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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세상 (16/43)

삭막한 세상

아이에게 쥐어줬던 스케치북처럼 뭘로 칠했는지 알 수 없는 선들이 가득 그려져 있는 낡은 종이. 그림이라 보기에도, 낙서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냥 쓰레기인 건가?”

피카소의 그림보다도 훨씬 난해한 선들에 쓰레기라 단정 짓고 버리려는 순간 꼬불꼬불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 선들 속에서 바르게 표시된 짧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지도 Lv.0? 지도 레벨이 1부터가 아닌 건가? 감도 설정 변경, 1단계. 도움말 콜.”

어지러움과 내가 나 같지 않은 느낌은 싫었지만 무턱대고 고생만 하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나았다. 도움말 창이 열리자 허공에 손을 움직여 스크롤 바를 조종해서 ‘보물지도’라 쓰인 곳을 누르자 ‘해석’과 ‘보물지도의 등급’, ‘보물을 파내는 법’으로 세분화됐고 차분히 한 가지씩 눌러보기로 했다.

“보물지도의 해석은 간단하다. 자신의 ‘지도해석’스킬에 맞는 레벨의 보물지도를 들고 ‘해석’이라고 외치면 된다?”

목소리에 반응해 지도에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지도 전체에 은은한 빛이 도는 가운데 조그만 빛 덩이가 지도의 가장자리에 나타났고 곧이어 지도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제대로 된 지도로 변하는 건가?

“……뭐야?”

지도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달라지긴 했지만 조금 더 절망적으로 변했달까? 은은한 빛은 단순한 연출이었는지 지도의 난해한 모습은 그대로였고 빛 덩이가 마지막에 머물던 곳에만 엑스 표시 하나가 더 새겨져있었다. 이걸로 어떻게 보물의 위치를 찾아?!

“미치겠군. 보물지도의 등급이야 뻔하니 넘어가고 ‘보물을 파내는 방법’이라……. 잡화점에 가면 50브론즈∼1실버의 가격에 곡괭이를 팔고 있는데 이 곡괭이로 표시된 지역을 파내면 된다. 자매품 삽도 있어요? 거기에 손으로 파헤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강철 손톱이 달린 건틀렛도 완비? 무슨 시체 파먹는 귀신도 아니고 그런 건 왜 준비해 놓은 거야?!”

이 지도라 하기 민망한 것으로 과연 보물이 숨겨진 곳을 찾아 낼 수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시도는 해봐야했기에 잡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대로라면 인피면구를 사용한 상태에서 NPC와의 거래불가라는 제약에 걸렸겠지만 영지의 주인인 길드의 일원이라는 특권 때문에 그런 제약 따위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음……. 삽 열 자루만 주세요.”

“열 자루나요? 혹시 건축 일을 하시나요?”

“아니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저희 삽 열 자루면 작은 동산 하나쯤은 만들 정도의 흙을 퍼낼 수 있다구요!! 설마, 저희 가게 제품의 품질을 못 믿으시는 건가요?”

두고두고 쓰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중세시대의 물건이 조악할 것이라는 예상도 상당히 작용을 했기에 가슴이 뜨끔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음…… 친구들이 대신 사다달라고 부탁을 해서 말이죠”

“뭐, 믿어드리죠. 개당 1실버씩 10실버 되겠습니다. 비싸단 말은 하지 마세요. 말했듯이 그만한 값어치는 할 테니까.”

이 당돌한 여자 NPC는 뭐라 말해볼 새도 없이 쏘아붙이며 흥정의 여지를 애초에 없애버렸다. 그 NPC의 태도가 재밌기도 했고 나에게 10실버는 그리 크지 않은 돈이었기에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값을 치르자 그녀가 잠시 안으로 들어가 물건들을 질질 끌고 나왔다.

“헥, 헥. 빨리 받아욧!!”

“상인들은 강한 거 아니었습니까?”

삽자루를 직접 들어보니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분명 저번에 상인초고수설에 의거하여 상인을 무적으로 만들었다 하지 않았었나? 아무리 잡화점이라지만…….

