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석판의 비밀 (28/43)

#석판의 비밀

“휴, 살았다.”

“자, 이번엔 약속대로 던전에 가는 거지?”

“그래, 그래.”

“어디로 가볼까나‥!”

“새로 생긴 던전은 어때? 요즘은 사람이 꽤 줄었다던데. 던전 난이도가 하나같이 높다고는 하지만‥. 1층 정도라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새로 생긴 곳이라……. 좋았어. 여차하면 스트 등 떠밀고 도망가면 되지. 킥킥킥. 근데 어디로?”

난이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나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말리지는 않았다.

앞뒤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만 조심하면 큰 위험은 없겠지. 겨우 1층이니까.

“키메라의 탑은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정해져있는데 한 번 들어가려면 몇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한다니 안 되겠고, 빛의 신전은……. 한 번에 적이 너무 많이 나와서 힘들 것 같아. 마지막 고개인의 유적은 나도 정보가 부족해서 뭐라고 못 하겠네. 성수나 프리스트가 있어야한다고 얼핏 들은 것도 같고.”

가넷은 자신이 알고 있는 던전의 정보를 풀어 놓았다.

성수나 프리스트? 그럼 언데드가 나온다는 얘긴데, 고대인의 유적이라니 고대인의 망령이라도 나오는 건가?

“어차피 2곳은 힘들다니 고대인의 유적이란 곳에 가보는 수밖에 없네. 난 준비됐는데 너흰 어때?”

물어보기가 무섭게 넷 다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가넷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우물거렸지만, 뭔가 말하기도 전에 아슈라가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할 말이 있는지 물어볼까 했지만 이동 후에 가넷이 입을 다물었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오, 여기가‥.”

“실례지만 레벨이 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유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던전으로 들어가는 계단은 건물의 잔재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던전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한 기사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그것도 무례하게 레벨까지 물어가면서 말이다.

“레이…… 지?”

“그렇습니다. 레벨이 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기사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검과 지팡이가 교차되어 있는 그림은 틀림없는 레이지 길드의 문장이었다.

여긴 독점 사냥터가 아닐 텐데? 나 모르는 사이 바뀐 건가? 아니지, 그랬다면 레벨을 물어 볼 이유가 없지.

“전 57레벨 기사고, 저 꼬맹이는 61레벨 마법사. 그리고 저기 네크로맨서는…….”

“죄송합니다만 돌아가 주십시오.”

크루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기사는 말허리를 잘랐다.

“예?”

“돌아가 주십시오.”

“아니, 무슨 이윤지나 알아야…….”

“이곳의 몬스터는 처음 나왔을 때도 강하지만 상대를 죽일수록 더 강해집니다. 게다가 정신체이기 때문에 성수나 마나를 머금은 공격이 아니라면 타격을 줄 수 없죠. 아무리 1층에 있는 놈들이라도 유저를 10, 20명쯤 죽이면 검기급 기사에 필적할 실력을 지니게 됩니다. 때문에 레벨이 낮은 유저들은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1층 출입 레벨은 70이상, 2층은 80이상, 3층은 90이상, 그 이후부터는 적어도 마스터 레벨이 파티에 끼어 있어야 하고 각 층도 3명 이상의 파티만 출입 가능하니 나중에 조건에 맞을 때 다시 와주십시오. 마스터 레벨의 경우, 본인이 원한다면 혼자서도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건 누가 정한 거죠?”

“길드장님이십니다.”

“흥, 레이지 길드장이 무슨 운영잔가?”

가넷은 운영자도 아닌, 같은 유저가 던전 출입을 허락하고 말고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음, 비정상적으로 강한 몬스터가 득실대서 던전에 밸런스가 깨지거나 금지가 되어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허락하고 말고 하는 것도 썩 보기 좋진 않군.

“그 말, 취소하십시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혼잣말도 못하나요?”

“길드장에 대해 비아냥거린 것. 당장 사과하십시오!”

“흥! 이건 과잉 충성 아닌가요?”

“당신을 레이지의 적으로 간주해도 좋습니까!”

기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소리쳤고 가넷은 레이지의 적으로 간주한다는 말에 움찔 거렸다.

이 망할 자식이, 감히 누구한테 큰소리야?!

“그 검, 뽑으면 죽는다.”

하이딩을 써서 몰래 뒤로 돌아가, 목에 도를 바짝 들이대자 검으로 향하던 기사의 손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놈, 내가 누군 줄 알고‥.”

“레이지 길드라며?”

“알면서도 이런 짓을 하다니, 레이지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거냐?!”

내가 가면을 쓰고 있을 때도 알아보는 사람은 레이지 내에선 일부 수뇌부들 뿐. 내 정체를 알 리 없는 이 기사는 나에게 시답잖은 협박을 해대고 있다.

훗, 이 사실을 아론이나 거트 형이 알면 어떻게 될까?

“글쎄다. 적으로 돌이는 사람이 나일지, 너일지는 두고 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 당장 길드장이나 아론, 레이, 글로린, 드라이저 등 간부급 중 한 명에게 연락해서 흰 가면을 쓴 로그를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교육받도록.”

그 말과 함께 윈드 봄버로 기사를 치워버렸다.

누구한테 대들었는가를 생각하면 이 정도야 약소하지!

“크윽, 꼼짝 말고 기다려라!”

“스트, 좀 심한 거 아니야?”

“어쩌려고 그런 짓을…….”

가넷은 너무 놀라 입만 뻥끗거렸고 크루드와 아슈라가 한마디씩 했다. 쿤은……. 아직 어려서 상황 판단이 안 되는지 놀란 가넷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괜찮아. 레이지의 간부급하고 인맥이 닿아 있거든. 정상적으로 알렸다면 곤란해지는 건 저놈일걸?”

