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셋. 맡겨 주세요!
태진의 특사대가 창설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합류한 자는 물론 아리스였다. 정보부 장관실에서 가까운 곳에 마련된 부실에는 멀쩡한 간판조차 달지 않았지만 그녀는 제때 그곳으로 찾아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리스.”
“……예, 안녕하세요.”
그녀는 기사 정복 차림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복장이었던 태진은 쓴웃음 비슷한 표정을 만들었다.
“부대장이 그 정도면 대장의 차림새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 겁니까?”
“아, 아니, 이건 그냥 첫 출근이니까…….”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아리스에게 태진은 뚜벅뚜벅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아리스. 여러 가지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손을 맞잡고 악수. 특사대장과 부대장의 첫 출근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곧바로 이어진 것은 사무실 정리. 우습게도, 왕국 전체에서 정말 중요한 부서였으나 현 인원은 이 두 명으로 끝이었다. 향후 필요할 시기가 되면 인원을 보충한다는 미명 아래, 당분간은 태진과 아리스만이 특사대원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물론 인사서류상엔 정보부장관 비서실 소속으로 올라 있다.
어쨌든 둘뿐인 사무실이니 그들은 평대원처럼 열심히 청소를 했다.
적당히 사무실 정리가 된 듯하자 다음은 책상 정리. 두 개의 책상을 각각 맡아서 각자가 사용하기 쉽게 만들어 놓자 어느새 점심때였다.
“배고프네요.”
“그렇군요. 남은 일은 점심 먹고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네, 좋아요.”
둘은 나란히 정보부 식당으로 향했다. 태진이 정보부를 들락날락거린 이후 그의 얼굴은 꽤 알려진 편이었다. 게다가 그 옆에 동행하고 있는 자가 전 순찰대장인 아리스였으니 그 유명세는 더 말할 바가 아니다.
식당에서 자리를 잡자 태진은 물음을 던졌다.
“정식 기사 임명이 언제입니까?”
“다음주예요. 특사대 부대장이 되었으니 아버지께서 빨리 받는 편이 좋다고 하셔서…….”
“또 절차 다 무시하고 팰을 재촉했나 보군요.”
아리스는 웃음으로 대답을 무마했다. 태진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들 주변으로 많은 이들이 지나갔다. 수군대는 소리가 태진의 귀에는 모두 들렸지만 그는 그것들 모두를 무시했다. 유익한 정보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이 태진과 아리스가 화두였기에 특사대에 유익한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리스가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진 님에게 흥미를 많이 가지나 봐요. 여기저기서 태진 님 이야기뿐이네요.”
외모상으로는 그렇게 튄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동안의 사건으로 정보부 내에서 유명 인사였다.
정확한 사연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은연 중에 보부 장관과 아는 사이라는 소문 정도는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다 며칠 전 열렸던 미켈파 남작, 오켈라니아 남작의 재판 건에도 관여했다는 소문도 있어, 그를 심상찮게 쳐다보는 시선들도 다수 존재했다.
태진은 태연히 식사를 이어 가며 대꾸했다.
“좀 지나면 수그러들 겁니다. 사람의 흥미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럴까요? 특사대가 조금씩 활동을 시작하면 좋든 싫든 이들에게는 알려지게 될 텐데요.”
“그전까지는 조용히 있고 싶습니다.”
태진은 담담했다.
식사를 끝낸 후 다시 특사대 사무실로 올라오자 문 앞에서 태진과 아리스를 기다리고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식사는 맛있었나요?”
키드카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았다. 태진을 반갑게 맞이하고 그 옆의 아리스에게도 살짝 목례를 해 보인다.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대량 급식에 일정 수준 이상의 맛을 기대하기는 힘든 법 아니겠습니까.”
태진은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대충 정리가 마무리된 접객용 테이블에 키드카와 게르가 자리했다.
“감옥에서는 별일 없었습니까?”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쉬다 나왔어요. 노예 시장 쪽 말고는 걱정되는 일도 없었고요. 그들은 어떻게 되었죠?”
“죄가 확정되어 어제 귀족 교도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죽기 전에는 나오기 힘들 겁니다.”
“조금 미안하군요. 결국 저한테 이용당한 꼴이니.”
“어쩌겠습니까.”
태연히 응답하는 태진에게 키드카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게르가 내민 서류를 받은 그녀는 안건을 한번 확인하고 태진에게 건넸다.
“여기. 약속했던 명부예요. 의심되는 명부는 따로 간추렸으니까 보기 편할 거예요.”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요. 감사합니다. 혹시 정보꾼은?”
“정보꾼 경계는 기본 아니겠어요.”
