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름 3권
● 차 례
반격 2
삭막한 세상
크로반 최후의 날
매지션 마스터
도둑의 길
슬라임 킹
여인궁 1
반격 2
“뭐라고 지껄이든 들어주다가 그냥 돌아가라고 해요. 그게 중립을 택하는 거니까. 목을 치면 적대, 따라가면 충성이니 조심하고요.”
괜히 얼굴을 보였다가 일이 꼬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가 돌아갈 때까지 방에서 연설문을 손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갔다, 나와도 돼.”
“빨리 와서 이것 좀 읽어봐요.”
똑같이 보고 읽는 거라도 아래만 쳐다보고 읽는 것과 앞을 보다가 가끔씩 아래를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략이나마 먼저 읽고 외우게 했다. 그 동안 신입 길드 원들은 저마다 짝을 지어 성안을 뒤지고 다녔고 연무장에선 연설 준비가 한창이었다.
“모두 조용!!”
전사의 외침이란 스킬을 사용하여 평소의 수배나 되는 크기의 목소리를 만들어 낸 아론 덕분에 조금은 웅성거리던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거트 형이 단상 위에 오르자 모두의 시선이 형의 얼굴로 쏠렸고 나와 아론이 조금 뒤쪽의 양옆에 버티고 섬으로써 부담을 덜어줬다.
“흠흠, 난 길드 마스터 거트라고 한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돈과 명예만을 노리고 가입한 자는 떠나라는 것이다. 레벨 제한만을 가입 조건으로 내 건 것은 인맥이 없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자들을 발굴해내기 위함이지 돈 따라, 명예 따라 움직이는 박쥐새끼들을 배불려 주려는 것이 아니다. 솔직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혹 그런 자가 있다면 다섯을 셀 때까지 자진해서 탈퇴하도록.”
몇몇 눈치를 보는 자들이 보이긴 했지만 선뜻 나서서 탈퇴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없나? 좋다, 그럼 믿겠다. 그래도 오늘까지 시간을 줄 테니 해당되는 자가 있다면 탈퇴하도록. 만약 나중에 밝혀지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이 없고 신뢰가 없는 길드는 개개인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결국엔 무너진다. 따라서 난 여러분이 비록 단시간에 모여들었지만 한 식구처럼 지내주길 바라는 바이다. 신뢰는 시간과 정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난 우리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는다. 그대들의 믿음을 내게 줄 수 있겠나?”
“예!”
“좋다, 그대들의 등 뒤를 서로에게 맡길 수 있겠나?”
“예!!”
때마침 해가 거트 형의 등 뒤에 위치해 몸 주위로 묘한 빛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부처나 예수처럼 뭔가 대단해 보이게 만드는 연출, 자연이 가져다 준 뜻밖의 행운이었다.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본성이다. 겁나는 자는 포기해도 좋다. 하지만! 난 승산 없는 게임을 할 만큼 멍청하진 않다는 것을 알아두기 바란다.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았다. 그때까지 믿음이 선 자는 나의 검이 되어 함께 해주기 바란다. 이상!!”
강압적인 듯한 말투가 거슬렸을 수도 있지만 그 만큼 단호함을 잘 표현해줬기 때문에 괜찮을 듯싶기도 했다. 이제 회유될지 어떨지는 그들의 몫. 우리가 어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요리를 준비해 놨으니 1층 연회장으로 가셔서 드시면서 얘기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아론의 말에 바쁘다는 몇을 제외하곤 모두 1층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갔고 다시 텅 비어버린 연무장에 남겨진 단상을 치우는 건 우리의 몫이었다.
“대 인원이다 보니 식비부터가 장난이 아니군.”
“그래도 한번뿐이니까. 그보다 형, 미리 준비한 거예요? 그런 대로 괜찮던데.”
조금 전 거트 형이 했던 말들은 내가 적어준 그것이 아니었다. 내용은 비슷했지만 핵심만을 집어서 직설적으로 나타낸 연설. 이런 건 거의 모 아니면 도인 식이기 때문에 미리 알았다면 말렸을 것이다.
“아, 그게…… 사실은 긴장해서 연설문이 적힌 종이를 놓고 왔지 뭐야. 그래서 기억나는 대로 말하려고 했는데 어찌나 말을 사악하게 꼬아놨는지 당최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할 수 없이 기억나는 대로 요점만 간단히 말해버렸지.”
“원본을 안 봐도 눈에 선하군. 말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거겠지. 당장은 덥석 받아들이지만 나중엔 빼도 박도 못하도록.”
“아니, 뭐…….”
“변명은 됐고, 일단 거트 형이랑 먼저 가있어. 다 치우고 갈 테니까.”
그렇게 쫓겨나듯 등 떠밀려 도착한 연회장. 우리의 등장과 함께 자기소개를 하며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던 신입 길드 원들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저희는 의식하지 마시고 계속 이야기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길드 사냥을 갈 터이니 빠지실 분은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길드 사냥이라는 말에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 정도 인원이, 그것도 하나같이 고렙들이 갈 수 있는 곳이란 많지 않았지만 루이너스 길드가 지금껏 차지해 놓은 전용 사냥터가 꽤 되었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다시 연회장 안에 이야기꽃이 피었고 거트 형도 그 틈바구니에 끼어 친밀도를 상승시켰다.
