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성 연합 (13/43)

6성 연합

“뭐? 그들이 왜…….”

“그건 모르겠지만 힘으로 뚫고 옵니다. 제가 있던 곳의 길드 원들은 이미…….”

그동안 잠잠하던 그들이 왜 갑자기 공격해 들어오는 것일까? 단순히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아니면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해 듣고? 둘 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모순 또한 가지고 있었다. 점령을 위해서라면 아마조네스 길드를 공격할 법했지만 마스터 하나 없는 이곳에 길드가 연합해서 쳐들어 올 이유가 없었고, 우리를 찾아 온 것이라면 현상금이 얼마나 올랐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길드가 연합해 움직이는 것은 이해가 갔지만 누가 알려줬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런 횡포를 부릴 수 없을 터인데 이 중에 알려줄 사람이 있다면 이미 진작 알렸을 테니까.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너흰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 돼.”

“너는? 너도 거의 마스터에 근접했잖아. 죽으면 복구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우리랑 함께 가자.”

“아뇨, 뇌궁도 보관소에 맡겼고 길드 장이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여차하면 몸을 뺄 테니 걱정 말고 먼저가세요.”

“그럼 ‘그곳’에서 기다릴게. 매스 텔레포트.”

‘그곳’이란 말을 이해한 에린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도 망설임 없이 던전 내로 진입했다. 누군가 이곳을 지나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면 최대한 몬스터를 공격하지 않아야 했지만 혹시라도 에린 누나가 이곳으로 들어올 경우 곤란을 겪을 수 있으므로 최소한의 수보다 조금 더 죽이며 들어갔고 4층에 도착하자 무언가 작업에 열중인 리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 맺힌 검은 기운은 파이치치로의 이동 열쇠인 구슬로 뻗어나가 힘 겨루기를 시작했고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간 우리는 비명과 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내질렀다.

“안 돼!!!”

쩌저적-!

검은 기운과 한동안 힘겨루기를 하던 구슬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점점 힘을 더해 가는 검은 기운에 항복을 선언했고 크고 작은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떨어졌다.

“파이치치!!”

발악과 같은 뒤늦은 외침만이 방안을 가득 메울 뿐, 전처럼 이동할 때 나타나는 어떠한 빛도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자네에게 주었던 옷과 모자가 내게 있는 어둠의 힘을 제어하고 탁한 기운이나마 신성주문을 쓸 수 있게 해줬었네. 그게 없으니 온 몸에 어둠의 힘이 가득 차더군. 쓰고 싶진 않았지만 이곳을 지키려면 힘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고, 몇 달간 어둠의 힘을 키워 드디어 마을을 다시 외부 세계와 차단했다네. 마을을 위한 일이니 신께서도 용서해 주시겠지.”

“빌어먹을.”

확실히 나중에 확인해 본 옷과 모자는 엄청난 신성력 증폭 기능이 있었다. 두 가지가 세트 아이템이어서 보너스 효과까지 생겨 세리와 비슷한 레벨인 프리스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던 거트 형의 DP가 이젠 세리에 필적하게 됐으니까. 하지만 만일 있을지 모르는 일행의 전멸에 비하면 너무 싸구려였다.

“무슨 일이 있나?”

“아니에요, 여기서 시간 좀 때워도 되죠?”

“좋을 대로 하게.”

혹시 올지 모르는 귓속말에 대비해 모두 감도를 2단계로 바꾸어 놓고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렸다. 5분, 10분이 지나도 에린 누나에게 아무 소식도 없자 거트 형은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고 15분 만에 드디어 내게 귓속말이 들어왔다.

[에반제린 : 놈들이 노린 건 밀림과 너희, 둘 다였어. 마을은 전멸이야. 지금 그리로 갈게.]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였다. 이 사실을 길드 원들에게 알리고 에린 누나가 올 때까지 같이 머리를 짜내려 했으나 뭔가를 떠올리기는커녕 걱정이 앞을 가려 정신이 마비되고 있었다.

“제길, 곧 있으면 레벨 업인데.”

현재 아론의 레벨은 99, 그것도 막바지에 치달은 상태였다. 혹시라도 죽어서 레벨 다운이라도 되면 그야말로 언제 다시 올릴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 로그아웃이라도 시킬까 생각했지만 에린 누나가 오기로 했으니 일단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형, 경험치 바는 얼마나 찼어요?”

“맨 끝, 남은 공간이 보이지도 않아.”

“그럼 이것들을 잡으세요.”

