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여인궁 2 (22/43)

힐름 4권

● 차 례

#여인궁 2

#마족의 성인식

#미궁 탐사

#닌자

#듀얼

#리바이어선

#석판의 비밀

#여인궁 2

똑똑!

방의 주인은 잠든 듯 숨소리만 고요히 흐르는 방에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길드장, 저 백인살입니다.”

“들어와라.”

뜻밖에도 출타 중이거나 잠자리에 들었을 거라 생각하던 방의 주인은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반개한 눈을 똑바로 뜬 그는 자세를 고쳐 앉음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한껏 뿜어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곧장 그의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 보고를 시작했다.

“정기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길드비를 걷은 오늘까지 탈퇴한 인원 32명. 새로 가입한 인원은 7명. 총 길드원 수 75명입니다. 저번 달까지의 길드비는 모두 전쟁 배상금으로 날아갔다 보시면 되고, 이번 달 길드비의 70%도 저번에 막아낸 공성 5번에 쓰인 돈을 메우는 데 쓰였습니다.

“요컨대 길드원의 수와 돈, 둘 다 부족하단 소리군.”

보고를 듣고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길드장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몽땅 털어넣었는데도 이번 일의 타격이 생각보다 큰 탓이다.

길드장이 골치 아픈지 손을 이마에 얹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는 동안에도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예. 하지만 길드원이야 모으려면 금세 모일 거고, 돈도 세금 등을 통해 꾸준히 들어올 테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길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충성을 다하며, 그 많은 길드비를 꼬박꼬박 내준 74명 길드원들의 지위 상승…… 인가?”

“예.”

그렇다. 길드장을 제외한 74명의 충신들. 그들을 이제 새로 들어올 신입 길드원들과 똑같이 취급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각 같아선 길드 내에서의 지위를 한 단계씩 상승시켜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겨우 100명이 한계인 길드에 74명이 오인장, 십인장이 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이름뿐인 직함을 준다 해도 74개의 직함을 무슨 수로 만든단 말인가? 그들 모두를 공평하게 하려면 이대로 더 이상 새로운 길드원 영입을 하지 않으면 될 테지만 현재 길드원 수가 8, 90명 대도 아닌 달랑 75명. 반 수 이상이 마스터 클래스라도 되지 않는 한 언젠가 무너질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조치 없이 어물쩍 넘어간다? 그건 더더욱 위험한 일이다. 불만이 쌓이고 쌓여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니까.

길드장은 문득,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참…….”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길드장, 어서 결단을…….”

“후후, 알았다. 그럼 일단은…….”

콰과과광!

길드장이 궁여지책을 내어놓으려는 순간, 지축을 흔드는 대폭발이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여인궁 길드가 비코 영지에 공성을 선포했습니다.]

[여신강림 길드가 비코 영지에 공성을 선포했습니다.]

“여인궁? 여신강림? 이것들은 또 뭐야?! 당장 길드원 모아서 방어해!”

“알겠습니다.”

명령을 박은 백인살은 복도를 뛰어가며 계속 길드 메시지를 보내 길드원들을 불러모았다.

“여인궁? 여신강림? 계집들이 감히 겁도 없이……. 좋아. 네년들을 통해 우리 디아블로가 부활했음을 알려주지. 마계의 군주, 디아블로의 강림이다!!”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뽑아든 디아블로의 길드장 보카치오는 특유의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백인살이 나갔던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 * *

“자, 준비됐지? 그럼 시작하자. 셋, 둘, 하나! 나 여인궁 길드 마스터 에반제린은 비코 영지의 소유권을 두고 디아블로 길드와 전쟁을 벌일 것을 선포한다!!”

“나 여신강림 길드 마스터 미첼은 비코 영지의 소유권을 두고 디아블로 길드와 전쟁을 벌일 것을 선포한다!!”

“헬 파이어!!”

“헬 파이…….”

“헬…….”

공성이 선포됨과 동시에 10개나 되는 지옥의 불꽃이 차례로 성문을 뒤흔들었다.

마계의 군주라는 디아블로의 허울 좋은 이름도 지옥의 불꽃으로부터의 피해는 막아주지 못하는 듯, 성문에는 순식간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 한 번 더!”

쩌저적!

한 너댓 번의 공격을 더 퍼부었을까? 계속되는 공격에 내구력이 다한 성문이 비명을 토하며 한두 조각씩 떨어져내렸다.

“제길, 생각보다 성문 강화에 투자를 많이 했군. 쓸데없는 마나 소비가 컸어. 마법사들은 화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라!”

한 영지의 영주가 되면 성의 방어가 용이토록 일정한 금액을 내고 성문의 내구력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디아블로의 성문에는 그 성문 강화 기능이 여러 차례 사용된 듯, 엄청난 내구력을 자랑했다. 지금은 너덜너덜한 걸레가 되어버렸지만.

한 차례만 더 마법 공격이 이어지면 성문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인궁, 여신강림의 지휘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적이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성벽 위를 지켜서? 아니다. 성벽 위에 궁수, 마법사 등의 수비 인원이 진작부터 올라가긴 했지만 여신강림의 마법사들은 맨투맨으로 붙은 실드 파이터들에게 철저히 보호받고 있었으니까.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본진으로 돌아온 마법사들은 묵묵히 마나 포션을 들이키며 소모된 마나를 보충하는 것에 열중했다.

여신강림이 침묵을 지키자 디아블로도 덩달아 침묵했다. 적의 힘이 생각 외로 강한 상황에서, 박살나기 직전의 성문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수적으로까지 불리한 상황이니 최소한 동맹인 스피릿 길드가 지원 오기까진 함부로 뛰쳐나갈 수 없는 것이다.

