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의 길 (19/43)

도둑의 길

찢으면서야 알았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찢은 스크롤은 아무런 좌표도 기억되지 않은 랜덤 텔레포트 스크롤이었다. 빛이 사라지고 눈에 들어온 것은 곱게 빻은 보석 가루처럼 보드랍고 새하얀 백사장. 며칠이라도 머물다 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에 한껏 취하려는데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좀 멀다?”

풍덩-!

역시 나처럼 박복한 놈은 뭘 해도 안 되는 걸까? 환상적인 백사장은 그림의 떡이고 떡 대신 짜디짠 바닷물만 배터지게 먹었다.

“우브브부? 우글(저건 뭐야? 젠장).”

바다 속 깊이 오래 있을수록 스테미너의 소모가 큰 것을 느끼며 다시 한 번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으려는데, 근처에 있던 수중형 몬스터가 큼지막한 입을 쫙 벌리고 ‘나’라는 먹이를 삼키러 빠르게 헤엄쳐 왔다. 젠장, 이대로는 스크롤을 쓰기도 전에 죽겠군.

“우, 우글글극 웁 우브브글, 우브그글(그대, 화염에 몸을 맡길지니, 버닝 소울).”

마나를 태워 몸을 불사르는 인체발화 주문. 불 속성에 대한 저항력이 어느 정도 있는 자에겐 잘 통하지 않지만 기사를 상대할 때 유용하고, 희귀한 편이라 레어로 분류되는 주문이 나에 의해서, 그것도 자기 자신에게 사용되었다. 본인이 사용하는 것이니 만큼 저항력은 깡그리 무시! 주변 바닷물까지 끓게 만드는 몸뚱이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놈의 본능을 자극했다. 켁, 숨 막히는 군.

“우그르극!(텔레포트!)”

스테미너가 바닥을 보이는지 숨이 탁탁 막힐 때 구원의 빛이 몸을 감싸며 그리운 공기가 넘치는 푸른 초원으로 날 인도했다.

“켁, 켁. 첫 죽음을 익사로 기록할 뻔했네.”

입 안 가득 찬 소금물을 토하듯 게워내고 나자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생겼다. 저 멀리 보이는 한 무리의 오크 떼와 듬성듬성 유인되어 싸우는 트롤. 기사와 트롤의 1대1 전투를 구경하며 앉아 휴식하는 파티…… 녹색의 평원인 건가?

“……를……!!”

적당한 그늘도 있겠다, 모처럼 구경 좀 하려는데 앉아있던 파티 원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뭐라 소리쳤고 그에 따라 주위의 파티 원들도 무기를 고쳐 쥔 채 달려왔다.

“뭐, 뭐야?”

“……를 조……!!”

달려오면서도 끊임없이 뭐라 소리 질러대는 사람들. PK도 아니고, 도둑질은 시작도 안 했는데? 해봤자 현행범으로 잡히지 않는 이상 수치만 조금 깎일 뿐이고.

“……뒤를 조심하세요!!”

“뒤라니, 나무 밖에…….”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외치는 소리의 대략적인 내용이 파악되었다. 의아해하면서 뒤를 돌아보자 예상과는 달리 탄탄한 근육질의 녹색 다리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고 곧이어 바람을 가르는 무서운 소리와 함께 눈앞에 까맣게 변했다.

“크윽…… 그럼 그늘의 정체는 오우거고, 난 그 밑에서 쉬고 있던 건가?”

마을 같은 곳에서 필드로 이동할 경우 이동하자마자 죽을 수도 있으므로 약 15초간 몬스터가 인식하지 않게 되는데 바보처럼 난 몬스터가 없다 단정 짓고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한 것이다. 첫 죽음이 오우거에게 일도양단이라…… 이 정도면 나쁘진 않군.

“여긴 수도인 건가? 성으로 돌아가지 않은 걸 보니 거트 형이 침대를 잘 처리했나보군. 일단…… 수련장으로 가볼까?”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가서 온갖 동물과 오크 등을 때려잡고 레벨을 올리는 수도 있지만 딱히 레벨 업이 급한 것도 아니고 새로운 클래스의 스킬들을 몸에 익히는 것이 먼저라는 판단이 섰기에 한번 가 본 적 있는 도둑 길드의 건물로 찾아갔다. 물론 그 전에 값나가 보일만한 것들은 아이템 창에 넣어놓고.

“안녕하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문 여는 소리가 ‘삐걱’하고 들리자마자 바람처럼 나타난 NPC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싱글거리며 인사를 했다. 훗, 이번엔 안 당한다.

“저…… 단검 하나에 얼마나 해요?”

“아, 단검 말씀이십니까? 단검은 모두 기본형으로, 10개 단위로만 팔고 있으며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가격은 최하급의 경우 10브론즈, 하급은 50브론즈, 중급은 5실버, 상급은 50실버죠. 이것들은 기본적인 던지기용으로, 찌르고 베는 용도로 쓰실 거라면 따로 보여드리겠습니다만 가격이…….”

건물에 들어오기 전에 전직하면서 받았던 ‘먼지 쌓인 흑의’를 조금 털어 입고 왔기 때문에 초보처럼 보였는지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끝을 흐렸다. 내가 진짜 초보라면 기분 나빴을지도 모르지만 의도한 대로 봐준다니 고맙군. 큭큭, 그럼 더 초보 같게!

“많이 비싼가 보죠? 아, 그런데 도둑이 검도 써요?”

“가격이 좀 나가는 편이죠. 제일 싼 것도 실버 단위로 나가니……. 도둑도 검을 씁니다. 로그도, 어쌔신도 마찬가지죠. 숏소드보다도 짧은 형태지만 암살하거나 제 한 몸 지킬 땐 꼭 필요하니까요. 단, 기사들처럼 위력적인 기술을 사용할 순 없습니다.”

“음…… 그렇군요! 그럼 덫은 하나에 얼마씩 하죠?”

“덫 역시 5개 단위로 팔고 있습니다. 등급은 마찬가지로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이고 가격은 각각 30브론즈, 1실버, 10실버, 50실버로 나뉩니다. 이것은 일반 덫일 뿐이고 창, 화살 등이 튀어나온다던가, 무게에 반응해서 작동한다던가, 독·폭발 포션 같은 것을 이용하는 트랩 장치들은 따로 준비되어 있죠.”

“흐음…… 너무 비싸네요. 좀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나 돈 없어요.’라는 눈빛을 간절히 쏘아 보내자 NPC인 그도 동정심이 무럭무럭 피어나는지 눈에 고민하는 빛이 비쳤다.

“좋습니다. 최하급 단검이라면 특별히 9브론즈에 드리죠. 대신, 어디 가서 소문내면 안 됩니다?”

[상인 스킬이 상승하셨습니다.]

그가 값을 깎아주마 하고 말하는 순간 서브 클래스 중 하나인 ‘상인’스킬이 상승했다. 서브 클래스는 본 클래스의 레벨 업에 지장을 안 주는 대신 ‘레벨’이 아니라 ‘스킬’로 오르니 상인 레벨이 오른 것. 계속 올리면 뭔가 혜택이 있으려나?

“여기 1실버, 단검 110개 주세요. 아참, 제가 스킬이랑 레벨이 낮아서 그런데, 수련장 같은 곳은 없나요? 스킬이라도 조금 올려두면 활동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 같은데.”

“최하급단검 110개와 1브론즈입니다. 명색이 길드인데 수련장이야 있죠. 다른 분들은 사냥하기 바빠서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그곳을 사용하시겠다면 대 환영입니다.”

“……공짜겠죠?”

쌍수 들고 반기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겨 물었지만 대답은 의외였다.

“물론입니다! 수련하시겠다면 제가 가끔 도와드리죠.”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닥 가득 쌓인 쇠 쪼가리(단검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쇠 쪼가리일 뿐이다.)를 아이템 창에 모두 집어넣고 나자 그는 잠시 문을 잠그고 앞장서서 수련장으로 안내했다. 수련장에 도착하자 눈에 들어온 것은 새 것 같은 더미(수련용 인형)들과 민첩성, 균형 감각 등을 키우기 위한 온갖 장비들. 손때하나 묻지 않은 그것들을 보자니 어째서 그가 수련장을 이용한다는 말에 기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묻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사냥에 필요한 것들뿐입니까?”

“아니오, 사냥에 관한 것들도 필요하지만 그 외의 것들도 배우고 싶습니다. 이와 내딛은 길, 제대로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답이 끝났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어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얼굴이 하늘을 향해 있었고 눈가엔 물기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설마…… 우는 거야?

“크흑, 감격했습니다. 여태껏 찾아온 사람은 적지 않았지만 수련장을 찾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여기 와서도 전투에 필요한 몇 가지만 배워 갔었거든요. 정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순간, 그의 눈에서 살기를 읽었다.

“예, 예.”

“그럼, 제가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수련하는 방법과 순서를 정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무, 물론이죠.”

“그럼 따라오십시오. 제가 차분히, 확실하게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저…… 장사는 안 하시나요?”

“어차피 사람도 안 오는 거, 며칠간 임시 휴업 내걸면 됩니다.”

[위험 감지 스킬이 상승하셨습니다.]

……그의 전신에서 광기가 뿜어져 나온다 느낀 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나보다.

“먼저 시작할 건 ‘추적술’입니다. 도둑이 추적할 게 뭐 있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항상 집에 고이 모셔둔 물건만 공략하는 건 아니니까요. 마차나 말을 이용한다던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을 좇아가서 일을 벌이려면 반드시 갖춰야할 기술입니다. 그럼 전 수련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준비물을 가지러 가는 그의 몸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사라져갔다. 이거야 원, 이형환위 저리 가라군. 잘못해서 화라도 돋운다면…….

“끔찍하겠어.”

“자, 다 됐습니다. 준비할 테니 기다려 주세요.”

돌아온 그의 머리엔 오우거도 넣고 삶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솥이 얹혀있었다. 양손엔 어디서 잡아왔는지 모를 여우 한 마리와 검은 가죽띠가 들려 있었고. 한 솥 가득 차있는 물의 반절쯤을 수련장 한 구석에 고루 뿌린 뒤 한쪽으로 날 밀어낸 그는 왼손에 들린 검은 띠를 내밀어 수련의 시작을 알렸다.

“진흙탕이라 쫓아오기는 쉬우실 겁니다. 그럼 이제 발자국을 남길 테니 좇아와 보십시오. 아, 기억해 놓은 대로 찾아가면 전혀 도움이 안 되니 발자국 찍는 동안은 그 머리띠로 눈을 가리시고요.”

“그러죠, 그런데 저 여우는 뭡니까?”

“제 대타입니다. 제가 자리에 없을 때는 저 녀석을 풀어놓고 하시면 될 겁니다. 길들여진 녀석이라 도망갈 걱정은 안 해도 되죠.”

그의 말에 따라 검은 머리띠로 눈을 가리고 300을 셀 때쯤 눈을 떠도 좋다는 말이 들려왔다. 눈을 뜨자 바닥엔 크지 않은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난감했지만 지정된 출발지로 가 발자국에 손을 대는 것으로 추적을 시작했다.

[추적술 스킬이 상승하셨습니다.]

[추적술 스킬이 상승하셨습니다.]

이제 막 시작해서인지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나아가는 동안 여성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스킬이 오르는 것도 좋지만 설정을 바꿔놓던지 해야겠군. 귀 아파서 안 되겠어.”

1단계 모드에서 ‘옵션’ 기능을 사용하면 알림 소리를 없앨 수 있다던데 아무래도 그걸 사용해야겠다. 추적술 말고도 앞으로 올릴 것들이 산더미인데 매번 이렇게 소리를 들으려면 귓병이 생기길 것 같으니까.

“응?”

딱 눈앞의 발자국만 좇느라 다른 발자국을 밟아버려 그 자리에 멈추고 두리번거릴 때 눈앞이 아찔해지며 뒤통수가 아려왔다.

“쓰읍…… 뭡니까?”

“눈앞의 것만 좇다가 전부 망쳐버리면 어떻게 해!! 그리고 바닥만 쳐다보고 움직이다 공격당하면 어떡하려고? 앙?”

갑자기 그의 말투가 존대에서 하대로 바뀌었다.

“말투가…….”

“원래 때리기도 하고, 욕도 좀 해야 빨리 배우는 거야! 그리고 그런 공격에 맞다니, 말이나 돼?”

“느닷없이 날아온 주먹을 어떻게 피합니까!!”

오히려 맞은 내가 잘못이라는 듯한 그의 말에 괜히 억울해져 소리쳤지만 곧 후회하고 말았다.

“어떻게 하긴, 위험 감지는 뒀다 국 끓여 먹을래? 너, 스킬 가이드 북 안 읽어보고 던져뒀지?! 에잉, 저런 놈이 어떻게 도둑이 되겠단 건지.”

“위험 감지?”

“한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들어! 위험 감지는 말 그대로 위험을 미리 느끼는 능력인데 위험을 제대로 알아차리거나 스킬로 발동시키면 상승시킬 수 있지. 스킬로 발동시키면 지속적으로 약간의 마나를 잡아먹지만 모든 위험을 미리 느끼고 대처할 수 있으니 마나가 차는 대로 사용해서 상승시켜 놓는 게 좋을 거다. 물론 위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아는 건 불가능하지만 눈먼 화살에 맞아 뒈지는 일은 없을 테니 엄청나게 유용한 능력이지. 던전처럼 언제 트랩이 터질지 모르는 곳에서는 그 효과를 절감할 수 있을 거다.”

