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32)

스물둘. 마치, 마법 같은 술수로 말이야

모든 사절단이 귀국길에 오른 뒤 트레빌에 남은 로츠왈드 사절단은 회담의 뒷정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주최측 입장이었기에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절단이 짐을 챙기는 동안 태진은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협력해 준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와 포상금을 지급했다.

자급자족으로 살아가는 트레빌 시민들에게는 이런 국제적 행사만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감사했습니다.”

식사를 준비해 준 식당을 마지막으로 일을 끝낸 태진은 대로를 뛰듯이 걸어와 성에 돌아왔다.

마침 시종들에게 마차에 짐을 실을 것을 명령하고 있던 아리스가 그를 발견했다.

“아리스! 팰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태진이 그녀에게 소리쳐 물었으나, 아리스는 그를 보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녀의 행동에 태진이 무슨 일인지 잠깐 공황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렸다.

할 수 없이 계단을 올라가려던 그의 앞에 아서가 나타났다.

아서는 계단 위에서 바쁘게 내려오고 있었다.

“아서. 팰은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태진 님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 숙소에 계실 테니 가 보십시오.”

감사의 뜻을 전하고 태진은 그를 지나치려 했다. 아서도 바쁜 듯 밑으로 뛰어 내려갔을 때 태진이 그를 불렀다.

“아리스가 어제부터 조금 이상한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발길을 멈춘 아서가 눈을 돌려 태진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태진 님이 모른다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가 부르시니 빨리 가 보십시오.”

아서는 차갑기까지 한 태도로 돌아섰다.

태진은 어깨를 으쓱하고 일단 아리스의 일은 머리 저편에 묻어 두었다.

팰리슈는 방에서 뭔가를 한참 찾고 있었다. 보아하니 짐을 정리하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했다.

“뭘 찾고 있는 겁니까?”

“아, 태진! 어서 와!”

난장판인 방 한중간에서 팰리슈가 태진을 반겼다. 태진은 널려 있는 옷가지를 보고 한숨을 쉬고는 바깥의 시종을 불렀다. 달려온 시종이 팰리슈를 대신하여 그의 짐을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아하하, 내 것은 내 손으로 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짐을 정리하려던 겁니까, 아니면 정리를 그만두려던 겁니까.”

“원래는 전자였어.”

한숨을 짓고서 태진은 용건을 물었다.

“저를 불렀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맞아. 의결서들 보관소에 넣어 줘.”

“당신이 직접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말이야. 이 난장판을 보라니까. 내가 그럴 틈이 있겠어?”

아직 스스로 짐 정리를 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진은 이마를 잠깐 감싸 쥔 뒤 알겠다고 대답했다.

팰리슈의 방에서 나온 태진은 행정부 장관실로 가 의결서를 받아 왔다. 각국 대표들이 이와 같은 의결서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간 것은 이를 테면 복사본으로, 정본이 바로 이것이었다.

성의 지하까지 내려간 태진은 시종의 안내를 받고 보관소에 도착했다. 육중한 문을 열자 어둑어둑한 불빛이 켜진 보관소의 정경이 펼쳐졌다.

어느 낡은 도서관 분위기의 보관소는 웬만하면 제대로 사용되지도 않는 곳이라 먼지가 쌓여 있었다. 걸을 때마다 풀풀 날리는 먼지들을 피해 태진은 의결서를 보관할 장소를 찾아 헤맸다.

“여기 있군.”

깊숙한 곳에 위치한 책장에서 겨우 빈곳을 발견하여 의결안을 차곡차곡 정리한 태진은 먼지 묻은 손을 털며 뒤돌아섰다.

그때 팔꿈치가 책장에 부딪혔고, 찌릿한 아픔에 태진이 짧게 소리를 냈다. 전기가 울리듯 뇌까지 달려오는 아픔을 참으며 팔꿈치를 문지르는데, 그의 시야에 책장을 삐죽 튀어나온 두루마리 하나가 보였다.

먼지가 산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상태로 엄청나게 오래 있었던 모양이었다.

태진은 그 두루마리를 빼냈다. 겉면에 제목 같은 고대어가 흐릿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티락스 마카나.’

해석하자면 ‘균형 파괴자’ 정도의 뜻이었다.

“아르바나가 아니고 마카나……?”

흥미가 솟았다. 삼화국 때의 기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태진은 소매에 두루마리를 숨기고 보관소를 나왔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문을 닫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미 깔끔하게 짐을 정리해 둔 태진은 다시 가방을 열어 옷가지 사이에 두루마리를 찔러 넣었다. 시간이 있었다면 이곳에서 해석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여유가 없었다.

비밀로 하고 왕국으로 가지고 가자고 마음먹고, 태진은 뻔뻔스럽게 짐을 다시 묶었다.

로츠왈드 사절단이 떠날 채비를 마친 것은 이튿날 오후. 점심 식사를 마지막으로 사절단은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트레빌을 떠났다.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동일했다. 배를 타고 노드칸 강을 거슬러 내려가 노큰 항구에 입항 후, 루위스까지 육로로 귀환했다.

수도에 돌아오자 이미 연락을 받은 시민들이 회담 성공과 귀환을 축하해 주었다.

“국왕 전하 만세!”

“국왕 전하 만세―!”

마차에서 몸을 내민 팰리슈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같은 마차에 타고 있던 태진도 같이 나오라고 불러 댔지만 태진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성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 시민들의 박수는 끊이질 않았다. 태진은 일일이 응답해 주다가 결국 지치고 만 팰리슈에게 핀잔을 던졌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지금부터 지치는 건 옳지 못합니다.”

“아아, 적어도 오늘은 좀 쉬자. 그럼 안 될까?”

“그렇게 될까 모르겠습니다만.”

태진의 악담대로 팰리슈는 역시 쉬지 못했다. 왕성에 복귀하여 보고 싶었던 왕비와 해후를 나누기도 전에 각 부 장관들을 소집하여 회담에서 정해진 사항들을 전달해야 했다.

국제 사항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예산이나 정책들의 변화를 줘야 하기 때문에 미리 공지해 두는 것이 좋았다.

“그럼 행정부는 그렇게 처리해 주시고…… 정보부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보오.”

“맡겨 주십시오, 전하.”

예의바르게 대답한 하이듀크가 뒤로 물러섰다.

팰리슈는 계속해서 각 부가 알아야 할 사항들을 알리며 며칠을 바쁘게 보냈다. 결국 정신을 차려 한숨 돌릴 때에는 도착일에서 3일은 지나 있었다.

“흑, 타냐! 나 국왕 못해 먹겠어!”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왕비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국왕을 왕비는 따뜻한 주먹질로 다독거려 줬다는 후문이다.

어찌됐든 사절단이 모두 왕국으로 복귀하였고, 태진도 특사대장 임무에 복귀했다.

가장 먼저 태진을 반긴 것은 그동안 올라온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으로부터의 보고였다. 태진이 없는 와중에도 키드카는 꾸준히 보고서를 제출해 왔던 것이다.

내용은 모두가 뒷세계에 대한 정보들. 어느 지역에서 어떤 폭력단이 출몰했고, 정보꾼들 사이에서 옮겨 다니는 소문 같은 것들도 보고되어 있었다.

키드카는 외부 정보원으로서의 역할을 지금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보고서를 한 장씩 넘겨 가던 태진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아리스였다.

“인수인계는 모두 끝났습니까?”

“네…….”

아리스는 정보부 대표로 회담에 다녀왔기 때문에 그녀가 세부적으로 전해야 할 사항들이 있었다. 태진이 특사대에 있을 때 그녀는 하이듀크에게 보고를 하고 왔다.

실상 그들이 특사대 사무실에서 만나는 것은 3일 만이었는지라 태진은 반갑게 말을 걸었다.

“도착하자마자 바쁘군요.”

“네…….”

“어디 안 좋으십니까? 힘이 없어 보이는데.”

“네, 조금…….”

맞은편 부대장석에 앉은 아리스의 모습은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니, 태진은 알고 있었다. 어딘가 묘하게 불편하고 자신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 태도는 만찬 때부터 이어져 오고 있었다.

보고서를 내려놓고 태진은 아리스를 향해 돌아앉았다.