“베르!”

선두에 선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맞춰 자신의 키 이상 가는 크기의 검을 등에 매단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예, 확실하게 뚫어놓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럼 부탁할게.”

“자, 갑니다. 파워 업!”

베르는 손을 뻗어 거인의 단검을 꺼내며 전신에 두른 아이템들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약속의 언어를 말했다. 아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이 낮은 베르가 엄청나게 무거운 거인의 단검을 쓰기 위해 택한 방법은 아이템의 보조인 것이다.

모든 아이템을 힘 상승 효과가 있는 것으로, 혹은 스트랭스 마법에 걸린 마법 아이템으로 바꾸다보니 방어력이 상당히 내려갔지만 거인의 단검의 위력은 그 갭을 충분히 메우고도 남았다.

“우오오오~!”

만화를 너무 많이 봤는지, 베르는 자기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쏴라!”

티딩! 팅! 팅!

피시식…….

어떤 놈이 무식하게 큰 칼 하나 들고 미친놈처럼 덤벼드는데 가만히 있을 디아블로가 아니었다.

잠시 후에 있을 대전투를 대비해서 마나를 아끼느라 고위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2써클, 4써클 마법과 상당수의 화살들이 베르의 몸을 노렸다.

하지만 어느새 검강까지 솟아오른 거인의 단검은 베르의 전신을 가리며 일체의 충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얍!”

콰과광!

어느 정도까지 접근한 베르는 성문을 향해 힘껏 도약했고 모든 힘과 체중을 실어 성문을 내려쳤다.

“저, 저런!!”

“막아라!!”

아무리 큰 칼로 내려쳤다고는 해도 대여섯번의 공격은 막아낼 거라 생각했던 성문이 너무도 쉽게 박살나 버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디아블로 길드원들은 자신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베르를 보고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한 채 멍한 상태로 베르와 거인의 단검을 쳐다봤다.

“저런 크기의 검이라면…….”

“레이지 길드의 베르 길리우스?!”

“말도 안 돼! 레이지와 우린 상호 불가침이…….”

성인 남성의 키보다 큰 칼, 거인의 단검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현재 힐름 내를 통틀어 세 명뿐! 레이지 길드를 지탱하는 한 축인 아론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새 거인의 단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베르 길리우스. 그리고 가끔 고레벨의 던전에 나타난다는 의문의 사내까지.

눈앞에 선 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디아블로의 길드원들은 순간 패닉 상태에 빠졌다.

레이지 길드와 자신들은 상호 불가침이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던 게 아닌가? 만약 이것이 계약을 깬, 약속을 어긴 것이라면? 디아블로 길드원들 사이로 공포와 불안감은 빠르게 전염되어 갔다.

“덤벼라!”

베르는 화살도, 마법도 닿지 않는 성문 바로 아래에서 크디큰 검극을 까딱이며 조롱하듯 눈앞의 기사들을 도발했다.

“모두 정신 차려라! 이런 일에 아론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레이지가 길드 차원에서 행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소리다. 병기의 이점만 믿고 적진에 뛰어든 저런 애송이를 갈아버리고, 방어를 철저히 하라!”

한 사내의 외침으로 대부분의 길드원들이 제정신을 차렸지만 한결같이 그를 띠꺼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굳이 해석하자면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정도일까?

몇 달 간 많은 액수의 길드비를 내면서 길드원들은 어지간한 간부급이 아니면 모두 자신과 동급, 혹은 아래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분이 시작된 것이다.

“흥! 말 안해도 그러려고 했어! 검강!!”

“내 말이 그말이다! 검강!!!”

제정신을 차린 디아블로 길드원들이 난 네 말을 듣고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하며 베르에게 검강을 날려댔다.

좁은 성문은 적은 수가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엔 골목길 다음으로 좋은 곳이다. 검술로는.

하지만 이들은 굳이 힘들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원거리에서도 상대에게 무지막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검강이란 스킬이 있는데 검술로 상대한다는 것은 오히려 웃긴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실 강기를 날려서 상대에게 보내는 것은 그냥 검에 강기를 씌우는 것보다 2, 3배쯤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겐 직접 싸우는 편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 성문이 생각만큼 좁지 않아서 한두 명이 날뛴다고 막을 수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이런 대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그들이 검강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이곳에 있는 디아블로 길드원 모두가 그 한번으로 눈앞의 적이 쓰러질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크! 이건 좀 위험하군.”

“흥,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널 저승으로……!”

그들은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여덟 명이 날린 검강은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이미 다른 기사들을 통해 실험해 봤으니까.

그때, 한 번에 6명의 검강까지 막아냈던 마스터 레벨의 기사는 7번째가 되자 검강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지더니 공격을 허용하고 큰 부상을 입고야 말았다.

오리하르콘 소드라는 뛰어난 무기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실전이었으면 몇 초 만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그런 일도 있었는데 하물며 마스터도 못된 애송이 따위가!

하지만 이 믿음은 거인의 단검이라는 사기성 아이템 덕분에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이런, 내구도가 많이 상했겠군. 어디보자…….”

“이, 이럴 수가…….”

베르는 살아 있었다. 막아낸 것이다. 여덟 줄기의 검강을. 그것도 큰 움직임 없이 정면으로!

자신이 감당해 낼 수 없는 많은 숫자의 검강이 날아오자 베르는 거인의 단검을 한 발자국 앞에다 꽂아 자신의 몸을 완벽히 가렸다. 거기에 베르가 강기를 씌웠다지만 강기가 그것들을 막아준 것은 네 개 째의 검강까지. 나머지 네 개의 검강은 거인의 단검이란 무리 자체가 막아낸 것이다.