태진은 침착한 눈으로 서류를 훑어 넘겼다. 정독 이전에 살펴보는 수준이었기에 그 작업은 금방 끝났다.
“잘 받아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키드카.”
“아니에요.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가십니까?”
“예, 친절하게도 마차를 빌려 주셔서 이제 출발할 예정이에요. 특사대도 오늘부터 시작이지요? 옆에서 도와드려야 하는데 불가능하겠네요.”
“마음만이라도 잘 받겠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키드카와 게르는 태진에게 깊이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떠났다. 그들은 비밀리에 오늘 밤, 수도를 떠나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으로 돌아간다. 몰래 왔으니 떠나는 것도 몰래.
태진은 배웅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하며 책상에 앉았다.
“그 서류는 뭔가요?”
아리스가 키드카에게서 받은 서류를 꺼내는 태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과 노예를 거래한 이들의 명부 중 일부입니다.”
“일부요?”
“예. 아무래도 노예에게 약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드는, 그런 자들을 간추려 모은 명부입니다.”
“약……?”
아리스는 키드카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노예 시장에서 수도로 오던 마차행의 모든 인원은 노예를 마약과 같이 거래한 자들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 약이 판매된 명부도 있을 터. 태진이 보고 있는 명부가 바로 그것이었다.
“보시겠습니까?”
태진은 아리스에게 명부를 넘겼다. 두툼한 그것을 천천히 넘겨 살피던 중 아리스의 눈이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어머…… 이분은……?”
“왜 그러십니까?”
“설마, 이분도 마약을 거래했다는 건가요?”
“그 명부에 실려 있다면 그럴 겁니다만. 잘 아는 분이십니까?”
아리스는 책상 위에 명부를 펼쳐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 클림프 미노클 백작. 아리스는 놀란 얼굴이었다.
“이분, 꽤 권위 있는 역사학 학자신데요?”
“학자라고 노예를 사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만.”
“아…… 그렇긴 해도, 그럴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정말로 의외네요.”
“친분이 있습니까?”
“예. 할아버지의 친우이시고…… 지금은 왕립 대학교 교수로 계세요.”
태진은 명부를 한 차례 내려다보았다.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안내해 주십시오. 지금 왕립 대학교로 가겠습니다.”
왕립 대학교. 국왕 팰리슈가 건국 후 힘을 부었던 사업 중 하나가 교육이었다. 현신의 전사가 남긴 지론은 국민의 수준이 올라가야 나라 전체의 수준도 올라간다는 것. 그 의견에 동의하여 팰리슈는 곧장 대학교를 건립했다.
현신의 전사가 잡아 놓은 기초를 골격 삼아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완공하였다.
그리고 그 정문 광장에는 현신의 전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멋지죠? 사 년 동안 전 매일 이 동상 앞을 지나다녔어요.세상 누구보다 태진 님이 만나고 싶었거든요.”
동상 아래에서 아리스는 잠시 추억에 잠겨 있었다.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대학 시절이었으나 벌써 오래전 이야기인 듯이 느껴졌다.
태진은 자신을 조각해 놓은 동상을 삐딱하게 올려다보았다.
“안 닮았군요.”
“그렇죠? 사실 태진 님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조각가가 별로 실력이 없었나 봐요.”
당시 동상을 조각한 자는 로츠왈드 왕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자였다. 그럼에도 조각이 닮지 않았다는 건 얼굴을 묘사해 준 자의 실력 문제일 텐데, 그 작자가 팰리슈였다.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짐작하며 태진은 나중에 그를 만나면 해 줄 대사 명단을 머릿속에서 뽑아 보았다.
“교수동은 어느 쪽입니까?”
“아, 맞다. 이쪽이에요. 오세요.”
졸업생답게 아리스는 헤매지 않고 길을 안내했다. 지나다니는 학생들은 귀족, 평민 구분이 없었다. 옷차림의 차이는 있었으나 평등하게 배움의 기회를 얻는다는 증거였기에, 태진은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한국의 대학교와 그렇게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건물을 몇 개 지나 동산 같은 곳을 오르자 그곳에 교수동이 서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좋은 그 건물 1층에는 각 교수실의 위치를 적어 놓은 현판이 있었다.
“클림프 미노클 백작…… 교수실은 그대로네요.”
둘은 3층에 위치한 미노클 백작을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전형적인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진은 헛기침을 한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벽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장. 가장 먼저 보인 모습은 그것이었고, 그 다음이 문 반대쪽 책상에 앉아 있는 마른 미노클 백작의 모습이었다.
“우리 학교생은 아닌 것 같은데, 뉘시오?”
