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눈물 나는 희극
미소라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카알트라즈에 그녀를 홀로 버려두고 도망쳐서, 그녀의 부탁대로 왕국까지 먼 길을 다녀왔다.
그 사이 반란군에게 붙잡혔을 그녀가 어떤 꼴을 당할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카알트라즈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도저히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그 걱정은 더했다.
그런데, 다시 만난 그녀는 멀쩡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낭군님!”
세 남자를 밀치고 후다닥 달려와 미소라의 반대쪽에서 태진을 부축한다.
“뭐야, 상태 왜 이래? 우리 낭군님이 왜 이렇게 된 거야, 미소라?”
몰라서 묻나. 그렇게 받아쳐 주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눌러 참고 미소라는 대답했다.
“루위스를 떠난 이후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와서 그렇다. 최소 며칠은 휴식이 필요해.”
“어머…… 체력도 약한데 말야. 너무 무리한 거 아냐?”
미소라가 왠지 모르게 울컥하려는 마음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 직전에 태진이 먼저 내뱉었다.
“너 때문이잖아.”
“응, 알고 있어. 미안하니까 그러지.”
미연이 미소라에게 눈짓을 했다. 미소라는 머쓱해져 태진을 부축하고 있던 팔을 풀었다. 힘이 빠진 태진의 몸이 미연에게 턱 걸쳐졌다.
물에 젖은 빨래같이 흐느적거리는 그를 양팔로 가득 안고서, 미연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진아, 잘 왔어!”
“…….”
“……어라?”
뭐라고 말이 돌아와야 하는데 아무런 말도 없었다. 미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푹 꺽인 태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채 태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관찰하던 미연이 결론을 내렸다.
“기절했어.”
“그럴 만도 하지. 양다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걸었으니까.”
“앞으로 결혼하기 전에 체력 단련 좀 시켜야겠어.”
단단하게 다짐하고 미연은 태진을 등으로 돌려 그를 들쳐 업었다. 세 남자가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미연은 손을 내저었다.
“나를 위해서 여기까지 와 준 사람이야. 이 정도는 해 야지.”
적어도 30킬로그램은 더 나가는 태진이었지만 미연은 거뜬하게 그를 업고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세 남자가 머뭇머뭇 뒤따랐고, 맨 마지막에서야 미소라도 한숨을 지으며 발을 뗐다.
세 남자가 앞장서서 앞길을 헤쳤다. 미소라도 입을 다문 채 산길을 걷다 도착한 곳은, 주변이 수풀로 우거져서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발견하기도 힘든 어느 절벽 아래였다.
그 아래쪽에 매우 신기하게도 철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세 남자가 먼저 철문을 일정한 리듬대로 두들겼다. 그러자 안쪽에서 다른 리듬의 노크 소리가 되돌아왔고, 거기에 답하듯 다시 노크하는 세 남자.
그 작업이 끝난 후 문이 열렸다.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린 그 안에서는 남자들과 비슷한 복장의 다른 남자가 걸어 나왔다.
말없이 눈빛으로만 이야기를 나눈 그들의 곁으로 미연이 태진을 업은 채 통과했다. 그러나 경계하듯 들어오지 않는 미소라를 향해 잠깐 몸을 돌린 미연이 소리쳤다.
“괜찮아. 들어와. 같은 편이야.”
미연의 인도에 미소라는 마음을 먹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컹,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시선을 던진 미소라는 신기함에 사로잡혔다.
동굴을 개조한 듯이 보였던 그곳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장소였다.
겉은 절벽의 형태고 안은 완벽하게 주거 형태로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피어 있는 횃불들이 환하게 조명 역할을 하고 있었고, 언뜻 보면 일반 건물과 다를 게 없었다.
미연이 태진을 안쪽 방에 눕혔다.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태진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더니 그녀가 다시 일어섰다.
“미소라, 너도 좀 쉬어야지?”
“나는 괜찮다. 태진만큼 체력은 약하지 않아.”
“하지만 너도 꽤 지쳐 보이는걸. 머리가 완전 떡졌는데?”
그 뜻을 알 리 없는 미소라는 해석을 미연에게 요청했고, 미연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태진이 누운 이 방은 원래 미연이 사용하던 방이라고 했다. 바로 옆방을 미소라에게 준비해 주겠다고 미연이 말하는 사이 그녀의 방으로 한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미연, 돌아온 겐가.”
익숙한 목소리에 미소라는 눈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당신은……?”
“오랜만이오, 부대장. 아니 이젠 미소라라고 불러야겠지.”
“럭커?”
나타난 남자는 텔리오트의 시종장이었던 럭커였다. 미소라는 설명하라는 듯 미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태진이 깨어나면 한꺼번에 하자구. 알았지? 우선은 좀 씻고서 쉬어. 여긴 세면 시설도 잘 되어 있으니까.”
미연은 웃는 얼굴로 럭커에게 눈을 돌렸다.
“얘네들 씻을 수 있게 준비 좀 해 줘.”
“음, 지시를 내려 두지. 허나…… 미소라는 몰라도 저 남자는 혼자 씻기는 힘들 것 같은데.”
“걱정 마. 내가 씻기면 돼. 나도 땀을 흘려서 좀 씻고 싶고.”
미소라와 럭커의 눈썹이 함께 씰룩였다.
“미연, 그 말은―”
“응? 저렇게 더러운 채로 내 침대를 쓰게 할 수는 없잖아. 좀 씻겨야지.”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나.”
“뭐가 문젠데?”
초롱초롱한 눈으로 되레 묻는 그녀의 태도에 미소라는 말문이 막혔다. 옆에 서 있던 럭커는 애써 담담한 얼굴을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일단 준비해 두지.”
“응, 고마워.”
럭커가 빠르게 방을 나가 부하들을 움직였다. 그들이 준비해 준 세면실에서 미소라는 몇 주일 만에 몸을 씻고 깨끗한 모습이 되었다. 씻는 와중에 바로 옆 칸에서 들려오는 미연의 꺅꺅대는 소리만 아니라면 훨씬 상쾌한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미소라는 그곳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저녁. 미연이 씻겨 준 덕분에 말끔한 얼굴로 미연의 침대에서 잠들어 있던 태진이 드디어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하루 동안 잠이 들어 있었기에 한동안 희뿌연 정신 때문에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다. 때마침 미연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멍청하게 침대에 앉은 채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진아! 일어났어?”
때마침 수프를 가지고 들어온 미연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자리하는 미연을 멀뚱히 쳐다보던 태진이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쿡 꼬집었다.
“우왓! 뭐 하는 거야?”
“……어라, 꿈이 아니네.”
“그럴 거면 자기 볼을 꼬집으란 말야. 왜 남의 볼을 꼬집어?”
“내 볼이면 아프잖냐.”
“어쭈, 몇 주 못 봤다고 사랑이 식었어?”
복수하듯 태진의 볼을 마주 꼬집어 주는 미연. 아프지 않을 힘을 주는 미연과 태진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배시시 미소를 짓는 순간 그가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걱정했잖냐, 임마.”
“헤헤. 미안해, 미안.”
품에 안긴 채 미연이 조그맣게 사과했다. 한참을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놓지 않는 태진. 그런 그의 팔 안에서 그녀는 얌전히 잡혀 있었다.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태진과 빠져나올 마음의 조각조차 없는 미연. 그렇게 두 명이서 부둥켜안은 채 나름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방해꾼이 물통을 들고 나타났다.
“……크흠.”
가만히 헛기침으로 신호를 보내는 미소라. 네 개의 시선이 그를 확인하더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미연이 두 명이다. 어이없어 하면서 미소라는 물통을 침대 옆에 올려놓고 한마디 했다.
“누가 들어오면 신경 좀 써라.”
“신경 쓰이게 들어오지 마.”
지지 않고 받아치는 미연의 태도는 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태진의 품속에서 혀를 삐죽 내미는 그녀를 날카로운 은안으로 직시하는 미소라. 이윽고 눈싸움에 진 미연이 투덜대면서 태진의 가슴에서 빠져나왔다.
“몸은 괜찮나.”
이제야 미소라는 태진을 바라보았다.
“아직 좀 삐걱거리는 것 같지만 훨씬 나아진 것 같습니다. 몸도 깨끗해진 것 같고, 덕분에 숙면을 취한 것 같군요. 미연아, 네가 씻겨 준 거냐?”
“응응. 잘했지?”
“잘했어, 잘했어.”
미연의 머리를 토닥거리는 태진. 갸르릉 고양이 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미연. 울컥거리는 기분을 감추지 않고 미소라가 말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난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미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프 먹어. 그걸로 일단 위장을 달래 놔야겠더라. 그동안 제대로 된 음식도 못 먹었지?”
그렇게 일러두고 나간 뒤 태진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수프를 깔끔하게 비웠다. 쪼그라든 위장에 조금 음식물이 들어가자 그제야 본격적으로 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꼬르륵대는 배를 쥐다가 견디지 못하고 미소라의 도움을 받아 바닥에 서자 미연이 다시 돌아왔다.
“럭커가 불러. 가자.”
미소라에게 태진을 인계받고 미연은 그를 럭커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회의실로 쓰이던 방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식사까지 차려져 있었다. 소화시키기 쉬운 메뉴들로 꾸며진 향긋한 요리의 냄새에 태진은 위장이 격렬하게 춤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태어나서 이토록 허기가 져 본 적도 또 없었다.
미연이 럭커라고 소개한 중년의 남자와 인사를 하고 태진은 우선은 식사를 마쳤다.
갑작스런 폭식은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을 익히 숙지하고 있는 태진은 가볍게 배를 채울 만큼만 먹은 뒤 식사를 그만뒀다.
“요리가 입에 맞는지 모르겠소. 제국의 음식은 왕국과 다르다고 들었으니.”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니 괜찮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아니오. 앞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려면 이 정도는 당연하지.”
럭커는 담담하게 말했다. 입을 닦은 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동부 반란군의 본부가 이런 곳에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바로 앞, 노마자 강 유역에 제국군들이 모이고 있을 텐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괜찮은 겁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이곳은 지형적으로 은폐가 유리하오. 거기다 우리가 적을 살피기에는 이처럼 좋은 장소도 없지.”
“그럼 안심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상황 설명을 좀 들어야겠습니다만.”
태진은 날카롭게 눈을 떴다.
“난 미소라에게 미연이 카알트라즈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미연은 이렇게 멀쩡히 내 옆에 앉아 있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녀는 내가 카알트라즈에서 구해 온 것이오.”
럭커는 카알트라즈에 대해 설명했다. 카알트라즈는 마법 시대의 것을 추정되는 거대한 유적이 섬 중심에 존재한다.
그곳에는 지금도 강대한 마력이 흐르고 있어 반란군 소속의 마법사들도 들어가기를 꺼려한다.