“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잠시 후, 귓속말을 보내는지 뭐라 중얼대던 놈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거 죄송합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할 줄 알았냐. 요놈아? 넌 이제 죽었다!”

……전형적인 대사와 함께 레이지의 문장을 단, 세 명의 기사가 더 나타났다.

이놈, 연락도 제대로 안 했군.

“너희들은 떨어져 있어.”

“어쭈, 혼자 나와? 꼴에 영웅행세냐?”

아무리 나라도 90레벨 이상일 기사 넷과 정면으로 붙는 것은 좀 버겁다. 그래도 하이딩 등 몇 가지 로그 기술을 적극 활용하면 지지는 않을 것 같아 일행을 뒤로 물렸더니 처음의 그 기사가 비아냥거렸다.

300명이나 되는 길드원 수를 채우다 보니 이런 쓰레기도 딸려왔나 보군.

“3류 양아치 같은 네놈과 그 문장이 너무도 안 어울리는군.”

“뭐야!”

“블링크! 하이딩!”

“멈춰요!”

놈의 옆으로 이동하는 순간, 검은 머리를 찰랑대며 어떤 여인이 나타나 소리쳤다.

“쳇, 빨리도 왔군. 5초만 늦었어도 두 놈은 보내버리는 건데.”

“아……!”

린이었다. 나를 알아본 린은 주위를 살피더니 기사들에게 말했다.

“성으로 돌아가서 연무장에 대기하세요. 조사와 처벌이 있을 겁니다.”

“글로린님, 하지만…….”

“돌아가세요!”

“예…….”

좀처럼 화내거나 하지 않는 린이 소리를 지르자 넷은 군말 없이 물러났다. 순하던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서운 법이니까.

뭐, 그게 아니라 린이 화났다는 소릴 들으면 눈 돌아갈 아론 때문일지도…….

“저 여성분은?”

멀찍이 떨어졌던 일행들이 다시 다가오자 린이 가넷을 지목했다.

“동…… 료.”

단 두 글자를 말하는 건데도 쇠추를 단 듯, 입술이 무겁고 입맛이 썼다.

“그렇구나. 난 또…….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그놈들이 칼을 뽑아선 안 될 상대에게 칼을 뽑았지. 그리곤 3류 양아치 같은 짓을 했군. 시간이 없군. 거트 형에게 전해줘. 차라리 홈페이지랑 각 도시 게시판에 공지를 몇 번 띄우고 직접 여길 통제하진 말라고 말이야. 같은 유저끼리 누구의 것도 아닌 던전 가지고 출입을 허락하네 마네 하는 것도 웃기잖아? 이크, 나, 간다.”

일행들이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린에게 전할 말을 다 전했다.

“그럼 전 이만.”

“수고하십시오.”

일행들이 작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다다르자 린은 알아서 잘 행동해줬다.

린이 떠나자 남은 건 우리 다섯 뿐. 이제 마음 놓고 사냥할 수 있게 되었다.

“너……. 돈, 힘, 권력을 다 가진 게냐?”

“권력은 무슨.”

“그게 권력이지 뭐야, 인마. 세상도 참 불공평하다. 나한텐 셋 중 하나도 안 주고‥.”

“형도 강해져 봐요. 돈이랑 명예, 권력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올 테니까.”

권력은 좀 다르지만 맞는 말이다.

이렇게 크루드의 투정은 아슈라에게 진압되었고 다시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몬스터가 그렇게나 강하다니 파이어 인챈트로는 턱도 없겠다. 가넷은 불의 정령을 소환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기에 성수를 뿌려. 아, 그리고 가넷과 쿤은 위험할 때 이걸 뿌리도록 해. 얼마 없으니까 진짜 위험할 때만.”

가넷과 쿤에게는 특별히 최고급 성수를 두 병씩 나눠줬다. 생각 같아선 더 주고 싶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이라 나도 5병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나중에 더 구해놔야겠군.

“저기…….”

각자 성수로 장비를 적실 동안 가넷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 물과 전기의 정령의 정령밖에 못 쓰는데 어떻게 하지?”

아! 깜박하고 있었다. 정령술사 역시 마법사처럼 처음에 속성을 선택한다는 것을. 불과 바람이 주류를 이루기에 착각하고 있었군. 물과 전기라, 어울리는 조합이긴 한데, 약해.

“그럼 물의 정령으로 방어하고, 전기의 정령으로 공격해. 힐름에서도 통용될 진 모르지만 옛날부터 벼락은 신성한 힘을 지녔다고 하니까. 안 되면……. 그냥 둘 다 방어로 돌리고 구경만 해도 돼. 아무리 정신체라지만 마법적인 힘인데 뚫고 들어오기야 하겠어? 아, 가능할 진 모르지만 물의 정령이 만든 실드에 성수를 약간 섞어도 쓸 만하겠네.”

“응!”

해결책을 제시해주자 가넷의 얼굴이 확 펴졌다.

후훗, 역시 웃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니까.

“준비 됐으면 들어가자.”

“스트, 잠깐만. 검에 실드라도 쳐진 것처럼 성수가 닿질 않아.”

마검이라서일까? 크루드의 검에는 성수를 뿌려도 닿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내렸다.

“마검이란 건가? 그럼 일단 그대로 사용해 보고, 안되면 아슈라의 검을 빌려 쓰도록 해. 미스릴 도금이라면 데미지를 주기에 충분 할 테지. 마검이니 만큼 그 자체로도 크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만…….”

“아, 아슈라의 롱소드가 있었지!”

