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족의 성인식 (23/43)

#마족의 성인식

“귓속말, 크루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조용한 곳으로 가서 크루드에게 귓속말을 날렸다. 한 명이 귓속말을 하면 다른 한쪽은 자동으로 연결되어 말만 하면 되기 때문에 내 가명을 알고 있는 크루드가 나에게 보내진 못해도 내가 보내는 건 문제없다.

“나다, 스트.”

“아! 일은 끝난 거야?”

“응.”

“지금 퀘스트 수행 중인데 곧 끝나니까 10분 뒤에 뤼크레스로 와라. 아, 텔레포트 스크롤은 있어?”

“있어. 그럼 뤼크레스 의뢰소에서 보자.”

“귓속말 해제. 텔레포트.”

귓속말이 끝나자마자 품안에서 뤼크레스 좌표가 기억된 스크롤을 찾아 찢었다.

뤼크레스라……. 참 오랜만이군!

“아, 저기있다. 스트!”

기다린지 10분도 안 되었는데 크루드와 쿤이 도착했다.

크루드의 한 손에는 회색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퀘스트를 막 수행하고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퀘스트를 끝냈다는 증표겠지.

“그건?”

“아, 늑대의 발톱. 퀘스트 아이템이야. 잠깐만…….”

크루드는 먼저 의뢰소 주인에게 가 퀘스트를 완료시켰다. 퀘스트 보상 아이템을 받고, 쿤과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합석한 크루드는 나에게 퀘스트를 같이 하자고 제안해 왔다.

“퀘스트?”

“그래. 우리가 받는 퀘스트라 B급이지만 아직 네 레벨로는 힘들겠지만 우리가 함께하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퀘스트 중엔 경험치가 1.5배니까 레벨 업도 쉬울 테고.”

퀘스트라……. 그러고 보니 해본 지도 참 오래됐군. 근데 B랭크라면 대충 어떤 종류지? 하도 오래돼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군.

“좋아. 그리고 나도 이젠 제법 도움이 될 걸? 친구 일 도와주면서 레벨 업을 상당히 했거든.”

“그래? 친구가 갑부랬으니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어지간한 레벨은 아닐 테고……. 혹시 30레벨 대?”

크루드가 나와 떨어져 있던 날짜를 계산하더니 예상 레벨을 물어왔다.

30레벨이라? 처음 만났을 때가 8이었으니 높게 잡긴 했다만……. 훗!

“아니, 43!”

“헉! 그럼 나랑 5밖에 차이 안 나잖아? 친구가 갑부라더니……. 이거 키워주겠다고 나선 우리가 민망해지는 걸?”

“걱정 마. 걔가 키워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고 했으니까. 워낙 바쁜 녀석이라서 말이야.”

괜히 크루드와 쿤이 주눅 들게 할 필요도 없었고 나도 딱히 마법을 이용한 광렙은 하기 싫었기에 앞으로는 키워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뭐, 어쨌든 파티 맺고 의뢰부터 받자. 내가 받아 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아, 언데드 사냥이라도 괜찮지?”

“쿤이 파이어 인챈트를 걸어주면 되고, 정 안되면 무기에 성수라도 뿌리면 되니까. 별 상관은 없어.”

“오케이!”

언데드도 상관없다는 대답을 듣고 파티를 결성한 다음 크루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의뢰소 NPC에게 다가갔다. 도시가 큰 만큼 의뢰소 안에 사람도 많았지만 그만큼 유저들을 도울 NPC 또한 많아 크루드의 차례가 오는 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흠, 명성으로 보아 B랭크의 의뢰까지 가능하시군요. 그럼 이 중에서 골라보시죠.”

“어디 보자……. 이걸로 하겠습니다.”

“음?!”

크루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양피지 중 하나를 고르자 NPC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또 무슨 일이야?

“무슨 문제라도?”

“아니, 이게 왜 B랭크 유저분께……. 음? 혹시 저분도 같은 파티이십니까?”

NPC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뭐야, 내 능력을 알아보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그럼 문제없겠군요. 그럼 건투를 빕니다.”

다행히도 NPC는 내 정체를 밝히지 않고 덮어뒀다.

이거, 간이 조마조마해서 어디 살겠나.

“구울 소탕이다. 이번엔 특이하게 특정한 지역에 있는 구울을 잡으라는데? 그래봐야 한 50마리쯤 소탕하면 끝나겠지만. 장소는 죽은 자의 땅 동쪽 폐허가 된 마을. 기한은 무제한. 자, 성수랑 포션은 나한테 넉넉히 있으니까 곧장 가자.”

“그래.”

NPC의 반응이나, ‘특정지역’ 소탕 퀘스트. 그리고 기한 무제한. 이 모든 것이 쉽게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에 뭔가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애써 떨쳐버리고 크루드의 뒤를 따랐다.

막히면 힘으로 뚫지 뭐!

“흠흠, 방금 전리품으로 얻은 것도 있고 하니 이번만은 특별 서비스를 하도록 하지. 매스 텔레포트!”

“귀찮아서 그러는 거면서.”

“시끄러워, 이 녀석아!”

크루드는 매스 텔레포트의 효과인 하얀빛이 올라오는 가운데서도 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응징을 했다.

“자, 여기서 폐허가 된 마을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아. 나오는 몬스터도 다 거기서 거기고. 쿤!”

“쳇, 맨날 부려먹기나 하고. 나 여기에 불꽃의 힘을 부여하나니, 파이어 인챈트!”

쿤은 투덜거리면서도 나와 크루드의 검에 각각 화염 속성을 부여해줬다. 프리스트가 걸어주는 성 속성보다야 못하겠지만 언데드에게 어느 정도의 추가 데미지는 있겠지.

“방향은 이쪽으로 직진. 여기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 마을에 가서 경험치 1.5배인 구울을 잡는 게 나을 거야. 서둘러!”

몇 마리의 구울이, 언제까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한 힘을 빼기 싫었는지 크루드는 우릴 재촉해 걸음을 서둘렀다.

가는 도중에 몇 마리의 구울과 좀비가 악취를 풍기며 다가왔지만 전혀 상대가 되질 못했다. 몇 번의 칼질로 토막 내주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계속하자 말 그대로 폐허인, 불타버린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가 본데?”

“지도 보니까 여기가 맞는데요? 생각보다 지역은 좁은 듯하지만 퀘스트가 빨리 끝나면 그만큼 다른 퀘스트 진행을 빨리 할 수 있으니까 나쁘진 않네요.”

쿤이 지도를 펴보더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여기가 맞단 말이지? 이것저것 수상한 점도 있고……조심해야겠군.

“온다. 쿤!”

“쳇, 알겠어. 나, 화염의 구로써 적을 멸할지니, 파이어 볼!”

크루드가 구울 3마리가 뭉쳐서 오는 것을 발견하고 소리치자 쿤이 귀찮다는 듯 파이어 볼을 날려 세 마리를 흩어 놨다.

주문 없이 시동어로만 마법을 사용하려면 해당 써클보다 5써클 이상이 높아야 하는데 아직 60레벨이 되지 못해서 스펠을 읊어야 하는 군. 아직 큰 도움은 안 되겠어.

“스트! 목을 공격해!”

파이어 볼에 맞춰 달려간 크루드가 서포트를 요청하며 공격할 곳을 지정했다. 듀라한이 아닌 이상 언데드는 당연히 목을 공격해야지!

“넌 이거나 먹어라!”

“끼에엑!”

파이어 볼로 인해 구울끼리의 거리가 멀어졌다고는 하지만 3대2임엔 변함이 없었기에 견제용 비도를 던졌다. 한데 비도가 박히는 소리는 ‘푹’이 아니고 ‘퍽’이었다. 박히라는 비도가 박히지 않고 구울의 안면을 때린 것이다.