“삼십 년 전 로츠왈드 독립전쟁 당시 투신의 전사에 대한 활약상은 우리에게도 알려져 있소. 우리 측 마법사들이 하는 연구한 결과 그녀는 마법사적인 자질이 뛰어나다는 결론이 나왔소.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더군.”
미연은 에헤 하고 웃었다. 반란군의 추측대로였다. 미연은 마법사적 자질이 태진보다 위로 평가되었었다.
“미연이 투신의 전사는 아니더라도 분명 같은 동쪽 나라 인간이라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소. 그래서 난 그녀를 카알트라즈로 끌어들인 것이오.”
다소 난폭한 방법이지만 미연의 무력을 막아 대화로 이끌어갈 수 있다. 동시에 텔리오트의 시야에서 그녀를 떨어뜨려 놓을 수도 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작전이었다.
태진은 모든 것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위험 부담도 있고 실행하기 까다로운 부분도 많았을 겁니다. 굳이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미연을 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럭커는 태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로츠왈드 왕국이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하오.”
“우리라면…… 동부 반란군 말입니까?”
“지금은 그렇소. 하지만 지금 각 동맹에 연락을 취하고 있는 중이오. 훗날 세력을 더 확대할 수 있을 것이오.”
태진은 럭커의 의도를 읽어 냈다.
“각지의 반란군을 하나로 묶을 계획입니까?”
“그렇소. 동부, 서부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반란군을 하나의 동맹으로 묶을 것이오.”
“그러고 나서 황성에 반기를 든다…… 그런 생각입니까. 우리 로츠왈드가 도와야 할 것은 그 전쟁이겠군요.”
“그렇소. 이것은 결코 로츠왈드 왕국과 무관한 일이 아니오.”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제국이 지금 왕국을 향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경 지대에 수많은 부대를 돌파하고 왔으니까요.”
“우리도 그 소식을 들었소. 그래서 당신들이 지나갈 진로를 파악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거요.”
“제국이 로츠왈드 왕국을 노리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시선이 밖으로 향한 틈을 타 당신들은 안쪽에서 내란을 일으키고, 우리와 함께 협력하겠다는 뜻입니까?”
럭커는 진중하게 말했다.
“지금 황성 안에서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소. 갑자기 제국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소? 그것이 다 이 황자의 계략이오.”
“이 황자?”
트레빌에서 만난 제국의 이 황자를 떠올리고 태진이 되물었다.
“텔리오트, 가면의 황자 말입니까?”
“그렇소. 지난 몇십 년간 난 황성에서 그의 시종장 역을 해 왔소. 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기에 충실하게 그의 곁을 지켰지. 그러다 병을 털고 일어난 그가 이 황자파의 간부들과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들을 수 있었소.”
럭커의 어조는 침통했다.
“그들은 디요네츠 황제를 살해하고, 그 죄를 왕국에 뒤집어씌운 뒤, 복수를 명목으로 왕국과 전쟁을 벌여 그 땅을 삼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소. 그 전에 눈에 걸리는 미연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를 카알트라즈에 보낸 것이오. 물론 그 제의를 한 것은 나이오. 카알트라즈는 나의 땅이기에, 그녀를 살리기 위해선 이 수밖에 없는 듯했소.”
결과적으로 미연을 텔리오트의 손아귀에서 구해 냈고, 텔리오트의 음모를 이렇게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진도 텔리오트의 음모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꾸며져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미연이 그의 앞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 그는 미연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올리고, 여차하면 쳐 낼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연을 한 차례 쳐다보고 태진은 다시 눈을 돌렸다.
“미연이를 구해 준 일에 대해선 감사드립니다.”
“별말을. 그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이었소. 거기다 이렇게 당신까지 우리 앞에 불러 주었지 않소. 이 황자…… 아니, 이젠 황제겠군. 텔리오트 황제가 일을 벌인 뒤에 어떻게 왕국과 접촉해야 하는지 우리도 고민이었으니 말이오. 당신이 직접 와 주지 않았다면 조금 골치 아팠을 것이오.”
럭커는 진심으로 감사하듯 신중하게 미소를 그렸다. 딱히 꾸며 낸 웃음으로는 보이질 않아서 태진은 진지한 얼굴을 만들었다.
“그럼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당신이 원하는 것은 현 황제의 음모를 막는 것입니까?”
“그동안 제국이 벌인 숱한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다름 아닌 국민들이오. 우리 반란군은 그런 국민들의 소망을 풀어 주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소. 아무리 늦더라도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끝을 내야만 하오. 혹여…… 아키레마 제국이 이대로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말이오.”
그의 어조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 말 속에 담긴 무게감은 이미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황성의 핍박에 고통을 받는 제국민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이 전쟁으로 모든 것을 끝낸다. 설사 제국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소망을 이뤄 주고 싶다.
럭커의 마음이 절절히 태진에게 전해져 왔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황성에서 정체를 숨기고 지냈을까, 그리고 미연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고, 미연을 어떤 마음으로 구해 냈는지,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인 것은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국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럭커가 반색했다.
“요청을 받아 주는 거요?”
“이미 시작되려 하는 전쟁. 텔리오트 황제의 음모인지 뭔지는 알 바 없습니다. 난, 나의 친우들이 있는 로츠왈드 왕국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국군을 모조리 쳐 내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 소.”
“30년 전에 끝내지 못한 전쟁을 이제 끝낼 때가 온 것 같군요.”
태진은 로츠왈드 왕국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찾아온 음모와 텔리오트가 꾸며 낸 미연의 위기. 그 두 가지에 상관관계가 없을 리가 없었다.
이러한 음모를 꾸미는 자를 결코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제국의 이 황자였고 지금은 황제를 시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텔리오트. 태진의 목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해졌다.
태진은 미연을 쳐다보았다.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미연이 그의 시선에 히죽 웃었다.
“또 한 번 그때처럼 난리 쳐 보지 뭐.”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칼잡이를 붙잡으며 웃는 그녀의 미소는 매우 호기로웠다. 태진도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 반란군과 태진 사이에 구두적으로 협정이 체결되고 나자 럭커의 행동은 빨라졌다. 각 지부에 흩어져 있던 동부 반란군들에 전령을 보내고, 다른 반란군 본부에도 연락을 넣었다.
재빠른 그들의 움직임 속에서 태진은 며칠을 보냈다. 영양 보충과 충분한 휴식으로 몸 상태가 좋아지자 그는 틈틈이 마력 운용을 행해 체내에 마력핵을 저장했다.
4일째 밤. 럭커가 각 지부의 전령을 보내고 모든 소식을 전달했을 무렵 태진은 로츠왈드 왕국으로 돌아갈 뜻을 전했다.
“이곳에서 우리와 같이 싸워 주시지 않겠소?”
“죄송합니다. 전 미연이를 데리고 왕국에 돌아가 봐야 합니다.”
현재 태진은 왕국에서 누명을 쓰고 있는 상태다. 제국으로 도망쳤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미연을 데리고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여기서 반란군들과 전쟁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누명을 풀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하는 것이다.
이 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미연과 이야기를 끝냈다. 그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에 맨 처음 깔깔대고 웃다가 끝에는 화를 내는 그녀를 이해시킨 후, 함께 로츠왈드로 돌아가기를 결심했다.
럭커에게 알릴 시점에서는 이미 모든 결정이 내려져 있었다. 럭커는 자신이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황궁에서 미연을 보고도 생각했지만…… 도저히 우리 손으로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군, 당신들은.”
“하하, 죄송합니다.”
“한 가지만 묻겠소. 동쪽의 나라 인간들은 전부 그렇소?”
태진은 가늘게 눈을 떴다.
“글쎄요…… 저도 바운스에서 다른 동쪽의 나라 인간을 만나 본 적은 없기 때문에. 하지만 미연만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도 만만치 않소. 아니 어떤 의미로는 제일 적으로 돌리기 무서운 인물이야.”
웃음기 섞인 말투로 럭커는 허허 웃고 나서 태진과 미연, 미소라를 왕국으로 보낼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에게 국경을 넘을 때까지의 식량과 물, 제국의 지도를 넘기자 태진, 미연, 미소라는 착실하게 돌아갈 준비를 끝마쳤다.
***
5일째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본부를 나선 그들을 럭커가 직접 배웅을 나왔다.
“부디, 무사히 로츠왈드 왕국으로 돌아가시오.”
“이젠 미연이까지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태연하게 대답하는 태진에게 럭커는 로츠왈드 식으로 악수를 청했다. 그 옆에서 미연이 발랄하게 손을 흔들었고, 미소라는 별다른 인사 없이 먼저 몸을 돌렸다.
헤어지기 전 태진은 럭커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주변에 제국군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 어디입니까?”
“서쪽으로 가다 보면 제국의 임시 사령지부가 있소. 지도상으로는…… 이쯤일 거요.”
레무닉과 비슷한 높이의 구릉지가 있는 위치에 럭커가 표시를 해 주었다. 하루 정도 걸으면 도착할 만한 거리에 있는 그곳의 위치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태진은 단단히 감사 인사를 보냈다.
“협력 기념과 미연이를 구해 주신 것에 대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즐겁게 기다려 주십시오.”
럭커는 어리둥절한 와중에 그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태진과 미연, 미소라가 로츠왈드 왕국으로 다시 향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남부 임시 사령지부가 의문의 마법 공격으로 괴멸되었다는 소식이 럭커에게 전해졌다.
그때 이시브는 임시 사령지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한시라도 바삐 도달해야 했기 때문에 구릉지에 들어와 이미 진지 구축을 끝내 놓은 사령지부를 발견했을 때는 진심으로 기뻤다.
태양이 중천을 지나고 있었고 거의 일직선으로 돌파해 온 그의 여정도 드디어 끝을 맺을 것 같았다.
“음?”
말을 달리던 이시브는 하늘 위에서 뭔가 반짝인 듯한 느낌이 들어 눈을 들었다.
사령지부가 있는 위치의 상공에서 무언가가 낙하하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더 존재감을 명확히 해 가더니 이윽고 커다란 불꽃이 되어 사령지부의 한중간에 떨어졌다.
―콰앙!
대지가 흔들렸다. 쿠구구궁― 지진이라도 난 듯이 일제히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이시브는 우선 날뛰는 말을 진정시켜야 했다.
진동이 멎기 전에 바닥에 뛰어내려 말고삐를 붙잡은 그는 진동이 사라질 때까지 필사적으로 다리를 억눌렀다.
이윽고 흙먼지가 퍼지며 그의 시야를 더럽혔고, 그 먼지들이 사라진 다음에 목격한 것은 그의 상식을 초월하는 광경이었다.
“……이, 이게 무슨…….”
사령지부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원래 천막들이 모여 있고 각 부대의 군인들이 활동하기 위해 마련해 놓았던 간이 건물들도 흔적도 없었다.
최소 수백 명의 인간들이 그 자리에서 폭발과 함께 날아갔다.
엄청난 위력의 무언가가 폭발한 흔적은 구릉지에 고스란히 남았다. 지구에서는 ‘크레이터’라고도 불리는 흔적이었다.
