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 전
“하지만…….”
“네게서 숲의 기운이 느껴지긴 해도 그걸 도구로 사용하는 걸 본 이상 허락할 수 없다. 그 뒤의 녀석은 말할 것도 없고.”
로드에게서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사용했던 바인드가 문제였나 보다. 결국 우물쭈물하는 린을 등 떠밀어 보내고 아론과 함께 마을로 돌아와야 했다
“아참, 그놈은?”
“그놈?”
“그 왜, 있잖아. 바스 뭐라고 하는…….”
“몰라, 생각이 있으면 돌아왔겠지.”
로드의 공격을 피했으니 지금쯤 마을 어딘가에 있거나 사냥 갔을 거라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려는데 어디선가 고막을 울리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너 이 X끼들!!”
“뭐야?”
돌아보자 바스가 기사 몇 명을 데리고 잔뜩 화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로세?
“이상한 데로 끌고 가서 날 아웃 시켜? 그깟 친목 길드 따위를 믿고 설쳤나본데, 이분들이 누군 줄 알아?!”
“글쎄다, 언젠가 본 것도 같은데, 꼭 알아야 하는 거냐?”
“그 유명한 철의 기사단 분들이시다!! 너흰 이제 죽었어!”
오호라, 재수 없는 엘시노의 똘마니 분들이셨군. 그쪽이야 ‘그때’이후로 우리와 계속 적대 관계를 유지했는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아론님도…… 개입되신 겁니까?”
나름대로 간부급이라 몇 번 만난 적 있는 한 기사가 물었다.
“뭐야, 아는 사이야? 그래도 봐줄 수 없어!!”
“쟨 뭘 믿고 떠들어대는 거야?”
“마스터의 사촌 동생인데 마스터께서 그 쪽 신세를 많이 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쩐지 돈이 넘쳐난다 했더니…… 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길드와 길드 사이의 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인지 그는 머뭇거리며 쉽게 답하지 못했다.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니들은 이제 척살 당하는 거야. 접을 때까지 죽여주마!!”
“돌아가서 마스터께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만한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그런데 고의는 아니셨겠죠?”
“난데없이 오우거 로드가 뜨는 바람에 우리도 위험했지. 저놈은 피한 것 같던데 왜 죽은 거야?”
“쓰러지는 나무에…… 깔렸답니다. 그런데 옆에 분은?”
인피면구 덕에 알아보지 못하고 나에 대해 물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 길드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나에게 척살을 내리려는 거겠지.
“이제 알아보겠나?”
“콜로니스트 님이셨군요.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본래 얼굴로 돌아오자 바로 알아차렸다. 다른 한 명이 나란 걸 알고 굳은 얼굴로 돌아가는 그의 뒤로 바스가 이런 저런 소리를 치며 따라갔다.
“무슨 일인 진 모르지만 니들 두고 봐!!”
자고로 약한 개가 짖는 법이니, 전혀 신경 쓰이진 않았다. 철의 기사단에서도 섣불리 우리에게 싸움을 걸지 못할 테니까.
“큭큭큭, 실컷 오우거 로드의 공격을 피하고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서 아웃 당해? 저놈 개그 맨 아냐?”
“그러게 말이다. 그러고도 찾아 온 걸 보면 낯짝이 꽤나 두꺼운데?”
공지
[앞으로 한 달 뒤, 힐름 오픈 1주년을 맞아 듀얼 토너먼트가 열립니다. 시합방식은 단판제로 포션 사용이 금지되며 같은 클래스끼리만 시합을 하고, 각 클래스 우승자들끼리 제비뽑기를 통해 붙게 됩니다. 그리고 마법사 분들께 희소식!! 앞으로 한 달 간 추가로 속성 선택을 하실 수 있게 됩니다. 그 동안 생각은 했는데 속성이 달라 사용하지 못하던 마법들을 만드실 수 있게 되겠죠? 게다가 한 달 간은 속성간의 반발력이 사라질 테니 열심히 수련하시면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으실 겁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세요∼.]
“이벤트다!”
이벤트를 알리는 공지와 함께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추가 속성 선택 가능에 속성 간 반발력이 사라져? 그럼 죽어라 키운 나는 뭐가 되는데? 다른 마법사들에게야 희소식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엿 먹으라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둠의 마법서 정체를 밝히더니……. 이러다 반발력 없애는 공식까지 밝히는 거 아니야?
“쳇…….”
