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임 킹
“크윽……. 성공이군.”
내가 다시 눈을 뜬 곳은 푹신한 침대가 있는 병원이 아니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이 느껴지는 수련장의 텐트 안. 복수를 위해 이곳을 나가면서도 부수지 않은 덕이었다. 죽음으로 인한 두통이 가시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론을 불러들이는 일이었다.
“할 수 있겠어?”
“물론이지. 거인의 단검 무게에 비하면 저런 것쯤이야…….”
수련장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수레를 보며 아론은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긴, 힘이라면 오우거에게도 밀리지 않는 놈이니까.
“좋아. 공간의 흐름을 따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워프 게이트! 서둘러.”
“흐읍!”
타원형의 파란 게이트가 열리자 아론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서서히 굴러가는 바퀴. 점점 속도를 더해가던 아론과 수레는 게이트 속으로 쏙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수레의 크기가 게이트의 크기보다 커서 걱정했는데 크기는 상관없는 건가?
“텐트 철거. 이제 나도 가보실까?”
게이트에 손을 집어넣자 누군가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며 순식간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게이트 반대편엔 아론이 수레에 기대 기다리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묻자.”
“뭘?”
“돈이 목적이었으면 그 NPC가 찾으러 온 단검을 가지고 도망치는 편이 더 나았잖아? 굳이 찾으러 넘어온걸 보면 가격면에서 이것들 이상 가는 걸 테니까. 그런데 왜 굳이 이 비도들을 택한 거냐?”
위험 감지 때의 기습, 트랩 때 날 굴려댄 것, 그리고 그림자의 단검까지, 감히 날 건드린…….
“복수지. 네 말대로 귀찮게 비도들을 가지는 것보다 단검 5자루를 챙기는 게 훨씬 간단해. 게이트를 열고 단검들을 던져 넣은 다음, 게이트를 닫아버리면 내가 한번 죽는 것으로 해결될 테니까. 하지만 난 복수가 하고 싶었거든? 번거롭긴 해도 이렇게 하면 못해도 고생은 시킬 테고, 잘하면 폐기 처분도 가능하지. 그의 능력을 생각할 때 몬스터들 사이에 밀어 넣었다고 죽지는 않아. 그렇지만 정해진 영역을 보통 벗어난 것도 아니고 대륙의 중앙에 있는 수도에서 초입이긴 하지만 대륙의 최남단인 죽은 자의 땅까지 간 건 어떻게 될까? 버그로 처리 되어도 할 말 없지 않겠어?”
“……새삼 너하고 친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적으로 만나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별말씀을.”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인 뒤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수레의 종착지는 트랩과 마찬가지로 아론의 방이었다. 트랩 600개에 비도 1000개. 그것들이 차지하는 공간은 웬만한 작은 방을 가득 메울 정도였지만 아론에게 배정된 방은 그 예닐곱 배는 족히 됐다. 내가 쓰던 방을 아직도 비워뒀으니 자기 방에 쌓지 말라고 아론이 잔소리 해댔지만 움직이기 귀찮은 관계로 어느 정도의 트랩과 비도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물론 옷을 갈아입고 가면으로 바꿔 쓴 채. 집을 하나 사는 것도 좋겠지만 매번 같은 곳으로 떨어지는 게 짜증나니 패스.
“스테이터스 창 확인.”
밖으로 나오자마자 도둑 길드 장에게 죽어서 레벨이 몇이나 떨어졌는지부터 확인해 보았다. 현재 레벨 8. 대장간에서 나올 때가 10이었으니 2나 떨어진 셈이었다. 가뜩이나 비도도 잘 못 다뤄서 마법의 도움이 없으면 레벨 10이 넘어도 오크 사냥조차 못 할 것 같은데 난감하군.
“마법사 한 분 구합니다!”
“보물찾기 함께 할 로그분 구합니다!”
“울프 킹 잡으러 갑니다. 두 자리 남았음!!”
파티를 구하는 사람들의 외침에 광장은 상당히 시끄러웠다. 이거 참, 레벨 10이하를 모으는 파티는 있지도 않군. 초보 존에 다시 가야하나…….
“저기요.”
“예? 저 말입니까?”
한숨을 내쉬며 초보 존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데 마법사 인 듯, 로브를 눌러쓴 꼬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초등학생인가?
“네.”
“왜 그러시죠?”
“클래스가 어떻게 되세요?”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대뜸 클래스를 물어보는 것은 어찌 보면 실례되는 일이었으나 이 꼬마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듯 했다.
“도둑입니다.”
현실과 다름없었지만 게임인 만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존대하는 편이 좋았다. 혹시 아는가? 이 꼬마가 엄청난 봉일지.
“역시!”
“무슨…….”
“저희랑 같이 사냥 안 가실래요? 슬라임 던전에 가려는데 파티 중에 도둑이 한 명도 없어서요. 경험치는 균등으로 할게요.”
“……뭐, 그쪽만 좋다면 저야 오케이죠. 안 그래도 레벨 업 할 생각에 앞이 막막했는데.”
왜인지는 몰라도 이 꼬마는 나를 꼭 파티에 넣으려고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둑을. 하급 몬스터인 슬라임이 주로 나오는 던전이라면 트랩이라 봐야 하급이 고작일 텐데?
“그럼 이쪽으로.”
꼬마가 날 데려간 곳은 한산한 펍(Pub.주점)이었다.
“여어∼. 도둑은 구했냐? 또 엉뚱하게 궁수 데려온 거 아냐?”
“칫, 제가 뭐 어린애인줄 아세요? 도둑 맞으니까 빨리 가자구요∼.”
“그래, 초등학생씩이나 됐는데 어린애는 아니지. 큭큭. 아, 그런데 레벨은?”
레벨 얘기가 나오자 꼬맹이의 얼굴이 파래지며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저 꼬맹이가 내 레벨이나 스킬에 대해 물어본 적 없군.
“그게, 그러니까…… 에…….”
“도둑에게 레벨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투에 직접 참가할 게 아니라면 말이죠. 스킬만큼은 자신 있으니 걱정 마시길.”
“이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제가 무시한 것처럼 되어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인사드리죠. 전 크루드, 42레벨 기사입니다.”
“전 스트, 레벨 8 도둑입니다.”
생각보다 레벨이 너무 낮아서일까? 크루드란 기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굳이 레벨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들이 받아주지 않으면 초보 존으로 가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나보고 직접 싸우라 할 것 같지도 않은데 스킬만 높으면 되는 거 아닌가?
“흐음, 마나가 부족할 듯싶은데…….”
아! 현재 내 레벨은 8. 일반적인 경우라면 마나가 턱없이 부족할 터였다. 그렇다고 마스터 클래스임을 밝힐 수도 없으니…… 크루드란 기사가 고민하는 동안 변명거리를 찾아야 했다.
“제가 레벨은 낮지만 서브 클래스를 오래 키워서 마나량은 자신 있습니다. 친구 도움으로 마나 포션도 넉넉하구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파티에 도둑 클래스 한 분을 더 넣을까 고민했는데.”
한 명을 ‘더’ 넣으려고 했다? 그 말은 날 뺄 생각이 없었다는……? 진심인진 모르겠지만 진짜라면 상당히 착한 녀석이군.
“파티 초…… 어, 아이디가?”
“그게, 제가 지금 리얼모드 3단계라서 말입니다. 아이디는 일단 스트인데 쿨럭 쿨럭…….”
그가 아이디를 물어오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얼모드 2단계에서 파티에 들어가려면 아이디를 말해야 한다. 가명이 아닌 본래 아이디를. 즉, 정체가 탄로 난다는 소린데 순간적인 기질을 발휘해서 악수하면 끝이니까. 거짓말은 했지만 난 아직 리얼모드 2단계. 최대한 자연스럽게 기침을 하며 조그만 소리로 ‘감도 설정 변경 3단계로’를 중얼거렸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갑자기 사래가 걸려서…….”
