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크로반 최후의 날 (17/43)

크로반 최후의 날

“진형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각 조는 이상 없는지 체크해서 보고하도록.”

공성을 하기로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각 길드가 소집되었다. 나한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가 뭐야?”

“이번엔 내가 알아서 해볼 테니까 구경만 해. 흠흠.”

아무런 이유 설명도 없이 자신 있다 장담한 거트 형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서둘러 준비하느라 엉성한 단상 위로 올랐다.

“본성을 치기 전에 그대들에게 한 가지 알릴 것이 있다. 알리지 않아도 될 테지만 어차피 이번 일이 성공하면 알게 될 테니 말하는 편이 좋겠지. 우리 길드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자들이 매일 인피면구를 사용해서 이상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쉽게 가까이 하지 못 했을 수도 있을 테고. 지금, 마지막 결속을 다지는 의미에서 본 모습을 보여주겠다. 시간이 없으니 소개는 한 사람으로 끝내지. 사라졌던 마법사 최강자, 콜로니스트다!!!”

“허억!”

“그, 그럼…….”

“우리가 라스트?!”

웅성웅성-!

아마조네스와 더 매지션의 일부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동요가 없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와아아아아아!!!”

누명이었음을 알리는 공지의 효력인지 아무런 반발이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아니, 오히려 환호했다. 적으로 만났으면 모르되 아군이 되었으니 명성만큼의 몫을 해줄 거란 기대겠지?

“조용, 조용!!”

거트 형의 외침에 잘 훈련된 병사처럼 웅성거림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과연 오합지졸은 아니란 거군.

“이 싸움은 단순히 우릴 엿 먹인 NPC에 대한 복수로 시작 됐지만 힐름 내의 평화와 안녕을 지키는 초석이 될 것이다. 이런 말하기는 나도 낯간지럽지만, 묻겠다. 정의의 사도가 될 준비는 됐나?!”

“예!”

“자신의 무기를 앞으로 내밀어라, 그리고 맹세하라. 정말 할 수 있겠나!!”

“예!!”

사기충천한 모습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든든했지만 갑자기 엄습해오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준비해 놓은 라무의 봉인석을 만지작거리며 안정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시간을 앞당긴 이유는 혹시 새어나갔을지 모르는 정보의 허를 찌르기 위함이거니와 현재 수도에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가 우리의 모습을 가려줄 테니 마법사들은 물 계열의 마법으로 준비하도록. 그럼 출발이다!!”

“매스 텔레포트.”

‘비’라는 소리에 하마터면 만지작거리던 봉인석을 떨어뜨릴 뻔했다. 알아서 한다며 큰소리치던 게 고작 비에 몸을 숨기는 거라니!! 기습의 묘를 살려 어느 정도의 효과는 보겠지만 크나큰 전력 손실임에 틀림없었다.

“제길…….”

이미 장내의 모든 인물들이 이동 중에 있는지라 말릴 수도 없었다. 눈 아픈 흰 빛이 사라지자 보이는 웅장한 성. 예정대로 궁수들은 화살을 날리고 실드 파이터는 방패를 들어 마법사를 보호했으며 기사들과 마법사는 성문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엥?”

끼이익 ‘쿵’소리를 내며 저항했어야 할 성문이 어이없게도 ‘끼이익’이란 소리와 함께 열려버렸다. 그렇다고 적이 나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 흔한 NPC병사 하나 없다는 게 큰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일단 후퇴!!”

안을 살피던 기사들이 되돌아오고 주위를 경계하고 있을 때 약속한 구석에서 로즌 크랜츠가 길드 원들을 이끌고 진입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리곤 대답도 듣기 전에 출발, 카멜레온처럼 주위와 동화되는 색의 옷과 하이딩으로 우리편의 눈마저 속이며 무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함정이어도 할 수 없다, 가자!!”

우리 편 진형의 모습은 레이지, 베테랑 할 것 없이 뒤섞인 전사들이 최전방과 후방을 맡고 중간에 보호받아야할 마법사와 프리스트들, 측면에 약간의 기사와 아마조네스가 나뉘어 맡는 전형적이면서도 실속 있는 것이었다. 설사 공격을 받는데도 큰 문제없겠지.

“마법사들은 언제라도 쓸 수 있게 캐스팅을…… 으악, 뭐야?!”

“검강.”

“폭강.”

“내려치는 거신의 해머, 자이언트 윈드 해머”

“내려치는 거신의 해머, 자이언트 윈드 해머”

진형을 최대한 흐트러뜨리지 않고 반쯤 이동할 무렵 성벽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있던 기사와 마법사 명 몇이 튕기듯 일어나며 ‘성문을 무너뜨려’버렸고, 갑작스레 떨어지는 돌덩이들에 그 밑을 지나가던 후방 보조계열(마법사, 프리스트등)들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아론!! 괜찮냐?!”

“아직은.”

“조금만 기다려, 내가 뇌궁으로…… 젠장!!”

뇌궁을 가지고 있는 에린 누나가 반대편에 있었다. 믿을 만한 드라이저나 더 매지션의 수뇌부도 모두 이쪽에 있는 상태. 뇌궁의 위력에 반해 한번 써보고 도망가 버릴 확률이 너무도 많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와아아아아아!!!”

돌덩이 너머와 뒤쪽에서 동시에 적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 크기는 귀가 멍멍할 정도. 적지 않은 수임을 알리는 증거였다.

“이쪽은 NPC개떼다. 못 도와줄 것 같으니 알아서 해!!”

“제기랄…….”

이번엔 함성대신 병장기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워갔다. 이런 식으로 전력을 분산시킬 줄이야.

“이제 콜로니스트도 한 물 갔군. 겨우 이 정도 미끼에 아가리를 들이밀다니.”

“미끼라면…….”

“기후조절 마법 중 하나인 레인 폴. 이깟 비에 몸을 숨기는 것 따위의 생각을 진짜로 하다니, 보통 실망이 아니야”

거드름을 피우며 다가오는 디아블로 길드의 수장, 보카치오. 후방에 배치된 적은 수의 기사들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건가?

“아쿠아 캐논!!”

“위력도 없는 이딴 마법은 무섭지 않다, 이거야!!”

한 점 파괴력이 강한 전격의 힘도, 폭발력이 최고인 화염의 힘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법사란 존재는 한없이 약한 것이었다. 웬만한 마법은 검강에 의해 두부 썰리듯 잘려나갔고 그나마 강한 주문을 외워볼라치면 어김없이 날카로운 쇳덩이들이 위협했다. 이제 끝인가?

“미소 짓게 하는 따스한 봄날의 햇빛, 파인(fine).”

혼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파크리트의 손에서 뻗어나간 빛이 하늘에 닿으며 순식간에 비구름을 몰아내 버렸고 화염계 마법을 억제하던 비도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그래봐야 젖은 상태이니 전격계는……!!”

“반격 시작이다, 드라이!!”

“드라이!”

길드 장인 파크리트를 따라 더 매지션 전원이 ‘드라이’란 시동어를 외치자 리턴 스크롤을 사용한 듯 발끝부터 작은 불꽃이 몸을 휘감아 올라오며 옷이 모두 말랐다. 땡볕에 말린 이불처럼 말끔한 모습. 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공격으로 이어갔다.

