“그, 그럼 할 수 없지.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말 끊어서 미안한데 2레벨 보물지도에서 나오는 돈과 아이템이면 매스 텔레포트로 왕복하는 비용도 충당 못 하거든?
털썩
내 말에 기운이 빠졌는지 가넷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나한테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 여분이 몇 개 있으니까 그걸로 가자. 나도 지하수로가 궁금하거든.”
“정말?”
차마 가넷의 울상인 모습을 볼 수 없어 운을 띄우자 바로 반응이 왔다. 그냥 받기만 하기 미안한지 가넷은 획득한 보물의 반절을 내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 봐야 몇 골드 되지도 않을 테지만.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해 베셀로 온 우리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어 지하수로로 들어가기 위한 맨홀을 찾았다.
“찾았어?”
“아니, 너는?”
“나도 못 찾았어.”
“저두요, 형.”
아무리 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맨홀은커녕 쥐구멍만한 구멍도 없었다.
에고 기능도 떼어버려서 거짓말할 리도 없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저기요.”
“네?”
결국 삼십여 분을 더 헤맨 끝에 우리는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지하수로가 어딘지 아세요?”
“바로 앞에 있잖아요.”
“네?”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건 돌로 된 바닥과 건물들 뿐. 맨홀 같이 생긴 건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앞이라니, 어디에……?”
“이 건물이요.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사다리 타고 내려가세요.”
그가 가리킨 건물은 절.대. 지하수로와는 연관 시킬 수 없는 견고한 중형 타워였다.
이런 타워에 뭐가 아쉬워서 지하수로 입구를 만든 거지?
“감사합니다. 얘들아, 가자.”
타워에는 아예 문 자체가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타워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고, 아래로 내려 갈 수 있게 해놓은 사다리가 있었다.
“여기란 말이지?”
가넷은 첫 보물찾기에 흥분한 듯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려봐.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일단 타워부터 조사하자.”
별다른 것이야 있겠냐마는 일단 2층, 3층 올라가며 조사하고 지하수로에서 필요할 만한 물품들은 잠시 빌.렸.다.(물론 주인이 없었으므로 허락은 받지 않았다.)
군데군데 마법진 비슷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는 것만 빼면 이상한 점은 없군.
“자,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가서 신호 보낼게. 파이어!”
먼저 타워 안에서 찾은 횃불 몇 개에 불을 붙은 뒤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 불로 인해 근처에 몬스터가 있었다면 물러갈 테고 시야도 조금은 확보되겠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아무 이상이 없음을 횃불을 흔들어 알리자 아슈라, 가넷이 차례로 내려왔다.
횃불 대신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니 한결 나아졌다. 안으로 들어가자 점점 하수구 특유의 역한 냄새가 진해져왔다.
가넷이 참기 힘들 텐데 걱정이군.
“괜찮아?”
“말시키지 마. 숨 참기도 힘들어.”
가넷은 코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면서도 꿋꿋이 걸어왔다. 바람 속성의 정령을 부릴 줄 안다면 고생 안했을 텐데 안타깝군.
“형, 저기!”
“찍, 찍찍!”
누가 여기 하수구 아니랄까 봐, 쥐. 그것도 사람 반절만한 자이언트 랫이 나타났다.
“꺄아아악!”
자이언트 랫을 보자마자 가넷은 역한 냄새도 잊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빨리 해치워야겠군. 자이언트 랫은 덩치만 컸지 레벨은 낮으니까.
“파이어 랜스!”
치지지직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찍찍대며 어슬렁어슬렁 기어오던 자이언트 랫이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죽긴 했어도……. 징그럽긴 한가 보군.’
이제는 뒷걸음질치지 않았지만 여전히 가넷은 내 등 뒤에 숨어 눈감고 시체가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넷에게는 미안하지만……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군. 흐흐!