“휴, 나도 이제 먹어 볼…….”
“아론, 길드 사냥 좀 다녀와라.”
“지금? 난 아무 것도 못 먹었는데…….”
“갔다 와서 먹으면 되잖아. 난 어디 좀 들렀다 갈 테니까 먼저 가있어. 얼른!!”
“쳇, 그래. 간다, 가. 가면 되잖아.”
도착하자마자 쫓겨나는 아론의 두 손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각종 빵들이 가득 들려있었다.
“못 말리겠군. 청소야 NPC들이 알아서 할 테고,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건가. 텔레포트.”
내가 가고자하는 곳의 좌표가 기억된 스크롤을 찾아 찢자 나무에 오르는 구렁이처럼 발끝에서부터 빛이 휘감겨 올라왔다. 오늘따라 유독 오랫동안 눈을 괴롭히는 빛의 잔영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긴 곳은 몬스터의 울부짖음도, 인간의 추악한 그림자도 없는 태평한 숲이었다. 숲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종종 걸음은 어느새 전력 질주로 변해 있었고 입에선 익숙해져 버린 타이밍에 맞춰 블링크란 단어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하, 하, 하하하하하하!”
입이란 곳에선 분명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눈에는 물이 고여 흘러 내렸다. 이젠 흔적만 남은 집터. 찾고 있던 집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이번에도…… 당황했던 거니? 응? 그런 거야?”
숲은 신음처럼 흘러나온 내 말을 조용히 삼키기만 할 뿐, 어떠한 대답도 토해내 주지 않았다. 한동안 자리를 지키다 일어났다. 그리고 지도를 펴둔 채 집을 지을 수 있을 법한 공간이 있는 곳은 모두 돌아다녔다. 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후우…….”
여러 가지 생각들이 아무런 통제 없이 머릿속을 맘껏 헤집고 다녔다. 본성을 차지하고 나면 날 더욱 부담스러워 할까? 그럼 성만 차지하고 바로 탈퇴해야 하는 건가? 아니, 내 이름에 붙은 명성 자체가 부담스러운 거라면 캐릭터를 삭제하는 게 좋을까? 그 전에 수백, 수천 명을 PK해서라도 먼저 만나봐야 하나?
“으아아아아아!!”
숲도 한 번에 삼키지 못할 만큼 커다란 괴성을 질러댔다.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고 가슴의 답답함은 조금 나아진 듯싶었다. 하지만 또다시 시야가 흐릿해졌다. 멀리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답답한 마음에 인피면구를 벗어 버렸으니 이대로라면 죽겠지.
“으헉?”
그냥 죽고 싶었다. 그래서 무릎사이에 파묻고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죽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의문에 찬 비명 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쌔신으로 보이는 자들의 형상이 한 무리의 인간들 시체 위에 서있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사생활까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계약이 이행되기 전엔 당신의 목숨도, 저의 목숨도 혼자의 것이 아닙니다.”
“네가 뭔데 끼어들어!! 윈드 커터.”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거칠게 몰아치자 그의 몸이 거짓말처럼 옆으로 미끄러지며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그 모습에 더욱 분노하며 연달아 날린 세 발의 파이어 볼, 그러나 단 한발도 스치지도 못했다.
“잠시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 볼 시간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헛소리 그만하고 꺼져버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멍청하게도, 스피드 중심인 그에게 발동시간이 긴 헬파이어 스펠을 읊다가 놈이 날린 마비 침에 당해 꼼짝없이 쓰러져 버렸다. 비웃기라도 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는 아무 표정 없이 돌아섰고 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미쳐버리겠군.”
약 30초 후, 마비가 풀렸음에도 일어서지 않았다. 아니, 일어서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내가 택한 것은 로그아웃. 제2의 세계를 떠나 제3세계인 꿈속으로의 진입을 시도했다. 제발 그곳에서만큼은 그녀를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빌며…….
“어제는 잘 갔다 왔냐?”
“너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좀 들렀다가 온대놓고 로그아웃을 해버리다니.”
다음 날, 다시 제2세계인 이곳에 접속할 수밖에 없었다. 제1세계인 현실에서 난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고 제3세계인 꿈속은 오래 머물 수 없으니까.
“미안, 미안. 잘 끝나긴 한 거야?”
“그럭저럭. 아이템 수거는 몇 사람이 도맡아서 하고 사냥이 끝난 뒤에 정확히 배분했지. 처음 갔을 때 루이너스 자식들이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사냥하고 있기에 혼쭐을 내서 쫓아 버렸고.”
“잘했어. 전용으로 쓰던 사냥터 중 하나를 개방하라는 건?”
“적당한 거 하나 골라서 BBS에 글 올렸어. 길드 원들도 얼마 전까지 힘들게 렙업 했으니 쉽게 납득했고.”
각 성을 차지한 길드들이 고레벨 사냥터의 70%이상을 독점하고 있던 탓에 인맥 없이 커온 유저들은 마스터의 길이 요원하기만 했던 게 사실이었다. 새로 들어온 우리 길드 원들 또한 얼마 전까지 마찬가지였고. 그런 상태에서의 사냥터 개방이니 민심 획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잘됐네. 그럼 더 매지션에 다녀올게. 일단 그들만이라도 설득 시켜 놓아야지.”