입을 벌린 채 이시브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함께 길을 달려온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대장 격인 이시브가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도 어떤 행동도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이시브가 정신을 차린 것은 좀 더 후의 일이었다.
“뭐,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생존자를 찾아라! 주변을 수색한다!”
뒤늦은 이시브의 지시에 부하들이 허겁지겁 크레이터 주변 수색에 나섰다. 일과 중이었기에 진지에는 많은 이들이 남아 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이시브는 구릉지 전체를 살피려 했다.
그 노력에 보상이라도 해 주는 듯 작전 배치 문제로 순찰을 나갔던 병사들이 굉음을 듣고 진지로 속속 귀환했다.
있어야 할 진지가 깨끗하게 사라져 있어서 놀란 것이 첫 번째, 황제의 비서관이 이곳까지 왕림했다는 것이 두 번째로 놀란 지휘관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자네가 이곳의 지휘자인가?”
“아, 저는 부관…… 입니다만, 아무래도 지휘관님은…….”
“알겠다. 그럼 지금부터 임시 사령지부의 지휘관은 너다. 상황을 보고하도록.”
대령으로 계급은 같았지만 맡은 직책이 달랐기에 지휘관은 서둘러 이시브에게 피해 보고를 올렸다.
이시브의 예상대로 진지에 있던 자들은 최소 인원이었고, 병력 피해는 예상외로 적었다. 그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으나 이대로는 보급품도 남지 않았기에 사령지부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시브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지금 시간부로 이 사령지부는 철거한다. 사령부로 돌아간 뒤 다음 지시를 기다리도록. 나도 동행하겠다.”
그의 명령대로 지휘관은 서둘러 병력을 집합시켜 정비했다. 시체를 찾고 싶어도 흔적도 없이 날아간 조각들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시브는 병력들이 모두 모이는 대로 가까운 부대의 위치를 확인하여 그곳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그 모습을 먼 곳에서 쳐다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다른 두 명의 시력으로는 인원조차 파악하지 못함을 알기에 그는 일일이 설명을 곁들였다.
“이제 출발합니다. 다른 부대로 합류할 생각인 듯합니다.”
“따라가서 한 방 더 날려 버리지?”
미연의 말에 태진은 히죽 웃었다.
“그럴 시간까지는 없어. 예상외로 병력을 축내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따라갈 만큼 우리 시간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니까. 뭐니 뭐니 해도 지금은 적진 한가운데라구.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야.”
태진의 의견은 타당했기에 미연도 고집 부리진 않았다.
“그나저나 방금 그거…… 딥 임팩트?”
“비교하자면 아마겟돈 쪽이지. 혜성은 아니고…… 소행성 중 하나를 끌어 온 거니까.”
자신들만이 아는 용어로 이야기해 대는 둘의 모습을 쳐다보던 미소라가 대화를 끊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아 참. 맞아. 우린 갈 길이 바빴지.”
딱히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미연이 성큼성큼 앞으로 뛰어나갔다. 빙글 몸을 돌린 그녀는 두 명의 남자를 향해 손을 붕붕 휘둘렀다.
“어서 와! 빨리 가자!”
“……소리치지 마라, 미연.”
“우히히. 주위에 아무도 없는걸, 뭐!”
저 앞으로 쌩 하고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태진이 기분 좋게 쓴웃음을 머금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 뒤를 따르며 미소라가 중얼거렸다.
“힘이 넘치는군…….”
“하핫.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다.”
두 사람은 앞서 사라진 미연의 뒤를 쫓아 국경으로 향했다.
3일 뒤, 이시브는 한 부대에 도착했다. 원래라면 동부에 가까운 남부 도시에 주둔해 있던 부대였기에 전방으로 배치된 이후 아직 제대로 진지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보고와는 다른 현장을 목격하고 이시브는 지휘관을 불러 호통을 쳤다.
용건을 꺼낸 것은 그 다음이었다.
“당분간 이들을 병력에 포함시켜라. 따로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예, 알겠습니다.”
“사령부로부터 연락은?”
“그……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지휘관은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낮게 목소리를 낮췄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산속을 이동하는 수상한 자들을 발견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시민들에게 받은 정보라고 합니다.”
“전에 그 녀석들과 관련 있는 건가?”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시브는 즉시 전서를 날려 주변 부대에게 지시했다. 그자들을 발견하여 되도록 생포, 그렇지 않으면 최대한 신원과 정보를 밝혀내라고.
보고지는 남부 주둔군 사령부였고, 그 전서가 떠난 직후 이시브는 부하들을 이끌고 사령부가 있는 로필락 시로 향했다.
며칠 뒤 로필락에 도착한 이시브는 그동안 사령부에 도착해 있는 정보들을 통합하여 기어코 그들의 정체를 밝혀냈다.
“은발의 남자와 흑발의 여자. 그리고 노란 머리의 남자. 정확하군.”
예상대로였다. 미소라는 지체하지 않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시디 노트니로 전서를 보냈다.
수도까지 향하는 얼마 없는 전서조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일직선으로 북상했다. 대로 위를 나는 전서조는 하루 동안 쉬지 않고 날아 시디 노트니에 도착했다.
황궁으로 직접 날아든 전서조는 훈련받은 대로 익숙한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은 황제의 비서실이었고, 이시브가 보낸 전서는 발츠 중장의 손을 거쳐 텔리오트에게 들어갔다.
전서를 모두 읽은 텔리오트가 무참하게 종이를 구겼다. 황제의 반응에 발츠가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폐하!”
“럭커가 배신을 했어.”
발츠는 순간 그 이름을 누구의 얼굴과도 연결시키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전 이 황자 시종장이었던 자의 얼굴을 떠올리고 경악했다.
“이 황자궁 시종장 말입니까?!”
“맞아, 그 녀석. 배신을 할 줄이야…….”
텔리오트로 치자면 가장 측근이었던 자였다. 언제나 그의 업무를 완벽하게 보조하는 유능한 자였는데, 그가 미연을 빼돌릴 줄이야. 텔리오트는 상상도 못한 실책에 솔직한 분노를 표출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군. 이시브에게 복귀하라고 해. 그리고 지금 당장 선전 포고를 한다.”
“아, 알겠습니다!”
“제일 먼저 벨린 협곡을 쳐라. 적들의 길목을 막아.”
발츠는 경례를 하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달려 나가려 하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황제의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들어온 자가 있었다. 발츠는 그를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대, 대공 저하!”
아키레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형제는 대공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텔리오트가 황제 위에 오른 이상 레키엔은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원래라면 그 호칭에 화산처럼 화를 냈어야 할 레키엔이었다. 그러나 그는 발츠에게는 전혀 눈길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텔리오트의 앞으로 다가왔다.
“형님. 오셨습―”
“닥치고 대답해라, 텔리오트. 아버지가 승하하셨다니 이게 무슨 망언이냐!”
“로츠왈드에게 암살당하셨습니다.”
텔리오트는 지독하도록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레키엔의 얼굴이 흉악스럽게 일그러졌다.
“암살? 로츠왈드가? 그 말이 진짜란 말이냐 그럼?”
“만스톡이라는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그 독을 만들기 위해선 로츠왈드 왕국 남부에서 피는 스톡이라는 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츠왈드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레키엔의 두 눈에 불꽃이 일었다.
“이 개자식들! 내 뼈와 살이 다하는 그날까지! 네놈들을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시뻘건 증오가 넘실대는 그의 모습은 오랜 군인으로 익숙해져 있는 발츠조차도 몸을 떨게 만들었다. 발츠는 차마 입도 열지 못하고 얼어붙었고, 레키엔의 시선은 다시 텔리오트를 내려다보았다.
“놈들은 어디에 있지?”
“아직 국경 너머입니다. 전쟁을 이제 시작할 예정입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텔리오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형님! 그것은 위험합니다!”
“위험? 위험이라고 했느냐! 아버님이 저 더러운 자식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다! 이 내가 원수를 갚지 않으면 누가 갚는다는 것이냐!”
레키엔의 기세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텔리오트의 가면조차 부술 듯한 안광을 뿜으며 레키엔은 소리쳤다.
“넌 여기에 붙어 있어라. 아버지의 원수는 바로 나! 레키엔 휴 아키레마의 손으로 갚을 것이다!”
그는 곧바로 황궁을 뛰쳐나가 산하의 병력을 끌어 모았다. 아직 1황자파에 속해 있던 자들이 병력을 보충해 주었고, 총 5천 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룬 레키엔의 부대는 4일 뒤 로필락을 목표로 남하를 강행했다.
같은 시각 텔리오트가 명령한 벨린 협곡 점령전이 개시를 알렸고, 이로써 로츠왈드 왕국과 아키레마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키레마 제국에서 로츠왈드 왕국으로. 한 달 사이 국경을 두 번이나 넘게 된 태진과 미소라는, 이제 미연까지 합세하여 로츠왈드로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태진의 체력도 원상 복귀했고, 인원이 한 명 늘어난 덕에 주위를 살필 수고를 서로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가 웬만한 여정에는 익숙해져 있어 제국군의 눈에 띄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제국군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정체를 확인할 길이 두어 번뿐이라 속이 탈 지경이었다.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대로 그들이 지나간 경로라고 짐작되는 곳을 뒤졌지만 발자국 하나 건지지 못했다.
결국 세 명이 국경에 다다랐을 때 수색에 나갔던 제국군들은 귀환 명령을 받고 부대로 속히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 근처. 반나절만 걸으면 완충 지대로 들어서는 위치에서 세 명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쫓아오던 놈들이 사라졌어.”
“음, 그래? 어쩐지 아까부터 기척이 없더라.”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한 모금 마신 미소라가 그것을 태진에게 넘겼다. 그것을 받으며 태진이 미소라의 의견을 물었다.
“정말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태진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물어본 사항이었다. 국경을 넘기 전까지 결정하라고 말한 뒤 태진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은 것이다. 미소라는 그가 물을 마시길 기다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함께 길을 떠난 책임은 쳐야 한다.”
리트미소에서 미연과 함께 여행을 시작한 일을 말하는 미소라. 태진은 미연을 슬쩍 쳐다보았다. 눈빛을 받은 미연이 미소라에게 헤죽 웃어 보였다.
“태진이도 만났구. 이제 나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걸. 미소라까지 이 전쟁에 끼지 않아도 돼.”
“아니…… 지금 돌아가도 장로님께 드릴 말이 없다.”
맨 처음 물었을 때 미소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리트미소의 장로가 나를 같이 보낸 이유는 미연의 신변이 안전해질 때가지 그녀를 도우라는 의미라고. 그런 의미에서 미소라는 굳게 말했다.
“아직 미연, 너의 안전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미소라는 미연의 곁을 떠나길 거부했다.
태진은 빙그레 미소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미소에 미소라가 눈을 돌렸다. 태진의 웃음이 참으로 거북했기 때문이다.