“동요하지 마라! 그런 공격을 막아냈으니 저 검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한 디아블로 길드원들의 뒤쪽에서 전사의 외침이란 스킬을 사용한 듯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곳에는 핏빛 망토를 휘날리며 디아블로의 수장 보카치오가 베르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이런, 정말로 무사하진 않군요. 내구력이 8만 3천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요? 큭큭.”

“네놈이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이냐!”

“문답무용!”

대답을 짧게 일축한 베르는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러 적진에 검강을 떨어뜨렸다. 커다란 거인의 단검에서 강기가 뿜어져 나온 만큼 마나의 소비는 컸지만 그 위력 하나는 확실했다.

기습이 통한 것도 있지만 재빨리 검강으로 막아낸 이들 역시 자신의 검강보다 훨씬 굵고 큰 베르의 검강에 밀려 부상을 입은 것이 그 증거이다.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보카치오는 직접 검을 휘두르며 베르에게 달려들었다.

“이놈! 힘으로 토설하게 만들어주마!!”

콰과과광!

“크아아악!!!”

“으아아!!!!”

보카치오와 베르의 거리가 반으로 좁혀졌을 때, 또다시 눈부신 섬광과 함께 지축을 흔드는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소리.

폭발음 때문에 확실치는 않았지만 비명이 들려온 곳은 성벽 위! 궁수, 마법사들이 있는 곳인 듯싶었다.

“앗! 길드장, 위험해요!”

섬광이 사라질 때쯤 디아블로 길드원 하나가 제자리에 멈춰선 보카치오를 덮치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 위를 스치며 지나가는 굵은 검강. 모두가 마법 공격으로 인한 섬광 때문에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베르가 슬쩍 검강을 뿌린 것이다.

보카치오라는 목표물을 잃은 검강은 꿩 대신 닭 격으로 그 뒤에 있는 떨거지들을 노렸다.

“크악!!!”

초승달, 아니 반달 같은 검강에 디아블로의 진형이 어지러워졌다. 몇몇이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곳에 뼈를 묻겠다는 듯, 마나를 아끼지 않고 쏟아내는 베르의 검강에 되레 피해를 입거나 물러섰다.

“헥, 헥. 이젠 서 있을 힘도 없네.”

“네놈, 죽여 버린다!!!”

“월 오브 스톤!”

광기에 젖은 보카치오가 베르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목소리에 의해 만들어진 돌의 벽이!

“뚫는다!”

보카치오는 적의 원군으로 마법사 하나가 등장했음을 알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 여기고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원래 마법사란 존재는 근접전에서 기사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니까.

콰앙!

돌로 된 벽이 부서지며 이리저리 파편이 튀었다. 너무 가까웠던 탓에 보카치오 자신도 상당량의 파편에 몸을 부딪쳤지만 베르를 죽이겠다는 그의 집념은 고통도 잊게 만들었다.

“파이어 볼, 더블!”

“마스터?!”

보카치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개의 불덩이가 마스터만의 특권인 더블 스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깨달았지만 별다른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크기가 다른 두 개의 불덩이가 서로 부딪히며 폭발을 일으켰으니까.

코앞에서 일어난 폭발에 말려든 보카치오는 다시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마스터 레벨은 그에게 그 정도의 폭발은 큰 데미지도 아니었고, 이까짓 고통쯤은 수없이 겪어본 것. 서커스 하듯 공중에서 몸을 틀어 균형을 잡고 다시 달려 나갔다.

“막을 수 없는 대지의 흡입력. 그라비티!”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강력한 중력 마법을 시전해 그를 주저앉혔다.

“콜 형, 늦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아아, 미안. 성벽 위의 쥐새끼들이 생각보다 잘 도망 다녀서 말이야.”

“콜로니스트! 네놈이 정녕 계약을 깨겠단 말이냐! 그래도 명성 좀 있다는 놈이라 믿었건만…….”

‘콜’이라는 소리에 반응해 무시무시한 중력을 버티며 고개를 치켜든 보카치오는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생각한 자가 맞음을 확인하고 힘겹게, 그러나 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약을 깨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모양인데, 전 레이지 길드의 콜로니스트가 아니라 여신강림 길드의 콜로니스트입니다! 댁들과 상호불가침인 레이지나 더 메지션, 블러드, 아마조네스 길드가 아니라고요! 이제 이해가 되셨습니까?”

콜로니스트라 불린 사내는 보카치오를 찍어 누르는 중력 마법을 풀지 않은 채 재미있다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탈출구를 만들어 놓다니, 이런 비겁한…….”

“비겁이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언젠가 깨어질 계약 아니었습니까? 저희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콜의 반박에 보카치오는 입을 다물었다. 콜에게 비겁하다 말한 자신도 몰래 세력을 키워 레이지 길드에 도전할 생각이었으니까. 언젠가 붙게 될 일이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더 빨리 공수가 뒤바뀌어 찾아온 것뿐이다.

“큭! 그렇지, 언젠가 깨어질……. 그럼 성벽 위는 전멸이겠군.”

“성이 참 좋군요. 쥐새끼 한 마리 없이 조용한 것이.”

동문서답.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 성벽 위에서 들리던 비명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아마도 전멸. 사인은 그 눈부신 섬광과 관련 있을 것이다.

“대충 오해가 풀린 것 같으니 저흰 잠시 물러나도록 하죠. 쫓아오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할 말 다한 콜은 그라비티를 유지한 채 뒷걸음질 치다가 어느 순간, 마법을 풀고 베르와 함께 본진 쪽으로 달아났다.