“파이어 볼”

“드라이”

더 매지션의 반수는 자신이외의 동료들에게 똑같이 드라이 마법을 시전 해줬고 그 사이 나머지 반절은 둘씩 짝을 지어 기사들을 공격해 나갔다. 보통의 정직한 방법이라면 검기에도 쉽게 막힐 파이어 볼이지만 검과 맞닿기 전 서로 부딪치며 폭발을 만들어 냈고, 충격파까지 갈라 버릴 수 없는 기사들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그래봐야 파이어 볼이다. 겁먹지 말고 몰아 붙여!!”

계속해서 밀려나는 길드 원을 보며 보카치오가 고래고래 소리치자 기사들은 마지못해 달려 나갔고, 대책 없이 뛰어드니 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두 개의 파이어 볼이 합쳐지기 전에 해치워보려 했다. 하지만 타이밍을 놓쳐 직격으로 맞거나 코앞에서 충격파에 나뒹굴기 일쑤였고 어쩌다 정확히 겹쳐지는 순간 검을 밀어 넣으면 양쪽으로 갈라지며 동료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타이밍에 익숙해지지 못한다는 건…….”

“매번 주입하는 마나량을 달리해서 파이어 볼의 크기에 변화를 주니 타이밍이 어긋날 수밖에요. 슬슬 전격계 주문사용도 가능할 것 같은데 빨리 끝내고 저쪽을 돕죠.”

“강기다, 강기를 쏟아 부어!!!”

전격 계열 주문으로 전세 역전의 굳히기에 들어가려는데 상대가 강기 난사로 대응을 해왔다. 다시 전세는 재역전. 얼마 남지 않은 기사들이 맞대응을 해보지만 절대적인 인원수의 부족으로 제 몸 하나 간수하기 바빴고 마법사와 프리스트들은 중첩된 실드에 몸을 맡겨 시간을 끌었다. 마나량이 부족한 저들은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질 테니까.

“대가리를 친다, 윗대가리를 집중 공격해!!”

보카치오는 다른 사람들을 견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두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우리가 있는 실드를 공격했다. 한두 명도 아닌 십 수 명이 몰아치니 근 열 겹에 이르던 실드도 순식간에 두 겹 남짓으로 변해버렸고, 바깥쪽의 실드는 그나마도 균열이 가려하고 있었다.

“감히 내 먹잇감에 손대려 하다니. 썩 꺼지지 못해!!! 체인 라이트닝!!”

“브레스 오브 파이어!!”

다른 실드에 숨어있는 사람들이 기회를 봐서 도와주기만 기다리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막강한 범위 마법 두 개가 펼쳐지며 아군의 실드와 상당수 적군의 목숨을 거두어가 버렸다. 다 좋은데 ‘먹잇감’이라는 것은……?

“에크만, 알테어!!!”

“헹, 나한테 최강자 자리를 넘기기 싫으니까 오지로 숨어버려?! 그런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이거야!!”

뭐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한 상황. 하지만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들을 구슬려 상황을 모면하는 게 시급했다.

“마침 잘…….”

“듀얼이다, 콜로니스트!!”

“싫습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신이 안 서는 상태에서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던 보카치오는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자 열이 받았는지 직접 검을 휘두르며 공격을 해왔다.

“어째서 피하는 거냐!!!”

“이것들이…… 죽어!!”

“넌 또 뭐야?! 블링크.”

말하는 데 끼어 든 것이 못마땅한 에크만은 블링크를 시전 해 그의 목 언저리로 이동했고 격투가 레벨을 자랑하듯 발로 목을 감아 넘겨버렸다. 아무리 같은 원 클래스 마스터라고는 해도 몸으로 싸우는 건 보카치오가 더 익숙할 텐데……. 하긴, 평범한 놈들이 아니었지.

“라이트닝, 더블”

재차 이어지는 공격을 검의 우수성으로 막아낸 보카치오는 추하게 바닥을 한 바퀴 구른 후 자세를 고쳐 잡았지만 쉽사리 달려들지는 못했다.

“난 이놈하고 할 말이 있으니까 넌 거기 찌그러져 있어, 알았어? 앙?”

“큭…….”

더블 스펠의 사용으로 마스터라는 게 드러났고 이미 기선 제압까지 당해버린 데다 친구로 보이는 자까지 만만치 않게 생겼으니 그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엉뚱한 인간들은 침묵마저 허락하지 않았으니…….

“알았냐고!!”

“……알았다.”

“어쭈,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약한 주제에 저걸 콱!!”

“참어, 참어. 약한 놈이 자존심이라도 있어야지.”

힐름 내 몇 대 길드라 하는 곳의 수장으로서 참기 힘든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 했다. ……죽기 싫었기에.

“넌, 도대체, 왜!! 듀얼 하기가 싫다는 건데? 설마 치사하게 도망치면서 운.좋.게. 얻은 자리를 지키려는 건 아니겠지?”

“최강자라는 거창한 자리를 그렇게까지 유지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지금 상황이…… 듀얼이나 할 만큼 한가로워 보이십니까?”

그들은 슬쩍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고 싸움 없이 한가한 지역이 이곳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챘다. 마법사와 기사들의 생사를 건 긴박한 싸움이었지만 그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약간 짜증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상황만 정리되면 듀얼을 하겠다. 이거지?”

“‘승리’로 끝났을 경우의 얘기죠.”

“좋아, 한몫 거들어주지. 대신 나중에 딴소리하면 듀얼이고 나발이고 그냥 죽여 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말은 그렇게 해도 실천에 옮기진 못할 것이다. ‘최강자’의 칭호가 옮겨가려면 ‘운영자가 참관한 정당한 듀얼’이어야 하니까. 에크만이 움직이자 알테어도 함께 움직였다. 둘 다 똑같은 격투가 클래스인 듯. 하지만 여기서도 둘의 개성이 드러났다. ‘무한 마나’를 지향하던 에크만은 ‘속도’위주의 연타 형, ‘마법은 한방이다.’를 외치던 알테어는 ‘힘’중심의 파워형으로 마법사 때 걷던 길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비겁한 놈들!!”

에크만이 보카치오를 상대하고 알테어는 더 매지션들을 도우러 갈 거란 예상과는 달리 둘이 협공해서 보카치오를 몰아 붙였다. 차지 볼트로 손에 묵직한 감각을 남겨준 다음 망설임 없이 품으로 파고드는 에크만. 최소한의 동선으로 접근의 저지는 물론 베어버리기까지 하려던 보카치오는 알테어의 위력적인 발차기에 검면을 강타 당해 속사포 같은 연타에 고스란히 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커헉!”

“짜릿한 맛을 보여줄까?”

어느새 너클에 라이트닝 인챈트를 건 에크만은 격투가 스킬 중 하나인 스턴 펀치를 사용해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 순간 기질을 발휘해 몸을 비튼 보카치오, 운 좋게도 라이트닝 인챈트 덕에 적지 않게 변한 마비 확률에 걸리지 않고 바닥을 구를 수 있었다.

“협공이라니, 마스터로서의 자긍심이 없는 거냐!!”

“자긍심은 개뿔, 난 약한 놈한텐 그런 거 안 따져.”

너무도 쉽고 허무하게 당하는 현실이 억울했던지 ‘마스터로서의 자긍심’을 들먹였지만 에크만은 처음의 공방으로 자신의 우위를 확신했는지 별 반응 없이 공격을 해나갔다.

“바인드, 그로우.”