“왜 그래? 이벤트라잖아.”
“아냐, 아무것도. 듀얼이라…… 또 수련해야 하는 건가?”
“수련? 레벨 업이 아니고?”
지금 레벨에서 한 달 동안 올려봐야 다음 클래스 마법을 배우는 91까진 무리다. 그럴 바엔 새로운 전술과 조합들을 찾아내는 게 승률을 높이는 방법이니 그때까지 마법사간의 전투를 익혀둬야겠다. 연습 상대가 되어 달라고 하면 시켜만 달라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까 상대가 없어서 못하는 불상사는 없겠지.
“지금 키워봤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진 못할 테고, 전술을 익히는 게 더 효과적이야. 길드 원들 모아서 특훈 시작이다!!”
즉시 접속해 있는 길드 원들을 모아 훈련에 들어갔다. 나와 드라이저, 베르와 아론, 거트 형과 세리가 팀을 이뤘는데 맞는 클래스가 없는 카엘은 같은 속도형 클래스인 세르와 붙었고, 레이는 린이 없는 관계로 내 팬클럽에 가서 훈련해야했다. 팬클럽에는 여자라 그런지 궁수가 많았는데 부탁하러 갔다가 두 시간 가량을 붙잡혀 있었다.
“하앗!!”
“블링크, 파이어 월, 매직 애로우!!”
지식 면에서는 나보다 조금 떨어지지만 레벨이 더 높은 드라이저는 충분한 상대가 되어 주고 있었다. 한참을 연습하는데 거트 형이 멈춰서며 표정이 굳어졌다
“누구 사고 친 사람?”
알 수 없는 물음에 어리둥절해 하자 거트 형이 풀어서 다시 얘기했다.
“길드 전 하자고 요청이 들어왔거든?”
“!!”
“아마 우리일 거야.”
나와 아론은 대답과 함께 오른손을 들었다. 결국 해보자는 건가, 엘시노.
“이유는 묻지 않겠다만…… 어떻게 할 거냐?”
“엘시노도 아직 마스터가 아니니까 동맹 길드의 도움을 받으면 승산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길드 전 걸어온 건 카브라는 곳인데. 길드 장 이름이 바스쿠아스?”
“에……?”
길드 장이 놈이라면 엘시노가 거절했다는 소린가? 하지만 학교 애들 레벨이 높아봐야 80도 안 될 테고, 귀가 있다면 우리 길드에 대해 들었을 텐데…….
“이상하지만…… 까짓 거 받아들여요. 그 정도는 린이 없어도 충분할 테니까.”
“아는 길든가 보네. 뭐, 실전 연습도 할 겸 괜찮겠지. 승낙.”
거트 형이 승낙하자 바로 귓말이 들어왔다. 약간의 의견 조율을 하는 듯, 한동안 얘기가 지속됐고 타협을 끝냈는지 우리에게 통보했다.
“시간은 게임 시간으로 두 시간 뒤, 장소는 근처 분지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고, 좀비 짓(죽은 사람이 다시 와서 전투에 참여하는 것)없이 정면 승부다.”
좀비 짓 없이, 그것도 정면? 그 쪽에서 지켜준다면 우리에겐 좋지만 실세로 지켜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이쪽도 나름의 방비를 해야겠군.
“숫자에서 밀릴 텐데 용병이라도 모아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길드 마스터 레벨이 75던데 뭐. 그리고 콜이 승산 없는 싸움을 하자고 할 리도 없잖아?”
길드 전 요청할 때 길드 마스터의 레벨도 공개되나보다. 귓말로라도 그런 걸 가르쳐 줄 리 없으니까. 75면 3렙이나 다운됐단 소린데……. 70대에는 검기가 없어서 강한 몹을 잡을 수도 없고 힘들 텐데, 안 됐군.
“빈틈!!”
비슷한 레벨이지만 로그인 덕분에 속도가 월등히 빨라 제대로 된 공격을 못 해보던 카엘이 기습을 함으로서 훈련이 시작됐다. 서로의 패턴을 익히고 공략법을 찾는데 열중하니 시간은 유수같이 흘러갔고 맞춰둔 알람 소리에 각자 마무리를 하며 훈련을 마쳤다.
“자, 오랜만에 우리 길드의 위상을 드높이고…… 상대에게 포션 값을 덤탱이 씌워보자!”
“오오오오!”
