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스트
세르는 필요 물품을 말하고 인피면구를 사러 떠났다. 단검과 덫, 독 등 무겁지는 않지만 양이 많은 것들이라 내 무한의 주머니에 넣기로 하고 나섰지만 아이템 창에 무한의 주머니가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당황스런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고 살피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내 아이템 창 자체가 무한의 주머니로 교체된 것, 어떻게 보면 공간이 줄어든 셈이니 아깝긴 했지만 떨굴 일 없다는 이점이 있고 전체적인 공간도 크게 늘었으니 만족했다. 물어물어 로그 길드와 연금술사 길드를 찾아 물건을 사고 의뢰소로 가자 세르와 길드 원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자요, 얼굴에 가져가면 자동으로 사용되고 사용할 때마다 성향이 약간씩 깎인대요. 사냥을 조금만 하면 복구할 정도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요.”
“그래? 고마워, 잘 쓸게.”
인피면구 하나를 집어 얼굴에 대자 흡수되듯 달라붙었다. 약간 불편한 느낌. 하지만 시야를 가리거나 하진 않았고 이 느낌도 곧 익숙해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쓸만 한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저하고 콜 오빠뿐일 거예요. 오크 이벤트에서 명성을 얻었으니 대충 B클래스는 받을 테고, 레벨에는 맞지 않겠지만 퀘스트 중엔 경험치가 1.5배니까 레벨도 그럭저럭 오르겠죠. 몇 개 클리어하고 A클래스 받기 시작하면 레벨에 맞는 몬스터를 1.5배 경험치로 잡을 수 있어요!!”
이제 모두 레벨 60은 가뿐히 넘겨서 어지간한 보스 급을 무리해가며 잡아도 지금처럼 폭렙이 불가능하다. 드래곤 정도라면 모를까. 그러니 빨리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퀘스트가 최선인데, 아무리 이벤트에서 많은 명성치를 얻었어도 단번에 A클래스까지 받을 수는 없었고 세르의 예상처럼 B클래스 상급이 최고였다.
“그 많은 경쟁자를 제치면서 퀘스트만 깼는데도 B클래스 중급이 최곤데 오빠는 이벤트 한번으로 B클래스 상급이라니, 너무 불공평해요!!”
리자드 마스터 때 약간 올려두긴 했지만 한 번에 세르보다 높은 클래스의 의뢰를 받을 수 있게 되자 약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헤헷, 하지만 괜찮아요. 조만간 따라잡을 테니까. 전 레이 오빠랑 가고 싶은데…… 괜찮죠?”
세르가 찰싹 달라붙자 숫기 없는 레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레이가 저쪽 팀에 붙으니 팀이 쉽게 갈려졌다. 같은 궁수인 린이 우리 팀으로 오자 아론이 딸려왔고, 자연히 기사인 베르가 저쪽으로 가게 되자 세리도 따라갔다. 세리가 저쪽으로 가니 프리스트인 거트 형이 우리 쪽으로 왔고, 이쪽엔 내가 있으니 드라이저는 당연히 저쪽 팀. 이 얼마나 훌륭한 연쇄효과인가? 계획하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팀에 감탄하고 있을 때 세르가 먼저 퀘스트를 결정했다.
“전 이걸로 할래요, 오빠도 빨리 골라요.”
남은 의뢰 문서를 쭉 둘러보다 집어든 것은 B클래스 중급의 늑대 처치 퀘스트, 간단하게 시작해 보자는 의도였다
[늑대 처치 의뢰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확인 차원에서 떠오르는 메시지에 답하고 돌아서자 모두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뭐 잘못됐어?”
“그냥 늑대겠지?”
“응, 왜 그러는데?”
“숫자는?”
“50마리.”
“그나마 다행이군. 네놈은 꼭 골라도 그런 것만 고르냐?”
아론은 이유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계속 구박했다. 목적지인 크메르 산에 올라가면서 들은 이유인 즉 늑대는 열 종류가 있는데, 하나같이 상대하기가 까다롭다는 것. 우리가 잡으러 가는 보통 늑대는 일대일이라면 레벨 40대도(프리스트 제외) 잡을 수 있지만 몰려다니는 습성 때문에 고레벨도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실전 연습을 하려는 유저들이 간간이 괴롭혀 준다니 나 역시 연습 상대로 써먹을 생각이다.
“여기부터 조심해야 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거든.”
“알았어. 쉽게 접근 못하도록 횃불 들고 이동하자.”
오기 전에 사둔 횃불을 밝히고 산을 오르는 동안 늑대 울음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습격은 없었지만. 산 중턱쯤에 오르자 슬슬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눈이 모여들었고 우린 넓은 곳으로 가 장작을 놓고 모닥불을 만들었다. 자리를 잡자 동그랗게 돌며 포위망을 형성하는 늑대들. 더 가까워지기 전에 처리해야했다
“속, 연사.”
“파이어 애로우.”
다수의 적인데도 멀티 샷을 쓰지 않는 게 이상했지만 의문은 곧 풀렸다.
“끼잉.”
“뭐, 뭐야?”
“멍청아, 그 정도론 안 죽어!!”
파이어 애로우를 쓰고 나서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생각보다 늑대들의 속도가 빨라 맞추지 못 할 뻔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맞아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린이 쓰러진 늑대에게 화살을 날려 마무리했지만 난 쉽게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오빠, 피해요.”
린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수그린 몸 위로 지나가는 한 마리의 늑대. 재공격을 하려고 몸을 돌리던 중 아론의 검에 맞아 쓰러졌지만 그 속도는 대단한 것이었다.
“안식으로 인도하는 속박의 힘, 패럴라이즈.”
익히고 나서 처음으로 사용해 보는 어둠 속성의 마법. 대량의 마나가 빠져나갔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마법사로서는 피하기 힘든 늑대의 움직임을 단번에 정지시켜버렸으니까.
“이것도 버티나 볼까? 라이트닝 스피어.”
자신이 쓸 수 있는 써클보다 5써클 낮은 마법은 스펠이 없어도 쓸 수 있기에 여유를 가지고 실험을 해봤다. 결과는 성공. 급소가 아니라도 마나를 조금 더 실으면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문제는 속도지만.
“확실하게 맞추려면 한 번에 한 발씩만 쏴야 해요.”
여러 발을 사용하면 그 만큼 속도, 위력이 줄기 때문에 린도 아까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 같았다. 늑대를 다 잡았다는 증거로 쓰일 발톱을 줍고 있을 때 위쪽에서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적인가?
“사람?”
“어? 어??”
격투가로 보이는 유저 하나가 정신없이 도망쳐 내려가던 중 린과 부딪쳐 넘어졌다. 그 뒤에 따라오던 늑대들은 사람이 있자 쉽게 달려들지 못하고 주위를 돌며 에워쌌고, 쓰러진 격투가가 일어났다.
“누님, 무척 성숙하십니다.”
“너 이 자식, 뭐야?!”
짝!
린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던 녀석은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입을 놀렸고 결국 린에게 뺨을 맞았다. 아론이 죽일 듯이 달려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늑대 먹이로 만들어 주마!!”
아론은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리며 던져 버릴 듯한 자세를 취했다.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진짜로 던졌을지도……. 아무튼 그 행동이 겁을 줬는지 뻣뻣해진 상대를 보며 씩씩거리는 아론에게 우선순위를 정해줬다
“지금은 조여드는 늑대가 더 급해. 그리고 지금 던지면 너뿐 아니라 린도 옐로우 카드 먹는다.”
직접 PK를 하면 성향이 바로 ‘악’으로 변하지만 간접 PK를 할 경우에는 ‘선’ 수치가 반절로 줄게 된다. 그래서 일명 옐로우 카드로 불리는데, 두 번 옐로우 카드를 받는다고 성향이 악으로 바뀌진 않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바뀌어야 할 별명이라 생각한다.
“쳇, 하지만 저것들 처리하고 나서는 장담 못해.”
“그건 마음대로 하고, 일단 저것들 처리가 급선무다. 20마리는 가뿐하겠는데?”
“뭐야, 저것들 갑자기 왜 저래?”
포위하고 있던 늑대들이 우릴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점점 포위망을 좁히며 압박하다가 덮치려는 듯, 어지럽지도 않은지 속도를 더해가는 놈들을 보며 당황해 할 때 격투가 유저가 중얼거렸다.
“젠장, 이제 죽었다.”
“혹시 깨는 방법 알고 있어?”
“무슨 마법을 쓰면 된다고 한 것 같기는 한데 저거에 걸리고 살아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그 말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마법이라니, 파이어 월인가? 아니면 파이어 볼을 연속으로??
“곧 사정권인데 어떻게 좀 해봐요!!”
“넌 어차피 나한테 죽을 거니까 닥치고 있어!”
저걸 깨려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린이나 내가 공격을 해야 하는데, 늑대들은 힘없이 날리는 린의 화살에 맞아줄 만큼 마음이 넓지 못했다.
“이젠 죽었다.”
이미 몇 번 당해본 듯 격투가는 절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모두 나한테 붙어!!”
얄밉게도 제일 먼저 붙은 것은 격투가, 그 다음이 거트 형이었고 마지막으로 아론이 린과 함께 붙었다
“나를 둘러싼 어리석은 자들에게 절망을, 플레임 노바!!”
내 주위 50cm정도를 벗어난 곳에서부터 불꽃이 원형으로 퍼져나갔고 근접해있던 늑대들은 특유의 빠른 속도를 이용해 보지도 못한 채 죽어갔다.
“아우우우우∼.”
동족의 시체를 방패삼아 살아남은 몇 마리의 늑대는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인지 다른 동료를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울음을 토해내고 아론의 검에 생을 마감했다.
“역시 이게 답이었나. 어, 벌써 죽인 거야?”
“뭐야, 이놈 어디 갔어?”
내 옆에 붙어있던 격투가가 안 보여 성격 급한 아론이 벌써 죽인 건가하고 쳐다보자 아론도 당황해하며 녀석을 찾고 있었다.
“방금 일은 죄송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너 거기 안 서!!”
“힉, 리턴.”
아론이 대시까지 써가며 달려갔지만 리턴을 사용한 상대를 잡을 순 없었다.
“젠장, 아이디 알아내서 암살이라도 시키고 만다!!”
녀석이 열 받았을 때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조용히 기다렸다. 혼자서 화를 삭이거나 화풀이 대상이 되어 줄 상대가 오기를.
“오빠, 전 괜찮으니까 화 푸세요. 고의도 아니었고 어차피 게임이잖아요.”
“하지만…… 그래, 알았다.”
당사자인 린이 나섬으로서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물론 진짜로 풀렸을지는 모르겠지만.
“크륵…… 인간…… 크르릉…… 일족을 죽인 죄…… 피로써 갚아라.”
