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지션 마스터
“……올라가시죠.”
왕족이란 권위에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그는 속으로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다고 생각할 것임에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놀려먹기에는 부적합해도 원하는 걸 이루기엔 NPC가 편하단 말이야?
“그런데, 저쪽엔 뭐가 있는 거지?”
오가는 길들이 잘 기억 되어 있나 확인 차 꺼낸 지도에 갈 수 있을 법한 곳임에도 가보지 않아 검게 표시된 길이 나타나있었다. 이왕 온 거, 갈 수 있는 데는 다 가봐야 하지 않겠어?
“후유, 저긴 감옥입니다. 아니, 봉인 지역이라 하는 게 옳겠군요. 무시무시한 괴물이나 괴인들을 가둬 놓았다고 하죠. 밖에서도 열 길이 없어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결계의 강도로 보아 확실한 듯합니다.”
“호오, 그래? 앞장 서.”
그도 이젠 포기했는지 한숨에 씁쓸한 표정을 짓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이거야 원, 내가 신분만 믿고 설쳐대는 귀족 나부랭이 같군. 음……맞나?
“아참, 놈들이 '악'이라면 아까 가져온 돌 조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지만 하고 보니 그럴싸했다. 봉인씩이나 된 ‘놈들’이라면 위험할 지도 모르겠군.
“꼭 가셔야…….”
“안 가고 뭐해? 돌이 손안에 있으니 지금 당장 위험하진 않겠지.”
특별한 활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마나도 불어넣어 봤지만 마나를 주입할 때 ‘An’이란 글자에 푸른빛만 생겨날 뿐, 실드가 생겨난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마나 소비도 거의 없는데 이게 맞긴 한 건가?”
“다 왔습니다. 다행히 문은 닫혀 있군요.”
“열어봐.”
“예?”
철에 미스릴을 입힌 건지 통 미스릴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문들이 좌우로 굳게 닫힌 채 버티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는 화들짝 놀라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왔다.
“원래는 밖에서도 못 연다며? 여기까지 온 거 확인은 해봐야지.”
“하지만…….”
아차, 지금 난 신분만 믿는 귀족 나부랭이였지? 그렇다면 이 정도로 끝내선 안 되지!
“반항하는 거야? 왕족인 나한테? 왜, 삼족을 멸해줄까?”
싱긋 웃으며 답해주자 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가장 가까운 문 앞에 섰다. 기사단장 씩이나 되니 ‘가족’이란 개념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적중했군. 큭큭큭.
“아니, 아니. 거기 말고 저 끝을 열어봐. 뭔가가 튀어나오더라도 대응할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들리지 않게 뭐라고 구시렁대던 그는 설사 열리더라도 도망갈 틈을 벌 수 있게 검강을 준비해 놓고 왼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멸망으로 이끄는 홍염의 불꽃, 그랜드 파이어.”
“으학!”
열쇠 구멍도 없는 철문은 그의 힘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숴 버릴 수밖에. 좁은 공간이라는 제약에 폭발력 높은 마법은 쓰지 못하고 그랜드 파이어를 날리자 갑자기 생겨난 실드가 흡수하듯 위력을 흩어버렸다.
“검강으로 후려쳐, 명령이다!!”
‘명령’이란 말에 반사적으로 내밀어진 그의 검은 똑같은 실드에 막혀 마나의 기운을 잃고 튕겨 나갔다. 이 돌멩이와 결계는 연관 없는 건가?
“돌아가자.”
생각보다 큰 반발력에 엉덩방아를 찧은 그를 뒤로하고 돌아서자 주섬주섬 일어나 알아서 뒤따라왔다. 이제 지도도 채워졌으니 안내는 필요 없지만 나름대로 고급 인력인데 버리고 갈 수야 없지.
[blood길드가 오마이스 영지를 차지하였습니다.]
서재를 통해 밖으로 나오자마자 blood길드가 목적을 달성했음을 알리는 공지가 떠올랐다. 본성을 차지한 우리가 막는데 감히 쳐들어갈 바보는 없었겠지.
“아, 콜. 마침 잘 왔다.”
“무슨 일 있어?”
“우리끼리 상의해 봤는데 네가 짜놓은 계획대로 움직이면 민심 잡는 것과 어쌔신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 둘 다 큰 무리 없이 진행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넌 지금부터 레벨 업에만 전념해. 우리 길드의 간판이나 다름없는 네가 마스터도 못되는 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어?”
확실히, 마스터까지 경험치가 반절도 안 남은 상태이니 무슨 일이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몸을 사리게 되는 것 같아 내심 레벨 업 생각이 간절했었다. 하나, 그 경험치라는 게 좀 많은 거여야지…….
“수성도 NPC 대신 길드 원으로 채우면 최대 300명까지 가입이 가능하다니 연합해서 쳐들어와도 문제없을 거고, 여차하면 더 매지션이 도와주기로 되어 있으니까. 마스터 레벨 몇 명이 도우면 레벨 업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쯧쯧쯧, 그렇게 경험치를 나눠 먹어서 언제 레벨을 올려?”
성 밖으로 튕겨 나갔다 다시 들어 온 에크만, 알테어가 좀 전의 얘기를 들었는지 혀를 차며 다가왔다. 아, 듀얼 하기로 했었지.
“지금의 두 분이야 혼자서도 사냥하기 편하시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죠. 연무장으로 가시겠습니까?”
“헹, 누가 마스터도 못되는 놈이랑 누가 싸워주긴 한대냐? 이봐, 길드 장! 어차피 레벨 업 시킬 거면 이놈 우리가 데려가도 되지?”
“아, 뭐, 본인만 좋다면야…….”
“최단 시간에 레벨 업 시켜줄 테니 잔소리 말고 따라와!!”
그렇게 말하고 파티 신청을 한 에크만들은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해 납치하듯 날 끌고 갔다. 어이, 난 마나 포션도 덜 챙겼다고!!
“바로 텔레포트는 불가능하니까 조금 걸어야 한다. 죽기 싫으면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
“여긴 대체…….”
“사이클롭스 밭.”
그는 그 한마디로 일축하고 입을 다물었다. 일견하기에도 조심스런 발걸음, 그만큼 위험하단 뜻이겠지.
“이러다 죽으면 복구가 더 오래 걸리겠군.”
“사지로 내몰진 않을 테니까 잔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해!”
작은 중얼거림이었는데도 귀신같이 알아듣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나저나 사이클롭스라…… 내 기억이 맞는다면 노란 피부의 거대한 외눈박이 괴물인데…….
“나왔다, 피해!!”
내가 봤던 자료를 제작자들도 봤던 걸까? 멍청해 보이는 표정까지 예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눈에서 레이저로 보이는 빛줄기를 쏘아낸다는 것쯤?
“X팔.”
날아오는 빛줄기를 확인하는 것도, 반응하는 것도 늦은 터라 재주껏 바닥을 굴렀어도 착용한 이탈의 망토 절반이 사라져있었다. 내구력 무한이란 능력답게 곧바로 재생을 시작했지만 기분 더럽군.
“요즘 바닥과 너무 친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문득, 바닥과 노는 게 습관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었다.
“저 하늘의 별이 되어라, 승룡풍!”
먼저 달려간 에크만이 특유의 빠른 속도와 다연발 매직 미사일로 놈의 주의를 끌 동안 알테어가 파고들어 그 옛날의 게임인 ‘스트리트 파이터’의 켄처럼 강력한 승룡권을 날렸다. 주먹에 가격됨과 동시에 마법의 힘으로 뿜어져 나온 바람은 4m에 달하는 거구를 1m가량이나 띄워 올렸고, 굉음을 내며 쓰러진 사이클롭스에게 재차 공격이 이어졌다.
“썬더 브레이크!!”
“크워어어!!”
강맹한 전격의 힘에 가격 당한 곳은 사이클롭스의 약점으로 알려진 눈이었다. 순간적인 보호 본능으로 눈을 감았던 놈은 한발 먼저 도착한 썬더 브레이크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었고 감긴 눈이 다시 떠져 더 큰 고통을 받았다. 갓난아이가 배고프다 울며 버둥거리는 모습이 이러할까? 엄청난 고통에 손을 저어 에크만을 날려버릴 생각도 못하는 놈은 양손으로 땅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꼼짝없이 에크만의 공격을 전부 받아냈다. 그런데…… 저놈들이 다 죽이면 난 언제 레벨 올려?
“역시 이놈들 잡는 건 수지에 안 맞아.”
