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바이어선 (27/43)

#리바이어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힐름에 접속했다.

블러드란 대형 길드가 홀연히 떠나버렸음에도 변한 건 하나 없었다. 있다면 수많은 PK들이 그로티우스 산맥 한 자락에 위치한 범죄자 마을로 몰려들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정도.

금세 메워진 빈자리에 왠지 모를 큰 허무함이 밀려왔다.

“크루드는 아직도 드워프 마을이려나? 귓속말 크루드.”

“아직도 드워프랑 노냐?”

“스트? 아니, 너 가고 나서 바로 완성됐다. 지금 일리아든데, 올래?”

“그래야지. 이번에도 의뢰소?”

“아니, 퀘스트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아슈라 누나를 합류시키려고 온 거야. 겸사겸사 아이템에 마법도 새기고. 그러니까 마법사 길드로 오면 돼.”

“아슈라의 누나? 설마, 내가 마스터니 하는 것들 말한 건 아니지?”

“내가 바보냐? 미리 주의시켰지. 흐흐흐! 그보다 상당한 미인이니까 침 닦을 손수건이나 준비해 와라.”

“호오, 그래? 네 안목을 믿어보지!”

“귓속말 해제. 텔레포트!”

단시간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무엇보다 일리아드로 들어가려면 배를 타고 크디큰 엘빈 호수를 가로질러야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에 단숨에 스크롤로 이동했다.

마법도시라는 수식어 이외에도 물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은 곳답게 일리아드에는 분수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낭만의 도시라고도 불릴 만하군.”

이곳의 지리는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지라 헤맬 일 따윈 없었다. 아니, 지리를 몰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만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탑을 보고 찾아가면 되니까!

“내가 좀 늦었나?”

“아냐, 아직 아슈라도 안 왔어.”

크루드와 쿤은 마법사의 탑이라고 불리는 마법사 길드의 건물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탑의 안쪽만큼이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입구에서 크루드를 쉽게 찾을 수 있던 건 순전히 쿤 때문이었다. 미스릴 로브가 발하는 영롱한 빛 때문에.

“크루드, 난 쿤 데리고 창고에 좀 갔다 올 테니까 넌 여기서 아슈라 기다려.”

“창고? 뭐, 알아서해.”

벌써부터 쿤의 로브를 노리고 주위를 맴도는 놈들이 생겨났다. 본인은 모르는 듯했지만.

크루드는 최대한 어두운 색의 로브를 꺼내 쿤을 감싸고 창고로 뛰었다.

놈들도 같이 뛰었지만 경비병이 있는 이상 섣불리 행동하진 못했고 그 사이 쿤을 달래 미스릴 로브를 창고에 맡겼다.

“피, 저것만 있으면 레벨 올리기 쉬울 텐데…….”

“하지만 PK들에게 수십, 수백 번 습격당하는 것보단 낫잖아? 저런 아이템은 지킬 만한 힘이 있을 때 써야하는 거야.”

충분히 설명해줬음에도 쿤은 마냥 아까운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에구, 달래려면 또 진땀 빼겠군.

“아, 스트 형!”

다시 마법사 길드에 도착했을 때, 아슈라가 날 먼저 발견하고 소리쳤다.

“아, 거기 있었……!”

손을 흔드는 아슈라에게로 걸어가다가, 그 옆에 서있는 금발의 여성을 보고 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니, 온몸이 굳어버렸다.

저 금발을 흑발로 바꾸면…….

“소연이…….”

……였기 때문에.

“삼촌! 마법은 다 새겼어?”

“경량화, 마법 저항, 실드 주문을 다 새겨놨지! 그런데 가지고 있던 검, 갑옷까지 다 팔아서 마련한 45골드 중 43골드나 써버리는 바람에 다름 사냥에서 뭔가 벌어올 때까진 쫄쫄 굶게 생겼다.”

“내가 좀 빌려줄까? 난 로브에 마법 못 새기겠다고 해서 돈 많은데.”

“오옷! 쿤, 역시 넌 내 구세주야!”

“대신 1주일 간 학원 빼주기!”

“끄응, 알았어.”

크루드와 쿤이 협상하는 동안 난 몇 번이고 가면에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기를 반복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가면을 벗고 소연이 앞에 나서고 싶지만 또 도망가 버릴까 봐……. 그게 두려웠다. 이대로라면 지켜 볼 수는 있을 텐데…….

“아참, 그러고 보니 인사를 안 시켜줬네. 이쪽은 아슈라의 누나인 가넷. 56레벨 정령술사고, 나이는 나랑 동갑. 쿤은 알거고. 이쪽은…….”