“저건 또 뭐야?”
“말하는 거 보니 보스 급, 운영자일 수도 있고.”
보스 급을 몇 번 봤더니 면역이 생겨버린 것일까? 운영자가 조종을 하는 것이든 아니든 보스 급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별 감흥이 없었다. 거트 형은 예외지만.
“저놈은 내 거다. 나머진 알아서 처리해 줘. 프로브케이션.”
“뭐, 그러지.”
이기든 지든 힘껏 싸울 상대가 나타났으니 이것으로 아론의 속도 풀릴 것이다. 아무래도 아론 혼자는 무리였기에 거트 형에게 아론의 보조에만 전념해 줄 것을 부탁하고 먼저 잔챙이들을 처리해 나갔다.
“속, 연사.”
“라이트닝 스피어.”
속도가 눈에 익자 싸움이 훨씬 편해졌다. 무리해서 몸을 움직일 필요 없이 움직임을 예측해 가며 싸우자 금방 수를 줄일 수 있었다. 웬만한 도둑이나 궁수 클래스의 속도를 능가하는 늑대들을 상대하다보니 속도 중심의 상대와의 싸움 요령이 저절로 익혀졌고 처음에 격투가 레벨도 조금 올릴까 마음도 정리가 됐다. 제대로 된 마법사의 전투를 한다면, 격투가 레벨 따윈 필요 없어!!
“공간의 틈으로, 블링크. 관통하는 심판의 창, 라이트닝 랜스.”
마지막 두 마리의 늑대가 꼬치처럼 전격의 창에 꽂혀 이승과의 작별을 고했다. 상황을 살피니 아론은 온몸에 자잘한 상처를 입은 채 보스 급 늑대와 혈투 중, 움직임이 빨라 거트 형의 회복 주문을 거의 받지 못 하고 있었다.
“제가 도울게요.”
“멈춰!! 나 혼자 상대한다. 끼어드는 건 내가 아웃된 뒤야!!”
아론의 외침에 린은 들었던 활을 천천히 내려야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 이대로 가면 아웃될 게 뻔했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다. 보이지 않게 도와야 하는데…….
“그렇지, 안식으로 인도하는 속박의 힘, 패럴라이즈.”
아무도 못 듣게 중얼거린 뒤 마비를 걸자 보스 급도 예외는 아닌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단 몇 초뿐인 마비지만 그걸로 충분할 테지.
“죽어, 죽어, 죽어!”
일격에 끝내지 않고 온몸을 난도질하는 녀석의 잔인한 모습에 린은 눈을 돌렸고 안 되겠다 싶어 말리기로 했다.
“파이어 볼.”
내 의지에 따라 생성된 변형 파이어 볼은 아론이 낸 상처를 비집고 들어가 놈의 내부에서 폭발했다. 놈의 몸 자체가 워낙 컸던지라 상체부분은 남겼지만 하체 부분은 조그만 고깃덩이로만 존재했고 자신의 먹잇감을 가로챘다 여긴 아론은 내게 살기를 뿌리며 달려왔다.
“오랜만에 병이 도진 건가? 라이트닝 스피어.”
“검기.”
방금 전 보스를 잡은 것으로 80레벨에 도달했는지 검기를 생성해 마법을 갈라버리는 아론. 하지만 버서커와 다름없는 상대에게 질 생각 따윈 없었다.
“디그, 워터 볼, 바인드.”
아론은 디그로 중심을 잃자 재빨리 다른 발로 중심을 잡았고 앞으로 쏠린 몸을 향해 날아오는 워터 볼을 가볍게 갈라버렸지만 양옆에서 뻗어오는 줄기들은 피하지 못했다.
“이까짓 거!!”
“아쿠아.”
팔, 다리를 양옆으로 잡아끄는 나무줄기들을 힘으로 끊어버리려는 아론에게 물을 끼얹었다.
“정신 차려!! 예전처럼 돌아가려고 이래?!”
“……미안하다, 먼저 돌아갈게. 리턴.”
다행히 정신을 차렸는지 리턴을 사용해 돌아가는 아론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쉴 때 거트 형과 린이 다가왔다.
“오빠…….”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형, 아이템 수거 좀 해줄래요?”
“나 혼자? ……알았다.”
분위기가 약간 심각한 것을 느낀 거트 형이 자리를 피해주고 나서도 잠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솔직히 아론의 마음처럼 네가 아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녀석도 알고 있을 테고.”
“아니에요, 아론 오빤…….”
“오빠, 동생이 아니라 이성으로써 좋아하는 것. 사랑이란 감정을 말하는 거야.”
“…….”
사랑이란 단어를 들먹이자 린은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녀석, 매일 웃고 있지만 어렸을 때 새엄마란 인간에게 학대를 당했었다. 온몸에 상처와 멍이 사라지는 날이 없었다더군.”
“그런…….”
“그냥 듣기만 해,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알았을 땐 이미 새엄마란 사람의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녀석의 아버진 차마 이혼할 수 없었지. 그래서 녀석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도 그리 오래 사시진 못하셨어. 그 다음부턴 혼자 살게 됐는데 어릴 적 일 때문일까? 한번 화를 내면 자신도 주체할 수 없게 되는 거야. 학교 주변 깡패를 반 죽여 놓은 적도 있었지. 아무튼 그걸 알고 한동안 방황도 했지만 억제해 보려고 정신과도 다니고 정신 수양에 좋다는 여러 무술 도장 등을 다녀서 요즘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쉽게 경험하고 몬스터라지만 생명체를 벤다는 게 너무 자극적인 일이었던 가봐. 어쩌면 게임을 그만두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렇다고 너한테 동정을 하라거나 억지로 사귀어 달라는 말은 아니야. 아니, 그런 마음을 가지고 본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그냥 지금처럼만, 방금 전 일이 없었던 것처럼만 지내 줘, 부탁할게.”
마지막 말과 함께 난 무릎을 꿇었다. 린은 이미 녀석에게 소중한 사람 중 하나니까…….
“알았어요, 오빠. 그만 일어나세요.”
“고맙다.”
“네, 그런데…….”
“콜, 다 주웠다. 퀘스트 클리어 할 정도는 되겠어.”
아이템 수거가 끝났음을 알리는 거트 형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럼 돌아가자, 아론이 기다리겠다. 리턴!!”
마을로 돌아가 의뢰소로 가자 아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먹자 지존인 놈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나이를 먹었더니 몸이 안 따라줘서 그런다, 됐냐?”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은 뒤 아론은 린에게 다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 정신과 치료를 받는 정신병자다. 한번 화를 내면 감정을 주체 못하거든. 이상하지? 이제 날 모른 척해도 탓하지 않을 게. 안 좋은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오빠. 세상에 화 안내는 사람은 없잖아요? 저도 뭐 먹을 때 누가 뺏어 먹으면 화나는 걸요.”
그럼…… 뺏어먹은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건가? 까짓 것 한번쯤은 나쁜 놈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제야 늑대 처리하고 오는 거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레이였다. 녀석들은 이미 맡은 퀘스트를 처리하고 두 번째 퀘스트까지 해결했는지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었고, 모습을 보니 레이는 세르와 꽤 친해진 듯했다.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너희는 뭐뭐 깼는데?”
“늑대하고 박쥐.”
“늑대?”
분명 우린 먼저 출발했고 저들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먼저 퀘스트를 클리어 할 수 있던 걸까? 의문에 찬 눈동자로 바라보자 레이가 알아채고 말해줬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부담스럽다. 늑대는 한곳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니까 먼저 깼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너흰 어디로 갔는데?”
“크메르 산.”
“니들 미쳤냐? 거긴 보스 급도 있고 늑대들이 연합공격도 하는 곳인데 왜 거길 가!! 잠깐, 혹시 이렇게 늦은 것도…….”
보스 급의 출현과 늑대들의 연합 공격은 그곳만 그런 거였어? 젠장, 무식이 죄라고 괜히 사서 고생한 셈이군.
“덤비길래 잡았지.”
“이 치사한 자식들, 니들끼리만 렙업하냐?!”
“아이템은요? 늑대라 무기나 방어구류는 안 줬겠지만 뭐 특별한 건 없어요??”
“글쎄, 아이템 수거는 거트 형한테 맡겨서 잘 모르겠는데.”
모두의 시선이 거트 형에게로 쏠리자 형은 갑작스런 시선 집중에 거북스러운지 기침을 몇 번하고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별건 없어. 퀘스트 아이템인 늑대의 발톱하고 보스 급이 준 늑대의 이빨.”
“늑대의 이빨? 처음 듣는 아이템인데 보스 급이 준거니까 좋은 거겠지 뭐.”
뭐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길드 집에 놓아두기로 하고 무한의 주머니에 챙겨두었다. 그리고 퀘스트 클리어. 약간의 보수와 함께 경험치가 들어왔고, 울프 킹을 처리했다는 명목으로 추가 명성치가 들어왔다. 다음 퀘스트를 찾기 위해 의뢰 문서를 살피고 있을 때 학원에 가야한다며 베르와 세리, 드라이저가 접속을 끊었고 베르의 친구라는 한 격투가 유저가 길드 가입을 위해 찾아왔다.
“저기, 베르가 이리로 오면 될 거래서 왔는데…….”
“아, 네가 베르 친구구나. 아이디가 카엘리안이라고 했던가?”
“넵!!”
“얘들아, 인사해라. 이쪽은 카엘리안, 베르 친구인데 오늘부터 길드 식구가 될 거니까 친하게 지내라.”
베르가 우리 길드인 것을 알고 가입시켜달라 사정사정한다던 친구가 이 녀석인가 보다. 그런데 어째 낯이 익다?
“카엘이라고 부르면 되겠지? 인사해라, 이쪽부터 colonist, 아론, 글로린, 큐베레이, 나이세르. 그리고 난 길드 장인 거트루드. 말이 길드 장이지 실세는 얘들이니까 알아서 잘 모셔.”
“네, 안녕 하…….”
“너 잘 만났다, 감히 도망을 쳐?!”
그랬다. 녀석이 바로 조금 전 크메르 산에서 리턴으로 도망간 격투가인 것이다. 아론이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한 기세를 보이자 린이 말렸고, 아론은 녀석의 가입을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찬성으로 돌아섰고 거트 형이 가입을 위해 길드 집으로 데려갔다.
“무슨 속셈이야? 갑자기 용서한 것은 아닐 테고.”
“큭큭……. 길드 원끼리는 죽여도 페널티가 없다지 아마?”
“너 설마…….”
“오해하지 말라고. 난 녀석의 실력 향상에 기여하고 싶을 뿐이니까. 물론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을 통해서 말이지.”
결국 길드 가입에 찬성한 것도 합법적인 PK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아론의 무서운 음모를 모르는 녀석의 명복을 빌어준 뒤 다음 퀘스트를 찾았다. 사람 수가 줄어드니 마땅한 게 없군.
