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름 2권
● 차 례
듀얼 토너먼트
얼음의 여왕
붉은 태양의 대지
쿠데타
밀림에서 생긴 일
밀림속의 황금도시, 파이치치
6성 연합
반격 1
듀얼 토너먼트
“역시나 복잡하군.”
듀얼 토너먼트의 당일, 토너먼트가 열리는 이곳 류벤 제국의 수도 폴메르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근 1년 만에 열리는 제대로 된 이벤트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입장권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새치기하지 마시고 차분히 줄 서서 기다리세요. 거기, 새치기하지 말랬지!!”
여덟 방향에 있는 출입구에서 모두 표를 팔고 있지만 몰려든 사람들을 수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구경꾼의 입장이라면 저 엄청나게 긴 줄에 암담해하겠지만 출전하는 사람들은 따로 신청하는 곳이 마련되어 있으니 별 걱정 없다.
“헉”
조금 전의 말을 번복하겠다. 이쪽 역시…… 무지하게 밀린다. 각 클래스 별로 신청하는 곳이 다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청하는 어중이떠중이도 상당수였고 기자단을 자처하는 자들도 이곳저곳을 기웃거려서 만만치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이쪽도 암담하군.”
“70레벨 아래는 제외시킨 게 맞긴 한 거야?”
“이 많은 사람들 중 8명을 뽑아내려면 고생 좀 하겠군. 일단 각자 클래스로 흩어지자”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한발, 한발 기운 없이 발을 내딛고 있을 때 멀리서 날 알아본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고 웅성거림이 커지더니 끝이 없어 보이던 줄이 반으로 쫙 갈라졌다(한 줄에 두 명이다).
“콜로니스트님, 먼저 가시지요”
“예? 아, 감사합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한 마법사가 양보의 말을 건넸고 안 그래도 막막하던 차에 거절하지 않았다. 쪽팔리긴 하지만 갈라진 줄의 사이로 지나가는 동안 그들의 함성과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출전 신청을 하고 싶습니다.”
“이름이?”
운영자들도 직접 하기 힘들 걸 알았는지 NPC가 접수를 받고 있었다.
“colonist입니다.”
“음…… 됐습니다. 본선 시작 5분전까지 대기실에 와주십시오.”
“'본선' 시작 전?”
이 많은 사람들 중 본선 진출자를 추려내려면 ‘시험’을 봐야 할 텐데 본선 진출 전이라니?
“그렇습니다. 현재 colonist님과 알테어님, 에크만님, 노드님에게는 자동 본선 진출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에엑?”
“이건 대부분의 마법사에게 동의를 얻은 것입니다.”
알테어와 에크만, 노드는 마스터 클래스이니 이해가 갔지만 나까지 본선 진출이라는 건…‥.
“이해는 안 가지만 차려주는 밥상이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나까지 자동 진출하면 자신들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위 마법사들은 온갖 환호성을 질러댔다. 창피해서라도 더는 못 있겠군.
“잘난 척 해대는 마스터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세요!!!”
“맞아요. 무한 마나니 뭐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짜증나는데요.”
그 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한마디씩 내뱉는 그들을 뒤로하고 한참 줄서 있을 녀석들을 놀려주기 위해 움직였다. 내가 듣기론 노드는 무뚝뚝하고 사람들과 잘 안 어울려서 그렇지 미움 살 짓은 안 했을 텐데 마스터라고 싸잡아 비난하는 건가?
“아, 오빠!!”
걷다보니 세르와 린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프의 숲에서 돌아와선지 복장이 좀 달라졌네?
“이야, 몰라보게 변했는데?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내셨죠? 길드 전 얘기는 들었어요. 참가 신청은 벌써 하신 거예요? 아까 보니까 기사랑 마법사 클래스는 유난히 줄이 길던데.”
“그래, 갔더니 길을 터 줘서 금방 했지. 너흰?”
“로그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줄이랄 것도 없었고 린 언니는…… 참가를 못한대요.”
“아니, 왜?”
“기술을 다 배우니까 전직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궁수가 아니니까 안 된다나 봐요”
숨겨진 직업으로 바뀌어버린 건가?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하나 찾기도 힘들어하는데 내 주위에는 벌써 몇이야?
“레이가 씩씩거리며 올 모습이 눈에 선하군.”
“네?”
“별거 아냐, 그보다 직업명이 뭔데?”
“하프 엘프요. 그 덕에 이제 ‘그곳’ 출입이 자유로워졌어요.”
주위에 귀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엘프 소리는 아주 작게 말했다. 가까이에서도 듣기 힘들 정도로.
“그 갑옷들은 ‘그들’이 준거야?”
“네, 가볍고 방어력도 좋아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아무도 가본 적 없던 곳인 만큼 물을 것도 많았다. 이런저런 궁금한 점을 묻고 있는 동안 거트 형과 세리, 카엘이 돌아왔고 내 예상대로 씩씩거리며 레이가 돌아왔다. 마궁수란 새로운 직업이 되어버렸으니 린과 마찬가지로 참가가 불가능했겠지.
“린!!!”
돌아온 아론은 린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왔다. 엘프의 숲에 있는 동안 귓속말조차 통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옆집에 사니 얘기도 듣고 얼굴도 봤을 텐데 왜 저리도 호들갑인지…….
“그럼 표 사야하는 거 아니에요?”
“아!!”
참가 할 수 없으니 관람석 표를 사야 했는데 암표를 막기 위해 1인 1표에 양도가 불가능하게까지 했으니 그 긴 줄의 끝에 서야했다. 지금 서면 시작하기 전까지 살 수나 있을까?
“큐베레이님과 글로린님 되십니까?”