“죽었지만 죽지 않은 자, 죽음을 거스르는 자여, 깨어나라. 크리에이트 좀…… 읍, 읍!”
자이언트 랫을 좀비화 시켜서 끌고 다니려는 아슈라를 다행히 일찌감치 말릴 수 있었다.
놈을 좀비로 만들면 척후병으로는 쓸 만할지 몰라도 가넷이 계속 창백한 얼굴로 다녀야 할 테니 안 되지. 뒤에서 날 끌어안는 건…… 흠흠, 좋지만. 그래도 창백한 모습이 너무 안쓰러우니까.
“발자국 수는 제대로 세고 있지?”
“그렇기는 한데 보폭이란 게 매번 일정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할 수 없잖아. 믿어보는 수밖에. 대충 거리를 맞추고 의심 가는 곳을 파자.”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가넷이 내 허리를 놓아주지 않으니 걸음 수를 아슈라가 셀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슈라도 체격이 좋은 편이어서 나와 보폭이 비슷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한참을 걷고 있을 때, 조금 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인가?”
“아니, 좀 달라. 저건…… 랫맨?”
낮은 음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지며 나타난 건 사람의 형태를 한 쥐. 랫맨이었다.
누가 번식력 강한 쥐 아니랄까봐 한 번에 너덧 마리가 나오다니……. 쳇!
“좁은 곳이라 폭발력 강한 마법은 못 쓰겠고……. 좋아, 이참에 몽땅 구워주지. 아슈라, 시간 좀 벌어봐.”
“에엑? 제가 소환수도 없이 무슨 수로……?”
“온다!”
“히익! 본 스로우!”
뒤로 물러나면서 주문을 외우면 잡히기 전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가넷이 허리춤을 꼭 붙들고 있는 탓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아슈라를 떠밀었고, 아슈라는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뼈 몇 개를 꺼내 달려오는 랫맨들에게 던졌다.
“오지 말란 말이다! 본월!”
랫맨들은 아슈라의 뼈 던지기 공격을 들고 있던 삼지창으로 쉽게 쳐냈지만 그 주춤한 틈을 타서 사용한 본월에 의해 전진 할 수 없게 되었다.
고작 뼈 몇 개를 꺼내 던졌을 뿐인데 벽으로 변해버리다니, 놀랍군.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랫맨들이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뼈의 벽을 부수는 동안 이놈들은 물론 안쪽의 쥐새끼들까지 몽땅 쓸어버릴 마법이 완성되었다.
“인페르노!”
수십 대의 화염 방사기를 한데 모아서 사용한 것처럼 뜨거운 불길이 통로 전체를 집어삼키며 뿜어져갔다.
아무리 잘 쳐줘도 하급을 벗어날 수 없는 렛맨들이 그것들을 버텨낸다는 건 어불성설. 불꽃이 지나간 자리엔 새까맣게 타버린 숯덩이 다섯 개가 놓여 있을 뿐이다. 아마 수로 안 어느 정도 거리까진 이런 비슷한 것들이 있겠지.
“윽, 형. 빨리 가요.”
노린내가 나기 l작하자 아슈라가 걸음을 재촉했다.
노린내가 사라질 때까지 달려가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우리……몇 보나 온 거지?”
“헉!”
역한 노린내를 피하기 위해 달리는 바람에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국 수를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세어야 하나?”
“응? 형, 찾았어요!”
“뭐?”
“이걸 봐요.”
아슈라는 지도의 어느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내게 내밀었다.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수로의 사거리로 된 곳보다 조금 위에 있는 엑스표. 그리고 다시 움직인 아슈라의 손가락은 우리 앞에 있는 사거리를 가리켰다.
우리가 오는 동안은 일방통행이었고 발자국 수도 상당했다. 그렇다면 저기가 목표지점!
“좋았어. 가자!”
인페르노 덕분인지 우리의 직선 방향은 물론 양옆에서도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갈림길을 넘고 나서는 걸음을 천천히 했다. 근처에 금이 간 벽이 있음을 알되, 정확한 위치는 모르니까.