“이거 어때요? 물건 운송해 주는 거긴 하지만 가는 길에 잡는 모든 몬스터가 경험치 1.5배인데. 거리가 멀긴 해도 정 안 되면 텔레포트로 갔다 오면 되니까 실패할 염려도 없구요.”
“가는 동안 잡는 모든 몬스터가 1.5배라면 그거 받고 다른 곳에서 레벨 올리다가 시간 맞춰 전해주면 되겠네?”
“그건 아니에요. 일정한 길이 제시되고 그 안에서만 적용되거든요. 문제는 난이도인데…….”
세르가 받을 수 있다면 높아봐야 A클래스가 되지 못 할 것이었다. 그런데 난이도가 문제라니?
“난이도가 어때서?”
“난이도가 물음표에요. 가끔 있는 일인데 E급이 될 수도 있고 SS가 될 수도 있죠. 전자면 다행이지만 후자면 좀 곤란한데…….”
“일단 수락해, 여차하면 텔레포트를 쓰면 되니까.”
“그래도…….”
세르가 망설이자 그냥 내가 문서를 들고 수락해 버렸다. 사인을 한 문서를 보자 눈에 들어온 조그만 글씨, 그것은 내 몸을 경직 시켰다.
[직접적인 텔레포트 사용 불가]
“다음 퀘스트는 골랐어? 오는 길에 침대랑 격투가용 더미 주문했더니 조금 늦었네.”
“그럼 길드 가입시킨 거야?”
“그래, 이제 같은 길드 식구니까 아까 일은 잊고 잘 지내.”
“명복을 빌어주마.”
카엘은 갑자기 손을 꼭 잡고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어리둥절해 했지만 곧 그 심오한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카엘이라고 했던가? 앞으로 잘 지내자는 의미에서 대련 한번 하자. 좋지? 그럼 나가자고.”
“예? 아, 아니 전 별로…….”
카엘의 말은 철저히 무시 됐고 결국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아론에게 질질 끌려갔다.
“퀘스트는…… 좀 미뤄야 겠군.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시간은 많으니까.”
목적지는 사막도시 슈호프. 가장 가까운 곳으로 텔레포트 한 다음 걸어가면 두세 번은 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학원간 다른 애들도 합류시켜야 할 테니 괜찮겠지.
“으음…….”
헬멧을 벗자 어지러움이 일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다가간 곳은 컴퓨터 앞. 습관처럼 작동시키고 메일을 확인하자 글을 안 올리는 것에 대한 항의와 독촉의 메일이 쌓여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그 끝에 내린 결론은 연재 중단이었다.
남들은 철모를 때의 풋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사랑이란 감정을 처음 느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생각해보면 이렇다 할 추억도, 정식으로 사귄 적도 없었고 그저 매일 장난치며 짓던 하얀 미소에 내가 물들어 버렸을 뿐인데, 그 모습이 뇌리에, 가슴에 박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침입을 막고 있다.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기쁨에 새벽같이 일어나던 1년이 지나고 졸업이 다가왔지만 난 내 소심함, 용기 없음을 탓하며 돌아설 뿐, 고백조차 하지 못했다. 그 후부터인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좋아진 것이……. 마음속으로 자학하며 멍하니 3년쯤을 보냈을 때 주위에 친구는 거의 없었다. 소위 말하는 아웃사이더, 왕따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별 감흥은 없었고 그러다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알게 됐다. 1년 전부터 사귀는 남자친구와 잘 지내고 있다는……. 처음에는 사진으로나마 그 미소를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며 인터넷으로 겨우겨우 찾아내 봤다. 처음에는…….
그러나 역시 나도 욕심 많은 인간이었고 우연인척 말을 걸며 얘기를 나누고 결국 어설픈 고백까지 해버렸다. 결과는 당연한 걸지 모르지만 차였다. 그것뿐이면 다행이겠지만 그 후로 내가 말을 걸때마다 피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 그것은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위로를 받고 싶어도 주위에는 위로해 줄 친구가 없었고 마침내 찾아낸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가 판타지 소설인 것이다. 다행히 집중력이 높았던 나는 쉽게 빠져들 수 있었고 수백 권을 읽으며 쌓인 지식을 바탕으로 나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갔다. 그런 글쓰기를 이젠 멈추려는 것이다. 또 다른 세상인 힐름이라는 탈출구가 생겼으니까. 아, 그리고 내가 먼저 그녀에게 연락을 끊었다. 부담주거나 괴롭히긴 싫으니까.
“후우…….”
한숨과 함께 3년을 머리 쥐어 짜가며 쓰던 글의 게시판에 연재 중단을 알리는 공지가 떴다. 아쉬움과 씁쓸함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지만 깊은 한숨과 함께 날려버리려 애썼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겐 그것이 최선이니까. 그래도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이 떠나질 않아 침대에 벌렁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야, 일어나.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자는 거냐.”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오랜만의 단잠이 깨버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확인한 얼굴은 아론, 아니 현실이니까 태진이었다.
“몇 신데 호들갑이야.”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누가 메테오 안 쏴주나 기다리고 있거든? 빨리 일어나. 퀘스트 깨야할 것 아니야.”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게임이 벌써 사람하나 버려 논 듯싶다. 태양은 가스로 만들어져 있어서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된다고 가정하면?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말라죽을 것이다. 흠흠, 아무튼 퀘스트 때문에 온 것 같은데…….
“결론은 퀘스트 깨야하니까 일어나서 접속해라, 이거냐?”
“응.”
너무도 당연하게 말하는 녀석, 어찌 생각하면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알았다. 지금 접속하지. 너도 빨리 들어와라.”
접속을 위해 바람처럼 달려가는 태진을 배웅하고 천천히 헬멧을 썼다. 퀘스트를 내가 받았으니 모두 기다리고 있겠군. 좀 미안한데?
“접속.”
접속을 끊었던 의뢰소에 나타나자 뒤에서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길드 원들일 거라 생각하며 돌아본 곳엔 웬 낯선 여성이 서있었고, 방심한 틈을 타 와락 껴안더니 얼굴을 가리고 도망쳐버렸다.
“꺄악, 해냈다!!”
“뭐, 뭐지?”
문을 나서기도 전, 앞으로 꼬꾸라지는 여성. 그녀의 등엔 시퍼런 비수가 꽂혀있었다.
“오빠한테 꼬리치는 것들은 다 죽을 줄 알아!”
그 말을 끝으로 비수를 던진 여인은 금세 달려온 경비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쓰러지는 그녀의 머리 위로 보이는 동맹마크……. 내 팬클럽의 멤버였던 것이다
“설마 나…… 감시당하고 있는 거?”
서슴없이 마을 안에서 PK하는 모습을 보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황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몇 명의 여성들, 그녀들의 머리 위엔 하나같이 동맹마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스토킹 같잖아?! 리턴!!”
길드 집으로 오자마자 창문 밖부터 살폈다. 역시나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동맹 마크들. 난 감시당하고 있던 것이다. 잠깐, 인피면구를 사용했었는데?
“한번 로그아웃하고 나면 사라지는 거였나?”
거울 앞에 서자 인피면구를 쓰기 전 모습인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포션보다 인피면구를 먼저 챙겨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아론 : 노드 마을로 와. 계산해 보니까 거기가 슈호프랑 제일 가깝다. 사막이니까 준비할 것도 많네, 빨리 와서 좀 거들어.]
[colonist : 그래, 나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그녀들이 무섭게 느껴졌으니까. 재빨리 창문과 먼 곳으로 가서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드라이저의 로브를 하나 꺼내 입었다.
“저기요.”
“네? 왜, 왜 그러시죠.”
가슴 졸이며 밖으로 나가 골목으로 들어서려 할 때 한 여자가 부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저 집에서 나오시는 걸 보니 라스트 길드 원 같은데, 처음 보는 분이네요?”
“아, 그게요. 그러니까…… 제가 며칠간 접속을 못했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저흰 colonist오빠 팬클럽이에요. 마크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쪽 길드와는 동맹이구요. 혹시 안에서 콜 오빠 못 보셨어요?”
“지금 집에서 정비 중이에요. 음, 그러니까 크메르 산에 사냥 갈 거라는 것 같던데…….”
“정말요?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얘들아, 오빠 사냥 가신데!!”
“진짜? 멋진 사진 찍을 수 있는 기회잖아!!”
순식간에 모여들어 정보를 공유하고 쫓아갈 준비를 하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해 텔레포트를 하러갔다. 에휴……. 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거지?
“왜 이렇게 늦었어?”
“말도 마라. 집 주위에 그 팬클럽이라는 여자들이 쫙 깔려서 안 들키고 나오느라 혼났다. 아, 글쎄…….”
한 동안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자 아론도 고개를 끄덕이며 애도를 표했다. 카엘과 드라이저, 거트 형은 부러워했지만…….
“헙!! 콜, 너…… 스타에 이어서 교주 노릇까지 해야겠는데?”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소름부터 돋기 시작했다. 온몸을 엄습해오는 불안한 기운, 그 정체는…….
“이번엔 마법사로 이뤄진 길드인데, 동맹 맺거나 널 명예 길드 장으로 세우고 싶대. 아무래도 받아 들여야겠지? 그럼, 승낙.”
팬클럽 하나로도 이 고생인데 추종자까지 생겼으니……. 앞으로 고생문이 훤했다. 현실 도피 겸 나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아론이 나를 들쳐 메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낙타를 파는 사육장.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질 때 린의 설명이 들려왔다.
“우리가 가려는 곳이 사막인 만큼 물이랑 낙타가 필수에요. 음식을 꼭 먹어야 하는 것은 아직 패치가 안 됐지만 사막에서 물이 없으면 능력치 하락과 함께 HP, MP가 지속적으로 감소한대요.”
“잠깐, 낙타가 있어도 우린 라이딩 스킬이 없잖아?”
“돈이란 게 좋긴 좋더구나.”
자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 갑자기 돈 예찬론을 펼치는 녀석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안장?”
“그래, 비싸긴 하지만 필요 라이딩 스킬을 줄여주지. 그래봐야 우리한테는 그리 큰돈도 아니고. 그러니까 스킬을 조금만 올리면 된다, 이 말씀!!”
“특정 직업 스킬도 아닌데 올려두면 나중에 써먹을 데가 있겠지. 그런데 처음에는 어떻게 올리는 거야?”
“그거야 별수 있나?”
순간 한기를 머금은 아론의 손이 내 허리를 감아왔다. 그리곤…… 낙타를 향해 냅다 던져버린 것이다!! 약간이라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라이딩 스킬을 올리기 위해 무려 3시간을 고생했고, 나중에 알아보니 그 정도는 나귀 타고 1시간이면 충분히 올린단다.