“벌써? 우리를 알리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
“어차피 그들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본성이고 나발이고 다 물거품이야. 아무래도 디아블로 길드는 회유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오면서 바깥 날씨가 짜증날 정도로 맑다는 걸 알았기에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였지만 굳이 스크롤을 사용해서 이동해버렸다. 수배가 풀리진 않았지만 인피면구 덕분에 활동은 자유로웠으므로(착용 시 범죄자라도 NPC와의 거래만 안 될 뿐, 마을을 돌아다닐 순 있다.) 성문까지 도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길드 장을 만날 수 있을까요?”
“보아하니 길드 가입 신청잔가 본데 이제 오다니 배짱이 두둑하구만. 따라오슈.”
입구를 지키던 자는 내 차림새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멋대로 날 길드 가입 신청자로 둔갑시켜버렸고 특별히 급한 일도 아니었기에 한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어이, 지각생 하나 추가!!”
“쳇, 시작한 지가 언젠데 이제 오는 거야? 저 맨 끝에 세워.”
등 떠밀려 서게 된 줄. 면접관으로 보이는 자들에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시험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그들이 문제를 내면 그것에 대해 답을 말하고, 틀리면 다음 사람이 대신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리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요하지는 않았다.
“자네까지 5명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사막을 건너다 샌드 웜을 만났다고 가정할 때, 어떻게 하겠나? 파티 원의 구성과 레벨은 마음대로 정해도 좋네.”
“음……. 그러니까 샌드 웜이 점프했을 때 세 명이서 레비테이션을 걸어 더 높이 띄우고…… 아, 모두 마법사죠. 떨어뜨려서 정신없게 만든 다음에 물 계열의, 아니 사막이니까 불 계열의 마법으로…….”
“다음.”
“움직이지 않고 사라지길 기다리겠습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사내의 말은 가볍게 무시되었고 다음 사내가 대신 짧게 받았다. 면접관들은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 잠시 상의를 하더니 합격이란 통보를 내렸다. 그러곤 마지막인 나를 슬쩍 보더니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마지막이군. 늦게 왔다는 건 그만큼 자신 있다는 소리겠지. 묻겠네, 대다수의 RPG에서 마왕은 왜 공주만을 납치하는가?”
자신이 낸 문제가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띠우는 사내. 다른 문제들과 질문이 판이하게 다른 걸로 보아 의도적으로 날 떨어뜨리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후후, 당해줄 것 같은가?
“마왕 후손 잉태설.”
“뭐?”
“공주 납치가 후손 계획의 일부란 말입니다. 현재까지 나온 RPG들에서 마왕의 본거지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통계 낸 자료에 의하면 50%이상은 북반구의 끝 부분에 있고, 20%이상은 이세계(異世界)에 존재한다는 결과가 나오죠. 즉, 마왕이 사는 곳의 기후는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사는 지역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마왕과 그 종족들은 인간 세계의 기후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확연한 증거지요. 그래서 마왕은 인간 중에서도 우수한 유전자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를 납치하여 인간 여자와 자신 사이의 잡종을 만든 후 세계를 다스리게 하려는 계획을 세운 겁니다. 다른 것도 물으시겠습니까? 더 물으셔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이, 이…… 그래! 그럼 이것도 설명해 보게. 주인공 일행의 전투 상황과 아이템 습득 결과를 알려주는 자는 누구인가!! 예를 들면 A는 드래곤에게 25의 데미지를 입혔다, 라던가 B는 250의EXP를 얻었다, 라던지 하이포션을 얻었다, 하는 것들 말이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걸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땀을 닦는 면접관. 안타깝게도 이번 질문 역시 머릿속에 답이 들어있었다.
“직업 해설자 설과 주인공 싸이코 설. 어느 쪽을 먼저 들으시겠습니까?”
“아, 앞의 것부터 듣지.”
두 가지 설을 제시하며 선택을 종용하자 그는 실수했음을 깨eke고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먼저 설명할 것은 직업 해설자 설, 말할 분량이 꽤 많았기에 먼저 입을 풀어야 했다.
“직업 해설자 설은 말 그대로 RPG속에서는 주인공 일행의 전투 상황을 쉴 새 없이 설명해주는 전문적인 해설자가 있다는 견해이죠. 그들은 직업적으로 철저히 훈련받은 아나운서로서, 정확한 상황전달로 주인공 일행의 상황파악 능력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공수 집중력 향상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존재란 것입니다. 동료 중 앞을 잘 못 볼 정도로 노쇠한 마법사가 있을 경우 그 덕을 톡톡히 본다고 하더군요. 하나, 멀리 떨어져서 큰 소리로 상황을 전달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논리적 모순이 발견되었고 현재는 ‘주인공 일행 중 한 명 이상이 이러한 전문적인 상황 설명가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았겠느냐.’라는 견해가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주인공 싸이코 설은…….”
한 번에 많은 말을 하려니 숨이 찬데다 입에 침까지 말라 말을 멈춘 뒤 그의 앞에 놓인 쥬스 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미 이야기 속에 빠진 그는 내 뜻을 이해하고 선뜻 컵을 내어 주었고 시원하게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주인공, 또는 주인공 일행 중 한 명은 약간 정신상태가 이상한 사람으로, 언제나 자기 눈에 보이는 일들을 입으로 실황중계 한다는 것입니다. 비단 전투 시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여러 가지 조사를 할 때도, 보물 상자를 열 때도 그 미친 짓은 멈추지 않는 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제 이름이 A라고 하면…….”
