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속의 황금도시, 파이치치
열쇠? 우리는 지도라 할 수 있는 석판과 구슬을 가지고 있을 뿐, 그런 건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석판과 구슬 말고도 뭔가가 더 필요한가요?”
“그래, 구슬! 그 구슬이 열쇠야. 마을로 갈 거거든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 줄 수 있겠나?”
“뭔데요?”
“마을 사람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와서 나에게 알려주게. 그놈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되네.”
“그 정도라면…….”
[‘모순된 자의 부탁’ 퀘스트를 받아들였습니다.]
퀘스트였다. 아주 간단한. 그냥 보고 오는 게 뭐가 힘들겠는가? 한데, 일단 가기나 해야 할 텐데…….
“마을로는 어떻게 가죠?”
“저기 있는 구멍에 구슬을 넣으면 구슬에 담긴 전기의 힘만큼 텔레포트가 가능하지.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게 다 그 라무란 놈 탓이야. 아, 거기 서서 마을의 이름만 외치면 마을 외곽으로 이동할 수 있어.”
“엘도라도!!”
휘이이잉∼. 아론이 멋지게 포즈를 잡고 큰소리로 엘도라도를 외쳤지만 마법진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썰렁해진 분위기, 그때 뒤에서 리치의 쯧쯧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내가 엘도라도라고 말했지 않은가!! 마을 이름은 파이치치라네.”
“파이치치.”
쪽팔린 아론을 선두로 한 명씩 차례로 텔레포트를 감행했고, 구슬 속의 전기도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이동하자 보이는 것은 던전 밖과 비슷하게 생긴 울창한 숲들과 저 높이에 세워진 황금의 피라미드. 길도 일방통행이어서 마을의 위치를 쉽게 찾아 낼 수 있었다.
“마을이 아니라 피라미드였잖아?”
“보통 피라미드 속은 미로처럼 되어 있다던데, 조심해야겠어요.”
“이거, 한 귀퉁이만 잘라다 팔아도 비싸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콰지지직-!
레이와 아론이 작당하고 구석으로가 검기로 피라미드를 내려치자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번개가 둘이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다행히 피하긴 했지만 번개가 떨어진 곳과는 불과 몇 십 센티 차이,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미친놈아, 그 레벨에서 죽으면 얼마나 복구하기 힘든 줄 자각하고 있는 거냐!!”
“미안, 미안.”
죄지은 게 있는지라 머리를 긁적이며 뒤따라오는 둘. 한숨밖에 안 나오는 바보 콤비들이었다. 보통 피라미드의 입구는 위쪽에 있다는데 이 황금 피라미드는 특이하게 1층부터 올라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건 넓은 길과 황금으로 치장된 수백의 가구들, 그야말로 황금의 도시였다.
“이건…… 엄청난데?”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그냥 황금으로 되었다 해도 믿을 정도로 수많은 금가루가 뿌려져있었고 뛰노는 아이들의 장난감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마저도 모두 황금이었다. 여기 물건 몇 개만 집어가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군.
“저기 올라가는 계단이 큼지막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저기로 가보자.”
“네, 이런 곳이라면 최상층에 문제의 인물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계단 앞까지 가는 동안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있어도 말을 걸거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계단에 오르려하자 사제와 비슷한 옷을 입은 세 명의 남자가 다가왔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말을 건넸다.
“라무나를 믿으시는 분들이 맞습니까?”
“예? 그게 누구죠?”
그들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기에 그렇다 말하려 하는 순간 아마조네스의 누군가가 먼저 말을 받아버렸다. 그것도 부정적인 답변으로.
“라무나를…… 모르신다구요?”
“예, 뭐…….”
“이교도다, 잡아라!!!! '
방금 전까지 웃음 짓던 남자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며 소리쳤고, 계단 위에서 내려오는 신관들뿐만 아니라 아래의 일반 주민들까지 적으로 돌변하여 우리를 공격해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피해가 컸다. 사내의 가까이에 있던 몇 명은 돌발적인 공격에 부상을 입었고 무기를 뺄 시간도 없이 죽임을 당했다. 그나마 경계를 잊지 않은 몇 명의 대응으로 피해가 줄긴 했지만 이건 오크 떼 못지않은 숫자인데다 죽음을 도외시하는 공격들이라서 도저히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다.
“주민들은 무조건 동귀어진이잖아?! 걸어 나가긴 글렀어, 무조건 뚫고 올라가자!!”