“해결 됐으면 내려가 볼까?”

이번에야 말로 당당하게 시작의 일보를 내딛었다.

“잠깐만!”

네 번째 태클은 쿤이었다.

이러다 날 새겠군.

“무슨 일이야?”

“여기…….”

쿤이 왼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백발의 어린아이를 가리켰다.

어린아이는 오른손 엄지를 빨며, 왼손으로 자기보다 얼마 크지도 않은 쿤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언제 나타난 거지?

“무슨 일이니, 꼬마야?”

맞지도 않는 성인 남성의 메리야스를 입은 것 같은 차림새나, 행동으로 보아 일반 유저가 아닐 거란 판단을 내렸다.

NPC가 이렇게 붙잡고 늘어진다는 것은 뭔가 부탁이 있다는 뜻. 이런 어린애가 부탁해봐야 얼마나 큰 것이겠으며, 그에 대한 보상도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냐만 쿤의 옷을 놓게 하려면 일단 얘기나 들어봐야 할 것 같아 말을 시켰다.

“레냐, 심심해. 놀자.”

“미안한데 우리는 지금 저기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 그러니까 나중에 놀자.”

“정말? 저기 들어갈 거야?”

“그래.”

“잘됐다. 레냐랑 술래잡기 해. 레냐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빨리 잡아야 돼?”

계단으로 내려간다는 말에 레냐라는 꼬맹이는 오히려 반색하며 던전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현상이야?

“강제 퀘스트다. 실패해도 페널티는 없고, 성공 조건은 1층 내에서 한 번 나가기 전까지 저 꼬마 애를 잡으면 된대. 보상에 대해선 안 나와 있고.”

리얼모드 2단계였는지 가넷이 바로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럼 무시해도 상곤 없는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럼 사냥하다가 눈에 띄면 잡고, 안 보이면 안 잡으면 되지. 이번엔 진짜 출발이다!”

어렵사리 던전에 내려오자 멀리서 레냐가 메롱하더니 달아나버렸다.

한데 이상하게도 이곳의 몬스터로 보이는 희끄무레한 유령들은 레냐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길까지 비켜줬다. 혹시 유령들과 안면 튼 건가?

“나와 크루드가 앞. 가넷, 쿤이 중간. 아슈라가 뒤다. 아슈라, 등 뒤에서 리젠 될지 모르는 놈들 조심해라.”

“정신체들이라 시체도 남지 않을 테니 싸움에 끼어들진 못하겠지만 망은 확실히 볼 테니 걱정 말아요, 스트 형!”

시체가 없어서 소환도 못하고, 소환을 한다 해도 언데드에게 성수뿌린 무기를 줄 수 없는 아슈라는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진형을 갖추고 나아가자 망령들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무기로 맨손, 쇠스랑, 식칼, 삽까지 든 놈들. 흡사 농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가넷, 쿤!”

“스파크, 라이트닝!”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의 장벽, 파이어 월!”

범위 공격이라면 7써클의 파이어 스톰이 있었지만 배우지 않았는지, 마나 소모가 커서인지 쿤은 파이어 월로 대체했다.

이렇게 되면 나도 도와야겠군.

“윈드!”

강풍이 불길을 이끌고 망령들을 덮쳐갔다.

가넷이 전기의 정령을 보내 싸우게 했지만 패밀리어처럼 보는 것을 공유 할 수는 없었기에 잠시 후 파이어 월을 거두고 상황을 살펴야 했다.

“구울하곤 다르다, 이건가?”

“스파크, 돌아와!”

겨우 1마리가 죽었을 뿐인 걸 확인하고 크루드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쩡한 세 망령을 보고 가넷은 사프크를 불러들였다. 정령이 사망할 경우, 30분간 소환할 수 없으니까.

흐음, 생각보다 강한 놈들이군.

“마법 저항력이 높은 건지, HP가 많은 건지는 확인해 봐야겠지? 진노하는 파괴의 불꽃, 플레임 스트라이크!”

새빨간 화염 구슬이 한 망령의 배에 적중했다.

뚫고 지나가 버리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몸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푸쉬쉭! 쾅!

플레임 스트라이크에 빨려 들어가듯 오그라들던 망령은 결국 한 줌 재로도 남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고, 아직 힘은 남은 플레임 스트라이크는 뒤쪽에서 또 폭발을 일으켰다.

오호, 줄지어 있을 때 헬 파이어라도 쓰면 재미있겠군!

“마법 저항력이 높은 건 아닌가? 크루드, 왼쪽 놈 맡아라!”

“옛썰!”

크루드는 왼쪽 식칼 든 놈에게, 나는 오른쪽 삽을 든 놈에게 각기 달려들었다. 삽을 든 놈은 정면으로 달려오는 나를 향해 힘껏 삽자루를 휘둘렀다. 삽의 길이는 롱소드보다 조금 더 길었지만 너무 느려서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삽이 바닥을 내리쳤을 때, 이미 난 놈의 옆구리를 베고 있었다.

“호, 이것 봐라?”

정령처럼 베어진 곳이 다시 붙을 줄 알았는데 베어진 상태 그대로 였고 망령은 실제 인간인 것처럼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그 사이에 양 팔에 상처 입히고 목까지 베긴 했지만……. 조금 황당한데?

“아직도 지들이 인간인 줄 아는 거야?”

“이 검, 잘 통하다 못해 이놈들에겐 천적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잘 봐.”

크루드는 이미 두 다리와 양 팔에 상처를 입어, 행동 불능이 된 망령의 배에 마검을 살짝 꽂았다. 그러자 플레임 스트라이크에 맞았을 때처럼, 마검을 중심으로 망령의 몸이 오그라들었다.