말을 잠시 멈추고 품에서 1실버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고 돈을 줍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A는 바닥에서 1실버를 습득했다!! 뭐 이런 거죠. 이러한 싸이코 설은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 일행을 하나의 정신병자 집단으로 치부해버리는 위험성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쉴 새 없는 공격을 받고 있기도 하죠. 특히 마을사람이나 동료들과도 일절 대화를 금하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는 주인공이 전투 중에만 갑자기 촉새처럼 나불거릴 수 있느냐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사이코설 옹호자들은 ‘그러니까 더 미친놈이다. 자폐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다.’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제 뭘 물어보실 거죠? 얼마든지 답해드리겠습니다.”
“흠흠, 됐네. 2차 시험은 저 친구를 따라가면 될 걸세.”
1차 면접은 가뿐히 클리어. 이것도 슬슬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연무장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소환술사들이 저마다 한 마리씩의 오우거를 소환해 내었다.
“이번에는 각자 한 마리씩의 오우거를 상대하는 것입니다. 만일을 위해 오우거는 무조건 방어만 하도록 설정해 둘 것이고 얼마나 빨리, 적은 마나로 잡는지와 실용적인 콤보를 사용하느냐가 선별 기준입니다. 그럼 맨 앞의 분들부터 나와 주세요.”
제자리에서 방어만 한다는 말에 첫 번째 조는 그 자리에 뻣뻣이 서서 마법을 난사해댔고 심사관들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본 두 번째 조는 그래도 나았다. 어설프게나마 몸을 움직여 줬으니까. 볼만한 것은 3조부터였다. 그들은 오우거가 실제 공격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몸을 움직였고, 심지어 아무도 없는 허공에 마법을 뿌리는 놀라운 집중력까지 보여주는 자까지 있었다. 제법 다양한 콤보가 터져 나오며 순서는 돌고 돌아 어느덧 내 차례까지 돌아왔다.
“시작!”
“이게 좋겠군. 바인드, 위대한 불꽃의 분노, 익스플로젼. 멸망으로 이끄는 홍염의 불꽃, 그랜드 파이어.”
딜레이를 이용한 콤보, 밀림에서 차고 넘칠 정도로 연습을 했었기 때문에 타이밍 맞추는 것쯤은 간단했다. 약 30초 만에 해치워버린 내 모습을 멍하니 넋 놓고 쳐다보던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깨달고 다시 오우거 공략에 열중했고, 그 동안 어떻게 알았는지 더 매지션의 길드 장, 파트리크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잠시 시험장 안을 스윽 둘러보더니 곧장 내게로 걸어온 걸로 보아 방법이야 어찌됐든 내 정체를 확실히 아는 것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가입 신청자로 오해 하기에 장난 좀 쳤습니다.”
길드 장이 깍듯이 대하는 모습에 날 골려먹으려 했던 자를 비롯해 함부로 대했던 자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론님께서 가신 지 꽤 됐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귓속말을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니 마침 신입 길드 원을 뽑는 날이라 혹시나 하고 와봤죠.”
“그래도 어떻게…….”
“변장술이 없는 남성 유저는 인피면구를 썼을 때 자세히만 보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마왕의 공주 납치에 대해 재미있는 답변을 하신 분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고요.”
“변장술?”
“20세 이상 여성들만 익힐 수 있는 특수 스킬인데, 굳이 설명하자면 화장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남성 유저들이 자신들에게도 그 스킬을 만들어 달라 요청했지만 회사 측에선 현실에서 수술하면 캐릭터를 바꿔주겠지만 그 외에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죠.”
특이한 취향의 인간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다. 술렁이는 연무장을 나와 그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방안에는 그와 나, 단 둘뿐이었고 믿을만한 자들로 하여금 주위를 물리게 했다. 면담의 시작, 먼저 인피면구를 벗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왔을 지는 대강 짐작하실 거라 믿습니다.”
“레이지 길드의 본성 공략과 그에 따른 협조 요청, 맞습니까?”
“예.”
정확했다. 아론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부탁을 하러왔는지 그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제길, 이러면 처음부터 꿀리고 들어가는데.
“여러분의 수배령을 해제시키려면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돕겠다고 나서기는 힘들군요. 묻겠습니다. 성을 얻은 뒤에도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힘과 권력에 물들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만약 변한다면 단죄의 검을 내리십시오. 그런 날이 온다면 제가 직접 성문을 열어 드릴 것입니다.”
“좋습니다. 힘이 되어 드리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계획이 확실히 짜이면 그때 다시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힘이 되어 주겠다. 하지만 벌써부터 무리는 않겠다. 거대 길드를 맡고 있는 자다운 침착한 결정이었다. 이 정도도 우리에겐 감지덕지. 칼자루에 검신을 끼워 넣은 셈이니 이젠 날카롭게 날을 갈 차례이다.
“쉽지 않은 결정, 감사드립니다.”
“말했지 않습니까, 콜로니스트님이라면 괜찮다고. 하나, 디아블로 길드는 다를 겁니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위에 서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요. 만약 설득을 시도하실 거라면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필시 간 사람을 죽일 겁니다.”