젠장, 이놈의 비도는 말을 들어먹질 않는단 말이야!

“연속 베기!”

크루드가 스킬 명을 외치자 구울의 목을 치려던 검이 더 빨리 움직였고 이내 구울 2마리가 목을 떨궜다.

“쳇, 도둑은 저런 기술 없나?”

대부분의 능력치 포인트를 민첩성에 쏟아 부어 이미 내 속도는 크루드의 연속 베기보다 빨랐지만 순간적으로 빨라지는 저런 능력이 탐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마검사야 말로 RPG의 로망인데……. 에휴, 아이템 하나에 눈이 멀어서 이게 무슨 짓인지.

“세 놈이서 겨우 손톱 하나만 주다니, 짜다. 짜!”

내가 신세 한탄하는 동안 구울에게서 나온 아이템을 살피던 크루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이미 회색으로 물든 구울들을 욕했다.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은 구울들이었기에 1시간 동안이나 더 사냥하는 동안 위험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모은 구울의 손톱은 모두 53개.

쿤과 크루드의 경험상 B랭크의 구울 사냥 퀘스트가 손톱 40개 정도에서 끝난다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양이었지만 목표가 달성되었다는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구울들은 여전히 빠른 리젠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고.

“이거 끝이 없잖아? 대체 몇 마리를 죽이라는 거야!”

얻은 손톱의 수는 53개지만 죽인 숫자는 그보다 많았기에 지치고, 질려버린 쿤이 신경질 적으로 말을 뱉었다.

“1시간 동안 손톱 53개라니, 다른 곳의 세 배는 족히 되는 군. 레벨 올리기에는 좋지만……. 쉴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입에서 단내 나도록 뛰어다닌 크루드가 처음보다 무척 느려진 몸놀림으로 구울 1마리를 베고 소리쳤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힘 빠져서라도 죽겠군.

“크루드, 쿤! 일단 이 지역을 벗어나서 재정비한 다음 다시 오자.”

“그래. 나도 힘없어서 더 이상은 못 베겠다. 쿤, 길을 뚫을 만한 범위 공격 하나 날려봐.”

“알았어. 위대한 불꽃의 분노, 익스플로전!”

츠츠츠츠!

익스플로전은 시전하고 나서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약간의 딜레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쿤은 구울들이 뭉쳐서오는 곳보다 조금 앞쪽에 시전했다.

폭발과 함께 튀겨진 팝콘처럼 사방으로 날아가는 구울들. 더 이상 경험치를 노리지 않았기에 무조건 뚫린 길을 따라 달렸다. 걸음이 느린 쿤은 크루드가 옆구리에 꿰차고.

“헥, 헥. 이 정도면 안전하겠지? 앉자.”

쿤까지 들고 오느라 힘들었는지 구울들이 보이지 않자 크루드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나도 한계다.”

HP나 MP는 아직도 남아돌았지만 피로도 만큼은 정말 한계였다. 1시간동안 거의 쉬지도 못하고 싸웠으니까. 마법사인 상태라면 입만 아프고 말았을 테지만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지금은 정말 이대로 뻗어서 자버리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상급 마나 포션 두 개를 쿤에게 넘겨주고 나 역시 물 대신 한 병 따 마시며 숨을 돌렸다.

“역시 갈증 날 땐 이게 최고라니까! 응? 왜 그렇게 쳐다봐. 너도 한 병 줄까?”

“아니야. 아무 것도. 그냥, 갑부 친굴 둔 녀석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싱겁기는…….”

이온 음료 맛이 나는 상급 마나 포션 한 병을 입에 물고 있는데 크루드와 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50실버짜리 마나 포션을 갈증 해소용으로 쓰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슬슬 일어나 볼까.”

“잠깐만. 레벨 확인 좀 하고. 스테이터스 창 오픈!”

크루드와 쿤이 레벨 확인하는 걸 보고 나도 덩달아 확인했다. 현재 레벨은 45. 퀘스트 수행 중이라 그런지 2나 올랐다.

“와우, 경험치가 엄청난데?”

“그러게 말이야. 난 2나 올랐다.”

“어, 내가 3이나 올랐는데?”

“전 1이요.”

순간 내가 실수했음을 알아차렸다.

현재 나는 마법사 클래스를 마스터함으로써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2배인 상태.

그런 상태에서의 2레벨 업은 보통 사람들의 2레벨 업과 결코 같지 않은 것이다.

“너랑 나랑 레벨 차이가 2인데 내가 더 많이 올랐다고?”

“아, 그게 말이야.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도둑 클래스뿐 아니라 마법사 클래스도 활성화시켰거든. 레벨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서 필요 경험치가 올라간 거야.”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반쪽짜리 거짓말로 위기를 벗어났다. 마스터했다는 게 다르지만…… 아무튼 마법사는 마법사니까.

“정말? 그럼 왜 지금까지 마법을 안 썼어?”

“잘 쓰지도 못하는 마법, 괜히 쓰다가 망신당하느니 애초에 안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지. 그리고 도둑이란 직업이 은근히 마나를 많이 쓰거든. 마법사를 활성화 시킨 것도 그 때문이고.”

“그래? 별로 많이 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은데……. 그럼 마법사 레벨은 몇이야?”

“응? 잠깐만. 스테이터스 창 오픈.”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까먹었다는 듯 스테이터스 창을 열고 뒤적거렸다.

어디 보자, 무리 없이 써먹을 만한 마법이 있는 게…….

“34. 4써클 웬만한 마법은 다 쓸 수 있어.”

“그 정도면 상당하네. 그럼 이제부턴 스트가 무기에 인챈트를 걸어주고 파이어 볼로 선제공격까지 하는 걸로 하자. 쿤은 아까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 마나를 아끼고.”

“좋아. 나 여기에 불꽃의 힘을 부여하나니, 파이어 인챈트!”

시동어만 외우면 될 거, 주문까지 읊느라 귀찮았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속으로만 투덜거릴 뿐이었다.

인챈트를 걸고 나서 우리는 다시 마을로 들어갔다. 여전히 마을 초입부터 꾸역꾸역 밀려오는 구울들. 이미 질려버린 그 모습을 보며 파이어 볼을 사용하려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고 가는 것이 있어 주문을 멈췄다.

“그런데 이 퀘스트.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다니?”

“그렇잖아. 구울의 손톱을 몇 개 모아와라도 아니고, 마을에 있는 구울을 없애라. 라니. 이건 어쩌면 단순한 구울 소탕이 아닐지 몰라.”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또 있었지. 그것 때문에 이 퀘스트를 택한 거지만.”

“퀘스트 내용하고, 기한이 무제한이란 것 말고 이상한 게 또 있단 말이야?”

“응. 사실 이 퀘스트의 난이도가 물음표였거든. 내가 고를 수 있는 퀘스트 난이도 한계가 B랭크니까 높아봐야 그 정도 되겠지만.”

“난이도가…… 물음표?!”

크루드는 물음표라고 해봤자 별 거 있겠냐는 식이었지만 난 알고 있다. 난이도 물음표가 의미하는 바를!

“이거 어렵게 됐군. 구울 킹 따위라도 나오는 거야 뭐야?”

“네?”

“아니야. 아무것도. 쿤, 지금부터 최대한 마나를 아껴놔. 이기진 못해도 도망갈 순 있어야 하니까. 크루드! 너도 힘을 아끼면서 싸워. 괜히 멀리 있는 구울들 건드려서 끌고 오지 말고.”