“검기.”
“아이스 개틀링(ice gatling)!!”
기습으로 당하긴 했지만 신관들의 전투 능력이 그렇게 뛰어난 건 아니었다. 전문 싸움꾼인 셋이 뛰어 올라가며 검기로 공격하자 비교적 수월히 길이 만들어 졌고, 따라 올라오던 주민들은 얼음조각에 맞고 구르며 뒤따라오는 사람들까지 같이 잡고 굴렀다. 계단을 올라가자 아래층보다는 좁지만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공간이 등장했고 방금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던 신관과 같은 옷차림의 인간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라무나를 믿는 분들이십니까?”
아래층 상황을 전혀 모르는 신관들은 좀 전과 똑같은 물음을 던졌고 이번엔 실수 없이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대답이 끝나자 신관들은 우리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주민들이 올라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주민들은 나키르의 오크 캡틴이 막고 있는 중이었고 그 틈에 다음 층을 향해 전력 질주를 했다.
“헥헥, 이쯤해서 돌아갈까?”
“지금 돌아갔다간 저 아래의 무식한 놈들을 다시 상대하고 올라와야 할 것 같으니 그냥 계속 가죠.”
“젠장, 그깟 놈이 뭐라고 저 난리들이야. 망할 놈의 광신도들.”
“오크 캡틴이 죽이는 경험치가 저한테 들어오는 걸 보니 몬스터로 취급되는 것 같은데요? 들어오는 경험치도 적지 않아요.”
광신도가 몬스터란 소리는…… 이곳 자체가 하나의 던전이라는 뜻? 만만히 봐서는 위험할 수 있었다. 아직 난이도 파악이 안 된 비밀 던전이니까. 주민들이 따라오기 전에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려는데, 이번엔 약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신관이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이곳부터는 일반 신도들이 올라갈 수 없는 곳입니다. 혹, 신관이 되려는 분들이십니까?”
“예.”
아니라고 했다간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무조건 맞는다고 답했고, 그는 순순히 길을 내어주었다. 올라가자 좀 전보단 작지만 아직도 넓은 공간이 있었고 계단을 막았던 자와 비슷한 복장을 한 신관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고 있었다.
“신관이 되려고 오신 분들 같은데 따라오시지요.”
어슬렁대던 자들 중 하나가 우릴 보고 따라올 것을 청했다. 안 따라 갔다간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일단 따라갔더니 교회 비슷하게 생긴 큰 건물로 들어갔고, 그들보다 좀 더 고위급인 듯한 인물 셋이 앉아있는 방으로 우리를 들여보냈다.
“앉으시지요.”
세 명의 신관은 약간 높은 곳에 앉아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고 다른 신관들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열다섯 명 대 세 명. 이 바보 같은 놈들은 사람을 믿는 것인지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인지 몰라도 곁에 호위하나 두지 않았고 나에겐 그 모습이 더 없는 기회로 비추어졌다.
“세르, 내가 신호하면…….”
“거기, 잡담은 금지입니다.”
그들이 들리지 않게 세르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말하자 세 신관 중 하나가 나름대로 위엄 있는 목소리로 제지를 가했다. 일단은 당연히 말을 들었고 아론과 베르 등 덩치 큰 녀석들은 모이게 해 세르의 하이딩 사실을 숨겼다.
“그럼 신관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저, 질문이 있습니다.”
“뭐죠?”
“실례지만 신관님들의 지위가 어떻게 되시죠?”
“그것 참 실례되는 질문이군요! 저희는 신의 대리자 라무님의 바로 아래에 있는 최고위 신관 10인 중 셋입니다. 답변이 되었나요?”
“아, 예.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높은 신분인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들은 일단 몇 가지 추상적인 질문을 던졌고 판타지를 읽으며 철학 쪽에도 손을 대보았던 터라 내가 생각해도 그리 나쁘지 않은 대답을 했다.
“그럼 라무나 성가 13장 라무나는 늘 함께요를 불러 보십시오.”
라무나 성가?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부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가 무르익었음이 느껴지자 드라이저에게 눈짓을 했고 드라이저가 나서 그들에게 한 가지 청을 했다.
“이 친구는 항상 저와 함께 성가를 불렀기 때문에 혼자서는 긴장될 겁니다. 같이 부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나보다 어린 드라이저였지만 연기를 해야 하는 이상 존대할 순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각자의 타깃을 정하고 손으로 카운트를 센 다음 노래아닌 노래가 시작되었다.