길드 전시 죽으면 레벨 다운은 되지 않고 경험치만 깎인다. 그 경험치는 나중에 승리한 팀에게 고루 분배되고 3번 이상 죽은 캐릭터는 자동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되며(억지로 참여하려면 PK를 해야한다.) 진 길드는 양측이 사용한 소비형 아이템의 값을 모두 물어야 한다. 그럼 승기를 잡고 엄청나게 아이템을 구입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걸 막기 위해 1번 죽을 때까지 상점 무료 이용은 1회만 적용된다. 무료 사용 가능한 사람의 수도 양측의 평원 인원수뿐이고.(동맹 참가 시 동맹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럼 아무리 사도 수가 적은 우리가 상대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안길 수 있겠느냐 묻는다면 당신은 바보다. 84레벨인 지금 내 ‘무한의 주머니’의 용량이 얼마나 될 거라 생각하는가? 무려 아론의 3배다!! 아론이 힘을 제일 적게 찍은 세리보다 2배도 넘는 무게를 들 수 있는 걸 생각하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하리라 믿는다. 게다가 ‘비싼’것들로만 채워 넣으면……. 비록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모하지 않은 아이템은 사라지면서 자동 환불되지만 신생 길드인 저쪽에, 아니 더불어 철의 기사단에까지 약간의 재정적 부담을 안길 수 있는 것이다.
“매스 텔레포트.”
“체력 회복 포션 계속 꺼내줘요. 제일 비싼 걸로.”
“난 마나 포션, 역시 비싼 걸로!!”
아이템 창 가득 포션을 챙긴 우리는 약속 장소인 근처 산으로 향했다. 이런 용도로 쓰라고 만든 것일까? 올라가는 내내 동물 몇 마리를 제외하곤 생명체를 찾을 수 없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득한 새의 노랫소리가 평화로움을 알리고 있었다.
“저들인가?”
한참을 올라가자 보이는 분지. 그 곳엔 우릴 기다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수가 많은데?
“드라이저.”
“네, 음흉한 자들이어 모습을 드러내라, 리빌!!”
갑작스레 나와 드라이저가 마법을 사용하자 상대는 당황했지만 스펠을 통해 탐지 마법이란 걸 알고 취했던 자세를 풀었다. 숨어 있는 자들은 없군.
“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시작은 이 동전이 떨어질 때로 하지.”
팅-.
거트 형이 1골드를 꺼내 튕겼고 이내 땅에 떨어졌다. 시작을 알리는 함성과 함께 몰려오는 기사들. 그들의 목적은 우리에 대한 공격도 있겠지만 줍지 않은 1골드의 취득에도 있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노린 것이기도 하고.
“아론, 레이. 궁수 킬!!”
“오케이.”
이쪽의 4배는 될법한 머릿수, 하지만 상대의 레벨이 낮다는 걸 알아서 일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을 합쳐도 트롤 한 마리보다 못 한 것 같았다.
“숫자가 많으면 그 만큼 불리한 점도 있지.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파이어…….”
“스트랭스, 스피드 업…….”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카엘님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아쵸 아쵸 아쵸쵸쵸……!!”
“넌 너무 말이 많아, 나처럼 조용히 처리해야지. 크로스 샷!!”
“전투 프리의 위력을 보여주마. 슈팅스타, 하아압!!”
숫자가 많은 만큼 웬만한 범위 공격은 피할 길이 없었다. 계속되는 파이어 볼과 프리스트의 몇 없는 공격 주문인 슈팅스타에 격투가, 기사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고 상쇄해야 할 마법사들도 온갖 보조마법이 다 걸린 세르와 카엘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궁수들은 아론과 레이에 의해 하나 둘 아웃됐고.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무참히 쓰러지는 아군을 보며 목청껏 외치는 바스, 궁수들의 처리를 끝낸 아론이 놈을 죽일지 턱짓으로 물어왔고 일단 살려두라는 사인을 보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지켜봐 주지.
“남은 소환수가 없어, 난 포기할래.”
“역시 라스트 길드에겐 무리인가…….”
점점 줄어가는 아군들을 보며 몇 몇 사람들은 마을로 귀환해버렸다. 이제 남은 인원은 열댓 명 정도, 전멸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파이어 월!!”
어떤 마법사가 시간을 끈답시고 파이어 월을 생성했지만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매직 애로우.”
나와 드라이저의 손에서 나간 매직 애로우들은 파이어 월을 거치며 불의 힘까지 획득했고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의 공격이라 상대편에서 두 명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디스펠.”