“여긴가? 아니, 저기? 으아아, 모르겠다. 그냥 다 부수자!”
금이 간 벽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수로 자체가 너무 오래된 탓에 구별해 낼 수 없었다.
여기도 저기도 금간 모습에 머리를 쥐어뜯던 아슈라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무데나 곡괭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누구든 했어야 할 일을 알아서 해주니 고맙군. 가넷 앞에서 추태 부릴 뻔했어.
“나와라, 나와. 나오란 말이야!”
“내 동생이지만 참…….”
쿠르르르르
마구잡이로 휘둘러진 곡괭이가 어느 지점에 닿는 순간, 벽의 한곳에 구멍이 났다.
“오오오오! 형! 여기 상자가 있어요!”
결국 찾아내버린 아슈라는 잠긴 자물쇠를 흔들며 날 불렀다.
빨리 와서 자물쇠 좀 따달라 그거겠지. 확 따지 말아버릴까 보다.
“보물상자를 열면 가디언이 등장하니까 조심들 해. 뭐, 2레벨 지도까지는 대단치 않다고들 하더라마는.”
3레벨 지도는 중급 몬스터가, 4레벨은 고급, 5레벨은 나조차도 혼자 상대할 수 없는 최고위 몬스터가 나온다고 하지만 2레벨 지도까지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락픽이란 도둑 전용 아이템으로 자물쇠를 따자 즉시 뒤쪽에서 반응이 왔다.
“꾸어억!”
“실드!”
몸을 돌림과 동시에 실드를 형성하자 뭔가 둔탁한 느낌이 걸렸다. 뒤에서 나타난 거대한 두꺼비, 자이언트 토드가 혀를 쭉 내밀어 공격한 것이다.
자이언트 토드라니, 생각보다 강한 놈이 나왔군.
“그래도 내 상대는 못 되지. 멋어랏!”
빠르게 허리춤에서 표창 두 개를 집어 놈의 입을 향해 날렸다.
그냥 맞아도 좋고, 삼키려하면 더 좋다. 입속까지 상처를 입을 테니까.
“꾸어어억!”
혀를 뻗어 표창을 쳐내려던 자이언트 토드는 오히려 혀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했다. 거기에 표창 두 개를 더 날려주고 쉐도우 소드를 소환해내자 자이언트 토드는 오수 속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무지한 자들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다행히 자이언트 토드가 오수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 등을 가격해서 물이 튀거나 하진 않았다.
자이언트 토드와 함께 떠오르는 온갖 잡 몬스터들. 하나 이제 적어도 우리 주변에는 살아있는 몬스터가 존재하진 않았다.
역시 저레벨들이라 처리가 쉽군.
“자, 이제 엽니다!”
보물 상자에서 나온 것은 약간의 돈과 60대 레벨의 유저가 쓰기에는 조금 모자란 방어구 두 개였다.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에 투덜대는 아슈라와는 달리 가넷은 내게 생글생글 웃으며 지도 한 장을 더 내밀었다.
“끄응, 또 가자고?”
“응!”
“…….”
“사람 살려!”
가넷이 내민 것이 3레벨짜리 지도인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수로 더 안쪽에서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어찌됐건 비명이란 자체가 위험할 때 내는 것이므로 경계하며 어둠 속을 주시했다.
“사람 살려!”
쿵! 쿵! 쿵! 쿵!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멀리서 미세하게 느껴지던 땅울림도 점점 커져 왔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앗, 비켜요!”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건 로그로 추정되는 검은 옷의 사내였다. 사내는 우릴 재빨리 발견하지 못했는지 달려오던 속도를 줄이지 못했고,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두 팔을 교차시켰다.
“어라?”