어디선가 나타난 금발의 사내가 다짜고짜 둘의 신원을 확인했다.
“예, 그런데요”
“전 운영자 고블린입니다. 제가 두 분을 찾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시는 것 때문인데요…….”
하고많은 몬스터 중에 고블린이라……. 취향한번 독특하군.
“우린 유저도 아닙니까? 정 안되면 본래 직업 대회 쪽에라도 넣어주면…….”
“진정하십시오. 저희도 그것을 생각 안 해본 건 아닙니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어서 두 분을 포함해 새로운 직업을 얻으신 다른 분들끼리 시합을 갖는 것으로 대신 하려 하는데, 참가 의사를 알아야 하기에 이렇게 제가 직접 돌아다니는 겁니다.”
새로운 직업끼리의 대결이라? 재미있는 생각이군. 일반 유저의 시합보다 인기를 끌겠는데?
“재밌겠군요.”
“그럼 승낙하시는 겁니까?”
“그러죠. 린도 참가할 거지?”
색다른 경험의 기회인지라 린도 거절하진 않았다.
“어차피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참가하시나 본데, 같이 이동할까요?”
“예.”
“이동.”
운영자의 한마디는 매스 텔레포트와 같은 효과를 냈다. 도착한 곳은 꽤 넓은 홀. 주위에는 각각의 클래스 명이 적혀있는 통로가 있었는데 아마도 각 클래스의 대기실과 연결된 듯싶었다.
“각자에게 맞는 통로로 들어가 주십시오. 아, 세 분은 저와 따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가보실까? 나중에 보자고!!”
거트 형, 아론, 드라이저, 베르, 세리, 세르, 카엘. 특별대우를 받지 못한 일곱은 각자의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 듀얼 토너먼트의 예선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전 진행을 맡은 고블린이라고 합니다.”
운영자가 대기실에 만들어준 스크린들 중 하나에 화면이 잡혔다.
“첫 번째는 궁수 분들의 예선입니다. 시험 방법은 표적 맞추기!! 움직이는 표적을 얼마나 많이, 정확하게 맞추느냐가 채점 기준으로 마나 샷과 마나 애로우의 사용은 금합니다.”
궁수의 과제는 순수한 ‘궁술’이었다. 속도와 위력이 대폭 향상되는 두 가지가 금지 되었어도 고렙이 유리한 건 변함없지만 그것도 많이 봐준 셈이니 반발은 없었다. 일부 고렙은 당연히 불만이 있겠지만. 한 번에 십여 명씩 시험을 치러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그 동안 격투가의 시험도 시작되었다.
“아쵸쵸쵸쵸쵸.”
“으자자자자자자잣.”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미의 반짝이는 곳을 최대한 빨리, 정확하게 가격하는 것. 그 과정에서 한 유저가 폼 잡는답시고 발경으로 더미를 부수고 실격 당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그렇게 쳐도 안 부서지던 것이 발경 한방에 박살이라, 기를 넣었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한 건가?
“파이어 볼.”
“아이스 랜스.”
그 다음 시작된 건 마법사들의 시험이었다. 과제는 나타난 몬스터의 약점과 속성을 공략해 빨리, 많이 잡는 것. 몬스터가 공격을 못하도록 되어있고 한 마리 잡을 때마다 마나가 전부 채워지니 몬스터에 대한 이해도를 묻는 것 같다.
“크윽.”
“내가 카무이다!!”
기사들에게도 상당히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다. 자신과 같은 레벨에, 능력치는 오히려 조금 높고 기술까지 똑같이 쓸 수 있는 NPC와의 대결, 그야말로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소환, 화이트 울프, 고블린x5, 클레이 골렘.”
“소환, 스켈레톤 나이트x2, 본 나이트x2.”
“소환, 카사x5.”
소환술사, 네크로맨서(전직방법은 어쌔신과 동일), 정령술사의 과제는 같았다. 자신의 레벨+5에 해당하는 급의 몬스터를 잡는 것. 몬스터의 종류는 랜덤이며 소환체 간의 연계 플레이에 중점을 둔 듯하다. 이상하게 어쌔신과 로그, 프리스트의 소식은 전혀 없었는데 세르에게 귓말을 해보아도 통하질 않았다.
“끝난 건가?”
기사 클래스는 유난히 마스터가 많아서 두 배인 16명을 뽑았고, 마법사도 2명을 더 뽑아 총 10명이 뽑혔다. 안타깝게도 길드 원 중 본선 진출자는 아론 하나뿐. 나와 특수 클래스를 합치면 넷이나 되니 비교적 많은 편일 것이다.
“드디어 본선 진출자가 모두 가려졌군요. 그럼 막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뒤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심심하시다구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예선이자 결승인 로그와 어쌔신, 프리스트의 경기!!!”
아무것도 없던 세 개의 스크린에 로그와 어쌔신, 프리스트들의 모습이 잡혔다. 어쌔신들의 무대는 울창한 숲, 로그는 던전으로 보이는 곳, 프리스트는 신전. 각자 직업에 맞춘 과제가 주어질 듯했다.
“어쌔신은 지금부터 5분간 이동, 준비의 시간이 주어지며 그 후부터는 서로 죽고, 죽이는 배틀 로얄이 시작됩니다.”
“오오오오!!!”
“그리고 로그들은 트랩 던전을 돌파하게 되는데 스킬과 레벨만이 아닌 뛰어난 판단력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니 방심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프리스트는 기도자세로 눈감고 오래 버티기!! 전투직이 아닌 만큼 많은 고민 끝에 만든 경긴데요, 도중에 눈을 뜨거나 조시면 탈락입니다. 준비 되셨으면 시작하겠습니다. 시…… 작!!”