진짜로 사래 걸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워낙 현실 같은 게임이다 보니 그들도 수긍했다. 기침이 멎자 크루드가 손을 내밀었고 내가 그 손을 마주잡음으로 해서 파티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럼 다른 파티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스트님을 데려 온 꼬맹이는 48레벨의 마법사 쿤이고, 이쪽은 왼쪽 분이 43레벨 마법사 붉은바람님, 오른쪽 분이 미티어레인님이십니다.”
기사 하나에 마법사 셋. 슬라임이야 원래 불로 지지는 게 제일이니 구성은 그렇다 쳐도 레벨이 전부 40대 이상? 고작 슬라임 던전에 가는 것 치고는 평균 레벨대가 너무 높았다.
“슬라임…… 던전이라면서요?”
“그건 가면서 말씀드리죠. 자, 갑시다!”
그가 내 등을 떠밀며 펍의 밖으로 나오자 파티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속셈인진 모르겠지만 슬라임이라…… 재미있겠군.
“슬라임 던전까진 동문을 따라 30분쯤 걷다가 남쪽으로 빠지면 됩니다. 한 4, 50분 걸리겠군요. 준비 되셨으면 출…….”
“저기요!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해서 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도망다닐 때나 걸어 다녔지, 사냥 갈 땐 걸어서 가본 적이 드문지라 간단하게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쓰자고 건의했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초보 취급만 당했다.
“가뜩이나 아이템 드랍률이 극악인 슬라임을 잡으러 가면서 매스 텔레포트까지 쓰면 적자를 면할 수 없습니다. 아니, 비단 슬라임 뿐만이 아니죠. 레벨이 6, 70대쯤 되지 않으면 매스 텔레포트는 쓰기 부담스러운 아이템입니다.”
워낙 초보 때를 심하게 건너뛰었고 어떤 걸 사도 돈이 모자란 적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그들을 뒤따랐다. 대로를 따라 걷는 만큼 몬스터의 습격도 없었다. 대로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는 동안 오크 몇 마리가 얼쩡대다 단칼에 베였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전투 없이 슬라임 던전에 도착했다.
“아담하네.”
던전의 입구는 한 번에 두 명이나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았다. 던전이란 게 지하로 내려갈수록 길이 넓어질 수도, 좁아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슬라임 던전 정도가 넓어져봐야 한 명분의 넓이 정도가 고작일 게다.
“그럼 들어가 볼까?”
“아저씬 뒤로 빠져요. 삼촌이 앞장 설 거니까”
앞장서 들어가려는 날 막은 건 쿤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크루드와 쿤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가면에 대한 것부터 나이, 도둑을 선택한 이유 등 온갖 것들을 물으면서. 그것들에 대답해주다 보니 자연스레 나도 그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크루드와 쿤의 나이는 각각 21살과 11살. 크루드는 나와 동갑이었고 쿤은 초등학교 4학년, 역시 꼬맹이였다. 둘이 같이 다니는 이유는 크루드가 쿤의 삼촌이여서인데 크루드의 레벨이 더 낮은 이유가 한참 접근전을 펼칠 때 파이어 볼을 날린다던가 새로 배운 마법을 실험한답시고 듀얼도 걸지 않고 기습하는 쿤 때문이란다. 붉은바람과 미티어레인은 이번 사냥을 위해 나처럼 초대한 사람들인데 너무 차가워서 말붙일 엄두가 안 난다나?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슬라임 던전따위에 40레벨 이상의 유저들이 몰려가는 이유는 이 던전의 최하층인 4층에 있는 슬라임 킹을 잡이 위해서라고 한다. 엄청난 크기라고는 하는데, 그래도 천적 격인 ‘불’앞에서는 무릎을 꿇겠지.
“쳇, 크루드. 네가 먼저란다.”
본래 클래스로라면 적어도 슬라임 킹이 있는 곳까진 걸음 한번 안 멈추고 뚫어버릴 수 있지만 레벨이 8인, HP낮은 도둑 노릇을 해야 하니 크루드에게 선두를 맡겼다.
“파이어 인챈트!”
“파이어 인챈트”
입구에 들어서기 전, 먼저 크루드의 검과 내 그림자의 단검에 화염 속성이 부여됐다. 일반 검으론 슬라임의 점액질 때문에 핵을 파괴하기 힘들 테니까.
꾸물꾸물-.
던전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메바처럼 생긴 슬라임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하나 둘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1층은 우리가 맡지.”
아무리 나라도 슬라임에게 죽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지 크루드가 눈짓으로 함께 나설 것을 권했다.
“가자!”
상급에 속하는 단검에, 파이어 인챈트까지 걸렸으니 검을 바닥에 끌면서 지나만 가도 슬라임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장난까지 쳐가며 길을 뚫는데 갑자기 갈림길이 우리를 막아섰다.
“갈림길?”
“드디어…… 나왔군. 이제 진짜 네 차례다. 길 좀 찾아봐줘.”
“뭐?”
“길 찾기 스킬이란 게 있다며? 다음 층으로 가는 최단 거리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초급 던전 전체와 중급 던전의 중반까지는 어느 길로 가도 다음 층 계단에 도착할 수 있지만 슬라임 킹과의 전투를 생각해서 힘을 아끼고 싶거든.”
“그건…… 로그가 쓰는 스킬인데?”
“에……?”
그랬다. 길 찾기 스킬은 도둑뿐만 아니라 어To신도 사용하지 못하는 로그 전용 스킬이다. 설마…… 날 데려온 이유가 달랑 그거 하나?
“이거 난처하게 됐군. 그럼 아무 곳으로나…….”
“아, 잠깐!”
할 수 없이 무작정 중앙의 길로 가려는 크루드 보기 미안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가 우연찮게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를 찾았다. 발자국! 슬라임이 주는 경험치는 결코 많지 않다. 10레벨 이하의 유저에게라면 그럭저럭 쓸 만한 양이겠지만 무기에 인챈트를 걸려면 최소 11이상의 마법사가 있어야 한다. 파티에 11레벨 이상의 마법사가 끼어 있으면 여기서 죽치고 사냥할까? 아니다. 파티에 그런 자가 있다면 마나가 고갈될 때까지 오크만 잡고 뒤로 빠지는 게 훨씬 이득이다. 경험치 뿐만 아니라 아이템도 오크 쪽이 훨씬 잘 준다. 즉, 발자국이 많은 길이 비교적 고레벨들이 다니는 최단 루트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이쪽이야.”
부가 설명이 없었음에도 크루드는 일체의 망설임 없이 중앙의 길을 포기하고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오른쪽 길로 이동했다. 믿는다는 건가?
“역시 제대로군.”
예상은 들어맞았다. 선택한 오른쪽 길을 따라 2층으로 가는 계단에 도착하기까지 나온 슬라임의 수는 오히려 갈림길에 들어서기 전까지 만났던 수보다 적었다. 피해는 전무(全無). 계속 이런 식이라면 슬라임 킹까지는 레벨 8 로그인 채로도 혼자 뚫을 수 있을 것 같다.
“2층도 우리끼리 해보지.”
크루드의 눈짓에 맞춰 동시에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디뎠다.
“응? 물러서!”
지잉 지잉-.
모든 던전이 그렇듯, 다음 층으로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계단 주위 5m에는 몬스터가 얼씬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몬스터가 없는 것은 그 보호지역을 벗어나도 마찬가지였다. 갈림길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다, 계단에서 4, 50m쯤 멀어졌을 때 위험 감지 스킬이 발동하며 사이렌이 머리 위쪽에서 울려댔다.
타닷-.
쿵!
크루드와 내가 몸을 뺀 것과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약간의 거리를 벌리고 찬찬히 살펴보니 떨어진 괴물체는 슬라임이었다. 한데, 슬라임이 떨어졌던 땅이 갈라져있다. 어스퀘이크를 썼을 때처럼 사방으로 갈라졌으면 모르되 칼로 내려친 것처럼 반으로 쪼개진 형태다. 둥글둥글한 점액질의 몸을 가진 슬라임이 떨어지면서 땅을 일자로 갈랐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거였나?”