하지만 몸을 가눌 수 없는 건 그 사내이지 내가 아니었다. 뒤따라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굳이 부딪힐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몸을 왼쪽으로 틀자 사내는 그냥 지나쳐 갔다.
“근처에 3레벨 이상의 보물이 있었나보군. 그렇다면…….”
얼핏 스쳐가며 본 사내의 손엔 빛바랜 종이가 쥐여져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건 아마도 3레벨 이상의 보물지도.
3레벨 정도라면 몰라도 4레벨 이상으로 넘어가면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더블!”
4레벨 이상의 가디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과하게 손을 썼다. 수로 안의 공기를 모두 태워버리며 뻗어간 화염은 사내를 뒤쫓아 오던 각종 뱀, 쥐, 두꺼비 형태의 몬스터들을 구워버리고 옆으로 흐르던 오수의 수위마저 낮춰버렸다.
“다행히 3레벨 지도였던 것 같군. 거기다 도망치면서 일반 몬스터까지 따라붙은 것 같다. 그런데…… 응?”
뒤돌아보자 바닥에 좀 전의 사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도 몸이 회색으로 변해서.
“넘어진 충격으로 죽어버린 거냐?”
정말 그렇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 회색 시체가 사라진 곳, 그 중에서 머리가 있던 곳에는 주먹만 한 짱돌이 놓여 있었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다니, 그놈도 기구한 운명이군.
“죽은 것도 모자라 남 좋은 일만 시키다니 말이야.”
“남 좋은 일?”
가넷이 반문했다.
“그래, 너도 방금 해봐서 알듯이 가디언이란 게 보물을 얻기 전, 그것도 보물 상자를 열었을 때 나타나는 거잖아. 그런데 그 놈은 그 가디언에 쫓겨 왔어. 그렇다는 것은 놈이 발견한 보물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소리지! 우린 가서 집어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오오오오!”
가넷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가디언도 쓰러뜨리지 못한 자들은 보물을 가질 자격도 없다!’라는 아슈라의 피를 토하는 열변에 못 이겨 동참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린 그 사람이 어디서 보물을 찾았는지 모르잖아?”
그가 직선으로만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들어 가넷은 마지막 저항(?)을 해봤다. 하지만,
“추적!”
아직까지 남아있는 박복한 로그의 발자국에 대고 말하자 그의 발자국 모두에 파란색 테두리가 쳐졌다.
이것을 따라가면 보물이 있는 장소로 갈 수 있지!
“명색이 로그인데 추적기술 하나 없을 까봐? 가자!”
추적은 순조로웠다. 인페르노 때문에 중간에 발자국이 지워지긴 했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발자국이 발견됐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몇 번 방향을 바꾸고 나서 우린 무너진 벽을 하나 발견 할 수 있었다.
“저기로군.”
가까이 가자 무너진 벽의 안쪽에 뚜껑이 살짝 열린 상자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가장 먼저 달려 간 것은 아슈라. 하지만 상자를 뒤지고 돌아설 때는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왜 그래?”
“그놈이 상자를 열고 바로 아이템을 꺼내 간 것 같은데요.”
그 말과 함께 확인시켜 주듯, 아슈라는 상자를 비스듬히 기울여 우리에게 보여줬다.
음? 거무튀튀한 뭔가가 있는데?
“자식이 가져가려면 다 가져갈 것이지 치사하게 돌조각 하나 남겨 놓냐!”
“뭐? 돌조각?”
가넷을 고생스럽게 데리고 왔는데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 무안해하고 있을 때 아슈라가 한 말은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돌조각이라니, 그렇다면 혹시……?
“Xen? 이건 또 어느 나라 말이야?”
“하아! 잊힌 던전이나 숨겨진 곳을 찾아보라더니 이런 의미였나?”
Xen. 소환을 뜻하는 말인 이것은 분명 자칭 카오스 마스터라는 놈이 찾아 헤매는 석판 중 하나다.