고블린의 시작 소리와 함께 그들은 바삐 움직였다. 듀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클래스를 잘도 처리했군.
“스크린 상승.”
그의 말에 따라 스크린이 좀 더 위로 배치되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듀얼 토너먼트 본선경기를 시작합니다!!”
어쌔신과 로그, 그리고 프리스트. 이 셋은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과제인지라 수시로 체크해가며 관람할 수 있게 해놓은 것 같다. 첫 번째 시합은 예선과 마찬가지로 궁수. 시합 방법이 조금 특이했는데 경기장 중앙에서 등을 맞대고 있다가 각자 앞으로 20발자국을 걸어간 뒤 시작했다.
뒤로 덤블링하며 쏘는 사람, 옆으로 쓰러지며 쏘는 사람, 고공 샷을 쏘는 사람……. 다양한 방법이 난무하는 가운데 승자가 결정됐고 몇 가지 말로 치켜세워 준 다음 다른 클래스로 넘어갔다.
“궁수 클래스의 최강자는 핏빛화살님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오, 그새 어쌔신 쪽은 둘이나 죽었군요. 다른 클래스는 탈락자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결정할 최강자는…… 격투가 클래스입니다!!”
“화끈하게 보여줘라.”
아무래도 원거리 공격이 주를 이룬 궁수들의 시합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역부족 이었나보다. 과제가 과제인 만큼 격투가 클래스의 본선 진출자는 대부분이 현실에서 무술 유단자였는데, 요청에 따라 자신들의 무술 종류에 맞는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최후의 1인으로는 권혼님이 남으셨습니다. 멋진 경기를 보여주신 너클님에게도 박수를!!”
고블린의 요청에 따라 관중석에서 함성과 함께 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권혼은 결승에서 같은 마스터인 너클과 호각을 이뤘는데 마스터 아이템으로 다른 클래스와 연관되는 것을 선택한 너클과 달리 오리하르콘 너클을 선택한 덕에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번엔 3명의 어쌔신이 아웃됐군요. 로그와 프리스트도 각각 한 명씩 탈락했습니다. 갈 길이 먼데 안타깝군요. 다음은 정령술사들의 차례입니다. 준비 되셨죠? 그럼 시작합니다!!”
고블린이 각 스크린에 표시된 숫자가 준 것을 보고 체크한 뒤 진행을 이어갔다. 정령술사들의 싸움, 예상 밖으로 최상급 정령은 승패를 가르는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상대편의 최상급 정령을 막기에도 벅찼으니까. 결승전은 물&전기 대 바람&불이었는데 바람의 정령을 희생시켜 불의 힘을 증폭시킨 플레임의 승리로 돌아갔다. 바람의 정령을 흡수시켜 버리다니…… 대단하군.
다음에 이어진 소환술사, 네크로맨서의 경기 키우기 까다로워 고레벨이 없는 관계로 생각보다 시시했는데 어이없게 우승자는 저번 에르가도에서 만났던 그 녀석이었다. 정령술사도 망했구나, 망했어.
“와우, 벌써 최강자가 다섯이나 나왔군요. 이쯤에서 중간 점검을 해보겠습니다. 먼저 어쌔신, 남은 숫자는 모두 열 셋. 로그는 스물 하나에 절반 이상을 통과했군요. 프리스트는 스물여섯. 우승자가 가려진 클래스는 궁수, 격투가, 정령술사, 소환술사, 네크로맨서이며 기사와 마법사가 남았습니다. 이어지는 순서는 기사 클래스 2차 예선!! 숫자가 다른 클래스의 2배인 만큼 결승은 마법사 최강전을 치른 뒤 진행하겠습니다. 양 선수 나와 주세요.”
첫 시합은 아론과 엘므라는 사람의 경기였다. 그런데…….
“너클 가드?”
너클 가드란 손잡이에 고리형태로 붙은 가드로 손가락 부위만 가려지는 가드 형태인데 너클에 스파이크를 달아 전투시에 타격용으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아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무기인데 과연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걸까?
“시작!!”
“검강.”
시작부터 검강끼리의 충돌이었다. 상대는 힘에서 밀리는지 살짝 흘리고 물러섰고 아론은 그대로 따라 들어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덩치에 안 맞게 빠른 찌르기에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아론의 검의 방향을 틀어지게 만드는 상대. 과연 보통 내기가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검이란 자체가 베기보단 찌르기에 유리하긴 해도 팔에 무리가 가서 오래 유지하기는 힘들었는지 찌르기도 얼마 가지 못했고 곧 베기로 바뀔 수밖에 없었는데 동작이 더 커져서인지 수월하게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맞지 않자 초조해진 아론은 저도 모르게 동작이 커졌고 상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맞아라!!”
“합.”
휘잉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올려치는 상대의 검에 아론의 레더 아머가 살짝 베어졌다. 무척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움찔한 덕에 오히려 상대가 무방비 상태에 빠졌고 그걸 놓칠 만큼 어수룩한 아론이 아니었다.
“끝이다.”
“아직입니다!!”
동작이 큰 아론의 베기보다 엘므의 너클에 달린 스파이크 공격이 더 빨랐다. 스파이크에 얼굴이 찍힌 아론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고 엘므가 다가오자 무작정 검강을 뿌려 저지했다. 경기 중 포션 사용 금지라는 제약 때문에 시야와 거리감에 문제가 생긴 아론. 승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군.
“젠장.”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이것도 엄연히 실존했던 검의 한 종류입니다. 이번엔 다른 사용 방법을 보여드리죠.”