마지막 한방 정도만 남기고 비켜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비웃듯 에크만은 깔끔하게 처리하고 사이클롭스의 시체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전 언제 올리라는 겁니까?”
“가만히 좀 있어봐. 어차피 이런 수지도 안 맞는 놈들 상대하다간 죽기만 하니까. 아∼ 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게.”
좋은 곳이라고는 했지만 올라갈수록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동굴, 혹은 천길낭떠러지로 간다는 것이었다. 점점 사이클롭스의 숫자만 늘어나는 게…… 설마 일부러 날 죽이기 위한 함정?
“여기서부턴 블링크를 쓰던 지랄을 하던 꼭 붙어서 따라오기만 해. 다른 놈들은 깡그리 무시하고. 간다!!”
“블링크, 블링크, 블……”
전방 멀리서 한 ‘무리’의 사이클롭스가 보이기 시작하자 에크만도 긴장된 목소리로 소리치며 속도를 냈다. 최대한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우회하며 돌아갔지만 유독 시야가 넓은 녀석이 있던 걸까? 크고 넓적한 발로 성큼성큼 걸어왔고 이미 도망치기로 한 거, 더 몰려들기 전에 속도를 올렸다.
“이번엔 로드냐!!”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죽자 사자 달아난 방향에는 일반 사이클롭스보다 50cm쯤 더 커 보이는, 숯처럼 까만 피부의 사이클롭스가 버티고 있었다. 차이를 보이는 건 외모만이 아닌지 들고 있던 몽둥이로 바닥을 헛치자 조금 떨어진 곳까지 큰 진동이 일었고 가공할 파괴력에 기겁하며 최대한 멀리, 빠르게 이동하는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다 왔다!!”
“다행……?! 낭떠러지잖아!!!”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달려서 도착한 곳은 낭떠러지였다.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이 떨어져도 머리 터져 죽을 만큼 엄청난 높이의!!
“뛰어 내려.”
“에이, 썅!”
뒤에서 로드를 포함한 십여 마리의 사이클롭스들이 쫓아오고 있으니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앞장서서 뛰어내린 둘을 따라 몸을 날리자 검은 점처럼 보이던 것들이 점점 커지며 눈에 들어왔고 한눈에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 떨어질 셈이냐! 날아올라!!”
“아! 새처럼 하늘로, 플라이”
한참을 떨어지고 있을 때 먼저 내려와 자세 잡고 있던 에크만들이 플라이 마법을 유도했고 죽기는 싫었기에 바로 플라이를 시전 했다. U턴하듯 솟구쳐 올라간 곳, 거기에서는 에크만과 알테어가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었다.
“썬더 브레이크!!”
“헬 파이어!!”
더블 스펠이라는 특권으로 플라이를 유지하면서 강력한 주문을 완성시킨 둘은 약속된 지점을 향해 몇 번의 공격을 퍼부었고 공격 대상인 절벽의 한 곳은 동굴과 같은 모양으로 변하며 붙어있던 돌덩이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어서 저리로!!”
무리한 공격으로 마나가 다 떨어져 가는 것일까? 뭐가 그리도 급한지 둘은 인공 동굴의 안으로 날아 들어갔고 나 역시 그들의 뒤를 쫓았다.
“디그, 디그, 디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플라이를 캔슬한 그들은 쉴 새 없이 디그를 사용해 동굴 안 땅을 다듬었고 얼마 안가 미끄러져 떨어질 염려 없이 평평한 지형으로 탈바꿈시켰다. 대체 뭐하자는 짓이야?
“휴…… 다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긴! 다 널 마스터로 만들기 위한 고귀한 희생이지. 일단 숨 좀 돌리자.”
그들은 마나가 딸리기보단 ‘디그’를 외치는 게 힘들었던 것인지 마나 포션은 먹는 둥 마는 둥 홀짝이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 5분을 그렇게 앉아서 쉬었을까?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난 에크만은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여기가 여긴 줄 알아?”
사이클롭스도 처음 봤는데 그걸 알면 내가 운영자게?
“이곳의 정식 명칭은 타이탄 계곡! 우리는 짤짤이 계곡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넘어가기로 하고, 이름 그대로 타이탄이 서식하는 곳이지. 타이탄이 뭔지 모르지? 응?”
“아, 뭐…….”
새 장난감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어오는 그에겐 설사 안다 해도 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럴 거야. 타이탄은 방금 만난 사이클롭스 따위와는 상대도 안 되는 무지막지한 놈이지. 아, 떨어질 때 얼핏 봤을 수도 있겠군. 아무튼 저놈들인데 눈에서 빔을 쏘거나 하진 않지만 육체적 능력이 엄청나서 한 마리를 제대로 상대하려면 마스터 기사 5명은 있어야 할 걸? 우리조차도 원거리에서 한껏 마법을 퍼부어 준 다음에나 한 마리 끌어내서 죽일 수 있었으니까.”
“죽기도 많이 죽었지. 대충됐다 싶어 덤볐다가. 큭큭.”
“맞아, 그랬었지. 킥킥킥킥.”
죽었던 기억이라면 결코 좋지 못한 것일 텐데 이 둘은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실컷 웃어 제쳤다. 괜히 미친놈들이 아니라니까?
“그것과 절 여기로 데려온 것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있지, 그거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머리 좋은 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니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 무에 그리도 즐거운 겐지 또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던 그들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킥킥, 그럼 가르쳐 주도록 하지. 말했듯이 이 밑에는 타이탄들이 있고, 우리는 위에 있다. 그리고 타이탄들은 하늘을 날거나 특별한 원거리 공격을 하지 못하는데 우린 원거리 공격이 주특기지. 마지막으로 우린 마나 포션과 명상이라는 편법이 있지만 저놈들은 한번 소모된 HP를 회복하지 못해!! 즉, 여기서 퍼붓고 회복하는 걸 반복하면 저놈들이 주는 막대한 경험치를 날로 먹을 수 있다는 얘기지! 리젠 속도가 제법 빠르고 말했듯이 육체적 능력이 굉장해서 아이템을 먹으러 내려갔다간 골로 가기 십상이지만 아이템 욕심만 버린다면 최고의 레벨 업 장소 아니겠냐? 음하하하.”
마스터 레벨의 기사 5명은 있어야 상대할만한 놈이 주는 경험치를 혼자서, 그것도 날로 먹는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들의 말처럼 최단 시간으로 레벨 업을 할 것이나,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운영자 측에서 제지하지 않던가요?”
“아, 오긴 왔었지. 근데 지들이 오면 어쩔 거야? 버그를 쓴 것도 아닌데 기껏해야 빌기밖에 더해? 모르긴 몰라도 절벽만 부서지지 않게 패치할 수 있을 만큼 이 시스템들이 간단하진 않을 걸? 잘못 건드렸다가 남도, 땅도, 부술 수 없게 되면 어쩌려고 건드리겠어? 어차피 마법사, 그것도 마스터가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짓이니까 그쪽에서도 묵인하기로 했지. 마스터에서 레벨이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저 위쪽의 사이클롭스라는 것들도 쉽지 않은 상대니까.”
“흐음……. 한데 마나 포션도 별로 안 가진 상태라 잡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군요.”
“그거라면 걱정 마. 방법이 다 있으니까.”
“방법이라면……?”
그 정도 일은 이미 예상해 놓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감을 보인 에크만은 한 곳의 위치와 좌표를 말해주고 거트 형에게 대량의 마나 포션을 가지고 나올 것을 부탁하도록 했다.
“공간의 흐름을 따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조합, 워프 게이트.”
더블 스펠을 이용한 두 개의 고위급 마법 조합, 길죽하고 푸른 타원형의 게이트가 열리자 알테어가 거침없이 들어가 마나 포션으로 가득 차있을 상자들을 끊임없이 들고 나왔다.
“자, 이번이 마지막이다.”
“에휴…… 힘들다. 이젠 걱정 없지?”
마지막 한 상자를 쌓아 올리자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뒤로 쌓인 수십 개의 상자들. 타이탄이라는 놈들이 어느 정도의 경험치를 줄지는 모르지만 명상을 병행하면 오우거 정도만 줘도 충분히 레벨 업이 가능할 것 같았다.
“쓸데없이 대가리 내밀었다가 돌팔매질에 맞아 뒈지지 말고 웬만하면 방향 잡아서 손만 내밀고 쏴. 우린 간다. 리턴.”
타이탄이란 놈들이 계곡 아래를 빼곡히 메우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찌 방향을 잡는지 노하우 전수도 없이 그들은 매정하게 떠나버렸다. 흐음, 머리를 내밀지 말라라…….