“스트, 클래스는 닌자. 나이는 크루드와 같습니다.”

맴도는 것을 선택했다.

“닌자라는 클래스도 있었나요?”

“정식으로 인정 된 클래스는 아닙니다만 로그와 마법사 클래스를 조합해서 제 나름대로 부르고 있죠.”

“그렇군요. 그런데 그 가면은……?”

“죄송하지만 개인 사정상 벗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간 벗은 모습을 볼 수 있겠죠? 제가 서먹한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계속 가면을 쓰고 계시면 아무래도 거리감이 느껴질 것 같아서…….”

“예…….”

……언젠가는.

“야, 야. 동갑인데 말들 놔. 원래 이놈이 이렇게 뻣뻣하지 않은데 널 보고 긴장했나 보다.”

“그럼 그럴……까?”

크루드의 중재에 소연, 아니 가넷이 먼저 말을 놓았다.

밝고, 활달하고, 어색한 건 못 참는 성격……여전하네.

“자, 그럼 인사도 끝난 것 같은데 이동해 볼까? 가고 싶은 던전이라도 있는 사람?”

“던전 말고……. 난 이 근처를 더 돌아다녀 보고 싶은데? 물의 신전이란 곳도 가보고.”

“난 찬성! 그동안 너무 사냥만 해서 질렸어. 삼촌, 우리 놀러 다니자!”

“아, 아슈라, 넌 어때? 새로 얻은 검, 써보고 싶지 않아?”

“그게, 써보고 싶기야 한데. 누나의 보복이 무섭다 보니……하, 하.”

“스트, 넌? 너도 무기 새로 얻었잖아.”

크루드는 내게 두 개의 작은 칼을 건네며 너만 찬성하면 밀어 붙일 수 있어! 라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보내왔다.

미안하네, 친구. 하지만 난 소연이의 의견에 반대 할 수 없다네.

“이 근처에 볼거리가 많지. 때론 여유를 갖는 것도 좋아.”

“윽! 스트, 너마저…….”

크루드가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크루드, 넌 지금 새 장비를 시험해 보고 싶은 거지?”

“응? 그렇지.”

“그럼 멀리 갈 것도 없네. 우린 무기고, 넌 방어구잖아? 그렇다면 우리가 널 공격하면 되지. 아, 내건 암살용 무기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흐흐흐…….”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발 한 발 다가가자 크루드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사람 살류!”

장난인 걸 뻔히 알면서도 소리 지르며 도망가는 크루드의 익살에 모두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소연이는 웃을 때가 제일 예뻐.

“이제 쇼핑하러 가는 거지? 쿤, 이리와. 넌 누나랑 같이 가자.”

“응. 이쁜 누나.”

“헉?”

“쇼, 쇼핑?”

소연이, 아……. 자꾸 이름을 부르게 되는군. 가넷이 말한 둘러본다는 관광이 아닌 쇼핑을 말하는 것이었다.

잠시후, 우리 남자 셋은 착실한 짐꾼이 되어 있었다.

쇼핑은 양손 가득 채우는 맛이라며 아이템 창에 넣지도 못하게 했기 때문에 낑낑대며 물건들을 들고 다니길 무려 4시간. 분수대에 앉아 겨우 20분간 숨을 돌리고, 이번엔 일리아드의 명소를 찾아 관광이 시작되었다.

하루 세 번, 30m 높이까지 솟아오르는 분수와 뱃길을 지키는 머맨을 보고 배에 올라 물의 신전으로 향했다.

물론 일리아드의 볼거리는 이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날짜를 맞추지 못해 많이 놓쳤을 뿐.

나도 다 알지는 못 하지만 2주에 한 번씩 더 메지션이 하는 마법 시연과 일리아드 성주의 특권으로 파트리크가 거대한 해마를 타는 모습, 1주일에 한 번씩 한다는 연극 공연 등이 있다던가?

“저기가 물의 신전?”

“이야, 멋진데?”

은색과 파란 색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물의 신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꼭 오페라 하우스처럼 생겼군.

“다 왔습니다. 모두 절 따라오세요.”

안내원은 자신과 떨어지지 말 것을 당부하며 앞장 서 나갔다. 하지만 가넷은 쿤의 손을 붙잡고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앞의 사람들과 거리가 꽤 벌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아 디스커넥트인가 했더니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우리, 저 사람들하고 따로 돌아다니자.”

“따로?”

