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숨긴 귀환자 83화
10. 바로잡아야겠어(8)
“내가 아까 말했잖아. 말이 좋아 각성부대장이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입장이었다니까. 솔직히 윗선에서 정하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 힘겨루기 같기도 했어. 정치 알지? 훨씬 높은 윗선에서 서로 힘겨루기하는 거 말이야. 그래서 자네에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나도 그냥 방관했어. 내가 나선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됐네.”
진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네에…….”
솔직히 임경식 중령의 행동은 책임자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임경식 중령의 처지를 생각했을 때 그도 최선을 다한 거라 생각했다.
그런 진우의 속내를 느꼈을까? 임경식 중령이 사과를 건네왔다.
“미안하네. 자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진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한테만요?”
“아니. 블랙 게이트에서 죽은 병사들에게도 미안하게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핑계 같겠지만 나도 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 그래서 블랙 게이트가 그레이 게이트로 바뀌었을 때 나도 솔직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라고. 정말 농담이 아니고 사표까지 쓸 생각이었어. 그랬는데 애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우리 애들이 아직 어려. 내가 옷을 벗고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거든. 근데 군인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 그래서 뻔뻔하게 앉아 있었네. 미안해.”
“아닙니다. 부대장님도 사정이 있었겠죠.”
“그렇다고 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야. 이해해 달라거나 용서해 달라고 하는 말도 아니야. 그냥 내 맘이 불편해. 그냥 까놓고 이 자리에 있고 싶지도 않아. 애당초 내 자리인 것 같지도 않고.”
임경식 중령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그냥 형식적으로 돌아가는 각성부대라면 모를까 진우가 부부대장으로 앉아 있는 상황에서 임경식 중령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김세령 소령도 진우 쪽으로 넘어간 상태다.
그렇다면 각성부대 내에서 임경식 중령의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플레이어인 병사들은 어차피 진우를 따를 것이 분명하고 말이다.
그런 진우와 플레이어들을 견제해야 할 각성부대 작전과도 이미 진우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임경식 중령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나 대신 각성부대를 이끌어 줘.”
진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솔직히 임경식 중령이 빠져 준다면 편하긴 했다.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이준식 대령이 언제 어떤 식으로 장난을 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이준식 대령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임경식 중령을 상관으로 앉히고 군 생활을 한다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임경식 중령이 알아서 방을 빼겠다고 하니 생각이 달라졌다.
진우가 잠깐 생각을 하다가 물었다.
“그럼 후임은 누가 오는 겁니까?”
“후임은 무슨 후임! 사단장님 말씀은 이 소령이 진급할 때까지는 부대장을 공석으로 남겨둘 생각이던데.”
“그게 가능합니까?”
“부대가 돌아가지 않을 상황이라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사실 이 소령이 있는데 문제 될 것도 없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이 소령이 골치 아프더라도 날 좀 도와줘. 어차피 다른 지휘장교들은 지금 다 게이트 파견 나가 있기 때문에 그리 큰 어려움은 없을 거야. 이 소령이 현재 남아 있는 인력들을 잘 이끌어서 각성 부대 좀 이끌어 줘. 내가 좋은 부대장은 아니었어도 이 소령이 맡아줘야 내가 맘 편할 것 같아서 그래.”
김승철 소장이 임경식 중령에게 서울 전출을 미끼로 던지면서까지 얘기한 이유는 그가 진우를 설득하라는 뜻도 있었다.
지금까지 김승철 소장은 진우에게 진 빚이 많았다.
진우가 나타남으로 인해서 현재 그의 입지가 많이 달라졌는데, 거기다가 대놓고 또 나를 위해 희생해 달라고는 직접적으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경식 중령을 통해서 진우를 설득해 달라고 이렇듯 판을 짜 놓은 것이다.
임경식 중령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김승철 소장의 의도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임경식 중령이 대신 얘기하는 것이었다.
진우도 임경식 중령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 고민이 되었다.
원래 그의 계획은 군에서 빨리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블랙 게이트에서 들어간 천 명, 그들의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돈을 벌려면 결국 게이트 공략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진우가 밖으로 나가 강힘길드에 합류를 한다고 해도 마음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좀 규모 있는 게이트들은 강원도에 있는 대형 길드나 자리 잡고 있는 대기업들이 먼저 선점을 할 것이다.
그나마 잘해야 C등급 게이트일 거고 그것도 어렵게 아주 어렵게 기회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C등급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어떻게 천 명의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차라리 11사단이 강원도 전 지역을 관리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챙기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이제 나 혼자가 아니야. 책임져야 할 식구들이 많으니까.’
그렇다고 섣불리 승낙은 하지 않았다.
“제가 고민을 좀 해보겠습니다.”
“그래. 생각을 잘 해보고 어떤 결론을 내리든 간에 오늘부터 자네가 각성부대 총 지휘를 하면 돼. 나에게 보고할 것도 없고. 허락받을 필요도 없어. 그냥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부대장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정말이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임경식 중령 역시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어차피 떠날 사람 이곳에 대한 미련은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떠나기 전까지 온전히 자리만 지키다가 떠나고 싶었다.