“강하죠, 하지만 모두가 육체적으로 강하란 법은 없잖아요? 특히 저처럼 가.냘.픈. 소녀가.”

“그렇다면?”

“마법 상인은 마법을, 저희 아이템 상인은 당연히 아이템 조합이죠. 그 비전의 기술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돈 떼어먹으려는 사람들 중 살아서 나간 사람은 없답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어리다고 얕봤다간 죽기 딱 좋겠군.

“아참, 이건 선물입니다. 삽자루 더미에 묻혀있던 건데 손님이 아니었으면 찾지 못 했을 테니 드리는 겁니다.”

[미스틱 심볼(mystic symbol)]

행운 10상승

비록 아무도 손대지 않는 ‘행운’의 상승이지만 공짜인데다 장비하기 쉽게 배지의 형태여서 기꺼이 받아 챙겼다. 보물 지도 얻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혹시, 여기가 어딘 줄 아세요?”

“이건…….”

이거 보여주면서 위치를 묻는다는 게 우습긴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고, 쪽팔림을 무릅쓰고 물어보니 아는 듯한 눈치였다. 저걸 알아 볼 수 있단 말이야?

“웬 낙서죠?”

“그럼 그렇지……. 아닙니다. 전 이만…….”

“찾지 않는 편이 좋으실 거예요.”

“무슨…….”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다가 NPC의 외침에 재차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할 수 없이 가게 밖으로 나서야했다.

“어딜 가서 정보를 얻는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정한 곳은 펍(Pub). RPG게임에서 제1의 정보 제공소로 뽑히는 술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부터 독하게 풍겨오는 술 냄새. NPC도 NPC들이었지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 끝도 없이 마셔대는 유저들의 공이 큰 듯했다.

“뭘로 드릴까요?”

“음……. 좋은 술이라 불릴만한 것들은 한 병에 얼마지?”

“하하, 드시기도 전부터 돈 걱정이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저희 가게는 싸고 맛 좋기로 유명하거든요. 좋은 거라면 한 병에 10실버 정도죠. 골드 단위의 술도 몇 병 갖추고 있습니다만 그런 건 귀족이나 되어야 마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 골드 단위의 술이란 것 한 병 싸주고 10실버짜리로 테이블마다 두 병씩 돌려.”

“예? 예, 알겠습니다. 당장 가져다 드리죠.”

그로서도 이 정도 파는 것은 처음인지 얼떨떨한 모습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아니면, 내 차림새가 그렇게 허름해 보인다는 건가?

“혹시 여기 그려진 곳이 어딘 줄 아나?”

“그건……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군요. 여보게들!! 여기 이 분이 테이블마다 슘페터 두 병씩 돌리라고 하시는군. 한 명씩들 와서 가져가!!! 이봐, 거기! 한 놈이 기어오면 모를 줄 알았나? 감히 누굴 속이려고…….”

“오오오오!!!”

꽤 고급술을 돌림으로써 저들의 시선과 환심을 단번에 사버렸으니 이제 정보를 얻는 일만 남았다. 설마 저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도 모르겠어?

“열다섯 테이블에 두 병씩, 3골드에 ‘골드 드래곤이 하품하다 흘린 눈물’이 2골드니까 도합 5골드 되겠습니다.”

“이, 이름이 특이하군요.”

“처음 이 술을 만든 사람이 꽤나 괴짜였다더군요.”

“자, 여기요.”

“안 찾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 순간 술집 주인도 잡화점의 그녀와 같은 말을 했다. 고갤 돌려 쳐다보니 역시나 컵을 닦으면서 딴청.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각 보물을 지키고 있다는 가디언 때문에? 하지만 Lv.0짜리 지도에서 나올 만한 것이라고 해봐야 오크 정도가 고작일 것 같은데……. 유저가 아닌 일반 NPC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라고는 하지만 ‘무적’을 자랑하는 상인 NPC 입에서 나올 소린 아니고. 설마 제작자들이 미친 척 최고위 가디언이 있는 지도를 등급만 낮춰 놓은 건가? 이 지도의 난해함이며…… 가능성은 충분하군.