도둑에게 이런 놀라운 스킬이 있을 줄이야. 약간의 마나를 잡아먹는다고는 하지만 마나야 넘쳐나니……. 좋았어, ‘옵션’에서 설정 변경하는 김에 위험 감지 스킬도 ‘접속시 자동사용’으로 맞춰놓아야지. 그리고 최단 시간에 마스터 해 버리는 거야!!

“위험 감지 발동.”

“준비 됐으면 다시 시작한다!”

대걸레 비슷한 걸로 발자국 가득한 땅을 고르게 편 그는 다시 눈을 가리게 하고 발자국을 찍어댔다. 이번에도 역시 복잡하게 얽혀있는 발자국들. 긴 한숨을 내쉬고 발자국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걷고 있을 때 왼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위험 신호인가!

“하압.”

퍽!

이번엔 손이 아니라 팔꿈치로 머리를 가격 당했다. 이유는 재수 없게도 몸을 날린 방향이 그가 공격해 오던 곳이었기 때문. 쳇, 알기만 한다고 좋은 건 아니군.

“으이그, 멍청아.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쪽에서 위험이 오는 건데 이쪽으로 뛰면 어떻게 해!! 다시!”

눈 가리고 뒤통수를 문지르는 동안 발자국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언제 말이나 해줬냐!!’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했다간 또 맞을 것 같으므로 패스. 큭.

“이거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울며 겨자 먹기로 맞으면서 위험 감지를 몸에 익히고 더듬더듬 발자국의 끝에 다다랐을 때는 수련을 시작한지 1주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으아아아∼ 해냈다!!”

“헹, 굼벵이 기어가는 속도로는 누가 못 해? 그렇게 하다간 거리만 더 벌어지겠다. 제한 시간 5분! 못해도 이 안에는 끝마치도록 해봐.”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초를 치를 소리가 들려왔다. 5분이라니! 기습이 없다면 몰라도 지금의 나에겐 절대 불가능 해!!

“그래, ‘지금의 나’에겐 불가능한 거였어. ‘지금의 나’에겐!!”

1주일 동안 스킬이 상승할 때 주어지는 소량의 경험치로 두 번의 레벨 업을 해, 지금 레벨은 3! 좋은 몸놀림을 보이기엔 민첩성이 너무 모자랐던 것이다. 레벨이 문제란 결론이 내려지고 행한 것은 그가 잠든 사이 몰래 나갔다 오는 것! 여기서 ‘몰래’인 것은 며칠 전 바람도 쐴 겸 놀러갔다 오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가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실패한 경험을 살려 내린 결정이었다.(그만큼 밖으로 내보내주려 하지 않는다.) 밤이 깊어지고 실행된 작전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먼저 문을 잠그겠다 말해 열쇠를 받고 잠그는 척만 한 뒤 돌아와 연습을 계속 한다. 그 후, 그가 믿고 잠이 들었을 때 리턴 스크롤로(문으로 나갈 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면 낭패이므로)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휴, 그런데 한밤중에 사냥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아무리 레벨 업이 급해졌다 해도 고레벨 파티에 껴서 경험치 나누어 먹고 레벨 업 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와 비슷한, 혹은 조금 높은 레벨의 파티 모집을 찾았다.

“저……. 파티에 참가하고 싶은데요.”

“네, 어서 오세요”

내가 찾은 파티는 고블린 사냥을 떠나는 초보들. 레벨이 10만 되어도 마비 침을 쏴서 귀찮게 만드는 고블린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그 전까진 동물만 잡아서 올리기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종종 볼 수 있는 파티였다. 물론 초보인 만큼 클래스나 레벨 제한도 없었다. 저레벨 때야 그게 그거니까.

“이 분까지 총 5명이군요. 전 이쯤에서 사냥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세요?”

“저도 지금이 딱 좋은 것 같네요.”

가뜩이나 많지 않은 경험치, 사람이 더 늘어봐야 좋을 것 없다는 판단 하에 모두가 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는‘빛나는 숲(bright forest)’이란 촌스러운 이름의 초보자 존. 불이 없으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다른 곳과는 달리 야시장처럼 환하게 불이 밝은 곳이었다.

“아참, 님은 클래스가 어떻게 되세요? 그리고 아이디가…….”

가입할 때는 아무 말 없더니 사냥 방법을 정할 때에 와서야 깜박했다는 듯 손뼉을 치며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떤 이름으로 활동할지를 안 정했다. 콜이라고만 해도 금방 들켜버릴 테고. 콜로니스트니까…….

“스트, 도둑 클래스입니다. 보물찾기가 각광받고 있다기에 로그로 전직하려고요.”

“오우, 키우기 힘드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리고 그 가면은……?”

“이렇게 특징을 주면 이름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리고 고레벨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충분히 즐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죠. 아무리 현실 같아도 게임은 즐겨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훗, 그딴 나약한 소리하는 놈 치고 잘되는 놈 못 봤지.”

아아, 난 언제쯤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파티에 끼어볼 수 있는 걸까? 기분 좋게 파티 장과 얘기를 나누는데 ‘최강을 추구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말투로 한 사내가 끼어들었다.

“원래 말투가 저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그럼 님은 뭔가 목표로 시작하셨나보죠?”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파티 장이 대신 사과하는 걸 받아넘기고 본인에게 묻자 뻔하디 뻔한 대답이 나왔다. 10점 만점에 2점, 각오는 좋지만 독창성이 없잖아!!!

“최강! 그것이 내 목표다.”

“호오? 좋은 목표이긴 합니다만 상용화된 지 2년에 가까운 상황에서 그건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님께서 마스터에 아무리 빨리 오르셔도 그때쯤이면 투 마스터가 상당수 나올 텐데요.”

“몇 개를 마스터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글쎄요. 아무리 검술 실력과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나다해도 압도적인 능력치 차이를 메우기란 쉽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실전 경험의 차이도 무시 못 하겠고……. 아! 아이템 차이도 상당하겠군요.”

뭐라 대답하려던 그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겠는지 몸을 휙 틀어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어린 새싹을 짓밟는 것 같아 맘이 편치는 않지만 뭐, 압승이지.

“그렇게 희망을 꺾어 버리실 것까진……. 에휴, 그럼 한 명이 몰이해서 끌고 오면 나머지 사람들이 달려들어 잡는 걸로 하죠. 먼저, 자진해서 몰아다 주실 분?”

“…….”

마비 침이란 성가신 공격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나라면 실드 치고 침이 떨어질 때까지 버티는 수도 있지만 굳이 나서서 수고할 필요까진 없겠지.

“역시 없군요. 그럼 가장 적합하다 생각되는 분은…… 스트님이군요. 도둑 클래스는 기본 능력치부터 다른 클래스보다 민첩성이 높을 테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할 수 없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선이 모이니 마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 한 무리씩만 끌고 와 주세요.”

“……어차피 그 이상은 상대할 능력도 없으면서.”

억지로 떠밀려 가는 것이니 만큼 불만이 없을 리 없었다. 구시렁대며 안으로 들어가길 1분여, 왼쪽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급히 몸을 날렸다. 파박 소리와 함께 오른쪽에 있던 나무에 박히는 작은 침들. 고블린 무리의 기습이었다. 수적 우세함을 아는 듯 기뻐하며 길지 않은 대롱을 다시 입에 문 놈들은 망설임 없이 또 한 번 독침을 뿜어냈다.

“블링크. 쳇, 몰이 중이었지.”

어떻게 죽일까 떠올려보다가 몰이 중이란 걸 깨닫고 돌아서자 마법사란 사실에 긴장했던 놈들도 신나서 좇아왔다. 블링크가 4써클인데 저런 반응이란 것은, 마법이 무섭다는 걸 본능으로만 안다는 건가?

“공격!”

일정 거리까지 뒤로 물러나자 대기하고 있던 파티 원들이 들이닥쳐 공격을 퍼부어 댔다. 마법사는 라이트닝 애로우 한 방 쓰고 탈진에 기사들은 궁수의 지원 사격에 혹시라도 맞을까 걱정하며 앞으로 못 나가는 오합지졸이었지만 수는 그런 대로 줄어 남은 건 한 마리, 기회다 싶어서인지 둔기류와 같은 타격만을 주고 튕겨 나가버렸다.

“휴, 고블린이란 놈들도 쉽진 않네요.”

모자란 실력에, 엉성한 팀웍은 생각도 안 하고 ‘고블린이 생각보다 강하다.’라는 투로 말을 하는 꼴을 보자니 웃음 밖에 안 나왔다. 에휴, 그냥 혼자 노는 게 더 빠르려나?

“스트님,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숨도 제대로 못 고르면서 또 한 번의 몰이를 요구하는 파티 장. 전멸 되는 꼴을 볼 것 같아 내키진 않지만 해달라니 해줄 수밖에.

“……그러죠.”

아까 왔던 곳보다 조금 더 들어오니 한 번에 리젠된 건지 열 댓 마리의 고블린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마리만 빼오긴 힘들겠군.

“수를 줄인 다음 끌고 가는 게 좋겠어.”

아직 안전거리인지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기에 급히 스킬 가이드북을 뒤져 트랩 설치 방법을 숙지한 뒤 고이 모셔뒀던 녹슨 덫 5개를 꺼내 땅에다 내려놓았다.

“트랩 설치.”

덫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트랩들을 보통 사람들이 설치·해제한다는 건 무리라는 이유로 이렇게 단순화시켜 놓은 제작진에게 감사하며 트랩을 설치하자 덫들에 잠시간 빛이 머물렀다. 이것으로 준비 완료?

“샤프니스.”

좀 전의 상황을 떠올려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운 단검들의 날카로움을 증가시킨 후 목표물들을 향해 힘껏 던졌다. 몇 개는 맞겠지.

“키륵, 킥!”

재수 없게도 대부분의 단검은 자루 부분이 앞으로 간 채 고블린들에게 타격을 줬다. 이렇게 되면 날을 아무리 날카롭게 세워봤자 말짱 꽝. 단검이 일직선으로 날아가지 않고 회전하면서 날아간 까닭인 듯싶었다.

“되는 일이 없고만.”

어느 정도의 방어선이 되어줄 거라 믿었던 녹슨 덫들은 그야말로 ‘장난감’이었다. 덫에 당한 고블린들이 발을 절뚝거리며 계속 걸어오는 데다, 2개는 작동조차 안 하니…….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조금씩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단검에는 계속 다양한 인챈트를 걸어 던지며.

“저기 옵니다. 모두 준비…… 헉!”

여기까지 끌고 오는 동안 어찌어찌 고블린의 수를 열 이하로 줄였지만 다섯 잡기도 힘들어 한 이들로서는 무리가 있는 숫자였다. 더구나 이젠 보는 눈이 있어서 단검에 인챈트도 못하고…….

“마법사는 쇼크로 움직임을 막고, 궁수는 기회 봐서 몇 번만 쏴! 전사들은 독침 날릴 거리를 주지 말고 붙어!!”

재빠른 대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효율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하나, 레벨이 10도 안 되는 마법사는 수련 마법인 쇼크조차도 난사하지 못했고 궁수도 컨트롤이 나빠 전사들을 죽일 뻔하기 일쑤, 그런 상황에서 전사들이라고 실력 것 싸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원래의 실력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한방 감인 놈들한테 밀리다니, 큭…….”

파이어 볼 한방이면 전멸할 놈들과 소리질러가며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인챈트도 안 된 최하급 단검은 아무리 던져봐야 극소량의 HP만 깎을 뿐이고……. 차라리 전멸하기를 기다렸다가 독식해 버릴까?

“파이어 볼.”

마법사는 마나 고갈로 주저앉았고 궁수도 화살이 떨어져 활을 휘두르며 근접전을 펼치는 가운데, 어디선가 날아온 파이어 볼 한방에 고블린은 물론 파티원들까지 튕겨져 나갔다. 스트라이크!!……가 아니지,

“뭐야?!”

“흥, 허접들이 구해줘도 화내기는.”

파이어 볼의 영향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은 노란 머리가 싸늘히 식어 가는 파티장의 시체를 보며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전멸할 뻔한 사실을 떠올렸는지 주먹만 부들거릴 뿐, 화를 속으로 삭였다.

“레벨도 낮은 것들이 욕심도 많지, 능력도 안 되면서 많이도 끌어왔네.”

“그건 우리 껀데…….”

당연하다는 듯 떨어진 아이템을 줍는 그들에게 마법사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간단히 묵살되었다. 적어도 레벨 10은 넘은 것 같은데 밤이라 여기로 온 건가? 쳇, 놀 거면 숲의 끝으로 가서 간혹 나오는 홉고블린이나 오크를 잡을 것이지.

“아, 제가 끌고 오면서 잡은 몇 놈이 떨구고 간 아이템을 가져오겠습니다.”

씨익.

나에겐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들이지만 파티원들이 아이템을 다 빼앗기는 것에 속 쓰려하는 것 같아서 가져오기로 하고 몸을 움직였다. 한데, 아이템을 가지러 가기 위해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순간 그들이 뜻 모를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걷는 속도를 빠르게 했다.

“이런, 젠장.”