“아리스.”

조용히 그녀를 부르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태진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말해 주십시오. 사과하겠습니다.”

“……아뇨, 태진 님이 잘못하신 건 없어요.”

“그렇다면 왜, 만찬 때부터 저를 피하는 겁니까. 제가 잘못 느끼고 있습니까?”

아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부대장의 몫으로 돌려진 서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묘한 결의마저 느껴졌다. 더 파고들어도 괜찮은 걸까. 태진은 걱정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답해 주지 않겠습니까?”

“……그저, 잠깐 생각해 볼 게 있어서예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생각?”

“태진 님은 무엇이든 잘하시니까 내가 곁에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고민이 들었을 뿐이에요.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태진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당신은 제게 충분히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제 곁에 없어도 된다니, 그런 걱정은 불필요합니다.”

“예, 저도 알고 있어요.”

힘 빠진 어조로 아리스는 대답했다. 태진이 추가로 뭐라고 말을 하려 할 때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돌렸다.

“그것보다, 장관님이 국경 지대에서 보고가 올라와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회담 가기 전 태진 님이 부탁하셨다고 하던데.”

“아, 그거. 조금 전에 봤습니다.”

“어떤 보고인가요?”

부대장인 아리스도 숙지해야 할 내용이었다. 태진은 자신의 책상에서 해당하는 서류를 가져와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모든 국경 수비대에 검문 검색을 강화하여 조금이라도 수상한 일이 생기면 보고하라고, 회담 전에 지시를 내렸습니다. 맥스일 백작이 첩자로 밝혀진 이상 국경을 넘으며 제국과 왕국을 오고 가는 하수인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자를 찾아내면 다른 정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미연을 만나기 위해 회담을 준비하면서도 특사대의 임무를 완전히 잊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태진의 설명을 들으며 서류를 빠르게 훑어 내려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아무런 성과가 없네요.”

“그렇습니다. 밀입국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보고뿐입니다. 일 황자로 이어진 선을 잡을 수 있으리라 조금은 기대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기대가 컸던 듯합니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태진의 목소리였다.

보고서를 덮은 아리스가 나지막이 말해 주었다.

“괜찮을 거예요. 맥스일 백작이 이미 체포되었으니 언젠가 분명히 저쪽에서도 꼬리를 드러내지 않겠어요?”

묘하게 어른스런 말투에 태진은 눈을 깜빡이다 주억댔다.

“옳은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그것뿐이겠군요.”

“그럼 이제 맥스일 백작건은 끝난 건가요?”

“네. 일단락되었습니다.”

아리스는 서류를 태진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럼 이제 뭘 하지요? 특사대는 회담과는 상관없으니 인수인계 받을 것도 없고요. 제 생각으로는 국경 지대를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국경 지대 말입니까?”

“네, 어차피 맥스일 백작건과 연계하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떠세요?”

국경 지대는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법적으로 매우 미묘한 위치에 있는 지역이다.

시에 따라서는 오히려 왕국보다 제국에 가까운 풍습을 가진 곳도 있고, 거기다 영주의 비리도 만연한 곳도 가끔 존재한다. 특사대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괜찮은 일거리라고도 할 수 있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내일부터 한번 국경 지대를 조사해 볼까요.”

“자료는 모아둘게요.”

믿음직스러워진 아리스의 태도에 태진은 기뻐하면서도 묘하게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특사대의 일을 정리하고 퇴근한 뒤 별궁으로 돌아가 씻으면서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눈치 챘다.

“과연…… 정신 차려 보니 남자친구가 생긴 딸아이를 보는 기분이 이런 건가.”

하이듀크의 아버지 마음을 이상한 구석에서 배우고 있는 태진이었다.

실없는 생각이라는 느낌에 피식 웃으며 샤워를 마친 태진은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바깥으로 시종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지만 방 안은 제법 조용했다.

태진은 손을 뻗어 천장을 잡을 듯이 주먹을 쥐었다.

트레빌에서의 그날 밤. 이 손에는 미연의 손이 쥐어져 있었다. 미연과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 반드시 같이 돌아가자고 다짐했었다.

“열심히 하자고.”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 그는 히죽 웃으며 아리스의 제안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국경 지대의 조사. 내일부터 어떻게 조사를 이루어 나갈까 고심하며 그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태진은 국경 지대 조사의 ‘국’자도 꺼내지 못했다.

***

뮈인터트가 갇혀 있는 곳은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하자면 특급 호텔 급의 감옥이다. 땅을 기어도 귀족이라고 죄를 지은 귀족들은 다들 특별 감옥에 갇힌다.

과거 미켈파 남작과 오켈라니아 남작도 이 특별 감옥에 신세를 졌다가 지금은 머나먼 남국의 섬으로 유배를 가 있는 상태.

그래서 특별 감옥에는 뮈인터트 단 한 명이었다.

지금 시각은 이미 심야. 달도 휘영청 떠 있고 바람은 선선했다. 실내다 보니 어차피 바람이 느껴질 리는 없고, 다 창밖을 보면서 느끼는 감상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감옥에는 지금 현재 간수와 뮈인터트뿐이었다. 조금 전 간수가 순찰을 돈 결과, 가장 안쪽 방에 있는 뮈인터트는 침대에 누운 채 숙면을 취하고 있는 듯했다.

“어휴…… 이놈의 여편네는 도시락을 싸 줘도 뭘 이딴 걸.”

간수는 적적함을 달래고 싶었던지, 괜스레 투덜거리며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교대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느긋하게 배나 채우고 있자는 생각이었다.

그가 쩝쩝 소리 내며 도시락을 반쯤 비워 나갈 때.

분명히 누구의 방문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을 시간에 특별 감옥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누, 누구요?”

이 시간에 누가 감옥에? 듣자하니 얼마 전에 사절단이 도착했다던데 정보부원이 찾아온 건가. 아니, 그렇다고 이 시간에 오진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간수는 헐레벌떡 문으로 달려갔다.

“누구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간수는 잠깐 망설이다가 문을 삐꺼덕 열었다. 걸쇠가 걸려 있어 문은 시야를 겨우 터 줄 정도만 열렸다.

“……아.”

문틈 사이로 보인 얼굴은 말단 간부인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걸쇠를 풀어 문을 활짝 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 이 시간에 어인 일로……?”

늦은 밤의 방문객.

그는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 인사를 했다. 예를 갖추는 그를 보며 잠깐 목례를 해보인 방문객은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간수용 책상 위에는 먹다 만 도시락이 그대로 있었다. 간수는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아무리 간수라도 감옥에 허락되지 않은 음식물을 들이는 것은 불법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치우겠습니다!”

그는 즉각 책상으로 뛰어가려 했다.

등을 돌린 그때,

서걱―

그는 자신의 등을 뭔가 뚫고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판단할 겨를도 주지 않고 속에서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솟구쳐 올라왔다.

“쿨럭!”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온 검붉은 피를 한 손으로 받아내려 안간힘을 쓰다 결국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방문객에서 한순간에 살해자로 전직한 자는 그의 시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더니 품을 뒤져 열쇠를 찾아냈다.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감옥 안쪽으로 향했다.

잰걸음을 옮기던 방문객이 멈춘 곳은 뮈인터트의 방 앞.

침대에 앉아 있는 뮈인터트의 모습을 확인한 그자는 열쇠로 대번에 문을 땄다. 삐걱,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에 뮈인터트가 몸을 뒤척이더니 일어났다.

“누군가……?”

어두운 감옥 안. 쉽게 정체를 확인할 수가 없었기에 뮈인터트는 우선 그렇게 물었다.

“이제야 와서 죄송합니다.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뮈인터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그도 정체불명의 구출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네가 왜 나를……?”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우선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자는 뮈인터트를 이끌고 곧장 특별 감옥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후번 간수가 특별 감옥에 도착했다가 현장을 발견했다.

그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경비병이 곧바로 그 사실을 정보부에 알렸고, 이내 기동대와 순찰대를 거쳐 아리스의 귀까지 들어갔다. 아리스는 비몽사몽 하던 정신을 재빨리 수습하여 태진의 별궁으로 달려갔다.