“누구, 이 지도에 대해 아시는 분 없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왁자지껄 떠들던 자들의 표정이 일순간 경직됐다. 그것도 잠시, 못 들은 척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술 마시기에 열중했고 뻘쭘하게 서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근처에 있던 중년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자네한테 비싼 술도 얻어먹었는데 피해주기 싫어서들 저러는 거라네. 그런 종이는 잊어버리게. 그러는 편이 자네에게도 좋아.”

“걱정 말고 아시는 게 있다면 말해주십시오. 이래봬도 꽤 강합니다.”

“어허, 자네를 무시하는 게 아니야. 모험가라면 당연히 강할 테지. 하지만…….”

“정 알고 싶다면 내가 가르쳐주지.”

“영감님!!”

중년인과 말하는 중에 웬 주정뱅이 영감님이 불쑥 끼어들어 시선을 빼앗았다. 사탕을 탐내는 어린아이 같은 눈에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놓여있는 듯 꼴딱꼴딱 넘어가는 침, 그의 시선은 내 가슴팍을 향해 있었다.

“다 말해줄 테니, 아까 산 그 술…… 맛 좀 볼 수 없겠나?”

“그러죠.”

“자네까지 왜 이러나. 영감님, 이 청년은 벌써 슘페터 값으로 3골드나 되는 거금을 썼습니다. 아무리 ‘골드 드래곤이 하품하다 흘린 눈물’이 드시고 싶어도 그렇지…….”

그가 말하는 동안에도 나와 영감님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자리로 가 앉았고 이미 잔도 반쯤 채우고 있었다.

“에잉, 마음대로 하게!!”

“제 녀석이 사줄 것도 아니면서 큰 소리는……. 꿀꺽, 캬하, 과연 비싼 술은 다르구나!! 자네, 그곳까지 직접 데려다 줄 테니 한잔 더 줄 순 없겠나?”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병째 드리죠.”

“저, 정말인가? 젊은이가 통이 크구만!! 당장, 당장에 가세.”

노인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게라도 되는 양 앞으로 가는 걸음 수보다 옆으로 비틀거리는 수가 더 많은 불안한 그 모습이 못미덥긴 했지만 정보를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영감님, 업히십시오.”

“아냐, 난 멀쩡해!!”

혼자서도 걸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무리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던 노인은 결국 바닥과 입맞춤을 했고 더듬더듬 일어나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런…….

“‘골드 드래곤이 하품하다 흘린 눈물’을 빨리 드시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업히겠네, 업혀, 업히면 될 거 아닌가. 빨리 엎드리게.”

목적이 있는 사람을 설득하기란 무척 쉬운 일이다.

“저조그롱∼.”

처음 만났을 때도 약간 취한 상태였던 데다 ‘골드 드래곤……’의 취기가 이제야 올라오는지 가면 갈수록 영감님의 혀가 꼬였다. 제길, 완전히 취하기 전에 도착하는 수밖에.

“뎌기, 나뮤 아대에…….”

근처 뒷산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느껴지던 움직임이 사라졌다. 그래도 근처까지 온 게 용하군.

“아버지!! 어디 계세요!!!”

영감님을 다시 펍으로 모셔다 드리고 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아들로 보이는 중년인이 목청껏 소리치며 산을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내 눈이 마주치고 등에 업힌 영감님에게로 시선이 옮겨지자 그는 달려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았다.

“넌 뭐 하는 놈이야?”

“손놓고, 영감님이나 받아요.”

내 키가 더 큰 덕분에 목을 심하게 조여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가뿐히 뿌리칠 수 있었다. 영감님을 떠넘기고 아들에게 약속했던 술병을 내미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건지 눈빛이 달라졌다.

“이, 이건…….”

“영감님께 약속했던 ‘골드 드래곤이 하품하다 흘린 눈물’이란 술입니다. 깨어나면 드리세요.”