이미 그 자리엔 아이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땅에 떨어진 아이템이 사라지기까진 약 3시간이 걸리니 누군가 가져갔다는 소린데…….

“추적술을 써먹을 때가 생각보다 빨리 왔군.”

이미 죽어 없어진 고블린들의 발자국이 사라졌기에 다녀간 자들의 이동방향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스킬이 낮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낸 발자국은 모두 세 명의 것. 그 중 하나는 내 것이니 그새 두 명이 더 지나간 것이다. 두 명, 이동방향은 남동쪽……. 쳇, 그놈들이 집어간 건가?

“PK다!”

“사람 살려!!”

돌아가기 위해 한 발자국을 떼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초보들한테 뺏어 봐야 얼마나 뺏는다고 PK질이야?

“귀찮게 시리.”

멋대로 활개 치게 놔두면, 언제든 나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결국 처리해야 된다는 소린데……. 일단 파티원들부터 만나야겠군.

“오옷, 홋홋홋호.”

“좀 더 분발해 보라고. 이래서야 샌드백과 다를 게 뭐 있나?”

“크흑, 이 빌어먹을 년놈들이!!”

파티원들이 기다리기로 한 장소에 도착할 즈음 어떤 남녀가 거만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괴롭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접근하니 선명하게 드러나는 얼굴들. 괴롭히는 쪽은 조금 전 고블린 사냥에 난입했던 남녀요, 괴롭힘을 당해 신음하는 쪽은 파티원들이었다. 아니, 이젠 최강을 외치던 노란 머리의 기사 혼자만 남았다.

“도와주긴 해야겠는데……. 이대론 무리군.”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고 가면까지 썼는데, 벌써부터 들켜버리면 낭패였다. 즉,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얘기. 하지만 그의 상태론 옷 갈아입을 동안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버티고 못 버티고는 네 몫이다. 잠재된 힘의 분출, 헤이스트.”

갑작스런 속도의 향상에 빨라진 본인조차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아참, 나도 이럴 때가 아니었지.

“이런, 그러고 보니 마법사용 장비를 놓고 왔었어! 큭…….”

전에 착용하던 장비들을 떠올리며 품속을 뒤적거렸지만 꺼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 출발한답시고 장비를 모두 창고에 처박아둔 것. 그나마 정체를 숨길만한 건 인피면구 뿐인데…….

“에라, 모르겠다.”

내가 정의의 사자니 하는 거창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을 안 해서 초보들이 학살당하게 만들만큼 비인간적이지도 않다. 결국 내린 결정은 가면을 벗고 인피면구를 착용하는 것. 상대가 나를 이길 수 있을 만큼의 고레벨은 아니라 확신했고, 더블 스펠을 사용해 내가 마스터 클래스라는 것을 알리기도 싫었으므로 아이템 창을 뒤적거려 최하급 단검 수십 개와 언젠가 주워뒀던 ‘그림자의 단검’을 꺼냈다.

“물러서!! 라이트닝.”

내 외침에 노란 머리의 기사는 몸을 뒤로 뺐고, 한 쌍의 남녀를 향해 8개의 단검이 날아갔다. 그 뒤를 받쳐주며 전기의 힘을 더하는 라이트닝. 날카롭지는 못했지만 단검 하나하나에 적지 않은 전기가 담겨 무시 못 할 공격이 되었다.

“저, 저게 뭐야?!”

“나, 화염의 구로써 적을 멸할지니, 파이어 볼.”

크게 당황해 머뭇거리는 기사와 달리, 여 마법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침착하게 파이어 볼을 날렸다. 결과는 비도의 무력화. 그냥 라이트닝으로 공격했으면 파이어 볼을 뚫고 데미지를 입혔겠지만 단검이 대부분의 힘을 흡수해버린 탓이었다.

“웬 놈이냐!!”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라고. 너희야말로 뭐 하는 놈들이기에 초보들을 노리는 거냐!”

좀 전의 라이트닝 때문일까? 최소 3클래스 이상인 마법사란 사실에 긴장했는지 둘의 표정이 과히 좋지 못했다.

“넌 비켜라, 죽기 싫으면.”

날 아군이라 여겼는지 슬금슬금 접근한 노란 머리는 그들을 향해 검을 세우며 돕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2분 안에 마법이 풀려서 휘청거릴 놈이 돕기는 무슨…….

“방해는 안 될 겁니다. 돕게 해주십시오.”

그가 내 목소리를 몇 차례 들어 봤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목소리를 낮고 굵게 변형시켰다.

“지금이야 그럴지 모르지. 하지만 1분쯤 지나고 헤이스트가 풀리면 어떨까. 그때도 자신 있을 것 같나?”

순간, 그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훗, 자신이 히든 피스 같은 특수한 능력을 얻었다 착각하고 있었나보군.

“6써클 이상의 마법사인가? 재수 옴 붙었군. 하지만…… 틈을 안 주면 돼!!”

내가 얘기하는 동안 눈짓을 주고받은 PK들이 주문 외울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처리 할 수 있지만…….

“놀아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압!”

챙!

허리를 베어오던 PK의 검이 ‘그림자의 단검’과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상대가 저 레벨이긴 하지만 역시 기사, 나보다 높은 힘 때문에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파이어 애로우.”

“파이어 애로우.”

기사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사용한 불꽃의 화살이 예상대로 기사를 바닥에 뒹굴도록 만들었다. 비도를 꺼내 던지려는 찰나, 후방에 있던 여 마법사로부터 똑같이 파이어 애로우가 날아왔다.

“칫.”

비도를 날리고 나면 피하거나 막기 힘들어 진다. 물론 딜레이 따위 무시하고 상쇄시키면 문제없지만 그렇게 할 거였으면 진작 끝장을 봤을 거다. 피할까? 막을까?

퉁!

결론은 ‘쳐낸다’였다. 검기 따위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들고 있는 검이 꽤 고급품이라는 것을 믿은 것이다.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손끝에 약간의 묵직함이 느껴지는 것만으로 무리 없이 빗겨 쳐낼 수 있었으니까.

“이래서 사람들이 고급품을 찾는 건가?”

마법사를 키우면서 느끼지 못했던 고급 아이템의 중요성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익, 일어서!”

여 마법사의 찢어지는 목소리에 기사가 강시처럼 벌떡 일어났다. 쯧쯧, 보아하니 남자가 잡혀 사는 커플이구만!

“버닝 핸즈.”

“흡.”

여 마법사의 명령(?)으로 일어나 당장에라도 다려들 것 같던 기사가 내 손에 모인 붉은 기운을 보고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닿기만 해도 다리미에 눌린 것처럼 벌겋게 도장이 찍히니 경계할 만도 하겠지. 자, 먼저 공격해 올 것 같지는 않으니 이쪽에서 선수 쳐 보실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지. 막아봐라!!”

채쟁 챙-!

치지직-.

“크아아악!!!”

그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지만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12개의 붉은 빛을 막아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적중 된 것은 모두 5개. 그나마 두꺼운 레더 아머에 닿은 하나는 피해를 입히지 못했지만 몸을 가리는 정도에 불과한 얇은 두께의 바지는 고통을 고스란히 전해줬다.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서 공격해! 관통 된 것도 아니잖아!!”

상황을 모르는 여 마법사는 예의 그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 사이 날린 제 2탄까지 맞은 기사가 일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자, 이제 답변을 들어 보실까? 니들은 뭐 하는 놈들이며, 왜 초보들을 죽이는 거냐.”

퍽 하체에만 데미지를 입어, 주저앉은 상태에서도 상체는 들고 있는 기사의 가슴을 발로 차버렸다. 오뚜기처럼 내려갔다 바로 올라오는 상체. 그 왼손에 들린 검은 수평으로 눕혀져 내 가슴을 쓸고 갔다.

“이런, 왼손잡이였나? 바인드.”

기사는 모두 오른손잡이일 거란 편견 때문에 죽을 뻔한 나 자신을 질책하며 그의 왼손을 봉했다. 그리고 다시 킥!

“크윽.”

“파이어 애로우!”

츠즈즈즈-.

기사가 이마를 차여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여 마법사가 지원 사격을 가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버닝 핸즈에 막혀 간단히 소멸 되어 버렸으니까.

“이런, 이런. 무장해제부터 시켜달라는 건가?”

치지지직-.

“아아아악!!!! 그만!! 제발 그만해!!!!”

기사에게 중요한 곳이자, 상대하는 내겐 가장 경계해야할 곳인 양팔을 지그시 잡아 눌러주자 기사가 괴성을 질러댔다. 생살이 타들어 가는 것이니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

“시끄러!!”

짜작!

이번엔 불꽃이 넘실대는 손바닥으로 그의 따귀를 후려쳐 버렸다. 선명히 남은 손도장. 이거…… 너무 잔인한가?

“꺄악!!”

여 마법사는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기사를 더는 못 보겠는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제 좀 대답할 마음이 생기나?”

“마, 말하겠습니다. 뭐든 물어보세요. 아니, 뭐든 물어봐 주세요!!”

알아서 존칭까지 넣는 걸 보니 군기가 제대로 잡혔다.

“이미 물어 봤잖아. 너흰 누구며, 왜 초보들을 죽이는지.”

“아! 전 레벨 35 기사 조이스고, 저쪽은 레벨 34 마법사 골린입니다. 제 누나죠.”

어떻게 된 녀석인지 다리도 불편하고, 팔도 봉해진 상태인데 말은 청산유수였다. 이 게임하는 사람 중에 정상은 나밖에 없는 건가? 아, 소연이도 빼고.

“이소연…… 아직 못 찾은 건가?”

정보 길드에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직도 못 찾았다는 소린데……. 하긴, 저번에도 오지에 가까운 곳에서 생활했었으니까.

“네?”

“아냐, 아무것도. 계속해.”

“예. 저희가 초보를 죽인 이유는 실전 경험 때문입니다. 초보들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무술을 익힌 사람도 적지 않으니 특별한 기술을 개발했을 때 연습하긴 딱이거든요. 기술에 실패해도 역습당해 죽을 확률도 낮고요.”

“그럼 왜 하필 PK지? 오크 같은 놈들한테 실험해도 충분하잖아? 성향이 악으로 변하면 제약이 많을 텐데?”

“모르세요? 레벨이 20이상 차이나면 PK를 해도 죽은 사람의 선 수치만큼만 깎이잖아요. 물론 자신의 수치가 더 낮으면 성향이 악으로 변해버리지만요. 이런 허접들은 아무리 죽여도 성향엔 지장 없어요.”

“오호, 그래? 아주 유용한 정보로군.”

“아, 악마다!!”

좋은 정보에 눈을 빛내고 있을 때 구석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노란 머리 기사가 악마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숲 밖으로 달아났다.

“쳇, 내 어디를 봐서 악마란 거야? 고위 마족쯤이라면 몰라도. 대답은 그걸로 끝인가?”

“예? 아, 예.”

“더 할말은?”

“없습니다.”

“그럼 잘 가게나.”

푸욱-!

마지막으로 유언정도는 들어주려 했건만 본인이 싫다는데 더 이상 어찌하랴? 그의 목에 검을 박고, 그것을 지팡이 삼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차차, 배후가 있는지를 안 물어봤군. 뭐, 아직 하나가 더 남았으니까.”

“너, 너! 우리 오빠한테 이를 거야!!”

“호오, 삼남매인가 보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거군.”

“가까이 오지 마!”

이거, 내가 악당이라도 되는 듯한 상황이군. 난 단지…….

“이 쇳조각들이 식어버리기 전에 써먹으려는 것뿐인데 말이야. 고통은 좀 크겠지만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여기서 쇳조각이란 조금 전 기사를 전투불능으로 몰고 간 붉은 빛. 버닝 핸즈로 달궈진 최하급 비도였다. 비도로써의 역할은 상실했지만 생살을 지지는 고통으로 빈틈을 만들어내니 원래보다 훨씬 유용하지 아니한가?

“보호하는 마법의 장막, 실드!!”

뒷걸음질 치던 여 마법사는 시간을 벌어 볼 요량인지 주위에 흰 막을 생성했다. 오빠라도 부를 건가 보지?

“마나 량에 따라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몇 안 되는 마나 량 중심의 마법이라……. 시간 벌기엔 아주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버닝 핸즈도 같은 방식이라고!!”

실드와 마찬가지로 버닝 핸즈 또한 많은 양의 마나를 불어넣을수록 강해진다. 그녀의 마나 량 따위론 막을 수 없을 만큼의 마나를 집중시키자 불꽃은 팔까지 침식해왔다. 오, ‘버닝 핸즈’가 아닌 ‘버닝 암즈’가 되어 버린 건가?

“막을 테면 막아보시지!”

부웅 붕 붕-!

휘둘러진 손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녀가 놀란 사이 약해진 실드도 단박에 찢겨져 나갔고, 살짝 스치기만 한 머리카락도 심하게 그을려 파마한 것처럼 변했다. 여자에게 머리는 생명이라도 했던 것 같은데…… 조금 심했나?

“에이, 어차피 살아나면 복구 될 텐데 뭐 어때. 대신 곱게 죽여주마!”

버닝 암즈(?)에 겁먹은 여 마법사는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해보고 목을 내어줬다. 저 렙의 마법사가 반항을 해봐야 얼마나 했겠냐마는…….

“대충 정리도 했고, 다시 레벨을 올려…….”