“어? 그래. 그럴게.”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크루드와 쿤은 의아해하면서도 잘 따라줬다. 좀 전에 무리하다가 죽을 뻔한 기억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아까처럼 수십 마리가 계속해서 달려들지 않는 한 구울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에 전진하는 것은 매우 순조로웠다.

하지만 내 심증에 답하듯 마을 안쪽으로 다가갈수록 구울의 수는 점점 늘어갔다.

역시 중심부에 뭔가가 있다는 소리군.

“헉, 20마리는 족히 되겠다.”

중심부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 때, 약 20마리의 구울들이 떼 지어 걸어왔다.

많기도 하군. 그래도 이게 마지막이면 다행인데…….

“쿤, 저놈들의 중간에 파이어 월을 만드렁. 계속 움직이니까 거리 계산 잘하고.”

“예!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의 장벽, 파이어 월!”

화르륵!

4열 횡대로 줄지어 다가오는 구울들 사이에 화염의 장벽이 생기면서 3번째 줄과 미처 걸음을 멈추지 못한 4번째 줄 일부를 화장시켜 버렸다.

이것으로 우리가 상대할 구울의 수는 8마리가 된 셈.

이대로 칠까 하다가 아직도 많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작업을 했다.

“나, 화염의 구로써 적을 멸할지니, 파이어 볼!”

“키에에엑~.”

볼링이 따로 없었다. 뒤쪽의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못 들었는지 4열 횡대를 유지하고 다가오던 구울들은 파이어볼의 폭발력에 밀려 파이어 월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사라진 게 다시 3마리. 이제 5마리만 상대하면 되니 비교적 간단했다.

“그래도 예의상 비도는 날려주마!”

퍽! 퍽! 푹! 퍽! 퍽!

또 실패. 다섯 개의 비도 중에 1개만 간신히 박혔을 뿐, 나머지는 둔기류로 둔갑해 구울들의 안면을 강타했다.

이거 언제쯤 제대로 박히려나?

“그 다음도 내게 맡겨, 윈드!”

강품이 불었다.

원래는 바람이 분다는 사실만 느껴질 정도의 미풍이 부는 바람 속성 수련 마법이지만 바람 속성 숙련도 100%인 내가, 억지로 마나까지 불어넣으니 새로운 마법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변한 것이다.

내 손에서 일어난 강풍은 파이어 월의 불꽃을 이끌고 구울들을 덮쳐버렸다.

바람이 한동안 유지되자 구울의 악취 섞인 비명소리도 깨끗이 사라졌다.

“혀, 형……. 그건?”

몰이사냥을 하면 꽤 도움이 될 법한 콤보였기에 마법사인 쿤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뭐, 비밀로 할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닌데 못 가르쳐 줄 것도 없지. 하지만!

“퀘스트 끝나고 알려줄게. 일단 리젠 되기 전에 서두르자.”

“그래. 스트 말대로 우선 전진이다!”

그래도 안 알려준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쿤도 입맛을 다시며 뒤따라왔다.

아까 그 놈들이 정말 마지막 방어선이었는지 5분을 걷는 동안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크루드는 몹이 없다고 투덜댔고, 쿤은 끝났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한 없이 불안했다. 이미 물음표 난이도의 퀘스트에서 최상급 불의 정령을 만나 죽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게 오히려 폭풍 전야일 수도 있어. 다들 긴장 늦추지 마.”

“에이, 나와 봐야 구울일 텐데 무슨 걱정이야. 구울이 아무리 많아도 아까 보여줬던 너와 쿤의 협동기면 끝장날 텐데!”

“잠깐, 삼촌! 무슨 소리 안 들려?”

크루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쿤이 갑자기 귀에 손을 대고 어떤 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소리?”

“애…… 응…… 응애, 응애!”

침묵 속에 바람에 실려 온 희미한 소리. 그것은 분명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이런 폐허에 아기가?”

“가보자!”

결정이 내려지자 이동 또한 신속했다. 조금 더 집중해서 방향을 잡아낸 뒤 달려가자 울음소리가 점점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엇, 저기!”

“일단 구울부터 처리하자. 아기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 마법 쓸 때 조심해!”

쿤이 발견한 아기 곁에는 세 마리의 구울이 악취를 풀풀 풍기며 서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아기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 쿤이 재빨리 매직 애로우를 날렸다.

“키엑?”

“언데드 주제에 어딜 감히!”

머리를 노렸다간 구울의 시독이 아기에게 튈 수 있기 때문에 등을 맞추자 우리를 인식한 구울들이 몸을 틀었다. 크루드가 호통을 치며 달려가자 세 마리의 구울 역시 앞으로 나왔다. 한데 일반 구울과는 달리 움직이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혹시 이놈들이 물음표인 이유?

“쿤, 지원 부탁해!”

생각보다 강한 구울들에게 우위를 빼앗긴 크루드를 돕기 위해 나도 몸을 날렸다.

단순히 능력치만 높은 구울이 아닐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겠군.

“파이어 볼! 이건 덤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구울에게 파이어 볼을 날리고 허리춤에 매어뒀던 비도를 뿌렸다.

이걸로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아니, 저런…….”

파이어 볼이 날아오자 구울 한 마리가 정면으로 막아섰다.

팔을 X자로 교차시킨 채.

결과는, 구울의 방어 성공!

막아낸 양 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긴 했지만 뒤로 밀려나지 않고 완벽하게 방어해냈다. 비도도 어쩐 일인지 제대로 박혔지만 구울은 모기가 울은 것처럼 박힌 곳을 툭툭 쳐서 떨어뜨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미친!

“플레임 스트라이크!”

상상을 뛰어넘는 구울의 능력에 얼어붙어 있을 때, 뒤쪽에서 대지를 달구는 강렬한 화염이 날아왔다.

6써클이나 되는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직격으로 맞자 이번만큼은 구울도 무사하지 못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양팔이 사라져 버리고, 몸체도 타격을 입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남은 두 마리의 구울은 동료가 죽든 말든 크루드를 몰아붙였다.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라 파랗게 부어오른 걸로 보아 구울의 독에 중독 된 듯한 크루드는 한껏 인상을 쓰며 겨우겨우 공격을 막아냈다.

“크루드, 이쪽으로 와!”

크루드를 부르는 동시에 다시 한 번 비도를 던져 구울들의 행동을 늦췄다. 구울들은 손짓 한 번으로 비도를 무력화시켰지만 약간의 틈을 보여 크루드가 우리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끝없이 타오르는 화염의 장벽, 파이어 월!”

크루드가 달려오는 것에 맞춰, 쿤이 불의 장벽을 세웠다. 구울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크루드의 퇴로 역시 막은 셈이었지만 언데드도 아니고 불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크루드는 얼굴을 가린채 불의 장벽을 뚫고 넘어왔다.

“삼촌, 해독약!”

“윈드!”

크루드가 해독약을 꺼내 상처에 바르는 동안, 나와 쿤은 조금전 일반 구울 20여 마리를 상대로 사용했던 합동기를 재차 선보였다. 죽진 않을 것 같지만 상당한 데미지를 입혔을 테지.

“쿤, 이제 우리가 처리할 테니 멈춰. 마나가 완전 고갈되면 한동안 마나 포션으로도 회복 못 하니까.”

“그럼 부탁할게요.”

쿤도 마나 고갈이 염려됐는지 파이어 월을 유지하길 포기하고 내게 받았던 상급 마나 포션을 들이켰다. 불의 장벽이 걷히자 온몸이 검게 그을린 구울 두 마리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달려왔다.

“그래봤자 시체따위!”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 윈드 커터! 먹어랏!”