“말 많은 자에게 봉인의 사슬을, 사일런스.”
“말 많은 자에게 봉인의 사슬을, 사일런스.”
“성가는 그게 아니잖…… 읍, 읍읍!!”
각각 좌측과 우측의 신관의 입을 마법으로 틀어막자 당황한 가운데 신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그 순간 세르의 마비 침에 찔려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나키르!!”
“테이밍.”
“순순히 테이밍 당하는 게 좋을 거야. 원한다면 빈사 상태까지 끌고 가 줄 수도 있어. 보복이 두려워도 걱정 말라고. 그 라무란 놈도 죽일 거니까.”
원래 일반인은 광신도일지라도 고위급은 다른 것이다. 그 교의 모순과 거짓됨을 알고 있고, 교에 남아있는 이유도 보복의 두려움과 돈, 명예뿐이니까. 그렇게 셋은 별다른 저항 없이 나키르의 아공간 속으로 들어갔고 내 말에 따라 일단 모두가 리턴을 사용했다.
“최고 신관님, 지금 이곳에 이교도들이…… 설마!!”
이미 리턴이 사용되었음을 알리는 하얀빛이 올라오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신관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들은 이교도가 우리임을 확신했고 보이지 않는 최고 신관들의 행방을 물었다.
“최고 신관님들을 어떻게 한 거냐!!”
“잘 모시고 갔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돌려줄 테니 걱정 말라고!!”
“슈팅…….”
그의 슈팅스타가 발동하기도 전에 우리는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 와보니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했다. 상당수의 길드 원들이 무장을 갖춘 채 집결해 있었고 부 길드 장이 길드 장을 구하러 가자는 둥의 헛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이봐, 무슨 일이야?”
“아, 길드 장. 안 그래도 지금 길드 장을 구하러 가려고 했는데 잘 오셨……?!”
“내가 여기 있는데 뭘 구하러 가? 각자 사냥터로 다시 보내고 아까 모였던 몇 명만 다시 모아 놔.”
“예? 예…….”
길드 장도 못 알아본 부 길드 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켰고 죽어서 돌아왔던 사람들을 재집결 시켰다. 약간의 화살, 포션 보충을 끝내고 다시 사용한 매스 텔레포트. 이번엔 해골들을 일일이 상대해주지 않고 4층까지 논스톱으로 내려갔다.
“오, 그래. 마을은 살펴봤나?”
“완전 사이비 종교가 되어있던데요? 주민들은 라무난가 나발인가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들고요.”
“결국, 그렇게 된 건가. 고맙네. 별 거 아니지만 보답으로 이걸 받아주게.”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내게 넘겼고, 난 그것을 다시 거트 형에게 주었다. 전직 프리스트인 놈이니 프리스트인 형이 쓰는 게 나을 거란 생각도 있었지만 솔직히 가지고 있기 찝찝했던 것이 컸다.
“미안한 말이지만 한 가지 부탁을 더 해도 되겠나?”
“뭔데요?”
“라무, 그를 쓰러뜨려 주게. 그가 죽으면 증거로 그가 가진 추장의 지팡이를 가지고 이리로 와서 내게 보여주면 되네. 할 수 있겠나?”
“뭐,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으니까요. 시간제한 같은 건 없겠죠?”
“나야 좋든 싫든 무한한 생을 살아가는 리치인데 시간 걱정 할 일이 무에 있겠나? 최대한 빨리 그를 쓰러뜨려 마을 사람들이 정신 차리게 만들어주게.”
[‘모순된 자의 염원’ 퀘스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파이치치.”
퀘스트의 수락과 함께 다시 파이치치로 돌아왔다. 이대로 들어갔다간 동귀어진에 인해전술까지 합쳐진 공격에 맞아죽기 딱 좋았으므로 들어가기 전 한 가지 조치를 취해 놨다.
“최고 신관님들이시다.”
미리 꺼내놓은 세 명의 최고 신관을 보자 마을 주민들은 엎드린 채 고개도 들지 못했고 그 누구도 막는 이가 없었다. 세 신관의 연기는 제법 능숙했다. 각 계단을 지키는 자들에게 자신들이 우리를 교화시켰다 거짓말을 쳐 돌려보냈고 그들이 다시 한 번 자신들을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층, 한층 올라가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이들이 다른 신관을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한 건 일단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기에 바로 나키르에게 실험을 시켰다.