의문은 바로 풀렸다. 떨어진 슬라임이 한 자루의 도처럼 변한 것이다. 대부분의 점액질이 도의 형태를 이루는 데 사용되고, 도를 이루고 남은 약간의 점액질과 핵이 바닥에서 그것들을 떠받들었다. 이 특이한 것은 이동 속도도 1층의 것들에 비해 상당히 빨랐다. 내가 신기해하고 있을 때 크루드가 점액질의 도와 마주쳐갔다. 양단(兩斷). 크루드는 슬라임이 자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검을 휘둘렀다. 결과는 양단. 불 속성이 가미된 검은 슬라임의 점액질을 가로로 양단했다. 하나, 그것은 실수였다. 크루드의 검이 지나가자 슬라임은 잘려졌던 점액질들을 다시 받아들여 재빨리 도의 형태를 이루었다.
“컥.”
다행히도 점액질의 도는 그리 날카롭지 못했다. 도를 가슴으로 받은 크루드는 신음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냥 서있는 상태였다면 배나 낭심에 맞았겠지만 슬라임에 맞춰 자세를 낮추다보니 가슴에 닿은 것이다. 이건 어찌 보면 행운이다. 내가 크루드를 향해 달려 들어가자 슬라임이 도를 이루던 점액질 중 상당량을 바닥 쪽으로 돌렸다.
포옹-.
병뚜껑 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슬라임이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점액질을 이동시킨 건 반동의 힘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떨어지는 도는 크루드의 목을 노렸다.
투웅!
“크흡.”
“파이어 애로우.”
방심이 컸던 만큼 크게 당황한 크루드를 대신해 내가 도를 막아냈다.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예전 아론이 세비지의 투창을 받아냈을 때의 느낌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검을 쥔 손바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손바닥에 전해져 오는 고통 때문에 반격하지 못함을 아쉬워할 때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리며 불꽃의 화살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치지직-!
조준은 정확했다. 불꽃의 화살은 슬라임의 핵을 관통했고 점액질들은 터져버린 물풍선처럼 바닥에 퍼졌다.
“에헴, 내 실력이 이 정도라구요!”
양 허리에 손을 얹고 턱을 치켜든 자는, 위험천만한 파이어 애로우를 날린 자는 지금까지 크루드의 레벨을 10이상이나 떨어뜨렸다는 쿤이었다.
“너…….”
“뭐,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우리가 맞았으면 어쩔 뻔했어!”
“우리가 맞았으면 어쩔 뻔했어!”
딱, 콩!
나와 크루드는 동시에 달려가 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너, 내가 쓰라고 하기 전까진 절대로 마법 쓰지 마. 내가 죽기 직전이라도. 알았어?”
“하지만…….”
“매형한테 말해서 한 일주일 접속 못하게 만들어 줄까?”
“그, 그것만은…… 알았어. 안 쓰면 되잖아. 히잉…….”
역시 애들에겐 부모님이 쥐약이다. 몇 번 당해본 기억이 있는지 쿤은 바로 저항할 생각을 버렸다. 다시 선두는 나와 크루드가 맡았다. 좀 전의 일을 교훈삼아 방심하지 않으니 슬라임의 형태 변화 따위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두 번이나 나온 갈림길도 1층에서와 같은 방법을 쓰니 간단히 해결됐다. 물론 제대로 된, 몬스터가 가장 적은 길인지는 모른다. 그냥 상대하기 어렵지 않으니 맞나보다 하고 짐작할 뿐.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 건 딱 한 종류를 상대할 때뿐이었다. 웬만큼 가까이 갈 때까진 보통 슬라임처럼 가만히 있는 놈을 상대할 때만. 놈은 속도도 느리고 어느 정도의 접근도 허용한다. 하나, 검을 꽂을만한 거리에 도달하면 어떤 변형 슬라임보다도 빠른 속도로 창을 만들어 찔러온다. 나와 크루드, 둘 중 하나가 미끼가 되고 다른 한 명이 공격하면 못 잡을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린 피해를 원하지 않았다. 안전한 길을 두고 돌아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약간의 사고는 있었지만 큰 힘을 들이지 않고 3층으로 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잉 지잉-!
“피해!”
3층 계단을 보고 다리에 힘을 더하려는데 갑자기 크루드가 날 밀쳐냈다.
패애앵-!
내가 서있던 자리에 화살 같은 무언가가 휙 하니 지나갔다가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왔던 것 이상의 속도로 되돌아갔다.
“저건…….”
“활의 형태?”
이번엔 활의 형태를 갖춘 슬라임이었다. 다른 놈들 덩치의 세배는 됨직한 놈을 못 보다니, 너무 방심했군.
“모두 뒤로 빠져! 일단 사정거리는 대충 잡았으니까 원거리에서 해결한다.”
혹시라도 재공격이 오면 받아치려고 자세를 잡고 있던 크루드가 정면을 주시하며 명령을 내렸다. 명령 이행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바닥에 넘어져있던 나를 마지막으로 파티원들이 후퇴를 마치자 크루드도 조심조심 뒷걸음질 쳐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핵도 컸고 점액질의 양도 많았기에 모두 폭발형 주문을 택했다. 저 바닥에 붙은 껌딱지 같은 놈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거라 굳게 믿고서.
피이이잉-!
파이어 볼이 쏘아짐과 거의 동시에 활 형태의 슬라임이 대부분의 점액질을 모아 화살처럼 쏘아냈다. 근 20m는 될 법한 거리였지만 점액질 화살은 쭉쭉 뻗어 나왔다. 뒤쪽에서 계속 점액질들을 공급해주니 굵기도 계속 그대로였다. 어른 팔뚝만한 화살이 파이어 볼과 맞닿았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저, 저런……!!”
슬라임의 점액질 몸으로 만들어진 화살 따위, 가볍게 상쇄시키고 본체까지 없애리라 생각했던 파이어 볼들이 제대로 된 힘 한번 못 써보고 소멸 되어버렸다. 이변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파이어 볼을 없앤 점액질 화살의 힘이 죽지 않고 우리를 향해 뻗어 나왔다.
“크흑…… 응?”
화살의 목표는 크루드였다. 너무 갑작스런 상황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크루드는 코앞까지 온 화살에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착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패애애앵-!
크루드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실눈을 뜨는 순간, 목에 살짝 닿아있던 화살이 부르르 떨리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끌려갔다. 점액질을 화살처럼 쏘아내고 끝내는 게 아니라 다시 회수해서 재활용(?)하는 것이다. 아찔한 경험을 한 크루드는 제자리에서 비틀댔다.
“하아, 정말 위험했다.”
“그래, 그런데 2써클의 파이어 볼도 가볍게 박살내는 저 놈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지?”
“…….”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슬라임은 꾸준히 기어오며 거리를 좁혔고 우리는 그런 슬라임에 맞춰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섰다.
“에잇! 삼촌, 나한테 맡겨. 아무리 점액질이 많다 해도 한계가 있겠지. 내가 죽어라고 파이어 볼을 써서…….”
“멍청아! 누가 그걸 몰라서 안하고 있냐? 슬라임 킹을 만나기 전까진 마나를 아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자꾸 물러만 나는 게 짜증났던지 쿤이 자신 있게 나섰다가 크루드에게 꾸지람만 들었다.
“아, 맞다!”
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쿤이 꾸지람을 듣는 걸 보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힌트를 얻은 것도 쿤의 말에서이기 때문인지 미안한 마음은 더했다. 힌트가 된 말은 점액질의 한계! 가진 점액질을 최대한으로 쓰는 놈이란 것이 놈의 약점이었다.
“왜 그래?”
“내말 좀 들어봐. 저 놈이 점액질로 된 화살을 쏠 때, 점액질을 한계치까지 화살에 몰아넣겠지?”