태진이 인사하기 전에 그의 뒤에서 아리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미노클 백작의 눈에 희색이 돌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내 수업에서 전체 수석을 한 아리스 뤼스필드 양 아니신가.”
반가운 얼굴로 미노클 백작이 책상에서 일어섰다. 살짝 그녀를 포옹하듯 인사하는 그를 그녀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잘 지내셨어요? 졸업한 후로 바빠서 찾아뵙지도 못하고, 죄송해요.”
“아니다, 아냐. 네가 순찰대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네 할아버지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단다.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
“기뻐해 주시니 감사해요, 교수님.”
두 사제의 훈훈한 광경을 태진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잠시 이야기꽃을 피우던 두 사람의 신경이 다시 태진에게 돌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 태진 님. 인사하세요. 이분이 클림프 미노클 백작님이시고 왕립 대학교에 역사학 교수로 재직 중이세요. 교수님, 이쪽은…… 으음, 저희 순찰대에 도움을 주고 계신 분이세요.”
“처음 뵙겠소.”
“반갑습니다. 강태진이라고 합니다.”
미노클 백작은 악수를 청하려던 손길을 움칠 멈추었다.
“지금 성함이 뭐라고 하셨소……?”
“강태진입니다. 로츠왈드 왕국 독립 전쟁사를 기록하신 미노클 백작님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그 이름과 동명입니다만, 본인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그, 그건 그럴 테지만…… 조금 당황스럽군.”
미노클 백작은 둘은 의자에 앉혔다. 교수동 담당의 시종이 들어와 차를 끓이는 사이 미노클 백작과 아리스는 다시 옛이야기를 꽃피웠다. 태진은 시종이 건네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들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때를 기다렸다.
얼마 후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두 사람이 태진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이다. 아리스는 멋쩍은 듯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오늘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라 태진 님이 교수님을 뵙고 싶어 하셔서요.”
“태진 님……?”
그 호칭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미노클 백작은 태진을 주시했다.
“나한테 볼일이 있으시오?”
“그렇습니다. 순찰대에 관련된 일입니다만. 강의는 잡혀 있지 않으니 잠깐 얘기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소, 순찰대의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던가? 내가 어떤 혐의라도 있는 것이오?”
“오켈라니아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구매하셨습니까?”
순간 미노클 백작의 행동이 멎었다. 그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찻잔을 들었던 아리스의 손길로 정지했다.
“태, 태진 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그의 화법을 잘 알고 있는 그녀도 당황한 말을 내뱉었지만 태진은 요지부동이었다.
“증거가 확보되어 있으니 굳이 숨기려고 해도 소용 없을 겁니다. 단지 미노클 백작님의 직위상 확인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 말투는 부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알 수 없는 압박감에 미노클 백작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간신히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오……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소?”
“새로이 말씀드리죠, 자수하신다면 정상참작의 여지도 있습니다.”
태진의 날카로운 눈빛이 노쇠한 교수를 찔렀다. 아리스는 스승이 단시간에 몇 십 년은 늙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더 숨길 것도 없을 것 같구려.”
무거운 입이 떨어졌다.
“그렇소. 내가…… 노예를 샀소.”
“목적은?”
“시, 시종이오. 난 백작이지만 학자인 탓에 그렇게 부유하지는 못하오. 그렇기에 노예를 사서 급료를 없애보려고 했을 뿐이오.”
“시종의 급료를 주기도 힘들었던 겁니까?”
“부끄럽지만…… 그렇소.”
태진은 확인하는 눈길로 아리스를 슬쩍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미미하게 모른다는 뜻을 내비쳤다.
“좋습니다, 솔직하게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건이 끝나자 태진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리스가 허겁지겁 미노클 백작과 인사하며 뒤따라서 교수실을 나올 때, 미노클 백작이 태진을 붙잡았다.
“나, 난, 어떻게 되는 것이오?”
“일단, 도망가도 소용없다는 사실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 같으니 그쪽도 참고하겠습니다. 곧 연락이 갈 것입니다. 소환 명령이 떨어진다면 거부하지 마시고 받아들이십시오.”
미노클 백작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뒤로 하고 태진과 아리스는 교수동을 빠져 나왔다.
“좀……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나쁜 분은 아니신데.”
“노예를 샀다는 자체가 이미 범죄입니다.”
“처벌…… 하실 건가요?”
태진은 잠깐 그녀를 돌아보았다.
“특사대가 하는 일은 범죄자의 처벌이 아닙니다. 범죄의 조절입니다. 미노클 백작을 처벌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대를 확인했을 뿐입니다. 특사대의 첫 번째 일이 되겠군요.”
