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궁 1
[콜, 너 어디야!]
“아, 잠깐 기다리자.”
갑작스런 거트 형의 귓속말에 걸음을 멈추자 크루드가 알아채고 쿤의 걸음을 멈추었다.
[형, 무슨 일 있어?]
[너 수련도 다 끝났다며? ‘그 말’ 한 지도 3개월이 다 되가는데 에린 일은 언제 처리할 거야!]
아…… 벌써 3달이나 됐던가? 그럼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겠군.
[알았어. 지금 갈게.]
“귓속말 해제. 크루드, 쿤. 미안한데, 나 가봐야겠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급한 일이라니 할 수 없지. 그럼 일 끝나면 연락해.”
“이게 금방 끝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적어도 며칠은 걸릴 것 같은데…… 아무튼 연락할게.”
“그래, 잘 다녀와라. 무슨 일인 진 모르겠지만 건투를 빈다!”
크루드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성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성에는 이미 우리 길드의 초창기 멤버와 아마조네스 길드장, 부길드장이 모여 있었다.
“아, 늦어서 미안.”
“미안한 줄은 아냐?”
에린 누나에 관한 일이어서인지 거트 형이 불퉁거렸다.
“미안하다니까. 그럼 얘기를 시작해볼까? 음, 공적인 일이니 존칭을 쓰도록 하죠. 먼저, 이번 일은 에반제린님이 길드를 재창설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길드원은 기존의 길드원 그대로를 재가입 시키시면 되고 이름은 생각해 놓으신 게 있으시겠죠?”
“여인궁으로 할까 하는데…… 요 콜, 아니 콜로니스트님의 말씀처럼 남성 유저들에게 밀려 레벨 업 등 게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여성 유저들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독점 사냥터는 밀림만으로 만족할 생각입니다.”
역시 에린 누나는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수성을 위해서라도 독점 사냥터 몇 개쯤은 꼭 필요했다.
“좋은 말씀입니다만 생각해보니 그건 조금 힘들 것 같군요. 현재 디아블로가 가진 독점 사냥터는 모두 16개. 이것도 던전 하나를 통째로 삼킨 것만을 센 것이고, 고급 던전 중 레벨 업이나 돈 벌기에 좋은 층만 골라 독점하고 있는 곳까지 하면 무려 21개나 됩니다. 디아블로의 욕심이 과하긴 했지만 더 매지션도 12개. 저희는 최강급 던전 8개 중 3개를 독점한 대신 13개를 가지고 있죠.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레벨 업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수성을 위해서라도 독점 사냥터 몇 개쯤은 꼭 필요하다는 소리입니다. 여인궁의 수성 때 저희가 돕기야 하겠지만 만일이란 게 있으니 여인궁 자체도 어느 정도의 무력은 갖춰야 하죠. 예를 들어 레이지와 여인궁에 같이 공성이 걸릴 경우, 저희가 상대를 막아내고 도우러 갈 시간은 벌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서, 최소 2,3개의 독점 사냥터는 가지실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계속 우리의 도움만 받게 되면 사람들이 얕잡아 볼 수 있다. 그러다보면 공성을 선포하는 길드가 늘어날 것이고, 한 손이 열 손 못 당해낸다고 언젠가 성을 비워주게 되어있다.
“그럼…… 2개만 가지도록 하죠.”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자,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성을 어떻게 무너뜨리느냐를 얘기해보도록 하죠. 솔직히 말해 지금의 여인궁은 디아블로 전력의 반도 상대하지 못합니다. 어떤 전술, 전략을 이용해도 뒤집을 수 없을 만큼 그 차이는 분명하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프로젝트 길드! 레이지, 혹은 그 밖의 동맹 길드에서 인원을 차출해 일시적으로 길드 하나를 세우는 겁니다. 물론 그들은 공성이 끝나면 다시 원래 소속된 길드로 돌아가죠.”
“만약, 그들이 마음을 바꿔먹고 그대로 성을 차지해버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번엔 여인궁의 부길드장, 아니 부궁주가 걱정되는지 질문해왔다.
“그러진 못할 겁니다. 그들이 성을 차지하고 길드를 유지한다는 것은 원래 있던 길드를 배신하는 행위이니 배신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질 게 분명하거든요.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뒤 남은 길드석으로 여인궁의 2진을 만들면 어떨까 조심스레 권하는 바입니다. 아마조네스의 인원을 여인궁으로 고스란히 옮긴다면 전처럼 궁수 집단이 될 테니 2진은 다양한 클래스를 고루 받아들여 균형을 잡는 겁니다. 길드 설립 취지를 반영하자면 그것도 여성 유저라는 게 가입 조건이 되겠군. 뭐, 머슴으로 부릴 남성 유저를 받으셔도 되고 말입니다.”
“하하하!”