“저 신관 무리를 공격해.”
“홀리 메이스.”
“아니, 왜…… 컥.”
역시나, 신관들은 반항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 공격한 신관들 중 죽지 않은 자는 주위에 있던 신관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고 공격한 신관들은 칭찬해주길 바라는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최고 신관들을 바라봤다.
“잘했도다, 저들의 마음은 이미 악에 물들어 돌이킬 수 없었느니.”
“오오오오∼.”
이건 완전히 한편의 코미디였다. 한데, 죽은 자들의 시체를 살피니 아이템은 없고 대신 몇 덩이의 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죽으면서 금을 남긴다는 사실을 알아 챈 아론들은 라무를 치러간다는 본래의 목적도 잊은 채 나키르를 끌고 신관 사냥에 나섰다. 그렇게 1시간 여를 허비하자 녀석들은 만족할 만큼의 금이 모였는지 환한 얼굴로 돌아왔고 다시 길을 재촉할 수 있었다.
“야야, 이것 봐라.”
아론이 웃으면서 신관들에게 다가가더니 그대로 검기를 이용해 베어버렸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신관들은 일제히 공격 태세를 취했고 그때 세 신관의 입에서 어이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그는 악의 화신이었다.”
“아아∼.”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렇게 3층도 무난히 통과를 했다. 4층의 신관들 역시 최고 신관인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죽으면서 남기는 것은 조잡한 금 조각이 아닌 조그만 금괴였다. 또 한 번 그것에 눈이 뒤집힌 아론과 레이는 당장에 아이템 창을 비웠고 일행의 걸음은 또다시 멈춰서야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번엔 금방 돌아왔다. 그 이유를 듣자하니, 금괴의 드롭확률이 너무 낮다는 것. 몇 개의 금괴와 아래층에서 얻어온 금 조각으로 다시 아이템 창을 가득 메운 녀석들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앞장서 나아갔다
“이곳까지 다른 이들을 데려와서 이게 무슨 짓인가?”
“미안하네.”
같은 최고 신관인지 지금까지 반항은커녕 때려 주십사하고 편한 자세로 있던 주위 신관들이 공격은 하지 않았지만 경계하기 시작했다. 같은 급의 신관들이 마찰하니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아론, 베르.”
카엘도 곧 90레벨 대에 도달할 테니 그때가 되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론과 베르가 무력행사할 때 제일 먼저 나서야했다. 아무리 상대가 고위급 신관이라지만 먼저 공격해 들어간 우리 쪽 두 명 역시 마스터를 목전에 둔 기사들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었다. 물론, 그 뒤에 변명은 세 신관들의 몫이었고.
“이제 이 황당한 던전을 클리어 하러 가보실까?”
끼이익-!
이번 계단은 올라가기도 전에 사람 몇 배나 되는 문이 있었고 끝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금은 많아도 기름은 없는지 문에서 상당한 소음이 났고, 그 덕에 기습의 기회 따윈 멀리 날아가 버렸다.
“너희는 누구냐? 감히 신의 대행자인 이 라무님의 단잠을 방해하다니, 죽어 마땅하다!!”
“미안해서 어쩌지? 우린 널 죽이러 왔는데. 사이비 교주씨.”
“사, 사이비라니. 어디서 그런 망발을!!”
NPC주제에 찔리기는 하는지 말까지는 더듬었다.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던 라무의 모습은 대머리에 흰 수염만 땅에 끌릴 정도로 긴 할아버지였고 툭 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저런 노인과 싸워야 하는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받아라, 썬더 브레이크!!”
나이를 먹고 육체적 상태는 어떨지 몰라도 전투력만큼 보스답게 뛰어 났다. 7써클의 썬더 브레이크를 스펠도 없이 사용하다니, 잠깐?
“신의 대행자라는 놈이 어째서 마법을 쓰는 거야?!”
민감한 부분을 찔렀는지 놈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거렸다가 이내 공격을 퍼부었다. 바닥이 흙처럼 검이나 쇠붙이를 박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따로 흡수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피해 다녀야만 하는데 한 점 파괴력이 최고인 번개 속성이기에 잘못 맞으면 그대로 즉사하는 수가 있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언제,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번개를 피하느라 정신없던 아론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검강을 끌어올려 번개를 베었고, 양쪽으로 갈라진 번개는 각각 아마조네스 길드 원과 카엘에게 날아갔고 갑작스런 각도변화에 반응하지 못한 둘은 사이좋게 마을로 돌아갔다.