나키르는 자신의 아공간에 잠재워두던 소환 수들을 몽땅 꺼내 놓았고 아론이 잡기 쉬운 위치에서 테이밍을 풀었다. 6개월 간 밀림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져 고레벨의 몬스터를 상당수 테이밍 했기 때문에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실패, 역시 99에서의 경험치 바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 소환수가 모두 사라져버리다니.”

소환 수 없는 소환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응원이외에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짐만 될 뿐인 나키르는 걱정 말라며 자진해서 로그아웃을 시도했고, 나키르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에린!!”

“제길, 모두 전투 준비!!”

거트 형이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치자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그리고 빨라지는 소리, 길게 늘어져 보이는 그림자의 수가 하나가 아닌 것은 무언가 일이 잘못됐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쥐새끼들이 여기들 숨어있었군. 따라와 보길 잘했어.”

“에린 누나는 어떻게 한 거냐!!”

“아? 그 여자? 마을로 고이 보내드렸지. 이 검으로.”

은을 입힌 건지 은을 통째로 가공해 만든 건지 던전에서도 은은한 빛을 내는 롱소드를 어깨에 걸친 사내가 수하들과 함께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고 에린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에 모두가 분노했다.

“다크 썬더!!”

동굴 안에서 대형 마법을 펼치는 것은 자살과도 같은 행위이니 어떤 마법을 써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내 뒤에서 선제공격이 날아갔다. 맞은 부위가 썩어들어 가기 때문에 인간이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 중 하나라 그 마법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고 있었고, 고개를 돌리자 리치가 돕겠다는 듯 손을 앞으로 향하며 한 걸음 나섰다.

“이런!!”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뒷사람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급히 고개를 숙여 피해버렸고, 그 뒤에 있던 마법사가 얼굴에 맞아 즉사했다. 자신의 힘이 통한다는 걸 확인한 리치는 신이 나서 또 한 번 다크 썬더를 날렸지만 이번엔 앞으로 나선 프리스트에 의해 간단히 막혀버렸다.

“스펠 없이 쓸 수 있다 해도 내게 디바인 마크가 있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디바인 마크는 신성력을 증폭시켜주고 시동어만으로 웬만한 신성주문을 쓸 수 있도록 해주는 프리스트의 마스터 아이템이었다. 아직 둘 정도밖에 마스터가 나오지 않았을 텐데 그 중 하나라는 것은 보통 길드가 아니란 소린데…….

“너흰 누구냐!!”

“누구긴, 너흴 잡으러온 저승사자님들이시지. 설마설마 했는데 몬스터하고 손을 잡다니, 역시 타락할 대로 타락했군. 하지만 어둠의 속성 따윈 통하지 않아!!”

“스펙터!!”

양쪽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을 때 리치가 다시 한 번 나섰고 상대편에서도 프리스트가 디바인 실드를 외쳤다. 하나, 리치도 통하지 않는 걸 알면서 계속 쓸 만큼 멍청하진 않았고 회색으로 변해 쓰러져있던 마법사의 시체 속에서 반투명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키에에에에에!!!”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마법형 언데드 몬스터, 스펙터였다. 물론 상대가 상대인 만큼 나오기가 무섭게 온몸이 난자당하긴 했지만 처음 펼친 마법이 버스트 플레어였고 적지 않은 충격을 주며 적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썬더 오거.”

“검강.”

“마나 샷.”

혼란한 상태를 틈타서 날아간 공격은 안타깝게도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강기류는 상대편 기사들의 대응에 별탈없이 사라졌고 비교적 약한 마법과 권풍, 비도는 디바인 실드에 막혀 힘을 잃었다.

“신이 주신 무한한 영광과 힘이여, 홀리.”

“신이 주신 무한한 영광과 힘이여, 홀리.”

일부러 한 박자 늦게 날린 홀리마저 상대 프리스트의 홀리에 막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여러 증폭 기능 덕분에 마스터의 홀리에 밀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눈부신 홀리의 격돌이 끝난 후 본격적인 전투로 들어갔다.

“죽어, 죽어, 죽어!!!”

“다크 미사일.”

“윈드 커터.”

아론은 대장으로 보이는 자와 호각을 이루고 베르와 카엘 역시 그런 대로 버텨줬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상대는 접근전 전문인 기사가 대부분이었고, 우리 쪽은 거리를 두고 싸우는 타입들이니까. 검강을 쓰는 자들에겐 4써클 이하의 마법이 무효화기에 공격 패턴이 단순해 질 수밖에 없어 발동 속도가 빠르고 위력이 강한 프리스트들의 홀리에만 의지하니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 확실했다.

“아론!!”

“형!!”

챙강-!