“저쪽입니다! 그 악마 같은 놈이 있는 곳이!!”

도망갔던 노란 머리의 목소리를 선두로 몇몇의 발자국 소리가 커져왔다.

“제길. 악마가 뭐야, 악마가!! 마족이라는 고급스런 말도 있는데. 오늘 사냥은 글렀군. 리턴!”

인피면구를 가면으로 바꿔 쓰고 리턴을 사용할 때까지 그들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차피 PK도 안 되는데 다 죽여 버리고 사냥할 걸 그랬나? 그 오빠란 인간도 정신개조(?)를 시켜줘야 하는데……. 짭,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아직 밤이니 들키진 않겠지?”

사냥터에서의 일은 일이고, 이젠 들키지 않고 수련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먼저, 수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잡화점에 들러 기름을 조금 구했다. 용도는 문의 이음쇠에 뿌려서 특유의 쇳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것. 다행히 기름은 이음쇠를 아주 부드럽게 만들었고 문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안 들켰겠…… 힉!”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주위를 살피려는데 눈앞을 검은 무언가가 막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도둑 길드 장이 차가운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걸려버렸네.

“……늦었다. 가서 자라.”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할 말만 하고 들어가 버렸다. 화내지 않는 건가?

“능력치 정리만 하고 좀 쉬어야겠다. 스테이터스 창 오픈.”

고블린들을 잡고 레벨 업해서 얻은 능력치 포인트를 분배하려 했는데 뜻밖에도 레벨이 예상했던 5보다 4레벨이나 높은 9였다. PK들을 죽이고 얻은 경험치인가?

“아무렴 어때.”

이 고달픈 훈련을 따라가려면 약간이나마 레벨이 높은 편이 좋았다. 마법의 도움으로 오린 거지만 도둑 쪽 능력을 아주 안 쓴 것도 아니니까.

“흐으음…… 쩝.”

“일어나라”

“10분만…….”

쉽게 잠들지 않고 누군가 조금만 건드려도 깨어버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힐름 내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다. 꿈도 꾸지 않아서 일어나면 실제 몸의 피로도 풀리고. 이것을 이용해 게임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자들도 있지만 회사 측에선 접속한 지 20시간이 지나면 경고 없이 강제 로그아웃이란 강수로 대응하고 있다. 나 역시 몇 번 당해봤고.

“난…… 경고했다.”

촤아악-!

“어푸푸!”

다시 잠에 빠져들려는 순간, 난데없이 물벼락이 떨어졌다. 제길, 코에 물들어갔잖아!

“으으…… 코 매워. 그냥 흔들어 깨우면 안 됩니까?”

“이게 제일 빨라. 일어났으면 시작하지.”

쳇, 이러쿵저러쿵해도 결국 어젯밤 일로 화가 난 거군? 수련의 강도가 높아지겠지만 민첩성이 꽤 올랐으니 버틸 만 하겠지.

“예, 예. 갑니다. 가요!”

“그 쪽이 아니다.”

벌떡 일어나 평소처럼 수련장 구석으로 가려는데 그의 말이 날 잡아끌었다.

“예?”

“기초이긴 하지만 추적술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지. 마지막 한 가지만 배우고 다음 기술로 간다. 두 번은 안 알려줄 테니 잘 보도록.”

자기 할 말만 내뱉은 그는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어렴풋한 잔상만 눈을 어지럽힐 뿐이었다.

“……괴물이군.”

“발자국은 이 정도면 되겠지. 지금부터가 진짜다. 이렇게 발자국 위에 손을 얹고 마나를 손에 모아 추적이라고 외치면 그 발자국과 같은 것에는 파란 테두리가 쳐진다. 마차나 말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지. 말이나 마차에서 내리거나 신발을 갈아 신으면 끊긴다는 게 문제지만 날아가지 않는 이상은 재 추적이 가능하니 큰 문제는 아니야. 물론, 지속적으로 마나가 공급되어야 하지만.”

“질문! 왜 도둑의 기술에 마나 쓸 데가 많은 거죠? 이래선 속도 중심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텐데요.”

“그건…… 너희들 때문이다. 도둑은 물론 로그, 어쌔신들도 처음에는 마나 없이 순수한 육체 능력으로 기술을 펼쳤었지. 하나, 제대로 된 한 명의 도둑, 로그, 어쌔신이 되기까진 너무 긴 시간과 큰 고생이 뒤따랐다. 그걸 못 견딘 자들은 하나 둘씩 다른 길로 빠져나갔지. 그런 자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안 되겠다 느낀 전대 길드 장이 마나를 활용해 더 쉽게 기술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 덕에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도둑다운 도둑, 로그다운 로그, 어쌔신다운 어쌔신은 거의 나오질 않고 있지. 나도 생각 같아선 널 제대로 된 도둑으로 만들고 싶다만…… 그건 욕심이겠지. 어제 도망가지 않고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자, 더 질문 없으면 직접 해보도록.”

목소리가 침울해 지는 것이, 아픈 데를 찌른 모양이다. 안쓰럽기는 한데…… 거기에 넘어가서 죽어라 고생하긴 싫다고!!

“추적.”

전직 마법사인 내게 마나를 모으는 일이란 비도 날리기보다 10000배쯤 쉬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한 번에 성공! 이제 다음 기술로 넘어갈 일만 남았다.

“이 기술에서 중요한 건 스킬도 스킬이지만 마나를 다루는 일이지. 위험감지 스킬에선 저절로 마나가 빠져나갔지만 이번은 직접 느끼고 조종해야 해서 처음 성공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몇 번 성공하다보면…….”

“이미 성공했는데요. 다음 건 뭐죠?”

“헛, 마법사로 나갔어도 소질 있었겠군. 다음 기술은 도둑의 꽃, 스틸(steal)!! 이것 역시 편법이 존재하지만 난 먼저 몸에 익도록 가르칠 테니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해도 좋다. 포기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거라 약속하지.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수련이 끝날 때까지 내 수련 방식에 철저히 따라와야 한다.”

이 기회에 확실히 해두겠다는 건가? 뭐, 좋아. 어차피 나도 몸에 익혀둘 생각이었으니까.

“따르겠습니다.”

“좋다. 그럼 지금부터 저쪽에 놓여있는 더미(dummy. 연습용 표적 인형)들의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훔치는 연습을 해라. 단, 훔치는 순간을 제외하고 더미와 닿아서는 안 된다. 저것들 모두에게 성공하면 그때 날 찾아오도록. 난 상점에 있겠다.”

“저, 저걸 다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어설프게 사람 모양을 한 크고 작은 인형들 수십 개가 약간씩의 거리를 두고 땅에 박혀있었다. 어림잡아 70개는 될 것 같은데 저걸 언제 다해!

“너무 적은가?”

“아뇨, 그게 아니라…….”

“아참, 몇 개에는 장난을 좀 쳐놨으니 인형이라고 방심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

“……!”

‘죽을 수도 있다.’ 한마디 때문에 그가 떠난 한참 후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스틸하다 죽을 수 있게 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설마 더미가 살아 움직이는……? 아냐, 아냐. 저게 골렘이나 가고일 류도 아니고 그럴 리 없어. 그럼 주머니에 폭탄을? ……충분히 가능성 있군.

“이걸로 되려나…….”

가설이 세워지자 먼저 주변에 널린 돌들을 주워 모았다. 설마 처음부터 손댔을 리 없으니 10번째부터 테스트 시작! 테스트는 각 더미에 달린 주머니 위치를 확인하고 돌로 맞춰보는 것이었다. 위험한 게 들어있다면 뭔가 표시가 날 테니까.

“응?”

짤랑 첫 번째 더미의 주머니에선 맑은 돈 소리가 났다.

“호오, 설마 주머니마다 뭔가를 넣어둔 건가?”

생각 같아선 당장 열어보고 싶었지만 어차피 얻을 것들, 나중이 무료해 질까봐 그냥 놔두고 다음 것들을 확인해 나갔다. 주머니에 든 것은 돈뿐이 아니었다. 딱딱한 것, 부드러운 것……. 가끔씩 포션 병이 깨져 안타깝게 했지만 다른 것들에 대한 기대감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룰룰…….”

퍼엉!

40여 번째 더미에서, 드디어 우려했던 결과가 나타났다. 폭발 포션을 넣어 놨던 듯, 주머니는 물론 더미의 절반가량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저거에 당했으면…….

“꼼짝없이 죽었겠군. 미쳤어…….”

고개를 저으며 다음 더미를 향해 돌을 던지려는데 주머니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이건 뭔가…… 무지 수상하다!!”

돌은 던져 봐도 더 크게 꿈틀댈 뿐,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이건 일단 체크.”

나중을 대비하는 의미에서 비도 하나를 더미의 이마에 꽂고 다음 것으로 향했다. 나머지들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맨 마지막 것까지 확인하는 동안 세 개의 더미가 폭발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다섯 개의 더미는 이마에 비도가 꽂혔을 뿐. 아, 두 개는 독 포션이었는지 주머니 곳곳에 구멍이 나며 걸레가 되었다.

“하아, 저게 어딜 봐서 조금이고, 장난인 건지……. 아무튼 대충 끝났으니 시작해 볼까?”

위험 요소도 없고, 더미의 크기도 180cm정도로 커서 자신 있게 파고들었다. 허수아비처럼 벌리고 있는 팔에 부딪칠까 걱정되지만 안 되면 사이렌이 울리겠지, 뭐.

“이 정돈 가뿐…….”

쿵-.

허리춤에 매인 가죽 주머니를 낚아채고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이마에 달려들던 속도만큼이나 큰 충격이 전해졌다.

“크윽…… 목뼈가 안 부러진 게 다행이군.”

쓰러진 지 약 5분 정도가 지나서야 통증의 여운이 사라져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큭, 지금도 이 정돈데 레벨이 더 높았으면 죽었겠군. 그나저나 이 빌어먹을 위험 감지는 왜 발동을 안 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 년 놈들과 싸울 때도 안 울렸어!

“내 당장 제롬을 불러서 따져…… 아니지, 일단 길드 장에게 물어나 보자.”

잘 알지도 못하고 불렀다간 개 쪽만 당할 거란 생각에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한걸음에 상점으로 달려갔다.

“위험 감지 스킬이 발동 안 되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상점으로 통하는 문을 박차고 소리치자,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자던 길드 장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응? 무슨 일이야?”

“위험 감지 스킬이 발동을 안 한다고요!!”

“난 또 뭐라고……. 마나가 없나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내 말을 듣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잘 준비를 했다.

“마나는 충분했어요!”

“그럼 뭐가 잘못 된 거냐?”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흐음……. 자세히 좀 설명해봐. 뭘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러니까 위험감지만 믿고 더미에 달려들었다가 사이렌이 안 울리는 바람에 머리가 더미의 팔에 부딪쳐서…….”

“푸하하하하!! 뭐? 팔에 부딪혀? 네가 그러고도 도둑이냐!”

“사이렌이 안 울렸다니까요!”

“큭큭,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데 내가 말 안 했던가? 위험 감지는 네가 인식하고 있는 것엔 반응 안 해. 빤히 보고 있는 것에까지 사이렌이 울려대면 어디 신경 쓰여서 움직이기나 하겠냐?”

“그, 그런…….”

확실히 정면으로 날아오는 파이어 애로우 따위에까지 일일이 울려대면 짜증나서라도 게임 못 할 것 같긴 하다. 쳇, 자기가 안 알려 줬으면서 저렇게까지 웃을 건 뭐야?

“킥킥킥. 부딪치면 또 와라. 치료 정도는 해줄 테니까!”

수련장으로 향하며 문을 닫았는데도 한참동안이나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뿌드득-!

“내가 여기서 나가는 날, 이 원수는 꼭 갚아주마.”

분을 삭이며 수련장으로 돌아와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스틸이란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더미와 부딪칠 것을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면 손놀림이 늦어지고, 손놀림을 생각하고 움직이면 더미의 어딘가와 부딪치는 것이다. 길드 장에게 조언을 구하려 해도 그는 끝내거나 부딪치면 오라며 실실거릴 뿐이고, 별 소득 없이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씩이나 연습을 했음에도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택한 방법은 말 그대로 몸에 익히는 것이었다. 주머니에 대한 생각은 일체하지 않고 더미 피하는 것만을 반복했다. 물론 처음 것부터 마지막 것까지 다양한 종류로. 하나, 단순히 피하는 것만이 아닌 피하고 나서의 행로와 티나지 않게 스쳐가는 것들을 생각하고 움직이자니 이것도 쉽지는 않았다. 거기에 각 더미들의 다양한 크기·모양이 가세하자 8일이란 시간이 또 훌쩍 지나버렸다.

“후우……. 이쯤이면 조금은 몸에 밴 건가?”

마지막 82번째인, 낮은 자세로 오른쪽 허리춤에 왼손을 가져다 놓은 어쌔신 형태의 더미를 별다른 의식 없이 피해내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손이 문젠데…….”

휘익-!

내 손이 어느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는지 가늠해보기 위해 먼저 허공에 휘둘러봤다. 느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썩 만족스럽지도 못한 속도. 뭔가 강화가 필요할 듯싶었다.

“레벨을 좀 더 올려봐? 아니지, 레벨에만 의지하는 능력은 레벨다운 됐을 때 타격이 너무 커. 도둑인 만큼 죽기도 많이 죽을 거 같은데……. 결국은 서브 클래스인가?”