구울은 친절하게도 나와 크루드에게 나뉘어서 달려들었다.

이런 하급 마법을 주문까지 읊어가면서 써야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군. 레벨을 속였어도 마법사라고 하길 잘했어.

“나, 화염의 구로써 적을 멸할지니, 파이어 볼!”

구울 따위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속도 중심형 캐릭터인 나를 따라잡지는 못하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도망 다니다가 기습적인 파이어 볼을 날렸다. 그리곤 왼발을 축으로 돌아서서 구울의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배후를 점령한 뒤에는 당연히 목베기! 검이 좋아서인지 부드럽게 목이 잘려져 나갔다.

“도와줄까?”

“아니, 됐어!”

내 몫을 해치우고 크루드에게 묻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크루드도 바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구울이 강해져 봤자 공격 수단은 결국 썩어 문드러진 팔. 화염 속성까지 걸린 검과 부딪히다 보면 언젠가 엉망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능력치만 높은 구울이었나 보군.

“휴, 이정도면 B랭크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겠는데? 위험했어.”

“그래도 힘든 만큼 보상도 클 테니까 너무 투덜대지 마, 삼촌.”

“그래, 쿤 말이 맞다. 어째 삼촌이란 녀석이 조카보다 더 어린애 같냐?”

“뭐야?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우리는 구울들을 처리했다는 안도감에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크루드를 골려먹으며 휴식을 취하다가 뭔가 떠오른 듯 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 아기!”

“그러고 보니 여기 온 이유가 아기의 울음소리 때문이었지!”

고개를 돌려보니 아기는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고 어느새 울음도 그친 상태였다.

“잠깐! 폐허가 된 마을 정중앙에 멀쩡히 누워서 울고 있는 아기. 다른 곳과 비교도 안 되게 빠른 구울의 리젠 속도. 그리고 아기 곁에 있는 변종 구울들. 뭔가‥이상하지 않아?”

“이상하긴! 구울들이 마을을 습격해서 마을 사람들을 다 죽였는데 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여성체인 대장 구울의 가슴을 울려서 구을들이 이 아기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돌보려했다. 죽기 전의 기억이 조금 남아 있는 대장 구울이 이 아기를 안아보려는 순간에 우리가 등장 했고,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우리는 구울들을 섬멸하고 아기를 마을에 데려간다. 제법 흔한 스토리잖아?”

아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에? 삼촌. 그럼 우리가 나쁜 놈이 되는 거야?”

“아니지.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이고 시체 주제에 살아 있는 인간의 아기를 기르려 한 구울들이 나쁜 거야. 만약 우리가 막지 않았다면 이 아기는 구울의 독에 중독돼서 구울에게 안긴 채 죽고 말았을 걸?”

“헤……. 그럼 우리가 이 아기의 생명을 구한 거네?”

“그렇지!”

죽이 맞아 더 이상 말릴 수도 없게 된 두 사람은 제쳐두고 난 내 나름대로의 가설을 세워갔다.

“보통 이런 경우에 일어날 최악의 상황은……. 역시 그건가? 너무 흔한 거라 꺼려지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썬 이게 가장 확률이 높군.”

마지막 변종 구울 3마리가 강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보통 구울들을 기준으로 할 때 강한 것이었다.

내가 본래 클래스로 돌아가거나 예전 우물 안에 들어갔다 만난 불의 상급 정령, 최상급 정령과 싸우면 한 주먹 거리도 안 될 것들. 물음표란 난이도의 이름값을 하려면 뭔가 남아도 많이 남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물음표인 만큼 이걸로 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자, 어서 아기를 안아서 데리고 가자.”

“응!”

“잠깐만 기다려 보라니까.”

“아, 걱정 말라니까! 구을의 습격일 뿐이라고.”

당장에 지도를 펴주며 여기는 죽은 자의 땅이야, 사람 사는 마을 따윈 아이스 골렘이 온천욕 할 시절에나 있었다고! 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일이 틀어지면 더 복잡해질 것 같아 조심하라는 충고만을 했다.

“그럼 나도 준비를…….”

쿤과 크루드가 아기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나는 기척을 없애는 스킬까지 써가며 목표 지점까지 이동했다.

“역시 어릴 땐 다 예쁘다니까.”

내가 바득바득 우긴 덕에 검을 뽑아들긴 했지만 경계심은 창고에 맡겨두고 온 크루드가 5m 가량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삼촌, 검 내려. 아기가 놀라잖아!”

“아차, 미안.”

쿤의 호통에 크루드는 그나마의 방어 수단인 검마저 등 뒤로 감춰버렸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아기가 팔을 들어 버둥거리자 쿤과 크루드는 연신 귀엽다를 내뱉으며 남은 거리를 단숨에 좁혀버렸다.

“꺄하~.”

“응? 악수하자고?”

아기가 크루드를 향해 손을 흔들거리자 크루드도 왼손을 뻗어 한 손가락으로 악수를 하려 했다.

그때였다. 아기의 눈에 붉은 빛이 돌고 작고 보드라운 손에 검붉은 기운이 모여든 것은.

퍼엉-!

“크아악!!!”

핏빛 안광이 폭사하고 손에 뭉친 검붉은 기운이 크루드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놀란 크루드가 몸을 뒤로 빼고 검을 들어 막아보았지만 검은 두 동강나고 브레스트 아머가 움푹 파이며 날아가 버렸다.

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뒷걸음질 치는 동안 아기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기묘한 뒤틀림이 보였다.

“클클클. 하찮은 인간 주제에, 조금뿐이지만 내 힘을 받은 구울들을 없애다니 제법이구나. 내 너희를 가상히 여겨 자랑스러운 마계의 귀족. 나, 그랑존이 인간 세계에 나온 것을 기념하는 첫 제물로 삼아주마. 크핫하하하하!!”

[시크릿 이벤트 ‘마족의 성인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뿔과 날개가 달린, 제대로 된 마족의 모습으로 변한 놈이 말을 끝마치자 리얼모드 3단계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알림말이 귓가에 퍼져왔다.

이거, 유저들에게 미안하게 됐군.

“그런데 한 놈은 어디 갔지?”

서걱!

“여기 있지. 마족의 뿔, 겟이다!”

마족이 아기의 형태였을 때부터, 이럴 것을 예상하고 근처 건물 위에 있던 나는 마족의 등 뒤로 뛰어내리며 마족의 힘의 원천인 뿔을 잘라내 버렸다. 물론 베기 전에 소리를 질러 알아차리게 만드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힘이 부족해서 검이 뿔에 걸리긴 했지만 윈드 봄버를 응용해서 검에 힘을 더하니 어렵진 않았다.

뿔을 잃은 마족은 곧장 바닥으로 추락했고,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나는 뿔을 들고 도망쳤다.

“커억! 힘이, 내 힘이……!!”

“그러게 누가 남들이 다 써먹은 흔해 빠진 레퍼토리 재탕하랬냐? 창의력 부족한 네 탓이다!”

놈의 뿔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 겁먹을 이유 따윈 전혀 없었다. 마족의 뿔을 아이템 창에 던져두고 일단 크루드의 상태부터 살폈다. 공격에 의한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쿤을 불러 크루드에게 포션을 먹이게 한 뒤 난 다시 그랑존에게로 걸어갔다.

“그랑존이라고 했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큭, 뿔만 있으면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에게 죽다니. 분하다!”

제 딴에는 도발하려는 것인지 한 주먹거리라는 말에 악센트까지 줘가면서 말했지만 내가 겨우 그까짓 거에 넘어갈 리 없지 않은가?

“네가 그렇게 강하다고?”