“물병은 콜 오빠의 무한의 주머니에 꽉 채우기로 하고……. 복장도 바꿔야 할 것 같은데요?”
“하긴, 사막 사람들이 괜히 그런 복장을 하고 다니는 게 아닐 테니까.”
옷에 어떤 이점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모두 옷을 갈아입었는데, 이국적인 복장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실용적인 것 같아 만족하며 길을 떠났다. 그리고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실수를 인정해야했다.
“야, 우리 경험치 때문에 퀘스트 하는 거 아니었냐? 왜 이렇게 썰렁해.”
“그래, 지루해 죽겠다.”
레이가 투덜거리자 아론이 맞장구 쳤다. 다른 애들도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차마 표현을 못하는 것 같았고. 가는 길에 잡는 모든 몬스터에게 1.5배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기에 얼씨구나 하고 받았는데 이런 복병이 숨어 있을 줄이야…….
“이미 시작한 거 어쩔 수 없잖아요. 포기했다가 명성치 많이 깎이기라도 하면 회복도 어렵구요.”
“맞아요, 여자들도 가만히 있는데 남자들이 투덜거리기나 하고…….”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녀석들에게 여자 애들이 한 마디 하자 금세 조용해 졌다. 아아, 여자에 약한 것이 남자라 했던가…….
“어? 저 선인장은 조금 크네?”
“그러네요, 지금까지 것들보단 훨씬 큰데요?”
저 앞에 어린아이 키만 한 선인장이 버티고 있었다. 여자 애들이 신기해하자 서로 선물하겠다며 달려 나가는 아론, 레이, 베르에게 남은 남자들은 부러움 섞인 악담을 퍼부었다.
“확 넘어져버려라.”
“개미지옥에나 빠져라.”
“그것보단 저 선인장이 넘어지면서 가시에 찔리는 거야. 저번에 작은 선인장을 깔고 앉았는데 어찌나 가시가 많던지, 빼는 데만도 시간 엄청 걸렸지 아마.”
셋은 일단 다가가긴 했으나 어떻게 운반해야 할지, 어떻게 캐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눈을 뜨는 선인장. 뭐? 눈을 떠?
“피해!”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선인장이 공격한 것은 레이, 다행히 궁수인 덕분에 특유의 민첩성으로 피했지만 내뿜는 가시는 전부 피하지 못했다.
“파이어 애로우, 모두 이쪽으로 와!”
셋이 다급히 뛰어오자 나와 드라이저가 실드를 형성했다. 거트 형과 세리는 레이를 치료해야하니까.
“가시가 너무 많이 박혔어. 다 빼기 전에는 치료가 불가능 할 것 같은데? 다행히 독은 안 묻어있고.”
“그보다 저건 뭐야?!”
“사보텐더……. 제길, 이 게임 이것저것 짬뽕 시켜 놨잖아!!”
계속 가시를 내뿜으며 실드를 두드리는 선인장 괴물은 일본 모 게임에 나오던 사보텐더가 확실했다. 저 달리는 듯한 자세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
“가시가 작아서 지금 다 빼긴 무린 것 같다, 미안해.”
“괜찮아, 너 없어도 충분해. 세르, 지금 트랩 깔 수 있지?”
“예? 물론이죠.”
“그럼 안쪽 실드 하나 풀 테니까 그 사이에 설치해. 될 수 있으면 스턴 효과나 폭발하는 걸로.”
내가 유지하던 실드 하나를 풀자 세르가 재빨리 달려가 능숙한 솜씨로 트랩을 설치하고 돌아왔다. 세르가 돌아오자마자 다시 쳐진 실드. 그 안에선 총 공격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셋 세면 드라이저는 실드를 풀고 놈이 트랩을 밟으면 총 공격이다. 하나, 둘…… 셋!!”
“걸렸다. 윈드 볼!!”
트랩에 걸려 비틀거리면서도 발악적으로 뿌리는 가시를 막아내자 놈의 몸은 화살과 마법, 비도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드라이저의 마법과 린의 화살, 세르의 비도에 이어 달려 나간 베르가 옆구리를 베자 아론은 검기를 끌어 올려 사보텐더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휴……. 이 정도면 A클래스쯤 되려나?”
“까다로운 상대란 건 확실해. 트랩이 아니었다면 놈의 가시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거야. 고맙다, 세르.”
“뭘요, 제 역할을 했을 뿐인데.”
“콜, 잡담할 시간 있으면 이리 와서 가시 뽑는 거나 도와!!”
레이를 바라보자 아까는 잘 몰랐지만 엄청나게 작고 많은 가시들이 박혀있었다. 하긴, 게임에서 사보텐더가 한 번에 내뿜는 가시의 개수가 1000개였지. 고생 좀 하겠군.
“으……. 아직도 쓰리네.”
가시를 다 뽑고 힐로 회복시켰음에도 레이는 계속 엄살을 부렸다. 그런 놈이 선인장만 보면 화살을 갈겨대는 게 말이 돼?
“게임에서 상처는 치료하면 통증이 전혀 없는 거 모두 아는데 엄살 좀 그만 부려라, 추하다.”
“크, 크흠.”
한마디 톡 쏘아주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딴청 피우는 레이, 그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 뭐야?”
두두두두두-.
갑작스런 땅의 울림. 알 수 없는 이상 현상에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고 곧 진동도 멈추었다.
“단순한 지진이었나?”
“아냐, 저길 봐!!”
“커헛.”
지렁이처럼 단순하게 생겼으면서도 커다란 몸집, 못 집어먹을 게 없을 정도로 크고 넓은 입. 사막의 청소부라는 샌드 웜이 분명했다.
“움직이지 마!! 놈은 눈이 퇴화돼서 움직임에 반응한다.”
꿀꺽!
샌드 웜. 아무리 우리가 보스 급을 몇 번 잡아봤어도 놈에겐 상대가 되질 않는다. 지상에서라면 승산이 있지만 모래 속에서부터 튀어나오는 공격은 모여 있는 여럿을 한 번에 아웃시킬 수도 있는 무서운 것이니까.
“언제까지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거야?”
“그냥 갈 기미가 안 보이는데 그냥 총공격하면 안 될까?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보스 급을 몇 번 잡아봐서일까? 몬스터를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생겨버렸다. 어떤 몬스터든 협공하면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자만심은 모두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고, 난 그걸 눌러줄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샌드 웜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땅속으로 숨으면 어떻게 찾을 거고 땅속에서 공격하면 어떻게 피할 건데?! 그리고 뭐하자는 짓인진 모르지만 마법 방어력이 장난이 아니라 웬만한 마법에는 콧방귀도 안 뀐다고!!”
“그, 그럼 레비테이션으로 공중에 띄우고 그때 공격하면…….”
레이가 아주 조그만 소리로 의견을 내놓았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레비테이션의 마나 소모는 중량과 인원수에 비례하는데 저 정도 크기면 준비 자세 잡을 때 떨어뜨릴 거다.”
“…….”
쏘아붙이는 내 말에 일행 전원 할 말을 잊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내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입안으로 마법을 쏘아 넣으면 어떨까, 숨지 못하게 땅을 얼리면 어떨까, 하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후우…….”
투엣.
낙타의 움직임에 샌드 웜이 반응해 버렸다. 그 작은 소리에도 주저 없이 달려든 놈은 린이 타고 있던 낙타를 삼켜버렸고 놀라 제어가 안 되는 다른 낙타들을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젠장, 낙타는 모두 버리고 일단 피해.”
커다란 몸집답게 놈이 낙타를 모두 삼키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총 9마리의 낙타를 먹은 녀석은 트림처럼 몇 개의 안장을 뱉어내고는 배가 찼는지 몸을 돌려 사라졌다.
“간 건가?”
“그런 것 같은데, 다행이다.”
“다행은 무슨……. 이제 우린 걸어가야 한다고! 아직 반도 못 왔는데…….”
물이야 내 아이템 창에 넉넉히 들어 있지만 타고 갈 낙타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다시 리턴으로 돌아가서 타고 오자니 그 샌드 웜이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고……. 결국 걷기로 결정, 걷기 힘든 만큼 상당한 체력을 갉아먹는 사막의 모래 위를 걸으며 슈호프로 향했다.
“아아……. 내 장담컨대 다시는 사막 안 온다.”
“저도요, 빨리 퀘스트만 마치고 로그아웃할래요.”
“게임하면서 이렇게 힘들고 피곤한 적은 처음이야.”
생각보다 걸어서 사막을 횡단하는 건 쉽지 않았다. 넉넉하다 생각한 물도 도중에 다 떨어지고 개미지옥에 빠져 플라이 마법으로 겨우 빠져나오는 등 사고의 연속이었으니까.
“혹시 의뢰를 받고 오신 분들이 아니오?”
“아, 맞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갑자기 나타난 할아버지가 우릴 이끈 곳은 자신의 집이었다. 그리고 시작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얼마 전부터 우물물이 말라버려 물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가져온 마법서를 익히고 비를 내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 가져왔던 책이 레인 폴(rain fall)이라는 이름의 마법서로 변했고, 나야 마법을 익히면 이득이므로 주저 없이 익혔다.
“비, 비다. 비!”
레인 폴을 발동시키자 한동안 물을 못 마셔 몰골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시대를 생각해봤을 때 산성비는 안 내리겠지? 하, 하…….
“고맙네, 고마우이…….”
“저흰 맡을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퀘스트를 마무리하면서 느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그에게 물었다. 만약 마법사가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 거냐는. 실제로 처음 그 퀘스트를 발견한 사람은 세르이지 않은가?
“아, 그렇게 되면 저 우물을 조사해 달라고 하려했었지. 어느 날 갑자기 나오지 않았으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안에 어떤 게 있을지도 모르고 오크 같은 몬스터만 나와도 마을 청년들론 무리고 말일세.”
“그럼 저희가 조사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마법으로 비를 내렸지만 우물이 계속 저 상태라면 이 비로 얼마동안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오는 동안 고생만 하고 경험치는 거의 먹지도 못했기에 억울해서라도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촌장쯤 되 보이는 사람이 동의하자 나는 잘 구슬려서 포션과 탐사용 도구를 최대한 뜯어먹었고 선두로 세르가 내려갔다.
“뭔가 보여?”
“잠깐만요.”
두레박에 타고 있던 세르가 줄을 흔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아래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무게가 줄어든 걸 보니 바닥에 내려간 듯. 주위를 살피는지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고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가 꽤 넓고 이상한 마법진이 있는데, 모두 내려와 봐요.”
우물 바닥이 넓고 마법진까지? 뭔가 수상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우리가 내려가면 줄은 잡아 줄 사람이 없잖아?”
“그것도 그렇군. 아, 촌장님. 마을 청년들을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네만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을지는…….”