술병과 내 얼굴, 그리고 영감님을 번갈아 보는 그의 눈에는 뭔가 갈등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오면서 영감님이 조금 드신 걸로 해드리죠.”

“그, 그래 주시겠습니까?”

“실망이 크실 수 있으니 적당히 드세요. 전 이만…….”

“살펴가세요!! 복 받으실 겁니다!!!”

영감님 아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오른 산의 중턱, 유난히 눈에 띄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그 밑에 땅을 갈아엎은 듯, 주변 풀 색깔이 아닌 검은흙으로 된 지점이 있었다. 저긴가?

“어디 보자, 지도와 매치가…… 될 리 없지만 나무하난 확실하군.”

워낙 낙서 같은 그림이라 다른 주변지형과 매치가 될 리 없었지만 어린 아이가 그린 것 같은 나무 그림만큼은 확실했다. 맞든 틀리든 시도는 해봐야 했고 삽을 꺼내 땅을 파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딱딱한 무언가가 삽 끝에 걸렸다.

“찾았다!!”

그 주위를 삽으로 조심스럽게 긁어내고 손으로 직접 파내어 꺼내놓자 묵직하진 않았지만 상자가 꽤 큰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디언은 상자를 연 다음인가?”

아직 가디언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상기하고 조용히 스펠을 읊조려 공격에 대비한 뒤 상자 뚜껑을 발로 차서 열었다. 그와 함께 튀어나온 건 개구리 한 마리. 특별히 독이 있는 놈도 아니고 1써클의 마법을 쓰기에도 마나가 아까운 그냥 개구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뭐야, 이것들은. 어린 애 낙서 같다고 생각했더니 진짜 어린애가 그린 지도란 말이야?”

들어있는 물품은 직접 집에서 만들었는지 엉성한 바느질이 훤히 보이는 인형 하나와 대충 걲은 나뭇가지를 어설프게 가공해 놓은 듯한 목검 한 자루, 낡아빠진 가죽 장갑 한 켤레가 전부였다.

“하아……. 역시 아이들의 보물이란 건가? 옵션 제로에 목검은 공격력 3? 난 몇 시간 동안 뭘 한 거지?”

보물하나 찾아보겠다고 몇 시간동안 설친 것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 인형 밑에 깔려있던 편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신이시여, 제발 저희 엄마가 나을 수 있게 해주세요. 빨리 나아서 전처럼 함께 산책도 하고, 음식도 만들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 1골드나 하는 신전에서의 치료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30실버의 약값이라도 어떻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나중에 열 배, 스무 배로 꼭 갚아드릴게요. 그리고 매일매일 어른들 말씀도 잘 듣고 기도도 꼬박꼬박 잘할게요. 안 들어주시면 이제 신님을 안 믿을 거예요. 제가 매일 확인할 테니 돈이 마련되신다면 봉투 안에 넣어주세요. 꼭이요!!]

“역시 어린애로군. 1골드, 어린애에겐 과한 돈이지만…… 괜찮겠지.”

일반NPC라면 어른에게도 큰돈이라 위험할 것이긴 했지만 상황이 어려우니 괜찮을 것이란 생각도 들어 1골드를 봉투 안에 넣었다. 가지고 있던 중급 포션 하나를 더 넣고 다시 상자를 원래 자리에 묻고 있을 때 이 상자의 주인인 듯한 어린 아이들이 도란도란 얘기하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들키지 않는 편이 좋겠지, 블링크.”

삽을 챙겨 넣고 나무 위로 올라앉아 기다리자 아이들이 조그만 모종삽으로 상자가 묻힌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이 파내는 흙의 양은 작지만 셋이 협동하니 내가 팠던 속도와 엇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었고 상자 위의 흙을 탁탁 턴 뒤 뚜껑을 열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먼저 잡은 것은 편지가 담겨있던 봉투. 혼자서 그랬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른 둘은 자신들의 보물인 장갑과 목검을 집어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들어있다!!”