미연이 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진을 보았다. 태진은 손을 저으며 남은 육포를 입 안에 털어 넣고 일어섰다.
“그럼 가 봅시다. 국경 가까이까지 제국군 부대가 전진 배치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미연이 가벼운 동작으로 일어섰다.
가장 후방에서 미소라가 따라오고 태진이 머릿속에 지도를 띄운 채 길을 안내하는 식으로 그들은 레무닉 방향으로 남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에 완충 지대가 나타났다. 높은 언덕 위에 잠시 발을 멈춘 태진은 몸을 엎드린 채 시각에 집중했다.
마치 망원경처럼 먼 곳에 있던 사물도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국경 바로 앞에 제국군이 진을 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때?”
“조금만 더 늦었으면 국경을 지나기가 까다로웠을지도. 아직은 구멍이 있어. 가자!”
미연의 물음에 성실히 대답한 그가 몸을 낮춘 채 언덕을 옆으로 돌았다. 이 길은 로츠왈드 왕국에서 넘어올 때도 사용했던 길이었다.
일반적으로 길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가파른 비탈길에 자리 잡은 울퉁불퉁한 돌들을 밟고 밑으로 내려온다.
태진을 제외한 다른 두 명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태진은 둘을 이끌고 제국군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국경을 넘었다.
완충 지대에 들어서 한참 걸어간 뒤에야 세 명은 긴장을 풀었다.
“이제 좀 있으면 이 땅도 별 의미가 없어지겠지?”
완충 지대란 국경을 맞대고 양측 부대가 시야에 보이면 불필요한 전력 소모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의견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미터법으로 계산하여 약 3㎞ 정도 될 듯한 땅을 독립 전쟁이 끝날 때 협약으로서 완충 지대로 지정, 두 나라가 상대국의 승인 없이는 발을 디디지 못하게 했다.
그 협약이 지난 30년간 이어지고 있었지만 미연의 말대로 이제 그것도 별 소용없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곧 있으면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날 거야. 제국군이 맨 처음 노릴 곳은…… 아마도 벨린 협곡이겠지.”
벨린 협곡은 로츠왈드로 들어오는 관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이 점령당하면, 로츠왈드는 아키레마 제국으로 들어가는 가장 수월한 문을 잃게 되는 것이고, 아키레마는 로츠왈드로 들어오는 가장 좋은 입지를 선점하게 된다.
양측의 입장이 상반되게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벨린 협곡이었다. 그렇기에 제국군이 쳐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벨린 요새를 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태진의 생각이었다.
“아마 팰리슈도 그렇게 생각하고 대처할 거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루 빨리 왕성으로 돌아가는 것.”
미연도 그것에 동의했다. 그들에게는 제국 반란군 연합이라는 큰 아군이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 그들이 힘을 대 줄 것이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미연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했다.
셋은 해가 진 어두운 완충 지대를 걸었다. 별을 보고 방향을 찾는 태진이 있기에 길을 헤맬 걱정은 없었다.
일정한 방향으로 꾸준히 걷자 그곳에 드디어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기척도 느껴졌고, 그것이 국경을 순찰 중인 국경 수비대라는 사실을 태진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어쩔 거지?”
미소라가 물었다. 태진은 가만히 레무닉 쪽을 바라보다 얼굴을 돌렸다.
“미소라 씨는 그때 왜 일부러 잡혔습니까?”
“그쪽이 체력 보충도 할 수 있고 편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럼 우리도 그러는 게 제일 좋지 않겠습니까.”
태진의 눈동자는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미연이 그의 의도를 깨닫고 똑같은 눈빛을 만들었다. 미소라는 훗 하고 웃음 비슷한 숨소리를 내더니 되레 앞장섰다.
은발을 휘날리며 뚜벅뚜벅 걸어간 그는 국경 수비대가 자신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자 멀리서 돌을 던져 시선을 돌렸다.
“누, 누구냐!”
어둠에 싸인 완충 지대에서 나타난 괴한을 향해 대원이 검을 꺼냈다.
“무슨 소리야?”
“어? 왜 그래?”
그의 외침에 주변을 돌고 있던 다른 대원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웅성대면서 모인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은발을 휘날리며 유유히 서 있는 한 남자. 그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너, 넌!”
놀라는 그들을 향해 미소라는 담담히 얘기했다.
“또 잡히러 왔다.”
***
레무닉 국경 수비대에 의해 탈주했던 강태진, 미소라 체포. 그리고 신미연이라고 신분을 밝힌 여성도 확보. 수도로 긴급히 이송 실시.
―그런 전서가 도착한 왕성은 다시 발칵 뒤집혔다. 가장 먼저 이 전서를 읽은 에스타냐가 허겁지겁 팰리슈에게 그것을 넘겼고, 경악한 팰리슈는 하이듀크와 아서, 아리스까지 집합시켰다.
소식은 들은 하이듀크는 집무실 문을 부술 듯이 열며 달려 들어왔다.
“무슨 말이냐!”
팰리슈는 설명하지 않고 그에게 전서를 넘겼다. 내용을 모두 읽은 하이듀크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역시 태진! 기어코 미연을 구한 거로군!”
그것은 친우로서 순수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미소가 가득 찬 그 얼굴을 보고 아리스도 덩달아 기뻐했다. 하이듀크에게서 받은 전서를 아리스도 읽은 다음 그녀가 기운차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태진 님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거로군요!”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아서였다. 팰리슈는 날카롭게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서, 아마 태진이 돌아오면 너에게 할 말이 많을 거야. 그가 돌아온 뒤 이야기하자. 그들의 이송 인계는 원래대로 아서, 네가 맡아. 대신 라스터를 그 자리에 동석시킨다. 이의 없지?”
“……예, 전하.”
그렇게 결정된 일주일 후. 레무닉에서 최고 속도로 태진, 미연, 미소라가 이송되어 루위스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태진은 밧줄이 묶여 있었지만 매우 당당한 포즈로 아서와 대면했다. 굳은 얼굴의 아서는 태진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스터가 대신 앞으로 나와 세 명을 인계받고 이송을 완료시켰다. 숙소를 찾아가는 이송대를 보낸 후 라스터는 세 명을 왕성의 특별 감옥까지 옮겼다.
그 사이 아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세 명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초조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감옥에 가두는 이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라스터는 문 너머로 태진에게 일렀다.
“알고 있겠지만 너의 귀환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임시로 수감하는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 주게.”
“이해합니다, 라스터. 팰리슈에게 잘 부탁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태진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고 라스터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감옥을 나가기 전 미연을 한 차례 쳐다보고 그녀에게도 친근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미연도 손을 흔들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인사했다.
라스터가 감옥을 나간 후 아서는 잠깐 걷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미연은 눈동자를 돌리다가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고, 미소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것은 태진뿐이었다.
아서가 고개를 들어 방 안의 태진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몇 주 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
뭐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결국 아서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감옥을 떠났다. 태진은 어깨를 으쓱대고 침대에 몸을 걸쳤다.
한동안 감옥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 인원 중 조용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한 명이 방 안에서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그녀의 연인이 대꾸를 해 주었다. 조용하던 남자도 가끔 이야기에 끼어들자, 간수는 이내 주의 주는 것을 포기했다.
“아, 거기 과자 가게. 아직 있어?”
“빵집으로 바뀌었어. 하지만 과자는 아직 할 거야. 나중에 한번 가 보자.”
“응! 그러자!”
에헤헤 웃는 미연의 웃음소리가 벽을 넘어 들려왔다. 태진은 덩달아 미소를 지으려다가 감옥으로 다가오는 약한 발소리를 감지했다.
간수가 일어서서 누군가를 맞이했다. 약간 청각에 집중하자 그 발소리가 누구인지 금방 구분해 냈다.
그 발소리는 태진의 방 앞에서 멈췄다.
“태진 님!”
아리스였다. 그를 구출해 줬을 때와는 달리 오늘은 당당하게 찾아온 것이다. 아리스는 반가움을 얼굴에 가득 띄운 채였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아마 곧 감옥에서 풀려나 혐의를 벗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웃은 뒤 태진은 물었다.
“제가 부탁한 것, 잘해 주셨습니까?”
“아. 물론이에요. 아서의 감시 말이죠?”
간수를 의식하듯 목소리를 낮춘 아리스는 또박또박 설명했다.
“태진 님이 탈출하신 뒤에 아서는 곧 추적대를 조직하여 쫓아갔어요. 그리고 삼 주쯤 뒤에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왔죠. 그 이후로는 줄곧 뮈인터트의 수색에 매달렸어요. 저도 그 일을 도왔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요. 그리고…… 녹산, 그의 시신 처리도 했어요.”
“아서가 담당했습니까?”
“아뇨. 그것은 제가…… 자살로 결론지었어요.”
태진을 탈출시킨 후 곧 아리스는 알게 되었다. 그날 밤 미소라가 녹산에게 한 일을. 그가 잠깐 뒤에 합류했던 것은 녹산의 입을 죽음으로 막기 위해서였다.
“말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아리스를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있어요.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괜찮아요.”
태진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녹산이 살아 있었다면 아리스의 위치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아리스가 탈옥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다른 불리한 증인을 처리해야 했다.
아리스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주욱 아서의 옆에서 그의 일을 도왔어요. 뭐든지 같이하려고 했죠. 그래도 아무것도 얻을 수는 없었어요. 그는 정말 자신의 일만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수상한 점은 없었다, 라는 겁니까.”
“예. 안타깝게도…… 죄송해요. 도움 되지 못해서.”
“아니오, 괜찮습니다. 그를 감시하라고 한 것은 더 이상 어떤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더 이상 어떤 일을요?”
“예. 당신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뭔가를 하려고 해도 못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 당신은 잘해 줬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퍼졌다. 헤헤 하고 솔직하게 웃는 그녀는 곧 남아 있는 일이 있다며 인사를 했다.
“또 올게요.”
“아마 그전에 감옥에서 나갈 겁니다.”
“그럼 더 좋고요.”
손을 흔들며 아리스를 보낸 태진. 아리스는 미연의 방을 지나치다 작은 창으로 밖을 보고 있던 미연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미연도 어정쩡하게 인사하자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감옥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기를 기다린 다음 미연이 목소리를 올렸다.
“헤에― 널 잘 따르네? 몇 살?”
“올해 이십사 세던가…… 왜? 신경 쓰여?”
“흐흥, 아니 그냥. 어딜 가나 우리 낭군님은 인기도 많구나 하고.”
질투 어린 미연의 말에 태진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짓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만 참아. 여길 나가서, 곧 정식으로 인사시켜 줄 테니까.”
“어허, 사랑의 라이벌끼리 인사를 시킨다구?”
“뭐래냐.”
지지 않고 서로 대꾸해 주고, 그들은 태평하게 낄낄댔다.
“아서는?”