시야가 좁아진 왼쪽으로 돌아가는 엘므, 급히 몸을 돌리자 또 왼쪽으로 돌고, 보면 돌고, 또 돌고…… 그렇게 돌기만 하는 것에 짜증난 아론이 먼저 위치를 예측하고 달려들었다.
“걸렸다.”
다행히 예측이 맞아 들어가 검을 맞댈 수 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걸렸군요.”
맞닿은 부분은 검날이 아니라 스파이크가 있는 너클 부분이었다. 그대로 버티면 너클 부분이 박살나겠지만 상대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고 손목을 돌려 흘림과 동시에 검날로 아론의 목을 베어갔다.
“미친.”
황급히 고개를 숙이자 검을 휘두르며 생긴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그 상황에서 힘을 지탱하고 있는 왼발을 차버린 아론. 덕분에 같이 넘어져 버렸지만 운 좋게도 상대의 오른팔에 상처를 낼 수 있었다.
“이런…….”
치료를 할 수 없으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통증이 올 것이며 아론의 무지막지한 힘을 받았다간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쯤 되자 엘므는 자연히 몸을 사렸고 전력을 다해 휘두르는 아론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승자는 아론!! 다음은 최초의 마스터시죠? 디아블로 길드의 수장, 보카치오님과 강철같이 강하고 냉정한 카리스마, 철의 기사단의 엘시노님의 격돌입니다.”
명색이 한 길드의 수장인지라 한껏 치켜 세워주는 고블린. 최초의 마스터라는 간단한 소개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보카치오의 얼굴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철 따위, 이 미스릴 소드로 간단히 베어주지.”
역시 기분이 상했던 것일까? 보카치오는 정중히 인사하는 엘시노를 도발해 버렸다. 미스릴 소드는 엘시노에게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물건이니 통하지 않을 리 없었고.
“이거, 시작 전부터 신경전이 팽팽하군요. 오래 끌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시작!!”
레벨 차이도 차이거니와 미스릴이 검강의 힘을 증폭시켜준 탓에 승패는 쉽게 갈렸다. 처참히 무너진 엘시노. 길드 수장끼리의 대결이었던 만큼 철의 기사단은 한동안 디아블로 길드를 피해 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승자는 검신.”
“승자는…….”
마스터들은 모두 2차 예선에 통과했다. 마스터끼리는 싸우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슬슬 몸이라도 풀어 두십시오.”
운영자인 듯한 사내가 대기실로 들어와 곧 시합이 있음을 알리고 사라졌다.
“8명의 강인한 전사들이 뽑혔군요. 어쌔신은 일곱, 로그는 열 셋, 프리스트는 여덟 명 남은 가운데 마법사 최강자를 뽑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
기사 다음으로 많은 유저가 플레이하는 클래스인 만큼 그 함성 또한 대단했다.
“말씀드리는 순간 프리스트 두 명이 눈을 떴군요.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저쪽에는 유저의 이름만 빼고 중계하고 있는데 꽤나 궁금하셨던 모양입니다. 계속 진행하죠. 첫 번째 시합. 레인보우님 대 매직님의 경기!!”
첫 번째 시합은 거의 제자리에서 누가 빨리, 많이 날리나의 대결로 싱겁게 끝이 났다. 두 번째 경기 역시 싱겁기는 마찬가지. 본격적인 경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진 너무 마법사스러운 정적인 대결이었는데요, 이제부턴 마스터들이 등장하니 다른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출전자는 마스터, 노드님과 첫 경기의 승자이신 매직님!!”
마스터인 만큼 제법 인지도가 있는 노드의 경기가 시작되자 긴장감 없는 경기로 침체 되어 있던 관객석이 활기를 되찾았다.
“시작!”
“파이어 볼, 더블.”
마스터의 특권인 더블 스펠을 이용한 두 방의 파이어 볼.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다름없다는 공격을 매직도 알고 있는지 첫 시합과는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간다고 달라질 건 없다.”
노드의 파이어 볼은 각각 매직이 달리는 방향의 앞과 뒤에 부딪쳐 폭발했다. 그와 함께 밀려나는 매직. 어느새 멈춰버린 움직임은 그가 느끼고 있는 긴장감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차지 볼트.”
“이런, 파이어 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노란 전기 덩어리를 보고서야 정신 차린 매직이 다급하게 파이어 볼을 날려 봤지만 차지볼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큭.”
폭발하는 파이어 볼 속에서 날아온 차지 볼트는 매직의 옆구리를 강타했고 로브를 입은 덕에 HP는 얼마 안 깎였지만 상당한 통증이 있는 듯했다.
“계속 할 건가?”
“내가 졌다.”
통증 때문에 옆구리를 붙잡고 있다가 위를 올려다본 매직은 머리 위에서 한껏 전기를 머금고 있는 손을 보고 패배를 시인했다.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너무 어이없게 끝난 경기. 관객석은 또다시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가실 차례입니다.”
“알겠습니다.”
내 차례가 왔음을 알리러 온 운영자의 뒤를 쫓아 경기장으로 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너무 빠른 전개에 관객석이 침체되었군요. 이번에는 분위기를 업! 시켜 보겠습니다. 에번스님 대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계시죠? 이름 그대로 새로운 마법 개척의 선두 주자, 콜로니스트님의 경기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조용했던 관객석에 큰 파문이 일었다. 소개가 너무 거창하군.
“자자, 원활한 진행을 위해선 조용히 해주셔야 합니다.”
운영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소리를 질러대는 관객들. 그럴수록 상대로 나온 에번스의 몸도 긴장으로 뻣뻣해져 가는 것 같았다.
“차단.”
도무지 통제를 할 수가 없자 고블린이 내린 결정은 소리의 차단이었다. 그 크던 함성이 일순간에 사라지자 놀라웠지만 시작하기 전에 건의할 것이 있어 놀라고만 있을 순 없었다.