“응, 따로. 저 사람들을 따라가면 설명도 듣고, 차근차근 둘러보기야 하겠지만 마음에 드는 곳에 오래 있을 수도 없고 불편하잖아? 그러니까 우리끼리 돌아다니다가 볼 거 다 보고 가자.”

“누나, 그러다 배 떠나면…… 윽!”

“리턴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다 보고 난 다음엔 너희 가자는 데로 갈 테니까 한 번만 봐주라. 응?”

발등이 밟힌 아슈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와 쿤은 당연히 오케이. 크루드도 가자는 데로 간다는 말에 솔깃해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미 안 보일만큼 멀어져 버린 앞사람들을 피해 반대쪽으로 문을 찾아 들어갔다.

물고기, 인어 석상들이 늘어서 있는 복도를 지나자 꽤 큰 예배당이 나왔다. 물의 신전이라선지 주위가 온통 하늘색, 파란색인 예배당의 앞에는 특이하게 제법 노출도 심한 옷을 입은 여인의 석상이 놓여 있었다.

보통은 성모 마리아 상 같은 걸 놓지 않던가? 뭐, 설정 나름이지만.

“헤에…….”

“남자들이란…….”

입을 떡 벌리고 구경하는 아슈라와 크루드의 모습에, 가넷은 쿤의 고개를 돌리다 날 쳐다봤다.

나야 가넷을 훔쳐보기도 바쁘니 그런 상태가 아니었고, 어깨를 으쓱여 줌으로써 답했다.

“그런데 신관이라도 한 둘 있을 법 한데 아무도 없네?”

“그러게. 불러 볼까? 아무도 없습니까?!”

머쓱한 표정으로 정신 차린 크루드가 크게 소리쳐봤지만 예배당 가득 울리기만 할 뿐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거 이상하다 못해 수상한 걸?”

크루드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호수에 섬처럼 덩그러니 신전 하나만 떠 있는 것부터가 수상했지. 뭔가 있을 것 같군. 찾아보자!”

나와 크루드, 아슈라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RPG에서 신전이 나올 때 가장 많이 써먹는 수법은 단상 주변 비밀 통로!

“비밀 통로를 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하나씩 해보면 뭐 하난 걸리겠지.”

단상을 밀고, 당기고, 흔들어봤다가 뒤집기까지 했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레버 같은 것도 없는 걸 보니 단상은 아닌 듯. 이번엔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이런저런 장식물을 움직여 보다가 눈에 띤 것이 장식용 산호초. 건들면 툭 하고 부러져 버릴 듯 연약해 보였지만 어차피 내 것도 아니고, 나중에 걸리면 하나 사다주면 될 거란 생각에 힘을 줘서 꺾었다.

쿠구구구구구!

“빙고!”

물의 여신쯤으로 추측되는 석상의 발밑이 갈라지며 계단이 생겨났다. 역시 힐름도 일반RPG의 설정을 상당히 가져다 쓴단 말이야!

“안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진형을 짜서 간다. 크루드와 내가 앞장서고 중간에 가넷과 쿤, 아슈라는 맨 뒤에서 혹시라도 누가 따라오는지만 살펴줘. 그리고 혹시 내가 죽으면, 스켈레톤이라도 소환해서 도망칠 시간을 벌어. 어쩌다보니 성향이 악이 되어서 페널티는 없을 거야.”

아무리 이제 본 실력을 내기로 마음먹었다지만 기습에는 당할 수도 있기에 미리 아슈라에게 당부해 놨다. 적어도 가넷만큼은 죽게 만들 수 없으니까.

한 5분쯤 걸어 내려가자 무슨 수족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바다 속이었고 이 시대의 기술로 가능한지 모르지만 유리 같은 것으로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

온갖 물고기가 돌아다니는 것이 꽤나 장관인지라 우리는 한동안 그곳에서 머물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가넷이 움직이지 않았다.

“멈춰. 진노하는 파괴의 불꽃. 플레임 스트라이크!”

구경이 끝나고 더 내려가자 꽤 커다란 철문과 그 양옆에 산호초로 만든 머맨 둘이 삼지창을 들고 서있는 게 보였다.

특이한 점은 머맨에게 튼튼한 다리가 있다는 점과 머맨들의 눈이 가고일의 그것처럼 퀭해 있다는 것.

나는 이것들이 가고일의 일종이라 판단하고 선공을 가했다.

쾅!

약 15m 지점부터 유리가 아닌 돌벽으로 다시 바뀌었기에 통로가 무너지진 않았다. 오른쪽의 산호초 머맨이 박살나자 역시나, 왼쪽 머맨의 눈에 파란 빛이 돌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링크! 하이딩!”

