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에서 생긴 일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헛소린 들을 것 없다, 죽여라!!!”
“젠장, 여기만 탈출하고 드림 본사로 찾아가서 따지고 만다. 파이어 볼.”
리턴을 쓰기엔 시간이 모자라고 실드, 리턴 콤보를 사용하려해도 검기, 검강을 쓰는 놈들이 너무 많아 버티기 힘들 것이기에 강행돌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막아라!! 도망치게 놔둬선 안 돼!!!”
“크아악.”
뭉쳐있어서 피해는 크게 입힐 수 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많은 마나를 소모해 버티기도 힘든 상태,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했다.
“그렇지, 이거나 먹어라!!!”
쨍그랑!
품에서 녹색 액체가 든 병을 꺼내 던지자 기사 하나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병을 깨버렸다. 녹색 액체는 다름 아닌 중급의 독. 어쌔신들의 스킬중 하나인 독 바르기로, 검에 바르는 것보다는 독이 퍼지는 속도 등에서 떨어지지만 다수의 적을 혼란에 빠뜨리기에는 더 효과적이었다.
“이것도 먹어라!!”
뒤이어 던진 병은 보라색의 액체가 든 중급의 폭발 포션이었다. 위력은 대충 파이어 볼 정도의 수준!! 병을 쳐내려던 기사는 물론이고 주위의 병사들까지 상당한 타격을 입고 쓰러졌다.
“뛰어 내릴 준비해.”
“계단에 적들이 쫙 깔려있는데 미쳤어?”
이번에는 상급의 폭발 포션 3개를 한꺼번에 계단 아래로 던져버렸다. 한 개 한 개가 4써클에 해당하는 위력이니 당연히 주변은 초토화 되었고 우리가 뛰어 내릴 뒤쪽으로 상급의 독 포션을 하나 더 던진 후 뛰어 내렸다.
“크흑…… 달려!!”
계단 위쪽의 적들은 독 때문에 접근하지 못했고 그 틈을 타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내성만 벗어나면 도망 갈 수 있어!!
“절대 내보내선 안 된다. 국왕 폐하를 해한 자들이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에게서 단호한 결의가 느껴지는 듯했지만 검강의 고수들은 위쪽에 몰려있는지라 상대가 되지 못했다. 독 포션 몇 개를 흘려가며 부서진 내성 문을 통과하자 이번엔 성의 위쪽에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마나가 실리지 않은 일반적인 화살이었기에 머리와 목을 감싸고 뛰면서 투구를 착용한 아론과 베르, 거트 형에게 독 포션 몇 개를 나눠주자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인간 투석기 세 명이 돌팔매, 아니 포션팔매질을 해대자 궁수들도 상당한 위협을 느꼈고 도중에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깨진 포션들은 뒤쫓아 오는 기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헉, 헉. 따돌린 건가?”
“쉬고 있을 틈 없어. 실드 칠 테니 리턴 사용해. 보호하는 마법의 장막, 실드.”
“리턴.”
빛이 발목을 감쌀 무렵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라질 수 있었다. 돌아온 길드 집. 죽었던 길드 원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황을 설명하자 모두 당황했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비싸고 중요한 물품 몇 개씩을 챙기기 시작했다.
“역적들은 나와 심판을 받으라!!!”
마지막, 병사들과 눈이 마주친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어느 새 집 앞까지 찾아온 이들은 순순히 잡힐 것을 요구하다가 대답이 없자 문을 부수기 시작했고 우리는 탈출을 시도했다.
“여럿이 함께 이동하면 걸리기 쉬우니까 일단 각자 흩어지자. 자신의 거처는 귓속말로 알리면 되니까. 자, 받아.”
텔레포트 스크롤을 한 장씩 나눠주고 남는 게 없자 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오빠는요?”
“난 텔레포트 마법이 있으니까 괜찮아. 살아서 만나자. 조금만 버텨. 안전한 곳에 자리 잡고 로그아웃해서 본사에 직접 따지러 갈 거니까.”
여분으로 사뒀던 텔레포트 스크롤은 안타깝게도 한 장이 모자랐다. 마법으로 사용하는 텔레포트는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랜덤이라는 게 문제지만 일단 여기를 벗어나면 괜찮을 테니 상관없겠지.
“멈춰라!!”
“텔레포트.”
“텔레포트.”
“텔레포트…….”
멈추란다고 멈출 바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2층으로 올라오기가 무섭게 모두 한줄기 빛이 되어 사라졌고 어딘가 익숙한 다른 공간이 나를 반겼다.
“여, 여긴?”
“오, colonist. 이게 몇 년 만이니?”
“로사 아주머니?”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기껏 텔레포트해서 왔다는 곳이 전에 불 속성 수련할 때 아르바이트했던 뤼크레스의 한 여관인 것이다. 다시 텔레포트 할 마나는 없는데 미치겠군.
“아주머니, 저 좀 숨겨주세요.”
“응?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라.”
멀리서 들려오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에 재빨리 카운터 밑으로 숨었다. 아니나 다를까, 발소리의 주인공은 한 무리의 중무장한 기사들. 여관 벽에 무언가를 붙이고 아줌마에게 나를 봤냐는 질문을 던진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인 거니? 반역자라니…….”
“믿어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누명 썼어요.”
“역시 그랬구나. 너 같이 착실한 애가 반역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계속 있다간 폐만 끼치게 될 것 같은데 이만 가 볼게요.”
아줌마를 못 믿는다기보다는 계속 있다가 걸렸을 때 벌어질 일이 두려워서이다. 나야 도망가거나 한번 죽으면 끝이지만 게임 속 NPC인 아줌마는 그걸로 끝이겠지.
“몸조심 잘 하거라!!”
아줌마의 배웅을 받으며 가만히 주위를 살피자 서쪽이 허술해 보였다. 마지막 남은 마나 포션을 입에 털어 넣으며 블링크를 사용해 안전을 확보하고 출구를 향해 달렸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마을의 경비대, 항시 문을 지키고 있는 그들을 잊고 있던 것이다.
“젠장…….”
경비대원들은 늦은 저녁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자 경계 자세를 취했다가 나란 걸 알고 잠시 고민했다. 요 얼마간 만나지 못했지만 예전에 소매치기를 잡고, 그들의 말동무가 되면서 친해 졌으니까. 5미터 앞까지 왔을 때도 고민하던 그들을 갑자기 몸을 획 돌려 모르는 척 했다.
“오늘은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
“그러게 말이야. 옆으로 누가 지나쳐가도 모르겠는데?”
반역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텐데 일부러 딴청을 피우는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하고 계속 달려갔다.
“망할, 망할, 망할…….”
뤼크레스의 서쪽은 초보자 존이다. 벌써 나한테도 PK범들처럼 표시가 생겼는지 사냥하던 초보들은 도망가거나 공격을 해왔는데 MP도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그들을 죽이지 않고 도망가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그런데 문제는 도망갔던 초보들 중 하나가 마을에 가 알렸는지 몇몇의 유저와 기사들이 날 잡으러 쫓아온다는 것. 덕분에 난 잡히지 않으려 마나가 차는 데로 블링크를 쓰면서 도망 다니고 있다.
“이봐, 이리로!!”
블링크를 사용해 잠시 동안이지만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렸을 때 한 노인이 손짓을 하며 자신의 집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속는 셈치고 일단 집으로 들어가자 노부인이 내게 익숙한 파란색 병을 건넸다.
“살림이 넉넉지가 못해서 이것밖에 못 주는 걸 이해해 주게나.”
그것은 제일 싼 마나 포션이었지만 이런 농민 NPC에게 만만한 금액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단 급한 김에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마나 포션을 들이키고 있을 때 그 할아버지가 기사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제게 이렇게 잘해 주시는 거죠?”
“그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지.”
“은혜?”
“허허, 기억나지 않는 겐가? 몇 년 전 논에 물을 댈 수 없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자네가 수로를 만들어 도와줬었지 않은가. 그래서 조그마한 성의로 마나 포션이란 걸 주려 했건만 자네는 이미 사라진 후였지. 그래서 언젠가 다시 만나면 주려고 간직 했었다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땅 속성 수련도를 마스터하기 위해 어느 농가를 도왔었던. 그때 아무 생각 없이 한 일로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이야…….
“감사합니다.”
“감사라니, 은혜를 갚았을 뿐인 것을.”
“아닙니다. 제가 한 일에 비해 너무 큰 보답을 받았습니다. 이거라도…….”
품에서 5골드를 꺼내 노인에게 내밀자 극구 사양했고 설득에 설득 끝에 1골드를 챙겨 넣었다.
“신전으로 가보게. 신성 영역인 만큼 안전할 걸세!!”
밖으로 나오긴 했어도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는데 노인은 또 한 번 도움을 주었다. 이 근처에 신전이라면 미완성이던 건물뿐인데 그새 완성된 건가? 좋아, 일단 가보자.
“마무리 공사 중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북쪽의 신전으로 왔지만 신전은 아직 완성 된 게 아니었다. 상당부분이 완성되긴 했지만 아직은 공사 중인 곳이 있었고 난감해하고 있을 때 잠시 신전 안에 들어갔다 나오던 인부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오, 이게 누구야. 그동안 잘 지냈나?”
꽤 낯익은 얼굴. 기억을 되살려 보니 그가 누군지 쉽게 알아 낼 수 있었다. 인부들의 대장, 파스. 바람 속성 수련할 때 이리저리 구경하러 다니다가 친해진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아, 파스 아저씨.”
“아까 기사들이 자네 초상화를 들고 와서 봤냐고 물어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어찌된 건가?”
“사실은 그게 말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실대로,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반역’인데도 그는 꺼려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자신의 일처럼 열 받아 했고, 자신들이 도와줄 게 없는지 물어왔다
“이 신전에 신세를 좀 질까 해서 온 건데 아직 공사도 덜 끝났군요.”
“응? 그거라면 걱정 말게. 아직 마무리가 안 된 곳이 있긴 하지만 완성된 곳에서는 이미 예배를 보고 있으니까. 내 특별히 사제님께 자네 말을 잘 해주지.”
“정말요? 고맙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들의 부탁으로 난 언제까지고 신전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대사제라는 사람이 기사가 잡으러 와도 막아 준다고 했으니 이제 안심이군.
“로그아웃.”
“후우…….”
가만히 앉아 심호흡을 하면서 어지러움을 떨쳐버리고 태진에게 화상 전화를 연결했다. 나보다 일찍 안전한 곳을 찾았는지 금세 전화를 받았고 내일 본사에 쳐들어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니까 린은 엘프의 숲으로 갔고 나머지는 나처럼 신전이나 집 있는 친구들에게 의탁해 있다 이거지?”
“그래, 이 상태로는 간단한 사냥도 무리니까 최대한 빨리 본사에 따져서 수배를 풀어야해.”
“일이 틀어져서 수배를 못 풀기라도 하면 말 그대로 게임 접어야 할지 모르겠군. 밤새 내일 공방(?)을 위한 질문지라도 작성해야겠어.”
“들어가 볼까?”
“그래.”
다음 날 나와 레이는 날이 밝자마자 드림의 본사로 찾아왔다. 원래는 아론도 같이 올 예정이었지만 오겠다는 린을 떼어놓느라 어쩔 수 없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봐, 학생들. 어딜 가는 건가?”
입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경비의 태클이 들어왔다. 험상궂게 생긴 경비가 계속해서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지만 우린 따지러 온 게 아니던가? 움츠려들 이유 따윈 없었다.
“버그 처리 반이 몇 층이죠?”
“잡상인이나 미친놈이 아니었군. 4층이네. 이 왼쪽으로 가면 엘리베이터가 보일 거야.”
경비는 갑자기 딱딱한 표정을 풀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잡상인은 이해하겠는데 미친놈은 또 뭐야?
“미친놈이라뇨?”
“아아, 가끔씩 돈 좀 있다 하는 것들이 게임 속 돈을 사겠다고 나서거든. 지들끼리 사고파는 것도 아니고 회사까지 찾아오다니, 그게 미친놈이지 뭐야?”
회사까지 찾아와서 사려한다면 상당히 많은 양일 게 뻔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1골드가 1만원일 텐데…… 우리나라도 갑부가 꽤 많단 말이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잘 해결하고 가거라.”
아저씨의 말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가니 두 개의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각 엘리베이터 옆에는 서는 층과 그 층에 관한 약간의 설명이 적혀있어 찾는데 별다른 어려움을 없었다.
“4층을 누르고…….”
“잠깐만요!!! 헉, 헉…… 헉!”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한 사내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다가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호, 오랜만인데?
“어딜!!”
몸을 돌려 달아나려던 사내는 내 손에 목덜미를 잡혀 엘리베이터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제가 뭘 했다고 그렇게 도망가십니다. 제.롬.씨.”
“도, 도망이라뇨.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서…….”
제롬이나 나나 게임 속에서 얼굴을 변형시키지 않아 서로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잠깐, 혹시 어제 일도 이 인간이 주도한 거 아니야?
“제가 어제 당한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혹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 아닙니까?”
“그건 결단코 아닙니다!!”
“그러시겠죠. 만약 오늘 일부러 그랬다는 게 밝혀지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럼…… 빨리 가서 해결책을 찾아볼까요?”
이쯤에서 살짝 웃어주면 효과는 배가되는 법이다. 차가운 표정에 입꼬리만 올라가는 내 얼굴을 보는 제롬은 거의 울상이 되었고 유리한 고지에 올라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될 듯싶었다.
“이, 이쪽입니다. 팀장니임∼.”
철컥!
버그 처리 반이라 적힌 곳의 문이 열리자 제롬이 쏜살같이 달려가 팀장이라 불린 사람의 뒤쪽으로 숨어버렸다. ……애냐?
“무슨 일로……?”
“어제의 쿠데타 때문에 왔습니다.”
“아,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게임 상에서 연락을 넣었는데 모두 접속하지 않거나 귓속말을 꺼놓으신 상태더군요. 이리 앉으시죠.”
컴퓨터로 둘러싸인 방 한가운데에 오아시스처럼 자리하고 있는 원형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팀장은 자리에 앉자 깍지 낀 양손의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얘기를 시작했다.
“어제 일은 뭐라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원래는 왕을 죽이는 걸로 끝났어야 할 일인데 갑자기 A.I가 제 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일이 커져버렸군요. 보통 게임이라면 욕을 좀 먹더라도 백업을 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게임이 아니란 걸 여러분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대로 살라는 소립니까? 사냥도 못하는 이런 상태로?”
“그렇다고 쿠데타에 대한 부분만 수정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일이 너무 커져버리기도 했고……. 그래서 어제 저녁 회의를 통해 만든 대처 방안이 있긴 합니다만. 수형씨, 그 서류 줘보게.”
저만치 떨어져 곁눈질로 상황을 지켜보던 제롬이 갈색 서류철을 전해주고 황급히 사라졌다.
“이건 일단 결제를 받으려고 준비해 놓은 서류인데, 먼저 여러분들 의견을 묻겠습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내용은 여러분들에 한해서 캐릭터를 한 개 더 만들 수 있고 초기 능력치에 약간의 혜택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로 10개월쯤 후에는 본래의 캐릭터에 걸린 수배를 풀어주는 것이죠. 물론 슬쩍. 원한다면 본래 캐릭터에게 두 번째 캐릭터가 모았던 경험치를 모두 옮겨줄 수도 있습니다.”
