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너 머리가 왜 그따위야!
평화 회담이 열리는 모디어프는 고대어로 ‘자유의 땅’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판샤란 산맥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노드칸 강의 주변을 둘러싼 삼각주 지역으로, 현재 어떠한 나라의 영토도 아닌 중립 지역으로 남아 있다.
현재 그곳엔 고대의 삼화국(三和國)의 유적들만이 남아 있어서, 나라 사이의 중요한 회담에만 쓰이고 있다.
세 나라에서 모두 평화 회담에 참석한다는 긍정적인 전서가 돌아왔다. 개중에 제국에서는 이황자가 참석하여 사절단의 구성도 함께 도착했다.
사절단에는 백두 부대의 이름도 올라 있었기에 태진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로츠왈드 왕국에서도 사절단을 구성해야 했다. 팰리슈는 정상 회의를 열어 각 분야의 대표를 뽑았다. 최종적으로 팰리슈와 태진을 비롯하여 아리스가 정보부 대표로, 아서가 국왕 친위대의 대장으로, 기타 여러 인원들이 사절단으로 발탁되었다.
이번 회담의 주최자는 로츠왈드 왕국이었기 때문에 사절단은 곧바로 모디어프로 출발했다.
모디어프로 향하는 육로는 제국과의 국경에 막혀 있기 때문에 사절단은 노큰 시로 가 배에 몸을 실었다. 시기상 풍랑도 강하지 않은 때라 배는 수월하게 모디어프에 가까워졌다.
“모디어프에 오는 것은 처음이에요.”
아리스는 뱃머리에서 멀리 보이는 모디어프를 바라보았다. 모디어프는 나라가 아니기에 자치령에 가깝다. 현재 사람들이 사는 곳은 노드칸 강의 중류 지역에 있는 트레빌 시뿐이었고, 나머지는 휑한 모래만이 가득한 폐허에 가깝다.
그런 땅을 보고서도 아리스는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로츠왈드를 벗어나는 것이 처음 아닙니까?”
“사실 맞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런 모래의 땅이라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여성스런 감수성으로 차분하게 모디어프를 관찰하는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태진. 그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배는 노드칸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노드칸 강은 바운스에서도 손에 꼽히는 커다란 강이기에 중류까지 올라와도 마치 바다로 착각될 만한 너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에 살며 한강에 익숙해져 있는 태진도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루위스를 떠난 지 50여 일이 지나고 나서야 배는 트레빌 시를 눈앞에 두었다. 이미 세 나라에서 사절단이 출발하고도 남은 때였기에, 팰리슈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평화 회담 준비에 돌입했다.
트레빌 시에는 이미 평화 회담에 대한 전서가 도착해 있었다. 시장을 만난 팰리슈는 그에게서 시에 관련된 인수인계를 받은 뒤, 그것을 그대로 태진에게 전했다.
고대의 삼화국은 원래 각각의 세 나라가 하나로 뭉쳐진 형태였다. 한국의 역사를 예로 들자면 가야국과 비슷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각각 독립된 자치를 인정했지만, 하나의 나라이기도 하기에 세 나라는 화국으로서의 수도는 이곳 트레빌 시로 정했다.
그래서 트레빌 시에는 당시에 세워진 트레빌 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회담의 장소는 바로 트레빌 성이었다. 평화 회담만이 아니라 과거 휴전 체결이라든지 나라 간의 중요한 회담이 있을 경우에는 으레 사용되어 오던 곳이라 시민들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네 나라의 평화를 약속하는 평화 회담이기에, 주도격인 로츠왈드 왕국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아지는 결과를 나았다.
“이런 것도 의도한 거야?”
팰리슈의 물음에 태진은 옅게 웃기만 했다.
태진의 지휘로 회담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애초에 그는 여기에 미연을 목적으로 온 것이기에 정작 회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팰리슈와 각 부서의 대표들은 오직 회담에만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로츠왈드 사절단이 트레빌에 도착한 지 보름째 되는 날. 나파즈 공국과 마니크 왕국의 공동 사절단이 트레빌에 도착했다. 두 나라는 친밀한 사이를 과시하듯 공동 사절단을 구성하여 회담에 참석한다고 이미 전서를 받은 상태였다.
트레빌 성으로 이어지는 대로에서 트레빌 시민들과 함께 태진은 환영식을 열었다.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마차들의 행렬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화려한 그 마차들도 각 나라의 개성을 살린 디자인들이었다.