“또 한 건했네!!”

여자아이가 봉투 끝을 만져보더니 다른 두 아이를 향해 소리쳤고 나머지 아이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한 건’이라니, 뭔가 말이 이상한데?

“고, 골드야!!!”

“이얏호!! 대박이다!!!”

“또 어떤 돈 많은 멍청이가 걸려들었군.”

갈수록 말이 이상해져 가는 것이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래서 순진한 어른들은 속여먹기 쉽다니까. 어린애가 조금만 안 되어 보여도 돈을 펑펑 써대거든.”

“그런데 너도 어떻게 저런 글을 쓸 수 있는 거냐, 아홉 살이나 됐으면서.”

“나도 저거 쓰면서 어찌나 소름이 돋던지. 그래도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저씨들을 속이려면 어쩌겠어. 참고 써야지.”

여자아이는 다시 한 번 편지를 읽어보더니 닭살이 돋는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곤 고이 접어 다시 봉투 안에 넣었고 안에 들어있던 1골드짜리 동전은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아참, 지도는 얼마나 뿌렸어?”

“동네 꼬마들 셋 고용해서 하루 15장씩 그려내고 있어. 몇 군데 옥상에서와 골목 군데군데에 뿌려놨고.”

“아홉 살짜리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어른…… 꼬마들을 고용…… 이거였나? 사람들이 조심하라던 게? 후우……. 정말 삭막한 세상이야.”

“앗, 나무 위에 사람이 있다.”

“들었나봐, 어떡하지?”

“어떡하긴, 튀어!!!”

조용한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아이들은 날 발견하고 상자를 묻지도 않은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려가 잡아서 혼쭐을 내줘야할지 모르지만 허탈감과 황당함은 그럴 의욕조차 나지 않게 만들었다.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마을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자 광장 이곳저곳에서 장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귀에 들어오는 건 보물지도에 관한 것들. 정확한 시세가 정해지지 않았는지 서로 제시하는 가격이 달랐고 장사하는 자들끼리 다툼도 일어났다.

“비록 유저지만 어른들이 저 모양이니 애들이 보고 배울 게 없는 거겠지. 후우……. 1레벨 지도 삽니다!!!”

결국 두 명이 합의해서 가격을 정하는 것까지 본 후 나 역시 장사꾼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산다는 사람이 많을 법도 했지만 비싸게 책정된 가격 때문인지 판다고 달려든 사람 수가 꽤 됐다. 처음 가격은 모두 4골드. 하지만 조용히 2, 30실버 정도 깎아 주겠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해석.”

괜히 한 번에 많이 사들였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었기에 3골드 70실버를 주고 한 장만을 사들였다. Lv.0짜리와는 달리 해석하기 전에 불투명 유리를 씌워놓은 것처럼 흐릿한 모습. 확실치는 않지만 알아볼 수 있는 지도일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해석에 실패했습니다 ]

“아까 올린 정도론 1레벨 해석도 안 된다는 건가? 다시, 해석.”

[해석에 실패했습니다. ]

“해석, 해석, 해석!!!”

[해석에 실패했습니다.]

[지도 해석 스킬이 상승했습니다.]

다행히 스킬이 모자랐던 것은 아닌지 뿌옇던 부분이 사라지며 뚜렷한 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꽤나 그럴싸한 모양. 전에 사뒀던 마법지도와 매치 시켜 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듯싶었다.

“가봤던 곳이어야 할 텐데…….”

전에도 말했듯이 이 지도에 표시되는 곳은 지나치기만 했을지라도 ‘가봤던 곳’에 한정되므로 아직 안 가본 곳이 많은 내겐 표시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흐음……. 아, 여긴가?”

밀림 때 여지저기 휘젓고 다닌 덕인지 생각보다 지도에 표시 할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지도 속 내용을 이리저리 돌리다 발견한 무성한 숲, 근처에 도로와 연못이 있는 것이 보물 지도의 그것과 똑같았다.

“이거, 쉽잖아?”