***

늦은 밤. 태진은 복도를 뛰어오는 발소리에 민감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귀에 익은 발걸음은 태진의 방 앞에서 멈춰 섰다.

“태진 님! 일어나세요, 태진 님!”

다급한 어조였다.

태진은 재빨리 문을 벌컥 열었다. 식은땀까지 맺힌 얼굴의 아리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맥스일 백작이, 감옥에 사라졌어요!”

태진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 버렸다.

태진과 아리스가 특별 감옥에 당도한 것은 시신 발견으로부터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미리 도착해 있던 순찰대원들이 주변을 봉쇄하고 태진과 아리스를 맞이했다. 현 순찰대장이 지금까지 조사한 사항을 아리스에게 알리는 동안 태진은 곧장 뮈인터트가 갇혀 있던 방으로 갔다.

“탈옥이라니…….”

어느 감옥과 다를 게 없는 방이었다. 조금 전까지 잠을 자고 있었는지 이불이 어질러진 채였다. 태진은 신중히 방 안을 수색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아리스가 태진을 찾아 들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아무래도 맥스일 백작을 구해 준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맥스일 백작 스스로 안에서 탈출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군요.”

억지로 문을 딴다면 어떻게든 흔적이 남기 마련. 문은 원래 있던 그대로였다.

“누굴까요? 누가 맥스일 백작을 탈출시켰을까요?”

아리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태진은 도로 문 쪽으로 돌아갔다.

아직 치워지지 않은 시신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번엔 문을 확인한다. 몇몇 사항을 아리스에게 물어본 다음 그는 몸을 일으켰다.

“내부의 소행입니다. 성내의 누군가가 맥스일 백작을 탈출시켰습니다.”

“예? 그게 무슨……?”

“그것도 이 간수가 알 만큼 얼굴이 알려진 자입니다.”

아리스가 눈을 깜빡였다.

“그, 그걸 어떻게 아세요?”

“걸쇠가 풀려 있습니다. 그 말은 간수가 안쪽에서 걸쇠를 풀었다는 말이 됩니다.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태진은 책상 위에 방치된 도시락을 가리켰다.

“그는 야밤에 도시락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허겁지겁 문을 열어 얼굴을 확인합니다. 그 얼굴은 간수도 잘 아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걸쇠를 풀고 그를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하지만 그는 이 밤에 감옥을 찾아올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간수는 문을 닫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거기다 간수는 도시락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가 눈치를 주자 허겁지겁 도시락을 치우기 위해 등을 돌립니다. 그때, 늦은 밤의 방문자는 간수의 등을 베어 그를 죽입니다.”

아리스는 정신없이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기에 설명이 끝났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문에서 이 정도나 떨어진 간격에서 죽은 것은 그런 이유였군요.”

“추측일 뿐입니다만.”

태진은 그렇게 말하지만 왠지 그가 말하면 정말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들린다. 태진의 대단한 점은 그런 걸 거라고 아리스는 아련히 생각하다 정신을 차렸다.

안 돼, 넘어가면 안 돼.

침을 삼키고 아리스는 순찰대장에게 지시했다.

“어서 성내 수색을!”

“벌써 지시해 두었습니다! 어차피 아직 성을 빠져 나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되니 곧 잡힐 겁니다!”

든든하게 외친 순찰대장에게 아리스는 믿음직스럽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더 이상 현장에서는 건질 것이 없었기에 태진과 아리스는 수색을 지휘하러 가려고 했다. 그때 기사 하나가 부리나케 탈옥 현장으로 달려 왔다.

“순찰대장님! 또 탈옥입니다!”

순찰대장보다 태진이 먼저 반응했다.

“또 탈옥이라니 누가 말입니까!”

“노, 녹산입니다! 아르바나단의 두목이었던!”

태진이 뮈인터트와 함께 체포했던 자였다. 회담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해 놓아 이제 평생 감옥에서 나올 일이 없을 녀석이었다.

태진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예감을 강하게 받았다. 아리스와 눈을 마주치고 말을 나눌 필요도 없이 녹산의 감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는 아서가 도착해 있었다. 수색을 도우러 기동대원까지 출동했기에 그 대장인 아서도 소환된 것이다.

“아서! 어떻게 된 일이야?!”

“아리스, 왔군. 태진 님도 오셨습니까? 여기를 봐 주십시오.”

아서는 태진을 감옥으로 안내했다. 훤하게 열린 문이 그들을 맞이했다. 특별 감옥과 비교하여 허름하기 그지없는 녹산의 독방에서 아서는 설명했다.

“억지로 도망친 흔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누군가 밖에서 문을 열어 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성내 수색으로 성안이 어수선해져 간수도 자리를 비운 사이 도망친 듯합니다.”

이 야밤에 움직이는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도망갈 길은 많아진다. 나뭇가지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사람들 속에 섞이며 도망하는 정도는 간단한 것이다.

“면목 없습니다.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아서.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맥스일 백작이 탈옥한 시점에서 이런 사태도 예상했어야 했습니다.”

실수였다. 그것도 대실수. 태진은 잠시 자신을 탓하면서 감옥을 둘러보았다.

“다른 죄수들의 말을 들어 보았습니까?”

“여긴 모두가 비협조적인 놈들뿐이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태진 님이 해 보시겠습니까?”

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꼬리를 밟힐 만한 단서는 남겨 놓지 않았을 겁니다. 쳇, 정말 한 방 먹은 것 같군요.”

씹어 뱉듯 말을 삼킨 태진에게 아서가 물었다.

“맥스일 백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뭔가 다른 증거가 나왔습니까?”

“이번 탈옥은 내부의 소행입니다. 왕성의 주목이 회담으로 쏠려 있는 틈을 노린 것입니다.”

“내부의 소행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진은 자신의 추측을 아서에게 알렸다. 아서의 표정은 설명을 들은 아리스와 비슷해졌다.

“그럴 수가…… 왕성의 누군가가 맥스일 백작과 녹산을 탈옥시켰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녹산의 탈옥으로 좀 더 명확해졌습니다. 이런 사태에서 왕성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는 자, 결국 내부의 누군가일 확률이 더 높아졌습니다.”

태진의 추리는 거침이 없었다.

더 이상 단서를 발견하지 못한 태진은 아서와 아리스를 이끌고 감옥을 빠져 나왔다.

야밤에 벌어지는 수색으로, 성안은 야시장을 방불케 했다. 감옥에서 뛰쳐나온 태진은 다른 둘에게 소리쳤다.

“나눠서 지휘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들이 성 밖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찾아내야 합니다.”

“제가 동쪽을 맡겠습니다. 태진 님은 중앙을, 아리스 넌 서쪽을 맡아 줘.”

아서가 재빠르게 구역을 나누었다. 세 명은 감옥 앞에서 동시에 헤어졌다.

수색은 밤새 계속되었다. 왕성 안을 뒤지듯 벌어진 수색이었지만, 괴상하게도 그들의 꼬리는 전혀 잡히질 않았다. 해가 뜨고 루위스의 모든 시민이 기상하여 아침을 시작하려 할 때, 세 명은 왕궁 앞에서 다시 만났다.

“발견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왕성을 빠져나간 흔적이 전혀!”

태진의 물음에 아리스가 절망적인 대답을 보내 왔다. 그렇지만 더욱 절망적인 소식이 가장 늦게 도착한 아서에게서 들려왔다.

“북동쪽 간이 입구가 열린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간이 입구…… 라면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잖아? 게다가 잠겨 있을 텐데?”

“자물쇠를 부순 것 같아. 낡은 문을 억지로 열어서 훼손된 흔적도 발견됐어.”

발견한 것은 아서였다. 아서는 다른 기동대원들이 달려올 때까지 입구 주변과 바깥을 수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완전히 당했습니다.”

태진이 칼칼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다른 답이 없네요.”

“그들은 성 밖으로 도주했습니다.”

아서가 상황을 정리하듯 말을 내뱉은 뒤 몸을 돌렸다.

“전 지금부터 성 밖을 수색하고 오겠습니다. 아직 수도를 빠져나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사건 발생부터 지금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이미 그들은 수도를 벗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아주 미약한 확률을 믿고 태진은 아서를 보냈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이 소식을 이미 들었을 팰리슈와 친우들에게 해 주어야 할 설명의 정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팰리슈의 집무실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국왕과 왕비는 물론 정보부에 관계된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 앞에서 태진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습니다.”