“그렇다. 네놈 따윈 100명이 와도 날 못이…….”

“그거 잘 됐군. 그만큼 경험치도 많다는 소리니까.”

잘 걸렸다는 뜻을 듬뿍 담아 투둑거리며 손을 풀자 조금 전까지 당당하던 마족은 온데간데없고 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는 덩치 큰 박쥐 인간 한 마리만 남았다.

내가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그랑존도 손을 놀려 뒤로 물러났지만 걸음을 빨리하자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걸렸다! 내가 마나는 못 써도 네놈쯤은……!”

“블링크!”

일어나지도 않고 앉아서 뒷걸음질 치던 것도 다 연기였는지 그랑존은 어느 정도까지 거리가 좁혀지자 튕기듯 일어나서 내게 달려들었다.

“훗, 뿔에 담긴 건 마력뿐. 육체적인 힘은 아직 남아 있다는 걸 아는데 내가 방심할 줄 알았나? 이렇게 되면 한 번 해보자는 소린데……. 좋아. 빨리 끝내주지.”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쿤은 아직도 크루드를 간호하는 중이었다.

이쪽을 보기 전에 빨리 끝내는 편이 좋겠군.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마족이라 최선을 다해야 할 테니까.

“네놈을 죽이고 뿔을 되찾겠다. 하앗!”

그랑존의 선공이었다.

“필라 오브 파이어! 차지 볼트!”

“가소롭다!”

땅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정면에서 전격의 구체가 날아드는데도 그랑존은 여유만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마기로 보이는 검을 빛을 손톱에 두른 그랑존이 필라 오브 파이아와 차지 볼트를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뿔을 잘렸는데 어떻게?!

“브, 블링크!”

“크크크크. 놀랐나 보군. 큰 뿔은 잘렸어도 아직 덜 자란 작은 뿔이 남아있다! 본래의 힘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네놈을 죽이고 뿔을 빼앗기엔 충분하겠지. 이번에도 피할 수 있는지 보자. 하압!”

그랑존은 강기급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 기운을 끌어올려 다시 대시해왔다. 이번엔 나도 피하기만 할 생각은 없지!

“파이어 월! 포그!”

파이어 월에 이은 포그. 두 마법 간에 간격이 좁았다면 포그가 소멸되어 버렸겠지만 제법 간격을 둔 덕에 시야를 가린다는 본래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

“이따위 안개론 내 감각을 무디게 하지 못…….”

치지직!

내가 원하는 건 놈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야를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헛소리를 지껄여대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감각이 극에 달해 시야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만.

“크읏, 이런!”

“최고급 성수. 나한테야 깨끗한 물일뿐이지만 네 녀석에게는 독인 것 같군.”

자신감의 표현인지 정면으로 주둥이까지 나불거리며 달려오던 놈은 내가 뿌린 성수에 맞아 피부가 일그러지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아무리 상극이라지만 효과가 너무 뛰어난 걸!

“왜, 무서운가 보지? 신의 힘이 아.주. 조.금. 기든 물일뿐인데 그렇게나 겁내는 걸 보니 역시 마.족. 따.위.는 신에게 안 되나 보군.”

“감히 인간 따위가 고귀한 마족을 욕보이다니!”

중요한 부분에서 끊어 읽는 아주 간단한 도발에 놈이 발끈 했지만 한 가닥 이성은 남았는지 쉽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냥 오지 않는다면 끌어들이는 수밖에.

“무섭지 않다면 한잔 마셔 보겠나? 싫어? 그럼 내가 마시지. 큭큭. 내가 이걸 마시고 나면 조심해야 할 거야. 내 침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네 놈 따위가 감히……! 죽여 버리겠다!!”

남은 성수를 몽땅 입에 붓고 병을 옆으로 던지자 그랑존이 손톱에 울분을 담아 찔러왔다.

“푸하!”

“크앗……. 이 더러운 자식!”

입 안에 성수를 넣었으되 삼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랑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분무기처럼 퍼지도록 뿜어버렸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랑존은 손톱을 거두었고 그 사이 블링크로 놈의 배후를 점했다.

“꼼짝 마. 머리통이 목과 분리되기 싫으면.”

뒷목을 움켜쥐고 말하자 그랑존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 웬만한 마법 한방이면 이대로 목과 몸통이 분리될 테니까.

“내가 침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는데 듣지를 않는군. 온 김에 한잔해라.”

최고급 성수 한 병을 더 따서 그랑존의 입에 억지로 들이부었다. 그랑존은 입을 꾹 다물고 저항했지만 입을 데는 듯한 고통 때문에 조금씩 틈이 생겼다.

“다 마시면 풀어주지.”

고통에 못 견뎌서일까, 내가 한 말 때문일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시길 거부하던 그랑존이 입을 쩍 벌리고 성수를 원샷했다.

“잘 마시면서 엄살은. 윈드 봄버!”

그냥 풀어주긴 위험하기 때문에 윈드 봄버를 이용해 멀리 날려 버렸다.

꿈틀꿈틀.

땅에 처박힌 그랑존은 내부가 진탕이 됐는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꽤나 잘 통하는 군 이번엔 뭘 실험해 볼까?

“스트!”

“쳇!”

꾸물거리는 사이, 정신이 든 크루드가 쿤과 함께 달려왔다.

“저게 그 마족이에요?”

“그래. 지금은 뿔리 잘려서 힘을 못 쓰니까 빨리 해치우자. 크루드, 뿔은 잘렸어도 마족은 마족이니까 HP가 높을 거야. 목을 잘라.”

“알았어!”

어차피 경험치는 균등하게 분배되기 때문에 마무리는 크루드에게 맡겼다. 복수를 겸해서.

바닥에 뒹굴고만 있던 그랑존은 크루드의 일검을 피하지 못했고 검은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시크릿 이벤트. 마족의 성인식이 종료되었습니다.]

……미안하게 됐지만 운영자들, 욕 좀 먹을 것 같다.

“이리 와봐. 아이템 나왔어!”

마족이 죽으면서 떨군 것이 있는지 크루드가 나와 쿤에게 손짓했다. 이벤트 몬스터라 좋은 걸 꽤 많이 줬을 지도…….

“조그만 흰색 원뿔 하나랑 두꺼운 책 한 권. 붉은색 문양이 있는 검은 로브하고 검신에서 손잡이까지 까만 검 한 자루. 그리고 골드가 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 대박이닷!!”

하얀색 원뿔은 덜 자랐다는 마족의 뿔인 것 같고, 저 검은 책은 마법서? 보통의 것보단 두껍지만 맞는 것 같다. 마족에게서 나왔으니 어둠의 마법서겠고. 돈주머니는 말 그대로 돈주머니.

나머지는…… 뭐지?

“가만 있어봐. 확인! 확인! 확인!”

[알고보면 간단한 흑마법 대백과사전]

이제 막 성인이 된 마족들이 배우는 흑마법 교본. 다른 마법서와 달리 이것은 한 권으로 모든 흑마법을 배울 수 있다.

[럭셔리하고 엘레강스한 마족의 로브]

마계 최고의 제단사가 만든 기품 있는 로브. 감히 범접치 못할 우아함으로 무지한 것들이 우러러보게 한다.

부가 능력 : 하루 세 번 마나 소비 없이 참(charm) 사용 가능

레벨 40이하 언데드계 몬스터 접근 방지

[뱀파이어 소드]

적의 생명을 흡수하여 성장하는 마검. 이 검으로 적을 죽이다보면 언젠가 검이 진화한다. 마계의 물건인 만큼 가장 좋은 먹이는 빛과 관련된 자들의 영혼.