설상가상으로, 내구도가 많이 상한 상태에서 격한 싸움을 치르던 아론의 검이 동강나며 주인의 볼을 베고 지나갔다. 위험에 빠진 아론을 구하기 위해 화살을 날린 레이는 자신의 방어가 사라져 등에 긴 검상을 입었고 베르 역시 자신의 상대를 발로 차내고 대장에게 덤벼들었다가 옆구리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다크 썬더!! 이리로.”

대장의 얼굴에 다크 썬더를 날려 5m가량을 밀어 낸 리치는 아론을 데리고 뒤로 빠졌고, 혼자 두 몫을 하는 베르를 위해 수시로 다크 썬더를 날리며 아론에게 하고자하는 말을 꺼냈다

“자네, 그 레벨 업이란 걸 하면 저들을 꺾을 수 있는가?”

“그건 왜요, 전 싸워야 합니다. 놓으세요!!”

아론이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려 했지만 생각보다 리치의 힘이 대단했는지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가면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 심리가 은연중에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두 동강 난 검으로 뭘 하겠단 건가!! 대답이나 해.”

“아마도요, 오리하르콘 소드만 있다면 가능할 겁니다.”

“그럼 날 베게.”

갑작스런 리치의 말에 멈칫거린 아론은 물끄러미 리치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결심을 했는지 힘이 느슨해진 손을 뿌리치고 반쪽짜리 검을 고쳐 잡았다

“됐습니다. 어차피 아저씨를 죽여도 업 할 수 있을 만한 경험치가 아니에요.”

“이대로는 너희도 죽고 나도 죽어!! 이래봬도 그동안 상당히 강해졌으니까 걱정 말고 공격해.”

“싫어요.”

“해.”

“싫……!! 아저씨!!!”

쇠심줄 같은 아론의 고집에 리치는 직접 아론의 검에 머리를 받아 죽음을 맞이했다. 그와 함께 아론의 주위로 쳐지는 절대의 배리어. 마스터 레벨에 도달해 신이 강림했음을 알리는 증거와도 같은 힘이었다.

“이런, 젠장.”

“이제 어떻게 해?!”

“괜찮아, 전직하지 않는 이상 죽으면 레벨 다운이니까. 일단 다른 놈들부터 죽여!!”

리치란 방해꾼이 사라지자 베르는 더욱 수세로 몰렸다. 이제 막 90대 초입에 진입한 오른 카엘도 마나 량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단 시간에 끝내려 몰아치는 자들을 나머지 사람들이 막기란 무리였다. 첫 번째 희생자는 이미 큰 상처를 입은 레이였다.

“그대, 검의 끝을 본 자여…….”

“오리하르콘 소드로, 당장!!”

여기저기 자신이 가진 마비 침을 뿌려대던 세르의 죽음은 아론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지만 그 목숨을 건 공격은 우리에게 정말 값진 것이었다. 동귀어진을 노린 덕에 무려 네 명의 기사가 마비되었고 그 중 셋이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그래도 아직 다섯이나 되는 마스터 급 기사들이 남았지만 말이다.

“허허, 급한 모양이군. 좋다, 이 검으로 뜻을 이루어 보도록.”

“잠깐, 혹시 지금 전직할 수 있나?”

아론은 상대가 신이란 사실도 망각했는지 함부로 반말을 내뱉었고 신은 허허 웃으며 넘길 뿐, 다른 NPC처럼 극악무도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아론의 질문에 사라지려던 신은 깨어지기 직전인 배리어를 다시 유지시켰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 다른 클래스로의 전직을 말한다면 불가능하네. 그건 마을의 길드에서 해야 하지. 원칙은 원칙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같은 기사 클래스의 다른 타입을 선택한다면 가능하네. 예를 들면 실드 파이터라던가, 스피어 나이트라던가…….”

“실드 파이터, 그걸로 하겠어!!”

갑자기 다른 무기로 바꾸기보단 익숙한, 거기다 오리하르콘 소드도 쓸 수 있는 실드 파이터가 낫다고 생각했는지 거침없이 답했고 신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부터 자네는 80레벨의 실드 파이터네. 물론 검강 같은 건 사용할 수 있지. 대신 방패술은 0에서부터 시작하며 레벨 상승 또한 힘들 것이고 마스터 아이템은 오리하르콘 실드 뿐, 선택의 자유는 없네. 괜찮겠나?”

“알았으니까 빨리 주기나 해!!”

“그럼 또 만날 날을 기대하지.”

신은 자신이 있던 자리에 바스타드 소드 형태의 오리하르콘 소드와 견습 실드 파이터에게 주어지는 견습 기사의 방패를 두고 모습을 감췄다. 검과 방패를 집어 드는 순간 깨어지는 배리어.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남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모조리 죽여주마!!”