1레벨이라서 일까? 지도가 비교적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찾기가 너무 쉬웠다. 지도를 따라 이동한 곳은 초보 존. 엑스 자 표시는 숲의 중앙에 있었지만 이 숲의 끝까지 간다 해도 오크 전사나 슬라임이 고작이기에 소풍가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울 수 있었다.

“룰룰루∼ 응?”

“마비 풀릴 때까지만 버텨 줘.”

“큭, 나도 마비 됐어!!”

다섯 명의 파티가 오크, 고블린 파티에 맞서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오크를 상대하기도 벅찬 듯, 무기를 맞댈 때마다 뒤로 밀려났고 설상가상으로 두 명이 고블린의 (대롱으로 쏘는)침에 맞아 행동불능 상태였다. 도와줘 볼까?

“매직 미사일.”

매직 애로우로도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는 녀석들에게 그 윗 단계인 매직 미사일을 날려줬으니 결과는 뻔했다. 재빠른 고블린 한 마리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파악 못하는 오크 둘, 그들이 생존한 전부였지만 셋의 협공에 곧 동료들의 뒤를 따라갔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멸 당할 뻔했는데…….”

“아직 레벨이 안 되시는 것 같은데 너무 깊이 들어오신 것 같군요. 안전한 곳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아닙니다. 목적이 있어 왔거든요.”

그는 한 손으로 다른 손에 들린 지도를 가리키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우연히 1레벨 지도를 얻어서 팔자 펴보려고 왔다, 이건가? 뭐, 나쁠 건 없겠지.

“저도 보물 때문에 왔는데 안쪽으로 가실 거라면 도와드릴까요?”

어차피 시간도 남는 데다 주로 어떤 게 나오는 지 알아보기 위해서 동행을 권했다. 하지만 못 믿는 눈치. 나 역시 보물 지도를 들어 보이고 나서야 조금은 경계가 풀어지는 듯했다.

“이제 거의 다…… 저깁니다!! 확실해요.”

“가자!!”

지도 든 청년으로부터 확신이 담긴 말이 나오자마자 나머지 사람들은 우르르 달려가서 검과 손, 지팡이들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삽을 살 돈이 없는 건가?

“이걸 쓰시죠. 전 여분이 있어서요.”

“오옷, 감사합니다. 삽이나 곡괭이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10실버가 없어서 손과 검으로 땅을 판다는 그들의 말에 새삼 내가 특별하게 커왔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벌벌 떨면서 쓰는 골드 단위의 돈을 아주 초보 때부터 만져왔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플레이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삽을 적극 활용해 상자를 파냈고 무척이나 낡아 있으나마나한 자물쇠를 발로 차서 부숴 버렸다.

“열렸다!!”

“라이트닝 스피어.”

상자가 열림과 동시에 나타난 코볼트 두 마리와 오크 전사 한 마리. 가디언의 존재를 잊고 있었는지 상자를 열었던 자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고 덕분에 나만 고생이었다.

“매직 미사일”

한 번의 수고를 더해 세 마리의 숨통을 끊어놓자 그들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고 상자 안의 내용물을 감상해 볼 수 있었다.

“돈으로 3골드에 하급 보석 몇 개, 미확인 숏소드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는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은 거듭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하급 보석이야 처분해도 몇 실버 안 나올 테지만 미확인 아이템이라? 흥미롭군.

“이걸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어떤 것일지 궁금하군요.”

미확인이라 하면 특별한 옵션이라도 붙어있다는 소리였으므로 이들과 헤어지기 전에 알아두고 싶어 1골드짜리 확인 스크롤을 건넸다. 이거,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도 있겠는데?

“이런 비싼 걸……. 알겠습니다. 확인.”

스크롤이 잘게 찢기며 생긴 빛이 검으로 옮겨가자 검신에 종이 딱지 한 장이 생겨났다. 이름 하여 감정표.

[숏소드]

공격력 : 32 + 5 내구력 : 400 + 100

“…….”

“…….”