“그렇겠지. 거리가 거리인 만큼”
“그게 약점이야! 저놈이 화살을 쏠 때가!! 대부분의 점액질이 공격으로 쏠린다는 것은 방어하는 점액질의 양이 그만큼 적다는 뜻이잖아? 그러니까 화살이 쏘아지는 거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핵이 있는 본체 쪽으로 슬쩍 화염계열 마법을 날려주면 간단하단 소리지!”
“그런 수가 있었구나! 다들 들었죠? 그럼 스트의 말대로 실행합니다.”
뒷걸음질을 멈췄다. 그러자 슬라임의 거리 좁히기도 중단됐다. 처음에는 활이 두꺼워지더니 더 굵은 화살이 생겨났다. 반동도 이용하는지 시위도 당겨졌다. 꽤나 멀리까지 당겨진 시위에서 힘이 풀리자 굵은 점액질이 무섭게 쏘아졌다.
피이잉-!
화살은 또다시 크루드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크루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움직일 수 있으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한 3m를 남겨뒀을까? 드디어 움직인 크루드의 머리는 약간의 머리카락만을 내어주고 안전을 지켰다. 그때 쿤을 제외한 마법사들이 크루드의 양옆으로 달려 나가며 준비해놨던 파이어 볼을 쏘아냈다. 패애앵하는 당기는 소리를 듣고 쏘면 늦는다는 것을 의식해선지 조금 서두르는 감이 없지 않았다.
패애앵-.
드디어 점액질은 한계에 도달했다. 크루드의 머리카락을 약간 잘라먹었던 화살은 잘려진 머리카락 자리에 시원한 바람을 밀어 넣으며 원위치로 돌아가려했다.
“제길, 돌아가는 게 너무 빨라…….”
돌아갈 때 걸리는 시간이 올 때의 반절을 조금 넘는 정도인 것 같다. 직감적으로 실패할 것을 느끼고 달려갔던 두 마법사를 불러들이려 할 때 폭발 소리가 들렸다.
“아……. 저런 방법이!!”
달려갔던 두 마법사 중 미티어레인은 예정대로 본체를 공격했지만 붉은바람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노린 것은 점액질 화살! 길게 이어진 화살의 본체 가까운 부분에 파이어 볼을 터뜨림으로써 회수 자체를 막아버린 것이다. 그 덕에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가던 화살은 중간에 끊겨 바닥에서 꿈틀댔다. 하나, 이것도 약간의 문제점은 있었다. 중간이 잘림으로써 나머지 점액질들의 회수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 아까에 비하면 많은 양은 아니지만 파이어 볼 한방 정도는 충분히 박아낼 수 있었다.
“위험…….”
푸욱-.
파이어 볼이 막혔으니 반격 당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슬라임에 접근한 미티어레인에게 소리를 지르려했지만, 목구멍에서 말이 살짝 새어나왔을 때 도로 입을 닫았다. 어느 새 달려간 크루드가 슬라임의 핵 부분에 검을 박아 넣은 것이다. 레벨이 낮아서 그렇지 이 정도 실력이라면 고수라 불려도 무방할 거다. 난…… 꽤나 든든한 동료를 얻은 것 같군.
“휴, 겨우 해치웠네. 스트, 쿤! 가자!”
두 마법사와 크루드의 활약으로 2층의 마지막 고비도 넘겼다. 이제 남은 건 어떤 슬라임이 나올지 모르는 3층과 슬라임 킹이 있다는 4층 뿐! 힘들긴 했어도 누구하나 포션을 사용한 사람이 없으니 지금까진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스트, 이제부턴 진짜 진지하게 하자.”
“그래. 까딱 방심하단 죽을 지도 모르겠다.”
2층에서도 고전했는데 3층에서라고 수월할 리 없다. 의견 교환을 한 나와 크루드는 차분히 발걸음을 옮기며 어떤 몬스터가 버티고 있을지 전방을 주시했다.
“응?”
3층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돼서 우린 벽화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 모를 초등학교 수준의 형편없는 그림 실력이었지만 다행히 내용파악은 가능했다.
“내용을 연결해 보자면…… 저 끝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여기 그려진 이 슬라임을 죽이면 사라진다?”
“대충 그런 것 같네.”
“그럼 이 슬라임은…….”
“가다보면 나오지 않겠어? 어떤 종류인지는 직접 부딪쳐서 알아보는 수밖에.”
“그렇겠지. 자, 다시 출발!”
파티장인 크루드의 말에 따라 다시 이동이 시작됐다. 벽화에 그려진 슬라임은 한 마리였지만 혹시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2층 초입에서처럼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올 지도 모르고 지금까진 없던 함정이라도 있을까봐 정신을 집중했지만 3층의 막바지에 가서야 쓸데없는 심력 낭비였음을 깨달았다. 일방통행인 3층의 끝에 버티고 있는 건 푸르스름한 슬라임 한 마리와 반투명한 벽이었다.
“에게? 진짜로 달랑 한 마리네? 이 정도는 내가…….”
“너…….”
“농담이야, 삼촌. 농담!”
쿤은 또 나서려다 크루드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꼬맹이가 나서는 게 습관이 됐구만.
“어떤 종륜지는 모르지만 일단 제가 건드려 보죠.”
“조심해서…… 헙!”
크루드에게 주의를 주다가 난 놀라 눈을 비볐다.
“저거…… 두 개 맞지? 내 눈이 이상해 진 거 아니지?”
“아니야. 두 개가 아니라 네 개…… 계속 분열한다?!”
“제길, 무한 증식이다! 별 수 없어, 마법사!!”
내 신경질 적인 외침에 맞춰 주문 외우는 소리가 은근하게 내리 깔렸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세 개의 파이어 볼이 무한 증식 슬라임에게 날아갔다. 하나, 이놈들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어느새 8마리로 분열한 슬라임은 6마리를 방패삼아 2마리를 살렸고, 2마리는 방패들의 뒤에서 분신을 늘려갔다. 주문을 다시 외우기 위한 딜레이가 지나면 다시 분열해 있는 슬라임. 마나를 아끼고서는 이기기 힘든 상대임이 분명했다.
“마나 포션은 내가 줄 테니까 갈겨버려!!”
“정말? 앗싸∼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의 장벽, 파이어 월!!”
“마나 포션 값을 지불할 능력이 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의 장벽 파이어 월!!”
“성난 바람의 춤, 윈드 커터!”
마나를 아끼지 않기로 결심했는지 쿤과 미티어레인은 파이어 월을 세워 점액질의 벽을 한 번에 소멸시켜버렸다. 이것뿐이라면 몇 마리의 슬라임 정도는 살아남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붉은바람의 윈드커터는 파이어 월의 불꽃까지 등에 업고 불꽃 벽 뒤의 모든 생명체를 남김없이 쓸어버렸다. 저 붉은바람이란 마법사,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데?
쿠구구궁-!
마법사들이 마나를 아끼지 않고 공격하자 허무할 정도로 쉽게 슬라임을 해치울 수 있었다. 파이어 월이 걷히고, 거의 흔적도 없는 슬라임들의 시체마저 사라지자 뒤쪽에 있던 반투명한 벽이 땅속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자, 받으십시오.”
내게 받을 거란 기대도 안 하는지 각자의 포션을 꺼내는 그들에게 품속에서 마나 포션 하나씩을 던져줬다. 얼떨결에 받아든 셋은 포션의 등급을 보고 몹시 놀랐다. 하긴, 자기들이 쓰는 포션이라 봐야 하급, 무리하면 중급이 고작인데 레벨 8짜리가 상급 마나 포션을 던져줬으니…….
“말했잖습니까, 친구의 도움을 좀 받았다고.”
“친구가…… 갑부냐?”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이제 한동안은 못 만나겠지만.”
아무리 갑부라도 레벨 8짜리한테 상급의 마나 포션을 준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지만 다행히 눈치 챈 사람은 없는 듯싶었다. 레벨 8짜리한테 마나가 많아봐야 얼마나 많다고 상급 포션을 주겠어? 아무리 급조한 말이라지만 나도 멍청하군.