“이게 좋으려나? 매직 애로우.”
추적 기능이 있는 매직 애로우는 방향을 잡는데 큰 도움을 줄 터였다. 역시나, 앞으로 뻗어나가던 마법의 화살들은 제각기 방향을 틀어 타이탄들에게 날아갔고 그 중 한발의 방향과 각도를 유심히 살펴 둔 후 그대로 손바닥을 내밀어 실험적인 공격을 날렸다.
“파이어 볼”
“우엉!”
적중했다. 어디에, 어떻게 맞았는지는 모르지만 맞기는 맞은 것이다. 그럼 이제 제대로 해볼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콰광-!
“웅.”
“?!”
좀 전과 달리, 타이탄의 소리보다 땅에 부딪쳐 폭발하는 소리가 먼저 들리는 순간 일이 틀어졌음을 느꼈다. 바보같이 공격을 받은 뒤 움직일 거란 생각을 못하다니!!
“우워어!”
상황을 파악하려 동굴 밖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 공격을 받은 타이탄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적으로 인식했는지 포효하는 타이탄. 헬 파이어가 바닥에 작열하면서 만들 낸 제법 큰 돌덩이들을 주워들고 동굴을 향해 돌팔매질을 시작했다. 이대로 입구가 막혀버리면 시작도 못해보고 끝나게 돼!!
“제길, 버스트 플레어, 파이어…….”
돌덩이가 날아오거나 동굴의 위쪽에 맞아 무너뜨리면 버스트 플레어와 파이어 볼로 상쇄시키는, 스피드 승부가 시작됐다. 한참의 접전 끝에 승리를 거머쥔 건 다행히 나. 버스트 플레어로 부서진 돌들이 그들의 손에 맞지 않을 만큼 작아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헥, 헥. 벌써부터 이러면 어떻게 레벨을 올려?”
비록 고개를 내민 탓이지만 한번 공격에 실패했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는데 연속으로 공격해서 마나가 떨어지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매직 애로우로? 그렇게 하다간 끝이 없을 게다. 회복 속도가 더 빠를지도 모르지. 그럼 자이언트 플랜트를 이용한 휩? 통하기야 하겠지만 조금 전 봤던 놈들은 검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한 마리도 채 죽이기 전에 베여 땔감으로나 쓰이겠지. 전체 공격을 이용한 치고 빠지기? 내가 마스터라서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다봤다가 돌에 맞아 죽거나 아래쪽 돌들이 범위 안에 들어가서 제 살 파먹는 격이 되겠지.
“으아아악! 짜증나. 물이라도 차있으면 걱정 없이…… 물? 맞아, 그거야!!”
잊고 있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물을 공급할 수 있는, 힐름 내 가진 자 몇 안 되는 마법이 내게 있다는 것을.
“하늘의 축복, 때로는 저주. 레인 폴. 거인 족을 말살시킬 심판의 비야, 마음껏 내려라!! 크핫핫핫”
손에서 뻗어나간 빛이 하늘에 다다르자 예외 없이 검은 비구름이 빠르게 생성되어 비를 뿌렸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나는 새로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대지와 타이탄들의 몸이 흥건하게 젖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어떤 마법으로 공격하느냐!!
“아무래도 체인 라이트닝은 각이 안 나올 것 같군.”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가는 체인 라이트닝을 쓰기 위해선 손을 밖으로 내어야 하는데 비가 오고 있으니 잘못하다간 라무 꼴 나기 쉬웠다. 그렇다고 데미지가 약한 콜 라이트닝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투덜거려봐야 이것밖엔 없겠군. 시동어만 외쳐도 된다는 것을 위안 삼을 수밖에. 콜 라이트닝, 콜 라이트닝, 콜…….”
쿠르릉 쿠릉-!
구름이 있어서일까? 5써클인 콜 라이트닝이 6써클에 맞먹는 박력을 과시하며 계속해서 내리꽂혔다. 그러길 30여 차례, 마나는 아직 남았지만 놈의 죽음을 확신하며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가 기겁을 하고 다시 안으로 몸을 숨겼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이 정도면 오우거 로드라도 죽었겠다. 할 수 없지, 마나 포션을 쌓아두고라도 죽을 때까지 갈겨대는 수밖에.”
물약 빨로라도 죽이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몇 개의 상자를 옮기는데 유독 한 상자의 무게와 소리가 다른 것들과 달랐다. 다른 것들은 옮기는 동안 포션 병들끼리 부딪쳐 챙챙 소리가 나는데 비해 그것은 단단한 무언가가 든 듯 쿵쿵거린다 랄까?
“오? 이것은…….”
[네가 한동안 들르지도 못할 거란 소리에 더 매지션의 도움을 받아 그 동안 새로 나온 마법서들을 넣었다.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다만 잘 활용해서 하루 빨리 마스터가 되어 돌아오길 비마. -거트-]
거트 형의 쪽지 아래에는 처음 보는 마법서들이 빼곡히 쌓여있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에 콘퓨, 그라비티, 리버스 그라비티…‥, 그리고 썬더!!”
맨 아래 깔린 것은 썬더란 이름의 9써클 마법서였다. 만일 이것이 콜 라이트닝과 같은 방식이라면…… 타이탄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썬더, 콘퓨, 그라비티…….”
떨리는 마음으로 모든 마법서를 펼쳐두고 익히기 위해 마법 이름을 한 번씩 읊조렸다.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스펠과 모습들, 이 마법들을 익혔다는 증거였다.
“썬더.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썬더!!”
한번 머리에 울린 것으로, 그것도 여러 개 중의 하나를 정확히 외울 만큼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동어를 먼저 말해 손바닥에 주문이 떠오르게 하고 컨닝을 해가면서 주문을 완성시켰다. 이것 역시 구름 덕에 파워 업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해 질만큼 밝은 빛을 내며 떨어진 벼락은 타이탄의 구슬픈 비명 소리를 계곡 가득 퍼트렸다가 이내 삼켜버렸다.
“꾸오오오오오∼.”
쿠르르르르릉-!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집어삼킨 천둥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계곡은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 사일런트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듯이.
“미친…….”
이번에야말로 죽었을 거라 확신하며 고개를 내밀었건만 놈은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하고 있을지언정 숨이 붙어있었다. 징한 놈들.
“콜 라이트닝!!”
다시 한 번 작열한 번개에 몸을 부르르 떨다 회색으로 물들어 가는 타이탄. 바퀴벌레보다 강한 그 생명력에 치를 떨었지만 마냥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었다. 죽은 건 겨우 1마리뿐이니까.
“내게 죽는 모습을 보이다니, 너흰 실수한 거야. 조금만 더 버티거나 하다 못 해 내 눈을 피해 죽기라도 했으면 포기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이제…… 씨를 말려주마!!”
순간, 타이탄들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이곳에 온 지도 어언 3주 째, 가끔씩 보급 겸 놀러오는 알테어, 에크만을 만날 때와 최소한의 현실 생활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사냥에 쏟아 부은 결과 오늘 접속했을 때의 경험치가 약 98%를 달리고 있었다.
“햇빛 받아 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군. 쳇,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썬더!”
이제 썬더의 스펠은 외우다 못해 입에 붙어버렸다. 또 한 놈이 죽을 때가 됐는데…….
“꾸오오오!”
정겨운 비명 소리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를 때 바닥에서 빛이 올라와 둥근 막을 형성하는, 본 적 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렇다면 드디어!!
“그대, 마법의 끝을 본 자여. 나, 레비스트로스는 그대의 깨달음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 가지 선물을 내리려 한다. 선택하라. 마법사의 이름을 이을 것인가, 새로운 길을 걸어갈 것인가.”
“마법사의 이름을 이을 경우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현자의 로브, 얇은 미스릴 실을 촘촘히 엮어 만든, 마법사에겐 최고의 방어구지. 마법에 대한 내성은 물론이거니와 착용자의 마나 효율도 극대화 시켜준다네. 이것으로 하겠는가?”
“흐음……. 궁수로서의 길을 걷는다면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에린 누나의 뇌궁의 영향으로 생각해봤던 궁수를 택할 경우 받는 아이템을 물었다. 뇌궁은 내 것이 아니니까.
“엘리멘탈 보우. 레벨이 오를수록 다양한 속성을 쏘아낼 수 있지. 고위 궁수의 능력을 미리부터 쓸 수 있는 대신 일반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마나 손실이 뒤따른다네.”