“한 가지 건의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아까부터 느낀 건데 말입니다. 식물 속성도 있는데 바닥이 돌이면 불합리한 거 아닙니까?”
돌을 뚫고 올라올 수 있다고 해도 그 속도는 매우 느릴 것이니 효과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요즘 애용하고 있는 나로서는 상당히 불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흐음……. 그도 그렇군요. 식물 속성을 사용하는 사람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데 고치려면 시간이…….”
슬쩍 눈치를 보는 것이 그냥 넘어가 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언제나 타협은 내가 이익 보는데 까지. 포기할 생각 따윈 없다.
“프로그램 수정시간이 그렇게 길다면 할 수 없죠.”
“그럼 계속 진행을…….”
“다 때려 부수는 수밖에.”
퍼엉!
펑펑펑펑……!
내 부탁에 따라 에번스라는 상대 선수도 동참해 열심히 경기장을 파괴해갔다. 경기 시작 전임을 이용해 운영자에게 마나를 회복시켜 달라 요청해가면서. 그렇게 대형 마법을 몇 번 퍼붓자 경기장은 오래지 않아 평지로 탈바꿈 할 수 있었다.
“후유……. 이렇게 되면 장외는 사라지는군요.”
“관객석이 있긴 하지만 저기까지 갈 일은 없겠죠.”
“그럼 진짜 시작하겠습니다. 시이…….”
“잠깐만요.”
이번엔 에번스가 경기를 중단시켰다.
“왜 그러시죠?”
계속되는 경기 중단에 고블린도 조금 신경질이 난 듯 목소리에 짜증이 섞인 것 같았다.
“기, 기권하겠습니다.”
심리적 압박감이 너무 심각했던 것일까? 상대는 기권을 선언하고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의 일방적인 응원과 팬클럽이 상처라도 낼까봐 눈을 부라리고 있는 걸 보면 공감이 가지만…… 나도 경기 좀 해보자!!!
“……에번스님의 기권으로 이번 경기는 콜로니스트님의 승리입니다. 다음은 마스터이신 알테어님과…….”
고블린도 험한 결과에 힘이 빠졌는지 목소리가 축 늘어졌다. 나머지 시합은 당연히 알테어와 에크만의 승리. 다시 내 차례가 돌아왔다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노드님과 콜로니스트님의 경기입니다. 레벨 차이가 상당하지만 콜로니스트님의 새로운 마법들이 변수가 될 수도 있겠군요. 멋진 경기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작!!”
“파이어 볼, 더블.”
이번에도 역시 거르지 않고 두발의 파이어 볼로 시작을 알렸다.
“윈드…… 봄버!!”
첫 번째 파이어 볼을 피하고 윈드 볼을 강화한 윈드 봄버를 바닥에 쏘아 공중으로 떠올랐다. 맹연습을 통해 익힌 어설픈 공중제비로 노드의 배후를 차지하자 당황한 그가 파이어 애로우를 날렸지만 연속기로 사용한 4써클의 버닝 핸즈에 가로막혀 사라졌다.
“크아악.”
다른 클래스로의 전직을 통해 나보다 민첩성이 뛰어나겠지만 이런 근거리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번 공격이 통하자 계속해서 그의 몸에 인두로 지진 듯한 빨간 손자국이 새겨졌고, 비명 또한 커져갔다.
“브, 블링크.”
“바인드.”
마구잡이 연타 속에서 겨우 빠져나간 그의 몸에 속박이 가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격.
“파이어 볼, 파이어 볼.”
버닝 핸즈에 맞은 통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변변한 방어조차 못한 그는 자신이 즐겨 쓰던 마법에 머리를 맞고 흙으로 돌아갔다.
“노, 놀랍게도 승자는 콜로니스트님!! 마스터를 꺾는 대 이변을 일으키며 결승에 올랐습니다.”
“와아아아아아∼.”
“꺄아아악, 오빠 너무 멋져요!!”
아무리 마스터에 근접한 자라도 마스터를 꺾은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환호는 뜨거웠다.(마스터가 없는 클래스도 있지만)
“조용, 조용히 해주십시오. 계속 소리 지르시면 다시 방음벽을 설치하겠습니다.”
그제야 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내가 대기실로 들어와 버린 탓도 있겠지만.
“다음도 빅게임이죠? 무한 마나를 지향하시는 에크만님과 마법은 한방이다! 를 외치시는 알테어님, 친구이면서도 극과 극의 마나관과 능력치를 지니신 두 분의 대결!! 과연 누구의 생각이 옳았던 것인지 지금 밝혀집니다.”
“우우우우.”
“둘이 같이 아웃 되라!!”
평소 그들을 안 좋게 생각하던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걸어 나오는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래서 잘난 것도 힘들다니까. 시기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래도 어쩌겠어. 우리가 보통 잘났어야지.”
야유를 시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말에 관객들은 흥분을 넘어 광분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여러분의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진행을 해야 합니다.”
“사회자 양반도 우리의 잘생긴 얼굴을 시기하는군.”
“시작!!”
더 듣기 싫은지 시작을 선언해 버린 고블린.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그들의 얼굴을 설명하자면…… 두꺼비와 개구리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 목소린 성대 결절이라도 있는 듯 낮고 굵직했다. 누가 보면 형젠 줄 알겠군.
“훗, 눈이 낮은데다 성격까지 급하다니…….”
“시작 안 하시면 두 분 다 실격 처리하겠습니다!!”
관중들의 정신 건강을 생각한 고블린은 친절하게 방음벽까지 만들고 그들을 재촉했다.