현실이라면 정상적인 상태가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것은 게임, 대처할 편법은 존재했다. 먼저 모인 청년들에게 물과 음식을 충분히 먹인 뒤 프리스트들이 체력 회복 주문인 리커버리를 걸어 주면 끝. 우리를 안전하게 내려 보내 줄 일꾼은 쉽게 마련되었다.
“흐음…….”
선두를 자청한 레이를 시작으로 하나 둘씩 내려왔다. 바닥에 도착하자 꽤 넓은 장소가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이것이 우물물을 마르게 한 장본인이 확실했지만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만큼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벤트 성은 확실한데 도대체 누가, 왜 했다는 설정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일단 부수고 보자는 결론을 내리려는 찰나, 세르의 외침이 귀를 강타했다.
“아앗, 길이다!!”
여기저기 짚어보던 세르의 손끝에 스위치가 걸렸는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타나는 길, 발을 내딛자마자 반겨 주는 건 살라만다가 뿜어내는 화염이었다.
“어딜!!”
갑작스런 공격에 움찔하는 사이 아론이 앞으로 나섰다. 불꽃과 함께 살라만다까지 베어버리는 푸른 검기, 하급 정령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쉽게 소멸되어 버렸다.
“정령술사는 없는데…… 몬스터로 나온 건가? 정령이??”
길은 일방통행. 조종이 가능한 거리 내에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몇 발자국을 가자 이번엔 세 마리의 살라만다가 막아섰고 여지없이 아론의 검기에 소멸되었다. 앞으로 나갈수록 수가 많아지던 살라만다는 어느 순간 중급 정령인 카사로 교체되었고 역시 점차 많은 수가 쏟아져 나왔다.
“정령들이 단체로 미쳤나, 왜 이래?”
“안에 지켜야할 무언가가 있다는 건가…….”
“또 나왔다. 제, 제길 이번엔 상급!”
통로는 겨우 세 명이 나란하게 설 정도로 비좁아서 협공을 하긴 어려웠다. 결국 맨 앞에 서있는 아론이 보조를 받으며 처리해야하는 상황. 아무리 검기를 쓸 수 있어도 현재 자신이 벨 수 있는 한계인 4써클 이상의 마법을 써대는 놈을 혼자 잡기엔 무리가 있었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실드!!”
불과 바람 속성을 택한 드라이저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실드가 고작이었다. 뭐, 그래도 카엘에 비하면 나은 편이지만.
“움직임을 막자, 워터 프리즌.”
…….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리는 물줄기는 소식이 없었다.
“아까 그 마법진의 영향이 여기에도 미치는 건가, 젠장.”
상급 정령에게 어설픈 공격은 통하지 않을 터, 생각을 바꿔 아론을 제외한 모두에게 인챈트를 걸어줬다. 세르의 단검 같은 경우는 독 효과가 사라지지만 정령에게 독 따위가 통할 리 없으니까…….
“형, 더는 무리에요.”
강한 마법을 난사하는 놈 때문에 실드가 계속 흔들렸다. 오래 버티진 못할 듯. 아론이 뒤로 빠지고 세르, 린, 레이가 공격 준비를 하자 그에 맞춰 실드가 파괴되었고 나는 드라이저의 옆에 대기하고 있다가 블링크를 써서 일행의 뒤로 빠졌다. 셋의 집중 공격에 상처를 입던 놈은 손을 휘둘러 실드를 형성했고 세르의 공격은 전혀 통하질 않게 되었다. 레이와 린의 화살도 힘의 대부분을 빼앗겨 버렸고.
“더럽게 강하네.”
아론이 치를 떨며 달려들었다. 녀석은 대시 스킬을 사용한 듯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더니 실드와 함께 팔의 일부를 베어버리고 자신도 마법에 맞아 튕겨 나왔는데, 꽤 큰 데미지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정령의 크기는 처음의 반으로 줄어들었고 아론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힐링!!”
거트 형이 달려가 회복주문을 걸었지만 빛이 스며들기도 전에 아론은 아웃되어 버렸고 놈의 앞에 선 거트 형 역시 아웃되는 걸 면치 못했다
“쏴!!”
또 다시 셋의 공격이 시작되고 정령도 실드를 쳤지만 세르의 단검에도 뚫릴 정도로 위력이 형편없었다.
“아쿠아 스파이크!!”
강한 회전과 함께 날아간 물줄기는 실드를 깨고 정령에게 직격했다. 카사만큼 작아진 모습. 이제 더 이상 플레임 스트라이크 같은 고급 주문은 사용하지 못 할 것이다.
“크흑.”
마지막 일격을 받은 놈은 거칠게 타오르더니 사라져 버렸다. 존재했다는 증거로 장갑 하나를 남기고서.
“문 뒤에 뭐가 있는 거지?”
“설마 또 정령이 있는 건?”
“에이, 설마…….”
문이 있는 걸로 보아 여기가 마지막인 것 같았다. 일단 장갑을 넣어두고 아론에게 귓속말을 하려는데 난데없이 세리의 온몸이 불타는 게 아닌가?
“꺄아아악!”
“뭐, 뭐야. 아쿠아!!”
다급히 세리에게 물을 떨어뜨렸지만 엄청난 열기에 증발해 버릴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안 돼!!”
갑자기 베르가 뛰어들어 망토로 세리의 온몸을 덮었지만 보통 불이 아님을 증명하듯 베르에게까지 옮겨 붙어 버렸고 순식간에 전신을 휘감았다.
“레이.”
“그래…….”
내 말의 의도를 알아차린 레이가 그들을 겨냥했고 화살은 정확히 목에 박혀 크리티컬 히트를 기록했다. 몸에 불이 꺼지지도 않은 채 회색으로 물들어 가는 베르와 세리를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앙칼진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같은 길드 원을 죽일 수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구할 방법이 있었나??”
“잘 찾아보면 있었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리 기분 좋지 못한 상태라 내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방법을 찾아? 어느 세월에? 물도 안 통하고, 두꺼운 망토로 덮어도 안 되는데 방법이 있기는 할까?”
“그, 그건…….”
“이게 게임이긴 하지만 설정해 놓은 정도에 따라 30%정도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 평균 감도인 20%로 놨다고 해도 온몸이 불타는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
“그럴 땐 빨리 죽여주는 게 나아. 크리티컬 히트였으니 큰 고통은 없었을 테지. 운 좋으면 페널티 없이 살아날 수도 있고.”
‘몬스터’나 ‘적’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경우 같은 길드 원이 죽이면 페널티 없이 살아날 수 있다. 아론이 카엘에게 했던 것처럼. 문제는 그 불꽃이 ‘적’이나 ‘몬스터’로 간주되느냐 인데…….
“페널티 적용되면 제롬을 불러야겠군.”
역시 제일 만만한 게 제롬이다. 다른 운영자는 알지도 못하지만…….
“손을 못 대면 트랩인지 알 수도 없는데…….”
“트랩은 아닐 거야. 그럼 힘으로 열어야 하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엘의 붕대를 조금 말아서 던져보자 붕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재가 되어 버렸다. 아마 문 전체에 특수한 마법이 걸린 듯, 그렇다면 어떻게?
“아, 레이. 너 신의 눈 가지고 있지? 아이템 확인 좀 하게 잠깐 빌려 줘봐.”
옵션에 ‘모든’이란 말이 붙어 있으니 아이템 능력 확인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착용자만 알 수 있지만
“그게 말이야, 그게…….”
“그게 뭐?”
“광렙 하려니까 돈이 많이 들더라고? 그래서…… 팔아버렸어.”
레이가 이렇게 생각 없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 다시 만난 이후 저번에 얻은 아이템을 쓰는 건 린뿐이었다. 나도 여럿이 다녀서 이탈의 망토를 쓸 기회가 없었고.
“설마 아론도?”
“응…….”
“얼마…… 에?”
천천히 펴지는 손가락 세 개.
“300골드?”
“아니, 30골드.”
“에라이, 미친놈아!!”
이런 상황에 더 말을 해서 무엇 하랴. 누군진 몰라도 산 사람은 대박 터트린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럼 확인 주문서 있는 사람?”
설레설레 모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고 할 수 없이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나한테 불붙으면 바로 죽이고 밖으로 나가. 마지막 사람은 마법진 부수는 거 잊지 말고.”
“오빠, 어차피 해결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그냥 돌아가요.”
“그래, 괜히 죽을 필요는 없잖아.”
죽을 확률이 상당히 높기는 했지만 가능성을 남겨두고 포기하는 건 찝찝한 기분이 들어 싫었다. 아이템 창에 아무렇게나 넣어둔 장갑을 꺼내 차고 문으로 다가가자 린이 앞을 막아섰다.
“죽을 걸 알면서 덤비는 건 바보에요!!”
“나도 가능성이 있으니까 덤비는 거야, 그리고 명색이 개척자인데 이름값은 해야지.”
“불붙으면 저한테도 옮겨 붙게 할 거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린이 톡 쏘아붙이고 등을 돌려 버렸다. 쟤…… 왜 저래?
“린 누나가 콜 형을 좋아하는 거야?”
“글쎄,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아론 오빠도 있잖아?”
“그럼 양다리?”
자기들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했지만 동굴과 같은 지형이라 소리가 울렸고 카엘과 세르의 소곤거림을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전 그냥, 그러니까 막기 위해서……. 또 아까 말을 잘 못했으니까 불에 타는 게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도 알아야 하고…….”
횡설수설하는 린, 사람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자리 잡았다.
“실패하면 아론한테 맞아 죽겠군.”
불이 붙어도 일행과 멀리 떨어 질 수 있게 블링크를 사용할 준비를 마치고 손잡이를 잡았다.
“열렸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너무 쉽게 열리는 문, 손에 뜨겁다거나 하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역시 이 장갑이 키 아이템이었나?
“망할…….”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아까 것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마법진과 레벨 90이상의 정령 술사나 소환 할 수 있다는 최상급 불의 정령, 절대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튀어!”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났지만 어느 새 우리 앞에 나타난 놈에게 전멸을 피할 수 없었다.
“으으…….”
사막의 어느 초라한 병원에서 두통과 함께 모두 눈을 떴다.
“최상급 정령이라니, 무슨 속셈이야?!”
“결국 그런 것까지 튀어나왔냐? 먼저 죽길 잘했군.”
“다들 레벨 얼마나 떨어졌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레벨이라도 조금 떨어졌기를 바랄 수밖에. 불행 중 다행으로 다들 1이나 2밖에 안 떨어졌지만 린이나 아론, 레이에게는 그것도 엄청난 것이긴 했다.
“에휴..……. 당분간 검기도 못쓰게 됐다. 레벨이 79야. 경험치는 반 이상 차있고.”