다음 공격에 대비해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보카치오는 바닥에서 올라온 나무줄기에 발목을 휘감겨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발목을 감은 채로 커지니 이런 효과가…….

“으악, 내 다리!!”

줄기가 크고, 굵어짐에 따라 그의 발목에 전해져오는 압박감도 커지는지 비명을 지르며 발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버둥거리며 칼을 휘둘러봐도 역부족. 검강이나 비검기라도 쓰면 될 테지만 고통만이 머릿속에 꽉 찬 그는 생각해 낼 수 없었다.

“휩.”

보카치오를 매단 줄기가 채찍처럼 휘둘러지며 그를 바닥에 메다꽂았고, 그 일직선상에 있던 자들도 덩달아 큰 타격을 입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곧게 선 줄기. 고통에 신음하며 혼미한 정신을 추스르려는 보카치오에게 에크만은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 정도 ‘충격’만으로 죽으면 안 되지. 필라 오브 파이어”

“저 하늘의 별이 되어라, 승룡풍.”

바닥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며 줄기에 불을 붙이자 알테어가 주먹을 휘둘러 일으킨 바람으로 빠르게 번지도록 만들었다. 권풍만으로 저 정도의 위력을 냈을 리 만무하고, 마법인가? 저거에 당하면 낙법이라도 치지 않는 이상 추락 데미지가 만만치 않겠군.

“으아아아악!!!”

“휩.”

순식간에 보카치오의 몸까지 뒤덮은 불꽃은 그의 HP만을 갉아먹으며 지속적인 고통을 줬고 다시 한 번 내려쳐진 뒤에도 꺼지지 않았다.

“꼴에 아직도 안 죽네? 휩, 휩, 휩!!”

이번에 내려쳐진 곳은 성문의 돌 더미. 내려쳐질 때마다 줄어든 잔해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얼굴을 팔로 감싸지나 않았으면 머리가 뾰족한 곳에 부딪쳐 쉽게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아주 걸레가 됐군.”

그는 그렇게나 당하고도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HP는 바닥을 보이고 있겠지만.

“라이트닝 랜스. 그렇게 여유 부리다가 이번 일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저와 듀얼 할 기회가 영영 사라질 겁니다!!”

“쳇, 내 더럽고 치사해서…….”

“뭐라고요?”

“아니, 별말 아냐. 금방 끝낸다고.”

“아참, 성 안쪽에도 적이 있으니 마나를 아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서두르는 척 나서서 보카치오의 목숨을 거두었지만 실은 딴 생각이 있었다. 이유인 즉, 그들과 우리는 서로가 ‘몬스터 화’된 상태이니 마스터 레벨에 도달한 그는 웬만한 보스 급 이상 가는 경험치 덩어리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그가 전직을 해서인지 에크만이 대부분의 HP를 소모시켜서인지 내게 돌아온 경험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합류할 차례인가? 버스트 플레임, 파이어 볼, 파이어 볼…….”

보카치오가 맥없이 당할 때부터 전의를 상실한 기사들이 알테어, 에크만까지 가세한 마법사들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약간의 저항은 하지만 그것으로 인한 피해는 극히 미미했고 위험하다 싶을 때 빈틈을 보여주면 공격하기보다 도망가기 바빴다. 압도적 우세를 보이니 이젠 안에서 고전하고 있을 기사들(주로)과 합류하는 게 급선무. 무너진 성문을 등지고 싸우는 건 우리 쪽일 것이기에 함부로 범위 공격이나 무식한 폭발력의 공격으로 나머지 돌들을 없앨 수 없는 노릇이었다.

“큭, 타이밍 한번 정확하군.”

“아직 입을 놀릴 힘이 있는 걸 보니 내가 너무 일찍 왔나보군?”

“전방은 잠시 마법사들에게 맡긴다. 기사들은 뒤로 빠져 회복하도록!!”

마나가 고갈된 건지 아론은 ‘전사의 외침’스킬도 사용하지 못하고 목청껏 소리 질렀다. 응원군의 도착에 사기가 높아진 기사들은 상대하던 자들을 발로 밀어내거나 무기로 튕겨 낸 후 신속히 후방으로 이동했고, 그들의 빈자리는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두 명씩 짝을 지은 마법사들이 파이어 볼을 활용해 훌륭히 메워냈다.

“리커버리.”

“힐링.”

“이봐, 마나 포션 좀 줘!!”

다행히 상대편 기사들도 비검기, 검강을 날릴 만큼 마나가 남지 않았는지 쉽게 접근하지 못했고, 그 사이 후방에선 기사들이 프리스트드의 도움을 받아 HP, MP를 채워가고 있었다.

“듀얼은 포기하신 모양이죠?”

파이어 볼로 수많은 기사들의 접근을 막고 적지 않은 타격을 주는 것이 신기했던지 넋 놓고 구경하는 둘에게 자신들이 할 일을 일깨워주자 투덜대며 정신을 차렸다.

“아, 듀얼!! 이놈들이 마지막이랬겠다? 금방 끝낼 테니까 보고만…….”

쐐애애액-!

한발 나서려는 순간 그의 발밑으로 화살 한 대가 꽂혔다. 화살이 조금만 느렸거나 발이 조금이라도 빨랐다면 위험할 뻔한 상황. 누군가 자신을 노렸다는 사실에 분개한 그는 땅에 박힌 화살을 뽑아들고 그것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히, 날 노려?”

쐐애액 팍-!

다시 한 번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쳐낸 에크만은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움켜쥐었고 고개의 변동 없이 손에든 부러진 화살을 내팽개친 뒤 입을 열었다.

“쏴라!!”

“보호하는 마법의 장막, 실드”

“난 왼쪽이다.”

“그럼 난 오른쪽이군, 블링크.”

좌, 우측 성벽에 올라 화살을 쏴대는 일반 병졸(NPC)들.미약한 마나조차 실리지 않았지만 크리티컬 히트를 무시할 순 없었기에 다른 마법사들은 실드를 펼쳤는데 알테어와 에크만은 오히려 성벽 위로 이동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윈드 봄버!!”

“윈드 봄버, 더블!”

날아오는 화살을 바람의 힘으로 저지하며 서서히 거리를 좁혀드는 그들 덕분에 어느새 우리를 향하는 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수고들 했어. 전방은 다시 우리 기사들이 맡는다!!”

뒤로 빠졌던 기사들의 부활. 수는 아직 상대편이 더 많았지만 고갈된 마나를 채울 줄 모르는 NPC기사들이 대부분이니 우리 쪽이 우세하다 말할 수 있었다.

“일단 신나게 강기부터 퍼부어 주자!!”

수가 너무 많아 한 명씩 베기도 용이치 않았을 뿐더러 마나가 떨어지면 얼마든지 쉴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아군이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론들은 시작부터 강기 다발을 마음껏 퍼부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어도 피할 수 있을까 말까인 검기 급 NPC기사들이 수많은 강기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오직 몸으로 막아내는 일 뿐. 앞쪽에 나와 있던 자들은 한결같이 육중한 고깃덩이로 변해버렸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이 비실비실한 것들을 몽땅 쓸어버리고 승리의 축배를 들자!!”

“와아아아아아아아!”

“상황은 어때? 끝나가?”

아론이 한 번 더 사기를 진작시키고 있을 때 오마이스 영지의 성에 있어야 할 거트 형이 나타나 진행 상황을 물어왔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제가 불렀어요. 이쯤이면 승리는 확실할 테고 혹시라도 디아블로들이 입구 쪽에서 쳐들어오면 차지할 주인이 없어 실패할 수도 있잖아요.”