“누구 마음대로…….”

“멈춰라! 저렇게 등을 보인다는 건 준비해 놓은 게 있다는 소리겠지. 크윽, 모두 진형을 갖추고 잠시 후에 있을 전투에 대비하라!!”

콜의 등을 향해 검강을 날리려는 기사를 보카치오가 만류했다. 그라비티의 영향권 안에 너무 오래 있던 탓인지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일. 최대한 괜찮은 척 보카치오는 후방으로 물러났다. 좋건 싫건, 준비가 됐건 그렇지 않건. 이제 남은 것은 전면전뿐이다.

* * *

“콜, 수고했어.”

“저보단 이 녀석이 고생했죠, 뭐.”

내가 에린 누나의 칭찬을 받아넘기자 베르는 HP와 MP를 대부분 회복했음에도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다.

오버하기는.

“자, 준비는 됐죠?”

“그럼! 이제 성벽 위도 활용 못하게 됐으니 지래야 질 수 없을 걸?”

베르가 시간을 끄는 동안 마법사 전원이 나서, 성벽 위를 선더로 집중 포격.

이 작전은 아주 효과가 탁월 했다. 하늘에서 번개가 직접 떨어지기에 방어도, 회피도 여의치 않고 웬만한 기사들도 두어 방이면 아웃이니…….

성벽 자체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는 점과 선더 마법서 자체가 워낙 얻기 어렵다는 점만 빼면 최강의 공격 전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었다.

“그럼 정비할 틈을 주지 말고 치도록 하죠. 전원 공격!”

“와아아아~.”

우리편의 사기를 올리고 상대의 전의를 꺾어버릴 시원한 함성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180여 명의 인원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저 정도면 간단히 이기겠죠?”

“당연하지. 문제는 우리 쪽 피해가 얼마나 되느냐인데, 그건 다 너하기에 달려……?!”

약속된 진형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여인궁, 여신강림을 보며 질문하는 베르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을……. 어라? 이놈이 왜 여기 있어?

“선두에서 한바탕 휘저어야 할 놈이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빨리 튀어갓!!”

“아? 예!”

“에휴, 내가 저런 녀석을 믿고 일을 벌이다니. 미쳤지, 미쳤어.”

“그래도 맡은 역할을 잘해내던 걸. 저 정도면 훌륭한 거지.”

내가 바닥을 향해 넋두리하자 에린 누나가 등을 토닥여줬다.

하긴, 원래 아론 몫으로 생각했던 일인데 저 정도면 잘한 거지. 그럼 나도 슬슬 준비해볼까?

“뭐, 죽음에 대한 특훈까지 시켰으니 오히려 D론보다 잘 싸울 수도 있겠네요. 텐트 설치!”

아론 몫의 일이 베르에게 넘어간 이유. 그건 베르가 이제 막 마스터 레벨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재수 없게 아론이 죽어버리면 경험치 손실이 너무 크니까. 하지만 베르는 경험과 전투력 어느 쪽에서도 아론에 미치지 못했다.

그 차이만큼 우리 편의 피해도 커지는 것은 자명한 일! 그 갭을 메우기 위해 내가 베르에게 요구한 것은 ‘용기’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용기! 그리고 그 용기를 키워주기 위해 나와 아론이 택한 것은 대련. 1대1, 혹은 2대1로 한쪽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대련 말이다. 죽음에 이르는 사람은 항상 같았고, 너무 쉽게 죽으면 그에 상응하는 아주 가벼운 벌칙이 뒤따랐을 뿐이지만 그 효과는 왠지 모르게 탁월했다.

“응? 텐트는 왜?”

“저도 이제 몸을 움직이는 클래스잖아요. 이렇게 좋은 실전 기회를 놓칠 수야 없죠.”

참가야 하겠지만 내가 많은 수를 죽이진 못할 것이다. 아니, 눈먼 검에 맞아줄 사람이 있으려나? 지금 참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때문에 수없이 죽을 것을 예상하고 미리 텐트를 설치한 것이다.

죽으면 재빨리 살아나 다시 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니까.

“하지만……우리 편의 희생을 줄이려면 네가 본 클래스로 나서는 게 좋지 않을까?”

“그것도 좋겠지만 나서지 않는 편도 적지 않은 이점이 있어요. 조금 전 모습을 보이고 옴으로써 상대를 흔들어 놓았으니 제가 안 보이면 계속 불안해할걸요? 뭔가 또 꾸미는 거라 생각할 테니까요. 그러면 자연히 싸움에만 집중할 수 없을 테고, 허점도 많아지겠죠.”

“그도 그러네.”

“그럼 전 다녀 올 테니 조심히 기다리세요. 그럴 여력도 없을 테지만 뒤에서 기습을 해올지 모르거든요.”

에린 누나가 죽는다고 이 싸움이 우리의 패배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에린 누나 역시 마스터를 목전에 둔 상황인지라 주의를 주고 전장으로 몸을 날렸다.

* * *

“큭, 성문 쪽으로 붙어라! 화살의 각이 안 나오는 곳으로 몸을 숨겨!!”

채재재쟁! 챙!

가면을 눌러쓴 지금의 난 스트. 전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도 신경 쓰는 이 하나 없었다.

상황은 여신강림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디아블로가 수적으로 우세한 여인궁, 여신강림을 막기 위해서 좁은 성문을 이용하려 했지만 성벽을 넘어 내리 꽂히는 여인궁의 화살 때문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화살 멈춰! 마법사 준비!”

“새처럼 하늘로, 플라이!”

더 이상 안에서 화살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자 하늘을 가득 메우던 화살 공격을 멈췄다. 그러고 나선 것이 마법사들.