이것으로 내가 두 개, 놈이 여섯 개가 된 건가? 아니, 그 사이 더 찾아냈을 수도 있겠군.
“네? 이게 뭔지 알아요?”
“이것으로 놈을 유인해내면 저번 고대인의 유적에서의 복수를 할 수 있겠어.”
순식간에 저 석판을 미끼로 카오스 마스터를 유인해 낼 계략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습이라든가 매복 후 다구리는 제쳐둔다. 오직 놈의 뒤에 있을지 모르는 세력으로부터의 방해를 저지하고 완벽한 이대일의 상황만 만들어내면 된다.
그놈은 내가 확실히 죽인다. 아이디를 알아내서 다시는 힐름 내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일 같은 건 그 다음의 일이다.
“혹시 이게 저번의 석판이랑 같은 거?”
그때 내가 놈에게 석판을 던져줬던 것을 기억해냈는지 아슈라도 그 돌조각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런 설명 없이 알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기에 금세 포기하고 내게 석판을 넘겨줬다.
“자, 다음에 갈 곳은 어디지?”
새로 얻은 석판을 보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 우선이 되는 것은 가넷과의 관계 개선이다. 따라서 석판은 품속에 넣어두고 가넷의 기분을 업 시키기 위해 또다시 보물찾기에 나섰다.
* * *
“오! 이 망토 폼 나는데?”
매스 텔레포트를 이용해 이곳저곳을 날아다닌 겨로가, 검 두 자루와 목걸이, 망토 각각 하나씩을 획득 할 수 있었다. 모두 6, 70레벨 대의 유저들이 쓰기 좋은 것들. 때문에 가넷과 아슈라는 기분 좋게 목걸이와 망토를 나눠 갖고 검 두 자루는 팔기로 했다. 자기들만 갖기 미안했는지 검을 내게 주려 했지만 거절했다.
“형, 누나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나타나서 말 걸어보는 게 어때요?”
“그럴까?”
그렇게 아치고 나서 우물거리고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될 거라는 생각을 하던 차에 아슈라가 업된 분위기를 몰아 다시 한 번 나타나보기를 권유했다.
나로서는 당연히 솔깃한 제안, 때문에 ‘스트’는 어물쩍 핑계대고 자리를 이탈해야 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지. 곧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줘.”
“급한 일이라니 할 수 없지. 아슈라, 그럼 우리도 다른 곳으로…….”
“다른 곳이라니, 스트 형이 곧 돌아온다잖아. 기다리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스트 형, 우린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갖다와.”
가넷과 엇갈리지 않기 위해서 곧 온다는 핑계를 댔는데 하마터면 틀어질 뻔 했다.
아슈라가 가넷을 막아내는 동안 재빨리 스크롤을 찢어 이동했다. 물론 이동한 곳은 먼 곳이 아닌 근처 숲. 가면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수풀을 헤치고 걸어 나갔다.
“어?!”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듯 놀라는 연기를 펼쳤다.
“네가 여기 웬일이야?”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가넷은 갑자기 냉기가 풀풀 날리는 싸늘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고, 그 반응에 놀란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어, 그게…….”
“아직도 저번과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응…….”
가넷의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한 몫 했겠지만.
“좋아. 하지만 이번엔 확실히 대답해 줄게. 난 네가 싫어. 알았어? 난 네가 싫다고! 그리고 나에 대한 너의 감정이 정말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그거야 다행히……!”
“난 사랑이란 걸 몇 번 해봤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사랑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어. 아니, 난 사랑이란 걸 해보지 않았어. 너도 네 마음속을 잘 들여다보면 그게 사랑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거야. 이제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줘.”
그 말을 끝으로 가넷은 내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돌아서는 가넷을 붙잡고 ‘아니야. 내 사랑은 진짜야!’ 소리치려 했지만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상태에서의 짝사랑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내 사랑이 그리움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난 뒤……. 그 그리움이 이젠 집착이 되어버렸다는 생각마저 했다.