저걸 쓰면 초반 레벨이야 빨리 오르겠지만 재미도 없겠군. 무엇보다 뇌궁 정도의 위력도 아니고 고작 마나 애로우에 해당하는 위력이라니……. 그렇다면 어떤 걸로 전직을 하지? 모자란 HP와 힘을 위해 기사나 격투가 쪽으로? 지금까지 너무 급하게 온 것 같아 이번엔 좀 즐기고 싶은데…… 아!
“도둑, 아니 로그의 길을 걷는다면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매직트랩퍼즈 글러브. 그대가 쌓아 올리는 트랩 설치의 숙련도에 따라 최대 8써클까지의 마법을 담은 트랩을 만들 수 있게 될 걸세”
“8, 8써클까지!! 로그의 길을 걷겠습니다.”
“좋아, 이것으로 또다시 경지에 오르길 기대하지. 다시 만나세.”
아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있던 자리에 한 쌍의 장갑을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집어 들자 깨어지는 바리어. 그와 함께 난 몸을 날려 동굴 밖으로 뛰어 내렸다.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하늘을 대신하는 심판의 빛, 썬더 더블!!”
또다시 집채만 한 두 줄기의 번개가 내리 꽂혔고 이번엔 나도 그 범위 안에 들어있었다. 중첩된 데미지에 이번 공격까지 받고 회색으로 물드는 타이탄들. 지금의 난 ‘무적’이다.
“생각보다는 많군.”
특수한 아이템이 아닌 이상 바닥에 일정 시간 놓여있으면 사라진다는 원칙 때문에 그동안 놈들이 떨궜던 것들을 모두 회수하진 못했지만 몇 시간 동안 쌓인 것들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보통 이럴 때 먼저 챙겨야 하는 건 무기지!!”
‘무적’상태의 지속시간인 3분 안에 다 쓸어 담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워낙 몸집이 큰 타이탄들이라 무기 등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기에 공간이 남을지 걱정되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가장 돈 될 만한 무기류부터 챙기기!! 힘이 낮아 번쩍 들어 집어넣을 수는 없는 관계로 스트렝스 걸린 손으로 어떻게든 움직여 품에 넣는 작업이 반복 되었다. 입으로는 초를 세어가면서.
“2분 30초, 리턴!”
아직 몇 십 초의 여유가 있었지만 리턴이 발동되는 시간도 넣어야하고 잘못 세었을 경우를 대비해 서둘러 돌아왔다. 캬,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깥세상의 향기로고.
“일단, 전직부터 하는 게 낫겠지?”
성을 차지하고 숙소에 가서 침대에 이름을 새기지 않은 탓에 리턴으로 도착한 곳은 수도의 광장이었다. 곧장 성으로 향할까하다가 전직을 위해 먼저 찾은 도둑 길드. 역시 비인기 직업인지라 건물 안에는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계십니까?”
“소, 손님이다! 어서 오십시오. 뭘 도와드릴까요?”
먹잇감을 발견한 굶주린 맹수처럼 달려와 환한 낯으로 실실거리는 그의 태도는 정말이지 부담됐다.
“저, 전직하러 왔습니다.”
“호오? 그러고 보니 ‘마법의 끝을 본 자’셨군요. 정말 도둑의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아실 테지만 쉽지 않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그럼 여기 서류에 사인하시죠.”
전직이라 길래 그 길드의 마스터가 나와서 축복해주고, 조촐하게나마 의식 같은 걸 치를 줄 알았건만 달랑 서류에 사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능력치는 모두 그대로지만 레벨은 다시 1이 되었고 스킬 창을 부르면 마법사 쪽과 도둑 쪽으로 나뉘어 한번에 2개의 창이 나타났다.
“보물아, 기다려라!!”
“예? 뭐라고요?”
“아, 아닙니다.”
앞으로 내 게임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 줄 보물들을 생각하니 절로 말이 터져 나왔다. 그 탓에 옆에 있던 NPC가 미친 놈 보듯 쳐다봤지만……. 민망하군.
“받으세요, 기본 장비입니다. 최하급 녹슨 덫 5개와 낡은 단검 하나, 먼지 쌓인 흑의, 스킬 가이드 북 한 권.”
다 합쳐봐야 1실버도 안 될 것들. 스킬 가이드북을 제외하면 버려도 좋을 정도로 허접 했다. 성에 들렀다가 장비부터 새로 맞춰야겠군.
“크흠……. 요즘 길드 사정도 안 좋고, 돈.많.은. 누가 기부라도 해줬으면 좋을 텐데.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게 우리 내 인심이 아니었던가. 아아, 삭막해진 세상이여~.”
그는 기본 장비라는 것들을 주려다 말고 갑자기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공짜로 전직도 시켜주고, 가이드북도 주니까 기부금조로 돈을 내 놓으라 이건가? 하여간 이놈의 NPC들은…….
“길드 사정이 안 좋다니 제가 약간 기부를 하죠.”
“호? 흠흠, 아이고~. 이젠 날 동정하려 드는구나. 2골드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라고~.”
2골드를 꺼내 내밀자 슬그머니 내려 보더니 가식적인 곡소리에 힘을 실었다. 쳇, 얼마를 원하는 거야?
“이걸로도 모자라면 할 수 없죠. 지금은 그냥 가고 나~ 중에, 아주 나~ 중에 다시 들르도록…….”
“아니, 누가 모자라댔나? 그리고 액수보단 마음이 중요한 게지. 자, 가보게.”
마스터 급 기사를 훨씬 웃도는, 너무 빨라 보이지도 않는 스피드로 손위의 돈을 낚아 채간 그는 기본 장비를 떠안기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나 없는 동안 거트 형과 에린 누나는 진전이 있었으려나?”
그가 등을 돌린 것처럼 나 또한 등을 돌려 성으로 향했다. 여전히 웅장한 모습으로 평화로이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에번스 성, 들어가기 전 팔짱끼고 잠시 감상하고 있는데 성문 근처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건방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봐, 누가 접근해도 좋다고 했나? 너 같은 허접이 올 데가 아니니 당장…… 힉! 코, 콜로니스트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당장 문을 열겠습니다.”
한참을 거드름 피우다 알아차린 그는 기겁을 하며 성문을 열었고 들어가면서 거트 형이 사람 잘못 뽑았다는 생각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다른 놈들도 이렇진 않겠지?
“콜! 돌아왔구나.”
“마스터가 되긴 한 거냐?”
원래 성안에 있었는지 연락 받고 바로 돌아온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반가운 얼굴들이 줄지어 나왔다. 인사는 해야겠지?
“막을 수 없는 대지의 흡입력, 그라비티!!”
“어헉, 이게 무슨 짓…….”
강력한 중력의 힘은 아론의 몸을 짓누르는 것은 물론 그 주변의 땅까지 디그를 사용한 것처럼 움푹 파이게 만들어 버렸다. 힘 좋은 저놈이 쉽게 움직이지 못할 정도라면 상당히 강력한데?
“무슨 짓이긴, 원래 이런 대답은 몸으로 직접 들어야 하는 거야. 내려치는 거신의 해머, 자이언트 윈드 해머!!”
“쿠헉.”
가뜩이나 짓눌리고 있는 상황에서 바람의 해머를 내려치니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이 땅에 닿았다. 조금만 더하면 납작해진 개구리처럼 되겠군. 큭큭.
“잘 버티는데? 중첩된 힘도 버티나 볼까? 막을 수 없는 대지의 흡입력, 그라비티”
“꺽…… 살려…….”
중첩된 그라비티의 위력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바닥에 붙어버린 아론은 인정해주지도 않는 항복을 선언하며 버둥거렸다. 풀어주면 덤빌게 뻔한데 누가 놓아줄 줄 아냐, 이놈아.
“오빠, 그만하세요. 저러다 진짜 죽겠어요.”
데미지를 입기야 하겠지만 녀석의 HP를 생각하면 내 마나가 바닥나도 살아있을 텐데 린이 호들갑을 떨며 말렸다. 그 사이 꽤 가까워졌나 본데?
“쳇, 편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누군 좋겠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콜! 너 이놈!!”
역시나, 린을 봐서 풀어줬더니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확실히 더 손봐줄 필요가 있겠어.
“이번엔 안 당한다. 하압!!”
아론은 그라비티에 당해도 공중에서라면 더 빠르게 내려찍거나 검강을 날릴 수 있다고 판단한 건지 제법 먼 거리에서 도약했다. 같은 공격을 계속할 거라 여겼다니, 날 너무 무시하는군.
“세상으로부터의 단절, 리버스 그라비티”
“어? 어? 어?”