“저렇게까지 부탁하니 들어줘야겠군, 라이트닝.”
에크만이 날린 라이트닝은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메시지로,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엉뚱한 곳에 라이트닝이 떨어지자 움직이는 알테어. 전직한 직업이 민첩성 위주인 듯 처음부터 큰 주문을 외웠다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9써클의 대단위 화염마법이 펼쳐지자 넓은 경기장 중 알테어의 앞쪽은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마스터다운 엄청난 위력!! 하지만 시합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뒤? 옆? 어느 곳을 둘러봐도 에크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재밌는 걸 보여주지.”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손에는 이미 전기 덩어리가 뭉쳐져 조금씩 크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내려치는 거신의 해머, 자이언트 윈드 해머.”
“쳇. 보호하는 마법의 장막, 실드.”
“솟구치는 불의 기둥, 필라 오브 파이어.”
에크만이 공중에서 무언가를 꾸미자 알테어가 바람의 망치로 내려치고 불의 기둥을 세워 다시 올려쳤다. 하지만 막대한 양의 마나를 쏟아 부은 실드는 깨지지 않았고 다소의 충격은 있었지만 안전하게 착지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뜨거운 숨결, 브레스 오브 파이어.”
곧이어 뿜어지는 뜨거운 불꽃의 숨결, 인페르노의 여기가 식기도 전에 또 한 번 대지가 뜨겁게 달궈졌다.
“망할 놈, 마법 한번 써보기 힘드네. 크레이지 썬더.”
예부터 바보와 연기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어느새 다시 공중으로 올라간 에크만은 그렇게 떨어지면서도 없애지 않던 전기 덩어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갇혀있던 전기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날뛰었고, 약간의 제어는 있었는지 시전자가 있는 뒤쪽으론 가지 않았다.
“보호하는 마법의 장막, 실드.”
터엉!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전기의 비속에서 알테어는 얇은 막에 몸을 의지했다. 한번, 두 번, 세 번째 충격이 가해지자 실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깨어지며 공격을 허용했고, 알테어는 큰 충격을 받아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아웃. 역시 듀얼에서 지는 가장 큰 이유는 HP의 소모 때문이 아니라 통증에 의한 빈틈허용인 것 같다. 몬스터야 다르겠지만.
“승자는 에크만, 다음 경기는 5분 후에 있겠습니다.”
고블린은 별다른 설명 없이 할 말만 하고 그를 강제 이동시켜 버렸다. 어지간히 보기 싫었나 보군.
“날 시기하다 못해 그런 짓까지 하다니, 운영자로서 실격입니다!!”
5분 후, 다시 나온 에크만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저렇게 애써가며 욕먹고 싶을까?
“……뿌뜩…… 계속 잡담하시면 제가 시말서 쓰는 한이 있어도 실격처리 할 테니 그리 아십시오.”
“역시 잘난 건 피곤하다니까, 진행하시죠.”
고블린은 인심 쓴다는 듯한 그의 말투에 순간 울컥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겨우 참아내고 짜증스럽게 시작을 외쳤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뜨거운 숨결, 브레스 오브 파이어.”
“블링크. 새처럼 하늘로, 플라이.”
처음부터 큰 주문을 외우자 또 하늘로 올라가는 에크만, 저런 식으로 올라간 거였군.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하긴, 정말 똑똑했다면 일찌감치 포기했겠지. 그럼 반복 학습을 시켜주는 수밖에.”
그의 손에 좀 전과 같은 노란 전기 덩어리가 뭉쳐지기 시작했다.
“라이트닝 애로우.”
아이템 창 자체를 쓸 수 없기 때문에 검 같은 걸로 전기를 막을 순 없었다. 라이트닝 애로우를 날려 봐도 플라이 마법을 시전 한 상태라 요리조리 다 피해버렸고 시간이 갈수록 전기 덩어리는 더 커져갔다.
“파이어 볼.”
내 비밀 무기이자 최후의 보루인 압축 파이어 볼이 그에게 쏘아졌다. 역시나 가볍게 피해버렸는데 여기서 약간 문제가 생겨버렸다. 생각대로라면 비웃으며 약간의 차이로 피해야 하는데 근 2m의 거리를 두고 피한 게 아닌가? 여기서 폭발을 시킬 것이냐, 아니면 다음 공격까지 참을 것이냐…….
“익스플로젼.”
퍼엉!
두 번째 마법을 사용할 때까지의 딜레이 동안 저 전기 덩어리가 곧 쏘아질 것 같아 폭발을 택했다. 폭발에 휘말려 날아가던 에크만은 관객석 벽을 붙잡고 멈추더니 도약해 하늘로 올랐다.
“새처럼 하늘로, 플라이. 감히 이런 잡스러운 짓을!! 죽어라!!!”
하다 못 해 모였던 전기 덩어리라도 흩어지길 바랐건만 용케도 유지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뛸 듯 움찔거리는 전기. 저것이 쏘아지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에라이, 블링크.”
내가 이동해간 곳은 바로 에크만의 위쪽.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발로 내려찍으려는 순간 그의 몸이 180도 회전하며 전기를 쏘아냈다.
“그깟 잔재주가 통할 거라 생각했나!!!”
치직 치직 치지지직-!
사방으로 날뛰었으면 조금이라도 데미지를 덜 입었겠지만 거리가 가깝다보니 퍼지지도 않고 내 전신을 유린해갔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추락하는 몸, 그나마 다행으로 의식을 잃어 땅바닥에 부딪히는 고통은 면할 수 있었다.
“으음……?”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맨 먼저 나를 반겼다. 그 다음 모여드는 길드 원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제 일어났냐? 게임에서도 기절을 하다니, 참 신기하단 말이야.”