정말 내 마음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닌 걸까?
머리가 복잡했다.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가넷에게도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잠시 아슈라를 쳐다보고 뒤돌아섰다. ‘스트’의 변명은…… 아슈라가 잘해주겠지.
“텔레포트!”
어느 곳으로 이동하는 스크롤인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뿐. 내 마음속 어둠을 감춰줄 하얀 빛이 몸을 휘감았다.
* * *
쾅!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펍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사내는 누굴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다른 테이블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술병이 쌓여있는 자리로 성큼 걸어갔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곰 같은 사내는 그 테이블의 주인인 청년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더니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술집에 있던 일부 사람들이 귀를 부여잡고 비틀댈 정도인 걸로 봐서 뭔가 특수한 능력이 가미된 외침인 듯싶었다. 하지만 정작 술병을 빼앗긴 청년은 고개를 들어 슬쩍 사내를 쳐다 볼 뿐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옮겨 새로운 술병을 손에 쥐었다.
“이게!”
이번엔 사내가 술병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버렸다. 던져진 술병은 박살이 났고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시선이 그 둘에게 쏠렸다.
“야, 저 사람 아론 아냐?”
“맞아! 저번에 한 번 본 적 있어. 그런데 무슨 일이지? 가만, 저기 술에 절어 있는 사람…… 콜로니스트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야?”
두 사람 다 너무 알려진 얼굴들이라 금세 주위가 시끄러워 졌다. 그리고 곧이어 그 소란스러움에 기름을 붓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오빠!”
“콜 형!”
펍의 문이 떨어질 정도로 몇 차례 문이 세게 열리며 레이지의 간부급이라 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아까보다 시끄러움이 몇 배는 중독되자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청년 콜로니스트는 크게 이맛살을 구겼다.
“귀청 떨어지겠군.”
콜로니스트가 한마디 하자 글로린은 바로 정리에 들어갔다.
“여기 계신 분들이 마신 술값은 모두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당장 이곳을 나갈 것. 둘째는 여기서 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입을 뻥끗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은 힐름 내에서 다시 발붙이기 힘들 겁니다.”
“혀, 협박하는 거냐!”
진짜 술에 취했다면 저 말에 발끈해서 상대가 누군지도 안보고 덤빌 사람이 있겠지만 힐름 내에서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는 않기 때문에 앞뒤 분간 못하는 멍청이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말로 약간의 저항을 해볼 뿐.
“그렇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맞습니다. 그러니 당장 나가십시오. 그리고 입에 자물쇠를 채우십시오. 본인조차 키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런 자물쇠로 다셔야 할 겁니다!”
글로린의 단호한 말과 표정에 사람들은 겁을 먹고 슬금슬금 펍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명이 나가니 그 다음은 썰물 빠지듯 순식간이었다.
모두가 밖으로 나가자 글로린은 펍의 주인에게 얼마의 돈을 주고 금일 휴업이란 팻말을 가져다가 문 앞에 내걸었다.
평소와는 딴판인 그녀의 말과 행동에 같은 길드원들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팻말을 내건 글로린은 이번엔 테이블 위의 빈병을 치웠다.
“이제 제대로 이야기해보자. 대체 왜 이러는 거냐? 벌써 일주일 째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며!”
글로린이 빈 병을 치우고, 마주 앉아 얘기할 만한 공간이 생기자 아론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했다.
“……자랑스럽게 떠들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말과 함께 아론의 뒤에 서있는 거트 형, 드라이저, 카엘 등을 쳐다봤다. 아론이야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아는 사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에 나가 달라는 우회적 표현이었다.
다행히 거트 형이 알아들었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왜 안 나가지?”
모두 나갔지만 딱 한 사람, 린은 나가지 않고 있었다.
“저도 듣고 싶어요. 남아 있게 해주세요.”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건…….”