진심을 담은 사과에 팰리슈가 손을 들었다.

“그만둬, 태진. 네 잘못이 아냐. 따지자면 우리 모두의 잘못이야.”

에스타냐도 그 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그들을 탈옥시킬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태진,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마.”

그렇게 말은 하지만 태진의 마음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뮈인터트를 체포한 것은 자신이었다.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 너무 마음을 놓아 버린 것이었다.

이러면서도 특사대의 대장인가. 왕국의 밤을 조절할 거라고 큰소리를 치고 다녔던 건가.

실수임을 깊이 자각하고 있는 그를 대신하여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 기동대장이 성 밖을 수색 중이에요. 시내를 모두 뒤져야 하기 때문에 일찍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기동대와 순찰대로는 무리겠군. 지금 흑안 기사단에서 인원을 축출하겠다.”

라스터의 제안에 아리스는 감사하다고 예를 갖췄다. 라스터가 밖의 시종을 불러 흑안 기사단의 부단장을 불러오게 명하는 사이, 잠자코 있던 하이듀크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둘의 탈옥을 도운 범인의 정체야. 태진, 정말 그가 왕성 안의 누군가란 말이야?”

“그런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진에게서 이미 설명은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태진의 추리가 진실이라고 치자면,

“……왕성 안에 제국의 간첩을 돕는 협력자가, 어쩌면 또 하나의 첩자가 있다는 말이 되는 게로군.”

심각한 라스터의 어조에 좌중이 모두 침묵했다.

말 그대로다. 뮈인터트는 제국의 첩자였다. 체포당한 그를 누군가가 구해 줬다는 건 또 다른 첩자가 있다는 것과도 동일한 말이 된다.

“그럴 리가…… 맥스일 백작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야. 그런데 또 한 명이 있다고?”

국왕이 된 입장으로서 팰리슈는 믿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려는 그의 이마를 왕비 에스타냐가 툭 쳤다.

“국왕이 흔들리지 마. 지금은 냉정할 때야.”

태진은 말했다. 제법 얼굴이 알려진 자라고. 그렇다면 왕성 안에서 근무하는 일반대원들이 아닌, 고급 관리 쪽의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는 말이지만.”

전제를 깔고 태진은 입을 열었다.

“이중에는 없을 거라고 빕니다. 친우를 내 손으로 체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태진의 친우들, 세 명의 눈이 단숨에 험악해졌다.

“태진, 지금 우리들을 믿지 못하는 건가?”

“믿고 있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겁니다. 제발 저의 믿음을 깨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이 바운스에서 미연 이외의 누군가를 믿는다고 한다면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다.

30년 전 함께 전쟁을 치렀고, 지금은 함께 한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이들은 친우를 넘어 같은 영혼을 공유하는 사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태진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여기 있는 이외의 고급 관리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귀족, 아니면 귀족의 자제 쪽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귀족을 조사할 수도 없지 않나?”

“그렇습니다, 라스터. 그래서 정말로 기초 수사부터 할 생각입니다.”

어느새 특사대의 대장으로 돌아온 태진은 앞으로의 방향을 이야기했다.

“어젯밤, 감옥에 가까이 간 자들은 지금부터 모두 수배하여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 편이 귀족 조사보다는 손이 덜 가고, 오히려 확률이 높습니다. 참고로 여러분들은 어젯밤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이듀크는 솔직하게 화를 내려고 했다. 그러나 팰리슈가 너무나 진중한 어투로 대답을 해 버리는 통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난 어제 밤까지 업무를 본 다음 타냐와 함께 잠이 들었어. 사건 발생 시간까지 시종장이 깨어 있었으니 증명해 줄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국왕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만, 대답해 줘서 감사합니다. 팰.”

국왕이 나서서 대답하자 다른 이들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가 비슷했다. 하이듀크도 회담의 정리로 요새 바쁜 나날을 보냈기에 세상모르게 잠을 잤고, 뮈인터트가 없는 신웅 기사단의 관리까지 일부 맡고 있는 라스터도 피곤하기는 매한가지. 증언은 하나 같이 잠이었지만 태진은 그것을 믿었다.

“지금부터 알아볼 이들이 여러분 같이 고분고분했으면 좋겠습니다.”

팰리슈는 짐짓 국왕스러운 위엄을 두르고 태진에게 말했다.

“좋다. 특사대장 강태진. 이 사건의 전권을 네게 위임하겠어.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도록.”

“맡겨 주십시오.”

태진은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허나 상황은 그렇게 여의치 않았다.

“……대답은 잘 했지만 말이야.”

“예? 태진 님,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리스에게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고, 태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지금 특별 감옥의 대기실에 있었다. 이곳에는 어젯밤 특별감옥을 담당한 경비병과 간수들이 모여 있었다. 급식 배달 말고는 시종도 없는 곳이라 이 인원이 모두 다였기에 취조는 편했다.

문제는 취조에서 건져낸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수상한 인물도 없었어요…….”

모두가 그런 증언뿐. 마지막 간수의 취조를 끝낸 후 태진과 아리스는 좌절하여 책상에 머리를 박을 것 같았다.

“단서가 전혀 없네요.”

“이런 기분도 오랜만입니다.”

뮈인터트와 녹산을 구한 또 하나의 첩자의 경로는 명확했다. 특별 감옥에서 먼저 뮈인터트를 구하여 성내를 수색하게 만들고, 그 혼란을 틈타 녹산을 구출한다. 제법 잘 짜인 작전이었고, 작전은 성공했다.

태진이 골치 아픈 점은 덕분에 수사의 방향이 특별 감옥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녹산의 탈옥은 수색으로 성내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목격 정보든 단서든 찾기 글렀다.

단서가 나온다면 처음에 일어난 뮈인터트의 탈옥 때인 것이다.

그래서 혹시 특별 감옥 주변에서 수상한 자나 보통은 볼 수 없는 인물을 본 적 없냐고 묻기 위해 이들을 이렇게 불러 모은 것인데,

“이 정도로 깨끗하면 오히려 통쾌할 지경이네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입니다.”

태진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속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이제 시작이니 벌써부터 절망하기는 빠른 감이 있지만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매우 답답한 일이다.

경비병들과 간수를 모두 내보낸 다음, 둘만 남았을 때 아리스는 태진에게 넌지시 일렀다.

“힘내세요. 수사를 계속하다 보면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후우, 감사합니다.”

태진은 조금 힘을 얻은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리스도 기운을 차린 그의 모습이 좋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둘은 열심히 특별 감옥과 일반 감옥까지 모두 돌아다니며 관련 인들을 만나고 다녔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뭔가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수사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사태는 불행스럽게도, 그들에게 어떠한 단서도 던져 주지 않았다.

루위스에 다시 밤이 찾아왔다. 오늘 밤은 달조차 구름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일찍 날이 어두워지자 시민들은 일을 일찍 접고 각각의 가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일을 마칠 때야말로 장사를 시작하는 동네도 있었다. 유흥업소가 잔뜩 모여 있는 뒷골목이 그곳이었다.

순찰대원들이 이미 한 번씩 훑고 지나간 길의 불빛이 하나 둘 켜졌다. 오색찬란한 빛들이 스며 나오는 거리에, 이번엔 기동대원들이 나타났다.

업소들을 하나씩 돌며 수상한 자의 행방을 묻고 다니는 그들의 리더는 로티아였다.

“이봐, 정말 아무도 안 왔어?”

“그렇습죠, 기사님. 누구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지껄이겠습니까요.”

지배인쯤 되는 자가 로티아에게 연신 굽실거렸다. 로티아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가끔 밥을 먹여 주던 선량한 남자였다.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그를 자신도 모른 척하며 로티아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수상한 자를 보면 반드시 성으로 연락하도록. 알겠지?”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지배인은 기동대원들이 떠나는 뒷모습에다 대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며 로티아는 대원들을 이끌고 다른 업소를 찾아갔다.