레벨 업때마다 주어지는 능력치 포인트 이외에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서브 클래스. 오히려 돈이 드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약간씩의 돈을 벌어들이고, 능력치 상승까지 있는데다 레벨 업에 지장을 주지도 않아서 초보는 물론 중수, 고수들까지 한 가지씩은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나 같은 특수한 경우는 예외지만.

“민첩성보다는 힘이 낫겠군. 어디보자, 힘 올리는데 좋을만한 클래스가……?”

리얼 모드를 1단계로 변경시키고 도움말 창을 불러내자 지금까지 밝혀진 서브 클래스의 종류와 활성화 방법을 세세하게 알 수 있었다. 힘에 좋은 것은 대충 나무꾼, 대장장이, 건축 노동자, 광부, 목수…… 정도인가? 그래도 힘 하면…….

“대장장이지!”

처음으로 활성화시킬 서브 클래스는 대장장이로 결정됐다.

“그런데…… 나갈 수는 있을까?”

결정이야 내렸지만 그가 내보내 줄지 문제였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겠다고?”

“예, 10일이면 돼요”

그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내 눈을 들여다봤다. 훗, 설사 찔리는 게 있더라도 눈을 피하거나 떨 만큼 어수룩하지 않아!

“좋다. 어차피 하루 이틀에 끝날 거라 생각진 않았으니까. 10일이란 시간동안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네 멋대로 해봐라. 대신, 약속한 날짜를 어기면 내가 직접 찾아다 끌고 와서 괴.롭.혀.주지.”

기묘하게 움직이는 입꼬리와 번뜩이는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탈출 아닌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밖에 나왔다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10일, 능력치 상승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밖으로 나오자마자 근처의 큰 대장간을 찾아다녔다.

“월급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받아만 주세요!”

“아, 글쎄. 지금도 사람이 너무 많다니까? 내 밑으로 들어와 봤자 자네가 맡을 일은 없어!”

쾅-!

두꺼운 나무문이 큰 소리를 내며 세게 닫혔다. 이것으로 여섯 번째 퇴짜인가?

“제길, 서브 클래스 하나 활성화시키기가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서브 클래스를 활성화시키는 방법. 그것은 활성화하고자 하는 계열의 NPC의 문하생이 되는 것이었다. 대장장이의 경우는 당연히 대장장이 NPC. 무기점, 잡화점과 더불어 각 마을에 하나씩은 꼭 있는 대장간이니 만큼 활성화시키기도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스승인 NPC의 실력에 비례해서 문하생이 되는 유저의 스킬 향상도 빨라지기 때문에(서브 클래스의 경우, 레벨 대신 스킬이 상승한다. 스킬은 세분화되어있지 않음.) 실력 있다 소문난 대장장이 밑은 이미 문하생들로 꽉 차있는 것이다. 에휴……. 그냥 나무꾼이나 할까?

“여기가 무기 점도 아니고 무슨 대장간 아이템이 이렇게 비싸?”

대장간이라고 무기 및 방어구를 수리해주는 게 전부는 아니다. 간단한 무기나 방어구를 비교적(무기 상점이나 방어구 상점에 비해) 싼 값에 팔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는 상급 대장장이의 대장간이라 그런지 가격이 조금 비쌌던 모양이다.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리려는데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허어, 나도 딸린 입들이 있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지! 그리고 나 정도의 실력자가 어디 흔한 줄 아는가?”

흔하지는 않지만 내가 아는 한, 수도 내에 5명 정도 있다.

“흥, 실력이 좋으면 뭘해? 순 바가진데…….”

“오빠, 우리 그냥 성 북쪽 외곽에 있다는 넬슨씨네로 가자. 거기가 실력은 떨어져도 가격이 다른 곳에 반절도 안 된데! 이런데서 바가지 쓰고 사느니 거기서 몇 개를 사는 게 나을 거야.”

“그래, 가자. 어디 그런 식으로 장사해서 잘 되나 봅시다!!”

“헹, 간다면 누가 겁낼 줄 아냐? 그런 약해빠진 검으로 얼마나 강해지나 두고 보자!”

말소리가 그치고 대장간 안에서 한 쌍의 남녀가 씩씩대며 나왔다. 실력이 떨어지는데 가격은 반값도 안 된다? 대장장이로서의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못 쓰는 물건을 내놓진 않을 텐데, 싸도 너무 싸단 말이야? 일단 한번 가보는 게 좋겠군.

“성의 북쪽 외곽……. 넬슨이라고 했지?”

그의 대장간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파격적인 가격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으니까.

“여기요!”

“여기가 먼저에요!!”

“예, 갑니다!”

상점 안은 물건 고르는 사람과 먼저 계산하려 소리치는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하나, 계산대에는 단 두 명만이 바삐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일단 나도 둘러볼까?”

먼저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숏 소드 두 자루를 집었다. 내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하급 물품이니까.

[숏소드]

공격력 : 32 내구력 : 250

음……. 저번에 본 쓸 만한 숏소드가 공격력 32+5에 내구력 400+100이었으니 이건 중급쯤 되는 건가? 내구력이 심하게 딸리기는 하지만……. 좋아, 이곳의 문하생이 되야 겠다.

“저기요!”

“손님, 그렇게 넘어오시면 안 됩니다.”

“문하생이 되고 싶어서 왔는데요.”

“저, 정말인가? 아주 잘 왔네! 지금은 좀 그렇고…… 3시간쯤 후에 다시 오겠나? 그때 정도면 대충 다 팔릴 것 같은데 말이야.”

“예? 다 팔려요? 그, 그렇게 하죠.”

상점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지 그는 3시간 후 다시 올 것을 권했다. 이 많은 걸 3시간 만에 다 판다고? 진짜라면 금방 갑부 되겠다.

“흐음, 오랜만에 성이나 들러야겠군.”

구석진 곳에서 가면을 벗고, 창고에 맡겨놓은 로브를 하나 꺼내 입은 뒤 오랜만에 성을 방문했다. 마침 성에는 거트 형이 있었고, 그 동안의 이들을 상세히 들으며 3시간을 금방 흘려보냈다.

“소연이의 행방은 아직 못 찾았단 말이지?”

“그래. 너무 상심하진 마라. 정보 길드에 너한테서 들은 몇 가지 정보를 더 제공해 놨으니 머지않아 연락이 오겠지.”

“응. 인연의 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난 이만 가볼게. 약속이 있어서.”

“벌써? 약속이 있다니 할 수 없지. 이제 자주 좀 들려라!”

“글쎄, 시간이 될 진 모르지만 노력해볼게. 나 돌아올 때까지 성 잘 지켜!”

조용히 성을 빠져나온 다음 제일 먼저 으슥한 곳을 찾았다. 가면을 쓰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변신(?)을 마치고 넬슨씨의 대장간으로 가자 아까 그곳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 이유는 상점 문에 걸린 품절 팻말 때문. 정말 3시간 만에 상점 안 물건들을 모두 팔아 버린 건가?!

“계세요?”

나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장간의 문은 잠기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내 목소리를 들은 넬슨씨가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뛰어나왔다.

“오오, 자네 왔는가? 문하생이 되고 싶다고 했지?”

“예”

“환영하네. 자네는 지금부터 견습 대장장이야. 별로 가르쳐 줄 건 없지만 많이 배워가길 바라네.”

[서브 클래스 대장장이가 활성화 되셨습니다.]

[중급 대장장이 넬슨의 문하생이 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뭘 하면 되죠?”

“어허, 뭐가 그렇게 급한가? 자네야 내 이름을 알지 모르지만 난 아직 자네의 이름도 모른다네. 그리고 월급도 책정해야 하고…….”

그러고 보니 그에게 전혀 나를 알리지 않고 일부터 하려고 했다. NPC에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명을 써야겠지?

“스트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리고 월급은 그냥 알아서 주세요.”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걸 보니 이름도 가명이겠군. 뭐, 개인 사정이란 게 있을 수 있으니 신경 쓰진 않겠네. 월급은 그럼…… 1골드씩 주지. 실력이 늘면 올려줄 수도 있으니 열심히 하게나. 아,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서 나가면 1브론즈도 안 줄 테니 그리 알게.”

내게 주어진 시간은 10일. 월급이 1골드든 100골드든 어차피 못 받을 것이기에 신경 쓰진 않았다. 계약이 체결되자 그는 날 대장간 안쪽으로 이끌었다.

“자, 지금부터 여기 있는 잉곳(ingot;금속이나 합금의 덩이.)들을 분류해서 종류에 맞는 곳으로 옮기게. 모아놓는 곳을 잉곳 색과 같게 만들어 놓았으니 분류가 어렵진 않을 걸세. 비실비실하게 생겨서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되지만 천천히 하면 어떻게 되겠지. 급하진 않은 일이니 쉬어가면서 하고, 다 끝나면 날 부르게.”

넬슨씨는 내가 분류할 수 있도록 간단한 설명을 하고 내일 장사할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며 사라져버렸다.

“역시 처음이라고 잡일부터 시키는군. 쳇!”

일을 시작하긴 해야겠는데, 무식하게 양손에 하나씩 들어다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먼저 주위를 살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외발 수레와 공사장 벽돌 나르는 지게. 한꺼번에 많은 양을 나를 수 있고, 균형 잡는데 상당한 팔 힘이 드는 수레로 결정했다.

“어? 어어!”

쿵 콰르르르-!

처음부터 너무 많이 담았는지 열 발자국을 못 넘기고 수레가 쓰러져버렸다.

“제길, 이 정도씩은 담아야 오늘 내로 끝날 텐데.”

바닥에 널브러진 철괴들을 다시 수레에 옮겨 담으며 뒤를 돌아보자 산더미 같은 광물들이 날 비웃고 있었다.

[힘이 상승하셨습니다.]

[체력이 상승하셨습니다.]

머릿속에 ‘포기’란 단어를 떠올리려 할 때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날 구원해줬다. 능력치의 상승! 고작 힘1에 체력 1이 오른 것이지만 이것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전 능력치가 10씩 오르는 것 이상으로 컸다. 내 착각을 바로 잡아 줬으니까. 내가 이곳에 와서 이렇게 일하는 것은 ‘힘’이라는 능력치를 상승시키기 위해서다. 한데 난 이 일을 빨리 끝내고 다른 기술을 배울 생각만 했으니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지금하고 있는 이것만큼 착실히 힘을 올릴 만한 일도 드문데 말이다. 마음이 달라지자 행동도 달라졌다. 무지하게 많은 양을 수레에 실어 넘어지게 하지 않았고 조금씩조금씩 철괴의 수를 늘려가며 안정감을 유지했다.

“당신이 그 새로 왔다는 문하생?”

한 3시간쯤 일했을까? 50분 정도마다 한 번씩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은발의 괴한이 난입했다.

“아……. 아까 카운터에서 일하던 선배?”

“선배는 무슨! 난 지금 당장 여길 떠날 겁니다. 여기 온 건 당신에게 충고를 해주기 위해서죠. 명성치가 넉넉하다면 당장 여길 떠나십시오! 지금 계약을 깨고 나가면 300정도의 명성치가 깎이겠지만 한 달 동안 생고생만 하는 것보단 낫습니다. 저도 그 2골드란 돈 때문에 한 달간 참아봤는데 망치를 두드려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다 특별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노동력 착취만 당했다고요!!”

한창 장사 중일 때 봤던 기억을 떠올리고 선배라 칭하자, 그는 이곳의 문하생이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은 듯 정색하며 얘기를 늘어놓았다. 여기가 그 정도로 심각한 곳이란 말이야?

“혹시 능력치 상승 속도가 느리다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아니, 힘과 체력만큼은 오히려 다른 곳보다 뛰어나긴 하지. 나처럼만 고생한다면. 하지만…….”

“그럼 됐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기술이 아니라 능력치니까요. 충고는 고맙습니다.”

“쳇,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그에게 어깨를 한번 으쓱여 주고 다시 일을 하려는데 그가 문을 닫고 나가면서 한 가지 정보를 줬다.

“그래도 불쌍하니 이건 알려드리죠. 리얼모드 2단계로 수레를 가지고 5시간 이상 일하면 ‘수레 미는 요령’이라는 패시브 스킬이 생길 겁니다. 그걸 얻으면 훨씬 많은 양의 잉곳을 옮겨도 크게 힘들지 않을 테니 잘 이용하시길…….”

그가 사라진 후 다시 한 번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3시간여, 도중에 쉬었던 시간이 빠진 건지 겨우 5시간이 채워지며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패시브 스킬 수레 미는 요령을 익히셨습니다.]

‘수레 미는 요령’이라는 스킬이 생기고 나서 일은 훨씬 수월해졌지만 문제도 하나 생겨버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힘을 안 들이니 정작 중요한 힘이 오르질 않는 것이다! 결국 3시간 동안 힘이 오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사용 장비를 수레에서 지게로 바꾸었다. 역시나, 힘을 들이니 다시 힘이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오르기 시작한 능력치에 기뻐하고 있을 때 또 한 번 문이 열리며 넬슨씨가 들어왔다.

“그 일은 멈추고 당장 나오게.”

일을 멈추고 그를 따라 간 곳은 만들어 놓은 아이템을 진열하기 전 모아놓는 창고였다.