아무 말 못하는 린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아론이 이마를 찡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있게 해줘. 여자 입장에서의 의견도 필요할 거 아니야?”
아론은 내가 할 이야기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
여자 입장에서의 의견이라, 그것도 좋겠지.
“좋아, 그럼 얘기를 시작하지.”
이야기는 쿤과 크루드를 만난 것부터 시작되었다.
슬라임 킹을 잡았던 얘기, 공성을 위해 잠시 헤어졌던 얘기, 다시 만났을 때 아슈라를 소개 받았던 얘기, 함께 미궁에 들어갔던 얘기, 드워프를 만난 얘기, 닌자라는 아이디어 얻고 그에 맞는 장비를 얻은 얘기, 그리고 소연을 다시 만난 얘기.
성급하게 고백하고 또 차인 얘기, 마지막으로 일주일 전 내 머리와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 일이 있었던 얘기까지.
그리고 물었다. 그리움은 사랑이 아닌 건지, 집착은 사랑이 아닌 건지, 난 정말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었던 건지.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멍청한 녀석! 그리움이건 집착이건 결국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거잖아! 넌 지나가다 우연히 스친 사람도 그리워하냐? 그런 사람에게 집착해? 아니잖아! 그렇게 너의 마음에 자신이 없어서야 어떻게 사랑을 쟁취하냐? 넌 차여도 싸다, 싸!”
“전, 사랑이 한 가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모두 다르듯이 사랑하는 방법도 모두 다르지 않겠어요? 그리움도 사랑의 한 종류이고 집착도 사랑의 한 종류인 거예요. 그리고…… 짝사랑도…….”
저 말을 들으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아직 확실한 틀이 잡히지 않았다.
수많은 의견의 충돌 속에서 어느 하나만 살아남기까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듯했다.
“그리고 네가 싫다고? 그럼 좋아하게 만들면 되지. 동생이랑 잘 안다며? 동생한테 뭐라도 쥐어주면서 누나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오라고 하면 되잖아?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챙겨주는 사람 싫다고 할 사람이 어딨냐? 그리고 정 안되면 그냥 옆에 들러붙어. 이러쿵저러쿵하다 보면 결국엔 미운 정이라도 들지 않겠어?”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가봐. 오늘 상담, 고마웠다.”
평소엔 단순 무식하다고 놀리기만 하던 녀석이었는데 지금 보니 내가 더 미련하고 멍청했던 것 같다. 덕분에 머리든 마음이든 조금은 편해졌다.
“그래, 이젠 너무 술만 퍼마시지 말고 어디 계곡이라도 가서 마음을 가다듬어라. 정 술이 마시고 싶으면 이런 눈에 띄는 곳 말고 성으로 와.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럼 우린 간다!”
“잠깐만.”
이제 홀가분하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서는 아론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스트’일 때의 내 가면과 옷가지들을 넘겨주었다.
“마음을 다잡고 나면 찾으러 가마.”
“그래. 빨리 찾으러 와라. 늦게 오면 엿 바꿔 먹을지도 몰라!”
녀석은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더 풀어주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섞어하고 밖으로 나갔다.
저 녀석을 친구로 둔 게 참 다행이군.
“저기, 오빠.”
“응?”
아론이 나갈 때도 눈치만 보고 우물쭈물하던 린이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지?
“정말……. 마음속에 그 언니 자리밖엔 없는 거예요?”
“야야, 겨우 마음 잡아가는 애를 또 혼란스럽게 할래? 나가자, 나가.”
린이 나오지 앉자 고개를 빼꼼히 안으로 들이밀던 아론이 린을 들쳐 매고 밖으로 나갔다.
마음속에 소연이의 자리밖에 없냐라…….
적어도 지금은.
“어디 조용한 계곡이라도 가서 찬물로 머리 좀 식히다 와야겠군.”
물 한잔으로 혀에 밴 술의 쓴 맛을 희석시키고 조용히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 * *
“후우…….”