플라이 마법으로 성벽 위에 오르는 마법사들을 지휘하는 건 드라이저였다.

“될 수 있으면 전격 계열로 쓸어버려!”

“제길, 마법사다. 후퇴! 내성으로 후퇴하라!”

쿠과과과광!

급히 몸을 빼는 디아블로 길드원들에게 온갖 파괴력의 마법과 검강 다발이 날아들었다.

폭발에 휘말리지 않고 안전하게 내성으로 들어간 인원은 대략 40여 명. 아직도 수가 많았지만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쳇, 이러다가 나서보지도 못하고 끝나겠는데?”

“자자, 빨리 움직여라!”

“응?”

싸움이래봐야 문 앞에 있는 기사들끼리 하는 것이 전부이니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아쉬워하는 그때, 베르가 이끄는 한 무리의 인원이 내성의 서쪽으로 이동해 가는 것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빙고!”

내가 세운 작전이니 그 다음 그들이 행할 행동을 모를 리 없었다.

좋았어. 저거라면 안으로 들어가 한바탕 놀아볼 수 있겠는데?

“파워 업! 자, 와라!”

성을 등지고 선 베르가 자세를 낮추자 기다리고 있던 기사 하나가 녀석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으랏차!”

베르의 1m 앞에서 점프한 기사는 깍지 낀 베르의 손을 밟고 성의 창문을 향해 날아올랐다.

타닥!

이미 몇 번의 연습을 거친 후였기에 어렵지 않게 창문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잠입에 성공한 기사는 안쪽의 상황을 살핀 뒤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둘, 셋, 넷…….

앞의 기사와 같은 방법으로 총 12명의 기사가 잠입했다. 아마 반대편에선 12명의 마법사가 플라이 마법으로 같은 짓을 하고 있겠지?

“간다!”

“에……?”

플라이 마법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기사들이 사용한 방법이 더 멋있어 보인 관계로 난 무작정 베르에게 달려들었다.

“혀, 형은……. 에라, 모르겠다. 으아압!”

베르는 안 된다는 듯 손을 가로젓다가 다시 자세를 취했다.

내가 연습하지 않아서 그런가본데, 이 정도는 연습 같은 거 안 해도…….

“……으아아악!!”

젠장! 이 정도쯤은 가뿐할 거라 생각했는데 타이밍이 어긋나 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어도 나에겐 창문까지 닿을 만한 힘이 부족했다. 날아오르던 몸은 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새처럼 하늘로, 플라이!”

타이탄 사냥을 위해 사이클롭스 밭의 끝 절벽으로 뛰어내린 경험 덕분일까?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플라이 마법을 시전할 수 있었다.

“휴, 역시 안 하던 짓 차려니까 안 되는군.”

먼저 들어왔던 기사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아래층으로 내려가 내성의 문을 공략하고 있는 우리 편 기사들과 협공하고 있겠지. 성동격서의 계랄까!

“흐음, 단신으로 쳐들어가긴 무릴 테고. 너무 쉽기야 하겠지만 아래층 인원들과 같이 움직여야겠군.”

목표가 정해지자 거칠 것이 없었다. 이미 이곳, 비코성의 내부는 정보 길드에서 사들인 지도를 통해 훤히 꿰뚫고 있으니까.

달리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디아블로가 포위되어 있는 현장에 도착했다. 같이 잠입했던 마법사들이 벌써 한방 날렸는지 바닥과 벽의 상당 부분이 그을려 있었고 기사들은 한창 난전 중이었다.

“나도 간다. 하아압!”

챙! 챙! 챙! 챙!

흥겨운 검 부딪히는 소리에 맞춰 나도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여인궁 길드가 비코 영지를 차지하였습니다.]

비코 영지를 상징하는 깃발이 찢어지며 여신강림의, 아니 여인궁의 승리를 알리는 알림말이 떠올랐다.

여기 도착하기까지 내가 죽은 회수는 모두 일곱 번. 무려 10레벨이나 떨어졌지만 딴 데 정신 팔린 기사 셋을 죽여 현재 레벨은 43. 오히려 30레벨이나 상승한 폭렙 상태였다! 공중전 중의 ‘상대 길드원 몬스터화’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축하해요, 누나.”

“고마워. 다 너희 덕분이야.”

“아니요, 거트 형 덕이겠죠.”

이 성을 굳이 에린 누나에게 넘긴 이유가 거트 형이 점수 따게 하려는 것이었던 걸 떠올리고 공을 거트 형에게 돌렸다.

“그래, 거트 오라버니한테는 따로 인사해야겠다.”

“아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드라이저, 넌 여신강림에 있는 사람들 본래 길드로 돌려보내고. 베르, 넌 나랑 같이 본성으로 돌아가자.”

“예? 아직 공성 시간도 안 끝났는데 디아블로가 탈환전이라도 벌이면‥.”

공성전이 완전하게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철수명령을 내리자 베르와 드라이저, 에린 누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서두르라고! 리턴!”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리턴!”

본성, 그러니까 폴메르 성으로 돌아온 나는 귓속말을 날려 베르에게 목적지를 알려주고 서둘러 달려갔다.

“길드 탈퇴!”

[정말로 여신강림 길드를 탈퇴하시겠습니까?]

“그래.”

[여신강림 길드를 탈퇴하셨습니다.]

쾅!

급한 마음에 국왕 알현실의 문을 몸통 박치기로 밀어열고 들이닥쳤다.

“길드 가입!”

“승인!”

사전에 알린 덕에 기다리고 있던 거트 형이 즉시 가입 승인을 했다.

“형, 베르 오면 가입시켜서 보내고, 얘기했던 30명은?”