팰리슈의 집무실에는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국왕 내외와 하이듀크, 라스터, 아리스까지. 일단 현 사건과 관련된 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는 한 명이 아직 오지 않았다. 팰리슈는 그를 찾았고, 대답한 것은 에스타냐였다.
“저택에서 출발하였다니 곧 도착할 거야.”
태진이 루위스에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났다. 아침이 되어 비밀리에 모인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태진의 처벌에 관한 의논이었다.
그 의논을 위해 빠져서는 안 되는 자가 아서. 팰리슈는 아서가 도착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에스타냐가 내온 차를 모두가 한 모금씩 들이마셨을 때 아서가 도착했다. 정중하게 문을 두들기고 들어오는 그의 얼굴은 하룻밤 사이에 꽤 초췌해져 있었다.
아서는 앉지 않고 테이블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래…… 간밤에 잠은 잘 잤어?”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말과 표정이 달랐다. 아리스는 문득 그가 측은해졌다.
여기 있는 모두가 아서가 왜 이런 꼴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태진이 제국의 첩자라는 것은 아서의 주장이었다. 만약 제국으로 가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보기 좋게 깨졌다.
아서는 침을 삼켰다.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불렀는지 알 거야, 아서. 국왕인 내가 앞에 나서긴 그러하니, 아리스, 부탁해.”
팰리슈에게 지명당한 아리스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온 친구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올곧았다.
“아서, 넌 지난 한 달 넘게 특사대장 강태진 님에게 첩자의 혐의가 있다고 주장해 왔어. 실제로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들도 나왔기에 국왕 전하께서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셨지. 잘 생각해 보면 기동대장인 너에게 누군가의 죄를 증명한 권리를 없었는데도 너는 스스로 나서서 그 일을 해 왔어.”
“…….”
“나도 그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어. 아무튼 그렇게 너는 태진 님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그를 체포, 수감시켰어. 하지만 그 후 태진 님은 감옥에서 탈출했고 제국으로 갔지. 그렇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너의 우려와는 달린 태진 님은 돌아왔어. 미연 님까지 데리고 말야.”
아서는 고개를 숙였다. 아리스는 숨을 길게 내쉬고서 말했다.
“이것을 또 다른 길로 설명해 줄 수 있어?”
“…….”
대답은 없다.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하이듀크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태진에게는 아직 뮈인터트를 탈옥시켰다는 혐의가 남아 있긴 해. 하지만 이젠 예전 기동대장의 주장처럼 제국의 첩자라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었어. 그렇기에 우리는 태진의 처벌에 대해 고심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이해하겠지?”
“예…….”
천천히 대답하는 아서. 뒤이어 그에게 물은 것은 아서의 아버지인 라스터였다.
“아서야, 지난 밤 동안 스스로 많이 생각을 해 봤을 줄 안다. 이제 대답해 보거라. 태진은 제국의 첩자라고 생각하느냐?”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라고 다시 말하려 하는 라스터를 팰리슈가 손을 들어 막았다.
라스터가 말을 삼키고 아들이 꺼내 놓는 답을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이 끝난 것은 조금 후,
“……아닙니다.”
아서의 부정으로였다.
“저의 착오입니다. 태진 님은…… 제국의 첩자가 아닙니다.”
아리스는 기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됐다, 이제 태진 님은 풀려날 수 있다!
이를 악문 듯한 어조에 팰리슈는 목소리를 조금 크게 냈다. 아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 우린 여기서 너에게 굴욕을 주려는 게 아냐. 주장한 네가 인정하지 않으면 이 뒤로 아무 결정도 할 수 없기 때문이야. 우리도 그동안 너의 주장에 마음이 흔들렸고, 손을 들어 줬다. 그것은 우리의 실책이야. 우린 모두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이제 네가 그것을 인정해야만 했던 것이야.”
“인정합니다. 제가, 저의 실수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더 이상 책하진 않겠어. 하지만 아무 처벌을 주지 않는 것도 이상하니―”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는 팰리슈.
“이틀간 근신을 명한다.”
“……예?”
아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들었다. 그는 최소한 직위 박탈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현신의 전사에게 누명을 씌운 죄는 크다. 그렇기에 어떤 처벌이라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것은 너무나 작은 벌이었다.
팰리슈의 얼굴은 근엄했다.
“언제 제국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능한 기동대장을 버릴 수는 없지 않겠어? 넌 앞으로도 우리 왕국을 위하여 더 열심히 일해 줘야 해.”
너무나 단호한, 그리고 너무나 왕다운 말. 하이듀크와 라스터가 보기 드물게 같은 포즈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타냐와 아리스는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아서는 팰리슈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하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참을 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목을 비집고 뚫어 흐를 것 같은 그 감정을 참아 내기란 고역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진 둑처럼 용솟음칠 것 같아 악착같이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가 봐.”
“……감사합니다, 폐하.”
팰리슈의 지시가 떨어지자 아서는 쌩하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 앞에서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
사라진 아서의 자리를 한참 쳐다보던 팰리슈가 고개를 돌리자, 30년 지기 친우인 하이듀크가 히죽이죽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우리 국왕 폐하께서 오랜만에 좀 멋있었어. 안 그래, 라스터?”
“음, 동감이네.”
원수 같은 친구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팰리슈가 으엑 하는 얼굴로 뭐라고 항변을 하려고 했을 때, 그는 바로 옆에서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부인을 발견했다.
“타냐! 당신까지!”
“맞잖아. 뭘 그래?”
결국 팰리슈는 “내 편은 아무도 없어…….”라며 무너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즐겁게 대소하는 모두를 보며 아리스는 난처하게 서 있었다.
그때, 잠깐 현 정황을 잊고 웃을 수 있었을 때, 현실은 돌연 집무실로 날아들었다.
“저, 전하!”
국왕의 비서 중 한 명이었다. 에스타냐가 자리에 없어서 가장 높은 직책이었던 그 비서가 직접 집무실에 뛰어 들어온 것이다.
에스타냐가 먼저 일어났다. 비서가 그녀에게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넘겼다.
“좀 전에 전서조가 도착해서, 벨린 협곡에서, 전서가 와서!”
“알았어. 비서실로 복귀하도록.”
에스타냐의 단호한 명에 비서가 후다닥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전서를 읽은 에스타냐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제국군이 공격을 시작했대! 목표는 벨린 요새. 지금 양측 군이 완충 지대에서 전면전을 펼치고 있다는데?!”
선전 포고는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 벨린 요새에 선전 포고가 닿았을 때 이미 제국군은 완충 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벨린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가 그보다 늦게 완충 지대로 들어서 맞섰지만 대응이 느렸다.
그 사이 제국군은 요새로 확실히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전서를 보낸 것은 그 후였다. 그렇기에 지금이면 또 전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팰리슈는 지체하지 않고 하이듀크와 라스터에게 기사단 편성을 명했다. 전시 체제로 뒤바뀌자마자 둘의 움직임은 빨랐다.
라스터가 임시로 맡고 있던 신웅 기사단은 곧 하이듀크가 맡게 되었다. 둘은 팰리슈의 전권 위임으로 산하의 기사를 모두 불러 모아 조속히 기사단을 전시 편성으로 변모시켰다.
랑퀘지 단장 또한 마법사단 소속의 마법사들을 각 기사단에 배치했다.
그 작업은 굉장히 빨랐으나 보통이 아닌 일임에는 틀림없었기에, 오후 늦게나 되어서야 편성이 완료되었다.
그 사이 또 하나의 전서가 날아들었다.
“벨린 요새 방어 실패…… 생존 병사들과 함께 후퇴했다, 라.”
대응이 늦은 것은 치명적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당했는지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벨린 요새가 함락되어 제국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 하나만은 확실했다.
팰리슈는 더 이상 늦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단을 내리자마자 그는 기사의 호위조차 잊고 특별 감옥으로 달려갔다.
졸고 있던 간수가 그의 등장에 화들짝 잠을 깨고 일어났다. 그의 문책을 뒤로하고 팰리슈는 곧장 세 명이 갇혀 있는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허겁지겁 간수가 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느긋한 자세로 태진과 미연, 미소라가 걸어 나왔다.
“우와…… 진짜 오늘 열어 주네?”
미연이 혀를 내둘렀다. 팰리슈는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얼굴로 미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연…… 정말 미연 맞아?”
“어라라, 이게 누구셔. 타냐한테 잡혀 사는 팰 아냐?”
“누, 누가! 잡혀 살…… 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 적 별명이야!”
팰리슈가 환희가 찬 얼굴로 소리쳤다. 결코 화를 내는 어조는 아니었다.
태진은 그의 앞에 뚜벅뚜벅 걸어왔다.
“제국군이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마, 맞아. 어떻게 알았지?”
“나의 처벌이 결정되지 않아도 전쟁이 시작되면 나를 찾아오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제국군의 작전 배치로 봤을 때 아마 오늘 시작되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태진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팰리슈는 감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감옥으로 하이듀크와 라스터, 아리스가 달려왔다. 팰리슈가 감옥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일을 내팽개치고 쫓아온 것이다.
“미안해, 태진. 그동안 내가 한 짓, 진심으로 사과해.”
고개를 숙이는 그를 태진은 손을 뻗어 일으켰다.
“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잖습니까?”
태진의 웃는 얼굴. 팰리슈는 그와, 옆에 서서 하이듀크와 라스터에게 손을 흔들고 있던 미연을 둘러보았다. 30년 전과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친우들의 모습을 두 눈에 새기며, 그는 한 나라의 국왕이라는 위엄과 오래된 친우의 우정을 담아 말했다.
“신의 전사들이여. 다시 한 번 우리 왕국을 구해 줘.”
태진과 미연은 약속이나 한 듯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물론이지!”
그날부로 태진은 로츠왈드 왕국군의 총사가 되었다. 팰리슈에게서 병력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그는 조직되어 있던 흑안·신웅 기사단의 전력을 머릿속에 입력시키는 것과 동시에 또 하나의 기사대를 만들기를 원했다.
“미연을 위한 거군.”
하이듀크는 기억하고 있었다. 30년 전. 독립 전쟁에서 그 어떤 기사단보다 큰 공훈을 올린 것은 바로 미연의 기사대였다.
태진은 하이듀크의 도움을 받아 쓸 만한 인재를 모았다. 거기에 미연의 눈으로 판단하게 하고, 그 결과 미소라와 아리스도 미연의 기사대에 포함되었다.
대충 구성이 완료된 기사대를 둘러보던 미연은 고개를 갸웃댔다.
“뭐랄까…… 좀 부족하단 말야. 좀 실력 좋은 남자 없어? 좀 힘 있는 검술을 하는 녀석으로.”
태진은 기사대의 균형을 고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요청을 받은 하이듀크는 금방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태진도 같은 남자를 떠올렸고, 둘의 시선이 얽혔을 때 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어라, 어디 가?”
“쓸 만한 녀석을 하나 데려올게.”
그렇게 말을 남기고 태진이 향한 곳은 슈펠가의 저택이었다.