누군가 사용한 마법에 의해 파이어 월이 수그러들더니 소멸됐다. 불의 장벽이 걷히자 나타난 건 거울처럼 깨끗한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 그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철의 기사단 길드가 카브 길드의 동맹군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미안하게 됐군, 이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그리고 레벨도 한참 낮은 애들과 놀아봐야 웃음거리 밖에 더 되겠나?”
엘시노, 그가 끌고 온 인원은 무려 30여 명. 하나같이 검기 이상의 능력을 지닌 자들일 것이다. 말은 이러쿵저러쿵해도 결국 이 기회에 쓸어버리겠다는 소리.
“이런 비겁한…… 응?! 승낙!! 후후……. 지원군이 나선 건 그쪽뿐이 아닌 것 같군.”
“뭣이?!”
거트 형의 말에 철의 기사단 전원이 긴장하며 주위를 경계했지만 나타나기는커녕 찬바람만 매섭게 몰아칠 뿐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천하의 라스트 길드가 조금이라도 목숨을 연장시키려고 그런 허풍까지 떨다니, 추종자들이 보면 통곡할 일이군.”
지원 온 엘시노를 믿고 기가 살아난 바스, 철의 기사단 뒤에 숨어있는 주제에 말은 잘했다.
“오래 끌 것 없이 서두르지. 최대한 발악해 보도록.”
“망할…… 파이어 볼.”
“이런 어설픈 공격은 안 통한다는 걸 잘 알 텐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파이어 볼을 베어버리고 달려드는 엘시노, 그의 뒤로 30여명의 막강한 전력이 따르고 있었다.
“라이트닝 월.”
드라이저가 전격의 벽으로 상대를 저지하려했다. 철제 갑옷이니 쉽게 접근하진 못할 거라는 생각. 좋은 판단력이긴 했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해줘라, 상쇄!!”
일렬로 늘어서 검기를 휘두르는 적들, 검 주위에 둘러진 검기 때문에 데미지 따윈 받지 않았고 오히려 세워졌던 전격의 벽이 소멸해 버렸다.
“이런…….”
“이제 죽을 시간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엘시노가 달려들려는 순간 사방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너나 할 것 없이 당황해하며 주위를 살피자 머리 위에 동맹마크를 단 수십 명의 인원이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프리스트 조, 오빠에게 회복을!!”
길드 장인 피나란 여성이 외치자 엄청난 양의 힐링과 기타 보조 마법이 걸리며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소환 조, 바리케이드 설치.”
어느 새 우리의 앞과 양옆으로 다가와 늑대, 골렘, 놀 등을 소환해 내는 소환술사들. 저들이 아무리 고렙이라도 뚫으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마지막으로 전원 공격!! 오빠에게 칼을 겨눈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자!”
마나로 된 화살(90레벨 이상)은 없었지만 간간이 마나를 담은 화살(80이상)도 보였고, 일반 화살들 또한 무시 못 할 수와 속도로 쇄도했다.
“실드를 들어라!! 나머진 검막을!”
저번 오크 때의 교훈일까? 실드 파이터를 제법 많이 양성한 듯 30명중 7, 8명이 히터 실드를 꺼내 몸을 보호했다. 그들과는 달리 검막을 시전한 자들은 막고는 있지만 언제 마나가 동날지 모르기 때문에 암담한 표정을 지었고 엘시노의 얼굴도 굳어졌다.
“심판하는 하늘의…….”
“모두 몬스터에게 뛰어 들어라!! 공격은 하지 말고 방어에만 치중하도록!”
마법까지 날리려 하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몬스터를 향해 뛰어들 것을 명령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엘시노가 시범을 보이자 따라 뛰어든 기사들은 몬스터와 화살이라는 두 가지 적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날아오던 화살 중 상당수를 몬스터가 대신 막아줘서 조금씩이나마 전진이 가능했다.
“라이트닝 월, 매직 미사일.”
전격의 벽이 형성되고 이번엔 매직 미사일들이 전격의 힘을 얻었다. 이미 몬스터들이 바리케이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내 공격에 맞춰 줄었던 화살 수가 또 한 번 불어났고 적의 수를 조금씩 줄여 갔다.
“검강.”
티팅- 팅팅팅-!
갑자기 갑옷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화살 수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벽의 반대편에서 검강이 내 오른쪽 팔에 명중했다.