아리스가 모르겠다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고, 태진은 설명하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미노클 백작의 정보를 구해 주십시오. 그의 신변을 조사하겠습니다. 어쩌면 마약의 흔적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
며칠 동안 두 사람은 미노클 백작의 모든 정보를 캐고 다녔다.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아리스의 할아버지이자 현재 왕립 대학교 총장으로 있는 파미엘 뤼스필드였다. 아리스를 내세워 총장실에 들이닥친 태진은 여전히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역사학 교수로 있는 미노클 백작의 인사 기록을 보고 싶습니다만, 허락해 주십시오.”
“……아리스야, 이분은 뉘시더냐?”
“할아버님, 그…… 죄송해요, 인사가 늦었어요. 저희 순찰대를 도와주고 계시는 강태진이라는 분이세요.”
“그렇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태진은 기본적인 사항을 파미엘 총장에게 알려주었다. 심각한 얼굴이 된 그가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우리 교수 중에 노예를 산 자가 있다니…… 게다가 그 자가 나의 친우라니.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오. 알겠소, 지금 인사 관리과로 전언을 써 주겠소. 가지고 가면 원하는 대로 기록을 열람할 수 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총장님.”
“아리스의 일을 도와주고 계시다니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구려. 앞으로도 우리 미숙한 손녀딸을 잘 부탁하오.”
“별말씀을. 도움 받는 것은 언제나 접니다.”
태진의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묘하게 발갛게 변했다. 눈을 감고 있다는 설정인지라 태진은 그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고, 그 반응은 손녀딸을 지켜보는 할아버지에게만 발각되었다.
“그나저나, 아리스야. 아들놈에게 들었다만, 정보부에서 뭔가 새로운 일이 있다고 하던데 그건 무슨 일이냐?”
“네, 네? 새, 새로운 자리라뇨?”
태진은 속으로만 고개를 젓고서 진득이 입을 열었다.
“아마 그 얘기 아니겠습니까? 정보부 장관님께서 새로이 비서실을 개편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 이야기일 겁니다, 총장님.”
“비서실을 개편? 정보부에 그런 게 있던가?”
“있긴 있습니다만, 기밀사항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기밀이라. 그렇군, 가족이라도 알려 주기는 힘들지. 그런데 그 사항을 현신의 전사와 동명이신 그대는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게요?”
“순찰대 일을 돕고 있다가 그냥 흘려들은 사실입니다. 현재 위치상 정보부 장관님을 뵐 기회가 많기에.”
뻔뻔하게 대꾸하고서 태진을 일어섰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그는 아리스를 데리고 총장실을 빠져 나왔다.
할아버지에게 다시 인사드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리스는 얼른 태진의 뒤를 따랐다.
“후우. 할아버지께 숨기려니 힘드네요.”
아리스의 한숨에 태진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리스. 앞으로 특사대 활동에 대하여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표정 관리하는 법과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우십시오. 특사대는 모든 활동 사항이 기밀입니다. 순찰대 인사 개편 건도 그래서 비밀로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처럼 가족은 물론이고, 심할 때는 팰도 속여야 할 때가 있을 겁니다.”
“구, 국왕 전하도요?”
“필요성이 있다면 그럴 생각입니다.”
국왕을 속인다는 건, 잘못 받아들인다면 쿠데타와도 이어지는 엄청난 일이다. 태진은 그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서 아리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타고난 성격을 바꾸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그 두 가지는 익혀 주십시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여, 열심히 할게요.”
순진한 성격의 아리스로서는 힘든 부탁이긴 했으나 물러서진 않았다. 순하지만 마음속에 곧은 심지가 있는 그녀를 태진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약한 미소를 띤 얼굴로 태진은 다시 움직였다.
다음 행선지는 대학 인사 관리과였다. 총장의 도장이 찍힌 전언을 가지고 가자 관리과 직원의 표정이 다급하게 바뀌고, 눈 깜짝할 사이에 관리과장이 튀어나왔다.
전언을 읽은 과장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관리 창고로 그들을 안내했다.
과장에게 입막음을 단단히 하고, 태진은 그가 꺼내 준 인사기록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특이사항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건 어딜 보나 평범한 서류잖아.
결국 태진은 조사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행정부에 문의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아리스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행정부라니…… 귀족 명부를 찾으시려는 건가요?”
“그럴 생각입니다. 미노클 백작과 접점을 가지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노예 시장의 명부와 대조해 보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단서를 찾으시려는 거죠? 노예와 약을 구매했다는 증거는 이미 노예 시장의 명부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물론 미노클 백작에 한해서는 충분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노예 시장의 명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을 보면 안 되는 물건이니까 좀 더 완벽한 증거는 잡아 내야 합니다. 미노클 백작이 마약을 손에 넣었다면 수도 내 귀족 중 또 다른 자도 그곳에 연루되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전 그 단서를 찾아내려는 것입니다.”