시민들이 박수와 꽃을 뿌렸다. 가장 큰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두 남자가 양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왼쪽이 나파즈 공국의 대공, 하미엘 신 나파즈, 그리고 오른쪽이 마니크 왕국의 일왕자 휴리조 루 마니크. 노년과 청년의 조합이군.”
하미엘 대공은 이미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었고, 휴리조 일왕자는 갓 스물을 넘긴 성인이었다. 동맹 관계인 두 나라만이 할 수 있는 기묘한 조합의 공동 사절단이었다.
일단 이들은 로츠왈드에서 경계할 만한 대상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평화 회담의 손님으로서, 이쪽은 주최자로서 상대하는 것이 옳았다.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으며 마차는 대로를 지나 트레빌 성 앞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팰리슈가 손을 벌리며 인사했다.
“두 분 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별말씀을.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어 감사할 따름이오.”
하미엘 대공과 팰리슈는 과거 독립 전쟁 당시에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를 잠시 떠올리며 팰리슈는 자연스레 악수를 청했다. 하미엘 대공은 익숙하지 않은 인사법에 어색해 하면서도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소개하겠소. 이쪽이 마니크 왕국의 휴리조 일왕자. 마니크 왕국의 대표로 사절단에 참가하였소.”
휴리조 일왕자는 건장한 체구를 가진 자였다. 키는 태진과 비슷했으나 마른 그에 비해 탄탄한 근육질인 휴리조 왕자의 두터운 손을 맞잡으며 팰리슈는 알게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반갑소. 로츠왈드 왕국의 국왕인 팰리슈 반 로츠왈디스라고 하오.”
“휴, 휴리조 루 마니크라고 합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덩치에 비해 그의 태도는 매우 자신이 없었다.
멀리서 보고 있던 태진과 아리스가 귓속말로 그에 대한 평가를 나누었다.
“덩치에 안 맞는 사람이네요.”
“의외로 저런 종류의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학교 운동부원. 운동에 힘쓰다 보니 사람과의 대면에 익숙하지 않은 그런 종류일 것이다.
하미엘 대공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허허허 웃었다. 팰리슈는 조금 안도한 듯이 따라 웃으며 두 사람을 트레빌 성 안으로 안내했다.
팰리슈와 하미엘 대공이 이야기를 나누고 휴리조 일왕자는 가끔씩 대화에 끼는 정도의 구도였다. 대신 그는 처음 온 트레빌 성의 이곳저곳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일국의 왕자지만 그도 나라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고, 게다가 모디어프는 쉽게 올 수 있는 땅도 아니었다. 그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고, 비슷한 동년배로서 태진은 말을 걸어 주기로 했다.
“트레빌 성의 역사는 아십니까?”
그렇게 다가가자 호위병사가 태진을 경계하며 다가섰다. 휴리조 일왕자는 병사를 뒤로 물리며 대답했다.
“대략적인 개요밖에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강태진이라고 합니다. 로츠왈드 사절단이며, 이번 회담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태진은 지금 눈을 감은 상태였다. 그가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일반인과 똑같은 생활을 한다는 사실은 로츠왈드 안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타국의 왕자에게는 신기한 일이었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태진에게 물었다.
“눈이 안 보이십니까?”
“네, 어릴적 사고로……. 하지만 덕분에 다른 감각이 발달하여 지장은 없습니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태진은 트레빌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책에서 본 것과 이곳에 와서 시민들에게 들은 것을 조합하여 그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휴리조 일왕자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트레빌 성의 대부분은 각국에서 오는 사절단의 숙소로 쓰였다. 태진은 하미엘 대공과 휴리조 일왕자의 숙소까지 모두 안내해 준 다음 대략적인 일정이 쓰인 종이를 비서관에게 넘겼다.
그들이 쉽게 여독을 풀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신경 쓰는 태진에게 아리스가 또 감탄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태진 님이 못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알고 싶으십니까?”
“아뇨…… 알면 또 마음이 복잡해질 거 같으니까 관둘래요. 이런 회담의 진행도 해 보신 건가요?”
“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가면 으레 제가 인솔자역이었습니다.”
태진은 수학여행과 소풍의 개념을 부연했다.
아리스가 뒤늦게 주억댔다.
“이번 회담은 그것들보다 참가자의 규모가 커진 거로군요.”