“얼레?”
멍하니 쳐다보던 아론은 끊임없이 날아오는 번개에 어찌할 수 없이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갈라진 번개는 어김없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날아갔고 나 역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번개를 피해 나키르가 소환한 세 신관의 디바인 실드 속에 몸을 숨겨야 했다.
“크핫핫핫, 자기편을 죽이는 멍청이 덕분에 손이 덜 들겠구나!!”
“제기랄.”
아론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면서도 어떻게 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모두 마찬가지였고 빨리 찾아내지 못하면 전멸을 각오해야 할지도 몰랐다
“우린 상관 말고 그냥 후려쳐!!”
“후려…… 쳐? 그래!!”
처음으로, 라무가 날린 번개가 다시 라무에게 돌아갔다. 아론이 진짜 검면으로 번개를 후려쳐 버린 것이다. 조금 빠르게 휘두르면 검과 부딪치지 않은 부분에 맞을 수도 있고, 너무 늦게 휘두르면 발등에 내리 꽂힐 수도 있는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라무에게 큰 위협을 준 것이 사실이었고 나 말고는 아무도 실패했을 때의 일은 생각해내지 못한 듯했다.
“으으……. 이건 어떠냐, 체인 라이트닝!!”
드디어 라무가 방법을 바꿨다. 받아치지 못하게 범위 공격을 선택한 놈은 반격해 오지 못할 거란 생각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표정은 검기로 거미줄 같은 번개를 자르며 뛰어 들어오는 두 기사들 때문에 금세 바뀔 수밖에 없었다.
“차합!!”
뛰어드는 순간 양손으로 발사한 썬더 브레이크에 아론과 베르는 큰 타격을 입고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괜한 피해는 아니었는지 라무가 상처 난 배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비틀거렸고 그 사이 세르가 겁도 없이 달려 들어가 마비 침을 뿌려댔다.
“감히 어딜!!”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라무의 몸에 닿지는 못했다. 휘둘러진 한쪽 손에서 나간 에너지 볼트는 마비 침은 물론 세르까지 날려버렸고, 세르를 구하러 가게 하는 시간 벌기의 역할도 했다.
“이제 끝을 내주마. 하늘의 심판!!”
한쪽으로가 들고 있던 지팡이 이외에 또 하나의 지팡이를 주워 든 라무는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고, 지팡이의 수정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치의 어마어마한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하나의 기둥 같던 번개는 수십, 수백 갈래로 나뉘며 주위를 휩쓸고 다녔고, 세 신관의 모든 힘이 담긴 디바인 실드 속에 숨은 나키르와 나, 운이 좋았던 아론과 에린 누나를 제외하곤 모두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용케도 살아남았군. 이번엔 정말 끝을 내주마.”
“아쿠아 스파이크!!!”
“조잡하다!!”
자신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날아오는 거대한 물줄기를 번개의 물리력으로 부숴버린 라무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바였다.
“아쿠아 오거, 아쿠아 스파이크, 아쿠아 캐논.”
“조잡하다, 조잡하다, 조잡해!!!”
“아쿠아.”
온갖 물 속성 마법을 써가며 접근한 뒤 사용한 최후의 공격은 그냥 아쿠아였다. 물론 보통의 아쿠아보다는 많은 양의 마나를 사용해 물의 양 또한 건장한 사내 하나를 가둬도 될 정도로 많았지만. 그렇게 물리력을 가진 마법들은 조잡하다고까지 말하며 간단히 막아내던 그도 머리 위에서 바로 떨어지는 물만은 어찌하지 못했고 결국 고개가 아래로 푹 숙여질 정도로 무거운 물의 무게에 휘청거렸다.
“악을 심판하고 처단하는 정의의 번개, 썬더 브레이크!!!”
“어디 감히 내게 번개를!! 썬더 브레…… 으허억!!!”
온몸은 물론 주변까지 흠뻑 젖은 상태에서 전격 계열의 마법을 쓰려고 하니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 리 없었다. 자신이 쓰려던 마법에 감전 당하고 뒤이어 날아온 썬더 브레이크에까지 공격을 당하자 몸이 붕 떠서 구석에 처박혔고 난 다시 한 번 아쿠아를 사용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커, 커헉. 내가 잘못했어. 뭐든 다 할 테니까 그만둬. 노인공경도 모르나!!”