그렇게 외치며 들었던 방패를 상대에게 집어 던지는 아론. 녀석의 등장으로 제법 여유가 생겼다. 한 명이 죽어 네 명이 된 기사 중 두 명이 아론을 상대하러 간 덕에 오히려 기사들을 몰아붙일 수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로 상황이 종결되어 버렸다.

“컥! 마스터 직후의 무적 상태를 잊고 있었어…….”

마스터 레벨에 오른 사이 배리어 주위로 몬스터나 사람들이 둘러싸고 기다리다 죽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는 1분간의 무적상태가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줄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런 기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얼핏 봐서 잊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대답일까?

“미안하다, 이런 기능이 있는 줄 알았으면 대충하고 나오는 건데.”

“그래도 네 덕에 살았잖냐. 남은 사람은 다섯뿐인가? 후유……. 이제 여기도 안 되겠군. 일단 나가자.”

남은 사람은 나와 아론, 거트형, 린, 베르. 다른 사람들은 살아난 뒤 나가기 전까진 안전지대인 병원에서 기다리거나 로그아웃했을 테니 추가로 죽을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생각 같아선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던전 내에서 리턴 이외의 이동 스크롤은 사용 불가라는 제약 때문에 직접 걸어 나가야 했다.

“어차피 대역죄로까지 몰렸는데 그런 제약쯤 풀어주면 안 되나.”

구시렁거리며 던전 입구에 다다를 무렵 힘차게 움직이던 다리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더 매지션…….”

“오랜만입니다. 콜로니스트님.”

“너희도 우릴 잡으러 온 건가?”

던전 입구를 반원형으로, 그것도 두 겹이나 둘러싼 마법사들. 그들이 공격하기로 마음먹는다면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죽어줘야 했다.

“아니요, 저흰 콜로니스트님이 명예욕에 눈이 멀어 왕을 죽였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사실이라 해도 당신이시라면 괜찮다고 생각하고요. 이곳에 온 것은 단지 6성 연합이라는 족쇄에 묶여서일 뿐이지 실제 전투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눈감아 주겠다는 건가?”

“곧 다른 길드가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피하려면 지금 뿐이죠.”

6성 연합, 프리스트 마스터라는 거물이 끼어 있다 했더니 성을 차지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우리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것이든 아니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풀숲을 향해 몸을 날렸고, 달려가려는 순간 뒤쪽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오셨군요. 그들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도착한 후론 없었습니다.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그래야죠. 몇이 죽었다고 하니 병력의 반은 여기에 남겨두겠습니다.”

반을 남기겠다는 소리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더 매지션 길드 이외의 사람이 있으면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고, 혹여 그들 중 하나가 이쪽으로 와 우릴 발견하기라도 하면 저들이 곤란해지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까.

“지금, 저희 길드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무시라뇨, 어째서 그런 말씀을…….”

“저희가 여기 있는데 따로 병력을 남겨둔다는 건 저희를 무시하거나 못 믿겠다는 뜻 아닙니까?!”

“저흰 그냥 전부 들어갈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서…….”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정 힘을 아끼고 싶다면 반은 돌려보내십시오. 정확히 하지 않는다면 그대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적대시 할 수도 있다는 엄포를 놓자 상대 쪽 길드 장은 당황하며 사태를 수습하려고 진땀을 뺐다.

“제가 낄 자리는 아닙니다만…… 그럼 저희 쪽 연락책으로 두 명 정도만 두고 가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이 근처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쫓기 바쁘실 텐데요.”

“그거 좋네요, 괜찮으시겠죠?”

“으흠……. 좋습니다.”

최소한의 인원까지 거절하면 의심을 살게 뻔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이미 의심을 샀으니 저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만 공식적으로 관련되었음이 밝혀지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닐 테니까. 예전 우리와의 관계 때문인가?

“그럼 너랑, 또…….”

“제가 남죠.”

조근 전 길드 장끼리의 얘기에 끼어들어 곤란하게 만들었던 기사가 남을 것을 자청했고, 당연히 그 말은 받아들여졌다. 다른 길드 원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놈은 눈썹과 입꼬리가 비정상적으로 치솟는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끔 등잔 밑이 어두울 때가 있죠, 어디 살펴볼까요?”

이쪽을 향해 눈을 빛내며 한 걸음씩 움직이는 사내. 무성한 수풀 사이로 보이는 그의 음흉한 눈은 수풀을 통과해 우리를 보고 있는 듯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10m가량, 혼자라면 죽여서 입을 막을 수 있겠지만 던전 입구에 서있는 다른 한 명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응?”