쾅!
아론의 집무실 문을 힘껏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뭐, 뭐야?”
“내놔.”
“뭘?”
무턱대고 손바닥을 내밀자 아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가면하고 옷.”
“아, 그거? 그거라면 린이 맡아놓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쳇, 귀찮게.”
“그나저나 맘은 정한 거냐?”
다시 걷어차서 연 문을 통해 나가려는데 아론이 물어왔다.
맘 정리하고 찾으러 온다고 했으니 당연한 건가?
“왜 그런지부터 알아볼 거다. 왜 내가 싫은지, 왜 자기는 사랑을 모른다고 했는지. 바로 옆에서. 그러려면 가면과 옷이 꼭 필요해.”
아론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난 성큼성큼 걸어서 린의 방으로 갔다.
똑똑.
여자애 방을 아론에게 했던 것처럼 하고 들어 갈 수는 없었기에 노크로 예의를 차렸다.
“들어오세요.”
다행히 어디 나가지 않았는지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한 만큼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들어가자 무슨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엥?”
“아, 오빠!”
책상에 앉아 서류 정리하는 린의 뒤로 내 옷과 가면이 걸려 있었다.
저게 왜 저기 걸려 있데? 어라, 칼주름까지?
“가면이랑 옷 가지러 왔는데……. 저거 입으면 나랑 부딪히는 사람들 베이겠다?”
“그, 그게 언제 오실지 몰라서…….”
“아아, 탓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잘 보관해줘서 고맙지. 이리 줘, 어서 가봐야 하거든.”
손가락으로 걸려있는 가면과 옷을 가리키자 린은 돌아서서 그것들을 손에 들었다.
“응?”
옷걸이에 잘 걸려있는 옷들을 받아들었는데 옷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린이 손에 힘을 주고 놓아주지 않았다.
놀라서 쳐다봤지만 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그 언니가 아니면…… 안 되는 거예요?”
“뭐?”
“난……. 안돼요? 나도 오빠를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아론이랑…….”
“아론 오빠가 제게 잘해주긴 하지만,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전 오래전부터 오빠를 좋아해왔다고요!”
고개를 치켜든 린의 눈가엔 투명한 무언가가 맺혀 있었다.
“…….”
“그 언니는 오빠를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몇 번이나 고백을 거절했다면서요! 이제…… 제 마음을 받아주면 안 돼요?”
린이 이런 생각을, 마음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했지만 짝사랑, 가슴앓이, 나 역시 지독하게 겪어본 것들이라 쉽게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지도 몰랐다.
뭐라 말해 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문득 소연이도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지금 네 마음 나도 잘 알지만 이 말 밖에 해줄 게 없다. 짝사랑이라는 거. 시간이 지날수록 간절해지고 절실해지는 건데……. 지금 난 그 절실함이 너무 커져서 포기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절실함이 채우고 있는 부분이 너무 커서, 그것이 빠져나가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 같다. 너의 절실함이 어느 정도인진 잘 모르지만 정말 미안하다.”
옷을 꼭 쥐고 있던 린의 손에 힘이 풀렸다. 지금 닥쳐올 슬픔이, 가슴을 옥죄는 답답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알지만 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린의 손에서 가면과 옷이 모두 떨어졌고, 난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왔다. 달래 줄 수 없을 바에는 사라져 주는 게 나을 테니까.
“너……!”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을 때,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이 보였다. 벽에 기대고 서있던 것은 바로 아론. 표정이 어두운 걸로 봐서 우리의 대화를 모두 들어버린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라. 무슨 소릴 들었다간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
아론의 말대로, 아무 말 하지 않고 복도로 뛰어갔다. 딱히 아론에게 뭐라 말할 입장도 아니고, 아론을 볼 낯도 없었으니까.
스르륵……. 쿵!
뒤쪽에서 아론이 벽에 기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어긋나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