딱 5초다. 첫 번째 머맨이 박살나고부터 두 번째 머맨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들어가자.”

“쿤, 스트……. 대체 레벨이 몇이야?”

“우움……. 나도 몰라.”

가디언이라면, 게다가 이렇게 숨겨진 곳을 지키는 놈들이라면 적어도 70레벨 대의 파티나 돼야 잡기 때문에 가넷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끼이이익!

두꺼운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비껴 섰다.

넓은 장소가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철문 뒤에 있는 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계단을 따라 걷기를 10분여. 드디어 빛이 보였다.

“여긴…….”

섬이었다.

물의 신전과는 조금 떨어진, 바위와 안개로 둘러싸여 그 존재조차 찾기 힘든 그런 섬이었다.

한데 잔뜩 모여 비밀 예배라도 드리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석상에 조각됐던 그 모습 그대로의 여인이 혼자 바다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여신입니까?”

멍한 눈으로 크루드가 물었다.

“훗, 아니랍니다.”

크루드의 물음에 여인은 웃으며 부정했다.

“그럼 성녀?”

“음……. 제가 가진 약간의 치유력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 단지 물을 조금 깨우쳤을 뿐이랍니다.”

물을 조금 깨우쳤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라무, 잠지드에 이은 물의 그랜드 마스터!

“혼자일 때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 맞붙자니 가넷이 위험해질 게 뻔해서 그럴 수 없었다.

물이라면 다른 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약할 텐데…….

“다들 물러서!”

“응? 설마 너……. 안 돼. 내가 먼저 찜했단 말이야!”

상황 파악을 못 한 크루드는 내가 저 여인에게 흑심을 품었다 생각하고 먼저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잠지드와 동류야. 저 여자.”

“뭐, 뭐라고?”

“쿤, 잠지드가 누구니?”

“덩치가 엄청 큰 흰머리 아저씬데 키도 6m 가까이 되고, 괴물이에요.”

크루드와 아슈라는 제자리에 굳고, 쿤은 가넷에게 열심히 설명해줬다

“헉, 스트. 네게 맡기마.”

“저번보다야 쉽겠지만……. 저번에도 특수한 아이템 써서 겨우 이긴 거라 솔직히 나도 자신은 없다. 애들 데리고 도망가. 도망칠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까.”

“다들 들었지? 후퇴다!”

“……왜 도망가는 거죠?”

크루드가 애들을 우르르 몰고 나가자 노출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물의 그랜드 마스터이기 때문이지.”

“어떻게 아셨죠?”

“경험이지. 전기의 라무, 땅의 잠지드. 이 두 놈을 통해서.”

노란색, 황토색의 구슬을 꺼내 보이며 답했다.

“저 이외의 그랜드 마스터들인가 보군요. 당신 같은 보통의 마스터가 혼자서 그들을 이겼을 리는 없고, 필시 협공을 펼쳤을 텐데 지금 당신은…… 혼자네요.”

“그래서, 난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소린가?”

“네. 분명히.”

“나도 그랜드 마스터를 단신으로 이긴다는 것에 큰 기대는 안 해. 하지만 공격력 약한 물을 다루는 그대에겐 왠지 자신이 생기는 군. 블링크! 하이딩!”

아무리 물이라도 그랜드 마스터라는 칭호를 노름으로 따진 않았을 테니 비겁해도 할 수 없다.

그녀의 오른쪽에서 나타나 곧장 목을 찌르기 위해 도약했다.

포옹!

도 끝이 갑자기 생겨난 큰 물방울을 뚫지 못하고 공중에 멈춰섰다.

“아쿠아 볼!”

“크헉!”

아쿠아 볼의 위력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수압이 복부를 강타했다.

튕겨진 몸이 바닥에 수차례를 튕기며 혼을 쏙 빼놓았다.

한데 이상하게도 무방비 상태인 동안 추가 공격이 없다.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건가? 파이어 월! 하늘을 대신하는…….”

“아쿠아 월!”

그녀와 나 사이에 세워진 불의 장벽이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너무도 쉽게 사라져버렸다.

어차피 시야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상관없지!

“……심판의 빛, 선더!”

쿠르르릉!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비가 오고 있었다면 위력이 배가 되었을 테지만 컨트롤 웨더를 쓸 시간도 없고, 쓴다 해도 나까지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에 바로 벼락을 떨어뜨린 것이다.