선심 쓴다는 말투와 동의도 없이 서류부터 만들어 놨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조건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두 번째 캐릭터의 레벨을 본래 캐릭터에 맞춰 올려주신다면 그렇게 하죠.”
“그건…….”
“무슨 선심이라도 쓴다는 것처럼 얘기하시는데요, 90대가 얻는 경험치와 능력치가 좋아도 저렙이 얻는 경험치를 같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어쩌자는 것입니까!!”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팀장도 짜증이 났는지 탁자를 가볍게 내리쳤다.
“일단 수배 푸는 시간을 단축시켜주십시오. 그리고 매달 저희에게 어느 정도의 위로금을 주셨으면 합니다. 나라의 힘이 닿지 않는 오지로 떠날 생각이거든요. 또, 크로반이란 작자를 갈아 마실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십시오.”
“오지라……. 확실히 수배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곳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몇 번 죽을 수도 있을 텐데요? 뭐, 알아서 잘하겠죠. 나라를 갈아엎을 수는 있습니다. 이번 일도 모두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일어난 거니까요. 갈아 마실 수 있을지는 여러분들 능력이지만 조만간 공지로 알리도록 하죠. 그럼, 위로금은 얼마나……?”
“한 달에 100골드로 하죠.”
100골드란 소리에 긴장하던 팀장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정말 그거면 되겠습니까?”
“더 주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더 받을 의향은 있습니다만…….”
“그럼 수배는 현실로 8개월 후에 풀기로 하고 매달 길드 장인 거트루드의 아이템 창에 100골드 씩 넣도록 하죠.”
“잠깐, 잠깐. 뭔가 착각하시고 계신 것 같은데요. 길드 전체에 100골드가 아니라 일인당 100골드입니다. 그 동안 손해 보는 경험치까지 환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역시나, 조금은 무리한 부탁이었을까? 그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조금 낮춰서…….
“좋습니다. 단, 수배가 풀릴 때까지입니다. 수배 기간을 어떻게든 줄여봐야겠군요…….”
“예스!!”
옆에 있던 상연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응? 뭐라고 했나요?”
“아, 아닙니다. 그럼 저흰 이만…….”
“나중에 봅시다, 제롬씨.”
“그래요, 어디 잘 버텨보십시오.”
나가기 전에 제롬을 지그시 쳐다봐 주자 오한이 느껴졌는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 댔나?
“한 달에 100골드씩 8개월이니까…… 800만원!! 크아, 이게 웬 공돈이냐.”
“공돈은 무슨, 8개월이나 쫓겨 다녀야 하는 심적 고통을 생각해봐.”
“까짓 거, 수배 풀릴 때까지만 접으면 되잖아. 한 달에 공으로 100만원씩이나 준다는데.”
상연은 사람 없는 곳으로 나오자마자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처럼 쉽게 접을 수 있을까? 이미 또 다른 현실로 자리 잡아 버렸는데…….
“그 말,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보자.”
우리는 기다리고 있을 다른 길드 원들 때문에 바로 헤어져 각자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만사 제쳐두고 찾은 것은 전용 헬멧. 이젠 익숙해져 괴상하기보단 친근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접속, longway…….”
익숙한 빛에 이끌려 또 다른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시꺼먼 무언가가 내 품속으로 안겨들었다.
“어? 어?”
신전의 여기저기에 달려있는 발광석의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작고 날카로운 단검은 검은 물체에서 뻗어 나온 손에 쥐어져 내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큭!!”
잊고 있었다. NPC의 침입은 막을 수 있지만 일반 유저들의 침입은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질끈 눈을 감고 고통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아무 느낌도 없지 않은가? 슬며시 눈을 떠보니 마비라도 된 듯 어쌔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손에 쥔 단검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 옆에 나를 받아 준 대사제가 근엄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신성한 신전에서 살기를 품다니, 내 그대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리다.”
퍽퍽퍽퍽!
퍼버벅!
퍽 퍽퍽퍽……!
대사제는 정화 시켜준다며 주먹에 신성력을 모아 그를 신나게 두드렸다. 간간이 사용하는 회복주문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그는 들고 있던 단검마저 놓치며 주먹에 몸을 맡겼다.
“오호, 이건 좀 쓸만 하군.”
대사제에게 들키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가 정화 의식(?)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땅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품안에 챙겨 넣었다. 다행히 의식이 끝나고도 그는 알아채지 못했고 꽤 고급 아이템인 그림자의 단검을 무사히 획득할 수 있었다.
“그대도 악한 마음을 품지 않게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마시오.”
“예, 예.”
그는 걸레가 된 어쌔신에게 뭐라 주문을 하나 걸더니 다른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이거, 무서워서라도 빨리 떠나야겠군.
“귓속말, 거트루드.”
거트형을 시작으로 모두에게 귓속말을 날려 결과를 전하고 오지로 떠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오지라 불릴만한 곳은 몇 군데 있었지만 크게 사막과 밀림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사막 쪽의 특징은 나오는 몬스터의 숫자가 적은 대신에 한 마리 한 마리가 강해서 경험치를 많이 준다는 것이고, 밀림 쪽은 그와 반대로 많은 수의 몬스터가 나오는 대신에 약하고 경험치가 적다는 것이다. 선택은 당연히 밀림. 지금 우리의 처지를 생각할 때 포션 소모가 비교적 적은 밀림 쪽이 유리하다. 포션을 비롯한 소모형 아이템은 린이 동기생들에게 부탁해 넘겨받았고 장소를 정해 모이는 일만 남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이 정도 인원이 한 번에 움직이면 당연히 눈에 띌 테고 자연히 현상금을 노리는 자들이나 우리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적대시하는 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왕국 쪽의 움직임이 있을지도 모르고.
“골치 아프네.”
팬클럽과 더 매지션 길드에 도움 요청은 이미 해봤다. 하지만 더 매지션 길드 측은 이번 일의 소문이 이상하게 나는 바람에 나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은 자들이 꽤 생겨나 중립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팬클럽도 예외는 아닌지 상당수의 사람이 빠져나갔다고 한다. 남은 사람들로는 실력 있는 몇 명의 공격도 막아내기 힘든 상태. 뭔가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렇다고 작게 나누거나 개별로 움직이자니 너무 쉽게 죽을 수가 있고…….”
또 다시 머리가 복잡해 졌다. 사람이 안 다니는 곳을 연결해 몇 가지 탈출 루트를 생각해봤지만 아예 안 다니는 길도 아니었으므로 들킬 위험이 적지 않았다. 언제 지어지고 사라졌을지 모르는 집들도 큰 문제였고. 집안에서 우릴 발견하고 사람들을 모으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 눈을 피하기 쉬운 숲을 통해서 운을 믿고 가보는 수밖에 없나?”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 봐도 결국 나오는 답은 하나였다. 강행돌파. 아무리 힐름이 넓다지만 그 만큼 사람도 많으니까. 열이 넘는 인원이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움직인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을 오래 끌어봐야 정보가 새기밖에 더하겠어. 오늘밤에 일을 벌여야겠군. 귓속말….”
한사람씩 귓속말을 돌려 계획을 알렸다. 대략적인 루트와 일을 벌일 시간을. 준비는 이미 끝난 지 오래라 기다리는 일만 남았고 모두 초조함을 덜기 위해 접속을 끊고 나갔다.
“후우…….”
나라고 초조함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현실로 돌아와서 뱃속을 든든히 채워 넣고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며 답을 구하자 금세 맞춰둔 알람이 시끄럽게 울어댔고 길게 숨을 내쉰 뒤 헬멧을 집어 들었다.
“접속, longway…….”
또 어쌔신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지 은근히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쉽지만 할 수 없군. 텔레포트.”
린의 동기생들, 그러니까 내 후배들이 다녀가며 준비한 물품을 나누어주었기에 아직 텔레포트 스크롤에도 여유가 있었다.
몬스터도, 사람도 없는 한적한 산. 도착해보니 먼저 도착한 몇 명의 길드 원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이었는지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근처 나무 위에 올라 망을 보던 린과 레이까지 모두 모여들었다. 다들 이미 목적지와 루트는 알 테니 그냥 가기만 하면 되겠군.
“출발이다. 발소리 낮추고 신경을 곤두세워.”
“실프, 주위를 경계 해줘.”
“바람의 정령?”
정령술사도 아닌 린이 갑자기 실프를 불러냈다. 엘프가 친화력 있는 건 알겠는데 이건 또 어찌된 상황이야?
“전직하면서 엘프들이 약간의 친화력을 불어 넣어줬어요. 정령은 엘프의 궁술에 꼭 필요한 존재거든요.”
정령이 꼭 필요하다? 약간 이해가 갈 듯도 했다. 성에서 하늘로 쏜 화살들이 떨어질 때 무섭게 내리 꽂히던 것도 정령을 이용한 거였겠군.
“꽤 든든한데, 가자.”
행여 낙엽이라도 밟을세라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은밀한 이동을 계속했다. 어두운 숲에서 발밑을 비춰줄 횃불의 빛마저도 최대한 가리며 한참을 이동하던 중 유일하게 낮처럼 거침없이 이동하며 망을 보던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어요.”
사사삭-.
횃불은 이미 꺼버렸고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곳에서 더듬더듬 옆쪽의 나무를 찾아 그 뒤로 몸을 숨겼다.
“음? 방금 이 근처에서 불빛이 보이지 않았어?”
“오빠, 도깨비불인가 봐. 무서워, 빨리 가자.”
“도깨비 따위, 나올 테면 나오라지.”
어둠을 무서워하는 여자와 겁낼 것 없다고 큰소리치는 남자, 전형적인 커플이었다. 아마 저러다 비슷한 거라도 나오면 나 몰라라 도망치…….
“히잌!!”
“꺄아아악!!! 오빠, 같이 가!!”
……는 구나. 그들이 본 건 다름 아닌 린의 실프. 약간 흰색을 띠는 것이, 확실히 갑자기 나타나면 무서울 것 같다.
“휴, 괜히 긴장했네.”
“저런 놈들이라도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버리면 위험해지니까 항상 긴장해야지. 근데 린,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사람이라도 몰고 오면 어쩌려고?”
“죄송해요. 레이 오빠가…… 읍, 읍!!”
린이 말을 하려하자 레이가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충 상황이 짐작 가는군.
“린이라고 일부러 그랬겠어? 실프가 경계하라니까 제 멋대로 움직인 거겠지. 그리고 이런 밤중에 몬스터도 없는 곳을 걸어서 이동한다는 건 텔레포트 비용이 없다는 말인데, 다시 돌아가 텔레포트로 이동하진 않을 테고 마을까지 뛰어 간다 해도 30분 이상은 족히 걸리잖아? 우린 그 안에 이 지역을 빠져나갈 테니 별 상관없겠지.”
“뭐, 그렇다고 해두지. 일단은 이 지역부터 빠져나가자.”
또 다시 은밀한 이동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몬스터가 나오는 지역에 들어왔는데도 그 커플 이후로는 행인조차 없었고 몇 마리의 몬스터를 나키르에게 종속시키는 여유까지 부리며 목적지의 3분의 2 거리까지 올 수 있었다. 끝까지 남의 눈에 걸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남은 문제는 딱 하나, 꽤 크고 깊은 강이었다.
“일단 그 강에 뱃사공이라도 있을 거라 가정하고 오긴 왔다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부딪치고 보는 거야.”
“그래, 까짓 거 배 같은 건 만들어서 가면 되잖아?”
“숨어요!!”
서서히 날이 밝아오려는 상황에서 꽤 많은 횃불들이 움직였다. 잘은 들리지 않지만 뭔가 큰 소리로 명령하는 듯, 그에 따라 횃불들은 어지럽게 움직여댔고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적이다……!”
그 소리들을 알아들었는지 레이와 린이 저들의 정체를 밝혀냈다. 저렇게 온다면 몇 명은 들키지 않을 수 있지만 반수가 넘은 길드 원은 꼼짝없이 들켜 쫓기게 될 것이다.
“제기랄, 어떻게 알았지? 할 수 없다. 1차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지? 일단 흩어지고 거기서 만나자.”
“그래, 아직 거리가 꽤 있으니까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살아서 만나자.”
휙휙-!
모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자 저들도 눈치를 채고 쫓아오기 시작했다. 장애물이 많은 숲속이라 그들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고 그 사이를 린이 휘젓고 다니며 우리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줬다.
“랜티, 저들의 움직임을 막아줘.”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린도 나무의 하급 정령을 불러 뒤를 맡기고 몸을 빼냈다. 하지만 린이 막은 자들이 전부는 아니었고 이미 내 뒤에는 몇 명의 기사가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이렇게 장애물이 많은 곳에선 빠른 판단력만 있다면 블링크 난사가 그 무엇보다 빠르기 때문에 조금씩 그들과의 거리를 벌릴 수 있었지만 일행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잠시일지라도 나 자연과 하나가 되리니, 인비저빌리티.”
그들의 모습이 이젠 보이지도 않지만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도 몰랐고 마나도 넉넉지 않았으므로 모습을 감추고 휴식을 취했다. 이 마법의 좋은 점 중 하나가 포션을 사용해도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기에 마음 놓고 MP를 회복시킬 수 있었는데 눈에 들어 온 모습에 포션을 마시다가 뿜어버렸다.
“켁, 켁.”
작은 통나무집 창문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여성 유저. 들켰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바로 내가 애타게 찾던 소연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내가 심하게 기침하자 밖으로 나와 괜찮은지 물었고 나는 손을 저으며 괜찮다 말한 뒤 얘기할 것을 요구했다. 밖은 위험하기에 들어간 그녀의 집. 불행히도 짐도 둘로 나뉘어져 있고 침대도 두 개나 됐다.
“혼자 사는 게 아니네?”
“응, 동생이랑 같이 살아.”
씨익-.
나도 모르게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남자 친구는 있고?”
“아니, 깨진지가 언젠데…….”
“그런데 저번 듀얼 토너먼트 때 왜 날 피한 거야? 바로 달려가서 찾았는데…….”
“그때 좀 당황했거든…….”
당황해서 날 피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꼬치꼬치 캐물으며 따지고 싶었지만 항상 그녀 앞에서 그랬듯이 입은 마음과 앙숙이라도 되는 듯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이야? 반역이 어쩌고 하는 것 같던데, 네가 그렇게 욕심 부릴 리는 없고.”
“말하자면 복잡한데, 한마디로 누명이지. 아, 클래스는 뭐야?”
“정령술사. 많이 죽어서 레벨은 낮지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나는 움츠려 들 수밖에 없었다. 소연이는 손짓으로 숨으라는 표시를 했고 그녀가 느긋하게 문을 여는 동안 침대 밑으로 들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비저빌리티를 시전 했다.
“혹시 이곳으로 낯선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낯선 사람? 글쎄요, 못 본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제가 허락하지 않는 한 집으로 못 들어오니까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조금 전에 안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그건 누구였죠?”