더 매지션이란 라이벌이 없었다면 본성을 쳤어도 수백 번은 쳤을 거라는 얘기를 누차 들었던 터라 그 정도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다. 남은 건 다른 3개 성의 판단 뿐. 그들 중 한 곳만 설득하더라도 성공 확률은 반 이상 될 것이라 확실할 수 있었다.
“다른 성의 마스터들과 자리를 주선해 드릴까요?”
“아니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수성만 신경 쓰기도 벅찰 것 같군요.”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그럼 공적인 이야기는 끝났고, 아까의 마법에 대해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마스터 레벨에 도달하셨다는 소린 못 들은 것 같은데……….”
그가 원하는 대로 익스플로젼의 딜레이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고 그들이 개발한 몇 개의 콤보를 얻어왔다. 돌아와선 바로 레벨 업에 열중. 과연 사냥터 독식이 좋긴 좋은지 8일 만에 남은 경험치를 모두 채워 마스터까지 단 한 계단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길던스턴 : 그레이, 미러 길드 공성 준비 중. 10분 이내로 도착할 듯.]
“역습조는 잠시 이리로 오도록.”
전(前) 미러, 그레이 길드 원을 포함한 근 10여 명의 인원이 나를 따라 성문 옆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그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수성 준비를 시작했고 좁은 입구에서부터는 우리의 뒤에 검은 그림자들이 은밀하게 뒤따랐다.
“이쯤이 좋겠군.”
“뭐가 말입니까?”
[길던스톤 : 이동 시작!!]
“자네들의 심판의 장소. 블링크.”
두 길드가 공성을 선포해 이들이 내게 칼을 들이대기 전에 먼저 선수 쳐서 안전한 2층의 베란다로 이동했다. 뭔가 알아챈 듯한 자들과 어리둥절해하는 자들. 선공을 취한 쪽은 상황파악을 한 자들이었다.
“들켰다. 쳐라!!”
“뭐, 뭐야?!”
갑자기 돌변해 공격하는 전 그레이, 미러 길드 원들. 미처 대비 못한 몇 명은 쉽게 처리했지만 상대들도 싸움에 이골이 난 자들이라 그 다음부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사방에는…….
“크악!!”
정보길드의 고급 인력을 고용해 설치한 덫과 함정이 잔뜩 깔려 있으니 무사히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하다 봐도 무방했다.
“지금 그레이 길드와 미러 길드가 연합하여 공성을 선포했다. 이들은 우리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그들이 심어놓은 자들이고 그대들 역시 이유야 어찌됐든 다른 길드에서 온 자들이지. 먼저, 그대들 모두가 길드에서 제명될 것임을 말해두겠다. 이제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앞으로 그대들의 길드가 택할 길이다. 우호인가, 적대인가. 만일 우호라면 눈앞에 있는 자들을 섬멸하고 아니라면 지금 당장 길드를 몰고 와도 좋다. 오늘, 우린 저들을 통해 힘의 차이를 보여 줄 것이다.”
“추방, 엘트니. 추방…….”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트 형이 미러, 그레이 길드 원을 시작으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고 모두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멈칫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미러, 그레이 길드 원들도 함부로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아군이 될 수도 있는 상대들이니까. 제일 먼저 손을 쓴 것은 소울 길드의 소속으로 밝혀진 자였다.
“하앗!!”
죽이면 PK라는 제약이 있음에도 그의 검은 망설이지 않았다. 정말 아군이 될 건지, 기회를 엿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확실한 아군이 되기로 결심한 듯 매섭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른 길드의 사람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나중이야 어떻게 되든 일단 그의 뒤를 따라서 검을 날렸고 미러, 그레이 길드 원들 역시 배수의 진을 치고 덤벼들었다. 배수가 아니라 배덫 쯤 되려나?
“역시 싸움 구경하고 불구경이 제일 재미있다니까.”
“성문은 아직 뚫리지 않고 있대. 아마조네스와 린의 애로우 샤워가 한몫 톡톡히 해내고 있는 모양이야.”
“아직도요? 흠, 생각보다 공격 측이 약하네요. 본보기로 삼기엔 딱 좋겠어요.”
이쪽도 슬슬 정리가 되어갔다. 연무장 내에는 악 성향이 아닌 사람이 없게 되었고 미러, 그레이 길드 원 세 명이 서로 등을 맞대고 겨우 버티고 서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나머지 사람들의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이 그들의 몸을 유린했고 살아남은 몇 명만이 레벨다운 되지 않았다는 기쁨에 미소 지으며 각자의 길드로 돌아갔다.
“이제 움직여 볼까?”
성문은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궁수와 팀을 이룬 마법사들이 간혹 날아오는 공격들을 방어해주자 상대는 성문 근처에도 오기 힘들어했고 이대로는 너무 시시한 싸움이 될 것 같아 일부러 성문을 열어 주도록 부탁했다. 처음엔 절대 안 된다는 반응이었지만 강력히 주장하자 마지못해 성문을 열었고, 재빠른 몇 명의 상대가 아마조네스들의 견제를 뚫으며 전진해왔다.
“월 오브 스톤.”