백색 섬광과 주위에 가득한 흙먼지 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었으면 좋겠지만 명색이 그랜드 마스터이니, 확인 사살이 필요하겠군.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선더. 더블!”

흙먼지가 걷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두 줄기의 벼락이 연달아 내리쳤다. 섬 자체가 가라앉아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찔한 파괴력에 승리를 확신했다.

“윈드!”

섬 전체를 가득 메운 흙먼지를 걷어내기 위해 상당량의 마나를 윈드에 실었다.

끝에서 반대편 끝이 보일 정도로 작은 섬이었기에 강풍은 쉽사리 흙먼지를 걷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길게 파인 땅의 중심에 온전한 모습으로 그녀가 서 있었다.

“물의 방패를 네 겹이나 뚫다니, 대단한 파괴력이네요. 아쿠아 스피어!”

“파이어 랜스, 더블!”

하늘을 향했던 한 겹 남은, 네모난 물의 방패가 전면을 향하더니 창의 형태로 변해서 쏘아졌다.

아쿠아 스피어라면 2써클. 4써클 파이어 랜스로 뚫고 기습이다!

“어……?!”

분명 2써클이나 차이가 나고, 내 쪽은 두 발인데 뚫린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상상도 못한 결과에 놀리며 다급히 바닥을 굴렀다.

찌리릿!

아쿠아 스피어에서 튄 물방울 하나가 피부에 닿자 찌릿하며 감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선더의 기운이 스며든 건가?

“제길, 혼자선 무리군.”

“포기하시는 건가요?”

“그래, 일단은.”

“다시……오겠다는 말이군요.”

“당연한 소리!”

“좋습니다. 언제든 오세요. 대신, 협공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런 상황이 되면 저도 어쩔 수 없이 공격적으로 변할 테니까요.”

“오만하군.”

“그런가요? 하지만 이곳의 저의 영역. 상대가 인간인 이상, 물 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상 타이달 웨이브로 밀어내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겠죠. 이 작은 섬에는 몸을 지탱할 만한 무언가가 없으니까요.”

타이달 웨이브.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는 마법.

힐름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 줄 알았는데 물의 그랜드 마스터라고 쓸 수 있는 모양이다.

확실히 물살에 휩쓸려 버리면 방법이 없겠어.

그나마 가망이 있는 건……. 1대1로 수십, 수백 명이 싸우게 해서 마나를 고갈시키고 마무리하는 것뿐인가?

마인 상태라면 날개와 헬 파이어를 이용해서 잡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남은 뿔은 이벤트에 쓸 것 뿐이니‥. 그런 짓을 했다간 바로 계정 삭제겠지.

“나중에 오지. 이곳을 기억시켜도 되겠나? 이번에도 숨어들어 온 거라 다음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서 말이야.”

“좋을 대로 하세요.”

“좌표 기억.”

그녀의 허락을 받은 뒤, 랜덤 텔레포트 스크롤 한 장에 좌표를 기억시켰다.

“아참, 이름 좀 알려주지? 당분간 내 목표가 되었으니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리바이어선.”

“인간…… 인가?”

“글쎄요?”

자신을 리바이어선이라 칭한 여인이 살짝 눈웃음을 치며 말끝을 올렸다.

[바다의 신으로 불리는 바다의 지배자, 바다 뱀 리바이어선. 울음소리로 대해일을 부른다는 괴수. 일부 게임에선 소환수로도 등장한다.]

이것이 내가 아는 리바이어선의 정보였다.

진짜 그 리바이어선이고, 지금은 폴리모프라도 한 것이라면……잡는 걸 포기해야 할지도.

“젠장. 나중에 보자!”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돌아간 거 아니었어?”

“널 두고 어떻게 가겠냐. 그런데, 이긴 거야?”

“아니, 졌다.”

“살아 돌아왔잖아?”

“비참하지만 공격이 안 통하는 걸 확인했을 뿐이야. 평화주의자쯤 되는 것 같더군. 쳇!”

“그래도 다행이다.”

가넷의 한 마디에 꿀꿀했던 기분이 싹 가셨다.

그래, 이미 나에겐 구슬이 두 개나 있고 소연이까지 곁에 있는데 더 욕심내서 무엇하랴!

“입구를 봉쇄하고 신전 기사들은 침입자를 처단하라!”

“이런, 들켰나 본데?”

꽉 막힌 지하라 멀리서 지르는 고함 소리도 제법 선명하게 전달됐다.

이크, 단상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게 걸렸나보군.

“그렇다면 꾸물거릴 수 없지. 리턴!”

다행히 신전의 인물들과 마주치지 않고 일리아드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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