“아∼ 노인공격?”
역시나 전격 계열밖에 쓰지 못하는 놈인지 전격계 마법을 봉쇄당하자 구차하게 빌기 시작했고 더 볼 것 없이 구타를 시작했다. 힘이 높지 않았기에 HP가 떨어져 죽는 일은 없었고 아쿠아를 이용한 물고문을 섞자 제발 죽여 달라는 소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근데 뭐 좀 묻자.”
“예, 예. 말씀만 하세요.”
이젠 시키지 않아도 존댓말에 무릎까지 꿇어앉았다.
“너, 신관이냐 마법사냐?”
“마법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신도를 만들어?”
“이 지팡이 때문입니다. 신관이 아니어도 신성력을 쓸 수 있게 해주거든요. 신관이 사용하면 더 강한 힘을 발휘하게 해준다는데 전 신관이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 이거 드릴 테니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프리스트가 아닌데도 신성력을 쓸 수 있다면 필시 레어나 유니크 급의 아이템일 것이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분명 그 리치가 죽으면 떨굴 거라고 했지? 그렇다는 것은 이벤트 성으로 드롭확률 100%짜리 아이템이란 소리잖아? 아론.”
아론은 놈을 한 번에 죽이지 않았다. 린이 죽었기 때문에. 린은 정령술과 궁술이 합쳐진 특수 클래스기에 궁수레벨 100으로는 마스터가 될 수 없고 레벨 업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했으니 죽었다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경험치 복구가 문제인 것이다. 해서, 이번만큼은 나도 아론의 잔인한 행동을 묵인하기로 했다.
“아이템은…… 3개인가?”
노란빛이 감도는 구슬 하나와 추장의 지팡이, 그리고 이름 모를 활까지. 일단 모두 수거해 마을로 돌아가자 죽었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초조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특별히 말로 답하지 않았다. 수거해온 아이템을 들어 올렸을 뿐. 세 개의 아이템을 보자 마을은 환호성으로 뒤덮였고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길드 장의 집으로 모여 군침 삼키며 확인 스크롤을 사용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확인, 확인, 확인.”
[추장의 지팡이]
프리스트가 아닌 자에겐 프리스트 레벨+30. 단, 마법사일 경우 자신에게 주문사용 불가. 프리스트는 DP 30%증가, 레벨+10 효과. 어둠 계열 마법에 영향 받지 않음.
상태이상 걸리지 않음. 1회에 한해 경험치 손해 없이 부활가능
부가 설명 : 추장은 신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존재이다. 신에게 보호를 받고, 그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건 선택받은 자뿐이다. 이 지팡이는 신이 그에게 내린 선물이다.
[봉인의 구슬(뇌)]
뇌 속성의 그랜드 마스터 라무를 1회에 한해 소환할 수 있다.
부가 설명 : 한 가지 원소라도 진정으로 터득한 자들은 죽지 않는다. 그들을 쓰러뜨린 자들에게 언제든 자신을 부를 수 있는 구슬을 남기고 떠나는데 이 구슬을 사용하면 구슬 속 인물은 무조건 사용자의 말에 복종해야한다. 장난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뇌궁]
블루 드래곤의 콧수염으로 만든 활. 무시무시한 뇌력을 화살 대신 쏘아낸다. 단, 사용자 전체 마나의 10분의 1이 사라지며 사용자의 마나 량에 따라 위력도 달라진다.
“이, 이런 사기성 아이템이!!!”
확인된 3개의 아이템은 유니크를 넘어서 사기성까지 느껴지는 무지막지만 놈들이었다. 생각 같아선 3개 모두 날름 먹어버리고 아마조네스 길드와 영영 마주치지 않고 싶기도 했지만 아직 공소시효(?)가 많이 남아있는 상태라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결국 아이템을 고루 나누어야 했다. 봉인의 구슬은 라무를 쓰러뜨리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나에게 돌아왔고 아마조네스 길드에 이렇다 할 프리스트가 없는 이유로 추장의 지팡이는 우리가, 뇌궁은 저쪽이 가져가게 되었다.
“누나, 위력부터 확인해 봐요.”
“그, 그래.”