“……미노클 백작님 한 분을 노리는 게 아니군요?”
“말씀드렸다시피 전 지금 마약의 제거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리스는 개인 명부를 덮었다.
“범죄는 인간이 있는 한 어차피 생긴다고 하셨잖아요. 마약이 나쁘다는 건 알지만 노예시장도 그냥 두면서 왜 마약은 없애려고 하는 거죠?”
“노예 시장은 현재 키드카의 관리 아래에 있습니다. 말했다시피 그녀가 거래하는 모든 노예는 그녀의 손에서 모두 관리되고 있습니다. 노예로 팔려간다고 하더라도, 미켈파 남작 같은 특이 경우가 아닌 이상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약은 다릅니다. 마약은 제조자와 유통자가 있을 뿐, 아무도 그것은 관리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약은 로츠왈드 왕국을 위해서라도 ‘조절’되어야만 합니다.”
왕국 범죄 조절 계획. 그중에서 마약은 조절, 결국 제거되어야만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아리스는 침을 삼켰다.
“범죄에…… 강약이 있을까요?”
“아리스의 논리는 이해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범죄는 범죄인 채로 이미 없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범죄가 나타난다면, 소매치기가 살인보다는 귀엽지 않겠습니까?”
필요 최소한의 범죄만을 남겨 둔다. 왕국 범죄 조절 계획의 요지는 그것이다. 인간 세상에 범죄가 사라질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악행은 세상의 유지를 위해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필요악, 악이 있어야만 정의가 성립하는 법이다.
아리스는 아찔해지는 태진의 머릿속을 굳이 상상해 보려 하지 않았다.
“그냥, 제 느낌이에요. 개인적인 느낌. 혹시, 마약에 관한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으신가요?”
“가지고 있다면, 그건 제가 아니라 미연입니다. 그녀의 가문에 관련된 일로, 마약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으로 사건이 있었다는 말을 전에 들었습니다. 간접 체험이랄까요. 어쨌든 마약 자체는 싫어하는 편입니다.”
태진과 미연 사이에만 알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아리스가 알 리 없었다. 아리스는 뭔가 할 말이 궁색해져 입을 다물었다. 몇 차례 다른 쪽 인사 명부를 뒤진 다음 태진은 먼저 창고를 빠져나갔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과장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그를 보며 아리스는 왠지 모른 쓸쓸함을 느꼈다.
물론 그 쓸쓸함의 정체를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왕립 대학교를 빠져 나와 태진과 아리스는 곧장 왕궁 행정부로 향했다. 대외적으로 아직 순찰대장 직함인 아리스의 부탁으로 테스피놀 행정부 장관을 만나, 수도 내 거주 중인 귀족의 명부를 손에 넣었다.
그것을 살피며 각 귀족 간의 상관관계를 엮는 데 하루가 걸렸고, 그 상관관계를 따라 하나씩 검토를 해 보는 데에 또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3일째 되는 날에야 모든 검토가 끝났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몇 가지의 가설만이 남겨졌다.
“후우…….”
아리스는 뻑뻑한 눈을 비비다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침부터 서류와 씨름을 하느라 눈치 채지 못했을 뿐 그녀의 배는 예전부터 허기를 알리고 있었다. 마침 서류 정리가 끝났기에 아리스는 태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적어도 아리스의 것보다 두 배는 넘을 듯한 양의 서류를 쌓아 놓고, 이틀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세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그는 여유롭게 고개를 들었다.
“배고프십니까?”
“에, 아, 네?”
“그런 소리가 들리는군요. 먼저 식당으로 가셔서 식사하십시오. 전 좀 더 보다가 가겠습니다.”
“아…… 태진 님, 어제도 그렇게 말씀하시곤 안 오셨는데요.”
“그랬습니까? 그렇다면 오늘은 가겠습니다. 적당한 영양 섭취는 두뇌 활동에 유익한 일일 테니까요.”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고 태진은 책상에서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서려고 할 때 태진은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문을 열자 바깥에 서 있던 아서가 흠칫 놀라는 기척을 보내온다.
“아, 태진 님. 혹시 식사하러 가십니까?”
“그렇습니다, 아서. 용건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같이 식사라도 할까 해서. 장관님도 부르시고요.”
“아버지가?”
정복을 챙겨 입은 아리스의 물음에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로 태진과 아리스는 사무실을 나섰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정보부 장관실의 문을 두들기자 근엄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들어오시오.”
“아버지, 저예요.”