보이지 않아서 확신할 순 없지만 그는 지금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으리라!!
“아, 동생이 있었거든요. 방금 나갔는데.”
“수색해라!!”
“옛!”
유저가 아니라 NPC인 듯 소연의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집안에 들어와 헤집고 다녔다. 옷장, 아이템 상자, 침대 밑까지. 그리 크지 않은 집이라서 수색이 빨리 끝났고, 개운치 않은 목소리로 그들의 대장쯤 되는 듯한 사내가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가자!!”
그들이 저만치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하고 침대 밖으로 나오자 집안 꼴이 난리도 아니었다. 아이템 보관 상자가 널브러져 있는 것은 기본이요, 말끔히 정리 되어 있던 옷과 이불들이 산발한 머리처럼 지저분하게 흩어져있었고 옷걸이 몇 개는 쓰러져 부러져있었다.
“이거 나 때문에…….”
“아니야, 저놈들이 나쁜 거지.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당분간은 숨어 지내야지. 저 강 건너 밀림으로 들어갈 거야.”
“혼자?”
“아니, 길드 원들과 만나기로 했어.”
순간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면 널 잡으러 온 사람들도 돌아갈 수밖에 없겠다. 그치?”
“무슨 소리야?”
“너 리얼모드야? 지금 공지 못 봤어?”
“으응, 무슨 일인데?”
“공성전이 가능해진대. 새 국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반감을 품은 영주도 있고, 민심이 불안정해졌다나 봐. 공성전이 가능한 영지는 총 6개고 성을 얻으면 왕에게 충성할 건지 중립을 유지 할 건지 적대할지도 고를 수 있다는데?”
적대를 할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성을 얻으면 나라를 갈아엎을 수 있다는 뜻? 그 팀장이 말한 길이라는 게 이거였나?! 하.하.하……!!
“좋아, 이제야 희망이 보이는군. 이만 가볼게.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벌써 가려고? 그런데 강은 어떻게 건널 거야?”
“뱃사공이 있다고 들었어. 뱃삯은 충분하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 추격이나 공격은 막아낼 자신 있고.”
“역시 바보구나? 그 뱃사공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움직이지 않아. 그의 도움을 받으려면 퀘스트를 깨야하거든.”
그랬던가, 퀘스트……. 뱃사공이 주는 퀘스트가 얼마나 어려울 것이며 얼마나 복잡하겠냐마는 시간이 촉박한 우리로선 큰 부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소연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뻔했군. 역시……♡
“흠흠, 그럼 어떻게 하지?”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네가?”
“그래, 어디서 만나기로 했다고? 빨리 가자.”
괜히 우리 일에 끼어들었다가 잘못하면 같이 반역자로 몰릴 수 있었기에 말려보려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걸릴 경우 가짜 인질극을 펼치기로 마음먹고 안내(사실은 소연이가 길을 더 잘 알았다.)했고 잡으러 온 사람이 많이 줄어들어 수월히 움직일 수 있었다.
“여기야.”
뱃사공이 있다는 곳의 근처까지 이동하자 옆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레이, 우거진 수풀을 이용해 몸을 가리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네 머리 위와 양옆.”
고개를 들어보니 굵은 나뭇가지 위에 린과 세르가 숨어있었다. 다른 애들도 아마 수풀을 이용해 숨어 있겠지.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레이가 설명을 원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믿을 만한 조력자.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뱃사공을 협박해서라도 강을 건너야지.”
뱃사공이 퀘스트형 NPC인지 모르는 아론이 레이의 옆에서 튀어나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걱정 말고 일단 배에 타기만 해.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번에는 못 가겠는데?”
길드 원만 11명. 웬만큼 큰 배가 아닌 이상 한 번에 타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몇 명까지 탈 수 있는 배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나까지 합치면 다섯 명, 무리하면 일곱 명까지도 가능해.”
“그럼 거트 형하고 세르, 카엘, 드라이저, 나키르, 베르가 먼저 간다.”
대략적인 합의를 마치고 바로 배의 점령에 들어갔다. 뱃사공의 퀘스트는 아예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배를 강탈해 일단 강 위로 떠밀었다.
“소환, 도루루 x 3.”
“읍, 읍 으브브브.”
소연이에 의해 소환된 물의 중급 정령 세 마리는 뒤쪽에서 배를 밀어 속도를 증가시켰다. 배의 주인인 NPC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솥뚜껑 같은 아론의 손에 입을 막혀 버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괜히 물고기 형태가 아니었군.”
물고기 형태의 중급 정령들은 물속에서 보통이 넘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일곱의 무게 때문에 잘 안 나갈 거라 생각했던 배는 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시원스럽게 강을 갈랐고 금세 반대편 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트 형들을 내려놓고 돌아오는 배는 쾌속정이라도 되는 양 무서운 속도를 자랑했고 누군가 보는 눈이 생기기 전에 나머지 사람들도 실어 날랐다.
“고마워, 이제 가봐. 우리랑 더 같이 있다간 너까지 위험해져.”
“하지만…….”
“가보래도. 다음에 만날 땐 당당하게 멋진 선물을 준비해 갈 테니까 기대해.”
많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소연이를 돌려보내자 다시 현 상황에 충실해야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에요?”
“내 첫사랑.”
“네?”
“자, 그럼 들어가 보실까.”
당황하는 린의 물음을 뒤로하고 밀림 진입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익숙하지 않은 지형과 몬스터들에 대비하여 마법사와 프리스트를 보호하는 대형으로 진을 짜고 한발 한발 내딛자 오랜만에 긴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아직까진 아무 이상 없…….”
“으악!!”
스스스스스스-!
나뭇가지를 밟으며 주변을 경계하던 린이 이상 없음을 보고하려는 순간 베르의 키가 평소보다 훨씬 작아졌고, 계속 작아지고 있었다.
“모두 물러서, 늪이다.”
린은 나뭇가지를 밟으며 이동하니 늪 따위를 발견하거나 걸릴 위험이 없다는 걸 생각지 못하다니, 린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었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베르의 몸은 따라주질 않았고 황급히 나무줄기를 찾아 눈을 혹사시켰다.
“젠장,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동 속도를 저해하던 나무줄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 나무의 정령!!”
“아까 기사를 막을 때 소멸 되어 버려서 재계약까지는 하루가 필요해요.”
“젠장, 모르겠다. 필라 오브 워터!!”
푸슈슈슉-.
다행히도 늪은 ‘물’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 베르가 있는 자리에 물기둥을 세우자 베르의 몸도 물과 함께 뿜어져 올랐고 다시 떨어지는 녀석을 아론이 달려가 발로 차버렸다.
“커헉, 형님. 너무 하십니다.”
“그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구해볼 방법도 없었어. 고맙게 여겨.”
확실히 거기서 떨어졌으면 늪 속에 완전히 잠기어 다시 손쓸 시간도 없이 아웃됐을 것이기에 베르도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아쿠아를 이용해 대충 베르의 몸을 씻기고 다시 늪을 피해 이동, 물가에 도착하니 몇 마리의 악어가 눈을 꿈벅거리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도살자 스킬 좀 올려두는 건데.”
아론은 진심으로 악어가죽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었다.
“경험치는 짜게 주지만 많아서 좋군. 질보단 양이라 이건가?”
슬금슬금 물을 건너 우리 쪽으로 이동해오는 수많은 악어와 물뱀들. 물속을 가득 메운 그들을 보니 옛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아론, 옛날 생각나지 않냐?”
“그러게, 이놈들도 가져다 팔면 돈 좀 되려나?”
“확인해 보면 알겠지. 드라이저, 상대는 물속에 있다. 준비해!!”
“예? 아, 예.”
씨익-.
드라이저는 말을 알아듣기는 했으되, 어떤 걸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내가 스펠을 읊기 시작하자 바로 따라 했다.
“무지한 자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90대 레벨 두 명이 동시에 사용하는 체인 라이트닝, 두 손에서 뻗어나간 전격의 힘은 서로 엉키며 더 굵고 많은 갈래로 퍼져나갔고 물속은 물론이요, 물과 접촉한 모든 것들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저래서 어디 아이템이나 남아있겠어?”
“지금이라면 들어가지도 못하겠지. 하지만 아이템 수거 방법은 따로 있지. 감도 설정 변경, 1단계로 전환.”
약간의 어지러움을 동반하며 내가 나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변했다. 이렇게 하면 전투도 제대로 하지 못하겠지만 나름대로의 이점은 있더군.
“수거.”
1단계 모드는 철저히 게임적 요소가 있는 것. 따라서 말만으로도 아이템 창에 내 몫의 아이템이 챙겨진다. 변경하는 동안 1분씩, 총 2분의 어지러움을 겪어야 하지만 적도 없는 상태에선 쓸만 한 모드이지 않은가?
“저렇게 타버렸는데도 가죽은 주는군. 가죽과 각종 이빨, 아쉽지만 이게 전부야. 그나마 대량이라는 게 위안이 될까? 감도 설정 변경, 3단계로 전환.”
챙겨지는 건 어디까지나 내 몫의 아이템뿐이기에 드라이저도 감도 변경 후 아이템을 수거해 나갔고 다른 사람들은 느긋하게 다음 리젠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잉 피잉-.
챙챙챙!
3단계로 변경을 한 지 30초나 지났을까?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활을 당기는 소리와 화살이 땅에 박히는 소리, 또 무언가로 화살을 쳐내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게 들렸다.
“뭐, 뭐야?”
다행히 그들도 악의는 없는 듯 사상자가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날아오는 화살은 우리 주위에 빼곡히 박혀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여긴 우리 구역이다. 살고 싶다면 얌전히 돌아가.”
저 많은 화살이 언제 우리 몸에 꽂힐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봐서일까? 그리 겁나지는 않았다. 숲에서 구역을 운운하며 활을 겨누는 상황. 엘프의 숲 때와 참으로 비슷하지 아니한가? 그녀들이 엘프 흉내라도 내는 것 같이 여겨져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오지에 주인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군요. 실례지만 길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먼저 그녀들의 경계를 푸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지팡이를 품에 넣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공격할 뜻이 없음을 내 비추며 앞으로 한발자국 걸어 나갔다.
“거기 멈춰. 우리는 아마조네스다. 주요 던전과 사냥터를 장악한 것도 모자라 이곳까지 넘봐? 절대 내어줄 수 없어!!”
“저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피슉-!
오해를 풀기 위해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딛자 가차 없이 발등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이거, 난감하군.
“혹시 길드 장 되시는 분이 여기 계십니까?”
“아니, 길드 장은 여기 없다.”
“그럼 절 그분께 좀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럴 순 없다.”
“이런, 실례가 많았군요. 전 라스트 길드의…….”
“colonist다!!!”
다행히 날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그녀가 소리치자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웅성거림이 커지자 리더로 보이는 궁수가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신분은 확실한 것 같군. 좋다, 따라와라.”
다행히 이번에는 나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길드 원 모두가 그녀의 뒤를 따라갔고 대신 수많은 궁수들의 포위를 받아야만 했다.
“길드 장이십니까?”
“예. 얘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왕을 죽이고 왕좌를 빼앗으려다 지금은 쫓기시는 몸이라고요? 왜 그러셨죠? 왕이 되어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으셨던 겁니까? 아니면 그렇게 해서 이름을 날리고 싶으셨나요?”
물음을 해오는 그녀의 입가엔 냉소가 가득했다.
“후우, 오해입니다.”
“오해라고요?”
“예, 변명으로 여기실지 말지는 길드 장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니 전 사실대로만 말하죠. 이번 일의 시작은 오크 대 침공 때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설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때의 조건과 최근 상황만 얘기하면 됐으니까. 믿음을 주기 위해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지만 아직 확실한 믿음은 없는 것 같았고 얘기가 끝난 뒤, 우리를 내보내고 이어진 회의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들어오시죠.”
결정은 내려졌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모두 물러나 있었고 길드 장만이 떫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이곳에는 당신들 같은 고레벨이 사냥하기에 적당한 곳이 많지 않습니다. 즉, 당신들을 인정하려면 그 중 하나를 비워야 한다는 소리죠. 그럼 우리 길드 원의 레벨 업이 느려질 테고…… 해서, 전 당신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아…….”
“하지만 길드 원들 중에 당신의 팬이 꽤 많더군요. 그들의 주장이 강력하니 사냥터 한 곳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대신, 그곳에서 벌어들이는 아이템은 모두 저희가 회수해 갈 것입니다. 포션 같은 소모형 아이템은 저희 쪽에서 지원해 드리지요. 그리고 만약 아이템을 숨겼다가 걸리면 가차 없이 내쫓을 테니 그리 아십시오.”
어차피 한 달에 100골드씩 들어오니 아이템 좀 못 먹는다고 울상 지을 이유 따윈 없었다. 결정이 나자 사냥터 안내를 받기 전에 그녀들에게 부탁하여 텐트(집이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침대와 같은 역할)를 구해 설치했고, 팬들의 안내를 받아 길드 촌(길드 원들의 집이 모여 있는 곳)의 이곳저곳과 앞으로 우리가 쓰게 될 사냥터를 하나하나 알아갔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나오는 몹은 아나콘다에 크로커다일 같은 무식하게 커다란 놈들이라 이거지?”
“네, 아나콘다는 마나 샷이나 일반 화살로도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크로커다일은 워낙 표피가 단단해서 마나를 실어도 쉽지 않아요.”
“하긴, 그도 그렇겠군. 이놈들을 어떻게 잡아야 하려나…….”
아마조네스는 사람 수로, 화살 수로 클리어 해왔다지만 우리는 사람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근처가 물투성이니 불 속성을 사용하기엔 무리고, 전기 속성? 그거라면 어느 정도 효과를 보겠지만 몸집이 그렇게나 크다면 지금까지와 같은 효과를 보기는 힘들 것이다.
“마법에 대한 내성은?”
“저희 쪽에 마법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리 높지는 않을 거예요.”
키에에에-!
아직 뚜렷한 대책도 세우지 못했건만 물속에서 커다란 아나콘다가 튀어 올랐다. 그에 반응해 날아가는 검강과 화살. 강력한 원거리 공격들은 놈의 몸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혔지만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못했다.
“아론!!!”
“꺄악!!”
덥석!
공중에서 수직 하강한 아나콘다는 한 입에 아론을 삼켜버렸고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감히!!!”
부우욱-!
가죽 북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아나콘다의 입에서 배까지 파란색 선이 그어졌다. 하늘을 향한 파란 빛줄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끔한 절단면만을 남긴 채 사라졌고 깨끗한 절단면 틈에선 피나 내장 대신에(19금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아론의 육중한 몸이 체액 범벅이 되어 비집고 나오려하고 있었다.
“푸아, 으윽. 영 찝찝하군. 망할 놈의 뱀 같으니라고.”
“혹시 모르니까 가만히 있어봐, 큐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 없었지만 먹혔던 대상이 뱀이었던 만큼 만일을 위해 해독 주문을 걸어줬다.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중독되지는 않았던 듯. 독의 존재여부가 가려지자 아론은 물속으로 뛰어 들었고 다급한 가이드(?)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거긴 수심이 깊어요!!!”
“!!”