“진 건가? 차라리 가만히 있어볼 걸 그랬군. 운 좋으면 안 맞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네가 이겼어.”
“그게 무슨 소리야?”
“니가 공격에 맞고 에크만이 관객석까지 날아 갔었잖아? 그때 관객석을 살짝 밟았나봐, 그래서 장외패가 되어버렸지.”
장외패라…….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군. 그보다, 다른 경기는?
“넌 왜 여기 있냐?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사 시합이 이어졌을 텐데?”
“졌다. 마스터한테는 무리더군. 지금은 새로운 직업들끼리 붙고 있어. 레이는 첫판에 깨져버렸고 린은 준결승에 올라갔는데…….”
“으음…….”
옆쪽 침대가 하얗게 빛나며 린이 나타났다. 졌나보군.
“졌나보군, 괜찮아?”
“예, 머리가 조금 아프기는 하지만 괜찮아요.”
“지금 나가면 결승은 볼 수 있겠군. 가자.”
약간 어지럽기는 했지만 크게 지장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자 시작을 알리기 전에 하는 고블린의 설명 소리가 들렸고 서둘러 볼 자리를 찾았다.
“어? 저 녀석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와 마주선 자는 저번 길드 전 때 봤던 창백한 안색의 소년이었다. 저 녀석도 새로운 직업?
“승자는 유한빈님, 결승은 잠시 후에 치러지겠습니다.”
“현무단의 그 녀석이잖아? 특수 클래스였나……. 네 상대는 어떤 녀석이었어?”
“세르반테스라고 하는 전산데, 검을 주로 쓰지만 창이나 메이스도 쓰고 마법까지 이용해 싸우는 마전사예요. 아이스 랜스를 만들고 그걸로 랜스 차지를 사용한다던가 하는 변칙 공격도 있어서 당황했어요.”
“아이스 랜스로 랜스 차지를? 희한한 녀석이군. 네가 전직한 지 얼마 안 되서 경험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만만치 않겠는데?”
더구나 린은 원거리 위주인 궁수 계통의 직업이니 한정된 공간에서 접근전 위주의 상대와 싸우는 건 무리가 있겠지.
“양 선수 나와 주세요!!”
고블린의 요청에 따라 세르반테스와 한빈이란 녀석이 걸어 나왔다. 한빈이란 녀석의 양손에 들린 건 크로스 보우?! 그렇다면 녀석도 궁수 계통의 유저인가?
“자, 특수 클래스의 마지막 대결, 유한빈님 대 세르반테스님의 경기…… 시작!!”
슈슉-
시작 소리와 함께 한빈이란 소년의 양손에 들린 크로스 보우가 상대에게 발사됐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달려가는 한빈. 몸을 움직여 피해내자 이번엔 비도를 뿌려댔고 화살에 이어 비도가 날아올 줄 몰라 손발이 어지러워진 상대에게 등 뒤에 메고 있던 장도를 뽑아들고 약간의 도약으로 달려들었다.
“큭.”
챙!
한빈의 도가 정수리로 날아들자 상대는 검을 황급히 올려 도를 막았다. 도약 중이었기에 한빈의 몸은 아직 공중에 떠있는 상태였고 그대로 오른쪽 어깨를 디밀어 도를 눌러버렸다. 도에 체중이 실리자 상대의 놀고 있던 다른 손도 검의 손잡이를 향해 움직였고 그 순간, 한빈이 양손으로 잡고 있던 도를 오른손으로 쥐며 자유로워진 왼손을 허리 뒤로 돌렸다. 다시 드러난 한빈의 왼손에는 작은 소도가 역수(逆手)로 들려 있었고 바닥에 발이 닿자 왼손이 상대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커헉, 이런 망할!!”
촤악 상대는 옆구리에서 복부로 이어지는 깊은 상처를 입은 채 한빈을 밀치고는 뒤로 물러섰다. 한빈은 다시 도를 집어넣으며 튕겨나간 탄력을 이용해 상대의 가슴 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손목 안쪽을 마주 잡았다가 그대로 손을 뻗어 상대의 목 양옆을 향해 내질렀다.
푸욱-.
그 작은 손에는 날이 반짝이는 날카로운 단검이 한 자루씩 들려있었다. 두 자루나 되는 단검이 목을 꿰뚫었으니 당연히 크리티컬 히트. 상대는 그렇게 실력발휘 한번 못해보고 경악하며 쓰러졌다. 엄청난 무위를 보여준 한빈은 격한 움직임으로 인한 약간의 홍조를 보일 뿐, 여전히 굳어 있었다. 관객석 역시 굳은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한빈이 사용했던 장비를 갈무리하고 옷을 털고 있을 때쯤, 조용하던 경기장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이번 경기의 승자는 용병, 유한빈님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귀를 때리는 함성소리에 귀를 막고 들어가는 한빈. 그가 사라진 뒤에도 함성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시합까지 끝이 났습니다. 이제 어쌔신은 셋, 로그는 다섯에 선두가 던전 86%돌파, 프리스트는 다섯 명이 남았는데요, 이분들의 결과는 나중에 따로 홈페이지에 올리도록 하겠고 지금부터 듀얼 토너먼트의 마지막을 장식할 깜짝 이벤트!! 최강자들의 배틀 로열이 시작되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배틀 로열이라니.”
“말 그대로 배틀 로열, 최후의 1명이 남을 때까지 싸우는 겁니다.”
“제롬씨, 오랜만이군요.”
어느 샌가 나타난 제롬이 설명을 했다. 오랜만에 보니 은근히 반가운데?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사회자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깜짝’이벤트라고. 이제 곧 가보셔야 할 텐데 준비하시죠. 아마 마법사는 제거 대상 1순위일 테지만 말입니다.”