“좋아. 그럼 저들이 완전히 전멸할 때까지 그쪽 마법사 다섯은 거트 형 주위로 실드를 쳐서 보호한다. 알겠나?”

“예.”

전에 와본 적 있으니 안쪽으로 텔레포트하면 될 거라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내성으로의 텔레포트가 불가능 할 수도 있었기에 기특한 생각을 해낸 세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고 아론을 독촉했다.

“야! 왜 이리 오래……?!”

두둥 두둥 두둥-!

갑자기 성문 쪽에서 약하지 않은 무언가와 실드가 부딪치며 나는 가죽북 소리가 들려왔다. 실드는 우리 편일 테고, 공격 하는 쪽은?

“디아블로의 반격인가?”

“아닙니다. ‘몬스터’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 새로운 길드인…… 어라, 저건 엘시노?! 엘시노입니다!!”

“!!”

“얼마 전에 마스터가 되고 종적을 감췄다더니 아무래도 '복수'를 위해 나타난 것 같군요.”

“…….”

한참을 막아내던 이들이 실드를 두드리는 반동을 이용해서 안쪽으로 굴러 들어오자 다른 이들이 입구를 막아섰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엘시노만 앞으로 나와 있고 나머진 뒤로 물러섰습니다. 뭔가 얘기를 하자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어도 그와 나는 엘시노가 무얼 말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 지도……!!

“결자해지(結者解之).”

“너 미쳤어?!”

“곧 끝나는데 무시해 버려요. 저들 정도라면 못 막을 전력도 아니고, 듀얼을 하더라도 마스터가 된 후 안전하게 하면 되잖아요.”

‘꼬리 내린 개’라는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기다렸다면 응당 상대해 주어야 한다. 그로 인해 한 발자국 앞까지 다가 온 마스터의 경지에서 다시금 멀어진다 하여도.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왕을 제압하는 덴 문제없을 겁니다. 안심하고 다녀오시죠.”

“그럼, 다녀오죠. 비켜라!! 내가 나가겠다.”

입구의 마법사들을 밀치고 성문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론이 지시했는지 전방에서 싸우던 기사 셋이 방패를 들고 앞을 막아섰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겠다는 말에 동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엘시노와의 거리가 절반쯤으로 좁혀졌을 때 제자리에 멈춰 섰다.

“네가 원하는 건 나겠지? 설마 그 인원으로 디아블로를 대신해 우릴 막겠다는 건 아닐 테고.”

“저 아이들은 너와 나의 싸움을 방해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일 뿐이다. 방해하려는 자가 너희든, 디아블로든 알바 아니지. 이렇게 혼자 나왔다는 것은 받아들이겠다는 뜻인가?”

“이렇게까지 날 기다려줬는데 그러는 것이 예의겠지. 여기서 하겠나? 아니면 약간 자리를 바꿀까.”

“여기서 하지. 그런데 듀얼 신청은 하지 않는군. 반드시 이길 거란 자신감인가? 큭큭……. 그렇다면 후회하게 될 텐데.”

듀얼을 신청하고 받아들인다면 어느 한쪽이 죽더라도 아무런 페널티를 받지 않는데 듀얼에 대한 말을 하지 않자 엘시노는 냉소를 지으며 눈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어차피 듀얼을 신청한다고 받아줄 것도 아닐 텐데 구차하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쫓기는 자에게 오만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물러나라.”

“큭큭, 잊고 있었군. 그대가 쫓기는 몸이었단 걸. 이젠 족쇄가 풀릴 것 같지만.”

그는 실소를 멈추지 않고 황금빛의 오리하르콘 소드를 고쳐 쥐었다. 그에 맞춰 나도 주위의 기사들을 물렸고 그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엘시노는 검을 까딱거려 길드 원들을 조금 더 멀어지게 한 다음 검을 든 자세를 바꾸어 공격 의지를 내비쳤다.

“이런! 파이어 볼”

그냥 보기만 해도 눈 아픈 오리하르콘에 햇빛이 반사되자 눈뜨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빛이 되어 눈을 괴롭혔다. 그와 동시에 달려드는 엘시노, 노린 건가?

“하압!!”

“하드 웨폰(hard weapon)!”

강렬한 빛으로 일시적 장님 신세가 된 덕분에 시야내의 장소로 이동하는 블링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꺼내든 한 자루의 검. 저번 보물찾기 때 얻고 시간 없어서 처분 못한 그리 무겁지 않은 초보용 검이었다. 이걸로 그의 검기, 검강을 막아내기는 힘들 테지만 마법으로 인챈트 시켜 한 번의 부딪침 정도는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제기랄!!”

검기를 너무 무시했다. 예상보다 너무도 쉽게 강화된 철검은 조각나 버렸고 철검, 아니 쇳덩어리의 저항 같지 않은 저항을 뚫은 그의 검은 약간의 머리카락과 오른 어깨를 베며 엄청난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크악!! 윈드 봄버.”

나름대로 자주 쓰긴 하지만 오른손에 비해 익숙하지 않은 왼손을 뻗어 그와의 거리를 벌린 뒤 발을 놀려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만들었다.

“‘꼬리 내린 개’란 별명까지 생긴 마당에 ‘비겁자’란 말 따위가 더 붙는다 해서 달라질 것 없겠지!!”

“으읍, 블링크.”

포션 뚜껑을 입으로 따고 있을 때 몸을 비튼 그의 비검기가 피하기도 어렵게 대각선으로 날아왔다. 블링크를 이용해 피하긴 했으나 중심을 잡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몸놀림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춤추듯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쉽게 내가 있는 방향을 찾아내 다시 한 번 비검기를 날렸다.

“이크!”

흔히 무협에서 말하는 철판교의 수법으로 넘어지듯 몸을 피하자 이번엔 그쪽으로 또 다른 검기가 날아왔다.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이대로 죽거나 바닥을 구르거나. 고수라면 죽을지언정 쓰지 않는다는 나려타곤(혹은 뇌려타곤)이었지만 나는 고수도 아닌데다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목숨을 버릴 만큼 아둔하지도 않았기에 주저 없이 바닥을 굴렀다.

“그렇지, 그래. 더 추하게, 더 비굴하게, 더 구차하게!!!”

그는 광기 어린 목소리로 날 더욱 몰아붙였고 일부러 죽이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절묘하게 검기가 퍼부어졌다. 이놈, 눈동자가 풀렸잖아?! 에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윈드 봄버!!”

오른손이 바닥에 닿는 순간 윈드 봄버를 뿜어냄으로써 몸을 세우는 것은 물론 약간의 거리까지 확보했다. 흥분해서일까? 곡선의 묘를 살리며 부드럽게 조여오던 그의 검은 난폭하게 변해있었고 나도 허리를 숙여 쉽게 피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윈드 봄버. 땅을 박차고 발을 앞세워 그의 안면으로 쇄도해 들어갔지만 팔에 걸려 옆으로 튕겨 나갔고 몸이 회전하는 것을 이용해 계획했던 일을 실행할 수 있었다.

“카악, 퉷!!”