이건……!

“크루드, 이 검 설명에 뭐라고 쓰여 있었지?”

“에……. 그러니까, 적의 혼을 흡수하고 빛과 관련된 놈들의 혼을 더 좋아하고…….”

“그거야, 혼! 고대의 망령은 혼. 그 자체라서 검에 닿아 있으면 마검에 흡수되는 거야!”

“오, 그렇게 깊은 뜻이?”

“이로써 세 가지는 확실해졌다. 놈들은 마법 저항력이 높지 않고, 방금 전 공격에 멀쩡했던 이유는 공격이 약해서였으며, 크루드와 내 공격이 잘 통한다는 것. HP가 많은 것인지는 확인 못 해서 아쉽지만 차차 알게 되겠지. 계속 가볼까?”

확실해진 세 가지 사실을 일행에게 알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아참, 나 그 바람 알려준다면서요!”

“아, 맞다. 그랬었지. 별 거 없어. 바람 속성 수련 마법 윈드를 숙련도 마스터하고 마나를 왕창 불어넣으면 되거든.”

“에게, 겨우 그거?”

“그래. 이제 가볼까?”

마검의 능력과 최고급 성수를 머금은 그림자의 단도 덕분에 70레벨 대 3명 이상을 제한으로 걸어놨던 1층은 무난히 뚫고 갈 수 있었다.

진행하는 내내 레냐라는 꼬맹이가 얼쩡거렸지만 애써 못 본 척 무시했다. 그러자 점점 근처에 나타나는 빈도수가 늘어갔고, 거리도 가까워져 갔다.

“이야, 드디어 계단이 보이는 구나!”

“저 다섯 놈만 잡으면 1층은 클리어다. 이거지?”

저 멀리 2층에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실은 그 주위로 쳐진 세이프티 존이 보이는 거지만. 계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낫, 호미 등을 든 5마리의 망령만 해치우면 끝이었다. 그 전에‥.

“너희끼리 저놈들 상대할 수 있겠어?”

“음, 원거리로 3~4마리쯤 해치우지 못하면 위험한데, 왜?”

“이제 나가려고!”

일부러 뒤쪽까지 들리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가넷 등에게 눈짓, 턱짓으로 뒤따라오고 있는 레냐를 가리키면서.

다행히 가넷이 먼저 알아차렸다.

“어,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우리끼리 잡자. 쿤!”

“으응? 응! 할퀴고 지나가는 화마의 손톱, 파이어 스톰!”

“스파크, 라이트닝!”

어차피 1층의 마지막이라 쿤은 마나를 아끼지 않고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고 범위 주문을 사용했다.

사나운 바람이 불꽃을 머금고 망령들에게 돌진했다. 파이어 스톰이 2개 마법을 합쳐야하는 것에서 유저들의 강한 항의에 의해 한 개의 마법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그만큼 마나 소비를 크게 늘려 놓았었지. 아마?

“하이딩!”

쿤과 가넷이 공격을 시작했을 때 곧장 하이딩을 사용해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조금씩, 기척을 내지 않고 레냐를 향해 걸어갔다.

“쿤, 한 번 더!”

“딜레이에요. 잠깐만 시간을 벌어줘요.”

“스파크, 라이트닝 월!”

가넷이 명령을 내리자, 스파크를 중심으로 전기가 뿜어져 나와 벽을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하급 정령이 쓸 수 있는 마법 한계가 4써클이나 됐었지.

“으음, 됐어요. 할퀴고 지나가는 화마의 손톱, 파이어 스톰!”

“스파크, 방어해!”

쿤이 딜레이가 풀리자마자 마법을 쓴 탓에 망령들의 앞에서 벽을 세우고 있던 스파크는 피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방어 명령을 내렸으나 7써클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

결국 스파크는 소멸되어 버렸고 망령은 아직 3마리나 남았다.

이상하군, 저 정도면 죽었어야 정상 아니던가?

“저놈들, 이제 보니 몸 색깔이 다르다?”

“응? 맞아. 조금 빨간 것 같은데?”

내가 봐도 그랬다. 확 티 나는 건 아니지만 은근히 붉은 색이 감돌고 있었다.

가만, 혹시 저놈들……. 벌써 사람 몇 죽인 건가?

“강화판이군. 제기랄!”

큰 데미지는 못 줘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망령들의 주의를 끌던 스파크가 사라져 버렸으니 쿤과 크루드으 힘만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쿤은 딜레이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냐와의 거리는 약 3m. 조금만 더 버텨라!

“쿤, 아직 멀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삼촌!”

거리를 좁혀오는 세 망령들과 대치하던 크루드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럴수록 망령들의 걸음이 빨라졌고, 급기야 달리기 시작했다.

“큭!”

“우, 운디네. 워터 실드!”

세 망령은 크루드, 쿤, 가넷에게 각각 흩어져 무기를 휘둘렀다.

“잡았다. 블링크!”

“응?”

레냐의 어깨를 짚고 즉각 블링크를 감행했다. 목표는 당연히 가넷의 옆!

“꺄앗!”

운디네가 반구형 실드를 만들어냈지만 망령은 약간 움찔거릴 뿐, 쉽게 실드를 통과했다.

망령의 손이 실드 안으로 들어오자 가넷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성수를 뿌렸다. 성수를 든 손을 휘젓자 성수는 금세 바닥나고 말았다.

치지지직!

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성수에 닿은 망령의 팔이 증발해버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성수가 워터 실드와 융합되었는지, 실드를 뚫고 들어온 딱 그만큼의 팔이 잘려나가 기체로 화했다.