“지금 넌 우주에 있는 것과 같지. 내 마나가 바닥날 때까진 한 방향으로 힘을 줬을 때 멈추지 않고 날아갈 거야. 잘 가라, 윈드 볼.”
윈드 볼을 사용해 살짝 밀어주자 아론의 몸은 저 하늘 높이 잘도 올라갔다. 멀어질수록 마나 소모가 커지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버틸만하군.
“이거 못 내려놔? 너 내려가면 죽는다!! 야! 정말 이럴 거야?! ……사람 살려!!!”
강한 체, 온갖 협박을 하던 아론은 일정 높이를 넘어서자 저자세로 나왔다. 이쯤에서 내려 줘 볼까?
“내려오는 게 소원이라면, 까짓 거 들어주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깨를 으쓱여 주고 주입하던 마나를 끊자 약 70m 상공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사람 살류∼.”
“꺄아아악!!”
“그대에게 부유의 힘을 부여하나니, 레비테이션.”
70m는 너무 오버했던 건지 아슬아슬하게 마법이 걸리며 말 그대로 코앞에서 멈추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일순간 흐르는 정적, 이럴 땐 욕먹기 전에 선수 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덤빌래?”
도리도리.
“얌전히 있을 거지?”
끄덕끄덕.
이 정도 거리에서 공격한다면 상당량의 마나를 소모한 내가 불리했지만 방금 전 때 아닌 번지점프(?)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아론은 목 아프도록 고개를 움직이며 약한 모습을 보였다.
“뭐, 대충 이 정도지.”
“오오오오오!!!”
어느 새 구경나온 길드 원들의 탄성 소리가 성안 곳곳을 메워나갈 때 거트 형이 몸소 달려 나왔다. 군주로서 썩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끼리니 괜찮겠지.
“돌아왔구나!!”
“잘 있었어? 아니지, 그간 평안하셨사옵니까, 폐하?”
“이게, 오자마자 장난이냐? 하하하하.”
“하하하하.”
“별일은 없었지?”
“별일이랄 것까지야 없지. 예정대로 성을 가진 길드에서 독점 사냥터를 1개씩 양도받아 개방했고, 국왕 편에 섰던 디아블로 길드와 스피릿 길드는 견제만 해두고 있어. 각각 1번씩의 공성 전을 치렀는데 우리와의 관계 때문에 새로운 가입자가 거의 없는데도 잘 막아내더군. 하지만 탈퇴하는 사람 수가 늘어나서 내버려두면 몇 달 못 갈 것 같다.”
벌써 무너지진 않았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아직은 건재했다. 아직 해결할 문제가 남아있는데 사라지면 안 되지. 큭큭큭…….
“오마이스 영지 쪽 일은?”
“PK의 도시로 공포하고 나서 한동안 반발이 많았는데 극악한 PK들은 오히려 그쪽에서 처단하고 핸디캡을 감수해가며 사냥에 열을 올린 데다 이쪽에서도 사냥터 개방을 하니 이제 그럭저럭 자리 잡은 것 같애.”
나중엔 어찌될지 몰라도 아직은 기반이 약하니 blood에서도 몸을 사리는군. 하긴, 그들로선 처신이 제일 중요하지.
“음……. 잘 돌아가는 군. 그럼 에크만이랑이 오기 전에 한 가지 일을 마무리 지어놓자. 디아블로와 스피릿 쪽 일, 내가 맡아도 되지?”
“그야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상관은 없는데 어쩌려고?”
“그건 다녀와서 알려줄 테니까, 더 매지션, blood, 아마조네스, 베테랑에 연락해서 대신 권한을 양도받아 줘.”
“그래, 그럴게. 일단 들어가서 집무실 침대에 이름부터 새겨 놔.”
“오케이. 아참, 저 성벽 위에 있는 놈. 신참인 것 같은데 너무 무례하더라. 지금처럼 민심을 수습해야 할 때엔 독이 되겠어.”
할말 만 하고 애들을 따라 준비 된 집무실로 가는데 뒤에서 ‘제명’이란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이럴 땐 즉각적인 본보기용 처리가 제일이지.
“아, 니들을 위해 선물을 몇 개 가져왔지.”
“선물?”
밖에서 당한 것 때문에 볼이 불룩해져있던 아론이 선물이란 말에 눈을 빛내며 즉각 반응했다. 내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네 자루의 대검과 한 자루의 몰(maul). 타이탄들이 남기고 간 것이니 만큼 보통은 넘을 거란 생각이었다.
“이, 이걸 어떻게 들어!! 길이가 2m도 넘겠다.”
“그거야 내 알바 아니지. 베르한테는 좀 무리겠지만 넌 힘 빼면 시체니까 가능할 것도 같은데? 아참, 옵션 확인은 안 해봤으니까 각자 알아서들 하라고.”
“무책임한 놈, 확인.”
“확인.”
투덜거리며 확인 스크롤을 꺼내는 둘을 등지고 정들었던 장비들을 벗어 놓을 때 ‘쿵’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가 버무려져 고막을 흔들었다.
“이, 이거 정말 우리한테 주는 거 맞지?”
“음……. 하나씩만!”
원래는 여분까지 생각해서 두 자루씩 똑같이 나누어주려고 했지만 아론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표정, 역시 뭔가 있어!
“이거……… 정말 가져도 돼요?”
“물론이지. 능력치가 어떤데?”
“거인의 단검. 내구력 10만에 공격력은…… 오리하르콘 소드와 맞먹는데 강화시키면 훌쩍 뛰어 넘을 것 같다.”
“!!”
내구력이 10만이라면 내구력 손상이 제일 많은 아이언 골렘을 3333마리 잡아도 1이 남는데 거기에 공격력은 오리하르콘 소드를 뛰어 넘는다? 크기와 무게 때문에 비교적 단순한 공격밖에 못할 테지만 이건 정말이지…….
“심봤다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마디였다.
“무슨 일이야?!”
방안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거트 형이 밖에서 기다리던 여자 애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안 그래도 불러서 확인시키려고 했는데 잘…….
“꺄악!!”
“당장 나가!!!”
그랬다. 여자 애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한 이유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는데……. 난…… 벗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개망신이!
“흠흠, 화 풀어라. 진짜 못 봤다니까? 그치, 얘들아?”
거트 형이 달래보려 여자 애들의 동조를 구했지만 얼굴만 붉힐 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크아악!! 저 반응이 어딜 봐서 아무것도 못 보거야!!
“그래,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머리에 큰 충격을 받으면…….”
“정신 차려, 인마.”
넋이 나간 상태에서 중얼거림이 계속되자 아론이 ‘거인의 단검’을 휘둘러 검면으로 머리를 강타했다. 쓰읍, 저런 무식한 크기가 ‘단검’이라니 말도 안 돼!!
“크흠, 각 길드 장들과 연락해서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권리를 위임받아 놨다. 어쩔 셈이야?”
“이대로 대치 상태를 유지해봤자 서로 귀찮기만 하잖아? 합리적으로 관계 청산을 해야지.”
“화해하려고?”
“당연히! 아니지. 승자는 우린데 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겠어? 난 그들에게 받아야 할 합당한 대가를 받아내려는 것뿐이야. 쉽게 말해 전쟁 배상금이랄까? 그렇게 하면 상하관계도 확실해 질 테고 이후론 알아서 기겠지. 성 운영 자금 모자라지 않아?”
“그야…… 초기니까 그렇긴 하지. 세금으로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만큼 쓸 데도 많으니까.”
“그럼 몰은 형이 갖고 검 한 자루는 경매에 붙여서 자금을 마련해. 먼저 홈페이지 경매 게시판에 글을 올려서 최고 금액을 알아보고 그걸 시작가로 잡으면 될 거야. 몇 천대는 나올 테지.”
“!!”
“아참, ‘사신’ 자격 같은 건 부여 할 수 없으려나?”
“아, 있어.”
“그럼 부탁할게.”
“‘사신’ 수여. 목적은…… 교섭”
허공에 금빛 두루마리가 생겨나며 ‘사신’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좋아, 좋아. 이젠 벗겨먹는 일만 남았군.
“그럼 다녀올게, 좋은 소식 기대하라고. 텔레포트”
베르와 아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내 몫을 챙겨 두 개 남은 무기들과 나를 번갈아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젠 익숙해 질 법도 한데 말이야…….
“활기차군.”
제일 큰 3개의 영지 중 하나답게 우리와 디아블로의 관계 따윈 상관없다는 듯 마을 안이 북적거렸다. 하긴, 싸움나면 오히려 구경거리 생겼다고 좋아하겠지.
