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화 (1/32)

히어로즈 리턴 1권

■ 들어가기 전에

책이라는 형태로 글을 묶었던 마지막 기억이 벌써 3년 전입니다.

그 이후 나라의 부름을 받아 2년을 보내고 나왔을 때, 머릿속에 흘러 다니던 두 캐릭터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글의 두 주인공입니다.

현대의 주인공들이 이세계로 넘어가 활약을 펼치는 이야기는 흔합니다.

이세계에서 전설을 만든 후 그곳에 머물거나 다시 본래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들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한 번 갔던 이들이 또다시 이세계로 가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이 글은 그런 발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0년 뒤에, 한 번 다녀온 세계로 다시 돌아가게 된 영웅들의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습니다.

부디 끝까지 즐겨 주시길.

작가 박우진 올림

들어가는 막

“데이트할 때 진검(眞劍)은 좀 두고 오면 안 되냐?”

“없으면 허전하단 말야. 재단에서 허가도 났는걸.”

만나자마자 태진이 한 소리했다. 미연은 볼멘소리로 퉁명스레 대꾸한다.

“너야말로 초겨울에 그 두꺼운 코트는 뭐니? 남자잖아?”

“남자도 추위는 타.”

지지 않고 핀잔을 주는 미연과 간단히 대꾸하는 태진. 두 사람은 한참을 서로 마주 보았다. 이윽고 기쁜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입시 때문에 이렇게 데이트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미연은 태진과 팔짱을 끼며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김에 그동안 가지 못한 라면집에 가기로 했다. 2년 전, 두 사람을 ‘바운스’로 건너가게 만들었던 그 라면집이었다. 바운스는 지구와는 다른 환경의 또 하나의 세계. 그곳에서 돌아온 후 한 번도 그 라면집은 가지 않았기에 미연이 가자고 말을 꺼낸 것이다

라면집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좁디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둘은 라면집의 문을 열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붉은 계열로 디자인된 가게. 둘은 아련한 눈길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면을 주문한 다음 기다리는 동안 미연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태진에게 물어왔다.

“그 녀석들, 잘 지내고 있을까?”

미연이 말하는 그 녀석들이 누군지 태진은 알고 있었다. 바운스의 ‘로츠왈드 왕국’에서 벌어졌던 독립 전쟁에서 만난, 그 잊지 못할 친구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2년 전 바운스로 넘어간 두 사람은 태진이 미연을 노예 시장에서 구해 내면서 친구였던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 와중에 만난 ‘제국’의 귀족이었던 소년을 도와 독립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 전쟁에서 두 사람은 대단한 활약을 했고, 결국 건국 영웅으로서 ‘신의 전사’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이것은 지구의 그 누구도 모르는, 오직 태진과 미연만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모두 잘 지내고 있을 거야.”

태진은 담담히 대답했다. 이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라면집에서 두 사람은 비교적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라면집을 나서면서 미연은 애써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활달하게 말했다.

“문을 열고 나갔는데 그때처럼 또 가 버리면 진짜 웃기겠다. 그치?”

“그럴 리가 있겠냐, 설마.”

태진도 웃음으로 응수하며 라면집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라졌다.

***

그 감각은 마치 4년 전을 떠올리게 했다. 현대의 시간관념으로는 2년 전이었지만, 태진 본인의 체감 시간으로는 4년 전, 그때의 그 감각과 똑같았다.

라면집 문을 열며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눈앞이 새까매졌다. 마치 도시 전체가 빛을 잃고 태양마저 사라졌음을 의미할 만큼 완벽한 암흑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리고 곧 시야가 아닌 모든 오감에 일제히 어둠이 들이닥쳤음을 감지한다. 그 어둠은 감각을 뛰어넘어 전신을 장악하고, 최후에는 두뇌마저 덮쳐들었다.

북극에 맨몸으로 서 있을 때 냉기가 과연 어떻게 덮쳐 오겠는가. 태진은 그런 문제가 시험에 나오면 논술형으로 충분히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경험을 두 번씩이나 했으니까.

태진은 완벽하게 정신을 잃었다. 실신이나 졸도로도 설명할 수 없을 완벽한 혼수상태.

그러나 4년 전과 같이 각성의 때는 찾아왔다. 온몸과 정신까지 장악했던 어둠이 서서히 안개처럼 걷혔다.

눈을 떠 시야를 도로 확보했을 때 태진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태진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데자뷰?”

4년 전 눈을 떴을 때와 똑같았다. 울긋불긋한 머리 색깔. 도저히 현대의 한국으로는 볼 수 없는 의상들. 차라리 서양인에 가까운 이목구비를 가진 이들이 동물원 구경 온 아이 같은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자 주변에 모였던 인간들이 우르르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 반응을 이해할 새도 없이 태진은 사방을 샅샅이 살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시멘트의 고층 빌딩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벽돌로 쌓아 올린 집과 짚과 줄로 엮은 지붕. 모두가 단층이다.

지금 서 있는 길도 아스팔트가 아닌 단순한 흙길.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는 길이었으나, 애초에 문제는 그게 아니다.

여긴 분명 한국이 아니지?

그렇다면―

미연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었다. 그 눈부심에 눈을 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쩐지 멍한 정신으로 한참을 그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되돌아온다.

미연은 스프링처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좀 더 명확해진 정신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여긴 조금 전까지 걷던 그 거리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빌딩이나 도로는 보이지 않고 있는 거라곤 나무와 수풀.

여긴…… 숲 속이네. 조금 전까지 태진이랑 같이 빌딩 한 중간에 있었는데, 어찌된 일이지?

잠깐 의식을 잃은 사이 이런 수풀 속에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뒤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검집을 풀어 무작정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치마를 입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 이런 숲 속에서 치마를 입고 있었다면 정말 움직이기 힘들었을 테니까.

미연은 그동안 당학류(當虐流) 해검도(解劍道) 분파의 일원으로 쭉 신체를 단련해 왔기 때문에 어떤 일이라도 그리 쉬이 지치지 않는다. 지금도 몸 상태는 분명 나쁘지 않았다.

1㎞ 정도는 직진으로 쭉 걸어왔다고 생각되었을 즈음 미연은 자켓을 벗어 한쪽 팔로 들고 있었다. 기후조차 다르다. 분명히 초겨울의 싸늘한 날씨였는데 지금은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가고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기온으로 보아 초여름 즈음. 수풀 전체에도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심상치가 않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미연은 깨달았다.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시 정신이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이토록 늦게 깨닫다니!

라면집을 나서자마자 새까만 어둠이 온몸은 물론 정신까지 집어삼키듯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 보니 정체 모를 곳에 누워 있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장소에서 태진과 미연은 동시에 소리쳤다.

“……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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