“삼촌, 대충 회복도 다 끝났으니까 빨리 내려가자. 슬라임 킹을 빨리 보고 싶단 말이야. 진짜 소문처럼 덩치가 집채만 할까?”
“알았다. 알았어. 다들 준비 되셨나요? 그럼 내려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대충 회복을 끝낸 것 같자 크루드가 앞장서서 마지막 4층으로 내려갔다. 4층은 어디서 봤던 구조였다. 얼음의 동굴. 좁다란 길의 끝에 무지하게 크고 넓은 공간이 있는 이 구조는 얼음의 동굴 5층, 최상급 골렘이 버티고 있는 곳과 구조가 비슷했다. 넓은 공간에 버티고 있는 것이 최상급 골렘이 아니라 초대형 슬라임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헉!”
“집채만 하다더니 그 이상이잖아!”
“파, 파이어…….”
“안돼!”
모두가 집 두세 채는 될 법한 슬라임의 크기에 경악하고 있을 때 쿤이 겁에 질려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볼!”
치지직!
쿤이 날린 파이어 볼은 제 위력을 다했음에도 슬라임의 크기를 100분의 1도 줄이지 못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따끔한 공격에 슬라임 킹은 우리를 인식해 버렸다.
“흩어져!!”
저런 무지막지한 놈에게서 마법사를 보호한답시고 마법사의 앞을 막아섰다간 사이좋게 쥐포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서로 간의 거리는 최대한 멀게! 슬라임 킹이 크긴 했지만 이곳은 그 두 배 가량 넓었기 때문에 원형으로 포위할 수 있었다.
이동해서 자리 잡고, 공격 자세를 취할 때까지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슬라임 킹은 아직까지 느릿느릿한 속도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파이어 볼!”
이미 공격을 시작한 거, 어차피 싸울 거면 몸을 완전히 틀기 전에 최대한의 데미지를 입혀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쿤은 마나를 모조리 긁어모아 파이어 볼을 난사했다. 피해는 있었다. 사람 머리통만한 화염의 구가 슬라임 킹의 몸체에 부딪칠 때마다 큼지막한 구멍이 생겨났으니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다른 곳의 점액질들이 빠른 속도로 이동해왔고 그 덕에 슬라임 킹의 방향 전환도 빨라졌다.
“이이…… 누가 겁낼 줄 알아? 덤벼!”
눈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핵 두 개가 자신을 향하자 쿤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은 오기일 뿐이다. 그 증거로 제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다. 도와주러 가고 싶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이쪽에서 공격해 시선을 돌려볼까 생각하는 사이 슬라임 킹의 몸체에서 커다란 촉수가 뻗어나갔다.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 그 커다란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굳어있던 쿤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퍼벙!
팔처럼 좌우 양쪽에서 뻗어 나오던 촉수는 붉은바람과 미티어레인이 날린 파이어 볼에 적중 당해 터져 나갔다. 목숨은 건졌지만 쿤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중간 부분이 터져 나간 탓에 촉수의 앞부분이 그대로 쿤의 몸을 덮친 것이다. 쿤의 전신은 점액질 속에 파묻혔다. 버둥거려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아마도 물속에 잠긴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 일정 시간 내에 나오지 못하면 질식사 처리가 될 테지만 근처의 마법사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쿤의 상태를 못 봐서도 아니고 그들이 악독해서도 아니다. 구하러 갔을 때 슬라임 킹이 재차 공격해오면 막아낼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저 점액질 속에서 빠져나오는 건 쿤 혼자의 힘으로 해야 한다.
“쿤!”
“자리를 지켜!”
아직 초등학생밖에 안된 쿤이 숨을 못 쉬고 버둥대는 모습을 차마 못 보겠는지 크루드가 달려가려 했지만 내 말을 듣고 주춤거렸다.
“쿤! 파이어를 사용해!!”
저 상황에서 파이어 애로우 같은 건 사용해봤자 도움이 안 되고 파이어 볼을 썼다간 자폭하는 꼴 밖에 안 된다. 쿤의 레벨이 좀 더 높았으면 더 쉽게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파이어가 최선! 손바닥에 모인 불꽃으로 차분히 점액질들을 없애는 것이다.
“아구어(파이어).”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쿤의 손바닥에 붉은 불꽃이 생겨나 점액질을 소멸시켜갔다. 그때였다. 재차 쿤을 공격하려는 듯 슬라임 킹의 몸이 앞으로 움직였다.
“파이어……!”
속았다. 앞으로 움직이는 놈의 움직임에 맞춰 붉은바람, 미티어레인 두 마법사가 파이어 볼을 날릴 위치를 선정했는데 놈은 양옆으로 한 개씩의 촉수를 뻗어 두 마법사를 공격했다. 갑작스런 공격이었지만 다행히도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파이어 볼이 그들을 살렸다. 살기는 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너무 가까웠던 탓에 둘의 몸이 붕 떠서 뒤로 날아간 것이다. 둘 다 큰 피해는 없었는지 서둘러 몸을 일으켰지만 자세가 불안정했다. 이럴 때 촉수가 다시 날아온다면 하나까진 피해도 두 개째는 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HP가 적은 마법사인데 폭발로 타격까지 입었으니 맞으면 8, 90%즉사다. 그들도 그것을 생각했는지 눈빛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슬라임 킹이 노린 건 이제 막 점액질 덩어리를 빠져나온 쿤이었다.
“하압!”
쿤을 향해 첫 번째 촉수가 뻗어나가는 순간 크루드가 달려가 슬라임 킹의 몸을 난자했다. 비록 열 번을 베는 게 파이어 볼 한 방과 비슷한 정도의 타격을 입힐 뿐이지만 그는 베고 또 베었다. 아니, 타격도 아니다. 약간씩의 점액질을 없애갈 뿐이다. 약점인 핵은 멀쩡했다. 그래도 그것이 효과를 보았는지 두 번째 촉수는 쿤에게 날아가지 않았다. 대신 귀찮게 구는 크루드를 후려쳐서 멀리 날려버렸다.
“삼촌! 너……! 나 여기에 불꽃의 힘을 부여하나니, 파이어 인챈트!!”
무슨 생각인지 크루드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쿤이 품에서 롱소드 하나를 꺼내 화염 속성을 부여했다. 쓰러진 크루드는 데미지가 상당했는지 쉬게 일어나지 못했지만 슬라임 킹은 본 척 만 척. 오로지 자신의 목표는 쿤 하나라는 듯 쿤을 향해 촉수를 뻗었다. 쿤은 예상했다는 듯 오른쪽으로 살짝 피했다. 곧바로 두 번째 촉수가 뻗어나갔다. 이번엔 쿤이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첫 번째 촉수가 있는 왼쪽으로!
“무슨……?!”
촉수를 향해 뛴 쿤은 첫 번째 촉수에 어설프게 매달렸다.
쉬리릭!
뻗었던 촉수가 다시 회수되었다. 그에 따라 쿤도 슬라임 킹의 몸체에 빨려 들어갔다. 아니다.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끈적거리는 점액질들을 떨쳐버리고 점프를 시도했다. 점프는 성공했다. 슬라임 킹의 몸의 중간 부분에 찰싹 달라붙은 쿤은 녀석의 끈적거리는 특징을 이용해서 조금씩 위로 기어 올라갔다. 저대로는 위험하다. 크루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쿤이 있는 곳을 촉수로 만들기라도 하면 쿤은 큰 낭패를 볼 것이다.
“흐아압!”
크루드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슬라임 킹을 난도질했다. 힘이 약해 벨 때마다 손에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크루드도 합세했다. 몸을 추슬린 마법사들도 다시 파이어 볼을 날려가며 놈의 시선을 빼앗는데 동참했다.
“크악!”