태진은 즐겁게 웃으며 그녀와 헤어졌다. 사절단이 도착했으니 그만큼 다시 일이 늘어난 것이다. 그는 그날 이후로도 종일 뛰어다니며 사절단의 식사와 세탁 등. 큰 부분에서 작은 부분까지 일일이 모두 체크했다.
덕분에 본인의 숙소에 돌아갔을 때는 제법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매일이 이렇다 보니 정신을 차리면 하루가 끝나 있기도 했다.
방에 딸린 세면실에서 샤워를 하고 침대 위에 드러눕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것은 아리스였다.
평소 늘 보아 오던 정복이 아닌 가벼운 옷차림의 그녀는 처음이었다.
태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뇨…… 내일 아키레마 사절단이 도착하는데 어떡하고 계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피식 웃으며 태진은 그녀에게 의자를 내주었다. 차를 타 와 맞은편에 앉은 그는 조금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보입니까?”
“그, 글쎄요? 별로…… 평소와 똑같아 보이세요. 하지만 워낙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시니까…… 속마음은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버릇인지라, 죄송합니다.”
미묘한 태도로 사과를 하고서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솔직한 마음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나니 벌써 오늘이 되었다. 그 정도일까요.”
나파즈―마니크 공동 사절단이 도착한 것이 3일 전. 팰리슈까지 포함하여 오늘 삼국의 대표가 아침 식사를 하던 도중에 전서가 도착했다. 내일 오후쯤 도착할 예정이라는 아키레마 사절단으로부터의 전서였다.
회담의 진행을 맡고 있기에 전서를 가장 먼저 본 것은 태진이었다. 그는 전서의 내용은 대표들에게 알리고 아무렇지 않게 본래의 일로 돌아갔다.
아리스가 전서에 대해 들은 것은 오늘 오후였고 그때부터 쭉 태진의 기분이 궁금하여, 결국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안 떨리세요? 투신의 전사님을 드디어 만나게 되는 날이 왔는데.”
“그게 말입니다.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합니다. 마치 어제 데이트했다가 막 헤어진 듯이, 내일도 만나게 된다는 당연한 기분입니다.”
데이트라는 단어도 아리스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굳은 얼굴로 태진을 다시 쳐다보았다.
“정말이세요?”
“그렇습니다. 희한하죠? 제가 생각해도 조금 뜻밖입니다. 그렇게도 내일을 바라 왔는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아서 말입니다.”
“그럼…… 됐어요.”
아리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태진이 직접 타 준 차를 마시고 그녀는 늦지 않게 일어났다. 방을 나올 때 태진은 예의바르게 그녀에게 인사를 던졌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네, 좋은 밤 되세요.”
문이 닫히고 아리스는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그녀는 떠나지 않고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다. 과연 나는 왜 이곳에 온 걸까. 태진에게 찾아와서 그에게 무엇을 확인받고 싶었을까.
떨리지도, 설레지도 않는 평온한 마음.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 것 같은 자신이 아리스는 괜히 미워졌다.
태진 님, 떨리지도 않다는 건 만난다는 걸 서로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의미 아닐까요?
내일이면 투신의 전사가, 미연이 온다.
그녀도 태진의 존재를 이미 눈치 채고 강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리스는 왠지 모르게 미연도 태진과 같은 마음일 거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
아키레마 사절단의 밤.
목표로 한 트레빌는 이미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 서부대로를 지나 모디어프로 들어선 사절단은 트레빌를 하루 앞둔 거리에서 마지막 야영지를 꾸렸다.
미연은 그 야영지에서 떨어진 곳, 좀 더 트레빌가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기에 미연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사라졌다고 누구나 오해할 만한 위치였다.
한참 혼자서 트레빌 쪽을 보고 있을 때 위쪽에서 소리가 났다. 고개를 올리자 자신과 똑같은 가면과 모자를 쓴 남자가 서 있었다.
“……육포 있어?”
미연이 대뜸 말했다. 미소라는 예상치 못한 물음이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허리춤의 주머니를 뒤졌다. 거기서 종이에 말린 육포를 꺼내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와아, 고마워! 내 건 벌써 다 씹어 버렸거든. 미소라는 많이 남았네? 다 먹어도 돼?”
“맘대로 해라.”
그는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가면을 살짝 들어 육포를 물고 질겅거리는 미연을 내려다보다가 주춤주춤 그 옆에 앉았다.
둘은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야영지의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위치여서 배경 음악은 있었지만, 미소라도 느낄 만큼 확연한 어색함이 흘렀다.