경험치 50%도 안 되는 차이지만 전투력 면에서는 배가 넘는 차이를 보일 것이므로 당분간 아론도 힘들게 됐다.
“난 사막 건너오기 전이랑 비슷한데? 아참, 베르랑 세리는?”
“저흰 그냥 길드 원에게 죽은 걸로 처리됐는지 그대론데요?”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일단 촌장에게 다시 가서 우리 힘으로 무리임을 밝히고 퀘스트 완료 서명을 받아 뤼크레스로 돌아왔다. 퀘스트 중엔 죽거나 귀환해도 길드 집으로 안 오는 게 다행이란 말이야.
“퀘스트 완수했습니다.”
“오, 해내셨군요. 왠지 전보다 약해지신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뭐, 좋습니다. 명성을 한 단계 올려드리죠.”
“보상은?”
퀘스트를 수행했으니 명성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추가로 돈이나 아이템을 줘야 하는데 이 NPC는 그냥 가보라는 듯 몸을 돌려버렸다.
“이미 드렸지 않습니까, 마법서 레인 폴.”
“그걸로…… 끝?”
“예, 당연하죠.”
“……무르면 안 될까?”
“절대!!”
……이래저래 득보단 실이 많았던 퀘스트였다. 허탈감에 젖어 하나 둘씩 로그아웃 하는 길드 원들. 나도 힘 빠져서 더 이상 게임하긴 힘들 것 같아 접속을 끊었다.
허탈했던 퀘스트가 끝난 후 우리의 일상은 거의 비슷했다. 퀘스트 얻어서 접속한 길드 원끼리 깨고, 레벨 업하고. 저번 퀘스트에서 생각보다 명성치를 많이 얻어서 A클래스를 받을 수 있었기에 레벨 업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 덕에 아론에 이어 레이와 린이 화살에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는데, 레이는 운영자에게 마궁수란 직업을 정식으로 인정받아 페널티가 사라지고 새로운 스킬이 생겨나게 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 * *
“글쎄 난 신입생 환영회 같은 건 귀찮아서 싫다니까.”
“그러니 말고 일단 따라와 봐. 반가운 얼굴이 있으니까.”
싫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 가는 태진. 처음에는 반항했지만 얼마 안 가 도저히 힘으로 못 이긴다는 걸 새삼 깨달았고 순순히 따라가기로 했다. 북적이는 장내를 헤치고 도착한 나이트 한 구석엔 낯은 익지만 이름은 알 수 없는 몇 명과 새내기 티가 풀풀 풍기는 몇 명의 남녀가 앉아있었다.
“어?”
“아, 오빠.”
저번에 학교 보러 왔다더니 진짜로 우리 학교, 그것도 우리 과에 들어온 린. 아니, 재연이가 앉아있었다. 그 실력이면 법학과나 의학과도 충분할 텐데 어째서?
“여긴 웬일이야?”
“웬일이라뇨, 이제부터 오빠들 후배가 됐는걸요.”
“하지만…….”
“자자, 후배님들. 술만 마시지 말고 나가자고.”
평소에도 이 여자, 저 여자한테 집적대던 한 녀석이 재연을 포함한 후배들을 몰고 스테이지로 올라가 버렸다. 나와 태진이 춤추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이용해 떨어뜨려 놓으려는 듯, 가자마자 놈은 같은 신입생 사이에 껴있는 재연의 주위를 맴돌며 수작을 걸었다.
“저게!!”
“참아, 참고 이리 와봐.”
내 만류에 태진은 꽉 쥔 주먹을 내리며 다가왔다.
“그러니까, 잠시 후면…….”
약간의 코치를 해주자 다시 처음 올 때 같은 얼굴로 변하는 태진. 슬금슬금 천천히 스테이지로 향했다.
“재연이라고 했던가? 나와…….”
조명이 바뀌고 블루스 타임으로 바뀌자 예상대로 놈이 수작을 걸었다. 하지만 근처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태진이 정확히 놈과 재연의 사이에 끼어들었고, 놈은 타이밍을 놓치는 것은 물론 태진의 덩치에 밀려 넘어지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너……!!”
뭐라 하려할 때 손을 뒤로 돌려 주먹을 쥐어 보이자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기어 나왔다. 둘 다 처음 춰보는 것인지라 많이 어색했지만 주위 사람을 힐끗거린 결과 대충은 흉내 낼 수 있었다.
“흠흠, 이 중에 힐름하는 사람?”
“저요.”
“저도요.”
상용화 된 지 1년이 다 되어가니 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고 대부분이 한다는 걸 확인한 놈은 약간 거만 떨며 입을 열었다.
“이 선배님께서는 78레벨의 기사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하도록.”
“와∼ 선배님, 저 마법서 하나만 사 주세요.”
“저 좀 키워주세요.”
린이나 힐름을 하지 않는 애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놈에게 달라붙어 아부를 떨었다. 78, 확실히 높은 편에 속하긴 하지만 길드 최하 레벨인 세르도 77이니…….
“우리 재연이는 힐름 안 하니? 안 하면 한번 시작해봐. 이 오빠가 확실하게 키워줄 테니까.”
‘우리’라는 말을 붙이자 태진이 발끈 했지만 난감해 하는 재연에게 눈짓으로 사인을 보내는 것으로 참았다.
“그게, 하긴 하는데…….”
“그래? 레벨 몇인데.”
현재 재연의 레벨은 91. 궁수 클래스 중에서 마스터가 나오지 않을 것을 감안할 때 지존 급이라 해도 무리가 없었다. 때문에 말하길 주저했고 낮아서 그런 것이라 착각한 녀석은 계속 재촉해댔다.
“83이요.”
“!!”
너무 높게 부르면 여파가 클 것 같아서 몰래 손으로 지시하자 재연은 그대로 말했다. 물론 83도 충분히 높은 레벨이었지만 녀석보다 낮게 말했다간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도 있으니까.
“이야, 너 대단하다!!”
“언제 그렇게 키운 거야?”
“수시에 붙어서 베타 때부터 계속했거든요…….”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못하는 놈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태진. 레벨 83이라는 거물이 나타나자 아무도 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 좀 키워주라, 응?”
“나 격투가 레벨52인데 아직도 40레벨 때 쓰던 무기 차거든? 바꿔주면 안 될까?”
처음 보는 신입생에게 너무 매달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리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선 중렙에서 헤맨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런가보다 하며 지켜봤다.
“알았어요. 무기정도는 맞춰 드릴게요.”
가지고 있던 돈 말고도 몇 달 전 미스릴 소드를 팔고 얻은 돈을 나눠 300골드 정도 추가로 얻었으므로 돈은 차고 넘쳤다. 퀘스트로 얻은 돈까지 합치면 장비와 포션으로 쓴 돈을 제하고도 개인 당 300골드 이상을(카엘 제외) 소유하고 있으니 중렙 유저 몇의 장비 맞춰 주는 정도야 부담될 이유가 없지
“크흠, 궁수면 나랑 같이 파티하지 않을래?”
“죄송해요. 이미 파티가 있어서…….”
어느 새 석화가 풀린 놈이 파티를 제안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80만 돼도 80미만의 플레이어와는 파티를 맺지 않는 것이 정석이니까.
“그, 그래? 그럼 길드라도 만들면 어떨까. 그 동안 모아 놓은 돈에 약간만 보태면 길드 석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너, 그렇게 짜게 굴더니 그렇게나 많이 모아 둔 거야? 치사하다.”
“오빠 부잔가봐요.”
길드 문제까지 나오자 재연이 다시 한 번 날 쳐다봤다. 잘못하면 길드 명을 밝혀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들통 나는 건 시간문제, 재연과 더불어 우리까지 말려들게 뻔했다. 그렇다고 우리 길드를 탈퇴하고 저쪽으로 가게 할 수도 없었기에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 감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죄송해요, 이미 길드에 들어서…….”
“길드 이름이 뭔데?”
“친목 길드라 그리 크진 않아요.”
길드 얘기까지 꺼내 놓고 재연이 안 들어온다고 말을 거둘 순 없어서 결국 놈은 그 동안 모아 놓은 피 같은 돈으로 길드를 만들기로 했다. 저놈…… 망했군.
“선배님들, 안녕히 가세요.”
“그래, 너도 잘 가라.”
다들 게임할 욕심에 2차까진 가지 않고 자리를 깼다. 재연은 모두에게 만날 장소와 시간을 알려줬고 놈을 제외한 나머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옆집이니까 태진이랑 같이 가면 되겠네. 그럼 게임에서 보자고.”
“그래, 이따 보자.”
집이 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터벅터벅 걷다보니 금세 도착했다. 얼마 마시진 않았지만 이대로는 접속이 안 될 것이므로 술을 깨기 위해 약을 먹고 간단히 샤워를 했다. 베란다 쪽 창문을 살짝 열자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머리카락이 길지 않은 덕에 금세 말릴 수 있었다.
“접속.”
머리에 쓴 괴상한 헬멧을 통해 내 혼이 다른 세계와 연결됐다. 물론 힐름이 ‘혼’이라는 미신적인 것을 이용한 게임이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해두자
공지
[눈의 도시 에르가도에 뭔가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이상한 조짐?”
저번 달에 새로 발견된 눈의 도시 에르가도. 육로로는 갈 수 없고 텔레포트나 배를 타고 가야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신기한 것도 많고 얼음속성이 걸린 무기와 방어구를 팔기 때문에 화산 같은 지형에서 주로 사냥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우리길드도 히메네스 화산에 갈 준비도 할 겸 몇 번 갔었던 곳이고.
“운영자들이 또 뭔가를 꾸미는 건가.”
오크 대 침공 이벤트 이후 이벤트다운 이벤트 한번 열리지 않았으니 슬슬 한번 열 때도 된 듯싶다. 그래도 일단 조사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 텔레포트 타워로 향했다.
“목적지는 에르가도.”
“3골드입니다.”
여전히 텔레포트 가격은 비쌌다. 지금이야 사냥 가서 어렵지 않게 벌 수 있는 금액이지만 웬만한 고렙이 아니면 사용하기 힘들 정도니…….
“눈의 도시 에르가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투적인 멘트를 날리는 NPC. A.I도 아니라 무시해도 상관없었기에 일단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방어구 말고도 두꺼운 옷을 껴입은 사람들이었고 난 내 실수를 깨달았다.
“추워죽겠네.”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듯 추위도 어느 정도 전해지는 것. 전투 중에는 흥분으로 큰 영향을 안 받겠지만 그냥 돌아다닐 때는 다르다.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한 조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지로 장난할 리는 없기 때문에 먼저 탐문수사(?)를 하기로 했다
“저, 에르가도에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별다른 일은 없는 것 같은데요.”