근신 중이던 아서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태진은 슈펠가의 부지 내로 들어서면서, 왕성에서 납치당했을 때 맡았던 공기와 같은 냄새를 맡았다. 이 부지 어느 곳의 건물이었던 모양이었다.
밤에 찾아온 태진을 시종들은 조심히 맞아 주었다. 아서의 위치를 물은 그는 혼자서 아서의 방문을 노크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아서가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찾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태진은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불 하나 켜지 않고 어두운 달빛만이 가득 찬 아서의 방은 생기를 잃고 있었다.
아서는 빛을 잃은 눈동자로 태진을 바라보았다. 태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국에 협력하고 있던 겁니까?”
직접적이면서도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질문이었다. 아서는 빠른 대답을 하진 않았다.
“……어떻게 눈치 채셨습니까? 제가, 태진 님을 함정에 빠뜨린 것을.”
“레펠을 훔치러 들어온 자였습니다. 그때 미소라가 훔치러 왔다가 가면을 떨어뜨리고 갔다고, 당신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랬습니다만.”
“특이한 점은 가면뿐이었습니까? 몇 번 검을 나눴다면 눈빛이라거나 다른 움직임의 특징이 있었을 겁니다.”
아서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뿐이었습니다. 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전 그 점이 걸렸습니다. 특이점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미소라는 국경 수비대에 잡혔을 때 모자까지 분명히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
“모자가 없었다면 분명 그 은발이 더 큰 특징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은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가면 말고는 특이점이 없다고 당신은 방금도 말했습니다. 이것은 작다면 작은 모순점입니다. 하지만 전 그것이 당신의 실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잠깐 쉬고 태진은 말을 이었다.
“레펠을 훔치려 했던 자는, 미소라가 아닌 녹산 아니었습니까? 당신은 뮈인터트와 녹산을 탈옥시켰고, 녹산을 이용하여 미소라와의 연계를 만든 다음, 그 죄를 저에게 돌렸습니다. 틀립니까?”
아서는 이마를 손으로 쥐었다. 조금 뒤 너무나 무겁고 눅눅한 목소리로 아서는 응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벌인 짓입니다.”
“미연이도 제국에서 이 황자의 음모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습니다. 그것과 이 사건, 관련이 있는 일입니까?”
“있습니다. 왜냐면 제가 부탁한 것이니까요.”
아서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트레빌에서 몰래 텔리오트와 접촉한 것. 그리고 그 뒤 자신이 벌인 일. 뮈인터트는 도망가지 못하게 어느 창고에 묶어 놓았다고 진술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태진은 침을 삼켰다.
“……왜 이런 일을 한 겁니까?”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아서의 어조는 단조로웠다.
“아리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트레빌에서, 그 만찬에서, 아리스의 눈물을 당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서가 눈을 들었다. 빛을 잃었던 눈동자에 아주 조금 원망의 기운이 깃들었다.
“당신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신과 당신의 연인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게서 아리스를 빼앗아 갔고, 빼앗아 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당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는 이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알겠습니까!”
태진은 느꼈다. 그의 진심을 읽었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다.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는 그 모든 마음을 받아들였다.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사과해 봤자 아무것도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조용히 타오르는 눈동자를, 태진은 흔들림 없이 바로 보았다.
“로츠왈드 왕국이 위험합니다. 나의 친우가, 당신의 아버지가 세운 이 나라가 지금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과거를 가졌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왕국을 위하여 다시 싸워 주십시오!”
말을 내뱉는다.
“로츠왈드의 긍지 높은 기사, 아서 슈펠!”
바람이 불었다. 창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태진과 아서를, 분명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히 자신은 한 남자를 좌절시키려 했다. 거기다 한 나라까지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그 나라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손을 뻗어 주고 있었다.
이 무슨 웃긴 일인가. 이 얼마나 눈물 나는 희극인가.
아서는 자신이 울고 있다고 뒤늦게 깨달았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주체하지 못할 눈물이 뺨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둘러 손을 들어 닦아 보지만 마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젠장…….”
가만히 중얼거리고 아서는 눈을 들었다. 눈물로 뭉툭하게 변형된 태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눈빛 그대로 그곳에 서 있다.
“……정말 당신…… 못 당하겠어…….”
그것이 긍정의 대답임을 태진은 굳이 또 묻지 않았다.
***
날이 밝았다. 미연은 태진과 함께 밤을 보냈다. 침대에서 슬그머니 눈을 뜨며 옆자리를 더듬었다.
“어……?”
밤새 있었을 온기의 근원이 사라졌다. 만져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연은 이불로 가슴께를 가리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서 무언가 꿈틀대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리자, 그것이 익숙한 남자의 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해?”
“아, 깼어?”
태진이 고개를 돌렸다. 젖은 머리를 닦고 있었던 듯 수건이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미연은 적당히 근육이 잡힌 그의 몸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수건 사이로 삐죽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새삼 낯이 익은 색임을 그녀는 뒤늦게 알았다.
“머리카락 다시 염색했어?”
“응. 이제 다시 신의 전사니까 말야. 신의 전사의 특징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흑발에 흑안 아니겠냐.”
히죽 웃으며 마저 물기를 제거하는 태진. 그런 그를 침대에 엎드린 채 바라보며 미연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좋다아. 다시 검은 머리로 돌아간 거 보니까. 역시 검은 머리가 더 좋아 난.”
이불을 둘둘 감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미연. 아직은 축축한 태진의 머리칼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그녀가 키득댄다.
태진은 그녀의 볼에 키스를 해 주고 말했다.
“어서 옷 입어. 모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피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는 그녀를 달래서 옷을 입힌다. 세면과 아침 식사까지 간단히 끝낸 후에 그들은 서로의 옷매무새를 체크해 주었다. 지구에서는 당연했던 이 생활을 바운스에서는 1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겨울의 초입. 눈도 거의 오지 않는 바운스의 기온이기에 추운 가을 정도의 날씨였다. 어울리는 복장인지 서로 확인해 준 뒤 그들은 별궁을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아리스였다. 아서와 함께 행동하고 있던 그녀가 태진의 머리카락을 보고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렸다.
“태, 태진 님! 그, 그 머리는!”
“색이 바뀌었군.”
그들의 뒤에서 미소라가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준비를 끝낸 모습. 미연이 손을 살짝 흔들고 태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노란색보다는 이편이 어울리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미소라의 미묘한 반응에 미연이 금방 투덜댔다. 태진은 빙그레 웃고서 아리스에게 물었다.
“팰은 집무실에 있습니까?”
“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계셔요.”
다섯 명은 함께 국왕 집무실로 향했다. 드물게도 예복을 걸친 팰리슈는 검은 머리에 눈도 뜨고 있는 태진이 나타나자 국새를 집어 던질 정도로 놀랐다.
“……오랜만에 보니까 가슴이 놀라는군. 그래,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지.”
“잊지 말아 주십시오.”
씁쓸하게 태진이 웃었다.
곧 집무실에 기사 정복을 입은 하이듀크와 라스터도 등장했다. 출정식을 위한 복장이었고 출정 길에 오르면 일반 기사복으로 돌아오게 된다.
본래대로 돌아온 태진의 모습에 모두가 한 번씩 감탄을 터뜨리고 나서 팰리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어. 가 볼까?”
팰리슈가 앞장서서 왕궁을 나섰다. 왕성의 광장에는 수천의 기사들이 운집하여 국왕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팰리슈가 근엄한 자세로 등장하자 기사들이 함성이 일순 터져 나왔다. 팰리슈가 손을 뻗어 그것을 잠재운 뒤에 입을 열었다.
“로츠왈드 왕국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이여! 30년 전, 우리는 아키레마 제국의 폭정에서 벗어나 우리의 옛 땅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아키레마 제국은 더러운 누명을 우리에게 씌워, 우리들의 땅을 다시 한 번 점령하려고 하고 있다! 로츠왈드의 건국왕! 나, 팰리슈 반 로츠왈디스는 먼 옛날 강성했던 로츠왈디스 가문의 조사들의 혼을 두고 맹세하겠다! 결코 이 땅을 두 번 다시 저들에게 빼앗기지 않겠노라고!”
마치 이날을 위하여 그동안 연습이라도 한 듯한 우렁찬 팰리슈의 목소리. 수천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고, 팰리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사들이여, 짐의 이 소원을 들어주겠는가!”
“물론이옵니다, 전하!”
“명만 내려 주시옵소서!”
우오오오오오! 수천의 음성이 하나가 되어 팰리슈를 덮쳤다.
마치 물리적인 힘을 받은 듯이 팰리슈는 그 목소리를 전신으로 받아 냈다. 이길 수 있다. 도저히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기사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그렇다.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하늘도 우리들의 승리를 위하여, 삼십 년 전과 같이 우리에게 당신의 전사들을 보내 주셨다!”
기사들이 잠깐 웅성거렸다. 그들도 로츠왈드 왕국의 자식들. 팰리슈의 뜻하는 바에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소개하겠다! 삼십 년 전 우리를 제국의 손에서 구해 내었고, 이번에도 우리를 이끌어 줄 신의 전사들이다!”
미연은 왜 태진이 도로 염색을 했는지, 기사들 앞에 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도, 동쪽의 나라에서 온 자들이다!”
“신의 전사? 저, 정말!”
“흑발이다! 눈동자도 까맣다! 신의 전사들이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기사들이 경악에 가까운 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파도처럼 순식간에 전 기사들에게 퍼져 나갔다. 수천의 목소리가 저마다 각자 외쳐 대자 광장은 금방 엄청난 소란에 빠졌다.
이것을 멈춘 것은 신웅 기사단을 맡은 하이듀크였다.
“시끄럽다! 기사가 된 자들이 이 무슨 소란들이냐!”
수천의 소음은 일순 사라졌다. 마법으로 소리를 몽땅 지운 듯이 고요해진 광장을 한 차례 노려보고 하이듀크는 헛기침했다.
태진이 앞으로 나섰다.
“삼십 년 전에 이미 동쪽의 나라로 돌아갔지만 친우의 부름을 받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로츠왈드 왕국의 미래는 여러분들 손에 달려 있습니다. 끝까지 저와 함께 싸워 주겠습니까?”
옆에서 미연이 손을 번쩍 든다.
“싸우자! 나가자! 이기자! 아자!”
우와아아아!
수천의 팔이 올라갔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돌아온 건국 영웅들의 인도에 따를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한 것이다.
그 함성은 오래토록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만은 팰리슈도 하이듀크도 말리지 않았다. 태진과 미연의 등장은 왕국군의 사기를 단숨에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
그 사기 그대로 기사들이 출정을 시작했다. 태진의 조치로 루위스에 남게 된 팰리슈는 왕국군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신의 전사들을 불렀다.
“신의 전사들이여, 잘 부탁해.”