바스락 바스락.

이제 몇 발자국만 더 걸어오면 들키게 될 상황에서 반대편 숲에 동물이라도 있는지 수풀이 움직이며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거기냐!!”

사내의 검에서 뿜어져 나간 검강이 더 매지션들을 지나쳐 수풀을 가르기 직전, 수풀 속에 숨어있던 몇 명의 남녀가 숲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우리와 유사한 복장.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도움이 된 것은 확실했다.

“사람의 흔적이 있는 건 여기였는데…… 제가 쫓겠습니다. 길드 장께 연락을!!”

그가 도망치는 자들을 쫓기 시작하자 이해 못할 상황에 어리둥절하던 더 매지션 길드도 일제히 블링크를 시전 해 이동했다. 물론, 금방 잡혀 버리면 아니란 게 밝혀지므로 최대한 공격을 자제하면서.

“어디로 갔나?”

“저쪽입니다.”

“공을 빼앗길 순 없지, 가자!!”

안으로 들어갔던 길드가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향한 쪽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수풀에 숨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도망친 자들이 잡혀버릴 수도 있지만 너무 서두르다가 저들에게 쫓기는 것보단 나으니까.

“우리도 가자.”

당연히 우리가 향한 방향은 그들이 사라진 반대쪽. 레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람 수가 적으니 이동속도도 빨라졌고, 소리에 반응해 몸을 숨기는 것도 훨씬 편했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는 상황이라 몸을 숨기고 귓속말을 했더니 세르가 각 신전에 우리의 진입을 막기 위해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주었고 결국 우리는 밀림 속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냥 이대로 한 달만 접속 끊을까?”

“쉿! 누가 온다.”

“그러니까, 두 개 길드가 쫓았는데도 잡질 못했다?”

“예, 그들과 친분이 있으니 더 매지션 길드가 알게 모르게 추적을 방해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루이너스 길드가 늦게 출발한 탓도 있겠지만요.”

“아무튼 수에 비해 위험한 놈들이란 말이야.”

이대로 딱 한 달간만 접속을 끊어야 할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또다시 우리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이번엔 또 다른 길드인 듯, 우리 옆을 지나가는 동안 쉬지 않고 더 매지션 길드와 루이너스 길드에 대해 욕을 퍼부었는데 비교적 힘이 약한 녀석들인지 말할 때마다 누가 들을 새라 주위를 살폈다.

“정작 놓친 놈들은 주요 장소에서 지키고 있는데 우리는 이 넓은 곳을 수색해야 한다니, 내 더러워서라도 돌아가면 마스터를 더 영입한다. 퉷.”

힘의 우열에 따라 맡는 일도 달라졌는지 길드 장으로 보이는 자가 침까지 뱉으며 악감정을 드러냈다. 물론 이번에도 두리번거리면서. 우리가 숨어있는지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이들을 보며 쓸만 한 정보를 얻었다 좋아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고 보라고, 내가 조만간 이렇게!!만들어줄 테니까.”

혼잣말에 취한 길드 장의 검에서 뿜어진 검강은 아론이 숨어있는 나무를 향해 날아갔고 아주 간단하게 베어버렸다. 베어진 나무의 위에서 나무와 함께 쓰러지는 아론,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점프 같은 튀는 행동을 해선 안 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장!! 저기 가지 속에 갑옷 같은 게 있는데요?”

“마스터라고 부르랬지!! 으잉? 진짜잖아? 이, 이게 말로만 듣던 기연?! 나, 나가 가볼랑게 느그들은 요기서 쪼매만 기둘려라잉.”

쓰러진 나무의 가지 속에 파묻혀 있는 아론의 등을 기연으로 얻어지는 아이템 정도로 착각한 길드 장은 원래 지방 사람인지 사투리에 말까지 더듬으며 다가갔고, 일이 꼬였음을 느낀 우리는 그들이 쫓아오지 못하게 만들 공격을 준비해야 했다.

“오메, 빤딱거리는 거.”

손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 도착했음에도 아이템이라 굳게 믿은 그는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고, 양손으로 땅을 민 반동으로 일어난 아론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막히는 검. 오리하르콘 소드로 보아 그 역시 마스터였다.

“아이템의 가디언이당가?”

“우리가 쫓는 놈들 중 하나에요!! 허업.”

아직까지 아이템일 거란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길드 장의 환상을 깨어준 녀석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백색의 광구, 홀리를 보며 기겁을 했고, 그러면서도 흩어져 피할 것을 명령하는 침착함을 보였다. 뒤이어 떨어지는 화살의 비, 애로우 샤워. 투구를 비롯해 착용한 갑옷들에 마나를 불어넣는 재빠른 대처로 큰 피해를 주진 못했지만 무시못할 경력으로 적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아론, 튀어. 컨트롤 바인드!!”