녀석도 기어오르는 쿤보다 우리가 더 귀찮고 위험하게 느껴졌는지 붉은바람과 크루드를 향해 각각의 촉수를 뻗었다. 붙어있던 크루드는 또다시 공격을 받아 저만치 날아갔고 조금 거리를 두고 있던 붉은바람은 준비했던 마법으로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촉수가 회수되고 곧바로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목표는 또다시 크루드와 붉은바람. 쓰러져있는 크루드가 위험했지만 쿤에게 했던 것처럼, 미티어레인이 촉수에 파이어 볼을 날려 아주 위험한 상황은 막았다.
“이야압!”
슬라임 킹의 눈으로 추정되는 부위에 도달한 쿤이 다리를 점액질 속에 박아 고정시킨 뒤, 양손으로 롱소드를 붙잡고 작은 핵을 향해 힘껏 찔러 넣었다.
불 속성을 지닌 검은 어렵지 않게 핵 하나를 파괴했다. 겨우 조그만 핵 하나가 파괴되었을 뿐인데 슬라임 킹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격하게 움직였다. 입이 없어서 비명은 못 지르는 건가?
“흥! 누가 이걸로 끝낼 줄 알아?”
다리를 점액질 속에 박아 넣은 덕분에 심하게 요동치는 슬라임 킹의 위에서 떨어지지 않던 쿤은 또 무슨 오기가 생겼는지 천천히 발을 빼고 반대편 눈으로 기어갔다. 박아 넣었던 롱소드는 핵을 파괴하고 나서도 계속 빨려 들어가 버렸지만 쿤은 개의치 않았다. 우리의 엄호 속에 반대쪽 눈까지 기어간 쿤은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철퍽 소리가 나며 점액질 속에 주먹이 박혔다. 하지만 쿤의 짧은 팔론 핵까지 닿지 못했다. 이물질이 들어오자 슬라임 킹은 롱소드에 그랬던 것처럼 쿤의 몸을 안쪽으로 빨아들였다. 쿤은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빨아들이는 힘에 몸을 맡기고 슬라임 킹의 내부로 들어갔다.
“아구어(파이어)!”
쿤의 손에서 불꽃이 솟아났다. 그와 함께 손 주변에 있던 점액질들이 불에 놓인 마른 오징어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이걸로 핵을 파괴하고 빠져나오려는 생각인 듯. 하나, 한 가지 오류가 생겼다.
“에기알(제기랄).”
숨이 막혀오는 건 둘째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목표했던 핵을 도무지 잡을 수가 없다는 것. 헤엄치듯 가까이 가보려 해도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가까이가면 핵이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 움직여 거리를 유지했다. 이대로라면 잘해도 소득 없이 슬라임 킹을 벗어나는 것이고, 잘못하면 저 안에 갇혀 죽게 생겼다. 아니다. 살아 나와도 곧바로 촉수를 뻗는다면 100%피하지 못하고 죽는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쿤이 결심한 듯 파이어를 없애고 작은 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아염의 우오어 어글 얼알지니, 와이어 올(나, 화염의 구로써 적을 멸할지니, 파이어 볼)!”
자폭.
쿤의 손에서 만들어진 화염의 구는 작은 핵과 상당량의 점액질을 날려버리는 동시에 쿤의 몸까지 보기 흉할 정도로 뭉개버렸다. 회색으로 물든 쿤의 시체는 슬라임 킹의 몸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갔다. 터져 나간 자리는 다른 곳에 있던 점액질들이 몰려와 금세 메워버렸다. 일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먼저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간 건 크루드였다.
“쿠운!!”
“파이어 랜스!”
틀렸다. 모두가 침묵했을 때 붉은바람만은 조용히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는 슬라임 킹이 터져 나간 자리를 메우려 점액질들을 움직이고, 반대편에서 크루드를 향한 촉수를 뻗어내는 그 순간을 공략했다. 어른 허벅지만한 굵기의 화염의 창이 양쪽에 지원 보내느라 얇아진 핵 주위의 점액질들을 녹이며 핵에게 달음질쳐갔다. 찰나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점액질을 되돌릴 시간 따윈 없었다. 화염의 창과 슬라임 킹의 핵이 부딪히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고막을 뒤흔들었다.
채재쟁 챙-!
무언가 쇳소리 비슷한 게 들리더니 핵, 아니 핵이라 생각했던 것에서 검푸른 색의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저게…… 진짜 핵?”
진짜 핵이 파이어 랜스로부터 안전한 곳까지 도착하자 파이어 랜스와 핵 껍데기의 힘겨루기가 끝이 났다. 굳건히 버티던 핵의 껍데기는 수십 조각으로 쪼개지며 비산했고 밀어붙이던 파이어 랜스는 그대로 관통해 지나갔다.
“저, 저건!!”
우린 깨어진 조각들을 보고 기겁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었다. 깨어진 조각은 바로 한 자루의 온전한 검! 수십 개의 검들이 슬라임 킹의 핵을 둘러싸고 말 그대로의 ‘검막’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흩어진 검들은 슬라임 킹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자리를 잡았다. 설마 저걸로…….
“온다!”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뻗어 나오는 촉수 속에 서너 자루의 검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크루드!”
멀리 떨어져있던 붉은바람은 바닥을 구름으로써 공격을 피해냈지만 5m남짓의 거리에 있던 크루드는 촉수에서 뻗어 나온 칼날을 가슴으로 받아 내야했다. 뒤쪽으로 10여 미터를 튕겨나간 크루드의 몸은 다행히도 회색빛이 아니었다. 아직은 살아있다는 소리. 황급히 달려가 상급 포션 세 개를 연달아 뿌려댔다. 이 정도면 수치상으론 크루드의 HP를 거의 절정까지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슬라임 킹에게 검이 없었다면 이렇듯 가까이 가는 게 안 될 말이지만 검 때문에 촉수의 중간을 끊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니 살리고 봐야했다.
“공격 거리가 짧아졌어!”
크루드를 질질 끌고 구석으로 가는 동안 붉은바람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쿤의 활약으로 덩치가 처음의 반절 정도로 줄어버렸으니 당연할 테지. 새삼 그게 뭐?
“미티어레인님! 이제부터 원거리에서만 공격하십시오. 저놈의 촉수보다 파이어 볼의 사정거리가 더 깁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어느 샌가 잊혀져버렸다. 붉은바람과 미티어레인은 정말 잘 싸웠다.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거리를 확보했고 마법이 완성되는 족족 쏘아내어 착실하게 점액질의 양을 줄여갔다. 하지만 상황은 한순간에 반전되었다.
“훗, 닿지도 않는 공격 따위……. 나, 화염의 구로써 적을 멸할지니, 파이어 볼!”
조금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붉은바람은 촉수의 사정거리보다 몇 미터 뒤에서 놀리듯 주문을 외웠다. 파이어 볼 주문은 촉수가 한계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완성되었고 붉은바람은 기다릴 것 없이 슬라임 킹의 몸체를 향해 쏘아냈다. 촉수와 부딪치지 않게 상단 부분으로. 하나, 이번 촉수는 지금까지완 달랐다. 사정거리의 변화 따위가 아니다. 사정거리는 계속 되는 공격으로 오히려 짧아졌다. 대신, 사정거리가 한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그 반동으로 촉수 안에 있던 세 자루의 검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파이어 볼이란 유일한 공격 수단이자 방어 수단이 사라진 상태에서 붉은바람이 그것을 피할 확률은 계산할 필요도 없이 0%. 세 개 중에 두 개의 검이 각각 어깨와 배에 꽂혔고 붉은바람의 몸은 뜨거운 물에 잉크 퍼지듯 빠르게 회색으로 물들었다. 붉은바람이 아웃되자 혼자 남은 미티어레인이 다급해졌다. 붉은바람과 반대방향에서 공격한 덕에 한 개의 촉수를 상대하면서 여유를 부릴 수 있었는데 이젠 저 두 개의 촉수 모두가 자신을 노릴 것이므로. 아니, 두 개의 촉수가 공격하는 것까진 괜찮다. 문제는 붉은바람이 당했던 그 기술이 나오는 것. 한 개라면 파이어 볼로 상쇄하겠지만 두 개의 촉수가 모두 검을 뿜어낸다면? 필사(必死)다.