“이 정도 수입은 올려야 뜯어먹을 맛이 나지.”
그들과의 관계가 수평적, 대립의 관계였다면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제시 금액을 더 높게 잡도록 해주는 좋은 현상으로 보일 뿐이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향한 성문, 고용된 NPC병사가 ‘사신’임을 알아보고 길안내까지 자청했다.
“무슨 일이냐.”
오는 도중 만났던 디아블로 길드 원들에게 연락 받았는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보카치오가 뭣 씹은 표정으로 맞이했고 영주 집무실을 가득 메운 길드 원들은 경계를 한층 강화했다.
“얘기에 들어가기 전에 그대들과 함께 했던 스피릿 길드 장도 불러야 할 겁니다. 그대 혼자 결정하기엔 너무 큰 사안이라 생각되는군요.”
“……그렇게 하지.”
한 10분쯤 지났을까?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스피릿 길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하지만 굳은 표정엔 긴장한 빛이 역력, 싱글싱글 웃어줄수록 그 경도는 더해갔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교섭.”
두루마리를 펼치자 둘에게 금색 빛이 쏘아지며 교섭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아, 아. 일단 목부터 좀 풀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죠.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저번 공성 전에 대한 전쟁 배상금 때문입니다. 훨씬 쉽게 이길 수 있었는데 ‘누구누구’의 방패 때문에 저희 쪽 피해가 커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만큼의 정신적·물질적 피해 보상을 받아야겠다, 이겁니다.”
“피해는 우리 쪽이 훨씬 컸어!!”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죠. 중요한 건 승.자.의 피해랍니다. 무너진 성문을 고치는 데만도 돈이 상당히 깨지더군요.”
실제로 성문 수리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 우리 쪽 피해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돈 들었다는 게 중요한 거다.
“그건, 그러니까, 음……. 그래! 마지막에 우리가 막대한 돈을 들여 고용한 NPC가 남았으니 된 거잖아!!”
“오호? 그때 갑자기 NPC가 쏟아져 나오기에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런 뒷 공작이 있었군요? 이거, 정신적 피해가 더 커집니다? 그리고, 그 NPC들은 거의 다 잘라버리고 그 자리에 유저를 채워 넣었답니다.”
“그래서, 얼마를 원하는 거냐?”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보카치오가 이마에 한 줄 주름을 더 만들어 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 여유라? 돈 좀 있다 이거지?
“1천 골드.”
“힉!”
“그 정도라면…….”
“……씩 5개 길드니까 도합 5천 골드 되겠습니다.”
스르릉-!
팔짱끼고 앉아있던 보카치오의 몸이 튕기듯 달려 나와 목에 칼을 겨누었다. 그에 반응해 방안의 사람들도 제각기 실드 캐스팅과 도주로 차단, 확실한 ‘위협’을 했다. 하나, 예전에도 말했듯이 거래의 최선은 ‘협박’이지.
“아, 명색이 master of castle의 주인인데 똑같이 받는 건 말이 안 되는군요. 도합 6천 골드. 신속히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액수가 액수인 만큼 3개월 할부까진 해드리죠.”
“뭘 믿고 까부는 거냐? 레벨 99에서 죽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지 않았나?”
“훗,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습니다.”
“어째서 확신하지?”
“두 가지의 큰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먼저 첫째는 제가 ‘사신’의 자격으로 왔으니 죽이면 영지 성향이 ‘적대’로 변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죽여도 레벨다운 따위가 없기 때문이죠. 파이어 볼, 더블.”
손바닥 위로 떠오른 두 개의 불덩이를 본 그는 안색이 파리해지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서, 설마 그새 마스터가……?”
“빙고! 이제 상황 파악이 되셨습니까?”
“보카치오님,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작은 편에 속하는 성을 차지해 상대적으로 빈곤한 스피릿 길드 장은 호들갑스럽게 안절부절못했고, 보카치오는 뭔가 계산하듯 이마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백날 계산해봐라, 헛수고일 테니까.
“좋다. 1개월에 2천 골드씩 나누어 내도록 하지. 대신, 우리에게 걸고 있는 견제를 풀어라. 공식적으로 적대가 아님을 선언하고, 상호 불가침을 약속한다면 원하는 데로 해주겠다.”
적대가 아님이 알려지면 새로운 길드 원이 몰려들 테고, 3개월 후엔 세력이 확대되어 다시 세금으로 돈을 긁어모을 수 있다는 계산인 건가? 모아둔 돈이 꽤 되나보군.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더니…….
“그렇게 하죠. 계약서를 써야겠으니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시고, 문서가 작성되는 동안 2천 골드를 모아주십시오. 첫 지급 일은 오늘입니다.”
“그러지.”
“안 돼! 난 못해! 차라리 배 째!!”
“따라오시지요.”
거의 울상이 되어 현실 도피하던 스피릿 길드 장은 보카치오에게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 나갔다. 쯧쯧, 줄 한번 잘못 섰다가 기둥뿌리 뽑히게 생겼군.
“내용은 2천씩 석 달 받고, 대신 적대 아님을 선포, 거기다 상호 불가침이라…….”
“다 쓴 건가?”
“뭐, 대충은 요. 읽어보시고 세 장 모두에 사인해 주십시오.”
“크흑, 내 피 같은 돈.”
계약서를 읽어보던 보카치오가 2000이라 적힌 부분에 스피릿 700, 디아블로 1300이라고 덧붙인 것 이외에는 수정 없이 계약이 성사되었다. 이 돈을 누구한테 먼저 주는 게 좋을까?
“그럼, 한 달 후에 찾아뵙죠. 리턴.”
시야를 가리는 빛 너머로 테이블을 힘껏 내려치는 스피릿 길드 장과 길드 원들에게 입 단속시키는 보카치오의 모습이 잠깐 잠깐 보였다. 단순한 것들, 내가 이렇게 허술히 끝낼 것 같더냐? 큭큭큭큭.
“에…‥ 에?”
도착한 곳은 분명 내 집무실이었는데 비정상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거트 형은 그렇다 쳐도 길드 장들은 누가 부른 거야? 아직 첫 수확 금을 누구에게 줄지도 안 정했는데.
“오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자금 적으로 충분한 여유를 가진 더 매지션을 제외한 네 곳의 길드 장들은 눈을 빛내며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이거, 이거.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어디 말이나 하겠나…….
“잘됐습니다. 자세한 건 잠시 후에 알려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거트 형, 나 좀 봐.”
“그래, 실례하겠습니다.”
방안에 그들을 남겨두고 거트 형만을 복도로 불러냈다. 내가 골똘히 생각하며 자신만 불러내자 뭐가 잘못된 거라 생각했는지 들떠있는 표정을 굳힌 형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결정했어.
“뭐…… 잘못됐어?”
“형, 요즘 에린 누나랑 잘돼가?”
“으응? 아니, 뭐……. 그냥 그렇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지만 밀어주기로 해서인지 어정쩡하게나마 답해줬다.
“그럼, 크게 점수 딸 수 있는 방법 알려줄까?”
크게 떠진 눈은 ‘나 관심 있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눈 튀어나오기 전에 말해줘야겠군.
“공성 전!”
“공성 전? 설마 디아블로를 치자는 거야?”
“스피릿이든 디아블로든 아무 곳이나”
“하지만…… 그들을 치려면 비용으로 보나, 레벨로 보나 우리가 도와야 할 텐데 쉽게 받아들일까? 굳이 밀림으로까지 들어갔던 앤데…….”
확실히 지금 아마조네스의 전력으론 스피릿의 내성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전멸 당할게다. 그렇다고 우리가 차려다 바치는 밥상은 자존심 상해서라도 안 받을 테고, 힘이 있다 해도 밀림으로까지 들어갔던 에린 누나가 공성을 결심하긴 쉽지 않겠지. 공성에 들어갈 비용도 감당하기 어렵겠고. 하나.
“천 골드”
“응?”
“전쟁에 참여했던 각 길드가 받을 보상금이야. 그 정도면 돈 문제는 거의 해결 됐다 봐도 무방할 테고, 모자란 전력을 채우면 그만이지. 에린 누나는 내가 설득할게. 어때, 해볼래?”
잠시 동안 말없이 서있던 거트 형은 와락 껴안을 듯 달려들며 고마운 마음을 표시했다.
“콜,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아무리 기뻐도 남자가 껴안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남자의, 그것도 30대의 포옹은 달갑지 않았기에 슬쩍 피해주고 닫았던 문을 살짝 열었다. 처음 보이는 건 초조하게 좌우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베테랑의 길드 장. 아무래도 나머지 한 곳은 베테랑으로 정해야 할 것 같다.