무게를 줄이기 위해 플레이트 메일이 아닌 체인 메일 등을 섞어 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들도 철인데 그 무게가 어디로 가겠는가? 물에 빠지지 않으려 공중에서 버둥거려봤지만 추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익사는 싫어!!!”
풍덩!
조약돌도 아니고 아주 큰 바위를 던진 듯한 소리가 나며 아론이 잠수를 했다. 서둘러 그 자리로 가봤지만 공기방울만 보글보글 올라올 뿐 어찌 손 써볼 방도가 없었고,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쯧쯧, 결국 이렇게 가는군. 머리에 든 게 없긴 했지만 나름대로 좋은 녀석이었는데…….”
“누가 머리에 든 게 없어?!”
푸왁-!
익사로 결론 내렸던 녀석이 아주 말짱한 모습으로 물에서 튀어나왔다. 마치 얕은 물에서 땅을 박찬 것처럼.
“어? 안 죽었냐? 그 깊이에서 갑옷까지 입은 채 헤엄쳐 나올 수 있을 리는 없을 텐데?”
“깊이는 무슨, 이렇게 수심이 얕은 곳에서!!”
“그게 무슨 소리에요, 거긴 수심이 7m도 넘는다구요!!”
“엥?”
아론은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이 밟고 있는 지형을 살폈고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검푸른 색에 가뭄 만난 논처럼 갈라진 땅, 미약하게 들리는 숨소리와 바닥의 떨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조심스레 뒤를 살피자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크로커다일이다!!!”
“쿠아아아.”
병아리 색 눈을 껌벅거리던 놈은 가이드의 외침에 맞춰 입을 벌렸고 그에 따라 놈의 주둥이 위에 있던 아론 역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익!”
방금 전엔 간신히 살았지만 이번에 떨어지면 확실하게 죽는다는 것을 아는지 아론은 급히 검강을 생성시킨 검을 놈의 등에 박아 넣었고, 그것이 약간의 통증을 불러일으켰는지 놈도 떨어뜨리려 애를 썼다.
“아주 발광을 하네. 아론이 저기 있어서 전격계 마법도 못 쓰겠고 어떡한다.”
“제, 제가 길드 원들을 불러 올까요?”
“아니, 일단 우리끼리 한번 해보지. 나중에 도움을 받더라도 일단 하는데 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론이 저기 붙어있는 이상 특별한 움직임을 할 수가 없었다. 녀석의 죽음을 한번 각오하기에는 복구까지의 필요 경험치가 너무 많았으니까.
“으아아아!!! 어떻게 좀 해봐!!”
제 놈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겐지 녀석은 이리저리 휘둘리며 비명 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이렇게 되면 할 수 없지.
“레이, 린. 눈을 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어차피 저대로 가면 아론이 먼저 힘 빠져서 손을 놓게 돼. 차라리 더 발광해서 아론을 날려버리길 바라는 수밖에.”
“도리가 없군, 명복을 빌어주마!!”
피슉 피슉-!
레이가 먼저 한발을 날렸다가 린이 차마 활을 들지 못하는 걸 보고 대신해서 한발 더 날렸다. 첫발은 성공, 그러나 두발의 시간차가 너무 나버린 관계로 두 번째 공격은 엉뚱한 곳에 맞았고 몸부림이 조금 더 격해졌을 뿐이었다.
“야!! 하려면 제대로나…… 크흑.”
아론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는 있지만 놓는다고 멀리 날아갈 정도는 아니어서 힘만 더 빼게 만든 격이 되어 버렸다. 상황이 악화되자 레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나머지 눈을 공격해봤지만 매번 눈을 감거나 엉뚱한 부위에 맞는 것으로 끝이 났고 좀처럼 맞아주질 않았다.
“제가…… 할게요.”
아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는지 린이 활을 들었다. 그리고 당겨진 화살. 예측 사격인지 겨냥하는 부위는 눈과 약간 떨어진 곳이었다.
“키에에에에엑!!!”
실패인 듯 눈보다 약간 아래 부분을 향하던 화살이 정령의 힘을 빌려 궤도를 바꾸며 정확히 눈에 박혔다. 양쪽 눈을 잃은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더욱더 격하게 몸을 움직였고, 그 결과 반동을 이용해 아론이 반대편 숲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피해!!”
콰지직-!
발광하는 놈의 꼬리에 우리가 있던 나무로 된 선창이 박살이 나버렸고 조그만 나무배는 저만치 떠내려가 버렸다.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는 사이 레이와 린이 화살을 날려보았으나 모두 튕겨났고 마나 샷이나 검강 같은 고급 기술로만 생채기를 낼 수 있을 뿐이었다.
“이거 환장하겠군.”
“형, 이제 어떻게 하죠?”
“겉은 단단할지 몰라도 속은 어떤가 보자. 세리, 지금부터 보조마법 비슷하게 생긴 건 다 걸어 줘.”
“스피드 업, 스트렝스…….”
“드라이저, 넌 전격계열 마법으로 저기 박혀있는 아론의 검을 노려봐. 못하겠으면 체인 라이트닝을 사용해도 좋고. 저놈 입이 떡 벌어질 정도면 돼.”
“해 볼게요.”
어떤 마법이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드라이저는 결심이 섰는지 린에게 다가가 조그만 소리로 무언가를 물었고 린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디네.”
“심판하고 처단하는 정의의 번개, 썬더 브레이크!!!”
“길을 만들어!!”
린에게 부탁했던 게 바로 이거였다. 물로 길을 만드는 것!!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는 당연히 썬더 브레이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소멸되었지만 목표인 아론의 검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끼에에에에엑!!!”
벌려진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도록 드라이저는 마법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젠 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각을 유지시키며.
“블링크.”
목표 장소는 놈의 입안. 이대로 입이 다물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잡혀 먹힐 테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젠장, 이렇게 흔들려서야…… 빨리 끝내고 가는 수밖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떤 마법으로 공격할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역시 막상 닥치자 선택의 범위가 빠르게 축소, 정리되었다. 인페르노 같은 지속적 마법은 유지가 불가능하니 제외시켰고, 파이어 볼 같이 약한 마법도 이놈의 HP를 많이 깎기 어려웠기 때문에 제외시켰다. 지금 필요한 건 그야말로 일격필살!! 그것도 폭발형이어야 했다.
“더블 스펠만 쓸 수 있었어도…… 그렇지!!”
더블 스펠을 쓸 수 있다면 이런 걱정 안 했을 거란 생각이 들자 레벨 업의 필요성이 간절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 이런 상황에서 실험해 보기엔 너무 위험했지만 잘하면 더블 스펠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을지 몰랐다.
“위대한 불꽃의 분노, 익스플로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연달아 이어지는 마법. 둘 다 상당히 고위급 마법들인지라 막대한 양의 마나가 몸에서 빠져나갔지만 일이 예상했던 대로 돌아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형, 피해요!!!”
모든 마나를 쏟아 부었는지 이젠 드라이저의 손에서 미약한 전류조차 나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크로커다일의 입도 닫히려하고 있었다.
“보호하는 마법의 장막, 실드.”
놈의 입이 닫히는 순간 뛰어내리며 실드를 두르자 모두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띠웠지만 곧 느낌표로 고쳐야했다.
콰과과과과광-!
손바닥 위에서 터진 폭탄보다 주먹 쥔 손안에서 터진 폭죽이 손에 더 큰 충격을 주는 것이다. 내 버스트 플레어의 핵심도 그런 것이고. 아무튼 입을 다문 크로커다일은 다시 한 번 엄청난 고통을 맛봐야했고 이번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움직임이 멈추어간다?”
잠시간 고통에 몸부림치며 주변을 초토화시킨 크로커다일은 고개를 떨군 채 침묵했다. 아직 몸 색깔이 변하지 않는 걸로 보아 죽은 건 아닌 듯. 그렇다면 마지막 일격을 날려줄 필요가 있었다.
“후우, 죽음으로 이끄는 파멸의 구슬, 버스트 플레어!!”
비록 자신이 만든 것이지만 변형, 조합마법도 스펠이 필요했다. 공들여 만들었다고는 하나 시동어만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밸런스 조정을 위해). 날아간 압축된 불꽃은 몸부림으로 크게 벌어진 상처를 비집고 들어갔고, 이내 놈의 살점을 비처럼 흩뿌리며 폭발해 버렸다. 회색으로 물드는 크로커다일의 몸. 승리했음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이얏호!!”
“휴우, 감도 설정 변경, 1단계로 전환. 수거. 감도 설정 변경, 3단계로 전환.”
연달아 감도를 변경해대자 많은 양의 마나가 빠져나가선지 더욱 어지러움이 커졌다. 큭, 만취했을 때보다 더 심한 것 같군.
“형, 그런데 어떻게 한 거예요? 마법간의 딜레이 때문에 마스터가 아닌 이상 연달아 고위급 마법은 쓸 수 없을 텐데.”
“일단 숨 좀 돌리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지만 약 2분여 간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마나 포션도 억지로 마시려다 뱉어버렸고.
“후유, 다음부턴 서두르지 말아야겠군. 어지러움이 중첩된 느낌이야.”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어떻게 되긴, 시간차 공격이지. 너도 알다시피 익스플로젼은 발동시간이 좀 걸리잖아? 한데 시전 함과 동시에 공격으로 인정되지. 그래서 그 발동시간 내에 다른 주문을 캐스팅 한 것뿐이야. 급하게 사용해서 평소보다 많은 양의 마나를 날려먹긴 했지만.”
“그럼 다른 발동시간 긴 마법과 조합하면 몇 가지 콤보가 나오겠네요?”
말하는 드라이저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있었다. 하긴, 마법간 딜레이가 있는 마법사에게 유용한 콤보란 매우 중요한 것이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발동시간이란 게 넉넉하지는 않아서 그 시간에 맞추려면 스펠을 빠르게 할 필요가 있어. 즉, 평소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마나가 나간다는 소리니 그놈만 잡고 끝낼 게 아니라면 피하는 편이 좋겠어.”
“예!!”
“아참, 아론은?”
“……!!”
모두 크로커다일에 정신이 팔려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아론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돌아오니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저쪽으로 가기 위한 배도 떠내려간 터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저 반대편 사냥터를 맡고 있는 길드 원들에게 연락해 둘게요. 배도 곧 여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가져올 테고 텐트도 만들어 두셨으니 리턴하거나 아웃되시면 저희 마을로 돌아오시겠죠. 계속 사냥하세요.”
끝으로 크로커다일은 리젠시간이 무척이나 길다는 소리까지 듣자 안심하고 하던 사냥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현실시간으로 3주일, 주 사냥감인 아나콘다와 며칠에 한 번씩 랜덤하게 뜨는 크로커다일을 잡고 적지 않은 경험치를 얻으며 상급의 래더 아머 재료인 크로커다일의 가죽 등을 고스란히 그녀들에게 넘기자 우리에 대한 경계심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길드 장의 호출이에요!!”
처음처럼 매일 붙어있지는 않지만 가끔씩 들러 수확물을 받아가고 감시도 하는 역할인 레나란 이름의 16세 소녀가 급한 듯 발을 구르며 손짓했다. 말만 감시였지 거의 구경하며 놀다갔기 때문에 오버하는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별거 아니라 생각하며 느긋하게 사냥을 마무리 했다.
“늦으셨군요. 아론님이 앞장서시기라도 한 건가요?”
“하.하. 뭐 그런 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냥 잊어버리세요.”
3주전, 첫 사냥 때 일행과 떨어진 아론은 어떻게든 돌아와 보려고 물을 따라 움직였다. 하나, 수심은 얕아질 줄을 몰랐고 설상가상으로 길이 막혀 우회해 가야하는 사태가 발생!! 다른 사람이라면 약간 시간이 걸릴지라도 수월히 이동했겠지만 길치가 괜히 길치던가? 전혀 엉뚱한 길로 들어선 아론은 결국 처음 위치에서 20분 거리의 다른 사냥터에서 아마조네스 길드 원들에게 구조되었다.
“노력해보도록 하죠, 쉽진 않겠지만. 훗.”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번 웃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덕에 아론은 누군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있지도 않은 먼 산을 바라봐야 했다. 설령 있다 해도 사방이 울창한 숲이라 보일 리는 없었지만.
“그보다, 어쩐 일이시죠? 전리품은 레나를 통해 빠짐없이 보냈고, 포션이나 화살도 아직 여유가 있는데요.”
“아, 본론을 잊고 있었군요. 오늘 여러분을 모이시게 한 이유는 여러분의 사냥터 때문입니다. 요 몇 주 동안 레벨 업을 한 길드 원이 꽤 있는데 여러분이 사용하시는 그곳이 그 아이들에게 적당하거든요. 물론 크로커다일까지는 잡지 못합니다만 그건 어차피 간부급들이 처리해오던 일이니까요.”
결론은 사냥터를 비워달라는 말. 그녀의 갑작스런 태도에 겉으로 티내진 않았지만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그 사이 중앙 쪽 길드나 크로반과 손을 잡은 것일까? 중앙 대륙에 있는 녀석들을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이런 저런 추측이 머릿속에 난무하며 혼란으로 치닫고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몇 마디 덧붙였다.
“대신 여러분의 사냥터에 제한을 걸지 않겠습니다. 아이템도 반절만 받죠. 나머지 반절은 쌓아두시든, 저희에게 파시든 자유입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했잖아요, 그 사냥터가 필요한 길드 원들이 생겼다고. 그리고 이젠 믿으니까요. 그럼 다시 인사해야겠군요. 저는 아마조네스 길드의 장을 맡고 있는 에반제린이라고 합니다.”
“저, 전 라스트 길드의 장을 맡은 거트루드입니다.”
악수를 하고 에반제린이 눈짓을 하자 한 길드 원이 둘둘 말려진 큰 종이를 가져와 탁자에 펼쳤다. 화려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간단한 그림과 기호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이건 저희가 만든 밀림의 지도입니다. 워낙 넓어서 세세하게 기록하진 못했지만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의 말처럼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특징적인 지형과 길을 간략히 그려 놓아 오히려 보기가 편했다.
“통째로 들고 다니기에는 무리니 일정한 크기로 잘라서 가지고 다니시는 게 편할 겁니다. 저희도 넉넉지 않아 하나밖에 못 드리겠네요.”
“저희야 받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죠. 마음 쓰지 마세요.”
거트 형은 과장된 몸짓으로 감사를 표시했고 그런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마침 아마조네스 길드 원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크로커다일이 리젠 됐답니다.”
“그럼 가봐야지. 아, 실례지만 먼저 자릴 좀 뜨겠습니다.”
“예, 저흰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가보세요.”
그녀가 길드 원과 함께 뛰어 나가자 집안에 남은 건 우리뿐이었다.
“자, 그럼 어디로 가볼…… 응? 왜 그래?”
거트 형은 신이 나서 돌아서다가 굳은 얼굴로 팔짱끼고 서있는 나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형이 어떤 위치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리 상대가 신세지고 있는 길드의 수장이라지만 형 역시 우리의 길드장이야. 그런데 형이 그렇게 굽히고 나오면 상대가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 전체를 얕잡아 보게 된다고!!!”
“…….”