“각각의 옆에 가격을 적어놓았으니 지금부터 빨리 외우게. 먼저 일하던 놈이 어제 첫 월급을 받자마자 도망가 버려서 오늘부터는 자네가 나와 같이 카운터를 봐줘야겠어.”

물건 값을 외우는 것을 시작으로 도망간 그가 하던 일들이 하나 둘씩 내게 떠넘겨졌다. 팔 물건 진열, 가격표 붙이기, 카운터 보기, 청소하기, 잉곳 분류, 아이템의 1차적 제작까지! 물론 처음부터 아이템 제작을 맡긴 건 아니었다. 3일이 지나 내 힘이 어느 정도 오르자 넬슨씨가 평소에 접근조차 못하게 하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일을 떠맡겼는데, 여기서 말도 안 될 정도로 싼 가격의 비밀이 밝혀졌다. 그것은 바로…… 주조를 통한 아이템의 양산화!! 망치로 두드리고 두드려서 만들지 않고 틀에 쇳물을 부어 찍어내는 만큼 내구력이 턱없이 약했지만 그만큼 인건비를 들이지 않고 빨리, 많은 양의 물건을 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날이 필요한 것들은 넬슨씨가 따로 몇 번의 망치질을 해줬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는 않았다.

“아저씨! 쇳물 다 부었어요.”

“알았다. 이제 조금 쉬고 하던 잉곳 분류나 마저 하거라.”

아이템의 1차 생산을 맡은 지 6일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망치한 번 못 잡아봤다. 매일 매일 장사가 끝나면 방으로 끌려가 주조 틀에 쇳물 부어넣는 일과 잉곳 분류만 해댈 뿐. 듣자하니 다른 곳은 10일이면 비도 하나쯤은 혼자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던데 이러니 문하생 되겠다고 찾아오는 놈이 없지!

“저, 아저씨.”

“왜?”

“저 내일 카운터 보는 것까지만 돕고 여길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월급이 적어서 그러냐? 그럼 올려주마. 3골드면 되지?”

넬슨 아저씨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월급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내일이면 도둑 길드 장과 약속한 10일이 되는 것, 그것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월급이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이……….”

“……결국 너도 가는구나. 하긴, 할 줄 아는 거라곤 주조술 밖에 없는 나란 놈 밑에 있어봐야 젊은 놈 청춘만 버리는 거지. 잡지도, 원망하지도 않으마. 그리고 내일까지 붙어있을 필요도 없다. 이거 받고 썩 꺼져버려!”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는 넬슨 아저씨가 내게 던져준 건 1골드짜리 동전이었다. 이게 무슨……?

“3골드로 올려준다고 했잖느냐! 한 달의 3분의 1동안 일했으니 1골드지. 네놈 목소리도 듣기 싫으니까 구시렁댈 생각 말고 나가봐라.”

“…….”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는 넬슨 아저씨를 뒤로하고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뭔가 씁쓸한 느낌……. 이대로 끝내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귓속말 아론.”

[콜로니스트 : 어디냐?]

[아론 : 그야 사냥가려고 준비 중이지. 얼마 전에 레벨 80을 넘겼는데…….]

[콜로니스트 : 폴메르 북쪽 외곽 넬슨 대장간. 미안하지만 오늘부터 게임시간으로 20일만 여기서 내 대신 일해주라.]

[아론 : 뭐? 20일씩이나? 아무리 게임시간으로라지만 현실로도 거의 7일에 가깝잖아! 이제 막 방패에 마나를 불어넣을 수 있어서 재미 붙으려는데……. 나 안 해. 아니, 못해!!]

[콜로니스트 : 레벨 때문에 못하시겠다? 그럼 간단하네. 너 거기 어디야? 당장 가서 죽여줄게. 잠깐만 길드 탈퇴하면 레벨다운 시킬 수 있겠지!]

[아론 : 컥! 할게. 하면 되잖아! 근데…… 보수는?]

[콜로니스트 : 보수?]

[아론 : 그래, 보수. 나 같은 고급 인력을 맨입으로 부려 먹으려고 했냐? 그 NPC가 주는 보수래 봐야 1, 2골드가 고작일 텐데 모자란 금액은 네가 채워 줘야하지 않겠어?]

……놈이 나랑 같이 다니더니 잔머리만 늘었군. 훗, 그런다고 줄 것 같냐?

[콜로니스트 : 거인의 단검 부숴줄까? 내구력 10만이라도 파이어 볼 몇 천 발이면 간단히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아론 : 하, 하……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고 말구! 폴메르 북쪽 외곽, 넬슨 대장간이랬지? 당장 갈게!!]

아론이 도착한 건 귓속말을 끊은 지 10분도 안 되서였다. 도착한 녀석은 곧장 대장간으로 끌려 들어왔고 넬슨 아저씨와 인사한 뒤 내 계약을 이어받았다.

“이제야 좀 홀가분하군. 그럼 다시 도둑 길드로 돌아가 보실까?”

주로 팔 힘을 써서 올린 능력치지만 적용되는 건 팔뿐이 아니었다. 한층 강해진 힘으로 내딛은 발은 내 속도를 전보다 1.3배 가량 증가시켜주었고 내 몸은 바람이 되어 금세 도둑 길드에 도착했다.

“다녀왔습니다.”

꽤 큰 소리로 인사했음에도 테이블에 다리 올리고 여유롭게 무기 손질하던 길드 장은 고개를 까딱여 나임을 확인할 뿐, 다시 무기 손질에 열중했다. 쳇, 말 한마디라도 건네면 입이 썩냐?

“휘유…… 그럼 다시 시작이다!”

상점을 지나 수련장으로 되돌아온 나는 허공에 소리치며 더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단 해야 할 건 희미해진 감각을 되찾는 것! 10일의 공백이 어느 정도 일지 알아내기 위해 전과 같이 손은 봉해두었다.

“큭, 이 정도일 줄이야…….”

10일이란 공백에 익숙하지 않은 속도 때문인지 28번째 더미에서 발이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실망은 했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시도로 게임시간 2일 만에 다시 모든 감각을 되찾았고 드디어 손을 사용해 스틸을 시도했다.

“에게, 3브론즈?”

손놀림이 조금 어설프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낚아챈 첫 번째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은 달랑 3브론즈였다. 가지고 있어봐야 티도 안 날 금액이지만 뭐 어떤가? 처음인데. 더 좋은 아이템을 기대하며 더미 한 개, 한 개를 공략해 나갔다.

“흐음…… 이건?”

잡다한 아이템이 대부분이었지만 착실히 수거해나가며 46번째 더미 앞에 섰을 때, 더미 이마에 꽂힌 비도를 보고 잠시 멈칫거렸다.

“뭐가 됐든 부딪혀보는 수밖에.”

딱히 확인할 방법도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주머니를 낚아챘다. 지금까지완 다른, 뭔가 안에서 움직이는 느낌. 안에 들어있는 것이 생명체임을 직감하고 2m 전방의 땅에 던져버렸다.

스르르륵-.

바닥에 던져진 주머니가 들썩이더니 안에서 조그만 뱀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얼굴이 세모진 것이 척 보기에도 독사! 확실히 저 길드 장이란 인간, 아니 NPC가 날 잡으려고 작정한 것 같다. 멋모르고 풀어봤으면 된통 당할 뻔 했군.

“하지만 기습도 아닌 이런 대치 상황에선 전혀 위협이 되지 않지. 파이어 볼.”

고작 뱀 따위가 피할 수 있을 만큼 내 마법은 느리지 않았다. 파이어 볼에 당한 독사는 에크만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을 만큼 노릇노릇하게 잘 익었고, 다른 비도 꽂힌 더미들의 주머니에 있던 독사, 독 개구리, 어린 사보텐더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이제 남은 더미는 3개! 이마에 비도가 꽂혀있지 않은 정상적인 것들뿐이었다.

“저 정도야 가뿐하지.”

가벼운 마음으로 달려들어 첫 번째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두 번째도 겟! 마지막인 낮은 자세의 어쌔신을 향해 돌진했다.

“클리어!”

지잉 지잉-!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 서려는데 뒤통수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왔다. 뭐, 뭐지?!

“블링크!”

푹 푹 푹-!

다급한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블링크를 시전하자 뒤쪽에 무언가 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내가 서있던 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세 개의 비도가 박혀있었고 오른쪽 허리춤에 가있던 어쌔신 더미의 왼손이 뒤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 최후의…… 트랩이었나?

“이것도 쓸만…… 응?”

주머니에 담겨져 있던 것들을 품속에 털어 넣고 땅에 박힌 3개의 비도를 집어 드는 순간,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건 바로 비도의 날에 초록빛이 감도는 것! 내가 아는 한 이것은 로그나 어쌔신만이 쓸 수 있는 ‘독 바르기’스킬을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 인간이…… 날 죽이려고 작정한 게 확실해!! 제길, 두고 보자.

“끝냈습니다. 이제 다음 걸 가르쳐 주시죠.”

“그래? 그럼 가지”

살기를 듬뿍 담은 내 말을 그는 능청스럽게 받아넘기며 수련장으로 향했다. 수련장에 들어선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더미 중 하나에 주머니를 다는 것이었다. 내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는 건가?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겠군.

“좋습니다. 보여드리죠. 갑니다!!”

“야! 가긴 어딜 가? 가만히 앉아서 설명하는 거나 들어!!”

“그럼 저 주머닌……?”

“뭐긴 뭐야, 몸에 익혔으면 편법을 들을 차례지. 네 몸놀림이 아무리 빨라도 그냥은 훔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스틸 발동’이라고 말해야 손이 빛나면서 마침내 무언가를 훔칠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물론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본인에 한해서야. 그리고 네놈들에겐 리얼모드라는 게 있다며? 그게 2단계일 때와 3단계일 때는 스틸에도 차이가 있지. 먼저 2단계에서는 외부에 장착하지 않은 것을 훔칠 수 있다. 가령 지금 네 품속에 있는 포션이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몬스터와 사람, 모두에게 쓸 수 있지만 사람에게 쓰기엔 너무 제약이 많지. 스틸 당한 사람은 10분 동안 널 죽여도 상관없어지고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는 데다 훔친 주머니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니 말이다.”

저 말은…… 아이템 창에 있는 것을 빼내 올 수 있다는 얘기?! 이건 상세하게 알아 둘 필요가 있겠군!

“제약은 그것뿐인가요? 실패 확률이 높다는 건 무슨 소리?”

“하나씩 물어봐라, 하나씩! 제약이야 더 있지. 사람한테 쓸 경우 저것 말고도 이동 계열 마법이나 스크롤을 10분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과 명성치 하락. 죽으면 훔쳤던 물건을 포함해서 2개의 아이템을 떨구게 되고, 자신이 들 수 있는 무게 이상의 것은 훔치지 못한다는 정도? 그리고 실패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다. 스틸 발동을 외치면 모든 사람·몬스터의 옆구리에 주머니가 있는 게 보이는데, 그걸 지금처럼 훔치면 반절 성공한 거지. 훔치는 것에 성공하면 네 스킬 레벨에 따라 빈 주머니인지 무엇이 들어있는지 결정되는데 이게 나머지 반절이지. 실패란 빈 주머니를 훔친 것을 말한다. 이제 3단계의 경우를 알려주지. 3단계에서도 스틸 발동을 말하면 손이 빛나지만 주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장비하고 있는 것들을 훔쳐낼 수 있지. 아니, 강탈한다는 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이것은 사람에겐 사용 불가고 몬스터는 레벨에 따라 실패율도 올라가지. 아, 죽은 시체에게도 사용할 수 없다.”

스틸이란 기술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다른 도둑도 아니고 나 같은 마스터들이 마음먹고 스틸만 한다면? 대등한 실력이거나 약간 처지는 실력이 아니고서는 선 채로 가진 아이템을 몽땅 털려야 하는 것이다! 매번 랜덤으로 아이템이 들어온다지만 그건 횟수로 커버하면 될 일이니까.

“이제 다음 기술로 넘어가지. 이건 방금 전의 ‘스틸’의 고급 편인데, 이름은 ‘바꿔치기’. 스틸을 발동한 상태에서 손에 무언가를 쥐면 손에 주었던 게 사라지고, 그 상태에서 주머니를 훔치면 자신이 쥐었던 것의 크기와 비슷한 물건을 훔칠 수 있지. 손에 쥐는 건 돌멩이든 뭐든 상관없어. 음…… 이건 한번만 보여주고 끝내도록 하지. 잘 봐, 지금 내 손에 체력 회복용 포션이 있지? 스틸 발동, 바꿔치기 발동.”

그가 스킬을 발동시키자 손바닥 위에 있던 포션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손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듯 손바닥과 손등을 내보인 그는 주머니를 달아뒀던 더미를 향해 달려갔고, 더미를 스쳐지나왔을 때 파란 마나 포션을 흔들어 보였다.

“꼭 생물이 아니라도 내용물을 바꿔치기 할 수 있지. 자, 다음은 ‘아이템 감정’. 이건 여기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따라오라고.”

할 말만 하고 앞장 서가는 그를 보다가 더미로 달려가 주머니를 끌러보았다. 안에 들어있는 건 빨간 색의 체력 회복 포션. 놀라운 모습에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다가 품에 챙겨 넣고 그를 뒤따라갔다.

“자, 일단 이걸 읽어라”

쿵!