비록 자세가 불안정한 상태이긴 했지만 뱉어낸 침은 정확히 눈을 향했다. 뒤늦게 질끈 감기는 했으나 이미 약간의 침이 눈 속으로 들어간 상태. 놈은 한 손으로 검을 무작정 휘둘러 접근을 막고 나머지 한 손으로 침이 들어간 눈을 비벼댔다.

“그로우, 휩”

“앗, 따거!!”

놈이 검을 휘두르는 반대편에서 줄기가 뻗어 나와 비비고 있는 왼손을 계속해서 후려쳤다. 줄기는 살에 착착 감기며 눈을 비비기는커녕 손도 못 들게 만들었고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기 때문에 들고 있는 검으로도 줄기를 제대로 잘라내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앞뒤로 움직이게 조종하는 탓도 있지만.

“그럼 이제…….”

시야가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움직이는 줄기에 정신이 팔리니 공격하기에는 아주 좋은 상태가 되었다. 하나 나 역시도 줄기를 컨트롤하느라 다른 마법을 사용키 어려운 상황. 마법사의 몸으로 주먹질을 한다 해도 별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 자명한 일이었으므로 조금 치사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제 됐…… 크아악!! 내 눈!!!”

“쓰읍…… 손가락도 만만치 않게 아프군”

내가 택한 방법은 몰래 다가가서 놈의 눈을 찌르는 것!!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도, 더군다나 현실과 같은 게임에서 사람 눈을 찌른다는 게 무지하게 찝찝하고도 꺼림칙한 일이었지만 살기 위해선, 이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찌른 손가락이 삐기라도 한 건가? 통증이 장난이 아닌데.

“저런 비겁한!!”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 내가 먼저 시작했냐?! 이게 다 인과응보라고!!! 라이트닝 랜스.”

샛노란 전격의 창이 목 줄기에 도달할 무렵 그의 몸이 취한 듯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아직도 고통스러운 듯 한 손으로 눈을 감싸 쥐고 있지만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입, 그렇다면 방금 전의 비틀거림은…….

“감도 변경인가. 속전속결로 끝낼 수밖에.”

감도의 변경으로 인해 통증도 많이 줄었을 테고 뒤쪽에서 귓속말을 이용해 코치를 하고 있으니 길게 끌수록 불리한 것은 내 쪽이었다. HP를 깎기보다 크리티컬 히트를 노릴 수 있는 ‘관통’형 마법으로 놈의 주위를 맴돌며 공격을 해댔지만 놈은 예상외의 놀라운 움직임을 보이며 치명상을 면했고 심지어 움직임을 예상해 돌진해오기까지 했다.

“거기냐!!”

“블링크”

이동 경로를 정확히 짚어내는 바람에 블링크로 몸을 피해야했다. 어쩌다보니 엘시노의 길드 원들을 등진 상태, 설마 난입하진 않겠지?

“엥?”

“멍청아, 똑바로 알려줘야지. 방향이 바뀐다고 헷갈리냐?”

코치해주는 녀석과 엘시노의 위치가 거울 보듯 반대여서 인지 왼쪽에 있는 나를 맞추겠답시고 오른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니까 지금의 엘시노는 저 녀석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이렸다? 후후…….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여기다!! 여기.”

다음 지시가 내려지지 않아 그 자리를 지키고서있던 엘시노가 목소리에 반응하여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검을 휘두르는 건 마구잡이. 충분한 거리를 확보해 가며 그를 뒤쪽으로 유인했다.

“야, 야!!”

“……!”

코치하는 녀석의 옆에서 구박하던 여성이 당황해하며 등을 때리자 자신의 손을 보며 엘시노의 방향과 맞춰보던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그만 두기는커녕 더 빨라지는 손. 왜 그러냐는 듯 째려보자 여자의 손이 앞쪽을 가리켰고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그가 본 것은 다름 아닌 내 등이었다. 아마도…….

“거기서 검강.”

녀석의 목소리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약간의 음성 변조를 해서 굵직하게 외치자 엘시노도 거기에 속아 마나를 한껏 담은 검강을 뿌려댔다. 검강이 날아올 때는 이미 블링크로 몸을 피한 상태. 희생자는 코치하던 녀석을 포함한 그쪽 길드 원들 뿐이었다.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이 역적들아, 목을 내놓아라!!!”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어딜 감히 새치기냐, 크레이지 썬더!!”

“꺼져라, 헬 파이어”

쿠과과과과광-!

인페르노 준비 중에 디아블로 길드의 난입. 그 결과는 처참했다. 인페르노 하나만을 맞았으면 모르되, 듀얼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에크만들에게까지 공격을 받으니 반수 이상의 대 인원이 전멸. 황금 빛 검을 치켜들고 돌진을 명하려던 보카치오는 제자리에 석상이 되어 침묵했다.

“나이스 타이밍!!”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엘시노를 비롯한 수많은 기사들을 해치웠으니 어찌 아니 기쁘겠는가? 주먹 쥔 손을 올렸다 내리며 기쁨을 표시하자 정신 차린 보카치오가 알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서둘러라!!”

남은 인원들이 부채 펼치듯 좌우로 퍼지며 자세를 잡자 우리도 성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안쪽에선 아직도 기사들이 NPC들과 교전 중, 안쪽에서 조금씩 충원되는 탓에 시간이 좀 걸리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선 듀얼을 할 수 없다더니 무슨 짓이냐!!”

안전한 곳까지 오자 에크만이 노기 띤 목소리로 다그쳤다.

“정확히는 ‘듀얼’이 아니라 ‘싸움’이었죠”

“그거나 그거나!!”

“죄송합니다. 일단 사과드리죠. 하지만 그와의 악연은 두 분을 만나기 전부터 시작됐었고 그에 대한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계실 테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최강자’의 칭호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건 ‘운영자 참관하의 정당한 듀얼’을 통해, ‘마법사’에게만 통용되는 것이니까요.”

“그게 아니라니까!! 나도 말 좀 하자. 네 놈이 다 이겨 가는 상황이라고 해서 날 적으로 돌리는 멍청한 짓을 할 리 없으니 그 걱정은 안 하는데, 만약 죽어서 레벨 다운이라도 됐으면 어쨌을 거냐 이거지!! 내가 마스터에서도 훨씬 벗어난 놈을 이긴다고 좋아할 것 같냐?! 이번은 무사히 넘어갔으니 참겠지만 다음에 또 그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그가 원하는 건 비단 ‘최강자’의 칭호뿐만이 아니라 나와의 복수전을 통해 정당하게 자신의 힘이 우위에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인 듯싶었다.

“이상한데요? 공격이 너무 무력합니다.”

“오자마자 큰 전력 손실을 입은 데다 한번 당한 기억이 있으니 적극적이지 못한 거겠지.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철저히 지키도록!!”

“예.”

생각보다 소심한 디아블로의 공격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조금 전 죽은 자들을 기다리는 것으로 치부하고 기사들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에크만과 알테어라는 무기를 잘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겠지.

“뭐, 뭐야? 저것들은.”

주위를 살펴 약간 밀린다 싶은 곳부터 도우려는데 안쪽에서 복장부터 다른 검기급 이상의 기사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이건 대체……?

“디아블로, 성문으로 강행 돌파를 시도합니다!!”

“노린 건가, 하지만 어떻게……?”

“마법사들은 성문을 지키는 데만 전념해!! 여긴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막아낸다.”