망령이 팔을 부여잡고 괴로워 할 때, 내가 나타났다.

“꺼져라!”

베어진 목이 공중에서 흰 연기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괜찮아?”

“네가 준 성수 덕분에. 아참, 다른 애들은?”

쿤은 시동어만으로 쓸 수 있는 파이어 볼을 계속해서 날리고 있고, 아슈라는 그 옆에서 미스릴 도금된 롱소르를 휘두르고 있었다. 크루드는 자기 몫의 망령을 상대하면서 간간이 검을 날려 쿤을 도왔고.

3대2의 싸움이었지만 조금씩 상처가 늘어가는 건 크루드 등이었다. 그 모습에 안절부절 못하던 가넷은 좀 전의 상황을 떠올리고 힘을 얻었는지, 워터 실드를 유지한 채 쿤이 상대하고 있는 망령에게 달려들었다.

“꺄악!”

가넷은 실드로 망령을 들이받았다. 아직은 성수의 기운이 남아있는지 망령은 부딪힌 부위가 화상 입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블링크, 파이어 샷건!”

비틀거리며 일어나, 워터 실드가 풀려버린 가넷에게 걸어오는 망령의 앞을 막고, 산탄총처럼 불꽃들은 한 번에 쏘아내는 파이어 샷건을 사용했다.

위력은 파이어 애로우의 5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수십 발이나 되니,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상당한 고통을 안겨다 줄 수 있었다. 이놈들은 특히 고통에 약한 것 같으니 잘 먹힐 수밖에.

“꺼어억!”

“필라 오브 파이어!”

놈의 발밑에서 커다란 불기둥이 솟구쳐 놈을 삼켜버렸다. 이로써 남은 건 한 마리!

“파이어 캐논!”

포탄과도 같은 불덩이가 날아가 마지막 망령의 목을 날려버렸다. 크루드와 대치중이라 자칫하면 크루드가 맞을 수 있었지만 내가 그렇게 어수룩해 보이는 가? 이 정돈 파이어 볼로 1m 앞에 있는 개구리 죽이기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휴우, 막판에 이런 놈들이 나올 줄이야.”

“스트 형, 늦었잖아요.”

“스트 형은 느림보!”

“스트, 고마워. 성수랑 구해준 것. 모두 다.”

“역시 가넷 너밖에 없다. 저것들은 고마운 줄도 모르니……. 쳇!”

가넷의 고맙다는 소리에 여간해선 느껴지지 않는 심장의 울림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연기했다.

아직 들켜선 안 되니까.

“아저씨, 레냐가 졌어요. 여기 이거…….”

잠시 잊고 있던 꼬맹이, 레냐가 패배를 인정하며 건넨 건 부서진 돌조각이었다.

가만, 뭐라고 쓰여 있는데? ……Ylem? 이건 또 어느 나라 언어야?

“형, 사람이 올라와요!”

“응?”

“하하, 하하하, 하핫하하!! 이거 오늘 운이 좋군. 이봐, 너!”

마법사인 듯, 2층에서 올라온 사내는 실컷 웃더니, 갑자기 날 지목했다.

“나 말인가?”

“그래, 너.”

“무슨 일이지?”

“그 석판을 내놔라. 아니, 내가 사지.”

별로 쓸모도 없는 석판 따위, 부숴버려도 상관없지만 놈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갖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비슷한 것이 또 있었군. 성을 처음 얻었을 때 악으로부터 지켜준다던 그 석판. 거기 적혀 있던 게…… 뭣이던가?

“천 골드 주면 팔지.”

“감히 네놈 따위가 나와 장난하겠다는 거냐!”

“장난이 아니라니까? 천 골드만 내놔봐. 당장 줄 테니까.”

“말로 좋게 해결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떨굴 때까지 죽여주마! 라이트닝!”

꼴에 8써클 이상은 된다는 건지 놈은 시동어도 없이 3써클의 라이트닝을 날렸다.

하지만 이정도 쯤이야, 블링크 없이도 피하지.

“한가락 하는 놈이군. 하지만 어림없지! 파이어 볼, 더블!”

놈은 뜻밖에도 마스터 클래스였다. 더 메지션을 이용해 널리 퍼진 더블 파이어 볼을 사용한 놈은 득의에 찬 표정을 지었지만 이 정도론 아직 모자라지!

“백스텝!”

쾅!

조금 전, 내가 있던 자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난 이미 백스텝으로 영향권을 벗어난 상태. 그 폭발 중, 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은 볼을 간질이는 미풍뿐이었다.

“이런……. 이번에도 피하나 보자, 파이어볼. 더블!”

“더블 파이어 볼의 단점은, 이거지!”

막 생겨난 파이어 볼을 향해 표창을 하나 던졌다. 표창이 파이어 볼에 닿자 당연히 폭발! 그 여파로 나란히 오던 파이어 볼까지 같이 터져버렸다.

이것이 더 메지션이 고안해낸 대 기사용 마법, 파이어 볼 더블의 약점이다.

“큭, 예삿놈이 아니구나! 클클클, 하지만 승리는 내 쪽인 것 같군.”

“스트, 얘들아!”

“가넷?!”

어느새 놈은 가넷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제길, 이러면 꼼짝할 수가 없잖아!

“난 괜찮으니까 어서 공격해! 어차피 한 번 죽으면 그만이야!”

“누가 널 죽게 내버려 둔다더냐? 큭큭큭!”

놈은 품에서 손수건 같은 걸 꺼내 가넷의 코와 입을 막았다. 한 3초쯤 지났을까? 가넷의 몸이 축 늘어졌다.