태진과 미연은 엄지를 치켜세우고 몸을 돌렸다. 팰리슈는 그 제스처가 무슨 뜻인지 3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다 깨닫고,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왕국군은 대로를 타고 북상했다. 훈련이 충분한 기사들은 가볍게 행군을 참아 냈고, 체력적으로 약한 마법사들도 말과 마차를 이용하여 모두가 낙오자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사이 벨린 협곡 앞에 진을 친 국경 수비대는 더 이상 제국군이 밑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벨린 협곡만이 아닌 다른 국경선에서도 차례차례 전투가 발생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태진은 북상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지도를 보며 전략을 짜내고 있었다.
루위스를 출발한 지 8일째. 태진은 드디어 벨린 협곡 앞에 당도했다. 국경 수비대를 흡수한 태진은 수비대장을 포함시켜 회의에 들어갔다.
“제국군의 형세는?”
“아직 요새 안에서 버티며 밖으로 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간혹 위협용 교전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아직 우리 군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진은 곰곰이 생각하며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지도에는 전서로 받은 국경 부근 제국군의 위치와 규모가 빠짐없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벨린 협곡 근처에 가장 많은 부대가 모여 있었다.
“이상하군. 이 정보대로라면 분명 우리 측 국경 수비대보다 훨씬 수가 많을 텐데, 왜 요새에 진군을 멈춘 거지?”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뭔가를?”
하이듀크의 물음에 태진이 시디 노트니에서 로필락까지 뻗어 내려오는 대로를 가리켰다.
“레키엔 대공, 아니면 텔리오트 황제 본인이 직접 전선으로 내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른 쪽에서도 이미 교전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벨린 협곡을 접수한 상태로서는 전황이 좋게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그런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가능성의 진위는 곧 밝혀졌다. 회의를 하고 있던 막사로 기사 하나가 달려 들어와 태진에게 전서를 전했다.
왕국의 문양이 아닌 그 전서를 펼친 태진의 얼굴에 한순간 희색이 지나갔다.
“동부 반란군 두목, 럭커로부터의 전서입니다. 현재 남부 반란군 설득에 성공하여, 그들이 남하하고 있던 레키엔 대공 부대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들이 기다리고 있던 자는 레키엔 대공이었군.”
라스터가 끄덕댔다.
“다른 정보는 없나?”
“동부 반란군도 본격적으로 내란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제 제국군은 우리만이 아닌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전력이 분산되겠군. 우리에겐 매우 좋은 일이야.”
제국 반란군과의 연계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국군은 실상 두 개의 적과 싸우는 것이기에 자신들의 땅이라고 해서 안심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전쟁을 오래 끌수록 힘든 것은 국민들입니다. 속전속결로 갑시다.”
태진의 선언에 모두가 시선을 모았다.
“이 전쟁, 최단 시간 내에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밝힌 태진의 계획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주변 정리는 모조리 반란군에게 맡긴다. 왕국군은 벨린 협곡을 탈환하고, 곧장 일직선으로 시디 노트니까지 돌진한다. 커다란 전략은 그것뿐이었다.
하이듀크는 멍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 그게 가능할까?”
“믿어 주십시오, 하이듀크. 제가 언제 불가능한 일을 언급한 적 있었습니까?”
태진은 조용한 눈길로 말했다. 그것을 본 이상 하이듀크는 더 이상 항변할 수 없었다. 30년 전, 소규모의 로츠왈디스 반란군을 선봉에서 이끌고, 숱한 영웅담을 만들어 낸 자가 눈앞의 태진이었다.
그가 입에 담았다는 것은 실현된 일이거나 앞으로 실현시킬 일, 단 두 가지였다.
“……못 당하겠군, 정말.”
“그 말, 아서에게도 들었습니다.”
“내 아들이니까.”
라스터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회의와는 상관없이 태진의 뒤에 붙어 있던 미연이 히죽 웃으며 일어섰다.
“자, 그럼, 이제 회의 끝난 거지?”
“아직 요새 탈환 작전 회의가 남았어, 미연아.”
“히잉― 그런 거 대충 쳐들어가서 도로 빼앗으면 되잖아.”
투신의 전사다운 태평한 작전이었다. 태진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미연을 도로 자리에 앉혀 회의를 재개했다.
“이미 전술을 세워져 있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태진은 낮은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했다.
날이 밝고 벨린 협곡에 햇살이 떨어졌다. 거친 바위산 중간으로 난 길까지 햇빛은 구석구석 벨린 협곡을 비춰 주었다.
협곡의 길을 막은 형태로 지어진 요새는 말 그대로 관문이었다. 완충 지대에 속하는 계곡 길에 들어서려면 어떻게든 요새를 통과해야 한다.
거꾸로 말해서 계곡 길을 통하여 제국군이 요새를 점령했다는 뜻도 된다.
요는 요새를 점령한 뒤라면 계곡 길을 통하여 아키레마로 들어가기가 매우 용이하다는 점이다.
기상 후 든든히 아침을 먹은 뒤 태진은 왕국군을 집합시켰다. 벨린 협곡으로 들어서는 평원에는 5천의 기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미 간밤에 잡힌 작전이 전파되어 있었다.
선봉 역을 맡은 라스터가 그들 앞에 서서 단 한 마디를 외쳤다.
“죽지 마라!”
라스터가 말에 올라타 군의 맨 앞에 섰다. 검을 치켜세운 그가 날카로운 함성과 함께 평원을 달려 내려갔다.
그 뒤를 따라 수천의 군세가 뒤를 따랐다.
우와아아아아!
수천의 인간이 마치 한 사람처럼 한 가지 목소리를 낸다. 태진은 최대한 전황이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해진 시각에 출발한 왕국군이 벨린 협곡을 향하여 물밀듯이 돌진했다.
국경 수비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요새를 점거한 제국군의 규모는 약 500명. 전력상으로는 10배의 차이지만 후방의 제국군의 접근이 쉽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 낙관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적은 요새 안에 들어앉아 있다. 공성전에서는 수비가 공격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공격하는 입장에 선 태진은 냉철하게 전황을 내려다보았다. 라스터가 지휘하는 흑안 기사단이 세차게 요새로 돌진했다.
“적을 쳐라!”
라스터의 명령에 따라 기동창병들이 창을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요새 앞에서 보호목을 설치하고 있던 제국군이 뒤로 물러섰다. 그 뒤에서 궁병들이 나타나 왕국군을 향해 활을 겨눴다.
슈욱!
수십 발의 화살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대지로 내리꽂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태진의 예상 범위였다. 기사들의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던 방패병들이 라스터의 명령에 방패를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다른 기사들이 몸을 숙이는 동안 낙하한 화살들은 모조리 방패에 맞아 튕겨 나갔다.
“돌진하라!”
다시 왕국군의 돌진이 시작되었다. 궁병들이 또다시 화살을 쏘아 보냈으나 기동창병들의 옆을 달리던 방패병들이 화살들을 막아 냈다.
그 사이 창병들이 제국군의 방어진을 정면에서 두들겼다.
“하아아앗!”
“우리의 요새를!”
“얌전히 내놔라아아!”
기합성과 함께 내지른 창병들의 공격에 제국군이 나가떨어졌다. 그 뒤를 따라 기사들이 방어진을 깨고 들어왔다.
그러나 제국군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요새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제국군들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성벽에 공사들과 마법사들이 배치되어 공격 준비를 하자 라스터는 잠깐 언덕 위로 눈을 돌렸다.
먼 거리였으나 순간적으로 태진이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전군 정지―!”
라스터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지시와 함께 돌격하던 왕국군의 기세가 멈췄다.
돌격으로 인하여 무너졌던 제국군의 방어진을 무너뜨린 시점에서 공격이 멈추자, 뒤로 물러섰던 제국군들이 주춤거리며 몸을 돌렸다.
쏟아져 나오는 제국군의 뒤에서 궁병들이 화살을 잡았다. 그와 함께 제국 마법사들의 주문이 우렁차게 퍼졌다.
“작은 태양처럼 작열하는 불꽃!”
10여 명의 마법사들이 하나의 주문을 영창했다. 그들의 손앞에서 성인 남성의 머리 크기의 불꽃이 생성되었다.
슈우욱!
허공을 가르고 왕국군의 진형으로 날아드는 불꽃!
마법이 직격하기 그 직전, 왕국군 사이에서 홀연히 주문이 영창됐다.
“거목을 쓰러뜨리는 태풍!”
기사들 사이에 섞여 있던 마법사들이 한 가지 마법을 만들어 냈다. 각각의 돌풍이 한 방향으로 모여 거대한 태풍을 만들어 낸 그들의 마법은 날아오는 불꽃의 마법을 모조리 엉뚱한 방향으로 날려 버렸다.
태진은 그 장면을 똑똑히 보고 있다 손을 들었다.
그것은 지시. 라스터는 그것을 곁눈으로 확인하고 제국군의 공격이 주춤한 틈에 다시 지시했다.
“전군! 돌격!”
우호오오오!
작전대로 멈춰 서 있던 왕국군이 또다시 요새를 향해 몰고 들어갔다.
불꽃이 쏟아져 내리면 왕국 마법사들이 바람의 마법으로 방어했다. 화살이 쏟아져 내리면 방패병들이 막아 냈다. 창기사들과 검기사들이 순수하게 공격에만 치중하여 제국군을 격파해 나갔다.
이 일련의 움직임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 태진이었다.
태진은 언덕에서 요새의 움직임을 살피며 라스터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전투 틈틈이 태진을 확인하여 그의 명령을 읽어 내는 라스터 또한 대단했다.
“밀리지 마라! 밀어붙여라!”
또다시 내려진 지시에 따라 라스터가 기사들에게 외쳤다. 그의 명령대로 기사들은 제국군의 방어진을 무너뜨리며 점차 요새로 짓쳐 들어갔다.
그 즈음 태진은 요새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일어난 사실을 눈치 챘다.
몇 명의 궁사들이 성 안쪽을 쳐다보고 소리쳤다. 그리고 뒤이어 마법사들도 뭐라고 의견을 외치자, 문 안에서 또 다른 제국군들이 달려 나왔다.
수백의 제국군과 수천의 왕국군이 좁은 요새 앞에서 부딪혔다.
왕국군의 수가 많았지만 제국군은 결코 쉽게 밀리지는 않았다. 협곡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좁았고 수천의 군세가 한꺼번에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버티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병력 공세만 있어 준다면 며칠이고 버틸 수 있는 지형이었다.
그러나 태진은 결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계획은 속전속결.
무조건 빨리 시디 노트니까지 진군하여 이 전쟁을 하루라도 속히 끝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두 개의 군이 정면충돌한 전장을 내려다보던 태진의 눈이 요새 뒤쪽으로 향했다. 레무닉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바위 계곡으로 누구라도 쉽게 오를 수 없을 만큼 가팔랐다.