사람들에게는 물론 마을내의 모든 A.I형 NPC에게 물어봤지만 정확한 답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결국 돈만 버린 셈. 이대로 가기에는 돈이 너무 아까웠고 혼자서라도 사냥해 충당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사냥하긴 좀 까다로운데…… 할 수 없지.”
얼마나 걸었을까? 마을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고 주위에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몬스터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소환, 버닝 파이터.”
저 멀리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소환술사인 듯, 소환술사는 키우기 꽤 까다로운 직업이라 좀처럼 보기 힘들어. 즉시 블링크를 이용해 근처로 다가갔다.
“전원 공격.”
“멍청하군.”
내 솔직한 감상평이었다. 그의 말에 따라 아이스 골렘에게 달려드는 파이터 셋. 하지만 온몸에 붙어있는 불꽃이 추위에 못 이겨 시들해져있었고 그들이 밟는 곳마다 얼음이 녹아 푹푹 내려앉았다.
“가라!!”
흥분해서 소리치는 그의 바람과는 달리 지형효과로 더 강해진 아이스 골렘에게 버닝 파이터는 떨어지는 꽃잎처럼 쓰러져갔다.
“이, 이런……. 소환, 버닝 아쳐.”
버닝 파이터가 형편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다시 버닝 시리즈를 불러내는 한심한 소환술사. 저 정도를 소환하려면 50레벨 이상은 되어야할 텐데 어떻게 키울 수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워 진다.
“쏴!!”
그의 명령에 따라 버닝 아쳐가 활을 쐈지만 위력은 형편없었고 아이스 골렘의 몸에 겨우 스크래치만 낼 수 있었다. 그는 버닝 아쳐마저 아이스 골렘이 휘두른 손에 쓰러지자 더 이상 밑천이 없는지 뒷걸음질 쳤고, 멍청하게도 신발에 스파이크를 안 박았는지 미끄러져 넘어졌다.
“할 수 없군. 찌릿한 고통, 라이트닝 펀치.”
전기 속성을 띤 주먹이 사람 몸통만한 크기로 아이스 골렘을 강타했다. 옆으로 밀려나는 골렘. 뒤뚱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악을 심판하는 하늘의 힘, 콜 라이트닝.”
조금 시간이 걸리는 마법이지만 원래 속도도 느린데다 균형까지 잃은 아이스 골렘에겐 충분했다. 내리꽂히는 번개에 맞자 골렘이란 놈들이 워낙 HP가 많은 족속들이라 죽진 않았지만 거의 빈사 상태에 빠졌고, 죽일까 하다가 선도 아니고 버닝 시리즈를 모두 잃은 소환술사가 불쌍해 보여 그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뭐해요, 테이밍 안 하고. 내가 선이 아니니까 파티가 아니어도 가능할 겁니다.”
“예? 예. 테이밍!!”
소환술사 고유의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자 아이스 골렘의 이마에 주인의 이름이 적히며 테이밍 되었음을 나타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스 골렘을 테이밍 할 수 있다면 60레벨도 넘겼다는 소린데…….
“뭘요, 그런데 왜 여기에서 버닝 시리즈를 꺼내신 거죠?”
“그거야 상극이니까…….”
이렇게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그 레벨이 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 노력과 정성에 운영자가 감동이라도 한 건가?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실로 치자면 극지방이란 말입니다. 그런 곳에서 불 속성 몬스터를 소환하면 당연히 약해질 수밖에요. 더구나 상대는 홈그라운드라 지형효과까지 받는단 말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소환술사.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았다.
“HP가 바닥이네, 역소…….”
“잠깐만.”
“예?”
그냥 갈까 했지만 이왕 도와준 거 확실히 돕자는 생각에 역소환을 제지했다.
“이놈 빼면 소환 가능한 몬스터도 없는 것 같은데 기다려보라고. 아쿠아, 아쿠아, 아쿠아…….”
이렇게 추운 곳에서 물은 금세 얼어 버린다. 따라서 아이스 골렘에게 뿌려진 물도 빠르게 얼었고 그것은 얼음으로 된 아이스 골렘에게 포션과 다름없는 효과를 보였다.
“사부!!”
“에……?”
“제게 큰 가르침을 주셨으니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사부의 존함을 알려주십시오.”
“저기, 난 사부 같은 게 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거절하고 또 거절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혹시 지금까지 올린 레벨도 저런 식으로 빌붙어서?
“그럼 내게 아홉 번 절하거라.”
“예, 사부.”
그 자리에서 절을 하기 시작하는 사내. 하지만 끝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스케이프.”
약속된 언어를 말하자 망토가 파랗게 빛나며 주인의 뜻을 받들었다. 그가 다섯 번째 절을 할 때 마을로 이동했고 혹시나 뒤쫓아 올까봐 새로운 인피면구로 바꿔 썼다.
“휴우, 겨우 도망쳤네.”
“사부님! 어디 계세요, 사부님!”
이곳을 뜨기 위해 텔레포트로 향하던 중 창피한 줄 모르고 사부님을 외치는 소환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목적지는 일리아드, 최대한 빨리.”
인피면구 덕에 발각될 위험은 없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날 재촉했다. 목적지는 린이 신입생&재학생들과 만나기로 한 일리아드, 굳이 그곳으로 잡은 이유는 마법 도시인만큼 마법 걸린 무기로 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인 것 같다.
“무기점에 있는 걸 보니 아직 다 못 샀나보군.”
얼마 전 거금을 들여 장만한 마법 지도를 펼치자 일정 범위 내에 있는 길드 원들이 표시됐다. 가본 곳만 표시되기 때문에 지도 채우려고 오래도 돌아다녔었지.
“대충 좀 고르지. 너무 시간 끄는군.”
괜히 들어갔다가 정체라도 들키면 골치 아픈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근처에서 지도를 보며 기다렸다. 한 30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무기 선택이 끝났는지 하나씩 무기를 매만지며 밖으로 나왔고 몇 마디 인사 후 헤어졌다. 길드 이름이 어쩌고 하는 걸로 봐서 길드 석을 사러 가는 듯. 한껏 일그러질 놈의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어? 왔으면 들어오지 왜 밖에 있냐.”
린에게 수작 거는 놈이라도 있을까봐 지키고 서있던 아론이 길드 표시로 날 알아봤다.
“방금 왔어, 에르도나에 다녀오느라고.”
“아, 공지는 나도 봤어. 안 그래도 가볼까 했는데 무슨 일이야?”
“난 잘 모르겠던데? 공지로 장난 칠 리는 없고, 뭔가를 위한 사전 작업쯤 되겠지. 예를 들면 이벤트라던가.”
별다른 이상도 없는데 공지로까지 말하는 걸로 보아 꼭 이벤트가 아니라도 무언가를 위한 사전 공작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라면 굳이 공지로 하지 않고 NPC를 통해 소문을 흘렸을 텐데.
“이벤트라? 오크 때 이후 감감 무소식이더니 드디어 한번 하려는 건가?”
“내 예상일뿐이지 확실한 건 아니야. 한다면 곧 돌아오는 오픈 1주년에나 하겠지.”
말하고 보니 그럴 듯했다. 오픈 1주년 같은 기념할만한 날을 그냥 넘길 리 없으니까. 궁수와 로그, 그리고 프리스트와 업데이트가 늦게 된 소환술사를 제외한 검사, 격투가, 어쌔신, 마법사 클래스에서 몇 명의 마스터가 나왔으니 오크 이벤트와는 상대가 안 되는 놈들을 출현 시킬지도…….
“이벤트를 재미있게 즐기려면 레벨 업은 필수겠지?”
“물론!!”
“그럼 오늘은 어디로 갈까…….”
“잠깐!!”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재수 없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은 린에게 계속 수작 걸던 놈이었다.
“사냥 갈 거지? 나도 같이 데려가줘.”
레벨 차이를 뻔히 알면서도 그런 부탁을 하는 놈에게 ‘넌 뭐야?’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내 존재를 알아채고 인사했다.
“아, 그새 한 명이 더 늘었군. 전 바스쿠아스라고 합니다. 78레벨 기사죠.”
“그래서?”
“말했듯이 파티에 넣어달라는 겁니다. 짐은 안 될 테니 걱정 마시고…….”
자신감과 오만함이 묻어 나오는 말투, 상당히 거슬렸다.
“아니, 짐만 될 뿐이다. 우리가 사냥하는 것들은 최소 하급리치, 이길 자신 있나?”
하급리치도 약간 축소한 것이었다. 셋이 충분한 경험치를 얻으려면 다수의 중급리치나 위험을 무릅쓰고 상급리치 몇 마리는 잡아야 하니까. 하지만 아직 검기도 못 쓰는 놈에겐 하급 리치도 드래곤만큼이나 무서운 것이었고 머뭇거리다가 결정을 내렸다.
“할 수…… 있습니다.”
“좋아, 용기인지 객기인진 두고 보면 알겠지.”
“야!!”
“오빠!!”
내가 멋대로 놈을 파티에 받아들이자 린과 아론이 당황해 소리쳤고 바스…… 아무튼 놈도 멍하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동갑이었어?”
“난 나이 많다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인피면구 때문에 나이를 착각했던 놈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지만 난 내 입으로 연장자라 말한 적 없으니 죄 없다고. 그럼 이제부터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지 평소보단 좀 길군요.
“처음엔 가볍게 녹색의 평원으로, 매스 텔레포트.”
녹색의 평원이란 소리에 얼굴이 경직되는 바스쿠아스. 음, 귀찮으니 바스라 하겠다. 사실 녹색의 평원은 그 필드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트레…… 뭐라는 곳인데 나오는 몬스터가 오크, 트롤, 오우거 같은 녹색이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 도착하자마자 반겨주는 건 한 무리의 오크 떼였다. 트롤, 오우거에 밀려 좀처럼 보기 힘든 놈들인데 운이 좋은 건가?
“무지한 자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적지 않은 마나가 소모되지만 스테미너 포션도 없는데 기사들이 힘 빼게 할 순 없었다.
“꾸우웩.”
“크킁.”
오랜만에 들어보는 오크들의 비명소리를 감상하고 있을 때 축농증 환자 같은 소리를 내며 트롤 한 마리가 나타났다.
“불, 전기. 어떤 걸로 할래?”
“응?”
“인챈트 말이야. 저런 거 한 마리에 여럿이 달려들어야겠어?”
우리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하지만 검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트롤의 회복력은 무서운 것이었다.
“좋아, 내가 하지. 하지만 도움 따윈 필요 없어!!”
바스는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튀어나갔다. 검에 붉은 기운이 도는 걸 보니 꼴에 마법 검? 결코 만만한 가격이 아닐텐데…….
“하압!!”
녀석은 트롤에게 정면으로 달려드는가 싶더니 내려치는 도끼를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렸고, 휘청거리는 틈을 타 배후를 노렸다.
“죽어라!!”
푹-!