로티아가 옆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지배인은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 깊숙이, 오히려 뒷문으로 빠져 나와 뒤쪽 건물로 들어간 지배인은 주변을 유심히 살피더니 숨죽여 누군가를 불렀다.

“이봐! 녹산! 어디 있어?”

가게에서 쓰이는 각종 물품들이 어지럽게 널린 창고 한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다, 폴로.”

“뭘 그리 구석에 숨어 있나. 기동대고 순찰대고 전부 지나갔어. 이제 한숨 놔도 돼.”

폴로. 그는 한때 녹산의 밑에서 같이 일하던 자였으나 술집을 하나 차리며 독립한 자였다. 성에서 도망 나온 녹산은 폴로를 떠올리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고맙다, 폴로.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 이 은혜는 언젠간 꼭 갚겠다.”

“쳇, 그딴 말은 살아서 수도를 벗어난 다음에 하라고. 지금 밖에는 기사 놈들이 좍 깔렸어. 어떻게 빠져 나가려고 그래?”

“그건 우리를 구해 준 놈한테 물어봐야지. 아무튼 자네도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내 걱정은 마라. 너만큼이나 잔뼈가 굵은 나라고.”

폴로는 호기롭게 웃으며 창고를 빠져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뚝 끊기자 녹산의 옆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가 꿈틀댔다.

“후우…… 내가 저런 자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군.”

“긍지 높은 귀족 나리니 이런 사태는 꿈도 못 꿨을 테지. 이해하오.”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었소.”

뮈인터트. 같은 탈옥자의 입장으로서 지금 그는 녹산과 함께 이 창고에 숨어 있었다. 태진의 짐작대로 둘을 구한 자는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여기에 숨어 있을 수 있을 것 같소?”

“글쎄,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수색이 약해질 때까지는 여기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소.”

“영 불편하구먼.”

심기 불편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뮈인터트를 녹산도 껄끄럽게 쳐다보았다. 원래 공적인 관계로 만나던 사이다 보니 이런 사태라고 동지 의식 같은 게 발휘될 리 없다.

다만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들을 탈옥시킨 자의 목적을 전혀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그자가 왜 우리를 구해 줬겠소?”

“나도 잘 모르오. 거의 끌려 나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당신과 같은 왕성 사람 아니오. 아는 바 없소?”

“전혀 모르오. 제대로 대화해 본 적도 없는 자를 내가 어떻게 알겠소?”

뮈인터트와 녹산은 목소리를 낮춰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대화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닫히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작은 발소리가 창고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맥스일 백작님. 어디 있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 그들을 구해 준 자의 목소리였다. 뮈인터트는 덮고 있던 모포를 벗고 일어섰다.

“여기네. 이제야 온 건가.”

“기사들을 따돌리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나도 기사네. 이 정도는 거뜬하지.”

“녹산, 당신은?”

“나도 멀쩡하오.”

그자는 두 사람의 건강을 확인한 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두 분은 이제 국경을 넘어서 제국으로 가십시오. 원래 소속이 제국이신 맥스일 백작님은 그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하루 빨리 제국에 가시는 게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입니다. 길을 알고 있으십니까?”

“길 정도야 알고 있네만…… 어떻게 수도를 벗어난단 말인가?”

“내일쯤이면 수색도 약화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든 제가 길을 만들겠습니다.”

“잠깐. 나도 제국으로 가라는 거요, 지금?”

녹산이 끼어들었다. 그자는 차분하게 녹산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죽고 싶습니까? 탈옥까지 한 이상, 당신은 이제 최소 사형입니다.”

“……젠장, 데리고 나온 게 누군데 그래.”

“안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까?”

뻔뻔하기까지 한 그자의 말에 녹산은 결국 승복했다.

“좋소, 제국으로 가지. 이렇게 된 바에야 제국으로 가서 제일의 단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도 괜찮겠어.”

“화끈해서 좋군요.”

그자는 재빨리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전에 당신은 나를 좀 도와 줘야겠습니다.”

“뭐요? 돕다니?”

“구해 준 값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의문스러워 하는 녹산의 반응에 그자는 간단히 부탁의 내용을 꺼냈다. 그러자 녹산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그거…… 재밌겠군. 반드시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뮈인터트와 녹산, 그리고 의문의 구출자. 세 사람은 한 뜻이 되어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침통한 얼굴의 아서에게 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서가 성 밖을 수색하는 사이 태진도 아리스와 함께 수사를 계속해 나갔지만, 아서와 같은 신세였기 때문이다.

“수도 밖으로 이미 도망친 것 같습니다. 좀 더 빨리 수색령을 펼쳤어야 하는데.”

“수색령을 거둬야겠네요…….”

이번 사건은 계속해서 타이밍이 어긋나고 있었다. 아리스의 의견에 태진은 수색령을 중지시켰다.

“아서, 이틀 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가서 쉬십시오. 많이 지쳐 보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서, 가서 쉬어. 태진 님과 내가 정리할 테니까.”

아리스도 그를 설득했다. 피로가 쌓여 없던 기미까지 생기려고 하는 아서의 등을 억지로 밀어 보내자, 결국 그도 못 이긴 듯 휴식을 취하러 돌아갔다.

그를 보낸 후 다시 수사 자료를 훑어보려는 아리스를 태진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리스. 당신도 좀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낯빛이 좋지 않습니다.”

“태진 님도 같이 일하셨잖아요. 저만 쉴 수는 없어요.”

책임감이랄까, 지금 아리스에게는 태진도 쉬이 어쩔 수 없는 심지가 느껴졌다. 회담에서 돌아오고 나서 나타난 그녀의 변화였다.

태진은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와 다시 수사 자료를 파고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다시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책상에 엎드린 채 아리스가 꾸벅꾸벅 졸고 있어 그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저택에 돌아가서 주무십시오, 아리스. 내일 해도 될 일입니다.”

“아…… 죄송해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리스는 인사를 하듯 말듯 특사대를 나갔다. 너무 부려 먹었다 싶어 잠깐 미안한 마음에 태진은 아리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그녀의 책상을 깔끔히 정리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리저리 널린 서류들을 한데 모으고 있을 때 누군가가 특사대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온 것은 시종이었다.

“기동대장님이 일반 감옥으로 와 달라고 하십니다.”

시종은 그 말을 남겨 놓고 나갔다.

쉬러 갔다고 여긴 아서의 부름에 태진은 곧장 일반 감옥으로 향했다. 아직 순찰대의 수사가 이뤄지고 있어서 녹산이 있던 감옥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진을 부른 아서도 그곳에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왜 불렀는지는 그가 왔을 때 물어보면 된다. 태진은 기다리는 동안 혹시 놓친 것이 없는지 확인할 요량으로 찬찬히 감옥 안을 둘러보았다.

녹산이 갇혀 있던 이 감옥은 다른 곳과 다를 바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탈옥에 한해서는 매우 희한한 점이 있었다.

탈옥의 흔적이 없다.

억지로 문을 딴 흔적도 없을 뿐더러 하다못해 작은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간수가 스스로 문을 열어 주지 않은 이상 이럴 수가 없다.

탈옥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잠긴 문을 열었다는 간수의 증언을 떠올리면서 태진은 문 앞에서 일어섰다.

혹시 아서가 그를 호출한 이유도 이것 때문일까.

그를 기다리며 태진은 최대한 시력에 집중하여 감옥을 한 번 더 꼼꼼히 훑었다.

그가 조사에 심취해 있을 때 멀리서 뛰어 오는 발소리가 들려 왔다.

“아서인가?”

중얼거리면서도 태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서의 발소리라고 무심결에 결론지은 것이다.

발소리가 가까워져 와 문 앞에 도달했을 때 태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뻑!

그의 뒤통수에 강렬한 불꽃이 일었다.

완전히 뒤로 돌지도 못했고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일순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점차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변해 갔다.

통제를 잃은 몸이 쓰러지기까지는 찰나에 불과했다. 그 사이 태진은 자신을 습격한 자가 누군지 모습조차 보지 못한 채, 기절하고야 말았다.

왕국 마법사단.