한동안 모두가 침묵했다. 이 정도라면 무기 점에서도 사도 운 좋으면 쉽게 뽑을 수 있는 것이니까.(무기 점에서 사는 무기들도 약간씩의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역시 1레벨이라는 건가?

“꽝이로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 걸 팠어도 썼을 텐데 제 건 마을로 가져가면 되죠.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저, 마을까지 좀…… 하, 하…….”

이제 내 몫의 보물을 파내러 가려는데 지도를 들고 있던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마을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이들만으론 살아서 나가기 힘들겠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리턴 스크롤 한 장을 쥐어주자 또다시 감사의 인사를 연발하는 그들을 보니 가끔 초보를 돕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어서 가세요.”

“아, 아닙니다. 먼저 가세요. 이렇게 도움을 받았는데 휑하니 가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저희는 가시는 것을 본 뒤에 가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를 은혜도 모르는 놈들로 만들고 싶으신 건가요?”

이렇게나 우기니 내가 없는 사이 몬스터가 출현할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걷고 있을 때 뒤쪽에서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 그들이라면 이미 마을로 가고도 남았을 시간이긴 했지만 오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했기에 이상히 여기며 돌아가 봤다.

“그러기에 리턴을 쓰쟀잖아!!”

“그게 얼마짜린데! 레벨도 얼마 안 되는 거, 한번 죽고 말지.”

일곱의 오크, 아니 한 마리가 죽었으니 여섯의 오크에게 둘러 싸인 세 명의 얼굴이 낯익었다. 10실버짜리인 리턴 값을 아끼기 위해 걸어서 나가려고 한 건가?

“원하는 대로 죽어서 나가게 해주지.”

도와주지 않기로 했다. 생각 같아선 오크들에게 헤이스트라도 걸어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성향이 대폭 하락할……?

“그러고 보니 깎일 수치도 없잖아? 숨겨진 힘의 분출, 헤이스트.”

왕을 죽이고 쫓기게 된 순간부터 성향은 악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무리 몬스터를 잡아도 변동이 없는데다가 추격자까지 죽인 탓에 더 깎일 수치가 남아있지 않았다. 가뜩이나 힘겹게 버티고 있는데 오크들이 빨라지자 그들은 놀란 눈으로 쓰러져 내렸고 품에서 리턴 스크롤과 좀 전의 것으로 보이는 검 하나를 떨어뜨렸다.

“안 돼…….”

헛된 죽음이 된 것에 절규하는 모습을 보며 고소해하면서도 오크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헤이스트의 지속시간이 아직 남았으니까.

“됐다, 파이어 볼.”

인간과 마찬가지로 헤이스트가 끝난 뒤의 부작용이 적용되었다.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오크들. 서로에게 몸을 의탁하려 모여든 덕분에 단 한방으로 끝낼 수 있었다.

“꼭 돈에 목숨을 걸어야 했을까?”

가진 자의 여유, 혹은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고작 10실버에 목숨 거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씁쓸하게 검과 스크롤을 회수하고 지도를 펴들자 보물이 묻힌 곳과 멀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라운드 실드(wood)]

내구력 : 300 수리불가, 3%확률로 데미지 반사.

“이건 제법 쓸 만하군, 리턴.”

가디언으로 튀어나온 슬라임 두 마리는 파이어 애로우에 의해 핵이 파괴되었다. 상자 안에서 나온 미확인 아이템은 나무로 된 라운드 실드. 나무이기 때문에 수리는 못하지만 확인해보니 옵션은 초보용으로 적당했다. 성안의 내 방으로 돌아와 살피니 책상 위에 그간 상황에 대해 적힌 종이가 있었다.

“우호와 적대가 하나씩, 우세하군. 이제 준비를 시작해 볼까?”

우호세력들과 만날 약속을 잡고 음식 장만을 명하러 가는 김에 방금 얻은 라운드 실드를 수련 중인 아론에게 던져줬다. 이제 복수의 칼이 완성되었으니 베어주마, 크로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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