이 둘의 대화는 보통 미연이 말하고 미소라가 받아치는 구도였기에, 미연이 말을 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미소라도 그것을 깨닫고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그 순간 미연이 선수를 쳤다.
“별 많지?”
“…….”
미소라는 살짝 한숨을 내뱉고 대꾸했다.
“별을 보고 있던 게 아니지 않나. 다 알고 있다.”
“헤에, 들켜 버렸네?”
미연은 슬그머니 가면을 벗었다. 찬바람이 피부에 닿자 상쾌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옆모습을 보다 미소라도 가면을 벗었다. 누군가가 다가오면 다시 쓰자고 서로 약속을 하고 그녀와 시선을 같이 했다.
“기분이…… 어떤가.”
무겁게 미소라가 입을 뗐다. 물을까 말까 계속 고민하던 질문이었다.
“뭐가?”
“내일이면 현신의 전사를 만나게 되는 거다. 몇 달 동안 찾지 않았나.”
미연은 으음―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갸웃댔다.
“그게 말야,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
“……흠?”
“아무렇지도 않아. 요상하게도. 아까부터 거기에 대해서 나도 생각하고 있는데, 나 왜 이렇게 평화롭지?”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나.”
“설명 좀 해 주라. 나도 솔직히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거나 그럴 줄 알았단 말야. 근데 왜 이렇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미소를 쳐다봐도, 미소라는 그녀에게 돌려줄 대답이 없었다. 뭔가 괜히 물어봐서 손해봤다는 느낌이라 미소라는 가면을 쓰고 일어섰다.
“어라, 가는 거야? 좀 더 놀자―”
“됐다. 먼저 자겠다.”
바위 뒤로 돌아가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연은 입을 삐죽였다.
“뭐야. 왜 저런담? 삐진 건가?”
야영지로 돌아오며 미소라는 생각했다. 나는 왜 그녀에게 그런 질문은 한 것일까. 몇 달을 찾은 연인을 만나는 거다.
말을 저렇게 해도 분명히 기뻐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것을 단지 눈치 채지 못했거나 숨기고 있을 뿐이다.
어쩐지 착잡한 마음이 되어 돌아온 야영지에는 이시브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저쪽 바위 뒤에 있다. 곧 올 거다.”
미소라는 먼저 자리에 누웠다. 왜 자신의 마음이 답답한지, 잠들 때까지 그는 결코 깨닫지 못했다.
복잡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으니 잠자리가 편했을 리가 없다. 뭔가 불편하게 잠에서 깨자마자 보인 것은 똑같은 가면의 얼굴이었다.
“늦어!”
“……아침부터 소리 지르지 마라.”
일어나자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었다. 사절단의 인원들도 반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백두 부대가 모두 기상하고 나자 텔리오트도 눈을 떴다. 다른 공신들은 이황자도 일어났다는 사실에 허겁지겁 떠날 채비를 갖췄다. 사절단의 맨 앞에 서서 텔리오트는 인원 점검까지 스스로 처리하고 나서 마지막 걸음을 시작했다.
오전을 지나 오후 무렵이 되었을 때 그들은 드디어 트레빌에 들어섰다.
아키레마 사절단이 오늘 도착한다는 소문은 이미 시 전체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외곽에서부터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대로에 다가갈수록 인원은 늘어가더니, 대로에 들어서자 수많은 인파가 양쪽에 늘어서 그들의 도착을 축하했다. 3일 전과 마찬가지로 꽃을 뿌리고 박수를 쳐 대는 시민들의 환영 인사에 말을 타고 가던 미연이 절로 손을 흔들었다.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뒤쪽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던 미소라는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환성이 심해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포기하고 그는 최대한 일행이 아닌 척하려고 노력했다.
텔리오트는 마차 안에서 밖을 내다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럭커 대신 마차에 오른 이시브가 바깥의 분위기를 살피다 텔리오트에게 알렸다.
“지금이옵니다, 저하. 시민들에게 얼굴을 보이며 인사해 주십시오.”
이시브의 지시는 정확했다. 환성이 절정에 올랐을 때 텔리오트는 마차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아키레마 제국의 가면의 황자는 신비로운 인물로 시민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가면을 쓴 그가 손을 들어 흔들자 시민들의 환성은 더욱 커졌다.
다시 고개를 넣은 텔리오트가 크게 웃었다.