상황이 급박해졌다. 슬슬 뒤로 빠져 마나 보충을 해야 할 때에 마나 충만한 검기급 기사들이 밀려오니 그들도 목숨을 걸어야 했고, 마법사들도 빠른 돌파 때문에 고위 마법을 쓰기 힘들어 간신히 접근만을 막아낼 뿐이었다.

“에크만님, 알테어님. 이번이 진짜 마지막 전투입니다. 한바탕 휘저어봅시다!!”

“헹, 저까짓 검기 쓰는 인형들로는 내 상대가 되질 못해!!”

기사들을 돕기 위해 뛰쳐나가긴 동시에 했지만 격투가 클래스를 올리고 있는 둘에게 금방 뒤쳐져 버렸다. 양쪽 모두 갑옷을 입고 있어서 아군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전격 계 마법이 주특기지만 요리조리 잘도 움직이며 적만을 골라서 공격해대는 에크만과 더 매지션들이 했던 것을 적극 수용해서 혼자 두 개의 파이어 볼로 공간을 만들어가며 싸우는 알테어. 둘을 보고 있자니 동맹 길드 하나를 더 얻은 듯한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괴팍한 성격만큼이나 대단한 실력이란 말이야?

“결국 이건 써보지도 못하는군. 뭐, 수집용으로도 좋겠지.”

잠시 라무의 봉인석을 꺼내 만지작거린 후 다시 품속에 넣고 나 역시 전투에 참여했다. 중앙은 둘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니 다른 곳을 돕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 하에 발길을 돌려 측면으로 향했고, 도착과 함께 제법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타오르는 분노의 칼날, 플레임 소드.”

머리 위에 뭉쳐진 화염 덩어리는 척 보기에도 패도적인 한 자루의 도를 만들어 냈고 이내 적진으로 떨어져 내렸다. 안 그래도 6써클인 주문에 상당량의 마나를 더 주입시켜 크기를 부풀렸더니 겨우 검기급인 기사들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었고 한 번에 한 명이 아닌 여럿을 쓰러뜨리며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쳇.”

플레임 소드가 사라진 건 십여 명의 검기급 기사를 지나고 몇 없는 검강급 NPC기사와 맞부딪쳤을 때였다. 힘이 많이 소진 된 플레임 소드를 검강으로 파괴해버린 그는 꼴에 A.I라도 있는 겐지 조종자인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공격 의지를 내비쳤고 낌새를 알아챈 다른 기사들이 나에게로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검을 겨누었다.

“각자 방어하십시오!! 응어리진 분노의 폭발, 플레임 소드 개(改), 익스플로젼 소드.”

다시 한 번 머리 위로 화염 덩어리가 모이며 좀 전과 다를 바 없는 도 한 자루를 만들어 냈다. 굳이 집어내자면 검날 부분이 두껍다는 정도?

“부술 수 있으면 부숴보고,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라!!”

“소원대로 해주지.”

퍼버버벙

그의 검과 익스플로젼 소드가 부딪치고 난 소리는 다름 아닌 폭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마법의 원래 목적이 그것이니까. 익스플로젼 소드는 스펠에서부터 밝혔듯이 플레임 소드의 개량형으로 부딪치는 순간에 폭발을 일으켜 대상자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 다음 플레임 소드가 따로 운용되는 강자 중심의 그룹을 무너뜨리기 위한 마법이다. 폭발 범위에 따라 9써클 마법에 필적할 정도로 지독히 많은 마나를 소모할 때가 있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크아아악!!!”

설명이 부족했던 것일까? 공격에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적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막고 있던 두 명의 기사도 죽음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빈사에 가까운 데미지를 입었고 검기급 기사를 상대하던 셋도 중, 경상의 데미지를 입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나마 근처의 적들은 전멸했다는 게 위안이 되긴 하지만 명백한 나의 실수로군.

“우라질…….”

순간 텅 빈 공간을 안쪽에서 밀려나온 NPC들은 꾸역꾸역 잘도 메워갔다. 이래서야 쓸어버린 보람이 없잖아!!!

“모두 동작 그만!!”

이 지독히도 많은 놈들을 전부 쓰러뜨리긴 무리라는 결론이 나올 무렵, 전후좌우 어느 쪽도 아닌 곳에서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런!!”

소리에 이끌려 위쪽을 바라본 NPC들은 그대로 행동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들의 행동이 정지되자 우리 편 역시 눈치를 보며 마나 포션을 황급히 돌이킬 뿐, 섣불리 나서지 않았고 성문과 달리 조용한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겠는지 에크만이 일을 벌였다.

“차지 볼트, 더블”

그가 두 개의 차지 볼트로 사용한 방법은 더 매지션들이 파이어 볼로 했던 것과 같았으나, 효과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다. 파이어 볼은 그 자리에서 폭발하는데 비해 차지 볼트는 사방으로 전류를 내뿜으며 적을 괴롭혔고 아무리 안 좋은 상황이라도 가만히 죽어 줄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을 시작으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멈추라고 했을 텐데!! 왕이 죽어도 좋다는 건가!”

“다른 분들도 멈추십시오.”

본격적인 공성 시작 전에 미리 성안으로 진입했던 어쌔신. 그들의 수장인 로즌 크랜츠가 크로반의 팔을 꺾고 목에 날카로운 소도를 든 채로 성 위에서 NPC들을 협박했다. 사전에 놈은 우리 몫이라고 못 박아 놨으니 진짜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NPC가 그런 것까지 알리 없지.

“무기를 버리라고 말해.”

“무, 무기를 버려라. 빨리!!”

챙 채쟁챙챙-!

유저라면 살려줄 리 없다는 걸 알고 공격해 오겠지만 역시 NPC는 그들보다 상위 계층인 크로반의 명령에 따랐다. 제자리에 무기를 떨궈 놓고 한쪽으로 줄지어 이동시킨 후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아론은 급히 기사 병력의 반을 입구 쪽으로 이동시켰고 이따금씩 날아오는 검강 세례에 조금씩 진입을 허락하던 마법사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저, 정말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날 놓아주는 거겠지?”

“입 아프게 두 번 말해야겠나? 날 믿지 못한다면 할 수 없지.”

그는 칼을 거두고 등을 밀어 떨어질 듯 말 듯한 상황으로 만들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크로반, 바지에 오줌이나 지리지 않았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장되게 공포를 호소했다. 아주 볼만하군.

“믿어, 믿는다구!! 제발 살려줘!!!”

“그래야지. 그럼 이제 검강급 기사들을 한 명 빼고 모두 성문으로 지원 보내.”

“가미르를 제외한 단장들은 검을 들고 성문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막아라!!”

어느 정도의 A.I를 지니고 있는 단장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늘같은 국왕의 명령이니 할 수 없이 따라야 했다. 방어에 더욱 안정감이 생긴 성문, 폭음이 커져 가는 걸 보니 여유가 생긴 마법사들의 고위 마법이 하나 둘씩 터져 나오는 것 같다.

“다음 요구사항을 말하도록 하지. 미안한 얘기지만 ‘왕국의 보물’을 내놓아라. 다 가져가긴 미안하니 하나만 고르도록 하지.”

“그, 그건…….”

“그게 네 목숨 값보다 비싸다는 건가? 여러 개도 아닌 하나가? 그렇다면 더 얘기할 거도 없군. 어디부터 시작할까? 이젠 쓸모 없는 그 혀?”

“줄게, 줘, 준다구!! 가미르는 어서 가서 보물들을 가져오도록 하라. 당장!”