“그러니까…… 연무장!”

워낙 다급하게 묻자, 다급했는지 잠시 생각하던 거트 형은 이마를 탁! 치며 답을 내놓았다.

“텔레포트!”

연무장의 좌표가 기억된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거트 형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는지, 연무장엔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 그들에서 쉬고 있는 한 무리의 기사들이 있었다.

“모두 들어라! 목적지는 비코성 입구. 여기 있는 스크롤을 다섯 명에 하나씩 사용해서 당장 이동하는 거다. 알겠나!”

“예!”

“텔레포트!”

그늘에 있던 기사들이 날 알아보는 것을 확인하고 6장의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내려놓은 뒤, 먼저 비코성을 향해 이동했다.

“콜 형, 여신 강림에 있던 사람들은 다 돌려보냈어요.”

비코 성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드라이저가 맡은 바 일을 제대로 수행했음을 알려왔다.

“응?”

“저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주위와 성에서 70m쯤 떨어진 곳에서 옅은 빛이 생겨났다.

그리고 3초 뒤, 빛은 좀 더 구체적인 무언가로 형상화되었다. 내 주위에 나타난 건 30명의 기사들. 그리고 저 멀리에 나타난 건 그 수가 배는 됨직한 붉은 망토의 무리들! 디아블로였다.

“스피릿 길드를 어떤 사탕발림으로 꼬셨는지 모르지만 너희 생각처럼은 안 된다! 전원 돌격 준비!”

스피릿 길드가 등을 돌린 사실까지 알았는지 보카치오는 아까보다 심하게 흥분했다.

훗, 덫인지도 모르고 덤비는 꼴이라니!

“우린 레이지 길드. 성문으로 쥐새끼 한 마리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 여길 지나가려면 우릴 먼저 쓰러뜨려야 할 터, 마찰을 일으키기 싫다면 돌아가라!”

“개소리! 상호불가침의 계약 따위 깨어진 지 오래지 않느냐! 전원 돌격!!!”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일어난 일을 모른다는 듯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보카치오가 더 볼 것 없다는 듯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것으로 궤멸 확정이군!

“모두 성문 안으로! 좁은 공간을 이용해서 상대한다!”

60 대 30 정도로 일단은 우리 편이 수적 열세이기 때문에 비교적 좁은 성문을 이용하는 정석 플레이를 펼쳤다. 기사들의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달려오던 디아블로의 길드원들이 일제히 품으로 손을 넣는 이상 행동을 취했다.

“텐트 설치! 여기서 뼈를 묻겠다!”

그들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텐트. 죽으면 곧바로 살아나 다시 전투에 참여하는 좀비 짓을 하겠다는 것인데, 이로써 마지막 살길마저 제 손으로 끊는 것이다.

“이 비겁한 레이지 놈들, 비켜라!”

“지껄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어딜 감히‥!”

채앵!

드디어 첫 격돌이 일어났다.

“이것으로 디아블로와의 상호불가침은 깨어졌다!”

“으아아악!”

내가 재빨리 성벽 위로 올라가 디아블로와의 계약이 백지로 돌아갔음을 선언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아블로의 진영에서 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네, 네놈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보카치오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한동안 잠잠하던 블러드 길드의 정예들이 공간을 찢고 튀어나왔기 때문! 과연 암살의 스페셜 리스트답게 그들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디아블로의 수를 무려 20이나 줄여버렸다. 이제 남은 수는 40명가량.

“뒤로!”

“어딜!”

직접 손을 쓰지 않고 뒤에서 관전하던 로즌 크랜츠가 짧은 명령을 내리자 블러드 길드원들이 일제히 백스텝 스킬을 쓰며 썰물 빠지듯 물러났다.

하지만 디아블로는 놓치지 않고 따라 붙었다.

앞뒤로 양면 공격을 받고 있다지만 접근전에서는 어쌔신 따위보다 검강을 사용하는 자신들이 유리하니까 혹시 모를 우환을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다.

“라이트닝 월!”

연속해서 백스텝을 사용하는 어쌔신들과 쫓아가는 디아블로 사이에 전기로 된 벽이 세워졌다. 뛰어들었다가 마비라도 당하면 100% 목을 내놓게 될 터,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물러섰다.

“쏴라!”

어느새 성벽 위에 일렬로 늘어선 여인궁 길드원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마나를 뜻하는 푸른빛으로 수놓는 하늘. 그 아름다운 곡선의 끝엔 당황한 모습의 핏덩이들, 디아블로가 있었다.

콰과광!

결코 화살이 낸 소리라 볼 수 없는 폭음과 함께 큰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뿌연 먼지 사이로 시커먼 무언가가 빠르게 이동했다.

당황하면서도 검풍을 이용해 먼지를 흩어버린 디아블로는 또 한 번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옆, 동료들의 목에 검은 옷의 어쌔신들이 칼을 박고 있었으니까.

“크윽……. 분하지만 후퇴다! 각자 산개해서…….”

보카치오가 이젠 22명밖에 남지 않은 길드원들에게 소리치다가 절망해버렸다.

동쪽과 서쪽. 딱 두 개 남은 탈출로에 더 메지션 길드와 베테랑 길드가 각각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디아블로가 머뭇거리는 동안 포위망은 조금씩 좁혀졌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지만 지금의 디아블로에겐 쥐만큼의 힘도 없으니 신경 쓸 바 아니다.

“검강!”

포위망이 3분의 2쯤으로 좁혀 졌을 때, 갑자기 디아블로 측의 기사 하나가 동료들에게 검강을 뿌리고 어쌔신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항복! 항복합니다. 길드 탈퇴 할 테니 제발 목숨은……. 꺽!”