지나친 클래스의 편중. 에린 누나도 그것의 문제점을 생각했는지 모두가 웃고 있는 속에서 혼자 진지하게 고민했다. 에린 누나가 침묵을 지키자 웃음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에린 누나가 먼저 입을 떼기까지 그 누구도 기침 소리 한번 내지 않았고 심지어 크게 숨 쉬는 것까지 자제했다. 이 행동들은 자의적인 것도 있지만 두 눈 부릅뜨고 모두를 째려보는 거트 형 때문이지도 했다.
“후우……. 의견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처음과 달리 일이 커져버린 것 같지만 여성 유저의 권익 보호라는 큰 목표가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겠지요.”
에린 누나의 입에서 옅은 한숨과 함께 긍정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자, 이제 동의도 얻었으니 작전회의에 들어가 봅시다. 먼저…… 공성 일은 모레!”
“아니, 그렇게나 빨리?”
6개 성 중 상위에 속하는 곳을 치면서 이틀 만에 모든 준비를 끝내겠다고 선언하자 모두 당황해했다. 우리가 차지할 성, 돈들이고 시간 들여서 공성 병기를 만들어다 부술 것도 아니고 길드원을 새로 뽑을 일도 없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어?
“딱히 준비할 게 있는 것도 아닌데다 시간을 끌면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물론 여기 계신 분들을 못 믿는 건 아닙니다만 2진을 만들고 정비할 때라면 가능성 있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요. 아, 그런데 디아블로와 동맹인 스피릿 길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그쪽에서 지원 온다면 2진만으로 상대하긴 힘들 텐데요. 죄송한 말이지만 여인궁의 전력으론 스피릿에게 약간을 타격을 주는 게 고작이지 않습니까?”
이번엔 레이가 스피릿의 지원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안 그래도 말할 참이었는데 잘됐군.
“말을 잘 꺼내주셨습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누군가에게 부탁 한 가지를 하려 했거든요. 레이지 길드원 중 제 대신 스피릿과 블러드에 편지 한 통씩 전해주실 분? 사신의 자격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죽거나 할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니 제가 하죠.”
아론이 손을 들고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편지를 배달해 줄 사람이 생겼으니 잠시 양해를 구하고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익숙하지 않은 깃털 펜에 내 악필이 더해지니 초등학교 4학년짜리 글씨가 나와 버렸지만 형태만 알아 볼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쪽팔리긴 하기 때문에 남이 못 보도록 종이를 접어 아론에게 넘겨줬다. 이럴 땐 게임이라 글씨를 쓰자마자 잉크가 마른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흠흠, 그것만 가져다주면 알아서들 행동할 거야.”
“니 지렁이 같은 글씨를 알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면 일단 전해주고는 오마.”
“시끄러!”
“아참, 공석이었지? 전 이만 물러납니다.”
편지를 받아든 아론은 내 속을 한 번 긁어놓은 뒤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망할 놈!
“이제 사라질 놈은 사라졌으니 하던 얘기를 마저 하죠.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정면 돌파와 전략을 쓰는 쪽이 있는데…….”
아론이 사라지고, 작전 회의는 한동안 계속됐다. 이런저런 의견이 오간 가운데 결정된 작전은…….
“후우, 괜히 온다고 했나? 여긴 정말 오기 싫었는데…….”
등에 자신보다 큰 검을, 허리춤엔 황금빛 검을 찬 덩치 큰 사내는 견고하기 그지없는 성문을 한 번 올려다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론님. 길드장과의 마찰 때문에 오실 거란 생각을 못했는데, 어쩐 일이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덩치 큰 사내, 아론이 성문을 지나려하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어쌔신 하나가 튀어나와 말을 걸었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눈앞의 상대를 힐끗 쳐다본 아론은 다시 걸음을 옮겨 그들을 지나치면서 입을 열었다.
“니들 길드장 만나러 왔다. 연락하고, 앞장서.”
그들을 무시하는 행동이었지만 어쌔신의 얼굴엔 전혀 동요가 일지 않았다.
성문을 지나고부터 아론의 말대로 어쌔신이 앞장을 섰다. 하지만 아론이 길을 훤히 다 알고 있어서인지 둘은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 걸어가듯 따로, 또 같이 길을 걸었다. 그래도 상대가 한 길드의 장이라는 것을 상기 했는지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아론의 태도도 조금은 바뀌었다.
“레이지 길드의 아론님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드르르륵!
커다란 문이 열리고, 아론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지 굳게 입을 다문 아론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건 묵묵히 앞으로 가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걸 전해주러 오신 모양이군요? 다 읽을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아론은 근처 의자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고 편지를 받아본 사내는 진지한 얼굴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편지를 끝까지 읽은 사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우고 다시 편지를 봉투에 접어 넣었다.
“재미있군요. 이 대로면 아주 재미있겠어요. 콜로니스트님께 잘 알았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럼 난 가지.”