“대단한 환영이군. 제국보다 이곳의 인기가 더 좋은 것 같아.”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저하.”
텔리오트의 농담을 이시브는 웃어넘겼다. 하지만 확실히 이러한 환영은 예상외였다. 아무리 모디어프가 개방적인 곳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열기가 높을 지는 이시브로서 상상 밖이었다.
이 회담을 주도하고 있는 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고, 그는 추측했다.
사절단의 행로는 대로를 지나 트레빌 성 앞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자 텔리오트는 옷을 단정히 정리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성 앞에는 이미 도착해 있는 사절단의 대표가 텔리오트를 맞이하고 있었다. 미리 얻은 정보로 텔리오트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거리낌 없이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팰리슈가 가장 먼저 나서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텔리오트는 잠깐 손을 내려다본 다음에야 맞잡았다.
“해 본 적이 없기에 어색하오. 이해해 주시오.”
“이해하오. 와 주셔서 감사하오, 텔리오트 지 아키레마 이황자.”
어떻게 보면 앙숙인 두 나라 간의 만남치고 첫인상을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회담이 진행됨에 따라 달라질지도 몰랐지만, 텔리오트도 팰리슈도 인사는 잘 끝났다고 여겼다.
텔리오트는 하미엘 대공과 휴리조 일왕자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악수라는 문화가 없는 나라에서 왔기에 그들은 목례로서 서로에게 예를 갖췄다.
인사가 끝난 뒤 팰리슈가 전과 같이 안내를 했다. 앞장서서 트레빌 성으로 들어가는 그를 뒤따르려 하다가 텔리오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 이시브밖에 없었다. 미연과 미소라가 아직 말에 탄 그대로였다. 여기선 그들이 내려 텔리오트를 호위해야 한다.
이시브가 서둘러 달려가 미연에게 낮게 말했다.
“대장님! 내려오십시오. 부대장님도 어서!”
미소라는 단숨에 말에서 내렸지만 미연은 아니었다. 어느 한 방향에 눈을 돌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시브로서는 상대적인 눈높이가 낮아서 그녀가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다리를 흔들었다.
“대장님! 내려서 황자 저하 옆에 서십시오!”
“어, 어? 아, 응.”
그녀가 다시 제정신을 차렸다. 말에서 내려서 그녀는 미소라와 같이 텔리오트의 뒤에 섰다.
“뭘 보고 있던 거야?”
“아무것도 아냐. 미안해.”
텔리오트의 물음을 대충 얼버무린다. 텔리오트는 고개를 돌려 기다리고 있던 팰리슈에게 미안하다는 듯 목례를 해 보였다.
“자, 그럼 이쪽으로.”
팰리슈의 안내로 그들은 드디어 트레빌 성안으로 들어섰다.
대표들이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그 뒤쪽에서 미연은 미소라에게 속삭였다.
“찾았어.”
“그래? 그쪽에서도 너를 알아봤을까? 이렇게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게 말야. 눈을 감고 있어서 잘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히 태진이야. 이 자식, 나중에 만나면 한 소리 해 줄 테다.”
드디어 태진을 만났는데 미연의 음성은 미묘하게 화가 나 있었다. 미소라는 짐작할 수 없는 그 이유를 굳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성을 구경하듯 한 바퀴 돌아 숙소가 있는 층에 도달했다. 그때 줄곧 뒤쪽에 있던 태진이 앞으로 나와 팰리슈를 대신하여 사절단에게 숙소를 배정했다.
눈을 감은 채 척척 방의 위치와 번호까지 알려 주는 그를 미연은 뒤쪽에서 계속 주시했다.
“……이상입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아키레마 사절단이 각각의 방으로 흩어질 때까지 태진은 그 앞을 지켰다. 사절단 인원들과 인사를 해 가면서 그들이 모두 안전하게 방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미연도 자신의 짐을 챙겨서 그의 앞을 지나쳤다.
눈을 감고 있는 태진. 가면을 쓴 미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미소라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이시브의 부름에 잠시 눈을 돌린 사이 그녀는 이미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이시브는 미연이 주목한 노란머리의 맹인을 잠시 쳐다보다가 곧 이시브와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키레마 사절단이 각자 방을 찾아 들어간 뒤 복도에는 태진만이 남았다. 팰리슈와 다른 사절단들도 흩어진 이후였기에 그는 혼자서 길을 되돌아왔다.