화살 비를 피하느라 정신없던 자들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성벽이 닫히지 못하도록 갖은 애를 다 썼지만 성문을 닫는 대신 돌이 벽으로 입구를 막아버림으로써 그들을 우리 쪽에 가두어 버렸다.
“이런 걸 낚시라고 한다지 아마?”
당황해 벽을 두드리는 그들의 손은 어느 순간엔가 회색빛을 띠면서 멈추어 떨어졌다. 그때, 벽이 너무도 쉽게 허물어 졌다. 이런 일반의 도로는 검풍, 검기, 검강을 막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성문은 다시 닫혔다.
“이런 방법으론 무린 건가? 그렇다면…… 좋아.”
성벽에서 화살을 쏘는 것만으로 패배시키는 건 너무 싱거웠다. 그렇게 되면 ‘저 화살만 막으면 돼.’라는 생각으로 다시 공성을 선포하게 될 것이고, 그걸 보는 다른 사람들은 ‘할 만한가 본데? 그럼 우리도 한번…….’이란 생각을 가질지도 몰랐다.
“로그 분들, 아직 계십니까?”
“예, 몇 명은 돌아갔지만 아직 남아있습니다.”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합니다. 추가 수당을 드리죠. 물론 길드 장에겐 비밀로 말입니다.”
적지 않은 추가 수당을 제시하자 그들도 흔쾌히 승낙했다. 연무장의 입구에 깔린 덫을 수거해 지정해주는 자리에 다시 깔아놓는 로그들. 준비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먼저 한가롭게 기다리는 길드 원들을 뒤로 물리고 궁수들에게도 손짓하자 쉼 없이 쏟아지던 화살 비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그녀들은 재빨리 자리 이동을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성문이 부서지지 않게 살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뭔가 함정이 있을 것이다. 주위를 경계하며 움직여라.”
함정인 걸 알면서도 그들은 들어 올 수밖에 없었다. 사람 수가 두 길드 합쳐 근 200명에 이르니(한 길드 당 최대 인원 100명) 들어오는 줄은 뱀의 꼬리처럼 길어졌고 150여명 쯤이 진입했을 때 단호히 꼬리를 잘라버렸다.
“홀리!!”
“물은 나무의 양분이 될지니, 그로우(grow)!!”
“모두 공격하라!!”
물과 식물 속성의 혼합, 물을 양분으로 삼은 나무줄기는 웬만한 장정의 허리둘레보다 더 굵어져 성문을 대신했고 거트 형의 홀리는 후방의 적들을 가뿐하게 날려버렸다. 이어지는 아마조네스의 화살 공세. 공격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그 무지막지한 비 때문에 움직이는 자 따윈 존재치 않았다.
“방패! 방패 부대!!”
실드 파이터가 제법 있는지 부대라고까지 칭하며 불러대는 길드 장은 그들을 자신의 주변에 세우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전진을 명했다. 실드 파이터가 아닌 자가 방패를 든다고 해서 화살이 방패를 뚫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방패로 바닥을 제외한 전 방위를 가리는 이들. 약간의 충격은 있을지언정 화살을 확실하게 막아냈다. 하나, 바닥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 실수였다.
“크악! 내 다리!!!”
발목을 무는 강철 덫에서부터 독 바른 침이 쏘아지는 덫까지 다양한 트랩들이 발동되며 겨우 진정되었던 진영을 다시 흩트려 놓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그로우, 그로우, 그로우, 휩(whip)!!”
거기에 헬 파이어가 가세하자 완전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거대한 식물이 채찍질하듯 내려쳐지니 그 방향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고 덫이 가장 적은 곳을 찾아 무조건 뚫었다.
“이거, 양치기라도 된 기분인데?”
그들을 몰아넣은, 가장 덫이 적은 장소는 바로 연무장. 입구까지야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이들의 수를 반 이상 줄일 수 있는 양이 매장 되어있는 곳이었다.
“조금 더 재미를 줘볼까? 파이어.”
손에서 옮겨 붙은 불은 빠른 속도로 줄기를 타고 올라갔고 보는 이로 하여금 하얗게 질리도록 만들었다. 흡사 거인족이 불꽃의 채찍을 들고 휘두르는 모습이랄까? 위력을 더한 채찍은 그들의 움직임을 더 빠르게 만들었다.
“돌격조와 기습조, 지원조는 성문 앞에 있는 놈들을 쓸어버리고 수비조는 연무장에서 나오는 입구를 봉쇄한다. 명심하라, 이것은 우리의 압도적인 힘을 인식시키기 위한 싸움이다.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알겠나?”
“예!!”
3개조가 아직 들어오지도 못하고 식물과 씨름하는 바보들을 처리하러간 사이 수비조는 대열을 갖추고 좁은 길목을 막아섰다. 대열이 갖춰지고 그 뒤로 아마조네스가 자리 잡을 무렵 안쪽에서 폭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그에 맞춰 그녀들의 활시위가 힘차게 당겨졌다.
“적들이 다시 몰려온다. 좁은 공간인 만큼 쪽수로 득을 보지는 못할 테니 자신감을 가지고 막도록!! 난 주포를 쏘겠다.”
말뜻을 이해한 에린 누나는 빙긋 웃으면서 품으로 손을 넣어 푸른 활을 꺼내주었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 이젠 익숙해져 자세가 바로 잡혔다. 마스터하면…… 궁수로 나가볼까?