연달아 확인 스크롤을 찢자 각각의 아이템에 감정표가 붙었다.

“지, 진화하는 검!”

“흑마법서!”

감정표를 확인한 둘은 무척이나 놀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엄밀히 따지면 저 아이템들은 모두 내 것이니까.

“난 이거면 되니까 검은 크루드가, 마법서는 쿤이 갖도록 해.”

아직 못 배운 흑마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흑마법이란 것이 능력에 비해 무지막지한 마나를 소모해서 실용성이 적기 때문에 크게 아깝지는 않았다.

검이 끌리기는 하지만 왠지 마족의 뿔 쪽에 더 마음이 가고. 내가 별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을 택하고 자신들은 원하던, 고급 아이템을 얻자 미안했는지 크루드와 쿤은 로브를 내 쪽으로 밀었다.

“잡은 건 넌데 우리만 좋은 걸 갖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어차피 이거 하난 남으니까 네가 가져.”

“음, 알았어. 그럼 돈 주머니는 둘이 나눠 갖도록 해. 난 크게 돈 쓸 일 없으니까. 이거 안 받으면 검이랑 마법서도 뺏어버린다?”

“자꾸 이러면 너무 미안한데……. 알았어.”

아이템 분배가 끝났다. 각각의 아이템들은 주인을 찾아갔고 주위를 돌아다녀 보니 그 많던 구울들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즉, 퀘스트의 완료. 마을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레벨을 확인했다.

“헛!”

어김없이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확인된 내 레벨은 52. 7레벨이나 상승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숨겨진 리벤트의 보스씩이나 되는 놈이 달랑 셋이 잡았는데 겨우 7업이라니. 아무리 필요 경험치가 배로 늘어났다지만 40대의 레벨에서 7업은 정말 너무 한 것이다.

90대의 레벨이라면 경험치 바를 10%도 못 채웠을 테니까.

“레벨이 57! 9나 올랐다!

“난 61. 6이나 오르다니, 이제 7써클 마법을 배울 수 있어!”

1, 11, 21, 31……. 이런 식으로 10레벨 당 한 번씩 필요 경험치가 대폭 상승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레벨 업에는 개인차가 날 수밖에 없었다.

크루드와 쿤은 이걸로 만족하나 보군. 뭐, 레벨 업에 열을 올리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리턴!”

우리 셋은 각자 나름대로의 만족을 갖고, 하얀 빛에 몸을 실었다.

* * *

“뭐라고요?”

“그게 그러니까 퀘스트에 대한 보상이 아직 준비 안 된…….”

“퀘스트를 줘놓고 보상이 준비 안 됐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던 의뢰소 NPC는 크루드의 호통에 진땀을 흘렸다.

“저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운데, 몇 번을 확인해도 그 퀘스트에 대한 보상 물품이 없어요. 그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이거 미치겠네. 죽을 동 살 동 해서 겨우 클리어하고 오니까. 뭐? 보상 물품이 준비가 안 돼? 당신, 이거 깨면서 뭐가 튀어나온 줄 알아? 앙?”

“크루드, 참고 이리 와봐.”

“읍! 놔! 읍읍!”

자칫하면 마족에 대한 것도 말해 버릴 것 같아 크루드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왜 그래?”

“더 있다가는 네가 마족에 대한 것까지 말할 것 같아서.”

“그게 뭐 어때서?”

“얌마, 숨겨진 이벤트랍시고 발동됐는데 10분도 안 돼서 끝났어. 우리 때문에 그렇게 된 걸 알면 이벤트에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

“그래봐야 고렙들에겐 별 경험치도 안 될 이벤트였는데…….”

“그래도. 모처럼 만의 이벤트라는 게 중요한 거야. 그리고 어차피 곧 있으면 운영자가 등장할 걸? 아, 양반은 못 되는 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어른 키만 한 푸른 불길이 치솟으며 누군가 나타났다.

눈을 가리는 파란 머리카락과 일반 유저에겐 허용되지 않는 파란 눈동자.

그렇다. 낯설지 않은 이 얼굴의 주인은 제롬이었다!

“이봐, 혹시 여기에 ‘그 퀘스트’ 클리어 하신 분들 안 왔나?”

“저, 저기에…….”

한껏 폼을 잡고 등장한 제롬은 가면 때문인지 나도 못 알아 본 채 목소리를 깔았다.

“혹시 그랑존이라고……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랑존. 그 마족의 이름이기에 아는 건 나 혼자였다. 쿤도 듣기는 들었지만 벌써 잊은 듯하니.

“그놈 이름이야.”

“여긴 눈이 너무 많으니 자리를 옮기죠. 이동!”

제롬의 특이한 등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이동 된 곳은 처음 보는 거대한 탑의 입구. 정문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자 로브를 깊게 눌러쓴 NPC 하나가 테이블에 의자까지 가져다 놓고 온갖 포션류와 성수, 음식을 팔고 있었다.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이봐, 여기 주스 4잔.”

“예, 알겠습니다.”

제롬은 테이블 하나를 골라 앉으면서 NPC에게 마실 것을 주문했다.

“여긴 어디죠?”

“키메라의 탑이라고 합니다. 이름 그대로 키메라가 나오는 곳이죠. 저 옆에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던전이 시작됩니다. 총 9층짜리 건물이고요. 아,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쓰실 것 없습니다. 아직 미공개 된 곳이니까요. 주위에 특수한 장치를 해놔서 운영자 외에는 볼 수도 드나들 수도 없습니다. 자, 궁금증이 풀리셨으면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동안 제법 수련을 쌓았는지 제롬은 능숙하게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 전에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숨겨진 이벤트의 보스씩이나 되는 마족이 겨우 48에서 57로, 레벨을 9밖에 안 올려줬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아,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랑존이 성인이 되지 못했다는 점과 뿔이 잘렸다는 점이 그것이죠. 이따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랑존이 1,000명의 인간을 죽이는 순간 한층 더 강해졌을 겁니다. 성인이 된 것이죠. 그걸 채우지 못했으니 상대적으로 약해서 경험치도 적었고 뿔이 잘리는 바람에 더더욱 약해져서 그 정도의 경험치 밖에 주지 않은 거죠.”

결국은 ‘덜 익은 열매를 따먹은 네 잘못이다!’라는 소리였다. 이 말을 들은 크루드와 쿤은 원망이 담겨 있는 제롬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후후, 제롬. 그동안 많이 늘었군. 하지만!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뿔이 잘렸기 때문에 약해졌고, 약해졌기 때문에 경험치가 줄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 뿔을 누가 잘랐죠?”

“……!”

“뿔이 저 혼자 뚝 부러졌나요? 아니면 그랑존이 자학하다가 부러뜨려 먹었나요? 설정상의 오류. 인정하시겠습니까?”

“……인정합니다.”

이리저리 눈알 굴려가며 고민하던 제롬은 결국 제작사 측의 실수를 인정했다.

자, 이번엔 뭘 뜯어내 볼까…….

“이 일은 조금 뒤에 얘기하도록 하고, 아까 하시려던 얘기부터 듣죠.”

일단은 패를 아꼈다.