그가 얇은 매뉴얼이나 된다는 듯 내 앞에 내려놓은 건 두께가 8cm씩은 될 법한 책 10여권이었다.

“이, 이걸 다 외우라고요?”

“누가 외우래? 그냥 한번 읽어보기만 해. 대신 꼼꼼히. 네가 기억 못해도 알아서 기억되니까 딴 생각 말고 제대로나 읽어라.”

“후…… 예, 예. 그러죠.”

약간 비꼬는 말투로 답한 뒤 책을 한 권 끌어다 펼쳤다. 목차는 없었다. 무기편이라고만 적혀있을 뿐. 두 장을 넘기자 드디어 본 내용이 나왔다. 이 게임의 배경이 중세 시대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컬러풀한 모습. 작은 사진 옆에 그 무기에 대한 설명이 쭉 적혀있는 형태였다. 양이 많아서 그렇지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읽는 도중에 길드 장이 또 한 번 책을 던져주고 가 날 패닉으로 내몰았지만 그럭저럭 현실시간 3주 만에 끝을 볼 수 있었다. 힘들긴 했지만 꽤 유용한 정보였어.

“이제야 다 읽은 모양이군. 이거 받아라.”

그가 던져 준 건 렌즈 크기가 주먹만 한 돋보기였다

“이제 그걸 아이템에 대고 보면 그 아이템에 대한 정보가 새겨진 게 보일 거다. 책에 나와 있던 것에 한해서지만 그런 건 극히 드물 테니 큰 문제는 안 되겠지. 물론 당장에 모든 정보가 보이진 않을 거다. 틈날 때마다 들여다봐서 숙달시켜 놓도록. 따라와라, 이번엔 ‘트랩설치’다.”

오! 드디어 본격적인 실전용 기술들을 가르쳐 줄 모양이다. 먼저 이동한 그를 좇아 수련장에 도착하니 그가 수련장 중앙에 서서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 왔나? 아까도 말했듯이 이번에 가르쳐 줄 기술은 ‘트랩설치’다. 그래서 말인데…… 수업료도 안 받는 마당에 내가 트랩까지 무료로 줄 순 없지 않겠냐? 트랩은 알아서 구하도록. 나한테 사면 더 좋고.”

스틸을 수련할 때 집어먹은 아이템도 있는데 여기서 트랩까지 내놓으라면 그건 도둑놈 심보다. 아, 이미 도둑놈이었지.

“얼마나 필요하죠?”

“글쎄……. 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 어느 정도의 트랩을 다루고 싶은 건가?”

“예? 그런 건 레벨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닌가요?”

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그는 혀를 차며 답했다.

“쯧쯧, 기술에 강하고 약하고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 물론 설치 속도 따위엔 차이가 있겠지만 힘세고, 빠르기만 하면 누가 공짜로 트랩 설치해 준다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호오, 레벨의 고하에는 상관이 없다 이거지? 생각 같아선 상급 트랩까지 마스터하고 나가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중급이요”

“중급이라……. 대충 최하급 50개에 하급이 300개, 중급이 400개 정도인가? 음…… 그쯤이면 중급 트랩을 마스터하진 못해도 그럭저럭은 쓰겠어. 돈으로 환산하면 약 8골드 63실버.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만, 그래도 구할 수 있는 데까지는 구해……!!”

8골드 63실버. 꽤 큰돈이긴 했지만 나에 대한 투자인 만큼 아끼지 않고 선뜻 내놓았다.

“친구가…… 갑부 소릴 들을 만큼 부자라서요. 저번에 나갔을 때 딱 9골드 도움을 받았죠. 더는 지원해주지 않는다지만…….”

그가 더 이상 내 돈에 눈독들이지 못하도록 9골드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돈을 받아든 그는 당장에 상점으로 달려갔고 몇 분 되지 않아 수레 한 가득 트랩을 실어 끌고 왔다.

“자, 먼저 최하급 트랩으로 기초를 다지지. 트랩의 사용법은…….”

“트랩을 땅에 두고 그 위로 손을 올려 ‘트랩 설치’라고 외친다. 아닌가요?”

“맞다. 수동으로도 설치할 수 있지만 그건 숙련된 사람도 실패하기 쉽고 딱히 더 좋은 점도 없으니 관심 끄는 게 좋을 거다. 이것을 사용할 때는 특히 명심해야 할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네 주제를 알라는 거다. 하급도 못 쓰는 놈이 상급 트랩을 다룬답시고 설치다간 시동어를 말하는 순간 발동된 트랩에 목숨이 오락가락할 테니까. 약간의 스킬 차이라면 트랩만 버리고 말겠지만.”

능력 이상의 기술을 쓰려하면 화를 입는다는 건가? 그럼 내 마법 트랩도?

“흠…… 어쩌다가도 성공하는 일은 없나요?”

“물론. 아, 그리고 트랩 해제와 트랩 발견은 따로 올릴 필요 없다. 트랩 해체는 설치와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되고 트랩 발견은 디텍트라고 외치면 발동되는데, 능력은 모두 트랩 설치 스킬에 따라 결정되니까”

지금까지를 생각해보면 따로 익힐 법도 한데……. 귀찮았던 건가? 뭐, 나야 편해서 좋지.

“자, 그럼 진짜 시작하자. 일단 저걸 가져다가 5개에 1열로 쫙 깔아라. 줄 똑바로 맞춰서.”

그가 지목한, 최하급 트랩이 담긴 수레로 가서 품안 가득 덫들을 챙겨 넣었다. 그리곤 그의 말처럼 줄을 딱딱 맞춰 트랩들을 깔았다. 하나가 사람 얼굴만 한 크기의 최하급 트랩이었지만 5개를 한 줄로 놓으니 줄은 그리 길어지지 않았다. 50개의 트랩을 모두 깔았을 때,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길드 장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이거……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너,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예? 예. 왜요?”

“죽어도 큰 타격 있는 거 아니지?”

“뭐, 그렇기야 하지만…….”

“스킬이 대폭 향상된다면 몇 번쯤 죽는 건 괜찮지?”

“그야 많이만 오른다면…….”

“그럼 수고해라.”

빙글-.

갑자기 그가 내 무릎을 굽히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눌러 공중에서 누운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잠시 붕 뜬 몸. 중력의 이끌림을 예상하며 손을 버둥거리는 순간 그의 오른손이 내 허리를 감았다. 그다지 유연하지 못해 허리를 삐끗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 다음 그가 한 행동은…….

“아, 따, 따, 따, 따가!!!!”

……일직선으로 트랩을 깔아놓은 곳에 날 굴려버린 것이다!!

“트랩을 깔아 놓기만 한다고 실력이 늘 줄 알았냐? 이렇게 작동을 해야 느는 거지! 크하하하하하!!”

퍽 퍽 퍽-!

몸을 틀어 트랩의 길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길드 장의 발길질이 온몸을 강타했다.

“끄어어어어…….”

타의에 의해서 굴러 간 트랩의 길. 그 끝에 도달한 내 모습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산발한 머리, 옷을 가릴 정도로 많이 달려있는 덫들, 웃는 얼굴의 흰색 가면. 이대로 사냥터에 가면 새로운 몬스터인 줄 알고 당장 유저들이 달려들 것 같다.

“오, 그 많은 트랩들을 견뎌 내다니, 생각보다 맷집이 좋군?”

“……트랩이 입힌 데미지보다 발길질이 입힌 데미지가 더 큰 것 같습니다만?”

“어허! 도둑에겐 인내심도 중요한 거야. 그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면 쓰나?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대신 스킬이 꽤 많이 올랐을 거다. 그럼 이제 하급 트랩으로 수련을…….”

진한 살기를 뿌리며 한 발자국씩 내딛자 그는 얼른 하급 트랩이 담긴 수레 옆으로 가 화제를 돌리려 했다.

“수련? 좋∼ 지. 단, 이번에 구르는 건 당신이야!!”

“그, 그건 좀…….”

“그럴 게 아니라면, 날 막지마쇼. 알아서 처리하고 올 테니까!”

생각 같아선 당장에 그를 공격해 죽이고 싶었지만 갑자기 떠오른 그의 엄청난 능력들 때문에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온 몸에 주렁주렁 달린 최하급 덫들부터 떼어냈다. 그리고 수레에 담긴 300개의 하급 트랩을 품안에 몽땅 쓸어 담았다. 아이템 창에 공간이 조금 남았지만 중급 트랩은 그에게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 없는 빈 공터로 나와 내가 부른 건 나키르였다. 녀석의 소환수라면 쉽게 죽지도 않고 착실히 트랩에 걸려줄 테니까.

“사부니임∼.”

“콜! 나도 왔다.”

나키르가 내 연락을 받았을 때 거트 형도 옆에 있었는지 길드원 동원령을 내리겠다는 걸 간신히 뜯어 말렸더니 나키르와 함께 와버렸다. 와봐야 별로 할 일도 없을 텐데……. 아, 소환수한테 회복 주문을 걸어주면 되겠군.

“그럼 부탁할 게. 저쪽이야”

“소환! 놀x3.”

일견하기에도 부실한 하급 트랩이 작동하기도 전에 박살날까봐 나키르가 오기 전에 대형 몬스터를 피해 달라 말해 놨더니 3마리의 놀을 꺼내 놓았다. 겨우 하급 트랩인데다 지속적으로 회복 주문까지 걸어줄 테니 문제없겠지.

“일렬횡대로 서! 앞으로 전진!!”

미리 깔아놓은 트랩의 길을 향해 3마리의 놀들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고통을 참으며 쉬지 않고 나아가는 놈들 때문에 나도 덩달아 바빠졌다. 미처 못 깔아놓은 트랩을 계속해서 깔아야 했으니까. 도중에 놀의 진군 속도가 내 트랩 설치 속도를 따라잡아 잠시 휴식시켜 놓는 일도 있었지만 300개의 트랩을 모두 사용하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헛! 거트 형, 빨리 힐!!”

“어? 그래. 매스 힐(mass heal)!!”

하급 트랩을 모두 사용하고, 중급 트랩을 가져와 같은 짓을 반복하는 데 다섯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나키르가 급히 소리를 질렀다. 하급 트랩 때는 거의 힐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렇게나 위력 차이가 난다는 건가?

“휴……. 형, 아무래도 놀 정도론 안 되겠어요. 위력 면에서 하급트랩과 4배정도 차이가 나니……. 저 정도면 웬만한 무게도 끄떡없을 것 같은데 다른 걸 소환하죠.”

“할 수 없지.”

“소환! 트롤x2”

오! 트롤의 회복력이라면 딱히 회복 주문이 없어도 되겠군!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일렬횡대로 서. 전진!”

트롤의 회복력에 거트 형의 회복 주문이 더해지니 위험이란 있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난 하루 만에 중급 트랩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둘을 성으로 돌려보내고 나서도 난 공터를 떠나지 않았다. 한 가지 실험을 행하기 위해서.

“매직 트랩 설치.”

실험을 위해선 리얼 모드 2단계가 나을 거란 판단에 이미 감도 설정도 변경했다. 하나 남은 중급 트랩을 땅에 놓고 떨리는 마음으로 매직 트랩을 설치했다.

“……아, 어떤 마법인지 말을 안 했군. 매직 트랩 설치, 파이어 애로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아니가?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어떤 마법을 담을지 말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파이어 애로우를 넣어 다시 말했다. 하지만 파이어 애로우만 땅에 부딪쳐 폭발을 할 뿐, 내가 원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것도 아니면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확인.”

[매직 트랩퍼의 장갑][로그 전용]

능력 : ???

“아!”

말로만 들었지 확인 한번 안 해본 마스터 아이템에 손을 얹고 확인을 외치자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이건…….

“로그와 연동되는 아이템이었어! ‘로그’가 아닌 ‘도둑’상태에서 백날 쇼해봐야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지. 마음 같아선 당장에 레벨 업 해서 써먹어 보고 싶지만 이 고생하고 도둑의 재미를 못 느끼면 억울하겠지? 조금만 더 참자. 리턴!”

빛 무리와 함께 이동한 곳은 수련장 안 텐트. 리얼 모드 2단계로의 강제 모드 변경으로 인한 어지러움이 없었기에(이미 2단계니까) 거침없이 밖으로 발을 뻗었다.

“다음 거 가르쳐 주세요!!”

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수련장을 가득 메우자 상점에 있던 길드 장도 놀라서 뛰쳐나왔다.

“그 많은 걸 벌써 다 했단 말이야?”

“당연하죠. 편법에서 날 따라올 사람은 없으니까!”

“좋아, 그럼 다음 기술로 넘어가지. 이번에 배울 기술은 ‘비도 날리기’다! 스킬 레벨이 오를수록 더 빠르고 강해지지. 감만 익히면 끝낼 거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저번에 산 단검들은 남아있지?”

그의 마지막 말에 얼른 아이템 창을 열어보았다. 남아있는 최하급 비도의 수는 13개. 이것들의 내구력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감을 잡을 때까지는 버텨주지 않을까 싶었다.

“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비도의 내구력은 5. 연습용 과녁이 내구력을 거의 깎아먹지 않기 때문에 약 20여 번은 써먹을 수 있었지만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 금세 동이 났다. 사고, 또 사고……. 수십 번의 거래가 이뤄지는 동안 3주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손목을 쓰니까 비도가 자꾸 돌잖아! 손목 말고 팔꿈치를 이용하라고!!”