로즌 크랜츠가 고개를 가로젓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어쌔신이 놈의 목을 베었다.

암, 저런 놈은 죽어 마땅하지.

“저놈은 레벨 1이다.

결국, 레벨 90대일 기사를 레벨 1로 만들어버리라는 로즈 크랜츠의 결정이 내려졌다.

도망가거나 숨어버리면 어쩌냐고?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놓칠 위인들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족쇄에 메여 있으니까.

바로 텐트라는!

“그리고 너희들은……. 딱 50번만 죽여주지. 아, 마스터 레벨은 예외다. 죽여 봐야 경험치도 얼마 못 먹을 테니 가진 아이템만 뺏고 보내주지.”

선심 쓴다는 듯한 로즌 크랜츠의 말투에 움켜쥔 보카치오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자자,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두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오게나.”

“테, 텐트‥!”

부드러운 말투와 함께 로즌 크랜츠가 몸을 틀자 텐트와 디아블로 사이에 일직선의 길이 뚫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텐트 안에서 기다렸다가 살아나는 족족 목숨을 취하는 어쌔신들과 디아블로 사이의.

“……텔레포트!”

“엇, 텔레포트!”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하던 보카치오가 기습적으로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사전에 대화가 없었는지 다른 길드원들은 당황하다가 따라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고.

혼자 살겠다고 수하들을 버리다니!

“쏴라!”

텔레포트라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가만둘 리 없지 않은가?

사용 후 이동이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까지 무방비 상태가 되고, 툭 건들기만 해도 캔슬되어 버린다는 점을 이용해 여인궁이 다시 한 번 시위를 당겼다.

“크억!”

누구 하나라도 몸 바쳐 방어했다면 한 둘쯤은 살아나갈 수도 있었지만 길드장이란 놈이 먼저 배신을 때렸으니 충성심 따위야 물 건너간 상태였다. 더구나 한 번 죽으면 연속해서 죽음의 고통을 느껴야 하고 레벨도 1, 2가 아니라 최소 50이나 하락하게 되지 않는가?

결국 디아블로 길드원 중 단 한 명도 텔레포트에 성공하지 못했다.

“말로 해선 안 되겠군. 가라!”

로즌 크랜츠의 명에 따라 정확히 22명의 어쌔신이 몸을 날렸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어쌔신이 기사와 정면승부를 벌이긴 힘들 텐데?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의 숲, 포그!”

디아블로와 어쌔신들의 격돌 7m쯤 전에, 로즌 크랜츠의 입에서 3써클 안개 생성 주문이 낭랑하게 퍼져 나왔다.

“세컨드 클래스가 마법사였나?”

디아블로의 중심에서부터 주위로 퍼져나간 희뿌연 안개는 순식간에 어쌔신들까지 집어삼켰다.

“끝났군. 저런 상태에서의 어쌔신은 무적에 가까우니까.”

약간의 병장기 소리가 안개 속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렸지만 그야말로 아주 약간이었다. 각자의 몫을 해치운 어쌔신들이 하나둘씩 빠져나오고 있는데 들리는 병장기 소리는 두 명분 정도랄까? 물러나는 어쌔신의 수를 열여덟까지 세고 이번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성문 아래로 몸을 옮겼다.

“총 22명. 어쌔신은 모두 빠져나왔습니다.”

성문 앞에 서자, 즉각 보고가 들어왔다.

“안개가…… 거슬리는군.”

“아, 즉시 검풍으로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내가 가면서 처리하도록 하지.”

기사들이 부산 떨어가며 안개를 없애는 것도 상당히 추하다는 생각에 직접 해결하기로 했다.

안개니까, 이게 좋겠군.

“그래, 화염에 몸을 맡길지니, 버닝 소울!”

마나를 태워 몸 밖으로 불을 뿜어내는 마법. 이것을 나 자신에게 걸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자 금세 효과가 나타났다. 수증기로 된 안개가 빠르게 증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넓게 퍼졌던 안개가 걷히고 안개가 있던 곳은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이렇게 도움을 주신 동맹 여러분께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이제 폭군 디아블로는 사라질 것입니다. 새로 비코 영지의 주인이 된 여인궁과 힘을 합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와아아아~!!”

조금은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다수의 군중에게 이것만큼 잘 먹히는 것도 드물다.

큭, 이러고 있으니 내가 진짜로 판타지 세계에 떨어진 것 같군.

“그럼 더 메지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베테랑도 이만‥.”

쓸데없이 PK가 되긴 싫었기에 무력시위만을 한 더 메지션과 베테랑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므로 작별을 고했다. 뭐, 디아블로가 달려들었다면 PK가 되는 것쯤은 감수했을 테지만.

“저희 블러드도 저것만 끝나면 신속히 사라지도록 하죠.”

로즌 크랜츠의 손끝엔 10초가 멀다하고 죽음이 이어지는 천막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단순히 죽이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계속 직기만 하는 디아블로가 오히려 PK가 되어 있다니……. 일부러 틈을 주고, 시간을 벌기 위해 검을 휘두르면 저렙을 내세워 PK로 만드는 건가?

“그러시죠. 그럼 저희도 이만.”

남의 앞마당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거슬렸지만 악역을 자처한 블러드인지라 뭐라 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마웠다. 다신 일어나지 못하게 대신 싹을 짓밟아줘서.

“자, 승전고를 울려라! 레이지 길드원들도 모아서 성벽 수리에 들어가고, 끝나면 대규모 연회를 열겠다!!”

“와아아아~.”

“오오오오!!”