그러나 왕국군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태진은 보이지 않는 그녀를 찾아 요새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 고 생각한 순간, 요새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
미연은 자신의 기사대를 백두 기사대라고 이름 붙였다. 태진이 또 그 이름이냐고 핀잔을 줬지만 결코 바꾸지는 않았다. 제국에서 맡았던 백두 부대는 어느새 잊어버린 듯한 그녀의 태도에 미소라도 잠깐 적응하지 못했었다.
그녀의 백두 기사대는 가파른 바위 계곡을 뒤편에서 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점점이 이어지는, 개미 같은 움직일 것이다. 맨손과 맨다리로 암벽 등반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밑에서 뒤따르고 있던 기사대원들의 얼굴에는 이미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적당한 위치에 오르고 나자 미연이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소리쳤다.
“좀만 더 힘내! 라스터가 열심히 시간 벌어 주고 있잖아?”
“아, 아무리, 그, 그래도! 이건 좀!”
아리스가 뭐라고 소리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내뱉기도 힘들었다. 묵묵히 오르고 있는 미소라와 아서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태진의 권유로 백두 기사대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첫 임무부터 이러니 아리스는 앞날이 깜깜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은 당연히 모르는 미연은 어느새 등반을 마치고 두 발로 서 있었다.
“여기까지만 올라오면 돼! 힘내!”
미연의 응원에 기사대원들이 악착같이 절벽을 기어 왔다. 마지막 대원까지 안전하게 올라왔음을 확인한 미연이 즉각 걷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길이 있어. 삼십 년 전에 내가 찾아낸 길이지.”
자신만만하게 걸어간다. 겨우 한 사람이 걸을 만한 길이었기에 대원들은 한 줄로 정렬하여 암벽을 지났다. 솔직히 발 디딜 곳도 없어 보이는 이런 길에 정말 요새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모든 대원에게 떠올렸다.
그러나 미연이 안내한 그곳에는 정말로 작은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있지?”
미소라를 제외하고 입을 벌린 대원들을 보며 미연이 설명했다. 이 입구는 30년 전의 요새 탈환전에 썼던 통로로, 그 이후 요새를 봉인해 놨으니 분명 제국군은 모를 것이라고. 이것은 태진이 전해 준 말 그대로였다.
그들은 입구로 들어갔다. 허리를 숙여야 할 만큼 낮고, 게다가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으나 미연은 거침없었다.
칼 손잡이를 잡고 전투 감각을 깨운 그녀는 대원들을 착실하게 앞으로 이끌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길이 끝이 났다. 묘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출구는 미연이 말한 대로 봉인되어 있는 듯했다.
미소라가 손을 뻗어 봉인된 면을 만져 보았다.
“큰 돌을 쌓아서 막아 놓은 것 같군. 어떻게 뚫을 생각인가?”
“아, 거긴 필요 없어. 그대로 둬도 돼.”
미연이 태연하게 대답하고 입구 바로 옆의 벽을 발로 뻥 찼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그곳의 벽이 무너져 내리며 또 다른 출구가 나타났다.
쏟아져 들어오는 약한 빛에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그 와중에 미연만이 장난스레 손가락을 바깥으로 가리켰다.
“여기는 막고 그 옆에 또 다른 출구를 만들어 놓은 거야. 언젠가 또 쓸지도 모른다며 몰래 만들어 놓은 거지. 태진이의 아이디어인데, 대단하지?”
30년 뒤, 이처럼 또 이 길을 사용할 거라는 것을 미리 예언이라도 한 듯한 장치였다.
미연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기사대를 이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 길은 요새의 한구석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쁘게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통로에서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미연은 가장 먼저 칼을 뽑았다. 다른 대원들도 저마다 검을 뽑고 미연을 바라보았다.
지시를 기다리는 그들을 향해 미연은 단단히 말했다.
“모두 자신의 검에 이름을 붙였지? 첫 인사에서 말했을 테지만 검에 이름을 붙인다는 건 별 소용없는 짓이야.”
칼은 자신의 팔과 같다. 그것이 미연의 논리였다. 기사대를 소집했을 때 미연은 맨 처음 그것을 밝혔었다.
“하지만…… 너희들의 그 정신을 무시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그 검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성공시키자. 알겠지?”
“예!”
“목소리 낮추고. 자, 그럼.”
미연이 돌아섰다.
“우리의 목표는 성벽! 요새의 문을 열자!”
미연의 구령에 맞춰 기사대가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요색의 구석에서 갑작스레 달려 나온 기사대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가장 맨 앞에 달려가는 미연의 칼날에 두세 명의 제국군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미연은 미소라에게 신호하여 그를 성문으로 보냈다.
제국군을 뱉어 내고 다시 닫힌 문을 담당하고 있던 병사들이 요새 안에서 나타난 기사들을 발견했다.
“누, 누구냐!”
“적이다! 요새 안에!”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그 목에 미소라의 단검이 틀어박힌다. 반대쪽으로 아서가 달려가 제국군을 베어 넘겼다.
양쪽 도르레를 점령한 두 명을 방어하며 남은 대원들이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이미 제국군은 한발 늦어 있었다.
“도르레 점령 완료!”
“오케이! 그대로 버텨라!”
그 장면을 확인한 미연이 성벽 위로 달려 올라갔다. 이변을 감지하고 나타난 제국군이 계단 위에서 그녀를 덮쳤다.
검격 자체를 칼등으로 막아 내고 안으로 흘러 들어가며 목을 벤다! 그의 시신이 떨어지기 전에 핏방울 밑을 미연이 민첩하게 빠져나갔다. 그 뒤로 달려드는 제국군의 가슴팍에 칼을 찔러 넣고,
“으라찻!”
그대로 밀고 올라간다! 가슴팍에 칼이 꽂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한 제국군은 그녀의 힘에 밀려 성벽 위까지 끌려갔다.
칼을 뽑아내고 제국군을 걷어찬 미연은 그가 밑으로 떨어지든 말든 다음 적에게 달려들었다.
궁병 중 하나가 급히 몸을 돌려 화살을 시위에 메겼지만 줄을 잡기도 전에 이미 미연의 칼이 그의 손을 베고 있었다.
“으, 으아악!”
옆으로 스쳐 지나가며 얼굴을 반으로 쪼갠 뒤 피가 떨어지기 전, 바로 옆의 마법사를 덮친다!
“사, 살려―”
말을 미처 끝맺지도 못하고 마법사의 목이 몸통에서 달아났다.
그 시신을 발로 걷어찬 뒤 미연이 성벽의 가장 높은 곳으로 냉큼 점프해 뛰어올랐다.
“요새 접수 완료―!”
미연이 손을 칼을 번쩍 들었다.
언덕 위에서 줄곧 요새를 주시하고 있던 태진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환희에 찬 얼굴로 팔을 휘둘렀다. 그것은 또 다른 작전의 지시였고, 하이듀크와 라스터가 동시에 움직였다.
그때까지 숨어 있던 하이듀크의 위치는 바위 계곡의 위였다. 그가 정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 뒤로 수십 명의 궁사들이 나타났다.
“요새로! 활을 쏴라!”
“다, 단장님! 아직 성벽에 투신의 전사님이!”
“하핫! 이딴 화살 공격에 그녀가 다칠 거라고 생각하나?! 신경 쓸 거 없다! 쏴라!”
궁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요새의 바로 위에서 요새로 쏟아 붓는 그 공격은 요새의 제국군에게 있어서는 예상치 못한 재앙이었다.
작전이 정해진 어젯밤, 하이듀크는 궁사들을 이끌고 바위 계곡을 올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연의 신호만을 기다리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화, 화살은 어디서 쏟아지는 게냐!”
“계곡 위입니다!”
“뭣이!”
요새 안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커다란 성문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사대원들은 단 한 명도 피해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제국군들이 빗발치는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꼬치가 되어 죽어 갔다.
성문이 열린 채 요새 안과 밖이 완전히 둘러싸인 형태였다.
“이, 이건 악몽이다……!”
로츠왈드의 정규 왕국군이 도착한 지 이제 겨우 하루. 그 하루 만에 벨린 요새는 왕국군의 손으로 도로 넘어갈 위기였다.
“돌격! 요새가 백두 기사대의 손에 들어왔다!”
계속 진군, 후퇴를 반복하며 제국군을 요새 밖에서 묶고 있던 왕국군이 일시에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사들 모두에게 성벽 위에 올라서 있는 미연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태양 아래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야기로만 듣던 투신의 전사, 그대로였다.
이 전투, 우리가 이겼다! 기사들의 그 믿음은 단숨에 사기로 뒤바뀌었고,
“하아아아앗!”
“밀고 들어가라―!”
“우리에겐 신의 전사가 있다!”
여태까지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양측의 균형이 완전히 박살났다. 왕국군의 기세를 제국군은 더 이상 막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방어진이 뚫리자 그 다음부터는 왕국군의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항복하는 병사는 사로잡고 방어하는 자는 처단한다. 그렇게 왕국군은 요새 안으로 파고들었다.
“제, 젠장! 도망간다!”
원군을 부를 여유도 없이 당해 버린 지휘관은 남아 있던 제국군 병사들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부상을 입은 동료들을 돌볼 새도 없이 제국군은 요새 반대쪽 문을 뚫고 완충 지대를 지나 달아났다.
전투는 순식간이었다. 왕국군이 요새로 진입하는 순간 하이듀크의 활 공격은 끝이 났다. 그리고 제국군이 모조리 사라지는 순간 라스터의 진군도 멈췄다.
“이겼다!”
“벨린 요새를 탈환했다!”
기사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전쟁을 처음 경험한 세대인 기사들에게 이것은 매우 뜻 깊은 전쟁이었다.
그 기사들의 중간을 태진이 가로질러 들어왔다. 태진이 지나가는 길은 기사들이 정중하게 비켜 주었다.
날아오는 아군의 활 공격과 제국군의 마법 공격. 그것들을 칼 한 자루로 막아 내고 있던 미연의 움직임도 이젠 멎어 있었다.
성벽 위에서 태진의 걸음을 눈으로 쫓던 미연은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돌아섰다.
태진이 다가와 미연의 앞에 섰다.
“수고했어, 미연아.”
“이 정도야 껌이지! 안 그래?”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그녀의 볼을 매만지며 태진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성벽 아래에서 라스터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계곡 위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은 하이듀크도 내려다보고 있었다.
30년 전, 신의 전사와 함께 전쟁을 경험한 그들에게 있어 이 승리는 특별했다.
라스터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저 모습을…….”
하이듀크가 중얼거렸다.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두 번째로 벨린 요새를 탈환해 준 두 신의 전사. 그들을 보는 두 기사의 눈에는 어느새 감격의 눈물이 맺혀 흘렀다.
이렇게 로츠왈드 왕국군은 아키레마 제국군에게 빼앗겼던 벨린 요새를 열흘 만에 되찾았다.
이것은 비록 작은 승리였으나, 훗날 역사에 길이 남을 신의 전사들의 두 번째 전쟁, ‘4회 전쟁’의 시초가 되는 승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