“크헉.”
“꺄악!! 힐!”
플레이어의 신체는 잘리지 않는다는 설정 덕분에 달랑거리며 붙어 있는 팔. 주위에 있던 모든 프리스트가 힐을 퍼부은 덕분에 금방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고, 예상치 못한 큰 타격에 비틀거리는 동안 아론이 반격을 가했다.
“이것들이, 검강!! 모두 소환 풀어.”
“아, 예. 역소환.”
아론이 뿌려댄 검강에 둘이나 쓰러졌지만 그 다음부터는 엘시노에 의해 모두 막혀버렸고 역소환을 풀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좀 전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저러니 화살이 안 통하지.”
살아남은 20여 명은 모두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있었다. 알지 모르겠지만 플레이트 메일은 힘과 민첩성에서 큰 손해를 보고 비싸기까지 했지만 일반 화살은 전혀 안 통하는 데다 갑옷에 마나를 덧씌우면 웬만한 마법과 검기에도 저항이 가능하니 능력치에 자신 있다면 애용해도 좋은 갑옷이다.
“아론이라고 했던가? 넌 내가 상대해 주지.”
“흥, 그런 거추장스러운 걸 입고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글쎄, 90이상은 추가 스탯치가 부여되는 걸 알 텐데? 잘 모르겠다면 시험해 보도록!!”
철의 기사단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엘시노가 살짝 도발하자 아론이 뛰쳐나갔다. 검강을 사용하는 유저들끼리의 전투, 그 여파만으로도 다른 이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다.
“젠장, 너희 화살은 안 통하니까 상대하지 말고 일단 피해!”
철의 기사단이 흩어져 팬클럽 사람들을 도륙하자 레이가 마나 샷(마나로 만든 화살, 90이상 사용가능)을 날리며 퇴각하라 외쳐댔다. 마나 샷이라면 웬만한 갑옷도 뚫을 수 있지만 플레이트 메일 자체가 워낙 두꺼웠고 마나까지 덧씌운 상태라 녀석으로서도 쉽게 수를 줄이지 못했다.
“나 잡아 봐라!!”
쿵!
세르는 트랩을 깔아둔 곳으로 상대를 유인해 레이가 죽일 수 있도록 틈을 만들었고, 카엘은 그들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충격을 주며 행동을 막았다.
“그렇게 비틀거려서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나? 움직이기 힘들다면 내가 편안하게 만들어 주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바스. 옆에 있는 두 명의 기사가 없었으면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놈이 까부는 꼴을 보자 상당히 거슬렸다.
“그딴 갑옷 좀 입은 게 대수냐, 묵사발을 만들어 주지.”
“갑옷이 두껍고 큰 만큼 소비되는 마나도 만만치 않겠지? 내 마나와 니들 마나, 누가 먼저 바닥을 보이는지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
내 옆을 지키던 거트 형과 베르가 나서서 그들을 상대했다. 갑자기 호위가 사라지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황해하는 바스, 도망가려 했지만 드라이저의 공격에 한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크흑……. 이제 좀 참을만하군. 역습을 시작해 볼까!! 내게 대항하는 자들에게 무한한 공포를, 매스 커스(mass curse).”
집단 저주, 어둠 속성의 8써클 마법으로 7써클의 저주 마법을 광범위화 시킨 마법이다. 저주는 특정 대상의 능력치중 하나를 랜덤하게, 또 랜덤한 수치를 깎는 것인데, 제작사 측에서 어둠의 마법서의 정체를 밝히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거금을 들여 샀지만 지금까지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는 쓰린 기억이…….
“헉.”
몇몇 기사들은 축 늘어졌고 또 다른 몇은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평소에 기사한텐 지혜 깎고, 마법사에게는 신앙을 깎는 등 어이없는 짓들을 해서 선전 포고 용으로 사용한 건데 이번엔 상당수의 사람들의 힘이나 민첩성을 건드린 듯, 무거운 플레이트 메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퇴각, 퇴각하라!!”
“어딜!!”
엘시노의 퇴각 명령에 스크롤을 찢어 도망가는 기사들. 스크롤 발동시간 동안 무방비 상태에 빠졌지만 두꺼운 플레이트 메일이 사상자를 줄여줬다.
“기다려라,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땐 확실히 죽여주지, 폭.”