거트 형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미안하다. 길드 장 같지도 않은 놈이 길드 장이랍시고 설쳐서.”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아니, 맞는 말이야. 길드 장이라고 설치는 주제에 정작 길드를 위해 한 일은 전혀 없으니까. 길드 석 세울 비용을 마련한 것도, 길드의 이름을 알린 것도 모두 너희들이었지, 내가 한 건 없었어. 난 아론처럼 레벨이 높지도 않고, 콜처럼 유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리처럼 보조를 잘하는 것도 아니니까.”
거트 형의 말을 들으니 그 동안 너무 내 멋대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난 항상 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며 길드 장인 거트 형의 말은 듣지도 않았으니까. 이래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는 건가? 성에 쳐들어가기 전에도 비슷한 것을 깨달아 놓고 이런 일을 반복하다니…….
“아니야, 형. 내가 잘못했어. 그 동안 형 말은 듣지도 않고 너무 내 멋대로 한 것 같아. 그리고 형은 우리의 정신적 지주잖아.”
난 진심으로 뉘우치고 또 뉘우치며 다시는 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정말?”
정신적 지주라는 대목에서 고개를 치켜드는 거트 형. 정정하겠다, 아무래도 다짐은 지켜지지 못할 것 같다.
“그럼 어디로 까볼까나…….”
속았다는 사실에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내 등을 떠밀며 거트 형은 새로운 곳으로의 출발을 알렸다. 그냥…… 한번 죽이고 가?
“한산하네.”
거대한 아나콘다에 익숙해진 아론이 손가락으로 뛰어드는 뱀 한 마리를 튕겨내며 말했다. 마을에서 30여분 거리인 여기까지 오는데 만난 몬스터라고는 원숭이 같은 하급 몬스터 몇 마리가 고작, 덕분에 카엘과 아론은 몸이 근질거려 안달을 하고 있었다.
“문제, 이곳 벌집에 꿀이 들어 있을까?”
“당연히 있겠지.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꿀이 먹고 싶어서.”
피잉-!
꿀이 먹고 싶어서라는 뜬금없는 얘기와 함께 활을 당긴 레이. 화살촉이 향하는 곳을 보자 곧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저렇게 크게 보인다는 것은…….”
“자이언트 비!!”
위이이잉-!
떨어진 벌집에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 자이언트 비는 잔뜩 떼를 지어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히익.”
한데 뭉친 놈들의 숫자는 이미 손으로 셀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갓 태어난 아기만 한 크기의 벌들이 날카로운 침을 앞세우고 떼로 몰려오는 데 기겁하지 않겠는가?
“망할, 시간 좀 벌어봐. 무지한 자에게…….”
“알았어. 파이어 인챈트, 파이어 애로우, 멀티 샷.”
활에서 떠난 세 개의 화살은 각각 한 마리씩의 몸을 꿰뚫었지만 나머지 다섯 발의 파이어 애로우는 세 마리의 날개를 찢어 놓은 뒤 열기로 나머지 무리를 흩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한방으로 끝내려 했건만 흩어진 놈들은 쉬이 다시 뭉치지 않았다. 결국 살아남은 십여 마리의 자이언트 비. 처음 상대하는 놈들인지라 경계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생에 도움이 안돼요!!”
“미안.”
가까이 붙고 보니 이놈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재빨랐다. 거기다 날카로운 침을 앞세우고 돌진하니 궁수들의 움직임이 쉽지 않았고 프리스트들은 디바인 실드 속에 갇혀있다시피 해야 했다.
“워터 프리즌.”
시동어 만으로 쓸 수 있는 5써클까지의 마법으로 공수를 번갈아 하다가 시간은 조금 걸리더라도 방어형이 될 수 있는 마법을 사용키로 마음먹었다. 지금의 자리에 마냥 서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조금 떨어진 곳에 일단 시전 했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게 아닌가?
“이런 XX.”
가끔 이런 느낌이 들 때면 언제나 결과는 같았기에 그곳으로의 이동을 포기하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랬더니 역시나, 머리 위로 자이언트 비 한 마리가 다트처럼 날아가는 게 아닌가? 땅에 박힐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느새 발동된 워터 프리즌의 물줄기에 부딪친 놈은 벽에 던져진 고무공처럼 날아온 것만큼이나 빠르게 튕겨 나갔다.
“응?”
위 위잉 위이잉-!
워터 프리즌에 부딪친 자이언트 비는 특별한 외상이 없음에도 날지 못하고 날개만 퍼덕거렸다. 그리고 날개에 묻어있는 물기. 호오, 그런 거였군.
“아쿠아, 아쿠아, 아쿠아…….”
어차피 워터 프리즌은 한 번의 마나로 일정 시간동안 지속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다른 마법을 쓰기 위해 굳이 효과가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자이언트 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용한 마법은 물 속성 수련 마법인 아쿠아. 숙련도가 max였기 때문에 마나를 조금 더해 물의 양을 늘려도 발동 속도는 그리 느려지지 않았고 느려졌다 해도 놈들이 피하기엔 무리였다.
“어푸푸.”
“억!”
예상대로 날개가 젖으니 뒤집어 놓은 거북이 마냥 버둥거리기밖에 못했다. 한데…… 무력화시키는 과정에서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한 가지 생겼다
“베르, 괜찮아?”
“어어어억…….”
“큐어.”
물에 젖어 떨어지는 자이언트 비 중 한 마리의 침에 베르의 목이 찔린 것이다. 다행히 깊이 박히지는 않았는지 아웃까지는 안됐지만 큐어를 받고도 못 움직이는 걸로 보아 마비성 독인 듯싶었다.
“이 놈인가?”
베르의 발밑에 떨어져있는 자이언트 비를 집어 들었더니 붙어있어야 할 침이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놈들의 침은 1회용인 듯, 시간이 지나도 다시 생기지 않았고 침이 없으면 어떻게 공격을 할까? 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나키르를 불렀다.
“나키르, 아공간에 자리 남았지? 한 마리만 테이밍 해봐.”
“예, 사부. 테이밍.”
세리의 디바인 실드 속에 같이 몸을 숨겼던 나키르가 침을 가진 놈으로 한 마리를 테이밍하자 나머지 사람들은 행동 불능에 빠진 놈들을 한 마리씩 죽여 갔다.
“경험치는 오크 몇 마리 잡는 게 더 낫겠는데?”
힘들인 것에 비해 적은 경험치가 들어오자 아론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상당히 적은 편에 속하는 경험치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움직이지 못하는 베르의 모습은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충분해 보였다.
“후아, 이 침 효과가 장난이 아닌데요? 30초나 마비시키다니!!”
마비된 동안 초를 세어 봤나보다. 베르의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감도를 변경해서 HP를 확인해봤더니 지극히 미미한 데미지. 녀석이 별것 아니라 안심하며 벌집을 가지러 가는 사이 몰래 나키르에게 신호해 날개 상태가 회복된 자이언트 비를 소환시키게 했고 피하지 못하게 전격계열 마법으로 마비시킨 뒤 자이언트 비의 공격을 받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공격!!”
영문을 몰라 커질 대로 커진 눈만 깜박거리는 베르를 향해 날아간 자이언트 비는 그대로 박치기를 감행해 버렸다.
“무슨 짓이야?”
“침이 빠진 뒤에는 육탄 공격이라…….”
마비된 베르의 몸조차 제대로 쓰러뜨리지 못하는 약하디 약한 공격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필요한 건 저 침 하나니까.
“실험하려면 말이나 하고 해라. 누구 빈 포션 병 있는 사람?”
포션을 마시고 난 다음 남는 병. 예전에는 그냥 버렸지만 이곳에 와서 부터는 꼬박꼬박 챙겨둔다. 연금술사 스킬을 올릴 때 만든 것들을 담기도 해야 했지만 상점에 되팔면 10분의 1 가격을 돌려주니까(아마조네스 측의 요구사항이기도 했다). 빈 포션 병을 몇 개 구한 레이는 벌집은 짜내 그 안의 꿀을 포션 병 가득 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벌집이 워낙 컸던 탓에 빈 포션 병은 턱없이 부족했고 되는 대로만 담은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나중에 연금술사 스킬 좀 올려서 꿀맛 나는 포션을 만들어 팔아볼까?”
진지한 표정으로 적당한 가격을 계산하는 녀석의 모습은 우리를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건 나중 일이고, 근처에 벌집이 더 있는지 좀 찾아봐.”
“응? 빈 병은 더 없는데?”
“꿀 때문이 아니니까 일단 찾기나 해.”
“그러지 뭐, 매의 눈 발동.”
레이의 눈 주변 근육이 기묘하게 움직이며 매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천천히 주변을 살피던 레이는 몇 개의 화살을 꺼내 땅에 박으며 방향을 표시했고 아홉 개째 화살을 박고 나서야 눈의 변화를 풀었다.
“이 자리에서 쏘아 맞힐 수 있는 건 7개가 최고야.”
“일단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럼 넌 여기 있다가 신호하면 자이언트 비를 끌고 와 주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략적인 작전을 알리고 각자의 위치로 보낸 뒤 종아리까지나 찰 법한 개울의 건너편에서 몇 번의 시도로 간단한 마법을 만들어냈다
“역시 공격형이 아니라 간단하군. 이것으로 준비는 끝인가?”
아론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오케이 사인이 날아왔고 곧바로 레이에게 신호를 보냈다. 가볍게 시위를 당겨 벌집 하나를 떨어뜨린 레이는 최대한 뭉친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 공격조차 하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시켰고 미리 만들어 놓은 징검다리를 이용해 속도를 줄이지 않고 개울을 건너 올 수 있었다.
“아쿠아 월.”
최대한 끌어들인 뒤 눈앞에 물의 벽을 세우니 관성을 이기지 못한 자이언트 비들은 파도에 휩쓸린 나비처럼 얌전한 모습으로 물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나, 둘, 셋, 넷…….”
하류에서 팔을 늘어뜨린 채 기다리고 있던 아론과 베르는 내기라도 했는지 자신이 건져 올린 수를 세며 요란하게 물 밖으로 자이언트 비들을 쳐냈다. 흡사, 연어를 잡는 곰의 모습이랄까?
“다 한 거냐?”
“룰루∼ 아, 가뿐하게 이겼, 아니 잡았지. 그런데 이놈들은 왜?”
승자는 아론인 듯 기쁜 표정으로 금화의 짤랑거리는 소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려고.”
쭈죽-.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자이언트 비 한 마리를 배 부분에서부터 엉덩이 쪽으로 밀어가며 밟자 약간의 체액과 함께 침이 조금 튀어 나왔다. 생각대로긴 한데 꽤 단단한 걸?
“아하! 침 빼려고? 그거라면 내 전문이지, 비켜봐.”
내 의도를 알아차린 아론이 자진해서 나섰고 안 그래도 내 힘으론 무린 걸 알았기에 순순히 옆으로 비켜섰다. 기사의 힘은 높다는 걸 과시하듯 힘든 표정 하나 없이 너무도 간단히 침을 뽑아내는 아론. 그것에 재미가 들렸는지 벌써 여섯 마리 째의 배를 짓누르고 있었다.
“세르, 이리 좀 와봐.”
죽는 것도 아니고 엉덩이 부분이 박살나며 침만 빠지는 모습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여자들. 그 중의 하나였던 세르는 내 부름에 애써 주위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비도처럼 쓸 수 있겠어?”
“얇은 건 조금 연습하면 익숙해지겠지만 너무 길어요.”
아직 침에 묻은 체액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라 더러운 것을 집듯이 엄지와 검지로 들고 살펴 본 세르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무래도 쓰는 사람이 편해야겠지.
“베르, 검기로 길이 좀 맞춰 줘.”
“얼마나 자르면 되는데요?”
“실험 재료야 충분하니까 약간씩 차이를 두고 한 길이 당 두 개씩 만들어봐.”
잠시 자신의 손바닥으로 크기를 재보던 베르는 대충 감이 잡혔는지 두 개의 침을 잡고 같은 크기로 자른 뒤 다시 그 중 하나로 길이를 가늠하며 조금씩 길이를 늘려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여섯 가지 길이의 마비 침, 세르는 좀 전과 달리 세심하게 살피며 손에 맞는 것을 찾았다.
“이게 좋겠어요.”
각 길이의 침들을 한 번씩 던져보고 난 후에야 세르가 결정을 내렸다. 그에 따라 나머지 침들은 선택된 네 번째 것의 크기에 맞춰 양산되었고 덩달아 나와 레이도 바빠졌다. 한번, 두 번, 같은 일을 반복할수록 마비 침은 쌓여갔고 아론과 베르의 희비도 엇갈렸다.
“저, 이번엔 저도 껴보면 안 될까요?”
무슨 생각에선지 육체노동임에도 불구하고 나키르가 참가 의사를 밝혔다. 당연히 모두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아론과 베르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으며 참여를 허락했다.
“좋아. 대신, 소환수를 부려서 건지는 건 인정 못한다.”
“네, 물론이죠.”
나키르의 아공간 속에 곤히 잠들어있을 아나콘다의 사용을 막기 위해 내건 조건이 흔쾌히 받아들여지자 돈 벌었다는 생각에 둘의 눈이 빛났다.
“그럼 시작한다. 레이!!”
“소환, 아나콘다 x 3.”
시작과 동시에 아나콘다를 소환하는 나키르. 좀 전의 약속 때문에 둘은 당황했지만 곧 뒤로 가 떠내려가지 못하게 바리케이드를 치는 모습에 안도하며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아쿠아 월!!”
지금까지와 다를 것 없이 떠내려 오는 자이언트 비 떼. 프로브케이션이 걸렸음을 증명하는 붉은 빛이 아론의 눈에 떠오르며 팔에 굵은 핏줄이 솟아오를 때 팔을 치켜든 채로 아론과 베르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이 안에서 공격하면 안 된다는 말은 없던 것 같은데, 맞죠?”
굳어진 아론의 뒤에서 자이언트 비들이 떠내려가기를 기다리는 나키르. 녀석의 손에는 실험용으로 만들었던 마비 침이 둘의 몸에 꽂힌 것 말고도 세 개나 더 들려 있었다.
“으으, 너…….”
“엇, 아론 형은 회복이 빠른가 보네요?”
괜히 입을 열었던 아론은 추가로 침 한방을 더 맞았고, 아나콘다 바리케이트에 자이언트 비가 모두 걸려있는 것이 확인 된 후 마지막으로 한방을 더 맞았다.
“이것으로 승리!!”
느긋하게 자이언트 비를 건져 올린 나키르는 승리의 브이까지 그리는 여유를 보였다. 그 모습에 뒤늦게 마비가 풀린 아론은 잊고 있었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제길, 저놈 제자였지.”
……라는 말을 내뱉었고 두말없이 3골드를 내어 주었다. 거기서 내 얘기가 왜 나오는…… 응?
“나키르!!”
“왜, 왜요?”
씨익.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라 말까지 더듬던 나키르는 웃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내놔.”
“뭘요?”
“내기에서 딴 돈. 물건(?)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그냥 넘어가길 바랐냐?”