그의 발밑에서 머리끝까지 온통 풀과 나무들이었으므로 바인드에 몸을 봉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급하는 마나의 량을 조절해 놓았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식물들을 한 순간 힘을 집중해 요령껏 끊어버린 그는 매섭게 날아오는 검강에 또 한 번 주춤거렸고, 그 사이 우리는 수십 미터를 앞서 나갔다

“쫓아부러!!!”

떨어져 내리는 화살 비가 자신들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사들은 전력을 다해 쫓아왔고, 그렇게 피 말리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그들에게서 도망친다는 건 단순히 그들보다 빠르게 이동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검강을 피해야 했고,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공격도 펼쳐야 했으니까.

“여기까지다!!”

“빌어먹을.”

다른 길드에도 연락이 되었는지 한 무리의 기사들이 측면에서 뛰쳐나왔고 예상치 못한 기습에 베르가 죽음을 맞이했다. 죽기 살기로 있는 힘껏 검강을 뿌려대는 아론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과도 거리를 벌릴 수 있었지만 다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마나도 바닥을 보여 뒤쪽 인물들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크아아악!!!”

“모두 당황하지 말고 맞서라!! 추격은 포기한다.”

마법사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마나마저 바닥을 보이는 상황에서 절망에 차있을 때 갑자기 추격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그야말로 아수라장, 어디선가 나타난 자들이 던진 초록색 독 포션과 비도들로 때 아닌 피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18금이 아닌 이유로 실제 피가 나오진 않았지만.

“따르시죠.”

아무리 뒤쪽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지만 너무도 쉽게 우리의 눈을 피해 접근한 사내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영문을 몰랐지만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닌 것 같은 험한 길을 한참 달려 도착한 곳. 그곳은 밀림이 확실함에도 우리가 와본 적 없는 초라하지만 커다란 마을이었다.

“그렇게 보실 것 없습니다. 애초에 존재하던 마을이 아니니까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플레이어가 직접 세웠다는 소린데, 대체 누가 이런 곳에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을 세운 것이며 이 많은 수의 길드 원은 또 어떻게 모은 것일까? 머릿속의 의문들은 점점 그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다.

“마스터,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 애써 떠올려보려 해도 머리만 지끈거릴 뿐,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우호적이면서 이 정도 크기를 가진 길드가 있던가?

“로즌…… 크랜츠!!”

“이런, 나름대로 서둘러 손을 쓴다고 써는데 살아남은 분들이 몇 안 되는군요.”

“네 놈!!”

처적-!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아론을 손으로 제지함과 동시에 어둠과 동화되어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차디찬 금속을 목에 밀착시켰다. 제길, 왜 나한테까지 칼을 들이대는 거야.

“손님이시다, 치워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회수되는 검들. 딜레이 때문에 바로는 아니었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모습들을 숨겼다. 그 절도 있는 모습에 이곳이 적진이란 사실을 깨달았는지 아론도 화를 삭일 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고, 나 역시 숨을 고루 쉰 뒤 입을 열 수 있었다.

“현상금을 탈 거였으면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을 테고, 이런 반응이 나올 걸 뻔히 알면서 데려온 이유가 뭐지.”

“역시 단박에 알아차리시는군요. 좋습니다, 본론부터 말하죠.”

짝짝짝-!

딱딱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놈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우며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러다 얼굴에 경련이 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표정. 조금은 분노에 찬 듯한 모습이었다.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들이 영지를 차지하고, 더 나아가 본성을 향해 복수의 칼을 들 수 있도록 돕겠다는 거죠.”

영지를 차지한다는 말보다, 돕겠다는 말보다 귀에 들어온 것은 ‘복수의 칼’이라는 부분이었다. 이들은 우리와 크로반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당황하는 모습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그가 말을 덧붙였다

“정보 길드만 정보를 다루진 않습니다. 정보는 저희 목숨 줄과도 같죠.”

“대가는? 우릴 불쌍히 여겨 자원 봉사를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우리가 아무리 쫓기는 상황이라 해도 그들과 적대하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이렇듯 개의치 않고 접근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우리에게 나라를 뒤엎을만한 힘을 주겠다는 이유가…… 대체 뭐지?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요. 저희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어쌔신을 비롯한 모든 범죄자들이 기습당할까봐 가슴 졸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도시입니다. 영지 하나를 내어주십시오.”