무슨 짓을 한거지?

“아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영화에 보면 납치할 때 쓰는 마취약 있잖아? 그것일 뿐이니까. 좀 더 정확히는 순수한 알코올이지. 어때, 이제 거래할 마음이 생기나?”

“스트, 그냥 저놈을 죽이는 게…….”

“어르신들끼리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똥파리가 끼어드느냐!”

“뭐야!”

“그만둬.”

똥파리 취급당해 놈의 페이스에 말려들 뻔한 크루드를 제지했다. 내가 덤비면 이야기야 할 것 같지만 빨리 승부를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니까 조심해야 한다.

마스터는 괜히 마스터가 아니다.

“거래에 응하지 않겠다면?”

“이것 참 반반한 계집이로구나. 살결도 뽀얗고, 피부도 매끄럽고……. 힐름 내에서 성행위는 금지되어 있지만 만지는 건 허용된다는 말씀이야? 클클클.”

놈은 상당히 긴 편인 혀로 입술 주위를 핥으며 가넷을 훑어봤다. 저, 저놈이!

“뭘 원하는 거냐!”

“방금 얻은 석판.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왜 그렇게 이딴 석판에 집착하는 거지?”

“알고 싶으면 너도 마지막 층에 가봐라. 모든 걸 안다 해도 내 상대는 못 될 테지만 말이야. 크핫핫핫!!”

“알았다. 여자를 먼저 보내줘라.”

“내가 뭘 믿고? 넌 지금 날 죽이고 싶어 미치겠잖아, 안 그래? 킬킬!”

“……동시다. 내가 석판을 던지는 즉시 그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넌 무조건 죽는다. 그리고 힐름에 다시는 발 못 붙이게 만들어주마. 서버 내 모든 유저를 동원해서라도!”

“이거, 이거 어디 무서워서 살겠나? 좋아.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해주지.”

“받아라!”

석판은 던졌다. 가넷과는 최대한 멀게!

“다크 볼! 샤이닝 볼! 퓨전, 카오스 볼!”

석판을 주우러 감과 동시에 놈은 가넷에게 회색의 구체를 날렸다.

“차지 볼트, 더블!”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었지만 회색 구체를 향해 차지 볼트 두 방을 날리고 가넷에게로 다가갔다. 순수한 알코올에 정신을 잃은 가넷은 흔들어 봐도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스트, 위험해! 실드!!”

갑자기 크루드가 내 등 뒤로 몸을 날렸다. 그것도 갑옷에 내장된 실드까지 사용해 가면서.

콰과과광!

선더를 능가하는 폭발음이 들리며 등에 큰 충격이 전해져왔다.

이 묵직함과 차가운 금속의 느낌은 다른 게 아닌 크루드의 몸이었다. 폭발의 여파에 휘말려 나 역시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지키고 말겠다!”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며 가넷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머리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크루드 녀석은 갑옷 등의 무게 때문인지 우리를 비껴나가 맨 바닥에 부딪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벼운 우린, 어딘가에 부딪힐 때까지 계속해서 날아갔다.

“실드!”

레비테이션이나 플라이로 위기를 모면하기엔 너무 늦었다. 남은 건 실드로 몸이 받는 데미지를 최소화 시키는 것! 곧 있을 충격에 대비해 실드에 마나를 한껏 불어넣었다.

쿠웅!

데굴데굴.

우리가 멈춰선 곳은 세이프티 존 안, 그것도 2층으로 가는 계단의 바로 위였다. 덕분에 우린 또 한 번 계단을 굴러내려 갔다.

“스트 형!”

“크윽…….”

“형, 괜찮아요?”

“난 괜찮아. 그보다 소연이는?”

“누나는 괜찮……. 아니, 형이 누나 실제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그, 그건…….”

제기랄, 말실수를 해버렸다.

“일단 상태부터 살펴!”

“알았어요.”

나름대로 충격을 줄여 준다고는 했는지 어떨지 몰라 일단 아슈라에게 치료를 맡기고 난 급히 계단 위로 올라왔다.

“빌어먹을!”

놈은 이미 석판을 가지고 사라진 뒤였다. 남은 건 엉망진창으로 찌르러진 갑옷을 입은 크루드와 그 옆에서 울고 있는 쿤뿐. 우리 대신 무언가를 막아준 크루드는 보통 중상이 아니었다.

“크루드, 괜찮아? 눈 좀 떠봐!”

쉴 새 없이 상급 포션을 들이부었지만 크루드의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발끝부터 서서히 회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런……!”

“삼촌!”

“스트 형, 누나가 깨어났어요!”

크루드가 죽으면서 뭔가 떨군 게 없는지 확인하고 쿤과 함께 가넷이 있는 곳으로 갔다.

가넷은 아직도 머리가 아픈지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크루드 형은요?”

“죽었다. 젠장, 내가 단번에 승부를 봤더라면…….”

“네 책임이 아니야. 넌 잘 싸웠어. 다 내 탓이지…….”

침묵이 흘렀다. 1층과는 달리 검을 든 망령들이 세이프티 존 주위를 어슬렁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쿤이었다.

“난 삼촌한테 갈래.”

“그래, 나도 같이 가자.”

“난……. 오늘은 그만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가넷은 일이 있는지, 크루드를 보고 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너희들 먼저 가. 난, 놈이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야겠어. 이 던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사실이 숨겨져 있는지 밝혀내서 놈을 짓밟아주겠어. 아이디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없애놓고야 말겠어!”

누나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고 쿤과 함께 사라졌다. 가넷은 말없이 제자리에 서 있는 게 로그아웃 상태인 것 같고.

던전 안에 남은 건 이제 나 혼자다.