건져진 놈들의 반수가 침이 사라진 상태였다. 아마도 아나콘다의 몸에 박혔겠지. 들통 났음을 깨달은 나키르는 머리를 긁적이며 6골드를 내게 넘겼고, 그런 녀석을 아론이 구박하기 시작했다.
“야! 아론, 너도 프로…… 읍!!”
힘과 속도를 높이는 프로브케이션은 반칙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아론은 재빨리 다가와 내 입을 틀어막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얼마면 되겠냐?”
“반절.”
“4골드, 방금 받은 것까지 합쳐서 깔끔하게 10골드잖아?”
“깔끔하게 반절.”
“쳇, 하여간 있는 놈이 더 한다니까. 옜다, 4골드 50실버.”
“남말하네.”
저번 드래곤 정보를 팔 때의 일로 약간의 차이가 벌어지긴 했지만 총재산으로 보면 나와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 놈의 투덜거림 따윈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니, 저렇게 악착같으니 나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지.
“그럼 계속 해 보실까?”
그렇게 또 다시 몇 번을 왕복, 백이십여개의 마비 침을 얻고 나자 밤이 되었고 밀림의 밤의 무서움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타닥타닥-!
딱히 할 일도 없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앉아있는데 에반제린이 호위도 없이 다가왔다.
“좀 앉아도 될까요?”
“예, 물론이죠.”
아까도 그렇게 말했건만 거트 형은 호들갑스럽게 자리를 내주었다. 저 반응, 뭔가 수상한데?
“한데, 무슨 일로?”
“그냥, 부러운 생각이 들어서요. 매일 얼굴을 맞대며 친형제, 자매처럼 지낼 수 있다는 게…….”
익숙하지 않은 침 던지기 연습을 하는 세르와 사용 가능한 수가 한정되어있는 마비 침을 아끼기 위해 바람의 정령으로 부딪쳐 사라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는 린, 그리고 호위하듯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아론까지 셋의 연습 모습을 바라보는 에반제린의 눈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 그 비슷한 것이 담겨져 있었다.
“아까, 갑자기 왜 사냥터의 제한을 풀었냐고 하셨죠?”
“아? 예, 그랬었죠.”
“사실, 전 오크 대 침공 이벤트 때 여러 길드에게 이용됐던 화살받이 중 하나였어요. 그때는 길드를 만들기 전이었고 꽤 유명한 기사들이 앞장서니 바보같이 따라 나갔던 거죠. 재접속을 한 후에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길드 사람들끼리 하는 말을 우연히 들어버렸어요. ‘저레벨은 화살받이다, 저 앞에 있는 오크들과 같이 머릿수만 채울 뿐이다.’라는 말이었죠. 그 말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고 처음으로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때였어요. 그 후엔 더 잘 아시겠지만 여러분의 주도 하에 이벤트가 끝났고 전 수시로 여러분을 주시했죠. 이번 3주간 지켜본 것은 여러분이 혹시나 변하진 않았을지, 다른 길드들처럼 처음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이름 높이는 데만 정신이 팔리신 게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지금 보니 확실해졌네요. 이번 일은 누명이라는 게.”
“그냥 NPC에게 조롱당한 바보들이죠, 뭐.”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답하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번에도 에반제린이었다
“동영상과 BBS(게시판)의 글은 봤어요. 이 적은 인원으로도 중앙 대륙의 유명 길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길드를 무너뜨리기까지 하다니……. 힘을 기른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피해 도망쳐 온 저와는 전혀 다르네요.”
“그 덕에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죠.”
피식.
거트 형의 악의 없는 말에 모두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잠깐.
“길드를 무너 뜨렸다고요?”
“얼마 전 철의 기사단이 공성전에 실패하고 길드를 해체했는데, 해체 직전에 길드 장인 엘시노가 ‘난 디아블로 길드에게 진 것이 아니라 라스트 길드에게 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그것 때문에 한동안 BBS가 떠들썩했는데, 모르셨어요?”
유명한 얘기라고는 하는데 우리 길드 원들은 한결같이 ‘홈페이지 접속할 시간에 몬스터 한 마리를 더 잡는다.’라는 주의였고 게임 속에서도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알 턱이 없었다. 엘시노가 그런 소릴 했단 말이지.
“다른 소식은 없어요?”
“다른 거라면…… 그 후로 길드 장인 엘시노는 자존심까지 버리고 다른 대형 길드에 들어가서 레벨 구걸을 한대요. 그래서 ‘꼬리 내린 개’라는 별명까지 붙었고요.”
그 정도의 인물이 자존심을 뭉개가면서까지 레벨을 올리려 한다면 목적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길드의 재건’이나 ‘나에게의 복수’. 아무래도 후자 쪽에 더 가깝겠지.
“아, 특이하게 blood라는 어쌔신 길드가 공성을 벌였는데, 거의 다 점령했다가 어쌔신에게 성을 내줄 순 없다는 일반 유저들이 가세하는 바람에 실패했어요.”
“혹시 그 어쌔신 길드, 길드 장 이름이 로즌 크랜츠 아닙니까?”
“그런 이름이었을 거예요, 아마.”
“죽었…… 답니까?
“예, 죽긴 했는데 이미 어쌔신 클래스를 마스터해서 큰 상관은 없다는 것 같던데요? 어쌔신이라도 마스터 레벨이 되면 성향이 중립으로 바뀐다던데 계속 PK를 하다니, 지독한 살인광인가 봐요.”
그의 능력에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에 인상을 써야하는데 왠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분노와 증오가 이젠 호승심으로 변해버린 걸까? 빨리 마스터 레벨에 도달해서 그와 제대로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한 구석을 배회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와는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요.”
“네, 조금…….”
“크흠, 그런데 계속 존대해서 부르긴 거북하지 않나…… 요?”
분위기가 무거워지려는 것을 막기 위해 거트 형이 고의성 다분한 헛기침을 해대며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하긴, 며칠 보고 말 것도 아닌데 그도 그러네요. 전 김미혜, 27살입니다. 거트 오라버니 말고는 다 동생인 것 같은데 말 놔도 되지? 그리고 이제부턴 에린이라고 불러.”
“오, 오라버니?”
“오빠는 왠지 나이에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되죠, 오라버니?”
“응? 예, 아, 그래.”
별것 아닌 말에 심하게 반응하는 거트 형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형은 에린 누나에게 정신이 팔려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이거, 갈수록 수상해지는데?
“내일은 오크 부족의 마을이나 세비지의 마을에 한번 가보는 게 어때? 이곳의 오크는 다른 오크들과 달리 상당히 강하거든. 그만큼 주는 경험치도 많고.”
“오크라…… 오랜만에 익숙한 얼굴을 보겠네요. 그런데 세비지는 또 뭐에요?”
“인간하고 똑같이 생긴 놈인데, 분칠이라도 한 것처럼 피부가 하얗지. 죽일 때 PK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찝찝한 것도 있지만 무척 강해. 그래서 우리도 고레벨 몇을 제외하곤 사냥을 금지시켰는데, 너희라면 마을 전체를 상대할 순 없어도 몇 마리씩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정 위험하면 오크 마을로 도망치면 될 테고. 둘은 서로 앙숙이라 서로를 공격하거든.”
“두 마을 사이의 거리는요?”
“가까워. 걸어서 10분 정도?”
서로 앙숙인 두 종족이 10분 거리에 있다? 순간, 게임 개발자들이 나를 향해 이용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원한다면 기꺼이.”
“응?”
“아니에요, 그럼 날이 밝는 대로 이동하죠.”
목표 설정이 끝나자 사적인 얘기들이 오갔고 에린 누나가 길드 창설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양해를 구하고 작전을 위한 계획 수립에 몰두했다. 그렇게 달빛과 별빛의 마력을 받으며 이야기가 오갔고…….
“출발하자.”
날이 밝았다. 거트 형 등 밤을 새워 얘기했던 몇 명은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였지만 표정이 밝았고 움직임에 큰 무리가 있지는 않을 듯싶었다.
“어디부터 갈 거예요?”
“몰랐다면 모를까, 있다는 걸 안 이상 오크들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겠지?”
“오랜만에 맘 편히 놀아 볼 수 있겠군.”
에린 누나로부터 일반 오크보다 강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는 게 아니니까. 오크 마을과 세비지 마을 사이의 경계선쯤 되는 지역에서 서쪽으로 움직인 지 3분도 안 되어 언덕 너머로 오크 특유의 꾸룩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모두 반갑게 맞이했다.
“정찰 중인 것 같은데? 숫자는 일곱, 전사가 한 마리 껴있군.”
“들키지 않는 편이 좋겠지, 누가 할래?”
아론과 베르가 시선을 주고받으며 무언의 합의를 할 때 그 동안 근질거리는 몸을 애써 참던 카엘이 선수를 쳐 튀어나갔다.
“이건 반칙이야!!”
당했다는 걸 깨달은 둘은 뒤늦게 카엘을 쫓아 몸을 날렸다. 하나, 이미 오크는 셋이나 줄어든 상태. 더는 빼앗길 수 없다는 듯 칼부림하는 베르의 머리를 밟고 아론이 오크 전사를 향해 뛰어 들었다.
“이놈은 내 거다!!”
챙-!
아무리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았다지만 막힐 것은 생각도 못했기에 크게 당황하며 몸을 비틀었다. 녀석이 떨어지는 곳에 있던 오크는 카엘이 재빠른 판단으로 저만치 날려버렸고 추하게 바닥을 구른 아론은 용수철 튕기듯 튀어 올라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일반 놈들과 차원이 다르잖아?!”
아론의 낭패를 본 둘은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너클과 검에 마나를 끌어 올렸고 오크 전사를 제외한 나머지 놈들을 도륙해 버렸다.
“꾸룩!!”
아무리 잘난 오크라도 아론이 전력을 다하니 상대가 되질 않았다. 자잘한 상처도 없이 온전한 상태에서 심장에 구멍만 뚫린 오크 전사는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바닥에 쓰러졌고 특이하게 생긴 뿔피리 하나를 남겼다.
“이곳 오크는 상상 이상인 걸? 나키르, 아나콘다는 풀어주고 오크 전사만 테이밍 해.”
“예? 하지만 아나콘다가 더 세잖아요?”
“공격력이야 그렇지. 그런데 육지에선 속도가 너무 느리잖아. 그리고 세비지의 능력을 가늠해 보려면 어쩔 수 없어.”
물이 아닌 육지에선 아나콘다의 속도가 지렁이의 그것과 견줄 수 있다는 걸 상기한 나키르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고 당장 아공간 속의 아나콘다를 모두 소환하여 서로 싸움을 붙였다. 거대한 뱀들의 물고 물리는 기이한 싸움. 다들 오크 소리가 들릴 때까지 구경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라질.”
부우∼.
조금 전 오크전사가 남긴 뿔피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세르가 입에 가져가 길게 숨을 내뿜은 것이다. 그리고 들려오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 정렬하는 군대의 그것이었다.
“꾸룩? 꾸, 꾸루룩!!”
“부우우∼.”
“이리 줘봐, 확인.”
[오크 정찰병의 뿔피리]
누구나 불 수 있지만 어떤 신호인지는 오직 오크들만이 알고 있다. 실수로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를 보낸다면 낭패를 볼 수도…….
“오크 마을, 아니 요새의 문이 열린다!!”
“망할, 전투 준비 해!!”
드드드드득-.
이쪽 뿔피리에 답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요새라 할 만한 마을의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오크 떼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일단 후퇴하고 놈들이 언덕을 넘어오면 마법으로 쓸어버린다. 그 전에 오크 궁수는 확실히 저격해. 드라이저!! 3번 합동기다.”
“옛!!”
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터라 공격 방법을 결정하니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나무 위에 올라 궁수를 한 마리씩 저격하는 레이의 카운트에 맞춰 모두의 긴장감은 최고조를 향해 치솟았고 영을 세는 순간 느릿한 스펠 소리가 낮게 깔렸다.
“마지막 세 마리, 연사!!”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악몽과 같은 섬뜩한 바람, 피어풀 스톰(fearful storm)!!”
측면 범위는 넓지만 전방 범위는 턱없이 짧은 인페르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펼친 2인 협동기, 피어풀 스톰에 힘을 더한 인페르노는 동료의 시체를 방패삼은 몇몇에게만 구차한 삶의 연명을 허락했을 뿐, 그 누구의 반항도 용납지 않았다.
“제길, 생각보다 수가 적었잖아. 직접 깨부수고 테이밍 시킬걸.”
“이거, 쓸 수 있는 아이템이 몇 개 없겠는데요?”
“크륵!!”
아무리 90대의 레벨이라도 이런 광범위 마법은 부담스러웠기에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측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링메일을 걸친 커다란 오크가 덤벼들었다.
“파이어 볼.”
피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기에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고 검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렸다. 가까운 거리에서의 폭발 반동으로 상당한 고통과 함께 날아가는 몸. 참지 못한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기에 죽음을 면한 것으로 만족했다.
“라이트닝 랜스.”
곁에 있던 드라이저가 4써클의 전격의 창을 날렸지만 놈은 덩치에 맞지 않게 빠른 동작으로 피해 넘겼다. 게다가 타깃은 아직도 나, 더 이상의 방해를 받기 전에 달려와 목에 칼을 겨누었다.
“크륵…… 멈춰라.”
“저놈이?”
“길…… 쿡…… 비켜라.”
놈은 어설픈 동작으로 인질극을 벌이며 한발자국씩 걸어 나갔고 길드 원들은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 했다.
“이봐, 그런 비실비실한 놈은 데려가 봐야 노예로도 못쓴다고!!”
“꾸룩…… 인간…… 우리의 원수다……. 로드께…… 크륵…… 알려서…… 복수한다.”
로드가 있다는 정보는 잘 들었지만 이대로 끌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신 나중에 제대로 방문해주지.
“블링크, 죽이진 마라.”
“꾹…… 마법사…… 죽여야한다……. 꾸루룩…… 실수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있던 내가 눈앞에서 등 돌리고 서있자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는지 어설픈 인간 말로 주절거렸고 몸을 풀며 압박해오는 자들을 보며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감히 오크 따위가…….”
“사람을 협박해?!”
“어디 죽어봐라!!”
피잉 핑 핑 핑-!
각각 양쪽 팔, 다리에 꽂혀 저항자체를 봉쇄한 린의 화살을 시작으로 주먹을 이용한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격투가 레벨이 없어도 무지막지한 힘 때문에 회복 타이밍이 어긋나서 죽을 법했지만 어느새 감도를 1단계로 변경해 오크의 HP를 수시로 체크해주는 린의 잔인한 행동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속이 다 후련하네.”
힘 조절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두드린 아론은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었는지 홀가분한 모습으로 손을 털고 일어섰다.
“쯧쯧, 넝마가 되어버렸군.”
손톱만 한 수백 개의 고리가 연결되어 몸을 보호하던 링메일은 내구력을 다해 군데군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가지고 있던 검은 두 동강이 나서 머리 위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키르, 테이밍 해라.”
“예? 그런 짓을 했는데 안 죽여요?”
“A.I를 가진 놈인데, 테이밍 하면 쓸데가 있겠지.”
“꾸구국…… 내가…… 인간에게…… 키루룩…… 길들여 질 것 같은가?”