“웃기는 군. 성이야 우리가 본성을 차지하면 무주공산이 된 것을 차지하면 될 테지만 수성은 어떻게 할 거지? 어쌔신들만으로, 아니 온갖 범죄자들이 힘을 모은다 해도 제대로 자리 잡기 전에 공격당한다면 세 번, 그 이상은 무리라고 보는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딱 2주만, 현실시간으로 2주만 수성에 도움을 주십시오.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하도록 하죠.”

언뜻 들으면 우리에게 유리하기만 한 조건 같지만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잘못하면 힘으로 왕좌를 빼앗은 데다(힘으로 밖에 뺏을 방법이 없지만) 범죄자들의 뒤를 봐주는 천하의 나쁜 놈들로 몰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당장 이곳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데다 만약 순순히 보내준다고 하더라도 1달이나 버티긴 힘들었고, 어찌어찌 접속을 끊어서라도 버텨도 크로반에게 복수하기는커녕 영지하나조차 차지할 수 없을 테니까.

“세금을 받으면서 쌓이는 자본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고레벨 유저의 독점. 누명이라고는 하나 오점을 남긴 여러분의 명성만으론 쉽게 뒤집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생각 따윈 이미 꿰뚫고 있다는 듯 절묘한 타이밍에 쐐기를 박은 그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생글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글쎄……. 너무 유리한 조건이라 오히려 꺼림직 하다.”

“유리하기만 한 건 아니야., 나중에 범죄자들의 뒤를 봐준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뭘 해도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기 힘들겠지.”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각자의 생각이 모인 답은 그들과의 계약을 수립하는 것. 기권한 아론을 제외하고 모두가 찬성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신뢰는 나중에 차근차근 다시 쌓아가도 된다고 자신을 달래면서…….

“좋아,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한데, 뭘 좀 물어봐도 될까?”

“얼마든지요.”

“어쌔신 마스터라면 PK는 질리게 했을 것이고, 마스터가 되면서 성향도 정상으로 돌아왔을 텐데 왜 계속 PK를 하고 범죄자들을 위해 이런 일까지 벌이는 거지?”

“마스터에 올랐다고 해도 전 어쌔신입니다. PK인 게 당연하죠. 사람들이 몬스터를 잡듯이 저희는 사람을 잡습니다. 그게 뭐 잘못된 건가요? 생각해보면 자기의 영역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몬스터들에게 쳐들어가 소란을 피우고 죽이면서 자신이 한번 죽으면 더 많은 사람을 끌고 와 복수하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가 인간 아닙니까? 오크 이벤트 때처럼 살기 위해서라면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그것도 모두 인과응보였죠. 그들이 게임이니까, 경험치를 위해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저는 외치겠습니다. 우리 역시 그 알량한 경험치를 위해 너희를 죽이겠노라고.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에게 실망한 사람들의 모임, 그것이 저희 blood길드입니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동조 할 순 없었다. 그가 인간의 이기심을 탓하고 응징하려는 이곳 역시 인간의 이기심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니까. 하지만 이왕 합류하기로 한 거 괜히 입 밖으로 내어 분열을 자초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다른 PK들도 살인광이 아닌 이상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죠. 왜 우리가 선택된 겁니까? 별다른 힘도 없는데 말입니다.”

무언가 회상하듯 눈의 초점이 흐릿해지는 걸 보니 어쌔신이 된 데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듯싶었지만 남자의 과거를 캐묻는 쓸모없는 짓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저 아쉬워하는 눈빛은 물어봐 주길 바랐던 것 같지?

“흠흠, 그런데 웬일로 갑자기 존댓말이십니까?”

“일단은, 동맹이니까요. 뭐, 거북하시면 얼마든지 반말해드릴 용의는 있습니다만?”

“아니, 뭐 그러실 것까지야……. 이유를 말하라면 다른 길드들에겐 배짱과 이유, 신용이 없어서라고 할 수 있겠죠. 나머지 5개성의 저지를 뚫고 왕좌를 거머쥘 배짱과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 조금은 무리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신용이 말입니다.”

그의 능글능글한 미소를 끝으로 계약은 성립되었다. 어쌔신들은 집에 대한 소유권을 일단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집이 있을 경우 죽으면 집에서 살아나기 때문에) 길드 원에게 죽음으로써 레이들이 기다리는 병원으로 갔고, 매스 텔레포트를 이용해 모두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제 남은 건 1달여의 시간을 보내며 공성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 뿐.

“아저씨, 그래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는 정한 겁니까?”

“아저씨라니요!!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 사람한테…….”