린과 레이가 뇌궁에 눈독을 들이긴 했지만 양쪽 사정을 이해하고 얌전히 물러섰고 에린 누나가 강한 무기를 얻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처음 사용해보는 사기성 아이템. 그 위력이 궁금한 양쪽 길드의 모두가 모여서 당겨진 시위를 주목했고 손끝에 모여든 뇌전의 기운에 절로 탄성을 자아냈다.
“에게?”
생각과는 달리 위력이 그렇게 강하진 않았다. 겨우 라이트닝 스피어 정도의 위력이랄까? 잔뜩 기대한 사람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비치었고 몇몇은 우리에게 사기 당했다며 소곤거렸다.
“누나, 그거 잠깐만 빌려줄래요?”
“응? 그래, 여기.”
뇌궁을 사용한 에린 누나 역시 실망이 컸는지 침울한 모습으로 활을 건네주었고 나는 린과 레이의 교정을 받아가며 활 쏘는 자세를 잡은 뒤 주위 사람들을 물렸다.
“제가 궁수 스킬이 없어서 어디로 날아갈지 모릅니다. 비켜들 서세요!!”
내 외침에도 사람들은 기껏해야 라이트닝 랜스나 나오겠지라고 구시렁거리며 천천히 걸어 나왔고 전방에 사람이 없음이 확인되자 시위를 힘껏 당겼다.
“뭐, 뭐야 저건!!!”
시위를 당길수록 커지던 뇌전의 기운은 어느 지점을 넘어서자 다시 줄어들었고 푸른색으로 변하며 예리하게 변했다. 사람들의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리는 가운데 놓아진 시위에선 푸른 기운이 미쳐 날뛰는 이무기처럼 날아갔고 과녁이 아닌 굵직한 고목에 부딪치더니 부딪친 부분의 지름 2m까지를 가루로 되어 버렸다
“이 정도면 8써클의 썬더 브레이크 위력을 훨씬 상회하겠는데요?”
“…….”
90레벨대 마법사의 총 마나량이 엄청나다는 건 알고들 있지만 벌려진 입들은 다물어지질 않았다. 침묵을 깬 건 갑자기 밑 부분을 잃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였고, 몇은 고목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해 예전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나무에 깔려 아웃되었다.
“자요, 이걸 제대로 쓰려면 빨리 궁수 레벨을 마스터하고 마법사 레벨을 올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제대로 다룬다면 저렇게 부수는 것만 아니라 관통도 가능할 테죠. 아, 힘들다.”
“그, 그래. 빨리 마스터해야지.”
“다시 던전 갔던 사람들 모아요. 끝내지 않은 퀘스트가 하나 더 남았으니까.”
아직도 뇌궁의 위력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는지 아마조네스 길드 원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잊은 채 멍하니 던전 속으로 빨려들어 갔고, 거의 본능적으로 해골들을 사냥하며 4층에 이르렀다.
“다시 보게 되는군. 라무는 어떻게 됐나?”
“이 안에 들어있죠. 그리고 말씀하신 게 저거 맞죠?”
내 말에 따라 거트 형이 추장의 지팡이를 들어 보이자 리치는 언데드라 눈물이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던 리치는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내게 넘겼고 이번에도 역시 나는 바로 거트 형에게 줘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라무가 죽은 게 아니라 계속 리치 상태로 계셔야 할 것 같은데, 마을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 이 모습으로 돌아가면 누가 믿어줄 것이며 누가 반겨주겠나? 이곳에서 누군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며 살아야겠네.”
언데드가 되었건 몬스터가 되었건 그가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나키르, 가서 신관들의 테이밍을 풀어주고 와라.”
“예? 하지만 이렇게 유용한 놈들도 없는데…….”
“그러는 게 예의야. 게다가 놈들도 A.I라 이제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파이치치.”
나키르만 다시 파이치치로 보내고 우리는 다시 마을로 돌아와 나키르를 기다렸다. 나키르가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말을 들어보니 파이치치에 돌아가 소환하자마자 자동으로 테이밍이 풀려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조네스 길드와 합의 하에 그 던전 자체를 봉쇄, 우리의 생활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 * *
“큰일났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6개월, 버그 처리반 팀장과 약속한 8개월이 1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완전히 이곳 생활에 적응해 나가기 싫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을 때, 숲의 외곽 사냥터를 배정 받은 길드 원 하나가 온 몸에 심한 상처를 입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몸이 왜 그래!!”
“중앙 대륙의 길드들이, 연합해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