“이렇게나 많이 몰려있으니 못 맞출 걱정은 없겠군!!”
어차피 제멋대로 날아가는 것, 옆으로 뉘어서도 쏴보고 두 개의 화살을 잡는 시늉을 해 두 발을 한 번에 날려보기도 했다. 맞은 곳은 모두 제각각. 한 발은 성벽의 일부를 박살내버리기도 했지만 나머지 여섯 발은 제 몫을 다하며 상대의 전의를 무참히 깨부쉈다.
“이건 사기야!!”
“사기는 무슨. 누나, 마나 회복할 시간만 벌어줘요.”
마나가 완전히 고갈되면 포션을 사용해도 일정 시간동안 효과를 보지 못하므로 약간의 마나는 여분으로 남겨둔 터였다. 거기에 상급의 마나 포션을 들이키니 금세 마나가 차올랐고 몇 분만 더 버티면 적어도 다섯 발 이상, 무리하면 예닐곱 발도 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잠깐!!”
“뭔가?”
“협상을 하자. 어차피 너희 쪽 희생자는 한 명도 없으니 우리가 패배를 인정하고 약간의 배상금을 치르지.”
배상금이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들을 본보기로 삼겠다했으니 그냥 보내 줄 순 없었다. 제길, 성벽도 수리해야하고 추가 수당도 줘야 하는데…….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본보기야. 그리고 당신들을 죽이면 돈 나올 데가 생기지 않겠어?!”
다시 한 번 뇌궁이 당겨졌다. 이미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들과 그들이 떨굴 아이템을 합치면 적어도 본전치기는 할 거라는 예상. 그러나 그들은 저항하기보다 한 명이라도 더 사는 방법을 택했다.
“리턴”
스크롤을 찢고 무방비 상태가 되어서 죽기도 많이 죽었지만 살아나간 사람 수도 적지 않았다. 연무장에 남은 건 아직 작동하지 못한 수많은 덫들과 뇌궁에 의해 패인 구멍들, 아이템이 전부였고 아이템이 떨어진 범위가 너무 넓어서 약간의 어지러움을 감수해야 했다.
“감도 설정 변경 1단계, 수거.”
“어라? 여기도 끝난 거냐? 도와주러 왔는데.”
성문을 맡은 아론이 건재한 모습의 1개조를 이끌고 돕기 위해 달려왔다. 어깨너머로 보니 나머지 2개조도 별다른 피해가 없는 듯, 그야말로 완벽한 대승리였다.
“적은 괴멸 직전이지만 우리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다. 완벽한 승리를 자축하며, 건배!!”
그들이 남기고 간 아이템들이 생각보다 비싼 값에 팔린 덕에 부숴 먹은 성벽을 수리하고, 추가 수당을 넉넉히 줬는데도 파티를 할 돈이 남았다. 운영자가 홈페이지에 올렸다는 이번 공성 결과 때문에 거트 형이 파티 도중 수없이 많은 귓속말과 쪽지를 받아야 했지만 그것은 즐거운 비명이었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도 저 멀리 다른 성과 공성전 할 준비를 한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우리 쪽에 쳐들어오려는 자들은 없었다.
“이제 슬슬 노려봐야 하는 거 아니야?”
“콜 오빠가 마스터되면 그때 하는 게 어때요?”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끝도 없어. 길드 세력도 어느 정도 틀이 잡혔고 해볼 만하겠군. 다들 이의 없지? 그럼 추진한다.”
다들 부담스럽고 긴장된 모습이지만 강하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먼저 더 매지션에 연락해 3개성의 주인들과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주선자인 더 매지션 길드의 성이었고 우리를 배려해주기 위해 대변인, 혹은 호위 한 명씩을 동반해도 좋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제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말을 빙빙 돌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다름 아닌 본성 공략 때문입니다.”
“!!”
“아아, 저희 길드가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주인공은 바로 여기 레이지 길드 분들이시죠.”
놀람으로 펴졌던 얼굴이 언짢음으로 구겨졌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들을 뛰어넘은 것도 모자라 본성까지 집어삼키겠다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만.
“본성이라면 독재를 막기 위해 더 매지션 길드가 앞장서서 사수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더 매지션이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나타난 지도 모르는 길드에게 넘기겠다니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 주십시오.”
“넘기다니요, 저희에겐 그런 권한이 없답니다. 다만 이 분들을 도울 뿐이지요. 여러분들께도 ‘통보’를 하는 게 아니라 협조해 주실 수 없는지 의사를 '묻고'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돕겠다는 이유를 말씀해 달라 이겁니다!!!”
상당히 흥분한 상태인지 이마에 핏줄까지 솟게 만들며 열변을 토하는 사내. 파트리크는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내게 눈짓을 했고 나 역시 이 상태로 설득하긴 무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조심스레 인피면구를 벗었다.
“다시 인사 드려야겠군요. 전(前) 라스트 길드에서 활동한 콜로니스트라고 합니다.”
“!!”
“라, 라스트 길드가 레이지?”