“비록 잠시일지라도 나 자연과 하나가 되리니, 인비지빌리티!”

하이딩에 비해 월등히 많은 마나를 잡아먹는 투명화 마법이지만 오랜 지속시간을 원한다면 이편이 더 경제적이다. 인비지빌리티는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말하거나, 마법을 쓰거나, 무기를 잡으면 풀려버리지만 그렇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지속되니까.

인비지비리티를 쓰고 가다가 실수로라도 망령들과 스치게 되면 하이딩을 사용하는 식으로 어렵지 않게 한 층, 한 층을 통과해나갔다. 이로써 5층!

“비록 잠시일지라도 나 자연과 하나가 되리니, 인비지빌리티!”

몇 층이 마지막인지는 나도 알 길이 없었기에, 마나 포션을 한 병 따 마시고 다시 인비지빌리티를 시전했다.

길을 따라 코너 하나를 돌자, 더 이상 인비지빌리티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은 막혀 있었고, 웬 노인 모습의 망령 하나가 돌 위에 걸터앉아 있었으니까.

“멜트, 윈트 커터!”

“흘흘흘. 그만두게나.”

멜트의 불꽃을 윈드 커터에 담아 날렸는데 노인은 요상한 웃음을 흘리며 손짓만으로 소멸시켜버렸다.

물 속성 마법 같은 걸로 상쇄시킨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한 거지?

“AI인가?”

“그렇다네. 해칠 생각은 없으니 이리 와서 좀 앉게나.”

“……그러죠.”

노인이 가리킨 돌 위에 나도 걸터앉았다. 노인은 나를 슬쩍 훑어보더니 껄껄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그 정도면 훌륭하군, 훌륭해. 자네라면 아까 그놈보다 낫겠어.”

“그놈이라면…….”

“오면서 못 봤나? 자칭 카오스 마스터네 하는 멍청한 마법사 놈 말이야.”

“……봤습니다.”

“내놔 봐.”

노인은 뜬금없이 무언갈 내놓으라고 했다.

“뭘…… 말씀이십니까?”

“뭐긴 뭐야. 돌이지. 네놈한테서 고대의 향기가 나는데 발뺌할 샘이냐? 어차피 여기에 왔다면 마법화시키러 온 거 아니야?”

“마법화라뇨?”

“엥? 너도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냐? 좋아. 설명해주지. 너, 돌 가지고 있지? 아, 석판 말이야. 석판. In이나 An, Uus, Des. 이중에 하나, 가지고 있잖아?”

“그걸 어떻게…….”

“아, 냄새가 난다니까? 그것도 아주 강하게! 이런 진한 냄새를 풍기는 놈들은 저것들밖에 없어.”

이렇게나 잘 아는 마당에 숨길 것도 없겠다 싶어 품속을 뒤적거려 An이 적힌 석판을 꺼냈다. 노인은 석판을 잽싸게 빼앗아가더니 한 번 살펴보고 다시 내게로 던졌다.

“진품 맞구먼. 흠흠, 아무튼 석판은 모두 17개. 이 석판들에는 각기 고대인의 힘이 담겨져 있다. 종류와 뜻은 Corp 악마적, 파괴적, 공격적. Ylem 땅. Flam 불. Wis 정신. Uus 민첩, 올리다. 상승시키다. Mani 힘, 회복. Ex 올리다, 증가시키다. Sanct 방어, 성스러운. An 반대, 해제 줄이다, 잠그다. In 주입, 공격적, 올리다, 열다. Grav 지역, 필드. Vas 범위 안, 타깃 안, 거대한. Xen 소환. Des 내리다, 깎다. 떨어뜨리다. Kal 보다 강한, 향상된. Por 상처, 충격. Ort 일시적인 소환, 순간적인 소환. 알아들었냐?”

“아뇨, 전혀!”

“못 외웠어도 상관없어. 네 기억 어딘가에 저장돼서 언제든 불러낼 수 있을 테니까.”

리얼모드 2단계나 1단계 상태에선 다시 듣거나 볼 수 있다는 소린 것 같다.

“이것들은 혼자서는 힘을 내지 못하고 서술어가 되는 다른 석판과 합쳐서야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In과 Mani를 합치면? In Mani가 되어 회복마법이 되는 거지. 하지만 Corp 와 Ylem을 합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뭐, 이런 식이지. 이렇게 하다라는 것이 안 붙은 석판끼리는 모여 봤자란 소리야. 이렇게 서술어가 되는 석판은 아까 말했던 In, An, Uus, Ses. 조합의 핵심 키워드지. 이것들은 다른 석판과 조합돼서 다양한 마법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그 독자적으로 마법화될 수 있어.”

“마법화가 뭔데요?”

“아, 지금 말하려고 하잖아! 마법화는 말 그대로 마법화시키는 거다. 주문까지 외워야하지만 위력도 조금 상승하고, 마나 소비도 줄지. 대신 한 번 마법화에 사용된 서술어 석판은 더 이상 다른 것들과 조합할 수 없게 된다. 조합된 석판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을 내려야지. 아, 그리고 마법화되지 않은 석판을 가지고 있으면 석판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 죽을 경우, 석판 하나 이상을 무조건 빼앗기게 된다. 어떤 것일지, 몇 개일지는 랜덤.”

잠시 눈을 감고 차분히 머릿속에 들어온 내용들을 정리했다.

“대충 무슨 소린지는 알겠는데……. 그 석판을 어디 가면 얻을 수 있는 거지?”

“그건 나도 모르지. 일단 소재가 확실한 건 7개다. 네가 한 개. 그 잿더미가 6개.”