연회라는 소리에 남성 유저들의 눈이 돌아갔다. 여인궁의 성 공략 기념 연회에 여인궁 길드원들이 나올 것은 자명한 일. 잘하면 여자 친구 하나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난 그런 남성 유저들을 보며 남몰래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되면 여인궁과 레이지의 유대가 더욱 강해질 테니까.

“이제 우리는 들어가서 차후의 계획에 대해 심도 깊은 얘기를 나눠보자고.”

그렇게 성벽의 수리를 길드원들에게 떠넘기고 레이지 길드와 여인궁 길드의 주요인사는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부르자마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거트 형이란 건 말해봐야 입만 아프겠지?

“여인궁의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레이지와 여인궁의 수뇌부를 모아놓고 앞으로의 계획 등을 토의하길 30여 분. 어차피 자세한 사항이야 여인궁이 알아서 할 일이기에 몇 가지 간단한 사항만을 결정짓고 연회 전에 맥주 한잔씩을 들이켰다. 물론 19세 이하는 음료수로.

“에린, 정말 축하해! 앞으로 내가 지켜줄 테니 성 뺏길 걱정은 하지말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봐.”

“고마워요. 거트 오라버니.”

거트 형이 자기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말인데.”

“네?”

“나, 널 좋아해.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푸웁!”

이런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고백하는 거트 형의 행동에 마시고 있던 맥주를 나도 모르게 뿜어버렸다.

“뭐어?”

“오, 오라버니…….”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얘기인지라 모인 사람들마다 한마디씩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고백하는 건 즉흥적이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까지 즉흥적인 건 절대 아니야. 그 동안 쭉 생각해 봤는데……. 나 널 사랑하는 것 같다.”

거트 형이 한층 더 진지한 모습으로 말하자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이런 바보 같은! 하다못해 대답은 나중에 해달라고라도 해야지! 지금 이 상황은 당장 답을 내라는 것 같잖아!

“죄송…… 해요. 제게 거트 오라버니는 그냥 좋은 오라버니일 뿐이에요. 혹시 그것 때문에 이 성을 저에게 주신 거라면 받을 않을 래요…….”

거절이다. 에린 누나의 말로 이 성이 거트 형과 사귀어주는 것에 대한 대가처럼 되어버려 상황은 더욱 어색해졌다.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거트 형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싫다면 할 수 없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오라버니가 싫다는 건 아니…….”

“알아. 무슨 얘긴지. 하지만 이 성은 그런 의미가 아니니까 받아줘.”

“네…….”

“자아, 갑자기 나 때문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는데 미안하고, 마시자.”

그 말과 함께 바로 맥주를 원샷하는 거트 형을 선두로 다시 방안에 조그만 움직임들이 생겼다.

방안이 약간의 활기를 되찾았을 때 한 NPC가 들어와 맡겨 놓았던 연회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거트 형의 앞에는 맥주 두 병과 독하기로 유명한 이플리트 두 병이 놓여 있었다.

“가자…….”

길드원들이 거트 형에게 다가가려는 것을 막고 모두를 재촉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지막에 남은 건 에린 누나였다.

“오라버니…….”

“에린……. 괜찮아. 그리고 난 아직 포기 하지 않았어. 포기하지 않을 거야.”

살짝 열어놓은 문틈으로 거트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부담스러운 듯한 에린 누나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 * *

연회가 한창 무르익으려 할 때 나는 거트 형과 일행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제 그만 스트가 되어 한바탕 놀아보기 위해서. 다들 성문까지 배웅하겠다했지만 주요 인사가 단체로 빠져나와 버리면 연회장이 어색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거트 형의 배웅만을 받기로 하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

“거트 형, 아까 실수한 거야.”

“알아. 나도…….”

성문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기에 천천히 걸으면서 거트 형의 잘못을 지적했다.

“알지 모르겠지만……. 고백은 상대에게 자신의 짐을 떠넘기는 거야. 끙끙 앓은 만큼,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큰 만큼 그 짐의 무게도 더 무거워지지. 일단 고백하고 나면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그 무거운 짐들의 무게가 사라져서 홀가분해지지만……. 그 무겁던 것이 한 줌 재로 소멸된 거라 생각해? 아니야. 그 짐들은 고백을 받은 당사자에게 넘어가 버리지. 이미 나를 좋아하고 있거나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그냥 친구로, 오빠로,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겐 태산보다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어. 그런 무게를 저런 여자아이가 버티기란 힘든 일이겠지. 고백을 한다는 건 어쩌면 죄를 짓는 일일 수도 있는 거야. 그래서 신중해야 해. 그런데 너무 서둘렀어. 잘못한 거야.”

“…….”

“그리고 너무 서둘렀을 때……. 그랬다가 실패했을 땐 옮겨갔던 짐의 무게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무게를 가진 칼이 왼쪽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 이때 빠르게 상처를 잊는 사람도 있지만 그 상처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자책의 의미로 더 깊은 상처를 내는 사람도 많아. 난 형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큭, 이러니까 독백 같군.

“……경험에서 나온 얘기냐?”

어느새 내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던 걸까……. 난 대답하지 않았다. 거트 형도 더 물어오지 않았다.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난 지그시 가면을 눌러썼다.

“이렇게 간단히 포기할 건 아니지?”

“물론이지.”

씨익!

거트 형과 난 마주보고 웃었다. 내 미소는 가면에 가려 안 보일 테지만 거트 형은 느꼈을 것이다.

“그럼 난 갈게. 나중에 봐!”

“그래, 잘 가라. 그리고 고맙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따라 달렸다. 잊었던 얘기를 꺼내면서 우울해졌던 감정을 날려 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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