그곳은 밤에도 불을 밝히고 연구가 한창이었다. 태진이 해석을 끝낸 공간의 레펠을 기반으로 공간 마법을 상용화시키는 연구와 함께, 사절단이 회담에 참석하는 동안 도착한 시간의 레펠의 연구, 거기다 미켈파 남작이 빼돌리려고 했던 재생의 레펠 연구까지.

비명 같은 환성을 지르며 날로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본부에 그림자 하나가 숨어들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경비의 눈을 속이고 연구실이 있는 층까지 도달에 성공했다.

횃불이 그려 낸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는 그 행동은 매우 숙련된 자의 것이었다. 간간이 지나다니는 마법사들을 피해 그는 공간의 레펠 연구실로 잠입했다.

공간의 레펠 연구는 거의 막바지 상태였다. 연구원들이 하나씩 포기하고 나가 떨어져서 연구실에는 한 명의 연구원뿐이었다.

여성 연구원은 마트란 차를 끓여 놓고, 차원 방정식과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등 뒤에 가면을 쓴 남자가 출현해 있었다.

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좌표 설정의 공식화에 집중해 있었다.

남자는 가면 뒤의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본 다음, 손에 든 몽둥이로 그녀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퍽! 둔탁한 음과 함께 그녀가 쓰러졌다. 피가 튀어 하얀 종이에 묻었지만, 미약하게 숨은 살아 있었다.

“……간단하군.”

가면을 써 발음도 부정확한 목소리로 이죽거린 남자는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기절한 그녀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레펠이었다. 현재 연구 중인 세 개의 레펠 중 하나라도 가지고 빠져나가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는 일단 연구원이 앉아 있던 책상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을 열어젖히고 책상 위를 뒤엎으며 열심히 수색했지만 남자에게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어디 둔 거지?”

정확하게 위치는 듣지 못했다. 다만 레펠이 연구실에 가면 있을 거라는 말만 듣고 숨어든 것이었다.

“젠장! 빨리 나가야 하는데.”

다른 마법사들이 나타나기 전에 레펠들을 훔쳐서 빠져나가야 했다. 아직은 계획의 절반이다. 여기서 지체해서는 안 된다.

조금 소란스럽더라도 그는 속도를 선택했다. 남자는 재빨리 책상 뒤로 이동했다. 각종 서적들이 꽂혀 있는 책장을 모조리 훑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뽑아서 집어던지는, 대담한 짓도 감행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이 연구실에는 한 명 더 연구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성 연구원이 공식을 정리하는 동안 차를 끓이러 차실로 들어갔었다.

한참 차가 끓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내밀었다.

“어이― 무슨 일 있어?”

라고 말하자마자 그가 목도한 것은, 책장 밑에 떨어진 책들보다 그 책들을 밟고 있는 가면의 남자 쪽이었다.

두 시선이 얽혔다. 그 찰나, 연구원이 소리쳤다.

“도, 도둑이다! 도둑이야!”

남자가 굳어 있던 몸을 움직여 연구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가 휘두른 몽둥이가 연구원을 덮쳤다.

“으윽!”

기겁하며 옆으로 몸을 날리자 문짝에 몽둥이가 틀어박혔다. 쾅! 소리가 들린 직후 연구원이 몸을 굴리며 손을 뻗었다.

“초목을 가르는 돌풍!”

연구원들은 모두 마법사들이다. 연구원의 손에서 그밖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마력핵이 튀어나왔다. 손앞에서 마력핵이 파괴되는 순간 주변의 공기를 휩쓴 마력이 날카로운 돌풍으로 변해 남자를 습격했다.

쐐애애액!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진공음을 남자는 본능적으로 피했다. 황급히 몸을 날리는 통에 책장에 부딪혀, 커다란 책장이 단숨에 뒤로 넘어갔다.

쿠구웅!

요란한 소음이 일어난 순간 연구원이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마법을 시전하려고 남자의 모습을 찾았지만, 넘어진 책장 앞에는 이미 남자가 없었다.

“―!”

깨달은 순간, 이미 놀라운 속도로 남자가 연구원 옆으로 와 있었다.

몽둥이를 휘두른다고 인지하는 찰나에 이미 연구원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고 간단히 실신해 버린다.

“……귀찮게 하는군!”

거기서 마법을 쓰다니!

너무 큰 소란을 벌여 버렸다. 마법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니 준비는 하고 왔지만, 만약 마법사들이 몰린다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제길! 할 수 없지!”

도망치자. 레펠은 찾지 못했지만 여기서 잡히는 것보단 낫다.

결심 후 행동은 빨랐다. 남자는 단숨에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미 복도에는 몇몇 마법사들이 나와 있었다. 옆 연구실에서 다른 레펠들의 연구를 진행 중이던 자들이었다.

“웬 놈이냐!”

“도둑이다! 잡아라!”

마법사들의 눈에 띄는 것은 당연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달음질쳤다.

“저긴 공간의 레펠 연구실인데?”

“경비대에 연락해! 레펠을 노리고 들어온 자다!”

마법사들이 남자를 쫓기 시작했다. 추적해 오는 마법사들의 눈길을 피해 남자는 들어온 길을 거꾸로 내달렸다.

이왕에 들킨 것 아예 화려하게 도망쳐 보자고 작정하고 정문 로비로 들이닥쳤을 때, 이미 도착해 있던 다른 마법사들이 한 번에 손을 뻗었다.

“대기를 찢는 질풍!”

동시에 주문이 영창되고 마력이 휘몰아쳤다. 사방에서 몰아친 바람이 남자를 덮치는 그 직전,

남자는 이미 계단 앞에서 몸을 피해 있었다.

“흥!”

땅을 구르고 일어나 손을 벌리고 무방비가 된 마법사들 중 한 명을 몽둥이로 쓰러뜨렸다.

“느리다!”

마법에는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긴다. 마력핵이 신체에서 빠져나오는 지점은 손바닥이기에 마법사들은 반사적으로 목표를 향해 팔을 들어 올리게 된다.

거기다 주문까지 더해지면, 몸을 피하는 틈 정도는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는 법이다.

남자는 마법사를 만난 적이 거의 없지만 그런 빈틈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눈치 챘을 때는 이미 포위망이 뚫린 뒤였다.

쓰러뜨린 마법사를 짓밟고 남자가 도주했다. 뒤늦게 경비병들이 로비에 도착해서 본 것은 활짝 열린 정문과 소리치는 마법사들이었다.

“도망쳤어요! 빨리!”

“레펠을 훔쳐갔을지도 모릅니다!”

사색이 된 마법사들의 비명에 경비병들이 건물 밖으로 뛰어 나갔다. 하지만 남자의 모습은 이미 기척도 없이 떠난 뒤였다.

“뒤져라! 멀리는 가지 못했다!”

경비병들이 일제히 건물 주위로 흩어졌다. 그들이 대장의 지휘로 주변을 샅샅이 찾는 동안 마법사들은 공간의 레펠 연구실을 조사했다.

기절해 있는 두 명의 연구원을 옮기고 공간의 레펠을 찾았다. 얌전히 제자리에 보관되어 있는 레펠을 발견하고서야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가면의 남자는 이미 마법사단에서 충분히 떨어진 곳까지 도망쳐 있었다.

미리 숙지해 둔 길을 타고 오니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도 없이 수월했다. 과연, 이래서 정보는 중요한 법이다. 비교적 가벼워진 걸음으로 남자는 으슥한 길을 이동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들어왔을 때 사용한 입구가 나타난다. 남자는 마지막까지 주의 깊게 경로를 따라 움직였고, 완전히 빠져나왔으리라고 여긴 그 순간.

그의 앞에 한 남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갑작스러웠기에 그는 단박에 얼어붙었다.

뛰어가고 있던 남자가 그를 발견하고 뜀박질을 멈췄다. 그 눈이 가면을 쓴 수상한 자에 못 박혔고 지체하지 않고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칫!”

남자는 몽둥이를 버리고 단검을 뽑아들었다.

“네 녀석, 기동대장이군. 네놈을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남자의 앞을 가로막은 자는 바로 아서였다. 검을 겨눈 채 아서가 날카롭게 외쳤다.

“웬 놈이지?”

“대답해 줄까 보냐!”

자신은 쫓기는 몸.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먼저 단검을 뿌리며 달려들었다.

“어딜!”

챙!