“으으…….”
덩치가 확 줄어든 덕에 아까보단 빨랐지만 여전히 느린 속도로 몸을 트는 슬라임 킹과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던 미티어레인은 뭔가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난 죽기 싫어!!”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해낸 미티어레인은 처음 들어왔던 계단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으음…….”
4층 가득 울려 퍼지는 그의 비명 소리 때문인지 잠시 정신을 잃었던 크루드가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좋아, 이제 도망칠 수 있어!
“여긴?”
“슬라임 던전 4층 구석. 가슴에 칼을 맞았는데도 살았더군. 운이 좋았어.”
“이 녀석이 날 살렸나 보군.”
크루드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팡팡 두드렸다. 한데, 레더아머에서 나는 소리로 보기 힘든 좀 더 딱딱한 소리가 났다.
“레더 아머의 가슴 부분에 강철판에 끼워놨지. 이렇게 하면 웬만해선 크리티컬 히트로 당하진 않으니까. 아참, 상황은?”
고개를 돌리니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한 미티어레인이 슬라임 킹의 공세에 밀려 허겁지겁 움직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우릴 버리고 도망가려더니 잘됐다!
“보다시피 전멸 직전. 놈의 시선이 돌아간 사이 우리는 빨리 빠져나가자.”
“미안하지만 너 혼자 가야겠다.”
“뭐?!!”
“삼촌이 돼서 조카가 죽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복수는 못 해도 하는 데까진 해봐야지.”
“그럼 나도 남지.”
“아니, 넌 가야 해. 저길 좀 볼래?”
크루드가 가리킨 곳엔 작은 팻말 하나가 박혀 있었다. 내용은…….
-주의-
슬라임 킹에게 사망할 시 손에 들고 있는 무기가 10% 확률로 드랍된다.
10%의 드랍 확률. 결코 적지 않은 확률이었다. 그럼 슬라임 킹의 몸속에 있는 검들이 전부 유저들이 드랍한 것?
“알아들었지? 넌 레벨은 낮아도 고급 무기를 들고 있는 것 같던데 드랍하면 큰일이잖아. 그러니까 내 말 들어. 난 창고에 이것과 똑같은 무기가 하나 더 있으니까 걱정 말고.”
“하지만…….”
“어서 가! 놈이 우릴 알아 챈 것 같으니까.”
정말이었다.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던 미티어레인은 세 자루의 검에 관통 당해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슬라임 킹은 우리를 향해 방향을 바꾸는 중이었다. 이 녀석을 사지로 내모느니 본 클래스로 돌아가 해치워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꾹 참았다. 벌써 들키면 안 된다. 혼자 있을 때면 모르되, 작은 눈 하나라도 있다면 본 클래스로 돌아가선 안 된다. 할 수 없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계단으로 달려갔다.
“이거나 먹어라!”
뿅!
코르크 마개 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뒤를 돌아보니 크루드가 술병 하나를 들고 달려가 슬라임 킹의 몸체에 사정없이 뿌려대고 있었다. 술병 안의 술이 모두 소모되자 크루드는 굵직한 횃불 하나를 꺼내 들었다.
“횃불, 사용!”
크루드의 말에 맞춰 횃불에 불이 일어났다. 그 다음 행동은? 당연히 술이 잔뜩 뿌려진 곳으로 투척! 금세 크게 일어난 불길은 술이 닿았던 곳들을 휘감으며 점액질들을 말끔히 태워버렸다. 하지만 불길은 쉽게 진압됐다. 슬라임 킹이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고 불길이 있는 지역 전체를 몸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슬라임 킹에게 깔림으로서 산소를 얻지 못한 불길은 너무도 쉽게 꺼졌고 그사이 슬라임의 방향 전환도 어느새 끝이 났다.
“흐아아압!!”
크루드는 피하지 않았다. 결국은 죽을 것, 당당하게 맞서다 죽겠다는 듯이. 화염 속성이 부여된 롱 소드로 슬라임 킹의 몸체를 사선으로 베었다.
틱!
검의 이동은 바닥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몸체 속에 있던 검 하나가 이동 경로를 막아선 것이다. 하지만 크루드는 멈추지 않았다. 힘을 주어 손목을 비틀더니 V자 모양으로 베어냈다. 슬라임 킹이 이렇다 할 피해를 입은 건 아니지만 베어내겠다는 그 집념 하나만큼은 높이 살만 했다.
크루드의 첫 번째 공격과 두 번째 공격의 연결은 일체의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도중에 검이 가로막혀 임기응변으로 V자를 만들어낸 것이 분명한데 처음부터 연계기였다는 듯 검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자세도 안정되어 있었다. 내가 비록 한 때 여러 가지 운동을 조금씩 하다 말았지만 그 정도를 알아 볼 눈은 있다. 무협 소설에서 나오는 검무란 게 이런 것인 듯싶었다.
하지만 그 몸놀림도 오래가진 못했다.
푸왁!
지금껏 나오던 촉수 두 개가 한 번에 튀어나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굵직한 촉수 하나가 크루드의 몸을 강타했다. 그 엄청난 힘을 버텨낼 재간이 없는 크루드는 하늘을 날았고 재차 날아온 촉수들에게 고스란히 몸을 내주었다.
“감히 내 동료들을 죽였던 말이지…….”
슬라임 킹의 무지막지한 힘에, 그 속에 숨은 칼날들까지 합세하자 크루드는 얼마 못 버티고 마을로 돌아갔다. 싸늘한 회색 빛 시체가 되어.
“넌…… 죽었다고 복창해라!!”
씁쓸한 일이지만 난 크루드가 죽고 나서야 슬라임 킹의 앞에 섰다. 크루드…… 기다려라, 복수는 확실히 해주마!
“내려치는 거신의 해머, 자이언트 윈드 해머!!”
거대한 바람의 망치는 떡메 치는 것처럼 슬라임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슬라임의 형체는 금세 복구되었다. 녀석도 잔뜩 화가 난 듯, 촉수가 뻗어오는 기세가 좀 더 거칠어졌다.
“파이어 랜스, 더블!”
두 개의 화염의 창은 뻗어오는 촉수에게 곧장 날아가서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화염의 창 앞에서 촉수 속에 들어있는 검 따윈 무력하기만 했다. 파이어 랜스가 슬라임 킹의 몸을 반쯤 뚫었을 때 나는 한 번 더 힘을 실어주었다.
“파이어 랜스, 더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화염의 창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는, 막을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가고자 하는 길을 똑바로 뚫고 간 화염의 창들은 놈의 약점인 핵도 한 귀퉁이 뜯어내 버렸다. 핵의 1/4이 사라지자 슬라임 킹의 몸은 더욱 강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촉수의 반동을 이용할 때 보단 훨씬 느렸다. 네 자루의 검은 너무도 쉽게 눈에 포착되었고 난 가볍게 회피했다.
“블링크!”
파바박! 팍!
느려터진 검들은 애꿎은 바닥을 찔러댔다. 틈이 보인다. 그것도 아주 큰 틈이. 하지만 공격하진 않는다. 공격 안 해줄 거다.
“블링크!”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슬라임 킹은 또 다시 검을 뿜어냈다. 당연히 회피. 내가 여유 있게 피할 때마다 멍청한 슬라임 킹은 계속해서 검들을 뱉어냈다.
“이제 남은 건…… 대충 삼십여 개 뿐인가?”
참 많이도 들어있다. 뿜어낸 검의 수만 4,50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데 아직도 30여 개나 남았다. 죽으면서 검을 드랍시키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니 이백 명은 족히 죽인 셈이다.
“응? 이건 크루드의 검 같은데…….”