“잿더미?”

“그 회색 로브 걸친 음침한 놈 말이야. 그놈이 여기 있던 석판 6개를 몽땅 쓸어갔지 뭐냐. 거기엔 In도 끼어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됐다. 얻은 김에 마법화시킬 것 있냐니까 더 모아서 이것저것 따져보고 다시 온다더군. 이제 10개 남았으니까. 열심히 찾아봐. 옛날에 흩어진 거라 나도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고, 잊힌 던전이나 숨겨진 곳들을 잘 찾아봐.”

“그러죠. 찾는 김에 그 잿더미 자식도 찾아서 없애버리고!”

“그래, 그래. 그건 마음대로 하고. 난 이만 자련다. 이제 가봐라.”

노인은 앉고 있던 돌을 침대삼아 드러누웠다. 어차피 내가 이 석판을 가진 이상, 언젠가 다시 하 s번 만나게 될 터. 그땐 도망치게 놔두지 않겠다!

“아참, 석판 조합은 꼭 두 개의 석판만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잘 연구해 봐라.”

노인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난 리턴을 써서 마을로 돌아왔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거리의 NPC들. 잘 살펴보니 주인이 바뀐 오마이스 영지였다.

“스트 형!”

리턴을 사용했을 때 도착하는 마을의 분수대 앞에는 이미 아슈라가 대기하고 있었다. 인사와 따라오라는 말만을 한 아슈라는 어느 여관방으로 날 데려갔다.

이거, 도살장 끌려가는 기분이로군.

“들어가요.”

“아, 왔냐?”

방 안에는 크루드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쿤은 그 옆에서 간호중이었다. 심하게 다친 건 사실이지만, HP만 회복하면 통증도 사라질 텐데 엄살은…….

“그렇게 보지 마라. 나도 괴로우니까.”

크루드는 눈짓으로 옆에 있는 쿤을 가리켰다.

쿤이 억지 부려서 누워있는 건가 보군.

“몸은 좀 어때?”

“말짱하지. 망령들 잡으면서 레벨 업이 상당히 됐던지 오히려 레벨은 조금 올랐기 때문에 기분도 괜찮고.”

“그런데 대체 어떤 공격이었던 거야? 내 뒤통수를 친 게.”

“네가 뒤통수를 갖다 댄 거다.”

“뭐?”

크루드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아니, 잠깐. 그렇다면 혹시……!

“그 회색 구체가 그런 위력을 낸 거라고!”

“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거지? 차지 볼트 두 방이면 최소 방향이라도 틀어졌어야 했거늘 그걸 무시하고 온 다는 것은…….

“제길, 다음에 만나면 그 기술을 쓰기 전에 끝장을 봐야겠군.”

“자, 스트 형,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 줄 차례에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어떻게 우리 누나 실제 이름을 아는 거죠?”

“……사실, 난 가넷. 아니, 소연이와 같은 초등학교엘 다녔었어. 처음 본 건 유치원 때라고는 하는데 기억은 안 나고, 아무튼 6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난 키가 커서 맨 뒤에 앉았고, 소연이도 꽤 큰 편이라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지. 자리까지 정확히 기억해. 소연인 내 오른쪽 대각선 앞에 앉았는데, 오히려 그 편이 얘기하기 편해서 좋았지. 내가 그때까진 무척이나 소심하고 내성적이었거든. 어색해하는 내게 먼저 말을 걸어준 건 소연이었어. 처음엔 그냥 좋은 앤가 보다하고 생각했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속에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더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심장은 소연일 위해 더 큰 공간을 마련해두고 있었어. 하루하루 소연이의 웃는 모습을 보는 기쁨에 학교를 나왔었고, 항상 남들보다 30분쯤 일찍 등교했었지.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졸업이 다가왔어. 졸업식 날, 사랑한다고 고백해 볼까 수도 없이 마음먹었지만 결국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하고 헤어졌지. 중학교에 가서도,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 한마디를 못한 나 자신을 자책하며 날 원망하며 살았어. 중3땐가? 우연히 인터넷으로 소연이의 메일을 알게 되었어. 그래서 매일 접속하기를 기다렸고, 우연인척 말 걸었어. 소연인 여전히 날 친한 친구로 대했어. 아주 편하게. 남자 친구 얘기까지 하면서 말이야. 그러다 어느 날 울컥하는 마음에 사랑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지.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주변은 맴돌 수 있었을 텐데 바보같이 말이야. 당연히 퇴짜 맞았지. 그후론……. 똑같이 대한다고 말은 하는데 내 감정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부담주기 싫어서 내가 먼저 연락을 끊었어. 그리고…… 도피처로 판타지를 택했지. 큭큭, 그 후 한동안 판타지에 아주 미쳐서 살았었지. 몰입하게 되면 아무런 생각도 안 나거든. 그러다가 글을 썼었고. 그 덕에 힐름에서 이 정도 위치에 올랐지.”

난 가면을 벗어던졌다.

“남들은 철모를 때의 풋사랑이라고들 할지 모르지만……. 내게 있어선 절대 그렇지 않아.”

“저 얼굴은……. 콜로니스트? 스트 형이 콜로니스트였단 말이야?!”

“너, 너……!”

쿤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눈만 깜박거렸고, 아슈라와 크루드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만 뻐금거렸다.

사기꾼이라고 욕해도 좋고, 한 대 때려도 좋다. 내가 진짜 두려운 건, 레벨, 지위 등에 구애받지 않고 사귄,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이들과 오랜만에 재회한 소연이를 잃는 것이다.

“……매형!”

아슈라가 냅다 달려와서 날 껴안았다.

매혀엉?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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