아리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대번에 환호 담긴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딸내미야!”
“아, 아버지!”
“아니, 그 고왔던 피부가 왜 이렇게 된 것이냐. 밥은 제때 먹고는 다니는 거냐? 집에서도 얼굴 보기 힘들고! 태진이 저놈이 그렇게 심하게 부려먹든!?”
여전한 모습에 태진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들으니 제가 부하의 사정도 챙기지 않는 악덕상사로 들립니다만, 하이듀크.”
“태진, 넌 예전부터 사람 부려먹는 게 너무 심해. 모두가 너 같진 않단 말이다.”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그만하시죠.”
하이듀크가 헛기침과 함께 투덜거리는 사이 태진은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식탁을 발견했다.
“정보부 장관도 원칙적으로 식당에서 식사하기로 되어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어허! 사람이 뭘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그래. 다 딸내미와 친우와 원수의 아들과 식사를 하고 싶은 나의 작은 배려라고 생각해. 앉아, 앉아.”
졸지에 원수의 아들이 된 아서는 계속되는 쓴웃음을 지울 새도 없이 식탁에 자리했다. 이미 말끔하게 차려진 식탁 위에는 풍성한 점심 한 끼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들은 담소를 나누며 점심을 함께 했다.
식사를 끝마친 후 시종을 불러 차를 주문한 하이듀크는 식탁이 치워지자 곧장 태진에게 물었다.
“마약건은 잘 되어 가나?”
“하이듀크의 딸을 부려먹는 만큼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첫마디가 가슴 아프군…… 제대로 된 걸 건지지 못한다면 당장 해고시킬 거야.”
“국왕 전하의 허가 아래 창설된 특사대의 대장을 정보부 장관이 쉽게 해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시키는’ 거지. 어감이 중요한 거야.”
태진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 길은 잡았습니다. 현재 미노클 백작과 닿아 있는 연줄을 몇 가닥 잡아냈습니다. 오늘 중으로 미노클 백작의 저택을 수색할 예정입니다.”
“여전히 일처리가 빠르군.”
“다 예상하고 아서를 이곳으로 부른 것 아닙니까?”
그들은 30년 전에 이미 서로의 모든 것을 안 친우. 성격도 능력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이듀크는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서 아서에게 눈을 돌렸다.
“기동대장, 도와줄 것이 있어.”
빠른 태도 변환. 아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정보부 장관님.”
“잠입 전문 대원을 다섯 명 색출하여 특사대로 보내. 태진을 도울 수 있도록 입이 무거운 자들로 선별하도록. 그 다음은 태진이 알아서 해 줄 거야.”
아서는 잠시 태진에게 눈을 돌렸다. 지금은 맹인 행세를 하고 있지 않으니 그 검은 눈동자와 정확하게 부딪혔다.
“미노클 백작의 저택을 수색하시는 거라면 정식으로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노예는 어차피 들킨 것을 알 테니 숨기지 않을 겁니다만 마약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가 마약을 다른 곳으로 빼돌린다면 증거가 사라집니다. 오늘의 수색은 마약의 위치를 판별하는 것이기에 정식 수색이 아닙니다.”
“그것은 혹시 불법 침입이 아닙니까……?”
“혹시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너무나 담백하게 대답하는 터라 아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강직한, 표준적인 기사였기에 태진의 발언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기사들에게 범법 행위를 시킬 수는 없습니다.”
“국왕 전하의 명령이라고 해도 말입니까?”
“그렇다면 생각은 해 볼 테지만…….”
“그럼 국왕 전하의 명령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특사대의 모든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팰의 허가가 내려진 상태입니다. 이번 수색은 앞으로 우리 특사대 활동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 기사들에게 누가 될 기록은 절대 남지 않을 것이고, 남더라도 제가 모두 처리하겠습니다. 다섯 명을 보내주십시오.”
태진은 아서에게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하이듀크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꼈고, 아리스도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결정은 기동대장인 아서에게 맡겨진 상태. 아서는 고심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후 아서가 고개를 든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 수색이 정당하다고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아서는 조금 마음이 풀린 듯 표정이 나아졌다. 하이듀크도 일부러 크게 숨을 내쉰 뒤 말했다.
“다행이군. 처음부터 우리끼리 삐걱거리면 안 되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을 테니 아서, 너도 조금은 머리를 유연하게 만들어 봐.”
“노력하겠습니다.”
뤼스필드 가문과는 달리 슈펠 가문은 원래가 기사 가문이었다. 제국의 귀족이자 기사였던 슈펠 가문은 로츠왈드 독립 전쟁시 로츠왈디스 가문의 뜻을 같이 하여 제국에 반기를 들었고, 지금은 건국 공신으로 인정받고 있는 가문이었다.