그는 저녁이 될 때까지 언제나처럼 똑같은 하루를 지냈다. 마지막 사절단이 도착하고, 회담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일은 더더욱 늘어나 있었다.
사절단이 늘어난 만큼 필요한 물품들을 확인하고, 회담에 사용될 장소는 점검하는 등, 진행 담당인 그가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날도 태진은 밥 먹는 시간도 아깝게 일을 한 다음 숙소로 돌아왔다. 심야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모래와 땀이 덕지덕지 붙은 불쾌한 몸을 이끌고 귀환하는 도중 아리스를 만났다. 그녀도 회담 준비로 지금에야 방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같은 층이었기에 태진은 아리스와 동행했다.
“며칠 안 남았네요.”
“조금만 더 고생하면 끝이 나는군요.”
“태진 님 덕분에 정말 많은 일을 해 보는 것 같아요. 태진 님이 없었다면 아마 영원히 못했을 일은 이 몇 달 간 다 경험하네요.”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뻔뻔하게 웃는 태진에게 아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그 가면을 쓴 여검사…… 투신의 전사님이시죠?”
“아마 그럴 겁니다.”
“만나러 가지 않으시나요?”
“타국의 사절단입니다. 그렇게 쉽게 만나지는 못합니다.”
아쉽다는 듯한 태진의 얼굴을 보며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댔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의구심이 든 것이었다. 그가 이 정도로 포기할 리 없다는.
하지만 그 의구심을 풀기 전에 아리스의 방 앞에 도착했고, 그와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결국 아리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방으로 돌아갔다.
태진도 먼저 방으로 가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내일 세탁을 맡길 옷을 따로 모아놓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머리를 말리고 최대한 뽀송뽀송한 상태로 단장을 했다.
그대로 침대에 앉은 채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방에서 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 아키레마 사절단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출입은 되도록 자제해 달라고 그가 미리 부탁을 해 놓은 덕택이었다.
지금쯤이면 모든 이들이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이능을 깨운 채 태진은 층을 내려갔다. 사절단에 따라온 시종들이 가끔씩 밤의 성을 오갔지만 태진도 그들에게 들킬 만큼 허술하진 않았다.
경비원들의 눈도 피해 태진은 성 뒤쪽으로 돌라왔다. 나무라고는 찾기 힘든 땅이지만 성 뒤에는 작은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태진은 그곳에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숨겼다.
그는 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이곳으로 나올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느냐. 당연하다. 태진이 그렇게 알렸으니까.
몇 달 동안 만나지 못한 미연이 눈앞에 있다. 그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리스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면 수를 써야 했다.
아키레마 사절단이 각 방으로 흩어졌을 때, 미연은 일부러 태진의 앞으로 보란듯이 지나갔다.
그때 태진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밤에 성 뒤쪽으로.”
한국말이었다. 미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라고 태진은 판단했다. 그래서 그 뒤로도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내고 이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태진은 기다렸다. 몇 달을 참았다. 고작 몇 시간을 기다리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겹기는커녕 오히려 흥미진진할 지경이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체감 시간으로는 이제 자정을 막 넘겼을까 그렇게 생각되던 때.
태진이 걸어온 길을 똑같이 밟고 오는 발걸음 소리가 있었다. 태진의 청각은 그 발소리를 구분해 냈다.
기억 속에 있는 발소리다. 양발에 어느 쪽도 치우치지 않고 일정한 체중 조절을 유지하는 발소리.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적당한, 그러나 이쪽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사라지는 발소리.
모두가 미연을 뜻하고 있었다.
태진은 수풀 속에서 일어났다.
이미 눈은 뜬 상태다. 더 이상 다른 감각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두 눈으로 상대를 확인했다.
나타난 것은 미연이었다. 가면 위로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한국말을 듣고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는 자가 그녀 말고 또 있을까.
수풀에서 벗어나자 미연도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서 멈춰 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미연이 손을 들었다. 가면과 모자를 벗었다. 몇 달 동안 길어 버린 머리카락이 어깨를 위로 흘러내렸다. 변한 곳이 없는 얼굴을 보는 순간 태진은 울컥하는 그리움이 치솟아 올랐다.
미연도 가면을 손에 쥔 채 못 박힌 듯 태진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그리고 미연이 너무나도 반갑게 소리쳤다.
“너 머리가 왜 그따위야!”
“……그 소리부터 나올 줄 알았다.”
몇 달 만의 해후. 태진은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히어로즈 리턴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