“누군 하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아십니까? 제일 답답한 건 나라구요!”

문제는 비도의 회전이었다. 저번에 몰래 나갔을 때 썼던 잘못된 폼이 몸에 베어버린 것인지 아무리 교정을 받아도 비도가 회전하며 날아갔다.

“에휴……. 나도 더는 못 가르치겠다. 알려줄 건 다 알려줬으니까 다음 걸로 간다!”

“……네.”

다른 사람이면 3일 안에 끝내고 스킬 레벨 올린다는데 3주 동안 한번을 제대로 못 날린 죄인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제 둔한 네놈을 가르치는 것도 마지막이구나. 마지막은 ‘단검 마스터리’다. 전에도 말했듯이 비도만으론 제 한 몸 지키기도 힘들다. 그래서 단검 쓰는 법도 배워둬야 하지. 하지만 기사들처럼 검기 같은 기술은 쓰지 못한다. 어쌔신들은 뛰어난 살인 기술을 이용해서 검으로 사람을 죽인다만 우리 도둑이나 로그는 호신용정도면 충분하다.”

“마지막…… 이라고요? 그럼 하이딩은?”

“하이딩 같은 고급 기술은 로그나 어쌔신 정도가 되어야 쓸 수 있지. 그것도 몰랐단 말이냐? 에잉…….”

하이딩을 배울 수 없다는 말은 꽤나 충격이었다. 제길, 트랩 다음으로 기대하던 스킬인데, 확 레벨 업 해버려?

“단검은 있냐? 없으면 그 갑부 친구한테 부탁해서 하나 사는 게 어때? 우리 가게에 마침 좋은 물건이…… 그림자의 단검?!”

단검 한 자루 팔아보려고 눈빛이 달라지는 그를 보며 품에서 그림자의 단검을 꺼내자 단박에 알아보고 소리쳤다. 뭐야? 저 반응은.

“자네, 꽤 대단한 걸 가졌군. 어차피 지금의 상태론 그 검의 능력을 끌어 쓰지 못할 텐데 나에게 넘기는 게 어떤가? 내 값은 후하게 쳐줌세.”

놀라는 것도 잠시 뿐, 뭔가 이상한 눈을 한 그는 내게 검을 팔라 부추기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한 저런 눈빛은 사기꾼에게서 보이는 건데? 후후…… 미숙해, 미숙해.

“자요.”

“쉐도우.”

그림자의 단검을 내밀자 바로 손에서 채간 그는 뜬금없이 ‘쉐도우’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단검을 든 반대쪽 손에 검은 색의 길쭉한 무언가가 생겨났다. 저건?

“오! 역시 진품이군. 쉐도우 소드라…….”

“…….”

“뭐, 말해주지. 이것에 그림자의 단검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가 다 이 쉐도우 소드 때문이지. 로그나 어쌔신만이 불러낼 수 있는 것으로, 내구력은 무한! 어둠 속성에 공격력은 본체인 이 검과 같지. 빛 속성과 부딪치면 그냥 통과해버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어디 빛 속성 무기를 가진 적을 만나기가 쉬운가? 고로, 이 검은 한 자루이면서 두 자루인 게야. 다른 사람이 잡으면 안개처럼 변해버려서 한 자루씩 나누어 가질 수는 없다고 하는데 그건 확실히 모르겠고. 그래도 쌍검술이 가능하잖아? 아, 게다가 쉐도우 소드는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형태도 바꿀 수 있다더군. 길이 제한이 있어서 창 같은 종류는 무리겠지만.”

단순히 날카로운 검이라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잖아? 후후……. 역시 난 아이템 복이 있단 말이야.

“주세요.”

“응? 뭘 말이냐. 아, 돈! 그래, 얼마면 되겠냐.”

“누가 돈 달래요? 그.림.자.의.단.검. 달라고요. 팔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기는…….”

“뭐, 뭐야? 감히 날 속이다니…… 그렇지! 흐흐흐……. 물건은 이미 내 손안에 들어와 있다. 뺏어갈 테면 뺏어 가봐!!”

확실히 그가 무력시위로 버티면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괜히 개겼다간 죽기만 할 뿐이니까. 하지만!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아∼. 난 운영자나 불러야겠다. NPC가 유저한테 사기 쳐 먹으니 이건 버그일 테고, 신고하면 보상받겠지? 해당 NPC는…… 폐기처분되려나? 가만있자, 지금 한가한 운영자가…….”

“내가 졌다. 내가 졌어! 제길, 가져가라.”

폐기 처분이란 말에 그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누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랬나?

“두고 보자…….”

떨리는 손으로 검을 넘기는 그의 입에선 뿌득뿌득 이가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제길, 다음 스킬 배울 때 고달파지겠군. 아니지, 마지막이 ‘단검 마스터리’랬잖아? 특별한 기술은 없댔고? 까짓 거, 사고 한번 치자!

“생명의 은인에게 달랑 이것뿐입니까?”

“생명의 은인이라니,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

“제가 누구 들으라고 중얼대지 않고 바로 운영자를 불렀으면 100% 폐기 처분 되셨을 테니 생명의 은인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개소리!”

떠나기 전 한바탕 하기로 마음먹고 받으려면 그림자의 단검에서 손을 떼었다. 흥분한 그도 손을 다시 자신의 쪽으로 가져갔고. 이로써 트랩은 완성되었다.

“호오, 성의를 보이기는커녕 화를 내신다 이거죠?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본데, 제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신을 폐기 처분시킬 수 있습니다.”

“뭣이?!”

역시 폐기 처분이라는 말에는 얼굴색이 바뀌며 크게 동요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처럼 두 세계를 왕래하는 자들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일들을 자신의 시점으로 저장할 수 있습니다. 전 그 능력으로 방금 전의 상황을 저장시켰죠. 제가 유리한데까지만! 전 아직 그림자의 단검을 받지 못했고, 이 상황에서 운영자에게 그 저장한 것을 보여주면 어떻게 될 까요? 아, 지금 그걸 버리셔봐야 소용없습니다. 그 정도 상황쯤이야 세치 혀를 굴려 얼마든지 역으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내 마지막 경고성 멘트에 그는 검을 버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끝났군.

“그래서…… 뭘 원하는 거냐!”

“아아, 그리 거창한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약간의 성의를 보여주십사 하는 거죠. 예를 들면…… 상급 트랩을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소비할 중급 트랩이라던지?”

“미친…… 중급 트랩을 900개나 달라는 게냐!!”

900개? 상급 트랩으로의 길이 그렇게나 멀었던가. 저 정도면 나로서도 부담스럽군.

“800개 해드리죠.”

“500개!”

“이렇게 되면 결국 650개가 되겠군요. 좋습니다. 50개 깎아서 600개까지 해드리죠.”

“크…… 좋다. 어차피 지금 받기는 무릴 테고, 수련이 끝나면 주지. 자, 검을 들어라!”

그는 내가 검을 돌려받자마자 흉흉한 살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복수하겠다는 건가?

“마지막 수련은 내 검을 막으며 실전 감각을 익히는 거다! 10번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때까지는 10년이 지나든 100년이 지나든 끝나지 않지. 크핫핫핫핫!!!”

“잠깐!”

그의 광기가 절정에 달해 번개처럼 달려들려는 순간, 나는 막판 뒤집기를 시도했다.

“뭐냐!”

“‘단검 마스터리’는 안 배우겠습니다. 안 배울 테니까 약속한 트랩이나 줘요.”

“하, 하지만 저번에 내 방식대로 끝까지 따른다는 말을…….”

갑작스런 역습에 어안이 벙벙해진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 예전의 약속을 들먹였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아, 그랬군요. 할 수 없네요. 배우겠습니다.’라고 할 리 없었다.

“제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었나요? 흠, 기억나지 않는군요. ‘문서’로 된 기록이나 ‘증인’, 혹은 ‘동영상 파일’을 가지셨다면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이런 이런,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절 핍박하신다면 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운영자를 부르는 수밖에……. 제롬과 고블린 중 어느 쪽이 더 한가하려나…….”

“알았어, 알았다고! 제길, 트랩을 줄 테니까 썩 꺼져버려!!”

“고맙게 받겠습니다.”

중급 트랩의 크기가 하급 트랩보다 작았지만 600개나 되는 걸 한 번에 나르기는 무리였다. 때문에 아론을 불러 나눠들게 한 후, 손을 흔들며 유유히 길드를 빠져나왔다.

“야, 서둘러!”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다만…… 리턴!”

아론이 리턴을 사용했으니 이동된 곳은 당연히 성안의 아론의 방. 비어있는 한 쪽 구석에 트랩들을 급히 쌓았다.

“다 됐군. 난 창고에 들렀다가 일을 시작할 테니까 너는 부탁한 대로 좀 해줘.”

“그래. 어차피 거기에 길드원들이 있을 테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다만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

“새 출발하는 의미로 한 밑천 벌어두려고. 그 동안 당한 복수도 할 겸. 그럼 난 간다. 텔레포트!”

먼저 이동한 곳은 아이템 창고. 최대한 화려하고 멋들어진 것들을 꺼내 입고 가면을 인피면구로 교체한 뒤(성향이 선일 경우, 인피면구를 착용하더라고 NPC를 이용할 수 있다.) 다시 도둑 길드로 향했다. 도둑 길드의 문 앞에 도착해서도 바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론 : 준비 완료!]

삐걱-. 기다렸던 아론의 사인이 떨어지자, 힘차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문소리가 나기 무섭게 달려 나온 길드 장은 손을 싹싹 비비며 점소이스러운 행동을 취했다.

“흠……. 선물을 좀 하려는데, 여기서 제일 비싼 게 뭐요?”

“비싼 거라 하면 역시 단검 종류입죠. 가만있자, 그 중에서도 제일 비싼 게…… 아, 여기 있군요. 섬광의 단검. 이것으로 말씀드리자면 강도와 예기는 말할 것 없고 특수 능력으로 ‘라이트’와 ‘헤이스트’가 깃들어 있는 마법 검입죠. 이걸 사시면 라이트를 쓸 때 자신의 눈을 보호할 수 있는 선글라스도 드립니다요.”

“얼맙니까?”

“이게 이래봬도 충전된 마법의 수가 꽤 많아…….”

“얼마냐고요!”

“10골드입니다!”

헤이스트가 있다고는 하지만 마나 소비량이 적지 않을 테니 가격대 성능비는 절대 좋다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뭐, 살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

“그거 5개랑 상급 비도 1000개만 주십시오.”

“헛! 섬광의 단검 5개에 상급 비도 1000개씩이나……. 죄송한 말입니다만 돈은 있으신지…….”

그는 못 미더운지 말꼬리를 흐리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친구에게 선물로 줄 것들치곤 너무 금액이 컸으니까. 하지만 그 의심스런 눈초리도 내가 들어 올린 미스릴 코인 하나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헤헤……. 당장 대령하겠습니다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문자 그대로 전광석화! 눈으로 좇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라진 그는 한참을 달그락거리더니 수련장 쪽 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하긴, 이 좁은 곳에 1000개나 되는 비도를 가져오긴 무리겠지

“헤헤……. 그럼 이제 값을 치르시는 게……. 모두 100골드입니다요.”

“급할 거 뭐있습니까? 먼저 단검들부터 좀 보죠.”

“아, 예.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보십시오.”

그는 끝까지 간사한 웃음을 유지하며 내게 하얀 검신의 단검 5자루를 건넸다. 강도야 알 수 없지만 예기 하나는 쓸 만하군.

“먼저 선글라스부터 쓰고…… 라이트!”

라이트는 따로 광구가 생겨나지 않았다. 하얗던 검신에서 빛이 뿜어져 나올 뿐. 강렬한 빛에 그가 영향을 받자 급히 계획을 앞당겼다.

“공간의 흐름을 따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워프 게이트.”

검신이 빛을 잃어갈 무렵, 타원형의 푸른 게이트가 내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건…… 뭐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를 무시하고 난 단검들을 하나씩 게이트 속으로 던져갔다.

“무, 무슨 짓입니까!!”

“보면 몰라? 넌 사.기.당한 거야. 잘 있으라고. 난 이 게이트를 넘어서 던져둔 단검을 회수…….”

“이 놈!”

그의 노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게이트에 공급하던 마나를 끊어버렸다. 눈으로 확인하고 움직였다간 늦어버릴 수 있으니까.

“큭!”

어느 새인지도 모르게 내 심장에 비도가 박혔다. 회색으로 물드는 몸. 그러나 게이트는 단번에 사라지지 않았다. 게이트는 약 5초의 시간동안 서서히 작아졌다. 5초. 보통 사람이라면 게이트를 왔다 갔다 하기에도 벅찬 시간이지만(크기가 점점 작아지니 늦으면 점프해야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그에게는 회수해 돌아오기 충분할 것이다. 그도 그렇게 판단했는지 게이트 속으로 몸을 날렸다.

“넌…… 끝이다.”

난 죽어가는 와중에도 한마디 말을 토해냈다. 워프 게이트가 열려있는 곳은 우리 길드의 독점 사냥터 중 하나인 절망의 평원. 그리고 내가 아론에게 부탁한 것은 길드원들을 이용한 대량의 몬스터 몰이! 아론에게 정확한 좌표까지 알려줬으니 제 아무리 길드장이라도 시간 내에 돌아올 수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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