아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편지를 근처 화로에 넣고 태우던 사내가 깜박 했다는 듯 이마를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아참, 전해주시는 김에 한 가지 더 전해주시겠습니까?”
“뭐지?”
“이 로즌 크랜츠가 정식으로 듀얼을 신청한다고 전해주십시오. 공식적으로 하긴 무리가 있을 테니 비공식적으로 말입니다.”
순간, 무표정하던 아론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뭐야?!”
쉬릭-!
아론의 허리춤에 차여있던 오리하르콘 소드가 빛살처럼 흐릿해지며 로즌 크랜츠의 목젖에 닿았다. 하지만 베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듯, 로즌 크랜츠의 얼굴엔 한껏 여유가 묻어나왔다.
“공식적으로 했을 때 콜로니스트님이 이기면 다행이지만 제가 이기기라도 하면 꽤나 시끄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일이 커져서 공성으로까지 번지면 안 될 일이니 그걸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비공식적으로 하자는 겁니다.”
“누가 그것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누가 네깟 놈이랑 붙어주기나 한대? 좋아, 정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내가 먼저 붙어주지!”
아론은 로즌 크랜츠의 목에 칼을 댄 상태로 발을 들어 놈의 배를 차버렸다.
‘제길, 피했군.’
그러나 발에 느껴져야 할 묵직한 감각이 없었다. 로즌 크랜츠가 미리 알고 백스텝으로 피한 것이다.
아론은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마나를 끌어올려 검을 밀어 넣었다. 곧이어 검에 2m 가량의 검기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로즌 크랜츠는 싸울 생각이 없는 것처럼 전혀 공격 자세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런, 앞서 말했듯이 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답니다. 오늘은 제가 한발 물러나죠. 하지만…… 언젠가 붙기 싫어도 붙게 되실 겁니다.”
로즌 크랜츠는 마지막 말을 작고 은근하게 했다. 상대가 전혀 싸울 의사를 안 보이니 아론으로서도 도무지 싸울 맛이 안 났다. 결국 ‘개소리!’라고 소리쳐 준 다음 두 번째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뒤돌아 성을 빠져나갔다.
* * *
“길드장! 왔어요, 왔어!!”
“오다니, 뭐가?”
길드장이라 불린 갈색 머리의 사내는 자신의 집무실로 호들갑 떨며 뛰어 들어온 소년을 보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레이지 길드에서 사신을 보내왔다구요!”
“뭐? 갑자기 왜?”
“그야…… 저도 모르죠. 아무튼 곧 도착할…….”
쿵!
성의 크기가 작아서인지 블러드 길드의 오마이스 영지 영주 집무실보다 작은 문은 아론의 힘을 못 이기고 큰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뭐, 뭐냐…… 가 아니라 뭡니까!!! ……요.”
큰소리를 치려면 스피릿 길드의 길드장, 카프카는 상대가 자신들과는 상대가 안 되는 거대 길드 레이지의 간부라는 것을 깨닫고 고온하게 말을 바꾸었다.
“편지를 전하러 왔습니다.”
“펴, 편지요? 그런 일이라면 아랫것들을 시키시지 뭘 이렇게 직접……. 아니, 말씀만 하시면 직접 가지러 갔을 것을…….”
“일단 읽어보시죠.”
편지를 전해 받은 카프카는 아론에게 앉을 것과 먹을 것을 계속 권하며 조심스레 편지를 뜯어 읽었다. 그가 편지 속 내용을 읽고, 이해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스락.
내용을 모두 읽은 카프카는 손에 힘이 풀렸는지 들고 있던 편지를 떨어뜨렸다.
“뭔가 문제 있나?”
“아닙니다. 아니고말고요. 이의가 있을 리 있겠습니까. 절대,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편지를 읽어보지 못한 아론으로서는 무슨 소린지 알 길이 없었지만 알았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떨어져 있던 편지가 발에 채였다. 내심 궁금했던 아론은 주워주는 척하며 편지를 힐끗 쳐다보았다.
편지엔 단 일곱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용두참(龍頭斬), 난입필사(亂入必死)
용의 머리를 벨 때, 난입하면 죽는다. 뭐, 대충 이런 말인 듯 하다. 여기서 용이란 디아블로일 것이요, 벤다는 것은 공격한다, 혹은 무너뜨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카프카도 그것을 알아차렸고 뻣뻣하게 굳어 디아블로가 무너진 뒤에 자신들의 처지를 머리 굴려 생각했다. 그의 그런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린 아론이 편지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입단속 잘 시켜주십시오. 그럼 스피릿엔 피해가 없을 겁니다.”
“예? 아, 예! 물론입니다. 살인멸구든 뭐든 해서 확실히 입단속 시키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호들갑스러운 그의 행동에 아론은 속으로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성을 빠져나왔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