단검을 후려쳐서 거리를 벌린 아서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아서의 검, 태각은 보통 검보다 날이 넓다. 빛을 반사하는 면적이 넓어 달밤에 싸우면 먼 곳에서도 그 빛이 보일 지경이었다.

경비병들이 괴상한 빛을 발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빛이 보이는 곳으로 모여들었고, 먼 곳에서 두 남자의 대결을 발견했다.

남자는 싸움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아서의 공격을 절묘하게 피한 남자는 단숨에 그의 뒤로 돌아 들어갔다.

“하앗!”

등짝을 걷어차서 아서의 균형을 무너뜨린 그의 눈에 경비병들이 모여드는 모습이 보였다.

더 오래 있으면 위험했다. 그는 아서에게 등을 돌려 도주했다.

“어딜!”

눈을 돌린 아서는 남자의 등을 향해 태각을 휘둘렀다.

그 끝이 등을 긁고 올라가 남자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잘라 냈다. 짜릿한 고통과 함께 남자의 시야가 일순 넓어졌다.

태각의 끝에 가면을 묶고 있던 끈이 잘린 것이다.

가면이 떨어져 내렸다. 등의 고통에 잠깐 힘이 풀린 남자가 넘어질 뻔 휘청댔다. 아서가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남자가 넘어지면서 단검을 뒤로 던졌다.

“큭!”

단검은 아서의 어깨를 스치고 뒤로 날아갔다. 아주 잠깐 그 때문에 팔을 뻗지 못했고 남자는 일어서며 흙을 한 주먹 아서에게 뿌렸다.

“비겁한 짓을!”

“이쪽은 목숨이 걸려 있다!”

아서의 시야가 흙으로 가려진 사이 남자는 몸을 일으켜 도망쳤다. 경비병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을 때에야 시야가 회복된 아서는 명령했다.

“쫓아! 놓치지 마라!”

경비병들이 남자를 추적하여 아서의 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아서는 어깨의 뜨끈함을 억누르며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주워들었다.

그것은 회담에 참여한 아서에게는 매우 익숙한 물건이었다. 제국의 이 황자, 텔리오트가 쓰고 있던 그 가면과 완전히 동일했다.

잠시 후 경비병들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재빠른 녀석이군……. 마법사단 쪽에서 온 건가?”

“예. 레펠 연구실에 숨어들었다가 마법사들에게 발각되어 도주했습니다. 저희도 곧바로 주변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단 말이군. 알겠다.”

레펠 연구실이라면 무엇을 노리고 들어온 건지는 뻔하다. 레펠 밖에 없다.

“피해는?”

“연구원 2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레펠도 무사하다고 연락 받았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너희들은 곧바로 마법사단으로 돌아가서 혹시 침입자가 남긴 흔적이 없는지 확인하도록.”

“예!”

아서의 명령을 받은 경비병들이 재빠르게 마법사단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린 뒤 아서는 가면을 꾹 쥔 채 정보부로 향했다.

***

왕성의 날이 다시 밝았다. 하이듀크는 정보부 장관으로서 기상하자마자 놀라운 소식을 두 가지나 들어야만 했다. 둘 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소식이었다.

서둘러 출근했을 때 장관실에는 이미 아서가 도착해 있었다. 밤을 샌 듯 초췌한 얼굴의 아서에게 하이듀크는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말해 봐. 대체 이 꼭두새벽부터 무슨 안 좋은 소식을 들고 온 거야?”

“지난밤, 마법사단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아서는 아주 간략하게 보고했다. 하이듀크는 수염을 매만지며 심각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다가 입을 열었다.

“결국 도망쳤단 말이지?”

“예. 지금 대원들을 풀어 성 밖을 수색 중입니다. 핏자국이 있어서 아마 오늘 안에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일 것 같은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제 격투 끝에 빼앗은 증거품이 이것입니다.”

아서는 들고 있던 가면을 하이듀크 앞에 꺼내 보였다. 이리저리 가면을 훑어보던 하이듀크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이 가면이 뭐지?”

“어제 침입했던 자가 쓰고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면을 쓰고 있던 자를 저는 몇 명 더 알고 있습니다.”

“……누구야, 그건?”

“제국의 이 황자입니다.”

하이듀크가 가면을 든 채 움직임을 정지했다. 예리한 눈빛이 아서를 향한다.

“텔리오트 지 아키레마 말인가? 회담에 참석했다던 그 황자?”

“이 황자는 중병을 앓다가 회복했지만 부작용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기 위해 항상 이 가면을 착용하고 있다고 아키레마 사절단이 말했습니다. 틀림없이 이 가면이었습니다.”

하이듀크의 시선이 다시 가면으로 떨어졌다. 제국의 가면을 쓴 침입자가 마법사단에 들어왔다? 제국의 첩자였던 자가 탈옥한 사건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시기가 너무나 괴상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 피해는 없었어?”

“공간의 레펠 연구원 두 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듯합니다. 침입자의 목적이라고 추정되는 공간의 레펠도 무사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무엇보다 레펠을 도둑맞았으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지.”

꺼림칙한 기분을 안고 하이듀크는 일단 눈앞에서 가면을 치웠다.

“두 가지라고 했는데, 남은 한 가지는 또 뭐지?”

“그것이…….”

아서가 말을 꺼내려고 한 그때, 장관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보통 노크도 없이 장관실에 들어오는 경우는 드문데, 그것조차 잊어버린 이가 한 명 있었다.

“아버지! 태진 님이!”

“……지금은 장관이라고 부르도록, 특사부대장. 태진이?”

“태진 님이 사라졌습니다.”

아서가 아리스의 말을 완성시켰다. 하이듀크는 좀 전의 보고보다 두 배는 더 놀란 얼굴을 만들었다.

“태진이 사라지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어젯밤에 제가 드릴 말이 있어서 일반 감옥으로 와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기동대의 수색 보고로 조금 늦게 감옥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정보부로 오는 길에, 예의 그 가면 남자와 마주친 겁니다.”

“별궁에는?”

“없었어요.”

아리스가 대답했다. 가장 먼저 태진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아리스는 일어나자마자 태진이 기거하고 있는 별궁에 다녀온 참이었다. 시종들은 태진이 어제 정보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특사대 사무실에도 아무것도 없어요.”

“어제 제가 부탁한 시종은 제 말을 확실히 전했다고 했습니다.”

하이듀크가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기동대장의 호출로 감옥에 가는 사이에 없어졌다, 이 말인가…….”

“……믿기 힘들지만, 그런 것 같아요.”

아리스의 어조에는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하이듀크는 슬쩍 눈짓으로 딸의 행색을 살폈다. 제대로 몸단장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는 티가 너무 났다. 그만큼 태진의 실종 소식이 그녀에게 충격이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일단 장관이라는 직책으로서 딸보다는 업무를 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다. 하이듀크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큰일이군. 맥스일 백작과 녹산의 탈옥에, 이번엔 레펠 탈취 미수까지. 거기다가 이 모든 사건을 맡아야 할 장본인이 실종? 대체 이 왕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파리한 아리스의 안색을 살피는 하이듀크에게, 아서가 심호흡을 하더니 이야기했다.

“거기에 대해서 의견이 있습니다, 장관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전…… 태진 님이 수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가 눈을 부릅뜨고 아서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하이듀크도 자세를 고치더니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말해 봐.”

“어젯밤부터 줄곧 의심해 오던 일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회담 때부터 영 꺼림칙했습니다. 회담이 있기 전날, 밤중에 태진 님이 가면을 쓴 자와 트레빌 성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아리스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자, 잠깐! 그분은 투신의 전사야! 신미연 님이었단 말이야!”

“그 사람이 투신의 전사라고 누가 알 수 있지?”

아서는 똑바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만큼 아서의 눈빛은 강렬했다.

“잘 들어. 너나 나나 가면을 쓴 자라는 것밖에 몰라. 투신의 전사의 생김새를 알아? 나도 단지 성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잠깐 봤을 뿐이야. 그 사람이 투신의 전사인지, 아니면 가면을 쓴 다른 자인지 아무도 몰라. 안다고 한다면, 태진 님뿐이야.”