“얘들아, 미안하지만 한 번 더 몸 좀 풀어야 할 것 같다.”
“키룩!!”
그래도 자존심이 남았는지 큰소리치던 놈은 악귀처럼 웃으며 돌아서는 셋의 모습에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그 틈에 나키르가 테이밍을 외쳤다.
“넌 인간에게 굴복하지 않겠지, 자긍심 높은 오크니까.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실수로, 아∼ 주 잠깐 방심한 사이에 당할 수는 있지 않겠어?”
“꾸룩…… 실수…… 누구나 한다……. 키루루…… 그래도…… 동족은…… 크룩…… 공격 안 한다.”
살며시 운을 띄우자 녀석은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테이밍을 받아들였고, 마지막으로 동족을 공격하진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오크는 꽤 의리파니까 그런 짓을 시킬 수는 없겠지.
“자, 그럼 얘기해 볼까? 저 안에는 오크가 몇이나 있지?”
“동족을 파는 짓, 못한다.”
이놈을 통해서 내부 사정을 파악해보려 했건만 의외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그래도 테이밍 된 후에 꾸룩거리는 소리가 없어져서 다행이군.
“저기서 네 직책은 어떤 거였지? 네 위치말이야.”
“캡틴. 오십의, 아이들. 맡고 있다.”
“그래? 생각보다 대단하군. 그럼 캡틴은 몇이나 있는데?”
“나까지, 일곱이 로드, 모시고 있다.”
역시나, 오크가 멍청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제 입으로 내부 사정을 전부 드러낸 놈은 아직도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모두의 머릿속에선 암산이 끝나있었다.
“350에 캡틴이 일곱, 로드가 하나라…… 부담되는 숫자이긴 하군.”
“인간!! 어떻게 알았나!!!”
“아, 그러니까 그게, 내가 예지력이 조금 있거든.”
“역시, 인간 마법사. 무섭다.”
아직 알아낼 것이 남아서 멋대로 뱉어내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안 믿을 것 같았는데, 우리의 순진한 오크씨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나를 경계했다.
“아까 보니까 오크 전사들이 무척 강하고 용맹하던데, 저 안엔 얼마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조심하려고, 조심. 그렇지 아론?”
“으응, 물론이지.”
“우리 부족, 모두 용감하다. 그 중, 전사는, 100이나 되고, 궁수도, 50이나 된다. 모두, 가까이 가면, 죽는다.”
물어본 건 전사 하난데 칭찬하는 말에 우쭐해진 녀석은 주저리주저리 전력을 모두 공개했고, 그 말들은 오크 마을을 공략할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다른 놈들을 찾아가 볼까?
“아참, 세비지들과 사이가 안 좋다던데 그건 왜 그런 거야?”
“그들은, 우리 보물, 노린다!! 우린, 그들 죽인다. 나머지 보물도, 찾아온다!!”
보물이란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지만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면 입을 다물어 버릴 수 있었기에 크게 내색하진 않았다.
“우리가 도와줄까? 그 보물이란 걸 되찾는 거.”
“인간, 정말인가?”
“그렇대도. 우리도 오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인간, 착하다. 로드가, 상 내릴 거다.”
오크 캡틴 구슬리기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는 보물이라는 황금 석판 조각에 대해 설명했고, 오크들을 부를 수 있는 뿔피리 소리를 세르에게 가르치는 등 열성을 보였다. 그것이 부족을 위한 일이라 굳게 믿은 채
“세비지들의 힘은 어느 정도야?”
“그들, 강하다. 하지만, 그들, 얼마 없다. 결국, 지친다, 그럼 우리가, 이긴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이끌어내려 해도 녀석의 언어능력으론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결국 세비지의 능력은 몸으로 느껴보는 방법밖에 없었고, 일단 왔던 길을 되짚어 세비지 마을 쪽으로 향했다.
“헙!”
창-!
아론이 경계하지 않았다면 맞받아치지도, 아니 날아오는 것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창에 꿰뚫려 죽었을 거란 생각이 들자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큭, 손바닥이 찢어질 것 같다.”
검기라도 끌어 올렸다면 한층 수월히 막았겠지만 미처 시간이 없어 순수 힘으로 막아낸 아론은 손바닥에 전해진 고통 때문에 검도 제대로 못 가누고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힘 위주의 기사인 아론이 저렇다는 것은…… 엄청난 위력!!
“저, 저거 검기 맞지?”
“검이 아니라 창이니까…… 창기일 걸. 어감이 이상하긴 하지만.”
손에 든 기다란 스피어 이외에도 등에 하나를 더 메고 있는 창백한 피부의 노출광(옷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것을 입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스피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푸른 기운은 80레벨 이상의 기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것이 확실했다.
“이런 놈들이 마을을 이룬다고?!”
아무리 우리 길드 원들의 대부분이 90이상의 레벨이라지만 검기 이상을 다루는 적들이 대거 출현한다면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접근 전을 펼칠 사람의 수가 적으니까.
“일단 저놈부터 해결하고 보자!!”
베르와 카엘은 이미 양쪽 측면으로 돌아서 공격을 시작했다. 아직 90레벨에 도달하지 못한 카엘은 마나가 잔뜩 실린 창 때문에 쉽게 품으로 파고들지 못했지만 검강으로 매섭게 몰아치는 베르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권풍을 한 번씩 찔러 넣어줬고 그때마다 세비지는 자세가 흐트러지며 빈틈을 허용했다.
“차앗!.”
뒤늦게 아론이 가세하자 세비지는 몇 십 초를 버티지 못하고 목이 달아났다. 사람과 똑같이 생긴 모습 때문에 셋은 죽이고 나서도 잠시 시체를 둘러싸 여자 애들이 못 보도록 했고, 그 모습은 세비지 마을 공략이 힘들어 질 거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강한 건 둘째 치고 사람하고 너무 똑같잖아. 이래서 어떻게 사냥을 하라고.”
“그럼, 포기할까?”
“저희 때문에 그럴 순 없어요. 몇 안 된다고 했으니까 참아볼게요. 검기 급이라면 혼자서 오크 수십은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아직 한쪽이 전멸하지 않았고 오크들도 이긴다고 자신하는 걸 보면 몇 십이 고작일 거예요.”
“괜찮겠어?”
“네.”
짐이 되긴 싫었는지 린은 입술을 깨물며 굳은 의지를 보였다. 린이 이렇게 나오자 세르와 세리도 좋든 싫든 따르게 되었고 세비지를 공략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일단, 한 번에 전부를 상대하긴 무릴 것 같으니까 한 번에 셋 정도씩 착실히 수를 줄여나가자. 음…… 몰이는 누가 하는 게 좋을까?”
“제가 이 중에서 제일 빠르니까 제가 할게요. 여차하면 마비 침도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래 줄래? 그럼 린과 레이는 근처 나무 위에 있다가 안으로 끌어들인 뒤 공격을 하고, 거트 형과 세리는 숨어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보조주문을 걸어 줘. 이번엔 나랑 드라이저가 할 일이 별로 없을 테니 나키르랑 같이 구경만 할 게.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고.”
뻔한 주문이라 따로 말할 필요까지도 없었지만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좋았기에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마을의 위치를 파악하고 매복 장소를 물색하는 동안 둘을 더 만났지만 매번 혼자여서 처리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세르가 하이딩 스킬을 적절히 사용해가며 마을의 입구까지 거짓말처럼 빠르게 숨어들어 갔다.
“적이다!!”
일부러 하이딩을 푼 세르를 보고 마을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따라 나온 적의 수는 네 명, 예상보단 많은 수였지만 궁수들의 서포트를 받으면 그렇게까지 무리도 아닐 듯했다.
“지금이에요!!”
세르의 외침과 함께 숲에서 튀오나온 아론들을 보고 세비지들이 쫓던 걸 멈추고 제자리에 섰을 때 등 뒤쪽에서 날아온 두 발의 화살이 한발 당 한 명씩의 목숨을 앗아갔다.
“어디냐!!”
“크헉.”
어딘가에서 자신을 겨누고 있을 활에 대한 공포감이 그들을 돌아보게 만들었고 한순간의 빈틈은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일단은 쉽게 처리했는데…….
“이야, 이놈들 경험치를 상당히 주는데요? 트롤 잡는 것보다 짭짤해요.”
“당연하지. 검기를 쓰는 유저라면 트롤과 1대1 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방금 전 놈들은 검을 쓰지 않았어? 한 마리는 도였던 것 같고.”
처음 만난 세비지가 사용했던 가공할 파워의 투창. 무심코 지나쳤지만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즉, 세비지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 잘못하면…….
“설마 마법사도 있는 거 아냐?”
“설마∼ 있어도 뛰쳐나오기야 하겠어?”
“그렇…… 겠지?”
콰앙-!
말이 씨가 되고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설마 하는 생각을 뒤로하고 다시 잠입한 세르가 커다란 폭음과 함께 튕겨져 날아갔다.
“이런, 된장 맞을!!”
이렇게 된 이상 달리 도리가 없었다. 우르르 몰려나오는 세비지들을 정면 돌파하고 세르를 구해내는 것뿐!! 너무 멀어 마법은 불가능했지만 린과 레이의 멀티 샷은 그들을 확실히 견제해줬고, 거리제한에 들어오자마자 힐링과 포션이 계속해서 퍼부어졌다.
“이 놈들!!”
성난 소처럼 달려 나간 아론과 베르는 검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많은 양의 마나를 사용해 검강을 휘둘렀고 그것을 막은 세비지들의 무기는 박살나거나 심하게 균열이 갔다. 내가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마법사,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놈이었다.
“아이스 개틀링(ice Gatling)!!”
“파이어 캐논(fire cannon)!!”
다행히 놈의 공격을 먼저 알아챘다. 육안으로 구분키 어려운 작고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개틀링을 연상시키며 수없이 날아왔고 나는 그것을 한 번에 녹여버릴 강한 화력을 내뿜어 상쇄시켰다.
“부우∼부, 부, 부, 부우∼.”
어느새 기운을 차린 세르가 오크 캡틴에게 배웠던 신호로 오크 마을에 연락을 취했다. 하나, 초반에 너무 무리해서 검강을 뿌린 탓에 아론과 베르가 너무 지쳐있는 상태였고 오크들의 지원이 오기 전에 죽을 공산이 컸다.
“소환, 오크 캡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키르가 하나뿐인 소환수를 꺼냈고, 소환된 오크 캡틴은 세비지를 보자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광분하며 달려들었다. 놀랍게도 잠시간의 몸빵 용이라 생각했던 오크 캡틴은 검기까지 뽑아내며 상당한 무위를 과시했다. 그 덕에 둘은 한숨을 돌리며 마나 소비가 많은 검강을 대신해 검기로 맞설 수 있었고 저 멀리서 오크의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부우∼부, 부, 부, 부우∼.”
여기 있다는 걸 알리듯 세르의 신호가 다시 한 번 숲을 가득 메우자 백여 마리에 이르는 오크 떼가 들이 닥쳤다. 그와 함께 우리는 세비지와 오크, 어느 쪽도 아닌 측면으로 몸을 이동시켰고 원수 집안끼리의 싸움을 느긋하게 지켜 볼 수 있었다. 전력을 비교해 봤을 때 세비지 쪽이 월등히 우월했지만 무기가 부서지거나 상처를 입은 놈들이 적지 않아서 생각만큼 오크의 수가 줄지는 않았다.
“이 틈에 우리는 보물을 찾으러 가자.”
“동족, 구해야 한다. 하지만, 보물, 먼저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웬일로 이렇게 무리를 하냐구요?
이미 보물의 생김새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들었기에 패를 둘로 나눠 이동할 수 있었다. 로드 격인 놈이 있다면 당연히 마을의 제일 끝에 있을 것이고, 그놈이 보물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마을의 끝에서부터 샅샅이 뒤졌지만 로드란 자체가 아예 존재치 않는지 보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보물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다 뒤져가긴 하지만 황금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았고 오크의 수가 점점 줄어들자 초조한 마음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단한 거면 금고라도 만들어서 넣어놓던가 저런 제단 같은 데에 올려놔야 할 거 아니야!! ……에? 제단?”
황당하게도, 세비지 마을의 중앙에 세워진 제단(이라기보다는 기둥) 위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빛의 원동력이 우리가 찾던 황금 석판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에는 세비지의 움직임이 너무 자유로웠다. 그 많던 오크들도 이젠 한자리 수로 줄어들었고 더 이상의 방패막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간다. 드라이저, 전체마법 준비해.”
“예? 그럼 형도 죽을 수 있어요!!”
“공중에 대고 쏴댈 게 아니라면 걱정 없어. 하다못해 투창이라도 막아.”
고개를 끄덕인 드라이저는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는 세비지들을 바싹 구워버릴 인페르노를 준비했고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캐스팅 방해를 막았다.
“아론, 간다.”
“와라, 우랏차차차!!!”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인간 투포환. 아론의 힘에 몸을 맡기고 하늘로 날아간 뒤 플라이 마법으로 석판에 접근했다. 제단의 위에 올랐을 때 드라이저는 바보짓을 하고 있었다. 전방 공격 범위가 짧은 것을 망각한 덕에 세비지들에겐 전혀 불길이 닿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그 덕에 우뚝 솟은 제단 아래에서 놈들은 나를 포위할 수 있었고, 어느새 근처 높은 곳으로 올라간 린의 엄호사격에 투창만 하지 못하고 있을 뿐, 나를 떨어뜨리려 쉴 새 없이 기둥을 쳐서 흔들고 있었다.
“젠장, 넘어 간다!! 블링크.”
세비지들의 계속되는 공격에 기둥은 결국 입구 쪽으로 크게 기울며 쓰러졌고, 보물을 훔친 것에 대해 분노한 놈들은 연신 ‘죽여라!!’를 외치며 도망치는 내 뒤를 쫓아왔다. 동급의 기사 이상의 속도를 지닌 놈들은 꼬불꼬불한 길에서의 블링크도 곧잘 따라왔고 블링크 딜레이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죽을 위기에 처할 정도로 매서운 공격을 해댔다.
“공격!!”
마나가 바닥을 보이는지 몸에 기운이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마법을 써댔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니 어디선가 반가운 여인네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쫓아오던 무리에게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일단 피하세요.”
“그럼 부탁합니다. 리턴.”
내 몸이 하얀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억울한 듯 세비지들의 절규하는 소리가 온 숲을 가득 메웠다. 마을로 돌아오니 길드 원들은 아직도 나를 찾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그 난리들인 거야?”
사건의 원인인 석판을 꺼내 자세히 살펴봤지만 특이한 문양이 그려진 황금 석판 조각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숨을 돌리고 생각을 정리하자 길드 원들이 하나 둘씩 돌아오기 시작했고 좀 전에 도움을 받았던 아마조네스 사람들 역시 몸을 빼냈는지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무슨 일이었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분노하는 건 처음 보는데.”
“그게…….”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마세요, 저희 쪽 피해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별로 속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어차피 저들의 조언도 구해봐야 하기 때문에 솔직히 답을 해줬다. 오크와 세비지의 배경설화(?)와 우리에게 세비지들의 보물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들은 부길드 장은 다급히 길드 장인 에린 누나를 호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린 누나가 접속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그 보물을 좀 볼 수 있을까?”