그가 땅을 내려찍자 큰 폭발과 함께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아론이 놓치지 않으려 있는 마나를 다 짜내 검강을 날려봤지만 안타깝게도 명중시키진 못한 듯, 먼지가 걷힌 곳엔 아무도 없었다.
“놓친 건가.”
“그렇게 말했으니 다시 오겠지. 그보다…….”
적이 사라지자 하나 둘씩 모여드는 여성들. 일단 고맙다는 소리부터 해야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을 드리겠습니다.”
“꺄악, 날 봤어.”
“아냐, 나야!!”
“나라니까!”
딱히 누굴 본 것도 아니건만 순식간에 난리가 나 버렸다.
“크흠.”
“아…….”
우리 길드의 남자들이 몇 차례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조금 정리가 되었고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군요.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 주셨으면 합니다.”
“콜, 너 미쳤어? 한 명이 아쉬운 판국에…….”
놀란 건 팬클럽뿐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올 거라 예고까지 한 마당에 그들을 물리려하자 길드 원들은 기겁을 했고 그녀들 또한 그럴 수 없다며 버텼다
“그건 안돼요, 저흰 오빠를 지켜야 한다구요!!”
“보셨잖습니까? 화살이 통하지 않는 걸.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다시 올 때 플레이트 메일을 벗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성의는 고맙게 받겠지만 누군가가 저 때문에 죽는 건 보고 싶지 않군요.”
“오빠가 날 생각해 주다니, 아아…… 나 쓰러질 것 같아.”
그녀들 중 상당수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걔 중에 몇은 비틀거리는 시늉까지 했고. 이 무서울 정도의 반응에 질려 이마에 손을 얹자 대머리도 아니건만 머리가 안 보일 정도의 빛이 머리를 덮었다. 빛의 정체는 프리스트들의 회복 주문. 에휴……. 이들을 누가 말리랴?
“후우……. 아무튼 제 말에 따라주십시오.”
“그렇다면 80레벨을 넘긴 사람들은 남게 해주세요.”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를 댔으니 그들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죠. 그럼 다른 분들은 마을로 돌아가 상대의 동향을 살펴 주시겠습니까?”
“네에!!”
남을 수 없다는 소리에 시무룩해져 있던 이들은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자 앞 다투어 마을로 향했는데, 가는 곳도 각양각색, 그들이 있을 법한 마을로 조를 지어 흩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약간의 작전 지시를 하고 한 사내에게 귓속말을 보냄으로써 준비를 끝마쳤다.
[현무 길드가 카브 길드의 동맹군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대체 몇 개나 가능하게 한 거야?”
“동맹 가능은 신경을 안 써서 잘 모르겠는데, 미안.”
처음 길드 전을 신청할 때 동맹 가능과 불가능, 또 몇 개 길드까지 가능인지를 정할 수 있는데 거트 형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넘겨버린 것이다. 현무(단)라면 용병길드로 이름 날리고 있는 자들인데, 성격이 괴팍해서 그렇지 실력은 웬만한 대형 길드의 간부급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도 달라질건 없지.
“곧 오겠군. 그럼 나도 시작 해볼까? 하늘의 축복, 때로는 저주. 레인 폴.”
내 손에서 뻗어나간 빛이 하늘에 닿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맞춰 나타난 엄청난 수의 기사들. 대부분이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있었고, 특이하게 목, 가슴 등의 중요한 부분만 갖춰 입은 자들도 보였다. 말 그대로 부분‘만’, 다른 곳은 천 한 장도 걸치지 않았다. 복장부터 튀는 걸 보니 저들이 현무단이겠군.
“난 현무단장 오펀이다. 미안하지만 죽어라.”
오펀이라 밝힌 사내는 껄렁한 자세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에 맞춰 떨어지는 빗방울, 우리에겐 작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비? 음…… 젠장, 피해!!”
오펀은 비가 온다는 걸 알자마자 주위를 살핀 뒤 회피 명령을 내렸고, 엘시노는 그런 그들을 ‘원래 이상한 놈들이니까…….’라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현명한 건 현무단 쪽이었다. 설마 간파한 것일까?
“심판하는 하늘의 힘, 콜 라이트닝!!”
“무지한 자들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스펠 읊는 소리가 산 전체에 메아리쳤고 전후좌우, 심지어는 하늘에서까지 번개가 날아갔다.
“망할 자식들, 뭐가 화살 비야!!”
“난…… 죽어도 죽지 않아.”