아직 검에 서린 붉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은 걸 보니 거의 확실했다. 일단은 회수!
“잠깐, 이게 회수가 된다는 것은…… 나머지들도?!”
돌아가서 크루드에게 돌려주려고 검을 아이템 창에 넣었다. 넣어진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검들도 넣을 수 있다는 소리! 여기 널브러져 있는 수십 개의 검만 주워다 팔아도……! 벌써부터 짤랑거리는 돈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크, 블링…… 아니, 실드!”
사방에 널려 있는 내 사랑스런 돈덩이들을 보며 흐뭇해하는 동안 슬라임 킹이 또 한 번 검을 뿜어냈다. 하나 이번엔 블링크가 아닌 실드로 대응했다. 조금 뒤, 실드와 부딪친 건 단 한 자루의 검 뿐이었다. 그 이유는 슬라임 킹이 전 방향을 향해 검을 뿜어냈기 때문! 블링크로 피했다면 당했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실드를 쳐서 안전한 상태라 그런지 그 모습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비록 검이 30자루밖에 없어서 빈 공간도 꽤 보였지만 저 안에 비도를 몇 백 개 쯤 채워 넣는다면? 무협 소설들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사천당문의 비기, 온 하늘에 꽃비가 가득 찬다는 만천화우에 버금갈 듯싶었다. 나중에 나키르를 꼬셔서 한번 시도해 봐야겠군.
“스스로 속에 있는 검들을 몽땅 뽑아내 주다니 고맙군. 그대, 화염에 몸을 맡길지니, 버닝 소울!”
마나를 불태워 온몸에 불길이 일게 하는 대 기사 전용 마법. 저번, 바다에 빠졌을 때 바닷물까지 끓게 만들어버린 이 마법은 어찌 보면 훌륭한 몸통박치기용 마법이었다.
“자, 간다! 블링크!”
아무리 강렬한 불길이 내 몸을 덮고 있어도 날아오는 촉수가 닿기도 전에 소멸되어 버릴 정도는 아니었기에 블링크를 시전 해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달라붙었다.
치지지직!
뭔가 타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슬라임 킹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날 짓눌러 질식사 시켜야 할 점액질들이 빠르게 오그라들며 소멸해 버렸다. 슬라임 킹의 크기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검푸른 색의 핵도 점프 한번만 하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꾸물꾸물!
위기를 느꼈는지 슬라임 킹은 몸을 움직여 나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대로 놓아둘 쏘냐! 슬라임 킹이 움직이는 만큼 나도 따라 걸었고 점액질은 줄고 줄어 어른 키만 한 핵만을 남겼다.
“마무리는 멋있게! 버닝 핸즈, 멜트!!”
이미 손에도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지만 버닝 핸즈를 사용하자 더욱 붉게 빛났다. 버닝 핸즈가 발동되고 5초쯤 지나 공급하던 마나를 끊어버림으로써 버닝 소울을 풀어버렸다. 그 대신 사용한 마법은 멜트! 손바닥에서 화염 방사기 같은 불이 뿜어져나갔다. 오히려 약한 마법들을 쓰고 있지만 이게 다른 사람들 보기엔 훨씬 멋있다. 전신을 휘감던 불꽃이 손으로 모여 뿜어져나가는 모습처럼 보이니까. 이건, 더 매지션에서도 인정한 사실이다.(더 매지션과 내가 가끔 만나 연구한 마법들은 꼭 실용적인 것만이 아니다.)
츠즈즈즈즈!
그 크디크던 슬라임 킹이 손바닥만 해지더니, 결국 세포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해버렸다. 레벨 업도 없다. 도둑의 능력을 쓴 게 아니라 순수하게 마법사로서 잡은 것이니까. 도둑의 능력을 썼다 해도 공헌도에 따라 경험치가 주어지니 많이 얻지는 못했을 거다.
“자, 오너라. 내 돈덩이들아! 감도 설정 변경, 1단계로. 수거!”
약간의 어지러움이 일었지만 금덩이들이 품속으로 굴러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자 그것마저 기분 좋았다.
“대충 정리 됐군. 리턴!”
빛에 휘감겨 마을에 돌아오자 또다시 어지러움이 일었다. 큭, 감도 2단계로 강제변경이군.
“스트!”
균형을 잡기도 전에 기다리고 있던 크루드가 밝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내가 죽었으면 병원으로 갔을 텐데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을 거라 예상 했다는 건가?
“역시 살았어! 쿤이 죽었을 거라고 병원에서 기다리자는 걸 뿌리치고 마중 나온 보람이 있어! 하하하!”
“쿤이 그런 소릴 했단 말이야? 내 이 녀석을 그냥……. 아, 잠깐만. 아이템 창 오픈!”
“……?”
수거한 검의 수가 워낙 많았기에 아이템 창을 열어 크루드의 검을 골라내야 했다. 뒤지고 뒤져서 겨우 찾아낸 롱소드를 꺼내 넘겨주자 크루드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이걸 어떻게……!”
“슬라임 킹이 계속 검을 뿜어댔잖아. 도망 다니면서 주워왔지. 다른 검도 많으니까 필요하면 말만 해.”
“도망가라니까 어지간히도 말 안 듣는군. 아무튼 고맙다.”
크루드는 멋쩍게 웃으며 오른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슬라임 던전에서의 말과 달리 크루드의 손에 들린 롱 소드는 전의 것보다 무뎌보였다. 똑같은 게 한 자루 더 있다는 그때의 말은 날 안심시키려고 했던 거로군.
“자, 그럼 이제 쿤에게 가보자. 이 형님 실력을 무시했으니 알밤이라도 한 대 놔줘야지.”
“그래, 그래라. 다시는 그런 위험한 행동도 못 하도록 따끔하게 혼도 한 번 내고.”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병원에 도착하자 쿤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뭘 그렇게 놀라? 아, 꼬맹이. 너, 내가 죽었을 거라고 했다며? 감히 이 형님의 실력을 의심했다 이거지?”
딱!
“아야, 왜 때려요!”
“너,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그런 무모한 짓을 하면 어떻게 해! 기어오를 때 촉수라도 뻗어나았으면 어쩔 뻔했어? 앙?”
“그, 그건 뭐…….”
“잘못 했지?”
“네…….”
“알면 됐어. 스트, 너도 이제 그만해라. 자, 그럼 이번엔 어디로 갈까?”
“슬라임 던전에 다시 한 번 가는 게 어때요?”
“안 돼!”
쿤이 슬라임 던전 행을 입에 담자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는 걸 몸으로 확인한 슬라임 킹이 단 몇 십분 만에 사라진 걸 알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우리가 죽고 나서 바로 도착한 고렙이 슬라임 킹을 낼름 해치우고 사라졌다, 아무리 봐도 억지스럽지 않은가?
“그래. 스트 말대로 슬라임 던전은 안 돼. 슬라임 킹의 검을 뿜는 기술을 깰 자신이 설 때까진. 우리 레벨도 떨어졌고……. 스트 레벨도 올려 줄 겸 오랜만에 곰이나 잡으러 갈까?”
“곰?”
“그래, 곰. 아, 스트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보통 동물은 아주 저렙 때나 잡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힐름에서는 아니야. 곰 중에서 가장 약한 갈색 곰이 오크 열 마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하거든. 호랑이 같은 경우는 더 심하지. 호랑이와 곰 중 가장 강한 놈들은 오우거 두 마리도 한 번에 상대한다던데? 물론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지만.”
영수쯤 된다는 건가?
“어디 보자, 가장 가까운 곰 서식처가…….”
“트웨인 산이야, 삼촌. 몬스터라곤 오크 서너 무리가 고작이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니까 독식하긴 쉬울걸?”
“거리는?”
“산 아래까지라면 걸어서 20분. 곰이 나오기 시작하는 중턱까지 가려면 한 50분 걸릴 거야. 방향은 남문으로 나가서 일직선으로 쭉 가면 되고.”
“좋았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