“하, 하지만 폐하…….”

“넌 내가 죽어도 좋다는 게냐!! 잔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가져와!!!”

혼자 남은 가미르라는 단장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뵈는 것 없는 크로반에게 묵살 당하고 마지못해 보물을 가지러 갔다. ‘왕국의 보물’이라, 성을 얻으면 같이 얻을 수도 있지만 언제 주인이 바뀔지 모르는 성이니 그렇지 못할 확률도 꽤 높겠군. 거기까지 생각했다면 대단한데?

“보물이, 사라졌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성문 쪽의 일도 마무리 될 무렵 보물을 가지러 갔던 기사가 헐레벌떡 뛰어와 긴급 상황을 알렸다. 뭣이? 보물이 사라져?!

“대신 이 쪽지 하나만 덩그러니…….”

위쪽에 있어 받아보기가 용이치 않은 그를 대신해 종이를 낚아채 읽어보자 기가 막힌 내용이 적혀있었다.

[왕국의 보물들은 잘 접수했습니다. 방비가 이렇게나 허술하다니 실망이군요. 되찾고 싶으시다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전 세계에 숨겨져 있는 저의 은신처로 찾아오십시오. 보물은 그 끝에 놓아두겠습니다. -괴도 J-]

“J? J? 제롬? 제롬!”

일개 유저의 신분으로 ‘왕국의 보물’을 훔칠 수 있을 리도 없고 ‘은신처’, 즉 던전을 가질 수도 없으니 이것은 필시 운영자의 농간이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돌’은 괜찮은지 확인해 봤나?”

“다행히 ‘돌’은 무사했습니다.”

“돌?”

그들은 보물이 없어진 건 안타깝지만 그 ‘돌’이란 게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돌’이란 게 대체 뭐길래 보물보다 소중히 여기는 거지?

“저, 저기. 보물이 없어진 건, 그러니까 제 책임이 아니고, 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크로반은 뭐가 깨달았는지 고개를 돌려 로즌 크랜츠에게 횡설수설 해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럴 수도 있지. 허나, 안타깝게도 내가 놓아줄 수 있는 건 내 손에 한해서다.”

“?”

“콜로니스트님, 받으십시오. 선물입니다.”

“!!”

확실히 로즌 크랜츠는 크로반을 손에서 놓아주었다. 그것이 안전장치 없는 수십 미터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것이라는 게 단 하나의 문제였지만.

“으아아아아악!!!!”

“그대에게 부유의 힘을 부여하나니, 레비테이션!!”

보통의 상황에서라면 크로반 정도는 별 무리 없이 띄워 올릴 수 있지만 가속도라는 게 무시 할 것이 못되는 바람에 대량의 마나가 한순간에 빠져나갔다. 공허함으로 인한 일시적인 무기력증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억지로 움직여 놈의 목 줄기를 잡았고 달려오던 기사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내가 칼 놀림이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로 찔러버리거나 여차하면 마법이 튀어 나갈 수가 있거든? 괜히 허튼 수작들 않는 게 좋을 거야. 거트 형, 일단 들어가자.”

“응? 그래.”

“안쪽에 보호막이 없는 걸로 보아 그 놈을 죽이면 끝나는 것 같습니다!!”

거트 형 등을 이끌고 성의 안쪽으로 들어갈 무렵 로즌 크랜츠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놈만 죽이면 끝이라고? 그럼 더 간다하지!

“이쯤에서 슬슬 시작해볼까?”

“너, 너흰 누구야! 누군데 이런 짓을…….”

“하아, 우릴 그새 잊었다는 거야? 그런 짓을 해놓고?”

어이없게도 이 미친 NPC는 우리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억지로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 듯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떠올려내지 못했다

“똑바로 봐. 우린 네놈에게 속아 국왕 암살범으로 몰렸던 라스트 길드다!!”

“히익!”

“벌써부터 너무 겁먹지 말라고, 쉽게 죽이진 않을 거니까. 애들아!”

“준비 완료!!”

“이거 놔,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신호에 따라 놈의 팔, 다리를 붙잡은 길드 원들은 각자 준비해 놓은 큰 깃털을 하나씩 꺼내 온몸을 간지럽혔다. 발광을 하지만 누르는 힘에 의해 제자리에서 들썩거리기만 하는 몸.

“으히, 그만. 으하하하. 그만! 우하하하하하!!!”

자고로 아픈 것을 참기도 힘들지만 웃음을 참는 것 또한 괴로운 것이다. 뱃가죽과 안면 근육이 당기는데 계속 웃다보니 놈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고 거의 녹초가 되어 그나마 저항조차 못하게 될 때쯤 고문 방법을 바꿨다.

“일어나라고, 아쿠아.”

“어푸푸.”

“리커버리.”

“마법사가 기사보다 좋은 게 뭔지 알아? 사람이란 게 생각보다 약해서 검 같은 무기론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죽어버리는데 비해 마법은 조절만 잘하면 얼마든지 데리고 놀 수 있거든, 이렇게. 쇼크, 쇼크, 쇼크…….”

“제. 발. 그. 만. 해. 으. 아. 악”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전기 충격을 써주자 놈이 행동 하나하나를 절도 있게 끊으며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렸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지?

“사혈이랍시고 갑자기 눈 뒤집혀 죽어버리면 골치 아프니까 이건 거트 형이 해야겠군.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내, 내가? 알았어. 해볼게.”

보호막을 깨고 성을 얻는 형태라면 내가 직접 고문하기 위해 준비해 온 바늘을 거트 형에게 넘기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아들고는 시작 부분인 머리 쪽으로 이동했다. 애써 일으킨 몸을 다시 눕히고 또 한 번 팔다리에 제약을 가하자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 될 것을 느꼈는지 몸부림을 쳤지만 모두 허사. 한동안 버둥거리던 놈은 곧 자포자기 상태로 들어갔다.

“앗, 따거. 이게 무슨 짓이냐!! 악! 그만 두지 못해?!”

이어진 고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늘로 찌르기’. 큰 고통은 없지만 예리한 바늘이 주는 따끔거림을 지속적으로 참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게다. 더구나 찌르는 시간에 약간의 여유를 둬서 통증이 살게 만들고 수시로 회복 주문까지 걸어 주니…….

“아학, 학, 학, 하하, 아하하하하하!”

고통에 신음하던 크로반이 어느 순간엔가 신음 소리 대신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견디고 견디다 미쳐버린 건가?

“이, 이놈 진짜로 미쳐버린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할 수 없지. 옛 어른들의 말씀을 따르는 수밖에”

“응? 너 설마…….”

“왜 아니겠어.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다'. 확인해 볼 절호의 기회잖아? 아직 고문이 많이 남았으니 죽지 않게 조심하고.”

이것 역시 직접하고 싶었지만 내 손에 죽어 버리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 있으므로 거트 형에게 맡겨졌다. 아무리 원한이 있다 해도 미친놈을 팬다는 게 내키지 않는지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계속된 독촉에 가장 약한 무기로 첫빵을 날렸고 그 한방으로 자신감이 생겼는지 휘두르는 손에 속도를 더해갔다. 신들린 듯, 아니 버서커라도 된 듯 몽둥이질을 해대는 거트 형. 회복 주문 쓰는 것도 잊지 않으며 쉴 새 없이 내려치는 그 모습에 세르 등 여자 애들은 고개를 돌렸다.