현무단장과 병이라도 있는지 안색이 창백한 청년은 다른 현무단원들처럼 갑옷을 벗으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제 1탄이 나가고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이 현무단. 그들이 땅에 검과 비수 등을 꽂고 파이어 실드 스크롤을 쓰는 등 비에 맞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반해 철의 기사단은 망연자실 쳐다보다 노릇노릇하게 익어갈 뿐이었다.
“임기응변이 대단한 자들이군.”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사였다. 절망적인 상황에 재빠르게 대응해 위기를 모면하는 능력은 누가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두 번째 작전으로 간다!!”
내가 사인을 보내자 더 매지션 길드의 장인 파트리크가 작전 변경을 알렸다.
“지금이다, 한 놈이라도 더 죽여!!”
공격이 절반 이상 줄었다고는 해도 상당한 수의 번개가 내려치고 있는데 현무단은 주저 없이 달려들었다.
“모두 맞서지 말고 거리를 벌려라.”
“도망가는 거냐!”
“예, 도망가는 겁니다. 솔직히 정면으로 붙어선 이길 자신이 없군요. 아, 지금부턴 체온조절 잘하셔야할 겁니다.”
확실히 기세로 보나 뭐로 보나 철의 기사단과는 수준이 달랐다. 약간 시간을 끌다가 그들의 몸이 비에 흥건히 젖은 게 확인되자 또 한 번 스펠 읊는 소리가 산을 가득 메웠다.
“폐 속까지 얼려버리는 혹한의 추위, 블리자드(blizzard)!!”
원래가 추운 지형인 분지에서 비에 젖은 채 사방에서 매서운 눈보라까지 치자 에르도나에서 파는 한기보호 아이템을 사왔을 리 없는 그들의 몸엔 서리가 끼고, 조금씩 얼어붙더니 하나 둘씩 체온 저하로 인해 아웃돼갔다.
“난…… 죽어도…… 죽지않아…….”
창백한 안색의 청년을 끝으로 현무단 전원이 아웃. 체온 저하였기 때문에 경험치가 깎이는 페널티 조차 받지 않겠지만 상태이상으로 인한 죽음 특유의 후유증 때문에라도 쉽게 돌아오진 못하리라. 실제로 그들의 전멸 후 재공격은 없었다.
[라스트 길드가 카브 길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전쟁을 포기하고 말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둔 포션은 이미 사용한 상태. 철의 기사단이 도와준다면 모를까, 한동안은 재정난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현무단의 고용 비용 또한 만만치 않을 텐데 말이야…….
“와아아아!”
“콜로니스트님, 축하드립니다.”
“이게 다 동맹분들 덕분이죠.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승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각 마을에 가있던 팬클럽 회원들이 앞 다투어 날아왔다. 덕분에 난장판. 그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상당히 애먹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콜로니스트님.”
“예?”
“아까 사용하신 레인 폴이라는 마법도 직접 만드신 겁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역시 새롭고 뛰어난 마법을 연구하기 위한 길드라 그런지 처음 보는 마법에 대한호기심이 강했다.
“그건 퀘스트로 얻은 겁니다. 난이도가 물음표길래 클리어 해봤더니 달랑 마법서 하나 주더군요. 처음엔 전혀 쓸모없는 마법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난이도 물음표라……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비와 분지라는 지형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시다니, 다시 한 번 콜로니스트님의 머리에 감탄했습니다.”
“잔머리만 잘 돌아가는 거죠, 뭐.”
얘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더 매지션 길드는 퀘스트를 받기 위해 떠났고, 팬클럽은 ‘난 강한 여자가 좋아.’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수련하겠다며 떠났으니까. 여담이지만 프리스트를 키우던 유저들은 캐릭터를 삭제했다는 소문이…….
“우리도 다시 시작해야지?”
“이미 시작 됐어요, 바인드!!”
“나의 친우를 보호해다오, 플랜트 실드 아더.”
기습적으로 내 발을 묶은 드라이저는 잠시 여유부리다 내가 만든 식물의 보호막에 갇혀버렸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뜨거운 숨결, 브레스 오브 파이어. 컨트롤, 홀드.”
불꽃이 인페르노처럼 앞으로 뿜어져나가 드라이저를 덮고 있는 식물을 태우기 시작했다. 불이 붙은 실드는 내 의지에 따라 드라이저의 몸을 조여 버렸고, 녀석은 그대로 아웃됐다.
“우리도 시작이다!!”
드라이저의 죽음은 훈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