스물일곱이나 됐을까? 30대인 거트 형보다도 적은 나이였지만 마땅히 부를 말이 없었기에 아저씨라 부르자 그는 펄쩍뛰며 정색을 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 로즌 크랜츠, 부르기도 어려운데.

“그럼 로즈라고 불러드릴까요?”

“……그냥 아저씨가 좋겠습니다.”

여성 유저들도 안 쓸 만큼 유치하고 여성스러운 이름이 튀어나오자 그것만은 싫었는지 아저씨란 호칭으로 불리기를 자청했다.

“답이나 해봐요, 어느 정도까지나 계획을 짰는지.”

“계획? 짰을 리가 있나요. 언제나 최고의 잔……흠흠, 머리를 자랑하시는 콜로니스트 님이 합류하셨는데 있던 계획이라도 취소시켜야지요.”

결국, blood길드의 정보 지원 하에 내가 머리를 쥐어 짜내는 걸로 합의가 됐다. 밀림을 장악했던 길드들은 지형의 완벽한 파악이라는 이점을 갖춘 아마조네스의 게릴라전과 홈페이지에 올라온 그녀들의 호소문의 여파로 일주일 만에 물러났고, 사냥터들은 경험치 복구 때문에 발 디딜 틈도 없어졌다.

“한번…… 가볼까?”

“……그래.”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우린 차마 던전에 들어가 보질 못했다. 마을을 지킨다는 사명을 가진 그였기에 마을로의 이동이 불가능해진 지금, 리젠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막연한 기대감은 우리의 발을 던전으로 이끌었고 못이기는 척 한 걸음씩 다가갔다. 분명히 후회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누군가…… 있다?!”

4층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리치가 있던 자리에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려가자 검은 그림자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이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육안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되자 도약하며 우리에게 검을 들이댔다.

“역시, 안 되는 건가?”

그림자의 정체는 어느 것이 머리털이고 어느 것이 수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사내였다. 검 끝에 맺혀있는 푸른 기운이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임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마스터가 된 아론에게는 크게 어려운 상대도 아닐 것이었다. 몇 차례의 공방이 오가는 모습을 보며 느껴진 그의 검은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 맹수처럼 거칠고 날카로웠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상대라는 걸 느낀 베르가 가세함으로써 착실히 몸에 상처를 입혀갔다.

“할 말 있나?”

사형을 집행하기 전 사형 집행인이 하는 말처럼 예의 상 물은 말에 대답은 없었고 그대로 사내의 목이 떨어졌다. 조금 더 들어가 살펴봐도 리치의 일은 완전히 끝난 것으로 처리된 듯, 깨어진 구슬과 벽에 새겨져있던 문양이 사라져있었다. 우릴 위해 희생한 리치를 위해 잠시 묵념을 한 우리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물며 다시 마을로 돌아와야 했다

“아, 거트 오라버니. 결정했어요. 저희 아마조네스 길드도 라스트 길드의 동맹으로 공성전에 참가할게요.”

던전의 일은 예상했던 대로 잘 안되었지만 돌아오자마자 며칠간 끌어오던 아마조네스의 동맹 참여여부에 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중앙 대륙의 길드 쪽에 당한 것이 있으니 대답은 긍정적, 이로써 계획했던 작전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수배가 풀릴 그 날을 기다리며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것뿐.

“이상하군요. 아직도 수배가 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약속한 날보다 하루가 지났는데…….”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설마 운영자들이 거짓말을 하겠는가?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느끼고 그것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익숙한 파란 머리가 호들갑을 떨며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이고, 그냥 오긴 힘든 곳이라 좌표를 통해서 왔는데 자리를 잘못 잡았군요…… 히익!!”

나와 로즌 크랜츠의 사이에 나타나 로즌 크랜츠에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걸던 제롬은 따끔따끔한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웃고 있는 내 모습에 기겁을 하며 너덧 발자국 달아났다.

“뭡니까?”

“아, 수배 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수배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원래 오늘 0시부터 수배가 해제되도록 만들 생각이었는데 한 달 전의 그 일이 여기저기 들쑤셔 놓아서 쉽지 않게 되어 버린 거죠.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합니다. 길드 명과 아이디를 바꿔 드리겠습니다. 물론 모든 것은 그대로고 이름만 바뀌는 거죠.”

“그런 짓을 했다가 유저들한테 들키면 일이 복잡해지는 거 아닌가?”

“아, 물론 여러분께만 그런 특혜를 드린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네임 체인지 스크롤은 초레어급 아이템으로 조만간 등장시킬 것이기 때문에 문제없다 이 말씀!! 여러분이 남들보다 먼저, 아주 우연찮게 얻은 것으로 치면 그만이지요. 자, 그럼 동의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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