“이 소령! 원래 이게 맞아. 대신 내가 전출 가기 전까지는 자네의 방패가 되도록 하지. 작전참모님께서 욕을 하면 내가 들어먹고. 불합리한 지시가 내려오면 내 선에서 다 커트하겠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자네 마음껏 해봐.”
임경식 중령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 진심을 외면하는 것도 힘들었다.
진우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고 있는데 문소리가 똑똑 하고 들려왔다. 임경식 중령과 진우가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홍인욱 중위가 들어왔다.
“충성!”
“그래. 홍 중위. 무슨 일이야?”
진우의 물음에 홍인욱 중위가 손에 든 서류를 내밀었다.
“새 게이트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래? 등급은?”
“B등급이라고 합니다.”
서류를 받아 든 진우가 확인부터 했다.
“이번에는 확실해?”
“네. 확실한 B등급이라고 합니다.”
홍인욱 중위의 말에 진우가 눈빛을 빛냈다.
30분 후.
각성부대 작전실로 부대에 남아 있는 모든 장교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 특별히 임경식 중령도 자리했다.
홍인욱 중위가 보고자로 나섰다. 그는 임경식 중령을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 임경식 중령이 손을 들었다.
“아아. 나에게 보고할 필요 없고 부부대장에게 말해. 내가 뭐 듣는다고 아나?”
“네, 알겠습니다.”
홍인욱 중위의 시선이 진우에게 향했다. 진우가 그 눈빛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10시 30분경에 우리 부대 동쪽 관할 지역에서 추가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게이트 관리소 실사 제보에 따르면 게이트 밀도는 160 정도이며 B등급 게이트로 판명되었습니다. 저희 11사단 게이트 관리과로 보고된 것이 14시 30분, 오늘 저녁 자정에 저희 각성부대 작전과로 넘어왔습니다.”
그때 임경식 중령이 손을 들었다.
“네.”
“14시 30분이면 퇴근까지 3시간 30분이나 남았는데 그걸 자정에 보냈다고?”
“네. 그렇습니다.”
“게이트 관리과도 참…….”
임경식 중령이 혀를 쯧쯧 찼다.
물론 게이트 관리과도 할 말은 있었다.
게이트 탐지 연구소에서 보고를 받았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오류가 있을 경우 대비해서 일단 변동 사항이 없다는 게 확인될 때까지는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게이트 관리과가 일하기 싫어서 하루를 보내고 난 후 보내는 것이라 생각을 한다.
실제로 요즘은 게이트 기술이 좋아져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 자체가 낮기 때문이다.
진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게이트 밀도 160짜리 B등급 게이트를 공략해야 한다는 거네.”
“네, 그렇습니다.”
“인원은? 부대에 인원은 충분히 있는 거야?”
“그것이……. 현재 B등급 게이트에 투입할 인원은 부족한 상황입니다.”
홍인욱 중위가 솔직하게 말했다. 임경식 중령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어떻게 해? 인원도 부족한데 무슨 수로 공략을 한단 말이야.”
홍인욱 중위가 슬쩍 얘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다른 부대에 지원 요청이나 인근 길드들에게 협조 공문을 보냅니까?”
임경식 중령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만약에 진우가 없었다면 무조건 지원 요청을 했을 것이다.
인원이 없는데 무슨 수로 게이트를 공략하겠나.
하지만 얼마 전 진우는 C등급 게이트도 겨우 공략할 인원으로 B등급을 공략했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말이다.
그런 진우의 지휘력이나 실력이라면 어쩌면 이 게이트 역시 공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임경식 중령이 진우를 바라본다.
“부부대장 어떻게 생각해?”
“으음……. 까라면 까야죠.”
“그렇게 말하지 말고. 왜 또 얘기가 그렇게 돼. 내가 설마 인력도 없는데 거기에 들어가라고 하겠어.”
임경식 중령은 괜히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진우기 피식 웃었다.
“부대장님 말씀은 그래도 우리가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 뭐 그렇긴 한데……. 부부대장. 자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좀 섭섭하다.”
“그랬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말했던 것은 가능하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게이트 밀도 120이었고, 지금은 160이니 조금 힘들 것 같긴 하지만…….”
진우가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김슬기 대위를 바라봤다.
“김 대위는 어떻게 생각해?”
“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유 중위는?”
“해보고 싶습니다.”
“안 중위는 어때? 안 중위 부담스러우면…….”
“아닙니다. 무조건 참석할 것입니다. 저 빼고 가시면 정말 서운할 겁니다. 전 무조건 따라갑니다.”
임경식 중령이 주위를 확인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지휘장교가 이렇게 셋인가?”
“이민욱 중위하고, 김민철 중위. 임태식 대위는 파견 나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군.”
임경식 중령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말했다.
“아, 그렇군. 임태식 대위! 임태식 대위는 거의 부대 복귀해도 되지 않아?”
김세령 소령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김세령 소령의 시선이 진우를 봤다.
“어, 그것이…….”
사단의 지휘 장교 중에는 진우와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장교가 한 명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임태식 대위였다.