“주, 죽여줘. 제발!!”

여자 애들이 고개를 돌린 지 한참이 지나고 크로반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더니 간곡한 어조로 죽여 달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회광반조?

“형, 이제 끝내자.”

“벌써? 아직 남은 고문도 많다며, 조금 더 해도…….”

“그만 하자니까!!!!”

“으응, 그래.”

아쉬움이 남는 듯한 거트 형의 언행에서 뭐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판타지적 요소와 약간의 게임적 요소만 있을 뿐, 현실과 똑같은 곳에서 수많은 인간과 몬스터를 죽이니 어떤 식으로든 정신 이상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걸까?

“이제 끝났군.”

무기를 바꿔 크로반의 머리를 박살내 버리는 순간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뚝 끊기며 성안이 조용해졌다. 창가로 달려가 보니 성문 쪽이 온통 빛 무리로 뒤덮인 상태. 성의 획득과 함께 레이지 길드 원을 제외한 모두가 강제 텔레포트 되는 듯했다.

“흐음.”

‘마을 안’으로 이동 되는 것일까? 사냥터에서 마을로 돌아왔을 때처럼 감도가 3단계에서 2단계로 자동 변경되었다.

[레이지 길드가 master of castle, 에번스 성을 차지하였습니다.]

“와아아아아아!!!!”

크로반이 죽으면서 남긴 왕관을 가지고 최상층의 왕좌로 가 거트 형을 앉히자 알현실 입구에서 본 적 없는 노란 머리 여성이 걸어 들어왔다.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인사드리죠. 전 성 관리 담당 운영자 주르입니다. 이미 성 관리는 해보셨겠지만 여기는 master of castle, 다른 곳과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그런 거라면 난 없어도 되겠군. 실례지만 먼저 자리를 뜨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본인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사실 콜로니스트 님은 저희 운영자들이 뽑은 기피대상 0순위거든요. 그래 주신다면 제가 고.맙죠.”

기피대상이라…… 그만큼 많이 뜯어먹었다는 소리니 나쁘진 않지만 1순위도 아니고 0순위라는 건 조금 거슬리는군.

“그런데 말입니다. 괴도 J라는 건, 제롬 맞죠?”

“아아, ‘왕국의 보물’이 도둑질 당한 것 말씀이시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예, 언제든 뺏고 뺏길 수 있는 성인데 처음 얻은 사람들에게 왕국의 보물을 넘기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거든요. 제롬씨도 막내라서 궂은일을 맡은 거니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아참, 지하로 내려가 보시려면 왕에게 권한을 얻어야 하는데 지금 얻고 가시죠?”

“그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냥 직책 같은 걸 말하고 뒤에 수여라는 말을 붙이면 돼요. 예를 들면 ‘궁정 마법사 수여’라던지……. 워낙 종류가 많아서 따로 말씀드리겠지만 제일 높은 건 아무래도 ‘왕족’이죠. 왕이 부재중일 땐 대신 일을 처리 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높게 설정 되어 있으니까요. 단, 새로 길드를 만들지 않고 왕좌를 탈취해 버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서 선택하시는 편이…….”

“왕족 수여.”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트 형이 왕족의 권한을 부여해 줬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왕권 탈취 따윈 관심 밖이고, 확실히 왕국의 지하 창고라면 어지간한 지위로 돌아다닐 수 없을지 모르겠군.

“그럼 가보도록 하죠.”

“천천히 다녀오세요∼.”

운영자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자 아래에서 NPC들과 함께 성문 복구 작업을 하고 있는 길드 원들이 보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들 잘 하는군.

“이봐! 아론은 갔나?”

“예! 길드 원을 반절쯤 이끌고 약속을 지키신다면서 어디론가 떠나셨습니다!!”

우리가 이곳을 얻음으로 해서 무주공산이 된 오마이스 영지를 blood길드가 집어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러 갔음을 알 수 있었다. 사전에 약속해 놓은 일이니까. 어디보자…….

“거기, 너!!”

“예? 저 말입니까?”

“그래, 이름이 가미르라고 했던가? 날 왕국의 보물이 있던 곳으로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벌써 ‘왕족’의 효력이 발휘되는지 가미르라는 기사단장은 군말 없이 안내했다. 꾸불꾸불한 길들을 돌고 돌아 흔한 방법으로 책장 뒤에 숨겨진 지하 통로에 들어서자 그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횃불에 불을 붙였고 아무것도 손대지 말라 거듭 강조하며 앞장섰다.

“서재에 그런 방법으로 길을 만들어 놓으면 다른 사람에게 발견될 수 있지 않나?”

“왕족의 서고에 누가 감히 발을 들여놓겠습니까. 있다는 걸 안다 해도 그 많은 책들 중에 하나를 찾으려면 며칠은 꼬박 새워야 할 겁니다.”

쳇, 거기가 왕족의 서고인지 부랑자의 거처인지 내가 알게 뭐야? 그가 주는 핀잔에 속으로 구시렁대고 있을 때 벌써 도착한 건지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입니다. 들어가 보시죠.”

“허헛.”

안으로 들어가자 눈부셔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의 금은보화가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없어진 보물이란 것들 보다 훨씬 나은데?

“응? 이거 왜이래?”

한 움큼의 금화를 쥐어 품속에 넣어봤으나 아이템 창에 들어가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를 유지했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소냐!!

“끄응 차”

아이템 창을 뒤져 보따리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 하나 가득 쓸어 담고 밖으로 나가려하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키메라 두 마리가 문 앞을 버텨서고 있었다.

[그것들은 취득 불가 아이템입니다.]

“억지로 가지고 나가려다간 수호자인 저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쳇, 할 수 없군.”

챙겼던 금화를 모두 풀어놓는 걸 보고서야 키메라들이 문에서 얌전히 비켜섰다. 이 막대한 양의 금화를 위해서라면 싸워봄직도 하지만 그건 마스터가 된 후의 일이다. 나도 경험치 아까운 줄은 아는 놈이니까.

“흠, 흠. 이렇다 할 단서나 덜 털어 간 보물은 없는 것 같군. 이제 ‘돌’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사방에 널린 게 돌 아닙니까?”

“나랑 말장난하자는 건가! 그 ‘돌’이 있는 곳으로 당장 안내해!!”

“……알겠습니다.”

나도 ‘돌’이라는 것만 알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따지고 든다면 ‘왕국의 보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돌’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말귀를 알아들었다. 더 중히 여기는 만큼 대단한 물건이었으면 좋겠는데…….

“저기 단상 위에 있는 겁니다.”

또다시 한참을 걸어 도착한 방문을 열자 단상 위에 뭔가 조그만 것이 올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안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이긴 했지만.

“이 조막만한 것이 보물보다 중요한 물건?”

단상 위에는 화려한 그림이나 문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랑 An이라는 글자만 음각으로 새겨진 조막만한 돌덩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악으로부터 성을 보호해 준다고 전해지는 물건입니다. 별효과는 없어 보이지만 오래 됐다는 것에…… 헛!”

혹시나 하고 품안에 집어넣은 돌이 곧바로 아이템 창으로 들어가 버리자 그도 놀랬지만 내심 나도 놀랐다. 금화는 못 집어가게 하더니……. 치사한 것들.

“그만 가지.”

“하지만…….”

“어차피 별 효과는 없어 보인다며? 정 안내키면 올라가서 왕에게 보고해. 괜찮다고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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