“아, 예. 일단 이번 이벤트가 정상적으로 진행됐을 때의 상황을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이벤트는 아시다시피 여러분의 퀘스트에서 시작됩니다. 구울들을 뚫고, 마을의 중앙으로 가서 그랑존이 개조한 구울들을 잡으면 시작이죠. 여담입니다만 여러분 전에 이 퀘스트를 받았던 파티는 마지막 구울들에게 두 번 전멸 당한 뒤 중도 포기했습니다. 아무튼 원래대로라면 그라존이 퀘스트 진행 중인 파티, 즉 여러분을 전멸시키고 죽은 자의 땅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어야 합니다. 이벤트의 제목 그대로 그랑존은 성인식을 치르는 중이거든요. 마족이 성인식이 뭐하는 거냐고요? 인간, 그러니까 유저가 되겠군요. 유저 1,000명 죽이기입니다. 본인이 직접 죽이든 부하를 이용해서 죽이든.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죽은 자의 땅 깊숙이 들어간 그랑존은 마족의 권위를 이용해서 언데드 몬스터 부대를 만들고 인간들을 공격하죠. 몇 천, 몇 만에 이르는 대단위는 아니지만 수백은 될 테니 유저측도 각 성을 중심으로 모여 대응하지 않겠습니까? 이 과정에서 유저 1,000명이 먼저 죽으면 그랑존이 각성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뿔이 잘리지 않은 그랑존은 마스터 레벨 유저 10명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되도 재미있었겠죠.”

“잠깐, 마스터 레벨 유저 10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요? 그럼 놈이 게릴라전이라도 펼칠 경우 힐름 자체가 망해버리는 거 아닙니까? 성인이 될 경우에는 아주 확실하게 말아먹어 줄 것 같은데요.”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뿔에 담긴 마나를 재충전 할 수 없게 해놨습니다. 마계에서만 회복 할 수 있다는 설정으로요. 아무튼! 최소 일주일은 걸리리라 예상한 대규모 이벤트가, 저희가 2달 동안 회의해서 만들어낸 회심의 역작을! 여러분이 단 7분 23초만에 끝내버리신 겁니다!”

어느새 제롬의 말에는 격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움찔거리는 크루드와 쿤. 그런데……어따 대고 큰 소리야?

“그래서 어쩌라고요?”

“예?”

“지금 우리가 전멸 안 당했다고 화내시는 것 아닙니까! 몬스터가 우릴 공격했고, 우린 그에 맞서 싸워 이겼습니다. 그게 뭐 잘못됐나요? 그렇게 이벤트를 열고 싶었으면 퀘스트를 거치지 말던가, 몬스터 부대를 만들 때까지 그랑존을 무적으로 만들었으면 될 거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나요?”

“그런……. 그런데 흠흠, 그걸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을 모셔온 이유는 유저들의 빗발치는 항의와 퀘스트에 대한 보상 때문입니다. 이번 일을 설명할 때 여러분, 그러니까 크루드님과 쿤님, 그리고 콜……. 헉!”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이제야 서류를 들쳐보던 제롬은 내 이름을 발견했는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이런, 입을 막아야겠군.

“운영자님, 잠깐 저 좀 보시죠.”

“예? 그, 그러죠.”

크루드와 쿤을 남겨두고 나와 제롬은 탑의 바깥으로 나왔다.

“무, 무슨 일로…….”

“너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저 안에 있는 이들에게 제 진짜 아이디를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뿐이니까요. 현재 스트라는 가명을 쓰고 여행 중이라…….”

번쩍! 내 말을 듣던 제롬이 눈을 번쩍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흐흐흐,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하시군요?”

“그런 셈이죠.”

“알겠습니다. 대신! 아까 경험치와 관련된 일을 없었던 걸로‥.”

많이 컸군. 제롬. 감히 나를 상대로 수작을 걸어?

“됐습니다. 그냥 마음대로 부르십시오. 까짓것, 다른 복장하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신 경험치 건과 곧 말이 나올 퀘스트 보상 건으로 확실하게 뜯어내 드리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먼저 실례.”

약간 화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을 마치고 휙 하니 돌아서서 들어와 버렸다.

훗, 이제 잘못 건드린 걸 깨달았겠지?

“무슨 일이야?”

“별 거 아냐.”

곧바로 제롬이 따라 들어와서인지 크루드와 쿤은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흠흠, 아까에 이어서 말하죠. 이번 일에 대해 설명할 때 크루드님과 쿤님, 그리고 스트님의 이름을 밝혀도 좋을지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우리 이름을 밝혀서 해명의 신뢰성을 높여 보겠다는 건가? 좋은 생각이긴 하군. 제작사 측에선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미쳤습니까?”

“예?”

“공지에 이름을 기재하면 유저들이 저희를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귓속말이 폭주하는 건 물론이고 심한 사람은 죽이겠다 나설걸요? 안 그래?”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러게요. 우리 이름 안 밝힐래요.”

크루드와 쿤에게 동의를 구하자 역시 내가 원하는 말이 나왔다.

“에휴, 그럼 어쩔 수 없군요. 가명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그리고 퀘스트에 대한 보상 말인데요. 그게, 원래는 그랑존이 죽기 전까진 구울들이 사라지지 않는 거라 보상은 나중에 그랑존이 유저 측에 입힌 피해에 비례해서 드리려고 했거든요? 한데 일이 꼬이는 바람에‥피해가 없다고 안 드릴 수도 없고……. 끄응!”

“그럼 똑같은 이벤트로 한 번 더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저희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나중에 다음 번 퀘스트를 맡은 파티와 같은 걸 주시면 되고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버지, 아니. 회장님께서 똑같은 이벤트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시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네요.”

그래서 듀얼 토너먼트 같은 걸 다시 하지 않는 건가? 운영자들도 고생이군.

“흐음……. 이건 지금 당장 뭐라 말씀 드리기 어렵군요. 저희끼리 의논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러면 얘기는 대충 끝난 건가요?”

“예, 아마도…….”

아니다. 하나 남아 있다.

“그럼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족의 경험치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뭔가 생각해보셨습니까, 운영자님?”

“……예. 사실 지금 상황을 현실에서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방금 막 결론을 내려서 알려주는 군요. 일단 경험치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떤 몬스터가 얼마의 경험치를 가지고 있는지 저희로선 알 수 없거든요. 몬스터 밸런스 팀장님이 워낙 괴짜라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시지 않아서……. 그렇기 때문에 경험치 대신에 명성치를 드릴까 합니다. 체크해보니 크루드님과 쿤님의 명성치가 B랭크 퀘스트를 간신히 얻을 정도더군요. 두 분의 명성치를 A랭크 급으로 상승시켜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스트님은…….”

날 따로 말하는 걸로 봐서 명성치 상승은 둘에게만 해당되나 보다. 하긴, 이미 A랭크 급인데 S랭크로 올려주기도 뭐하겠지. 어차피 퀘스트를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그럼 난 아이템인가?

“저희가 요구하는 일 한 가지를 수행해주신다면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제롬이 내민 것은 렌즈 부분에 커다란 눈이 달려 있는 돋보기였다. 아, 감정표도 붙어 있군.

[모험왕의 돋보기]

이 돋보기를 지도, 혹은 보물지도에 대면 돋보기가 그곳의 위치를 말해준다

부가 능력 : 지도 해석 스킬 + 50% 상승

“이, 이건…….”

최소 레어급이다. 보물 지도를 해석하고도 어디인지 몰라 창고에 썩혀두는 사람들이 넘치는 지금 즉시 위치를 알려주는 이 돋보기는 레어급 그 이상임에 틀림없었다.

“스트님이 로그로 전직할 레벨이시라더군요. 아마 여기서 벗어나면 곧장 전직하시겠죠? 그래서 로그에게 아주 유용한 물건을 준비해봤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들다마다. 이 정도면 수백 골드를 주고라도 사고픈 심정이다. 그런데 얼마나 대단한 부탁을 하려고 이런 걸 쥐어주는 거야?

“대체 어떤 일입니까?”

“험험. 그것이, 지금 말씀 드리기가…….”

제롬이 눈짓으로 크루드와 쿤을 가리켰다.