“일단은 조용히, 알지?”
“물론이지!!”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요. 바로 시작하죠. 모두 이 종이를 봐 주십시오.”
계약서를 꺼내 가운데 테이블에 올려놓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천 골드란 대단한 금액에 미리 언질을 받은 거트 형과 로즌 크랜츠, 파크리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고 에린 누나와 이름 모를 베테랑 길드 장은 크게 동요했다. 에린 누나야 그렇다 쳐도, 저 인간은 성주인데 반응이 왜 저래? 작은 성은 벌이가 시원찮은 건가?
“흠, 흠. 혹시 계약 내용에 대해 궁금하신 분 있으십니까? 예, 로즌 크랜츠님. 말씀해주십시오.”
계약 내용에 대해 질문을 받겠다하자 먼저 로즌 크랜츠가 살짝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무슨 얘기일 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아시다시피 저희의 주력은 어쌔신, 여기 적힌 대로 상호불가침을 지킨다면 사냥감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만…… 요즘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 둘 말고는 PK를 하지 않고 있으니 타격이 적지 않을 겁니다.”
“흐음, 그 점에 대해선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하나, 석 달만 기다려주십시오. 좋은 사냥감을 만들어 드리죠.”
순간, 그와 나의 눈이 마주치며 짧은 대화가 오갔다.
“좋습니다. 기대하죠.”
“저, 저기요!”
로즌 크랜츠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서자 이번엔 베테랑 길드 장이 손을 번쩍 들고 발언권을 요구했다. 갑자기 초등학교 학급회의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예, 말씀해주십시오.”
“여기 보면 한 달에 2천 골드, 즉 한 달에 두 길드씩 돈을 받게 돼있는데, 순서는 어떻게 되는 거죠?”
혹시라도 미뤄졌다가 못 받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는지 그는 손을 번갈아 주무르며 애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제발 먼저 받게 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듯.
“다른 분들이 허락하신다면 아마조네스와 베테랑 길드가 처음에 받는 걸로 하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하시죠.”
“저희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럼 결정 났군요. 받으십시오, 미스릴 코인 10개씩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받아온 주머니에서 10개의 미스릴 코인을 꺼내 나눠주자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리곤 얼른 가서 자랑하고 싶은 듯 또다시 안절부절못했다. 저런 모습 어디에서 카리스마를 느껴 모여든 건지 베테랑 길드 원들의 상태가 자못 궁금해졌다.
“그럼 다른 분들께는 다음 달 오늘, 천 골드씩 지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쯤에서 자리를 깨죠. 아, 아마조네스 길드 장님은 잠시 남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리턴.”
“다음 달에 뵙죠. 리턴.”
“저도 이만, 리턴.”
셋이 사라지자 조금은 껄끄럽던 느낌이 부드럽게 풀렸다. 아직도 처음 만져보는 큰돈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에린 누나, 뇌궁은 훨씬 엄청난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본 건가?
“누나!”
“아, 그래. 아참, 마스터가 됐다면서? 늦었지만 축하해.”
그새를 못 참고 쪼르르 달려가서 말한 건가? 거트 형도 못 말리겠군.
“고마워요. 그보다 지금부터 거트 형이 누나한테 남아달라고 한 이유를 설명할 테니 잘 들어주세요.”
“이유?”
“흠흠, 아까 계약서는 봤지? 6천 골드면 현금으로 쳐도 6천만 원, 정부에서 현금 거래를 인정한 뒤 힐름이 내린 조치로 시세 변동도 없을 테니 엄청난 돈이지. 아무리 2개 성이 공동으로 부담을 해도 한동안은 재정난에 허덕일 거란 말이야? 그때를 틈타서 3달째 되는 날 그들을 몰아내 줬으면 해. 불가침이라고는 해도 커다란 불안 요소임엔 변함없거든.”
“제가요? 하지만…….”
‘몰아 낼 거야.’도 아니고 ‘몰아내 줬으면 해.’가 자신에게 부탁하는 말임을 깨닫고 소스라치며 놀란 에린 누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 없음을 내비쳤다.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요. 물론 지금의 아마조네스로는 무리겠지만 부족한 전력은 메우면 그만이니까. 소모되는 비용도 성을 얻으면 쉽게 보충할 수 있을 테니 천 골드에서 투자하는 셈 치면 될 거고. 또 질문 있어요?”
“음……. 맞다, 분명 상호 불가침 목록에 우리도 끼어있었잖아? 그렇게 되면 계약 위반 아니야?”
안 그래도 말하려던 부분을 콕 집어내는군. 제법 예리한데?
“물론 그렇죠. 하지만 계약 위반 같은 걸 해서 이미지 버리는 짓 따위는 안 해요. 그래서 말인데…… 길드를 재창설해주세요. 계약서에 명시 되어 있는 건 ‘아마조네스’, 그러니까 ‘아마조네스’만 아니면 되잖아요? 다른 길드들이야 이미 성을 가졌기 때문에 해체했다간 성 주인 자리가 고스란히 날아가 버릴 테지만 아마조네스는 큰 무리 없겠죠? 물론 오랫동안 사용해 온 이름인 만큼 애착이 가겠지만 어차피 밀림이 아닌 대륙으로 나오면 아마조네스는 아마조네스가 아니게 되니까요.”
“…….”
아무리 자신들에게 큰 이익이 돌아오는 일이라도 너무 갑작스럽고, 몇 가지를 버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에린 누나가 허락하는 편이 우리로서도 이득인데 말이야…….
“역시 안 되겠어. 정들었던 밀림을 떠난다는 것도 그렇고, 불가침 조약 때문에 동맹 없이 싸워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길드 원의 대부분을 내보내야 하잖아? 게다가 중앙 대륙에 진출한다는 것도 썩 내키지 않고…….”
“아아, 그것 때문이라면 걱정 말아요. 어차피 성을 얻으면 최소 2, 3개 정도의 독점 사냥터를 가질 텐데 지금의 성 주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곳을 개방시키고 밀림을 통째로 먹겠다고 선언하면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좋아할 걸요? 안 그래도 인적이 드물던 곳이니까. 길드 원들도 퇴출시킬 필요 없어요. 공성 때는 ‘편법’을 사용할 거고, 탈환전을 벌이면 더 재미있어 지거든요. 그리고 누나, 밀림으로 들어갔던 이유가 제멋대로고 이기적인 대형 길드들 때문이랬죠. 대충?”
“응.”
“그러니까 더더욱 해내야 하는 거예요. 요즘에야 피해가 커서 자제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 들려오던 놈들의 횡포에 대해선 알고 있죠? 3개월 후 힘을 회복하면 다시 활개치고 다닐 테고, 불가침 협정을 맺은 우리가 제약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놈들 세상이 될 거라구요. 놈들 대신 누나가 성을 차지해서 선정을 베풀고, 음…… 여성 유저의 권익 같은 걸 보호한다던지 하면 누나한테도, 유저들에게도 좋은 일이잖아요?”
설득이 먹혀 들어갔는지 망설이던 표정이 점점 결의에 찬 모습으로 변해갔다. 왠지 만화 영화에 나오는,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해내겠다 결심하는 히로인의 모습 같은데? 히로인치고는 나이가 좀 많지만. 킥킥.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다니, 고마워.”
“아아, 인사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거트 형이에요. 전 앵무새처럼 말을 옮겼을 뿐이거든요.”
거트 형에 대한 호감도를 높여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돌아서며 눈짓하자 어색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섰다.
“아.하.하. 녀석이, 비밀로 해달라니까 말해 버렸네.”
“오빠,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 당장 결정 내릴 순 없고 길드 원들의 의견을 들어본 다음 결정할게요. 괜찮죠?”
“그래, 물론이지. 아직 시간은 넉넉하니까 맘 편하게 가져.”
모르긴 몰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10%를 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다시없는 기회니까.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면…….
“입단속, 알죠?”
“응, 그건 걱정 마. 이만 가볼게요. 오빠.”
“그래, 너무 부담 갖진 말고!”
에린 누나가 싱긋 웃으며 돌아가자 거트 형은 제자리에서 헤벌쭉 입을 벌리고 멍하니 굳어버렸다. 넋이 나가셨군, 넋이 나가셨어.
“정신 차려! 결혼이라도 하면 마님과 머슴이 되는 거 아닌가 몰라?”
“겨, 결혼?”