대대로 기사도가 몸에 배인 생활을 해 오는 터라, 이와 같은 범법 행위는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서는 결단을 내려주었다. 태진은 그 점에서 깊이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아리스. 오늘 수색을 맡아 주십시오.”
“네? 제가요?”
“정식 기사는 아니지만 그들 중 아무도 아리스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사대 부대장으로서의 첫 임무입니다. 맡겨도 되겠습니까?”
태진의 똑바른 눈빛이 아리스에게 고정됐다. 그녀에게 그 눈빛을 거부할 힘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맡겨 주세요! 꼭 증거를 찾아낼게요.”
진지한 얼굴로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날 밤, 미노클 백작의 저택으로 숨어드는 여섯 명의 그림자가 있었다. 모두가 검은 잠입복과 복면으로 몸을 가린 채였다. 얼굴은 물론 체형마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완벽히 은신한 뒤, 그림자들은 저택의 담을 넘었다.
정원에 풀어 놓은 경비견들에 대비하여 그들은 미리 몸에 어떤 향수를 뿌려 두었다. 인간의 체취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풀 냄새 비슷한 자연의 향기.
경비견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긴 그들을 지나쳤다.
경비조가 멀리 사라진 뒤여섯 명은 사전에 협의한 대로 움직였다. 두 명씩 짝을 나눠 저택의 좌측, 중앙, 우측을 맡아 수색에 돌입했다.
중앙의 저택을 맡은 두 명, 아리스는 기동대원과 함께 어둠 속을 달려서 저택으로 뛰어들었다. 기동대원의 이름은 로티아. 기동대 중 보기 힘든 여성대원이었고 그래서 아리스와 한 조가 되었다.
머릿속에 익혀둔 지도를 따라 움직이자 저택의 지하로 이어진 쪽문이 나타났다. 주변을 살피고 문을 열어 안으로 뛰어내리자, 곧 지하의 딱딱한 바닥이 그들을 반겼다.
“이쪽입니다.”
낮게 속삭인 로티아는 먼저 앞장섰다. 아서에게서 아리스를 철저히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길 안내는 자신이 하겠다고 아리스에게 말해 둔 것이다. 그에 대해서 아리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내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어요.”
“그럴 순 없습니다. 대장님의 지시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자신의 몸을 먼저 걱정해 주십시오.”
기사다운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 로티아에게 아리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그녀는 아직 수행 기사의 몸인데 정식 기사에게 호귀 비슷한 것을 받게 되었으니.
그렇게 로티아는 어두운 지하실을 나아갔다. 아리스는 어슴푸레한 횃불의 빛으로 현재의 위치를 가늠했다.
지도에 따르면 마약이 있는 창고가 있을 거라고 의심되는 곳은 세 군데. 각각 저택과 별관, 정원에 있었고 가장 먼저 그곳을 수색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시작이었다.
아리스와 로티아가 맡은 곳은 저택 지하의 창고. 과일주 창고를 지난 곳에 위치해 있을 그곳을 향해, 두 사람은 발소리에 주의하며 향했다.
시종이 뛰어다니는 소리에 움칠 놀라고 경비병의 접근에 소스라치게 숨으며 이윽고 과일주 창고를 발견해 냈다.
“이 옆입니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 그들은 또 하나의 창고를 발견했다. 명패조차 붙어 있지 않아서 정체를 짐작하기는 힘들었지만 단서 하나는 발견했다.
“자물쇠가 새 것이군요. 최근에 바꾼 듯합니다.”
“그렇네요. 게다가 특별히 튼튼한 걸로 구입한 것 같네요.”
둘의 머릿속으로 같은 결론이 떠올랐다. 여기다!
자물쇠를 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경비병의 움직임을 기다린 후 기척이 없자 로티아는 장비를 꺼냈다. 잠입이 특기여서 오늘 작전에 뽑힌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자물쇠를 만졌다. 아리스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실력이 대단하네요. 기동대에서는 이런 것도 배우나요?”
“기동대 임무 특성상 필요할 일이 있습니다. 게다가 전, 평민 출신이라…… 경험이 조금 있습니다.”
유일하게 보이는 눈매가 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전직은 뻔했다.
로츠왈드 왕국에서는 기사 시험만을 통과하면 기사가 될 수 있다. 신분으로 차별을 받는 법이 없는 것이다. 로티아는 평민에 전직 도둑이었지만 지금은 훌륭한 기동대의 일원이었다.
“다른 대원들도 그런가요?”
“아닙니다. 오늘 온 다섯 명 중에서는 저 혼자 평민 출신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귀족 가문의 자제들입니다.”