아, 내 본래 클래스로 수행해야 할 일일 테니 둘이 들으면 안 되겠군.

“크루드, 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먼저들 가. 어차피 난 이 일이 끝나자마자 로그로 전직하고 바로 로그아웃할 거니까 기다리진 말고.”

“그래? 할 수 없지. 우린 계속 뤼크레스에서 놀 거니까 나중에 접속하면 연락해!”

“제가 보내드리죠. 강제 이동, 뤼크레스로!”

둘을 강제로 이동시킨 제롬은 품에서 토시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먼저 해주실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마인이 되어 주십시오.”

“마인?”

“예. 죽은 그랑존을 대신해서 언데드 군단을 만들고, 그들을 이끌어 유저들을 공격하시는 겁니다.”

“제가 네크로맨서도 아니고, 무슨 재주로 언데드 군단을 만듭니까?”

“마족의 뿔과 이 토시를 이용하면 됩니다. 확인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마족의 뿔을 머리에 박으면 생명을 대가로 잠시나마 마족의 엄청난 힘을 얻게 되지요. 콜로니스트님이 그 힘을 얻으면 그랑존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실 거라는 게 저희 생각합니다. 거기에 이 토시의 능력을 더하면……. 이벤트의 재계가 가능하죠.”

뿔은 마족의 힘을, 토시는 마족의 권위를 준다는 소린가? 마인이라, 재미있군.

“그런데 생명을 대가로 힘을 얻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전 무조건 죽게 될 텐데 페널티를 없애주는 겁니까?”

“버틸 수 있는 시간은 6분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지요. 이 토시를 착용하면 시간제한이 사라지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리고 이벤트가 시작되면 콜로니스트님을 운영자화 시킬 겁니다. 마인이 되어 있는 동안에는 경험치를 떨구지도, 얻지도 못하고 성향 또한 일시적으로 악이 될 것이며 아이템도 취득하지 못합니다. 아, 넘치는 마나와 트롤을 능가하는 재생력 때문에 포션도 사용불가랍니다.”

이거 받고 일일 운영자로 봉사해라, 뭐 그런 뜻이로군.

“혹시 시간제한 같은 것도 있습니까? 언제까지 일을 벌여야 한다는.”

“아, 올 해 안으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듣자하니 곧 큰 힘을 얻으실 것 같더군요. 그 힘을 십분 발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매직 트랩에 관한 얘기로군. 확실히 큰 힘은 큰 힘이지. 자칫하면 내가 감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그럼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먼저 제가 친분 관계를 생각해서 정보를 뿌리고, 공격 상대를 고르면 어떻게 하실 거죠?”

“걱정 마십시오. 정보를 퍼트리는 순간 콜로니스트님의 계정을 정지시킬 거고, 이벤트 중에는 콜로니스트님의 눈에 모든 유저가 똑같은 얼굴로 보일 테니까요.”

계정 정지라, 꽤나 강경책을 쓰는 군. 뭐, 상관없지. 대충 정보는 다 모은 듯싶으니 마무리를 지어볼까?

“혹시 뿔은 제가 가진 걸로 해야 됩니까?”

“예? 당연하죠.”

“그럼 안 할랍니다. 제가 미쳤다고 제 아이템 버려가면서 남 좋은 일 합니까?”

듣자 하니 마족의 뿔을 사용하면 마스터 레벨 유저 10명과도 겨룰 수 있다는데 아이템 하나 때문에 버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돋보기야 어차피 나중에 골드고 사버리면 되니까.

차라리 사람 모아서 드래곤 슬레이어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지 않은가?

“예에? 아니, 그러시면……. 마족의 뿔이 세 개인 것도 아니라 따로 드릴 수 없는데…….”

당황한 제롬은 계속 횡설수설했다. 아무래도 하나 더 달라는 건 무리인 것 같군.

“좋습니다. 그럼 제가 양보하죠.”

“그, 그래 주시겠습니까? 정말 감사…….”

“작은 뿔을 드릴 테니 큰 걸로 바꿔주세요.”

“커헉!”

제롬이 난감해 하며 또 다시 사정했지만 더 이상의 물러섬은 없었다. 결국 교환 성립!

제롬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작은 뿔을 가져가고 큰 뿔 하나와 돋보기, 토시를 내게 넘겼다.

“돋보기는 ‘서치’라는 시동어로 사용가능합니다.”

“혹시 이거, 에고 아이템이라든지 하는 것 아닙니까?”

“그, 그걸 어떻게?”

내 물음에 제롬이 움찔거리며 당황했다.

이봐, 이봐. 수다쟁이 에고 아이템은 너무 뻔한 스토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이 커다란 눈알을 보고도 그런 생각 못 할 리 없잖아!

“떼어주시죠.”

“……네.”

돋보기를 받아든 제롬이 뭐라고 몇 마디 하자 돋보기가 하얀빛에 휩싸였다.

“여기 있습니다. 이동은 뤼크레스에 있는 도둑 길드. 맞죠?”

“예.”

사실 제롬이 말하기 전까지 로그로 전직하는 걸 깜박 잊고 있었다. 아무튼 올해 안이면 8개월쯤 남은 건가?

“강제 이동. 뤼크레스 도둑 길드로!”

제롬이 나를 향해 손을 휘두르자, 리턴을 사용했을 때와 같은 빛이 다리부터 감겨 올라왔다.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쳇!”

역시 에고 돋보기는 제롬의 노림수였다.

* * *

“어서 오십시오. 뭘 도와드릴까요?”

수도에 있는 어느 빌어먹을 길드장과는 달리, 뤼크레스의 도둑 길드는 점원부터 친절했다. 시설도 깨끗하고, 사람들도 제법 있고. 좋군.

“로그로 전직하고 싶습니다.”

“아, 전직하러 오시는 분은 참 오랜만이네요. 저를 따라오세요.”

장사가 제법 잘되는지 2층짜리 건물이었다.

“장사가 잘되네요? 수도에 있는 도둑 길드는 파리만 날리던데.”

“아, 이 근처에 보물이 꽤 많거든요. 그래서 보물찾기용 도구가 잘 팔리죠. 알려지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수도 같은 곳 근처엔 보물이 적지 않겠어요?”

역시 점원은 NPC가 아닌 유저였다. 그런데 괜히 말을 꺼냈군. 이 정도로 수다쟁이일 줄이야……. 나를 안내하는 점원은 2층 8번째 방, 그러니까 마지막 방에 도착하기까지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길드장님!”

“누, 누구야!”

꽈당!

책상에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있던 사내는 잠결에 자신의 다리가 꼬여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허둥대다 넘어져버렸다.

도둑 길드장들은 원래 다 저런 건가? 쩝!

“아이고, 허리야. 혜란 양, 무슨 일인가?”

“로그로 전직하러 오신 분이에요. 빨리 정신 차리고 서류나 꺼내요!”

“응? 전직? 거참 오랜만이군. 알았으니 나가 봐.”

주섬주섬 일어난 길드장은 서랍을 뒤지며 혜란이라 불린 소녀에게 나가보라 손짓했다.

“여기 있군. 거기 펜 있으니까 사인해.”

무척이나 성의 없는 태도였지만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로그로 전직하셨습니다]

“스킬북은 여기 있으니까 알아서 익히고, 더 할 말 없지? 그럼 난 잘 거니까 나가봐.”

“……예.”

“드르렁, 쿠울~.”

대답을 듣기도 전에, 길드장은 이미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나도 잠이나 자러 가봐야겠군.”

왠지 허탈한 마음으로 길드 밖에 나와 여관방을 잡고 자리에 누웠다.

“로그아웃.”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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