정작 그 태진은 이 자리에 없다. 아니, 이 왕성에서 없어졌다.

아리스는 반박하지 못했다. 아서의 말에는 어떠한 가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대로였다. 그 사람이 미연이라고 믿게 된 건 태진이 그렇게 말했던 탓이었다.

공석에서는 단 한 번도 가면을 벗지 않았으니, 회담의 그 누구도 진정한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 가면을 쓴 자는 총 세 명. 이 황자와 그 호위병 두 명이었습니다. 혹시 모릅니다, 그날 우리가 본 자는 이 황자 본인이었을지도요.”

다시 하이듀크에게로 고개를 돌린 아서는 거침없이 설명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이듀크마저 입을 다물자 아리스는 그에게 매달렸다.

“장관님! 그럴 리가 없어요! 서, 설마 태진 님이! 태진 님이 그들을 탈옥시켰다는 건가요? 이 황자의 지시를 받고?”

“……으음.”

“친구시잖아요! 나라를 떠나서, 친구에게 피해를 줄 사람인가요, 태진 님이?”

“그건 아냐. 그건 아니란다, 아리스.”

그러나 하이듀크는 자신 없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이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너무 기묘해. 차마 뭐라고 확답을 내릴 수가 없구나.”

모든 정황이 불명확했다. 내부에 있는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짐작되는 이상, 어느 누구라도 의심을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태진 님은 실종을 꾸며 맥스일 백작과 함께 제국으로 도망갈 속셈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것입니다. 장관님, 수배령을 내리게 해 주십시오.”

“아서! 아,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어!”

“아리스, 네가 정할 문제가 아니란다.”

하이듀크는 타이르듯 아리스는 진정시켰다. 다시 아서를 쳐다본다.

“수배령은 아직 불가하다. 증거가 부족해. 단지 정황이 그럴 뿐이야. 태진이 저지른 일이라는 건 단지 추측이잖아?”

“하지만 장관님, 혹시라도 사실이라면, 도망칠 기회를 주게 되는 겁니다!”

아서는 강하게 주장했다. 불안한 눈길의 아리스가 계속해서 아서와 하이듀크를 번갈아 봤다. 딸의 시선을 느끼며 하이듀크는 고심의 고심을 거듭해 대답했다.

“그래도 아직은 안 돼. 그렇게까지 주장한다면 좀 더 확실한 증거를 가져와.”

“……알겠습니다. 그럼 증거를 찾아오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다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아주십시오.”

아리스는 경례를 하고 장관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이듀크가 깊게 한숨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아서는 태진을 완벽하게 의심하고 있는 것 같구나.”

“왜…… 왜죠? 아서도 태진 님을 잘 따랐는데? 왜 저러죠?”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해는 돼. 정황이 너무나 태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아서가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그렇지만 태진 님이 제국의 처, 첩자라니. 말도 안 돼요. 그럴 리가 없어요.”

이곳에 없는 태진을 대신하여 필사적으로 변호하는 아리스의 모습을 보며 하이듀크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단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사흘도 가지 않아 깨졌다.

성 밖을 수색하던 순찰대가 뒷골목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녹산을 검거하여 정보부로 끌고 온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아서와 아리스, 하이듀크까지 모두가 취조실로 모였다.

“너였군. 어젯밤 마법사단에 들어와 레펠을 훔치려고 했던 녀석이.”

“젠장, 그 자식들 덕분에 며칠 동안 몸이 쑤셔 뒈지는 줄 알았다.”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하면 치료해 주겠어.”

반항적인 녹산의 눈빛에 굴하지 않으며 아서는 씹어 삼키듯 물었다.

“너를 꺼내 준 자가 누구지?”

녹산은 고개를 돌렸다. 쉽게 대답하지는 않을 태세였다. 아서는 어조를 낮게 바꿨다.

“잘 들어. 너의 옥문은 잠겨 있는 그대로였어. 나중에 돌아온 간수가 안에 네가 없다는 걸 알아채고 열쇠 통에서 열쇠를 꺼내고 문을 열기 전까지, 옥문은 분명히 잠겨 있었단 말이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 탈옥을 하면서 얌전히 문까지 잠그고 나갈 녀석이 누가 있지? 대답해! 누가 너를 꺼내 줬지?”

아서가 꺼낸 말은 아리스도 듣지 못한 내용이었다. 태진과 아리스가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옥문이 열려 있던 상태였다. 옥문이 잠긴 상태라니. 그건 마치― 마법 같은 일이 아닌가.

녹산이 고개를 돌렸다.

“웃기는군. 물어 본다는 게 고작 그거냐?”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은 채 세 사람을 훑어본 녹산은 얼굴 가득히 비웃음을 띄웠다.

“이름은 모른다. 들은 적 없으니. 갑자기 나타나서는 나를 꺼내 줬다. 마치, 마법 같은 술수로 말이야. 그런 마법이 있다고는 듣지도 못했지만.”

“……마법?”

“그래, 아가씨. 마법. 아마 그럴 거야. 열쇠도 없이 문을 통과하려면 마법 말고 딴 수가 있겠나?”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마법으로 너를 꺼낸 자가 누구지?”

아서의 마지막 물음. 녹산은 조소하며 대답했다.

“나를 잡아 처넣은 놈. 그 자식이었어.”

강태진. 다른 이가 있을 리가 없다. 특사대의 대장으로, 뮈인터트와 녹산을 비롯한 아르바나 단 전원을 검거한 남자가 또 있을 리가 없다.

아리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이듀크 또한 창백한 낯빛이 되었다. 그 와중에 아서만이 의기양양하게 녹산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자, 이제 치료부터 해 주지.”

취조실에서 나와 아서는 곧바로 하이듀크에게 청했다.

“수배령을 내려주십시오. 이 이상의 완벽한 증거가 또 있겠습니까?”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군…….”

“믿기 힘드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녹산이 증언한 것은 공간 마법임이 틀림없습니다. 공간 마법 없이 문도 열지 않고 탈옥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지금 전 대륙을 통틀어 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태진 님밖에 없습니다. 지금 왕성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의 뒤에는 태진 님이 있었던 것입니다.”

단호한 말투로 아서는 외쳤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장관님! 지금 즉시 태진 님, 아니 제국 첩자 강태진의 수배령을!”

잠시 후, 하이듀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강태진의 수배령은 왕성을 발칵 뒤집었다. 격노하는 팰리슈를 “우선 실종된 태진을 찾는 게 먼저다.”라는 말로 설득한 하이듀크의 명으로 수배령은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아서는 며칠 되지 않아 태진의 꼬리가 밟힐 것이라고, 정보꾼들과의 교섭도 서슴지 않으려고 했다.

그 사이 북동쪽 국경 지대에서 왕성으로 전서가 하나 날아들었다. 에스타냐가 들고 온 전서를 손에 든 팰리슈는 급히 전서를 뜯어 보았다.

“무슨 내용이야?”

전서를 모두 읽어 내린 팰리슈가 약간 얼이 빠진 얼굴로 에스타냐를 올려다보았다.

“……레무닉 근처에서 가면을 쓴 수상한 자를 체포하여 루위스로 이송한대.”

“뭐?”

전서의 내용은 짤막했다. 수배령을 받고 국경 지대 수색을 강화 중이던 수비대가 국경 근처에서 사람이 지나간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래서 추적 끝에 한 남자를 사로잡았는데 그는 매우 지친 얼굴로 루위스로 가야 한다고 되풀이했다. 일단 그를 강제 체포한 수비대는 곧장 루위스로 이송할 것을 결정하여, 이렇게 알려온 것이었다.

전서의 내용대로 팰리슈는 그자를 기다렸다. 보름 후에 루위스에 도착한 자는 은발과 은안을 가진 남자였다.

“미소 족?”

가면도 벗겨져 있어 그 외모가 전부 드러나 있었다. 팰리슈도 미소 족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신기했지만 우선은 위엄 있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미소 족이 어째서 우리나라의 국경 지대에 있던 게지?”

매우 지쳐 보였고 여기저기 상처도 많았다. 그러나 미소 족의 청년은 조금도 꺾이지 않는 자세로 팰리슈에게 말했다.

“현신의 전사를 찾아왔다. 미연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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