그렇기만 그 말투에 귀족에 대한 비굴함은 숨어 있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 깊은 곳까지 자신의 기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태도였다.
아리스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자물쇠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로티아가 몇 번의 장비 조작을 행하자 곧 자물쇠는 두 조막이 나 그녀의 손바닥 안에 안겼다.
“됐습니다.”
지체하지 않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 안쪽에서 문을 잠근다.
곧 횃불을 피워 내부를 확인하는 두 사람.
“여긴…… 식료품 창고일까요?”
창고 곳곳에 쌓인 나무상자와 포대 자루. 그곳에서는 진한 과일 향기와 함께 산뜻한 야채들의 향이 났다. 좀 더 안쪽을 뒤지자 서늘한 곳에 편히 누워 있는 고깃덩이들도 있었다.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료품 창고를 굳이 단단한 자물쇠로 잠글 필요가 있을까요?”
“위장 아니겠습니까? 좀 더 뒤져 보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찾아보죠.”
둘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창고를 구석구석 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깃덩이 근처에 다가섰을 때였다. 아리스가 그 근처에 섰을 때 로티아가 문득 그녀를 돌아보았다.
“방금 바닥 소리, 조금 다르지 않았습니까?”
아리스는 발로 바닥을 몇 번 두들겼다.
퉁퉁―
확실히 비어 있는 소리였다. 둘의 눈빛을 마주친 후 고깃덩이를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 아래에서 나타난 것은 작은 문이었다.
로티아는 문을 간단히 조사한 후 손잡이를 한 차례 비틀었다.
끼익―
소리가 나며 문이 들렸다.
사다리를 타고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지하 2층에 해당하는 깊이의 창고가 또 하나 존재했다. 지도에서는 보지 못한, 말 그대로 비밀 창고였다.
아리스와 로티아는 넓이는 위층보다 극히 좁았지만 나무상자들이 가득히 쌓인 그 창고를 구석구석 수색했다.
그리고 수색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간단히 발견하고야 말았다.
나무상자의 대부분이 몽땅 마약이었다. 마약 원재료부터 정제된 마약까지. 종류를 불문하고 수많은 마약이 창고에 쌓여 있었다.
아리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입을 뗐다.
“이럴 수가…… 이 정도 양이면 수도 전체에 퍼뜨릴 수 있는 양 아닌가요?”
“정제된 양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 있는 원재료…… 의 양까지 생각하면 수도는 물론이고 네이숩까지 퍼질 지도 모를 일입니다!”
로티아가 흥분한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리스는 움찔 놀라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 뒤에야 로티아의 흥분은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특사대장님의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일 것 같습니다.”
“더 조사가 필요할 것 같군요. 증거를 체취하세요. 정제된 마약과 원재료를 조금씩 가지고 나가죠.”
수색을 위해 뜯어냈던 나무상자에서 하얀 가루 한 봉지와 녹색의 풀을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목적을 이뤘다.
망설임 없이 그들은 창고를 빠져 나왔다.
그러나 지하1층의 식료품 창고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들의 앞을 어떤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이봐, 들었어? 저택 안에 누군가 침입한 것 같다던데.”
“뭐라구?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말야?”
“그렇다니까. 백작님의 명령으로 경비를 세 배로 늘렸잖아. 그래서 침입한 흔적을 찾아낸 거래. 평소 상태였다면 흔적은커녕 빠져나간 뒤에도 몰랐을 거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보통 놈들이 아니라는 소리 아냐! 어떤 놈들이야, 대체!”
“거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정문 앞에 소집이야. 서둘러!”
두 명의 목소리는 발걸음과 함께 사라졌다. 아리스와 로티아는 눈을 맞추었다.
“들킨 것 같습니다. 지시를 주십시오.”
“태진 님이 이럴 때를 대비하여 따로 작전을 준비해 주셨었잖아요. 다른 대원들도 그곳으로 갈 거예요. 일단 지하를 빠져나가도록 하죠.”
두 사람은 창고에서 빠져 나와 서둘러 지나간 길을 거슬러 달렸다.
모든 경비병들이 저택 앞에 모여 있었기에 사다리를 통해 지상으로 빠져 나온 그들을 발견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포옥 내쉰 아리스가 쉴 새도 없이 다시 한 번 낮게 내려앉은 눈으로 저택 앞의 분위기를 살폈다. 휴, 이상 없음. 그녀는 또 한 번 무거워진 마음을 가볍게 하며 정원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려 했다.
찰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행해져야 할 그 시점에 방해자가 나타났다.
“웬 놈들이냐!”
(히어로즈 리턴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