슈웅-.
리턴 스크롤을 사용하지도 않았건만 몸이 빛에 휩싸여 이동됐다. 강제 소환된 장소는 경기장 안. 주위에는 각 클래스의 최강자로 뽑힌 자들이 있었고 서로 눈치를 보며 연합을 꾀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배틀 로열이면 혼자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사부…… 님?”
“!!”
소환술사 최강자로 뽑힌 그 녀석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확인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나보네요.”
휴우……. 무엇 때문에 날 알아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라고 거듭 이야기하자 사과하고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조심해야겠군.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이런…….”
녀석 때문에 어느 쪽으로 갈지 못 정해서 무작정 움직였다. 하지만 나를 향해 칼을 겨누는 기사. 날 자신의 편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그렇다면…….
“!!”
반대편 궁수 역시 나에게 활을 겨누는 게 아닌가? 망할 놈들, 대 범위 마법으로 확……. 그랬군, 내가 대 범위 마법으로 뒷 치기를 하면 상대편만 아니라 우리 편까지 몰살시킬 수도 있으니까 못 믿겠다는 거였어.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
“3, 2, 1 시작!!”
“검강.”
“마나 샷.”
“블링크. 새처럼 하늘로, 플라이.”
에크만이 사용했던 방법이라 찝찝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땅에는 온통 적들뿐이니 죽을 생각이 아닌 이상 멍하니 있을 순 없었다.
“이크!”
마스터가 아니라 더블 스펠을 사용하지 못하니 공격은 할 수 없었고 간혹 날아오는 화살 몇 발만 피하자 그들도 나에 대한 경계를 늦추기 시작했다. 마스터 팀에 밀려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는 비마스터 팀. 인원은 줄고 줄어 마스터끼리 죽고 죽이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어?”
나에 대한 견제가 거의 없어 한눈을 팔고 있을 때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머리색도 다르고 판타지 풍 옷을 입고 있지만 틀림없는 그녀였다.
“어째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는 그녀. 왜, 왜, 왜 나를 피한단 말인가? 손을 뻗어 봤지만 닿을 리 없었다. 넋을 놓고 있자 마법은 자동으로 풀렸고 난 멍한 상태로 바닥에 추락했다.
“웬 떡이냐!!”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나를 향해 남은 모두가 공격을 퍼부었고 당연히 아웃됐다. 가시지 않는 통증과 죽음으로 인한 두통, 평소라면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하고 고통이 사라지길 기다렸겠지만 지금의 나에겐 아무 소용도 없었다. 만나야 해, 꼭 만나야겠어.
“크윽.”
휘청-.
균형조차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길드 원들이 부축하려 달려왔지만 뿌리쳤고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있는 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꺄악!!!”
“콜로니스트님, 이쪽을 좀 봐주세요!!”
그러나…… 도착한 곳엔 그녀가 앉았었을 빈자리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는데, 어디로 간 거야 넌…….
“하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뒤따라 달려온 아론이 주위를 살피며 물어왔다
“왔었어.”
“오다니, 누가?”
“소연이. 눈이 마주쳤는데, 날 외면했어. 어째서지? 왜 날 피한 걸까? 왜? 왜? 왜!!!”
“소연? 이소연?? 그랬군……. 걱정 마. 네가 너무 유명해서,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아는 척하기 부담스러워서 그랬을 거야. 이제 네 아이디도 알 테니 곧 연락 오겠지.”
“……그렇다면 좋겠지만…….”
“일단 자리를 피하자, 리턴.”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생각했는지 아론은 리턴을 사용해 자리를 피했고 다른 길드 원들도 뒤따라 왔다. 다들 뭔가 물어보려 했지만 아론의 제지에 막혀 방안으로 들어올 수조차 없었고 길드 집 밖에 모여든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지금 여기 없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어디로 나갔어요.”
“그렇다면 할 수 없죠. 혹시 1시간 안에 돌아오시거나 연락이 되면 입구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아론이 밖에 모여든 사람들을 돌려보내길 30여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갔는지 소란스럽던 바깥이 조용해졌다.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딜 가려고?”
“금방 돌아올 거야, 걱정하지 마.”
“그래……. 전해줄 말도 있으니까 빨리 와라.”
혹시 밖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이동했다. 목적지는 광장 분수대. 정확히는 그곳에서 만났던 정보 길드의 사람이었다.
“길드로 안내해라.”
“누구?”
“콜로니스트, 길드 장과 만나야겠으니 빨리 안내해.”
다행히 저번에 만났던 그를 다시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를 재촉해 단거리로 길드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 받은 길드 장이 기다리고 있었고 주위사람을 물린 뒤 얘기에 들어갔다.
“마법사 최강자 콜로니스트님께서 어쩐 일이신 가요?.”
왠지 비꼬는 말투였지만 지금 그런 것 따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사람을 찾아줬으면 합니다. 아이디를 모르니 힘들기는 하겠지만 얼굴을 묘사해 드리죠. 전 대륙을 뒤져서라도 찾으십시오.”
“허…… 언제나 어려운 의뢰만 하시는군요. 좋습니다, 몽타주만 확실하다면 최대한 인원을 풀어 찾도록 하죠. 단, 비용은 50골드. 특별한 위험요소가 있다거나 하면 추가될 수 있습니다.”
“일주일 내로 찾으면 10골드 더 드리죠. 최대한 빨리 찾아 주십시오, 그럼 이만. 리턴.”
50골드가 든 주머니를 꺼내놓고 리턴을 사용해 돌아왔다. 더 머물 이유 따윈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