“뭘 그렇게 놀라? 형 나이에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결혼을 전제로 하는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 직접 들으니 쑥스럽잖아”
“으이그.……. 그런데 나 없는 동안 그 인간들에게 연락 오거나 하지 않았어?”
“그 인간들? 아아, 알테어랑 에크만? 요즘 통 못 봤는데.”
요즘 통 보이지 않았다라……. 그러고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동굴에 찾아오다가 요새 발길이 끊겼지. 뭔가 일이 생긴 건가? 제발 큰일이어야 할 텐데.
“좋아, 애들 좀 모아줘.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오케이, 아까 무기 시험해 본다고 우르르 몰려나갔으니까 부르면 금방 올 거야. 귓속말, 아론.”
애들이 돌아올 동안 거금을 치르고 얻어왔던 스킬 가이드북을 꺼내 정독을 시작했다.
“스틸, 하이딩, 단검 던지기, 위험 감지, 트랩 설치…‥ 이거, 레벨 올리는 데 쓸 만한 건 거의 없잖아?!”
고작 단검던지기나 위력 약한 트랩으로 50이나 넘길 수 있을지 걱정되면서 낯빛이 흑빛으로 변해버렸다. 쳇, 이렇게 되면 마법 트랩 연쇄 폭발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다녀왔습니다∼.”
“한참 재밌게 놀고 있는데 왜 부른 거냐?”
‘거인의 단검’이 마음에 들었는지 정성스레 검면을 닦으며 투덜거리는 아론, 좋은 걸 줘도 고마워하는 건 받을 때뿐이라니까?
“나, 떠난다.”
“네?!”
“엥?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갑작스런 발언에 아론, 레이를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라며 방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저놈들이랑 너무 오래 논건가? 꿈쩍도 않는군. 쳇.
“길드를 떠난다는 건 아냐, 다만 길드 표시를 감추고 혼자 다니겠다는 거지.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우린 그 동안 너무 급하게, 앞만 보고 달려왔잖아? 그래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새 클래스를 키워 보려고. 두 번째 클래스로는 못 가본 곳도 가보고, 게임을 즐겨보고 싶어. 물론, 성에 일이 생기거나 내 도움이 필요할 때면 한걸음에 달려 올 거야. 실컷 일만 벌여 놓고 나만 쏙 빠지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한데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도움을 안 받겠다니, 전직 후엔 필요 경험치가 두 배인 걸 알고 하는 소리냐?”
“물론, 그래도 마법이란 보조가 있으니까 할 만하겠지.”
“아참, 전직은 어떤 클래스로 하신 거예요? 기사? 격투가?”
마스터하고 돌아온 지가 언젠데 참 빨리도 물어본다.
“로그.”
“로그요? 에휴, 오빠도 고생문이 훤하네요.”
로그로서는 선배(?)인 세르가 안타깝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 정도란 말인가?
“뭐, 뭐 어때서. 마스터 레벨에 오른 로그도 몇 있잖아?”
“있기야 있죠. 문제는 그게 달랑 다섯 명이라는 것과 그들 중 셋은 마스터한 스킬이 네댓 개뿐이라는 거죠. 나머지 둘도 예닐곱 개가 고작일 걸요? 로그는 레벨 올리기도 힘들지만 스킬 올리기는 더 힘들거든요. 사냥에 잘 안 쓰이는 게 대부분이다 보니……. 스킬을 몽땅 건드려 보실 거면 한 1년은 죽었다 생각하세요.”
일, 일 년씩이나! 마법처럼 상성이 있는 것도 아니니 꼼짝없이 노가다를 해야 한다는 소린데…… 죽었다.
“그래도 도움을 안 받을 거냐? 그냥 로그로 전직할 때까지만 키워달라고 하는 게 어때?”
“아냐, 그래도 해보겠어. 돈을 엄청나게 쳐 발라서라도 끝장을 보고 만다!!”
“……그런 걸 보고 돈지랄이라고들 하지. PK들하고 참 재미있게 놀겠구나. 매번 얼굴도 바뀌겠다, 아주 재밌겠어. 가끔 구경 가도 되지?”
“…….”
쳇, 이놈이 언제 이렇게 말빨이 늘은 거지? 그나저나 멍청하게도 얼굴 가리는 생각을 못했어. 인피면구를 계속 썼다간 새로운 친분 관계를 만들 방법이 없고…… 어쩌지?
“아, 생각해 보니 저번에 누가 가면이란 걸 팔기에 하나 사뒀는데 그걸 쓰면 어때요? 얼굴이 가려지면서 특징도 있고, 착용자가 원하지 않는 한 강제로 벗기려 해도 안 벗겨진다던데…… 생긴 건 좀 이상하지만 시야가 가려지지도 않는대요.”
“그런 게 있어? 어떻게 생겼는데?”
“전체적으로 흰색 가면인데 입과 눈이 찢어진 것처럼 생겨서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저녁에 보면 깜짝 놀랄 것 같은 모습이지만 자주 보면 괜찮겠죠.”
다행히도 린이 금세 해결책을 내놓았다. 가면이라…… 처음에야 거부감을 주겠지만 이리저리 둘러대면 괜찮겠지.
“그게 좋겠다. 지금 가지고 있어?”
“네, 여기요.”
린이 품에서 꺼내준 가면을 보니 살짝 거부감이 들 것도 같았지만 그럭저럭 쓸 만은 할 것 같았다. 받은 즉시 착용하니 인피면구와 비슷한 느낌, 하지만 이 정도의 이질감은 며칠 안에 익숙해 질 것이다. 크기와는 달리 시야가 방해되지 않고, 제법 유용하군.
“그럼, 언제 떠날 거냐?”
“지금!”
“그래, 그래. 어련하시려고. 처음엔 어디로 갈 건데?”
“그걸 알려주면 의미가 없지. 귓속말은 열어둘 테니까 무슨 일 생기거나 심심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자주 놀러 오셔야 돼요?”
둘을 제외한 모두가 조금은 침울해져 있는 상태에서 린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르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자주는 못 오겠지만 근처에 올 일이 있거나 시간 남을 땐 한 번씩 들를게. 자, 그럼 이제부터 짐꾼을 차출하겠습니다. 드라이저, 레이를 제외한 남자 분들은 집무실에 쌓아둔 제 짐들을 최대한 많이 들어주세요.”
죽을 때나 귀환할 때마다 이리로 돌아올 수 없는 노릇이기에 이 방을 버려야했다. 그러기 전에 해야 할 가장 큰일은 짐 옮기기!! 귀찮아서 대신 옮겨다 놓아줄 것을 부탁했던 온갖 잡동사니 아이템들을 다시 창고에 맡겨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너 대신 오마이스 영지에 있던 거 옮겨놓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걸 또 옮겨? 창고지기한테 바로 가는 텔레포트 스크롤도 없단 말이야!!!”
아이템 창에 넣으면 별 무게를 느끼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음에도 아론은 끝까지 투덜거려댔다. 저거 확 거인의 단검을 뺏어버려?
“걱정 말고 기다려봐. 창고 좌표가…… 여기 있군. 공간의 흐름을 따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조합, 워프 게이트.”
에크만이 종종 보여줬던 워프 게이트. ‘한눈에 보는 세상의 좌표’라는 책에서 좌표를 찾아 강하게 되새기며 사용하자 그곳으로의 푸른 빛 길이 뚫렸다.
“자, 모두 따라 들어와.”
처음 보는 마법이라 쭈뼛쭈뼛 거리며 서있는 아론들에게 시범 보이듯 먼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이동주문을 쓸 때처럼 눈이 부시지 않고도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저건 뭐야?!”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
신기한 듯 소리치는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NPC에게 다가가 가진 물건을 모두 넘겨주자 조심스레 게이트에 들어온 아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가져온 것들을 받아 다시 NPC에게,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적지 않은 마나가 소모됐지만 비교적 쉽게 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다.
“이제 가볼게.”
“뭐? 이대로 그냥 가려고?”
“그래, 괜히 다시 들어갔다간 오늘 내로 가기 힘들 것 같아서.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여자 애들한테는 잘 좀 말해 주라. 아참, 침대에서 이름 지우는 것도 잊지 말고.”
“그래, 대신 연락은 자주해라. ‘그때’는 잊지 않고 오는 거지?”
“당연하지. 마나 다 떨어져 간다, 빨리 들어가”
“응, 나중에 보자!!”
등 떠밀어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여보내고 바로 공급하던 마나를 끊어버렸다. 이크, 주위의 시선부터 피해야겠군.
“텔레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