“맞습니다. 공지로 보셨을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길드 명과 친목이었던 길드 성향을 바꿔야했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배령을 해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희를 엿 먹인 NPC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이 방법을 택했습니다. 밀림에서의 일 따윈 전부 잊었으니 성을 차지한 뒤 보복이나 불이익이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신중히 생각하시고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후사정을 모를 때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이 한 일이 있으니 그때에 대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이들은 그 점을 짚어주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근심의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만약…… 저희 모두가 반대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더 매지션이 디아블로를 막는다 해도 라스트, 아니 레이지 길드만으로는 저희 셋을 감당하지 못할 텐데요.”
“그래도 싸워야겠죠. 자세히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저희에겐 이미 2곳의 협력 길드가 있습니다. 결코 약하지 않은 분들이죠. 그리고 저희가 국왕을 죽였을 때도 마스터 없이 10명 남짓의 인원이었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이곳에서 해코지 당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편하게, 천천히 생각하세요.”
셋은 끝내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본성을 치는 시간도 그 만큼 연기되었고 구상해야하는 작전의 경우의 수도 더 늘어버렸다.
“휴, 이제야 두 가지 상황일 때의 작전을 끝냈군.”
현재 짜놓은 상황은 셋. 모두가 적으로 돌아설 경우와 둘이 적으로 돌아설 경우. 셋 모두가 아군이 될 때는 작전이고 뭐고 없이 쪽수로만 밀어도 이길 수 있으므로 제외시켰으니 이제 가정해 볼 상황의 수는 많지 않았다.
공지
[패치가 있겠으니 잠시 후 다시 접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무슨…… 로그아웃.”
패치가 이루어 질 동안 재빨리 컴퓨터로 자리를 옮겨 힐름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접속하자마자 제일 위쪽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새 패치 사항에 관한 공지,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보물찾기에 관한 패치 사항]
저희 제작진이 오랫동안 공들여오던 보물찾기가 드디어 선을 보이게 됐습니다. 보물지도는 각종 몬스터와 NPC에게 얻을 수 있으며 새롭게 추가된 ‘지도 분석’스킬이 충족되어야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총 6단계의 지도 등급 중에서 2등급까지는 누구나 해석이 가능하고 찾아 열 수 있지만 3단계부터는 ‘로그’클래스 만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 보물 상자는 지도 등급에 맞는 가디언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로그 혼자서 높은 레벨의 보물찾기를 해낼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보물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상자 속의 진실은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로그에게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특권을 주긴 했지만 보물찾기라는 자체가 워낙 큰 매력을 지녔기에 간단히 묻혀버렸다. 뭐, 로그가 레벨을 올리기도 어렵고 그다지 쓸모가 없던 게 사실이었으니 그 정도 특권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스크롤을 아래로 좀 더 내려 보니 보이는 글자, 패치 완료 예정시간 2분. 서둘러 컴퓨터를 자동 종료 시켜놓고 힐름 접속기기인 헬멧을 눌러썼다.
“접속”
“콜!! 보물지도 모으러 가자!!!”
접속하기가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아론이 들어왔다.
“그래, 작전도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나가…….”
“아참, 아까 3개성 중 하나에서 중립을 유지하겠다고 연락 왔다.”
아론의 그 말은 밖으로 나가겠다는 내 의지를 단박에 꺾어 버렸다.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겨우 짜낸 두 가지 상황의 작전이 모두 물거품. 둘이 모두 적으로 돌아설 때와 하나만 적으로 돌아설 경우, 이 두 가지의 작전을 새로 짜내야 했다.
“진작 말해 줄 것이지…….”
“뭐? 갈 거야, 말 거야?”
“너 혼자 가!!!”
“싫으면 말 것이지 성질은…….”
아론이 나가고 본성 주변의 지형도와 지도를 펼쳐놓고 살피는데 스킬 상승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도 해석 스킬이 상승했습니다.’라고.
“지도 해석이라면 보물찾기할 때 충족 시켜야 한다던? 이렇게 올리는 거였나?”
한 가지 알아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종이에 배치도를 그리는 데 다시 한 번 좀 전의 소리가 들려 왔다. 지도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지도에 관한 모든 것이 포함되는 듯, 작전을 세우는 내내 그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나중에는 하도 시끄러워 감도를 3단계로 바꿔버리기까지 했다.
“으아∼ 끝냈다. 나도 나가 볼…… 응? 너, 지도 모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었냐?”
“에이씨, 말도 마라. 뭔 놈의 지도가 그리도 안 나오는지…… NPC한테 찾아가도 따로 주는 놈이 있는지 그런 거 모른다고 하고. 저렙 몬스터를 학살해대도 한 장 떨어지질 않는다.”
아론의 성격이 급한 것도 있겠지만 쉽게 얻을 수 없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도 전용 사냥터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찾는 중이라니 나 역시 무작정 길을 나섰다. 내가 택한 곳은 마을의 골목. 모름지기 숨겨진 것을 찾으려면 사람이 쉽게 다니지 않는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뭐, 간혹 허를 찌른답시고 사람 많은 곳에 던져놓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진짜로 미친 짓이었던 건가?”
운을 믿고 뭐 하나는 걸리겠지, 라는 생각으로 걸었지만 2시간 뒤 남은 건 다리에 전해오는 통증뿐이었다. 지도는커녕 NPC란 놈을 보지도 못했고 썩은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더미 쪽에서 날아온 낙서 같은 종이에 얼굴을 맞기까지 했다.
“읍, 퉤퉤.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