등 뒤에서 트롤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은 바스는 승자의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들썩.
잠시 행동을 멈췄던 트롤의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몸을 돌리며 팔을 휘둘러 바스를 날려버렸다. 질긴 가죽과 회복력 때문에 검이 심장에 미치진 못한 듯, 상처도 검이 꽂힌 부분만 빼고 금세 아물어 버렸고 검을 잃은 녀석은 겁에 질려 일어나지도 못하고 기어 도망가려 했다.
“아론, 트롤 뒤로 가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트롤 따위는 아론의 상대가 되질 못했지만 좀 더 쉽게 처리하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일러줬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꼭 살려줘야 하는 거야?”
“한번 정도는 기회를 줘야지. 그리고 아는 사람이 죽는데 린이 좋아할 리 없을 테고, 구해줬다가 그게 인연이 돼서 연인으로 발전하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가는 아론, 그 질풍 같은 속도에 트롤이 반응하지 못하고 등을 허락했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검에 저장된 마법은 검 끝에서 나가기 때문에 파이어 볼은 트롤의 심장, 혹은 그 근처에서 폭발했고 내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상당한 위력을 냈다.
“야, 이런 말은 없었잖아!!”
“그 정도는 예상 할 줄 알았지.”
코앞에서 폭발하는데 아론이라고 어찌 무사하랴? 급히 방어했지만 충격으로 5m가량을 날아갔고 포션 하나를 들이키며 씩씩거렸다.
“그리고 HP적은 내가 하리? 다음부턴 린한테 시킬까?”
“쳇.”
휘익-.
딱히 반박할 말이 없자 화풀이로 들고 있던 검을 바스에게 힘껏 던져버렸다
“히익.”
일부러 노린 건지 손이 미끄러진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날아간 검은 아슬아슬하게 머리 옆에 박혔고 바스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검을 빼들었다.
“또 오는 군. 한 번 더 해볼래?”
“아, 아니. 잠깐 쉴게.”
바스는 좀 전의 공포가 남아있는지 나서길 꺼려했다.
“찢어발기는 진공의 검, 소닉 슬러쉬.”
“크워.”
날카로운 진공의 검이 목을 향해 쇄도하자 급히 도끼를 들어 방어하는 트롤. 인간의 몸을 양단해 버리는 힘으로도 버거웠는지 도끼를 놓치진 않았지만 팔이 공중으로 튕겨져 올랐다.
“검기.”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달려간 아론은 그대로 도끼 든 손을 ‘잘라’버렸다. 잘려진 부분을 잡고 오열하는 트롤. 놈의 엄청난 회복력도 지혈정도의 능력만을 보일 뿐 완전히 떨어져 나간 팔에 대해서는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회복’과 ‘재생’은 엄연히 다르니까.
“크워어어.”
오른 팔에 대한 미련을 아론에 대한 적의로 바꾼 듯 익숙지 않은 왼팔에 도끼를 쥐고 달려왔지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놈의 어설픈 공격은 애꿎은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고 수초 만에 아이템과 함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트롤의 피라, 특제 포션을 만들 수 있겠는데?”
특제 포션은 트롤의 피를 주재료로 하는데, 마시면 1분 동안 트롤에 맞먹는 회복력을 가질 수 있는 꽤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물론 회복 속도 이상의 타격을 받거나 크리티컬 히트에 걸리면 소용없고 검기 등에 당하거나 상처를 많이 입으면 회복력이 저하되지만.
“왜, 갖고 싶어?”
끄덕끄덕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바스는 움찔하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잡고 먹어.”
녀석을 놀리며 병에 담긴 트롤의 피를 품속에 넣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즐기는 나와 아론. 린도 녀석이 싫었는지 크게 말리진 않았다.
“웬일로 몹이 없네? 숲으로 가보자.”
“근처의 숲이라면 엘프의 숲? 미쳤어?!”
“깊이만 안 들어가면 되지, 뭐.”
녹색의 평원 근처엔 딱 하나의 숲이 존재한다. 몇몇 플레이어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같이 고렙에 해당하는 궁술과 정령을 사용하는 엘프가 산다고……. 판타지에서처럼 그들을 노예로 비싸게 팔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어떤 길드가 쳐들어갔다가 전멸 당했던 걸 보면 절대 수가 적거나 약하진 않을 듯싶다.
“오우거다!!”
아론이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소리치며 달려갔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검강으로 맞서는 게 옳았지만 ‘보는 눈’이 있는 관계로 절정에 달한 검기로만 부딪쳤고 우세하긴 해도 쉽게 승부를 가리진 못했다.
“우워-.”
“큭.”
주르르륵-.
정면으로 받은 공격이 아님에도 아론의 몸이 상당히 밀려났다. 그 다음 오우거가 취한 행동은? 도주! 마지막 공격도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었는지 도망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 놈은 5분도 못 버티고 뒤쫓던 아론에게 죽임을 당했다.
“크우……. 죽어라.”
휘잉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빠른 스윙, 아론이 급히 방어했지만 큰 부상과 함께 멀리 날아가 버렸다
“오우거 로드?”
일반 오우거보다 작은 몸에 타는 듯 빨간 피부색, 틀림없는 오우거 로드였다.
“망할, 튀기도 힘들겠군. 바인드!!”
숲인 만큼 많은 수의 식물들이 놈을 구속했지만 압도적인 완력에 간단히 뜯겨져나갔다.
“린, 너는 이걸 아론한테 뿌리고 같이 도망쳐.”
품에서 정제하지 않고 1회용으로도 쓸 수 있는 트롤의 피를 꺼내 주자 린이 되물어 왔다.
“그럼 오빠는요?”
“걱정 마, 작정하고 도망치면 운영자한테도 안 잡힐 자신 있으니까. 바인드, 바인드, 트위스트.”
이번에는 로드를 향해 가던 식물들이 서로 꼬이며 더 튼튼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멈칫거리게 만드는 것이 고작. 오히려 화를 돋운 셈이 되어버렸다.
“빨리 가!!”
“금방 와서 도와드릴게요.”
“나, 나는?”
린이 떠나자 내 뒤에 있던 바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알아서 해!! 공간의 틈으로, 블링크.”
“아악!!”
로드의 대시에 블링크로 피하자 바스는 옆쪽 수풀로 몸을 던졌다. 나를 찾기 위해 돌아서는 로드의 뒤로 쓰러지는 나무, 놈의 괴력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쪽이다.”
린과 아론이 합세한다 해도 이놈을 이기기한 불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에 둘이 나타나기 전까지 유인해 이곳을 떠야했다. 다행히 지금의 놈에겐 나를 죽이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로 여겨졌는지 거침없이 달려왔다
“안식으로 인도하는 속박의 힘, 패럴라이즈. 플랜트 스피어.”
달리다 마비 된 로드는 앞으로 꼬꾸라졌고 사방에서 창날같이 뾰족해진 식물들이 피부를 찔러댔다. 그러나 역부족. 몇 개의 굵은 줄기들은 조금의 상처라도 냈지만 나머지 줄기들은 간지럼 태우는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간지럼도 타지 않았다
“헤이스트.”
약 5분간 움직이는 속도를 대폭 상승시키는 헤이스트. 풀리고 30초간 균형을 잃는다는 단점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크우우우……. 죽인다.”
헤이스트를 사용했어도 워낙 느린 마법사기에 잡힐 듯하면 블링크로 거리를 벌리고, 잡힐듯하면 벌리기를 반복했는데 아까부터 회복도 없이 마법을 써댄 터라 마나는 금세 동이 나 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바인드, 이스케이…… 응?”
피잉 핑 핑 핑……. 일행과도 멀어졌겠다, 운 좋으면 살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도망치려는 순간 뒤에서 시위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한 발도 아닌 여러 발의…… 그런데 화살 하나하나에 마나가 담겨있고 개중 몇 발은 90이상의 궁수들이 사용하는 마나로 된 화살이 아닌가? 이 정도 궁수로 된 집단이 있던가 놀라 뒤를 돌아보려 하자 차가운 금속이 목에 닿았다.
“죽고 싶지 않다면 움직이지 마라, 인간.”
인간이길 포기한 자가 아닌 이상 유저가 나에게 ‘인간’일 칭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 숲에서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종족은? 당연히 엘프 뿐. 죽음을 운운하는 건 이미지에 안 맞지만 이미 여러 종류의 NPC를 통해 단련된 비상식으로 그 정도는 커버할 수 있었다.
“끄우욱.”
끝없이 이어지는 화살 세례에 오우거 로드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놈의 죽음과 함께 레벨 업!!을 기대했지만 제대로 된 타격 한번 못 입힌 관계로 돌아오는 경험치는 미미했다. 게다가 로드도 ‘거지’였고…….
“여기부터는 인간이 들어 올 수 없다. 네게서 숲의 기운이 느껴지니 한번은 살려주도록 하지. 사라져.”
“오빠!”
“콜!!”
목에 겨눠진 검이 치워져 움직이려는데 린과 아론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런 둘의 등장에 뒤에 있던 엘프가 화살 한발씩을 날렸지만 못 피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다.
“적이냐!!”
“엘프?”
다짜고짜 날아온 공격에 둘은 공격 자세를 취했지만 내가 아직 상대의 사정권 안에 잇다는 걸 확인하고 섣불리 달려들진 못했다. 솔직히 덤벼봐야 개죽음 일 것 같지만.
“멈춰라.”
그들의 리더인 듯, 한 엘프가 손을 들자 우리에게 겨눴던 활이 치워졌다. 물론 언제든지 공격 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지만.
“역시 이건…….”
갑자기 린에게 다가가서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엘프는 목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 목걸이 어디서 난 거지?”
“몬스터를 잡고 얻은 건데요.”
“아!!”
“무슨 일이야?”
린이 착용한 목걸이는 리자드 마스터를 잡고 얻은 ‘엘프의 목걸이’. 레어로 분류되기엔 옵션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진짜 ‘엘프’와 관련 있는 물건일 줄이야. 잘만 하면 누구도 가보지 못한 엘프들의 마을에 들어 갈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 목걸이는 원래 우리 엘프의 것이다. 돌려주지 않겠나?”
“예? 그런…….”
“활을 다루는 것 같은데 원한다면 우리의 기술을 가르쳐 주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것 같지만 인간과 엘프의 궁술은 조금 차이가 있으니 도움이 될 거다.”
난감한 얼굴로 우릴 쳐다보는 린, 우린 당연히 엄지와 검지를 붙여 OK사인을 보냈다. 숨겨진 이벤트 같은데 놓쳐선 안되지.
“……좋아요.”
“따라와라.”
엘프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 가려는데 나와 아론의 앞을 막아서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인지 몰라 커진 눈을 깜박거리는 우리에게 리더가 설명했다.
“허락된 자는 한 명뿐이다. 너흰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