“자요.”
“어라? 이건?!”
황금 석판을 보자마자 에린 누나는 그것에 대해 아는 듯이 말하더니 품속에서 그것과 비슷한 석판 하나를 꺼냈다. 그것 역시 금으로 된 석판. 두 개를 잘 놓고 확인해보니 서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두 개는 원래 하나임이 분명했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보기엔 너무 허전했다.
“누난 이거 어디서 났어요?”
“맨 처음 여기 올 때 뱃사공 할아버지의 퀘스트를 들어줬더니 주던데? 금으로 된 거라 팔까하다가 문양이 특이해서 가지고 있었지.”
“보통의 아이템은 아닌 것 같죠?”
“금으로 된 건데 보통은 아니겠지. 퀘스트 아이템이려나?”
아무튼 확실한 건 오크 마을의 보물인 석판도 빼앗아봐야 뭐가 됐든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아마조네스 길드의 도움이 필요했고 뭔가를 얻으면 나누기로 합의를 본 후 오크 마을 공략에 나섰다.
“부우∼부, 부, 부, 부우∼.”
100여 마리의 오크가 세비지에게 전멸 당한 게 1시간 전쯤의 일이니 리젠 됐다 해도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뿔피리 소리를 듣고 100여 마리의 오크가 또다시 빠져나갔고 격전 중에 울린 두 번째 뿔피리 소리로 또다시 100여 마리가 빠져나갔다. 이제 마을 안에 남은 건 고작 50여 마리의 오크들과 로드뿐. 우리 길드와 에린 누나 등 아마조네스 길드의 고렙들은 패를 나눠 한쪽은 남은 오크를 섬멸하고 다른 한쪽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뒤 200여 오크가 돌아갈 곳이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버팀목이자 사기 그 자체인 성문이 닫히고 오히려 공격이 날아오자 오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일곱 캡틴(나키르가 테이밍하자 곧바로 다른 캡틴이 생겨났다.)의 몸놀림도 물먹은 숨처럼 축 늘어졌다. 하지만 압도적인 쪽수라면 같이 있는 자체로도 힘이 되는 법. 사십여 궁수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었다.
“로드는 어딨지? 보물은?”
“아무래도 이번엔 로드가 가지고 있나 봐요. 마을 끝에 있겠죠.”
“제길,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는데 언제 로드를 상대해.”
요새 밖에 있는 다수의 오크를 상대하는 편이 효율적이란 생각에 망루로 올라갔지만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크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와 성문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잠시만 방심해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성문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파이어 볼을 퍼부었지만 오크 전사나 캡틴 같은 놈들은 한방에 죽지도 않았고 간혹 날아오는 오크 궁수의 화살도 꽤나 위협적이었다.
“큰 거 한방이 필요한데…….”
콰앙-!
오크들의 시선을 끌던 아마조네스의 궁수들이 반수 이하로 줄어버리자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요새로 밀려드는 오크의 수도 늘어만 갔다. 성문의 내구력이 다해 첫 구멍이 생길 무렵, 다행히 로드와의 전투가 시작됐는지 마을 안쪽에서도 폭음이 들려왔다.
“이런, 뚫린다!!”
“누구 맘대로!! 월 오브 스톤(wall of stone).”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문 뒤쪽으로 솟아오르는 돌의 벽. 내구력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키룩! 키룩!!”
뚫린 구멍 주위를 넓히려 주먹질을 한 오크 전사 한 마리가 주먹을 감싸 쥐고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저게 없었어도 손에 가시 박힐 텐데, 역시 바보로군.”
이렇게 여유로운 소리를 하는 것도 잠시, 다른 부분에도 하나 둘씩 구멍이 생겨갔고 돌의 벽 역시 금이 간 데다 지속시간이 다 되어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결국은 밀리더라도 이편이 낫겠지.”
“월 오브 스톤, 월 오브 스톤, 월 오브…….”
시간이 갈수록 벽의 크기만큼 안쪽으로 들어오겠지만 두 개의 벽을 최대한 가까이 붙여서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하는 방법 밖에 남질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돌이기 때문에 일반 오크 따위는 쳐봤자 손만 아플 것이고 오크 전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뚫리는 시간을 약 10분으로 잡았는데 한 가지 변수가 작용해 버렸다.
“크룩? 크루루룩!!!”
바로 오크 캡틴의 등장. 검기를 사용하는 녀석은 두부 썰 듯 벽을 잘라냈고 그런 놈의 뒤를 수많은 오크들이 환호하며 따랐다. 빌어먹을, 이제 마나도 큰 거 한방 날리기 간당간당한데…….
“끼룩? 꾸루륵!!”
콰아앙-!
마지막 벽이 뚫리고 무너진 돌 벽을 발로 차며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아챈 놈은 눈동자를 위로 굴려 상대를 쳐다봤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검에 기겁을 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고 있어, 로드란 놈처럼 검강을 쓴다면 몰라도 겨우 검기에 머무른 수준으론 내 상대가 못돼!!”
아론들의 등장이었다. 나머지 한 조각을 찾아냈는지 레이가 양손에 한 개씩의 조각을 들고 내 쪽을 향해 흔들어 보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공격을 시작했다.
“카엘, 저기 글래이브 들고 있는 세 놈 뭉친 곳에 권풍으로 공간을 만들 수 있겠어?”
“그야 가능하지만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뭐 하려고요?”
“당연히!! 쓸어버려야지. 시작해, 그리고 내가 저기에 도착할 때까지는 계속 엄호해주고.”
“알았어요, 권풍연격!!”
“베르!! 망루의 다리를 잘라서 저쪽으로 쓰러지게 해!!!”
마침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베르는 비스듬하게 망루를 받치던 나무들을 잘라 오크들의 쪽으로 쓰러지기 좋게 만들었고 성벽의 일부와 오크들을 뭉개버리며 나를 적진 한가운데로 이동시켰다.
“세상 모든 것들을 뒤엎어버리는 대지의 분노, 어스퀘이크(earthquake)!!”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대지가 진동했다. 덩치가 크건 작건, 힘이 강하건 약하건 그 분노의 포효 앞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백 갈래로 벌어진 대지는 소란 피우는 자들을 끝없는 어둠으로 데려갔고 남은 자들에게도 잊지 못할 공포를 각인시켰다. 어스퀘이크의 효과가 사라진 후에도 필드는 고요했다. 자칫 큰 소리라도 냈다가 또다시 대지의 분노를 사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오크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며 무기를 버렸다. 그리고 도망쳤다.
“크흑, 마나 고갈이군.”
“어차피 그쪽은 세비지 마을이니 쫓아갈 필요 없다!! 장비를 점검하고 귀환하라.”
누구누구와는 다르게 에린 누나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길드 원들에게 명령했고 모두가 그 말에 따랐다. 지금은 그깟 오크 몇 마리 잡는 것보다 두 종족이 그렇게나 소중하게 여기는 석판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더 급했다. 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출입할 수 없는 에린 누나의 개인 집으로 가서 조각을 서로 맞춰보았고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밀림 속의 황금도시…….”
“엘도라도?!”
우리가 가졌던 각 석판에 새겨진 문양들은 울창한 숲, 밀림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오크들에게 빼앗은 석판에 도시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다시 따로 떼어 조사해보려 해도 세 개의 석판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고 처음부터 하나였던 듯 이음새 격인 구슬 주위도 완벽히 붙어있었다.
“지도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훗, 그거야 간단하지.”
사용 방법을 알고 있다는 듯 아론이 우쭐거리며 석판을 집어 들었다.
“이런 건 말이야, 이렇게 마나만 불어넣으면…… 으잉?”
아무리 마나를 쏟아 부어도 석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안해진 아론은 어떻게든 해보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만지며 마나를 쑤셔 넣었고 석판은 마나를 모두 흩어버렸다.
“에라이, 쇼킹 펀치(shocking punch).”
“으윽!! ……뭐야?”
전격의 힘을 담은 주먹 형태의 마법이 아론의 머리를 강타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그 만큼의 마나가 빠져나갔는데 말이다.
“너, 디스펠 담긴 마법 아이템 가지고 있냐?”
“아니, 있다고 해도 그런 마법에 낭비할 리는 없잖아.”
“이상하네, 분명 마나는 빠져나갔는데.”
“응? 여길 봐!!”
에린 누나의 외침에 따라 바라본 석판의 구슬 속엔 노란 색의 아주 작은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콜.”
“알고 있어요. 악을 심판하고 처단하는 정의의 번개, 썬더 브레이크!!!”
지팡이 끝에 모인 전격의 힘은 한 점으로 모여 방출되었고 그 힘은 여지없이 구슬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이번엔 구슬 속에 떠도는 노란 무언가가 상당히 커졌다. 하지만 아직 구슬을 가득 메우기에는 부족한 듯, 드라이저와 번갈아 몇 번이고 마법을 쏘아낸 후에야 만족할 만한 양을 채울 수 있었다. 우리가 쏘아낸 전기로 추정되는 노란색의 무언가가 구슬을 가득 메우자 구슬을 중심으로 각 석판에 파여진 홈을 따라 빛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떠오르는 홀로그램. 판타지에서의 일이라 보기엔 너무나 이상했지만 일단 그 모습에 집중했다.
“여기라면 알고 있어, 이 밀림에서 유일하게 던전이라 부를만한 곳이니까.”
“그래요? 엇!!”
영상을 다 보여주고 나서 석판은 다시 분리되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각 석판에 새겨졌던 그림들이 말끔히 지워졌다는 것과 석판의 일부였던 구슬이 따로 떨어져 나왔다는 것. 어차피 던전에 들어가면 어두우므로 바로 재정비를 한 뒤 아마조네스 고레벨들과 같이 던전으로 향했다. 이동은 그녀들의 매스 텔레포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들어가죠.”
“그래, 레벨이 레벨인 만큼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큰 무리는 없을 거야. 1층에서 3층까지는 약하디 약한 놈들이니까.”
말 그대로였다. 1층에는 툭 건들기만 해도 뼈가 부서져 버릴 것 같은 해골들이 주를 이뤘고 2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나 3층부터는 약간 달라졌다.
“다크니스 스피어(darkness spear).”
스켈레톤 메이지의 출현!! 쓰는 마법들이 전부 4써클 이하인 두렵지 않은 녀석들이지만 마법인 만큼 피하지 않으려면 마나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귀찮게 만들었다.
“파이어 랜스.”
2써클이나 될 법만 마법에 4써클로 대응한다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적까지 함께 소멸시켜버렸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웠다. 그 다음에 몰려오는 놈들은 비교적 간단히 처리했다. 앞쪽에 포진해있는 궁수들이 활을 한 번씩 당김으로써 끝을 냈으니까.
“끼릭, 끽 끽.”
특이하게 이번 스켈레톤은 동물이었다. 과연 밀림이라는 것일까? 내려가면 갈수록 원숭이에서부터 스켈레톤 나이트까지 다양한 종류의 해골들이 변칙적인 공격을 해대며 공격해왔고, 그때마다 이곳에 능숙한 궁수들이 손쉽게 처리했다.
“솔직히 마지막 보스도 시간만 끌면 자멸하니 별 문제 없어.”
“자멸을 하다니요?”
“특이하게도, 그놈 설정이 리치가 된 프리스트 거든. 공격을 하면 할수록 몸에 데미지가 쌓여서 결국엔 지가 알아서 죽어.”
“하아?”
이번에도 역시 게임 개발자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괴상망측한 몬스터를 내 놓았다. 어떻게 프리스트가 리치로 변할 수 있는 걸까? 리치라면 마법사만 가능한 게 아니었던가? 놈에 대한 기대를 키워갈 무렵 4층의 막바지에 도달했고, 자신이 대신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려입은 해골바가지를 만날 수 있었다.
“내게서 이것마저 빼앗아가려 온 것이냐!! 이것만은 못 내준다. 죽어!!!”
놈은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더니 대뜸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하나, 전생에 프리스트였던 게 남아있는 듯 달려오는 속도가 매우 느렸고, 마법사인 나조차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샤프 슈팅 스타(sharp shooting star)!!”
일반의 슈팅스타와는 다르게 색이 검은 색에 가까웠고 뚜렷이 날카로운 모습을 갖췄다. 하지만 나와 드라이저도 블링크를 사용해 가뿐히 피해버리는 바람에 애꿎은 땅만 파야했다.
“우리, 어떤 공격이 나오나 구경이나 해볼까?”
“어떻게요?”
“겹겹이 실드만 치고 지켜보는 거지. 세리랑 거트 형까지 넷이서 방어하면 버틸 수 있지 않겠어? 여차하면 먼저 깨진 사람이 다시 치면 되니까.”
“해보죠, 그럼 저부터 갑니다. 보호하는 마법의 장막, 실드!!”
제일 위에 제법 넓은 범위로 펼쳐진 드라이저의 실드가 펼쳐졌고 그 안에 거트 형의 디바인 실드가 또다시 펼쳐졌다. 펼치고 나서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차에 한참이나 허공을 공격하던 리치가 유일하게 정지해있는 우리를 발견했고 원했던 대로 공격을 퍼부어 댔다.
“홀리 메이스(holy mace), 디바인 크로스(divine cross), 가즈 핑거(GOD's finger), 홀리(holy)!!”
몇 번의 공격에도 흔들리기만 할 뿐 부서지지 않자 놈은 프리스트 최고의 공격 주문인 홀리까지 날려댔다. 흔들리는 실드에 위험을 느낀 세리가 먼저 디바인 실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모두 큰 데미지를 입거나 죽었을 지도 모르는 상황. 간신히 얇은 막 하나가 유지되어 모두의 안전을 지켰고 무리해서 공격을 시도한 놈은 반발력이 극에 달했는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큭……. 이젠 이것마저 빼앗겨야 한다니, 분하다.”
“대체 무슨 소립니까? 우린 무엇도 빼앗지 않아요.”
다시 생각해도 ‘죽이기만 할 뿐…….’이라는 말을 뒤에 붙이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빼앗지 않는다는 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드는 리치는 아직도 우리를 경계하며 머리에 쓴 신관의 모자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럼 여기엔 무엇 하러 온 것이냐.”
“찾을 게 있어서죠. 혹시, 엘도라도에 대해 아세요?”
“그건 나다.”
“??”
이놈의 리치가 노망난 게 틀림없다. 황금의 도시가 어떻게 이런 해골바가지가 될 수 있겠는가? 얻을 것도 없어 보이는데 지금 죽일 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리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엘도라도는 너희가 생각하는 황금의 도시가 아니다. 황금 인간,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1년에 한 번씩 추장인 나에게 금가루를 바르는 풍습이 있었지.”
“당신이 추장이라면 어째서 여기에 이러고 있는 겁니까?”
“라무, 그 마법사가 날 이렇게 만들어서 내쫓았다. 그리고 내 자리를 차지해 버렸지. 난, 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지금까지 공격주문을 연습해오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원래 신관이 내가 리치의 상태에서 공격주문을 사용하면 나에게도 역시 엄청난 고통이 따르더군. 그대들은 그곳으로 가는 열쇠는 가지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